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행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오현정 옮김 / 큰산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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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함이 내 속에 울려 퍼집니다.
ㅡ생각해 보라, 너는 무엇을 보느냐?
ㅡ사람과 새와 돌과 꽃을 봅니다.
ㅡ다시 생각해 보아라, 너는 무엇을 보느냐?
ㅡ생각과 꿈과 빛과 유령을 봅니다.
ㅡ또 생각해 보아라, 너는 무엇을 보느냐?
ㅡ아무것도 보지 않습니다. 적막하고 고요한, 죽음 같은 깊은 밤입니다.
ㅡ또 생각해 보아라!
ㅡ아! 나는 검은 성벽을 꿰뚫을 수 없습니다!
나는 울음소리와 외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저편 강가에서의 날개 떨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ㅡ울지 마라, 울지 마라, 그것은 저편 강가가 아니니라.
외치는 소리, 울음소리, 날개 떨리는 소리는
너의 마음이니라.

 


 

그나저나 이 분도 이름이 니코스이니 애칭으로 따지면 니코로 불린 거 아니냐!
... 니코 미안.


일어나서 도서관 가면서
아 ㅅㅂ 그리스인 조르바 읽어야 한다니
아앍 ㅅㅂ 그 인간 변태잖아아아 읽기싫어엇 야메떼 이야다아 쿳소오 근데 독서모임 때문에 읽어야 돼애애
이러면서 갔는데 레알 이거보고 머리가 띵해짐
아 그러니까 소설만 그리스인 조르바를 썼지 비소설은 다양하구나. 민망하다 ㅋㅋㅋ 도서관에서 레알 나 혼자 비실비실 빵터짐(...) 매일 20페이지씩 소리내어 읽다보니 대략 10일만에 다 읽었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룰루. 여러분 조르바가 꼴보기 싫은 사람 있음까? 저처럼 잠언 읽으세요. 에세이는 싫어하는 편이지만 왠지 시같아서 부담이 안 간다.

 

 

 줄거리 정리를 하게 될 듯한데 이 책의 내용이 니코스 카잔차키스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오해를 벗어던지는 데 효율적일 것 같아서이다.

대충 신에 대해서만 정리하자면, 신이 인간과 동물과 식물과 사물 등 모든 것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신은 수없는 가면들을 지니고 있지만 그 본질은 하나이다. 이 점에서만 기독교에 가깝다 볼 수 있다. 이 신은 무능하지만 계속 우주와 싸우고 있으며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각기 자신의 내부에 있는 신의 요소를 육체에서 해방시켜 지구를 몽땅 불태워 요한게시록 같은 정화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번 마더퍼커 번! 레알 요즘 내 주변의 사방이 아파트 짓겠다고 공사가 한창인데 그 소음을 들으며 출근하다 보면 진짜 이렇게 됐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서는 심연 속에서 다함께 정숙한 침묵의 파티. 이런 요소들은 모두 동양의 윤회 사상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 작가가 그리스 정교를 믿었다고 판단하기엔 어폐가 있다. 작가가 중국 여행을 한 후 쓴 기행문도 있고 말이다.

 

 

 

 어쩌면 장막을 걷으라 말하지 않는 건 플라톤의 이데아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행위인인지도 모르겠다. 

 장막 저쪽에 있는 이상세계도 어차피 당신의 상상에 불과하다고 하는 듯. 실제로 이 대사 이후에 종종 그런 말투가 등장한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현상 속에 내재하지 않으며 바보가 되어 고뇌를 우직하게 지고 살아간다. 그것이 첫번째 의무와 두번째 의무 사이의 경계이다.

 

 

 결국 내가 보고 듣는 건 다 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근본으로 나아가려고 계속 노력한다면 결국 다 나의 마음에서 끝난다는 사실을 인식할 것을 두번째 의무에선 계속 권장하고 있다.  

결국 무엇을 하더라도 우리는 무릇 인간이며 대지는 인간을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음을 알라고 저자는 권장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크레온이 비인간적 존재와 싸우기 위한 감각을 준다는 말을 하는데, 그는 오이디푸스의 외삼촌이자 처남이다. 그런데 이 분 오이디푸스의 전말을 다 목격한 정신적 충격은 둘째치고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이 모조리 죽지 않았나;;

 

 

 

페이트를 보면 유독 외국에서 평범치 않게 살았던 역사적 인물들이 일본의 평범한 문화를 즐기는 장면이 많이 발견된다.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눈으로 이들을 본다면 어떨까? 그는 분개할 것이다. 책에서 그는 일상을 벗어나 끊임없이 도약하려 노력해야 하며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은 왜 페이트의 교훈에 동조하는가? 이는 일상적인 겸손에 들어 있는 성스러운 모습에 대한 존경심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항상 도약하는 삶을 살았던 서번트들이 평범해지는 모습은 겸손을 잘못 해석한 건 아닐까 싶다. 사실 작품 자체의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하다.

 

P.S 그래도 난 니코니코니 카잔차키스가 싫다. 이유? 인식-인류는 애 낳으라는 소리가 절반 이상이다. 사스가 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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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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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이다! 더 높은 인간들에 대한 동정이다!" 그는 소리쳤고, 그의 얼굴은 청동으로 변했다. 좋다! 그것도ㅡ끝이 났다!
나의 고뇌와 나의 동정ㅡ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도대체 나는 행복에 뜻을 두고 있는가? 나는 나의 과업에 뜻을 두고 있다!
자! 사자가 왔고, 나의 어린아이들은 가까이에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성숙해졌고, 나의 때가 온 것이다.
이것이 나의 아침이다.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이제 솟아올라라, 솟아올라라, 그대 위대한 정오여!"

차라투스트라는 남을 도우려는 자선이 자신의 행복과 동정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것을 극복하려 결심했는데도 불구하고 차라투스트라는 제4부 맨 마지막에 가서야 극복해낸다. 이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 없이 자만을 품지 않고 자신의 과업에 순수하게 전념하면서 눈앞에 있는 이에게 자선을 베풀지 않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나타낸다. 가족들 모두가 기독교인 니체로서는 특히 이를 극복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으리라 생각된다. 사람은 타고난 환경을 극복하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행복하기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이 책의 대부분은 제4부의 축제를 제외하고는 그의 처절한 고뇌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에 실패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는 전반적으로 쉬운 길을 벗어나서 어려운 길을 일부러 선택한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통을 상징한다. 그러나 에티카의 말대로라면, 쾌감은 악일 수 있으며 그 쾌감을 줄이기 위한 고통은 차라리 선일 수 있다.

 

책은 하루에 두페이지씩 읽으려고 노력했다. 솔직히 바쁘거나 시간이 없으면 건너뛰는 날도 있었다.
비유가 상당히 많아지는 제4부보다는 개인적으로 제1~3부의 글들이 매우 좋았다. 혹은 제4부에서 성 프란치스코를 풍자하며 빈정거리는 태도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나는 그게 니체의 사람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일말의 오만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 생각하는 사람들이 동정에 발이 걸린 채 주춤거리지 않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듯하다. 아니, 최소한 사기꾼을 동정하여 돈과 마음을 헛되이 날리지 않는데 효율적인 도움을 주는 듯하다. 그래서 1~3부까지는 비교적 인상적인 문장들을 블로그에 충실히 적고, 내 생각까지 거기에 붙여두었다. 일단은 계속 남겨둘 생각이다. 보실 분은 이 사이트에 들어가보시길. http://vasura135.blog.me/22099015492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사소한 불만.

1. 인간의 평등을 전면 부정했다.
2. 자신이 잘났다는 걸 무지 자랑하며 인간을 뭐든지 할 수 있는 슈퍼맨처럼 그려놓았다. 결국 이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황금이라던가 기술에 대한 만능주의로 변모하고 결국 거기에 파묻혀 인간이 소외되는 딜레마가 벌어지는데...

 

 

P.S 페이스북 친구가 위의 니체 모에화 그림을 보고 하치쿠지 마요이냐고 물어봤다.
생각해보니 말투가 좀 비슷하고 전투적으로 변모할 땐 성장할 때 그 강해진 모습이 맞다. 그러나 초인의 면모로 생각해봤을 땐 호노카로 보면 되겠다.

 

1. 호노카 사마는 아메야메하면 비를 그칠 수 있는 분이시다. 

 

 

 
2. 어릴 때부터 학교와 주변 환경을 싫어하셔서 과감히 파괴하시려는 의지. 

 

 

 
3. 극장판에서는 무려 미래에서 과거로 순간이동하는 능력을 지니셨다. 

 

 

 
4. 라이브 중간에 한번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모습. 

 

 

 
5. 성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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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당신에게 실망하셨다
마크 러셀 지음, 섀넌 휠러 그림, 김태령 옮김 / 책이있는마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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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들은 우리를 게으르다고 비난하지. 내가 거리에 설교를 하러 가면, 사람들이 "게으름뱅이!" 또는 "일하러 가라!"하고 고함을 지를 때가 있어. 하지만 왜 알잖나?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저 그런 일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이라는 것을 말이야. 자네는 군인처럼 머리에 벽돌을 맞아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야 해. 자네는 운동선수처럼 규칙을 지키며 경기를 해야 해. 자네는 농부처럼 곡식을 수확할 날을 기대하며 매일 열심히 일해야 해. 우리 말고 누가 이런 일을 하나? 나는 감옥에 갇힌 괴짜 거리 선교사라는 것이 부끄럽지 않아. 자네도 부끄러워해서는 안 돼. 솔직히 말해주면, 자네도 이 일을 계속하면 결국 나처럼 될 것이야.

 

 

이 책을 들고 읽어나가면 굉장히 기독교인으로 보이나보다. 

 

 

신흥종교인들이 갑자기 날 흐뭇한(기분나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고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갑자기 종교와 영성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시작한다. 하기사 나도 이 책은 집어서 욥기를 펼쳐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알고보니 이 책을 쓴 사람도 욥기에서부터 시작했다더라. 혹시 내용이 궁금하면 실험삼아 그쪽부터 읽어보는 게 좋겠다.

 

이미 야훼 모에화 짤은 올렸으니 다른 짤을 올려보겠다. 사진은 루시퍼 모에화 짤이라고 한다. 단순한 모에화니 루시퍼가 여자인가 아닌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여기서 하지 마시길 바란다.

 

욥보다 더 불쌍한 인물이 난 예레미야라고 본다. 나는 처음엔 그가 멀쩡했다고 본다. 단지 다른 어떤 예언자들보다 굉장히 감정적인데, 사람들이 하느님을 너무 적극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하고 예언자들을 싫어하니까 살짝 스트레스를 받아 고어에 흥미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요한 계시록의 수많은 암시들을 생각해 보면 사실 예레미야가 본 환상과 그렇게 다르진 않다. 스케일이 다를 뿐이지. 예레미야가 자신을 때리고 기둥에 매달았던 어떤 인간에게 한 조롱을 군중들이 예레미야에게 그대로 한다. 그래서 역대 성경 중에서 가장 소설같은 면이 있다. 그렇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감정적인 사람이라 하느님과 대화하는 장면에선 왠지 모를 시적 미학도 돋보인다. 지금은 예레미야 편을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편이다.

개인적으로는 바울이 제일 웃기고 골때린다고 생각이 든다. 감옥에서 글을 써서 그런지 말하는 게 점점 공상에 가까워지고 앞뒤 내용이 맞지 않는다. 그나마 인상깊은 글에서 좀 정상적인 글을 올렸는데, 그 이유는 정말로 저 글귀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긴 남이사 뭐라던 어떤 일에 목숨을 바치며 열심히 종사했다면 결국 보람찬 일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진정 자신의 일이 어떤 사람에게 이득이 되는가에 대해선 깊이 통찰해볼 일이다. 에세이는 그것에 대해서 특히 강조하고 있다.

 

로마 제...... 아니지, 다시 말해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와 세상의 모든 왕들이 단 한 번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을 멸하기 위해 아마겟돈으로 알려진 전쟁터에 모입니다. 바로 이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으로 돌아오십니다. '반지의 제왕'처럼 백마를 타신 채 손에 검을 높이 드시고는 하늘나라에서 달려 내려오십니다.

 

 

 강달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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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친과 문학이론 현대의 문학 이론 29
여홍상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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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좀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바흐친의 '다중 언어성'에는 '모든 고정되고 지배적인 형이상학적 기표들을 탈중심화하는' 급진적이고 해체적인 운동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이른바 탈구조주의의 이론적 모티프를 선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 테리 이글턴, 축제로서의 언어(여홍상 편역 바흐친의 문학이론)는 이런 측면에서 흥미로운 통찰을 보여주지만, 이글턴은 바흐친 이론의 전복적인 활력을 마르크스주의적인 '민중주의'로 환원하려는 시도를 일관되게 보여준다.- <이토록 사소한 정치성> p. 244

 

 

사진은 이 책의 저자들 중 하나인 테리 이글턴. 

 

 

바흐친이 무려 실제 존재하던 친구들의 가면을 쓴 이유는 이건가.
바흐친: 종교에 대해 특이한 관점을 가진 걸 숨긴 채로 책 출간 가능함(볼로쉬노프), 공산당 타이틀을 얻음으로서 안정적인 독자 확보(메드베제프)
&
볼로쉬노프: 바흐친의 필력으로 그나마 무명이던 이름이 세워질 수 있음.
메드베제프: 바흐친에 대해선 뭘 하는지 몰라도 걍 뭔가 잘난 척을 할 수 있음.

 

가만 있어봐 이거 진짜 천잰데?

바흐친은 사회의 다른 계층으로부터 다른 목소리들을 표현한다는 것은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을 하나의 장르로서 취급할 수 있는 어떤  확실히 여성이 쓴 소설과 남성이 쓴 소설은 구분이 확 가는 경우가 많다. 여성이 쓴 소설에서 나오는 남자는 굉장히 매력적이라던가, 남성이 쓴 소설에서 나오는 여자는 어딘가 사람 같지가 않다던가.

여성주의와 대화론이라는 논문이 여기 나오는 바흐친에 관한 그 어떤 논문과 견주어 보더라도 가장 빨리 읽히는 페이지 터너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왜냐면 이 논문은 어떻게 워마드가 실패하여 넷상 고대 유물로 사라져 가는지에 대한 과정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워마드의 미러링은 남성들의 행태를 고발하는 데엔 획기적이었다. 그러나 '여자의 언어'에 너무 신경을 쓰거나, 혹은 남성들을 따라하는 데 너무 집착한 나머지 아무 언어도 쓰질 못했다. 결국 자신들의 언어를 창조해보기도 전에 매우 남성적이라 할 수 있는 평론가들에게 윤리적으로 공격받을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지금은 옛날 이야기가 된 것 같지만 이전에는 여성이 썰을 푸는 걸 '소설 쓴다'고 했었다. 오히려 지금은 남성들에게 소설적인 것마저 빼앗기는 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바흐친 거의 두세달 넘게 읽고 있는 듯한데, 소감은
"아, 철학책은 읽다가 도중에 쉬면 진짜 진도 안 나가지는구나." 였다.
지금은 완전 바흐친의 책에서 인용할 구절들을 찾아가면서, 텍스트를 따라간다... 정도로 집중력이 많이 딸리고 있다.
그나마 반 이상 읽었고, 3분의 2쯤 지나서 이렇게 된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철학책이 다 이런진 모르겠는데 처음 3분의 1도 사실 많이 버겁긴 했다;;; 왜 스탈린 등을 마르크스주의라고 하는지 좀 이해가 안 갔달까;; 그나마 제일 많이 건졌다 싶은게 중간의 글들이고.

300페이지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해가는 실망감. 소설이 뭐가 어쨌다고 그렇게 공격하시나. 그럼 철학서 저자들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쓴 거 그대로 이루고 계신가? 충격적인 건 괴테조차도 소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썼다는 점이다. 아니 저기요 님이 쓴 것도 소설이거든요 ㅋㅋㅋ? 루카치는 문제적 주인공이 세상과 싸우는 장면이 등장하면 괜찮다고 말했다는데 솔직히 좀 꼰대같다. 새삼 바흐친이 위대하게 보여지긴 하다. 저렇게 소설에 대해 아무 말하는 시대에 소설과 대화를 옹호했다니 거의 선지자같은 역할을 한 듯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없다던 사사키 아타루와는 달리 이 책, 특히 바흐친과 현대 소설의 담론이라는 챕터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상당히 명백하게 밝히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그런데 주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가 아니라, 실험적인 요소와 시장지향적인 요소가 소설에는 어느 정도 섞여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의 의도대로라면 아마 이 논문은 당연히 포스트모더니즘은 있으며, 미래엔 리얼리즘과 같이 모두가 섞일 가능성이 있다고 귀결이 나리라. 그리고 그 이론을 뒷받침하는 건 바흐친의 축제이다. 모더니즘이 죽은 건 아닌 채로 포스트모더니즘은 확실히 존재하는 듯하다.

 

시간 속의 모험은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한 초보적 방법으로 간주되지만, 싸구려 소설이나 연재 만화, 혹은 람보나 잃어버린 방주의 특공대 같은 영화들, 그리고 수많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계속해서 등장한다. 왜 이러한 고대 시공성이 여전히 그토록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하는 것은 사회학적으로나 정신분석학적으로 크게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그러한 시공성은 행위와 사건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하기에는 그다시 생산적이지 않은 듯하다. 어떤 문화이건 이런 종류의 잔재를 많이 갖고 있을 것이다.

 

 확실히 새로운 의견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시간여행은 너무 진부한 주제긴 하죠. 근데 리제로나 슈타인즈 게이트 열광을 보면 또 그렇지 않은 거 같고. 솔직히 후자는 왜 떴는지 이해가 가는데 전자는 이해가 안 갑니다. 막장드라마라서 그러나?

 

 

근데 리제로나 슈타인즈 게이트 열광을 보면 또 그렇지 않은 거 같고. 솔직히 후자는 왜 떴는지 이해가 가는데 전자는 이해가 안 갑니다. 막장드라마라서 그러나?

 

  

P.S 바흐친과 문학 이론에서 바흐친의 글 인용한 부분만 모음.-> http://vasura135.blog.me/221033277789

솔직히 이 중에 마음에 드는 한 글귀만 인상깊은 구절에 올리려 했으나 어느 하나를 정확히 고를 수 없더군요.

마지막에 바흐친이 연극에 대한 언급을 한 부분? 은 뺐습니다.

역시 바흐친 씨는 소설만 언급하셔야 바흐친 씨 답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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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시즘
프란체스코 알베로니 / 강천 / 199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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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울 때는 연애가 시작되는 때라고 보아도 거의 틀리지 않는다.

 

 

여자가 계산을 한다고 착각하지 않길 바란다.

 

여자도 남자가 전부일 때가 있다. 그러나 그녀에겐 타오르지 않았던 과거가, 남자는 잊어버린 과거가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천천히 타오르기 때문에, 항상 사랑의 마지막에는 재가 남는다.

 

 

남성이 느끼는 성적 욕망은 여성에 비해 상당히 제한되어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성은 여성이 자신과 똑같이 욕망을 느끼는 방식을 체험하길 원하거나 생각하며, 그래서 동인지에 나오는 여성의 자위는 거의 언제나 무언갈 넣는 행위로밖에 표현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여성들은 마스터베이션 말고도 욕구를 충족시키는 여러가지 방법을 알고 있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향수나 구두나 가방에 오르가즘 비슷한 걸 느끼는 여성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그들처럼 되려 노력하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란 점을 책에선 분명히 하는 듯하다.

여성은 보통 남자가 자기 자신을 봐주길 원한다. 설령 자신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며 남자는 낚인 물고기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녀는 아이돌처럼 무대에 오르길 바라고, 적어도 한 명의 남자가 자신을 쳐다봐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남자는 대체로 말을 거는 걸 귀찮아한다. 그래서 여자는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서 남자가 자신을 봐주기 위한 모든 적극적 수단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가 귀찮아서 그런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자는 이 때부터 머릿속에서 추리소설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결국 남자가 지쳐서 그녀 곁을 떠나려 할 때쯤 그녀는 자신에게 보여지는 모든 권태의 징조를 복잡하게 꼬아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러다 결국 그 모든 서툰 추리가 거짓이었음을, 남자가 고난이도의 사랑(?)을 주작하기엔 너무 단순함을 발견했을 때 여자는 분노하여 남자의 무직이라거나 발기부전이라거나 하는 약점들을 캐내어 공격하면서 헤어질 이유를 찾는 것이다.
는 내가 고딩시절 읽었던 할리퀸 소설 내용임.

그러나 이 책에 의하면, 피부로 성감대를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한다 해서 남성들을 열등하다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여성은 느끼는 종류가 많기 때문에 어떤 남성에게서 풍기는 카리스마를 성적 매력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남성은 보통 보스(종교의 장, 회사 상사)의 매력과 여성의 매력을 확실하게 구분할 줄 알기에 스캔들이 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여성들이 보스에게 정신적 숭배와 함께 몸을 바친 탓에 인생이 파탄난 경우는 자주 볼 수 있다. 물론 사랑은 죄가 아니지만 성애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 탈 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여성이 딸리다는 걸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렘이 스토리상 예쁜 여자를 가진 남자를 사랑하는 대표적인 예이기 때문에 올렸으며 예쁜 거 쫓는 건 한결같은 남자의 특성을 매우 실천적으로 대표하는 사진이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거세를 끝낸 후에도 유독 불안이 심한데 상대방을 너무 사랑해서 자신이 주는 만큼 달라는 여성의 보챔이 강해질 때가 있다. 그게 보통 남성들에게는 공포로 다가오는가 보다. 그래서 요새 공포스런 동인지에서는 남성을 (실제로) 거세시키는 여성이 많이 나오며 이를 캐릭터화한 게 얀데레이다. 사실 이들의 걱정을 덜어주는 데 성공하여 분노를 없애고 나면 이토록 지고지순한 사랑이 없다. 그러니까 메가데레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앞뒤과정은 생략하고 후반의 메가데레나 초반의 라이벌 여성들을 제압하는 여성이 좋다고 하는 남성들이 의외로 많다. 참 그렇게들도 여자를 모르니 통탄할 일이다... 그 분들하고 사귀시는 여성들은 정말 인내가 대단하신 것이다.

생각해보니 사드는 소설을 썼다고 이야기하면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는데, 바타이유는 철학에서 연애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니 용서받을 수는 없겠다. 혼전 성관계로 애가 생길까봐 전전긍긍하는 커플들이 얼마나 많은가. 까딱 잘못하면 새로 생성(...)될 판에 에로티시즘이 죽음이라니 너무하신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철수에서 이야기했듯이 결혼을 해서 애를 낳지 않았으니 저런 소리를 쉽게 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아니면 책임감이 없던가.

 

 

 

 

계속 제복 관련 논란이 나오니 에리치카 제복 스페셜 사진을 올려봤다. 남자들은 누드를 더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스타일 좋은 사람이 제복을 입은 모습도 꽤 좋지 아니한가<- 

 

남자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는 중이다. 남자들이 나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사실을 안 게 7이라면 내가 남자들을 이해하지 못했구나 깨닫는 게 3 정도인 듯하다. 심지어 남자가 강간을 당하는 건 여자가 강간을 당하는 기분과는 큰 차이가 있으며 섹스 자체로 당하는 게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당한다는 견해는 참으로 지당한 듯하다.

 

 

 

확실한 예를 들자면 이성애 남자들의 이상향 하렘은 아이마스고 지도자(P)적인 남자 한 명에 다수의 여성이 들러붙음. 

 

일대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우정과 사랑을 분간하기가 어려운 건 러브라이브. 그래서 아이마스는 가능한 한 많은 여자가 있는 편이 좋고, 러브라이브는 1학년 셋 2학년 셋 3학년 셋이 이상적인 것이다. 하나면 쓸쓸하고 둘이면 커플결성 가능성이 너무 높아지니까.

 

 

책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일단 썸을 탄다. 나는 상대방에게 선망이나 호의를 품게 되며 이는 연애라고 볼 수는 없지만 징후라고 볼 수는 있다. 구체적인 사랑으로 대상을 고려하게 되면 증오도 깊어진다. 상대의 한계점이 보이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슬픔을 자기 탓으로 보며, 이를 억울기구라고 한다. 여자는 남자의 상한 기분을 다른 일 때문으로 돌리며, 이를 박해기구라고 한다. 그런데 억울기구가 과잉부담되어서 사라지게 될 때 공격은 사랑의 대상에게 향할 수 있으며, 이는 생성과정에 들어가게 되는 인간의 상태이다. 각각의 요소가 완전히 재구성되며, 이 때 사람들은 종교를 바꾸게 되는 등 개인적이지만 큰 변화를 겪는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사랑이 나타난다. 여기서 새로운 사랑은 내가 사랑했던 그 대상일수도 있고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탁월하게 숭고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좋다. 여기까지는 개인의 변화지만 쌍방의 연애는 두 사람이 서로 그런 상태에 있는 걸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전염이라 일컬여지기도 한다.

 

 

P.S 남자들은 보험?같은 잔머리 쓰지 않는다고 본다. 

 

물론 미래를 생각하고 여자 한 명 들여놓긴 하겠지만 이 남자놈들은 여자랑 같이 자는 것만 아니면 여자랑 모든 감정교류 다 하고 밥 다먹고 스킨십 다 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면 보험 아니고 뭐냐고? 정답은 '애완동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기분이 나쁠테니 예의상 보험?이라 하자. 이 나쁜 놈들은 보험?보다 더 이쁜 여자만 보면 정신이 나가서 넙죽거리고 굽신거리지만, 그것도 잠깐 뿐이다. 그러니 여자들이 할 선택지는 세가지가 있는데, 1번 그 남자의 전부를 수용하던가, 2번 싸우고 헤어지고 만나고를 반복하던가, 3번 그냥 그러고 살게 내버려두는 게 있다. 3번을 선택하면 좀 외롭긴 하겠지만 아무 슬픔 없이 살 수 있다. 그리고 이후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 그에 대비할 것.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만날 사람 다 만나. 그래도 괜찮아.'에서는 (너는 보험?이니 내가 맘이 내키면 갈 건데 좀 돈도 많이 벌고 이쁘게 하고 살아, 지금은 이유는 딱히 없는데 너 참 맘에 안 들어)라는 뜻이 있다. 이것도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남자 집 차려주던가, 다이어트하고 성형하고 화장 배워서 꾸미던가, 아니면 아예 만나질 말던가. 근데 아무리 그 남자 꼬시려고 고생해도 넘어갈지 안 넘어갈진 장담 못한다는 거. 이 세상에 예쁜 여자는 많고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며 남자는 어린 여자를 좋아하니까.

3번은 좀 수정할 필요가 있어서 더 써본다. 여성들이 남성들에 대해 저지르는 가장 나쁜 버릇은, 헤어질 때 남성에 대한 모든 추억을 곱씹으며 약점을 찾아서 헐뜯고 결국엔 그가 처음부터 나를 섹스토이로밖에 여기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만에 하나 그런 경우가 있을 수는 있으나, 다른 케이스가 있을 수도 있다. 그 땐 정말로 사랑했거나 혹은 사랑했다 생각했지만, 정말로 더욱 크게 사랑하는 상대가 찾아온 것이다. 남자도 안정된 애정을 갈구하며, 상대가 안정된 애정을 베풀기를 요구한다. 그저 그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뿐이고 다른 사람을 찾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요구가 과한 쪽이 있다면 서로 타협을 해 나가면서 맞출 필요가 있는데, 그러면서 애정이 확고해진다고 난 생각한다. 예전에는 시간과 거리가 사랑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좀 생각이 다르다. 뭔가 길게 말했지만 남자던 여자던간에 헤어진 이 인간이 처음부터 꽃뱀(제비) 혹은 나쁜 여자(남자)였냐 아니냐가 중요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1992년에 이 책이 번역되고 25년이 지났지만 이 책의 논리는 아직도 필요한 듯하다.

 

 

 

 게이나 폴리아모리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편인데, 특히 폴리아모리 쪽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는 편이다. 일단 레즈비언에 대한 글귀 중 마음에 드는 대목을 가져왔다.

 

레스비언끼리의 사랑은, 적은 수의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자기들이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나 모범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함에 의하여 성장하여 왔다. 베르린의 커뮤니티에 관한 여자의 말을 인용해 본다.
"동료의 한사람, 한사람이 다른 동료에게 나타내는 유순함과 보살펴 주려는 마음가짐은, 그대로 연인끼리의 관계에 해당됩니다. 우리들의 기분이나 느낌도, 서로 융화되어 있는듯한 느낌입니다. 그러므로 우정 같은 것과 섹스에 관계되는 것, 즉 신체에 관한 것을 엄밀히 분간하기는 어렵겠지요. 우리는 서로의 몸을 부드럽게 다룹니다...... 그러한 부드러움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 상대와 연애관계를 맺지 않고, 4년간 거기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에 대하여 고민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따뜻함에 관한한 부족한 것은 없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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