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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느리게 가는 마음(윤성희, 창비. 2025. 264쪽)

: 조용한 단편집. 이 작가 특유의 차분한 톤이 좋다. 전작도 그랬지만 이 작가의 단편을 읽으면 가만히 앉아서도 멀리 다녀온 거 같다. 힘들여서 어딘가를 걷거나 한 게 아니라 - 「 자장가」에서처럼 - 내 영혼이 둥실 떠서 가벼이 내려다보고 온 느낌. 예쁜 문장을 예쁘게 말하는 인물들 덕분에 위로 받았다. 



2.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프로데 그뤼텐, 손화수 역. 다산책방. 2025. 280쪽)

: 평생을 피요르 해안의 페리 운전수로 살아온 닐스 비크. 오늘도 평소처럼 일어났지만 매트리스를 밖으로 끌어다 불을 놓는다. 그리고 자신의 페리로 가서 운전을 한다. 오늘의 승객들은 여느때와 다르다. 닐스의 평생에 걸쳐 페리에 올랐던 수많은 사람들 중 이미 세상을 뜬, 기억에 남는 사람들(과 개 한 마리). 닐스는 천천히 운전을 하며 그들과 대화한다.


누구에게나 올 그날이 오면, 난 닐스처럼 고요할 수 있을까. 처음엔 승객들의 정체를 몰랐고 가장 먼저 탄 루나가 말을 할 수 있는 건 닐스의 상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욘이 타고나서야 알았다. 루나의 동행이 닐스를 위해서는 좋았는데 내겐 루나같은 동행이 없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 슬펐다. 하지만 닐스의 삶을 생각하면, 이 모든 이야기는 슬프면서도 기뻤다. 닐스의 마음 속에 남은 이들이 차례로 그의 배에 오르는 건 닐스에게는 삶의 마지막 날에 주어진 합당한 보상 같은 게 아니었을까. 닐스가 이 모든 이야기를 한평생 차분히 끌어안을 수 있었다는 게, 그리고 마지막으로도 조용히 물을 건널 수 있다는 게 어쩌면 축복일 것이다. 내 마지막 날도 닐스만큼만 되었으면. 



3. 버터밀크 그래피티(에드워드 리, 박아람 역. 위즈덤하우스. 2025. 416쪽)

: <흑백요리사>는 안 봤지만 저자가 워낙 여러 프로그램에 나와서 알고는 있었다가, 도서관 신착 도서 코너에 이 책이 있길래 집어들었다. 원래부터 요리 에세이를 종종 읽기도 했고. 이 책은 저자가 미국 음식 중 '소울 푸드', 즉 남부의 음식들을 기반으로 가장 미국적인 음식을, 미국 음식의 기원과 정체성을 찾아 약 2년 동안 여행을 하며 지역의 음식을 맛보고 배운 이야기이다. 레시피가 각 챕터 마지막에 실려 있긴 하지만 요리책은 아니다. 저자는 자신이 이민 2세대로서, 그리고 요리사로서 미국 음식의 영혼을 이민자 음식에 기원한다고 생각하고, 각 지역의 이민자 커뮤니티를 찾아 그들이 모국에서부터 가져와 지금까지 현지화해 가며 고수하고 있는 음식들을 탐구한다. 물론 그 탐구는 음식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음식에는 당연히 그들의 삶의 역사가, 이야기가 녹아있기 때문. 저자가 숙취를 머금은 채 찾아가는 따뜻한 베녜(도넛) 가게, 초면이지만 욕심껏 들이대서 얻게 된 비밀스런 모로코 전통 버터 '스멘'을 만드는 방법, 얼결이지만 진지하게 참석한 라마단과 해 진 후의 첫 식사. 


저자의 여정을 따라가며 여러 번 허기를 느꼈는데 이건 단순히 위가 비어서 생기는 배고픔이 아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고 혀에 그 음식을 올려 두고 싶었다. 길고도 길었던 그의 여정이 끝나는 게 어찌나 아쉽던지. 



4. 죽음을 걷는 여자(메리 피트, 최호정 역. 키멜리움. 2025. 240쪽)

: 말렛 경정과 의사 피츠브라운, 존스는 한 순경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작은 마을의 묘지에 방문한다. 장례식을 마치고 나오던 중, 커다란 화환을 든 두 명의 노부인을 보게 되고 그들이 묘지의 큰 대리석 조각 앞에 헌화를 하는 걸 목격한다. 마침 배럿 목사의 초대로 목사관에서 차를 마시게 된 그들은 배럿 부인에게서 특이한 문구가 새겨진 대리석 무덤과 그 무덤에 묻힌 아버지 랠프 드 볼터와 아들 레너드, 그리고 두 자매 린디와 애런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랠프와 레너드가 6개월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고, 린디와 애런이 낡은 저택을 떠나지 않고 둘만 살게 된 이야기는 배럿 부인의 어머니인 루시가 린디의 절친이었던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 랠프는 자식들은 영국의 기숙 학교에 맡겨둔 채 아내와 식민지 생활을 하다 아내가 죽자 귀국하고 자식들을 집으로 불러들인다. 하지만 10대인 두 딸의 교육이 걱정되어 지인에게서 소개를 받아 메리 데이질이라는, 살인자를 어머니로 둔 여성을 딸들의 가정교사로 들이게 된다. 선입견과는 다르게 청초한 아름다움을 가진 메리에게 반한 랠프. 그는 메리와 재혼을 결심한다. 한편 린디는 오빠 레너드의 친구인 존과 약혼한 사이다.


이 시리즈는 늘 재밌다.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스릴러들보다 덜 잔인하면서도 당대의 사는 이야기가 더 깊이 들어 있기에. 사실 범인은 초반에 잠깐 의심했던 그 사람. 그래도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에는 의심의 화살을 계속 다른 사람에게 돌리게 될 정도로 작가의 솜씨가 유려했다. 결국 자매는 스스로를 감옥에 가둘 수 밖에 없었겠지. 사실 내가 이야기 속에서 내내 미워했던 사람이 범인이 아니라는 게 좀 당황스럽기는 했다. 그리고 더 싫어했던 사람이 속 시원히(?) 죽지 않았다는 것도. 이 시리즈도,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계속 출간됐음 좋겠다. 



5. 시체 옆에 피는 꽃(공민철. 책과나무. 2019. 408쪽)

: 추리 단편집. 첫번쨰 작품이 너무 뻔해서 흥미를 잃은 채로 읽었다. 제목이 스포인데, 기시감이 강했다. 심지어는 미드 <가십걸>에도 비슷한 에피가 있지 않나? 두번째 작품도 TV 단막극에서 본 듯힌 내용. 세번쨰 작품은 추리소설이라기엔 좀 부족하고 네번쨰는 그나마 추리할 거리가 있긴 하지만 승강기 점검과 도둑, 추락사라는 키워드만으로도 사건의 전말이 짐작될만큼 뻔했다. 그러다 <가장의  자격>에서는 작가에게 정 떨어졌다. "여자는 나이를 먹으면서 여우 꼬리가 하나씩 생긴다(219쪽)" 면서 정작 도촬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아들은 순진하고 낭만적인 취미를 가진 걸로 서술하다니. 그나마 다음 작품에서 약간 반성을 하긴 하더라.


전반적으로 톤이 올드한데 그에 비해 문장이 정제되지 않고 허술하다. 문장력이 탄탄했다면 올드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작품들이 더 짜임새있게 느껴졌을텐데. 아쉽다.



6. 데드 스페이스(칼리 월리스, 유혜인 역. 황금가지. 2025. 384쪽)

: 헤스터 말리는 자원 개발 거대기업인 파르테노페에서 보안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잡범이나 잡으며 일해서 받는 돈으로는 초라한 방과 헐한 음식밖에 먹을 수 없고, 몸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공기관은 점점 속을 썩인다. 사실 헤스터는 타이탄의 환경을 연구하기 위한 우주선 심포지엄호에 탑승했던 인공지능 전문가였다. 하지만 선내 테러로 심포지엄호는 폭발하고, 마침 근처에 있던 파르테노페 화물선에 의해 구조되어 손상된 신체를 인공기관으로 교체하는 수술을 받고 살아남지만 천문학적인 비용을 파르테노페에 빚지고 노동으로 갚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 인공지능 분야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선택지가 없었던 헤스터에게 어느날 과거 동료였던 데이비드가 메시지를 보낸다. 그답지 않은 연락과 알쏭달쏭한 내용에 헤스터는 의문을 갖는데, 갑자기 그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온다. 헤스터는 그가 시스템 관리자로 일하던 소행성 니무에로 향한다.


전문용어가 꽤 많이 나오긴 하지만 스토리 따라가는 데에는 문제 없다. 솔직히 190 페이지까지는 꽤 지루했는데 그 지점이 지나니 흥미진진해졌다. 거대한 음모야 대강 짐작 가능했고, 먼 미래에도 정경유착과 거대 자본의 횡포, 가난한 자들의 희생이 당연시되는 암울한 사회를 예견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많이 우울했지만 한편으로는 인공지능 뱅가드의 사랑스러움에 울컥하기도 했다. 김초엽이나 천선란을 읽을 때도 느낀 거지만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다한들 누구나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인간성의 말살은 가속화되어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은 더 비참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면 과연 과학의 발전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7. 게으른 작가들의 유유자적 여행기(찰스 디킨스, 윌리엄 윌키 콜린스, 김보은 역. 북스피어. 2013. 216쪽)

: 두 저자를 닮은 두 명의 신사가 영국 시골을 여행하는 이야기. 디킨스의 문예지에 연재하던 두 작가의 합동 작품을 출간한 것이라 한다. 사실 진짜 유람기라기에는 관련 에피소드는 초반의 등산 이야기밖에는 없고, 나머지는 여행 중 여관에서 들은 유령 이야기. 게다가 그 이야기도 사실은 다른 책에서 이미 읽은 이야기이긴 했다. 그래도 좋아하는 두 작가가 같이 글을 썼다는 게 좋아서 열린 마음으로 편하게 읽었다. 



8. 고사리의 생존법(한수언. 서유재. 2021. 248쪽)

: 처음 읽는 작가의 단편집. 처음에는 문장이 다듬어지지 않고 부적합한 단어가 곳곳에 사용되어서 별로였는데 - 예를 들면, <도와줘, 공세리>에서 사고를 당해서 신체를 개조해 돌아온 세리 이야기를 하며 '생전에도'라는 단어를 쓴 것. 세리는 엄연히 살아있는데, 몸의 일부를 사이보그로 개조하면 죽은 거라고 보는 건가? - 내용이 좋아서 점차 문장은 덜 상관하게 되었다. 사실 문장 뿐 아니라 이런저런 면에서 디테일이 부족한 게 가끔씩 거슬리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작가의 중심이 잘 서 있는 듯 해서 앞으로도 이 작가의 작품은 계속 읽어볼 생각이다. 가장 재밌었던 건 「피바람 몰아치고」. 



9. 핸디맨(프리다 맥파든, 조경실 역. 북플라자. 2023. 352쪽) 

: 어릴적, 물리치료사였던 노라의 아버지는 집에 오면 자주 지하실에서 목공 작업을 했다. 늘 잠겨있던 그 문 안쪽에서 들리던, 목공 작업과는 다른 수상한 소리. 어느날 학교에서 교장실에 불려간 노라는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실종됐던 젊은 여성 맨디 요한슨의 시신 뿐 아니라 그간 실종됐던 여성 열 일곱 명의 잘린 손이 발견되어 부모님이 둘 다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할머니의 집에서 살며 할머니의 성으로 바꾼 노라는 의사로 성장하고, 이제는 외곽의 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메주 집으로 배달되는 아버지의 편지는 뜯지도 않고 찢어 버리며. 그런데 노라의 환자들 중 젊은 여성들이 하나 둘 실종되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잘린 손목이 발견된다.


노라가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나 크게 공감되어 차라리 노라가 살인범이길 바랐다. 범인은 짐작할 수 없었지만 뒷부분에서 설마 하긴 했다. 그치만 작가의 필력은 곧 내 의심을 다른 인물에게 돌렸지. 진짜 잘 쓰는 작가다. 


얼마나 인간답게 사느냐는 결국 자신의 의지가 결정하는 것. 타고난 악함을 자각했다면 끊임없이 자신을 설득하고 달래야 한다. 작가는 계속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이 작품 뿐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도. 스토리며 문장력, 구성까지 모두 탄탄하고 치밀하지만 내용이 은근히 스트레스를 줘서 당분간은 이 작가 그만 읽어야겠다. 



10. 오스카 와일드에 대하여(앙드레 지드, 이효경 역. 글항아리. 2015. 120쪽)

: 앙드레 지드가 오스카 와일드에 대한 추모의 마음으로 쓴 글과 그 이전에 와일드의 글에 대한 감상을 적은 글이다. 길지 않은 글이고, 사실 지드와 와일드도 엄청 친분이 두터웠던 것도 아니지만 지드가 가진 애정이 보여 마음이 아렸다. 사실 와일드 작품의 뛰어남과는 별개로 와일드의 삶은 늘 짠한 느낌인데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게 21세기의 독자(나)뿐 아니라 당대의 동료 문인도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기도 했다. 글 자체도 물론 훌륭했고. 



11. 우먼 인 스펙트럼(배예람, 이수현, 아밀, 김수륜, 진산. 안전가옥. 2023. 350쪽)

: 여성 이야기 앤솔러지. 작가들이 다 낯설었지만 편하게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다섯 편 모두 좋았다.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고. 첫번째 작품인 「수직의 사랑」이 가장 좋았지만 「협탐」 또한 그간 읽어본 장르가 아니어서 신선했다. 「누가 진짜 언니일까?」는 내용면에서는 기시감이 있었고 제목 또한 너무 직설적이어서 아쉬웠지만 작가의 필력은 괜찮은 거 같아서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됐다. 「여우 구슬은 없어」와 「하나뿐인 춤」도 세계관이 독특해서 맘에 들었다. 정말 다 좋았던, 근래 드물게 만족스러웠던 앤솔러지.



12. 밤의 살인자(라그나르 요나손, 고유경 역. 북플라자. 2017. 292쪽)

: 작은 마을에서 근무하는 경찰 아리 토르와 헤르욜푸르. 아리 토르의 독감 때문에 대신 근무를 하게 된 헤르욜푸르는 제보를 받고 마을 폐가에 갔다가 총에 맞아 쓰러진다. 아리는 헤르욜푸르의 아내 헬레나의 전화를 받고 찾아나섰다가 그를 발견한다. 곧 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본청에서 아리 토르와도 친분이 있는 형사 토마스를 파견한다.


(스포)


아리 토르도 토마스도 별로 호감가지 않아서 시큰둥하게 읽었다. 그닥 능력자인 거 같지도 않고 무턱대고 들쑤시고 다니기만 하고. 그런데다 역시 비호감이긴 했지만 엘린이 사건에서 엘린이 부상당했음에도 병원 이송을 막으면서까지 심문을 하는 데서 정이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은 건 범인을 가여워하는 거. 그래, 범인도 불쌍하고 동기도 공감되지. 근데 엘린만 할까? 겨우 폭행범에게서 도망쳤는데 그가 다시 내 집에 숨어든 걸 발견했을 때의 공포감을 아리 토르는 물론이고 작중 누구도, 저자조차도 모르는 거 같아서 진짜 별로였다. 



13. 모두가 나를 죽이려고 해(천지수. 닥터지킬. 2024. 352쪽)

: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밤, 홍천군 119센터에 화재 사건이 접수된다. 화재 장소인 펜션에 도착한 구조대는 기둥에 묶여 불타고 있는 시신 한 구와 진흙 바닥에 끌려다닌 듯한 모습의 시신 한 구, 그리고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여성 한 명을 발견한다. 생존자는 거대 사학 재단 이사장의 딸 마리. 한동안 코마였던 마리는 기적적으로 깨어나고, 사건의 전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동생 마령과 이사장인 엄마에게 앞으로 좋은 언니, 딸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마리는 혼란스러워진다.


사실 소설에서, 그것도 국내 소설에서  유력 사학 재단 등이 나오면 흥미가 식는 편이라서 심드렁했는데, 이 작품은 마리의 심리 변화 묘사가 상당히 촘촘해서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마음을 따라갈 수 있어서 계속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모든 일들이 다 마리를 중심으로 마리의 시각에서 서술되어 독자는 당연히 마리의 편에 선 상태로 사건을 바라보게 되는데 이런 시점의 선택이 한 수였던 듯. 또한 마리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과거가 한꺼풀씩 드러나는 것도 이야기에 흥미를 잃지 않도록 독자의 시선을 계속 붙잡아 두었다. 물론 이야기 속 진실의 찜찜함과 안타까움은 독자의 몫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14. 눈물상자(한강. 봄로야 (그림). 문학동네. 2008. 71쪽)

: 어른들을 위한 동화. 옛날 어느 마을에 잘 우는 아이가 있었다. 엉엉 우는 게 아니라 맑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아이. 아이는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행복한 것을 보아도 눈물을 흘렸다. 비를 머금은 바람이 뺨을 스치거나 이웃이 쓰다듬어 주어도 눈물을 흘리는 아이를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에 한 남자가 찾아와 아이가 가진 특별한 눈물을 보고 싶다고 하지만 정작 아이는 눈물을 흘릴 수 없다. 늘 울게 했던 노을을 보아도. 떠나려는 아저씨를 따라가기로 한 아이. 아저씨는 자신이 모은 눈물상자 속 눈물을 몽땅 사겠다고 한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아마도 울지 못하는 어른들을 위한 작품이겠지만, 난 혼자서 매일매일 잘 우는 어른이라서...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나도 어릴 때, 아니 이 책의 아이보다는 많이 컸을 때 별거 아닌 일로 울먹인다고 엄마한테서 짜증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가 창문 너머로 자기 없이도 하하호호 즐거운 가족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동화답게 해피엔딩이었고, 엔딩이 나를 위로해 줬다. 



15. 철로 된 강물처럼(윌리엄 켄트 크루거, 한정아 역. RHK. 2016. 468쪽)

: 1961년 미네소타 주 뉴 브레멘. 열세 살 프랭크는 한밤중의 전화 소리에 깬다. 목사인 아버지가 경찰서에 가는 길에 따라 나선 프랭크와 동생 제이크. 술에 엉망으로 취해 싸움을 벌인 삼촌-사실은 삼촌이 아니라 아버지의 참전 동료-거스를 데리러 가는 길이다. 거스는 얼마 전 철길에 앉아 있다가 기차에 치여 죽은 프랭크의 동급생 바비콜을 흉보는 말을 한 건달 모리스 엥달과 싸움을 벌인 것. 프랭크는 제이크와 집까지 걸어오겠다며 모리스의 차에 화풀이를 한다. 프랭크의 가족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엄마 루스와 역시 음악적 재능을 가져 새학기에 줄리어드 음대에 진학할 예정인 누나 에이리얼이 있다. 에이리얼은 한때 엄마의 약혼자였던 마을의 재력가 집안 브란트 가의 일원인 에밀에게서 음악 교육을 받고 있고, 브란트 가의 장남 칼과 사귀고 있다. 프랭크는 어느날 누나가 밤에 몰래 빠져나가는 걸 목격하고, 에이리얼은 부모에게 줄리어드에 가기 싫다고 얘기한다.


형식은 미스터리이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과연 사람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이다. 무엇이 프랭크와 제이크를 성장하게 할까. 말을 더듬는다는 이유로 무리에서 놀림당하고 배척당하는 제이크가 청각장애와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리사 브란트와 누구보다 잘 지내는 모습, 칼의 비밀이 새어나갔을 때 마을 사람들의 행동, 누구보다 공정하고 입이 무거워야 할 직업을 가졌으면서 전혀 거리낌없이 남의 치부를 드러내는 경찰... 그리고 자신의 상황과 위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원주민 노인. 특히 에밀이 자살을 시도한 이유가 내게는 꽤나 인상깊었다. 어쩌면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어른으로서의 최선이었으리라. 


제목인 철로 된 강물은 기차 선로를 말한다. 철은 흐를 수 없다. 하지만 철로 만든 기찻길은 시간을 따라 흐른다. 인생도 또한 그러해야 할 것이다. 한 자리에 박힌 듯 중심을 잡고 시간을 따라 흘러가야 하는 것. 프랭크는 살인 사건의 범인을 계속 추측하며 괴로워하고 상실을 견디지만, 제이크에게 중요한 건 범인이 아니다. 모두가 상처를 치유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어쩌면 열한 살 제이크가 나보다 훨씬 인생의 진리를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난 범인이 평온하게 여생을 누린 게 끝까지 싫었거든. 



16. 마당이 있는 집(김진영. 엘릭시르. 2018. 388쪽)

: 주란은 거실 창가에서 마당을 내다본다. 얼마전 이사한 이 집은 남편이 공들여 설계하고 오랫동안 지은 집이다. 그런데 마당에서 악취가 난다. 집들이 온 친구들의  말대로 짐승 사체가 있는지 한번 파봐야겠다 싶어 삽을 들고 마당 구석을 파내려가던 주란은 사람 손이 분명한 것을 발견하고 기겁한다. 두려움에 떨다가 귀가한 남편에게 얘기하지만 남편은 주란의 신경쇠약을 거론하며 주란의 말을 한귀로 흘린다. 한편 결혼 4년만에 임신한 상은은 폭력적이고 무능력한 남편이 오늘밤 낚시를 간다고 하자 가는 길에 자신을 친정에 내려달라고 한다. 얼마전 남편에게 이혼을 얘기했지만 묵살당했던 상은은 이 지겨운 생활을 끝낼 참이다.


등장인물들이 다 각자의 논리대로 움직이는 게 당연하긴 한데, 난 너무 답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주란과 상은의 상황이. 왜 둘이 협력하지 않는 거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를, 각자가 모든 타인을 의심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물론 들었다. 얼마나 머리 터지겠어. 어떻게든 이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가야 하고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데. 그래서 결말에 한시름 놓았다. 물론 주란의 앞날도 상은의 앞날도 그닥 평탄할 거 같진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이 상황에선 해피 엔딩이지. 어쨌든 재밌게 읽었고,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17. 이야기를 지키는 여자(샐리 페이지, 노진선 역. 다산책방. 2025. 432쪽)



18. 영원에 빚을 져서(예소연. 현대문학. 2025. 148쪽)

: 화자 '나'는 엄마의 장례식을 치른 후 우울감에 꼼짝을 할 수 없다. 누워만 있는 내게 갑자기 혜란이 전화를 하는데, 예전에 친하게 지냈지만 지금은 멀어져서 엄마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석'이 캄보디아에서 실종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나와 석과 혜란은 9년 전 프놈펜의 학교에 봉사활동을 가기 위한 모임에서 알게 된 사이다. 혜란과 나는 석이 캄보디아에 삐섯이라는 사람을 찾으러 갔을 거라 짐작하고, 무작정 석을 찾기 위해 다시 캄보디아로 향한다. 9년 전 프놈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길지 않지만 깊은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우리'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내 나라에 일어난 비극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나라의 비극을 얘기해 주는 삐섯에게 무심코 던진 석의 말.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난 석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바로 했지만, 현실에서 내가 기사를 읽고 이야기를 들으며 다행히 입 밖으로는 뱉지 않았지만 그같은 생각을 (몰래) 했던 적이 과연 없었을까. 비극의 양상이 조금 다르다고, 지역이 다르고 희생자가 다르다고 그 비극이 덜 슬픈 게 되는 걸까. 비극에도 무게가 있는 걸까.  무거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하는, 묵직한 이야기였다. 



19. 토마토로 만들어 줘(조예은. 창비. 2025. 100쪽)

: 토마토 농장집 딸 마윤. 학교 건물 뒷편에서 자신이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알고 얘기하는 친구 박은해를 홧김에 토마토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초등학교 때 남동생과 차별하는 할머니를 그렇게 만든 이후 안 그러려고 조심해왔는데. 문제는, 박은해가 사라지는 걸 애증의 대상인 유미도가 목격한 것. 유미도는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토마토로 만들어 주면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한다. 


귀여운 청소년 소설. 토마토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가 가장 궁금했는데, 상당히 설득력있는 세계관이어서 즐겁게 읽었다. 딱 그 나이에 느낄 수 있는 동경과 질투, 그리고 그걸 인정하는 성장 서사까지 짧은 분량 내에서 완성도 있는 이야기였다. 



20. 초콜릿을 참기에는 충분히 오래 살았어(마르가레타 망누손, 임현경 역. RHK. 2024. 220쪽)

: 데스클리닝으로 유명해진 스웨덴 할머니의 에세이. 어떻게 나이들어 가는지 말해주고자 한다지만 그냥 평범한 스웨덴 할머니의 에세이이다. 대단한 노하우가 있는 건 아니고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까칠한, 자기만의 기준이 있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며 살아온 나이드신 분의 이야기라서 편안하게 읽었다. 나이 들었다고 해서 꼭 건강식만 고집하고 젊은이들에게 뭔가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신 열린 마음으로 할 수 있는 한 남에게 도움을 주며 친구와 술 한 잔 그리고 초콜릿 한 조각으로 여생을 즐기며 사는 것. 멋진 삶일 것이다. 



21. 러브 누아르(한정현. 북다. 2024. 84쪽)

: 1980년대, 이름없이 그저 미쓰 리, 미쓰 박으로 불려진 여성들의 사랑과 일, 그리고 정의구현. 한양물산 공장에서 경리로 일하는 '미쓰 막걸리' 박 선. 사무실에 여직원들이 있지만 그들은 모두 미쓰 리, 미쓰 김 등으로 불린다. 어느날인가부터 출근하지 않는 미쓰 김 언니. 미쓰 리 언니는 그녀가 임신했다고 한다. 


암울했던 폭력의 시대를 지나는 이야기. 사랑과 문학으로 견뎌낸 사람이 반드시 있었을텐데, 그간 읽어온 소설들 속에서는 사랑과 문학의 힘이 과소평가되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이 작품을 읽고서야 했다. 외연은 칙릿이 맞지만 단순한 연애 이야기가 아니고 또 단순한 직장 생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역시 믿고 읽는 작가. 



22. 헵타메론 : 10번째 이야기(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이다희 역. frame/page. 2018. 108쪽)

: 원래 저자가 쓴 72개의 이야기 중 10번째 이야기만 번역출간되었다. 안드레 애치먼의 <<그해, 여름 손님>>에서 꽤 의미있는 장면에 언급되었다고 하는데, 난 분명 그 소설을 읽었고 이 책을 사는데에도 그 영향이 있었을텐데 기억이 전혀 나질 않는다. 


아라곤 왕국의 젊은 청년 아마두르. 무예와 용모가 뛰어나고 말솜씨도 좋아 인기가 많은 그는 백작 부인의 딸 플로리다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열두 살 플로리다는 너무 어린데다 자신과 신분의 차이도 크다. 고민 끝에 그는 플로리다의 곁에 있으면서 친하게 지내는 방법은 플로리다의 절친 아반투라다와 결혼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아반투라다에게 청혼하여 결혼한다. 플로리다는 사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는데...


중세 시대의 윤리의식이란! 아마두르에게 짜증나서 마음을 다스리느라 혼났다. 가엾은 플로리다, 가엾은 아반투라다... 아무리 사랑 때문이라지만, 그나마 흑심을 잘 감추던 아마두르가 막판에 그런 행동을 보인다는 건 당대에도 용서받기 힘든 행태 아니었을까. 액자식 구조로, 작품 속에서 이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이 각자 감상평을 한마디씩 얹는데 그 와중에 아마두르가 품은 마음 자체의 불경함을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역시 당대의 윤리관은 현대인에게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게다가 안드레 애치먼도 이 작품을 곡해한 거 아닌가 싶고... 어쩌면 그냥 그 문장이 필요했을 지도 모르지만. 어찌됐든 헵타메론의 모든 이야기가 궁금하긴 하다. 데카메론을 먼저 읽는 게 순서겠지만. 



23.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조시현. 문학과지성사. 2025. 432쪽)

: 단편집. SF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는데, 첫번째 작품이 좀 지루해서 계속 읽을까 고민하다가 두번째 작품이 맘에 들어 계속 읽기로 했다. 꿈인듯 생시인듯 몽환적인 분위기가 맘에 들었고 이 두번쨰 작품 <동양식 정원>이 이 소설집에서는 가장 좋았다. 나머지 작품들도 나쁘지 않았다. 독특한 세계관 속 인물들의 움직임을 통해 현실을 강하게 비판한다. 괜찮은 작가를 발견한 기분.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24.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조르주 베르나노스, 정영란 역. 민음사. 2009. 436쪽)

: 20세기 초, 프랑스 시골에 첫 부임한 젊은 신부의 고군분투기. 화자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한 시골 마을에 3개의 교구를 관리하는 주임신부로 부임한다. 그 자신이 가진 재산이 없는 탓에 그리고 빈한한 출신 탓에 먹고 입는 것에 괴로움을 겪으며, 또한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마을 사람들과 영주 역할을 하는 백작 집안과 갈등을 겪으며 힘겹게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지키려 애쓰는 신부의 괴로움이 절절하다. 


읽는 내내 안타까웠다. 가난한 신부의 입성과 부실한 먹을 거리가 그러했고, 무엇보다 굽힐 줄 모르는 그의 신념을 그대로 드러내는, 꾸밈없는 그의 언행이 안타까웠다. 조금만 부드러웠다면, 조금만 굽혔더라면...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처럼, 그또한 은총이리라. 



25. 낭만 사랑니(청예. 한겨레출판. 2025. 240쪽)

: 전 우주를 다스리는 염라. 약간은 철없고 순수한 이번 염라는 백색왜성을 너무 좋아해서 과식을 하고 그 결과로 충치를 얻는다. 염라의 10대 제자들은 염라의 어금니를 발치하고, 그 자리에 꼭 맞는 뼈를 찾아오라고 16나한을 지구로 보낸다. 16나한 중 수보리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나호라를 질투하는데,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먼저 뼈를 찾아서 나호라를 이기로 10대 제자로 승진하고자 한다. 마침 지구의 한 종합병원 치과에 근무하는 치위생사 이시린이 눈에 띄고 시린과 협력하기로 한다. 시린은 원장의 눈치만 보며 과잉진료를 하는 과장과 자신에게 모든 일을 떠넘기는 선배 사이에서 힘겹게 버티는 중이다.


설정도 재밌고 시린의 행보도 처음엔 좀 답답했지만 결국 각성해서 시원하게 사회정의도 실현하고, 즐겁게 읽었다. 다만 아버지가 너무 갑갑했어. 사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그렇겠지. 그래서 더 안타까웠고.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동화같은 느낌이어서 편안하게 읽었다. 



26. 잠 못 드는 밤(엘리자베스 하드윅, 임슬애 역. 코호북스. 2023. 192쪽)

: 시적인 문장으로 쓰여진, 에세이 같은 소설. 화자로 저자 자신의 이름을 사용했고 내용도 마치 저자가 직접 겪은 일인 듯 서술된다. 기억을 바탕으로 과거의 여러 시점과 지점을 왔다갔다하며 서술하기 때문에 읽기에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름다운 문장들과 깊이 있는 생각들, 소소하지만 임팩트 있는 에피소드들 덕분이 차분히 잘 읽어나갈 수 있었다. 이 저자는 처음이었고 편하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운 문장들 덕분에 마음을 잘 달랜 느낌이었다. 



27. 뉴 러브(표국청, 황모과, 안영선, 하승민, 박태훈. 안전가옥. 2021. 300쪽)

: 제목처럼 새로운 양상의 사랑 이야기. 하지만, 결국 모든 사랑은 특별하면서도 모든 사랑은 같다. 사랑의 주체가 AI든, 게임 캐릭터든, 한류 스타든 말이다. 다섯 편 다 재밌게 읽었다. <롤백>은 기시감이 좀 있었지만 - 내용 뿐 아니라 몇몇 장면까지도 - 신인 작가의 첫 작품이 이 정도면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볼 만 하겠다 싶었다. 가장 좋았던 건 역시 황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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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빛과 실(한강. 문학과지성사. 2025. 172쪽)

: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첫 작품. 시, 일기, 에세이 등이 주를 이루고,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도 포함되어 있다. 책의 구성이나 분량 때문에 여러 말이 나오는 거 같은데, 난 만족한다. 이보다 못한 글과 문장으로 이보다 훨씬 비싸게 받아먹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 물론 출판사가 급하게 책을 낸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예전부터 소설가 한강보다 시인 한강을 더 좋아했던 난 작가의 정원일기와 미발표 시들을 읽을 수 있어서, 그리고 노벨상 수상 연설문을 인쇄물로 소유할 수 있어서 좋았다. 제목이 된 작가 어린 시절의 싯구도 사랑스러웠고. 



2. 나의 폴라 일지(김금희. 한겨레출판. 2025. 320쪽)

: 저자의 남극 세종 기지 방문기. 한 달 동안 취재기자 자격으로 머물렀던 이야기인데, 남극 자체의 이야기도 물론 있었지만 인상깊었던 건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이다. 작가는 특유의 따뜻한 시선으로, 겸양의 마음으로 기지의 사람들과 주변 환경 - 자연 뿐 아니라 - 을 관찰하고 연구를 돕는다. 단순히 생활의 이야기만도 아니었고 또 그렇다고 그들의 연구 활동 리포트인 것만도 아닌 두 시각이 조화롭게 서술되어 있어서 좋았다. 물론 작가가 묘사하는 남극의 풍광들과 동식물들의 모습도. 


사실 난 남극 주변의 관광 상품들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 아주 못마땅하다. 인간들이 발을 딛는 곳마다 자연은 파괴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은 최소한으로 움직이고 호기심은 최대한으로 죽이며 자연의 눈치를 좀 보고 살아야 한다고. 그래도 이런 에세이들에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직 지구에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들은 꼭 가야만 하는 사람들만 가고 그들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3. 위싱 머신(소피 쿠슨스, 김나연 역. 모모. 2025. 524쪽)

: 방송 제작사에서 일하는 스물 여섯 루시. 어릴 때부터 꿈꿔 왔던 업계에 취직했지만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는커녕 상사가 시키는 허드렛일이나 하며 물새는 방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 술 마시고 의미 없는 만남 후에 집으로 향하던 중 구멍가게에서 이상한 할머니와 대화를 하게 되고, 위싱 머신이라는 기계에 소원을 빈다. 다음날 숙취로 눈을 뜬 루시는 잘 생긴 남자가 자신과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발견하고, 그가 자신의 남편이며 자신에겐 아이가 둘이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16년을 건너뛴 루시. 


난 대체 이걸 왜 읽었을까? 저자가 후기에 언급한 영화들에서 나온 설정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심지어 아들의 '외계인' 발언까지! 내용 전개도 다르지 않다. 디테일한 설정 한두개 뻬고는 뻔하게 흘러간다. 심지어 결말까지도. 그래도 조금은 다를 거라고 기대한 과거의 나를 말리고 싶다. 



4. 하우스메이드(프리다 맥파든, 김은영 역. 북플라자. 2023. 388쪽)

: 전과가 있는 밀리. 일하던 바에서도 쫓겨나고 집세도 없어서 차에서 생활하고 있다. 윈체스터 가의 입주가정부 자리는 마지막 희망이다. 자신을 잘 꾸며 취직에 성공한 밀리. 창문이 열리지 않도록 고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잠금장치도 바깥에 되어 있는 다락방에 머물 수 밖에 없지만 감지덕지다. 그런데 윈체스터 부인 니나가 좀 이상하다. 면점 때의 정상적이고 우아한 모습은 어디가고 수시로 말을 바꿀 뿐 아니라 집을 도저히 손댈 수 없을 만큼 난장판으로 만들어 두기까지 한다. 동네에서 니나가 정신병이 있어서 딸을 죽이려 했던 일이 있다는 소문까지 들은 밀리. 그 와중에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정원사는 의미심장한 단어를 내뱉는데...


익숙한 설정에도 반전은 예상 못하고 읽었다. 읽고 나니 아, 그래서 이런 장치를... 하고 이해했다. 작가가 영리하게 잘 썼다. 무엇보다 캐릭터의 묘사가 1부와 2부에서 확실히 달라서 재밌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1부보단 2부를 더 흥미진진하게, 집중해서 읽었다. 후속편이 나온 거 같던데, 궁금하다. 



5. 오래된 신들이 섬에 내려오시니(황모과, 전혜진 외. 들녘. 2021. 352쪽)

: 제주 설화를 코스믹 호러의 소재로 한 앤솔러지. 전혜진의 <단지>가 가장 맘에 들었다.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을 환기시켜 줄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속을 시원하게 해줬다. 황모과는 슬펐다. 굳이 제주여야 할 이유는 없는 내용일지라도 저자가 늘 얘기해왔던 소외된 여성의 이야기이며 나아가 여성들의, 약자들의 연대가 필요함을 역설한다는 점에서 여성들의 섬인 제주 관련 앤솔러지에 실린 것이 의미있다 할 수 있다. 반면 사마란은 제주의 영등 할망을 소재로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 싶게 기시감 드는 뻔한 이야기여서 읽는 내내 심드렁했다. 처음 두어 쪽 읽고 설마 이런 얘긴 아니겠지 했던 딱 그대로 흘러가서 별로였다. 게다가 문장도 채 정돈되지 않아 읽기 불편했다. 



6. 제 7의 천국(제임스 패터슨,맥신 패트로, 이영아 역. RHK. 2012. 432쪽)

: 우먼스 머더 클럽 7권. 전직 주지사의 아들이자 샌프란시스코의 셀럽 마이클 캠피언이 실종됐다. 어릴 때부터 심장병을 앓은 이 잘생긴 도련님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봐 온 터인데 감쪽같이 사라지자 상부에서는 압박이 들어오고, 린지가 이 사건에 투입된다. 그러던 중 마이클이 윤락여성 주니의 집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는 목격자가 나타난다. 한편 호크와 피지라는 두 젊은 남자가 중년의 부부를 살해하고 라틴어로 메시지를 남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단순 강도로 보였던 이 사건은 곧 연쇄살인임이 드러나고, 린지는 다시 이 사건을 맡는다. 그리고 유키가 사고사한 마이클의 시신을 처리했다고 자백한 주니의 재판에 들어간다.


(강스포)


사건의 진실은 있지만 악의 처단은 없다. 연쇄살인범이 법의 심판을 받지도 않고 마이클 사건의 결말도 별로다. 그게 과연 해피엔딩일까? 마이클의 여생이 얼마나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산다고 행복할 지... 계속 재판에서 패하는 유키가 안됐을 뿐이다. 



7. A군의 인생 대미지 보고서(강석희, 박서련 외. 창비교육. 2022. 212쪽)

: 학교 폭력 소재의 앤솔러지. 다양한 케이스와 다양한 성격의 학생들 이야기. 성장 소설답게 주인공들은 크든 작든 인생의 진리에 눈을 뜨지만 그렇다고 덜 아픈 것도, 상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작품들은 해답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다만 문제를 제기할 뿐. 중심 사건의 결말을 얘기하지 않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면 문학이 해야할 일은 한 거 같다. 이 책을 읽는 청소년들이 이 작품들을 읽고 무엇이 폭력인지, 어떤 상황이 폭력이 될 수 있는지 알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얘기하고 싶다. 다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강석희. 



8. 9번의 심판(제임스 패터슨, 맥신 패트로, 원은주 역. RHK. 2013. 400쪽)

: 유명 배우 마커스 다울링의 집에서 저녁 모임이 한창이던 때, 2층에는 도둑이 침입한다. 별 생각없이 열어둔 금고에서 귀중품을 훔친 이 도둑은 헬로 키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여도둑. 주로 상류층들이 파티를 여는 동안 보안에 허술한 틈을 노린다. 마커스의 집에서 지체한 탓에 마커스와 부인에게 들킨 키티는 창문을 넘어 도망가지만, 마커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한다. 키티는 다음날, 마커스의 부인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고 놀란다. 한편 쇼핑몰 주차장에서 유모차에 탄 아기와 엄마가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고, 범인은 뜻을 알 수 없는 메시지를 피해자의 피로 차창에 남긴다. 


키티 사건이 그렇게 처리될 줄은 몰랐다. 뭐, 역시나 악의 처단은 속이 시원한 정도는 아니지만 키티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다만 점점 시리즈가 린지를 비롯한 우먼스 머더 클럽 멤버들만의 특별함을 잃어가는 거 같다. 꼭 이 멤버여야 할 이유도 없는 거 같고, 그냥 작가가 자신이 상상한 범죄를 얘기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9. 10번째 기념일(제임스 패터슨,맥신 패트로, 원은주 역. RHK. 2015. 436쪽)

: 열 다섯 살 소녀가 알몸에 비닐 우비 하나만 걸친 채로 피를 흘리며 길가를 헤매다 구조된다. 린지는 임신한 소녀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속아 아기를 빼앗겼다고 보고 소녀의 주변을 수사하는데, 상류층 사립기숙학교에 다니는 소녀와 친구들을 수사하는 게 쉽지는 않다. 한편 유키는 남편 살해 혐의를 받고 있는 의사 캔디스 마틴을 상대로 한 재판에 투입된다. 


철없는 10대 소녀 때문에 내내 짜증났다. 거기에 낭비되는 경찰 인력에 대해서도. 그런데 또 다른 면에서, 린지가 유키의 재판에 대해 한 일도 짜증났다. 린지는 왜 그렇게 사방을 다 헤집고 다니는 거야? 구세주 컴플렉스 뭐 그런 건가?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진실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는 걸 감안해도 현실에선 이렇게까지 하지는 못하겠지. 아님 방법을 달리 하든가. 제목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마지막 챕터에서 드러난다. 마지막 장면만 맘에 들었다. 



10. 웃음을 선물할게(윤성희, 김이설, 김중미 외. 창비. 2019. 192쪽)

: 청소년기에 겪을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 - 짝사랑, 친구와의 관계 단절, 따돌림, 성적 문제 등과 가족에 일어난 비극까지 - 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앤솔러지. 김중미의 작품 속, 농성 중이던 장애인 유족들 중 민수 오빠가 한 "너도 웃어. 그래야 버텨"(171쪽)가 이 책의 주제이다. 삶은 힘들다. 어쩌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날보다 울고 싶은 날들이 더 많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면 행복해진다는 말처럼 웃을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웃음이 나오는 상황이 되면 남 눈치보지 말고 웃어야 한다. 그래야 버틸 수 있다. 



11. 내가 내일 죽는다면(마르가레타 망누손, 황소연 역. 시공사. 2017. 192쪽)

: 내가 죽은 뒤에 남은 물건들은 누군가가 정리를 해야 한다. 유족이든 아니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을 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 데스클리닝이란 이런 관점에서 살아 있는 동안 하는 정리 작업이다. 저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많은 물건들에 이 물건을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한 메모가 붙어 있는 걸 발견한다. 심지어 박물관에 기증할 물건에는 담당자 전화번호까지 있는 경우도. 이를 계기로 저자는 데스클리닝을 진행하는데 이 책은 저자도 나이가 먹어 자신의 데스클리닝을 진행하며, 그간의 노하우를 알려주기 위함이다. 


기본적으로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지만 무조건 없애라거나 빨리 처분하라고 하지 않는다. 저자가 강조하는 건 자신만의 속도로 현재의 삶을 흔들지 않으면서 사후에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덜 힘들게 하라는 것.  여러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중에는 우리나라의 정서와 맞지 않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방법들은 꽤 유용하다. 특히 인상깊었던 건, 남에겐 쓸모가 없지만 내게는 큰 가치가 있는 건 - 연애 편지나 추억의 팜플렛 등 - '버릴 물건'이라고 쓰인 상자에 넣는다는 것.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간직하다가 죽은 뒤엔 버려지는 게 마땅하다는 사고방식이 맘에 들었다. 그게 맞는 거지. 


늘 정리해야지, 정리해야지 하면서도 막상 손대기가 귀찮고 조금은 두렵기까지 한 서랍, 상자, 창고방 등이 누구나 하나쯤은 있을 수 있다. 물론 나도 서너 개 된다. 이 책을 계기로, 빠른 시간 안에 그걸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일 일도 모르는 일개 인간이라면, 늘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12. 칠면조가 숨어 있어(위수정. 위즈덤하우스. 2024. 96쪽)

: 유미는 선호의 직장 상사였다. 완벽한 일처리와 빈틈없는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유미 뒤에서 그녀를 흉보았지만, 선호는 그녀와 사귀었고 결국 결혼도 했다. 이제 1년, 유미는 돌연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을 써보겠다 한다. 그리고 선호는 점점 자신과의 접점이 없어지는 유미의 생활과 유미가 절대 보여주지 않는 습작에 신경이 쓰인다.


선호가 너무 찌질해서 계속 코웃음치면서 읽었다. 아휴, 진짜 쪼잔해. 아내가 글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아내의 노트북을 몰래 뒤지는 거며, 복수심(?)에 지혼자 아내가 봤으면 하는 일기를 쓰고 개운해 하는 거며. 근데 어쩌면 이게 결혼 생활인가 싶기도 하다. 난 해본 적 없어 모르지만 배우자라고 해서, 한 집에서 산다고 해서 상대방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어. 이런 사람인 줄 모르고 함께 살게 되었고 이런 사람이라도 참을 만 하면, 괜찮으면 계속 함께 사는 거겠지. 난 공감 못하지만. 삶의 다양한 면 중 하나를 들여다 본 기분이었다. 남 얘기니까, 하는 맘으로 재밌게 읽었다. 



13. 작가의 말(천희란. 위즈덤하우스. 2024. 100쪽)

: 픽션과 논픽션 사이의 경계를 잘 타는 소설. 난 완전히 소설로 읽었고, 물론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전혀 안 들어갔다고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다 픽션이겠거니 생각했다. 소설 속 화자는 작가로, 전원 주택으로 이사오지만 복층 서향집의 햇살은 화자의 우울에도, 글쓰기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느날 이끌리듯 자살을 시도한 화자.


좋아하는 작가이고, 전작을 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 작가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에 늘 공감했다. 이번 작품도 짧은 분량이지만 많은 페이지에 도그지어를 만들었다. 그래. 이건 소설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인생을 그대로 보여줄까. 어느 인생이건 이 소설 속 그 장면과 비슷한 장면이 한번은 있을 것 같지 않은가. 



14. 너에게 남은 시간 죽음의 디데이(이혜린. 풀빛. 2024. 216쪽)

: 담이의 부모님은 어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부모님과 함께 사고를 당했던 담이는 그 이후로 약간이라도 친밀한 관계인 사람들의 남은 생의 날 수를 볼 수 있다. 사람들 머리 위에 초록색으로 떠 있는 숫자들. 뭣 모르던 어린 시절, 친구 머리 위의 숫자가 1인 걸 본 후 어떻게든 친구의 죽음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한 담이는 이젠 누구와도 친분을 맺지 않는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여전히 혼자만의 세계를 지키려는 담이에게 반장 미소가 다가온다.


청소년 소설이니만큼 해피엔딩일 거라 믿고 읽긴 했지만, 읽는 내내 계속 생각을 하게 했다. 나로 말하자면,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쪽이라서. 다만 대강의 시기 정도는 알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누군가 다가와서 당장 몇 개월 혹은 며칠 남았다고 알려준들 뭘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사실 그런 맥락에서 결말 부분의 담이와 아저씨의 향후 계획(?)은 좀 아닌 거 같긴 하다. 난 또, 사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라는 입장이어서. 어쩄든 전개도 빠르고 문장도 나쁘지 않아서 재밌게 읽었다. 



15. 데이지 존스 앤 더 식스(테일러 젠킨스 리드, 최세희 역. 다산책방. 2023. 548쪽)

: 1970년대, 인기 절정이었던 록밴드의 갑작스런 해체 이야기. 마치 다큐멘터리를 녹취한 듯한 형식으로 당대의 아이콘이었던 데이지 존스와 밴드 더 식스의 흥망을 이야기한다. 예술가 부모의 방치 하에 그루피에서 시작해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하고 가수가 된 데이지 존스. 빌리와 그레이엄의 '던 브라더스'에서 시작되어 드러머 워런, 베이시스트 피트, 리듬 기타 척을 영입하여 '더 파이브'가 되었다가 척이 베트남전에서 사망하고 대신 에디와 키보디스트 캐런까지 여섯 명이 된 밴드 '더 식스'. 데이지의 첫번째 앨범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지만 더 식스는 빌리가 '인생의 사랑'인 아내 커밀라와의 이야기를 노래로 써서 점점 인지도를 올리고 인기를 끌게 된다. 그러던 중 프로듀서 테디는 빌리가 쓴 사랑 노래는 여성 싱어와의 듀엣이 좋겠다고 빌리를 설득하고, 데이지와 함께 다음 앨범을 만들기로 한다. 빌리와 데이지는 함께 곡 작업을 하지만 끊임없이 충돌한다. 


정말 당대의 실존 밴드의 이야기인양 몰입해서 읽었다. 난 당시의 락신에 대해서는 지식이 거의 없지만 이 책의 형식이 앞에서도 말했듯 다큐멘터리의 자막을 그대로 출간한 듯 했고, 장면마저 상상이 되었다. 데이지의 자유분방함과 한번의 실족을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 가정을 지키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격한 빌리의 생활이 부딪치는 지점도 너무나 이해가 됐고, 그 둘 모두에게 공감이 갔으며, 심지어는 주변의 워런이나 피트, 캐런과 그레이엄의 이야기에도 모두 공감이 갔다. 그만큼 이 작가가 그린 캐릭터는 입체적이었고 실존적이었으며, 당대의 연예계 묘사는 생생했다. 여성으로서, 락커로서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주고자 했던 데이지. '누군가의 뮤즈'이기보다는 그 '누군가'이길 바랐던 데이지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비록 그녀가 선택한 사랑에는 반대하지만. 무난하길 바랐던 워런과 열등감에 괴로워했던 피트, 역시 여성으로서 그리고 뮤지션으로서의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캐런과 어쩌면 전형적일지 모르지만 많은 남자들에게는 공감을 샀을 그레이엄의 이야기도 단순 재미를 넘어 그 자체로 내 몰입을 불렀다. 페이지가 정말 빨리 넘어갔고 그 와중에도 쉽지 않은 시대에 여성으로서 산다는 어려움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하게 했다. 전작에 이어 이제는 정말 이 작가의 작품은 믿고 읽게 됐다. 



16. 외계인 게임(오음. 팩토리나인. 2021. 312쪽)

:  교사인 김설은 애인과의 결별을 예감하고 도망치듯 여행을 떠나 작고 평화로운 마을 훈자에 머문다. 그곳엔 32세 번역가 하나, 40세 소설가 최낙현, 22세 대학생 전나은, 29세 남자 오후가 머물고 있고, 이들과 어울리며 김설은 서울에 두고온 고민을 잊는다. 게다가 후에게 끌리는 마음. 어느날 후는 모두 모인 자리에서 외계인 게임을 하자고 제안하는데, 이 게임은 일종의 밸런스 게임으로 곤란하거나 고민되는 상황 중 하나를 선택하고 소수인 쪽이 외계인이 되는 게임이다.


(강스포)

김설 캐릭터가 너무 후져서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했다. 자기 가슴 계속 쳐다보는 남자가 별로라는 말에 '그럼 언니가 노브라로 다니지 않으면 되잖아요'라고 생각하는 여성 교사라니p.51 그 뒤의 남하나 캐릭터도 너무 별로다. '잘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별로 감사한 줄 모르는 풍만한 가슴까지 있지 않은가'p.78라는 문장을 읽고 이 작가가 남자임을 확신했고 그래, 어디까지 하나 보자 싶어서 끝까지 읽었다. 여성 캐릭터들은 다 철없고 생각없이 사는 걸로 그린다. 남자 캐릭터들에게 작가가 더 공감하는 게 보이고 심지어는 성희롱에 정당성까지 부여한다 - 감기약 때문에 아내로 착각했단다. 거기에 더해 성희롱 가해자를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고 피해자는 아무렇지 않게 용서하는 걸로 그리다니, 아주 네 로망인가봐? 바람둥이같았던 오후마저도 사실은 순애보 끝장이었는데 사랑하는 애인의 죽음 때문인 걸로... 와, 어릴 때 읽은 HR 생각나네? 암튼 별로였고, 왜 리뷰들의 별점이 높은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문장마저 별로. 



17. 해독일기(프랑수아즈 사강, 백수린 역. 안온북스. 2023. 96쪽)

: 저자는 교통사고 후 치료를 받던 중 모르핀계 진통제에 중독된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전문의료기관에 입원한 저자의 일기. 일기 내용은 어쩌면 기존 작품들에 비해 강렬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지만 베르나르 뷔페의 그림이 더해지자 텍스트마저 강렬해졌다. 불안과 불쾌 사이, 쉼과 마비 사이 저자의 예민한 감수성이 잘 드러난다. 문학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애증.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고 쓰고 싶었던 마음. 원래도 이 작가를 좋아하지만 작가의 내밀한 감정을 들여다본 것 같아서 더 좋아졌다. 사실 이날 들고 나왔던 책이 이미 읽은 거여서 당황스러워 하다 부랴부랴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책이었는데, 퇴근길이 아주 충만했다. 



18. 마법 지팡이 너머의 세계(톰 펠턴, 심연희 역. 문학수첩. 2024. 416쪽)

: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말포이 역을 맡았던 톰 펠턴의 에세이. 해리 포터 이야기가 분량이 많긴 하지만 아역배우로서의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에 관한 이야기도 비중이 높다. 해리 포터 팬들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읽을 수 있다는 면에서 흥미진진할테고 해리 포터 팬이 아니더라도 인간적인 그의 모습에 꽤 공감될 만한 부분들이 있다. 저자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 합류하기 전부터 아역 모델과 배우로 활동했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오디션에 응시할 때까지만 해도 원작 소설을 좋아하기는커녕 읽지도 않았던 그는 오디션장에서 마주친 엠마 왓슨에게 퉁명스럽고 거만하게 대하고, 그 태도 덕분에 루시우스 말포이 역에 캐스팅된다. 그리고 시리즈 촬영 현장에서 엠마 왓슨과 대니얼 래드클리프, 그리고 슬리데린 삼총사 역을 맡았던 배우들과 함께하며 우정을 쌓는다. 그러나 마냥 아름답고 교훈적인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저자의 어마어마한 장난기에 촬영장이 엉망이 되고 아역 배우들의 샤프롱들이 기피하는 1순위 배우가 된 사연이나, 엠마의 힘을 얕잡아 보았다가 한방 먹은 이야기 등은 저자의 유머 감각과 함께 당시 현장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 이건 저자보다는 당시 스텝들 입장에서 -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장난을 치거나 우정만 나눈 건 아니다. 성인 역할을 맡은 배우들과 함께 연기하며 배운 점들, 그들 각자의 뛰어난 점과 화면 밖 모습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서술되어 미소지으면서 읽게 되었고, 이후 유명세를 누리며 잠깐이나마 가지 말아야 할 길로 빠졌던 모습까지 솔직하게 그려져 있다. 사실 가장 재밌었던 부분은 물론 해리 포터 촬영장의 비하인드 스토리이지만 저자가 엠마를 비롯한 배우들과 진실한 우정을 나누는 모습이 흐뭇했고 무엇보다 매우 균형잡힌 시각으로 할리우드를 비롯한 연예계의 비합리적인 관습들 특히 젠더 차별과 여성 혐오에 대해 목소리를 낸 부분이 특히 좋았다. 


영화를 볼 땐 그저 그 배역으로만 보았던 배우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19. 스톤 매트리스(마거릿 애트우드, 양미래 역. 황금가지. 2024. 396쪽)

: 단편집. 앞의 서너 편은 연작이라 할 수도 있는데, '알핀랜드'라는 판타지 세계를 무대로 한 소설로 성공한 콘스탄스와 그녀가 처음 이 소설 시리즈를 썼을 때의 애인이자 개망나니 호색한 시인이었던 개빈, 그리고 그와 얽혔던 여성들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들이 딱히 사이다라고 할 수는 없어서 읽는 속도가 좀 더뎠는데, 표제작에서 그런 기분을 말끔히 씻어 주었다. 표제작은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이야기. 늘 드는 생각이지만 우리나라 속담에 '맞은 놈은 발 뻗고 자지만 때린 놈은 그렇지 못하다'는 건 완전히 틀렸다. 떄린 놈은 지가 떄린 게 잘못인 줄도 모른다. 이 소설집 속의 많은 남성들이 심지어는 지가 때린 줄도 모르고, 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크개 개의치 않는다. 가해자의 논리란 정말이지 역겹기만 하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게 표제작. 젠더 문제 외에도 저자는 노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어려움을 언급하는 것도 빼먹지 않는다. 이런 균형잡힌 시각들이 좋았고, 마냥 아름답지만은 현실에 대한 솔직한 시각도 좋았다. 



20. 누의 자리(이주혜. 자음과모음. 2023. 132쪽)

: 3편의 단편과 1편의 에세이. 표제작이 많이 인상깊었다. '누'는 '누구'의 옛말. 누구라고도 지칭되어지지 못한, 이름없는 누를 위한 자리. 비록 작중 화자가 택한 자리가 내 맘에는 들지 않았지만 그것 또한 묵묵히 자리를 잡는 누가 견뎌야 할 몫일테지. 가장 좋았던 건 <골목의 근태>. 결말이 어쩌면 생뚱맞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그런 따뜻한 연대는 늘 환영이다. 



21. 창문(정보라. 위즈덤하우스. 2024. 96쪽)

: 정부는 인공지능의 학습을 위해 인간의 뇌를 통째로 업로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갈 데 없는 나는 그 프로젝트에 지원하여 산속 학습센터에 입주한다. 하루 8시간의 업로드, 요가 등의 프로그램에 적응하던 중, 갑자기 이웃이라며 접근하는 915호 사람. 나는 그와 엮이기 싫지만 그는 점점 튀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늘 그랬듯 이 작가의 작품은 설정은 미래적이지만 일어나는 일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나의 일상에 균열을 가하는 미친 인간의 등장. 피해자가 가해자로 돌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사이다일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걸 박수치며 바라만 볼 수 있을까? 그렇다고 가해자의 서사를 마냥 들어주고 공감해 줄 수는 없겠지만. 결국 이렇게 되기까지 방치하지 말아야 하는데... 삶은 소설 속에서도, 밖에서도 어렵기만 하다. 



22. 아빠 소설(이연숙. 위즈덤하우스. 2025. 104쪽)

: 주로 온라인 상에서 비평을 해왔던 화자는 출판사의 청탁을 받자 이제는 아빠의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감이 다가올수록 이걸 소설로 써야할 지 혹은 에세이로 풀어야 할 지 모르겠다. 계속 감을 못 잡고 허우적대는 화자는 한가지 기억을 떠올린다.


애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 미워한다는 건 아직도 사랑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됐지 않을까? 이제 그만 미워하고 그만 사랑할 때가. 하지만 쉽지 않다. 내 안에 아직 덜 자란 아이가 있어서인지도 모르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워야 할 지 몰라서인지도 모르고. 그래서 '가짜'라도 만들어서 때려눕히고 싶은데 그것마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화자는 명확하게 결말을 맺지 못하지만 독자인 나는 그게 답답하거나 안타깝지 않았다. 그게 평생 동안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져야 할 숙제라는 걸 알기에. 



23. 스파이 코스트(테스 게리첸, 박지민 역. 미래지향. 2024. 460쪽)

: 메인 주 작은 시골 마을. 매기는 농장을 구입하여 닭을 키우며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기관'에서 온 듯한 비앙카라는 여성이 나타나 16년 전 매기의 은퇴 전 마지막 임무에 대해 묻는다. 그 작전에서 함께 일했던 다이애나가 행방을 알 수 없다고. 다이애나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매기는 그녀를 찾는데 도움을 줄 생각은 없으나 당시 작전에 관한 문서가 유출됐다는 말에는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다음날, 매기의 농장 진입로에 비앙카의 시체가 놓여있다. 매기와 한마을에 사는 전직 동료들 4명 - 잉그리드, 로이드, 벤, 데클란 - 은 이 일을 조용히 수사하려 하지만 지역 경찰서정 대리인 조 티보듀는 이들의 행적이 의심스럽기만 하다.


그냥 살인사건 수사하는 스릴러인 줄 알았는데 정말 스파이 이야기였을 줄이야. 게다가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까지. 왜 소설 속에서도 좋은 남자들은 다 죽어버리는 걸까. 이러니 책 속이든 현실이든 좋은 남자들이 씨가 말랐지. 그래도 아직은 좋은 사람들이 살아 있으니. 범인은 전혀 짐작 못했고, 사실 작가가 범인을 짐작할 만한 틈을 주지도 않았다.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서술 방식은 흔하지만 이렇게 효과적으로 쪼이는 건 오랜만. 게다가 마티니 클럽 다섯 명과 조 티보듀까지 등장인물들이 다 흥미로워 앞으로의 이야기가 기대된다. 



24. 사랑과 연합 0장(한정현. 위즈덤하우스. 2024. 116쪽)

: 인간 외 종족에 대해 알려진 후, 인간은 그들과 '교배'를 통해 하프 엘프, 하프 드래곤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역시나 이들에 대한 차별 또한 생겨났다. 이제는 인간만큼은커녕 혐오의 대상이 되어 특정 지역에 격리 수용되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들. 하프 엘프 루비는 그저 조용히 인간과의 접촉을 피하며 살고 싶다. 자신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감추며 살고 있는 루비의 민박집에서 어느 손님이 남긴 쪽지가 발견되고, 거기서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했던 할머니의 이름을 발견한 루비는 당황한다.


역시나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저자는 한국사의 아픈 기억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의 혐오와 차별의 이야기도. 저자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판타지적인 인물을 내세운 건 처음인 거 같아서 이게 긴 이야기의 서막이라는 저자의 인터뷰가 정말 반가웠다. 그리고 이 와중에 비소의 행적이 벌써 안타까웠고 - 그가 당했을 배신과 버림이 - 앞으로의 여정이 궁금했다. 



25. 싸구려 행복(가브리엘 루아, 이세진 역. 이상북스. 2010. 592쪽)

: 2차 대전이 막 시작된 시기 몬트리올 근교. 열 일곱 플로랑틴은 '15센트'라는 이름의 저렴한 음식점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한다. 그곳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 아닌 듯 애매한 태도의 장 레베스크를 만나는데, 야심차고 성실한 장은 플로랑틴이 눈에 들어오긴 하지만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는 데에는 도움이 전혀 안 됨을 잘 알고 있다. 플로랑틴의 집은 매우 가난한데, 목수였던 아버지 이자리우스는 건설 경기 불황으로 실업자 신세가 되어 지금은 임시로 택시를 운전하지만 늘 자신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며 이런저런 주장을 떠벌리는 데에만 몰두하고, 엄마 로즈 안나는 가난한 살림에 플로랑틴 밑으로 줄줄이 낳은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늘 지쳐있다. 이 와중에 플로랑틴은 장의 친구 에마뉘엘과도 알게 되는데, 군인이자 중산층 가정의 장남인 에마뉘엘은 플로랑틴에게 순수한 애정을 보이고, 로즈 안나는 또 임신한다.


누구도 감쌀 수 없지만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지만 누구도 응원할 수 없는, 그렇다고 전혀 공감할 수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플로랑틴이 어리석은 선택을 할까봐 조마조마해 하며 읽었다. 그런 사회상에서 그런 가정이라면, 누구나 실족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결말이 다행이었다. 가장 가여운 건 다니엘, 그리고 로즈 안나. 하지만 모든 인물들이 다 조금씩은 안타까웠다. 그만큼 작가는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배치하여 누구라도 그들의 마음을 알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에 출간된 이 저자의 작품들은 다 읽었는데, 그중 가장 좋았다. 



26. 돈 안 쓰면 죽는 병(이두온. 위즈덤하우스. 2025. 96쪽)

: 화자는 중고거래앱에서 명품 원피스가 싸게 나온 걸 보고 직거래를 하기로 한다. 하지만 원피스를 갖고 나온 남자는 화자를 보고 안 팔겠다며 도망가고, 화자는 악착같이 쫓아가지만 남자는 화자를 모욕한다. 사실 화자가 이렇게 꼭 소비를 해야 하는 이유는 플람마 바이러스 때문이다. 머리에 어느 순간 혹이 나고, 이 혹이 점점 자라나 갑자기 폭발해 버리는 병. 이 병의 진도를 늦출 방법은 소비를 통한 도파민 방출 뿐. 그나마 생필품이나 식품이 아닌 사치품 소비만 해당된다. 


제목만 보고 재밌을 거 같아서 집어들었는데, 소설 속 세상은 처절하기만 하다. 사치품 소비만이 도파민을 만들어 내고 그 도파민에 의존해서 생을 연장해야 한다면 그게 의미가 있을까? 누구나 소비를 좋아하는 것도 아닐텐데, 또 누구나 그렇게까지 하면서 살고 싶지도 않을텐데. 물론 작가가 꼬집고자 하는 게 비틀린 자본주의와 말초적인 쾌락이라는 거 모르지는 않지만, 소설 속 등장인물들 어느 누구도 - 심지어는 스스로 생의 연장을 포기했던 사람들마저도 공감은커녕 안쓰럽지도 않았다. 거기에 더해 이런 세상에서 예술품의 가치는 또 어떻게 산정되는지, 예술가들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결말마저 힘들었던 소설. 



27. 시간의 계곡(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김보람 역. 다산책방. 2025. 468쪽)

: 오딜이 살고 있는 마을의 양쪽은 철책으로 막혀 있다. 이 밸리의 양쪽에는 산이 있고 동쪽 산을 넘으면 20년 후의 미래의 마을로, 서쪽 산을 넘으면 20년 전의 과거를 살고 있는 마을로 갈 수 있다. 이 밸리들은 다 똑같은 구조를 갖고 있고, 평상시에는 전혀 왕래할 수 없지만 특수한 경우에는 자문단의 허가를 받아 헌병대 동행 하에 얼굴을 검은 마스크로 가리고 '참관'을 할 수 있다. 직업 선택을 위한 견학이 시작되던 어느날, 오딜은 우연히 다른 밸리에서 온 참관인들을 목격하는데, 그들이 같은 반 에드메의 부모님인 걸 알고 당황한다. 한편 오딜은 시청 지하에서 서류 정리라는 단순 작업을 하며 딸을 키우는 엄마의 강력한 소망에 자문관이 되기 위해 에세이를 제출하고, 우여곡절 끝에 심사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 닥칠 불행을 미리 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구체적이지는 않더라도 그에게 미리 경고를 해야 할까? 그리고, 미쳐 작별하지 못한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게 과거의 모습이고 나를 드러낼 수 없다 해도 그 기회를 잡아야 하는 걸까? 솔직히 난 오딜의 처음 의견에 동의한다. 어느쪽이든 굳이 가야만 하는 걸까? 내 머릿속, 내 마음속 모습만으로 - 설사 그게 나의 바람이 덧칠된 모습일지라도 -  만족하면 안 되는 걸까? 하지만 오딜의 생각은 여러 사건을 거치며 바뀌고, 이 작은 마을에서조차 오딜의 운명은 힘들게 흘러간다. 그래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오딜이 잘못된 선택을 할 때마다 마음 속으로 그러지 말라고 부르짖었지만 오딜의 길은 어려워지기만 했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스스로를 구원하지만, 난 그게 진짜 구원인지도 의문이다. 그렇게 사라진 오딜도 그녀 자신이었으니. 


세계관이 폐쇄적이고 굳이 따지고 들자면 논리적 모순이 없지는 않지만 과거와 미래, 선택과 운명에 대해 계속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작품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책을 다 읽은 지금에도 바뀌지 않았다. 개입할 수 없는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들여다본들 내 현실에 무슨 도움이 될지. 사랑하는 사람을 잊는 것도 사랑의 과정이다. 



28. 술꾼들의 모국어(권여선, 한겨레출판. 2024. 236쪽)

: 술 좋아하는 작가의 안주 에세이. 계절별로 작가가 사랑해마지않는 식재료들과 음식들의 이야기가 풍부하다. 저자는 어릴 때부터 은근히 까다로운 입맛을 갖고 연약하게 태어났으나 자라면서 입맛이 틔였고 특히 대학생이 되어 술과 함께하면서 안주로서의 음식들에 일가견을 갖게 되었다. 작가가 소개하는 음식들은 그리고 에피소드들은 다 맛깔스러워서 읽는 내내 낄낄거렸다. 나도 한 식탐 하는지라 책을 집어들기 전에는 이거 읽었다가 입 트이는 거 아냐? 했지만 다행히도 내 게으름이 식욕을 이기기는 했다. 물론 작가는 먹는 얘기만 하지는 않는다. 음식이야기를 하면서 삶을 얘기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난, 삶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한끼 잘 먹고 나면 그 일을 헤쳐나갈 힘이 생긴다는 작가의 이야기에 또 힘을 얻는다. 



29.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헤르만 헤세, 황승환 역. 민음사. 2009. 128쪽)

: 화가 클링조어는 스페인의 한 지방에 여름내 머물기로 한다. 여러 지인과의 만남, 이웃 농가의 소녀 지나에 대한 사랑, 그리고 마침내 다시 붓을 드 그가 그린 자화상.


줄거리를 특정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문장도 어지러웠다. 아마도 이 작품을 쓸 당시 저자의 마음이 그러해서일 듯. 난 늘 헤세의 성격은 좀 안정적일 거라고 근거없이 짐작하곤 했는데 이 작품을 쓸 당시 작가의 개인사가 그렇게 힘들었고 작가 자신도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는 해설을 읽으며 내가 정말 무지했구나 반성했다. 이 책은 그런 저자의 인생 살풀이였던 듯 하다. 마지 추상화에서 원색의 두터운 물감 자국을 보는 듯한 이야기. 클링조어가 끊임없이 의식하고 또 예감하는 그의 죽음이 저자를 그리고 독자를 구원했다. 



30. 네버 라이(프리다 맥파든, 이민희 역. 밝은세상. 2025. 340쪽)

: 신혼 부부 트리샤와 이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데도 매물로 나온 집을 보러 간다. 길을 헤맨 끝에 간신히 도착한 외딴 집은 저택이라기보다는 성에 가까운, 웅장하고도 멋진 집이었다. 하지만 중개사 주디는 보이지 않고, 트리샤는 2층 창문 한 곳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목격하지만 이선은 보지 못한다. 계속되는 눈보라에 길이 끊기자 이선과 트리샤는 할 수 없이 하룻밤을 이 집에서 보내게 되는데, 트리샤는 읽을 책을 찾다가 비밀 공간을 발견한다. 사실 이 집은 오래전 실종된 정신과 의사 에이드리엔 헤일 박사의 집이었고 그 비밀 공간엔 박사가 상담 치료하던 환자들의 녹음 테이프가 보관되어 있다. 트리샤는 이선 몰래 그 테이프들을 들어본다.


처음엔 이선이 정말 의심스러웠는데,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된다. 다만 결말이 찝찝하다. 악의 확실한 처단 따위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PL과 함꼐 별장에 있던 메이든, 그리고 박사의 남친 루크가 너무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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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여운 것들(앨러스데어 그레이, 이운경 역. 황금가지. 2023. 476쪽)

: 19세기, 의사 아치볼드 맥캔들리스는 의대생 시절 유일하게 사귄 친구 고드윈 벡스터와 종종 함께 산책을 한다.  고드윈이 언젠가부터 자신을 피하는 듯 하여 아치볼드는 기습적으로 고드윈의 집을 방문하고 낯설지만 눈길을 끄는 여인과 마주친다.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아치볼드의 모든 것을 신기하게 여기고 이후 고드윈에게서 임신한 채 자살하려 강에 뛰어든 시신에게 태아의 뇌를 이식하여 살려냈다는 고백을 듣는다. 이후 고드윈은 벨라의 교육과 사람들의 호기심을 피하기 위해 그녀와 함께 1년의 세계여행을 다녀오고, 1년 후 재회한 아치볼드를 본 벨라는 그와 결혼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곧 방탕한 변호사 웨더번과 눈이 맞아 도망을 친다.


<<프랑켄슈타인>>의 말랑 버전이랄까.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신의 피조물을 버리지만 고드윈은 최선을 다해 그녀를 돌볼 뿐 아니라 끝까지 책임진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피조물처럼 외형이 흉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지만. 어쩄든 벨라는 상당히 사랑스러운 트러블메이커다. 당대에는 드물게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스스로를 구할 줄 아는. 이런 여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이 작품은 잘 보여준다. 물론 고드윈의 헌신적인 애정과 아치볼드의 든든한 지지가 있어서 가능하기도 했지만. 사실 마지막 부분의 아치볼드는 좀 한심하긴 했다. 벨라는 마지막까지 맘에 들었고. <<프랑켄슈타인>>은 읽는 내내 안타까웠는데, 이 책은 읽는 내내 유쾌했다. 



2. 첫번째 희생자 상. 하(제임스 패터슨, 최필원 역. 황금가지. 2004. 309쪽, 265쪽)

: 우먼스 머더 클럽 1권. 샌프란시스코 경찰 린지는 갓 결혼한 부부가 호텔방에서 잔인하게 살해된 사건을 맡게 된다. 면식범으로 보이는 이 사건은 곧 다른 신혼 부부가 신혼 여행지에서 살해됨으로써 연쇄 살인 사건이 된다. 린지는 첫번째 사건에서 대담하게 범죄 현장으로 잠입한 기자 신디, 예전부터 합이 잘 맞았던 부검의 클레어, 늘 완벽하게 자신의 일을 해내던 검사 질에게서 도움을 받으며 이 사건을 수사한다. 


일단, 클레어나 질은 비슷한 직종에 종사하기에 친해진 것도 함께 수사를 해나가는 것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기자인 신디는, 신선했다. 역시 초반에는 살짝 비호감으로 시작하긴 하지만. 나같으면 그런 식으로 시작해서 친하게 지내기 힘들 거 같은데, 쿨하다. 다만 제목이 의미하는 게 살인 사건 자체의 희생자가 아닌 린지의 개인사와 관련있다는 게 유감이다. 솔직히 그가 희생됐을 때 너무 짜증이 나서 책을 확 덮어버렸다. 작가야, 살려냈어야지! 



3. 두번쨰 기회(제임스 패터슨, 최필원 역. 황금가지. 2006. 404쪽)

: 교회 성가대를 향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한다. 대상은 할렘의 흑인 교회. 인종 증오 범죄처럼 보이는 이 사건을 조사하던 린지는 언뜻 보기엔 자살 같은 이전의 다른 사건과 공통점을 발견하고, 인종 증오 범죄가 아닌 경찰을 타겟으로 한 연쇄 살인이라는 걸 밝혀낸다.


작품 제목은 린지의 아버지와 관련이 있다. 어릴 때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갔던 아버지가 이제야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곧 이 사건과의 관련성이 드러난다. 아버지 이야기를 읽으며, 린지의 복잡한 마음이 안타까웠다. 어릴 때 버림받은 원망과 작지만 좋았던 추억들, 그리고 혈육이기에 배어나오는 애정. 물론 냉소적인 난 린지가 약해질 때마다 등짝을 후려치며 정신 차리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우먼스 머더 클럽 멤버들의 이야기가 조금 전개되는데, 좀더 나와도 좋을 듯 하다. 



4. 완벽한 죽음을 팝니다(지현상. 오러. 2023. 272쪽)

: 호러 소설집. 해피엔딩 따윈 없다. 본격적으로 기괴한, 공포에 충실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귀신보다 무서운 건 현실. 그 공포 속으로 발을 디딜 수 밖에 없는 건 현실에 등떠밀려서이다. 잘못된 선택이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외면하고만 싶은 이유는 현실도 그만큼 두렵기 때문. 다 무서웠지만 가장 끔찍했던 건 <문 뒤에 지옥이 있다>. 



5. 움직임(조경란. 작가정신. 2024. 124쪽)

: 오랜만에 이 작가의 작품을 읽었는데, 작가의 초창기 작품을 개정해서 재출간한 것이다. 스무 살 이경. 엄마가 돌아가신 후 무작정 외가로 왔다. 할아버지와 이모, 삼촌과 함께 다락이 있는 단칸방에서 살며 모래를 섞어 블록 벽돌을 만드는 할아버지와 삼촌을 위해 도시락을 싸고 집안일을 한다. 농협에서 하루종일 돈을 세는 이모는 밤마다 외국어 공부를 하며 탈출을 꿈꾼다. 이경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담배꽁초가 버려진 마당 귀퉁이의 화단을 돌보고, 앞방 남자의 방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그러던 중 이 건물의 3층 안마시술소에서 일하는 삼촌의 여자가 집에 드나들기 시작한다.


30여년 전보다 더 오래전 이야기처럼 읽혀 읽으면서도 낯설었다. 30여년 전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어리지 않은데. 그러다 문득 부끄러워졌다. 내가 너무 나이브했구나. 이런 가족도 분명 있었을텐데. 이 가족에게서 희망을 보는 것 또한 순진함의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희망은 이모 한 사람에게나 있겠지. 물론 이모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잘 덮일 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없는 사람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견딜 뿐이다. 희망 따위. 



6. 엿보는 마을(리사 주얼, 안은주 역. 한즈미디어. 2022. 440쪽)

: 오랫동안 해외를 돌아다니며 히피처럼 살던 조이. 결혼도 휴양지 호텔에서 일하다 만난 남자와 충동적으로 해버렸다. 고향으로 돌아와 어릴 때 살던 꿈꾸던 집을 산 오빠네 2층에서 살게 된 조이는 이웃집에 매력적인 외모와 분위기를 가진 남자가 아내와 10대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걸 알게 된다. 공립학교 교장인 그를 계속 관찰하는 조이. 그런데 어떻게 2개월 후 그 집의 부엌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고 그 집 쓰레기통에서는 조이가 신었던 부츠의 장식이 발견되었을까?


(약스포)

조이가 살인자가 아닐 거라는 건 처음부터 (희미하게나마) 드러난다. 조이는 생각은 없을지언정 누굴 죽일 거 같지는 않은 캐릭터라서. 처음엔 당연히 피해자가 그 사람이고 범인은 또다른 누군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읽어나갈수록 다채로운 인간들이 등장해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런데 등장인물들 중 멀쩡한 인간보다 비호감에 성격 삐뚤어진 인간들이 훨씬 많아서 계속 찌뿌린 채 읽었다.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제나의 엄마는 가엾지만 앞으로 정보기관의 요원이 될 거라면서 망원경으로 사람들을 관찰하고 스토킹하는 톰 피츠윌리엄의 아들 프레디, 톰을 무조건 칭송하는 제나의 친구, 남편에게만 올인하는 톰의 아내 등. 톰도 비호감이긴 마찬가지다. 톰이 죽었어야 했는데! 가장 멀쩡해 보이는 캐릭터가 범인이어서 안타까웠다. 하지만 작가가 얘기하고 싶은 건, 정상인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이 사회의 모습 아닐까. 



7. 여분의 사랑(박유경. 다산책방. 2023. 268쪽)

: 처음 읽는 작가의 단편집. 화자들 중 누구에게도 공감이 되질 않아 읽는 게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희망적으로 끝나지만 그 희망이 너무 희미해서 차라리 외면하고 싶었다. 작가는 예민한 시선으로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 은근한 멸시를 잡아내는데, 답답한 곳을 긁어주는 효과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저 혼자만의 소심한 복수를 하거나 자기만의 작은 위로를 하는 데서 그쳐서 속상했다. 물론 이게 현실이지만, 소설 속에서까지 그런 갑갑함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고요. 그래도 이 작가를 계속 읽을 생각이다. 



8. 폴과 비르지니(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 김현준 역. 휴머니스트. 2022. 212쪽)

: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됐던 때에 목가적인 환상을 불러일으켜서 인기를 끌었다는 서문을 읽고 기대를 갖고 읽었는데, 전반적인 이야기의 방향성은 다르지 않았으나 결말이... 18세기 프랑스 섬(현 모리셔스). 작품 속 화자는 프랑스 섬의 포르루이의 숲 한가운데에 나란히 붙어 있는 빈 오두막 두 채에 관심이 간다. 마침 지나가던 노인에게서 이곳에 살던 두 가족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화자. 오래전 젊은이 라 투르는 아내와 함께 이 섬에 도착한다. 집에서도 지원을 받지 못하고, 귀족 출신 아내 또한 집안의 반대를 무릅썼기에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 희망에 차 있던 라 투르는 그러나 열병에 걸려 죽고, 임신한 라 투르 부인은 간신히 숲 속의 허름한 오두막을 발견해서 그곳에 살기로 했다. 나란히 붙어 있는 옆집에는 귀족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진 마르그리트라는 여성이 갓 태어난 아들 폴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라 투르 부인은 곧 딸을 낳아 비르지니라고 이름붙이고 두 명의 노예와 이웃의 도움을 받아 함께 아이를 키우며 살아간다. 같은 요람에서 함께 자란 폴과 비르지니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데, 어느날 라 투르 부인의 존재를 문득 기억해 낸 부인의 이모가 비르지니를 파리로 부른다.


(스포)

앞에서 말했듯 결말이 너무 어이없다. 이게 무슨...이게 맞아? 이렇게 다 죽어버리는 게? 특히 비르지니. 그러니까, 비르지니는 드레스를 차마 벗을 수 없어서 죽은 거지? 그렇게 무력하게 배 위에서 죽지 말고 차라리 드레스 입은 채로 바다에 뛰어들어서 죽었더라면 나았을까? 아니, 애시당초 파리에서 나고 자라서 파리 사교계에서 활약을 했던 귀족 아가씨도 아닌 비르지니가 드레스 벗기를 부끄러워했다는 거 자체가 남성 작가의 환상을 투여한 거라고 생각되지만, 이 작품이 씌여진 시대를 생각하면 접고 들어갈 수 있다. 그래도 조금은 멍청하게까지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라 투르 부인의 이모님을 빌런 취급하는 건 부당하지. 드레스 못 벗어서 죽은 애도 있는데. 노부인이 당시의 사회 관습을 비판없이 따랐고 종손녀가 살아온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해서 악인이라 하는 건 너무하다. 난 차라리 이모 쪽이 더 이해된다. 아무튼, 18세기 낭만주의 소설은 나와 맞지 않는 걸로. 그냥 비르지니가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가 딱 좋았다. 그래도 소설 자체가 재미없거나 잘 못 쓴 글이라는 건 아니다. 결말이 내 스타일이 아니었던 거지. 



9. 좀비즈 어웨이(배예람. 안전가옥. 2022. 178쪽)

: 좀비 창궐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 편의 단편. 첫번째 작품인 <피구왕 재인>이 정말 좋았다. 우정과 사랑 사이의 그 간질간질한 감정이,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는 그 강인함이. 표제작도 좋았다. 그런 식의 로드 무비 스타일은 꽤 신박했다. 나라면 못했을텐데. 마지막 작품 <참살이404>에서는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밝혀지는데,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직장인 중 한 명으로서 공감이 되면서도 자기혐오적인 느낌도 들었다. 이 세 작품 속 인물들 모두 상황에 몰려 어쩔 수 없이 남을 밟아야 자신의 몸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래야만 하는 현실과 자신을 견딜 수 없어하는데 이 작품들의 배경은 판타지지만 현실과 가장 맞닿아있는 지점이 바로 이거. 그렇다고 주인공들이 다 먼치킨인 것도 아니고 자신보다 힘이 센 인물들에게 어쩔 수 없이 휘둘리고 착취당한다는 점도 현실적이었다. 오랜만에 맘에 드는 작가를 발견하게 되어서 기쁘다. 



10. 셰리(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장소미 역. 녹색광선.  2024. 208쪽)

: 쉰 살이 다 된 레아. 친구의 아들인 스물 다섯 셰리는 오늘도 레아의 침대에서 잠을 깼다. 셰리와 레아는 6년 전부터 연인이 되었고, 레아와 셰리의 모친은 셰리를 열 일곱 소녀와 곧 결혼시킬 참이다. 


번역이 너무 직역이라 읽기 힘들었다. 게다가 잊을 만 하면 한번씩 등장하는 문법오류/비문이 꽤 거슬렸다. 사실 그래서 내가 이 출판사를 기피하는데... 레아의 마음은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셰리의 철없음은 참아주기가 꽤 힘들어서 레아에게 공감하려는 내 시도는 실패했다. 그래도 레아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으면서 그녀의 행동을 통해 그녀의 마음이 드러나는 서술은 훌륭했다.  아마 당대에는 저자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더불어서 내용이 파격적이면서도 흥미진진했겠지. 비록 현대의 독자인 내게 이 내용은 그닥 파격적이지 않지만, 어찌됐든 이 작가의 책은 계속 읽어볼 생각이다. 제발 다음 책은 번역/교정교열 좀 제대로 해주길...



11. 하늘과 땅 식료품점(제임스 맥브라이드, 박지민 역. 미래지향. 2024. 488쪽)

: 1972년 펜실베니아 포츠타운의 오래된 우물에서 해골이 발견된다. 경찰은 목에 메주자를 걸고 있는 그 해골에 관해 알고 있을 듯한 유대인 노인을 심문하지만 그는 아는 바가 없다고 얘기하고, 곧바로 들이닥친 허리케인에 모든 증거는 사라진다. 노인 또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데... 사실 이 모든 사건은 47년 전, 이 마을 치킨힐이 유대인 정착촌이면서 흑인들의 마을일 때부터 시작됐다. 2차대전 때 홀로 유럽에서 건너온 유대인 모셰는 마을의 가장 큰 극장을 소유한 자수성가한 사업가였고, '하늘과 땅' 식료품점의 딸 초나를 보고 한눈에 반해 그녀와 결혼한다. 모셰의 수입이 넉넉해 그들은 얼마든지 시내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초나는 식료품점을 떠나기를 거부했고, 그렇게 그들은 식료품점 2층에서 살며 초나도 식료품점 운영은 놓지 않는다. 어느날 난로 폭발 사고로 엄마를 잃고 청력도 잃은 소년 도도의 이모 애디 - 식료품점 점원이자 흑인 - 가 조카를 주정부에서 정신병원에 수용하기 위해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숨겨달라고 부탁하고, 초나는 오래 전 우정을 나눴지만 지금은 말조차 섞지 않고 있는 옆집사는 흑인 친구 버니스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숨겨준다. 


(약스포)

등장인물이 꽤 많다. 이름을 외우는 게 힘든 나로서는 초반에 헷갈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초나. 다리를 절지만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토라를 읽고, KKK단 행진을 비난하는 컬럼을 쓰고, 피부색 따위와는 상관없이 옳은 일을 했던 초나. 이 멋진 여성의 마지막이 그런 식이어서 솔직히 너무 열받았고, 빌런이 합당하게 벌을 받는 게 아니라 사고사했다는 게 짜증났지만 이 작품 전체의 이야기는 좋았다. 작가의 전작처럼 여러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작지만 적당히 따뜻한 공동체의 느슨한 연대와 여러 우연이 겹쳐서 만드는 소소한 복수, 그리고 현실적인 해피엔딩이 좋았다. 



12. 쓰리 데이즈(제임스 패터슨, 이영아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400쪽)

: 우먼스 머더 클럽 3권. 오랜만에 질과 함께 조깅을 하던 린지는 우연히 드러난 질의 어깨 부근에서 멍을 발견한다. 말을 돌리는 질이 걱정스럽지만 질이 먼저 말하기 전에 다그칠 수도 없는 것. 질과 헤어져 계속 조깅을 하던 린지의 코앞의 저택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불타는 저택 안에서 남자아이를 구해 나오는 린지. 폭발이 일어난 집은 악덕 사업가로 질타를 받고 있는 라이타워의 집. 사건 현장에서는 '오거스트 스파이스'라는 서명이 된 경고장이 발견된다. 얼마 후 의료보험업계의 거물이라 할 수 있는 조지 벤고시언이 호텔에서 독살당하고, 역시 오거스트 스파이스의 이름을 달고 신디 앞으로 이메일이 도착한다. 연이어 테러를 예고하는 오거스트 스파이스. 세계 경제지도자들과 미국 부통령이 참석하는 G8 회담을 취소하지 않으면 3일마다 테러를 일으키겠다고 협박하는데...


수사물이지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사건들만이 아닌 사회 문제도 건드린다. 왜 세계 경제의 불평등은 점점 심화되는가? 이 불균형을 해소할 방법은 정말 없나?  왜 세계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외면하는가? 이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면 정말 과격한 방법 외에는 없는 걸까? 사건의 해결은 솔직히 좀 허무했다. 그래, 내부고발 중요하지. 수사관들이 아무리 정보를 캐고 다녀도 협조와 제보가 없으면 쉽지 않다. 근데 그건 현실에서 그런거고, 소설 속에서만이라도 막 휘리릭 해결하는 그런 것 좀 보면 안 될까? 게다가 이번 에피소드는 정말이지, 이 작가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다. 이 시리즈의 첫번째 희생자도 매우 어이없었는데 이번 희생자는 정말이지... 그렇게 죽일 거였으면 그런 서사라도 만들지 말든가. 그렇게 폭력에 시달리고 괴롭게 살게 했으면서 그렇게 죽게 한다고? 이 캐릭터를 죽여서 이 시리즈를 끌고 나가는데 무슨 편리함이나 재미가 있나 싶다. 게다가 린지의 로맨스도... 이제야 좀 로맨스가 전개되나 싶었는데.... 앞서 신디의 로맨스도 그냥 얼버무렸으면서!



13. 한밤의 배회자(제임스 패터슨, 이영아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460쪽)

: 우먼스 머더 클럽 5권. 이 시리즈는 순서와 맞춘 숫자가 제목에 들어가는데, 이 책의 원제는 The 5th Horseman이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임팩트가 없어서 이렇게 번역한 거 같은데, 여러 도서관에서 순서 상관없이 빌려서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 나로서는 매우 헷갈린다. 


샌프란시스코 병원에서 상태가 나쁘지 않은 환자들이 갑자기 죽는 일이 계속 발생한다. 주로 처방전이 뒤바뀌거나 의료 인력의 실수로 잘못된 처치를 받고 사망하는 이 사건은 법정 싸움으로 전개되고, 신디는 이 사건을 취재하기 시작한다. 한편 우먼스 머더 클럽에 새로 합류한 변호사 유키는 엄마와 함께 외출했다가 갑자기 엄마가 쓰러져 샌프란시스코 병원으로 옮긴다. 치료를 받고 상태가 호전된 엄마. 하지만 갑자기 엄마가 사망하고, 이 사안이 매우 이상함을 감지한 린지는 병원 관계자로부터 갑자기 사망한 사람들의 눈꺼풀 위에 카두케우스 문양이 새겨진 동전이 올려져 있었다는 제보를 받는다. 연쇄 살인임을 직감한 린지. 또 한편으로, 주차장에서 고가의 차 안에 완벽한 화장과 드레스로 단장한 채 앉아 있는 여성 시신이 발견된다. 차주와는 관계없어 보이는 이 시신을 살해하고 옮긴 범인을 찾기 위해 린지의 팀은 바쁘게 움직인다.


'캐딜락 아가씨'라니, 작가의 무신경함에 화가 났다. 아무리 오래전 작품이라도, 아무리 화자가 정의감에 불타는 여성이라도 피해자를 그런 식으로 대상화하다니. 이게 원문이 이런 건지 아니면 번역 과정에서 이렇게 된 건지 궁금하다. 두 사건이 있긴 하지만 둘다 범인이 너무 쉽게 잡힌다. 고급차 사건은 처음부터 범인을 드러내놓고 시작하고, 수사팀이 범인을 알아내는 과정과 검거 과정, 그들의 동기가 흥미롭기는 하지만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한 미끼같은 느낌이 강했고, 샌프란시스코 병원 사건은 충분히 몰입할 만 했지만 범인을 밝히고 잡는 과정이 시시했다. 그래도 린지와 우먼스 머더 클럽 각각의 이야기와 우정은 재밌다. 비록 4권은 건너뛸 수 밖에 없어서 아쉽지만(내가 다니는 3군데의 도서관에 다 없다). 



14. 여섯 번째 표적(제임스 패터슨, 이영아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10. 456쪽)

:  우먼스 머더 클럽 6권. 토요일 오후. 항구에 접근하고 있는 페리에서 총성이 울린다. 시작은 아들을 심하게 혼내고 있던 젊은 엄마와 그 아들, 그리고 범인을 말리려던 보험사 직원과 페리 승무원에 이어 우리의 유능한 검시관 클레어의 가슴에까지 총알이 박힌다. 그리고 여섯 번째 총알도 발사된다.


사건이 하나가 아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범인은 처음부터 밝혀진 가운데 린지와 팀원들의 수사가 전개되고, 그 와중에 납치 사건과 아파트 내 연쇄 살인까지 이어진다. 이 정신없는 가운데 린지는 전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데스크가 아닌 현장이라고 상사에게 어필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내가 화가 나는 건, 이걸 상사가 받아들이는데, 그 방법이 계급 강등이라는 거. 부서장 지위를 박탈해야만 현장일을 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경직된 사고 방식인가? 린지처럼 뛰어난 수사관을 사무실에 붙들어 두려한 것부터 어이없지만 현장 복귀를 꼭 강등이라는, 마치 징계처럼 느껴지는 방법을 통해야만 해? 저자가 당시 경찰국 내의 딱딱하고 어리석은 사고의 흐름을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넣은 에피소드인지 아니면 실제로 경찰 조직은 다 그딴식인지는 모르겠다. 


뭐, 암튼 별개로 보였던 세 사건은 결국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나고, 범인은 진작에 잡히지만 역시나 정신이상을 주장한다.  범인의 정신병을 다룬 다른 수사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 또한 결말이 속 시원한 권선징악은 아니다. 그래도 작가는 나름 할 수 있는 한 해피엔딩을 만들려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이 시리즈의 장점은 역시나 여성들의 우정이고, 난 그래서 이 시리즈를 계속 읽고 싶다. 



15. 곰돌이 푸 이야기 전집(앨런 알렉산더 밀른, 어니스트 하워드 쉐퍼드 그림, 이종인 역. 현대지성. 2016. 336쪽)

: '머리는 없'지만 귀여운 곰돌이 푸 이야기 전집. 알고 있는 푸 이야기는 그냥 단편적으로 본 애니메이션이 다였고 제대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인데 물론 어른이 읽기에는 단조로울 수 있지만 흥미로운 부분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헤펄럼프는 어떤 동물일까? 우즐이랑 위즐은? '홍수가 나서 피글렛이 물에 완전히 둘러싸여 버리는 이야기'가 가장 좋았고, 이 이야기 전에는 '크리스토퍼 로빈이 친구들을 데리고 북극 타멈을 떠나는 이야기'가 가장 좋았다. 무엇보다 등장 인물들이 다 좋았다. 모두가 기댈 수 있는 크리스토퍼 로빈. 로빈이 사랑해마지않는 푸. 머리는 없지만 시와 노래를 잘 만드는 푸. 사랑스러운 푸. 읽으면 읽을수록 푸를 더 사랑하게 되는 책. 



16. 여기는 괜찮아요(전성태. 창비. 2024. 280쪽)

: 차분하고 묵직한 단편집. 전에 읽은 작품들이 풍자와 해학의 분위기가 꽤 있었어서 이 작품들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는데 세월호 참사, 가족의 죽음, 팬데믹 상황에서의 소외 계층 등 소재가 무거워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가장 좋았던 건 첫번째 작품 <깡통>.



17. 옐로페이스(R. F. 쿠앙, 신혜연 역. 문학사상. 2024. 444쪽)

: 주니퍼 헤이워드와 아테나 리우는 '찐친'은 아니었다. 다만 서로의 필요에 의해 어울렸을 뿐. 데뷔작 하나 간신히 출판한 지질한 무명작가인 주니퍼와 달리 아테나는 중국계 여성 작가로 대학을 졸업 하자마자 대형 출판사에서 작품을 발표하고 계속 승승장구하다 이제는 넷플릭스와 계약까지 했다. 주니퍼와 아테나는 축하파티를 하다 아테나의 집으로 옮겨왔고, 아테나는 자신만의 팬케이크를 만들어 주겠다며 부엌으로 향한다. 잠시 뒤 부엌에서 들리는 소리에 주니퍼가 달려갔을 때 아테나는 목에 팬케이크가 걸려 사색이 되어 있었다. 하임리히 요법을 시행했지만 소용없었고 주니퍼는 아테나가 죽어가는 걸 무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구조대가 떠난 뒤 주니퍼는 아테나의 서재에서 얼핏 봤던 초고를 충동적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읽을 수록 놀라운 내용의 그 작품을 준은 자신의 에이전트에게 보내 열광적인 반응을 받고, 열정을 다해 초고를 수정해서 출판을 하기에 이른다. 


처음엔 그저 표절 혹은 도둑질 얘기하고 생각했다. 문단에서 있을 법한, 어쩌면 꽤 자주 일어날 지도 모를 이야기. 하지만 이건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작품명만 봤을 땐 백인인 주니퍼가 동양인인 아테나가 쓴 원고로 명성을 얻고 그걸 정당화하고자 필명마저 동양인처럼(준 송) 바꾸고 자신의 혈통에 대해 묻기 전엔 입을 다무는, 동양인에 대한 조롱을 비판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 이상의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가 착취와 폭력에 시달렸다면, 그 이야기를 쓰는 건 당사자에게만 국한된 권리(?)인가? 그 고통을 통해 받은 이익을 누릴 자격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단순히 작품만 놓고 봤을 때 그 고통을 세상에 알리는 목적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이 작품에선 아테나 또한 한국 전쟁 참전 군인의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소설로 발표하여 자신의 명성을 더 높인다. 하지만 아테나가 그랬다고 준도 아테나의 작품을 가져다 이용할 권리가 생긴 건 아니지 않나. 이 사안은 인종과 문화 차별 문제 뿐 아니라 젠더 문제, 사회계층 문제로도 논의를 확대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결국은 모든 게 '태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진짜 속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그 소재를, 해당 사안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 얼마나 진심을 가지고 피해자를 대하느냐의 문제. 피해자에게 공감하기 위해 얼마나 다가가느냐의 문제. 아마 준에게는 이 진실성이 보이지 않았겠지. 물론 준은 자신의 필명을 바꾸거나 자신을 중국계로 착각하여 초청하는 강연에서 불편함을 보이며 나름의 양심(?)을 드러내지만 저자는 독자가 준을 쉽게 용서하게 두지 않는다. 그래서 결말이 참 우스웠다. 아, 출판계 사람들이란... 저자가 정말 까고 싶었던 건 결국 자본주의에 잠식된 출판계였나보다. 책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출판계의 민낯이 조금 슬프다. 



18. 기나긴 순간(빌 밸린저, 이다혜 역. 북스피어. 2008. 208쪽)

: 화자는 병원에서 깨어난다. 천장의 희미한 불빛을 보고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자신의 목에 가로로 길게 상처가 있음을 알아챈다. 곧 의사와 간호사가 오고, 자신이 목이 잘린 채 발견됐으며 성공적으로 수술을 받았다는 걸 알게되지만 자신이 누군지, 어디 사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양말만 신은 알몸으로 목이 잘린 채 발견됐고 양말 안에는 1천달러 지폐가 있었다는 걸 병실을 방문한 경찰에게서 듣지만 역시나 기억나는 건 없다. 경찰은 지문 조회를 통해 그가 빅터 퍼시픽이라는 걸 밝혀 내고, 무사 퇴원한 빅터는 자신을 처음 발견해서 신고한 비앙카를 찾아간다. 한편 경찰은 (또다시) 목이 잘려 죽은 알몸 시체를 발견하는데...


교차 서술을 읽으면서, 그리고 책 뒤의 반전 부분이 봉해진 채 출간됐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반전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짐작은 하면서도 스스로의 추리력을 계속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이 작가의 필력은 뛰어나다. 가장 큰 힌트가 가장 헷갈리게 하는 요소여서 더욱 그랬다. 빅터의 캐릭터가 꽤 냉혹해서 굳이 이런 주인공을 내세워야 했을까 싶기도 했는데 그 이유도 마지막에 알았다. 이 작가의 작품은 두번째이고 먼저 읽은 <<이와 손톱>>보다 더 흥미로웠다. 국내 출간된 작품이 딱 하나 남았다는 게 조금 아쉽다. 



19. 토스트(나이젤 슬레이터, 안진이 역. 디자인이음. 2012. 384쪽)

: 저자의 자전적 소설. 장편이기는한데 음식명으로 된 각 챕터가 짧아서 부담없이 페이지가 쭉쭉 넘어간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지만 엄마는 요리 솜씨가 뛰어나지 않았고 어릴 때부터 음식을 먹는 것 뿐 아니라 만드는 것도 좋아했던,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남성적인 매력이 없어서 늘 아버지가 못마땅해했던 화자의 어린 시절이 담담하게 전개된다. 갑자기 엄마를 병으로 잃고난 후의 이야기는 꽤 슬펐다. 특히 마시멜로우 얘기(p.166)는 너무 가슴 아팠다. 그리고 혼자 잠자리에 들어야 했을 때 고모에게 전화를 해서 준비하는 동안 전화를 끊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는 얘기(p.187)도. 소설이라는 거 알고 읽기 시작했지만 한 챕터 한 챕터의 이야기가 다 에세이같았다. 


다만 중간중간 드러나는 성적 학대의 이야기는, 저자의 의도를 헤아리기 힘들었다. 친족 및 가까운 사람의 아동 성폭력을 고발하는 건가 싶기에는 어조가 너무 담담할 뿐 아니라 뒷얘기도 없고 그렇다고 그런 이야기를 그냥 넘기기에는 등장하는 시점이나 이야기의 농도가 좀 생뚱맞고. 물론 이 작품은 성장 소설이고 그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 중 이런 일들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강렬한 사건들이기는 하지만, 이걸 자서전이 아닌 소설로 기획했다면 그런 이야기들에 좀더 명백한 역할이 주어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 이중 하나는 거짓말(김애란. 문학동네. 2024. 240쪽)

: 경찰서에 있는 지우. 어른이 와야 갈 수 있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엄마의 애인이었던 선호 아저씨에게 연락을 한다. 지우가 경찰서에 있게 된 건... 채운은 엄마가 교도소에 들어가고 이모와 함께 살게 되어 전학을 온다. 담임은 자기소개를 해보라며, 자기네 반에서 학기 초에 했던 자기소개 게임을 말해준다. 다섯 문장으로 자신을 소개하되 반드시 하나는 거짓말이어야 한다는 것. 소리는 채운의 자기소개를 들으며 흥미를 느낀다. 


지우, 채운, 소리는 다 편부모 하에 있고 나름의 결핍을 갖고 있다. 특히 지우는 세상에 단 둘인 엄마마저 잃고 착하디 착하지만 자신과는 일말의 연결도 없는 선호 아저씨와 함께 사는 게 마음 편하지는 않다. 유일한 애착의 대상인 도마뱀 용식이를 돌보며 살 수 있게 돈을 벌고 싶어 소리에게 용식이를 맡기고 건설현장 알바를 하러 떠난다. 그리고 채운이 전학오기 전, 지우와 채운은 한 빌라에 살았던 적이 있고 지우는 그때 보았던 걸 웹툰으로 그린다. 이렇게 셋은 약하게 혹은 미묘하게 얽혀있다. 셋의 이야기는 모두 안쓰러웠고, 각자의 사정을 서로에게 드러내놓지 못하는 것 또한 슬펐다. 다만 결말은 이야기의 완성 측면에서 좀 미진한 느낌이었다. 물론 세 아이는 4 지금보다 더 나아갈 것이고 특히 지운이는 누군가에게 손 내밀 수 있게 되면서 좀더 편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소리와 채운의 이야기가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았을 걸 싶다. 그래도 이 작가의 오랜만의 장편, 정말 반가웠다. 



21. 스파이더 게임(제임스 패터슨, 최필원 역. 대현문화사. 2005. 547쪽)

: 워싱턴 빈민가 거리에서 일가족 3명이 살해된 사건이 일어난다. 심리학자이자 경찰인 알렉스와 파트너 존 샘슨은 그곳으로 달려가지만 곧 유명인의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서 배우 엄마를 둔 매기 로즈와 재무장관의 아들인 슈림피 골드버그가 납치된 사건에 차출된다. 범인은 늘 조용했던 수학교사 게리 손지. 그러나 FBI와 재무부 검찰국까지 합세한 수사는 지지부진하고, 알렉스는 재무부 검찰국 책임자 제지 플레네이건에게 끌린다.


(약스포)

심리학자라는 설정을 왜 넣었는지 모르겠다. 전혀 심리학자같지 않다.  법정 증언 장면에서 '정신의학은 과학이 아닙니다'는 대체 무슨 말이야? 게다가 공범자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는 게 니나 세르지에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라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다. 몸값 지불하려다가 헬기로 납치됐을 때 이미 의심했어야 하지 않나? 게리 손지가 모든 걸 밝히겠다며 불렀을 때도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한다. 그리고 집에서 습격을 받았을 때 나나 마마가 경찰을 부른다고 하자 자신이 경찰이라며 부르지 말라고 한 것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이들 생각은 안 해? 당연히 지원을 요청해야지! 아니, 애시당초 자기 집 감시/보호를 요청하지 않은 거 자체가 이해 안 간다. 아이들이 있는데. 자기 혼자 다 할 거라는 거, '이 쇼는 내 것'이라는 게리 손지랑 뭐가 다른가?


전반적으로 이야기를 너무 질질 끄는 느낌이었다. 우먼스 머더 클럽 시리즈는 안 이랬는데. 아무래도 알렉스가 자꾸만 수사에서 배제되는 상황을 만든 게 패착이었던 듯. 수사에서 배제되었어도 열정적으로 파고드는 미친 캐릭터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 냉철하게 주어진 상황을 분석하고 이용하는 캐릭터도 아니고. 게다가 로맨스는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지. 물론 나름의 반전을 위해서였겠지만... 



22. 딕테(차학경, 김경년 역. 문학사상. 2024. 240쪽)

: 다재다능했던 저자가 여성 인물들을 통해 한국의 아픈 근현대사를 얘기한다. 개인의 삶은 결코 역사와 분리되어 흘러갈 수 없으며, 만주에서 태어난 부모에게서 나서 미국으로 이주한 디아스포라로서의 저자로서는 이것이야말로 계속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주제일 것이다. 전체 9개의 챕터는 아홉 명의 뮤즈의 이름을 갖고 있고 각각의 챕터는 그 내용에 맞는 사진, 그림, 서예 등의 부가자료들이 풍부할 뿐 아니라 서술의 형식도 다양해서 계속 흥미를 갖고 읽어나갈 수 있었다. 물론 책 뒤의 해설에서 역자도 얘기했듯, 이해가 술술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재밌었다. 비록 이 책을 여기저기서 '소설'이라고 분류하는 데에는 반대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저자의 전위적인 산문들을 읽는 동안 지적으로 충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23. 금성에서 봐(빅토리아 비누에사, 신혜연 역. 서사원. 2025. 452쪽)

: 선천적으로 심장병을 앓고 있는 열 여섯 미아. 곧 수술을 앞두고 있지만, 힘겹게 이 세상을 더이상 살아가야 햘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남은 시간이 있을 때 생모를 만나고 싶을 뿐. 몰래 입수한 서류에 따르면 생모는 스페인에 있다고 한다. 사진 수업에서 만난 노아가 이 여정에 함께해 주기로 했지만 얼마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미아는 문득 창문 밖에서 노아를 죽인 사고차의 운전자인 카일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폭포 공원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사라지는 걸 목격하고, 혹시나하는 맘으로 폭포 공원으로 가 자살하려는 그를 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스페인 여행에 억지로 동참하게 한다.


어찌보면 클리셰 범벅이다. 시한부 소녀와 절망에 빠진 소년, 그런데 둘 다 예쁘고 잘생겼어. 그럼 당연히 사랑에 빠져야지. 그리고 그 사랑이 둘을 구원하는 거고. 물론 그 와중에  '엄마찾기'라는 과제가 있고, 그러면서 둘 다 성장을 하고. 뻔한 이야기였는데도 재밌었다. 어쩌면 오랜만에 이런 순하고 동화같은 이야기를 읽어서일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작가의 필력도 한몫 했다고 생각한다.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



24. 하나도 못 맞히는 점집(이선영. 클레이하우스. 2024. 304쪽)

: 하남시 대통로에는 '미스코리아'라는 점집이 있다. 중년 여성과 건장한 남자가 나란히 앉아서 점을 봐주는데 사주팔자를 적어내고 고민을 이야기하면 아기 동자가 남성에게 접신하여 전생을 이야기해준다. 그런데 던져주는 이름이 좀 의심스럽다. 죄다 나이팅게일 아니면 카사노바 같이 유명인들. 게다가 의사한테 과거에 '동이보감을 쓴 허균'이라고 하질 않나...


그냥 편하게 후루룩 읽고 싶어서 선택했고, 역시 딱 그 정도였다. 막 엄청 감동적이지도 않았고 모든 에피소드들이 다 여기저기서 들어봄직한 뻔하고 평범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래서 그냥 엄마나 이모한테서 동네 사람들 얘기 듣는 기분으로 슬슬 읽었다. 비호감 빌런이 등장하지 않기도 했고. 어쩄든 미스코리아 점집에서 하는 얘기는, 사람이 살면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와 의를 지키면 모든 일들이 다 잘 풀릴 거라는 거겠지. 그건 만고불변의 진리고. 



25. 빛이 이끄는 것으로(백희성. 북로망스. 2024. 360쪽)

: 파리에 거주하는 건축가인 화자는 그동안 남을 위한 작업만 해왔다는 생각에 집을 구매하고자 하지만 워낙 예산이 적은 탓에 기대도 안 하고 있던 중, 시테 섬의 오래된 저택이 헐값에 매물로 나왔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 집에 가서 현 집주인의 대리인과 만난 화자는 특이한 내부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저택에 큰 호기심을 느끼고, 집주인의 요구에 따라 스위스 루체른의 요양병원에 있는 그를 만나러 가는데, 마침 도착한 날 집주인은 혼수상태에 빠진다. 어쩔 수 없이 병원에 머물게 된 화자는 그 병원 또한 역사가 오래된 수도원을 개조한 매우 독특한 구조의 건물임을 알게 되고, 집주인이 메모로 요구했던 문제를 풀기 위해 곳곳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플롯은 괜찮은데 문장이 너무너무 엉망이다. 진짜 이렇게 거지같은 문장을 가진 출판물은 오랜만이다. 군더더기가 너무 많아서 초고를 읽는 기분이었다. 한 문장 안에서 동어반복이 일어나는 건 일도 아니고 같은 뜻의 문장을 연달아 두 번 이상 쓴 문단도 허다하다. 디테일이 어긋나는 건 초보 소설가의 실수로 눈감아 줄 수 있겠지만 지저분한 문장들은 견디기 힘들었다. 참다참다 편집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외워두었다. 문장만 괜찮았다면 내용면에서는 나쁘지 않아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었을텐데. 저자의 원래 직업이 건축가여서 쓸 수 있었던 작품이고 두 건물의 독특함을 제외하면 내용상으로는 단순하지만 말이다. 저자가 다음번 작품을 준비중이라니, 나무한테 미안한 건 나뿐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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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케이크와 맥주(서머싯 몸, 황소연 역. 민음사. 2021. 328쪽)

: 화자는 얼마 전 사망한 문단의 영향력있는 작가 에드워드 드리필드의 미망인에게서 그의 전기를 쓰는데 도움을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어릴 때 그와 그의 첫번째 부인과 어울렸던 일이 있었기 때문. 화자는 어린 시절 마을의 성직자였던 숙부의 집에서 자라며 마을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했던 드리필드와 우연히 만나 자전거 타기를 배웠던 일을 시작으로 그와의 인연을 이야기한다. 


표면적으로는 전혀 조롱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술집 종업원 출신이었다는 그의 첫번째 부인 로지에 관한 여러 소문(추문)들 혹은 그런 소문을 부르는 그녀의 태도에 관해 언급하기는 하지만 화자 자신은 그녀의 매력에 처음부터 매료되었으며 그녀의 성정과 상황을 누구보다 이해하는 듯 보인다. 사실 드리필드라는 인물에 대해 당시 문단에서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지만 대체적으로는 공감이 가질 않았다. 이 정도면 뭐,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는 수준 아닌가? 드리필드가 그렇게까지 조롱당하는 느낌은 아닌데. 사실 정말 부끄러워야 할 사람들은 블랙스터블 사람들 아닌가? 그야말로 위선의 표본이잖은가. 특히 화자의 숙모의 태도는 실소가 나올 지경. 


아마 저자는 이 소설을 읽고 당대의 문학계가 어떻게 반응할 지 이미 알고 이 소설을 썼을 것이다. 로지와 드리필드에 대한 자신의 진짜 평가보다는 소설에 그려진 피상적인 모습만으로 자기 얘기일까봐 전전긍긍하는 인사들의 모양새가 진짜로 우스웠을 듯. 



2. 아르테미스(앤디 위어, 남명성 역. RHK. 2021. 420쪽)

: 달의 도시 아르테미스에서 짐꾼으로 일하는 재즈. 돈을 모으기 위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물건을 배달한다, 심지어 불법적인 것도. 종종 거래했던 엄청난 부자 트론이 또다시 어떤 물건 배달을 제안하고, 이를 수락한 재즈는 약속일자를 지키지만 트론은 물론 그의 경호원까지 살해당한 것을 발견한다. 본능적으로 몸을 피한 재즈는 이 물건은 물론 트론이 추진하고 있던 일이 아르테미스 전체의 권력 관계에 얽혀 있음을 알게 된다.


수학천재라는 설정은 그닥 매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재즈의 아버지가 보여주는 부성애와 주변 인물들이 더 매력적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줄거리가 좀 산만하고,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의 행태는 더욱 산만하다. 사실 영화 <<마션>>도 되게 재미없었어서 책은 좀 재밌을까 싶어서 읽은 건데, 앞으로 이 작가는 안녕이다. 



3. 지옥의 설계자(경민선. 북다. 2024. 264쪽)

: 사후에 의식을 업로드해서 다시 삶을 이어가는 게 일반화된 미래 세계. 연쇄살인범 완영순 또한 자신의 사후세계를 미리 결제해 두었다고 한다. 그의 뇌를 통해 그의 의식을 사후세계로 업로드하기 전날, 이송 중 그의 뇌가 도난당하고 젊은 IT 사업가 철승은 완영순의 의식이 자신이 만든 지옥에서 고통당하고 있음을 공개한다. 대중들은 철승의 조치를 열렬히 환영하고, 철승은 강력범죄자들을 대상으로 지옥 서버를 확대한다. 한편 대체현실상에서의 자잘한 의뢰를 해결해 주고 돈을 버는 지석은 어느날 철승의 지옥에 무고한 자신의 엄마가 갇혀 있다는 수경의 의뢰를 받는다.


사실 전에는 사적단죄가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그 방법 밖에 없을 거라고. 특히 이런 거지같은 대한민국의 형법 체계 아래서는 더더욱. 하지만 그 사적단죄를 누군가가 대신하겠다고 한다면? 그 자격을 과연 누가 부여할 수 있으며 그 정당성을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철승이 처음부터 맘에 안 들었던 이유이다. 뭐, 지석도 딱히 맘에 드는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읽는 내내 소설의 설정과 주인공의 고군분투가 너무 피곤했다. 법의 경직성과 대중들의 부화뇌동도. 저자가 뭘 얘기하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그리고 저자의 아이디어와 이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나쁘지는 않지만 이 작가를 또 읽고 싶지는 않다. 



4. 흰 옷을 입은 여인(크리스티앙 보뱅, 이창실 역. 1984Books. 2023. 160쪽)

: 시적인 문체로 쓴 에밀리 디킨슨 전기. 하지만 있었던 일들을 시간순으로 나열하거나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저자의 상상력이 상당히 가미되었을, 에밀리의 마음 상황에 더 신경쓴, 어쩌면 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이야기이다. 


이전에 에밀리 디킨슨의 편지들을 읽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헤맸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이 책은 다른 전기들에 비해 불친절하다, 그래도 행간에서 시인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배어난다. 저자가 에밀리의 마음을 짐작하는 게 굳이 근거를 찾지 않아도 정당하다 느껴질만큼. 문장이 아름다워 시인의 짧고 고요했던 삶이 더욱 빛나는 느낌이다.



5. 재뉴어리의 푸른 문(앨릭스 E. 해로우, 노진선 역. 밝은세상. 2024. 548쪽)

: 재뉴어리의 아빠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는 고고학자다. 엄마는 재뉴어리가 아기일 때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재뉴어리는 뉴잉글랜드 고고학협회장인 로크씨이 저택에서 그의 보호 아래 커나가고, 아빠는 로크씨를 위해 특이한 물건들과 보물들을 수집하여 가끔씩 돌아온다. 일곱 살 어느날, 재뉴어리는 로크씨와 여행을 갔다 혼자서 호텔을 빠져나와 무작정 걷는데, 황량한 들판에서 다 쓰러져가는 낡은 목재로 된 푸른 문을 발견한다. 다른 세상을 상상하며 문지방을 건넜지만 아무 변화도 없다. 하지만 늘 갖고 다니는 가죽 수첩에 '옛날에 용감하고 만뇽을 부리는 소녀가 문을 발견했다. 그것을 마법의 문이라서 대문자로 시작한다. 소녀는 그 문을 열었다'(21쪽)는 글을 쓴 후 다시 문지방을 넘자 공기가 바뀐다. 해수와 돌로 만들어진 세상.


판타지 성장 소설이지만, 재뉴어리가 책 속에서도 말했듯 이건 사랑 얘기이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사랑 이야기.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그걸 얻기 위해 재뉴어리가 너무 큰 고난과 아픔을 겪었기에 읽는 나도 진이 빠졌다. 하지만 단 한순간도 해피엔딩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The Written이 좋았다. 글의 힘을 믿고 글의 힘이 온전히 실현되는 곳. 글 속에서는 무엇도 가능하고 무엇도 괜찮아지는 곳. 그 곳에 갈 수만 있다면, 난 세상의 모든 문을 열어보고 싶다. 



6. 공룡의 이동 경로(김화진. 스위밍꿀. 2023. 228쪽)

: 네 친구의 이야기. 연작이다. 각각 읽어도 무방하긴 하다. 차례로 넷의 시작이자 주희의 이야기, 그리고 솔아, 지원, 현우, 마지막으로 피망이의 이야기다. 자신의 마음을 얘기해주는 차분한 말들. 첫번째 작품은 다른 앤솔러지에서 이미 읽었는데 그때 이 네 명의 이야기가 더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아무 정보도 없이 작가의 이름만으로 선택한 이 책의 작품들이 다 그 이야기의 연작들이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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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갈수록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하지만 내 마음만 살필 수는 없지. 소중히 하고픈 상대의 마음을 거리를 지키면서 살피는 건 중요한만큼 힘들다. 이 네 명이 그렇게 조심스러운 사람들이어서, 그럴 줄 아는 사람들이어서 좋았다. 심지어는 피망이까지도. 그렇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다정하고 따뜻해서 위로받았다. 



7. 거의 황홀한 순간(강지영. 나무옆의자. 2025. 288쪽)

: 사귀던 남친과 헤어지고 서울에서 다니던 대학까지 휴학하고 내려온 하임. 엄마는 애매한 비중의 역할을 맡아하는 배우고 아빠는 엄마를 애지중지 수행하는 매니저 역할을 하느라 바쁜 와중에 하임은 연향역 매점을 얼떨결에 떠맡게 된다. 이런 하임의 눈에 들어온 한 남자. 연향역 역무원인 지완은 훤칠한 키에 뽀얀 얼굴로 매일 매점에서 화이트 하임을 사간다. 한편 지완의 엄마가 운영하는 식당에 반신불수인 남편 희태와 고등학생 딸을 데리고 무영이 내려온다. 식당일을 도우면서 식당에 딸린 집에 살기로 한 무영의 팔에서 상처를 발견한 지완은 직감적으로 가정폭력을 알아차린다.


(스포)


하임의 말랑하고 귀여운 가족사, 애정사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 무영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무영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정말 힘들었다. 사실 첫부분에 지완이 좋은 사람이어서 기꺼운 맘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무영을 대하는 태도에 짜게 식었다. 난 만인에게 다정한 남자 싫다. 그렇다고 지완이 무영을 외면했어야 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애매하게 구는 게 싫었는데 198쪽의 그 장면에서 결정적으로 완전히 싫어졌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하임에겐 가지 말았어야지. 게다가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후의 하임 태도도 공감할 수 없다. 특히 무영의 마지막 때문에. 죽은 연인은 영원히 가슴 속에 자리잡는 법이다. 그걸 받아들이는 하임은 나보다 성숙했나보다.


작가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내가 그동안 폭력에 시달리는, 익숙해져 무기력해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기 힘들어했던 이유이기도 하고. 



8. 그녀와 그(조르주 상드, 조재룡 역. 휴머니스트. 2022. 348쪽)

: 저자의 자전적 사랑 이야기.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와의 연애담을 기초로 했다는데, 남자가 너무 비호감이어서 읽는 내내 진도가 더뎠다. 아무리 연하라도 이렇게 철이 없을 수가 있나.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랑에 헌신하는 여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처음엔 사변적인 대화가 지루해서 이 다음에 <<세기아의 고백>>을 읽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갈수록 이 전형적인 철딱서니 연하남의 행태가 자꾸만 내 과거의 어떤 인간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이 연애가 어떤 종말을 맞이할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결말은 뜻밖에 합리적이었지. 테레즈의 주체적인 캐릭터만 남은 이야기였다. 



9. 세기아의 고백(알프레드 드 뮈세, 김미성 역. 문학동네. 2016. 404쪽)

: 저자와 조르주 상드와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 귀족 청년 옥타브는 파리에서 연인과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시골로 내려간다. 거기서 아름답고 헌신적인 여성 브리지트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과부인 그녀와의 사랑은 그녀의 명예에 치명적인 오점을 입히게 된다. 


답없는 한심한 옥타브의 이야기. 여성을 창녀 아니면 성녀로 극단적으로 이분화해서 받아들이는, 의심증과 허세 가득한 돌아이의 자기 찬양 회고록이다. 글솜씨가 없는 건 아닌데 전반적으로 '불쌍하고 순진한 나'를 바라보는 연민 가득한 시선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10. 마마 블랑카의 회고록(테레사 데 라 파라, 엄지영 역. 휴머니스트. 2023. 244쪽)

: 화자는 열두 살. 골목 끝 낡고 조용한 집 대문을 살짝 밀고 들어갔다가 이름처럼 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마마 블랑카와 마주친다. 넉넉한 마음씨로 화자를 불러들인 마마 블랑카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화자와 친구가 되고, 화자에게 자신의 삶을 쓴 원고를 남긴다. 피에드라 아술 농장에서 여섯 자매들과 함께한 어린 시절. 영어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자매들을 전반적으로 통제하려 들던 잉글랜드 계 가정교사 에벌린과 하녀 알라그라타와의 생활. 그리고 늘 멀고도 가까웠던, 동경의 대상이었던 어머니. 


당시 베네수엘라의 농장 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사탕수수 작업이 이루어지던 날 그 달콤한 물로 했던 목욕, 클럽이자 극장이었던 사탕수수 제분소... 물론 늘 천국같지만은 않았다. 늘 아들을 원했고 딸들에겐 관심도 없던 아버지와 딸들의 외모에 집착해서 블랑카의 생머리를 마뜩찮게 여겼던 엄마. 그리고 딸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는 명분아래 대도시로 이사해버림으로써 끝나버린 농장에서의 삶. 어쩌면 마냥 해맑은 시골 소녀의 회상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베네수엘라의 자영 농업이 무너지고 산업화라는 명분아래 대기업에 편입되는 슬픈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문장이 아름답고 캐릭터들이 생생해서 즐겁게 읽었다. 결말은 아쉬웠지만, 그건 인생에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지. 그래도 돌아볼 수 있는 추억이 있음으로 인생을 버텨나갈 수 있는 거니까, 그걸로 됐다. 



11. 4월의 유혹(엘리자베스 폰 아르님, 이리나 역. 휴머니스트. 2023. 348쪽)

: 모든 걸 일로만 연결지어 생각하는 변호사 남편을 둔 로티. 시내에 나와 혼자 차를 마시다가 우연히 신문에서 이탈리아의 고성을 4월 한 달 동안 대여해 준다는 광고를 보게 된다. 강하게 끌리지만 비용이 부담스러운 그녀는 같은 광고를 본 로즈에게 말을 걸어 함께 그 성을 빌리기로 하고, 경제적인 부담을 덜기 위해 두 명을 더 모집하기로 한다. 이들이 낸 광고에 응한 사람은 문단의 영향력 있는 작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 여러 문호들과 어릴 때부터 어울렸던 추억만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는 늙은 피셔 부인과 뛰어난 미모와 높은 신분 덕에 어딜가나 주목의 대상이 되어 피곤한 레이디 캐럴라인. 이들은 이탈리아의 산 살바토레에서 4월을 보낸다.


뒷표지에 이 소설이 엄청나게 유쾌하고 아름다울 거라 해서 기대가 높았는데, 그만큼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기대 없이 읽었다면 나도 유쾌함까지는 아니더라도 편안하게 받아들였을지도. 묘사되는 이탈리아의 풍광은 아름다웠다. 묘사만으로도 내가 마치 4뤌의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꽃향기 속에서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만큼. 하지만 캐릭터들이 상당히 입체적으로 얄미웠다. 특히 피셔 부인. 물론 이 소설이 진행되면서 해맑은 로티에게 감읍되어 변하긴 하지만, 난 로티의 그 대책없는 해맑음도 딱했기에... 결말은 모두의 해피엔딩이지만, 난 로즈와 남편의 이야기가 너무 찜찜했다. 남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냥 우연에 의해 얼렁뚱땅... 전반적으로 괜찮았지만 광고 문구처럼 여러 번 읽고 싶지는 않다. 



12. 일러스트레이티드 맨(레이 브래드버리, 장성주 역. 황금가지. 2010. 368쪽)

: 화자는 우연히 시골길에서 마주친 남자와 노숙을 하게 된다. 불빛에 비친 그의 몸은 문신으로 뒤덮여 있다. 화자는 뭔가 찝찝한 남자의 말에 잠을 못 이루고 있다가 남자의 몸에 새겨진 문신이 혼자 움직이는 걸 발견한다. 그리고 그 문신들에 녹아 있는 18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배경만 미래일 뿐, 당대의 사회 문제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단편들이다. 인종 차별, 교리주의적 종교 행태 등. 이 모든 이야기들은 각기 합리적인 결말을 맺지만, 인간과 지구 입장에서는 새드 엔딩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대환영이지.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화성의 미친 마법사들>. 가장 공감됐던 건 <세상의 마지막 밤>. 가장 재밌었던 건 <여우와 숲>.



13. 소설 11, 책 18(다그 솔스타, 김승욱 역. 문학동네. 2019. 228쪽)

: 비에른 한센은 이제 쉰이 되었다. 이십 여 년 전 사랑에 빠져 아내와 아들을 버리고 함께 떠나온 투리의 집에서도 나와버린 그는 투리와 함께하던 연극 동호회에서도 실패를 맛보고 나온 상태다. 한때 수도의 잘 나가던 공무원이었던 그는 투리와 함께하기 위해 이 작은 도시로 와서 시의 재무관으로 일하고 있지만 일 또한 그를 권태에서 구해주지 못한다. 이런 그에게 어릴 때 버렸던 아들이 이 도시의 대학에 다니게 되었다며 집을 구하기 전까지 같이 살아도 되겠냐는 연락을 해온다. 


초반부터 주인공에게 공감은커녕 일말의 동정심도 들지 않았다. 연인과 함께하기 위해 무책임하게 가족을 버렸으면서 이제 연인이 나이들어 신체적인 매력을 잃었다는 이유로 그녀를 떠나면서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자기합리화를 하다니, 진짜 찌질하다. 일과 취미 생활마저 그를 구할 수 없다는 건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누구에게나 공감할 수 있는 요소겠으나 그걸 타파하기 위해 한 짓이 너무 어이없었다. 이 인간이 이런 방법을 쓸 수 있었던 건 북유럽 복지제도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 면에서 씁쓸했던, 작가의 필력에도 불구하고 남들에게 권하기 힘든 책이었다. 



14.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베로니크 오발데, 김남주 역. 뮤진트리. 2011. 279쪽)

: 사랑하는 아내 이리나가 탄 차가 강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아내의 사인은 익사가 아니고, 아내가 탄 차도 처음 보는 차다. 랜슬롯은 자기가 알던 아내가 과연 누구인지 혼란스럽고 아내의 죽음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와 아내 이리나는 3년 전 길에서 우연히 만났고, 랜슬롯은 당시 함께 살고 있던 첫번째 아내에게서 단숨에 떠나와 이리나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그때 이리나는 어떠했나. 그리고 이제와서 찾아온, 죽었다던 이리나의 아버지는 과연 누구인가.


미스터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이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 허망함을 이야기한다. 물론 우리가 타인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그녀/그가 보여주는 일면만을 보고 내가 느끼는/믿는 부분만을 받아들이면서 평생 이해하려 노력하다가 끝나는 게 인간 사이의 관계 아닌가. 소설의 결말은 좀 허전할 수 있지만, 그저 이게 삶이겠다. 



15. 카산드라의 여자들(그웬 E. 커비, 송섬별 역. 위즈덤하우스. 2025. 312쪽)

: 21편의 단편들. 미래의 이야기도 있고 카산드라가 살았던 과거의 이야기도 있지만 공통점은 모두 여성의 이야기라는 것. 조금 웃기고 많이 빡치기도 하지만 대체로 통쾌하다. 카산드라 이래로 여자들은 그 발언의 진지함과 중요성을 무시당해 왔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 안에서는 그런 열받음은 덜하다. 어찌됐든 여성의 목소리는 크게 퍼져나가니까.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일상다반사>. 나 진짜 이런 일상 원한다. 



16. N분의 1은 비밀로(금성준. &(앤드). 2021. 216쪽)

: 영치창고 담당자인 교도관 기봉규는 재소자 김대식 노인이 입소할 때 맡긴 트렁크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현금을 발견한다. 김대식 노인은 교도소 안에서 죽었고 듣자하니 일가친척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한다. 가방 안의 현금은 모두 9억원. 박봉으로 간신히 생활을 꾸려나가는 기봉규는 동료 허태구와 함께 이 돈을 꿀꺽 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내에게만 털어놓는데, 그걸 처남과 처남의 여자친구가 듣고 만다.


크게 기대를 하고 읽은 건 아니었지만 기대보다 훨씬 별로였다. 설마 싶게 등장인물들이 다 멍청하고 캐릭터가 겹친다. 어떻게 모든 인물들의 색이 다 비슷하지? 심지어는 조폭 두목마저도 그 멍청함은 주인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게다가 줄거리는 설마 이렇게 흘러가진 않겠지 하고 책 초반에 생각했던 딱 그대로 흘러간다. 결말까지. 그래도 출판사 작가상 수상작이라기에 괜찮을 줄 알았는데 진짜 별로였다. 



17. 힐하우스의 유령(셜리 잭슨, 김시현 역. 엘릭시르. 2014. 392쪽)

: 오랫동안 간병하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언니네 집 유아방에 얹혀 사는 엘리너. 초자연 현상이 일어나는 힐하우스에 묵으면서 자신의 실험을 도와줄 사람을 찾던 몬터규 박사는 엘리너가 어릴 때 겪었던 일에 주목하여 엘리너에게 참여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고, 엘리너는 언니에게는 말도 안 하고 힐즈데일로 와버린다. 이 실험에는 엘리너 외에도 동거인과 크게 다투고 홧김에 떠나온 시어도라와 현재 힐하우스의 주인의 조카이자 언젠가는 이 저택을 상속받게 될 루크 샌더스도 참여한다. 힐하우스에서의 첫날, 우려와 달리 모두 깊은 잠을 잘 자고 일어난다. 하지만 둘째 날 밤, 있지도 않은 개 짖는 소리에 몬터규 박사와 루크가 주변을 살피러 나간 사이 엘리너와 시어도라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잠에서 깨고, 시어도라는 자신의 옷이 모두 찢기고 피가 묻어 있고, 벽에는 온통 피칠갑이 되어 있는 걸 발견한다.


(약스포)

저택에 점점 사로잡히는 엘리너의 심리를 잘 묘사했다. 어쩌면 엘리너는 처음부터 저택에서 나갈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엘리너는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집 혹은 가족, 그곳이 어디든, 부르는 이가 누구든 엘리너가 돌아가야할 곳은 없으므로. 힐즈데일의 작은 집을 보며 했던 엘리너의 상상의 삶과 엘리너의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울리던 '연인과의 만남으로 끝나는 여행'의 노래는 결국 새드엔딩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난 이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엘리너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므로. 이제는 저택과 엘리너 모두 만족했을 것이다. 



18. 중력의 노래를 들어라(남세오. 아작. 2021. 420쪽)

: 단편집. 프롤로그가 감성적으로 내 스타일이어서 꽤 기대하고 읽었는데 첫번쨰 작품부터 병맛이어서 힘들었다. 병*같지만 멋있어, 가 아니라 그냥 병*같았다. 작가의 필력이 그랬다는 게 아니라 작품 속 캐릭터들이. 두번째 작품은 다른 의미로 힘들었고. 각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는 명확했고 대체로 작가의 우려에 동의하긴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너무나 노골적이라는 점이 오히려 독서의 진도를 느리게 했다. 아마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은 선뜻 집어들기 힘들 거 같다. 



19. 나는 당신의 심장으로 살고 싶습니다(어슐러 도일 엮음, 안기순 역, 김지혁 (감수). 라이프맵. 2009. 175쪽)

: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연애 편지 모음. 예전에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가 읽고 있던 그 책이다. 알려졌다시피, 실제로 이 책이 없어서 어슐러 도일이 엮었다고 함. 목차에서 헨리 8세와 바이런이 포함된 걸 보고 짜게 식었는데 그냥 읽었다. 시작이 헨리 8세여서 더욱 냉소적이 되었는데 문득 이 책의 효용성이 사랑은 필히 변한다는 걸 보여주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시니컬하게 계속 읽었다. 역시 사랑의 말은 휘발성이 강하지. 사랑만큼 빨리 변하는 건 없다. 


그래도 베토벤의 그 유명한 편지를 읽을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읽다보니 아내에게 평생의 사랑을 바친 인물들도 더러 있어서 괜찮았다. 하지만 나다니엘 호손처럼 꿈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징징댄다든지 벤자민 디즈데일리처럼 자신의 사랑을 상대방의 경제력을 깎아내리는 걸로 증명하는 건 비호감이었다. 


첨언하자면, 조르주 상드를 조지 샌드라고 번역하고, 기독교는 크라이스트교라고 번역했으면서 카톨릭 대신 가톨릭이라는 단어를 쓰는 등 편집이 무성의한 느낌을 받았다. 



20. 동경(김화진. 문학동네. 2024. 224쪽)

: 인형 리페인팅 수업에서 만난 세 사람. 민아는 리페인팅을 가르치던 강사였는데 곧 사업체를 차린다. 아름과 해든은 수강생이었고 둘이 먼저 친해졌다. 아름은 민아가 회사를 만들고 함께 일하자고 하자 바로 합류하지만 해든은 원래 전공이었던 사진을 계속하고 싶어한다. 아름은 민아와 함께 일한지 2년이 지나자 번아웃이 오고, 해든이 제안한 사진이 궁금해진다.


1부는 세 명의 성격과 각자의 사정을 이야기해 주는데, 현실에 있음직하면서도 또 그들만의 특별함이 있다. 우유부단한 아름과 속얘기를 잘 못 꺼내고 자꾸만 생각과는 다른 말과 행동을 하는 해든, 야무지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지만 정작 속으로 곪아들어가는 자신을 돌보는데는 서툰 민아. 닮았지만 다른 이 셋의 삶과 생활이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또 한편으로는 대견하다. 소설 안에 들어가서 가만히 그들 곁에 앉아 얘기를 들어주고 어깨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 



21. 강변의 조문객(메리 셸리, 정지현 역. 민음사. 2024. 256쪽)

: 9편의 단편집.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이야기들이다.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전설에 바탕을 둔 이야기도 있다. 이야기들의 결말이 대부분 동화적이고 상당수 우연에 의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당대에는 사회가 지금보다 좁았으려니 하고 이해하고 읽었다. 가장 맘에 들었던 건 표제작. 



22. 흐르는 강물처럼(셸리 리드, 김보람 역. 다산책방. 2024. 448쪽)

: 1948년 콜로라도 아이올라, 열일곱 살 토리는 마을에 나갔다가 외지인이 분명한 윌과 마주친다. 첫눈에 서로에게 끌린 두 사람. 하지만 만취한 토리의 동생 세스를 부축하다 발목이 삔 토리를 윌이 안고 집으로 오자 토리의 아버지는 경계를 하고, 세스와 이모부는 인종차별적인 욕을 내뱉는다. 다음날 윌을 찾아 여관에 간 토리는 아메리카 원주민인 윌이 쫓겨났음을 알게 되고 그를 찾아 헤매다가 문득 마을에서 미치광이 취급을 받고 있는 노파 루비앨리스의 집에서 그와 재회한다. 집안 사람들이 복숭아 수확으로 바쁜 틈을 타서 윌과 밀회를 즐기지만, 얼마후 윌은 시신으로 발견된다.


그냥 사랑 이야기인 줄 알고 집어들었다. 이렇게 힘들 줄은 정말 몰랐다. 집을 떠나면서 토리는 자신의 이름을 집안 사람들의 애칭이 아닌, 윌이 여왕같다 말했던 빅토리아로 제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윌을 만나면서 새로운 사람이 된 빅토리아가 기특하고 대견했지만 간혹 예전의 '착한' 딸이자 누나, 조카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답답했다. 그래도 빅토리아는 점점 성장한다. 특히 자신이 사랑하는 복숭아 나무에 관한 판단과 루비앨리스에 대한 마음은 신산한 그녀의 삶에서 드물게 좋았던 순간이기도 했다. 슬프기도 했지만... 하지만 인생이란, 결핍과 이별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게도 하는 것. 누구보다 강해진 그녀의 모습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작가의 다음 작품에서 또다른 모습의 빅토리아를 다시 만나고 싶다. 



23. 부적격자의 차트(연여름. 현대문학. 2024. 176쪽)

: 물을 통해 전염되는 치명적 바이러스로 멸망해 버린 세상. 살아 남은 사람들은 우연히 개입한 인공지능 '모세'의 제안에 따라 오염되지 않은 곳에 돔을 둘러 '중재도시'를 세우고 일정 연령이 되면 '소거' 즉 안락사를 해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시스템을 도입한다. 다음 세대는 전 세대의 업무와 이름을 물려받으며 생애 한도까지 '실무자'로서 살게 되고 효율적인 생존을 위해 실무자들은 아침마다 균형제를 먹고 귀에는 늘 모세와의 소통을 위한 장치를 끼우고 있다. 실무자 세인은 소거 대상자들의 마지막 차트를 기록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얼마전 대규모의 오류로 인해 많은 실무자들이 생애 한도가 남았음에도 스스로 소거를 해 한동안은 업무가 비어 다른 병동의 오류 환자들을 맡게 된다. 그곳에서, 이 중재도시에서는 거의 없는 '꿈을 꾸는' 증상을 보고한 레드를 만난다.


치명적 바이러스, 돔으로 둘러싸인 도시, 감정을 제한하는 약물... 기시감이 강하게 드는 세계관이다. 하지만 이 책의 핵심은 '소거'에 있다. 그저 인류 전체를 위해, 다음 세대 양성을 위해 존재하다 일정 연령이 되면 사라져 주는, 사는 동안 감정을 느낄 일도, 자신만의 즐거움을 누릴 일도 없이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작업만을 해야 하고 조금의 감정 노출이나 꿈을 꾸는 일이 생기면 '오류' 취급을 받는 생존이, 오류가 쌓이면 생애 한도가 되지 않았음에도 소거되는 삶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들의 생존이 정말 생존일까? 인간답지 않은, 당장 안드로이드로 대체되어도 아무런 티가 나지도 않을 실무자를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때는 <<멋진 신세계>>나 영화 <이퀄리브리엄>의, 그리고 지금 이 작품의 약물을 간절히 원하기도 했었다. 호르몬에 휘둘려 널을 뛰는 마음을 겪어본 사람은 공감해 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의해야 한다. 오래전의 합의에 의해서라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통제되는 삶이 전체주의 하의 삶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선택하고 꿈꾸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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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뒤쫓는 소년(설흔. 창비. 2018. 272쪽)

: 언제부턴가 제국에는 까마귀 - 포도청 관원 - 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열 일곱 책을은 산책 후 집에 들어갔는데, 까마귀 넷이 들이닥쳐 갑자기 할아버지의 서재를 뒤엎어 모든 책을 태워버리고 할아버지마저 잡아간다. 망연자실한 책을 앞에 나타난 또래의 소녀 섭구 씨. 섭구는 책을 씨에게 제국을 구할 책을 써야 한다면서 책을 좇는 여행을 함께 시작한다.


청소년 소설인데, 청소년들이 이 책을 과연 즐겁게 읽을지... 이미 책을 좋아하는 하이라면 모를까, 책에 관심 없던 아이를 이 책을 통해 책 앞으로 끌어들이기는커녕 오히려 멀어지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전 일화를 새롭게 해석한 건 어른으로서는 충분히 흥미로웠지만, 청소년 입장에서는 잔소리 내지는 교훈 집착적으로 읽힐 듯. 한마디로, 올드했다.



2. 재버워크의 밤(프레드릭 브라운, 최세민 역. 엘릭시르. 2024. 352쪽)

: 뉴욕 외곽 캐멀 시티. 닥 스토거는 유일한 주간지 '캐멀 시티 클라리온'의 편집자이자 발행인이다. 평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팬인 닥은 매일매일이 똑같은 이 작은 마을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나 화끈한 기사를 써보는 게 소원이다. 신문 발행 전날 밤, 여느 때처럼 소소한 마을 소식들로 지면을 채우고 퇴근 후 한 잔 하려던 닥은 창문 너머로 마을 경찰관의 조금 신경쓰이는 움직임을 목격한다. 그에게 술을 한잔 사줄까 했지만 타이밍을 놓친 닥. 갑자기 그에게 '살인이야!'라는 전화가 걸려오는데...


인쇄공 직원 피트, 단골 술집 주인 스마일리, 친구인 변호사 칼 트렌홀름, 그날 낮에 이혼한 랠프 보니, 뜬금없이 등장한 예후디 스미스, 체스 상대인 젊은 앨 그레인저. 


닥의 집 문을 누군가 두드리던 순간부터 마치 꿈 속인 듯 여러 사건이 휘몰아친다. 범인은 내가 생각한 그 인간이었지만 동기는 생각지도 못했다.. 재버워크는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괴물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재버워크는 어쩌면 단 한 명일 수도, 혹은 이 사건에 관련된 모두일 수도 있겠다. 각각의 스토리가 있는 사건이 하나로 얽혀들어 해결되는 과정이 매끄럽게 이어져 깊이 빠져들어 숨죽이고 읽었다. 책을 다 읽자마자 바로 이 작가의 다른 책들을 검색했을 정도. 이 작가의 모든 작품들이 번역 출간됐음 좋겠다.



3. 못해 그리고 안 할 거야(리디아 데이비스, 이주혜 역. 에트르. 2024. 376쪽)

: 시, 일기, 낙서, 에세이 혹은 짧은 소설들. 대체로 재밌었기에 장르는 궁금하지 않았다. 간혹 지루한 글도 있기는 했다. 소재 또한 다양했지만 겹치는 것도 몇 개 있었는데 특히 플로베르의 서신에 많은 흥미를 갖고 있는 듯 했고, 플로베르는 나도 좋아하는 작가였기에 나 또한 흥미롭게 읽었다. 뭔가 환기되는 기분이었다. 


생활의 작은 하나하나가 모여 삶이 되고 그게 결국은 내 인생인 것. 



4. 악마의 계약서는 만료되지 않는다(리러하. 팩토리나인. 2022. 320쪽)

: 낡을 대로 낡은 넓은 부지의 3층 주택에 할머니와 살고 있는 대학생 서주. 비록 친 손주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거둬 준 할머니를 누구보다 아끼는데, 할머니는 사실 지독한 현실주의자이자 재산관리인이다. 이 넓은 집을 세놓아 먹고 살았지만 이미 다 쓰러져가는 집에 세입자는 이제 딱 두 명. 그러던 어느날, 할머니가 갑자기 빈 방들을 모조리 세 놓았다고 해서 웬일인가 싶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사람들이 출몰한다. 알고보니 지옥이 리모델링 중이라 죄인들을 임시로 이주시킨 것. 이들을 관리하는 악마 또한 와있는데, 서주는 어느날 급하게 알바를 나가는 자신을 위해 미숫가루가 식탁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악마를 이런 식으로 미화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따져보면 악하기로는 현실 세계의 인간들이 더하니까 뭐. 스토리에 군더더기가 없고 가벼운 듯 하면서도 현실의 문제점들과 사회 모순들을 잘 짚어줘서 재밌게 읽었다. 앞으로 약간의 깊이가 더해진다면 누구보다 좋은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 기대된다.



5.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김이설. 자음과모음. 2024. 208쪽)

: 돌봄노동에 시달리는 미경. 남편이 진 빚 때문에 허드렛일로 간신히 생활을 이어가는 정은. 빈둥지 증후군 난주. 대학 친구 셋이 25년만에 마흔 아홉이 되어 강릉으로 떠난다. 사느라 바빠 자주 만나지도 못했고 셋이 한번에 보기도 힘들었지만 이제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각자 다른 기억과 다른 사정을 지니고 떠나온 중년의 2박 3일 + 1일. 


이들이 언급하는 사건들이 다 내 기억에도 꽤나 생생해서 상당 부분 공감하며 읽었다. 단순히 중년에 접어든 친구들의 신세한탄이나 과거 회상, 묘하게 어긋나는 감정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삶은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가야 하는 것이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건 그 자체가 용기이고 극복이다. 각자의 사정도 각자에겐 겨우겨우 감당해 낼 만큼의 무게를 지닌 것. 누가 더 힘들고 덜 힘들 것도 없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또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거니까.



6.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아말 엘모타르, 맥스 글래드스턴. 장성주 역. 황금가지. 2021. 284쪽)

: 시간의 가닥을 따라 여행하며 역사적 사건을 수정, 삭제하며 싸우는 '가든' 과 '에이전시'. 이 두 세력의 핵심 전력인 블루와 레드가 어느 순간 전장에서 시간차를 두고 마주치고, 서로에게 메시지를 남기기 시작한다. 


이들의 편지가 어느 순간부터 사랑이 되었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블루가 그걸 말하기 전에, 나는 이미 알 것 같았다. 이들이 사랑에 빠졌음을. 이들의 사랑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 지 궁금해 끝까지 집중했지만, 사실 이 소설 속 세계관은 그닥 맘에 들지는 않았다. 사랑과 전쟁, 둘 중 하나 - 난 사랑에 한 표 - 에 더 치중했으면 더 좋았을 걸. 



7. 얼음 속의 여인(엘리스 피터스, 최인석 역. 북하우스. 2024. 368쪽)

: 캐드펠 수사 시리즈 6. 여전히 내전 중인 잉글랜드. 1139년 11월, 혼란의 와중에 피난민들 중 귀족 남매인 에르미나와 이브, 그리고 그들을 슈루즈베리의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으로 인도하던 힐라리아 수녀의 행방이 묘연해진다. 우스터의 베네딕토회 수도사가 와서 그들을 찾는데 도와주기를 청하는데, 현재 남매의 보호자인 외숙은 모드 황후 편이라 슈루즈베리에는 들어올 수 없다. 하지만 휴 베링어는 최선을 다해 수색할 것을 약속한다. 한편 캐드펠 수사는 브룸필드 수도원에 위급한 환자가 있다는 연락에 그를 치료하러 간다. 그는 강도에 당한 수사로, 산에서 남매와 젊은 여성을 만났음을 잠결에 중얼거린다.


역시 범인을 숨겨(?)두는 작가의 수법이 교묘했다. 난 처음에 그 사람이 그렇게 나쁜 사람일 줄 몰랐지. 다 읽고나서 내가 못 잡고 넘어간 단서들이 있었음을 깨닫긴 했다. 어찌 보면 에르미나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물론 상당 시간 에르미나의 흔적을 찾기 힘들긴 하지만. 캐드펠 수사의 활약이 조금 미진하지 않나 싶을만큼 꽤 스케일이 커진 느낌이다. 역시 재밌게 읽었다. 



8. 성소의 참새(엘리스 피터스, 김훈 역. 북하우스. 2024. 356쪽)

: 캐드펠 수사 시리즈 7. 저녁 미사 중 밖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더니 예배당에 한 젊은이가 뛰어들었고, 뒤이어 마을 사람들 여럿이 몰려와서 젊은이를 패기 시작한다. 수도원장이 나서서 호통을 친 후에야 흥분한 사람들은 폭행을 멈추고 젊은이가 살인과 두둑질을 했다고 하지만 젊은이는 부인한다. 떠돌이 음유시인이자 광대인 이 젊은이 릴리윈이 성소로 들어온만큼 수도원장은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이 청년을 보호하기로 한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범인이 짐작 가능했다. 동기도. 그래서 결말이 많이 안타까웠다. 1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성의 (돌봄)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 치러지지 않는구나. 그래서 집안에서 여성이 권력을 잡으려면 금세공인 집안에 막 결혼한 며느리 마저리처럼 남편을 잘 조종하거나 집안의 실세 줄리아나 부인처럼 모든 걸 틀어쥐고 다스릴 수 있어야 하는 것. 수재너처럼 우직하게 일만 하다가는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버리지. 이래저래 씁쓸한 결말이었다.



9. 귀신 들린 아이(엘리스 피터스, 김훈 역. 북하우스. 2024. 356쪽)

: 캐드펠 수사 시리즈 8. 성 바오로 성 베드로 수도원에 지역 귀족의 차남 메리엣이 수도사가 되겠다며 청을 해온다. 열아홉 살 그는 아버지와 함께 수도원으로 오는데 부자간의 정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이상한 작별과 자신의 성미를 간신히 누르는 듯한 태도, 견습기간을 줄여 달라는 간청이 수상하다. 게다가 밤에 그는 발작을 일으켜 숙사의 모든 사람들을 괴롭게 해 귀신 들렸다는 소문까지 난다. 한편 스티븐 왕의 동생이자 막강한 권력을 가진 헨리 주교의 총애를 받는 사제 피터 클레멘스가 왕에게 중요한 전갈을 가던 중 실종된다.


범인은 짐작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메리엣이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건 알았고 그게 나이절이라고 생각했다. 동기는 로즈위타의 플러팅일 거라고. 근데 다른 사람이 범인이라니. 게다가 동기가 이렇게나 정치적일 줄이야. 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정치 상황은 그저 배경으로만 가볍게 취급했는데 앞으로 좀더 신경써서 읽어야 하나 싶다. 근데 너무 헷갈려. 맨날 여기 붙었다 금세 저기로 돌아서고. 어쨌든 이번 작품은 성장소설의 색이 뚜렷했고, 그 부분이 가장 흐뭇했다.



10. 죽은 자의 몸값(엘리스 피터스, 송은경 역. 북하우스. 2024. 348쪽)

: 1141년 2월, 내전은 격화되고 참전했던 휴 베링어가 귀환하여 스티븐 왕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전한다. 스티븐 왕의 반대편에서 참전한 웨일스 군대 중 일부가 민간인을 약탈하는 가운데, 캐드펠 수사와 안면이 있는 손베리의 어바이스 - 이제는 매그덜린 - 수녀가 수도원으로 찾아와 자신들이 어떻게 웨일스인들의 약탈을 막았는지 얘기해 주며 그 와중에 확보한 웨일스인 포로를 데려가라 제안한다. 다음날 휴는 그를 데려오고, 웨일스 출신 캐드펠은 그의 입에서 자신의 신분과 상황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휴는 그를 역시 상대방에 포로로 잡힌 슈롭셔의 행정장관 프레스코트와 교환하려 한다.


정치적으로 곤란한 상황이 벌어진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사랑은 피어난다. 그래, 전쟁 중에는 수많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생겨나지. 정치적인 듯 보였던 이번 상황은 사적인 것으로 판명난다. 인간의 욕심과 순간적인 판단 오류. 그리고 약간은 억지스러울 지 모르지만 독자로서는 흡족한 해피엔딩. 다만 살인자의 벌이 충분치 않은 것 같다. 캐드펠 수사는 하나님이 벌하신다고 하겠지만. 



11. 고행의 순례자(엘리스 피터스, 김훈 역. 북하우스. 2024. 336쪽)

: 성 위니프리드 축제를 앞둔 시기, 슈루즈베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록, 성 바오로 성 베드로 수도원 접객원도 만원이다. 이들 중 눈에 띄는 몇몇이 있는데 바로 오른다리가 완전히 뒤틀린 흐륀과 그의 누나 멜랑에흘, 이모 위버 부인이다. 이들은 흐륀의 다리를 고쳐달라는 청원을 위니프리드 성녀에게 바치기 위해 순례길에 올랐는데 도중에 두 청년과 동행하게 된다. 키아난은 목에 커다란 십자가를 매고 맨발로 걷고 있고 그곁엔 매슈라는 젠트리 출신으로 보이는 번듯한 청년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지키고 있다. 캐드펠은 흐륀과 키아난을 치료해 주며 사연을 묻지만 키아난은 그저 죽을 병에 걸려 웨일스로 죽을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라고 할 뿐. 한편 스티븐 왕이 아직 포로로 잡혀있는 가운데 모드 황후는 런던에 입성하고 윈체스터에서는 헨리 주교 주관하에 회의가 열린다.


이제까지 이 시리즈는 앞의 이야기를 몰라도 읽기에 아무 불편이 없었지만 이번 권은 마치 그간의 이야기를 중간점검하는 듯 하다. 캐드펠이 위니프리드 성녀의 유골에 관한 비밀을 휴 베링어에게 털어놓기도 했고 올리비에가 재등장하기도 했고. 올리비에는 정말 반가웠고 앞으로의 에피소드도 기대하게 했다. 과한 고난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듯 보였던 키아난의 사연에 괜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기적이 일어나 그래, 캐드펠이 수사였지, 여긴 수도원이었지 하고 새삼 돌아보게 됐던 이야기. 



12. 오렌지와 빵칼(청예. 허블. 2024. 184쪽)

: 스물일곱 어린이집 교사 영아. 주위 사람들에게 잘 참아주는 편이지만 어린이집의 폭력적인 원생 은우에 대해서는 화가 치민다. 하지만 은우를 초과 시간까지 돌봐야 하고, 은우네 엄마가 하는 비건 빵집에 가서도 가식적이며 위선적인 모습을 꾹꾹 참아야 하는 게 버겁다. 게다가 대학 때부터 친했던 은주는 오늘도 변함없이 이런저런 링크를 보내며 '올바름'에 대해 가르치려 들고, 늘 헌신적인 듯 보이는 남자친구 수원은 지루하기만 하다. 영아는 자신의 모습이 답답해 '정서 변화 시술'을 받기로 한다.


꽤 잘 쓴 글이다. 적당한 무게감도 있고. 하지만 내 멘탈이 안 좋을 때 읽어서 너무 힘들었다. 기대도 너무 컸고. 영아의 시술 수 언행들이 시원하다는 리뷰도 있는 거 같은데, 난 오히려 대책 없는 지름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수습도 본인의 몫인 걸. 영악하게 자기 걸 챙겨야지, 무조건 지른다고 해결되는 건 없으니까. 중간은 없는, '올바름'에 매몰당한 요즘 세태를 비꼬는 듯 하지만 결말이 좀 허무해 맥빠지기도 했다.



13. 까마귀가 울다(박현주. 씨엘비북스. 2023. 360쪽)

: 저승사자 현. 죽기 직전의 사람과 자살을 결심한 사람에게만 보인다. 5년 전 현은 열다섯 살 소년 이정운을 살린다. 이후 우연히 마주친 이정운이 다시 자기를 알아보자 혼란스러워진 현. 이정운을 다시 살려야겠다고 맘먹는다. 


저승사자의 근무 상황이 꽤 디테일하다. 돈이 있어도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돈을 못 쓰고,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도 꽤 복잡한 규칙이 있다. 이 규칙이란 게 예외도 꽤 많지만. 저승사자 세 명의 캐릭터와 사연도 각각인 게 다채로워 재밌었다. 구구절절 사연을 나열하지 않고 깔끔하게 보여주는 작가의 솜씨도 좋았고. 재밌게 읽었다. 



14. 우리가 몰랐던 세상의 도서관들(조금주. 나무연필. 2017. 356쪽)

: 전세계의 48개 도서관을 찾아 살핀 책.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보관하고 빌려주며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 아니라는 건 이미 한참전부터 알려지고는 있지만 조금이나마 새로운 도서관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빌렸는데, 사실 첫머리에는 조금 실망했다. 최첨단 기술을 배우고 사용하는 장이 되거나(메이커 스페이스) 가족 도서관, 이주민을 위한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도서관 등은 새로울 게 없었다. 다른 매체나 책에서도 얼마든지 다뤘던 내용이므로. 


내가 기대했던 바가 충족된 건 책의 중반 이후, 바티칸 도서관 챕터부터이다. 굳이 찾아보진 않았지만 바티칸의 도서관에 관한 정보는 처음 접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수도원의 도서관, 귀족과 왕실의 도서관 들 이야기도 재밌었다. 앞의 도서관들은 굳이 방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이 도서관들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15. 푸른파 피망(배명훈. 국민지 그림. 창비.2017. 96쪽)

: 청소년 대상 일종의 마중물 소설이랄까. 작가의 단편 중 하나를 한 권으로 펴낸 책이다. 난 도서관에서 시간 떼울 일이 있어서 읽었는데, 쉽고 흥미롭고 교훈적이어서 마중물 역할로 딱이라고 생각했다. 내용은 뻔하다. 작은 행성의 두 연구소. 서로 다른 곳에서 이주해 온 이들은 전쟁 전까지는 잘 지냈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서로를 멀리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전쟁의 와중에 식량 보급에 차질이 생겨서 한쪽에는 고기만 쌓이고 다른 쪽에는 채소만 잔뜩 배달된다. 고등학생 '나'와 친구 채은신지는 각각 다른 연구소 소속의 부모님을 두고 있어 전쟁 중에는 교류할 수 없지만, 서로의 모습을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옥상에 매일 올라간다.


이 작가의 특기인 전쟁 이야기 속에 우정과 조크를 적절히 섞었다. 얘기했듯 내용과 결말은 뻔하지만 그 안의 세세한 에피소드와 사람들의 행태가 귀엽고 독특하다. 



16. 화려한 수업(아니샤 라카니, 이원경 역. 김영사. 2010. 448쪽)

: 늘 교사가 되기를 꿈꿨던 애나. 아이비리그를 졸업하고 드디어 교사 자리를 얻지만 부모님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박봉에 다 무너져가는 허름한 관사에서 지내며 참교사의 꿈을 위해 노력하지만 들어간 학교는 하필이면 상류층 아이들이 모여있는 재단이고, 아이들은 초라한 모습의 애나를 무시한다. 애나가 제대로 된 사고력을 키워주려 노력하면 할 수록 학부모들은 불만을 제기하며 숙제나 내주고 점수나 내주라고 한다. 그런데 애나에게 과외 제안이 들어오고, 교사 월급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액수에 애나는 수락을 한다.


상류 사회야 늘 궁금과 흥미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엉망으로 그린 책을 읽는 건 오랜만이다. 그래도 상류층들은 도덕성은 바닥이어도 교육에는 열심인 걸로 그려지곤 했는데, 여기 나오는 아이들은 물론 부모도 포함해서 다 멍청함의 끝을 보여준다. 스스로는 생각이란 걸 할 줄 모르는.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이 우리나라와는 반대인 것도 흥미롭기는 했다. 하지만 읽다가 너무 반복되는 내용에 흥미를 잃어서 뒷부분은 재미없게 읽었다. 



17.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케이틀린 도티, 임희근 역. 반비. 2020. 360쪽)

: 여성 장의사의 에세이. 저자가 20대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장례업체에서 일했던 6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죽음에 관해 고찰한다. 그간 여러 학술서나 에세이, 인문학 책에서 이야기해 온 죽음은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의 죽음은 물리적인 것, 처리해야 할 사후의 절차와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저자는 부러 가벼운 말투로 장례 업계에서의 에피소드를 곁들여 이야기하지만 사실 죽음이 산업이 된 후로 죽음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그닥 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변한 게 사실이다(물론 이는 저자가 고찰한 미국 사회의 경우를 이야기한다). 죽음은 장례 절차 중에 이루어지는 방부 처리와 보정 작업을 거쳐야 하는, 숨겨야 하는 무엇이 아니다. 단게단계가 돈으로 환산되는 사업도 아니다. 


사실 난 죽음 이후의 절차가 궁금했다. 물론 우리나라의 사례가 아니어서 내 궁금증을 모두 해결해 주진 못할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서 더 궁금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절차는 대강이나마 알고는 있는데, 미국은 또 어떻게 다르려나. 그런데 이 책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무게감이 있었다. 아무래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죽음의 절차를 진행했던 저자이니만큼. 그런 부분이 공감되기도 했지만 일부분은 지루하기도 했다. 그래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은 독서였다. 후속편은 안 읽어도 될 거 같다. 



18. 방어가 제철(안윤. 자음과모음. 2022. 144쪽)

: 애도의 모습들. 크게 다를 건 없지만 어떤 모습이든 어떤 방법이든 잃은 사람을 기억하는 건 결국 남은 자를 위로하는 것. 


가장 좋았던 작품은 「달밤」. 생일상을 차렸던 상에 다시 제사상을 차리는 게, 이게 생이라고 말해주는 거 같아서 묘하게 안심됐다. 탄생과 죽음은 결국 등을 맞대고 있음을. 표제작에서는 정오 선배가 화자를 음식으로라도 위로하며 자신도 위로받는 게 좋았고, 「만화경」에서는 얼굴도 모르고 이름만 겨우 아는 前세입자를 기억하고 애도한다는 게 맘을 따뜻하게 했다. 읽으면서 나도 위로받았던 작품집.



19. 다락방에서 남편들이 내려와(홀리 그라마치오, 김은영 역. 북폴리오. 2024. 468쪽)

: 절친 엘레나의 결혼 축하 파티를 마치고 귀가한 로렌. 낯선 남자가 자신을 친숙하게 부르며 맞이한다. 놀라서 경찰을 부르려 하지만 정황상 이 남자는 본인이 말한대로 로렌의 남편이 맞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도 상황은 그대로. 곧 로렌은 남편이 다락방에 올라가면 불이 번쩍하고, 새로운 남자로 바뀐다는 걸, 그리고 남편이 바뀌면 로렌 자신의 인생도 일부 수정이 된다는 걸 알게 된다. 


로렌의 남편들을 보면 볼수록, 대체 결혼을 왜 하나 싶었다. 사실 이 설정 자체가 약간은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는데, 로렌이 결혼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는 전제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로렌이 비혼주의자였다면 이 상황 자체가 너무도 큰 폭력 아닌가? 어쨌든 재밌자고 쓴 소설에 쌍지팡이 짚고 나설 건 아니니까 편한 마음으로 읽으려 했는데, 역시나 제대로 된 남자는 별로 없어. 그리고 카터의 경우에서와 같이, 같은 사람이라도 시기와 상황에 따라 관계는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결말도 너무 운명순응적인 듯. 근데 이런 상황이라면 이 이상 진취적이기도 힘들긴 하다. 마지막 남편이 카터이길 바라기는 했지만, 그랬더라도 처음만큼 행복하긴 어려웠을 듯. 여러모로 현실적인 결말이기는 했다.



20. 딜리트(설재인. 다산책방. 2023. 248쪽)

: 중학교 때 절친인 진솔과 해수. 진솔의 부모님은 음식점을 운영하면서 진솔이 공부로 성공하기를 바란다. 진솔이 가진 능력보다는 해야 할, 되어야 할 것에만 집중한다. 반면 해수의 부모에게 해수는 투자 대상일 뿐이다. 적게 투자하고 많이 뽑아내면 그만인데, 공부는 가성비가 안 나온다. 대충 빨리 졸업해서 부모처럼 쉬운 길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정작 해수는 공부가 너무 재밌고 좋다. 진솔의 부모는 가짜 서류로 진솔을 서원외고로 진학시키고, 해수는 부모의 강요로 서원정보고로 진학한다. 둘은 같은 재단이지만 분위기는 천양지차인 두 학교의 지하에 통로가 있는 걸 발견하는데, 그곳에서 예전에 죽었던 교사 이야기를 듣고 제물을 바치며 기도한다.


분위기가 꽤 그로테스크하다. 부모가 사라진 건 좋았지만 문제는 그걸 받아들이는 진솔과 해수의 마음과 상황. 최소한의 바람막이조차 되어주지 못하는 부모는 없는 게 낫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진솔과 해수를 도와주는 좋은 어른들도 있지만 현실은 책 속에서도 녹록치 않다. 이 모든 게 휘몰아치고 난 후에도, 책 속에서나마라도 바뀐 건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둘이 좀더 자유로워진 게 다인지도. 하지만 적어도 정보고 학생들이 목소리를 한번이라도 냈으니. 이게 시작이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해수와 진솔이라도 행복해 질 한걸음을 내딛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겠지. 



21. 초콜릿 레볼루션(알렉스 쉬어러, 이주혜 역. 미래인. 2011. 384쪽)

: 국민건강단이 집권하고 사회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초콜릿을 비롯한 모든 설탕 함유 음식들이 법으로 금지된 것이다. 하교길에 먹는 초콜릿 하나가 삶의 낙이었던 헌틀리와 스머저는 낙심하지만, 곧 초콜릿 밀거래가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고, 재료를 구해 초콜릿을 직접 만들기로 한다.


읽는 동안 초콜릿이 먹고 싶어질까봐 괜히 긴장하고 시작했는데,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저학년 대상인 이야기인 만큼 좀 뻔하게 흘러가긴 했지만 머리 식히는 기분으로 읽었다. 그런데 또 너무 저학년에게 읽히면 안 될 거 같아. 이 책의 주제는 자신의 신념을 무분별하게 강요하는 상황의 부작용, 독재의 부당함과 진정한 민주주의에 관한 건데, 저학년 어린이들은 이 책을 초콜릿 섭취의 정당화를 위한 근거로 삼겠지. 뭐, 적당한 당분은 삶을 풍요롭게 하니까.  



22. 죽지 않고 어른이 되는 법(강지영. 북다. 2024. 256쪽)

: 재이는 환생한다. 재이에게 생은 동그라미다, 이음매가 있는. 언제 어떻게 죽든 같은 부모에게서 같은 시간에 태어난다. 탄생의 순간은 고통스럽고 생이 반복될수록 괴로움도 크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환생을 알고 있는 상담심리학자 소영과 만나게 된다.


한 명의 소녀가 죽지 않고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생이 필요한 걸까. 또 얼마나 긴 시간의 희생이 필요한 걸까. 재이처럼 자신의 생을 알고 시작해도 쉽지 않은데, 소영같은 희생자가 있어도 쉽지 않은데, 현실의 대부분은 모른 채로 하루하루를 넘긴다, 어른들의 무심함 속에서. 그 하루 중 몇 명의 소녀들이 부모를 비롯한 양육자의 방치 혹은 학대에서 살아남고, 성범죄자와 스토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나.


소녀 한 명이 어른이 되는 건 정말 기적이다.



23. 로맨스 도파민(최영원, 조수연, 오조, 김이숨, 우재윤. 안전가옥. 2024. 318쪽)

: 로맨스를 주제로 한 앤솔러지. 다 처음 듣는 작가들이어서 기대를 갖고, 좋은 작가를 발견하길 바라며 읽기 시작했다. 첫번째 작품 「맛있는 녀석들」(최영원)이 딱 내 취향이라 즐겁게 읽었는데 두번째, 세번째 작품이 내 취향이 아니었다. 네번째 이야기도 평이했고. 세 작품다 뻔했다. 소재도 별로 특이하다고 하긴 힘들지 않나? 「팝콘을 들으세요」는 자동매치라는 면에선 신선할 지라도 폰팅이랑 다른 게 없잖아. 그래도 마지막 작품 「나의 지구」(우재윤)는 처음엔 병맛인가 하며 읽다가 점점 빠져들었다. 



24. 밤의 행방(안보윤. 자음과모음. 2019. 248쪽)

: 생계형 점집을 시작한 누나가 지리산으로 기도를 하러 들어간단다. 주혁은 누나를 데려다준 뒤 비어 있는 누나의 신당 겸 집에 머물기로 한다. 아침에 깨질듯한 두통으로 깨어난 주혁은 누군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걸 알게 되는데, 싱크대 위에 기묘한 모양으로 구부러진 나뭇가지가 있다. 당당하게 꿀물을 요구하는 나뭇가지의 쫑알거림은 멈추지 않고, 점집에는 손님이 들어온다.


죽음을 예고하는 나뭇가지라니, 신박한 설정이긴 하다. 이 작가의 전작들보다 설정이 가벼운 듯 하여 편안하게 읽기 시작했으나 주혁의 사연과 나뭇가지 '반'이 보는 죽음들은 가벼운 마음을 즉시 날려버렸다. 사람의 인연이란, 정말 사람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건지.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싶은 사람을 보고 만나는 게 왜 마음만으로는 안 되는 건지. 그래도 한발 내딛는 것으로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게, 살아가야 할 이유인 걸까? 



25. 우리의 질량(설재인. 시공사. 2022. 356쪽)

: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한강에 몸을 던진 서진. 사후세계라는 곳에 왔는데 이곳은 자살한 사람만이 모이는 곳이다. 각자 목 뒤의 엉킨 붉은 실타래를 달고 있는 이곳 영혼들은 타인과 진심어린 관계를 맺고 스킨쉽을 해야 실타래를 풀고 진짜 안식에 들 수 있다. 하지만 아무 관계도 맺고 싶지 않은 서진은 처소에 칩거하려는데, 대학 때 연인 건웅과 남편 장준성 또한 이곳에 와 있는 걸 발견한다. 건웅과 장준성과는 건웅이 재수학원에 다니던 시절부터 얽혀 있는 인연. 서진은 건웅과 재회하며 장준성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운다.


이 작가는 은근히 잔인한 면이 있다. 자살하지 말라는 말을 이렇게 하는 건가. 죽음 뒤에도 이어지는 인연들이라니, 그냥 악연이지. 어떤 소설의 세계관에서는 자살을 하면 모든 인연이 끊긴다던데 여기서는 그러기 위해 죽은 뒤에도 온힘을 다해 노력을 해야 한다. 살아있는 게 너무 힘들어서, 살려고 아둥바둥 노력해야 하는 게 너무 지겨워서 스스로 죽음으로 뛰어들었는데 그 이후가 이런 세상이라면... 죽음 뒤에도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이지만 그걸 위해 죽음 뒤에도 스스로 미끼가 되고 아픔을 견뎌야 한다니, 마냥 속시원하지만도 않다.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아무리 악행을 저질렀어도 죽음의 방법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사후세계라니. 그저 남들보다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빨간 실타래만이 악행의 대가라니...


그래도, 그래도 이건 해피엔딩이다. 이렇게라도 묶은 걸 풀 수 있다면. 



26. 아홉 명의 목숨(피터 스완슨, 노진선 역. 문학동네. 2024. 392쪽)

: 평범해 보이는 9명의 사람들. 사는 곳도, 직업도, 성별과 나이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하얀 종이에 이름만 쓰여 있는 명단을 받는다. 72세 리조트 소유주 프랭크. 아침 산책길에 명단이 놓여 있던 바위 근처에서 바닷물 웅덩이에 목이 눌려 익사당했다. 의부증 아내에게 시달리는 39세 매슈. 아침 조깅 중 뒤에서 총을 맞았다. 이외에도 배우자를 잃고 혼자인 삶을 겨우 꾸려가는 45세 간호사 아서, 명단을 받았지만 연방요원의 연락까지 무시한 무명배우 제이, 명단으로 노래까지 만들고는 명단의 다른 사람들을 찾다가 영문학 교수인 캐럴라인과 연락을 하게 된 이선, 늙은 부자 유부남의 정부 노릇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40세 앨리슨, 과거 쓴 책의 성공으로 컨설턴트로 일하다 은퇴한 70세의 잭, 그리고 FBI요원 제시카.


본문에도 언급되지만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의 공통점보다는 이 작가의 전작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이 떠올랐다. 물론 이 책의 살인은 전작에서처럼 방법에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작에서도 살인자의 동기가 키일 거라고 생각했듯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전작과 마찬가지로 공감은 어려울 거라고 미리 짐작했고 짐작은 맞았다. 사실 어느 작품에서든 연쇄 살인이란 그저 살인자의 자기만족일 뿐이다. 정당한 살인이라고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살인은 많지 않다. 우리가 살인자들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기를 바라는 이유이다. 이 책의 살인자의 동기는 일면 이해가 가기도 했지만, 그리고 대상을 선택한 이유도 조금은 공감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되어버렸다. 살인자 자신에게도. 어찌됐든 재미는 있었다.



27. 적산 가옥의 유령(조예은. 현대문학. 2024. 212쪽)

: 외증조모는 늘 비밀스러운 저택의 숨겨진 공간이 등장하는 소설을 썼다. 운주는 바쁜 엄마 대신 증조모의 집에서 크다시피 했다. 증조모의 적산가옥에는 뜬금없어 보이는 별채가 있는데, 하반신 마비였던 증조모는 비바람이 치던 밤 그곳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바닥에 귀를 붙이고 엎드린 이상한 자세로. 증손녀 운주에게 집을 남긴 증조모는 서른 살이 되는 해 1년간 이 집에 머물러야 한다는 조건을 유언장에 남겼고, 일본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힘들어하던 운주는 남편과 함께 이 집을 개조하여 카페나 펜션을 운영해 볼 생각으로 이사했는데, 별채에서 운주만 들을 수 있는 쿵쿵 소리가 울린다.


적산가옥의 비밀과 현재의 이야기가 90여 년의 시간차를 두고 교차된다.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모든 악인이 제거된 뒤에 남은 건 그 시간차를 뛰어 넘는 약자들의 연대. 그 모든 비밀들을 밝힐 수 있었던 것도, 악인에게서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그 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이 무서운 핏빛 이야기 속에서도 나를 위로해 주었다. 역시 죽은 자보다 더 무서운 건 살아있는 악인.



28. 고요의 바다에서(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강동혁 역. 열린책들. 2024. 376쪽)

: 1912년 피송금인으로 막 캐나다에 온 에드윈. 카이엣에서 허송세월 하던 중 숲의 큰 단풍나무 근처에 갔다가 갑자기 번쩍하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거대하고 넓은 공간 안에 들어가는 기분.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고, 쉬익 하는 소리도 들린다. 2020년 미렐라. 오랜 친구 빈센트의 남편에게 사기를 당한 자신의 남편이 자살하고 몇 년이 흘렀다. 미렐라는 빈센트와 얘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 빈센트의 오빠가 하는 콘서트에 가고, 빈센트가 찍었다는 영상을 본다. 커다란 단풍나무를 향해 가다 갑자기 바이올린 소리와 유압기의 쉬익 소리가 들리며 화면이 암전되었다가 돌아오는. 2203년 작가 올리브는 자신의 소설 북투어를 하고 있다. 그 소설에는 오클라호마 비행선 터미널에서 주인공이 바이올린 소리와 비행선 소리를 듣고 어디론가 옮겨지는 장면이 있다.


서로 다른 시간, 공간에 사는 인물들이 한 자리에서 스친다. 이건 기이할 수도 있고 무서울 수도 있지만, 이 작품에선 아름답다. 찰나의 스침과 얽힘은 고요하지 않지만, 고요하게 읽힌다. 그 잠깐의 시간이 인생을 알게 하고, 인생을 깨닫게 하고, 인생을 완성할 수 있게 한다. 


읽는 동안에는 장 보드리야르의 『Simulacres et Simulation』을 계속 떠올렸다. 이 책은 이 이론에 근간을 두고 있다. 내가 보드리야르를 읽은 지 거의 3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이 이론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쓰여지는구나, 하며 개스퍼리자크 로버츠와 누나 조이의 이야기를 흥미로워하며 읽었다. 하지만 책장을 덮고 나니 이론따위는 잊혀지고 그들의 찰나의 인연만 기억난다. 



29. 아찰란 피크닉(오수완. 민음사. 2024. 372쪽)

: 도시국가 아찰라 공화국. 가운데에는 특별자치구 헤임이 있고, 그곳은 빛나는 황금색의 거대한 피라미드이다. 헤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종합적합도평가'에서 뛰어난 성적을 받아야 하고, 이는 단순히 학업 뿐 아니라 평소의 태도와 인성, 교우관계 등이 모두 24시간 돌아가는 카메라 데이터를 기반으로 평가된다. 헤임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 자치구에 산다면 언젠가는 아찰이 되어 집을 떠나 아찰의 거리에서 살아야 한다. 몸에 있는 작은 종양들이 언제 폭발하듯 커져서 아찰이 되어버릴 지는 아무도 모른다. 각자의 사정이 있고 각자의 짐을 짊어진 7명의 아이들. 아란, 요제, 네즈, 디본, 카렐, 히에, 이투. 이 아이들은 각자의 짐을 진 채 학교 졸업 직전 마지막 평가인 아찰란 피크닉을 위해 달린다.


너무나 노골적이지만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는 비유로 가득한 소설. 알면서도, 뻔하다면서도 계속 읽을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아이들의 사연도 행동도 다 클리셰지만, 그러기에 더더욱 아이들의 행복을 바라며 읽었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이 그저 아이들 각각의 성장일 뿐이라도 좋았다. 사회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아무 것도 바뀐 건 없고 바뀔 기미도 안 보이지만, 아이들이라도 마음이 자라서, 아이들이라도 더 좋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보여서 그걸로 됐다. 



30. 슬픔은 날개 달린 것(맥스 포터, 황유원 역. 문학동네. 2020. 176쪽)

: 아내이자 엄마가 죽었다. 이제 두 아들과 아빠만 남은 가정에 까마귀가 들어온다. 조문객들의 과장된 슬픔과 위로에 시달리고, 아내의 흔적이 가득한 집안을 어쩌지 못하는 아빠는 자신조차 추스리지 못하지만 까마귀는 담담하게 삶과 슬픔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달라진 아빠를 받아들인다.


우화 소설은 아니다. 다만 까마귀는 집안을 돌아다니고, 아빠가 문학 작품을, 에밀리 디킨슨과 테드 휴스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아빠와 아이들에게 필요했던 건 단지 시간일 뿐이었을 수도 있고, 까마귀가 까마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물론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살아있는 한 삶은 계속된다는 거.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거.



31. 태어난 게 범죄(트레버 노아, 김준수 역. 부키. 2020. 424쪽)

: 아파르트헤이트 하에서 백인 여성/남성이 흑인 여성/남성과 성관계를 갖는 건 불법이다. 그런데 저자 트레버 노아는 흑백 혼혈이다. 엄마의 집이었던 동네에 가도, 백인 구역에 가도 저자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할머니는 밝은 피부색을 가진 이 아이를 어떻게 때려야 할 지 모르겠다며 훈육을 포기하고, 백인 아버지와는 함께 걸을 수도 없어서 길 건너편에서 나란히 걷는다. 하지만 저자의 어머니는 주체적으로 아이를 가졌듯 저자를 사립학교에 보내고, 유색인 거리에 집을 구하고, 비서직에 취직을 해가며 저자를 훌륭히 키워낸다.


저자는 아파르트헤이트의 부당함과 인종 차별의 무의미함만을 역설하지는 않는다. 저자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면서 그 와중에도 삶은 삶으로서 향유됨을, 그 자체로서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저자가 이렇게 잘 자란 데에는 물론 강인하고 사랑이 넘치는 엄마가 있다. 웃기지만 우습지 않았던, 재밌지만 슬프기도 했던 독서였다.



32. 백귀야행(송경아. 사계절. 2020. 224쪽)

:힘겨운 삶의 하루하루들. 그래도 우렁총각의 도움이든, 혹은 상처를 가진 두 사람이 서로에 어깨에 기대든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꾸려나간다. 하지만 선택은 결국 스스로 내리는 것이고, 상처는 혼자 감당해야하지. 첫번째를 제외한 모든 작품들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작가가 있어야겠지. 마음 아파하며 천천히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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