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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린
안윤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평점 :
알 것 같은 마음이 있다. 알 것 같은 것이지 아는 것 아니다. 그 마음을 아는 건, 오직 마음의 당사자뿐이다. 비슷한 상황, 비슷한 감정을 경험했기에 상태를 짐작한다. 주저하고 조심한다. 마음은 유일한 것이고 마음은 소하니까. 안윤의 소설집 『모린』을 읽으면서 나는 그런 마음 곁에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깨질 것 같은, 얕은 숨에도 사라질 것 같은 그런 마음을 지키려 애쓰는 마음을 보았다.
표제작 「모린」 은 고객의 불평불만을 상담하는 ‘미란’과 장애인 ‘영은’의 이야기의 사랑 이야기로 읽을 수 있고 상실과 회복에 대한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시각 장애인 낭독 봉사를 하는 미란은 그곳에서 영은을 처음 만났다. 자신의 전부였던 할머니를 잃은 미란에게 다가온 영은.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과 서로를 향한 마음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위안을 주는 유일한 존재, 무엇이든 다 말하고 싶은 상대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그런 존재. 소설 속 가장 선명하게 남은 문장처럼 유일한 사람.
모린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모린」, 9쪽)
설령 헤어졌다고 해도 그 고유함은 사라질 수 없다. 누군가를 알고 사랑한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미처 전부를 다 알지 못해도 애서 지우려 해도 끝까지 남아 있는 어떤 것이 있으니까. 그래서 먼 훗날 가만히 떠오르는 기억에 이름을 불러보게 된다.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한때 당신에게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서로의 전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랑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되기도 한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별을 한다. 「담담」 속 ‘혜재’와 ‘은석’처럼 말이다. 11년이라는 긴 연애를 끝낸 혜재는 소개로 만난 은석에게 양성애자라 말한다. 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은 은석에게 혜재의 정체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은석에겐 유가족이라는 정체성이 그러했으니까. 「담담」이란 제목처럼 둘의 만남은 그렇게 지속되고 서로에게 스며든다. 일부러 캐묻지 않고 일상을 공유한다. 무엇 때문에 슬픈지, 무엇이 상처로 남았는지 말하고 싶은 순간이 온다는 걸 알아서가 아니라 그 마음이 어떤지 조금은 알 것 같아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털어놓은 일과 서로를 이해하는 일, 한 사람을 아는 일 간에 정확히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그것이 관계에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일인지 갈수록 알 수가 없어진다. 서로를 이해하는 일, 한 사람을 아는 일이 과연 무엇인지조차도. (「담담」, 121쪽)

안윤이 그리는 관계는 밀착이 아닌 떨어진 사이다. 그러니까 그림자를 볼 수 있는 정도라고 할까. 그건 그림자까지 보고 싶은 마음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런 게 느껴져서 나는 안윤의 소설이 좋았다. 읽을수록 좋아졌다. 「모린」과 「담담」에서 상처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마음, 남겨진 흉터를 어루만지는 마음이 전해졌다.
그런 마음은 「하지夏至」에서도 만난다. 서울에서 제과점을 하던 ‘수림’은 모든 걸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서울을 떠나기 전 오랜 친구 ‘지언’과 이별 캠핑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수림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저 곁에서 이별을 준비하는 지언. 수림이 얼마나 힘들고 지쳤을지 짐작하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둘 사이에 흐르는 믿음이 있기에. 수림이 고향으로 내려가고 지언은 너는 잘 지내라는 문자를 보낸다. 수림을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잘 지내지 않고 괜찮지 않더라도 잘 지내고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 수림이 아닌 내가 회복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계절이 바뀌고 낮이 길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천천히 회복될 거라고.
너는 잘 지내. 그건 마치 지언이 내게 거는 주문 같았다. 너는 잘 지내. 그 주문에 단단히 걸려들고 싶었다. (213쪽)
낮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 나는 안다, 때가 되면 다시 점점 길어지리라는 것을, 어김없지만 전과는 같지 않을 낮이. (「하지夏至」, 214쪽)
직접적으로 묻거나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어떤 상처와 마음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건 상대를 향한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가능하다. 확인하고 확인받으려는 욕망이 아닌 그런 마음. 서툴고 어려워서 시간이 지나서야 보인다. 초라했던 이십 대 초반을 떠올리는 ‘의선’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던 ‘준수’를 회상하는 「작은 눈덩이 하나」. 그 시절 의선에게 유일한 사람은 준수였을 것이다.
그런 유일한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어떨까. 아무런 징조 없이 증발해 버린다면. 「틈」에서 ‘사희’가 그러했다. ‘인애’는 사희를 수소문하지만 찾을 수 없다. 사희는 이혼을 했고 사라졌다. 나중에야 사희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다. 우연하게 잡지에 실린 사희를 보고 무작정 찾아간다. 구 년 만에 사희는 인애를 근처 저수지로 안내한다. 그 풍경을 사진에 담으면서 그곳에서 다시 살아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황량하고 덧없는, 무위에 가까운 풍경들, 자신의 내면과 어딘가 닮은 대상들을 포착했다. 뷰파인더를 들여다볼 때 사희는 철저히 관찰자가 되었다. 자신이 이 세계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건너다보고 있다는 감각이, 거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고작 찰나를 붙잡는 것뿐이라는 사실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위안을 줬다. (「틈」, 240쪽)
인애에게 사희가 유일한 사람이었던 시절은 과거가 되었다. 아니 그 시절을 통과했다고 할까. 사희에게 인애의 사과나 위로가 필요한 시간도 지나가 버렸다. 놓쳐버렸다는 게 맞겠다. 사희가 보낸 시간을 알 길이 없고 그 시간을 놓쳤지만 그림자를 볼 수 있는 거리가 생긴 것이다.
안윤은 이처럼 저마다의 유일한 사람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각자의 삶 속에서 유일한 사람을 지키려 노력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거라고. 마음을 온전히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그런 기억을 품고 살아가도 충분한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