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병과 마법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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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것만 같은 고통의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기도가 쏟아져 나온다. 제발 이 순간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한편으로는 이것이 끝이기를 바란다.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배명훈의 장편소설 『기병과 마법사』속 윤해도 그러했다. 간절하고 간곡한 바람,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마음이 통하는 순간 ‘윤해’의 세상은 달라졌다. 윤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병과 마법사』은 이상한 소설이다. 그랬다. 처음에는 역사소설인가 싶었다. 가상의 국가 사라의 성군이었던 왕은 폭군이 되고 저자에는 죽음이 낭자했다. 살기 위해서 왕의 눈치를 살피고 욍의 조카 윤해는 원하지 않는 혼인을 해야 했다. 가문과 아버지를 위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약혼자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생사의 기로에서 윤해는 자신의 숨겨진 힘을 마주해 목숨을 구한다. 윤해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꿈 속에서 자주 보았던 장면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할까.


약혼자의 죽음은 수도 소라울에 살던 윤해를 북방지역의 ‘술름’으로 몰아냈다. 유배와 다름없었지만 윤해는 오히려 반가웠다. 북방 지역을 지키는 기병 ‘다르나킨’을 만난다. 그리고 ‘거문담’을 본다. 벽만 끝없이 이어진 형태는 비밀을 간직한 것 같았다. 영민한 윤해는 그곳이 낯설지 않았다. 이 역시 꿈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알 수 없는 존재가 등장하는 꿈, 확실한 무언가가 윤해를 그곳으로 이끈 것이다.


윤해를 만난 다르나킨은 그녀를 도와 전략을 짜고 변방의 전투에 함께 나선다. 집 안에서만 지낸 윤해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말(言)로만 두는 장기를 배웠다. 그것은 술름에서 유용했다. 이쯤 되면 소설의 제목인 기병과 마법사가 누구인지 짐작할 것 같다. 다르나킨은 기병이고 마법사는 윤해라는걸. 짐작과 달리 궁금증은 더 증폭된다. 윤해의 마법은 언제 어떻게 발현되는가. 윤해의 능력은 꿈에서 시작되었다. 꿈속에서 만난 사람, 그녀는 자신을 ‘마로하’라 말한다. 윤해가 꿈에서 만나는 일들은 모두 윤해에게 일어날 일이었다. 윤해가 오랜 시간 꿈속을 헤맬 때마다 술름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초원 한가운데 우뚝 솟은 요새 거문담과 알 수 없는 숫자 1021.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윤해는 모든 걸 밝혀낼 수 있을까. 윤해는 정말 마법사일까.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물리칠 묘수가 윤해에게 있을까. 어쩌면 윤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능력을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번의 우연이 아니라는걸, 단순한 예지몽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그걸 쉽게 믿을 수 있을까.


“나는 내 세계가 끌어낸 예언자고, 너는 네 세계가 빚어낸 예언자지. 네 세계를 구하는 건 내가 아니야. 그러니까 아무래도 이건 너의 몫인 것 같아.” (283쪽)


소설이 흥미로운 건 바로 그 지점이다. 윤해 스스로 자신을 믿는 일,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 있기에 거문담과 1021이라는 기묘한 숫자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마법을 불러올 수 있는 주문이 있느 것도 아니고, 특정한 수신호 같은 게 있는 게 아니니까.


세상과 세상을 잇는 문이라는 건, 다른 세상이 여러 개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쩌면 마로하 또한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사실 오래전부터 윤해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예언자 중 하나가 된다는 건 어딘가에 속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너무 넓게 퍼져 있어서 한자리에 모일 방법은 없지만, 그래도 저 넓은 우주 어딘가에는 예언자라는 역할과 임무가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대체할 수 없는 막중한 사명이. 궁극적으로 윤해는 거기에 속하고 싶었다. (327~328쪽)


윤해가 가진 능력만으로 세상과 싸울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기병으로 대표되는 다르나킨와 같은 이들, 저마다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협력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배명훈이 그리고 싶은 세상이며 전하고 싶은 메시지일 것이다. SF속 판타지 속 윤해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가치라고 말이다. 윤해가 만날 세상, 그리고 그 다음의 다른 윤해가 만들어갈 세상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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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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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좋다.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다. 다른 내가 될 수 없기에 나를 좋아한 것 같다. 그건 어쩔 수 없음일까, 아니면 나를 좋아하려고 노력했던 것일까. 잘 모르겠다. SF 소설처럼 어딘가 다른 내가 존재해 다른 삶을 산다고 상상해도 그 삶은 나이지만 내가 아니고 나는 그 삶을 좋아할 수 없다. 여기 있는 나의 삶만이 내가 아는 나의 삶이니까.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나의 삶이 더욱 소중할 수밖에. 나의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곳으로 나를 데리고 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을 읽으면서 내 삶을 더 좋아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너무 당연한 일인데 내 삶을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은 뿌듯함이라고 할까. 김영하 작가가 알려주지 않아도 인생은 일회용이다. 알고 있다. 주어진 생은 한 번뿐이고 그래서 잘 살아야 한다고.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고. 근데 그게 어디 쉬운가. 그런 깨달음을 쉽게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럼에도 곧 수긍하게 된다. 내 삶이니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내 삶은 소중하니까.


고백하지만 김영하의 에세이를 기다렸다거나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고 그게 좋았다. 작가가 담담하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부모님의 죽음, 작가가 알지 못했던 엄마의 젊은 시절, 시간이 지나고 돌아본 20대가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이 책이 아니면 나는 몰랐을 것이다. 몰랐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나는 엄마의 처녀 시절이 궁금해졌고 그 시절을 아는 이(엄마의 형제)가 단 한 분(이모) 남았다는 사실이 슬펐다. 이모와 나는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기 때문이다. 어째서 엄마가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것들로 채워진 인생, 알고 싶다고 느낄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끝내 답을 얻지 못하는 것. 그러니 후회할 수밖에 없는 것.


그 모든 걸 미리 알았다고 해서, 나의 미래를 알았다고 해서 행복할까. 그건 아닐 것이다. 알기 때문에 궁금하지 않고 알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을 게 뻔하니까. 그러니 학생들을 가르칠 때 가능성을 언급하지 않은 그의 선택은 현명하다. 혹자는 당신이 가능성을 언급했더라면 누군가의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자의 인생은 각자의 것이고 외부의 영향은 아주 미세하게 작용한다는 걸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것은 마치 우주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이끌리는 것만큼이나 자명하며, 그걸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해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리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61쪽)


나이가 들수록 좋은 건 쉽게 흥분하지 않고 순간의 감정을 누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완벽하지 않다. 과거의 나보다 훨씬 수월하다. 내가 변한 것처럼 나와 연결된 이들도 변한다는 사실이다. 매번 나의 잔소리를 귀찮아하던 조카가 그때 이모의 말을 이제 알겠다고 말하는 조카도. 어디 그뿐인가. 이제 내게 단 한 사람의 사랑만이 전부이고 그게 없다면 끝날 것 같은 세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감정은 소중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정은 너무 많다는 걸 안다. 김영하 작가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가 요가를 하고 정원이 있는 주택에 살고 이십 년 넘게 수동 커피 분쇄기가 있는 줄 영영 몰랐을 것이다. 대단하게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가 솔직하게 들려주는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은 꽤 감동적이다. 아마도 내가 젊지 않고 늙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지만 그들이 인생이라는 게임을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남아 여기까지 와 있는지 속속들이 알 도리가 없다. (151쪽)


단 한 번의 삶을 살아간다. 어제를 후회하고 오늘을 반성하며 내일을 기대한다. 놓친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안달복달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아직 5월인데 봄은 사라진 것 같다. 아차 하는 순간, 모든 게 지나간다. 한 번뿐인 인생이 그러하듯. 내 인생만 그러하지 않다는 게 큰 위안이다. 모든 걸 지우고 다시 그리고 다시 채워 넣고 싶은 삶일 수도 있지만 그럴 수 없다. 그 모든 게 나의 삶이었으니까. 나는 내가 좋고 앞으로도 내가 좋을 예정이다. 단 한 번의 내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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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25-05-27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에세이도 참 좋습니다.

자목련 2025-05-28 10:56   좋아요 1 | URL
저는 보물선 님의 댓글이 참 좋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blanca 2025-05-27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김영하 작가에 대해 새로운 면면들을 알아가게 돼서 참 좋았어요. 피상적으로 비치는 사람의 인상을 가지고 전부를 판단하지 말아야겠다, 싶었고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스스로를 좋아하는 자목련님 모습이 참 좋네요.

자목련 2025-05-28 10:57   좋아요 1 | URL
네, 잘 모르면서 혼자 지닌 편견이 참 무섭겠다 생각도 했어요. 저를 더 좋아하도록 노력하려고요!

꼬마요정 2025-05-28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 글 너무 좋아요.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싶습니다.^^

자목련 2025-05-28 10:58   좋아요 2 | URL
꼬마요정 님의 댓글이 무지 무지 좋습니다. 즐겁게 만나시길 바라요!
 


책을 샀다. 자꾸 책을 산다. 적립금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서 산다. 리뷰가 좋아서 산다. 이번이 아니면 읽지 못할 것 같아서 산다. 아니다. 그냥 좋아서 산다. 책이 좋으니까. 그렇게 해서 도착한 책은 세 권이다. 잠자냥 님의 리뷰가 좋아서(땡스투) 산 책은 『어느 겨울 다섯 번의 화요일』이다. 이번에 읽지 못하면 못 읽을 것 같은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댈레웨이 부인』이며, 살까 말까 고민하다 적립금이 큰 지분을 차지한 책은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이다.




1월부터 4월까지는 제법 조절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5월은 과소비다. 빨리 읽는다면 괜찮을 것이다. 지난번 구매한 소설 가운데 한 권은 읽었으니까. 빨리 읽을 수 없을 경우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다 책장을 본다. 나에겐 읽지 못한, 읽지 않은 책들이 있다. 많지도 않은 책인데 다 읽지 못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읽지 못한 책 가운데 10년 가까이 책장에 있는 책도 있기 때문이다. 모르겠다. 아무튼 책을 샀다.


커피를 산다. 쿠폰과 스탬프를 줘서 산다. 커피를 잘 아는 이가 좋다고 추천해서 산다. 아니다. 그냥 좋아서 산다. 커피가 좋으니까. 이번에 산 커피는 <콜롬비아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나에어로빅>다. 절대 외울 수 없는 이름이다. 다른 커피도 그렇다. 좋았던 커피를 기억하려면 구매 내역을 봐야 한다. 알라딘에서 구매하는데 만족도가 높다. 드립 백이나 핸드드립을 구매한다. 택배 상자를 열자마자 커피향이 쏟아진다. 정말 좋다. 빨리 커피를 마시고 싶다.






작약을 샀다. 친구에게 선물했다. 코만도였는데 색이 정말 강렬하다. 레드 참과는 다른 강렬함이다. 그리고 며칠 뒤 나에게도 코만도가 도착했다. 이번엔 친구가 보낸 작약이다. 내가 작약을 좋아하니까 보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작약을 선물했다. 코만도는 꽃송이가 무지 크고 너무 빨리 핀다. 그러니까 빨리 질 것이다. 새로운 작약을 통해 작약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간다. 그게 좋다.





엊그제는 여름 같았다. 습해서 진짜 여름인가 싶었다. 선풍기를 꺼낸 친구고 있고 에어컨을 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올여름이 무섭다. 여름이 오는 건 당연한데 그 여름이 무서우니 큰일이다. 여름이 오는 걸 피할 수 없고 나는 그런 능력도 없다. 여름과 잘 지낼 방도를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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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리 2025-05-23 16: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의 책장에도 안 읽은 책이 쌓여가고 있지만 또 한권 늘려가고 있죠

자목련 2025-05-24 10:55   좋아요 1 | URL
안 읽은 책을 향한 마음은 미루고요 ㅎㅎ

blanca 2025-05-23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 달 책 쇼핑 대박이에요. 이제 다음 주에 한 권만 주문하고 참을 거예요. 작약을 선물하는 친구 사이 너무 아름답네요.

자목련 2025-05-24 10:55   좋아요 1 | URL
꼭 한 권만 주문하시길 바라요!
고맙고 소중한 친구입니다^^

새파랑 2025-05-24 0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기대별점 적립금 때문에 책을 계속 사게 됩니다 ㅋ 전 기대별점 적립금 3번 쌓일때마다 사는거 같아요 ㅋ

자목련 2025-05-24 10:56   좋아요 2 | URL
맞아요, 기대별점!
거기다 룰렛 적립금까지 ㅎㅎ

구단씨 2025-05-26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꽃을 잘 모르는데, 작약의 빨강색이 너무 예쁘네요.
꽃잎이 잘 모아진 모습을 보고 장미인가 싶었는데, 활짝 핀 사진을 보니 이게 작약이구나 싶네요. ^^

저도 적립금 아까워서 종종 삽니다. 책도 사지만 사는 양만큼 읽어내지는 못하고, 가끔 커피도 사고...
알라딘 적립금은 참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Y서점처럼 제발 적립금 유효 기간 좀 없애주면 좋겠어요. ㅠㅠ

자목련 2025-05-28 11:15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작약은 처음인데 색깔이 정말 예뻐요. 그리고 신기한 게 지는 꽃잎의 색은 또 완전 히다른 색이고요.
맞아요, 적립금 사용기간이 짧아서 배보다 배꼽이 큽니다. ㅎㅎ
 
콜롬비아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나에어로빅 - 200g, 핸드드립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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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알라딘 커피에 빠져든다. 커피가 남았는데 완벽하다는 소개에 냉큼 주문. 땡스투는 그분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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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선 죽을 수 없는 최고령 사교 클럽
클레어 풀리 지음, 이미영 옮김 / 책깃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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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고리타분하고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지 그들에게 도움을 받을 일은 없다고 여겼다. 그들에게 듣고 배우는 삶의 지혜가 나를 키웠다는 걸 잊고 있었다. 노인의 삶에 대해 적극적으로 들여다보려 한 적이 없었기에 부끄럽게 생각한다. 나는 늙고 있고 다가올 노년의 삶은 당연한 일인데. 클레어 폴리의 『웬만해선 죽을 수 없는 최고령 사교 클럽』 은 그래서 더욱 인상 깊고 특별하게 남은 소설이다.


세상에나, ‘웬만해선 죽을 수 없는 최고령 사교 클럽’이라니 어떤 클럽일까. 가입 조건이 까다로운 곳일까, 아니면 최고령 노인들이 대단한 것일까. 정말 궁금하지 않은가. 함께 사교 클럽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 영국 런던의 작은 마을 해머스미스의 낡고 오래된 주민센터에 일주일에 세 번 오후에 열리는 사교 클럽이 있다. 주인공 ‘대프니’는 일흔 번째 생일을 맞아 아파트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기로 시작하고 사교 클럽에 가입했다. 이곳에 이사 온 지 15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15년 만에 처음으로 타인과 만났다는 게 맞겠다. 연애도 할 수 있겠다는 기대와 다른 것도 모자라 사교 클럽 첫날에 사건이 일어난다. 천장이 무너져 사교 클럽 회원 한 명이 사망했다. 키우던 개를 남기고 말이다. 대프니는 리디이와 아트와 함께 돌아가며 개 매기를 맡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의회는 낡은 복지관을 부수고 아파트를 짓겠다는 공고를 냈다. 사교 클럽 운영자인 ‘리디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대프니뿐 아니라 사교 클럽과 복지관을 이용하는 모두에게 마찬가지였다. 19살 미혼부 ‘지기’는 딸 ‘카일리’를 맡아줄 유아원이 필요했다. 말 못 하는 다섯 살 아이 ‘러키’, 주인을 잃은 개 매기까지.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복지관 운영에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했다. 유아원 아이들의 성탄극으로 관심을 모으기로 한다. 은퇴한 배우인 아트가 연출자로 연극 공연과 축제 분위기라면 승산이 있었다. 공연 당일 아트가 집에서 가져온 스타벅스 물건들만 없었더라면 말이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아트에게는 물건을 훔치는 이상한 취미기 있었다. 연락이 닿지 않는 딸과 손녀의 빈자리 채우기 위한 아트만의 방법이라고 할까.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으니 멈출 수가 없었다.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좋은 마음이었지만 스타벅스 매니저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매니저는 경찰에 신고한다고 소리치고 곤경에 처한 아트를 구한 건 대프니였다. 대프니는 아트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소리쳤으니까. 대프니가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을까. 지기도 대프니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대학을 가기 위해 보충 공부를 하는 동안 대프니가 카일리를 돌봐주고 있었으니까. 사실 리디아도 그랬다. 성장한 두 딸은 리디아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았고 남편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대프니는 그런 리디아를 지나칠 수 없었다. 매기를 맡기러 온 리디아를 집 안으로 들였다. 이 역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리디아가 새로운 시작을 하기를 바랐고 변신을 위해 자신의 옷을 내어주었다. 그녀가 당당하고 멋진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응원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복지관을 구할 수 있을까? 실의에 빠진 아트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의회는 아파트 짓기에 더욱 적극적이다. 다시 대프니가 나서야 했다. 우선 아트에게 전화를 거니 다른 남자가 받고 상황을 설명한다. 대프니가 한 번 더 아트를 구했다.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치다 걸린 아트는 치매에 걸린 대프니의 남편이 되었으니까. 대프니의 곧바로 물건으로 가득 찬 아트의 아파트도 정리한다. 리디아와 복지관 이용자들이 함께 도왔다.


처음에는 단순히 복지관을 이용자에 불과했던 사람들은 복지관이 없어지기 않기를 바랐고 그 중심에는 대프니가 있었다. 대프니는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상상이나 했을까. 정녕 모두가 대프니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연대하기 시작한다. 저마다의 어려움을 나누고 해결하려 노력한다. 그 모든 일에는 대프니의 말이 주문처럼 따라온다.


“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없죠.” (303쪽)


대프니는 한 번의 상처와 실수로 삶을 포기하고 좌절하는 이들에게 희망과 믿음을 안겨준다. 미혼부 지기에게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도와주고 홀로 외롭게 지내는 아트를 세상 밖으로 이끌고 리디아에게 남편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니 당신이 예상한 대로 복지관을 고치고 운영할 기금 모집도 성공한다. 물론 그 방법은 알려줄 수 없다. 당신이 멋진 대프니를 만날 기회를 날려버리면 안 되니까.


궁금하지 않은가? ‘웬만해선 죽을 수 없는 최고령 사교 클럽’말이다.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대프니의 활약을 직접 마주하길 바란다. 유머 넘치고 감동까지 안겨주는 소설을 놓치지 않기를. 분명 호쾌한 대프니의 매력에 흠뻑 빠질 것이다. 따뜻한 소설을 찾는다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하다면, 『웬만해선 죽을 수 없는 최고령 사교 클럽』을 만나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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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5-21 14: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웬만해선 죽을 수 없는 최고령 사교 클럽!
뭘까요?
엄청 궁금한데요^^

자목련 2025-05-23 15:55   좋아요 2 | URL
재밌게 읽었어요. 예상했던 해피엔딩이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전개도 있고요!

hnine 2025-05-22 0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영국 출신이라니 이 소설의 분위기가 상상이 되어 흥미가 생기네요. 노인이 활약하는 소설들이 재미있는 것들이 꽤 있지요. 고리타분하게 집을 지키는 노인들이 아니라 활약하는 노인들이 나오는 책, 영화, 드라마, 환영이요.

자목련 2025-05-23 15:56   좋아요 1 | URL
네, 멋지게 활약하는 노인의 모습이 좋았어요!
시트콤으로 만들면 좋겠다 싶은 생각에 배우 김영옥, 선우용녀를 떠올리기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