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5 : 먹다 나는 오늘도 5
미쉘 퓌에슈 지음, 안느 주르드랑 그림,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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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통통한 여성들을 미인의 기준으로 삼았던 19세기에도 이미 거식증 환자들이 존재한 것으로 보아, 젊은 여성들은 원래 패션모델처럼 마르고 싶어한다고만 설명할 수는 없다.
(...)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이런 것들이 아니라, 어떤 젊은 여성이 음식을 놓고 벌이는 게임에서 권력과 지배의 즐거움을 느끼게 되면서 빠져드는 악순환의 늪이다.
스스로를 통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폭군처럼 군림하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은, 점점 더 날씬해지면서, 동시에 의사를 이기고 모든 사람의 뜻을 꺾으면서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면서 점점 더 커진다.

  

우리나라에서 정말 신기한 점 중 하나는 세계에서 이렇게 보편적이고 당연하게 섭식 장애를 강요하는 나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작품에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옆나라 일본은 어마어마하게 먹는 것을 중요하게 다룬다. 주인공이 특정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집만 찾아다니는 건 물론이고, 밴드나 아이돌을 한다면서 왠지 케이크만 어마어마하게 먹어대는 애니메이션도 있다. 더군다나 가족끼리 둘러앉아 식사하는 풍경, 혼자서 음식을 만끽하는 풍경, 도저히 한 사람으로서 불가능할 듯한 대량의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대는 풍경, 차를 천천히 마시면서 명상에 잠기는 풍경 등 먹는 장면도 굉장히 다양하게 등장한다. 또한, 미국 드라마같은 데서는 친구들과 만찬을 즐길 때 내내 라자냐가 등장한다. 영국 드라마에서는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옷 다음으로 음식이 그 작품의 준비성과 품격을 증명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내 기억으로는 혼술남녀라는 드라마와 아름답다라는 영화, 혀라는 소설 외에 먹을 것을 심도있게 다룬 매체가 그닥 없다. 우리나라의 한 소설가가 계속 먹는 장면을 심오하게 다루긴 하지만, 단지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걸 다룰 뿐 독창성이 없다. 토를 맛깔나게 하는 배명훈의 단편이 최근 나왔지만 그것도 그저 단편일 뿐이다. 이로 볼 때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굉장히 예외적인 작품이고, 장르도 글로벌하다. 서양 언어에는 맛을 표현하는 어휘가 우리말에 비해서 엄청 풍부하다 하는데, 나는 그것을 교육의 힘이라 봅니다. 콘코디아 언어마을이란 데서는 맛에 대한 토론으로 언어를 배운다고 하더라.

 

  

또한 햄버거병에 대해서 따져보자.

 물론 아기에게 햄버거를 먹인 어머니에게도 잘못이 있고 클 것이다. 그러나 아기에게 햄버거를 먹이지 못하게 하는 법령이 없고, 왜 그 때 아이에게 햄버거를 먹였는가 하는 사전 과정은 모두들 알고 싶지 않은가보다. 사실 그들도 하나같이 섭식 장애로 일컬여질 만큼 말도 안 되는 음식들을 먹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전형적 남자들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맘충이 무식하니까, 라는 이유 외엔 알고 싶지 않겠다. 또한 전형적 여자들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그들도 자신의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먹인 적이 있음을 알리고 싶지 않겠다.

 

  

김훈이 라면을 굉장히 그리워하는 산문을 썼지만,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나라는 거의 60년 동안 맛이 강렬한 분식에 의해 지배되었었다는 소리도 된다.

 그런 화학 식품을 그리워하는 자가 여성을 차별하는 발언을 한 것도 또한 있을 법하다. 여성은 먹고 싶은 걸 먹을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는 특이한 인종에 속하기 때문이다. 결국 OECD에 뭔가로 승부를 걸고 싶다면 음식문화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권력을 상실해가고 있고, 괜히 무안해지니 맛에 대해 공부할 시간에 수학 문제집이나 풀라고 잔소리하고 있다.

 

  

먹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한 권으로 간추린 빵의 역사라는 책이 목침과 맞먹는 두께로 되어 있듯이 먹는 걸 사랑하는 건 어렵다.

 사회, 정치, 환경, 심지어 초자아에 대한 극복까지 통달해야 우리는 야밤에 치맥을 먹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건강에는 해로우니 가끔 하길 바란다. 그리고 아침 치맥도 꽤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걸 귀찮아한다면 이미 당신은 반은 죽어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내가 장담한다. 일단 흥미있어하는 음료나 음식의 역사에 대한 책부터 찾아 읽어보라. 상당한 재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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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4 : 걷다 나는 오늘도 4
미쉘 퓌에슈 지음, 루이즈 피아네티보아릭 그림,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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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레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해가면서 누군가의 곁에 가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다.
이때 걸어가는 길을 바꾸거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정치적으로 매우 능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촛불시위가 무력시위로 가느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많았지만, 이미 촛불시위에서는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있는 상태이다.

 

 어딘가로 떨궈서 무언가를 불태우려는 목적을 가지지 않는 이상(...) 촛불시위는 이미 가두시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치적이었다. 옛날 광우병 시위는 사실상 바보같은 경찰들이 살수차로 촛불의 불을 끔으로써 손에 든 건 없고 분노는 쌓이니 그 많은 사람들이 가두시위에서 무력시위로 변모한 바가 있지 않나 싶다. 나도 그 당시땐 걷기보다는 엄청 뛰어다녔다. 그러나 최근에 박근혜 탄핵 시위는 아예 살수차를 불러오지 못하게 됨으로써 완전한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된 바가 있다. 좋은 현상이던 나쁜 현상이던, 문재인이 그 점에서 상당히 전략적이었던 건 사실이다.

 사실상 걷기로 10킬로그램까지 뺀 나로선 돈도 안 들면서 경치 구경도 할 수 있고, 답답하지 않으면서 시간 때우기도 좋은 운동이라고 추천하고 싶다. 이번에 다시 6키로가 쪘는데(...) 다시 걷기를 시작하려고 생각하는 중이다.

 서울에서 다이어트를 시도했을 때는 헬스장을 다니는 등 나름대로 여러가지 시도를 했었다. 그 중에서도 걷기를 시도해본 바가 있으나, 살이 빠지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 자연의 경치가 좋아야 걷는 게 다이어트와 연관되는 듯하다. 어떤 다이어트나 다 그렇지만, 특히 걷기로 살이 빠지는 다이어트는 조금만 소홀히 해도 빠진 살이 금방 돌아온다는 단점이 있는 듯하다; 대신, 소소하게 조금씩 살이 빠져간다는 기쁨은 있다. 태양이 쨍쨍거리던 눈과 비가 오던 꾸준히 걸어야하므로, 피부관리에도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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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 완결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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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집에 머물러 자신들의 일만 돌본다면 누구에게 철도가 필요하겠는가?

  

미치광이 중에선 리어 왕처럼 그렇게 생각보다 숭고한 사람이 나오질 않는다.

 

 예를 들어 출근 시간에 1호선 지하철에서 퍼질러 앉아 끊임없이 신문을 읽던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정치면을 읽을 때 두들겨 팼었던지 갑자기 스포츠 신문에 격한 관심을 보이며 읽기 시작했고 나는 그 미치광이에 대한 흥미를 잃었었다. 좀 재밌는 미치광이를 보고 싶다. 산수를 흥얼거린다거나 하는 미치광이도 본 적 있지만 인생에 딱 한번 뿐이었던 것 같다.

 

  

나는 어머니의 옷을 많이 물려입는 편인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운좋게도 엄마와 내가 체격이 비슷하다. (사실 내가 2kg 정도 더 뚱뚱하다.) 둘째는 내가 패션 감각이 너무 후져서 서울에서 산 옷을 보고 어머니가 뒷목을 잡고 쓰러질 뻔해서 더위를 먹은 줄 알고 급히 눈앞의 유니클로에 들어갔더니 어머니가 살아나셔서는 옷을 골라 급히 사주셨기 때문이다. 이건 부모의 사랑을 떠난 일인데 그 옷들은 나마저도 어느 순간 너무 끔찍해져서 다 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구성이 너무 딸렸다. 셋째는 근근이 먹고 사는 스릴에 재미를 붙이다보니 어쩌다가 옷은 추위를 막고 민망한 부위를 가리면 되지 않냐 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나 때문이다. 어쨌던, 그 덕분에 월든의 소로우처럼 엄청난 주목을 받고 살게 되었다. 특히 10대들은 내 옷차림을 비웃다가 어느 순간 화를 내면서 지나간다. 지금은 내가 돈이 없는 판자집 사람인 줄 알고 동정하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티셔츠를 사는 데 드는 돈 5000원도 쓸 생각이 없다. 그 5000원은 모임을 가지면서 정신이 맑아지는 커피를 마실 때 정말 필요한 돈이다. (사실 그 때도 커피를 굳이 사야 하는가 의문이다.) 또한 나는 나를 비웃고 화내며 날뛰는 사람들이 정말 불쌍하다. 감정이입을 해봤는데, 그들은 기본적으로 그렇게 트라우마 수준으로 남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보다. 사실 내가 몸에 딱 맞는 옷을 좋아하긴 하다. 활동하기 편한 게 중요하지 않은가. 남들도 그런 옷의 소중함을 느껴봤으면 좋겠는데. 아니, 자신들이 정말 원하는 옷의 스타일을 눈치 보지 않고 입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대학에 공부하러 가는 건 개인의 자유고, 말리고 싶진 않다. 단, 공구는 한 번이라도 손에 잡아봤는지 묻고 싶다.

 남자들은 대부분 군대에서 익힌다고 하지만 군대 밖의 세상에서 손에 잡아봤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나는 책을 정면으로 진열해야 하는데 전혀 고정되지 않아서 와이어로 묶기 위해 철판을 드릴로 뚫은 적이 있고, 다행히도 상사의 정확한 지시에 따랐기 때문에 손을 뚫진 않았다. 이는 대학에서는 별로 얻을 수 없는 지식이었다. 그 외에도 따뜻하고 기능성 있는 집을 얻기 위해 배워야 할 지식은 많다. 그 때문에 일찍 죽는다면, 차라리 일찍 죽는 게 낫다. 120살까지 살면서 부모에게 배신당하고 형제에게 배신당하고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초라하고 낡은 몸과 마음으로 덜덜 떨다가 죽느니 말이다. 대학을 나왔지만 실제로 사용하는 건 학력이 아니라 외박을 밥먹듯이 해서 바깥 세상에 익숙한 육체와 대학 외부의 인맥 뿐이더라.

 마을 사람들이 끝내 소로의 오두막을 방문하지 않은 데 대해선 소로가 마을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니까 소문이 나서 그를 괘씸하다 생각하고 아무도 접근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결국 짧게 산 소로가 오래 산 그들보다 더욱 더 명성을 떨쳤고, 우리는 여기서 아싸가 뭔지, 싸가지없다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어야 하는 것이다. 세상도 사실 자신들 가운데 인기가 있는 것보단 훗날 세상에서 명성을 떨치는 게 더 가치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유독 똑똑한 사람을 예의가 없다는 둥 재수가 없다는 둥 침대가 더럽다는 둥 수근거리는데(근데 다 큰데다 혼자 사는 청년의 침대에 침입한 유부녀는 대체 무슨 꼴을 당하려고 그런 모험을 감행한 것일까나?), 나는 그저 그가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다기보단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을 선택할 줄 아는 그의 유능함에 대한 시기와 질투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이라 생각한다.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봤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월든 호수와 우리 고장의 호수를 비교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고장의 호수에 토끼가 나온 건 15년 전. 들꿩은 옆옆마을에서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일까?

 

 그러고보니 각자 차이가 많이 날지 몰라도 강원도가 남에게 관심이 많은 건 참트루다. 나는 강원도의 유일한 단점이 그거라 생각하는데, 내가 사는 소도시만 봐도 일단 서울에 무슨 가게가 있다고 소문나면 이 조그만 데에서 2개월도 안 되어 똑같은 가게가 세워져 있다. 일단 서울촌놈들 몰려와서 여기 백화점도 없냐 아쿠아슈즈도 없냐 투덜대는 탓도 큰데, 참다참다 못해 니가 그렇게 갖고 싶음 시장에 가서 만들라고 한 적도 있다. (혹시나해서 하는 말인데 백화점은 짓지 마라.) 아니 난 정말로 그렇게 생각함. 대체 어떻게 나이를 먹었길래 식탁보같은 걸 레이스로 못 뜨냔 말이다. 아무튼 그걸 귀 기울여 듣는 인간도 문제이다. 만일 모든 걸 집에서 직접 만들고 집까지도 직접 만든다면 지방 중에선 가장 집값이 비싼 문제도 해결될 것이고 민박할 곳을 따로 만들어놓으면 관광객들도 좋아할테니 관광도 해결될 것이며 그럼 개념인들만 관광올테니 헛소리 안 듣고 스트레스도 해결되고 얼마나 좋나. 그러면 강릉에서 삯이 발견되었는데 사방이 콘트리트 도로에 둘러싸여 언제 로드킬 당할지 모른다는 바보같은 뉴스랑, 서울에서 양X까지 90분 걸린다는 도로가 막혀서 5시간 걸린다는 븅신같은 뉴스가 안 나올 거 아닌가. 40몇층 관광 호텔은 시발 존나 쪽팔려서 얘기하기도 싫다.

 그리고 이제 와서 예전의 실친들한테 이야기하는데 좀 걸어라. 일찍 죽긴 하겠지만 지금 걷는다고 죽지는 않아요. 너무 더워서 너무 추워서 혹은 폭설이나 장마가 오기 때문에 내가 사는 데로 오지 못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자꾸 걷고 또 성의의 마음이 없어서 귀찮으니까 안 오는 거 아니냐. 남 욕하기 전에 자기 자신들을 좀 돌아보시길. 그리고 그렇게 느려터져서는 몸과 마음의 지방은 못 뺀다.

 요새 내 글에 관심을 가지는 실친이 많아지고, 심지어 내 옷차림과 옷 상표와 내가 만나는 사람과 내가 들고 다니는 책과 내 핸드폰과 산책할 때 데리고 다니는 강아지 등 참 많은 데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ㅠㅠ 솔직히 넷상친구들이 인생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 나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ㅠㅠ 그리고 좋은 관심도 있지만 상당히 기분나쁜 시선들이 섞여 있어서 부담스러웠는데 ㅠㅠ 여기서 조그만 외판원을 하는 이상 외면할 수가 없어서 상당히 곤란하던 참이었다. '남의 시선 신경쓰지 말아요'라고 말하는 것도 자신의 일이 아니니까 저렇게 편하게 말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고. 근데 월든에서는 '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라'라고 확실한 기준을 내어주면서 내 자신의 초라함(아마도 지식의 부분에서인 듯하다)에 대해 부끄러워해야지, 내 인생의 초라함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라고,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는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으니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 정말이지 큰 위로가 되었다. 첫 만남에선 굉장히 깐깐해 보였지만 만날 수록 점점 더 좋아지는 그런 남성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지옥도 아마겟돈도 사실 흠 잡는 사람들이 귀찮고 이 세상에서 쓸어버리고 싶어 만들어낸 판타지이지만 바퀴벌레 멸종만큼이나 실현 불가능이라 하더라. 따흑. 또르르...

 

 그치만 사냥에 대한 글은 싫어한다. 사냥에 대해선 굉장히 이중적인 글을 쓰는데 결론적으로는 사람들에게 사냥을 추천했다고 한다. 자신이 절제할 줄 안다 하여 모든 사람들이 절제할 줄은 아는 게 아니라는 전형적인 예시라 본다. 소로가 탄생한지도 200년 지났는데 그 호수 주변에 아직도 동물이 살아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아무튼 밥을 먹지 않으면 돈을 쓰지 않으니 돈이 없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퇴치할 3대 악으로 커피, 홍차, 술을 추천하고 줄일 것으론 고기를 추천하는데 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ㅋㅋㅋ 요즘 돈을 많이 절약해야 할 시기인데 월든을 읽고 새롭게 결심을 다지게 되었다. 덕질과 책 읽는 돈을 아껴서는 안 되지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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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3 : 수치심 나는 오늘도 3
미쉘 퓌에슈 지음, 이샴 암라니 그림,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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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브랜드 옷을 입지 않다니, 부끄러운 일 아닌가요?" 혹은 "신상 스마트폰이 없다니, 부끄러울 만하네요."
여기에 대해 "그러는 너는 우리가 수치심을 느껴 소비하도록 돌아가는 것이 부끄럽지 않니?" 라고 응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치심이 특히나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일단 부끄러움이란 제목의 단편소설? 수필?이 시험에 거의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글 중 하나이다. 또한 왕따 현상에서는 이지메같이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왕따에게 수치심을 주려는 노력이 일상다반사로 일어난다는 생각이 든다. 일반적으로 수치심은 개인이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수치심을 느끼는 일이 참 많다. 요즘은 비키니냐 토플리스냐(가슴)로 수치심의 기준이 정해진다면 옛날옛적엔 배꼽을 드러내는 걸 그렇게 부끄러워했다고 하니 말이다. 개인의 종교라거나 내밀한 사정이 이유인 것도 참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남성이 여성에게 세크하라를 할 때, 어떤 게 성희롱이고 어떤 게 성희롱이 아닐까? 맨 앞의 내용으로 보면 당연히 내가 수치심을 느끼는 게 성희롱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남성이 우월한 지위에 있다던가 개인적으로 내가 그 남성을 존중해줄 수밖에 없다던가 하면 수치심을 억누를 수밖에 없고, 그 세크하라에 아무렇지 않은 척 맞장구를 치며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세크하라를 당당하게 한 남성의 여성에 대한 칭찬도 그녀의 눈을 가리는데 한몫한다.) 특히 서브컬쳐의 모임에서 이런 분위기를 자주 보게 되는데, 견딜 수 있다면야 상관없지만, 가슴이 한순간이라도 따끔했다면 상대방에게 말을 해주는 게 좋다. 초보라면 거기서 멈출 테지만, 상습범이라면 계속 세크하라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리를 피해라. 수치심을 느끼는 것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아예 원인에 대한 접근을 피하는 게 좋다.

 공공장소에서 크게 떠드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이다. 부끄러운 줄을 알고 있지만 주변의 소음공해로 인해 목소리가 커지고 결국 상습적으로 수치심을 억누르다보니 아예 수치심이 적어져서 아는 사람이 전화만 하면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것이다. 책에서는 수치심에 떳떳해지는 법을 주로 적는데, 그건 프랑스같은 문화강국에서나 문제가 되는 일이고 우리나라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수치심을 느끼는가부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난 내 패션감각이 구린데에 대해 옛날부터 수치심을 많이 느껴왔었지만, 노출도를 줄이고 살이 찔 땐 헐렁한 옷을 입으려고 노력하면서 사람들의 시선도 많이 가라앉았고 나 자신도 그런대로 떳떳한 듯하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과 수치심을 공감하는 게 좋다. 여러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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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2 : 설명하다 나는 오늘도 2
미쉘 퓌에슈 지음, 캉탱 뒤킷 그림,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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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기술학교에 다니는 사촌이라면 비디오 신호가 어떻게 디지털 방식으로 입력되며 마그네틱 디스크 표면에 어떻게 녹화되는지 등등을 설명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 사촌은 사실 할머니에게 설명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지식을 과시했을 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할머니가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녹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할머니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똑똑한 척할 필요는 없다.

 

  

애니에서던 소설에서던 드라마에서건 영화에서건 주인공은 싸우고 있는데 곁에서 신나게 설명한다던가, 갑자기 판타지 세계에 빠져 어리둥절해 있는 주인공에게 세계관을 설명해주는 인물이 꼭 한 명씩 있다. 이런 인물을 설명충이고도 부르지만, 심한 말로는 아가리 파이터(...)라고 한다.

 

 후자는 주인공은 신나게 두들겨 맞는데 왠지 (의도한 건 물론 아니겠지만) 신이 나서 장단에 맞춰 저건 저먼 스플렉스라는 둥 떠들썩하게 꺄꺄 떠드는 좀 정도가 심한 아이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독자들도 당황할 만한 급전개가 펼쳐질 때라거나 저자가 작품의 내용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잃지 않으려면 반드시 설명충이 필요하다. 만일 죠죠 1부에서 디오가 얼마나 힘쎄고 악랄한지 스피드웨건이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를 조금 불쌍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고(천하의 디오도 어린 시절엔 술만 처먹는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았었다.) 그에게 부여하는 권력의 힘이 어느 정도 약해져서 3부가 나올 여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판타지 소설은 설명충 캐릭터가 꼭 나와야 사건이 진행된다. 인간의 집중력엔 한계가 있고 모든 걸 나레이션으로 일일히 보여주는 데엔 한계가 있다. K 애니메이션이 처음에 욕을 무지 먹었던 이유가 세계관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인데, 판타지 장르인데도 캐릭터 중에 설명충이 없기 때문이었다. 뭐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설명충 캐릭터가 없는 이유가 밝혀지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이 애니는 지금도 망작이라는 딱지를 떼지 못했으리라.

 

 

이런 캐릭터들도 결국 라스트 보스가 나타난다거나 어마어마한 반전이 전개된다거나 주인공이 사랑에 빠졌을 땐 그 자리에 없거나 이미 죽었거나 자리를 슬쩍 피해준다.

 스피드웨건 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 설명충 캐릭터를 풍자하려는 의도에서 생겨났다고 본다. 그래서 다소 과한 면이 있는데, 그도 어떤 장면에서는 설명을 포기하기도 한다. 설명을 하기 싫을만큼 느끼는 감정의 폭이 클 수도 있고, 혹은 상대가 설명을 듣기 싫기 때문에(이럴 때 상대방이 정말 의사를 확실히 표현하기는 한다.) 하지 않기도 한다. 물론 이 책이 놓친 포인트가 있는데, 정말 쓸데없는 관심을 가졌거나 혹은 쓰레기 같은 물건이 중요하다는 잘못된 정보를 믿는(혹은 믿고 싶은) 사람이 경험을 모으느라 시간 낭비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설명을 듣는 걸 포기하라고 설명을 해야 할 판이다. 아니, 이 책이 사실 그런 책인가? 이 짤방의 주인공이자 최고의 설명충으로 유명한 스피드웨건은 설명할 상황이 아닐 땐 설명하지 않는 신사이자 현자다. 하지만 그는 재단을 세우는 부자는 되었어도 평생 동정으로 살다 죽었다. 왜 저자가 엑스트라라도 스피드웨건에게 짝을 만들어주지 않았는지는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결국은 말보다는 행동을 더 많이 하며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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