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타르, 왜 철학을 하는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지음, 코린 에노도 해제, 이세진 옮김, 이성근 감수 / 북노마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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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소쉬르를 열쇠 삼아 클로델을 다시 펼쳐보십시오. 클로델은 그저 모든 실재가 신이 구사하는 언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횔덜린의 말대로 철학은 신의 침묵과 동시에, 절망의 시대에, 사물들이 이루는 다수의 통일성이 사라지는 시기에 시작됩니다.



 

 

요새 공부할 땐 집에서 주로 영상을 본다. 개인적으로 두 부류를 동시에 공부하고 있는 공부하고 있는 사정인지라 유명한 사람들의 강의를 집중적으로 듣는다. 소리내서 읽는 책들이 있다. 주로 철학처럼 무슨 뜻인지 머릿속으로 그려가며 읽는 책이나 시집이다. 오늘은 영어 공부를 하루종일 하고 집 밖으로 나와 걸으면서 리오타르를 읽었다. 머리 속이 상쾌해진다.


물론 나는 자신을 과시할 생각이 없으며 절대 이 책이 힐링서라고 할 생각이 없다. 도리어 머리는 과열되는 느낌이다. 단지 철학에 대한 그의 명쾌한 정의가 산뜻하게 다가온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두철수의 메뚝 씨는 '맞는 것은 맞으며, 틀린 것은 틀리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사람들은 '팩트 체크'라는 줄자를 그에게 들이댔다. 그가 어디서 살고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보려 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궁금한 마음도 있고 전화도 받아본 적이 있지만, 의도적으로 무관심하려 노력하고 있다. 진리가 아닌 인물을 쫓을 수 있는 결론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몇 이들의 팩트 체크에는 악의가 숨어있는 듯하다. 이는 한국에서 보이는 특징인데,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옛날에 어떤 여자 혹은 남자랑 섬씽이 있었는지를 굳이 밝히려 하는 따위다. 없으면 그만이라 웃어넘기려 들고, 만약 조금이라도 발견되면 동네에서 쫓아버리려 하거나 '뭐야 이런 사람이었네 나 이 사람 알아'라면서 시덥잖은 말을 한다. 그런데 따지고보면 유명한 성철 스님도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그이고 진리는 진리인데 어째서 인물을 배척하거나 추종하는지 알 수 없다. 메뚝 씨는 사람이고 물론 그러므로 그에게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정 진리에 불만이 있다면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일이지 않는가. 고유한 생각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을 혐오한다는 것은 철학자로서의 직업적 정신이 아닐까.

다만 올바른가 아닌가는 둘째치더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종교를 믿더라도 광신으로 빠지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리스도교 신자였고, 가톨릭대를 다녔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데에 단순히 흥미가 있을 뿐이었다. 물론 이도 성경 구절이 문학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흥미였고(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이걸로 논문쓸걸 그랬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아니 왜 갑자기 영어 조기교육에 빠져서 내가 생각해도 개쓰레기같은 논문을; 그때부터 내가 너무 보수적이고 안정된 걸 추구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복수전공이 아동학과라고 해서 영어를 합치면 혼종일 뿐이란 걸 그 땐 생각 못 했었나봄. 오히려 지금이 진보적이 된 편이랄까.. 딱히 그래도 취직이 되지 않아 지금과 똑같은 길을 갔을 것 같기도 하고.) 그 이상의 흥미가 있지는 않았다. 다만 이제 성당 갈 일은 없을 듯하다. 그 점에선 리오타르의 말에 공감한다. 공부는 혼자 해야 한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상당히 놀랐던 게 내 예상보다 독해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아니 사실 원래부터 독해능력이 없었는데 그걸 늦게 깨달은게 아닌가 한다. 태어나면서 처음 떠오르는 기억부터 대학생까지 난 쭉 자각몽을 꾼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깨어났다고 생각한 게 거의 2~3년 전쯤이다.) 국어도 의외로 문학 지문 중 더러 틀리는 게 있었다. 생각해보면 철학은 내가 대학을 다닐 때에도 4차원들이 듣는 학문으로 인식되는 게 있었다. 그러나 리오타르는 이에 단호하게 반박하며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도리어 허황되지 않느냐고 공격했다. 그러고보면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이 책의 내용을 잘 캐치하지 못했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러고보면 난 4차원이다, 남들과는 다르게 생각한다라는 말로 웃어넘긴 것 같다. 엄연히 진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개인차'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이미 귀를 막고 세상이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냈던 게 아닌가 반성해본다. 수능 시험이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도움을 줬다면 이번 공무원 시험은 내가 정확하게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 같다. 특히 영어 독해를 들으면서 느낀 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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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18-02-18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오타르의 이 책이 읽고 싶어지네요^^

갈매미르 2018-02-20 14:52   좋아요 0 | URL
강추합니다 어려운데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세계음치 - 38세 독신남의 서툰 세상살이, 내가 그렇게 이상한가요?
호무라 히로시 지음, 박수현 옮김, 박지영 단카감수 / 하루(haru)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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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특별하냐면 렌즈 대신에 유리를 넣는 평범한 도수 없는 안경과는 달리, 렌즈가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다. 즉, 테만 있는 안경이다. 눈이 좋으냐면 그렇지도 않고 엄청난 근시다. (...) 콘텍트렌즈를 끼는데 굳이 도수 없는 안경을 끼는 이유 중 하나는 안경이 없으면 얼빠진 얼굴로 변하기 때문이다. (...) 그 결과, 내 경우는 얼굴이 도라에몽의 '노비타(한국 이름 노진구)'처럼 변했다. 고로 안경을 벗으면 얼굴이 전혀 긴장되지 않는다. 

 


오키자리노 마마데같은 말은 아는데 오키자리니사레로 나오니 적응 안되는건 역시 내가 일본 애니를 봐서인가... 세카이오 마모루. 애니 일본어는 역시 여러모로 굉장하다는 느낌이랄까.

 

의외로 주변에 오키자리니사레루라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흠. 외워둬야겠다.

  

 


그나저나 호무라 히로시 씨 귀찮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만둬 ㅋㅋㅋ


 

왜 안경에 유리도 없는 거야 ㅋㅋㅋ 유리가 없으면 안경을 쓰는 의미가 있냐 ㅋㅋㅋ

  


책의 내용은 좋았는데 전반적으로 살짝 번역이 이상한 느낌이 있었다.

 

캇파가 상상의 동물로 머리에 접시 올리고 있는 녀석인 건 알고 있다. 그런데 난데없이 오이마키라고 번역을 하다니, 야키소바를 일본식 볶음우동으로 번역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인터넷으로 좀 더 자세히 찾아보니 "캇파마키는, 캇파가 좋아하는 것이 오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외에, 캇파의 원류인 <수천궁>의 상징문양과, 오이의 단면이 비슷하기 때문에, 오이를 '캇파'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라고 쓰여 있다. 굳이 캇파 유래까지 설명하기엔 한국 독자들에게 와닿지 않을 거 같아서 오이마키 정도로 번역한거 같다. 그러나 설명을 보아도 여전히 동파육을 중국식 돼지찜으로 번역한 듯한 찜찜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정신을 차리자 나는 38세로, 넥타이를 맨 총무과장으로,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고, 포세이돈도 로프로스도 로뎀(만화 바벨 2세 주인공 바벨2세의 세 부하)도 없이, 대 뱃살 반값 패키지를 손에 쥐고 맛있을까 맛없을까, 신선할까 상했을까, 이득인가 손해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어느 틈에 이다지도 멀리 와 버린 것을까. '아아.'
(아아) (이것이 다란 말인가) (인생이란) (설마) (다) (이것이) (그럴 리가)



어머니는 항상 왜 나보고 만화책과 갖가지 범죄자들이 나오는 책들을 보냐며 이맛살을 찌푸린다.


확실히 옛날엔 고전들에 미쳐 살았던지라 왜 만화책같은 걸 재밌다고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읽어도 제대로 눈에 안 들어왔다. 그렇지만 이런 책들을 보면 아, 나만 못나게 사는 게 아니구나하는 위안이 든다. 심지어 단카를 짓는 사람조차도 침대에 초콜릿 바를 물고 들어가 자는 그런 유형인지 않은가. (이가 썩지 않을까 걱정되긴 하지만.) 내가 다음에 빌릴 책은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이다. 나도  이 저자처럼 세계의 살인마 이야기라던가 하는 책을 읽는 게 내심 즐겁다. 범죄자의 얼토당토않음과 뻔뻔함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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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쇼핑을 좋아해 쏜살 문고
무라카미 류 지음, 권남희 옮김 / 민음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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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부산 등 한국의 대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생각한다. 어째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풍요해지면 자국 요리만으로는 부족해서 이탈리아와 프랑스 요리 레스토랑에 가고, 런던 스타일의 펍이나 바에서 술을 마시고 싶어할까. (...) 명동 골목에는 맛있는 노점이 여기저기 있다. 노천 의자에 앉으면 먼저 홍합 국물이 나온다. 나는 오돌뼈와 닭똥집 안주에다 참이슬을 마셨는데 정말 맛있었다. 게다가 가격은 넷이 먹었는데 4000엔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난 단순노동이 천직일지도 모르는데, 무언가 작은 것들이 바닥에 확 쏟아지거나 아님 유리가 깨져서 파편들이 쏟아지는 등 도저히 빗자루나 청소기를 쓸 수 없는 상황에 처할 때 난 그런 걸 잘 줍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겁을 한다. 귀찮지 않느냐, 손 다치지 않느냐 기타 등등. 그렇지만 난 시간 때우기 좋은 일들을 결코 귀찮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귀찮아하는 건 쇼핑이다. 특히 옷 고르기. 아무래도 이 삶은 내가 어느 정도 원해서 고른 삶인가 보다. 에휴...


꼭 넥타이를 맬 필요는 없지만 역시 셔츠를 입으면 뭔가 허전한 게 넥타이로, 20대 때엔 나 역시 매고 다녔다. 없으면 허전했다(??) 인턴 2달반인가 3달 다니고 정직원 제의 받고 수락하고 나서 바로 짤렸다는 분은 정장을 사 입고 싶어서 직장을 다녔다고까지 했었다. 그때는 돈벌면서 글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직종이 웹기획자라고 생각했다나. 그러나 정직원 제의 받으니까 '이걸로 돈 벌고 글쓸 시간도 있을라면 최소한 2년은 미친놈처럼 일해야 되는데?' 라는 생각이 퍼뜩 지나갔다고 한다. (인턴때 회사에서 4시간 자면서 일했다고 하는데 일단 내 체력으로는 출근 첫날에 병원 실려갈 케이스다.) 아무튼 그러고 나면 글을 쓸 수는 없겠다, 뇌가 다 굳겠다 느껴서 최근엔 글쓰기에만 전념하시고 계신다. 그렇게 치면 전 여자정장 입기 싫어서 정장 입는 회사를 안 다니는 건데... (근데 정말로 그것 때문에 회사 때려칠만큼 싫다. 일단 가슴 부위가 불편하고 엉덩이가 낀다. 내가 살 빼서 해결되었음 살을 뺐을텐데 이건 뼈 문제라 해결이 안 되더라.) 정장 몰까.

블루셔츠를 보기 이전에 무라카미 류는 블루종을 입었다 한다. 블루종이라고 해서 파란색인 줄 알았더니 검은 점퍼식 조끼였다. 우리 집에도 비슷한 건 있는데. 그렇다고 내가 돈이 썩어난단 얘기가 아니다. 옷은 무작정 비싼 걸 산다는게 제 신념이다. 그리고 비싼 것들은 무조건 손빨래한다. 그러다보니 요새는 정말 살 만한 옷이 없더라. 유니클로에서도 옷 사봤는데 흐물흐물한 느낌.

그러고보면 정말 부자인 사람들은 애초부터 현명한 소비를 한다는 느낌이다. 일단 무라카미 류는 겉보기에는 옷을 막 사는 것 같아도 이탈리아 명품 가게는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보통 사지만 이탈리아 내부에서 자기네들만의 재료와 방식을 고집하는 가게에서 꼭 의류를 산다고 한다. 책에선 그 가게 이름을 말해도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일부러 숨기는 것 같다. 무라카미 류 작가가 셔츠를 사는 곳이라고 일단 대중들에게 이름이 나면 외국인들이 너도나도 일단 사려고 몰려들어 신이 난 가게가 외국인들이 사는 실크셔츠 따위를 늘리고 블루셔츠를 만들지 않는다면 골치아파질 테니까. 무엇보다 넥타이는 꼭 면세점에서 산다는 점이 제일 훌륭하다 생각했다. 남성 중에서, 아니 여자 중에서도 이렇게 섬세하게 쇼핑을 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나 싶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태국에서 보석 사기를 당한 줄도 모르고 당당히 우리나라로 돌아와 금은방에 보석을 펼쳐놓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40~50만원에 그 보석을 샀지만 사실은 2만원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는 보석들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많이 먹히는 태국의 전형적 사기라던데, 여기서 졸부의 비애를 볼 수 있는 듯하다. 이런 속물적인 책에서 자본주의 초기 정신의 일본과 자본주의 후기 정신의 한국을 비교하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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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 리베르 문학 필독서, 단편·고전·수필 세트 - 전5권 - 한국단편소설 40 + 한국단편소설 70 + 한국고전소설 40 + 세계단편소설 40 + 한국대표수필 75 수능.논술.내신을 위한 필독서
박찬영 외 엮음 / 리베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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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을 걱정한다는 염려 따위는 전연 없고, 또 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무슨 짓을 한다거나 무슨 말을 한다거나 따위는 떳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마치 귀족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의 무관심이야말로 인간성 본래의 건전한 태도이다. 객실의 소년은 극장의 관객에 해당된다. 아무런 구속도 없고 책임도 없이 자기가 앉아 있는 한구석으로부터 자기 곁을 지나가는 사람이나 사건을 바라보며, 소년다운 민첩하고도 간략한 방법으로 좋다, 나쁘다, 재미 있다, 바보 같다, 멋있다, 귀찮다 등등 그들을 심판하고 그들의 가치를 단정한다. 결과나 이해 관계 따위에 관해서는 전연 무관심하며, 자주적인 순수한 판결을 내릴 뿐이다. 우리들이 소년의 비유를 맞추지 않으면 안되며, 소년이 우리들의 비위를 맞추지는 않는다. (...) 이러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일체의 약속을 외면하며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똑같이 잘난 체도 안하고 편견도 없고 증회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깨끗한 입장에서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무서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와 같은 사람이라면 현하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자기 견해를 밝힐 것이며, 그 견해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 되어, 화살처럼 사람들의 귀를 뚫고 그들을 두려움 속에 몰아넣을 것이다.

1. 랠프 왈도 에머슨의 자기 신뢰
에머슨은 명성만 들어봤지 그의 글은 처음 읽어봤다. 그런데 가히 에세이의 왕이라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월든이 월등한 차이로 이 자기 신뢰란 수필에 진다. 아니, 그의 책을 보느니 차라리 자연이라는 3쪽의 글을 읽는 게 훨씬 낫지 않았을까 하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이 글을 길게 인용한 이유는 이 대목을 읽을 때 어머니가 딱 나라고 했기 때문이다. 내가 눈을 흡뜨고 사람을 관찰하기 시작하면 너무 무서워서 내가 아무리 당신의 뱃속에서 났어도 소름끼치고 싫어서 피하고 싶다고. 나는 고맙다고 했다. 내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내가 과거에서부터 한결같이 지니고 있었다니 이 세상에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숲속으로 들어가면 마치 뱀이 그 껍질을 벗어버리듯 사람은 자기의 연령을 벗어 던져 버리는 것이다.

자연이란 수필 중에선 이 구절이 가장 압도적이다. 이렇게 가끔 어디에선가 내가 본 것만 같은 글귀가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처음에는 정말로 어디에서 봤던 것 같다고 생각하여 아주 골똘히 기억 속을 뒤져보곤 했다. 그치만 지금 보면 정말 어딘가에서 읽었던 게 반, 아니면 내 것으로 삼고 싶어서 예전에 봤다고 생각한 게 반이라고 본다. 과연 이 구절이 어느 쪽인지는 내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알 수가 없다. (...) 아마도 봤다면 월든에서 보지 않았을까?

에머슨이 사랑 이야기를 하는 게 나는 굉장히 낯설었다. 아마도 월든을 쓴 작가는 여자에게 고백하다 채이고 했으니 그 이미지가 그대로 에머슨에게 갔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 분 알고보니 두 명의 여성과 결혼하여 살아본 적 있는 능력자이시다(?) 철학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결혼하는 게 삶을 예찬하는 철학자의 중요한 증표라면 그는 월든 작가를 제치고 단연 콩고드의 철인이라는 왕관을 쓸만하다고 하겠다(??)

 

예컨대 알세스트가 자기 시가 시원찮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오롱트에게 그저 외곬으로 "그런 말이 아닐세!" 하고 대답을 되풀이할 딱의 그 반복은 해학적인 것이 된다. (...) 다시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사실대로 서슴없이 이야기해 주기로 작정한 '인간 혐오자(misanthrope)', 다른 한편으로는 예의범절을 졸지에 저버린 신사가 아닌 한, 이론에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든지 자존심을 상하고 고통을 느껴야만 할 결정적 순간에 가서 뒤로 물러서는 단순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두 가지 면이 그것이다. 그럴때에 진정한 장면 전개는 알세스트와 오롱트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알세스트와 알세스트 자신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2. 베르그송의 웃음.
아니 이런 게 머릿속에 들어 있음 어딜 여행하던 가랑이 사이에 머리 처박고 생각에 빠질 만 하네. 사르트르가 비판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아아니 철학자들은 다들 이렇게 말을 잘 하나요?
어떻게 코미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저도 몰리에르의 인간 혐오는 읽었는데 이렇게까지는 생각을 안 해봤는데.

 

 누구든 진정으로 왜 이 독일인들이 조국을 떠나야 하는가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프랑스인은 군주의 착취를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거나 또는 무언가 너무 심한 곤욕을 겪을 경우, 도피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압박하는 자에게 해고장을 주어 나라 밖으로 내동댕이치고서는 자신들이 국내에 유쾌히 머문다. 한 마디로 그들은 혁명을 시작한다. (...) 이제 막 내 손에 들어온 책 속에 실려있는 죽은 내 애인의 편지들에 나타난, 1813년 전쟁 당시 고국에 있는 동포의 모습이 보여준 인상을 타국 땅에서 그녀가 쓴 문구는 어제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 사랑스런 말들을 여기에다 옮겨 놓으려 한다.
"아침 내내 나는 감동과 상심의 뜨거운 눈물을 자꾸만 쏟으며 우노라! 오, 나는 내 나라를 그다지도 사랑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마치 의학을 하면서 피의 가치를 모르는 어떤 이처럼. 그에게서 그것을 떼어 버린다면 그는 어차피 쓰러져 버릴 것이다."

3. 하인리히 하이네의 살롱에 바치는 서언.
인간은 세월이 지나도 변한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느 시대에나라고 할 순 없지만 독재자들은 어디에나 드문드문 널려 있었다. 다만 그 현실을 부정하고 다른 독재자가 생길지도 모를 해외로 도망가거나, 아님 내부에서 혁명을 일으켜 상황을 이겨내 보려는 사람과,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채 체념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근데 나는 뭐 광우병이나(음식 가지고 놀지 마라) 세월호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체념일 뿐이지. 요즘엔 사회에 참여할 예정이긴 하다. 그렇지만 무정부주의는 좀 폭발했음 좋겠다 ㅎㅎㅎ

 

 시인과 사색가는 그 필연성 앞에 선 자신들의 궁극적인 형태 속에서 일치합니다. 저승으로 가는 입구 위에 서 있는, 원래는 시인으로 불렸던 사색자라는 로댕의 조각같이, 그 조각 대석에 새긴 어느 고통스러운 꿈속으로 침잠하는 티탄이란 금언이 양자에 다 적용됩니다. 이들 양자보다 전혀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는 니체의 희랍의 비극 시대의 철학이란 글에서 나타나는 그의 상 즉 '어떠한 양식도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편하게 해 주려고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라는 표현도 이들 양자를 두고 한 것입니다. 또한 그가 쓰기로는 거인은 시대의 황량한 시간상의 간격에 구애받지 않고, 또 다른 거인을 불러 그들 아래로 기어가 버리면서 제멋대로 떠드는 난장이들에 의해서도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고고한 영혼의 대화를 계속한다고 하였습니다.

 


4. G. 벤의 시인이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을까
수록작품이 라디오 대담이라고 한다. 대본으로 읽은 게 아닌 듯한데도 그리스 신화에 관한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와서 무지 감탄스러웠다. 확실히 문학 세계의 본질적 흐름과 사회 및 체계에 대한 인식을 비하인드 스토리처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데 라디오만큼 좋은 게 어디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우리나라에서도 외국 철학자나 문학자들의 대담을 스크립트로 많이 옮겨줬음 좋겠다. 번역은 물론이고.

만일 프랑스말로 사고한다면 한결 더 우아하고 한결 더 지혜로우며 한결 더 취미가 있어 오히려 더 낫다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완전히 프랑스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필요가 있으며, 외국인의 보모나 가정교사를 가지고서는 역시 이 행복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길에 있어서의 첫 단계 하나를 만들 뿐이다, 즉 러시아인이 되는 것을 그칠 뿐이라는 것마저도 세상의 어머니들은 모르고 있다. 오호라, 세상의 어머니들은 자기네가 외국인 보모를 초청함으로써 겨우 두 살 정도부터 자기네의 자식즐을 무서운 독으로 해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5. 도스토옙스키의 나라의 기둥이 될 사람은 어떤 언어로 말해야 하는가
대학교 때 졸업논문을 어릴 때부터 영어학습을 해야 한다고 썼는데 지금은 그걸 무지 부끄러워하고 있다.
어떤 소설을 읽었는데 앞으로는 VR을 쓰면 자신의 언어가 어색하지만 자동으로 외국어로 번역되어 나온다고 한다. 외국어 선생님들은 모두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한다나. 심지어 컴퓨터의 어설픈 번역말투가 재미있게 받아들여져 유행어처럼 쓰이는 건 이제 옛말이다. 언어의 품격은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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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과 역설 - 장벽을 넘어 흐르는 음악과 정치, 개정판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3
에드워드 W. 사이드·다니엘 바렌보임 지음, 노승림 옮김 / 마티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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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하지요. 음악에 벌어진 일은 음악이 가령 피델리오의 트럼펫 소리에서 알 수 있다시피 굉장한 부르주아지인 베토벤에서는 사회를 재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의 시대로 오면 음악은 대신 사회 속에서 아무런 기능도 담당하지 못하는 무능력만을 대변하게 됩니다. (...) 오늘날 음악이 혼을 빼놓을 정도로 복잡해져, 음악으로 하여금 사회의 반대축이나 균형축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도록 강요하는 비인간적인 사회를 고발하는 것이 현재 음악이 갖는 의미라는 것이지요.

요즘에는 자꾸 클래식만 듣게 된다. 일단 가사가 있으면 집중력이 엄청 떨어지는데 (요새 일어 중국어 영어 러시아어 왠만하면 다 알아들음.) 아예 모르는 이태리어 불어 이런거 나오면 그나마 일하는 데나 책 읽는 데 칩중이 되거든. 그리고 솔직히 지금은 내 모든 시간이 독서모임, 책 읽는 시간, 아니면 팟캐스트 듣는 시간이라.

사이드를 보고 싶어 샀는데 자꾸 나는 바렌보임에게 눈길이 간다. 대단한 사람이다. 제목 평행과 역설도 저 분의 말에서 따온 듯. 다니엘 바렌보임이 다른 사람들에겐 좀 괴짜로 보이고 레비가 성자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나한테만은 반대로 보인다. 그렇다고 레비가 히틀러에 대해 노골적인 증오를 가지고 있다는 건 아니다. 그 분도 자신이 배운 만큼 침착하게 처신을 하고 있다. (혹은 그러려고 노력하는 게 보인다.) 하지만 그에게서 명백히 드러나는 인종차별이 나에겐 무척이나 불편했다. 왜 인종차별을 받았으면서 다른 인종을 인종차별하려 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본 책에서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 분이 쓴 다른 저서를 읽었을 때도 그랬다. 그런 점에선 '음악을 하는데 훌륭한 음악가가 무슨 인종이던 성격이 괴팍하건 어땠단 말이냐, 난 내 발전을 위해 음악을 하고 있고 니가 듣기 싫으면 안 들으면 되지 왜 나보고 음악하지 말라 그러냐, 너보고 프라이버시를 아무렇지 않게 침해하는 양키놈이라 하면 넌 좋냐?'라고 쏘쿨하게 말씀하시는 다니엘 바렌보임이 존내 내 취향이다. 개인적으로 유태인 중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의 글귀를 하나하나 새겨보면 볼수록 그가 너무 좋아 미치겠다. 이런... 이렇게 보수가 되어 가나 ㅠㅠ 그렇지만 나도 애를 때린다거나 여자를 성희롱 하지 않은 이상 성격을 따지지 않고 음악이나 문학을 좋아하는지라.

팔레스타인 이야기가 간간히 나온다. 간단히 말하자면 보수주의자들이 세련되게 멍청한 소리를 한다는 건데, 멍청한 이야기인 걸 알면 비웃으며 스쳐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첫째, 겉모습은 싸움 없이 깔끔하게 가는 듯하니까. (사이드가 이 말을 꺼냈을 때 대체로 바렌보임은 대화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소 성숙하지 않아 보이긴 하다.) 둘째, 그게 멋져 보이니까. 셋째,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인간의 본성. 넷째, 반박하면 내가 싸움꾼으로 보이니까. 다섯째, 주로 나이든 꼰대들이 투쟁하자고 외쳐대는 것 같으니까. 나는 참 젊은이들이 힘들어보인다. 앞으로 점점 더 힘들어질 텐데 이에 굽히지 말아야 하겠다.

달에 홀린 피에로 처음 들었을 때 너무 혼란스러웠는데 사이드가 베르그와 베베른까지 합쳐서 이방인의 음악이라고 간단히 정리해 버린다 ㄷㄷㄷ 좀 허무하긴 한데 이 이상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을 듯하다. 조성음악 이후로 쉰베르크의 무조 말고도 여러가지 조성에 대한 대안들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다 현대음악의 초석들이지만 그렇게 사이드로 빠져버린게 많이 아쉽다.

지휘자와 연주자의 역할 문제로 싸우기도 한다. 지휘자는 엄밀히 말해 현재의 음향 엔지니어링 역활을 사람이 도맡아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강세라던가 고음 중음 저음 영역대의 분포가 안정 되도록 신경 쓰는게 지휘의 기본 방침이니까. 표현의 역량은 연주자들의 몫이다. 음악에 있어 공연이란 개념을 완성시키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음악에 대한 접근을 어떻게 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일단 나는 수학적, 공학적 접근을 우선시하는 편이다. 소리 자체가 일단 물리적인 현상으로 시작하니까. 실제로 프로듀싱도 그래프+수치로 하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나오는 결과물은 이런 정교함보단 더 감정적인 무언가를 이끌어낸다는게 음악의 양면성 아니겠나.

순서가 뒤죽박죽이라 그렇지 음악에 대해 기대 이상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음악 때문에 산 책이 아니라서 굉장히 의외인 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바그너가 멘델스존을 욕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본다. 하기사 쓸데없이 국뽕만 강한 극보수주의자란 느낌은 있지만 나름 음악은 괜찮은데 ㅋㅋㅋ

한편 알면서 생각도 못해봤던, 바이로이트의 성과 폭력에 관련된 것들이 점점 심해진다는 문제도 제기된다. 좋아하는 오페라는 춘희 아니면 카르멘이고, 못지않게 고어가 나오는(?) 장르를 선호하는지라 정말 심각하게 고려해 본 적이 없다(...) 이건 앞으로 페미니즘이 뜨면서 자유로이 제기될 문제 중 하나라고 보긴 하는데 워낙 요새 오페라의 인기가 저조해서 말이다. 사이드의 말이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어서 이 사람 존경할만 한가 긴가민가했는데 이 글 보면서 갓사이드로 인정한다. 사실 음악사 공부해보면 나오는 거지만 음악만큼 성 역활을 견고하게 잡아놓고 운영된 예술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미술이 표현의 분리라는 느낌이라면 음악은 역활의 분리라는 느낌..

갑자기 고전이 가치 있는 이유는 읽는 방법을 실패할 수 없기 때문이란 명구가 떠오른다. 결국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닦아놓은 해석의 가이드라인과, 그 가이드라인과 다른 해석을 내놓아도 고전이라는 거대한 가치는 그마저도 무차별적으로 포용하기 때문인데, 고전의 문학가치적 정치력은 여기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일면 사이드의 볼멘소리가 많이 공감간다. 그러고 보면 문단계가 그렇게 지키려 하는 순수문학도 고전에서는 그 입지가 뚜렷하니ㅋㅋㅋ

 

바렌보임: 모난 것에서 둥근 것으로, 남성성에서 여성성으로, 영웅적인 것에서 서정적인 것으로, 이 모든 것들을 음악에서는 경험할 수 있지요.

 

좀 더 설명을 붙이자면 개념들을 총체적으로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경험할 수 있기에 음악이 더 좋다라는 걸 말하는 거 아닐까 싶다.


음악 내에서 저런 '표제'들은 언어 의미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모두 하나로 녹아드니까. 하지만 마지막 빼고는 이 모든 것을 과학으로 해결하는 지금은 음악을 재정의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긴 한데. 또한 너무 음악을 서사적으로만 바라본다는 점이 나랑은 안 맞는 듯 하다 ㅋㅋ 보수인사로 알고있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반면 사이드는 책을 읽어나갈수록 호감도가 높아지는 측면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 음악평론가란 사람들이 들으면 개거품 물것같은 말을 많이 하는데 ㅋㅋㅋ 무슨 음악가 관련 자료라던가 국가상황 등등 이거저거 덧붙여서 더 클래식이라거나 이름 그럴싸하게 지어서 가격을 무지막지하게 한 뒤 책을 팔던데. 특히 음악 혐오던가. 제목도 참 그럴싸하지요? 솔직히 실망했음. 소설이나 계속 쓰실 것이지. 그들에게 옛날부터 에드워드 W. 사이드가 날렸던 일침이란 느낌이랄까. 아마 사이드가 주장하는 음악의 다양성이 현재 음악계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미술은 딱 한번 보면 인상이 전달되기 때문에 화력(?)이 빵빵한데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다보니... 청자가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듯. 아직은 라이온킹 OST에 아프리카 음악을 쓴다거나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게 현실이긴 하다. 하지만 제일 좋아하는 몇 안되는 세상 것들 중 하나가 음악이다보니 희망을 가져본다.

 

팔레스타인 사람에서 이집트인으로, 다시 미국인으로 표찰을 바꾸어야 했던 사이드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그런 느낌을 경험할 것이다. 강원도 촌놈에서 서울 대학생으로, 다시 주변국 출신의 미국 유학생으로 신분을 바꾸면서 정체성의 변화를 경험한 나로서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데 큰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다.

 

여기서 강원도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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