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길 (반양장) - 박노해 사진 에세이, 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 리커버 개정판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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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고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아쉬움뿐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무엇이 그리 아쉬운가. 무엇이 그리 부족한가. 아니다. 모든 게 감사하다. 지금 이 시간에 여기 있다는 것. 무탈하게 지내왔다는 것. 속 시끄러운 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마다 다음으로 이어왔다는 것.


지난 12월은 모두에게 특별한 달이 될 것이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탄핵 가결, 촛불 집회.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모두가 뜨거웠던 순간. 앞으로의 과정도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저마다의 삶을 살아간다. 누군가 고민의 시간을, 누군가 고민을 끝내고 선택의 시간을, 누군가 이전과 다른 삶으로 나갈지도 모른다. 박노해의 사진 에세이 『다른 길』에서 이곳이 아닌 그곳의 삶, 다른 삶을 마주하며 나의 삶을 생각한다.


우리 인생에는 각자가 진짜로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 나에게는 분명 나만의 다른 길이 있다. 그것을 잠시 잊어버렸을지언정 아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지 않을 때, 지금 이 길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질 때, 바로 그때, 다른 길이 나를 찾아온다. 길을 찾아 나선 자에게만 그 길은 나를 향해 마주 걸어온다.


나는 알고 있다. 간절하게 길을 찾는 사람은 이미 그 마음속에 자신만의 별의 지도가 빛나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진정한 나를 찾아 좋은 삶 쪽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에게는 분명, 다른 길이 있다. (「그 길이 나를 찾아왔다」, 9쪽)





박노해의 첫 사진에세이 『다른 길』이 출간 10주년을 맞아 리커버 개정판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만났을 것이다. 141컷의 사진과 박노해의 짧은 글이 전하는 묵직한 울림. 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 검색이나 지도를 통해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닌 직접 가야만 알 수 있는 삶이다. 거룩하고 숭고한 삶의 조각들이다. 태고의 시간이 여기 존재할 것 같다.





이곳 소농들은 동그란 자연의 곡선을 깨지 않는다.

기계가 아닌 물소와 사람의 손으로만 비탈을 깎고

찰흙을 다져 층층이 백 수십 결의 계단논을 창조해냈다.

그 어느 신전보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건축물.

후손에게 물려주는 최고의 문화유산이 아닌가.

세계의 토박이들은 오늘의 도시 문명과 인류의 밥상을

떠받치고 있는 피라미드 밑돌과도 같은 존재이다.

이 지상의 작고 힘없는 가난한 이들이 무너져내리면

지금 우리가 딛고 선 세계는 여지없이 무너지리라.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건축」, 27쪽)


사진 속 계단논을 보면서 이제는 관광지가 된 어느 지역을 떠올린다. 신성한 노동으로 삶을 이어온 사람들, 여전히 삶의 터전인 그곳을 향하는 마음과 태도는 조금 달라져야 할 것이다. 내가 직접 보지 못했기에 치열한 뜨거움을 알 수 없다. 어느 삶이든 다르랴.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순간일 것이다. 소박하지만 가장 풍요로운 삶, 넉넉함을 잃어버린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각자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하루에 가장 즐거운 시간은 짜이가 끓는 시간.

양가죽으로 만든 전통 풀무 마시키자로 불씨를 살리고

갓 짜낸 신선한 양젖에 홍차잎을 넣고 차를 끓인다.

발갛게 달아오른 화롯가로 가족들이 모여들고

짜이 향과 함께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탐욕의 그릇이 작아지면 삶의 누림은 커지고

우리 삶은 ‘이만하면 넉넉하다’. (「짜이가 끓는 시간」, 99쪽)


141장의 사진에 모두 붙잡았지만 유독 오래 머문 사진이다. 보는 순간, 고요한 평화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떤 분쟁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가 느껴진다. 아름다운 자연의 질서만이 존재할 것 같은 곳. 막강한 힘이 이곳을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 그곳에 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열망까지 품게 된다.





높고 깊은 산맥에 소중히 숨겨진 가쿠치 마을.

흰 만년설과 푸른 하늘과 붉은 흙집과 노란 나무가

저마다의 색깔로 빛나는 가을날.

남자들은 산 위에서 야크를 치고 땔감을 구하고

여인들은 양털을 자아 옷감을 짜고 빵을 굽는다.

따사로운 가난마저 고르게 빛나는 마을.

단순하고 단단하고 단아한 작은 흙집.

마음까지 환해지는 내가 살고 싶은 집. (「내가 살고 싶은 집」, 143쪽)

언제부턴가 개인이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나를 생각하고 나를 위하는 삶이 잘못은 아니지만 함께의 가치가 얼마나 위대한가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모두가 힘을 더해 벽돌을 찍어내는 사진과 스마트폰으로 필요한 것을 얻는 우리는 다르다고 말하겠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에겐 비교의 삶이 아니라 연대와 공존의 삶이 필요하다.





어린아이부터 할머니까지 모두 모여

마을 공동으로 사용할 흙벽돌을 찍어내는 날.

자신의 노동이 빛나는 날이기에 웃음꽃이 핀다.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결핍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 에너지를 다 사르지 못하고

자기 존재가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는 것,

‘잉여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고통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이 아무 의미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잉여 인간’은 없다」, 177쪽)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생각에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진이었으면 좋겠다. 쓸모없는 건 없다고, 존재 자체로 가장 소중하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말이다. 때로 막막하고 온통 깜깜할지라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모르겠다. 경이로운 자연을 품은 삶의 모습을 보며 나는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때로는 사람이 깃발이 되는 것이다.’ 이 문장이 고맙고 눈물겹다.





멀리 야크떼를 바라보고 서 있는 청년의 천막집에

티베트 불교의 상징물인 롱다가 펄럭인다.

롱다는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마치 초원을 달리는

티베트 말과 같다 하여 ‘바람의 말馬’이라 불린다.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의 등뼈를 곧게 세우고

깃발도 없이 길을 찾아가다 보면

때로는 사람이 깃발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깃발」, 343쪽)


책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삶이라는 현장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버티는 이들에게 박노해가 건네는 위로는 마음의 다른 길로 안내한다. 마음의 길이라는 소망을 품고 찾아 나선 이에게는 지표가 될 것이다. 떠나지 않는 이에게도 만족하며 감사하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길이 생긴 것이다.


인간이기에 ‘어찌할 수 없음’의 주어진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있음’의 가능성에 다해 분투하면서, 우리 삶은 ‘이만하면 넉넉하다’며 감사와 우애로 서로 기대어 사는 사람들. (「그 길이 나를 찾아왔다」,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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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2025-01-12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간절하게 길을 찾아 나선 사람에게 길이 다가와 마주한다는 것,,영상 이미지로 떠올리면서 글을 읽으니, 자목련님께서 글에 담으신 에너지들이 한층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위로가 되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일만 가득한 2025년이 되시길 바랄게요^^

자목련 2025-01-14 08:48   좋아요 1 | URL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는 책이 아닌가 싶어요.
전야제 님이 원하는 길, 즐겁고 행복하게 걸어가시길 바라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그레이스 2025-01-12 1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존과 연대의 중요성...200퍼센트 공감!

자목련 2025-01-14 08:44   좋아요 1 | URL
박노해의 글을 읽을 때면 매번 내가 잊고 있었던 것들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그레이스 님,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고 평온한 날들 이어가세요^^
 
시작하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윤성희 외 지음, 강미연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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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누군가에게 쉽고 누군가에게는 어렵다. 남들이 보기에 뭐든 쉽게 시작하는 것 같지만 정작 본인은 어려울 수 있다. 막상 시작하고 보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말이다. 어쨌든 시작해야 알 수 있다. 시작하는 마음의 시작은 어디에서 올까. 시작하는 마음에 필요한 건 뭘까. 시작하기를 주저하는 마음을 독려하는 힘은 뭘까. 시작을 테마로 한 『시작하는 소설』을 읽고 한 동한 ‘시작’에 붙잡혀 있었다. 시작해야 할 것을 미루고 있는 내가 보여서, 미리 실수나 실패를 예상해서 시작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시작하는 소설』 은 새해가 되면 작성하는 어떤 목표들이 자동으로 따라온다. 새 학년, 취직, 연애, 운동 같은 것들이 떠오를 것이다. 작심 3일로 그친 운동, 100권 읽기 같은 보통의 목록. 그런 맥락에서 김화진의 「근육의 모양」은 가장 친근하고 익숙한 시작을 들려준다. 소설은 필라테스와 담배를 동시에 시작한 재인과 재인의 필라테스 강사 은영의 이야기다. 재인은 ‘해 본 것’ 리스트를 작성하는데 두 가지를 추가할 수 있었다. 얼핏 ‘해 본 것’이라고 하면 그냥 해보았을 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해보았다는 건 그 자체로 큰 의미를 지닌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해보았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잘하거나, 성공 같은 것과는 별개로 더욱 대단하게 다가왔다.


처음 해보는 것이지만 여러 번 해 본 사람처럼 능숙하게 하고 싶다는 사춘기적 마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처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해야 할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혼자 엉뚱한 짓을 해서 우스꽝스러워지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마음 같은 것. 때문에 뭔가를 한다는 건 정말이지 부담스러워지만, 그럼에도 재인은 ‘한다’와 ‘하지 않는다’ 사이에서는 ‘한다’쪽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무조건 남는 게 있다고 믿는 편이었다. (「근육의 모양」, 80쪽)


재인이 필라테스를 배우는 은영은 대기업을 그만두고 강사가 된 지 4년째다. 은영은 회사를 다닐 때 일을 잘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러니까 상사의 눈치를 보고 능력 이외의 것들의 평가를 받는 일에 아무렇지 않아야 했다. 은영은 그럴 수 없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라 몸에 집중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다.


시작하기 위해서는 때로 그만두어야 할 것들이 있다. 은영이 회사를 그만둔 것처럼. 재인의 경우 결혼을 앞둔 연인과 헤어지는 일이 그러했다. 결혼은 나가는 것,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그러나 파혼도 시작이 될 수 있다. 모두에게 시작이 같은 의미일 수 없으니까. 누군가는 실패라고 규정한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해 본 것’에 속할 수 있다. 그것은 해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 되고 또 다른 시작의 자양분이 된다.


시작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경우 혼자가 아니면 좀 괜찮다. 이를테면 윤성희 「마법사들」 속 가출 같은 것이라고 할까. 그래서 십 대 소년의 가출기라고도 볼 수 있다. 민호와 성규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 가출을 한 민호와 성규는 영화를 보고 영화관에서 밤을 새우기로 한다. 둘만 남은 영화권에서 민호와 성규는 같이 본 영화 속 할머니가 한 "애쓴다"라는 말을 꺼내면서 서로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상처를 꺼내어 말하는 일을 시작하므로 서로의 애씀을 위로한다고 할까. 앞으로 민호와 성규가 시작할 모든 것들에도 애씀이 따르겠지만 그 시작과 우정을 응원하고 싶다.


어른이 되면 시작 따위는 두려울 게 없을 것 같지만 더 어렵다. 그래서 나이 드신 분들이 외국어룰 배우고 대입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럽고 대단하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떠한가. 백수린의 「흑설탕 캔디」속 칠십 대의 할머니는 손주들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다. 할머니에게 프랑스의 모든 것은 시작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프랑스에서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할머니에게 다가온 피아노 소리와 브뤼니에 씨와의 우정.


문득, 시작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구나 생각한다. 장류진의 「백한 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처럼 불합격 통보를 받고도 새로운 이력서를 쓰는 시작의 반복은 얼마나 위대한가. 정소현의 「어제의 일들」 속 상현은 주차장에서 일한다. 장애가 있는 그녀에겐 지울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사고가 있었다. 사고로 온전한 기억은 어제의 일들뿐인 상현이지만 살아 있어 다행이다. 상현에게는 살아 있음이 시작 그 자체이므로.


차마 다 기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것들은 명백히 지나가 버렸고, 기세등등한 위력을 잃은 지 오래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다행이라 말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어제의 일들」, 156쪽)


시작할 수 없다고 믿는 누군가에게 이 소설들은 시작할 수 있다는 응원을 건넨다. 시작하면 달라진다고, 아니 달라지지 않더라도 ‘해 본 것’이 생기는 건 꽤 괜찮은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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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코아였다 - 알코올 중독자 딸의 상처와 극복의 기록
허선화 지음 / 책과나무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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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같지만 모두가 같은 삶을 살지 않는다. 나와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삶을 이루는 환경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이유로 친구가 되고 그런 거리를 두기도 한다. 아픔이나 상처에 공감하며 이해하거나 처음부터 그것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심리 때문이다.


허선화의 에세이 『나는 코아였다』에 대해서도 누군가 그런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나는 코아(알코올중독자의 자녀 COA: Children of the Alcoholics)란 단어를 몰라서 이 책이 궁금하기도 했다. 어쩌면 코아를 아는 이는 그래서 이 책이 불편하고 읽기 힘들 수도 있다.


지금은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안다. 도박, 마약 같은 범죄의 범주가 아니더라도 중독은 그 자체로 병이라고 인식한다. 정신의학과의 진료를 받아 상담이나 약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그러나 70~80년대는 아니었다. 중독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남편이 술만 마시면 술 때문에 폭력적이 된다고 여겼다. 술만 아니면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아내와 아이들은 남편과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야 했다.


얼마나 힘들고 무서웠을까. 하지만 십 대의 저자에게 그렇게 말해준 이는 없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날은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저자의 아버지는 교사였다. 꽤 안정적인 직업이지만 교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예상 가능한 결과다. 가정을 지키는 중심은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 어머니를 위해 장녀였던 저자는 열심히 공부했다. 두 남동생을 챙기고 어머니를 도왔다. K- 장녀의 굴레였다.


물론 저자의 아버지도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병원에 입원하고 나오면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또 술에 빠져들었다. 기댈 수 있는 어머니가 있어 견딜 수 있었다. 안타깝게 저자가 열네 살에 교통사고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이후의 삶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어머니의 죽음으로 살림을 돌봐준 사촌 언니와 친척이 있었지만 임시였다. 그럼에도 저자는 서울대학교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그러나 여전히 저자는 자신이 원하는 걸 말할 수 없었다. 홍익대학교 4년 장학생이라는 선생님의 추천을 거부하지 못했다.


세상의 기준, 사람들의 기대, 그것에 철저히 맞춰졌던 나의 야망. 그건 진정한 내가 아니었다. 나는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며 독립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삶의 주체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45쪽)


홍익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러시아로 유학을 다녀온 저자의 이력을 보면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저자의 내면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것도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아픈 아버지, 사회적으로 실패한 아버지를 남동생에게 맡기고 유학을 선택했을 때 지금껏 아버지를 돌본 시간에 대한 보상 같은 것.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은 더 큰 고통이었다. 고국을 그리워하는 향수병, 갑자기 찾아온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삶은 더 피폐해졌다.


코아는 외로움에 극도로 취약하다. 때로는 나처럼 다른 사람의 의존 대상이 되어 외로움을 극복하기도 한다. 남을 돌봄으로써 자신의 외로움을 극복하는 성향을 ‘동반 의존’이라고 한다. 코아는 나약하지 않고 강해 보여서 타인에게 의지 대상이 되지만, 실상 내면에는 충족되지 않은 의존 욕구가 자리하고 있다. 동반 의존은 코아가 해결해야 할 부정적인 관계 패턴이다. 건강한 상호 의존을 가로막지 때문이다. 코아가 그런 자신의 관계 패턴을 인식하고 노력하면 동반 의존을 줄여나갈 수 있다. 나 역시 지금까지도 노력 중이다. (216~217쪽)


코아인 저자의 이 에세이는 자신의 지난 삶을 천천히 돌아보는 기록이자 상처를 직시하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한 일련의 과정이다. 강한 책임감도 일종의 코아의 특징이라는 사실. 생의 마지막까지 병원에 입원하며 보낸 아버지, 아버지가 왜 술에 빠지게 되었는지, 아버지의 상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중독의 위험성에 무지했던 시절, 누구도 알코올 중독 부모를 둔 자녀의 감정을 돌보지 못했다. 코아였던 저자는 스스로 결정하고 성장해야만 했다.


집사님의 말은 아주 짧았다. “그동안 수고 많았네. 잘 살아왔어.”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내 눈에서 폭포 같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서러움의 눈물도, 슬픔의 눈물도 아니었다 이해받은 데서 오는,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감동의 눈물이었다. 순간 나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음을 깨달았다. ‘이거였구나, 내가 원했던 것이.’ 그리고 동시에 하나의 통찰이 섬광처럼 뇌를 0.1만에 스쳐 지나갔다. ‘죄책감! 그거였구나. 내가 아팠던 이유가.’ 집사님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다. 수고했다. 잘 살아왔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 뭔가가 풀린 것 같았다. 비밀의 문을 굳게 채워놓았던 자물쇠가 열리고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드러났다. (286쪽)


저자는 신을 의지하고 기도를 하고 공부하면서 회복되기를 바랐고 조금씩 회복되었다. 십 대였던 저자에게 누군가 네 잘못이 아니라고. 죄책감은 가질 필요 없다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자신과 같은 코아에게 그러 말을 건네고 있는지도 모른다. 완전한 치유는 아니지만 치유는 계속될 거라는 믿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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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민음의 시 308
김경미 지음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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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의 시집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가 궁금했던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시집의 제목 때문이다. 바다, 빗소리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나는 작약에 꽂혔다. 작약을 취급하는 세계라니, 그 세계는 마치 나의 세계 같았다. 시집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그게 정확한 느낌이다. 잘 몰라서 읽고 잘 몰라서 좋다. 잘 몰라서 넘길 수 있고 잘 몰라서 다시 읽을 수 있다.


어쩌다 보니 이런 시를 먼저 읽는다. 그냥 지금 우리의 마음 같아서. 우리의 현실 같아서. 단단하지 않더라도 소멸하지 않았던 어떤 믿음이 한순간에 망가졌다. 망가졌으니 고치면 그만이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서 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냥 눈치를 보고 그냥 무리에 숨으려 한다. 해결과 수습은 시간 문제라는데,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행태를 지켜보자니 화가 난다.



늘 정확하게

네모반듯하거나 동그랗게

잘 지켜 준다니까


천 개의 연장통처럼 뭐든 다 들어 있거나

다 고쳐 준다니까


헛디뎠을 때

굴러떨어질 때

잘못 만났을 때


두드려도 문 안 열릴 때

두드린 적도 없는 문이 확 열렸을 때


해결과 수습은 시간 문제라는데


늘 시간이 없다 (「방법」, 전문)



시는 이래서 좋다. 나는 평론가가 아니니 내 맘대로 해석할 수 있고 내 감정에 끌리는 대로 취하면 그만이다. 다른 독자는 다른 방법이 있겠지만 말이다.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얼마나 많이 실패하고 얼마나 많이 상처를 입어야 인간 구실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더 배워야 할까. 그들이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공부는 끝이 없다는 걸 실천하려고 매번 인생 공부를 하려는 의도일까.



새와 저녁노을을 배우면

기차를 만들 수 있다


연도(年度)를 익히면 후회를 배울 수 있다


알파벳 여섯 개의 조합법을 배우면

배신하는 남자와 여자를 만들 수 있다


잠 안 오는 밤에

눈에서 제일 먼 엄지발가락을 주무르면

수면을 부를 수 있다


나사를 풀 때

심장과 바깥쪽

어느 쪽으로 돌려야 하는지는

수십 년째 외우지 못하고 헛돌지만


혀 닦는 법과

밤하늘의 별빛들만 제대로 습득해도

인간 구실을 할 수 있다 (「공부」, 전문)



그런가 하면 이런 시는 너무 슬퍼서 목이 멘다. 너무 아파서 심호흡을 한다. 무엇에 휩쓸리는도 모르고 이리저리 휩쓸리는 삶이 떠올라서. 그 삶이 하나가 아니라 무더기여서 아프다.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설령 도움을 청했다 해도 내미는 손이 없어서 잡을 손이 없어서 결국 혼자 안간힘을 쓰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결국에 닿지 않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기분. 다시 일어설 힘이 아니라 욕할 힘이 필요하다는 절절함이 느껴진다고 할까. 실컷 욕을 해도 괜찮다고 거든다. 아니, 나부터 한바탕 시원하게 욕을 해 볼까.



휩쓸려서 얼굴을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

시간을 버린 적도 많았다


휩쓸려서 폐허라는 말을 사랑하고

포도나무 밑 그늘이란 말을 좋아해서

곤란했던 때도 있었다


신발을 구겨 신듯

성격에 휩쓸려

인간에게도 바다에게도 가지 못했다


후회에는 갔다


나 혼자 내 힘으로

매번 (「휩쓸리다」, 전문)



나 없는 사이에 부가 내 발목을 훔쳐갔다

바닥에 주저앉았는데

바닥이 아니라고 했다


다시 보니 손목도 없어졌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다들 뭔가 애써 감추고 있는 눈치다


바닥에 앉으면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더니


별빛들이 매일 그런 식으로 계단을 오른다더니


다시 보니

목도 눈도 훔쳐 가고 없다


욕 좀 해도 괜찮을까요? (「바닥」, 전문)



진정된 마음으로 이제 이 시를 말해보자. 그래, 이 시였다. 이 시집의 표제 말이다.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를 마주하는 시. 상상하게 된다. 미용실 의자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아니, 나 이거나 당신일게 분명하다. 나도 “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란 말을 기억했다가 꼭 말해보고 싶다.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살아 있는 게 너무 재밌어서

아직도 빗속을 걷고 작약꽃을 바라봅니다


몇 년 만에 미장원엘 가서

머리 좀 다듬어 주세요, 말한다는 게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말해 버렸는데


왜 나 대신 미용사가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잡지를 펼치니 행복 취급하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그 위험물 없이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살아 있다고 간주하지만


당신의 세계는

어떤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오래도록 바라보는 바다를 취급하는지

여부를 물었으나


소포는 오지 않고


내 마음속 치욕과 앙금이 많은 것도 재밌어서

나는 오늘도

아무리 희미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오래 보고 있습니다 ( 「취급이라면」, 전문)



어떤 이별을 상상하기도 하고 영원한 작별을 그려보기도 한다. 소식이 끊긴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일까. 아니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미련한 태도일까. 그 무엇이든 상관없다. 나는 이곳에서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 오래 보고 있으니까. 작약을 만나려면 한 계절을 기다려야 하는데 조바심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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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12-12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김경미 시인의 시보다 이 시집은 공감도가 더 높아졌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건 또 왜인지 모르겠네요.
도서관에 있는지 검색해보고 없으면 구입해야겠어요.
나의 세계가 취급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도 생각해보게 되고요.

자목련 2024-12-15 10:21   좋아요 0 | URL
잘은 모르지만 이 시집의 시 가운데 일상을 다룬 시와 공감할 수 있는 시가 많았던 것 같아요.
나인 님도 즐겁게 만나실 바라요^^

꼬마요정 2024-12-12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뭔가 울컥 합니다.
‘후회‘는 배우자마자 쓸 수 있는 것 같아요ㅠㅠ

자목련 2024-12-15 10:25   좋아요 1 | URL
그쵸, 그 부분은 정말 울컥해요!
후회는 조금 천천히 써도 좋은데...

전야제 2024-12-13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드려도 문 안 열릴 때
두드린 적도 없는 문이 확 열렸을 때˝
이 구절에 꽂혀서 저도 이 시집 꼭 읽어야겠어요!
항상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목련님의 감수성으로 섬세하게 어루만져주시는 따뜻한 글 덕분에 힘이 납니다!^^

자목련 2024-12-15 10:26   좋아요 1 | URL
아마도 다른 시도 많이 꽂히지 않을까 싶어요!
저야말로 이렇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큐브 창비교육 성장소설 13
보린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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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이라는 시간은 딱 1년만 고생하면 다음으로 나갈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고3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스트레스를 동반하지만 이 시간만 지나면 뭔가 다 해결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냥 고등학교 3학년일 뿐인데 말이다. 강원도 고성의 바닷가 마을에 사는 ‘연우’가 어느 날 큐브에 갇힌 설정으로 시작하는 보린의 『큐브』에서도 마찬가지다. 연우도 고3이다.

이유도 모른 채 투명한 정육면체 큐브에 갇혀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지구 둘레를 돌고 있다. 같은 반 친구들은 연우를 찾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다. 연우는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무기력 그 자체다. 잠이 쏟아지고 잠에서 깨면 배가 고프다. 다행인 건 언제나 유부초밥이 있었다. 이상한 건 어디선가 ‘채집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빨간 공, 언제나 같은 자리, 정육면체 한가운데 떠있다. 홀로그램 비슷한 것으로, 연우가 깨어날 때는 투병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모래시계처럼 아래에서부터 빨갛게 차오른다. 가끔 매미 소리를 낸 다음 메시지를 보여 준다. 넌 채집되었다, 근처에 먹을 게 있다, 의식을 통제할 거다, 내용은 딱 세 종류다. 공이 완전히 빨갛게 채워지면 큐브 안팎의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온다. 연우 자신만 빼고. (19쪽)

연우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데 어느 순간 ‘항상성 붕괴……부접합……조사종료……’란 말이 뜬다. 그리고 연우는 다시 교실로 돌아온다. 놀라운 건 연우가 큐브에 갇힌 아니 채집된 시간이 무려 1년이었고 실종 상태였다는 것이다. 돌아온 연우는 일상을 되찾으려 하지만 자신만 빼고 모든 게 달라진 현실을 확인한다. 연우가 좋아하던 해고니는 꿈이었던 서퍼가 아니라 서프 숍에서 일을 하고 다른 친구들도 대학에 갔다. 연우도 대학 입시를 위해 도서관에 다닌다.

연우에게도 변화가 있다. 그건 연우만이 아는 비밀이다. 큐브에 갇혔을 때 채집된 장치와 거기에 복제된 자아인 젤리 곰이다. 작고 귀여운 젤리 곰은 연우가 말을 할 때마다 연우와 같은 목소리로 말을 한다.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 목소리는 진짜 연우의 마음 같다. ‘나는 우연우, 너야’라고 말하는 젤리 곰이라니. 이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조금씩 연우는 또 다른 연우인 젤리 곰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연우는 1년 전 해고니에게 하려 했던 고백을 하지만 해고니는 연우가 고성을 떠날 거라며 받아주지 않는다. 연우는 해고니가 좋아서 고성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 아버지도 예전과 다르게 연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한다. 막연하게 대학에 가려고 했던 마음을 돌아본다. 그리고 해고니가 왜 서퍼가 아니라 서프 숍 직원으로 일하는지 왜 바다를 무서워하는지 알게 된다.

연우는 큐브에서 빠져나왔지만 여전히 갇혀 있었고, 1년이 지났어도 지난여름 교실의 공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때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아무것도 리셋하지 못한 채, 되풀이되는 과거의 한순간 속에 갇혀 있었다.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알지 못한 채, 해고니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던 그때 그 순간 속에. (178~179쪽)

보린의 『큐브』 는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모른 채 대학 입시만을 위해 살아가는 고3의 고민을 SF라는 설정을 통해 보여준다. 연우가 큐브에서 보낸 1년이라는 시간은 인생 전체로 보면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고3이라는 시간도 다르지 않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위한 고민은 1년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니까. 연우 같은 고3이나 청소년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것이다. 여전히 원하는 바를 찾지 못하고 과거의 한순간(큐브)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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