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라이브! School idol diary 6 - ~호시조라 린~, L Novel
키미노 사쿠라코 지음, 원성민 옮김, 무로타 유헤이 외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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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콤플렉스가 굉장히 많은 그녀.

 

 어린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나온다. 에피소드는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소녀답게 긴머리 가발을 써서 뮤즈 일행들 앞에 섰는데 분장담당인 코토리 외에는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이야기, 할로윈데이 때 너무 분장을 잘 해서 하나요를 놀라게 했던 이야기랑 라멘 먹는 이야기, 노조미랑 하늘을 쳐다보면서 나눈 대화, 고양이 이야기 이 다섯 가지이다. 사실 굉장히 소박하고 별거 아닌 이야기로 보일 수 있지만, 러브라이브 본편에서와는 상당히 다른 성격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아니, 처음엔 이 녀석도 상당히 철없는 녀석으로 나온다. 승부를 좋아하면서도 정작 '진검 승부'가 되는 상황에서는 무서워서 벌벌 떨며 피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그 장면이 뮤즈 리더를 임시적으로 맡게 되었던 러브라이브 애니판 에피소드와는 차이가 있다. 애니판에서는 호노카가 워낙 강한 캐릭터로 등장하다보니, 만사 태평한 성격의 린과 상당히 대비되었다. 그래서 그녀가 무책임하고 통솔력이 부족해 보일 수 있었다. 자꾸만 여장을 하나요에게 맡기는 것도 자신감 부족이라기보단 회피로 보였을 수 있다. 하지만 스쿨 아이돌 다이어리에서는 '무대공포증'이라는 단어를 확연히 드러냈다. 소설판은 단순히 여성스럽게 차려입고 마냥 좋아라하는 '철부지' 린만 보여주고 있지 않다.

 

 그녀가 좋아하는 고양이 이야기도 그렇다. 새끼고양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이 다치는 건 상관치 않고 날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그녀가 사실 친구 하나요나 다른 어떤 뮤즈 인원들보다도 훨씬 더 강한 인물임을 드러내준다. 나중에 고양이 알레르기 때문에 고양이를 키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좌절하지만. 하나요는 끝까지 '고양이 알레르기는 치료한다고 낫는 병이 아니다'라고 강조하지만, 린은 고양이를 끝까지 책임질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을 부정하며 몸이 한계에 달할 때까지 그들을 기른다. 결국 정말 상황이 어쩔 수 없이 흘러가자, 그녀는 결심한다. 이후엔 반드시 고양이 알레르기를 감수하고서라도 집에서 고양이를 키우겠다고. 의외로 이 녀석 잘 크면 노력파가 될지도? 

 

 

 

  

  노조린을 노리고 있는 내 생각과 통했는지, 작가가 노조미와 린과의 하룻밤 이벤트 에피소드도 실었다. 역시 린짱토 이에바 옐로다요! 보라색과 노랑색은 진리입니다! 니코는 노조미의 먹이니까 당연히 3P로 달려야죠! (정신차려 임마.)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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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 - 채선 시집 현대시 시인선 135
채선 지음 / 한국문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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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솔직히 이 논문 리뷰를 다른 사람들(특히 남자들)이 어떻게 볼지 모르겠다. 일단 난 GL물이나 BL물을 좋아하는 덕후들 이상으로 동성애 문화와 퀴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아마도 내가 쓴 다른 리뷰들을 보면 훨씬 더 잘 알 수 있겠지. 그래서 솔직히 이 논문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상당히 반가웠다. 하지만 문제는 이 책이 절판되어서 지금 시중엔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2호는 구했지만 창간호는 중고책방에서도 도저히 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논문사이트 RISS에 들어가서 논문을 되는대로 틈틈히 구매하여 다운로드한 다음 프린트에 인쇄했다. 인쇄 쪽에 아는 형이 없었다면 프린트하는 데만도 비용이 꽤 나갔을 것이다. 다운로드하는 것 자체도 비싸다. 일단 남에게는 추천해주고 싶지 않지만, 혹시 레즈비언이나 퀴어나 연애에 관련된 논문을 쓴다면 꼭 구해볼 것을 추천한다. 퀴어에 대한 알찬 정보들이 상당히 많다. 

 퀴어는 형용사로 '이상한', '색다른'을 나타내는 용어였다. 하지만 현재는 성소수자들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중이고, 그 의미는 점차로 확대되어 가는 중이다. 아니, 이 논문에서 이야기하듯이 아예 독립하여 하나의 개념으로 들어서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음. 개인적으로 감회가 깊다. 원랜 성소수자도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섹슈얼(성전환 수술을 한 사람))로 넷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요즘엔 TIQQ2S(트랜스젠더(성전환수술을 하지 않고서도 자기 내면에 숨겨진 여성성 혹은 남성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사람), 인터섹슈얼(어지자지), 퀴어, 퀘스쳐닝(성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중인 사람들), 투스피릿(두 개의 영혼.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일어났던 현상. 인도의 히즈라도 이에 속한다.)) 가 포함되어 LGBTTIQQ2S로 많아졌다. 와 설명하는 데만도 지금 줄 엄청나게 길어졌다. 

 아무튼 퀴어에 대한 설명은 일단 훗날로 미루기로 하고, 주로 레즈비언들이 모여서 만든 이 논문은 퀴어와 연애 이야기를 동시에 하지만 특이하게도 내용이 분산되는 경우는 없다. 짐작이 가겠지만, 이들은 매우 힘든 사랑을 한 사람들이다. 자신들이 직접 체험한 직접적 간접적 연애담들을 담아놓아서 굉장히 독특한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 이 잡지에 포함된 모든 논문들이 맘에 드므로, 논문 하나 당 명대사 하나씩 따와서 담고 전체적인 줄거리(?)를 설명하도록 하겠다. 약간 아카사님 논문 느낌이 들도록?!

 

 1. 서문

 

 우리는 같은 것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속도가 달랐기 때문에 다른 것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끔은 좀 더 좋은 것이 되기 위해 분투했을 수도 있다. 하나의 것에서 다른 하나의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을 때를 가장 쉽게 지각하는 건, 역시 연애다. (...) 그 대상이 생명이든 생명이 아니든, 전체이든 무이든, 살아있는 것들은 이 열정을 피할 길이 없다.

 생 틸레르라는 사람은 인간도 허리를 잘 접으면 오징어처럼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다. 이에 대해서 퀴비에라는 학자는 격하게 분노했고, 이들 사이엔 격한 논쟁이 벌어졌었다고 한다. 윅스킬이라는 사람은 움벨트라는 개념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둘레세계라는 이론을 펼쳐서 인간과 진드기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식의 이론을 펼쳤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이론들에 얼마나 유연해질 수 있을까? '보통 정상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윤리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자연의 그 무한한 가능성과 다양성에 맞닥뜨리게 된다면?

 

 2. 퀴어 이론의 얼굴들 1

 

 퀴어한 시대라는 진단은 단지 성적이거나 때론 그렇지 않은, 발랄하고 경쾌한 난동들로부터 오는 것만이 아니다. 우연히도 레즈비언/게이 이론과 퀴어 이론의 복판에 서게 된 그녀는 자기 곁의 친구들과 동료들의 생존을 기적이라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규범적인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순응하지 못한 소년과 소녀, 혹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자살한 아이들 혹은 에이즈로 인해 생명을 다한 이들을 목격한다. 죽음만큼이나 생존 역시 퀴어하다면, "생존자들의 자책, 안도, 그리고 책임감"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반호모포비아적 이름으로부터 진화된 퀴어는 규범을 횡단하는 운동만이 아니라 그 운동이 일어나는 자리에서 벌어진 비순응적 죽음과 기적적인 생존,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의 책임에 관한 것이어야 할는지도 모른다.

 본격적으로 퀴어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아니, 거의 찬양하다시피 하고 있다. 지금 다시 읽어봐도 눈앞이 어지럽고 핑핑 돌아서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일단 젠더에 너무 사로잡혀 경직되어버린 페미니즘사상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논문이다. 우리나라에 이 정도까지 진보적인 사람이 있다니 정말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며,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논문의 두께나 쓰인 용어를 보면 만나도 그 사람의 말을 이해하기 버거울 것 같다는 느낌도;;; 일단 집에 있는 젠더 트러블 꼭 밑줄치면서 읽어야겠다(...)

 

 3. 자주 흔들리더라도 무너지지 않고ㅡ퀴어&정체성에 헌신하기

 

 재생산의 시간에 따라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안정적인 가족을 꾸려 살아가는 것은 '어른'의 삶이라고 여겨진다. 반면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하위문화적 취미생활에 몰입해있거나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덜 성숙한 것으로 비친다. 이성애적 삶의 모습은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주제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미래지향적인 관점을 가지고 장수를 기원하는 것은 정상이다. 반면,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즐기며 '오래 사는 것'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삶의 방식은 병리적인 것이다. (...) 그래서 퀴어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가정되었던 이성애적 시간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퀴어에 헌신하고 이성애적 편견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을 설명한 논문이다. 마르시아의 정체성 지위 모델이란 걸 사용했는데 상당히 흥미롭다. 특히 이 내용은 30대 이상의 오타쿠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타쿠인 자신에 열심히 헌신하면서도,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결혼 강요에 대해 약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게 자기 자신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난 생각한다. 굉장히 근원적이고 힘든 방법이지만, 이 과정을 통과해야 하위문화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흡수되거나 '튕겨나가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말 시간이 널럴한 사람들은 이 잡지 전체를 구입하되, 특히 이 논문을 꼭 두번세번 읽어봤으면 좋겠다. 사실 이 논문이 최근 내 입장을 정리하는 데 힘을 주었다.

 

 4. 퀴어, 미학, 정치

  

 간혹 예술의 공공성이나 정치성을 '정치적 예술'이나 '비판적 예술'의 동의어인 것처럼 혼용하는 경우를 본다. 이것은 그 예술을 구성하는 어떤 '소재'가 모든 것을 봉합하는 일종의 소재주의적인 발상에서 기인한다. (...) 퀴어미학은 퀴어함이나 퀴어코드를 전유해 양식화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나와 타인의 삶, 세계의 사건들을 퀴어하게 미학화하고 정치하게 퀴어화 할 것인가를 문제삼는 태도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미적양식들에 대한 도전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저자는 모든 미학이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에 대해선 나도 공감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사회에 공표하는 예술은 결코 일기장 수준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래서 나도 여태 소설이나 시는 쓰고 있지 않다지... 여기선 그레이슨 페리 혹은 클레어,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그리고 그의 더블을 예로 들어 '창의적' 퀴어정치예술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특히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는 우리나라에서도 전시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가보지 못해서 너무나 아쉽다.

 

 5. 퀴어와 연애하기ㅡ문학정치학으로 본 영화 줄탁동시와 소설 뼈도둑

 

 그는 더 이상 폐쇄적이고 고정적인 자리에 위치하지 않고, 자신의 연인을 은폐하지 않으며 영구히 유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뼈도둑은 보이지 않는 출구와 '바깥'의 가능성을 만들어 가고, 그곳을 향해 한발 한발 걸어나갈 뿐이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 괴이하고 기묘한 존재들이다. 본질적으로 뒤섞이고 이질적인 청중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 다양한 오해야말로 응답을 가능케 한다. 마치 싸우고 화해하고,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이 논문은 영화와 소설과 퀴어와 연애를 동시에 다루면서도, '이동하는 사람'에 대한 주제로 이 모든 것을 통일시켜버린다. 낯선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계속 호소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말랑말랑한 논문은 아니다. '쌍화점'같은 영화나 일부 자극적인 소설들을 예로 들어서 대중문화에서 다루는 동성애가 퀴어를 더욱 비정상적인 성적 지향으로 표방하고 있다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소설을 쓴 소설가들 중에는 김영하와 하성란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도대체 이 논문에서 극구 찬양하는 줄탁동시와 뼈도둑은 어떤 거물들인지 궁금해지게 만든다. 지금 이 리뷰를 쓰는 필자도 봐야 하는데 계속 미뤄지고 있다(...)

 

 6. 우리는 '제대로 된 혁명'을 위하여, 연애를 필요로 한다: D.H.로렌스를 기억하며

 

 연애의 연자는 두 사람의 실로 하나의 말을 묶은 것이다. 그런데 그냥 묶어서는 안 된다. 하나의 마음 위에서 묶어야 한다. (...) 따라서 제대로 된 연애를 하려면, 먼저 하나의 말을 만들어야 한다. 물론 그 말은 동의하고 이해하여 체화되어야 할 말이다. 우리는 이 대사를 위해서 의도적인 것이 필요하다. 연애를 위해서 우리는 그 때 그 때에 맞는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 있는 그대로의 내가 있는 그대로의 너를 만나기 위해선 반드시 시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 그 가면의 시간들은 분명 깊은 괴로움이다. (...) 그러나 연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 어찌되었든 본래적 자기로부터 가장 먼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본래적 나를 드러내는 방향을 취하면 된다. 궁극적으로 연기는 나의 확장을 위한 것이다. 나를 양보하여 나와 다른 너에게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너를 이해하고 너와 만나는 것이다. 서이다. 마음이 너와 같아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나를 너에게 포개는 것이다. 

  이 논문 또한 다섯 번 정도는 읽은 것 같다. 딱 연애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성애자던 동성애자던간에 불편함 없이 볼 수 있는 논문이다. 무슨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각주를 보면 로렌스의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문으로 실어놓았다. 그냥 이 논문 자체를 난 문학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교훈적이기 이전에 문체도 상당히 유려하고 아름답다.

 7. 언니 저 달나라로: 백합물과 1910-30년대 동북아시아 여학생 문화

 그러나 근대화의 입구에서 서로의 손을 잡았던 소녀들의 초상이, 백 년이 지나 오래된 의상과 함께 돌아올 때, 여성주의와 별다른 관계가 없어지고, 오히려 신비화된 여성상을 암시하는 텍스트가 된다. 백합물에서 보여주는 관계가 이성애 중심 질서를 흔든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백합물의 소녀상이 보여주는 이러한 보수성은, 가부장제와 관련된 이중적 효과로 인해 자못 흥미로워진다. 백합물은 현 사회의 섹슈얼리티를 향한 타협과 위협의 양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단 이 논문은 소프트 백합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요즘 사람들이 '자극적'이라 욕하는 소녀혁명 우테나와 신무월의 무녀, 어둠과 모자와 책의 여행자에 대해 다루고 있다. 물론 중심내용은 백합물의 교본이라고 할 수 있는 마리아님이 보고 계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학생들간의 이성연애가 금지된 탓에, 오히려 여학생들의 열렬한 관계가 상대적으로 1910년대에서 30년대까지 동아시아에 용인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선 다소 충격을 먹었다. 그 당시 유행(?)이었던 여성 동반자살 사건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는 게 흥미로웠다.

 

 8. K의 LGBT 서가를 위하여: 국내에서의 퀴어 청소년소설 수용현황 검토

 가장 먼저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우선 기출간된 도서에 관한 아카이브 작업이다. 이런 작업의 필요를 절감하고 있는 관련 연구자 및 실무자가 참여해 청소년이 접근 가능한 도서목록을 제공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부주제, 소재와 문학성의 판단까지 이루어지며, 가급적이면 결과물이 주식이 달린 도서목록 형태로 제시되어 접근성과 의의를 높일 수 있는 것이 이상적이다. 이 같은 작업과 더불어 '퀴어 소설'이라는 구획 자체에 관한 성찰 역시 다시 한 번 더 이루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

 

 나도 이 논문에 깊이 공감하는 게, 딱히 LGBT에 대해서 다룬 소설이 아니더라도 퀴어적인 이야기가 등장하거나 아니면 주인공의 과거 속에서 스치듯이 지나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 건 솔직히 아직도 퀴어한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으로밖에 떠돌뿐, 공식적으로 뭔가 제대로 체계가 잡혀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리고 이 논문에선 한 발 더 나아가 국내에서의 퀴어 청소년소설의 창작이 좀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길 기원하고 있다. 솔직히 내가 읽은 책 중에서도 그나마 추천할 만한 퀴어 청소년소설이 '비너스에게' 밖에 없다. 상당히 아쉬운 바이다. 

 

 9. 정체성과 차이의 정치를 넘어, 퀴어 운동의 다자연애를 꿈꾸며

 

 그렇다면 과연 '이성애자'란 무엇인가. 한때 동성과 사귄 적이 있지만 주로 이성과 사귀었고 지금은 결혼을 한 어떤 이는 과연 이성애자인가? (...) 나아가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지금까지 스스로를 '이성애자'로, '시스젠더'로 굳게 믿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짐으로써 새로운 사회적 권리와 연대의 지점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내가 정말 참여하고 싶어서 환장을 했었지만(...) 결국 참여하지 못했던 퀴어 버스와 동성애자 직원에게 인센티브 등의 혜택을 주는 기업들 이야기를 꺼내면서 국내 퀴어 운동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논문이다.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머무르지 말고, 서로의 차이가 연계되는 관계를 맺어가자'고 강조하는 이 논문은 언뜻 보면 쉬워보이면서도 다분히 철학적이다. 운동과 운동간의 연애를 강조하고 있다는 데에서 이 논문 내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관점을 취하고 있다.

 

 10. 레즈비언과 퀴어와 연애와 금수와

 

 이건 대체 뭔가, 레즈비언이냐 뭐냐, 이런 질문들이 툭툭 튀어나올 때, 왜 우린 지금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대고 있나 돌아볼 때다.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경험들과 여전히 이해 못할 것들 속에, 질문받는 자리에 우리가 있었다. 여전히 이것이 정상이라고 떵떵거리니, 있는 힘껏 째려볼 필요가 있는 이성애와 이상화된 연애를 무시할 수는 없으되, 그거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말면 좋겠다. 가장 이해 못할 곳에 우리가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니 말이다.

 이 논문을 쓴 필자는 레즈비언 커플이다. 8년째 동거중이며, 거의 부부같은 사이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성관계를 맺지 않게 되었다. 여자 대 여자의 러브러브 관계인데 정작 성관계를 맺지 않으니 레즈비언 커플들 사이에서도 온갖 걱정을 받는다고 한다. 연인인지 부부인지 기어코 구분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과 귀찮음과 남성 아이돌에게 푹 빠진 애인에 대한 약간의 질투감이 귀엽게 드러난 일기같은 논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선 이성을 좋아하고 덕질은 철저히 동성만 추구하는) 어중간한 이성애자인 필자도 할 말은 있다. 레즈비언 커플이 섹스(?)를 하지 않으면 걍 동성친구랑 다를 바 뭐냐? 라는 말로 레즈비언이 차별당한다고 하는데 이성애자도 차별받는다. 

 애 안 낳을거면 뭐하러 결혼하냐?
 섹스리스이면 뭐하러 연애하냐?

 

 

 결국 아무 생각없이 말하는 년놈들이 문제다.
 단순히 동성연애와 이성연애 간 차별의 문제는 아니라고 봄.

 

 11. 리뷰: 눈으로 듣고 귀로 보는 음악 이야기

 

 그녀/그와의 이별을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어 연인도 친구도 아닌 상태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은 여리지만 그 어떤 감정보다 진실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연인도 친구도 아닌 관계는 보통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이 없다. (...) 명확한 구분을 통해 보통의 언어는 정상과 비성상의 위계질서,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는 관계와 존재들을 양산한다. 이러한 보통의 언어에 포함되기를 거부하고 보통의 언어를 포기한 우리들 관계에 남는 것은 침묵이다.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즉 확실성을 결여한 언어를 상상하기 힘든 우리들의 불안이 일시적 침묵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명확한 언어로 규정될 수 없기에 불안정하게 흐르는 침묵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있다. 바로 음악이다.
나는 외로움을 가지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모든 것의 해답은 내 안에 있는 것이었다. 음악은 나에게 때로는 소통의 도구로, 때로는 연애의 대상으로 의지할 곳이 되어 주지만 기억과 망각의 흐름 속에서 결국에 의지할 곳은 음악도 그 무엇도 아니라 나 자신 밖에 없음을 알려준다.

 

 그녀 또는 그와의 미묘한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 또는 그를 떠나보낸 다음 그것(음악)과의 연애를 시작한다.

 그러고보니 남은 것은 나와의 연애 뿐이더라.

 그리고 그녀 또는 그와의 연애는 또 시작될 수도 있겠지.

 ... 내 얘기다. 달리 할 말이 없다.

 

 12. 혜진 He-Jin Kim이 쓰지 못한 글을 대신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는 트랜스젠더 활동가 혜진 씨의 이야기이다. 원랜 이 잡지에 기고를 할 예정이었으나 2012년 6월에만 8명의 LGBTI가 살해되어서 그것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삐라 측에다 통보했다고 한다. 그 후 이틀 동안 세 명의 레즈비언들이 죽음을 당했으며, 그것에 관해 활동하기 위해 원고를 끝내지 못할 것 같다는 메일을 그녀는 다시 한 번 더 보낸다. 그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

 

 다른 잡지의 인터뷰에서 삐라 잡지팀은 그녀가 다행히도 살아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의 요청을 삐라 측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2호에서는 죽음에 대해서 다룬다. 정체성의 차이로 인해 죽음을 당하는 사람이 이 세상엔 너무나 많다. 슬픈 일이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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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etyxxx 2015-04-19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꼼꼼한 리뷰 정말 잘 봤어요. 책 표지 링크가 좀 잘못된 것 같은데 그것만 수정되면 더 없이 좋을 것 같아요!
 
촌마게 푸딩 2 - 21세기 소년의 달콤한 시간 여행
아라키 켄 지음, 미지언 옮김 / 좋은생각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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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야는 자신도 히로코도 에도 시대에는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야스베와 약속했던 검도 시합도 할 수 없다. 센과 만나는 일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도모야는 견딜 수 없이 외롭고 슬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여겼다.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는 21세기이다. 대단히 풍요로우면서도 궁핍하고, 기묘하면서도 정직한, 어찌 보면 에도 시대와 별로 다르지 않은 이 시대를 도모야는 끝까지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저 가운데에서 헤실헤실 웃는 애가 촌마게 푸딩 1권 시절의 도모야이다.

도모야도 자라서 중학생이 되고, 사춘기가 되어 히로코를 고생시킨다.

그가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치고 도주하려는 찰나, 시간여행의 문이 열린다.

야스베를 현대시대로 오게 한 그 문 말이다. 

 

 현대의 도쿄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온 야스베는 과자점을 차리려고 하지만, 에도 시대에서 아무래도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그는 감옥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지만, 고문을 받으면서도 늘 과자점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 도모야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에도에 오게 되어서, 의지할 사람을 찾기 위해 야스베를 찾는 것 뿐이었다. 우연히 가부키 배우를 하게 되고 인기 몰이를 하면서 점점 야스베와 도쿄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지지만, 결국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신세가 되었고 바로 그 때 야스베를 만나게 된다.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촌마게 푸딩의 주제는 2권에서도 결코 흐려지지 않았다. 화과자나 만들려던 야스베도 결국 도모야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던 푸딩을 만들려고 결심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촌마게 푸딩 1권에 비해서 결코 스토리가 탄탄하지는 않다. 오히려 촌마게 푸딩 1권이 명성을 얻고 영화가 나오면서 야스베와 히로코를 엮으려는 팬들의 성화가 극성이다보니, 억지로 커플링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조금 무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래도 워낙 스토리가 기발하고 아기자기 하다보니 청소년 소설이라 생각하면서 보면 괜찮은 편이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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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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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처럼 살고 장준하처럼 죽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의 유족들은 사글셋방을 전전하는데 우리 마음 한구석에라도 장준하가 살 자리를 비워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p. 151

 

 

 

  

요즘 며칠간 정신병자같이 살았는데,

수많은 원인 중에 하나로 이 책도 손꼽힌다.

 

 저자가 밝혔듯이 이 책은 역사적으로 팩트가 확실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저자가 역사가라서 그런지 아니면 꼰대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서울의 경제가 번영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빈민들을 광주같은 시골로 몰아넣은 이야기는 아주 잠깐 언급만 하고 지나간다. 그래서 당연히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라는 만화책에서 등장했던 '걸리는 건 사람을 포함해서 다 잡아먹으려는 의도로 몽둥이를 휘두르던 배고픈 소녀'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날으는 돈가스가 왜 날으는 돈가스인지도 말해주지 않는다. 단지 스치듯이 그 시대의 단어들을 언급하고 지나갈 뿐이다. 그래서 난 모르는 게 있으면 부모님에게 물어가면서 책을 읽었다. 다행히도 나같은 경우는 아버지가 예전에 근현대사 선생님을 했었고, 유신 시절 너무 고생하여 지금도 도저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분들이 고등학교 은사님들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물어물어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워낙 이 한홍구라는 사람이 글을 잘 쓴다. 굳이 욕을 안 쓴 글이라도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에 유신 시대의 권력자들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깊은 빡침이 느껴진다. 문장가들은 분노해도 저렇게 품위있게 분노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달까. 정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욕으로 시작하여 더 험한 욕으로 끝내는 나 자신을 새삼 돌아보면서 '난 아직도 어린 시절의 그 분노조절장애가 풀리지 않았구나' 생각하게 된달까. 리뷰를 쓰고 있는 지금 굉장히 부끄럽다. 하지만 몇 마디는 반드시 하고 지나가려 한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을 주느니 차라리 러브라이브의 뮤즈 성우들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자. 추진본부 만들자 그래. 목돈 털테니까 제발 노벨평화상 모독하지 마라. 젠장할.

 우리나라가 이만큼 일궈진 건 박정희 때문이 아니다. 그 당시 뼈빠지게 일해서 지금은 병걸려도 제대로 치료도 못하는 우리 국민들 모두 덕분이다. 제발 자기비하는 그만두지 그래요. 자기잇속 챙기면서 대통령직 수행한 노태우, 전두환, 이명박 대통령보다 더 나은 게 아니라고. 도찐개찐이다. 오히려 더 악하지. 최소한 노태우와 전두환은 자신들이 나쁘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고. 박정희 대통령은 그런 우리 국민들을 죽이려고 했고, 그 제노사이드를 막기 위해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쏘아 죽인 거다. 왜 모르는 거냐고. 너무 착해서 그런거냐 아님 무지해서 그런거냐.

 아님 미친건가?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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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2015.4
샘터 편집부 엮음 / 샘터사(잡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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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날 나는 수선화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 앉아 있었다. 이후로 삶이 잿빛으로 여겨질 때면, 눈앞에 아득하게 펼쳐졌던 그 흰빛과 노란빛을 떠올리곤 한다. 괴테의 <색채론>을 보면 씨앗이나 뿌리 상태로 겨울을 견뎌낸 봄꽃들이 주로 흰색이나 노란색을 띈다고 한다. 깊은 땅속의 어둠과 추위가 그렇게 환한 등불과도 같은 꽃을 피우게 했을까.- p. 73

 

 


 

내가 샘터를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 담배가 테마이면서 이런 다양한 내용이 올라와서 다방면으로 생각의 폭을 넓혀주기 때문이다.


 정호승의 <수선화에게>라는 시가 생각난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내가 담배를 배우기 시작한 건 일하면서부터였다. 일을 하다보니 역시 사회부적응자인 나로서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끼기 위해 남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여러가지를 나서서 해야 했고, 그 과제 중 하나가 담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모금 피다보니 끊을 수가 없어서 한 땐 중독 상황에까지 나아갔었다. 그러나 내가 담배를 끊게 된 이유는 솔직히 이야기해서 건강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첫사랑과 연애를 하게 되다보니, 끊게 되더라. 그렇다고 그 사람이나 내 건강 상태를 걱정해서 끊은 것도 아니었다(...) 그 사람과 나중에 깨지던 아니면 잘 되던 간에 나에 대한 기억을 고작 담배냄새 따위로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첫사랑과 깨지고, 그 다음 애인이 태국에서 여행을 다녀온 뒤에 향수를 선물로 줬었다. 바람의 검심 추억편을 이야기하면서 토모에의 백매화향을 이야기했었는데, 정말 백매화향 향수를 구해다 준 것이다. 지금은 그 향수도 바닥이 나고, 첫사랑하고도 험하게 싸우다가 헤어지고 향수를 준 그 애인과 숱한 다른 애인들하고도 숱하게 싸우고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또 사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아직도 난 (비록 향은 다르지만) 향수를 쓰고 있고, 아직도 담배를 피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두 번 다시 그 사람들을 만나기 싫은 것도 사실이다.


 난 책을 읽는 걸 좋아한다. 글보단 전화가 좋고, 전화보다는 얼굴을 마주하고 같이 있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항상 같이 있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다. 일반화는 변명이지만, 트라우마가 있는 인간은 항상 인간관계의 끝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 그런 사람이 쌓은 인연은 반드시 악연이 되고 악연은 추억으로 남는다. 그렇다고 해서 프로이트의 카우치를 보면서 엉엉 울거나 하는 건 좋다고 생각하진 않는단 말이지. 프로이트가 카우치에 누워서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비듬을 떨어뜨리지 않았다고 확신하는가? 프로이트가 카우치에 누워서 코딱지를 파다가 크고 굵은 게 나와서 한 번 뭉친 다음 카우치 바닥 구석진 곳에 묻히지 않았다고 확신하는가? 하지만 기억으로 남는다면 어떨까?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딱 아련하게만 남는다면?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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