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펭귄클래식 59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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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리에게 경계심을 품지 않았던가.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리가 친숙하게 여겨졌다. 리의 말에는 그 말 자체보다 훨씬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듯했다. 리는 앨러턴에게 다른 때 다른 곳에서 서로 친했던 시기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단어나 감탄사를 특별히 강조했다. 리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너는' 내 말뜻 알잖아? '너도' 생각나지?"

 

 그 뒤 리는 매일 5시 십아호이에서 앨러턴을 만났다. 앨러턴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데 익숙했고, 리와의 만남을 기대했다. 앨러턴은 리처럼 대화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때로 리가 나타나면 다른 모든 것은 깜깜해지는 듯, 리에게 중압감을 느끼곤 했다. 리를 너무 자주 만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앨러턴은 구속을 싫어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적도, 절친한 친구를 사귄 적도 없었다. 이제 그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리는 나에게서 뭘 바라는 걸까?' 리가 퀴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퀴어라면 어느 정도 분명하게 여성스러운 면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앨러턴은 리가 자신을 관객으로 여긴다고 결론지었다.

 

1. 들어가며

 윌리엄 S. 버로스의 초기작품은 <정키><퀴어>, 두 작품으로 요약할 수 있다. 둘 다 윌리엄의 자전소설이지만, 윌리엄은 그 중 <정키>로 인해 문단계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작품 중 동성애에 대한 노골적인 비유가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퀴어 이론 자체가 세워진지 2015년도 현재에서 20년도 채 안 된 상황이다. 그래서 <퀴어>30년간 출간이 되지 않았다가 1985년이 되어서야 출간되었으며, 그로 인해 아직도 이 작품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이 미흡하다. 그는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기억을 적어도 담담히 서술하기 위해 작가의 길을 택했다고 <퀴어>의 프롤로그에서 서술하고 있으며, 그 주요 키워드가 동성애임은 소설의 주 내용과 제목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게다가 그는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둘 중 하나를 정해야 하는 그 시대의 정체성 문제에도 의문을 던지고 진지하게 성찰했다. 이는 탈정체성을 주장하는 현재 퀴어 이론의 흐름의 단초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글은 윌리엄이 <퀴어>라는 작품에서 퀴어를 어떻게 들여다보았으며, 더불어 사회 비판에 어떤 방식으로 퀴어적인 시각을 도입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1) 정의

퀴어

 윌리엄 S. 버로스는 1950년대 미국의 경제적 풍요 속에서 개개인이 거대한 사회조직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데 대항하여, 기성 세대의 주류 가치관에 의문을 제기하고 사회의 획일성을 거부하는 비트 세대였다. 이 관점에서 볼 때 퀴어라는 단어는 정상적이 아닌 이상한 것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인권운동이 크게 벌어지기 전, 동성애자를 이상하다고 생각한 이성애자들이 그들을 부를 때의 비속어로 썼다. 하지만 현재는 동성애자와 기타 성소수자 모두를 일컫는 포괄적인 용어로 쓰인다. 개중에는 남자와 여자라는 성 정체성을 초월하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한다.

분열병

 현재는 조현병이라고 불리지만, 작중에서는 분열병이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부정적 의미가 그대로 쓰인다. 사고 체계와 감정 반응의 전반적인 장애로 인해 균형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퀴어>에서 비유되는 증상 중엔 지나친 긴장감, 기이한 행동이 있다. 보통 환자가 광범위하게 많으며 사회활동에 복귀하기 힘든 만성 환자들의 비중도 많다.

약물중독

 보통 갈망과 금단 증상이 있는 addiction과 인체에 유해한 약물로 인한 신체적 손상이 있는 intoxication이 있으며, 그 모두를 포괄하는 중독이 있다. 작중에서는 주로 addiction 상태를 다루고 있다. 의존성은 몰입과 갈구의 단계, 만취와 중독의 단계, 금단 증세의 세 단계가 있는데, 작중에서는 주인공과 주인공의 상대 모두가 금단 증세를 보인다. 중독은 금단 증상이 사라져도 약물에 대한 집착을 보이기 때문에, 결국 계속 약물을 쓰게 된다. 작중에서는 식물성 환각제가 주로 언급되지만 모르핀이나 기타 의약품도 등장한다.

 

 

 

2. 중독자와 투명인간, 그리고 만남.

 <퀴어>는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작품 <싱글맨>과 함께 퀴어 문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작품이다. 둘 다 50~60년대 쓰여진 작품인데, 자유주의 운동이 한창이지만 아직까지 동성애자들에 대한 핍박이 만연했던 시대이다. 이 소설에서뿐만이 아니라 현재에서도 성소수자들은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다. 분명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이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고전적인 슬로건은 'We are everywhere.' (우리는 어디에나 있습니다.)이다.

 이성애자가 주류인 사회에서는 재생산을 최고의 가치로 친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병리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주인공 리는 퀴어로서 이런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관에 분노한다. 한 예로, 멕시코 마초를 '똥싸개'라고 욕함으로서 극단적인 이성애적 사고관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하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런 반사회적 퀴어로 자신을 정의하는 리는 술집을 전전하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퀴어인 미소년들과 가벼운 데이트를 즐기지만, 그 관계는 결코 통상에서 이야기하는 연애를 포함하여 그 이상의 단계로 나아가진 못한다. 즉 잡담을 던지는 것 외의 자기 발전의 기미가 없으며, 미소년들도 그의 말에서 무언가 의미를 발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의 단절과 동성간의 헌신, '중독성'이 없는 데서 리와 소년들 사이엔 한계가 있다. 그가 소설에서 거론하는 중독이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타인을 만나는 것을 상징한다. 혹은 적어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만하다고 타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을 상징한다. 이에 대한 예시는 리와 앨러턴이 의미 있는 만남을 가졌던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리는 고상한 구세계 인사법으로 고개 숙여 절하려고 앨러턴 앞에 섰다. 그러나 대신 벌거벗은 욕망에서 나온, 불행한 육신에 대한 고통과 증오로 뒤틀린 추파가 흘러나왔으며, 그와 동시에, 놀랄 만큼 그 시각과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토막 나고 절망적인, 다정한 아이의 미소처럼 애정과 신뢰를 담은 미소가 이중으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로 리는 인간이 결코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있다. 범죄가 난무하는 멕시코에서 그는 항상 돈과 권총을 지니고 경계의 시선을 늦추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 그는 그 두려움을 앨러턴에게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이 퀴어이고, 앨러턴을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다가 거절당하거나 무시당할까봐 극적인 상황을 피한다. 아래에 있는 리의 발언은 그가 필사적으로 동성애자에 대한 멸시의 발언을 함으로서 퀴어에서 먼 자신을 연기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앨러턴에게 자신을 동정해줄 것을 호소한다.

 

"저주야. 몇 세대에 걸쳐서 우리 집안에 계속되고 있지. 리 가문 사람들은 늘 변태들이었어. '나는 동성애자다.' 그 치명적인 말이 내 어질어질한 머리에 낙인을 찍었을 때 느꼈던 공포는 절대 못 잊어. 말로 다 할 수 없을 공포였어. 내 분비샘의 림프가, 그러니까 림프샘이, 얼어붙었지. 볼티모어 나이트클럽에서 짙은 화장을 하고 히죽히죽 웃던 여장 남자들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떠올랐어. 내가 그런 인간 이하의 괴물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가벼운 뇌진탕을 일으킨 사람처럼 멍한 상태에서 거리로 나갔지."

 

 앨러턴은 리의 연기하는 듯한 말투를 지켜보면서, 그 말에 흥미를 가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에게 중압감을 느끼기도 한다. 장 콕토의 연극 <오르페우스>를 보고 나누는 리와 앨러턴의 대화에서 볼 수 있듯이, 둘의 사고방식엔 명백히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콕토에서 재밌는 건 신화를 현대적인 상황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이야."

"실화일 수는 없을까요?" 앨러턴이 말했다.

 

 마초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퀴어도 아닌 '평범한' 인간 앨러턴은 미군 대학에서 린치에도 가해자로서 합류한 적이 있다. 구속을 싫어하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거나 매우 친한 친구를 사귄 적도 없다. 그는 리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지만, 몸도 마음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 애쓴다.

 

어두운 극장에서 리는 자기 몸이 앨러턴을 향해 기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상대의 몸에 들어가고 싶은, 그의 폐로 숨을 쉬고, 그의 눈으로 보고, 그의 내장과 생식기의 느낌을 익히고 싶은, 맹목적인 벌레 같은 허기로 팽팽해진, 아메바 같은 원형질의 투사. 앨러턴이 앉은 자세를 바꾸었다. 리는 날카롭게 쑤시는 아픔을, 영혼이 삐거나 탈골된 기분을 느꼈다. 눈이 아렸다. 안경을 벗고 감은 눈을 손으로 문질렀다.

 

 리는 자신의 본래적 자기를 서서히 드러내려 하지만, 앨러턴은 그를 병자 취급하며 피하려 한다. 이는 리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준다. 특히 육체적 접촉이 거부되었을 때 느낀 정신적 상처를 그는 육체적 상처처럼 생생히 표현한다. 그는 자신이 '퀴어가 아니라는' 한 동성애자의 말을 인정하는 자세를 취하며, 자신이 정신분열자라고 말한다. 이전에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정의했던 때에 비해서 자기비하가 더욱 격화되었지만, 그는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은유적인 비유를 멈추지도 않고, 자신의 '뮤즈'인 앨러턴을 포기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긴장은 리와 앨러턴이 남미로 여행을 떠나면서 더욱 격화된다.

 

 

 

3. 야헤와 큐라레, 그리고 이별.

 주인공 리를 상징하는 정신분열증은 그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앨러턴에게서 자신이 바라는 것과 똑같은 강도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데서 오는 그의 단절감을 상징한다. 심리학적인 시각에서 볼 때, 분열병 친화자는 과도한 엄밀성을 추구해 두뇌회로상의 완전 미분을 추구하려 하면 상대의 초기 움직임에 휘둘려 완전히 인지 불능의 상태가 된다. 더군다나 증세 초기에 달한 사람들은 불안 증세를 보일 때 상대에 대한 완벽한 예측을 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즉 상대의 미세한 움직임에도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처럼 점점 속도가 붙어가는 '출력'(수신)에 비해 '입력'(발신)이 지지부진하다. 리의 은유는 점점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하며, 앨러턴 간의 대화는 점점 단조로워지기 시작한다. 리는 노골적으로 앨러턴에게 중독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는 첫째로 리와 앨러턴이 마약에 관련되어 금단 증세를 겪는 장면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리가 먼저 심각한 건강 악화를 보이고, 그 둘은 약국을 찾아 돌아다니지만 리의 수중에 돈이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차없이 무시당한다. 그들이 마약이라는 금기와 터부를 깼기 때문이다. 둘째로 리가 앨러턴을 만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멕시코에서 동성애자인 자신을 동정해 줄 것을 호소했던 것처럼, 그는 남미에서도 또 다른 비유를 사용해 앨러턴에게 호소한다.

 

"정말이야, . 너는 불공평하게 이용한 적 없어? 나는 중독자가 아닌데 옆에서 누가 금단증상을 겪고 있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야.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야. '정말 아파? 네가 왜 네 역겨운 몸 상태에 대해서 나한테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아파도 최소한이라도 체면이 있으면 혼자 견뎌야지. 네가 재채기하고 하품하고 토하는 걸 옆에서 보는 게 얼마나 역겨운지 네 스스로도 알아야 해.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면 안 되는 거야? 넌 네가 얼마나 비위에 거슬리는지, 또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전혀 모르고 있어. 자존심도 없어?'"

 

 리는 이렇게 명백히 앨러턴에 대한 욕망을 앓고 있지만, 그것을 사랑이라고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리의 대화에서뿐만이 아니라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리는 프롤로그에서 앨러턴을 자신의 뮤즈, 즉 자신의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신화 속 여신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앨러턴을 유령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이 양가적인 감정을 없애고 앨러턴을 완전히 독점하기 위해 리는 텔레파시를 쓰려고 한다. 자신의 명령을 주입해서 그의 의도가 상대의 의도가 되는 것이다. 텔레파시를 쓰기 위해선 야헤라는 풀이 필요하다. 그는 이성애자만 사회에서 인정받는 현실을 통제하고 싶어한다. 전복적 유토피아를 건설하기를 꿈꾸는 것이다. 리는 투명인간에서 벗어나 자신이 스스로 수신자가 되고 싶어한다. 물론 상대는 앨러턴이다.

 

"물론 자신이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어야 멋진 그림이 되지. 자동 복종. 합성 인공 정신분열증. 명령하기 위한 대량 생산품. 그게 러시아의 꿈이야. 미국도 그리 별다르지 않고. 두 나라 관료들이 바라는 건 똑같아. 통제지. 초자아, 즉 통제 기관은 광포해졌고 치료가 불가능하지."

 

 그러나 이는 동시에 앨러턴에 대한 애정을 끊고 싶은 리의 절망감을 상징하기도 한다. 야헤를 찾아다니던 그들은 야헤와 발음이 비슷한 아야와스카라는 풀이 있으며, 코터라는 사람이 그 풀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을 입수한다. 아야와스카는 환각제 작용을 하는데, 인디언들에게는 주술에 쓰인다. 여기서 샤먼이 등장하고, 다시 정신분열증에 대한 암시가 등장한다. 샤머니즘은 분열병 친화자가 분열병자가 되는 걸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인디언들은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샤먼 학교에 들어가게 하는데, 교과목 중에 환각 능력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렇게 샤먼이 되면 병을 치료받은 사람이 샤먼이 되어 병을 치료할 수도 있다. 맛은 역하지만 적어도 금단현상은 없다. 이렇게 볼 때 리가 만일 아야와스카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마약 중독도 앨러턴에 관한 그의 중독도 모두 치유되는 효과를 얻는다. 리는 앨러턴도 마찬가지로 치유하여, 또 다시 그와 순수한 세계에서 다시 만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코터는 리와 앨러턴이 배반한 파트너 질의 앞잡이가 아닌지 의심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에게서 불신을 받는다. 또한 그는 백인 주술사이긴 하지만, 남미 인디언의 화살촉에서 큐라레를 구해서 약재로 만드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있다. 큐라레는 사냥을 할 때 쓰는 마취제, 즉 독이다. 리와 앨러턴의 여정은 그 쪽에서 막히고 만다. 동시에 그들의 관계는 그 곳에서 꼼짝없이 마비된 것이다. 에필로그는 그들의 여정이 끝난 이후를 그리고 있는데, 리는 잠시 여행을 하다 멕시코로 돌아오고 그 사이 앨러턴은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 어떤 장교 부부의 가이드가 되었다는 소문만 돌 뿐이었다.

 

 

 

 

 

4. 결론

 윌리엄 버로스는 소설에서 일어난 사건 이후로 아내 조앤과 결혼했지만, 그 결혼생활도 19519월 그녀를 실수로 쏘아죽임으로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는 그 사건을 계기로 하여 이 글을 쓸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이 소설의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그 사건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었으며, 이 상실감은 앨러턴을 잃은 기억을 그의 뇌리에 상기시켰다. 비록 전자는 돌이킬 수 없는 사별이고 후자는 대상의 생사도 모르는 일방적 이별이지만, 둘 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경험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연애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씀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분위기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의 참 주제는 상실과 실패였기 때문이다.

 윌리엄 버로스는 앨러턴이란 대상 자체가 아닌 자기 자신의 마음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들여다보면서 글을 쓰고 있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앨러턴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앨러턴에겐 불편할 수 있었다고 인정한다. 앨러턴과 리가 같이 살거나 여행하는 곳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가 묘사하는 곳은 멕시코이던 남미던 매우 불결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리에게 경계심을 가지거나 혹은 돈을 요구한다. 그는 전반적으로 앨러턴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한다.

 리는 작중에서 정신과 의사에 의해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하는 어떤 사람의 고백을 비웃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정신과에서 받은 동성애자라는 낙인을 두려워한다. 인생에서의 거듭되는 실패로 인해 자신의 마음 속에서 더욱 거세게 날뛰는 악령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정말이지, 심리학의 개념은 악령이라는 실체가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숙주를 사로잡고 있는 악령에게는, 자신이 그 숙주와 구별되는 별개의 침략적 생물체로 보이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에서 앨러턴이 리를 떠나 소리없이 사라진 이후로 리는 계산적으로 사람을 대하기 시작한다. 연기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숨기듯이 드러내지도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는 데 최대한 신경을 쓴다. 상업적으로 접근하는 타인에게는 모질고 차갑게 군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멕시코를 돌아다니며 앨러턴을 찾는다. 또한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촬영을 하기 시작한다. 대상이 정해져 있진 않지만, 멋진 몸매의 남자도 사진에 담는다. 그는 마음을 닫은 채 자신이 퀴어인 걸 세상에 내보이지 않지만,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는 꿈에 윌리라는 자신의 아들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본다. 죄수복과 같은 옷을 입고 사람들의 멸시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들, 즉 자신의 분신을 끌어안는다. 자신과 자신의 안에 있는 어린아이를 받아들인 채, 꿈에서 깨어난 그는 돈을 원동력으로 삼아 손아귀에 움켜쥔 채 계속 움직인다. 그는 이성애자들의 세상에서 성 소수자인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그 무언가를 계속 찾는다.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비웃지만, 결코 삶의 의지와 희망은 놓지 않는다. 윌리엄은 자신과 앨러턴의 이야기를 소설로 씀으로서, 그의 모습과 생각과 동작 하나하나를 사진처럼 묘사하여 텍스트에 담는다. 그는 소설을 쓰면서 마음아파하지만, 퀴어로서의 자신을 완성시키고 앨러턴을 가슴에 품는다.

 최근 심리학 학계에선 분열병이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다르며, 어느 사람에게나 분열병 증세 비슷한 현상을 느끼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윌리엄은 퀴어를 분열병과 동일시한다. 여기서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긍정이 희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회학에서는 동성애 기질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 섞여있으며, 그 정도는 천차만별로 다르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윌리엄 버로스는 앨러턴과 본래적 모습으로 만나는 데 실패했다.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같이 샤머니즘에 귀의하여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전복적 유토피아를 건설하지 못했다. 그가 완성한 소설은 매우 공격적인 문체로 쓰여져 있지만, 사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윌리엄은 자신의 정체성이 어느 쪽인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미 그는 정체성을 초월하여, 끊임없이 없애려 노력해도 제거에 실패한 자신의 악령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모습은 마약을 끊으려 노력하지만 결국엔 끊지 못한 윌리엄 버로스의 소설 <정키>에서도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의 자기인정은 최근에 와서야 문학계의 인정을 받고 있다. 사회의 주류인 이성애자들에게도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독자들은 <퀴어>를 읽으면서 그의 노골적인 사회 풍자와 경멸에 불쾌해하지만, 그의 사랑 이야기엔 일정 정도의 공감을 드러내며 작중의 리와 같이 슬퍼하기도 하고, 그를 불쌍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게다가 리를 쫓아낸 미국은 이제 그를 알게 모르게 속박했던 초강대국으로서의 힘을 잃었다. 그의 기록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법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며, 날카롭지만 새로운 시선을 부여해준다. 비록 리는 소설 속에서조차 자신의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지 못했지만, 그와 세계의 싸움은 적어도 현재진행형으로 끝난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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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품안에 내 사랑을
서연희 / 문학마을 / 199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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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하기 위해서 태어난 거니?

 


 


 

 

아무래도 리뷰를 쓸 때는 말 안한 것 같은데 15권에서는 이 두 년놈들의 심술이 아주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는다.

그것도 콤비를 짜서 공략하는데, 난 이 둘이 20권이 되도록 엮어지지 않는 게 되려 신기했다.

양동작전에서는 최고의 콤비인데.


 어머니의 부하인 렌은 어머니에 대한 집착이 점점 식어가는 가스미를 임신이라도 시키려고 강제로 덮치다가, 그것도 안 통하자 교코에 대한 가스미의 묘한 질투를 사용해서 애매모호한 말을 하는 등 가스미를 심리적으로 자극해 스스로 지 품안으로 뛰어들게 만든다. 되도록이면 일반화는 안 하는데, 이건 확실하다. 말을 이상하게 하거나 애매모호하게 하는 놈은 무조건 나쁜 시키다 ㅋㅋㅋ. 사실 그것도 교코가 체외수정을 해서 요시키의 애를 가질 거라는 협박을 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작전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빽이던 아버지 빽이던 그 모든 걸 사용해서 요시키를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려고 한다. 그에 대한 요시키 태도는 '아 님 그냥 빨리 날 좀 포기해주세요.' 거의 부처급이다?! 하지만 이 녀석도 결국 자신의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자진해서 안기는 데서 인내심의 한계에 봉착한다. 용서해달라며 요시키가 일하는 곳까지 쫓아온 가스미를 자신의 곁에 묶어두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덮치려 하지만, 역시나 그럴만한 용기는 없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결국 그 모든 게 감당이 안 되니까 요시키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는 16권의 가스미.


 그런데 렌에게 강간당하는 16권 너머에서부터 그녀는 되려 점점 강해진다. 그녀도 남자에게 완력으로 제압당하는 상황에 두려워하기도 하고, 요시키에게 그런 모습을 들켰을 때 절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렌에게 '우리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왜 당당하게 말하지 않고 이런 짓을 하는 거죠?' 같은 말을 하면서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다. 요시키는 마지막까지 어머니에 대해서 완강하게 대들지만, 그녀는 요시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차분히 정리해서 표현하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이 두 남매에 대한 집착에서 서서히 놓여나기 시작한 건 솔직히 가스미의 공이 컸다. 


 

 

대부분은 이 커플이 맺어진 것에 대해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둘만 행복하다니 너무 심한 게 아닌가',

혹은 '도덕관념이 심하게 잘못된게 아닌가'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난 이 커플이 잘된 것에 대한 불만은 없다.


 20권에서 해피엔딩으로 끝낸 이후, 이 작가는 외전 한 편도 쓰지 않았다. 처음부터 결말을 그렇게 쓰겠다고 생각하지 않은 이상 생각할 수 없는 완결방식이다. 확실히 이 만화의 겉모습은 아침드라마의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결코 그렇지 않다. 교코는 자본주의 상으로 볼 땐 요시키에게 상당히 이상적인 배우자이다. 고고학에 관심이 있는 그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아버지가 있다. 이 커플이자 남매의 어머니는 더 노골적이다. 그녀는 일에 바빠서 가스미의 옆에 자주 있어주지 못하며, 그 죄책감으로 줄곧 그녀에게 물질적인 보상을 풍족하게 베풀어주었다. 그녀가 남동생인 요시키와 연애하는 '금칙사항'을 저질렀을 때, 그녀는 그들이 그 물질들을 그대로 그녀한테서 빼앗아간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이는 노동과 연관이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는데, 옛적부터 칼뱅은 재산을 모으는 게 신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특정한 노동을 하려는 의욕을 가진 사람은 보통 '신용'을 얻어야 하며, 그 신용을 얻기 위해선 버려야 할 것이 많다. 금기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은 사무적이지만 그만큼 명확하다. 중세때부터 종교와 자본은 쿵짝이 잘 맞아왔으며, 종교의 냄새가 흐릿해지고 있는 지금도 무직 혹은 비정규직에 대한 마녀사냥은 뚜렷하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자본주의 시절에 의해 행복을 빼앗기고 그에 반대해 금기를 저지르고 행복해지려는 사람들에게서마저 행복을 빼앗으려는 자들에게, 우리는 저 커플을 맡겨야 하는 걸까?

 물론 나도 이 책이 말도 안되는 순정 판타지라는 건 알고 있다. 그리고 정말 가스미가 강했더라면, 그녀는 요시키를 안정적인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여성에게 넘겨줬어야 한다. 무엇보다 재산이 안정적이지 못하면 미래에 트러블이 생기지 않을리가 없다. 하지만 이 책의 리뷰에서 아무도 이런 지적은 하지 않을 것 같으니, 이렇게 글을 남기는 것이다.

 어쨌던 모든 인간은 사랑받고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의무이자 권리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해'라는 말은 명령어이기도 하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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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새장 속의 왈츠
니가나 지음, 이기선 옮김, 스오 유미 그림 / 앨리스노블 / 2014년 10월
평점 :
판매중지


전부 원하신다는 말씀이시군요, 여왕폐하.

 

 

 

 

 

  

리디북스에서 새장 속의 왈츠를 포함하여 앨리스노블TL을 10% 할인하고 있다고 하니

혹시 리뷰 쓰지 않고 포인트 모으지 않는 분 중 관심 있으신 분은 이쪽으로 구입하시길. 

 

 앨리스노블 TL은 성인 여성층을 노린 라이트노벨만을 선정하여 출판하는 출판사이다. 처음에는 할리퀸 소설의 아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이렇게 얘기하고 예시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할리퀸 소설에 대한 리뷰가 하나도 없어서 충격먹었다. 생각해보니 할리퀸 소설은 나도 중고등학생 시절 때 잠깐 푹 빠진 장르라서 그런 듯하다. 일단 읽을 예정인 할리퀸 책 두 권이 있으므로 결국엔 리뷰하겠지만, 일단 대표적인 추천작으로 '라이언의 딸'을 꼽겠다. 다시 말하지만 영화가 아니라 로레타 체이스라는 사람이 쓴 로맨스 소설이다. 로레타 체이스는 이 작품 말고도 라이언의 딸 후속작인 '밤의 포로', 제목으로도 내용을 얼추 알 수 있는 '미녀와 야수', 비어 말로리라는 초개성적인 망나니가 나오는 '마지막 스캔들'같은 주옥같은 작품들을 썼다. 여기서 짐작하시겠지만, 이 작가는 제로스에서 실루엣이 그려진 본인의 이상형을 구체적으로 완성시키는 역할을 했다.), 수위가 생각보다 훨씬 높았다. 정말 괜히 19금 표제를 단 게 아닌 듯하다. 일단 여자가 '~해요'라는 문체를 쓰고 남자가 '~하오'라는 문체를 쓰는 신영출판사 전용 번역체(...)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일러스트가 나오는 게 장점인 듯하다. '꿀'같은 단어는 할리퀸에서도 자주 나오는 단어이지만, 남성향의 소설에서 나올 법한 'X봉'이라는 단어를 등장시킨 건 새로웠다. 원문(일본어)으로는 어떻게 나왔을지 궁금하다. 아무튼 나에겐 상당히 신선한 번역이었다.

 

 하지만 할리퀸과 내용상에선 별 차이가 없는 게 아쉬웠다. 아니, 라이언의 딸과 비교하면 도리어 '당당한 여성'의 기준이 약해진 것처럼 보인다. 일단 이 책에서 여주는 자신을 외모를 시기하는 여성에게 한 마디 하는 등 도도한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아버지의 말에 따라 자신의 의도가 아닌 정략결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양상을 보인다. 결혼식 직전에 도망가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 전엔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성(알폰스)에게 그야말로 '조교당하는' 모습을 보인다. 염탐수위를 높이려면 당연한 양상이겠지만... 게다가 결혼 전에 알폰스을 보러 가는데, 그 목적이 남성이 자신을 미워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남성을 미워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참, 무슨 자신감인지 ㅋㅋㅋ 니가나 작가 아닌 다른 작가는 어떤 글을 썼을지 궁금했는데, 검색해본 결과 현재 여성향 성인 라이트노벨 계열에서는 아무래도 이 분이 주름을 잡으시는 듯하다. 게다가 이런 장르가 생겨난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하니, 다른 작가들도 아직까지는 어느 정도 니가나 작가를 따라서 글을 썼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할리퀸에서도 납치나 감금같은 요소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신선한' 내용이 나오려면 어느 정도 기다려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일단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굉장히 본능에 충실한 소설이므로, 그런 목적(?!)으로 본다면 왠만한 기준치를 달성하고도 남을 소설이라 평가하겠다.

 

 또 여담이지만 신영출판사는 이 앨리스노블 등의 라이트노벨과는 달리 아직도 건재하며, 계속 자신들의 전용 번역체를 쓰고 있음을 알리는 바이다. 최근 나온 소설 중 추천작으로 레베카 윈터스의 '사막에서의 하룻밤'이 있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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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스님 시봉일기 1 - 내일이면 늦으리, 반양장
송암지원 지음 / 도피안사 / 2002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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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모두가 고성능의 방송국과 같이
마음으로 자기 의사를 방송하고
다른 사람의 의사를
받아들이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서로 가슴을 터놓고
진정 사랑하고 행복을 기원해주는
따뜻한 우리 모두의 본래의 감성을
잘 다듬어 가야 하지 않을까.
- 마음이 행동한다 중

 

-4월-

하지만 스스로 눈을 가리고 착각의 어둠 속을
배회하는 무리에게는 어쩔 수 없이 눈길을
푸른 하늘 찬란한 태양에 돌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너는 무엇하는 자냐 중

 

-5월-

등불은 어둠을 밝히는 것이다.
마땅히 어두운 곳에 등불은 있어야 한다.
부처님 앞에서 얻은 밝은 등불은 우리의 이웃,
온 겨레의 가슴을 밝혀야 한다.
우리 나라 사회 구석구석에
부처님의 법의 등불은 밝혀져야 한다.
더욱이 어둠 속을 헤메는
가난하고 외롭고 고달픈 형제들의 가슴에
부처님의 자비의 등불이 밝혀져야 한다.

- 어둠을 찾아 진리의 등을 달아주자 중

 

 

  

  

각 시의 전문은 내 네이버 블로그에 있다. 관심이 있는 분은 찾아보시길. 맨 밑에 잡설이 있는데 그냥 건너뛰어주세요(...)

아무튼 붉은 꽃이 흩날리는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무슨 꽃을 이미지화한 것인지 궁금하다.

아무래도 일본을 매우 싫어하시는 것 같으니 철쭉 아니면 진달래 아니면 동백꽃같다만.

난 내 멋대로 머릿속에서 일본 벚꽃 사쿠라로 이미지화했다(...) 역시 벚꽃하면 사쿠라죠.

요즘 봄이라 그런지 애니메이션에서 벚꽃이 많이 올라온다. 한 컷.

 

 상당히 생각이 깊으신 분이다. 정말 아무 기대없이 '명상언어'집이라고 해서 구입했던 책이었는데, 상당히 짧은 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어 하나하나가 무게가 있어서 솔직히 많이 놀랐다. 기도라고 해야할지 노래라고 해야 할지 시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문장을 짧게 짧게 끊어서 나열했는데, 암송하기에 더없이 안성맞춤이었다.

 일단 이 명상언어집은 4계절에 따라서 나뉜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4계절이니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분이 생각하는 불교의 참된 모습은 '호국불교'이다. 개인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처럼 국가도 진리를 추구하며, 그러므로 개인 하나하나가 개인주의를 버리고 단체와 국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4월에서 5월달 쯤 되서 다시 설명이 나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이데올로기나 사상을 추구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대신 목표로 내세운 것이 부처님이 지상에 내려오신 하나의 목적, 즉 '지상의 인간 전원의 열반에 따른 불사'. 종교가 종교같지 않아 파벌들끼리 자리싸움하기 바쁘고, 특히 요즘같이 불교가 타락하고 갈갈이 찢겨질 때, 광덕 스님의 말은 상당히 이상적이고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광덕 스님은 이 책에서 정말 진지하게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간다. 그러는 걸 볼 때 이 분은 어쩌면 불교계의 로맨티스트인지도 모르겠다. 성철 스님은 상당히 현실적이고 냉철해서, 아무래도 꿈을 꾸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거든. 에미야 시로같은 느낌이랄까.

 굉장히 보수적인 분에다가 지옥을 싫어한다고 하셔서 내 타입은 아니지만(난 저세상에 악마와 지옥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어쨌건 진심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만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정진하는 그 노력만은 칭찬해주고 싶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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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2015.5
샘터 편집부 엮음 / 샘터사(잡지)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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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옥시토신은 신뢰를 구축하고 동기를 높이고 서로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도움을 주는 호르몬이다. 신뢰는 옥시토신을 분비시키고 옥시토신은 서로의 이득을 높이는 데 기여하며 높아진 이득은 다시 신뢰를 강화하는 선순환을 만든다.
 또 정서적 안정감을 촉진하고 유대와 협력 행동을 강화하는데, 앞서 언급한 도파민의 분비를 자극하는 역할도 한다.

 

 

 

 

  

이번 인상적인 글귀는 음악이 뇌를 샤워시킨다?라는 칼럼에서 나왔다.

옥시토신이 무조건 신뢰감을 높이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 조건에서는 생성될 수 있다고 한다.

옥시토신 뿐만 아니라 음악 또한 도파민을 자극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아이마스와 러브라이브는 믿고 볼 만 하다. (?!)

 

 샘터상 코너가 잠깐 나왔었는데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감동적인 이야기와 기발한 이야기가 많아서 좋았다. 역시 샘터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은 다들 수준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살짝 주눅들기도 했다. 특히 남편과 아이 한 명을 두었는데도 다른 아이들 네 명을 입양하고 위탁하여 길렀다는 김신혜 님의 이야기에서 존경심 비슷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선 사람들이 대부분 빚 없이 살고 있지만, 서울에선 부자나 빈곤한 자나 빚 없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기 전부터 입양을 하고 싶어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뇌종양과 맞서 싸워가며 꾸준히 아이들을 입양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키워가는 그녀의 이야기는 퍽이나 담담했다.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도 사정이 있고 아이를 낳으려 온 힘을 쓰는 사람들에게도 사정이 있지만, 이 이야기는 그런 차원을 이미 넘어선 게 아닐까 싶다. 오히려 자신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인생을 거는 사람들의 이야기같다고나 할까. 십대들의 쪽지 이야기도 그랬다. 내가 다녔던 성당 한 구석에 꽃혀져 있어서 내 어두운 어린 시절을 그나마 버틸 수 있게 해준 그 무료 잡지는, 한 달에 2000만원 넘는 경비가 들어가는 데도 쪽지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 후원금이나 광고비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 후원금 외엔 그 비용들이 고스란히 빚으로 남는데도, 현 발행인 강금주 씨는 경제적 어려움이야 늘 겪어서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담담히 말한다. 단지 십대들을 위해 무엇을 더 해야 할지 고민할 뿐이라고. 우리 집안은 그렇게 빚더미에 허덕이는 삶을 살진 않았지만, 갑자기 빚이 생겨서 휘청였을 때 가족들 모두 크게 당황스러웠다. 저렇게 담담해지기까진 어떤 어두운 세월을 헤쳐가야 하는 것일까.

 확실히 샘터는 깊은 연륜이 느껴지는 잡지같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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