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주르 뉴욕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보경 옮김 / 학고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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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든 집 중에서

"넌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큰소리로 말고 속으로만 말하렴.
하지만 알아 두렴,
지금이 네가 이 계단을 내려가는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저께도 내려갔던 바로 이 계단을,
그리고 내일이면 이 계단은,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밟게 된다는 것을.
안녕 정들었던 집이여, 안녕 격벽이여, 안녕 벽돌담이여.
나를 향해 활짝 열려 있던 문들이여 안녕,
안녕. 하지만 너는 잊지 마라.
그곳에서의 사뭇 행복하기만 했던 그 기억을.......

 

 

책에서 이야기하는 사강의 모습을 보면 대충 이런 이미진가. 이 정도라면 롤랑 바르트를 만난 사강보다는 사강을 만난 롤랑 바르트를 부러워해야 할 듯한데.

 

 뉴욕에서 베네치아까지 쭉 도시를 소개하다가 중간도 안 되어 갑자기 시로 바뀐다. 그 다음에 나오는 수필들은 도시와 관련된 수필이라기엔 굉장히 주제가 뒤죽박죽이다. 그러나 국가나 역사와는 아주 연관이 먼 이야기도 아니니 반드시 편집자 주와 뒷페이지에 있는 주석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저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따라잡을 수 있다. 물론 이 시에는 어떤 해설도 없고 난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여성 작가들이 흔히 그렇듯이 분열증세가 있는 작품같다.

 

 

  

아리아 동인지를 보다보면 베네치아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는 대목이 많이 등장한다.

 

 아리시아 씨가 곤돌라에 탄 손님과 이런 짓 저런 짓(...)을 하면서 베네치아에서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기 때문에 남자들이 몇 명씩 떼거지로 달려들어서 추근거린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던가. 하긴 아리아 본편에서도 '베네치아에서는 소문이 금방 난다'는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한다던가, 소문을 쑥덕쑥덕거리는 여편네들이 엑스트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고보면 "곤돌라 토오리마스~"는 일본어라서 아기자기하지, 뱃사람 남정네가 걸쭉한 이탈리아 말로 고함을 내지른다면... 그냥 아리아의 네오 베네치아에 대한 환상을 계속 지니고 싶다 ㅠㅠ

사르트르의 말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듯하다. 그녀는 그들이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징징거리지 않았다고 극찬한다. 이후에 그들의 책을 읽을 때가 다시금 기대되는 바이다. 또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언급할 때, 어떤 나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열거한다. 그런데 이런 기법을 박은정 씨의 시에서 본 듯하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박은정 씨는 여성으로서 받는 학대와 차별을 열거하는데, 시는 재밌었지만 사강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고향에서 그녀의 삶은 별 탈이 없었다고 하니 말이다.

종종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 특히 번역가가 프랑스 속담에 약한지 어떤 구절은 어물쩍 넘어가려는 게 보인다. 검색 좀 해보지 쩝.

 

그 유명한 페르젠의 손자 자크 드 페르젠은 카프리 별장에 아편굴을 만들어 놓고, 어느 날 밤 그곳에서 시를 읊으면서 죽어갔다. 당시 유명했던 빨간 머리의 팜므파탈 미미 프란케티도 있었다. 그리스풍의 민소매 페플럼만 입고 다녔던 그녀가 나타나는 곳에는 으레 오케스트라가 함께 있었다. 몇 차례의 자살 소동이나 그에 얽힌 뒷이야기, 그녀가 새롭게 개발한 나무 나막신은 제외하고도, 그녀로부터 유래된 많은 것들이 남아있다. 예로, 그녀가 즐겨 입던 페플럼은 미국에서 덩굴무늬 유아복 롬퍼로 교체되었으며, 그녀가 낭송하던 그리스 서정시는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금지된' 시들이 대신하게 되었다. 과연 어느 쪽이 더 해로운지 의아스러울 따름이다.

 

 

자크 드 페르젠은 최초로 동성애 전문 잡지를 만든 사람이다. 또한 미미 프란케티는 카프리의 레즈비언 살롱을 오랫동안 주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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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9 : 살다 나는 오늘도 9
미셸 퓌에슈 지음, 올리비에 발레즈 그림,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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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상처가 났을 경우 몸이 보이는 반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 것이다. "곧 혈소판들이 서로 엉기면서 출혈을 중단시켰다. 조직에 외부 세균이 침투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대량의 백혈구들이 상처 주위로 모였다" 등등. 이런 설명은 마치 혈소판이나 백혈구들이 의지적으로 이런 지능적 활동들을 해내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또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우리의 위와 장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고, 그 일을 멋지게 해낸다는 식으로 말한다. 마치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듯이 말이다.

  

난 이렇게 생각 안 하기가 힘들더라.
지금도 피규어같은 게 살아 있다고 생각함.
그런 의미에서 팟캐스트를 듣다가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접했는데 독일-한국 혼혈 10대가 고딩때 남친과 자신의 방에서 동거하겠다고 엄마에게 떼를 썼댄다. 집에서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서 학교에서도 보면 좋겠다나? 피규어를 사랑하면 그런 일이 없는 걸!

 

 나는 오늘도 시리즈의 마지막이다. 약간 데카르트의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한 게 아닌가 싶다. 사과나무에게 어느 정도 자율적 의지가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 책은 단호하게 사과나무가 무언가를 원하거나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오늘도 시리즈의 말하다 편이 떠오른다. 인간은 생각을 하고 말을 하기에 자신의 의지를 전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동물과 식물은 그렇지 못하다. 또한 생명체가 영혼이나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더 나가서 생명체는 구조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는 동일한 생명체의 후손이기 때문에 친척관계에 있다는 설명은 불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간이 치킨을 먹는 건 자신의 친척을 먹고 있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나는 오늘도 시리즈 중 하나인 먹다를 떠올려볼 수 있다. 이렇게 살다는 이전의 시리즈들을 회상할 수 있게 만드는 최종편이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연을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나는 오늘도 어느 편에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듯이, 여기서도 나오고 있다. 감정을 통해 세계와의 접촉을 유지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살고 있다는 실감이 든다. 쇼생크 탈출에서 끝끝내 자유를 갈구했던 죄수 주인공처럼 말이다.

 실로 오랫만에 식물원에 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을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일인지라 그 식물원으로 간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식물원을 벗어나 온천으로 가는 길에서 무덤들이 산재해 있는 곳을 만나서 상당히 놀랐다. 어찌어찌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소문을 들어보니 식물원은 좋아도 그 무덤길이 흉흉해서, 실제로 범죄까지 일어났다는 듯하다. 무덤은 대체로 방치되었지만 딱 하나에는 비석이 제대로 있었는데다 풀도 잘 정돈되었고 무덤 위 놓인 꽃까지 싱싱했는데, 강도의 소굴이 되다니. 관광객으로선 굉장히 불편하면서도 한편으론 안타깝다는 느낌이 든다. 그 강도들은 무덤의 비석을 유심히 봤을까? 아니, 자식이 저질렀다는 만행이 빼곡히 적혀 있었던 어느 어머니의 비석 하나라도 봤을까? 빨리 그 비석을 보고 반성하여 생명을 해치는 일을 중단하면 좋으련만. 문득 어머니의 무덤자리를 잘못 정해서 무덤이 물에 휩쓸려갈까봐 비가 올 때마다 개골개골 울었다는 청개구리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런 불상사도 있으니 아무래도 화장이 제일 좋겠지만, 살아있을 때 잘 해줄 것이지 죽어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때 비석은 요란하게 세워 뭣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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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8 : 버리다 나는 오늘도 8
미셸 퓌에슈 지음, 파스칼 르메트르 그림,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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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과거에 버린 연인을 우연히 마주치는 일 따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으련만...

이 문제를 좀더 명확히 들여다보기 위해, 일단 어떤 관계에서라도 상대에 대해 거리를 두고 멀어지거나 관계를 끊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점부터 짚어두자.

  

이 책에서는 쓰레기를 버리는 문제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구라는 우주 비행선의 주된 문제는 우리에게 식량을 공급해줄 식량 칸이 따로 없다는 것이라고. 다만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아야만 필요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으므로 엄청난 양의 재생 가능 에너지인 태양에너지를 더 잘 이용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게 시급한 문제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태양에너지와 풍력에너지가 주요 에너지 생산원으로 대체되면 가격이 비싸진다며 폭주하는 닝겐들이 있다. 그러면 원전은? 정부에서 지원하기 때문에 그 정도로 가격이 싼 것이다. 그것도 폐기처리할 때의 가격까지 붙여서 제대로 정산하면 상당한 금액이다. 아마도 그 이야기 한 사람은 경주방폐장까지 가보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그래도 난 근처까진 가봤다.
그러면 원전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어쩌냐고? 만약 지금 원천적으로 탈핵을 시도할 때, 우리는 그 남은 방사능 쓰레기들을 처리할 책임이 있다. 빨라도 60년 동안은 충분히 근무할 수 있다. 몸에도 심히 안 좋은 일자리 오래 붙잡지 마라. 아, 자식에게 일을 물려주려고? 자식 몸까지 망칠 일 있냐.

 친구를 제외시키고 쓰는 글이라 좀 찔리긴 하는데, 어차피 블로그에는 올릴 거다. 이건 안 쓰고 지나갈 수가 없다. 아까 원전 노동자 해고? 문제의 연장이다. 만일 A가 홍콩에서 쓰레기를 두고 간다. 왜냐하면 홍콩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쓰레기를 줍지 않으면 해고되며 해고되지 않으려면 '관광객이 함부로 버리는 쓰레기'라는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쓰레기를 홍콩 직원이 발견하기 전 5분의 시간 동안, 가령 홍콩의 원주민과 관광객 B가 우연히 지나가다가 그 쓰레기를 발견한다. 관광객 B는 (나처럼) 쓰레기가 함부로 버려지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모처럼 홍콩을 여행하면서 기분을 풀려고 했는데 잡치게 된다. 또 홍콩 원주민은 어떨까? 어떤 개념없는 외지인이 쓰레기를 또 함부로 버리고 갔다고 욕을 할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청소부들의 지속가능한 직장과 행복을 원한다면, 그들에게 친절하게 미소를 띄며 인사하는 게 정답이지 그들을 위해서 쓰레기를 버리는 게 정답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어디에서나 쓰레기는 널려있다는 걸 난 당장 오늘 집밖에 나가서 사진 수십장을 찍어 증명할 수 있다. 정말 사람을 위한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지, 다르게 본다면서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세상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봐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다른 의견일지는 몰라도, 그닥 새롭지는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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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7 : 원하다 나는 오늘도 7
미쉘 퓌에슈 지음, 틸 샤를리에 그림,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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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의지가 자유로운 것은 바로 이렇게 부정적인 것까지 원할 수 있는 가능성,

모든 것을 무시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이런 가능성을 '초연함의 자유'라고 부른다.
중립적이지 않은 상황에 대해 인위적으로 '초연'하게, 그러니까 중립적으로 대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진짜 원하는 걸 찾기 이전에 원해야만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게 먼저라고 본다. 

 

 물론, 책을 쓸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안 쓰는 사람들도 많고 심지어 그 와중엔 책도 안 읽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는 옆에서 책을 쓰라고 쓸데없이 강요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던가, 여러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역시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만일 글을 쓰고 싶다면 당장 책을 잡은 뒤 느낀 점을 글로 옮기기 시작하는 게 제일이다. 너무 부담간다면 일상에서 만난 사람들과 감상부터 조금씩 일기처럼 써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타인에게 강요받고 있다면, 게다가 그 타인의 사랑에 굶주려 중독된 듯 글을 쓰길 원한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면 정말 최악이다. 아무리 글쓰기가 사람들에게 좋아도 그렇지, 아주 심각한 경우 당장 글쓰기를 그만 두고 정말 자신이 원하는 걸 찾는 게 훨씬 낫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무언가를 원하라고 강요하는 건 대부분 이유 쪽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글을 쓰지 못할 것이며 심한 경우 자신의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하며 자식에게 글을 쓰길 강요하는 부모가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도 꽤 옛날 얘기다. 60대에 헬스장을 다니며 근육을 단련하고 모델로 나가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꼭 우리는 원하는 걸 늦은 나이에 새로 발견해야 하는가? 그렇진 않다. 어떤 나이라도 원하는 걸 발견하고 원하는 걸 다 성취할 때까지 꾸준히 하는 데엔 지장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원하는 걸 대를 이어 물려받을 때다. 개인적으로 난 부모의 직업을 자식이 물려받는 케이스가 많은 나라는 이미 글러먹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부모의 직업이 자식에게 훌륭해보이고 그게 일종의 동경과 사명감을 가져다줄 수 있다. 그러나 부모가 이룬 성취와 돈만 보고 그 직업을 평가했을 땐 이미 정말 원하는 무언가를 선택할 기회를 잃는 셈이다. 이는 공무원도 마찬가지인데, 철밥통이 좋은 건지 아님 그 직업 자체가 좋은지를 확실히 해야 결과를 보지 않고 정말 최선을 다해 후회없이 시험을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물론 진심으로 원해도 세상엔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을 원했고 그것에 최선을 다했던 적이 있는 사람은 그 후에도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다.

 세부사항은 다르지만 거절 못하는 사람이나 선택장애도 결국 원하는 것을 단호하게 설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본다. 보통 사람들은 '눈이 나빠서 어차피 너 하나밖에 안 보이고, 귀가 안 들려서 어차피 네 목소리밖에 안 들려'라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만일 그 사람이 어느 순간 기적적으로 눈이 잘 보이고 목소리가 잘 들린다면 그 사람들은 여전히 '너'의 옆에 있기를 바랄까? 애초부터 그 귀나 눈은 어떤 것도 잘 안 보이고 잘 안 들렸던 게 아닐까? 그 귀나 눈이 듣고 보았던 게 다 그 자신의 환상일 뿐이라면? 무언가를 결심했음 결심했지 의지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생각해보면 사랑이란 단어와 마찬가지인 듯하다. 어떤 것을 진정으로 원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원함은 행동이다.

 

 P. S 만약에 공무원(ex.서울시 공무원)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발령이 안 나고 한 곳에 오래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만약 있다면)과 아이 낳고 기르는 것이 그 사람 행복의 요체고 직업은 그냥 수단에 불과하다면 어떠한가? 라는 질문이 있었다. 뭐 직업을 돈 때문에 하는 건 그 사람의 자유고 상관없지만 결국 훗날에 박차고 나가는 걸 난 너무 많이 봐서... 그리고 공무원도 열성없음 짤린다(...) 결국 짬밥을 오래 먹는다는 건 어떻게든 직업에 재미를 붙여서 잘 지낸다는 뜻일 수 있다. 즉, '행복해야만 해'라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무리 철밥통이라도 죽도밥도 안 된다는 것. 내가 훗날 행복을 느낀다면 잘 된 일이지만 잘 안 될 수도 있으니, 굳이 도박을 하기 싫다면 원해야만 하는 일은 피하는 게 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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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6 : 말하다 나는 오늘도 6
미쉘 퓌에슈 지음, 브루노 샤젤 그림,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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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풀은
'초록'색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리고 소방차는 빨간색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똑같은 단어로 서로 다른 것들을 지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실용적인 의사소통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하지만 '빨강'과 '초록'이라는 단어의 심오한 의미는 나와 상대에게 전혀 다를 수도 있다.
(...)
의사소통의 부족한 점들은
더 많은 소통으로 극복할 수 있다.

 

   

 내가 그 인간이 간헐적인 색약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안 건 젠가를 할 때였다.

 

 특정 색의 젠가를 빼야 하는데 계속 반대되는 색의 젠가를 빼는 것이었다. 어떨 땐 정상일 때도 있는데 다른 때는 보색이 대비되서 보인다나. 그래서 그 녀석은 나의 도움으로 인해 젠가 게임을 진행해야 했다. 그렇게나 게임을 좋아하는 녀석이 뻘쭘해하니 안 돼 보이기도 했다. 보색으로도 모든 게 잘 보인다고 변명처럼 말할 때 '그래도 그 녀석이 좋아하는 석양은 잘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고.

 내가 보는 석양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해주려 했는데 딱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좀 더 곁에 있었으면 말해줄 수 있었을까? 더욱더 나 자신이 한심했던 건, 그 녀석이 본 석양은 어떤 느낌인지 물어보고 설명은 들었어도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생계에 관련된 일도 아니고 단지 서로 보는 색깔이 달랐을 뿐인데도 이렇게 대화하기가 어렵다니. 같이 살면서 선입견이 덮이기 쉬운 이슈에 대한 대화를 해야 한다면 얼마나 힘들까. 그러고보면 우리 가정에서는 대화하기 힘든 이야기는 일단 피하려 노력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하나하나 꺼내는 편인 듯했다. 그것조차도 무척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새삼 커뮤니케이션의 힘듦을 느꼈다.

 

  

갑자기 영화 홍보가 뜬금스럽다고 생각하겠지만 옥자는 여러가지로 이 책의 주제를 아주 잘 나타내는 작품이다.

 미자는 돼지 즉 옥자와 교감을 나누었지만, 삼계탕은 맛있게 먹었다. 옥자와는 대화하지만 닭과는 대화를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 이 장면에서 옥자가 말을 할 줄 안다면 단번에 장르는 괴수 영화로 다시 바뀌어버릴 게 뻔하다. 영화는 옥자의 침묵 덕분에 옥자에게 동정심을 표하며 온화하게 흘러간다. 옥자를 좋아하는 미자에게 삼겹살을 먹는 건 금기이다. 이는 옥자가 싫어할 것이란 미자의 생각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최근 우리 집 식탁에 올라오는 고기에 호기심이 왕성해지기 시작한 우리 집 강아지도 보신탕 앞에선 주춤거린 듯하다. 그러나 옥자가 말을 할 수도 있을 정도로 지능이 높아졌다면 어땠을까. 그도 미자가 인간이니 그럴 수 있다고 이해했을까? 아님 메트로폴리스의 주인공 로봇처럼 '친구'를 죽인 세상이 미워서 닥치는대로 세상을 파괴했을까? 어쩌면 동물과 인간의 차이, '종'차를 근거로 한 폭력은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논리에 근거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만들어진 타자화의 절정이 동물착취 아닌가.

 고의로 잘못된 통역도 그렇다. 난 봉준호가 소통을 못하는 여러 상황을 주제로 잡은 거라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자꾸 채식주의, 인간의 이기심 정도로 영화를 본다. 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하길 권한다. 배고프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다거나, 혹은 미자가 나쁘다는 게 영화의 핵심이 아닌데 말이다. 저 영화는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대화의 문제이다. 배고프면 그 어떤 대화도 필요하지 않다. 이미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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