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씩 그런 순간과 마주한다. 이게 진짜 내 생일까 하는 의구심. 그러니까 모든 게 꿈은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든다. 깨어나야 하는 게 깨지 않는 건 아닐까. 자각하지 못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마음. 존재하는 나는 실제인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질 때도 있다. 그래서 꿈을 자주 꾸는 내가 싫다. 어떤 꿈은 너무 잘 맞아서, 어떤 꿈은 너무 무서워서.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유디트 헤르만의 에세이 『말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에세이』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다.


이 책은 시학 강의록으로 쓰기와 말하기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도 있고 유디트 헤르만, 작가 자신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라 할 수도 있다. 하긴 뭐가 중요하겠는가. 읽는 동안 그에게 빠져들었고 나는 이제 유디트 헤르만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어쩌면 나는 이처럼 잡을 수 없는, 몽환적이고 몽환적인 글에 매료되는지도 모른다. 그의 단편집 『레티파크』에서 느꼈던 분위기, 그 소설에서 무얼 말하고 싶었는지 조금 알 것 같고 이 에세이를 통해 모호했던 것들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의 가족, 친구, 지인, 정신분석가, 그가 좋아한 공간에서 보낸 시간, 그곳에서 보낸 여름에 대한 이야기.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과 운명처럼 만난 특별한 이들(선택가족)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 그 모든 것을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정작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우리는 쓰고자 노력하고 쓰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모든 이야기에는 첫 문장이 있다. 책 속 이야기가 시작하는 문장이 아니라, 내 머릿속 이야기가 시작하는 첫 문장 말이다. 가끔은 어떤 이미지 또는 순간, 무언가를 향하거나 무언가에서 떨어지는 시선. 하지만 대개 그것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을 듣고, 불과 몇 초일 뿐이지만 그동안에 명확하고 몸에 바로 와 닿는 감각을 느낀다. (45쪽)


이 에세이는 이상하다. 왜냐하면 모두가 연결돼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것은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이 되기 때문이다. 쓰고 보니 내 글은 멍청하다. 작가에게 연결, 영향, 소설은 당연한 수순이 아닌가. 정신분석가와 작가에게 그를 소개한 친구 ‘아다’와 세상을 떠난 ‘마르코’ 가 에세이를 지배한다고 느꼈다. 그들이 함께 보낸 여름은 자유롭고 명랑하고 선명하다. 여름의 그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을까. 모든 규율은 사라지고 그들만의 규칙으로 채워진 시간들. 아직 읽지 못한 『여름 별장, 그 후』이 더욱 궁금하다. 에세이를 읽기 전 읽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오히려 나는 이후에 읽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정식 분석을 받는다고 하면 상담가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떠오르지만 유디트 헤르만이 들려주는 건 그가 의자에 누워있고 박사는 그 뒤에 서 있는 게 전부다. 대화라기보다는 말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레티파크』의 「꿈」의 모습이다. 에세이에서 상담을 끝낸 후 오랜만에 우연히 그를 만나 나눈 이야기.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자신의 소설을 읽었냐고, 그러니까 단편 「꿈」에 대해서. 『레티파크』 속 정신병원에 입원한 아버지의 이야기 「시」도 마찬가지다. 모두 실제라는 것. 그녀의 아버지가 정신병원에 보낸 시간, 폐쇄 병동으로 아버지를 면회 가던 시절, 그리고 아버지에게 시를 읽어준 일.


아버지는 경제적으로는 무능력한 가장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직장에 다녔고 그녀를 키운 건 할머니였다. 어머니가 벌어온 돈으로 담배, 책, 가구를 사고 그것들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든 아버지. 그런 부모가 고독과 불안을 안겨줬을 건 분명하다. 평생 우울증을 앓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 놀라운 일을 벌인다. 그것은 부모가 살던 거리의 모든 집이 팔렸고 사람들은 이사를 나가고 그녀의 부모가 마지막 세입자였을 때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위해 누군가 이사 온 것처럼 꾸민다. 그러니가 가짜 명패와 희미한 불빛, 발코니의 식물들. 어머니의 안정을 위한 아버지의 아이디어는 다정하고 살뜰하다.


쓴다는 건 결국 나를 꺼내는 일이며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누군가를 향한 애도이자 그리움, 거짓과 진실을 오가는 마음, 왜곡된 기억과 사진으로 남은 선명함 같은. 그게 소설이든 에세이든, 혹은 일기나 메모든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자꾸 ‘말하지 않은’으로 읽은 ‘말해지지 않은’ 것들은 무엇일까? 한 번도 꺼내지 않은 주제일까. 정확하지 않은 기억일까. 아니면 비밀일까.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말, 닫히고 감춰진 말들일지도. 잘 모르겠다. 아니, 영영 알지 못할지도.


어떤 문장은 현실에 너무 가깝다. 그것들은 현실에 속하며, 현실과 분리할 수 없다. 그것들에는 비밀이 없다. 그것들은 명백하고, 진실이며, 이 문장들에는 뒤흔들 것이 없다. 하나의 이야기 안으로 인도하는 문장들은 중간 세계에서 오고, 불투명하고, 해석 가능하고, 바꿀 수 있으며, 이는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세계를, 나의 세계를 이야기를 통해 바꿀 수 있다. (82쪽)


여전히 모르겠고 나는 닿을 수 없다. 다만, 삶을 쓴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라는 사실. 무엇을 쓰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쓰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때로 무의미한 글이 나를 존재하게 만들고 어느 순간 의미 있게 다가오기도 하니까. 말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열리게 되는 순간이 올 테니까. 물론 말해지지 않아도 상관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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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로 이어지는 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 결정된 어떤 일, 어떤 선택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만약에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 앞에 설까 생각하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는 맨 처음이 아닐까. 그럴 수 없기에 그것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일은 수많은 고민과 갈등을 하더라도 단 하나의 선택으로 끝난다. 과거로 돌아가도 그 선택을 할 거라는 알기에, 그게 나라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윤리적 딜레마’란 주제로 김연수와 히라노 게이치로가 참여한 『근접한 세계』를 읽다 보면 누구나 어떤 선택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이는 나만을 위한 선택, 어떤 이는 모두를 위한 선택을 생각할 것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걸 알지만 선택은 책임이 따라오기에 언제나 어렵다. 공익을 위한 제보,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비밀을 공개한 뒤 남은 인생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김연수의 「우리들의 실패」는 그런 삶을 조명한다. 소설은 화자인 기자가 ‘손동하’란 인물을 인터뷰하는 이야기다.

손동하의 선택은 비상계엄 선포, 대통령 탄핵안 가결로 이어졌고 그는 한국을 떠나야 했다. 대의를 위한 그의 선택은 개인의 인생을 포기해야만 가능했다. 모두를 위한 선택이 개인에게도 이로운 일일까. 소설을 읽는 우리는 그의 선택을 지지한다. 선택 밖에 있기에, 선택 안의 그의 복잡한 내면을 모르면서 응원한다. 어쩌면 모르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김연수는 어렵고 주제의 무게감을 내려놓고 한 사람의 선택과 과거의 이야기로 풀어간다. 손동하가 들려주는 그가 어린 시절 만난 소녀의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미래는 가능한가 묻는다. 그렇다면 그의 선택으로 다가올 미래는 어떤가.

삶이란 불확실하지만 분명한 과거가 존재하기에 현재와 미래가 있는 것이다. 결국 미래를 사는 일은 오늘을 사는 일이며 무엇을 선택하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히라노 게이치로의 「우리들의 실패」속 큐레이터 ‘가스미’는 고인이 된 사진작가의 작품 전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고민하고 고민한다. 전시할 작품이 아닌 공개되지 않은 사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고인의 취향이라 할 수 없는 범죄인 사진이었다. 사진작가와 자신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냥 넘어가야 할까. 자신이 알았다고 믿은 모습은 거짓이란 말인가.

사진작가의 아들은 반발한다. 아버지는 죽었고 그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묵인할 수 있다 주장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공론화할 수는 없지만 전시를 강행할 수 없었다. 세상은 모르고 나만 아는 일, 그러니 비밀로 묻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누가 그를 비난할 것인가. 한편으로 이처럼 세상은 모르고 소수만 아는 엄청난 비밀은 얼마나 될까. 시간이 지나 드러나고 밝혀지는 일들 말이다.





왜 그때 그 상자를 열었을까. 다시 그 생각으로 돌아온다. 열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시회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을 텐데. 그런 세계가 어딘가 있다면 지금이 세계의 나를 잃더라도 그곳에 가고 싶다. 하지만 그 세계에서 피해자가 있다는 걸 모른 채 전시회 성공을 기뻐하는 나도,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나도, 내가 되고 싶은 나는 아니다. (「결정적 순간」, 167~168쪽)


예술이라는 주제를 놓고 보면 큐레이터가 조언을 구하고 고민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개인의 일이라면 어떨까. 가까운 이의 비밀, 그러니까 범죄에 관련된 비밀을 알았다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내가 알았던 이가 전혀 다른 이로 존재하는 순간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울까. 한 사람을 아는 일은 현재뿐이 아닐까. 함께 할 미래를 아는 일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한 번 더 살 수 있다면 모든 것은 가능할까. 아니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

뒤에 이어지는 김연수와 히라노 게이치로의 대화는 소설이 어떻게 쓰여졌고 그 과정을 이해하기에 충분하고 대화를 읽고 나면 소설이 더 좋아진다. 두 작가가 소설가로 살아가는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가늠하게 된다고 할까.

저는 그 다정함이 과거의 기록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상상을 통해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미래적 시점’에서 오는 것이라 믿습니다. 운명론의 노예가 아닌 결단의 주체로써 독자에게 인물을 제시하는 것, 그것이 소설가로써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큰 다정함일 것입니다. (김연수, 201쪽)

『근접한 세계』 는 ‘윤리적 딜레마’란 주제로 쓰였지만 김연수의 소설은 미래를 사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최근 그가 가장 주목하는 주제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떠올랐고 가장 최근에 읽은 『겨울 정원』 속 「조금 뒤의 세계」를 생각하면 그렇다. 김연수의 소설을 읽다 보면 지금의 삶을 가만히 생각한다. 나와 연결된 우리가 만드는 미래. 만약에는 불가능하지만 한 번 더 살 수 있다면 우리가 꿈꾸는 미래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진지한 사랑과 격려가 필요하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이토록 평범한 미래」, 34~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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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3-11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어떨까? 궁금했었는데 리뷰를 읽다보니 금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자목련 2026-03-11 11:55   좋아요 1 | URL
나무 님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내가 갖지 못한 어떤 것, 그 능력을 질투한다. 질투는 나의 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를 향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건 꽤 괜찮다. 모방이라는 노력이라는 방향으로 뻗어가거나 수집으로 남기 때문이다. 2월을 기억하고 말하고 쓴 김상혁의 에세이 『그냥 못 넘겼어요』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그의 시집을 읽었다는 게 참 다행이구나 싶었다. 겨우 한 권하지만 말이다. 나만 아는 문장, 나만 쓸 수 있는 무언가를 갈망하던 시절이 있었다. 적극적으로 배우거나 강의를 찾는 대신 그저 읽기에 최선을 다했던 때였다. 그때의 인연은 나에게 시집을 많이 읽으라고 했다. 시집을 모으고 읽으려고 하던 노력도 다 그 인연 덕이다.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할 다짐과 수많은 용기로 채워진 1월과 왠지 모를 설렘으로 기대하는 3월 사이에서 날도 적어 움츠러든 2월이 진짜 나라고 말하는 김상혁 시인의 글은 어떤 꾸밈없이 솔직하다. 부모의 이혼 당시 엄마의 뱃속에 있었던 시인, 아버지는 곧 재혼했으니 아버지와의 시간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 천천히 알아도 좋았을 슬픔은 존재와 동시에 느꼈을지도 모른다. 손에 꼽을 정도의 만남과 함께 한 시간은 그에게 어떤 감각이었을까. 때문에 그는 아들에게 그 사랑을 온전히 전하고 싶었을지도. 어쩌면 이건 나의 오지랖이겠다.


일하는 엄마, 손주를 향한 끔찍한 사랑이나 다정함보다는 자신들의 분노와 고통을 돌본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안에서 자라는 그가 외로움을 친구로 두는 일은 가장 쉽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우울했던 유년 시절 할아버지 방에서 보았던 주말의 영화는 그를 안아주고 달래주었다. 늦은 밤 TV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영화를 보던 그 소년을 상상한다. 우리는 어느 시절 같은 영화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나는 그의 플레이리스트에 겹치는 곡이 있는 독자, 여기 있다고 외친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내가 자주 듣는 노래가 두 곡이나 있다고 말이다. 시인의 플레이리스트가 궁금한가? 궁금하면 『그냥 못 넘겼어요』를 읽어보길.


이렇듯 책이란 참 이상하다. 김상혁이란 시인에 대해 나는 아는 게 없었는데 이제 조금 안다고 할 수 있다. 책에 썼고 그걸 읽었으니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작가가 책에 쓴 모든 게 나에게 흡수되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재밌게 읽었다는 기억으로 남거나 심지어 읽은 기억도 잊게 되니까. 물론 이 책에 대한 기억도 그런 수순을 밟을지도 모르지만 기록으로 남기니 다를 것이다. 그가 즐겨드는 노래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는 것, 그가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은 등단작을 얄궂게 검색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글이 좋아서 가끔씩 저녁이 되면 생각날지도 모른다.





저녁이 우리집 대문을 열고 나를 찾으로 온다. 서서히 다가오는 저녁은 짐짓 엄격해 보이는 표정이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서 밥 먹고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더 놀지 못해 좀 슬프다. 그렇지만 나도 종일 노느라 지쳤기 때문에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며, 실은 매일 돌아가자고 이야기해주는 저녁이 고맙다. 집에 가자고 강권하는 저녁의 얼굴을 쳐다보고, 그 진지하고도 차가운 사랑의 목소리를 들으며, 놀이에 미련이 남아 공터 쪽을 연신 돌아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이 매일같이 찾아온다는 사실이 고맙다. (95~96쪽)


그러니까 ‘저녁’은 김상혁 시인의 고유한 정서 같다고 할까. 그의 시집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에서도 만난 저녁이니까. 어떤 슬픔과 안도가 동시에 전해지는 저녁. 어떤 저녁은 그를 위로하고 어떤 저녁은 그를 더 외롭게 만들고 어떤 저녁은 그를 포근히 안아주었을 것이다.


문득 나의 저녁도 떠올려본다. 빨리 밤이 오기를 바랐기에 저녁은 존재하지 않았던 날들. 나는 왜 그토록 밤을 기다렸던 것일까. 어둡고 짙은 밤의 깊이에 숨을 수 있어서 그랬다. 그 시절의 나는 저녁의 애틋함 따위는 알지 못했다. 오직 밤 만이 계속되기를. 그리하여 끝내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저녁이 있었기에 이런 저녁의 아름다움을 흠모할 수 있다.


저녁은 헤어지기 좋은 시간이다. 지치기도 쉬운 시간이구. 하지만 제 손으로 머리칼을 털며 고갤 숙이고 있는 장면만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런 말도 가능하다. 내가 매일 현관으로 쓰러지며 쏟은 별과 모래를 아침마다 네가 예쁘게 비질한다고. (「가정」의 일부)


『그냥 못 넘겼어요』를 읽기 전 내가 기대했던 2월은 풍성한 꽃다발과 서툰 웃음으로 채워진 사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2월은 각자의 사정과 기억으로 채워진다. 여느 달이 그렇듯 말이다. 누군가의 2월은 쓸쓸하고 누군가의 2월은 분주하고 누군가의 2월은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졸업과 시작으로 이어지던 2월은 없다. 내가 기다렸던 봄 방학을 지금의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계절은 조금씩 다르게 흐르고 열두 달의 의미도 새롭게 변화한다.


시 쓰는 강의에서 만난 천재 수강생이 수업에 나오지 않아 연락했더니 자신의 이름도 정확하게 모르고 있어 씁쓸하지만. 어렸던 자기를 질투하는 귀여운 아들과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냥 개가 된 개와 살아가는 2월의 이야기는 흐뭇한 미소로 끝난다. 마냥 즐겁고 행복해서가 아니라 그 모든 일상이 소중한 풍경이라서. 정말 시의적절하다고 할까. 3월만 기다리지 말고 남은 2월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얹는다. 2월이 있어야 3월이 오고 춥고 변덕스러운 2월이 있기에 그보다 포근한 3월은 폼 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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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에 친구와 나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대화를 나눴다. 그것은 작가 한강에 대해서였다.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은 친구는 책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도 그런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책을 좋아했던가. 모르겠다. 현재의 나는 책을 좋아하고 책을 사들이고 책을 쌓아둔다. 친구는 내게 한강의 책 가운데 『소년이 온다』의 내용이 뭐냐고 물었다. 대표적인 한강의 소설로 가장 많이 언급되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솔직하게 그 소설은 읽기 힘들 거라고 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도 마찬가지라고. 내가 좋아하는 단편집을 추천했지만 친구는 장편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알라딘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려고 하자 친구는 극구 말렸다. 친구에게 책은 도서관에서 빌리는 것이었고 내게는 사는 것이었다. 마침 곁에 둔 『디 에센셜 한강』을 건넸다. 이 책이 정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책을 구매했고 천천히 읽었다. 아니, 게으르게.


나는 한강 작가를 좋아한다. 한강 작가가 무얼 말하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 차분한 슬픔이, 애써 고르고 고른 순수한 언어가 좋았다. 어렵게 다가왔지만 자꾸 그렸다. 어쩌면 그의 소설을 읽을 당시 내 감정과 상태가 그러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여전히 그의 초기 소설을 아낀다. 『디 에센셜 한강』에 수록된 작품은 그런 이유로 읽으면서 조금 울컥했고 많이 아팠다. 어떤 면에서 한강의 소설은 상실과 애도로 가득한 생을 버티고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것 같다. 아니,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강에게 그것은 문학이자 언어였을 것이다. 유일하고 고유한 목소리.


말을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는 남자와의 이야기인 『희랍어 시간』을 다시 읽으며 나는 조마조마했다. 아름답게 보이기만 했던 소설이 아니었다. 처음 읽는 기분이었다. 처음 읽는 기분이 맞을지도 모른다. 한순간 그 삶이 깨질 것 같아서, 무너져내릴 것만 같아서. 그들이 겪는 상실과 고통을 나는 알 수 없으니 느낄 수 없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이 바라는 간절함이 나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서. 절망의 순간을 지나왔다고 여겼지만 여전히 절망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게 부끄러웠다. 말을 잃은 그녀가 시력을 잃은 희랍어 강사의 집으로 돌아와 그를 위해 안경점에 가려는 마음에 안도했다. 그것은 당연한 마음이 아니었기에. 이상한 일이었다. 과거에 옮겨 적었던 문장은 보이지 않았다. 오롯이 두 사람의 실루엣만 내게 들어왔다. 그들의 움직임, 사소한 떨림, 귀 기울이고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몸짓.


그런 기분은 단편소설 「회복하는 인간」과 「파란 돌」을 읽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의 소설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다. 그게 맞았다. 「회복하는 인간」을 읽으면서 이런 내용이었던가. 나는 「회복하는 인간」을 「노랑무늬영원」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육체적 고통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는 마음. 그렇다면 한강이 주목하는 고통은 무엇일까. 내면을 가득 채운 고통은 무엇일까. 인간으로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나 반가운 점도 있었다. 「파란 돌」을 읽으며 한강의 소설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파란 돌」에서 등장한 삼촌의 그림은 『바람이 분다, 가라』에 등장하는 먹그림을 불러왔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강의 「어깨뼈」를 떠올렸다. 한강의 소설 곳곳에서 느껴지는 봄의 기운. 겨울을 견디고 봄을 기다리는 이미지가 한강의 그것은 아니었을까 혼자 짐작했다.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이 가슴으로 올라왔습니다. 가슴뼈 사이 오목한 곳, 어떤 장기도 없는, 그렇게 아파보기 전에는 그런 장소가 몸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곳이었습니다. 당신은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손을 뻗어 내 손을 가볍게 쥐었습니다. 담담하게, 무언가를 위로하듯이. ( 「파란 돌」, 263쪽)





그래, 나는 이런 문장에 반하고 반했었다. 감히 만질 수 없는 감각과 숨죽여야만 들을 수 있는 소리. 그 모든 것은 슬픔에 기반된 것이었다. 그러나 슬픔에 싸였거나 갇힌 게 아니었다. 슬픔과 함께 성장하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눈이 되어 사라지고 말을 잃고 시력을 잃어도 멈출 수 없는 삶은 이어지고 계속된다는 당연하고 당연한 삶의 의무에 대한 위로이자 토닥임이었다. 거대한 역사의 슬픔을 통해서 한강이 전하고 싶은 게 이런 것이었지 오래전 나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부재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나와 우리를 버티게 만드는 그것이었다. 사라졌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지.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어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 때면 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 소리였으면. 처음으로 당신과 나란히 포도(鋪道)를 걸을 때였다. 길이 갑자기 좁아져서 우리 상반신이 바싹 가까워졌지. 기억나? 당신의 마른 어깨와 내 마른 어깨가 부딪힌 순간, 외로운 흰 뼈들이 달그랑, 먼 풍경(風磬) 소리를 낸 순간. (『내 여자의 열매』 속 「어깨뼈」)


『디 에센셜 한강』에서 만난 산문은 정말 처음이었다. 처음이라서 새로웠고 더 깊게 집중할 수 있었다. 작가 한강이 아닌 소녀 한강, 딸 한강, 인간 한강을 마주하는 순간이라고 할까. 피아노를 열망하던 어린 한강을 상상하며 읽은 「종이 피아노」는 비슷한 경험이 있어 더 애틋했다. 딸이 원하는 피아노 학원을 보내주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형편이 나아졌을 때 피아노 학원에 엄마 아빠를 위해 일 년만 다녀주라는 그 마음. 그리하여 중학교 3학년이 되어 다니게 된 피아노 학원의 이야기 「저녁 여섯 시, 검고 긴 바늘」은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언제 기회가 되면 피아노에 대해 말할 수 있기를.


그런가 하면 「여름의 소년들에게」는 『소년이 온다』를 읽기 전이나 읽은 후에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이 책을 읽고 어떤 느낌이었을까. 친구가 궁금해했던 『소년이 온다』를 읽게 될까. 아니면 읽지 못하게 될까. 친구는 한강의 다른 책을 더 읽게 될까. 아니면 멈추게 될까. 다음에 친구를 만나면 우리는 한강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다. 예상하지 않았던 대화지만 예전과 같으면서도 다른 그 무언가에 대해서.


‘언어’라는 나이 불충분하고 때로 불가능한 도구가, 결국은 그것을 읽을 누군가를 향해 열려 있는 통로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마침내 첫 문장을 쓰는 순간, 내는 백 년 뒤의 세계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쓴 것을 읽을 사람들이 거기 아직 살아남아 있으리라는 불확실한 가능성을. (「백 년 동안의 기도」, 340쪽)


저마다 독립적이었다고 여겼던 한강의 소설이 동그라미가 되었다. 동그랗게 커지고 있었다. 내가 만난 소설이 그 동그라미의 일부였고 전체였다는 게 기쁘다. 잘 모르고 끝내 알 수 없더라도 읽을 수 있고 읽는 일이 작가와 나를 연결하는 통로라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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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1-27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희랍어 시간>을 사서 읽었었어요. 참 좋더군요. 그리고 <여수의 사랑>도 좋았구요. 한강의 소설은 애잔하게 아픈 것 같아요. 그래도 어딘가 강한 힘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한강 디에션셜>은 책을 선물해주시겠다고 하셔서 저 책을 선물해주십사. 부탁해서 받은 선물이에요. 아직 읽진 않았지만요.^^˝
제법 많은 목차를 가지고 있군요.
서점을 가면 늘 한 켠에 마련된 한강 작가 코너가 눈에 밟혀 기회가 되면 한강 작가의 소설을 한 권씩 사가지고 와서 수집하고 있네요. 책들이 이쁘니까 자꾸 눈길이 가고, 소설을 쓰는 작가를 상상하며 떠올리곤 합니다.^^

자목련 2026-02-02 15:12   좋아요 1 | URL
<여수의 사랑> 좋아요! <흰>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말씀처럼 한강의 소설은 아프고 슬프고 상처가 가득한데 그 안에서 작은 빛을 발견하고 나갈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서점에 갈 때마다 눈에 밟히는 작가의 책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에요.
 


빈둥거림이 지나쳐서 이제는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바람이 강하게 불고 기온이 영하 저 아래로 떨어지는 날들이다. 몸만 추운 게 아니라 마음까지도 바람이 들이치는 것만 같다. 새해에 맞게 뭔가 새롭게 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은 어디서 오는 걸까. 주변에 뭐라 말하는 이도 없고 눈치를 주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어쩌면 이런 마음은 새해 증후군일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이즈음의 글에는 계획을 세우는 게 세우지 않는 것보다 낫지 않겠냐는 큰 언니와의 대화가 있었다.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는 지금의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계획 없이 사는 나에게, 조금은 계획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지난 계획을 기록한 글을 찾아보니 대단한 게 없었다. 책을 조금 더 읽고 쓰고 친구를 만나는 일, 그게 전부였다. 운동을 하거나 외국어 공부를 하거나 투자를 하거나 하는 건 없었다. 그런 계획을 다시 세워보기로 한다. 읽는 즐거움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책을 고른다. 올해의 첫 시와 첫 책은 이렇다. 조용미 시인의 『초록의 어두운 부분』에서 만난 시, 디디에 에리봉의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책이다.




기이하다 오래전에 나는 당신과 함께 모든 걸 나누었던 것 같다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서로에게 마음을 다했던 것 같다

왜 지금은 이토록 남인가 다른 생을 받으면 이렇게 다시 시작되는가

이전의 모든 생은 분명하고 또 어렴풋하다 모든 생에서 나는 나의 기억과 함께였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런 걸 알 수가 있을까 당신은 지독한 타인이고 다음 생까지는 너무 멀다

언제나 다음 생을 믿을 만큼 나는 어리석었다

여기서 그쳐야 한다 끝이라는 말을 늘 생각한다 끝은 여러 생을 거쳐 행할 줄 모르는 습관이 생겨났다

끝은 끝끝내 오지 않아서 우리는 끝에 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다 끝이 없는 마음이 지옥인데도 죽어도 마음은 끝을 모른다 끝이 저 스스로 죽고 싶도록 아름답게, 처절하게 우리는

(「구제적인 삶」, 전문)


모든 게 불확실하고 모호하지만 구체적인 것들을 생각한다. 하루의 일상, 하루의 시간,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분명하고 명확한 것들을 떠올린다. 하루하루 늙고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다. 나이를 헤아리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 혼자만의 새해 증후군은 조금 더 길어질지 모르지만 제주도에서 온 동백 사진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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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6-01-13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끝은 끝끝내 오지 않아서‘ 결국 오는 순간은 죽음일까요. 동백 사진이 정말 너무 예쁘네요.

자목련 2026-01-14 15:54   좋아요 1 | URL
문득, 죽음을 대면하는 일도 모두에게 주어진 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동백은 직접 보면 얼마나 예쁠까요! 아쉽지만 사진으로 담아준 이가 고맙지요^^

거리의화가 2026-01-14 0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도 글인데 사진이 예뻐서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화사한 색감이 회색 겨울을 날려보내는 것 같은... 추위에 건강 조심하세요^^

자목련 2026-01-14 15:55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예뻐서 자꾸 보고 있어요. 덕분에 마음도 환해지는 것 같고요!
화가 님도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