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루프 창비교육 성장소설 11
박서련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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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로맨스 소설을 쓰던 아이가 있었다. 반장이었다. 소설은 인기가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반장과 그리 친하지도 않았거니와 예나 지금이나 로맨스 소설에는 큰 과심이 없기에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박서련의 첫 청소년 소설집 『고백루프』를 읽고 뜬금없이 그 아이는 계속 소설을 썼을까 궁금해졌다. “청소년은 소설을 쓸 수 있고, 소설 쓰던 청소년이 결국 소설가가 되는 일도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라는 박서련의 말 때문이다. 나의 학창 시절과는 다르게 현재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문학 캠프나 공모전, 예술고등학교도 많으니 박서련처럼 고교 시절에 소설을 쓰고 소설가가 된 이들도 많을 것이다.


『고백루프』 에는 모두 7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1부에 수록된 「솔직한 마음」, 「안녕, 장수극장」, 「엄마만큼 좋아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의 감정과 마음을 잘 보여준다. 「엄마만큼 좋아해」 속 화자는 여섯 살 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솔직한 마음」의 ‘나’는 아이돌 그룹의 막내로 학교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다. 활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게 아니다. 걸그룹의 멤버 하나가 그룹 내 따돌림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막내인 ‘나’도 가해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반 아이들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기는커녕 기사를 믿고 대놓고 따돌린다. ‘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원래 왕따였던 아이 ‘원따’의 주변을 서성인다. 일부러 말을 걸고 매점에 가자고 말하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움뿐이다. 무대에서 빛나게 노래하고 모두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실체도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십 대란 나이에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안녕, 장수극장」은 가장 평범하면서도 진솔한 이야기였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장수극장’은 문을 닫는다. 고등학생인 ‘나’는 부모님을 대신해 매표소를 지킨다. 배우가 되고 싶었던 할아버지가 만든 극장이고 ‘장수’는 나의 아버지 이름이다. 그런데 학생회장 선배가 축제 때 아버지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한다. 놀라운 건 아버지가 직접 정성스럽게 영상을 촬영했다는 거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축제 때 학생회장이 담은 영상을 통해 동네 어른들이 장수극장을 추억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장수극장은 단순한 극장이 아닌 동네의 역사였고 동네의 기억이자 추억이었다. 내가 소읍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안녕, 장수극장」은 남다르게 다가왔지만 회장의 말에 뭉클하는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어른이 되면 우리 모두 다른 길을 걷겠지만 우리가 이 마을에서 자란 기억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장수극장을 잊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축제도 잊을 수 없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다.” (「안녕, 장수극장」, 61쪽)


학창 시절 벗어나고 싶었던 곳을 그리워하고 더 넓은 곳을 원했던 마음은 어느 순간 애틋함으로 변한다. 그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고 청소년이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지금 이 소읍도 옛 모습과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만큼 시간이 지났다는 말이다. 청소년기를 보낸 공간과 그 공간을 함께 누린 친구들, 그 시절이 얼마나 눈부시고 아름다운지 그때는 모르는 게 아쉽다. 하긴 이런 마음을 십 대엔 나도 몰랐으니까.


2부의 「보름지구」 와 「고―백―루―프」는 SF 요소를 적절하게 살린 소설이다. 미래에 지구를 떠나 달에서 거주하는 「보름지구」 속 청소년 ‘나’는 다른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게 한국 명절인 추석을 소개한다. 송편은 그 맛을 설명할 수 있지만 지구에서 달을 보면 소원을 비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달이나 화성에서의 거주가 한낱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니 푸른빛 도는 지구를 보며 소원을 비는 일도 가능할지 모른다. 표제작인 「고―백―루―프」 특정한 날이 똑같이 반복되는 설정으로 친구의 고백을 받고 수락해야만 벗어날 수 있다. 동성 친구를 향한 진심의 고백, 그 고백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참 예쁘고 사랑스럽다.


3부의 두 소설은 작가가 고등학교에 쓴 것이다. 엄마가 암으로 죽고 철원을 떠나 언니가 사는 서울로 올라와 적응해야 하는 「가시」와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은 후 새엄마와 단둘이 살 「발톱」은 상실과 애도를 겪고 서로 의지해야 하는 마음이 담겼다.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힘든 십 대의 상처와 방황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비슷한 구도와 설정이지만 가족과 타인을 향한 십 대의 마음을 가장 잘 묘사한 게 아닐까 싶다. 혼자라는 두려움과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지 어쩔 줄 모르는 마음과 서툰 행동이 그러하다.


청소년 소설답게 십 대의 이야기를 실감 나면서도 재미있게 풀어냈다. 그래서 당사지인 청소년이 읽는다면 더욱 공감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로 확장해 나갈 것 같다. 소설을 쓰고 있는 청소년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동기 부여가 되고 응원을 건네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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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 - 바른 욕망
아사이 료 지음, 민경욱 옮김 / 리드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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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싶다. 먹고 싶지 않다. 먹으면 안 된다. 갖고 싶다. 갖고 싶지 않다. 가져도 되는가? 뜬금없는 나열에 이게 뭔가 싶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 대한 의심. 그 욕구를 자제하고 절제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개인의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닌 사회의 규범과 시선의 기준에서 벗어난 욕망은 충족되어서는 안 되는가? 아사이 료의 『정욕』을 읽고 든 생각이다. 바른 욕망(正欲)이라니, 도대체 바른 욕망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나의 모든 욕망은 바른 것인가? 그것을 정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런 의미에서 아사이 료의 『정욕』은 충분히 성공적이다. 읽기도 전에 궁금증을 불러오고 읽은 후에도 정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니까. 소설적 재미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이 소설이 어떤 소설이냐고, 괜찮은 소설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잘 모르겠다. 작가는 소수와 약자에 대한 공감이나 이해, 연대를 이끌려는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성향을 오픈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을 향한 편협한 시선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소설이라고 할까. 소수의 선택을 존중하고 취향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봐야 할까. 이제 소설을 이야기해 보자.


남들과 다른 성향을 지닌 이들이 있다. 이를테면 소수, 혹은 비주류에서도 다른 범주에 속하는 이들이다. 다수가 얼마나 큰 힘을 지녔는지, 그들과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당할 피해나 손실을 알고 있다. 아니,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선뜻 소수를 응원하거나 그들의 편에 설 용기를 내지 못할 때가 많다. 『정욕』은 그들에 관한 이야기로, 그들의 사정과 형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평범한 초등학생이 아닌 등교 거부를 하고 유튜버가 된 초등학생과 그의 가족, 연애나 결혼 출산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는 침구 판매 여사원, 남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 없고 가족 이외의 남자와 접촉해 본 적 없는 여대생, 이성의 모든 관심을 한몸에 받는 외모를 지녔지만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 남학생. 그들은 주변에서 건네는 말과 시선이 불편하다. 일일이 자신에 대해 설명할 수도 없고 설령 설명한다 해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애당초 나는 이 세상이 설정한 커다란 길에서 벗어나 있으니까. (42쪽)


이쯤에서 궁금할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다르고 각자 취향이 다르니까 그럴 수 있고 그게 뭐 어떠냐고 말이다. 침구 판매 여사원, 남학생의 욕망이 사람이 아니라 특정한 사물에 대한 페티시즘이라면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놀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은 이성이 아닌 사물에 끌린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사실 보통의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큰 관심도 없지만 막상 남다른 취향에 대해 알게 된다면 끊임없이 꼬집고 파고들기 마련이다.


소설은 소수에서도 소수인 그들이 연대하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 나아가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삶이 있다고, 내가 알 수 없는 욕망도 존재한다고 말이다. 얼핏 그런 의도는 나쁘지 않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욕망이 법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면 달라진다. 도덕성, 인간 존엄성에 위배된다면 용납될 수 없다. 그 지점에 대해 작가는 언급을 회피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물론 소설 속 이런 문장은 우리 사회가 소수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부족하다는 걸 각인시키기에 훌륭하다.


어엿한. 평범한. 일반적. 상식적. 자신이 그쪽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째서 반대편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사는 길을 좁히려고 할까. 다수의 인간 쪽에 있다는 자체가 그 사람에게 최대의, 그리고 유일한 정체성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누구나 어제 본 건너편에서 눈뜰 가능성이 있다. 어엿한 쪽에 있던 어제의 자신이 금지한 항목에 오늘의 내가 고통받을 가능성이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이 살기 쉬운 세상이란 곧, 내일의 내가 살기 쉬운 세상이기도 한데. (329쪽)


모든 욕망과 다양성을 생각한다. 그 가운데 내가 속한 범주의 욕망과 다양성도 있을 것이다. 나의 그것은 존중받지 못하는가. 존중받고 있는가. 그것은 다수가 아닌 소수에 속한 것인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기에 어떤 욕망은 그 자체로 삭제되거나 존재 자체를 거부당할 수도 있다.


다수의 결정과 선택이 항상 옳은 건 아니다. 어떤 면에서 그건 부당한 힘을 과시하는 행태를 지녔다. 다수와 소수가 균형을 맞춰 공존하는 세상을 꿈꾸는 건 당연하다. 균형점을 정하는 일은 어렵고 함부로 강요할 수 없다. 그러니 바른 정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우선을 내가 모르는 삶이 있다는 것, 나는 끝내 알 수 없는 삶이 있다는 것, 그것만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해도 나쁘지 않다.


재미와 함께 질문을 던지고 없던 의문을 끄집어 내는 소설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라는 전략적인 한 줄 광고는 탁월하나 동의할 정도는 아니다. 나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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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4-12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이거 다락방 님도 과하다! 그랬는데 자목련 님도 비슷한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저도 읽기는 읽어야 하는데... ㅎㅎㅎ

자목련 2024-04-14 17:56   좋아요 0 | URL
지금은 다 읽으셨을 듯^^

페넬로페 2024-04-12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소설이었군요.
저는 인문학 서적인 줄 알았어요^^

자목련 2024-04-14 17:57   좋아요 1 | URL
제목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은오 2024-04-13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자목련님 두분 다 그저 그렇다고 하시는데.... 리뷰를 읽을수록 그래서 오히려 더 궁금해지는 마음. 악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4-04-13 20:2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내가 읽어야겠다~!!

은오 2024-04-13 23:38   좋아요 1 | URL
읽고계십니까?! ㅋㅋㅋㅋ

잠자냥 2024-04-14 00:24   좋아요 1 | URL
내일 아침부터….

은오 2024-04-14 10:21   좋아요 0 | URL
아침부터.... 멋잇어...

잠자냥 2024-04-14 10:26   좋아요 1 | URL
🤯🔫

자목련 2024-04-14 17:58   좋아요 1 | URL
도서관에서 읽으세요^^
 
레티파크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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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절없이 무너져내릴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조심해야 한다. 남김없이 다 쏟아낼지도 모르니까. 아무나 붙잡고 보기 흉한 흉터로 남은 상처에 대한 사연을 하소연할 수도 있다. 유디트 헤르만의 단편 소설 『레티파크』 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열일곱 편의 짧은 이야기가 왠지 하소연 같기도 하고 넋두리 같기도 한 느낌. 처음 단숨에 나를 사로잡았던 분위기와 감정은 소설의 것이 아닌 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몇 개의 짧은 이야기를 읽노라니 그 흥분은 조금 가라앉았다.


소설 속 인물은 자신의 히스토리를 전부 보여줄 생각이 없다. 물론 인물과 인물의 관계, 과거의 이력을 일부러 숨긴 건 아니다. 내밀한 감정을 비밀스럽게 보일 듯 말 듯 감춘다고 할까. 그게 이 소설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어떤 슬픔이나 상실에 대해 적극적인 설명이나 표현을 하는 순간 삶이 구차해진다는 걸 아는 것처럼. 그래서 어떤 이는 그 허탈함과 절망을 말이나 행동으로 끊임없이 보여주고 어떤 이는 그저 듣거나 보고만 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외면할 수 없어서다. 어찌할 바 모르는 그 마음을 아주 조금은 알기에.


떠난 남자를 기다리는 이에게, 그가 돌아올 자리를 지키듯 서성이는 여자에게 그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 말하지 못하는 마음. 과감하게 떠나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이별과 상실의 경험이 없는 이라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페티시」 속 엘라에게 아이만이 “우린 출발해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별과 상실을 확인하는 게 두려운 엘라와 다르게 「어떤 기억들」 속 여든두 살의 그레타는 그 모든 일을 다 경험한 할머니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 세입자 모드와 단둘이 산다. 과거에는 가족과 살았고 다른 세입자도 많았다. 그레타는 새 세입자를 찾지 않는다. 모드는 이주 동안 떠나있다 돌아와야 하는데 혼자 남을 그레타를 걱정한다. 그런 모드에게 그레타는 이렇게 말한다.


살다 보면 정말이지 몹시 기묘한 일들이 다시 떠오르곤 해요. 순간순간 나의 꿈들이 깨어났던 만. 분명 나는 잘 있을 것예요. 혼자서도, 걱정할 것 없어요. 잘 다녀와요. (143쪽)


소설 곳곳에는 그레타가 살아냈을 삶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세입자 모드를 면접할 때 했던 질문들(책을 읽나요, 노인과 관계를 맺어본 적 있나요. 마약을 하나요, 인생을 즐기나요, 등등)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레타는 두려울 게 없어 보인다. 설령 모드가 떠난 사이 자신이 죽더라도 말이다. 이상한 건 그레타의 말에 괜히 독자인 내가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살다 보면 앞으로 다가올 삶의 기운이나 감각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온다는 걸 믿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그런 믿음이 생긴다면, 확신을 갖는다면 삶은 더 이상 불안하지 않을까. 그게 가능할까. 면접은 다가오는데 한 아이는 아프고 다른 아이의 볼도 뜨겁다. 친구 닉에게 두 아이를 부탁하고 테스는 면접을 보러 가야 한다. 테스가 면접을 보러 간 사이 닉은 두 아이와 종이비행기를 만든다. 돌아온 테스에게 닉은 종이비행기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테스는 닉에게 자신이 면접해서 한 말을 들려준다. 어떤 기대도 절망도 없이, 그러나 단호한 테스의 의지가 느껴진다.


진실. 나는 사람들한테 진실을 말했어. 달리 뭘 말하겠어? 나는 아이가 둘 있다고, 싱글맘이라고, 정신 병동 경험이 있다고 말했어. 나는 이렇게 표현했어. 나는 오랫동안 집에 있었고 이제 다시 나가고 싶다고. 일을 하고 싶다고. 나는 말했어. 저는 씩씩해요, 저는 투지가 있어요, 저는 낙관적이에요. 저는 안정적인 사람이고 평정심을 가졌어요. (「종이비행기」, 97쪽)


그녀가 면접에 합격하고 출근에 대한 안내를 전할 전화를 받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희망할 뿐이다. 테스가 걱정되는 마음을 어쩔 수 없다. 소설 밖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단정해버리면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걸 살면 살수록 배우고 깨닫는다. 그래서 「교차로」속 패트리샤는 집을 비운 사이 침입해 난동을 피운 옆집 세입자의 십 대 아들을 선뜻 고발할 수 없다. 끊임없이 고민한 후에야 결정을 내리면서도 번복하게 되고 후회하는 일, 삶이란 그런 게 아닐까.


그녀는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문장 하나하나는 모두 심연이라고. 이렇게 말할까, 아니면 다르게 말할까, 아니면 아예 그냥 말하지 않는 게 상책일까. (「교차로」, 216쪽)


하나의 답이 정해진 게 아니고 구체적이고 정확하지 않아서 신경을 끊을 수 없게 만든다. 자꾸 생각한다. 이미 지난 사랑에 대해, 지난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버릴 수 있다고 다짐해다가 한순간 생각에 빠져드는 걸 반복한다. 미련할 정도로. 그렇다. 유디트 헤르만은 삶의 대부분이 그러지 않냐고 말한다. 삶에는 모호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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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 2024-04-05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오늘 리뷰도 정말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24-04-08 19:59   좋아요 1 | URL
달자 님, 많이 아쉬운 리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디트 헤르만의 다른 소설을 이어서 읽고 싶어졌어요.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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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넷 윈터슨의 장편소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는 얀 마텔의 『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넷 윈터슨이란 작가의 이름조차 몰랐다. 얀 마텔은 “어떤 책이든 우리에게 다른 삶을 살게 해주며, 다른 이의 지혜와 어리석음을 가르쳐 줍니다.”라고 말했다. 식상할 정도로 당연한 말인데 왜 이리 마음을 울렸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란 소설을 기억하고 있었고 덕분에 읽게 되었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란 제목에서 이미 오렌지만을 과일이라 주장하는 이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이가 등장할 거란 걸 알 수 있다. 뻔한 예상하다. 그러나 스스로 오렌지만이 과일이라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마도 오렌지가 얼마나 좋은 과일인데, 왜 오렌지가 아닌 다른 과일을 선택하느냐고 강요 섞인 조언과 권유를 계속할 것이다. 나도 그럴지 모른다. 내가 좋은 걸 다른 이가 좋아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게 전부라 믿고 싶은 마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에는 오렌지 말고도 다양한 과일이 있다는걸. 설령 세상에 과일이 오렌지 하나만 존재한다고 해도 그 오렌지를 거부할 수 있다고.


소설의 주인공 ‘지넷’의 어머니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다.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최선을 다해 지키려 하고 그 안에 입양한 딸 지넷을 가두려 한다. 아니, 자신이 세계를 완성하려고 지넷을 입양한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넷과의 충돌은 당연한 일이다.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구약 성서 「신명기」부터 읽도록 가르쳤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이 규정해 놓은 삶, 그것이 선이고 정의였다. 그게 무엇이든 모든 걸 다 흡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어린아이 지넷에게 세상은 얼마나 좁고 답답했을까. 귀가 안 들리는 지넷에게 성령 충만한 거라고 말하는 어머니라니.


지넷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며 품었던 기대는 무너졌다. 학교에서 지넷은 별종인 학생이자 왕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지넷 탓이 아니다. 존재와 동시에 어머니에게 세뇌당한 세계가 지넷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단 숨에 그것과 결별하고 살아가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니 지넷은 여전히 교회에 나가고 어머니를 돕고 신을 위해 일한다. 그러나 지넷은 더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고 어머니가 항상 건네준 오렌지만이 과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눈을 뜨고 깨우친다. 열여섯 살의 지넷의 눈앞에 나타난 소녀 멜라니를 향한 마음은 사랑이었다. 성경 공부를 하고 서로를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 지넷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비롯한 교회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여자를 사랑하는 일, 그것은 죄이고 악이었다.


집을 나온 지넷은 무너지지 않고 단단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트럭을 운전하고, 장례식 일을 돕고, 아이스크림을 팔면서 생활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정신병원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얻었다. 시간이 흐르고 지넷이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철학적으로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니까.”(285쪽)라고 말하지만 너무 늦었다.


소설은 지넷이 자신의 내면에 다다르고 완성하는 자전소설이며 성장소설이자 여성 소설이다. 창세기에서 시작해 롯기로 끝나는 목차를 보면 성경 소설이라 할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지넷이 스물다섯 살에 출간한 소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놀랍고 대단하다. 그러니 십 대 소녀의 반항기, 세상을 향한 당돌한 몸짓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소설이다. 지넷이란 이름이 만들어갈 세계의 시작이라고 할까.


세상엔 수많은 형태의 사랑과 애정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동안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함께 지내기도 한다. 이름은 주는 것은 힘들고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이는 본질과 관련된 것이며 힘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사나운 밤에 누가 당신을 집으로 부르겠는가? 당신의 이름을 아는 사람뿐이다. 낭만적 사랑은 싸구려 소설로 희석되어 수천 권 수만 권의 책으로 팔린다. 어딘가에서는 낭만적 사랑이 여전히 원서와 같은 석판에 적혀 있다. 이를 위해서라면 나는 바라다고 건너고 뙤약볕 아래에서의 고생도 마다 않고 내가 가진 전부를 줄 것이다. 그러나 남자를 위해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남자들은 파괴자가 되려고만 하지 결코 파괴되지는 않으려 하니까. 그래서 남자들은 낭만적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예외는 있다. 그리고 난 그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282~ 283쪽)


나는 당연히 지넷을 응원했지만 엘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엘시는 교회의 다른 어른과 달랐다. 귀가 아파 병원에 있을 때도 멜라니와의 사건으로 지넷이 비난받을 때도 엘시는 일방적인 무리들과 달랐다. 어린 소녀 지넷에게 유일한 어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조금 더 건강하게 오래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병원이 아니라 지넷 곁 가까이 있었더라면, 그녀의 죽음이 조금 더 늦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크고 아쉬움이 남는다.


“A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B일 수도 있는 거야.”

“모든 것은 마음속에 있는 거야.” (61쪽)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진리, 그 아름다운 가치를 오직 엘시만이 지넷에게 알려주었다. 엘시가 지넷에게 들려준 말들이 분명 지넷을 든든히 지켜주었을 거라 믿고 싶다. 엘시의 말은 여전히 힘이 된다. 지금을 살아가는 수많은 지넷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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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4-03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구절은 다시 읽어도 좋네요. 저도 엘시가 안타까웠어요.... 지넷 윈터슨은 그래도 주변에 좋은 사람이 좀 있었구나 싶기도 하고.

자목련 2024-04-04 11:39   좋아요 0 | URL
제목만 기억하고 있던 소설인데 잠자냥 님의 리뷰 덕분에 읽게 되었어요. 이 작가의 다른 소설도 기회가 닿으면 읽어보고 싶고요^^

독서괭 2024-04-0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령 세상에 과일이 오렌지 하나만 있더라도 거부할 수 있다!! 👍👍👍

자목련 2024-04-04 11:41   좋아요 1 | URL
당당하고 독립적인 삶을 생각해요! 이 소설 흥미롭고 좋았어요^^
 
데미안 - 에밀 싱클레어의 젊은 날 이야기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문예춘추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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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기운을 차리고 힘을 내야 할 것 같다. 봄이니까. 봄은 청춘의 계절이다. 성장하는 모든 것들의 시작이다. 새롭게 도전하는 이들을 향한 응원이 넘친다. 나도 뭔가 거들고 싶다. 봄이니까, 방황해도 괜찮다고 그 방황도 끝이 있다고. 뭐든 시작해도 되고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그 시절을 지나왔다는 이유로 잔소리가 늘어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을 다시 읽으면서 싱클레어였던 시절을 떠올린다. 불안으로 가득했던 날들, 내가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 질문이 많았던 날들. 지금도 여전히 모르지만 그때보다는 여유로움이 있다고 할까.


인생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주는 상대를 만나는 일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일이다. 좋은 영향을 주든 나쁜 영향을 주든 이전의 나와는 달라지니까.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면서 자신과 세상을 향한 시선이 달라진 것처럼 말이다. 『데미안』은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란 유명한 구절로 잘 알려졌다. 더 나은 존재,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변화와 성장을 위해 무엇과 투쟁해야 할까. 그것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궁극적으로 같을 것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길이고, 하나의 길을 가는 시도이며 하나의 작은 여정을 암시하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각자 자기 자신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8~9쪽)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으로 이끄는 길을 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64쪽)


사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단순한 성장소설로만 여겼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이 소설은 복잡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할 것 없는 가정에서 자란 싱클레어가 처음으로 두 개의 세계를 인지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조금씩 외부의 영향으로 평탄했던 내면이 움직이는 과정은 누구나 경험하는 사춘기, 막스 데미안이라는 인물을 만나면서 그에게 동요된다. 데미안이란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신비롭고 때로는 성스럽기까지 한 존재. 한편으로는 데미안이 아닌 다른 이를 만났더라면 싱클레어의 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규칙과 정도를 따르는 삶, 부모의 말에 순종하고 정해진 길을 가는 삶이 무탈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삶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삶도 있는 것이다. 싱클레어가 대학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스스로가 어두운 세계에, 악마에게 속하는 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랬던 그에게 나타난 소녀. 싱클레어가 ‘베아트리체’라 이름 짓고 그를 추앙한다. 한 마디로 짝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싱클레어는 아니었다.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하다. 그런데 그 얼굴은 소녀의 얼굴이 아니고 누군가 닮은 듯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데미안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진정 추앙한 이는 데미안이라는 말이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지배할 정도로 깊게 스며드는 관계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관계는 우정을 넘어 사랑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싱클레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데미안은 절대적 존재였고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데미안을 통해 싱클레어는 자신에게 더 가까이 나갈 수 있었다. 선과 악에 대해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심연에 닿고자 애섰을 것이다. 문득 생각한다. 나에게 데미안은 누구였을까? 선생님, 친구, 아니면 붙잡지 못하고 놓쳐버린 사람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나는 누군가의 데미안이 될 수 있을까? 그건 어려울 것 같다.


깨달은 인간에게는 오직 한 가지 의무밖에는 어떤, 그 어떤 의무도 없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자기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그리고 어디로 인도하든 간에 줄곧 자기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이었다. (178쪽)


누구에게나 진정한 사명은 오직 한 가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이었다. (178쪽)


그러니 이 소설은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데미안을 위한 소설이자 애도의 마음이다. 전쟁이라는 생과 사의 경계에서 싱클레어에게 미소를 짓던 사람. 온전히 닮고 싶었던 사람, 세계와 세계를 연결하고 확장시킬 수 있도록 안내한 사람, 영원한 친구를 생각하면 이 얼마나 애틋한 소설인가.


나는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 완전히 나 자신 속으로, 어두운 거울 속에 운명의 영상들이 어른거리는 그곳으로 내려가면, 거기서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굽혀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본다. 바로 나의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와 완전히 닮은 나 자신의 모습을. (232쪽)


시대가 흐르고 모든 것들이 변해도 전쟁은 일어나고 다툼과 갈등은 여전하다. 소설 밖 현재를 살아가는 싱클레어와 데미안도 방황과 고뇌의 시기를 보낸다. 그들에게 헤세의 데미안은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진다. 읽을 때마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나의 내면은 얼마나 단단한가 묻는 것 같다. 나에게로 가고 있는 건 맞는지, 그렇다면 어디쯤 가고 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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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4-04-01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데미안을 다시 읽으셨군요! 저는 <수레바퀴 아래서>를 다시 읽어볼까 합니다.

자목련 2024-04-03 10:25   좋아요 0 | URL
싱클레어보다 <수레바퀴 아래서>속 한스가 더 현실적인 인물로 더 깊게 와 닿았던 기억이 나네요.
즐겁게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