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을 주문했고 풍성한 수국이 도착했다. 여름은 수국이 제철이니까. 정말 풍성한 수국이다. 네 송이가 제법 무겁다.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수국 뒤에 숨어도 좋겠다. 습하고 습한 여름, 청량한 기운을 선사하다. 그래서 여름이면 수국이 떠오르는지도 모른다.





책도 한 권 샀다. 심보선의 시집 『네가 봄에 써야지 속으로 생각했던』이다. 기다리는 책은 황정은의 에세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 책장의 마지막 책들은 시집일지도 모르겠다. 시집은 쉽게 정리하지 못하니까.





여름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마냥 좋아하기는 어렵다. 더위에 취약하고 땀이 너무 많다. 맛있는 자두를 고르고 있다. 온라인으로 고르고 있으니 맛있는 자두를 먹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아파트 앞 마트엔 과일이 없다. 있어도 싱싱하지 않고 선뜻 구매할 수가 없다. 주저하다가 사장님께 마트가 문을 닫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오며 가며 상가 공실을 많이 보는데 폐업으로 가는 과정을 직접 마주하니 씁쓸하다. 심보선의 이런 시가 모두를 달래줄 수 없겠지만 그래도. 다정함이 필요한 이들에게 다정함이 전해지길.


기억의 소실을 응시한다

그 안에 새와 새 아닌 것들이

다 함께 웅크려 있다

날개가 있다고 다 새는 아니고

그 중 다정한 것만

꿈 안에 깃들 수는 없다

내가 너를

신화 속 존재처럼

소중히 여긴다 한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단어를 고르고 또 고른다

나는 용서하고 용서받을 기회를 놓친다

꿈이라면

꿈이 아니어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나는 너를 오로지 체온으로만 기억한다

따사로움이여

따사로움이여

그토록 아름다운 꿈을 꿨는데

너에게 보여줄 수 없다니

(「다정하고 따사로운」, 전문)





가만히 있으면 더위를 견딜 수 있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움직여야 하고 움직이면 땀이 난다. 땀을 날려줄 바람을 기다린다. 에어컨이나 선풍기의 바람이 아닌 자연 바람. 기다림이 길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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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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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선 길을 잃기 마련이다. 두렵거나 무섭다기보다 처음 간 곳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길을 찾으면 그만이라고. 돌아갈 곳이 있으니 괜찮다고. 그러나 돌아갈 곳이 어딘지 잃어버리고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걸 발견하면 절망에 빠진다. 도움을 청해야 할 이가 아무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폴 윤의 단편집 『벌집과 꿀』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그러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고향을 떠나고 길을 나선다. 정착한 듯 보이지만 뿌리를 내린 적 없다. 원망할 대상은 사라졌고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들의 여정(여행이든 이주든)은 고단함을 넘어 고독하고 쓸쓸하다. 때문에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타인을 돌본다.


첫 번째 단편「보선」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교도소에 갔다가 출소한 ‘보’의 이야기다. 교도소에서 만난 이의 소개로 낯선 동네의 카지노에서 일한다. 집과 카지노를 오가는 게 전부인 어느 날 동료의 잃어버린 아이를 찾다가 주인집 딸과 마주한다. 그녀에게도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족이 있지만 가족과 살지 못하고 집을 원하지만 집을 갖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들의 마음 한편에 자리한 감정을 나는 짐작할 수 없다.


자신이 살아온 곳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사연도 마찬가지다. 「코마로프」 속 탈북한 뒤 이곳저곳을 떠돌다 스페인에서 청소 일을 하는 나이 든 여자 ‘주연’의 사연, 런던 외곽 한인타운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크로머」 속 탈북 한인 2세 부부의 이야기.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갈 곳이 없는 주연은 사람들이 아들이라 말하는 남자에게 진짜 엄마의 주소를 전하고 한인 2세 부부는 길을 잃은 아이가 신경 쓰이고 걱정된다.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삶.


소설 속 인물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한 한국계 디아스포라들이다. 「보선」, 「코마로프」, 「크로머」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지만 조선인 고아와 에도시대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역참에서」, 할아버지를 이어 사할린섬의 교도소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고려인 십 대 소년 ‘막심’의 이야기 「고려인」, 러시아 극동 지방의 고려인 정착지에 임관한 러시아인 장교가 목격한 고려인의 삶을 보여주는 「벌집과 꿀」, 한국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남자의 이야기 「달의 골짜기」는 한국의 아픈 역사를 불러온다.





표제작 「벌집과 꿀」과 「달의 골짜기」는 짙은 여운을 남겼다. 내가 잘 모르는 역사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벌집과 꿀」의 고려인에게 러시아인 장교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자 외부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하나가 되어 뭉쳐야 했다. 고국을 떠나온 그들에게 그들을 지킬 수 있는 이들은 그들뿐이라고 믿었을 테니까. 설령 무지한 믿음일지라도.


“우리는 아무도 원치 않고 관심도 없는 땅에서 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벌집과 꿀」, 198쪽)

“그럼에도 내일이라는 게 있지 않게습니까?”(「벌집과 꿀」, 199쪽)


전쟁의 상흔만 남은 고향 집을 고치고 혼자 살아가는 「달의 골짜기」속 ‘동수’에게도 다르지 않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지만 동수에겐 그곳이 집이었으니까. 땅을 일구고 가축을 키우고 한 번씩 만나는 땜장이에게 필요한 물건을 샀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채, 전쟁고아인 남매를 거두며 살아간다. 결국엔 서로에게 상처로 남은 시간일지 모르지만.


매일 밤 여기서 달이 뜨고, 기울고, 부서졌단다. 그러고는 스스로를 다시 만들어냈지. (「달의 골짜기」, 250쪽)


그들은 살아내야 하기에 아무도 돌보지 않는 땅을 개간하고 넓혀간다.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나아간다. 어느 누구도 정확한 방향과 길을 알려주지 않지만 멈출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실패를 반복하며 방향을 찾고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낸다. 그곳이 어디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는 진리에 기대어. 변하지 않는 그 사실은 여전히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어딘지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나가가는 이들에게 애틋한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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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고 그 뜻을 이해하는 능력인 문해력(文解力)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금일 오후에 만나자고 했는데 금요일 오후라고 여긴다거나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는 말에 제대로 사과를 하라고 한다든지. 상대가 전하는 말의 뜻을 다르게 해석하고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유명 연예인이 문해력 검사에서 중학교 수준이 나왔다며 문해력 공부를 하고 있다는 방송을 보고 나도 문해력 검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연예인이 문해력 수업을 하는 방송도 보게 되었는데 수업 중 나온 특질이란 단어를 쉽게 설명할 수 없었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지만 말하기 어려웠다. 아니, 나는 그 단어의 뜻을 몰랐던 게 맞다. 그런데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 같은 이에게 『우리말 나들이 문해력 편』은 안성맞춤의 책이 아닐까 싶다.

‘단어 한 끗 차이로 글의 수준이 달라지는’ 말이 얼마나 많은지 책을 통해 새삼 알게 되었다.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고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도 말이다. 책은 3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장에서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뜻이 달라 헷갈리는 표현」, 2장에서는 「습관처럼 굳어 틀린 줄도 모르고 쓰는 표현」, 3장에서는 「문해력과 문장력을 동시에 높여주는 표현」을 알려준다. 우리가 일상에서 잘못 사용하고 있는 사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실생활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뜻이 달라 헷갈리는 표현」에서는 ‘갑절’과 ‘곱절’처럼 둘이 같은 뜻이 아닐까 싶은 ‘너비’와 ‘넓이’, ‘돋구다’와 ‘돋우다’ 말들과 뭐가 다른지 바로 떠오르지 않는 ‘밤새다’와 ‘밤새우다’, ‘신소리’와 ‘흰소리’ 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소개한다. ‘신소리’와 ‘흰소리’를 보면 이렇다. 신소리는 상대편의 말을 슬쩍 받아 엉뚱한 말로 재치 있게 넘기는 말이며 흰소리는 터무니없이 자랑으로 떠벌리거나 거드럭거리며 허풍을 떠는 말이다. 흰소리를 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되겠다. 그리고 신소리를 쉰소리로 잘못 쓰거나 잔소리와 같은 뜻으로 오해하지 말아야겠다.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잘못 알고 사용한 단어와 만났다. 세상에나 정말 창피한 순간이었다. 날씨가 개지 않고 흐린 상태는 ‘끄물끄물하다가 맞는데 나는 ‘꾸물꾸물하다’로 알았던 것이다. 한 번의 의심 없이 말이다.






「습관처럼 굳어 틀린 줄도 모르고 쓰는 표현」에서는 요즘처럼 더운 여름에 자주 쓰는 말‘ 겨땀’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마 많은 이들이 겨땀이 표준어가 아니라는 걸 모르고 사용할 것이다. 겨땀이 아닌 ‘곁땀’이 표준어라는 걸 잊지 않을 것 같다. ‘밥 한 번 거하게 살게’라는 말도 틀린 말이다. 거하다는 산 따위가 크고 웅장하다는 말이고 넉넉하다는 뜻은 건하다. ‘밥 한 번 건하게 살게’, ‘아침을 건하게 먹었다’로 쓸 수 있다. 가장 흔하게 잘못 사용하고 있는 말이 ‘흡연을 삼가해주세요’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게 왜 잘못된 말이지 하고 생각하는 이가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바른 표현은 ‘흡연을 삼가주세요’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

「문해력과 문장력을 동시에 높여주는 표현」에서는 정확한 뜻을 모르면서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들을 만날 수 있다. ‘미더운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기분이 좋다면 ‘미덥다’의 뜻을 아는 사람일 것이고 뭐지 싶은 생각이 든다면 미덥다란 말을 모르는 것이다. 믿음이 가는 데가 있다란 말이니 주변 동료나 친구에게 사용해 보면 어떨까. 굳건하고 확실하여 아주 미덥다는 뜻의 ‘구덥다‘,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참되고 미더운 데가 있다는 뜻의 ’실답다’를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사투리도 외래어도 아닌 알고 보면 표준어」란 부록도 유익하다. 사투리로 착각하거나 비속어나 잘못된 말이라고 여겼던 말이 표준어라니. ‘까지다’, ‘빠대다’, ‘삐대다’, ‘싸대다’, ‘오지다’가 모두 표준어였다. 그럼 ‘아따’는 표준어일까? 맞다. 표준어다. 아따는 사투리가 아닌 무엇이 몹시 심하거나 하여 못마땅해서 빈정거릴 때 가볍게 내는 소리다.

매일 쓰는 우리말이 가장 어렵다. 새삼 확인한다. 『우리말 나들이 문해력 편』은 우리가 쉽게 사용하고 무심코 쓰는 말의 소중함과 문해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준다. 단순히 글을 읽는 능력이 아닌 사회적 소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말한다. 어떤 말을 쓰고 어떤 표현을 하느냐로 자신을 나타낼 수 있고 상대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올바른 언어 사용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 책 한 권으로 자신과 가족, 친구의 문해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봐도 재밌을 것 같다. 처음 만나는 것처럼 생소한 말이 많겠지만 스마트폰의 세상이 아닌 재미난 우리말의 세계에서 충분히 좋은 시간을 갖게 되지 않을까. 꼼꼼하게 읽고 반복해서 읽는다면 풍부한 우리말을 쓰며 문해력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우리말 나들이 어휘력 편』 과 함께 든든한 우리말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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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6-24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끄물끄물하다˝ 완전 충격인데요? 저도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다 잘못 쓰고 있었네요.

자목련 2025-06-27 11:42   좋아요 0 | URL
잘못된 표현이라는 사실 조차 모르고 그냥 쓰고 있는 말들이 무척 많았어요.

잉크냄새 2025-06-24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흡연을 삼가주세요˝ 라는 표현에 적응하기는 금연보다 힘들 듯 합니다.
아마 대부분 ‘가‘와‘주‘ 사이에 ‘해‘를 끼워넣고 자신의 해박함에 흐뭇해할것 같네요.

자목련 2025-06-27 11:4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삼가주세요라고 쓰면 말씀처럼 고치는 이들이 있을 것 같아요 ㅎ
 
엎드리는 개 안온북스 사강 컬렉션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유진 옮김 / 안온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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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을 사랑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사랑을 원하는 방식도 그러하다. 분명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이지만 갈구하는 사랑은 같을 수 없다. 사랑이라는 속성이 그렇다. 그래서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게 현명한 사랑이라는 말도 있다. 사랑하니까 뭐든 원할 수 있고 괜찮다고 믿는 사람에게 그건 아니야, 그럴 수 없어라고 말한다면 사랑을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사실, 이렇게 말은 해도 사랑에 빠지거나 미치게 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성적인 판단은 사라지고 순간의 감각과 감정에 취해 그게 전부라고 믿고 만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엎드리는 개』 속 ‘게레’와 ‘마리아’의 관계는 무엇일까. 마리아를 향한 게레의 몸짓은 사랑이었고 그런 마리에게 게레는 처음엔 마냥 귀찮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관계와 감정은 수시로 변하니까.


스물일곱 살 게레는 고가의 보석 주머니를 발견하는 순간 다른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이 보석만 있으면 탄광회사도 때려치울 수 있으니까. 하지만 꿈과 현실은 달랐다. 게레가 주운 보석의 주인은 열일곱 번이나 칼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레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시선도 그러했다. 과거 마르세유 갱단 두목의 여자로 살았지만 정원을 가꾸며 하숙집을 운영하는 마리아는 그를 살인자로 착각한다. 하루하루가 지겹기만 했던 마리아에게도 게레가 신선한 활력으로 다가온 것이다. 늙은 여자와 젊은 청년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단단히 착각하면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마리아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착각, 게레가 잊었던 감각과 본능을 깨워줄 거라는 착각.


둘은 서로에게 몸을 기울인 채 속삭이고 공모하면서, 절반쯤은 적의를 품고 또 절반쯤은 유혹적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어다. 둘 사이를 방해하는 것은 그들의 나이 차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비슷한 부류라는 데 있었다. (69쪽)


소설과 별개로 게레와 마리아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둘만의 세계로 떠났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소설 속 늙은 여자를 정부로 두었다고 말하는 게레의 동료나 바에서 게레와 마리아를 두고 이모나 모자 사이라고 오해가 아니라 확신하는 이들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리아 쪽에서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 역시 게레를 향하 마음이 진심이었음을 발견한다.





그녀는 자의 신경을 긁어대는 내면의 무언가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다, 바람에서 정말로 좋은 냄새가 난다는 것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115쪽)


게레가 보석 주머니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연하게 운명이 게레에게 다가온 것이다. 마리아라는 사랑도. 누군가 마리아는 그저 외로웠고 고독했으며 게레는 욕망을 사랑이라고 착각한 거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이다. 게레가 마리아를 만나기 전까지 만났던 여자를 보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게레는 마리아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깨우친다.


『엎드리는 개』란 제목이 말하듯 소설에는 개 ‘파샤’가 등장한다. 떠돌이처럼 보이지만 주인이 있는 개 파샤는 게레 주변을 맴돌고 따라다니지만 게레에게 온전하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배를 내밀어 쓰다듬어 달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모두가 느낄 수 있다. 파샤가 게레를 좋아하고 있다는걸. 파샤의 행동을 통해 게레와 마리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엎드릴 수 있지만 주저하고 조심스러워하는. 마리아가 조금 더 빨리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게레에게 표현했다면 어땠을까.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마리아는 차갑고 조금은 적대적인 얼굴로 자신을 대면했다. 스푼을 내려둔 손이 턱으로, 머리카락으로 올라갔다. 간단한 동작으로 풍성하게 볼륨을 만들어보았지만, 거기엔 눈이 띄는 흥미도 열의도 없었다. 꼼짝하지 않고 아득히 머물러 있는, 권태와 무관심 그 자체인 얼굴이었다. 그러므로 오만한 눈꺼풀 아래 맑고 단단한 눈에서 너무나 둥글고 응축된 눈물이 아무런 전조 없이 연달아 솟아올랐을 때, 그녀가 느낀 감정은 괴로움이 아닌 놀라움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귓가에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흐르는 눈물을 바라보았다. (131~132쪽)


오해와 착각으로 시작된 관계였을지 모른다. 연민이나 동정으로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게레와 마리아는 서로를 사랑했다. 사랑하는 방식과 속도가 달랐다. 마리아 앞에 납작 엎드리는 개가 될 수 있었던 게레, 그런 게레를 쓰다듬고 만지는 대시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는 마리아. 타인의 시선에 가깝고도 멀게 보이는 그 거리가 그들에겐 가장 가까운 거리였다. 둘 사이에 오가는 눈빛은 둘만이 알 수 있는 신호다. 게레와 마리아의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들도 오직 그들뿐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이 말하는 사랑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사랑.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방식, 행복과 기쁨이 아닌 고독과 쓸쓸함만 남은 사랑, 사랑이 무엇인지 곱씹고 곱씹게 만든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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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되었다. 예보는 정확하게 맞았다. 마치 알람을 맞춰놓은 것 같았다. 그치는 시간도 그랬다. 비가 올지 몰라 우산을 챙기는 게 아니라 반드시 우산을 가지고 외출을 해야 하는 걸 알려준다. 편리하고 좋은 세상이다. 우연의 순간에 맞닥뜨리는 감정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들었다. 비 때문에 챙기지 못한 것들을 할 여유를 준 것일까. 어제의 하늘과는 다른 하늘이다.


장마의 나날을 보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비를 좋아하지만 비가 지닌 무서움을 잘 안다. 비가 몰고 오는 불쾌지수를 잘 다스려야 한다. 첫 번째 준비로 에어컨을 새로 장만했다. 장만이 아니라 선물이다. 더위를 많이 타는 누나를 위해 동생이 선물한 시원함이다. 공간의 재배치가 필요했다. 덕분에 책장을 정리했다. 이번에도 책을 버렸다. 좋아했지만 다시 읽을 것 같지 않은 책, 읽겠다 다짐하며 버리지 못한 책, 그리고 CD를 정리했다. 갖고 있는 게 많지 않았지만 막상 버리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선물 받은 게 많았다. 고마운 마음을 정리하는 것 같은 미안함이 몰려왔다.





책장에는 공간이 생겼다. 드립 커피와 몇 권의 책을 샀다. 버리는 만큼 맞춰 들이는 건 아니니까. 김애란의 단편집 『안녕이라 그랬어』, 『소설 보다 : 여름 2025』는 구매 계획이 있었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별의 시간』은 고민하다 구매했다. 왜냐하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책을 읽다 만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글이라는 건 알겠는데 어려웠다. 친애하는 이웃 님의 추천으로 도전하기로 했다.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알 수 없으니까.


비가 지나간 아침은 고요하다. 바람도 없지만 시원하다. 이 시원함이 곧 사라질 걸 알기에 더욱 달콤하다. 다시 비가 오기 전 해야 할 일은 세탁기 돌리기. 게으른 마음을 달래며 해야 할 일이 많다. 주말의 아침이 분주하다. 모두 장마의 나날을 안전하게 지냈으면 한다. 눅눅한 일상이 계속되겠지만 보드라운 시간도 이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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