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느리게 가는 마음(윤성희, 창비. 2025. 264쪽)
: 조용한 단편집. 이 작가 특유의 차분한 톤이 좋다. 전작도 그랬지만 이 작가의 단편을 읽으면 가만히 앉아서도 멀리 다녀온 거 같다. 힘들여서 어딘가를 걷거나 한 게 아니라 - 「 자장가」에서처럼 - 내 영혼이 둥실 떠서 가벼이 내려다보고 온 느낌. 예쁜 문장을 예쁘게 말하는 인물들 덕분에 위로 받았다.
2.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프로데 그뤼텐, 손화수 역. 다산책방. 2025. 280쪽)
: 평생을 피요르 해안의 페리 운전수로 살아온 닐스 비크. 오늘도 평소처럼 일어났지만 매트리스를 밖으로 끌어다 불을 놓는다. 그리고 자신의 페리로 가서 운전을 한다. 오늘의 승객들은 여느때와 다르다. 닐스의 평생에 걸쳐 페리에 올랐던 수많은 사람들 중 이미 세상을 뜬, 기억에 남는 사람들(과 개 한 마리). 닐스는 천천히 운전을 하며 그들과 대화한다.
누구에게나 올 그날이 오면, 난 닐스처럼 고요할 수 있을까. 처음엔 승객들의 정체를 몰랐고 가장 먼저 탄 루나가 말을 할 수 있는 건 닐스의 상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욘이 타고나서야 알았다. 루나의 동행이 닐스를 위해서는 좋았는데 내겐 루나같은 동행이 없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 슬펐다. 하지만 닐스의 삶을 생각하면, 이 모든 이야기는 슬프면서도 기뻤다. 닐스의 마음 속에 남은 이들이 차례로 그의 배에 오르는 건 닐스에게는 삶의 마지막 날에 주어진 합당한 보상 같은 게 아니었을까. 닐스가 이 모든 이야기를 한평생 차분히 끌어안을 수 있었다는 게, 그리고 마지막으로도 조용히 물을 건널 수 있다는 게 어쩌면 축복일 것이다. 내 마지막 날도 닐스만큼만 되었으면.
3. 버터밀크 그래피티(에드워드 리, 박아람 역. 위즈덤하우스. 2025. 416쪽)
: <흑백요리사>는 안 봤지만 저자가 워낙 여러 프로그램에 나와서 알고는 있었다가, 도서관 신착 도서 코너에 이 책이 있길래 집어들었다. 원래부터 요리 에세이를 종종 읽기도 했고. 이 책은 저자가 미국 음식 중 '소울 푸드', 즉 남부의 음식들을 기반으로 가장 미국적인 음식을, 미국 음식의 기원과 정체성을 찾아 약 2년 동안 여행을 하며 지역의 음식을 맛보고 배운 이야기이다. 레시피가 각 챕터 마지막에 실려 있긴 하지만 요리책은 아니다. 저자는 자신이 이민 2세대로서, 그리고 요리사로서 미국 음식의 영혼을 이민자 음식에 기원한다고 생각하고, 각 지역의 이민자 커뮤니티를 찾아 그들이 모국에서부터 가져와 지금까지 현지화해 가며 고수하고 있는 음식들을 탐구한다. 물론 그 탐구는 음식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음식에는 당연히 그들의 삶의 역사가, 이야기가 녹아있기 때문. 저자가 숙취를 머금은 채 찾아가는 따뜻한 베녜(도넛) 가게, 초면이지만 욕심껏 들이대서 얻게 된 비밀스런 모로코 전통 버터 '스멘'을 만드는 방법, 얼결이지만 진지하게 참석한 라마단과 해 진 후의 첫 식사.
저자의 여정을 따라가며 여러 번 허기를 느꼈는데 이건 단순히 위가 비어서 생기는 배고픔이 아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고 혀에 그 음식을 올려 두고 싶었다. 길고도 길었던 그의 여정이 끝나는 게 어찌나 아쉽던지.
4. 죽음을 걷는 여자(메리 피트, 최호정 역. 키멜리움. 2025. 240쪽)
: 말렛 경정과 의사 피츠브라운, 존스는 한 순경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작은 마을의 묘지에 방문한다. 장례식을 마치고 나오던 중, 커다란 화환을 든 두 명의 노부인을 보게 되고 그들이 묘지의 큰 대리석 조각 앞에 헌화를 하는 걸 목격한다. 마침 배럿 목사의 초대로 목사관에서 차를 마시게 된 그들은 배럿 부인에게서 특이한 문구가 새겨진 대리석 무덤과 그 무덤에 묻힌 아버지 랠프 드 볼터와 아들 레너드, 그리고 두 자매 린디와 애런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랠프와 레너드가 6개월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고, 린디와 애런이 낡은 저택을 떠나지 않고 둘만 살게 된 이야기는 배럿 부인의 어머니인 루시가 린디의 절친이었던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 랠프는 자식들은 영국의 기숙 학교에 맡겨둔 채 아내와 식민지 생활을 하다 아내가 죽자 귀국하고 자식들을 집으로 불러들인다. 하지만 10대인 두 딸의 교육이 걱정되어 지인에게서 소개를 받아 메리 데이질이라는, 살인자를 어머니로 둔 여성을 딸들의 가정교사로 들이게 된다. 선입견과는 다르게 청초한 아름다움을 가진 메리에게 반한 랠프. 그는 메리와 재혼을 결심한다. 한편 린디는 오빠 레너드의 친구인 존과 약혼한 사이다.
이 시리즈는 늘 재밌다.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스릴러들보다 덜 잔인하면서도 당대의 사는 이야기가 더 깊이 들어 있기에. 사실 범인은 초반에 잠깐 의심했던 그 사람. 그래도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에는 의심의 화살을 계속 다른 사람에게 돌리게 될 정도로 작가의 솜씨가 유려했다. 결국 자매는 스스로를 감옥에 가둘 수 밖에 없었겠지. 사실 내가 이야기 속에서 내내 미워했던 사람이 범인이 아니라는 게 좀 당황스럽기는 했다. 그리고 더 싫어했던 사람이 속 시원히(?) 죽지 않았다는 것도. 이 시리즈도,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계속 출간됐음 좋겠다.
5. 시체 옆에 피는 꽃(공민철. 책과나무. 2019. 408쪽)
: 추리 단편집. 첫번쨰 작품이 너무 뻔해서 흥미를 잃은 채로 읽었다. 제목이 스포인데, 기시감이 강했다. 심지어는 미드 <가십걸>에도 비슷한 에피가 있지 않나? 두번째 작품도 TV 단막극에서 본 듯힌 내용. 세번쨰 작품은 추리소설이라기엔 좀 부족하고 네번쨰는 그나마 추리할 거리가 있긴 하지만 승강기 점검과 도둑, 추락사라는 키워드만으로도 사건의 전말이 짐작될만큼 뻔했다. 그러다 <가장의 자격>에서는 작가에게 정 떨어졌다. "여자는 나이를 먹으면서 여우 꼬리가 하나씩 생긴다(219쪽)" 면서 정작 도촬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아들은 순진하고 낭만적인 취미를 가진 걸로 서술하다니. 그나마 다음 작품에서 약간 반성을 하긴 하더라.
전반적으로 톤이 올드한데 그에 비해 문장이 정제되지 않고 허술하다. 문장력이 탄탄했다면 올드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작품들이 더 짜임새있게 느껴졌을텐데. 아쉽다.
6. 데드 스페이스(칼리 월리스, 유혜인 역. 황금가지. 2025. 384쪽)
: 헤스터 말리는 자원 개발 거대기업인 파르테노페에서 보안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잡범이나 잡으며 일해서 받는 돈으로는 초라한 방과 헐한 음식밖에 먹을 수 없고, 몸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공기관은 점점 속을 썩인다. 사실 헤스터는 타이탄의 환경을 연구하기 위한 우주선 심포지엄호에 탑승했던 인공지능 전문가였다. 하지만 선내 테러로 심포지엄호는 폭발하고, 마침 근처에 있던 파르테노페 화물선에 의해 구조되어 손상된 신체를 인공기관으로 교체하는 수술을 받고 살아남지만 천문학적인 비용을 파르테노페에 빚지고 노동으로 갚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 인공지능 분야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선택지가 없었던 헤스터에게 어느날 과거 동료였던 데이비드가 메시지를 보낸다. 그답지 않은 연락과 알쏭달쏭한 내용에 헤스터는 의문을 갖는데, 갑자기 그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온다. 헤스터는 그가 시스템 관리자로 일하던 소행성 니무에로 향한다.
전문용어가 꽤 많이 나오긴 하지만 스토리 따라가는 데에는 문제 없다. 솔직히 190 페이지까지는 꽤 지루했는데 그 지점이 지나니 흥미진진해졌다. 거대한 음모야 대강 짐작 가능했고, 먼 미래에도 정경유착과 거대 자본의 횡포, 가난한 자들의 희생이 당연시되는 암울한 사회를 예견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많이 우울했지만 한편으로는 인공지능 뱅가드의 사랑스러움에 울컥하기도 했다. 김초엽이나 천선란을 읽을 때도 느낀 거지만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다한들 누구나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인간성의 말살은 가속화되어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은 더 비참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면 과연 과학의 발전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7. 게으른 작가들의 유유자적 여행기(찰스 디킨스, 윌리엄 윌키 콜린스, 김보은 역. 북스피어. 2013. 216쪽)
: 두 저자를 닮은 두 명의 신사가 영국 시골을 여행하는 이야기. 디킨스의 문예지에 연재하던 두 작가의 합동 작품을 출간한 것이라 한다. 사실 진짜 유람기라기에는 관련 에피소드는 초반의 등산 이야기밖에는 없고, 나머지는 여행 중 여관에서 들은 유령 이야기. 게다가 그 이야기도 사실은 다른 책에서 이미 읽은 이야기이긴 했다. 그래도 좋아하는 두 작가가 같이 글을 썼다는 게 좋아서 열린 마음으로 편하게 읽었다.
8. 고사리의 생존법(한수언. 서유재. 2021. 248쪽)
: 처음 읽는 작가의 단편집. 처음에는 문장이 다듬어지지 않고 부적합한 단어가 곳곳에 사용되어서 별로였는데 - 예를 들면, <도와줘, 공세리>에서 사고를 당해서 신체를 개조해 돌아온 세리 이야기를 하며 '생전에도'라는 단어를 쓴 것. 세리는 엄연히 살아있는데, 몸의 일부를 사이보그로 개조하면 죽은 거라고 보는 건가? - 내용이 좋아서 점차 문장은 덜 상관하게 되었다. 사실 문장 뿐 아니라 이런저런 면에서 디테일이 부족한 게 가끔씩 거슬리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작가의 중심이 잘 서 있는 듯 해서 앞으로도 이 작가의 작품은 계속 읽어볼 생각이다. 가장 재밌었던 건 「피바람 몰아치고」.
9. 핸디맨(프리다 맥파든, 조경실 역. 북플라자. 2023. 352쪽)
: 어릴적, 물리치료사였던 노라의 아버지는 집에 오면 자주 지하실에서 목공 작업을 했다. 늘 잠겨있던 그 문 안쪽에서 들리던, 목공 작업과는 다른 수상한 소리. 어느날 학교에서 교장실에 불려간 노라는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실종됐던 젊은 여성 맨디 요한슨의 시신 뿐 아니라 그간 실종됐던 여성 열 일곱 명의 잘린 손이 발견되어 부모님이 둘 다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할머니의 집에서 살며 할머니의 성으로 바꾼 노라는 의사로 성장하고, 이제는 외곽의 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메주 집으로 배달되는 아버지의 편지는 뜯지도 않고 찢어 버리며. 그런데 노라의 환자들 중 젊은 여성들이 하나 둘 실종되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잘린 손목이 발견된다.
노라가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나 크게 공감되어 차라리 노라가 살인범이길 바랐다. 범인은 짐작할 수 없었지만 뒷부분에서 설마 하긴 했다. 그치만 작가의 필력은 곧 내 의심을 다른 인물에게 돌렸지. 진짜 잘 쓰는 작가다.
얼마나 인간답게 사느냐는 결국 자신의 의지가 결정하는 것. 타고난 악함을 자각했다면 끊임없이 자신을 설득하고 달래야 한다. 작가는 계속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이 작품 뿐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도. 스토리며 문장력, 구성까지 모두 탄탄하고 치밀하지만 내용이 은근히 스트레스를 줘서 당분간은 이 작가 그만 읽어야겠다.
10. 오스카 와일드에 대하여(앙드레 지드, 이효경 역. 글항아리. 2015. 120쪽)
: 앙드레 지드가 오스카 와일드에 대한 추모의 마음으로 쓴 글과 그 이전에 와일드의 글에 대한 감상을 적은 글이다. 길지 않은 글이고, 사실 지드와 와일드도 엄청 친분이 두터웠던 것도 아니지만 지드가 가진 애정이 보여 마음이 아렸다. 사실 와일드 작품의 뛰어남과는 별개로 와일드의 삶은 늘 짠한 느낌인데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게 21세기의 독자(나)뿐 아니라 당대의 동료 문인도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기도 했다. 글 자체도 물론 훌륭했고.
11. 우먼 인 스펙트럼(배예람, 이수현, 아밀, 김수륜, 진산. 안전가옥. 2023. 350쪽)
: 여성 이야기 앤솔러지. 작가들이 다 낯설었지만 편하게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다섯 편 모두 좋았다.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고. 첫번째 작품인 「수직의 사랑」이 가장 좋았지만 「협탐」 또한 그간 읽어본 장르가 아니어서 신선했다. 「누가 진짜 언니일까?」는 내용면에서는 기시감이 있었고 제목 또한 너무 직설적이어서 아쉬웠지만 작가의 필력은 괜찮은 거 같아서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됐다. 「여우 구슬은 없어」와 「하나뿐인 춤」도 세계관이 독특해서 맘에 들었다. 정말 다 좋았던, 근래 드물게 만족스러웠던 앤솔러지.
12. 밤의 살인자(라그나르 요나손, 고유경 역. 북플라자. 2017. 292쪽)
: 작은 마을에서 근무하는 경찰 아리 토르와 헤르욜푸르. 아리 토르의 독감 때문에 대신 근무를 하게 된 헤르욜푸르는 제보를 받고 마을 폐가에 갔다가 총에 맞아 쓰러진다. 아리는 헤르욜푸르의 아내 헬레나의 전화를 받고 찾아나섰다가 그를 발견한다. 곧 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본청에서 아리 토르와도 친분이 있는 형사 토마스를 파견한다.
(스포)
아리 토르도 토마스도 별로 호감가지 않아서 시큰둥하게 읽었다. 그닥 능력자인 거 같지도 않고 무턱대고 들쑤시고 다니기만 하고. 그런데다 역시 비호감이긴 했지만 엘린이 사건에서 엘린이 부상당했음에도 병원 이송을 막으면서까지 심문을 하는 데서 정이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은 건 범인을 가여워하는 거. 그래, 범인도 불쌍하고 동기도 공감되지. 근데 엘린만 할까? 겨우 폭행범에게서 도망쳤는데 그가 다시 내 집에 숨어든 걸 발견했을 때의 공포감을 아리 토르는 물론이고 작중 누구도, 저자조차도 모르는 거 같아서 진짜 별로였다.
13. 모두가 나를 죽이려고 해(천지수. 닥터지킬. 2024. 352쪽)
: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밤, 홍천군 119센터에 화재 사건이 접수된다. 화재 장소인 펜션에 도착한 구조대는 기둥에 묶여 불타고 있는 시신 한 구와 진흙 바닥에 끌려다닌 듯한 모습의 시신 한 구, 그리고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여성 한 명을 발견한다. 생존자는 거대 사학 재단 이사장의 딸 마리. 한동안 코마였던 마리는 기적적으로 깨어나고, 사건의 전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동생 마령과 이사장인 엄마에게 앞으로 좋은 언니, 딸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마리는 혼란스러워진다.
사실 소설에서, 그것도 국내 소설에서 유력 사학 재단 등이 나오면 흥미가 식는 편이라서 심드렁했는데, 이 작품은 마리의 심리 변화 묘사가 상당히 촘촘해서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마음을 따라갈 수 있어서 계속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모든 일들이 다 마리를 중심으로 마리의 시각에서 서술되어 독자는 당연히 마리의 편에 선 상태로 사건을 바라보게 되는데 이런 시점의 선택이 한 수였던 듯. 또한 마리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과거가 한꺼풀씩 드러나는 것도 이야기에 흥미를 잃지 않도록 독자의 시선을 계속 붙잡아 두었다. 물론 이야기 속 진실의 찜찜함과 안타까움은 독자의 몫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14. 눈물상자(한강. 봄로야 (그림). 문학동네. 2008. 71쪽)
: 어른들을 위한 동화. 옛날 어느 마을에 잘 우는 아이가 있었다. 엉엉 우는 게 아니라 맑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아이. 아이는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행복한 것을 보아도 눈물을 흘렸다. 비를 머금은 바람이 뺨을 스치거나 이웃이 쓰다듬어 주어도 눈물을 흘리는 아이를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에 한 남자가 찾아와 아이가 가진 특별한 눈물을 보고 싶다고 하지만 정작 아이는 눈물을 흘릴 수 없다. 늘 울게 했던 노을을 보아도. 떠나려는 아저씨를 따라가기로 한 아이. 아저씨는 자신이 모은 눈물상자 속 눈물을 몽땅 사겠다고 한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아마도 울지 못하는 어른들을 위한 작품이겠지만, 난 혼자서 매일매일 잘 우는 어른이라서...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나도 어릴 때, 아니 이 책의 아이보다는 많이 컸을 때 별거 아닌 일로 울먹인다고 엄마한테서 짜증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가 창문 너머로 자기 없이도 하하호호 즐거운 가족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동화답게 해피엔딩이었고, 엔딩이 나를 위로해 줬다.
15. 철로 된 강물처럼(윌리엄 켄트 크루거, 한정아 역. RHK. 2016. 468쪽)
: 1961년 미네소타 주 뉴 브레멘. 열세 살 프랭크는 한밤중의 전화 소리에 깬다. 목사인 아버지가 경찰서에 가는 길에 따라 나선 프랭크와 동생 제이크. 술에 엉망으로 취해 싸움을 벌인 삼촌-사실은 삼촌이 아니라 아버지의 참전 동료-거스를 데리러 가는 길이다. 거스는 얼마 전 철길에 앉아 있다가 기차에 치여 죽은 프랭크의 동급생 바비콜을 흉보는 말을 한 건달 모리스 엥달과 싸움을 벌인 것. 프랭크는 제이크와 집까지 걸어오겠다며 모리스의 차에 화풀이를 한다. 프랭크의 가족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엄마 루스와 역시 음악적 재능을 가져 새학기에 줄리어드 음대에 진학할 예정인 누나 에이리얼이 있다. 에이리얼은 한때 엄마의 약혼자였던 마을의 재력가 집안 브란트 가의 일원인 에밀에게서 음악 교육을 받고 있고, 브란트 가의 장남 칼과 사귀고 있다. 프랭크는 어느날 누나가 밤에 몰래 빠져나가는 걸 목격하고, 에이리얼은 부모에게 줄리어드에 가기 싫다고 얘기한다.
형식은 미스터리이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과연 사람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이다. 무엇이 프랭크와 제이크를 성장하게 할까. 말을 더듬는다는 이유로 무리에서 놀림당하고 배척당하는 제이크가 청각장애와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리사 브란트와 누구보다 잘 지내는 모습, 칼의 비밀이 새어나갔을 때 마을 사람들의 행동, 누구보다 공정하고 입이 무거워야 할 직업을 가졌으면서 전혀 거리낌없이 남의 치부를 드러내는 경찰... 그리고 자신의 상황과 위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원주민 노인. 특히 에밀이 자살을 시도한 이유가 내게는 꽤나 인상깊었다. 어쩌면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어른으로서의 최선이었으리라.
제목인 철로 된 강물은 기차 선로를 말한다. 철은 흐를 수 없다. 하지만 철로 만든 기찻길은 시간을 따라 흐른다. 인생도 또한 그러해야 할 것이다. 한 자리에 박힌 듯 중심을 잡고 시간을 따라 흘러가야 하는 것. 프랭크는 살인 사건의 범인을 계속 추측하며 괴로워하고 상실을 견디지만, 제이크에게 중요한 건 범인이 아니다. 모두가 상처를 치유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어쩌면 열한 살 제이크가 나보다 훨씬 인생의 진리를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난 범인이 평온하게 여생을 누린 게 끝까지 싫었거든.
16. 마당이 있는 집(김진영. 엘릭시르. 2018. 388쪽)
: 주란은 거실 창가에서 마당을 내다본다. 얼마전 이사한 이 집은 남편이 공들여 설계하고 오랫동안 지은 집이다. 그런데 마당에서 악취가 난다. 집들이 온 친구들의 말대로 짐승 사체가 있는지 한번 파봐야겠다 싶어 삽을 들고 마당 구석을 파내려가던 주란은 사람 손이 분명한 것을 발견하고 기겁한다. 두려움에 떨다가 귀가한 남편에게 얘기하지만 남편은 주란의 신경쇠약을 거론하며 주란의 말을 한귀로 흘린다. 한편 결혼 4년만에 임신한 상은은 폭력적이고 무능력한 남편이 오늘밤 낚시를 간다고 하자 가는 길에 자신을 친정에 내려달라고 한다. 얼마전 남편에게 이혼을 얘기했지만 묵살당했던 상은은 이 지겨운 생활을 끝낼 참이다.
등장인물들이 다 각자의 논리대로 움직이는 게 당연하긴 한데, 난 너무 답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주란과 상은의 상황이. 왜 둘이 협력하지 않는 거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를, 각자가 모든 타인을 의심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물론 들었다. 얼마나 머리 터지겠어. 어떻게든 이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가야 하고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데. 그래서 결말에 한시름 놓았다. 물론 주란의 앞날도 상은의 앞날도 그닥 평탄할 거 같진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이 상황에선 해피 엔딩이지. 어쨌든 재밌게 읽었고,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17. 이야기를 지키는 여자(샐리 페이지, 노진선 역. 다산책방. 2025. 432쪽)
18. 영원에 빚을 져서(예소연. 현대문학. 2025. 148쪽)
: 화자 '나'는 엄마의 장례식을 치른 후 우울감에 꼼짝을 할 수 없다. 누워만 있는 내게 갑자기 혜란이 전화를 하는데, 예전에 친하게 지냈지만 지금은 멀어져서 엄마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석'이 캄보디아에서 실종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나와 석과 혜란은 9년 전 프놈펜의 학교에 봉사활동을 가기 위한 모임에서 알게 된 사이다. 혜란과 나는 석이 캄보디아에 삐섯이라는 사람을 찾으러 갔을 거라 짐작하고, 무작정 석을 찾기 위해 다시 캄보디아로 향한다. 9년 전 프놈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길지 않지만 깊은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우리'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내 나라에 일어난 비극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나라의 비극을 얘기해 주는 삐섯에게 무심코 던진 석의 말.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난 석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바로 했지만, 현실에서 내가 기사를 읽고 이야기를 들으며 다행히 입 밖으로는 뱉지 않았지만 그같은 생각을 (몰래) 했던 적이 과연 없었을까. 비극의 양상이 조금 다르다고, 지역이 다르고 희생자가 다르다고 그 비극이 덜 슬픈 게 되는 걸까. 비극에도 무게가 있는 걸까. 무거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하는, 묵직한 이야기였다.
19. 토마토로 만들어 줘(조예은. 창비. 2025. 100쪽)
: 토마토 농장집 딸 마윤. 학교 건물 뒷편에서 자신이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알고 얘기하는 친구 박은해를 홧김에 토마토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초등학교 때 남동생과 차별하는 할머니를 그렇게 만든 이후 안 그러려고 조심해왔는데. 문제는, 박은해가 사라지는 걸 애증의 대상인 유미도가 목격한 것. 유미도는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토마토로 만들어 주면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한다.
귀여운 청소년 소설. 토마토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가 가장 궁금했는데, 상당히 설득력있는 세계관이어서 즐겁게 읽었다. 딱 그 나이에 느낄 수 있는 동경과 질투, 그리고 그걸 인정하는 성장 서사까지 짧은 분량 내에서 완성도 있는 이야기였다.
20. 초콜릿을 참기에는 충분히 오래 살았어(마르가레타 망누손, 임현경 역. RHK. 2024. 220쪽)
: 데스클리닝으로 유명해진 스웨덴 할머니의 에세이. 어떻게 나이들어 가는지 말해주고자 한다지만 그냥 평범한 스웨덴 할머니의 에세이이다. 대단한 노하우가 있는 건 아니고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까칠한, 자기만의 기준이 있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며 살아온 나이드신 분의 이야기라서 편안하게 읽었다. 나이 들었다고 해서 꼭 건강식만 고집하고 젊은이들에게 뭔가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신 열린 마음으로 할 수 있는 한 남에게 도움을 주며 친구와 술 한 잔 그리고 초콜릿 한 조각으로 여생을 즐기며 사는 것. 멋진 삶일 것이다.
21. 러브 누아르(한정현. 북다. 2024. 84쪽)
: 1980년대, 이름없이 그저 미쓰 리, 미쓰 박으로 불려진 여성들의 사랑과 일, 그리고 정의구현. 한양물산 공장에서 경리로 일하는 '미쓰 막걸리' 박 선. 사무실에 여직원들이 있지만 그들은 모두 미쓰 리, 미쓰 김 등으로 불린다. 어느날인가부터 출근하지 않는 미쓰 김 언니. 미쓰 리 언니는 그녀가 임신했다고 한다.
암울했던 폭력의 시대를 지나는 이야기. 사랑과 문학으로 견뎌낸 사람이 반드시 있었을텐데, 그간 읽어온 소설들 속에서는 사랑과 문학의 힘이 과소평가되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이 작품을 읽고서야 했다. 외연은 칙릿이 맞지만 단순한 연애 이야기가 아니고 또 단순한 직장 생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역시 믿고 읽는 작가.
22. 헵타메론 : 10번째 이야기(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이다희 역. frame/page. 2018. 108쪽)
: 원래 저자가 쓴 72개의 이야기 중 10번째 이야기만 번역출간되었다. 안드레 애치먼의 <<그해, 여름 손님>>에서 꽤 의미있는 장면에 언급되었다고 하는데, 난 분명 그 소설을 읽었고 이 책을 사는데에도 그 영향이 있었을텐데 기억이 전혀 나질 않는다.
아라곤 왕국의 젊은 청년 아마두르. 무예와 용모가 뛰어나고 말솜씨도 좋아 인기가 많은 그는 백작 부인의 딸 플로리다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열두 살 플로리다는 너무 어린데다 자신과 신분의 차이도 크다. 고민 끝에 그는 플로리다의 곁에 있으면서 친하게 지내는 방법은 플로리다의 절친 아반투라다와 결혼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아반투라다에게 청혼하여 결혼한다. 플로리다는 사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는데...
중세 시대의 윤리의식이란! 아마두르에게 짜증나서 마음을 다스리느라 혼났다. 가엾은 플로리다, 가엾은 아반투라다... 아무리 사랑 때문이라지만, 그나마 흑심을 잘 감추던 아마두르가 막판에 그런 행동을 보인다는 건 당대에도 용서받기 힘든 행태 아니었을까. 액자식 구조로, 작품 속에서 이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이 각자 감상평을 한마디씩 얹는데 그 와중에 아마두르가 품은 마음 자체의 불경함을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역시 당대의 윤리관은 현대인에게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게다가 안드레 애치먼도 이 작품을 곡해한 거 아닌가 싶고... 어쩌면 그냥 그 문장이 필요했을 지도 모르지만. 어찌됐든 헵타메론의 모든 이야기가 궁금하긴 하다. 데카메론을 먼저 읽는 게 순서겠지만.
23.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조시현. 문학과지성사. 2025. 432쪽)
: 단편집. SF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는데, 첫번째 작품이 좀 지루해서 계속 읽을까 고민하다가 두번째 작품이 맘에 들어 계속 읽기로 했다. 꿈인듯 생시인듯 몽환적인 분위기가 맘에 들었고 이 두번쨰 작품 <동양식 정원>이 이 소설집에서는 가장 좋았다. 나머지 작품들도 나쁘지 않았다. 독특한 세계관 속 인물들의 움직임을 통해 현실을 강하게 비판한다. 괜찮은 작가를 발견한 기분.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24.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조르주 베르나노스, 정영란 역. 민음사. 2009. 436쪽)
: 20세기 초, 프랑스 시골에 첫 부임한 젊은 신부의 고군분투기. 화자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한 시골 마을에 3개의 교구를 관리하는 주임신부로 부임한다. 그 자신이 가진 재산이 없는 탓에 그리고 빈한한 출신 탓에 먹고 입는 것에 괴로움을 겪으며, 또한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마을 사람들과 영주 역할을 하는 백작 집안과 갈등을 겪으며 힘겹게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지키려 애쓰는 신부의 괴로움이 절절하다.
읽는 내내 안타까웠다. 가난한 신부의 입성과 부실한 먹을 거리가 그러했고, 무엇보다 굽힐 줄 모르는 그의 신념을 그대로 드러내는, 꾸밈없는 그의 언행이 안타까웠다. 조금만 부드러웠다면, 조금만 굽혔더라면...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처럼, 그또한 은총이리라.
25. 낭만 사랑니(청예. 한겨레출판. 2025. 240쪽)
: 전 우주를 다스리는 염라. 약간은 철없고 순수한 이번 염라는 백색왜성을 너무 좋아해서 과식을 하고 그 결과로 충치를 얻는다. 염라의 10대 제자들은 염라의 어금니를 발치하고, 그 자리에 꼭 맞는 뼈를 찾아오라고 16나한을 지구로 보낸다. 16나한 중 수보리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나호라를 질투하는데,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먼저 뼈를 찾아서 나호라를 이기로 10대 제자로 승진하고자 한다. 마침 지구의 한 종합병원 치과에 근무하는 치위생사 이시린이 눈에 띄고 시린과 협력하기로 한다. 시린은 원장의 눈치만 보며 과잉진료를 하는 과장과 자신에게 모든 일을 떠넘기는 선배 사이에서 힘겹게 버티는 중이다.
설정도 재밌고 시린의 행보도 처음엔 좀 답답했지만 결국 각성해서 시원하게 사회정의도 실현하고, 즐겁게 읽었다. 다만 아버지가 너무 갑갑했어. 사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그렇겠지. 그래서 더 안타까웠고.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동화같은 느낌이어서 편안하게 읽었다.
26. 잠 못 드는 밤(엘리자베스 하드윅, 임슬애 역. 코호북스. 2023. 192쪽)
: 시적인 문장으로 쓰여진, 에세이 같은 소설. 화자로 저자 자신의 이름을 사용했고 내용도 마치 저자가 직접 겪은 일인 듯 서술된다. 기억을 바탕으로 과거의 여러 시점과 지점을 왔다갔다하며 서술하기 때문에 읽기에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름다운 문장들과 깊이 있는 생각들, 소소하지만 임팩트 있는 에피소드들 덕분이 차분히 잘 읽어나갈 수 있었다. 이 저자는 처음이었고 편하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운 문장들 덕분에 마음을 잘 달랜 느낌이었다.
27. 뉴 러브(표국청, 황모과, 안영선, 하승민, 박태훈. 안전가옥. 2021. 300쪽)
: 제목처럼 새로운 양상의 사랑 이야기. 하지만, 결국 모든 사랑은 특별하면서도 모든 사랑은 같다. 사랑의 주체가 AI든, 게임 캐릭터든, 한류 스타든 말이다. 다섯 편 다 재밌게 읽었다. <롤백>은 기시감이 좀 있었지만 - 내용 뿐 아니라 몇몇 장면까지도 - 신인 작가의 첫 작품이 이 정도면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볼 만 하겠다 싶었다. 가장 좋았던 건 역시 황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