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1 : 사랑하다 나는 오늘도 1
미셸 퓌에슈 지음, 나타니엘 미클레스 그림,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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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충분한 결과에 대해 점수를 깎는 관계라면, 사랑이 아니라 심사나 경쟁을 해야 하는 다른 종류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펄핑크의 표지가 상당히 강렬한 책이다. 게다가 사랑하다라니. 얇은 두께이고 작아서 안 거의 보이게 가리고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곁눈질을 많이 받은 책이다. 파리 소르본 대학 철학 교수 미셸 퓌에슈라는 사람이 쓴 책이라는데, 의외로 고리타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써내려간 책이다. 마치 여러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하는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을 하는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은 고백하라는 내용으로 시작하지 않는 게 가장 인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기본에 대해서라던가, 이별에 대해서도 '이런 감정이 드는 건 상대방의 분위기가 식은 거다'라는 암시만 나오고 끝난다.

 가장 인상적인 건 인간에 대한 사랑을 사물에 대한 사랑과 구분했다는 점. 사물애호증에 대한 반박으로 봐도 되는 건가. 뭐 심리학에서도 공식적으론 사랑이라기보단 페티쉬로 분류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부분을 너무 간단하게 지나가는 느낌이다. 하지만 내 경험상으로, 전반적인 이 책의 의견에는 동감한다.

 

 

 

더불어 프랑스 사람이 쓴 글이라서 그런지, 결혼이라던가 출산이라던가는 언급조차 없으며 동성 양성에 대해서도 관대한 편이니 다양한 사람들이 봐도 괜찮을 책이다. 요즘 유행하는 자유연애(다중연애?)에 대해서는 충실성의 모자람을 이유로 반감을 가지고 바라보기는 하지만, 안 된다고 펄쩍 뛰거나 반박하진 않는다. 일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빨리 보고 간결하게 서평을 쓰긴 했지만(...) 정말이지 보기 드문 책이니 참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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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닮은 너에게 - 그리스도와 나눈 대화
클래런스 J. 엔즐러 지음, 박정애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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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당신의 뜻이면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놔두겠습니다."

  

 이 책이 성인 남성들에 대한 이야기에 소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일단 1인칭 화자이자 주인공이 남성인 예수이니까. 그렇지만 유달리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많고, 귀동냥으로만 듣던 성녀의 글귀도 나오고, 심지어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성녀의 이야기도 나온다. 중요한 테마는 아니지만, 이 책에 관심이 있어서 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한 번쯤 그 분들의 업적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 그 현상이 좋던 나쁘던 간에 성녀에 대해 따로 관심을 가져주는 종교는 천주교가 거의 유일한 건 사실인데, 그나마도 그들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얼마 없어서 안타깝다.

 

 자기계발서 같이 보이지만 종교 전문 서적에 아주 가깝다. 예수님이 '나'이고 이 책을 읽는 저자가 '너'라서 그러는 지도 모르겠다. 잘 알겠지만 '나'를 주어로 하면 보통 '내가'가 되고, '너'를 주어로 하면 보통 '네가'가 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알다시피 이게 발음이 무지 힘들고, 텍스트 상으로도 '내가'와 '네가'가 반복되다 보면 간혹 그 구절이 '내가'라고 쓰여져 있었는지 아니면 저 구절이 '네가'라고 쓰여져 있었는지 방금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구분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이 책은 정신을 집중시키기 위해 소리내서 읽었는데, 처음에는 구분하기 위해 '네가'를 입을 크게 벌리고 강조해서 읽었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다 '내가'로 읽어버린 것 같다. 어차피 예수님과 내가 하나로 되는 게 주제이니, 편하게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주로 미사에서 성체 부분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고, 기도할 때 성심성의껏 하는 방법에 대해 쓰여 있다. 기도문을 외울 때 급하게 하지 말라는, 일상생활에서 신도들이 무의식적으로 저지르는 실수 말고도 일이 바쁘더라도 항상 기도하면서 살 수 있도록 순간적으로 집중하면서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명상 방법보다도 훨씬 효과적인 책인 듯하다. 명상은 좋은데 종교는 싫다고 쓸데없는 책 읽지 않길 바란다. "나 말고 다른 신을 믿어라"라는 말이 거북한 건 이해가 가지만,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선 어느 정도 고집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내 생각에 기도만큼 명상과 집중 훈련에 효과적인 건 없다. 기도는 명상 따위가 아니라는 저자의 의견에 반하는지라 좀 미안하긴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난 그 느낌이 좀 더 강해졌다. 기도의 단어와 문구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분심이 들면 의탁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의 마음과 내 마음을 일치시키고 분심을 바치라는 말이 명상이 아니면 대체 어떤 걸 의미한단 말인가.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이야기는 저자의 상상력이 너무 들어가서 솔직히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손을 못박힐 때 중추신경을 신경쓰셨겠는가? 의학에 관심이 많은 저자는 개인적으로 그쪽에 대해 연구해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겠지만, 그 글을 읽는 독자의 마음으로선 그 고통이 느껴진다기보다는 너무 멀리 나간 느낌이다. 한 문장만 쓰면 좋았을 것을 자꾸 두 문장 세 문장을 써서 책의 전반적인 메시지를 다 망칠 뻔했다. 종교에 관련한 책이 흔히 그렇지만, 독자가 알고 싶지 않은 저자의 개인적인 신앙 부분은 책을 쓸 때 자제해 줬으면 하는 생각이다.

 

P. S 기독교를 상당히 진지하게 믿는 또래의 말에 의하면, 기도는 채우는 것이고 명상은 비우는 것이니 전혀 다르다고 한다. 또한 내가 생각하는 명상은 관상기도에 가깝다는데 난 명상 자체가 안 되는 사람이고 천주교인으로서 기도를 진지하게 해본 게 초등학생 때니 거의 20년 전이라서 잘 모르겠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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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밖의 전복의 서 읻다 프로젝트 괄호시리즈 8
에드몽 자베스 지음, 최성웅 옮김 / 읻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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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문체의 공간 중에서

ㅡ너의 책은 얼마나 많은 쪽수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가 답했다, ㅡ정확히 96쪽으로 이루어진 평면의 고독이오. 한쪽이 다른 한쪽 아래에 놓여 있소. 첫 장이 정상이고 끝 장이 그 기저라오. 문체의 도정이 이러하오.
그리고 또 덧붙여 말했다, "나를 궁금케 하는 것은 결코 한 장 한 장 넘기며 책의 모든 계단을 내려갔다는 점이 아니라, 애초에 어떻게 내가 가장 높이 위치한, 맨 첫 장에 이르렀느냐는 점이오."

물의 바닥이 별들로 점철되어 있다.

  

 삼위일체를 의식해서인지 자꾸 세 구도를 그려나간다.

 

 일단 신, 생각, 책을 주요 주제로 하여 시같은 구절(사실 읽으면서 판타지의 마법 주문을 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을 써내려간다. 그리고 생각 뒤에 생각이 있으며 그 너머에 무언가가 감싸고 있다는 이론을 펼쳐나가고 있다. 그러나 중간중간 여백이 남겨져 있는 그 짧은 문장 하나하나가 결코 만만치 않은 것들이며, 끝없이 생각에 잠기게 한다. 마치 전 세계 고대 유적에 쓰여진 언어들을 아무렇게나 섞어서 하나로 뭉뚱그린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에는 프랑스 원어가 같이 쓰여져 있는데, 일단 난 그걸 해석할 만큼의 지식이 없지만 이렇게 난해한 문장을 번역하면서 원서로 대조해 보라 내놓을 만한 용기가 있다면 번역가나 출판사나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에드몽 자베스라는 사람은 이 책으로 인해 국내에 첫 출간되었다고 들었는데, 번역가들이 손대기를 꺼려하는 책들을 손대는 것 자체도 용기가 가상하다. 칭찬해주고 싶다.

 특히 결론은 독서에 대해 쓴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책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만화책이 한층 더하긴 하지만, 소설의 여백도 중간중간마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 자체를 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인상깊은 글귀도 책에 관련된 문장 중에서 많이 나온 듯하다.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책밖에 없으며, 책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당연하다거나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없이 너무나 당연해서 당연이란 말도 안 하는 일)들을 새롭게 표현해내는 일, 한계를 돌파해 나가는 일이다. 이 시는 그걸 몸소 실천해 나갔다고 본다. 유태인이 쓴 책과 종교에 관한 책은 매우 조심해서 보는 편이었는데, 이 책이 선입견을 깨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리 로봇이 발달해서 책을 쓴다 해도 이런 내용의 책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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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쉬킨 탄생 210주년 기념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박형규 옮김 / 써네스트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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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의 무덤 중에서

아주 오래 전이었지, 늙은이들은
그의 발랄한 명랑함에 반하여
어딘지 슬픈 듯한 미소를 띠고
서로들 말하고 있었다ㅡ
"우리들은 윤무를 사랑하였지,
우리들의 지혜도 빛났었고,
하지만 세월은 덧없이 흐르고
자네도 지금의 우리 처지가 될 거야.
우리들이 그렇듯, 오, 장난기 많은 이승의 객이여, 자네도 샐녘이 차가울 거야.
지금 놀게나......" 그러나 늙은이들은 살아 있고,
그는 한창 나이에 시들어버렸다,
그가 없어도 벗들은 요란한 술잔치를 벌이고 있다,
어느새 마음에 드는 다른 벗들을 찾아내어.
젊은 처녀들의 이야기 가운데서도 거의 이름은
이제는 드물게, 아주 드물게, 아주 드물게밖에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다.
지난날 처녓적 그를 사랑했던 사랑스러운 유부녀들 가운데서
어쩌면 딱 한 사람만이 눈물을 흘리며
사라져버린 기쁨의 기억을
여느 생각으로 불러낼는지도 모른다......
어쩌자고?

 

  

 소설은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할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있게 말한다. 나쁜 짓이 나쁜 짓임을 알게 해 주는 게 소설이라고. 잡문집에서 그 이야기를 집어넣은 이후로 그의 소설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은 권선징악이 전부인 것도 아닌데, 이 점이 바로 비소설 위주로 독서를 하는 젊은이들의 심정을 복잡하게 만든다. 하지만 소설을 보면 왠지 나쁜 일이 자연스레 나쁜 일로 보인다. 전 대통령의 말을 빌리자면, '그런 기운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을 잘 써도 인터뷰가 왠지 요상한 사람의 글을 보면 기분이 찝찝하다. 지금 고백하자면, 그래서 내가 박범신의 글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무조건 소설은 고전을 많이 보고 현대소설과 비교하는 게 좋다. 시집 리뷰에서 왜 소설에 대한 글을 이렇게 길게 쓰느냐면, 아무래도 사람들은 시집보다는 소설을 많이 보기 때문에 비유로 설명한 것.

 

 

 

시는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할까?

 시는 유달리 정을 강조하는 우리나라 사회에서 공감을 일으키며 평소에는 꺼려하는 사회 혁명을 자연스럽게 일으키는 속성이 있어왔다. 장편의 시들을 제외하고 SNS에 전부 담을 수 있고, 더 유감스러운 이야기지만 저작권이 허술해서 유포되기 쉽다. 그러나 그런 만큼 포스트잇에 쓸만한 조그만 글귀를 원하는 네트워크 세대들에게 잘 맞기도 하다. 세월호 사건 때엔 고은이 SNS에 '미안하다. 내가 살아서 밥을 먹는다.' 같은 글을 써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대충 보면 초등학생 일기장에다가 이렇게 써도 쉽게 꾸지람 받을 글이다. 그러나 글을 쓴 타이밍, 고은의 생애, 무덤에 묻힌 젊은이와 노인의 생존(밥)이 그 문장에 담겨있는 걸 알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었다. 고은을 좋아하지도 않고 푸쉬킨과 고은을 비교할 생각은 없다. 사실 시로 일기를 쓰면서 자신의 연애사와 사생활을 역사와 결부시킨 건 푸쉬킨이 더 뛰어나다.

 

 

그리고 시가 소설을 능가하는 최대의 강점이 있는데, 진심을 담아 써야 좋은 글이 되기 때문에 태생부터 거짓인 소설에 비해 거르기 쉽다는 점이다.

 한때 미래파들이 자기 내부를 탐색하는 난해한 시들을 만들어내서 모두들 시가 어렵다고 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좋지 않은 시들을 걸러내기가 쉽다. 사회에서 이단으로 취급되는 소수자, 힘 없는 자들의 슬픔은 어떤 장르의 시이던간에 다 나타나게 되어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설령 행복한 시?라고 해도 난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고은의 글귀처럼 우리의 행복 밑엔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이 존재한다. 그런 게 보이지 않는 시를 나는 좀 피하게 되는데, 한 가지 예외를 빼고는 얼추 그 예감이 맞는 것 같다. 푸쉬킨의 연애시는 대부분이 실패, 눈물, 그리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심지어 성공을 짐작하고 행복에 넘치는 연애시 하나는 그의 착각으로 밝혀졌다.) 국가의 압박과 자신의 위에 군림하는 왕은 그에게서 자유를 박탈해갔다. 그러나 그는 자연, 특히 바다를 바라보면서 저 너머로 탈출하여 학교시절 친구들과 같이 사는 자신을 상상하며 살아갈 용기를 낸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많이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테러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옹호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더욱 러시아에서 고립되었다. 러시아에 자유(?)가 올 때까지. 개인사는 결코 사회와 분리되어있지 않다.

 

  

 이백년 뒤에나 푸쉬킨이 러시아에 다시 나타날 거라고 고골리가 그랬다는데, 그가 탄생한지 이백년하고도 십년이 지나도 푸쉬킨만한 시인은 세계 어딜 찾아보던 나타나지 않았다. 살아있을 때 잘하자. 추방시켜 놓고선 왜 돌아가실 때 찾아 씁.

 연적도 좀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을 만나야 하는 거다 ㅎ 경쟁을 붙여서 쉽게 이기면 재미가 없지 않겠나? 그런 의미에서 푸쉬킨은 불우했다. 아내를 좋아한다고 쫓아다니는 놈이 설마 자신의 처제와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아내를 쫓아다닐 줄은 몰랐던 거 같고... 그토록 비열한 족속을 라이벌이랍시고 만났으니 그렇게 어이없게 죽은 거라고 생각함. 결투신청을 하고나서 총을 뽑아서 쏘다가 죽는다.

 솔직히 이 시인은 그 자신이 찬미했던 바이런보다 더 괜찮지 않았나 싶다. 요새는 시인 탓은 아니지만 충분한 슬픔을 겪지 못했거나, 혹은 슬픔을 겪고도 멀쩡한 정신으로 이겨내는 시인이 없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선 슬픔과의 싸움을 다룬 건 박소란 시인 정도인데 그분은 역사의식이 없고.. 이겨내야 멀쩡하게 글을 쓰는데, 김지하처럼 미치면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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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은 메이드 사마! 16
후지와라 히로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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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왔다면 성지(교토 국제 만화 박물관)에는 가야만 하잖아?!

 

  

결국 미사키가 메이드를 해야만 했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었다.

 

 아버지가 돌아왔고, 미사키가 집안일에 대한 걱정을 너무 심하게 했던 게 가족들과의 이야기 끝에 증명되었다. 확실히 급전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에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뒷처리가 너무 미숙한 듯하다. 별거하면서 그 집안의 딸들만 아버지 얼굴 보고 살아가는 건가? 불편한 마음이 들었는데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 누구도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이혼을 했다는 이야기는 없었으니 아마도 그냥 별거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뭐 그렇게 살 수도 있는 거지. 그런 남자한테 집안을, 아니 자기 자신을 맡기고 사는 건 영 내키지 않았겠지. 사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내 집안사와 비슷하던데, 그래서 그딴 일로 집을 나갔다는 게 더더욱 납득이 안 가고. 가족들의 반응이 모두 반대하는 분위기였다면, 나라도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가라시는 어찌되는 건가? 

 마지막에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결혼했다는 어떤 정보도 없었다. 결국 약혼녀랑은 어떻게 된 건가? 영국으로 가버린 우스이가 보고 싶어서 귀족 수업까지 받는 미사키를 보면서 그는 약혼녀에게 그녀와 비슷한 상황이 되면 어떤 행동을 취할 거냐고 물었다. 그런데 약혼녀의 대답이 걸작이다. 자기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데리고 오게 하면 되지 않겠냐고 한다. 심하다. 차라리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로 적당히 끝내면 되지 2절까지 나가면 어떡하니. 아무튼 그런 여자랑 살다보면 인생 조질 걸 알 만한 녀석이고, 아니 솔직히 성장할수록 엄청 괜찮은 녀석이던데 미사키에게 돌직구 던지고 키스 한 번 하더니 그 이후 더 이상 뭘 어쩔 생각이 없다. 독신으로 살 건가. 아깝다. 나에게 와라(?!) 

 

 아무튼 그럭저럭 보기에 괜찮은 책 같다. 커플 탄생 과정과 주변 인물들과의 밸런스를 적절히 맞춘 작품인 듯하다. 단지 성추행에 가까운 짓을 한 이가라시와 카노우를 용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건 여전히 찜찜하다. 이가라시는 독신으로 혼자 살면서 충분히 값을 치르는 듯하지만, 카노우는 학생회장까지 맡게 되지 않았는가. 학생회장의 태도가 애매하긴 하지만 그가 한 악질 행동을 비밀로 하는 걸 보면 아마 용서한 게 아닐까 싶다. 여기서 아직까지 불편해서 말하기 힘들었던 목소리의 형태를 꺼내보겠다. 카노우도 성추행을 했다기보다는 학생회장을 괴롭히려는 의도로 행동을 했으니 그쪽에 대한 비유가 적절한 듯하다. 나는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미안하다고 공책에 쓰는 여주의 행동에 모욕감을 느꼈다. 잘못한 게 있어야 용서를 구할 수가 있는 게 아닌가? 남주에게 동정표를 사려고 했다면 그녀의 태도를 인정한다. 그녀는 여자인데다 장애인이고, 명확히 이중적인 약자니까. 전략적으로 강자에게 굽신거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그러나 여주는 그저 남주의 모든 걸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할 뿐이었다. 학생회장에서는 이를 성공적으로 우회한 데서 차이가 있다. 메이드 알바한 일을 숨기면서 가토우의 행위도 같이 숨겼고 그것은 반쯤 전략적이었다. 하지만 가토우를 학생회장으로 위임한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입막음을 위해서라거나 어떤 전략이 없는 행동이었다. 가토우가 악질적인 장난을 전에 자신에게 친 적이 있음을 생각하면 학생들의 미래를 그에게 맡겨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이를 대중작품이니까 적당히 넘기자고 하면 나도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어차피 이런 긴 글을 어떤 사람이 끝까지 읽는다는 건 생각할 수 없고, 13권을 덮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정리해 온 내 생각이니 역시 써야겠어. 프로 불편러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나는 정말 불편하다. 왕 불편하다고. 크앙. 아무튼 이 만화의 로맨스로서의 작품성은 인정한다. 몰입해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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