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마이페이퍼 당선작

라울 뒤피(Raoul Dufy) - 페넬로페
2023년 5월, 한가람 미술관에서 ‘라울 뒤피전(展)’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뒤피는 내게 생소한 화가였다. 검색해보니 뒤피는 1877년 프랑스 르아브르에서 태어나 1953년에 생을 마감한 작가였다.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겪은 사람이겠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그 당시에 워낙 유명한 화가가 많았는데 ‘뒤피의 그림은 어떨까?’라는 호기심도 생겼다. 직접 본 뒤피의 그림은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면서도 특이했다. 그림에서 받는 느낌이 독특해 생각보다 뒤피의 그림 앞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림뿐만 아니라 뒤피가 만든 작품이 ...

죽음과 소녀 - cyrus
대구 국제 오페라 축제가 올해로 20회를 맞이한다. 개막작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살로메』(Salome)다. 원작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쓴 동명 희곡이다. * 오스카 와일드, 오브리 비어즐리 그림, 임성균 옮김 《살로메》 (지만지드라마, 2023년)* 오스카 와일드, 정영목 옮김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민음사, 2009년)오페라 공연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공연 장소인 대구오페라하우스를 처음 가본 터라 예매표를 어디서 받는지 몰랐다. 살짝 마음이 움츠러든 채 건물로 들...

우리도 올리브나무처럼 - 자목련
우리 인생은 훨씬 크고 장엄하고 고귀한 것이다. 나 하나는 세계의 최소 단위이자 세계의 모든 것이기도 한 존재다. 희망의 단서端緖인 나 하나를 지켜내야 한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고 경외하고 함께 걸어가는 용기를 내야 할 때이다. 척박한 광야에서도 작은 올리브나무 하나가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으면, 그러면, 나무는 나무를 부르고 숲은 숲을 부르며, 다시 천 년의 사랑이 시작된다. 이런 시대에 작은 올리브나무 같은 나 하나로부터 우리 삶을 지키는 푸른 방패가 되고 소리 없이 세상을 지탱하는 푸른 기둥이 되어갈 것이니. 여기 천 ...

내가 걷고 내가 보는 수밖에 - 다락방
오늘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이 책의 이 부분을 읽다가 너무나 깜짝 놀랐다.태양의 서커스의 곡예사였던 테리 크바스니크Terry Kvasnik는 평생이 순간을 위해 훈련해온 것이 아닐까. 세 살에 체조를 시작한 뒤 30대가 된 지금까지 그는 브레이크 댄스, 무술, 파쿠르를 거치면서 꿈을 좇는 데 바쳤다. 그가 모페드(엔진이 달린 자전거)를 타고 시속 40킬로미터로 달릴 때였다. 앞에서 달리고 있던 승용차가 급정거했다.한순간에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었던 순간, 테리는 자신이 무엇을해야 할지를 본능적으로 알았다. 다행히 그는 자신의 ...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 나를 탐색한다. - scott
'오직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인류의 남녀를 비교할 수 있다. 인간은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1949년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 2의 성>을 출간 할 당시 프랑스 전체 사회를 뒤흔들며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이 책은 그동안 '여성은 자궁이다'라고 말해 왔던 프랑스 전체 지식인 계층을 넘어 오로지 남성의 시각만 반영 되었던 기존의 사회 법과 질서의 근간에 폭탄을 던져버릴 만큼 큰 파장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유럽 전역을 너머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그동안 여성이라는 생명체에 관해...

건강하게 오래 사는 법 - 단발머리
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우리 모두 다 안다. 다만 실천하지 않을 뿐. 매사에 게으르고 계획이 없는 편이라 ‘건강 관리’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기는 한데, 그래도 내 ‘건강 관리’ 노정의 기준점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 책을 꼽는다. <허영만의 동의보감>, 2013년에 읽었다고 알라딘이 가르쳐 주었다. 이 책의 주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다. 적게, 뭐든지 적게. 먹는 것, 말하는 것, 일하는 것, 듣는 것, 보는 것을 모두 적게. 물론 섹스도 적게. <질문 : 누가 더 오래 살까?> 1) 많이 먹고 ...

[페이퍼] 뮤지엄 산(山)에서의 안도 타다오의 시간(時間)과 공간(空間) - 겨울호랑이
완성된 <뮤지엄 산>은 지붕의 기복을 정교하게 사용하여 입구에서부터의 긴 산책로를 거쳐 뮤지엄 본관에 도착하며, 다시 그 앞에 스톤 가든을 배치한 직선 구조를 이루고 있다. 본관 건물은 세 개의 직육면체가 평행하게 비껴가게 늘어서고 또 하나의 직육면체가 비스듬하게 그것들을 연계하는 배치이며, 그것들의 결절점에 정육면체와 원통(실린더), 이른바 <안도적 입체>가 들어가서 명쾌한 기하학적 구성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동선을 이끄는 공간의 연쇄는 복합적이므로 높이가 달라지고 갑자기 개구(開口)가 열리는 등 ...

당신의 장바구니가 말해주는 것 - 잠자냥
어린 시절에는 어른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과 슈퍼마켓 같은 곳에서 함께 장을 보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어쩐지 즐거울 것 같았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몇몇 사람과 그런 경험을 공유했을 때 실제로 즐겁기도 했다. 처음에는.... 언제부터인가 함께 장을 보는 사람이 집사2로만 낙찰되었고, 집사2랑 장 보러 가는 게 고달픈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해서 최대한 대형 마트는 사람 없는 때를 골라 가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우리 둘 다 일하는 사람들이니 결국 사람 많은 시간을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을 때...

우정과 애도가 그 수면 위에 함께 놓여 있었다. - 유수
책의 부제로, 두 여성 작가가 나눈 7년의 우정이야기라 쓰여있다.우정이라는 말로 충분한가. 특히 이 책을 소개하기에 말이다. 얕고 상투적인 표현 같은데 대체할 만한 단어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사랑과 우정은 어떻게, 왜, 구분지어지기 시작했을까? 우정은 왜 우정하다,라고 쓸 수 없을까. 그런 걸 어렸을 때 궁금해했었다. 끔찍이 사랑하는 친구를 곁에 두고 속으로 따져보는 것이다.(음침쓰..) "너에 대한 나의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해?"에서 시작되는 질문들. 우리는 시스헤녀(그 땐 이 말도 몰랐지만)일 테고 그 사실만으로 이건 우...

다시 턴! - blanca
아직 서른다섯이 채 안된 아는 동생이 아직 다섯 살이 되지 않은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를 들었다. 익숙한 어려움, 낯익은 환희들, 피곤함 등이 떠올랐다. 대체 서른다섯이 되는 것은 어떤 느낌이었나,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서른다섯 살이 되던 봄" 에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있구나, 하고 깨달았던 것 같지도 않다. 스무 살의 봄은 생생한데 그 반환점의 기억이 흐릿하다니...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수명이 일흔여덟에서 여든이 되고, 여든에서 여든둘이 되고, 여든둘에서 여든넷이 된다. 그런 식으로 인생은 조금씩 길어지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이 시대의 필독서 - 구단씨
일상에서 ‘노 키즈 존’을 자주 보는 건 아니다. 여긴 시골이라 더 보기 힘들다. 그런데도 우연처럼 ‘노 키즈 존’을 발견하면 약간 안도하는 마음으로 가게의 출입문을 연다. 이렇게 말하니 누군가는 내가 아이를 싫어하니까 그런 거라고 말하던데, 아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아이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아이를 싫어하게 만드는 부모를 싫어하는 거였다. 실제로 며칠 전에 루프탑 베이커리 카페에서 있었던 일이다. 상당히 규모가 있는 곳인데,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위험이 있어 2층부터는 아이를 동반할 수 없다고 쓰여 있다....

경성의 산책자들 - 거리의화가
산책은 도시의 산물이다. 도시라는 공간이 생긴 뒤에 산책자들이 나타난다. 도시의 산책자란 근대라는 박물관의 관람자이자 탐색자라는 뜻을 갖는다. 산책자들은 어떤 도취감에 이끌려 도시 이곳저곳을 떠돈다. “오랫동안 정처없이 거리를 쏘다니는 사람은 어떤 도취감에 휩싸인다.” 그 도취감에 휩싸여 거리의 스펙터클을 감각적으로 흡수해버리는 것이다. 이때 대도시 거리는 그 자체로 방대한 문헌이고, 산책자는 그 문헌을 탐욕스럽게 연구하는 자다. - ⟪이상과 모던뽀이들⟫ P241얼마 전 한국 근대 문학가와 미술가의 삶을 담아낸 책을 읽으면서 오래 ...

중산층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 닷슈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정말 수작이다. 처음 봤을 때도 좋았지만 가끔 TV로 재방을 봐도 눈을 떼기 힘들다. 영국의 한 탄광 마을 소년이 마초적 분위기 속에서도 하라는 권투는 안하고 춤에 눈을 떠 마침내 런던으로 진출해 프로 발레리노가 되는 자전적 이야기다. 명화들이 그렇듯 이 영화는 영국 현대사의 갈등 국면도 놓치지 않는데 바로 빌리가 사는 마을이 탄광촌 더럼이라는 사실이다. 아버지와 형은 광부고 빌리가 사는 마을 집들은 하나같이 비슷하게 생겼다. 막 집권한 대처 정권은 탄광을 정리하고 있었고 경찰력을 동원해 파업을 무력 진압했다....

그림으로 보는 시대 모습과 사상 - 북다이제스터
크리스 오필리 <성모 마리아>(1996)오필리는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의 종교 상징물에서 영감을 얻어 성모 마리아를 강렬하고 관능적인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마리아를 흑인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서양 미술 관습에 대한 도전입니다. 작가는 사회적 규범에 도전하고자, 포르노 잡지에서 오려낸 여성 성기 모양을 아기 천사인양 성모 마리아 주위에 배치함으로써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함께 표현했습니다.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알랭 드 보통(1969~ )은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우리는 틀에 박힌 일상을 보내기에 우리 ...

세 번째 읽는 일리아스,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 그레이스
알베르토 망구엘은 말한다.“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우리에게 친근한 존재이다. 우리가 첫 페이지를 열기 전까지는 말이다.(『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 알베르토 망구엘 15p)” 우리는 이 트로이 전쟁에 관하여 많은 정보를 갖고 있어서, 이 일리아스라는 서사시 안에서 신화나 예술작품을 통해 익숙한 ‘파리스의 심판’, ‘트로이의 목마’, ‘라오콘의 죽음’ 등과 같은 사건들을 만날 것이라 예상한다. 그러나 이 서사시 안에서는 그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트로이 전쟁이 시작된 지 10년이 지난 시점, 5일간 전투 이야기다. 『일리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