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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과 마법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5월
평점 :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의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기도가 쏟아져 나온다. 제발 이 순간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한편으로는 이것이 끝이기를 바란다.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배명훈의 장편소설 『기병과 마법사』속 윤해도 그러했다. 간절하고 간곡한 바람,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마음이 통하는 순간 ‘윤해’의 세상은 달라졌다. 윤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병과 마법사』은 이상한 소설이다. 그랬다. 처음에는 역사소설인가 싶었다. 가상의 국가 사라의 성군이었던 왕은 폭군이 되고 저자에는 죽음이 낭자했다. 살기 위해서 왕의 눈치를 살피고 욍의 조카 윤해는 원하지 않는 혼인을 해야 했다. 가문과 아버지를 위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약혼자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생사의 기로에서 윤해는 자신의 숨겨진 힘을 마주해 목숨을 구한다. 윤해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꿈 속에서 자주 보았던 장면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할까.
약혼자의 죽음은 수도 소라울에 살던 윤해를 북방지역의 ‘술름’으로 몰아냈다. 유배와 다름없었지만 윤해는 오히려 반가웠다. 북방 지역을 지키는 기병 ‘다르나킨’을 만난다. 그리고 ‘거문담’을 본다. 벽만 끝없이 이어진 형태는 비밀을 간직한 것 같았다. 영민한 윤해는 그곳이 낯설지 않았다. 이 역시 꿈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알 수 없는 존재가 등장하는 꿈, 확실한 무언가가 윤해를 그곳으로 이끈 것이다.
윤해를 만난 다르나킨은 그녀를 도와 전략을 짜고 변방의 전투에 함께 나선다. 집 안에서만 지낸 윤해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말(言)로만 두는 장기를 배웠다. 그것은 술름에서 유용했다. 이쯤 되면 소설의 제목인 기병과 마법사가 누구인지 짐작할 것 같다. 다르나킨은 기병이고 마법사는 윤해라는걸. 짐작과 달리 궁금증은 더 증폭된다. 윤해의 마법은 언제 어떻게 발현되는가. 윤해의 능력은 꿈에서 시작되었다. 꿈속에서 만난 사람, 그녀는 자신을 ‘마로하’라 말한다. 윤해가 꿈에서 만나는 일들은 모두 윤해에게 일어날 일이었다. 윤해가 오랜 시간 꿈속을 헤맬 때마다 술름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초원 한가운데 우뚝 솟은 요새 거문담과 알 수 없는 숫자 1021.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윤해는 모든 걸 밝혀낼 수 있을까. 윤해는 정말 마법사일까.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물리칠 묘수가 윤해에게 있을까. 어쩌면 윤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능력을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번의 우연이 아니라는걸, 단순한 예지몽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그걸 쉽게 믿을 수 있을까.
“나는 내 세계가 끌어낸 예언자고, 너는 네 세계가 빚어낸 예언자지. 네 세계를 구하는 건 내가 아니야. 그러니까 아무래도 이건 너의 몫인 것 같아.” (283쪽)
소설이 흥미로운 건 바로 그 지점이다. 윤해 스스로 자신을 믿는 일,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 있기에 거문담과 1021이라는 기묘한 숫자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마법을 불러올 수 있는 주문이 있느 것도 아니고, 특정한 수신호 같은 게 있는 게 아니니까.
세상과 세상을 잇는 문이라는 건, 다른 세상이 여러 개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쩌면 마로하 또한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사실 오래전부터 윤해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예언자 중 하나가 된다는 건 어딘가에 속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너무 넓게 퍼져 있어서 한자리에 모일 방법은 없지만, 그래도 저 넓은 우주 어딘가에는 예언자라는 역할과 임무가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대체할 수 없는 막중한 사명이. 궁극적으로 윤해는 거기에 속하고 싶었다. (327~328쪽)
윤해가 가진 능력만으로 세상과 싸울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기병으로 대표되는 다르나킨와 같은 이들, 저마다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협력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배명훈이 그리고 싶은 세상이며 전하고 싶은 메시지일 것이다. SF속 판타지 속 윤해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가치라고 말이다. 윤해가 만날 세상, 그리고 그 다음의 다른 윤해가 만들어갈 세상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