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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쉬킨 탄생 210주년 기념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박형규 옮김 / 써네스트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젊은이의 무덤 중에서
아주 오래 전이었지, 늙은이들은
그의 발랄한 명랑함에 반하여
어딘지 슬픈 듯한 미소를
띠고
서로들 말하고 있었다ㅡ
"우리들은 윤무를 사랑하였지,
우리들의 지혜도 빛났었고,
하지만 세월은 덧없이
흐르고
자네도 지금의 우리 처지가 될 거야.
우리들이 그렇듯, 오, 장난기 많은 이승의 객이여, 자네도 샐녘이 차가울
거야.
지금 놀게나......" 그러나 늙은이들은 살아 있고,
그는 한창 나이에 시들어버렸다,
그가 없어도 벗들은 요란한
술잔치를 벌이고 있다,
어느새 마음에 드는 다른 벗들을 찾아내어.
젊은 처녀들의 이야기 가운데서도 거의 이름은
이제는 드물게,
아주 드물게, 아주 드물게밖에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다.
지난날 처녓적 그를 사랑했던 사랑스러운 유부녀들 가운데서
어쩌면 딱 한
사람만이 눈물을 흘리며
사라져버린 기쁨의 기억을
여느 생각으로 불러낼는지도 모른다......
어쩌자고?
소설은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할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있게 말한다. 나쁜 짓이 나쁜 짓임을 알게 해 주는 게 소설이라고. 잡문집에서 그 이야기를 집어넣은 이후로 그의
소설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은 권선징악이 전부인 것도 아닌데, 이 점이 바로 비소설 위주로 독서를 하는 젊은이들의
심정을 복잡하게 만든다. 하지만 소설을 보면 왠지 나쁜 일이 자연스레 나쁜 일로 보인다. 전 대통령의 말을 빌리자면, '그런 기운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을 잘 써도 인터뷰가 왠지 요상한 사람의 글을 보면 기분이 찝찝하다. 지금 고백하자면, 그래서 내가 박범신의 글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무조건 소설은 고전을 많이 보고 현대소설과 비교하는 게 좋다. 시집 리뷰에서 왜 소설에 대한 글을 이렇게 길게 쓰느냐면,
아무래도 사람들은 시집보다는 소설을 많이 보기 때문에 비유로 설명한 것.
시는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할까?
시는 유달리 정을 강조하는 우리나라 사회에서 공감을 일으키며 평소에는 꺼려하는 사회 혁명을 자연스럽게 일으키는 속성이 있어왔다. 장편의
시들을 제외하고 SNS에 전부 담을 수 있고, 더 유감스러운 이야기지만 저작권이 허술해서 유포되기 쉽다. 그러나 그런 만큼 포스트잇에 쓸만한
조그만 글귀를 원하는 네트워크 세대들에게 잘 맞기도 하다. 세월호 사건 때엔 고은이 SNS에 '미안하다. 내가 살아서 밥을 먹는다.' 같은 글을
써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대충 보면 초등학생 일기장에다가 이렇게 써도 쉽게 꾸지람 받을 글이다. 그러나 글을 쓴 타이밍, 고은의 생애, 무덤에
묻힌 젊은이와 노인의 생존(밥)이 그 문장에 담겨있는 걸 알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었다. 고은을 좋아하지도 않고 푸쉬킨과
고은을 비교할 생각은 없다. 사실 시로 일기를 쓰면서 자신의 연애사와 사생활을 역사와 결부시킨 건 푸쉬킨이 더 뛰어나다.
그리고 시가 소설을 능가하는 최대의 강점이 있는데, 진심을 담아 써야 좋은 글이 되기
때문에 태생부터 거짓인 소설에 비해 거르기 쉽다는 점이다.
한때 미래파들이 자기 내부를 탐색하는 난해한 시들을 만들어내서 모두들 시가 어렵다고 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좋지 않은 시들을
걸러내기가 쉽다. 사회에서 이단으로 취급되는 소수자, 힘 없는 자들의 슬픔은 어떤 장르의 시이던간에 다 나타나게 되어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설령
행복한 시?라고 해도 난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고은의 글귀처럼 우리의 행복 밑엔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이 존재한다. 그런 게 보이지 않는 시를
나는 좀 피하게 되는데, 한 가지 예외를 빼고는 얼추 그 예감이 맞는 것 같다. 푸쉬킨의 연애시는 대부분이 실패, 눈물, 그리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심지어 성공을 짐작하고 행복에 넘치는 연애시 하나는 그의 착각으로 밝혀졌다.) 국가의 압박과 자신의 위에 군림하는 왕은 그에게서 자유를
박탈해갔다. 그러나 그는 자연, 특히 바다를 바라보면서 저 너머로 탈출하여 학교시절 친구들과 같이 사는 자신을 상상하며 살아갈 용기를 낸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많이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테러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옹호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더욱
러시아에서 고립되었다. 러시아에 자유(?)가 올 때까지. 개인사는 결코 사회와 분리되어있지 않다.
이백년 뒤에나 푸쉬킨이 러시아에 다시 나타날 거라고 고골리가 그랬다는데, 그가 탄생한지
이백년하고도 십년이 지나도 푸쉬킨만한 시인은 세계 어딜 찾아보던 나타나지 않았다. 살아있을 때 잘하자. 추방시켜 놓고선 왜 돌아가실 때 찾아
씁.
연적도 좀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을 만나야 하는 거다 ㅎ 경쟁을 붙여서 쉽게 이기면 재미가 없지 않겠나? 그런 의미에서 푸쉬킨은 불우했다.
아내를 좋아한다고 쫓아다니는 놈이 설마 자신의 처제와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아내를 쫓아다닐 줄은 몰랐던 거 같고... 그토록 비열한 족속을
라이벌이랍시고 만났으니 그렇게 어이없게 죽은 거라고 생각함. 결투신청을 하고나서 총을 뽑아서 쏘다가 죽는다.
솔직히 이 시인은 그
자신이 찬미했던 바이런보다 더 괜찮지 않았나 싶다. 요새는 시인 탓은 아니지만 충분한 슬픔을 겪지 못했거나, 혹은 슬픔을 겪고도 멀쩡한 정신으로
이겨내는 시인이 없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선 슬픔과의 싸움을 다룬 건 박소란 시인 정도인데 그분은 역사의식이 없고.. 이겨내야 멀쩡하게 글을
쓰는데, 김지하처럼 미치면 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