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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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선 길을 잃기 마련이다. 두렵거나 무섭다기보다 처음 간 곳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길을 찾으면 그만이라고. 돌아갈 곳이 있으니 괜찮다고. 그러나 돌아갈 곳이 어딘지 잃어버리고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걸 발견하면 절망에 빠진다. 도움을 청해야 할 이가 아무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폴 윤의 단편집 『벌집과 꿀』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그러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고향을 떠나고 길을 나선다. 정착한 듯 보이지만 뿌리를 내린 적 없다. 원망할 대상은 사라졌고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들의 여정(여행이든 이주든)은 고단함을 넘어 고독하고 쓸쓸하다. 때문에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타인을 돌본다.


첫 번째 단편「보선」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교도소에 갔다가 출소한 ‘보’의 이야기다. 교도소에서 만난 이의 소개로 낯선 동네의 카지노에서 일한다. 집과 카지노를 오가는 게 전부인 어느 날 동료의 잃어버린 아이를 찾다가 주인집 딸과 마주한다. 그녀에게도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족이 있지만 가족과 살지 못하고 집을 원하지만 집을 갖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들의 마음 한편에 자리한 감정을 나는 짐작할 수 없다.


자신이 살아온 곳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사연도 마찬가지다. 「코마로프」 속 탈북한 뒤 이곳저곳을 떠돌다 스페인에서 청소 일을 하는 나이 든 여자 ‘주연’의 사연, 런던 외곽 한인타운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크로머」 속 탈북 한인 2세 부부의 이야기.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갈 곳이 없는 주연은 사람들이 아들이라 말하는 남자에게 진짜 엄마의 주소를 전하고 한인 2세 부부는 길을 잃은 아이가 신경 쓰이고 걱정된다.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삶.


소설 속 인물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한 한국계 디아스포라들이다. 「보선」, 「코마로프」, 「크로머」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지만 조선인 고아와 에도시대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역참에서」, 할아버지를 이어 사할린섬의 교도소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고려인 십 대 소년 ‘막심’의 이야기 「고려인」, 러시아 극동 지방의 고려인 정착지에 임관한 러시아인 장교가 목격한 고려인의 삶을 보여주는 「벌집과 꿀」, 한국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남자의 이야기 「달의 골짜기」는 한국의 아픈 역사를 불러온다.





표제작 「벌집과 꿀」과 「달의 골짜기」는 짙은 여운을 남겼다. 내가 잘 모르는 역사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벌집과 꿀」의 고려인에게 러시아인 장교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자 외부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하나가 되어 뭉쳐야 했다. 고국을 떠나온 그들에게 그들을 지킬 수 있는 이들은 그들뿐이라고 믿었을 테니까. 설령 무지한 믿음일지라도.


“우리는 아무도 원치 않고 관심도 없는 땅에서 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벌집과 꿀」, 198쪽)

“그럼에도 내일이라는 게 있지 않게습니까?”(「벌집과 꿀」, 199쪽)


전쟁의 상흔만 남은 고향 집을 고치고 혼자 살아가는 「달의 골짜기」속 ‘동수’에게도 다르지 않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지만 동수에겐 그곳이 집이었으니까. 땅을 일구고 가축을 키우고 한 번씩 만나는 땜장이에게 필요한 물건을 샀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채, 전쟁고아인 남매를 거두며 살아간다. 결국엔 서로에게 상처로 남은 시간일지 모르지만.


매일 밤 여기서 달이 뜨고, 기울고, 부서졌단다. 그러고는 스스로를 다시 만들어냈지. (「달의 골짜기」, 250쪽)


그들은 살아내야 하기에 아무도 돌보지 않는 땅을 개간하고 넓혀간다.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나아간다. 어느 누구도 정확한 방향과 길을 알려주지 않지만 멈출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실패를 반복하며 방향을 찾고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낸다. 그곳이 어디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는 진리에 기대어. 변하지 않는 그 사실은 여전히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어딘지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나가가는 이들에게 애틋한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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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리는 개 안온북스 사강 컬렉션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유진 옮김 / 안온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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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을 사랑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사랑을 원하는 방식도 그러하다. 분명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이지만 갈구하는 사랑은 같을 수 없다. 사랑이라는 속성이 그렇다. 그래서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게 현명한 사랑이라는 말도 있다. 사랑하니까 뭐든 원할 수 있고 괜찮다고 믿는 사람에게 그건 아니야, 그럴 수 없어라고 말한다면 사랑을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사실, 이렇게 말은 해도 사랑에 빠지거나 미치게 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성적인 판단은 사라지고 순간의 감각과 감정에 취해 그게 전부라고 믿고 만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엎드리는 개』 속 ‘게레’와 ‘마리아’의 관계는 무엇일까. 마리아를 향한 게레의 몸짓은 사랑이었고 그런 마리에게 게레는 처음엔 마냥 귀찮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관계와 감정은 수시로 변하니까.


스물일곱 살 게레는 고가의 보석 주머니를 발견하는 순간 다른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이 보석만 있으면 탄광회사도 때려치울 수 있으니까. 하지만 꿈과 현실은 달랐다. 게레가 주운 보석의 주인은 열일곱 번이나 칼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레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시선도 그러했다. 과거 마르세유 갱단 두목의 여자로 살았지만 정원을 가꾸며 하숙집을 운영하는 마리아는 그를 살인자로 착각한다. 하루하루가 지겹기만 했던 마리아에게도 게레가 신선한 활력으로 다가온 것이다. 늙은 여자와 젊은 청년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단단히 착각하면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마리아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착각, 게레가 잊었던 감각과 본능을 깨워줄 거라는 착각.


둘은 서로에게 몸을 기울인 채 속삭이고 공모하면서, 절반쯤은 적의를 품고 또 절반쯤은 유혹적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어다. 둘 사이를 방해하는 것은 그들의 나이 차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비슷한 부류라는 데 있었다. (69쪽)


소설과 별개로 게레와 마리아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둘만의 세계로 떠났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소설 속 늙은 여자를 정부로 두었다고 말하는 게레의 동료나 바에서 게레와 마리아를 두고 이모나 모자 사이라고 오해가 아니라 확신하는 이들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리아 쪽에서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 역시 게레를 향하 마음이 진심이었음을 발견한다.





그녀는 자의 신경을 긁어대는 내면의 무언가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다, 바람에서 정말로 좋은 냄새가 난다는 것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115쪽)


게레가 보석 주머니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연하게 운명이 게레에게 다가온 것이다. 마리아라는 사랑도. 누군가 마리아는 그저 외로웠고 고독했으며 게레는 욕망을 사랑이라고 착각한 거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이다. 게레가 마리아를 만나기 전까지 만났던 여자를 보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게레는 마리아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깨우친다.


『엎드리는 개』란 제목이 말하듯 소설에는 개 ‘파샤’가 등장한다. 떠돌이처럼 보이지만 주인이 있는 개 파샤는 게레 주변을 맴돌고 따라다니지만 게레에게 온전하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배를 내밀어 쓰다듬어 달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모두가 느낄 수 있다. 파샤가 게레를 좋아하고 있다는걸. 파샤의 행동을 통해 게레와 마리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엎드릴 수 있지만 주저하고 조심스러워하는. 마리아가 조금 더 빨리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게레에게 표현했다면 어땠을까.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마리아는 차갑고 조금은 적대적인 얼굴로 자신을 대면했다. 스푼을 내려둔 손이 턱으로, 머리카락으로 올라갔다. 간단한 동작으로 풍성하게 볼륨을 만들어보았지만, 거기엔 눈이 띄는 흥미도 열의도 없었다. 꼼짝하지 않고 아득히 머물러 있는, 권태와 무관심 그 자체인 얼굴이었다. 그러므로 오만한 눈꺼풀 아래 맑고 단단한 눈에서 너무나 둥글고 응축된 눈물이 아무런 전조 없이 연달아 솟아올랐을 때, 그녀가 느낀 감정은 괴로움이 아닌 놀라움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귓가에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흐르는 눈물을 바라보았다. (131~132쪽)


오해와 착각으로 시작된 관계였을지 모른다. 연민이나 동정으로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게레와 마리아는 서로를 사랑했다. 사랑하는 방식과 속도가 달랐다. 마리아 앞에 납작 엎드리는 개가 될 수 있었던 게레, 그런 게레를 쓰다듬고 만지는 대시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는 마리아. 타인의 시선에 가깝고도 멀게 보이는 그 거리가 그들에겐 가장 가까운 거리였다. 둘 사이에 오가는 눈빛은 둘만이 알 수 있는 신호다. 게레와 마리아의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들도 오직 그들뿐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이 말하는 사랑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사랑.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방식, 행복과 기쁨이 아닌 고독과 쓸쓸함만 남은 사랑, 사랑이 무엇인지 곱씹고 곱씹게 만든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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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악마의 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1
에드나 오브라이언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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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제발 사라졌으면 하는 장면은 사라질까 두려운지 일부러 새긴 문신처럼 남았다. 그건 나의 아픈 상처이자 죄의식이다.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부질없지만 그 장면이 떠올릴 때마다 그때의 내가 싫어서 미칠 것 같다. 많은 시간이 지나도 내내 그럴 거라는 걸 안다. 어쩌면 그게 나를 향한 벌인지도 모른다. 처음 만난 에드나 오브라이언의 『8월은 악마의 달』은 그런 소설 같았다. 그러니까 강렬하고 아름답지만 끝내 온전히 수용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감정들.


주인공 엘런은 아일랜드 출신의 스물여덟 살로 일곱 살 아들이 있는 이혼녀다. 아들은 전 남편과 캠핑을 가리고 했고 엘런은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다. 엘란에겐 만나는 남자가 휴가 있다. 그러나 그는 엘런과의 만남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 애인도 있다. 그런 남자는 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는데, 엘런은 그걸 늦게 알았다.


엘런은 런던을 떠나 프랑스로 향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온 홀가분한 휴가지의 일상은 다채롭게 이어진다. 매력적인 엘런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엘런과 즐기기를 바란다. 휴가니까. 런던도 아니고 엘런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뭐든 엘런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하지만 우연하게 만난 화려한 배우와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감정은 어쩔 수 없다. 무리의 분위기에 취해 엘런은 호텔을 벗어나 대저택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일행은 교통사고로 죽은 시신을 목격하지만 저택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술을 마시고 서로를 유혹하고 즐긴다.


휴가지에서의 하룻밤, 그게 뭐 대수겠는가. 엘런은 싱글이고 젊고 여긴 런던도 아니고. 욕망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긴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닐 테니까. 그러나 엘런의 세상이 무너지는 일은 곧 도착한다. 전 남편이 전하는 소식,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이다. 엘런이 휴가지에서 뜨거운 태양을 즐기는 동안 아들이 죽었다. 이제 아들을 볼 수 없다. 당장 아들 곁으로 달려갈 수도 없다. 60 년 전 엘런이 느꼈을 절망은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그렇게 엘런에게 8월은 잔인한 악마의 달이 되었다.


엘런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저 시간을 견딘다. 곁에서 위로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맡기는 일.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이라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는 엘런의 육체만 원했을 뿐이다. 결국엔 혼자가 된 엘런은 런던으로 돌아온다. 아들이 없는 집으로. 전 남편을 만나려 찾아갔지만 이미 젊은 여자와 떠나고 없다. 다행일지도 모른다. 아들의 죽음으로 슬퍼하고 있었다면 엘런은 자책감에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아나요? 나로 사는 삶을 그만두는 것.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하고 싶어. 깊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필요하다면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을 정도로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요. (232쪽)


아들의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엘런이 휴가를 떠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엘런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엘런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60년 전 엘런을 향한 시선은 아니다. 사회적 비난은 그녀를 말라죽게 만들었을 것이다. 누구도 엘런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다. 그러니 나는 엘런이 아들의 소식을 듣고 런던으로 바로 돌아올 수 없었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휴가지에서 따라온 몹쓸 병이 주는 고통이 엘런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엘런에게 8월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뜨거운 8월의 시간을 견디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은 계속될 것이고 스물여덟의 엘런은 나아갈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니 좋았다.

나뭇잎이 떨어졌고, 앨런은 나뭇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여전히 물기를 가득 머금은 채로 너울너울 떨어져 낙엽 더미 위에 자리 잡는 모습을 보았다. 수많은 나뭇잎이 사방에서 그렇게, 단순하고 무던하게 낙하하고 있었다. 적어도 한두 달쯤은 이렇듯 서늘하고 감미로운 가을이 이어질 것이다. (236쪽)


에드나 오브라이언은 짐작할 수 없는 엘런의 마음,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변화를 때론 차갑고 때론 뜨겁게 담아낸다. 사랑, 욕망, 젊음의 덧없음을 말해준다고 할까. 삶이란 알 수 없고 인간은 상실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걸 말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욕망을 채우려 발버둥 치는 존재라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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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과 마법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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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것만 같은 고통의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기도가 쏟아져 나온다. 제발 이 순간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한편으로는 이것이 끝이기를 바란다.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배명훈의 장편소설 『기병과 마법사』속 윤해도 그러했다. 간절하고 간곡한 바람,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마음이 통하는 순간 ‘윤해’의 세상은 달라졌다. 윤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병과 마법사』은 이상한 소설이다. 그랬다. 처음에는 역사소설인가 싶었다. 가상의 국가 사라의 성군이었던 왕은 폭군이 되고 저자에는 죽음이 낭자했다. 살기 위해서 왕의 눈치를 살피고 욍의 조카 윤해는 원하지 않는 혼인을 해야 했다. 가문과 아버지를 위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약혼자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생사의 기로에서 윤해는 자신의 숨겨진 힘을 마주해 목숨을 구한다. 윤해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꿈 속에서 자주 보았던 장면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할까.


약혼자의 죽음은 수도 소라울에 살던 윤해를 북방지역의 ‘술름’으로 몰아냈다. 유배와 다름없었지만 윤해는 오히려 반가웠다. 북방 지역을 지키는 기병 ‘다르나킨’을 만난다. 그리고 ‘거문담’을 본다. 벽만 끝없이 이어진 형태는 비밀을 간직한 것 같았다. 영민한 윤해는 그곳이 낯설지 않았다. 이 역시 꿈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알 수 없는 존재가 등장하는 꿈, 확실한 무언가가 윤해를 그곳으로 이끈 것이다.


윤해를 만난 다르나킨은 그녀를 도와 전략을 짜고 변방의 전투에 함께 나선다. 집 안에서만 지낸 윤해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말(言)로만 두는 장기를 배웠다. 그것은 술름에서 유용했다. 이쯤 되면 소설의 제목인 기병과 마법사가 누구인지 짐작할 것 같다. 다르나킨은 기병이고 마법사는 윤해라는걸. 짐작과 달리 궁금증은 더 증폭된다. 윤해의 마법은 언제 어떻게 발현되는가. 윤해의 능력은 꿈에서 시작되었다. 꿈속에서 만난 사람, 그녀는 자신을 ‘마로하’라 말한다. 윤해가 꿈에서 만나는 일들은 모두 윤해에게 일어날 일이었다. 윤해가 오랜 시간 꿈속을 헤맬 때마다 술름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초원 한가운데 우뚝 솟은 요새 거문담과 알 수 없는 숫자 1021.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윤해는 모든 걸 밝혀낼 수 있을까. 윤해는 정말 마법사일까.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물리칠 묘수가 윤해에게 있을까. 어쩌면 윤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능력을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번의 우연이 아니라는걸, 단순한 예지몽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그걸 쉽게 믿을 수 있을까.


“나는 내 세계가 끌어낸 예언자고, 너는 네 세계가 빚어낸 예언자지. 네 세계를 구하는 건 내가 아니야. 그러니까 아무래도 이건 너의 몫인 것 같아.” (283쪽)


소설이 흥미로운 건 바로 그 지점이다. 윤해 스스로 자신을 믿는 일,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 있기에 거문담과 1021이라는 기묘한 숫자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마법을 불러올 수 있는 주문이 있느 것도 아니고, 특정한 수신호 같은 게 있는 게 아니니까.


세상과 세상을 잇는 문이라는 건, 다른 세상이 여러 개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쩌면 마로하 또한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사실 오래전부터 윤해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예언자 중 하나가 된다는 건 어딘가에 속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너무 넓게 퍼져 있어서 한자리에 모일 방법은 없지만, 그래도 저 넓은 우주 어딘가에는 예언자라는 역할과 임무가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대체할 수 없는 막중한 사명이. 궁극적으로 윤해는 거기에 속하고 싶었다. (327~328쪽)


윤해가 가진 능력만으로 세상과 싸울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기병으로 대표되는 다르나킨와 같은 이들, 저마다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협력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배명훈이 그리고 싶은 세상이며 전하고 싶은 메시지일 것이다. SF속 판타지 속 윤해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가치라고 말이다. 윤해가 만날 세상, 그리고 그 다음의 다른 윤해가 만들어갈 세상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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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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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좋다.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다. 다른 내가 될 수 없기에 나를 좋아한 것 같다. 그건 어쩔 수 없음일까, 아니면 나를 좋아하려고 노력했던 것일까. 잘 모르겠다. SF 소설처럼 어딘가 다른 내가 존재해 다른 삶을 산다고 상상해도 그 삶은 나이지만 내가 아니고 나는 그 삶을 좋아할 수 없다. 여기 있는 나의 삶만이 내가 아는 나의 삶이니까.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나의 삶이 더욱 소중할 수밖에. 나의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곳으로 나를 데리고 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을 읽으면서 내 삶을 더 좋아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너무 당연한 일인데 내 삶을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은 뿌듯함이라고 할까. 김영하 작가가 알려주지 않아도 인생은 일회용이다. 알고 있다. 주어진 생은 한 번뿐이고 그래서 잘 살아야 한다고.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고. 근데 그게 어디 쉬운가. 그런 깨달음을 쉽게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럼에도 곧 수긍하게 된다. 내 삶이니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내 삶은 소중하니까.


고백하지만 김영하의 에세이를 기다렸다거나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고 그게 좋았다. 작가가 담담하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부모님의 죽음, 작가가 알지 못했던 엄마의 젊은 시절, 시간이 지나고 돌아본 20대가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이 책이 아니면 나는 몰랐을 것이다. 몰랐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나는 엄마의 처녀 시절이 궁금해졌고 그 시절을 아는 이(엄마의 형제)가 단 한 분(이모) 남았다는 사실이 슬펐다. 이모와 나는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기 때문이다. 어째서 엄마가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것들로 채워진 인생, 알고 싶다고 느낄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끝내 답을 얻지 못하는 것. 그러니 후회할 수밖에 없는 것.


그 모든 걸 미리 알았다고 해서, 나의 미래를 알았다고 해서 행복할까. 그건 아닐 것이다. 알기 때문에 궁금하지 않고 알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을 게 뻔하니까. 그러니 학생들을 가르칠 때 가능성을 언급하지 않은 그의 선택은 현명하다. 혹자는 당신이 가능성을 언급했더라면 누군가의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자의 인생은 각자의 것이고 외부의 영향은 아주 미세하게 작용한다는 걸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것은 마치 우주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이끌리는 것만큼이나 자명하며, 그걸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해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리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61쪽)


나이가 들수록 좋은 건 쉽게 흥분하지 않고 순간의 감정을 누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완벽하지 않다. 과거의 나보다 훨씬 수월하다. 내가 변한 것처럼 나와 연결된 이들도 변한다는 사실이다. 매번 나의 잔소리를 귀찮아하던 조카가 그때 이모의 말을 이제 알겠다고 말하는 조카도. 어디 그뿐인가. 이제 내게 단 한 사람의 사랑만이 전부이고 그게 없다면 끝날 것 같은 세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감정은 소중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정은 너무 많다는 걸 안다. 김영하 작가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가 요가를 하고 정원이 있는 주택에 살고 이십 년 넘게 수동 커피 분쇄기가 있는 줄 영영 몰랐을 것이다. 대단하게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가 솔직하게 들려주는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은 꽤 감동적이다. 아마도 내가 젊지 않고 늙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지만 그들이 인생이라는 게임을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남아 여기까지 와 있는지 속속들이 알 도리가 없다. (151쪽)


단 한 번의 삶을 살아간다. 어제를 후회하고 오늘을 반성하며 내일을 기대한다. 놓친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안달복달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아직 5월인데 봄은 사라진 것 같다. 아차 하는 순간, 모든 게 지나간다. 한 번뿐인 인생이 그러하듯. 내 인생만 그러하지 않다는 게 큰 위안이다. 모든 걸 지우고 다시 그리고 다시 채워 넣고 싶은 삶일 수도 있지만 그럴 수 없다. 그 모든 게 나의 삶이었으니까. 나는 내가 좋고 앞으로도 내가 좋을 예정이다. 단 한 번의 내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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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25-05-27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에세이도 참 좋습니다.

자목련 2025-05-28 10:56   좋아요 1 | URL
저는 보물선 님의 댓글이 참 좋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blanca 2025-05-27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김영하 작가에 대해 새로운 면면들을 알아가게 돼서 참 좋았어요. 피상적으로 비치는 사람의 인상을 가지고 전부를 판단하지 말아야겠다, 싶었고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스스로를 좋아하는 자목련님 모습이 참 좋네요.

자목련 2025-05-28 10:57   좋아요 1 | URL
네, 잘 모르면서 혼자 지닌 편견이 참 무섭겠다 생각도 했어요. 저를 더 좋아하도록 노력하려고요!

꼬마요정 2025-05-28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 글 너무 좋아요.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싶습니다.^^

자목련 2025-05-28 10:58   좋아요 2 | URL
꼬마요정 님의 댓글이 무지 무지 좋습니다. 즐겁게 만나시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