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엔딩 소설Q
김유나 지음 / 창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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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란 게 있긴 있는 건가? 종종 생각한다. 오늘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많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내일, 모레, 훗날 언젠가의 우리가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지금 불행하다면 행복하기 위해, 지금 행복하다면 더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늘 그렇듯 바라는 일은 뜻대로 되지 않고, 노력하면 되겠지 하는 바람은 가뿐히 무시당하기 쉬웠다. 소설의 주인공 자경이 아버지를 책임(?)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자경의 노력이 형체 없는 어떤 신으로부터 밟히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내가 너무 부정적 사고만 앞세워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자경은 요양병원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달려가는 중이다. 6년 전에 아버지가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자경은 서울의 직장과 본가인 전주와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대전을 주말마다 오가고 있었다. 살아가는 날들이 아닌, 그저 버티는 날들로 채워지는 삶이었다. 그마저도 끝이 있었던 거라,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대전에 장례식장을 마련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조문을 오면서 자경의 싸늘했던 마음에 온기가 돌던 것도 잠깐, 시간에 쫓기듯 살아왔던 방식은 금방 제자리로 돌아온다. 마감 기한이 있는 업무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상중에 경황도 없는데 회사의 팀원들이 단체로 퇴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2년째 함께하고 있는 애인은 자경의 상황도 모른 채로 원망어린 말들을 쏟아낸다. 아버지의 장례가 다 끝나기도 전에 본가의 집을 급하게 정리해야 할 일도 생겼다.


읽는 내내 드는 느낌은, 단거리 달리기와 장거리 마라톤을 같이 뛰는 것만 같았다. 자경이 아버지를 돌보면서 하루하루 촉박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니, 이 달리기의 피니시 라인은 어디쯤에 있을까 궁금했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회사일, 애인의 말, 본가를 정리하는 것까지, 잠깐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 벅찼다. 자경이 열 명 있어도 숨이 찰 것만 같았다.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 누구도 아닌 자경이 직접 처리하고 해결해야 할 일들이었기에 더 절망적이라고 해야 하나. 어떤 일이든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면 끝이 있겠지만, 그 과정이 참 고되기에 항상 좋은 생각이 먼저 나오지는 않더라. 겪어 봐서 안다. 장례식, 손님이 별로 없어도 힘들고, 상주 자리를 지키는 것도 고단하다. 끝나고 나면 온 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몸살이 나기도 하고, 며칠 동안 잠만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자경은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아버지의 집을 정리하느라 또 숨이 차다. 가구와 가전을 중고로 버리고, 집안 구석구석 차지하고 있는 짐을 커다란 김장 비닐이 가득 담아서 버리기를 여러 번. 이제 좀 쉬려나 싶었는데, 아직 한 곳이 남았다. 아버지의 서재. 어릴 적 자경이 지냈던 방이지만 자경이 떠나고 아버지의 일상으로 채워진 곳이다.


우연한 발견은 고단한 삶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바꿔놓는 마법이 되기도 하는 건가. 자경이 아버지의 서재를 정리하면서 발견한, 자경은 몰랐던 아버지의 세월을 엿보기도 한다. 자경을 낳고 바로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혼자서 자경을 키운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자경의 이십대를 지켜보면서 저장해둔 기억과 흔적은, 오늘까지도 어둠에 휩싸여 있던 자경의 일상에 조금 다른 빛을 비추기 시작한다.


무모하다고 했다. 쓸데없는 시간낭비라고도 했다. 살아가면서 각자가 바라는 간절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노력을 누구나 같은 시선으로 보지는 않는다. 자경이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빠져들었던 영화인의 삶은 이십대의 한순간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시절을 잊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 시절을 지금까지 끌고 왔다고 해서 오늘의 삶이 크게 달라져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오늘 다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은 그때의 기억을 소환하여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을. 자경이 영화를 만들면서 보았던,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은 그 불빛을 기억하면서, 다시, 아직도 거기에 있는 것들을, 그 시절의 자경을 지탱하게 만들었던 것들을 생각한다. 지독한 현실에 치여 살면서 어느 정도 단단해졌다고 여기던 것도 무색하게, 잊고 있던 이상한 순간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흔들리고, 마음은 이제 흔들리는 방향으로 따라가려고 한다. 이게 이상한가?


자경이 본가를 정리하기 시작했을 때,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서재를 남겨두었을 때, 내가 바란 것도 이런 마음이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다가도, 노력을 결과물을 기대하면서도 절망의 순간을 마주하곤 하는 게 우리 인생이라고 해도, 그래도 말이야, 상실과 절망의 순간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오늘과 다른 엔딩을 기대해서는 아닐까. 자경이 그동안의 연애에서 배운 대로 자기 이야기를 지금의 애인에게 할 수 없던 이유가 오늘의 현실이었다면, 오늘 정리하면서 보게 된 작은 빛 하나로, 차단된 통로를 다시 열기 위해 용기 내려고 하는 건, 내일의 엔딩이 오늘과 다르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그런 거지, 그래도 오늘을 사는 이유 말이다. 그래도 우리가 같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 선택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135페이지)


일상에 익숙하게 녹아 있는 팍팍한 삶이 들려 와서 답답했는데, 살아가는 일에는 언제나 한 가지 엔딩만 존재하는 건 아니기에,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는 방향으로 가는 건 막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어느 곳에는 위로가, 반대 방향에서는 기회가, 옆에서는 어떤 날의 기억이, 또 다른 곳에서는 따뜻하게 진심을 내미는 마음도 있다는 게, 그래서 언제나 시작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희망을 품어준다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사라질 수밖에 없고 우리는 모두 정해진 엔딩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시시한 삶의 그 지난한 과정 속에 아주 잠깐씩 빛나는 순간이 있는 거라고, “다시 멀리서 보면, 모두 거기에 있는 것들”, 그것을 우리는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이 소설이 얘기해주는 것만 같다. 너는 혼자로만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에게 곁을 내어주는 사람들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건네며 소설은 엔딩 이후를 기약한다. 우리가 상실한 많은 것들이 실은 우리를 살게 한다는 걸 이 소설을 통해서 배웠다. 기울어지고 연학한 마음을 서로에게 조금 기대는 방식으로. (소설가 김유담의 발문 중에서, 149~150페이지)


분량도 짧아서 잘 읽히는데, 잘 읽히는 것만큼 감정은 단순하지 않아서 마음이 복잡해지는 소설이기도 했다. 그래서 좋았다. 별 것 아닌 일로 심란했던 감정들이 조금 단순해졌다고 해야 하나. 하나씩, 쓸데없는 마음들은 쳐내고, 절실한 마음들은 꼭 품으면서 오늘도 잘 지내봐야겠다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 말고, 지금 나에게 곁을 내어주는 사람들을 더 마음에 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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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데, 때로 법이 내리는 그 처벌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분명 법의 기준으로 판단했을 테다. 변호사는 의뢰인의 편에 서서 충분히 변호했을 테고. 살아가면서 배운 인간의 자세가 법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기도 하다 보니, 이게 맞나 싶을 때가 있다. ‘촉법악법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건가. 다섯 편의 이야기가 담긴 촉법소년은 촉법소년이 저지르는 범죄,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 촉법소년법이 정말 실수(?)였다고 말하는 어린 인격을 잘 성장시키고 있는지 짚어보게 했다. 그렇다고 촉법소년법을 이용한 범죄가 반드시 이 아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 아이들을 위한답시고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자기 이익을 위해 잘못된 줄 알면서도 눈감아주려는 계산하는 어른들의 욕심도 포함된다. 그게 내 자식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늦는다. 모든 것이 다 끝난 후가 될 테니까 말이다.


레퍼토리에서는 침묵에 집착하는 소년 범죄자가, 이미 저지른 범죄로 처벌을 받고 나왔는데도 다시 범죄를 저지른다. 살인을 저질렀어도 촉법소년이라는 이유로 소년원에서 2년 형을 살고 나왔다. 그러고 나서 또 저지르는 범죄. 사람을 죽이고 협박한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시끄럽다는 게 전부다. 소년에게 위협당하고 있는 여성 피해자는 오히려 덤덤하다. 자기를 괴롭히는 이들을 소년이 죽여주었는데, 그렇게 침묵을 외치던 소년은 점점 말이 많아진다. 여성은 개 소년의 이야기를 들으며 개 같은 법이라고 하지만, 소년은 교정교육을 비웃으며 여전히 범죄를 저지르는 중이다. 이 범죄가 소년의 마지막 범죄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당연하다. 무엇이 잘못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이 소년에게 주어진 처벌이 전혀 교정교육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데도 촉법소년법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까?


변호사 아버지를 둔 소년이 일부러 대상을 정하고 친 장난에 두 명이 죽는다. 이 녀석이 얼마나 영악한지, 아니면 변호사 아버지가 하는 짓을 보고 배운 건지 뭔지, 사고를 내고서도 자기 빠져나갈 궁리부터 한다.(네메시스의 역주) 원래 촉법소년이 무적이긴 한데 증거까지 없으니 완전히 최강 무적이 된 거지. 나를 누가, 어떻게 처벌하겠어. 안 그래?” (네메시스의 역주95페이지) 이 단편은 법의 판단을 인정할 수 없던 한 아버지의 질주로 시작된다. 감히 내 아들에게 회복될 수 없는 장애를 만들어? 그 분노를 비웃기라도 하듯 차분하게 그 질주의 현장을 지켜보는 소녀가 있다. 누군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제대로 사죄하지 않는다면, 남은 건 복수뿐이라는 감정적인 판단만이 남을 뿐이다.


이제는 제대로 살고 있으니 과거 따위는 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무리되지 않은 과거는, 진심 어린 뉘우침 없이 지나온 과거는 현재의 삶에 깊숙하게 파고들기도 한다. 그는 선을 넘지 않았다의 이야기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은 채로 살아오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준다. 족발 배달을 나갔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된 아들의 사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경찰조사 역시 이대로 흘러갈 것만 같았다. 법에 맡길 게 아니라 직접 이 사건을 판결하기로 마음먹은 아버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역지사지. 같은 경험을 해봐야만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는 참 많다는 생각이 들더라. 자식을 지키려고 했던 일들이 고스란히 되돌아왔을 때, 그때는 많은 것이 늦은 때다.


인상적인 작품이 정해연 작가의 징벌과 소향 작가의 OK목장의 혈투였다. OK목장의 혈투는 지역사회가 아이들의 성장에 얼마나 큰 개입을 하고 있는지 그대로 보여주었다. 특히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여기에서도 통용되는 것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좋게 좋게뭐를 좋게 좋게하라는 말인가. 흔히 말하는 같은 동네 사람끼리 이러지 말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나는 그게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좋게 좋게했더니 더 심하게 되돌아온 경우도 많이 봤고, 가해자들은 전혀 개선의 의지가 없이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한 후로 다짐했다. 아는 사이라고 해서 판단의 기준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서로 끈끈하게 연결된 어른들의 세계에서 아이들은 끝도 없는 배려를 받는다. 그것도 공평하지 않다. 힘을 가진 이들이 이 사회를 흔들고 조정하며, 그 힘을 가진 이들의 자녀가 어른들의 축소판인 아이들 사회에서 똑같이 행동하며 살아가고 있다. 누구 하나 잘못을 지적하는 이가 없고, 그 잘못을 덮어주기에 급급하여 썩은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 곳. 이런 곳에서 그 어른들의 손길로 키워지는 아이들은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지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고,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온 마을이 합심하여 키운 아이는 더는 아이라고 보호받을 수 없을 것이며, 아이 앞에서 우쭈쭈 재롱만 피우던 부모가 후회할 때가 머지않은 것만 같다.


요즘 자주 보는 <이혼 숙려 캠프>에서 역할극 시간을 가장 기다린다. 많은 부부가 그들만의 이유로 이혼을 고민하는 중에, 무엇이 문제인지 그대로 마주 보게 하는 방식이 역할극 아닐까 싶다. 내가 저랬다고? 내가 할 때는 몰랐던 태도나 말투가, 다른 사람이 내 모습을 표현하는 걸 보고 그때야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거다. 보통 거울 치료라고 하는 그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출연자들도 그 부분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정해연 작가의 징벌에서 보여주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 위에서 말했지만, 역시나 역지사지가 답인가. 똑같은 경험을 해봐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어떤 일을 겪었을 때 똑같이 되갚아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구나 싶었다.


너희 이거 범죄야, 불법이라고!”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여자애가 히죽 웃었다. 뒤에선 다른 아이들도 진솔의 말투를 흉내 내거나 서로를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긴 머리 여자애가 말했다.

우린 촉법소년인데?” (징벌46페이지)


징벌의 주인공 진솔은 배우다. 정체 모를 이들에게 납치되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가학적인 폭행을 당한다. 처음에는 무슨 스토커 범죄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배우라는 신분을 이용해 주변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진솔에게 숨겨진 과거가 있었다. 이 지랄 같은 성격은 지금 만들어진 게 아니다. 학교 폭력을 일삼았던 진솔이, 가해자는 잊었던 그 시간을 고통 속에서 살아온 피해자가 있다. 소설은 촉법소년 범죄가 한 편 더 들려오는 것 같았는데,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고민했던 촉법소년 문제의 답을 확인한 것처럼 속이 뻥 뚫리는 이야기였다. ‘2045, 청소년들의 비행이 도를 넘기 시작하자 촉법소년에 대한 징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 결과 제11호 처분, ‘정신 징벌이 제정(65페이지)되기에 이른 거다. 정신 징벌 대상자는 징벌 포켓에 들어가 자신이 벌인 일을 똑같이 당하고, 미래까지 엉망이 되는 경험을 한다. 그 충격은 실제 당하는 것과 흡사하다. 그 때문에 정신을 놓는 경우도 있고, 극도의 불안 장애를 얻거나 사회에 대한 공포를 얻게 되기도 한다. 거울 치료만큼 확실한 치료 방법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들이 처벌받는 장면이 눈앞에서 그려지는 듯하다. 여전히 인권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으나, 어떤 식으로든 한 가지 의견을 선택해야 한다면 징벌 연구소장의 한마디가 더 와 닿는다. 잊지 말아요, 우리는 이제 가해자의 인권 따위를 우위에 두지 않기로 했어요.”(징벌65페이지) 여전히 우리에게 범죄 처벌의 기준을 정하는 일은 어렵다. 법으로만 판단해도 만족스럽지 못할 거고, 우리 안에 남은 많은 감정, 특히 분노와 억울함은 쉽게 해결되지도 않을 거다. 많은 부분이 소설이니까 가능한 상황이겠지만, 법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판결에 직접 응징하려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 책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미성숙한 인격으로, 아직 책임능력이 부족해서 형사처벌을 받지 않게 하는, 보호처분으로 대신하여 한 인간의 올바른 성장을 바라는 처벌을 내리는 일. 취지도 이해하고, 필요한 법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만든 법을 악용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난다면, 이 법을 이대로 유지하는 게 맞는 건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매체에서 보도되는 많은 사건, 이슈화되지 않았어도 우리 주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들을 살피면서, 정말 필요한 대책이 무엇인지 고민할 일이다. 내가 사는 곳 가까이에 중학교 두 곳, 초등학교 한 곳이 있다. 이 아이들이 방과 후에 몰려나오면서 보이는 말과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질 때도 많다. 아파트가 개방된 형태이다 보니 한밤중이나 새벽에 아파트 놀이터에 모여든 아이들의 고성도 들리곤 한다. 근처 골목에서 또래 아이를 폭행하는 걸 보고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다. 내가 보고 느낀 많은 장면을 다 옮길 수는 없으나, 한 가지 생각은 계속된다. 이 아이들이 정말, ‘아이들일까.










#촉법소년 #정해연 #소향 #윤자영 #김선미 #홍성호 #네오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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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사투리 - 서울 사람들은 이거 어떻게 읽어요? 아무튼 시리즈 70
다드래기 지음 / 위고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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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처음 김장 시즌이 왔을 때, 시어머니가 배차가 얼마나 필요하냐고 물었다. 배차? 내가 김장배추를 얼마나 많이 가져간다고 차량 배차를 할 정도인가 싶었다. 안 줘도 된다고, 남으면 10포기정도 가져간다고 말했다.(시어머니는 시골에서 농사를 하시고, 해마다 김장철에는 김장김치를 판매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꾸 배차를 그 정도로 되겠느냐고 물으셨다. 그 말에 또 나는 배차를 안 해도 된다고, 그냥 차에 10개 정도만 싣고 가면 된다고 말했는데, 옆에서 남편이 웃는다. 시어머니의 배차는 배추를 말하는 거였고,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본 배차의 의미를 여기서 확인했다.


지난달에 시댁에 갔었는데, 시어머니가 감자를 캤다면서 가져가라고 했다. 감자? 10월에? , 벼농사 이모작처럼 감자도 일 년에 두 번 수확하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가져갈 만큼 감자를 담아오라고 해서 창고에 들어갔는데, 아무리 봐도 감자가 없는 거다. 더군다나 새로 뭔가를 수확해서 정리해 놓은 농산물도 없더라. 감자가 없다고, 어디쯤에 둔 건지 물었더니, 거기, 문 앞에 큰 통에 있지 않느냐고 하시더라. , 나 진짜, 아무리 봐도 감자가 없어서 짜증이 났다. 아무리 봐도 감자가 없다고 그냥 안 가져가겠다고 했더니, 시어머니 직접 창고로 오셔서 이게 감자가 아니고 뭐냐고막 소리를 지르시는데, ‘어머니, 이건 고구마잖아요?’


그랬다. 시어머니에게는 감자도 감자고 고구마도 감자였다. (기억이 다 나지 않아서 이 정도만 적어보는데)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고 사실 빈번하게 일어나곤 했다. 결혼하고 시어머니와의 대화에서 나는 국어사전 검색하듯 단어를 한 번 더 해석해야 할 상황에 종종 놓이곤 했다. 같은 단어를 두고 시어머니와 다른 서로 다른 의미로 대화해야 하다니. 같은 전라도 땅에서, 그것도 같은 시에서 살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었다. 근데, 배추를 배차라고 하는 게, 고구마를 감자라고 하는 게 사투리인가? 단어 검색 해봐도 그건 못 찾겠던데...


전라도 토박이로 살면서 사투리를 쓴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는데, 그렇다고 내가 일부러 머릿속을 굴려가면서 표준어를 쓰려고 노력한 적도 없다. 그저 나고 자라면서 습득한 언어로 말해왔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다양한 사투리를 직접 목격한 적은 대학에 다니면서부터였다. (그 전에도 다양한 사투리를 간혹 들은 적은 있지만, 가끔이었다) 전라도의 작은 지방대학에 다니면서 놀란 건, 서울 경기 지역부터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까지, 전국의 모든 사람이 모두 모여 있다는 거였다. 물론, 학교를 중심으로 가까운 지역 학생들이 더 많았겠지만, 이렇게 다양한 말을 쓰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모였다는 게 놀랍기만 했다. 처음에는 낯선 억양에 놀라고, 나중에는 그들이 쓰는 단어를 한 번씩 더 물어보느라 바빴다. 그러니까, 우리 같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이 맞는데, 서로 사용하는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할 판이었다니까. 잘못 해석하고 그렇게 해석한 말대로 행동했다가, 서로 오해하거나 큰 실례를 하게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더 조심했던 기억이 난다. 곧 그 낯섦은 친근함으로, 한 번 더 물어봐야 했던 말은 새로운 말을 배우는 시간으로 변했다.


저자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이 경험의 축적으로 저자는 그만두려고 했던 만화를 다시 그리게 되었고, 이런 책까지 내게 되었다는 게 또 큰 수확이 아닐까. 부산에서 자라서, 순천의 대학에 가게 되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화개장터의 말투를 습득하면서 저절로 그 지역의 언어를 구사하게 된다. 나는 잘 몰랐는데, 저자의 말을 들으니 그럴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부산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순천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전라남도 사투리를 쓰게 되는데, 학교가 위치한 지역이 전라도와 경상도의 어디쯤에 있다 보니, 전라도와 경상도의 많은 학생이 모이는 곳에 되었고, 말투 또한 한곳의 사투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는 것. 상상이 되는가? 나는 막 경상도 사투리에 익숙해서 말하는데, 전라도에 살게 되면서 이 지역 말을 듣게 되고, 귀에 익숙한 말을 들으면서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 말을 종종 사용하게 되다 보니, 어라? 내 말은 전라도 말, 경상도 말, 전라도와 경상도가 섞인 말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고향 사람이 들을 때는 말이 요상하게 들리기도 했다는데, 생각만 해도 재밌다.


특히 서로 같은 말을 하는데 다른 단어를 선택하게 되면서 분위기가 싸해지고 오해할 수도 있었는데, 슬리퍼를 딸딸이라고 하는 일, 땡땡이친다는 말을 빠구리친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니, 어찌 오해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것만이 아니다. 저자는 타 지역 사람들과 대화할 때 말의 맥락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1단계

경상도 : 가시나 진짜 사진 잘 나왔데이. 윽수로 예쁘다. 잘 찍읏네. (칭찬)

전라도 : 오메, 가시내 뭘 이런 걸 다 사 와야? 들고 오는 것도 힘든디. (고마움)


2단계

경상도 : 아이고 가시나야, 니 윽수로 빼입고 나왔네. 그래 신나드나? (샘을 내는 듯한 가벼운 칭찬)

전라도 : 아따, 가시내 겁나 찍어 발랐구먼. 훨훨 날아부러. (놀리는 듯한 가벼운 칭찬)


3단계

경상도 : 저 가시나 말하는 꼬라지 바라. 싸가지가 바가지다. (확실한 욕)

전라도 : 흐미, 저 가시내 철딱서니를 간식으로 처먹었나 부네. (확실한 욕)

(79~80페이지)


웃으면서 읽다 보니 저자가 예로 들어준 말들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기는 하다. 특히 욕할 때 그 찰진 억양과 단어 선택에 놀라울 지경이다. 신체의 일부를 꺼내어 줄넘기를 한다는 둥, 무덤 앞에서 12첩 반상을 차려준다는 둥. 얼핏 돌려까기 같은데 해석해보면 살벌하고 잔인하기만 하다. 그래서 무섭냐고? 아니, 상황에 따라 무섭게 들리기도 할 텐데, 읽다 보니 그냥 웃겨. 거기에 고객센터의 이야기가 재밌고도 슬프게 들려서 안타까웠다.


, 상상해 봐. 내가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는데, 상담원이 사투리를 써. 내가 하는 질문을 잘 알아듣고 정확한 응대도 해줘서 별 문제 없었다. 사실 나는 상담원이 사투리를 쓰거나 표준어를 쓰거나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데, 상담원의 고객 응대에는 표준어가 원칙이라고 한다. 그들은 분명 표준어를 쓴다고 하는데 이미 억양에서 사투리가 느껴지곤 한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저자가 일했던 곳이 지방이기도 하고, 모바일이나 온라인으로 고객센터에 접근하기 어려운 나이 드신 분들이 고객센터로 전화 하는 경우가 많았던 거다. 이 고객님들이 진득한 사투리로 물어보시고, 상담원은 표준어와 법적 용어로 응대하는데, 또 고객님들이 잘 못 알아들으시니, 몇 번을 설명해도 못 알아들으시고 계속 반복해서 물어보시면, 직접 가서 해결해줄 수도 없고. 그러다가 어느 상담원이 정말 고객님의 눈높이에 맞는 찐 사투리로 응대해 드렸단다. 그렇게 설명해드리니 고객님은 바로 알아들으셨을 수도 있겠지만, 상담원 평가 점수에서는 마이너스가 기록된다고 하니, 이 무슨 아이러니야. 고객 응대는 최고점, 평가 점수는 마이너스. 이 예를 듣고 진짜, 융통성을 이럴 때 발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업무 평가에서는 잔혹하기만 했다.


표준말이 단정해 보이기는 하다. 같은 말을 전달해도 더 전문적으로 들리게 하는 효과도 있을 거고,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다른 단어로 생길 오해도 없을 거다. 하지만 애틋하게 들리는 정감 있는 말투는 역시 사투리가 아닐까. 듣는 사람에게는 내가 못 느끼는 전라도 억양이 느껴질 수도 있다. 지금은 오히려 더 친근하고 재미있게 말하려고 사투리를 섞어 쓰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표준어를 쓰게 된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투로 지역을 추측하기도 하지만, 그런 추측은 차별이나 배척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동네와 사람들을 연상하게 하는 즐거움이다. 과거 어느 시대에 존재했던 말의 어원을 따라가 보기도 하고, 그 시대를 걸어온 이들의 인생을 알게 되기도 한다. 나의 엄마가 TV를 보다가 어느 요리사의 레시피를 따라 적고 있는 걸 봤다. 노트가 있는데도 굳이 뜯어낸 지난달의 달력 뒷면에, 거품이 아닌 버끔이라고 적는 걸 보고 웃기도 했다. 엄마가 살아왔던 시절의 버끔은 누구나 사용하는 그냥 평범한 이었을 테니까. 날씨 서늘해졌으니 대문에 뺑끼칠을 해야겠다는 말을 페인트칠 하자는 말로 찰떡같이 알아듣는 내가 있다.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살아온 세월의 그림을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가 대화로 들리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게 비록 서로 다른 단어로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사투리라도 말이다.


말이, 각 지역의 사투리가 걸어온 길이 대한민국 현대사와 아주 가깝게 닿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어 반갑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역사를 이렇게 즐겁고 재밌게 들을 수 있다는 것도 행운이다. 너무 유쾌하게 읽어서 아무튼 시리즈를 더 애정하게 될 것 같다. 저자의 다른 작품 혼자 입원했습니다를 읽으면서 1인 가구, 비혼 여성이 살아가는 모습을 배웠는데, 이번 작품 아무튼, 사투리를 읽다 보니 미뤄두었던 안녕 커뮤니티가 더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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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행운
주영하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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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 명호, 태헌은 보육원에서 친 형제처럼 자랐다. 어쩌다 보니 명호는 목각 십자가를 휘둘러 보육원 원장을 죽였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지훈의 한 마디가 명호의 살해 이유를 설명해주면 좋았을 텐데, 지훈은 침묵을 택하고 명호는 소년원에 가게 된다. 이때부터였을까. 세 사람의 관계는 묘하게 흔들렸고,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성인이 된 세 사람은 끊어질듯 말듯한 인연을 계속 이어왔다. 공부를 잘 해서 출세한 지훈은 과거의 미안함 때문인지 명호에게 계속 돈을 대주었고, 태헌은 위태로운 줄타기 같은 지훈과 명호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했다. 이 정도 세월이면 서로가 알 것 다 알 것 같았지만, 정작 그들은 각자의 삶에 충실하느라 친구의 진짜 삶에는 다가가지 못한다. 그러던 중에 세 사람이 우연히 손에 쥐게 된 로또 한 장. , 이 로또가 말썽이다. 그냥 꽝이 되었으면 시원했을까. 이 로또가 40억에 당첨되었고, 세 사람은 로또 당첨금을 셋으로 나누어 각자의 인생에 불을 밝히고자 한다.


상상이 되지 않는가? 돈 앞에서는 어떤 감정이 앞서게 될지 모른다. 마냥 선하게 보여도 내 몫을 챙기고 싶은 욕심은 똑같다. 왜 꼭 셋이서 나누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하면 이미 분란은 시작된 거다. 굳이 셋이 나누어야 할까? 둘이 나누거나, 나 혼자 가져도 되는 거잖아? 각자의 계산으로 머릿속이 바쁜 이들의 생각을 누가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상황이 계속 펼쳐지고, 각자의 인생에서 절실히 돈이 필요했던 이유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상황은 더 꼬이고, 급기야 목숨을 잃는 이들이 생겨난다.


조금 더 자세한 설정이 있는데, 그 부분은 언급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입을 다물겠다. 처음에는 이 설정을 보고 무슨 판타지 소설인가 싶었는데, 읽을수록 누군가의 마음을 듣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떠올랐다. 상대가 나를 보면서 이렇게 말 하고 있는데, 이게 진심인지 아닌지 궁금했던 적 있지 않은가. 딱 그때의 마음을 풀어주기라도 하려는 듯한 설정에, 겉으로 보이는 이들의 관계가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역지사지의 순간만이 그 마음을 그대로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저자는 이 친구들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보여준다.


돈에 울고 돈에 웃는 인생이기에, 로또 40억의 주인공이 누가 될지 궁금했다. 정말이지 돈이 뭘까. 40억이라는 큰돈을 쓰고자 할 때 무엇이 우선순위가 될까.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없는 돈 만들어서 쓰느라 빚에 허덕이는 것을 멈추기 위해, 잘 해본다고 했는데 망해버린 일들을 위해. 뭐 어쨌든 돈이 필요한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돈을 채우기는 어렵기만 하니까. 막막한 상황에 갑자기 돈벼락이 떨어진 게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우연처럼 돌고 돌아 행운이 돌아가기도 하겠지만, 그 과정이 험난해서 추천하고 싶은 모험은 아니다. 당연히 목숨을 걸어야 하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비고 나면 뭐가 남을 건지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니, 참 막연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이 모험을 멈출 수가 없는 게 전쟁터 같은 삶의 현장이었다. 치열하게 전쟁터에서 뒹굴고 나니, 이 녀석들에게 남은 건 무엇일까 싶다. 우정이라고 말하기에는 그 과정에서 마주친 감정들이 쉽게 지워지는 건 또 아니더라만.


그나저나 나도 오늘 로또 명당이라는 곳에서 로또 샀는데, 당첨되고 싶다, 1...



#완벽한행운 #주영하 #다산책방 #소설 #한국소설 #로또 #40#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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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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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준이 되는 것은 저마다 다르다. 돈을 쫓는 사람에게는 돈이, 행복과 안정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조금 부족해도 마음의 안정과 행복을 떠올리는 게 우선이 된다. 이상하게도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희생하게 되는 인생의 계산법은 늘 적용되는지라, 언제나 선택은 하나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했다. 이섭이 북으로 올라갔다가 남으로 내려오면서 선택한 우선순위, ‘이쪽에서 내 가족을 희생시킬 만큼 더 나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기때문에,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뿐이었던 결정은, 그의 인생을 유령의 시간으로 만든다.


솔직히 난 어떤 사상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은 안 드네. 다만 어떤 게 더 인간적인 제도냐의 문제겠지. 나는 겁 많은 사람이라서 그냥 내 가족과 아이들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네. 내가 믿는 신념 때문에 가족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네. 제 몸만 아낀다고 비난해도 좋네. 나는 아이들이 칼끝에 손만 베여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네.” (134페이지)


일제강점기가 끝났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도 있었다. 이게 행복일까 싶은 것도 잠깐, 사회주의를 꿈꿨던 이섭은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경찰이 그를 대신해서 아내와 어린 딸을 잡아갔지만, 아무런 죄가 없는 이들이 곧 풀려날 거로 믿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이념을 좇아 북한으로 간다. 모든 것이 공평하게 나눠지고 살아갈 수 있는 그곳에서 자리를 잡으면 남은 가족을 불러와야지. 아마도 이런 마음으로 목숨 걸고 북으로 올라간 건 아닐까. 막상 보게 된 북한의 현실은 그가 바라던 이념과 너무 달랐기에 또 한 번 목숨을 걸고 임진강을 건너 남으로 내려온다. 그렇게 마주한 또 다른 현실은 잔혹했다.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북으로 갔다는 소식에,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거창한 바람도 아니었는데, 현실은 잔혹했다. 내 가족과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었던 소박한 바람은 한 사람을 살아있는 유령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숨을 쉬고 있으나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도 아쉬울 것 없을 것 같지만 그에게는 책임져야 할 또 다른 가족이 있다. 그가 두 번째로 꾸린 가족 역시 그의 행복이고 책임이었으니,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세상은 그를 번번이 좌절하게 했고, 북쪽을 바라보면서 키운 그리움 또한 계속 쌓여가기만 했다. 먼 거리에서 수면위로 비추는 조명이 이상하게 깜빡일 때마다, 이름 모를 고무배가 남쪽으로 흘러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희망 고문은 커졌다. 내 가족이 그렇게 흘러 남쪽으로 오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다. 창자의 내벽에 굵은소금을 박박 문질러대는 것도 같고 칼로 자근자근 저미는 것도 같은 통증이었다. 10년 가까이 전쟁터에 갇혀 오직 홀로 싸움터를 누빈 영성이 아버지의 고독한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그 시간 동안 자신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는 남자를 보며 시린 가슴을 견뎌야 했을 여자의 외로운 울음소리 같기도 하며, 20년이 다 되도록 전생의 감옥에 갇혀 그리운 이들을 찾아 헤매다 어느새 쉬어버린 이섭 자신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심지어 신혼의 골방에서 신랑이 폭사했다는 미자의 울음으로도 들렸다. 어쩌면 그 모두의 것인지도 모를 울음이 이섭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198페이지)


창문 너머로 아파트가 보이는 북한의 한 호텔에서, 화자인 지형의 목소리로 시작된 이 소설은 첫 페이지에서부터 이념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 현실에서 지형은 작가가 되어 북한에 방문하게 되었고,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의 간절함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리고 싶었으나,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아버지가 평생 품고 살았던 비통함은 그래서 더 안타깝다. 살아있다고 믿고 있으니 만날 것 같았지만 그러지 못했고, 금방이라도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지만 닿지 못했다. 기다림에 애가 타지만 그래도 견딜 수 있었는데, ‘사회안전법은 또 한 번 한 사람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그저 가족과 행복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가졌던 이념이, 그 이념을 좇아가고 싶었던 선택이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도 있나?


이념, 역사, 정치 등 많은 화두가 언급될 수 있는 소설이겠지만, 한 사람의 삶으로 읽혔다. 그 인생의 흐름 사이에 이념 갈등, 민족의 역사, 현실 속 정치적인 면이 부정할 수 없이 존재한다는 게 아이러니이지만. 혹시라도 그는 현실적인 문제에 갇혀 자기 삶이 다르게 읽힐까 봐서 걱정이라도 했을까. 자신의 삶을 유령의 시간이라고 선언하면서, 스스로 그 모든 이야기를 쓰고자 했다. 몇 장 쓰지도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할 줄은 몰랐겠지만. 그렇게 첫 문장이 시작되고 40년 만에 작가가 아버지의 인생을 완성했다고 한다그래서 더 의미 있다. 내가 접근할 수 없던 시대의 불행을, 울음 가득한 외침을 듣게 한다. 역사가 쥐고 흔들었던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인생에서 보아야 할 것을 고민하게 한다.


개정판으로 읽게 된 지금, 굉장히 잘 읽히는 소설이지만, 생각해 보면 많은 것이 의아하기도 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뭐가 달라졌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사상을 나누어 이야기하는 것도, 오물 풍선을 날려 보내고, 확성기를 틀어대고, 남과 북의 대화는 단절되었으며, 급기야 남과 북을 잇는 다리를 폭파하기에 이른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 안타까움 속에 존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유령 같은 인생은 누구의 몫인지 묻고 싶다.


#유령의시간 #김이정 #교유서가 #다시소설 ##책추천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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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1 13: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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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1 14: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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