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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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으면서 어떤 면에서는 거리낌 없어지고 어떤 면에서는 의뭉스러워진다. 뭔가를 소유하고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 이뤄야 한다는 의무감이 가득하다. 대화의 폭은 점점 좁아지고 깊이는 얕아진다. 진심을 표현하는 게 어렵고 가벼운 수긍이나 농담으로 눙 치는 경우가 늘었다. 사느라 그런 거라고, 고단해서 그런 거라고 여기면서도 돌아서면 내심 서럽고 웅크러진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다.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 속 단편을 읽으면서 그런 기분을 느꼈다. 작가와 함께 나이를 들고 작가가 그려낸 소설 속 인물이 전혀 남 같지 않음이 반가우면서도 쓸쓸한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화려하고 풍요로운 공간을 방문할 기회, 부러움의 대상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무의미한 대화 속에서 결코 우리가 될 수 없다는 걸 확인하고 마는 「홈 파티」나 타국의 휴양지에서 한 달 동안 지내면서 겪는 묘하게 불편함을 느끼는 상황이 소통의 부재보다는 돈의 문제로 부각되는 「숲속 작은 집」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경제적 어려움을 직면한 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홈 파티’나 ‘숲속 작은 집’이라는 제목만 보면 우리네 현실과는 다른 삶이 아닐까 싶은 기대와 다른 각도를 보여주는 것. 나의 자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삶의 장면이 어떻게 펼쳐질지 성찰하게 만드는 단편이다.


이처럼 이번 단편집에서 김애란이 들려준 이야기가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건 그냥 있을 법한 장면이나 삶의 조각이 아니라 누군가 살아내고 경험하는 삶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독자에게 가장 친숙하고 현실감 있게 다가왔을 「좋은 이웃」이 그렇다. 층간 소음이 심각한 요즘 좋은 이웃을 만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마찬가지로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 아니, 내 집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전세를 살며 독서지도사로 공부방을 운영하는 ‘나’는 윗집의 공사로 인해 소음과 일에 차질이 생기고 피해를 입는다. 이사를 오기 전 인테리어 공사 안내를 하고 서명을 받으며 좋은 이웃이 되겠다는 말은 이행되지 않는다. 선의로 이해를 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전세이기에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과 가르치는 학생의 이사로 복잡하다. 장애가 있는 시우가 곧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학부모는 그곳까지 와서 수업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만 선뜻 대답을 할 수 없다. 좋은 이웃이자 좋은 선생님은 의지가 있다고 가능한 게 아니었다.


우리가 집을 잃어서도, 이웃을 잃어서도 아니었다. 우리가 정말 상실한 건 결국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될지 몰랐던 우리 자신이었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다. (「좋은 이웃」, 142쪽)






남들처럼 사는 건 왜 이리 어려운가. 때가 되면 전세가 아닌 자가의 공간에서 살 수 있다는 행운은 나만 비껴가는 것일까. 이런 마음은 「빗방울처럼」에서도 만날 수 있다. 「좋은 이웃」과 마찬가지로 부동산 문제를 다루지만 한층 심각한 전세 사기에 대한 이야기다. 새 아파트로 이사를 앞둔 ‘지수’에게 닥친 일은 뉴스에서나 들은 것이었다. 집 주인이 집을 담보도 대출을 받고 연락 두절이 된 것. 천장에선 물까지 새는 상황에 할 수 있는 선택은 새 아파트 입주가 아닌 살던 집을 경매로 낙찰받는 일이다. 그럴 수 있다 쳐도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은 감당할 수 없다. 아무리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게 삶이라지만. 누가 지수의 선택을 비난할 수 있을까. 자신이 머물다 떠난 자리가 단정하길 바랐던 지수는 물 새는 천장 도배를 위해 도배사를 부른다. 안방 천장 상태를 살피던 그녀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건네는 그 평범한 말을 통해 아무에게도 받지 못한 위로를 그녀에게서 받는다. 생의 마지막을 결심한 그 순간에 말이다.


삶의 끝이 무엇일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그저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언제쯤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희망을 끈을 놓지 않으면서. 그러니 어떤 일들은 그냥 이유 없이 다가오고 일어난다. 표제작 「안녕이라 그랬어」의 ‘은미’에게도 그랬다. 달콤한 미래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의 간병이 길지 않을 거라고 여겼지만 현실은 계획한 대로 흐르지 않는다. 연인 헌수와의 이별이야말로 예정된 수순이었고 엄마를 떠나보낸 은미는 사십 대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선택지가 별로 없는 나이, 그러나 이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 나이, 은미는 외국어 공부를 시작한다. 화상 영어 사이트를 통해 원어민에서 영어를 배운다. 그 과정에서 ‘안녕’이란 말이 은미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연인과의 만남과 헤어짐, 엄마와의 작별, 그리고 원어민 교사와의 이별. 왜 나만 이렇게 버겁고 힘든가 싶었던 모든 것들은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일상이라는 위안.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저 내 차례가 된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 앞에서 매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을까? 마치 살면서 이별이라고는 전혀 겪어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안녕이라 그랬어」, 250쪽)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준비하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나이를 먹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니다. 삶은 알려주지 않는다. 언제쯤 원하는 삶과 마주할지 알 수 없다. 좋은 삶을 살게 될지도 알 수 없다. 혼자만의 세상이 아니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 타인과 비교하고 절망한다. 행복의 수치를 돈으로 헤아리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그들의 사정도 있고 아픔도 있을 것이다. 김애란은 그것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을 돈과 이웃의 이야기로 엮은 『안녕이라 그랬어』를 통해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더 높은 곳, 다른 계층으로의 이동을 욕망하는 자연스러움을 포착한다. 그리고 나 혼자만 그런 삶을 사는 게 아니라고 가만히 위로를 건넨다.


앞으로도 저는 삶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삶을, 죽음이 무언지 모른 채 죽음을 그릴 테지만, 때로는 그 ‘모름’의 렌즈로 봐야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음을 새로 배워나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뒤늦은 깨달음의 형태로 다가오니까요. (작가의 말 중에서, 316~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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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감성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
제인 오스틴 지음, 김선형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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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에서 독자가 바라는 건 무엇일까. 첫눈에 반해 아무런 장애 없이 완벽한 사랑과 행복한 결말일까. 아니면, 숱한 오해와 헤어짐을 반복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일까. 뭐가 됐든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과 동일시되어 연애 감정을 전달받기를 원한다. 연애를 꿈꾸면서도 연애를 멀리하는 요즘 20~30대가 연애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이유도 같을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과 『오만과 편견』이 오랜 시간 사랑받는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의 첫 장편소설인 『이성과 감성』은 연애의 첫 시작과 전반적인 모든 과정을 만날 수 있는 연애소설이다. 『이성과 감성』은 앞서 읽은 『오만과 편견』과 인물 설정이나 스토리가 상당히 비슷하다. 『이성과 감성』엔 유머러스한 인물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까. 주인공 자매는 물론이고 상대 남성의 성격이나 집안 배경도 흡사하다. 소설 속 자매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유산이 이복 오빠에게 돌아가며 어쩔 수 없이 정든 집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사랑이 시작될 것 같지만 사실 첫째 엘리너는 이사 전 사돈총각인 에드워드와 연애 감정을 키우는 중이었다. 물론 사돈 집안에서는 엘리너를 환대하는 건 아니었다. 거리가 멀어져도 둘 사이의 확신이 있다면 크게 문제 될 게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좀처럼 에드워드의 연락은 없었다. 반면 메리앤은 이사 온 곳에서 두 명의 남자를 만난다. 메리앤을 좋아하는 브랜던 대령과 메리앤이 첫눈에 반한 월러비. 메리앤의 마음은 나이차가 많이 나는 브렌던 대령보다는 또래인 청년 월러비에 향했고 언니 엘리너의 눈에는 둘 사이가 약혼한 것처럼 보였다. 브랜던 대령은 메리앤의 감정을 알면서도 메리앤을 향한 마음을 접지 않는다.


이성과 감성이란 제목처럼 소설 속 두 주인공은 서로 반대 성향을 지녔다. 철저하게 이성적 판단이 강한 언니 엘리너와 생각이나 판단보다는 감정에 이끌려 행동하는 동생 메리앤의 연애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 요즘 유행하는 성향으로 보자면 엘리너는 T, 메리앤은 F라 할 수 있다. 엘리너는 한편으로는 신중하다 못해 고지식하게 보인다. 에드워드에게 숨겨둔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도 차분함을 잃지 않으니 말이다. 메리앤의 명랑은 사랑스러울 때도 많았지만 제발 한 번 더 생각하면 어떨까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니 미래를 확신하는 월러비가 연락이 닿지 않고 마침내 들려온 소식이 그의 결혼 소식이니 메리앤의 상심은 병이 될 수밖에 없다.





엘리너와 메리앤의 사랑은 끝내 이뤄지지 않는 것일까. 에드워드의 숨겨진 약혼자와 월러비의 결혼은 충격이었기에 브랜던이 사랑하는 이도 메리앤이 아닌 언니 엘리너가 아닐까 조바심이 났다. 놀라운 건 이 소설이 제인 오스틴의 첫 소설이라는 점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감정과 그와의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소설에 녹아냈다고 할까. 어디 그뿐인가. 제인 오스틴은 그 시대의 사회적 관습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는다. 장자상속의 문제점을 꼬집고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는 부모(에드워드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재미있는 건 결혼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결혼에서 행복은 운이라 말했던 『오만과 편견』속 샬럿처럼 『이성과 감성』에서도 약혼을 했지만 파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했을 때 이익을 생각하는 따지며 유리한 선택을 한 루시의 모습은 그 시대의 영국의 사회가 어땠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엘리너와 메리앤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지만 제인 오스틴의 주변에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을 것 같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발생하는 감정은 어떻게 표현되는 게 좋을까. 얼핏 생각하기에 엘리너와 메리앤의 감정이 반박씩 드러나면 가장 완벽할 것 같지만 사랑하는 일도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니 뭐나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스스로를 다잡는 엘리너의 모습은 애처로워 보였다. 엘리너에게서 K- 장녀 모습이 겹쳐진 건 나뿐일까.


겉으로는 아무런 기쁨도 드러내지 않았고, 어떤 말이나 미소로도 표현되지 않았답니다. 오직 엘리너의 가슴속에서만, 그 고요하고 강인한 만족감이 머물러 있었어요. (477~478쪽)


“나는 침착하게 행동할 거야. 내 마음의 주인이 될 거야.” (542쪽)


사랑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어떠냐고 묻는 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 지난 사랑의 모습을 가만히 돌아보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어쨌든 돌고 돌아서 사랑의 결실이 이뤄지는 모습은 독자로서 흐뭇하다. 오랫동안 사랑받는 연애소설이라는 걸 확인한다. 제인 오스틴을 사랑하는 독자에게 제인 오스틴 탄생 250주년을 맞아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된 소설이라는 점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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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
제인 오스틴 지음, 김선형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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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일은 경험하기 전까지 궁금증을 유발한다. 안다고 여기고 확신을 가져도 실제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험자는 충고하고 조언한다. 자신의 경험이 대단한 영향력을 지닌 것처럼. 한편으로는 경험하지 않았기에 분별력이 정확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감정에 대해서는 섣불리 경험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사랑, 행복 같은 것들은 추구하는 가치와 기준이 다르니까.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시대적 배경과 문화를 별개로 결혼이란 무엇이며, 행복한 결혼이란 어떤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첫 만남의 좋지 않았던 인상 때문에 서로를 오해하고 돌고 돌아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사랑의 결실을 맺는 완벽한 로맨스이자 연애 소설이지만 그게 전부일까.


딸에게는 재산을 상속하지 않는 불합리한 상속 제도로 인해 원하지 않든 결혼을 목표로 삼다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래서 딸 다섯을 둔 베넷 부인은 어떻게든 딸들의 남편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근처로 재산이 많은 청년 빙리가 이사를 오면서 더욱 목표는 분명해졌다. 첫째 제인과 빙리는 제법 잘 어울리고 베넷 부인이 보기에 둘의 결혼은 시간문제로 보였으니까. 문제는 제인이 아니라 둘째 엘리자베스였다. 제인에 비해 미모가 약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엘리자베스에게도 신경이 쓰이는 청년이 있다. 빙리의 친구인 다아시.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가문의 상속자지만 오만한 태도로 일관한다.


연애 소설의 특성상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이뤄질 가능성은 크지만 소설 초반의 둘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는지가 가장 큰 관심사다. 다이시가 어떤 인물인지, 독자도 혼란스럽다. 물론 엘리자베스에게 호감을 느끼고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는 건 확실하지만 말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를 오만한 사람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다. 그가 제인과 빙리의 결혼을 반대한다는 것,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어려운 사람을 힘들게 했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게 사실이라면 엘리자베스가 그를 미워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이시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 엘리자베스에게 고백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모두가 예상하듯 답은 거절이다. 엘리자베스가 다이시의 진심을 알아갈 시간이 없다. 동생 리디아가 남자와 도망을 치는 일이 일어났다. 놀랍게도 그 상대는 한때 엘리자베스에게 관심을 보이며 다이시의 과거에 대해 알려준 남자 위컴이다. 소설이나 밖이나 남녀의 사랑은 예측할 수 없고 돌발적이다. 이 부분이 나는 제일 놀라웠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와 다이시의 관계 회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복선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제인과 빙리, 엘리자베스와 다이시의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면서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지만 과연 행복한 결혼이라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아들이 없는 베넷 부부의 먼 친척이자 상속자인 콜린스가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하자 흔쾌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베넷 부인과 엘리자베스의 거절로 콜린스와 결혼하는 샬럿의 생각은 그 시대의 표본일지도 모른다.


결혼에서 행복은 순전히 운에 달린 거니까. 당사자들이 각자 상대의 성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든가 처음부터 둘이 꼭 닮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남들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 거라는 보장은 전혀 없단 말이지. 살다 보면 어차피 충분히 달라질 테고, 그래서 또 남들만큼 속앓이를 할 테니 말이야. 그러니까 오히려 앞으로 평생을 함께 보낼 사람의 결점은 잘 모르면 모를수록 좋은 거야. (46쪽)


결혼은 언제나 그녀의 목표였거든요. 재산은 적고 교육은 잘 받은 젊은 여자에게는 결혼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어요, 그러니 행복을 얻을 가능성이 아무리 불투명해도, 결혼은 궁핍으로부터 지켜주는 가장 쾌적한 보호 수단이 되어주었지요. (213쪽)


샬럿의 입장에서 목표하는 바를 이뤄주는 상대가 등장했으니까. 아니, 현재의 누군가도 샬럿의 생각에 동의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결혼은 어렵고 알 수 없다. 평생 독신이었던 제인 오스틴이었기에 섬세한 감정 표현과 결혼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들려줄 수 있었던 것 같다.


재밌게 읽은 소설이다. 아름다운 자연 광경과 대저택의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제인과 피아노를 치는 엘리자베스를 지켜보는 다이시를 상상하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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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31 2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04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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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소식은 언제나 반갑다. 꾸준하게 소설을 발표하는 김혜진 작가의 장편소설 『오직 그녀의 것』은 기존에 만난 소설과는 달랐다. 다름을 어떻게 표현해야 가장 적절할까. 깊고 진한 여운보다는 재밌고 편안했다는 게 맞겠다. 그러니 다른 소설이 아닌 이 소설로 김혜진 작가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을 수도 있겠다. 특히 출판이라는 특정 분야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말이다. 한편으로는 지금껏 만나 온 김혜진의 결을 생각한다면 아쉬운 느낌도 지울 수 없다. 나 같은 독자가 그렇다.


소설 이야기를 해 보자면, 『오직 그녀의 것』은 편집자의 세계를 다룬다. 그러니까 제목 속 그녀의 것은 ‘책’이 되겠다.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한 번쯤 꿈꿔왔을 직장이 출판사일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석주’는 어땠을까?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석주는 어떻게 편집자가 되었을까. 대학에서 잠깐 문학 수업을 들었고 책을 좋아하는 게 전부였다. 교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에게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고민해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첫 직장이 그러하듯 석주도 우연하게 출판사 ‘교한서가’에 취직했다.


그렇게 책을 만드는 곳에서 석주가 처음 한 일은 교열이었고 나중에 편집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와 동시에 소설은 책을 만드는 전반적인 과정이 등장한다. 한 권의 책이 어떻게 기획되고 작가의 원고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투입되는지 알려준다. 소설의 배경인 1990년대 초는 현재와 다른 모습이다. 석주가 원고를 손으로 필사하는 장면, 저작권에 대한 모호한 태도, 도서정가제 실행 전의 모습은 그 시대 출판 시장에서 발로 뛰는 이들의 열정을 상상하게 만든다.


석주는 ‘교한서가’의 상황이 나빠지면서 그만두고 신생 출판사인 ‘산티아고북스’로 출근한다. 그곳에서 석주는 편집자란 일을 사랑하며 성장한다. 자신과는 다른 성향의 동료와 부딪히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한다. 편집자 소모임에 참여하며 몰랐던 분야에 대해 배우고 그 안에서 잡지 편집자 원호를 만난다. 그렇게 모두가 예상하는 전개가 이어진다. 석주와 원호의 연애는 자연스럽게 결혼을 향한다. 동종 업계에서 일을 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응원하고 배려하는 완벽한 상대라고 여겼다.


그러나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석주가 담당한 저자가 거대한 사건에 휩싸이면서 어려움에 처한다. 물론 둘 사이가 견고했더라면 그들의 사랑이 해피엔딩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웬만한 독자라면 이 소설에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할 것이다. 석주가 선택하고 석주에게 남은 건 사랑이 아니라 일이었다는 것을.





성실한 사수를 만나 묵묵하게 일을 배우고 책을 만든 시간이 흘러 58세의 석주는 주간이 되었다. 편집부의 대리에서 주간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좋아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두의 직장 생활이 그러하겠지만 석주의 일상도 다르지 않았다. 반복되는 일상, 생계를 위한 노동이지만 그 안에서 삶의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을 놓지 않았다.


석주의 하루는 이른 아침 원룸을 나서면서,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면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시작되었고 저녁 무렵 같은 풍경을 되짚어 오면서 끝이 났다. 멀리 보면 단조로워서 똑같은 하루를 이어붙인 것 같은 나날, 그러나 그녀에겐 매일매일이 새로웠다. 조마조마하고 필사적인 마음 사이로, 이상한 기대감과 설렘 사이로 속절없이 흩어지는 시간은 너무 빨라서 모두 기억할 수도, 붙잡을 수도 없었으나 석주를 그 일상의 진짜 주인으로 만들었다. (115쪽)


소설을 읽으며 석주가 경험했던 시간이 내게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계간지 1년 구독 영업 전화를 받던 순간, 작가와의 만남이나 북토크에 참여를 바라던 마음. 물류창고의 화재,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부도 사태는 지금은 찾을 수 없는 대형서점이나 내가 좋아했던 출판사가 떠올랐다. 현재 출판시장은 상상할 수 없었던 시대. 저마다의 특성을 살린 1인 출판사와 독립서점을 생각하면 아득하게 느껴진다.


시시하고 평범한 그 이야기는 다름 아닌 자신의 삶이었다. 석주가 미약하게나마 감동을 느낀 건 쓰지 않은 것과 쓸 수 없는 것까지 모두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단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그 여정은 오직 석주에게만 속한 것이었고 그녀만의 것이었다. (263~264쪽)


어쩌면 석주는 가장 완벽한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때로 실패하고 계획한 대로 이뤄지지 않아 수정과 수정을 반복하며 마침내 완성된 책을 마주하는 기쁨을 누렸을 테니까. 우리의 평범한 삶이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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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12-29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김연수 작가 포토존에서 찍으신 이유가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대충 김혜진 작가의 이 책 내용의 줄거리를 읽거나 들었을 때 음…저도 그동안 읽어와서 김혜진 작가를 그리는 상?이 있어서인지 ?가 조금 남아 선뜻 이 신간을 덥석 사지 않았던 듯 합니다. 그럼에도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김혜진 작가가 쓴 편안하고 재밌는 소설이란 어떤 맛일까? 싶기도 하구요.
<빈티지 엽서>란 단편도 저는 꽤나 편안하고 재밌게 읽었어요. 그런 느낌일까? 상상해봅니다.

자목련 2025-12-30 11:48   좋아요 1 | URL
앗, 일부러 찍은 걸 알아봐주시다니요!!!
이번 소설은 출판사의 일상을 상상하며 읽을 수 있는 재밌는 소설이었어요. 김혜진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3.5별이 적당할 것 같아요. <빈티지 엽서>랑은 조금 다른 결이 아닐까 싶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보세요 ㅎㅎ
 
소년 동주 창비교육 성장소설 15
정도상 지음 / 창비교육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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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시<별 헤는 밤>과 <서시>은 모두에게 익숙하다. 암기할 정도는 아니지만 한 구절만 들어도 바로 알 수 있다. 나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 대해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나부터도 자세히 모른다. 부끄럽지만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게 맞다. 그래서 윤동주 시인 서거 80주기를 맞은 올해 정도상의 소설로 만난 『소년 동주』를 만났던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소년 동주』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소설은 윤동주의 소년 시절을 조명한다. 저항 시인 윤동주가 아니라 무엇이 되고 싶은지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부모님과 갈등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만난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이 암울한 분위기를 걷어낼 수 없지만 그 안에서 문학을 향한 윤동주의 열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보여준다.

정도상은 현재를 살아가는 여고생 새봄이 꿈에서 윤동주를 만나 그와 함께 시간 여행을 하는 설정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청소년이 역사 속 인물 윤동주에게 접근하는 쉬운 방법을 제시한다고 할까. 실은 나 역시도 이런 과정이 흥미로웠다. 영화나 언론을 통해 볼 수 없었던 중학생 윤동주의 일과를 엿보는 기분이었다.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도 빼놓을 수 없다. 윤동주의 곁에는 언제나 송몽규와 문익환이 있었다. 셋은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응원하는 사이였다.

소설에서 만난 동주의 모습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좋아하고 달리기를 하는 평범한 중학생의 모습이었다. 바느질 솜씨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건 동요였다. 동요를 분석하고 동시를 쓰던 시간이 미래 시인 동주를 만든 게 아닌가 싶다. 섬세한 감수성과 예술적 기질을 지닌 동주와 달리 몽규는 현실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동주와 대립한다.


동주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몽규의 문학적 재능이 부러웠다. 하지만 몽규에겐 독립군이라는 확실한 꿈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실행할 용기도 있었다. 만주의 군관학교로 떠나 학생 훈련소에서 생활한다. 부모의 응원이 있기에 가능했다. 익환도 다르지 않았다. 익환은 평양 숭실학교로 편입했다. 동주도 평양으로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반대했다. 아들이 어려운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동주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익환이 있는 평양에 도착한 동주는 숭실학교의 규모에 놀랐다. 편입 시험 결과도 좋지 않았다. 4학년 편입에 실패하고 3학년 입학증을 받았다. 아버지께 4학년 편입 합격증을 보여주고 싶었을 텐데 동주는 얼마나 속상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부모의 기대와 자식의 희망은 늘 같은 게 아닌 것 같다. 숭실학교에서 동주는 학생회의 잡지를 만들며 문학을 배우고 더 깊게 빠져들었다. 그 시간 몽규도 군관학교에서 잡지 <신민>을 만들고 있었으니 둘의 운명이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평양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숭실학교가 신사참배를 반대하자 총독부는 교장을 해임하고 교정에는 사복형사의 감시가 심해졌다. 학생들이 시위를 하자 사복형사들은 학생회 간부를 체포하고 학교는 휴교를 결정했다. 동주와 익환은 자퇴를 하고 집을 돌아온다. 얼마 후 문학 대신 총을 들고자 했던 몽규도 돌아온다. 동주의 앞에 다시 힘든 시간이 놓였다. 연희전문 문과에 가려는 동주를 아버지는 문학이 밥 먹여주냐며 의과에 가서 의사가 되라고 한다. 문학을 하고자 하는 동주의 굳은 의지는 단호했다. 지금 시대에 문학이 동주를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아는 아버지의 가슴은 미어지는 고통이었다.

하고 싶은 일, 스스로 가장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일, 오래 꿈꾸던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삶’이라고 동주는 생각했다. 물론 때로는 고통과 희생이 따를 수도 있다. 고통과 희생이 두려워 꿈을 포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못 사는 삶’이 아닌가. (317쪽)

생활의 협박을 견디면서 생활 속에서 시대를 읽고, 순수를 읽고, 작고 사소한 몸짓과 슬픔에 감동하면서 시를 써야만 한다. 그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326쪽)


시인의 운명을 직감한 동주. 『소년 동주』를 통해 윤동주를 만나고 나니 그의 시가 어떤 고통을 안고 태어났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동요를 분석하고 동시를 쓰던 소년 동주가 자신의 시를 쓰기 위해 시집이란 시집은 모두 꺼내 읽고 시상을 찾기 위해 애쓰는 마음. 어느 시 하나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게 느껴졌다. 또한 책을 통해 동주, 익환, 몽규의 아름다운 우정이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런 의미로 꿈을 찾아 방황하고 길을 헤매는 청소년에게 든든한 응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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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12-09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년 동주라니~! 요즘 윤동주님 시에 다시 빠쪘는데 관심이 갑니다~!!

자목련 2025-12-10 09:27   좋아요 1 | URL
그렇다면 만족도가 높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