애초에, 진양(晉陽, 산서성 태원시)에서 관상을 보는 사람인 주현표(周玄豹)가 일찍이 황제가 귀하기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되겠다고 예언하였는데, 황제가 즉위하자 불러서 대궐에 오게 하려고 하였더니, 조봉(趙鳳)이 말하였다.
"주현표는 폐하께서 마땅히 천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고, 지금 이미 입증되었으니 다시 물어볼 것은 없습니다. 만약 그를 경사(京師, 하남부)에 두게 되면 성급하고 가벼우며 미치고 험상궂은 사람들이 반드시 그의 대문에 폭주하여 다투어서 길흉을 물을 것입니다. 옛날부터 술사(術士)의 망언(妄言)이 사람과 집안을 멸망에 이르게 한 일이 많았던 것은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마침내 광록경(光祿卿)으로 임명하였으나 치사(致仕)하자 황금과 비단을 후하게 내릴 뿐이었다.

안중회가 말하였다.
"신이 가시덤불을 헤치고 폐하를 섬긴 지가 수십 년이고 폐하께서 용비(龍飛)하게 되어 기밀(機密)을 승핍(承乏)하였더니, 몇 년 동안 천하는 다행히도 무사하였는데 지금 하루아침에 버려서 외진(外鎭)으로 보내니 신이 바라건대 그 죄를 들려주십시오."

황제는 사자를 파견하여 왕안구에게 재촉하여 성을 공격하게 하니, 왕안구가 사자와 더불어 기병을 이어서 성을 순찰하면서 그곳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성이 높고 험준함이 이와 같아서 설령 주인(主人)으로 하여금 밖에 있는 군사들에게 성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게 하였다 하여도 역시 운제(雲梯)나 충거(衝車)로는 미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정예의 군사를 많이 죽이면서 적에게는 손실을 주는 것이 없으니 이와 같은데 어찌합니까! 세 개 주의 조세를 가지고 먹게 하면서 백성을 아끼고 군사를 양성하고서 그를 기다리면 저들은 반드시 안에서 무너질 것입니다."
황제가 이를 좇았다.

조봉이 말하였다.
"제왕의 마음에 큰 믿음이 있으면 진실로 그것을 금석(金石)에 새길 필요는 없습니다."

옛날에는 인군(人君)이 즉위하고 태자를 세우면서 적서(嫡庶)의 구분을 명확히 한 것은 화란(禍亂)의 근원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후사를 점치고 저부(儲副)를 세우는 일은 신이 아직 감히 가볍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황상이 또 풍도에게 물었다. "올해는 비록 풍년이 들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넉넉하겠소?"
풍도가 말하였다. "농가에서는 그 해에 흉년이 들면 유랑하다가 굶어서 죽게 되고, 그 해에 풍년이 들면 곡물의 가격이 낮아지는데서 상처를 받으니, 풍년이든 흉년이든 모두 병들게 되는 것은 오직 농가만이 그러합니다.

서지고는 서지순을 불러 술을 마시면서 황금술잔에 따른 술을 그에게 내리며 말하였다.
"바라건대, 아우는 천세를 누리게."
서지순은 독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그의 그릇을 끌어당겨서 그것을 똑같이 나누어가지고 꿇어앉아서 서지고에게 바치며 말하였다.
"형님과 더불어 각기 500살을 누리기 원합니다."
서지고가 얼굴색이 변하여 좌우를 돌아보며 받으려고 하지 않자 서지순이 술을 들고 물러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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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에 이사원(李嗣源)이 앵자곡(?子谷, 사수관 서쪽)에 도착하여 그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제장들에게 말하였다.
"주상께서 평소 군사들의 인심을 얻었으나 바로 여러 소인들에게 가로막히고 미혹되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지금 우리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안중회도 역시 모두 통달할 수 없어서 마침내 주문을 올려서 말하였다.
"신은 다만 충성스럽고 진실한 마음으로 폐하를 섬기고 추요(樞要)를 가리는 기밀도 맡고 있는데 지금의 일은 거칠게나마 밝게 알 수는 있으나 옛날의 일에 이르러서는 신이 미치는 바가 못 됩니다. 바라건대 앞선 왕조에 있었던 시강(侍講)과 시독(侍讀), 근래에 설치한 직숭정원(直崇政院)과 추밀원을 모방하여 문학하는 신하를 뽑아서 그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응대(應對)하는 것에 대비하도록 하십시오."

거란주[耶律阿保機]가 발해를 공격하여 그들의 부여성(夫餘城)을 뽑아버리고, 이름을 고쳐서 동단국(東丹國)이라 하였다. 그의 맏아들인 야율돌욕(耶律突欲)에게 명령하여 동단에서 진수하게 하고 인황왕(人皇王)이라 불렀다. 둘째아들인 야율덕광(耶律德光)에게 서루(西樓, 내몽고 파림좌기)에서 진수하게 하고 원수태자(元帥太子)라 불렀다.

신사일(27일)에 거란주인 야율아보기가 부여성(夫餘城, 길림성 사평시)에서 죽자, 술율후(述律后)가 제장과 추장 가운데 제압하기 어려운 사람의 처들을 불러 말하였다.
"나는 지금 과부가 되었는데 너는 나를 본받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또 그 지아비들을 모아놓고 울면서 물었다. "너희는 돌아가신 황제를 생각하느냐?" 대답하였다. "돌아가신 황제의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말하였다. "과연 그를 생각한다면 의당 가서 그를 알현하시오." 드디어 그들을 죽였다.

다른 날에 황상 앞에서 논의하였는데 황상이 누가 재상이 될 만한 사람인지를 물으니, 안중회가 최협이라고 대답하였다. 임환이 말하였다.

"안중회는 아직 조정에 있는 인물들을 상세하게 알지 못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팔린 것입니다. 최협은 비록 명문 출신이나 아는 것이 심히 적습니다. 신이 이미 학문도 없이 재상의 지위를 욕되게 하였는데, 어찌 다시 최협을 기용하여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겠습니까?"

황상이 말하였다.

"재상은 무거운 책임을 가지는 것이니, 경들이 다시 살펴서 이를 논의하시오. 내가 하동(河東)에 있을 때에 풍서기(馮書記)116를 보니 재주도 많고 학식도 넓어 다른 사람과 더불어 다툴 것이 없었으니 이 사람이 재상이 될 만하오."

서온(徐溫)이 말하였다. "나라를 위하는 사람은 마땅히 실효(實效)에 힘쓰고 허명(虛名)을 버려야 하오. 고씨(高氏)가 당을 섬긴 지 오래되었고 낙양은 강릉에서 떨어진 것이 멀지 않으니 당인(唐人)들의 보병과 기병이 그곳을 기습하기가 심히 쉬우며, 우리는 수군으로 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곳을 구원하기는 심히 어렵소. 무릇 신하 된 사람으로 구원할 수 없고 그로 하여금 위태로워지고 망하게 한다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소?" 마침내 그의 공물은 받되 그가 칭신(稱臣)하는 것을 사양하고 그가 스스로 당에 귀부하겠다는 것을 허락하였다.

감국이 교서(敎書)를 내려서 조용사 공겸(孔謙)이 간사하고 아첨하며 궁핍하고 빈곤한 군민(軍民)들을 침해하여 각박하게 한 죄를 헤아려서 그의 목을 베게 하고, 무릇 공겸이 수립한 가혹하게 거둬들이는 법령은 이를 모두 철폐하게 하고, 이어서 조용사와 내구사(內勾使)를 철폐하고 옛날 제도에 의거해서 염철(鹽鐵)·호부(戶部)·탁지(度支) 삼사(三司)를 두고 재상 한 사람에게 위임하여 오로지 처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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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숭도가 왕종필을 죽여서 스스로를 밝히려고 하여, 기사일(10일)에 이계급에게 아뢰어 왕종필과 왕종훈(王宗勳)·왕종악(王宗渥)을 체포하여 모두에게 그들의 충성하지 않은 죄를 헤아리고 그들을 족주(族誅)하고 그들의 집안을 적몰(籍沒)하였다. 촉인들이 왕종필의 살점을 다투어 먹었다.

이부상서 이기(李琪)가 상소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을 하였고 농사의 상황을 헤아려서 군사를 징발하였으니, 그러므로 비록 수해와 한재의 재앙이 있었으나 부족하게 될 걱정은 없었습니다. 근대에는 농민에게 세금을 거두어 군사를 양성하니, 농민이 부유하게 공급하는데 군사들이 사용하기에 충분하지 못하였거나 농민이 빈궁하면서 군사가 풍족하고 배불리 먹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지금 설령 조세를 감면해 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진실로 절납(折納)과 뉴배(紐配)의 법을 제거하게 된다면 농민도 역시 조금이라도 쉴 수 있습니다."

거란주가 여진(女眞)과 발해(勃海)를 공격하면서 당이 빈틈을 이용하여 그를 기습할까 두려워하여, 무인일(21일)에 매노혜리(梅老鞋里)를 파견하여 와서 우호관계를 맺게 하였다.

재상이 두려워하여 백관들을 인솔하고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 "지금 조용(租庸)은 이미 고갈되었으나 내고(內庫)에는 여유가 있는데, 여러 군대의 가족들은 지킬 수 없으니, 만약 진휼하지 않으면 마음을 흐트러지게 할까 두렵습니다. 흉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그 재산을 다시 모으십시오."

황상이 즉시 이를 좇으려고 하자, 유후(劉后)가 말하였다. "우리 부부가 군주로 만국(萬國)에 다가간 것은 비록 무공(武功)을 빌렸다고 하지만 역시 천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운명은 이미 하늘에 달려 있으니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찌 하겠습니까?"

석경당(石敬塘)이 말하였다.
"무릇 일이란 과감한 결단에서 성공하고, 미적미적하는 데에서 실패하는 것인데, 어찌 상장(上將)께서는 배반한 사졸들과 더불어 도적의 성에 들어가서 훗날에 걱정 없이 지킬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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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봄에는 서리가 내려서 농사를 해쳐 견사(繭絲)가 심히 적은데 단지 정세(正稅)를 내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흘러서 옮겨 다닐까 두려운데 하물며 그 위에 빌려준 것을 거론하니 사람들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애초에, 황제는 이엄을 통하여 촉에 들어가게 하여 말을 가지고 궁중의 진귀한 물건을 사오게 하였는데, 촉의 법에는 비단이나 진기한 보물은 중국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 있고 그 거칠거나 질 나쁜 것은 중국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였는데, 이를 ‘입초물(入草物)’이라고 하였다.

거란이 그들의 강성함을 믿고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에게 와서 유주를 요구하고서 노문진(盧文進)을 두겠다고 하였다. 당시에 동북의 여러 야만인들이 모두 거란에게 복속되었는데 오직 발해75만이 복속되지 않았으며, 거란주(契丹主)는 침구할 것을 모의하였으나 발해가 그의 후방을 잡아당길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먼저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요동(遼東, 요녕성)을 공격하고, 그들의 장수인 독뇌(禿?)와 노문진(盧文進)을 파견하여 영(營, 요녕성 조양시)과 평(平, 하북성 노룡현) 등의 주를 점거하게 하여서 연(燕)의 땅을 소란스럽게 하였다.


신은 한마(汗馬)의 수고로움을 겪은 일이 없이 다만 좌우에서 시종(侍從)하였기 때문에 때로 성스러운 계획에 찬성하여 지위가 여기에 이르러서 항상 스스로 편안하지 아니하였으며, 지금 공훈을 세운 현명한 사람들에게 맡기는 기회를 이용하여 신으로 하여금 정절(旌節)을 풀어 놓게 될 수 있다면 이는 크게 원하는 것입니다.

애초에, 오대산(五臺山, 산서성 동북부)의 승려인 성혜(誠惠)는 요망함을 가지고 사람을 현혹시켰는데, 스스로 천룡(天龍)을 항복시키며 바람에게 명령하여 비를 불러 올 수 있다고 말하니, 황제는 이를 높여서 믿고 친히 후비(后妃)와 황제의 동생·황제의 아들들을 인솔하고 그에게 절을 하였으며, 성혜는 편안히 앉아서 일어나지 않으니, 여러 신하들도 감히 절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큰 가뭄이 들자 황제는 업도에서부터 성혜를 영접하고 낙양에 가서 비가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고, 사민(士民)들은 아침저녁으로 쳐다보았지만 수십 일이 되어도 비가 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성혜에게 말하였다.

"관(官)은 사(師)에게 비가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였으나 효험이 없으니 장차 불에 태워질 것이오."

성혜는 도주하여 달아나서는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다가 죽었다.

계미일(15일)에 위국(魏國)부인인 유씨를 세워서 황후로 삼았다. 황후는 가난하고 미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이미 귀하게 되고 나서도 오로지 재산을 축적하는 데에만 힘써서, 그가 위주(魏州, 하북성 대명현)에 있으면서 땔나무, 채소, 과일 같은 것들도 모두 팔았다.

황후가 되자 사방에서 공헌(貢獻)하는 것은 모두 나누어 둘로 하여 하나는 천자에게 올리고 다른 하나는 중궁(中宮, 황후)에 올렸다. 이로써 보화(寶貨)는 산 같이 쌓였고 오직 불경(佛經)을 베껴 쓰는데 사용하였고, 니사(尼師)에게 나누어 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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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강연효에게 양에서 벌어진 일을 물으니, 대답하였다.
"양조(梁朝)의 땅은 좁지도 않고 군사의 수도 적지 않지만 그러나 그들의 행하는 일을 추적해 보면 끝내 반드시 패배하여 망하게 될 것입니다. 어째서냐고요? 주군은 이미 어둡고 나약하여서 조암과 장한걸의 형제들이 권력을 멋대로 하며 안으로는 궁액(宮掖)
과 교분을 맺고 밖으로는 재화와 뇌물을 받아들이면서 관직의 높고 낮음은 오직 뇌물이 많고 적음을 보며 재주와 덕망으로 선택하지 않고 공훈과 노고도 비교해보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머리를 감지도 빗질도 못하고 갑옷을 벗지 못한 지도 15년이 넘었는데, 그 뜻은 집안과 나라의 원수와 수치를 씻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미 존호(尊號)를 바르게 하여 하북(河北)에 있는 사인과 백성들은 매일 태평하게 되기를 바라보는데, 비로소 운주(?州, 산동성 동평현)에 있는 한 자와 한 치 정도의 땅이라도 얻었다가 지킬 수 없어 그곳을 버린다면 어찌 중원을 모조리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장사들이 해체되고 장래에 식량이 다 떨어져서 무리들이 흩어질까 두려운데, 비록 하(河, 황하)를 그어서 경계로 삼는다 한들 누가 폐하를 위하여 그곳을 지키겠습니까? 신은 일찍이 강연효(康延孝)에게 하남(河南, 황하 이남)의 일을 자세히 물었으며, 자기를 헤아리고 저들을 헤아려서 낮이고 밤이고 그것을 생각해보니 성공과 패배의 기틀은 올해에 결정됩니다.

왕언장이 말하였다.
"나는 본래 필부(匹夫)로서 양의 은혜를 입어 지위가 상장(上將)에까지 이르렀으며, 황제와 더불어 15년 동안이나 교전(交戰)하였는데, 지금 군대는 패배하고 힘은 다하여서 죽는 것이 나 스스로의 몫인데 설령 황제가 불쌍히 여겨서 나를 살린들 내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사람들을 볼 수 있겠는가? 어찌 아침에는 양의 신하가 되었다가 해질녘에는 당의 신하가 되는 일이 있겠소? 이는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이오."

이사원이 말하였다.
"병법에는 신속한 것을 귀히 여깁니다. 지금 왕언장이 사로잡혔는데, 단응이 반드시 아직 이를 알지 못하고 있으며, 바로 어떤 사람을 도주하게 하여 보고하게 한다고 해도 의심하던지 믿던지 간에 오히려 사흘이 필요합니다.

양주는 사람됨이 온순하고 공손하며 절약하여 주색에 빠지는 실수가 없었는데, 다만 조엄과 장한걸을 총애하고 신뢰하여 위엄과 복(福)을 멋대로 하게하고 경상과 이진의 옛 신하를 소외시키고 버려서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황상이 그를 심히 후하게 대우하면서 조용히 물었다.
"짐이 오와 촉에 군사행동을 하려고 하는데, 두 나라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해야 하겠소?"
고계흥이 촉의 길은 험하여 빼앗기가 어려워서 마침내 대답하였다.
"오의 땅은 척박하고 백성들은 가난하니 그들을 이겨도 이익이 없고, 촉을 먼저 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촉의 토질은 풍요롭지만 또 주군은 거칠고 백성들은 원망하니 그들을 정벌하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촉을 이긴 후에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서 오를 빼앗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좋소!"

황제가 고계흥을 남기려고 하자 곽숭도가 간하였다.
"폐하께서 새로이 천하를 획득하였는데 제후들은 자제와 장좌(將佐)들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진공하게 하는데 지나지 않았지만, 오직 고계흥만은 몸소 스스로 들어와서 조현하였으니 마땅히 포상하여서 오는 것을 권고해야 하며, 마침내 얽어매서 남겨두고서 보내지 않은 것은 신뢰를 저버리고 의리를 이지러뜨리는 것이어서 사해(四海)의 마음을 막는 것이지 계책이 아닙니다."
마침내 그를 보냈다. 고계흥이 배나 빠른 길로 떠나 허주(許州, 하남성 허창시)에 도착하여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번 행차에는 두 가지 실수가 있었다. 와서 조현한 것이 하나의 실수요, 나를 풀어주어서 떠나오도록 한 것이 또 하나의 실수였다."

또 장좌(將佐)들에게 말하였다.
"새로운 왕조가 백번 싸워서 바야흐로 하남(河南)을 얻고서 마침내 공신들에 대하여 손을 들고 ‘나는 열 손가락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말하였소.?
자랑함이 이와 같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공로가 없다는 것이니, 그 누가 흩어져 버리지 않겠소! 또 수렵과 미색에 거칠어져 있으니 어찌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겠소? 우리는 걱정할 것이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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