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서 산타를 꺼냈다. 밤마다 별이 반짝인다. 밤새 켜져 있는 줄 알았는데 몇 차례 시도를 해 본 결과 5시간 켜지고 자동으로 꺼진다는 걸 알았다. 5시간의 기준은 뭘까, 깊은 밤이 유지되는 시간이라는 걸까. 제품을 만든 이만 알 수 있을 터. 누군지 모르는 그는 나처럼 궁금해하는 이가 있다는 걸 알까.


새벽에는 꽤 많은 겨울비가 내렸다. 이제 비는 내렸다 하면 폭우 수준이다. 비가 그치고 한파가 온다는 알림 문자를 받고 나니 겨울의 추위를 실감한다. 12월이니 이 추위는 하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중수, 고수의 추위가 남았다는 말이다.





책과 커피를 샀다. 정확하게는 소설과 커피를 샀다. 최은미의 짧은 소설 『별일』, 과 정이현의 단편집 『노 피플 존』이다. 오랜만에 마음산책 짧은 소설을 만나고 정이현의 소설은 특히 더 오랜 만이다. 원두를 가는 일이 귀찮아서 핸드드립으로 구매했다. 원두를 가는 건 나보다 작은언니가 많이 하지만. 알라딘에서 출시되는 원두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지만 먼저 마셔본 이들 덕분에 선택은 어렵지 않다. 땡스투는 오늘도 새로운 커피와 함께 오늘도 반할 리뷰를 쓰신 그분에게!


산타의 웃는 모습을 보면 나도 웃게 된다. 인위적인 웃음이지만 미소는 언제나 좋다. 택배 상자를 열자마다 퍼지는 커피향은 더 좋다. 맛을 보면 좋음이 더 커질 것이다. 소설도 그렇겠지 기대한다. 최은미의 아주 짧은 단편과, 정이현의 적당한 단편이 들려줄 이야기. 겨울을 함께 보낼 친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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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 2025-12-11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향이 여기까지 전해져 오는 듯 합니다. 맛과 향이 잘 어우러진 독서 커피 되셔요~^^

독서괭 2025-12-11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산타 푸근하고 예쁘네요~ 성탄절 분위기 확 납니다^^
 


책장의 시집을 정리했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읽지 못하는 미안함이 아니라 그 마음이 허영이라는 걸 깨달아서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한 시들, 읽고 싶을 때 읽어야지 하며 쌓아둔 시집들은 그 마음의 결과였다. 물론 계절마다 떠오르는 시집이 있고 시가 있다. 좋아하는 단어가 등장하거나 좋아하는 것들이 나오면 더 찾아서 읽기 마련이데, 그러다 보니 어떤 시집은 하나의 시만 읽고 나머지 시들은 읽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박준의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도 꼼꼼하게 읽지는 않았지만 이번 시집에는 유독 짧은 시들이 많았고(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제목 때문인지 아쉬운 느낌이 있었다. 누군가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것이 시인의 것일지도 모르지만. 가만가만 그 일상을 따라가다 마주한 상실과 슬픔은 박준의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라는 걸 확인한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에 대한 소회는 그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기억하라고 한다. 처음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읽는 시가 지독하게 쓸쓸하고 외롭게 다가오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해가 지면

책도 그늘이 됩니다

두어장씩

넘겨가며 읽었지만

이야기 속 인물들은

아직 친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호숫가 마을에

막 도착한 대목에서

책을 덮습니다

귀퉁이를 잇새처럼

좁게 접어둡니다

바람이 크게 일고

별이 오르는 밤이면

우리가 거닐던 숲길도

깊은 속을 내보일 것입니다

(「소일」, 전문)





올해는 비가 잦습니다

서쪽 마을에서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습니다

버린 기억을

테두리처럼 두른 것이

제가 이곳에서

한 일의 전부입니다

끝을 각오하면서도

미어짐을 못 견디던 때였고

온전히 가져본 적 없어

손에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한움큼씩

쥐고 보던 시절이었습니다

틀림없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싶으면

일단 등부터

지고 보는 버릇도

이즘 시작된 것입니다

(「은거」, 전문)

책을 읽다 멈추고 잦은 비를 바라보며 걱정하는 일상은 우리가 보낸 지난여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건 얼마나 큰 위로인가. 박준의 시가 닿는 곳에는 그런 다정함이 있었다. 그러면서 그런 다정함과 그 뒤에 감춰진 고단함을 생각한다. 나는 가늠할 수 없는 어떤 것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이나 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들.

유월과 칠월을 지나는 동안에는 쌀을 두컵씩만 씻었습니다 그 사이 뜨물 같은 마음도 생겨 아득한 것마다 가까이했습니다 움켜쥐면 적은 듯도 했지만 반듯하게 펴면 이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아래 흰빛」, 전문)

자꾸만 ‘미음’을 ‘마음’이라 읽는 건 왜일까. 끓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걸까. 그러면 끓이면 그 마음은 뜨거워질까, 아니면 끓이다 보면 증발하는 것일까. 아니다, 모든 건 다 제목 때문이다. 엉켜 붙은 어떤 마음, 자꾸만 꿈에 보이는 누군가를 떨쳐버리고 싶은 내 마음. 그 모두와 이별해야 한다. 마중도 배웅도 없이, 완벽하고 완전하게.

미음을 끓입니다 한 솥 올립니다 회회 저으며 짧게 생각합니다 같이 사는 동안 보여주지 못한 나의 수선이 어른거립니다 이내 다시 되작거립니다 체에 밭쳐둡니다 아시겠지만 진득하게 남은 것은 버려야 합니다 묽어져야 합니다 고개를 파묻습니다 나는 아직 네게 갈 수 없다 합니다 (「마음을 미음처럼」, 전문)

시집을 읽다 보면 솟구치는 욕망. 시집을 더 읽어야 한다는, 더 갖고 싶다는 허세가 커진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것들을 다스릴 줄 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11월의 마지막 날, 박준의 시를 읽다가 엉뚱하게 허연의 시를 찾는다. 11월의 시가 아닌 시월의 시. 이번에는 ‘시월’ 대신 ‘십일월’을 넣어서 읽는다. 이별하는 시간이다.

이별하는 것 말고 다른 것도 할 줄 아는 사람은 시월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병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하는 단풍잎. 영혼이 빠져나가 파삭거리기만 하는 풀밭, 초속 오 센티미터로 떨어지는 마지막 열매들. 죽은 새끼들을 낙엽에 묻고 날아가는 새들. 그리고 흙장난하는 아이들 이마에 불어오는 사연 많은 바람. 시월엔 가득 찼던 것들과 뜨거워졌던 것들이 저만치 떠날 짐을 꾸린다. 그걸 알아챈 추억들도 남쪽으로 가고. 시월엔 이별이 전부다. 시월은 이별밖에 할 줄 모른다. 시월에 무릎을 꿇는 이유다. 세상엔 만남의 몫이 있는 만큼 헤어짐의 몫도 있어서 이토록 서늘하다. (「시월의 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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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11-3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해주신 시들이 참 좋네요. 지금의 정서와 맞물려 곱씹게 됩니다. <시월의 시>가 특히 와닿네요.

자목련 2025-12-03 15:18   좋아요 0 | URL
허연 시인의 이번 시집<작약과 공터>의 시들이 참 좋아요^^

구단씨 2025-11-30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에 시집을 종종 사곤 했는데, 이제는 사지 않게 되더라고요.
거의 다 읽지 않게 되고, 다시 펼쳐봐야지 하는 다짐은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요.
근데 또 이상하게도 요즘 시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요즘 세계문학을 정리하고 있어요.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사서 채워넣었던 것들이 이제는 정말 장식으로만 머물고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이제 다가올 내일, 12월은, 2025년과 헤어지는 시간이겠네요.

자목련 2025-12-03 15:20   좋아요 0 | URL
좋아하는 시집, 좋아하는 시만 남기려고 하는데 그게 또 어렵네요 ㅎㅎ
저도 읽지 못하는(아니, 읽지 않는) 세계문학도 정리할 예정입니다.

12월 따뜻하고 건강하게 이어가세요^^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 내가 사는 지역에 첫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첫눈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첫눈이 오면 올해의 가을과는 완전히 작별하고 겨울을 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첫눈보다 먼저 김장이 김치냉장고에 안착했다. 항상 김장을 하시면 챙겨주시는 장로 님 덕분이다. 배추김치, 파김치, 총각김치, 섞박지까지 다양하다. 무를 좋아하는 나는 총각김치와 섞박지가 빨리 익기를 기다린다.


겨울이 되니 김장을 담기 위해 배추와 무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뒤늦게 고춧가루의 가격도 걱정된다. 김장을 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친구의 어머니가 담그시는 김장이 줄었으면 싶고, 다른 친구의 어머니가 사시는 절임배추가 괜찮았으면 좋겠고 올케언니가 김장을 담글 때 오빠가 많이 거들어주기를, 언니네 김장을 도와주러 가는 친구가 해야 할 일이 많지 않기를 바란다.


가을의 열매로 식탁 위에는 감과 귤이 가득하다. 베란다에 가지런히 익어가는 대봉과 아침마다 깎아먹는 단감과 귤들. 이 모든 일상이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도 같을 거라 확신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갑자기 허리가 아파서 꼼짝도 못 하는 작은언니를 보면서도 그랬다. 하루아침에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고 괜찮아졌다고 말하지만 아닐 것이다. 어제와 똑같은 일상은 얼마나 축복인가. 반대로 달라지고 싶은 간절한 이에게 어제와 똑같은 일상은 얼마나 저주스러울까.





지나치게 극단적이지만 우리는 축복과 저주, 그 어딘가를 살아간다. 우선은 축복을 생각하며 김연수와 황정은의 소설을 읽는다.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수상작보다 황정은의 단편을 『2025 제19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도 마찬가지로 김연수의 단편을 먼저 읽는다.


내린다는 첫눈이 내리면 그 모습을 가만히 볼 수 있는 순간이면 좋겠다. 온다는 첫눈이 오면 반갑게 맞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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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25-11-18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두 권을 함께 샀어요. 따라읽겠습니다

자목련 2025-11-21 09:52   좋아요 0 | URL
나란히 놓인 두 권을 상상합니다. 함께 읽는 일, 좋아요!

페넬로페 2025-11-18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월31일, 일요일
날짜도 또렷이 기억나네요.
그 날 갑자기 허리가 삐긋해
2주동안 꼼짝도 못했어요.
병원에 입원해 mri찍고
혹시 모를 병이라도 있으면 수술까지 각오했었는데 다행히 증상은 없었어요.
주사맞고 약 먹고 물리치료하고 ㅠㅠ
정말 갑자기 아프더라고요.
한 번 아프니 모든 것이 힘들어 밖에서 전쟁이 나도 상관없겠더라고요.
자목련님께서도 책 많이 보시고 글 쓰니 앉아있는 시간이 많으니
허리 정말 조심하시길요^^

자목련 2025-11-21 09:56   좋아요 1 | URL
2주 동안 입원도 하셨군요. 아픈 경험은 정말 무서워요.
근데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고 몸을 혹사하지요.
몸을 달래고 돌보며 살아야 하는 시간라서는 조금 서글프기도 하고요 ㅎㅎ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blanca 2025-11-18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정말 바람이, 손이 시려웠어요. 김유정 문학상은 사지 않아서 김연수의 단편은 자목련님 얘기로 들을게요.

자목련 2025-11-21 09:59   좋아요 0 | URL
겨울이 가을을 밀어내고 있는 것 같아요.
김유정 문학상, 즐겁게 읽어보겠습니다!

바람돌이 2025-11-18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정은작가님 에세이말고 소설집 나온지 꽤 오래되어서 이제쯤 나오지 읺을까 기다리는데 말이죠. 아쉬운대로 이 책ㅂ 터 읽어야할까봐요

자목련 2025-11-21 10:00   좋아요 0 | URL
저도 소설집 기다리고 있는데 소식이 없네요. <작은 일기>에서 언급한 단편이 이 단편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책읽는나무 2025-11-19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 열무를 얻어버려 알타리무 김치를 담궈뒀어요. 양념만 만드는데도 하루가 소비되더군요. 그리고 밤엔 김승옥 수상 작품집을 한 편씩 읽었더랬죠. 왠지 김승옥 수상 작품집 책을 떠올릴 때면 김장 이야기와 황정은 작가님과 김연수 작가님이 떠오를 것 같아요. 그리고 눈 이야기를 읽다 보니 최은미 작가의 <김춘영>도 떠오를 듯도 하구요. 거기에도 눈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자목련 2025-11-21 10:02   좋아요 1 | URL
나무 님이 담근 알타리무 김치는 얼마나 맛있을까요!
단편을 읽는 가을밤, 낭만적입니다. <김춘영>은 아직인데, 어떤 눈을 만날까 궁금하네요^^
첫눈이 내렸다는데 저는 못 봐서 소설에서 마주해야겠습니다^^

꼬마요정 2025-11-20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지난 주에 감을 따고 왔네요. 이제 나이가 많은 감나무는 많이 버거운지 작은 감들만 열려 있더라구요. 귤도 주문해서 벌써 10키로를 먹어치웠습니다. 추운 날씨는 싫지만 겨울에 먹을 수 있는 과일은 좋군요. 김유정 문학상은 저도 받았답니다. 이번에 책이 예뻐요^^

자목련 2025-11-21 10:07   좋아요 1 | URL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면 감 따는 일은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귤은 정말 빨리 사라져요.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과일, 더 맛나고 특별하네요^^
김유정 문학상, 즐겁게 읽으세요!

yamoo 2025-11-21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탁 위에 감과 귤이 가득하다니...참으로 풍요롭네요..
책상 위 책과 커피 한잔 그리고 귤...늦가을의 고즈넉한 청취가 묻어나는 사진입니다. 차분하고 좋네요^^
저는 한국소설 대신 트레버 소설을 올려놓고 싶은 계절입니다..ㅎㅎ

자목련 2025-11-26 08:44   좋아요 0 | URL
풍성한 시골 인심 덕분입니다. 지금은 식탁이 깨끗하고요 ㅎㅎ
 


더디게 읽고 있다. 읽고는 있으니 다행이다. 짧은 가을은 하루하루가 아쉽게 흐른다. 맑고 높은 가을 속 흰 구름은 기량을 뽐내기느라 바쁘다. 작정하고 고개를 들어보면 풍덩 하늘 바닷속으로 빠져든다. 눈 닿는 동네 산에는 아직 단풍을 찾기가 어렵다. 아파트 단풍나무만 곱게 물든 모습이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레몬빛을 닮은 모과를 보는 일도 즐겁다.


밤에는 보일러를 돌리기 시작했다. 물 온도를 가을로 변경했다. 그 차이를 잘 모르겠지만 보일러는 계획이 다 있겠지. 보일러에 주황빛 불이 들어오면 그 순간부터 보일러는 일을 한다. 그 순간을 위해 보일러는 기다리고 기다린다. 어쩌면 보일러는 오매불망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능을 가진 물건은 그 자체로 든든하기 보다 기능을 보여줄 때 던 든든하니까.






더디게 읽고 있는 책도 그런 마음일까. 나를 읽어줘, 나를 만져줘, 나를 돌아봐 줘. 그런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쌓아두고 북엔드에 세워둔 책만으로 나는 기분이 좋은데 책의 마음은 다를지도. 조금 더 세심하게 책의 마음을 들여다봐야겠다.


10월에 읽겠다고 구매한 책이지만 11월에 읽게 될 것이다. 좋은 책은 좋은 이웃님 덕분에 알게 된다. blanca 님 덕분에 이 두 권의 책이 나왔다는 걸았다. 김연덕이 쓴 10월 이야기 『아오리 아니고 아오모리』, 유디트 헤르만의 『말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에세이』를 땡스투와 함께 구매했다. 제목을 보자 마자 이책이구나 싶었던 책은 하재영의 『지극히 나라는 통증』를 이제 읽으려 한다. 세 권의 책이 도착했을 때 기쁨을 떠올리며 말이다. 그리고 곧 김연수와 황정은의 단편이 수록된 책도 구매할 것이다. 10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더딘 속도보다 조금 빠르게 읽고 있는 책을 마무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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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10-31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울대는 빛그림자 속에 들어있는 책이 아늑해보여요.
올해는 가을이 짪은 것 같아 아쉬워요.
벌써 롱패딩을 입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저는 난방 돌아가는 소리가 돈으로 들리는데 자목련님께서는 주황빛 불의 오매불망 기다림이라고 표현하시다니~~
역시 시인이십니다^^

자목련 2025-11-04 10:27   좋아요 0 | URL
너울대는 빛그림자를 좋아해요. 그래서 그 순간을 가만히 볼 수 있는 순간은 행복해요.
가을이 짧아서 아쉽지만 겨울에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으니 곧 겨울을 기대할 것 같아요.
쌀쌀하니 감기 조심하시고요!

망고 2025-10-3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빛 속 책탑이 고요하고 예뻐보여요😍

자목련 2025-11-04 10:29   좋아요 0 | URL
책탑은 언제나 예쁘죠. 김연덕의 표지는 더욱 그렇고요^^

blanca 2025-10-31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하루가 너무 아쉬운데 또 여기에 걸맞는 작가들의 이야기가 계속 나와줘서 따라 읽기 바쁘네요. 오늘 보니 단풍이 와, 감탄 나올 정도더라고요.

자목련 2025-11-04 10:3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예상하지 못했던 작가의 이야기를 만나는 일은 깜짝 선물 같아요^^
단풍을 보는 일, 가을의 특권이에요!

책읽는나무 2025-11-01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빛이로군요.
가을에 걸맞는 책들.
저와도 겹치는 책이 보입니다.^^
가을빛 같은 가을 날들이 이어졌음 좋겠네요. 자목련 님께.^^

자목련 2025-11-04 10:32   좋아요 1 | URL
나무 님과 겹치는 책이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에요!
환한 가을을 안온하게 보내시고요^^

yamoo 2025-11-0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일 더디게 읽고 있습니다..ㅎㅎ
오늘 산 책은 언제 읽을 지 몰라요..ㅎㅎ
간혹가다 바로 읽을 책을 구매하기는 합니다. 그런 책은 구매해서 바로 읽어요. 그 외에는 기약이 없어요..ㅎㅎ

자목련 2025-11-04 10:3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오늘 산 책은 오늘 산책의 기쁨으로, 언제 읽을지는 몰르고요~~
 


삶의 어려움이 표출되기까지 그것은 조용하게 움직인다. 아무도 모른다. 안간힘을 쓰느라 애쓰고 있다는걸. 그런 삶을 알고 경험한 이만이 한눈에 포착할 수 있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놀라는 이유가 그것이다. 어떻게 그녀는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을까. 그럼에도 이토록 아름다운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짧은 분량의 단편 소설집 『너무 늦은 시간』 을 읽으면서 안감힘과 고요함이 동시에 몰려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슬픔이고 절망이며 어떤 결단과도 같은 것이었다.

표제작 「너무 늦은 시간」이 제일 좋았다. 좋았다는 건 강렬했다는 것이다. 평범한 보통의 일상을 무심하게 전개하는 동시에 그 안에 담긴 함축적인 메시지. 주인공 남자 카헐의 행동을 묘사하며 그를 향한 동료의 시선과 걱정은 단순한 배려의 태도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키건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여성 혐오와 차별이다. 카헐의 결혼이 왜 파탄 났는지 그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말이다. 끝내 카헬은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할 것이다. 알게 되더라도 제목처럼 너무 늦게 알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희생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등한 관계가 필요하다는걸,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예의라는 걸 그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가족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억울하다 말할지도 모른다. 가족 모두가 식사를 하는 시간, 어머니의 가사 노동이 당연하다 여기더라도 어머니가 자기 접시를 들고 자리에 앉으려 할 때 발을 거는 남동생, 그걸 보고 웃는 아버지. 그런 집안에서 보고 배운 대로 그는 살아왔으니까. 카헐은 아버지가 웃지 않았더라면, 그런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생각하며 안타까워하지만 그건 핑계에 불과한다. 변화하려는 노력은커녕 자신이 그들과 같다는 걸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카헐은 연인 사빈이 준비하고 만든 음식은 맛있게 먹으면서 배번 음식 재료 값이 아깝고 설거지가 많다고 잔소리를 늘어놓고 사빈이 지갑을 놓고 와서 대신 계산을 한 것을 기억하고 생색을 내는 남자다. 사빈에게 고마운 마음은 전혀 없는 그 모든 게 당연한 남자. 결혼 준비 중 결혼반지 사이즈 조정을 위해 비용을 지불해야 할 때도 돈이 아깝다 말하며 화를 낸다. 이런 남자랑 결혼을 찬성할 이가 누가 있을까. 사빈의 결정은 옳은 일이고 현명했다.

타인의 상처와 슬픔에 대해 관심 없고 무지한 이기적인 카헐을 보면서 상실과 절망을 온몸으로 경험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펄롱이 떠올랐다. 마침 영화를 보기도 했다. 카헐의 대척점에 있는 이가 펄롱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에 대한 연민, 고통을 나누려 애쓰는 마음은 경제적 부유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그가 자신 선함, 삶에 있어 중요한 것들에 대한 생각들. 아픈 이들을 위한 연대와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펄롱은 그걸 해낸 사람이다. 수녀원에서 만난 소녀를 지나치지 않았다. 이름을 물었고 도움을 주려 했다. 늘 거기 있으니까란 말이 이렇게 따뜻하고 힘이 있던 말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내 이름은 빌 펄롱이고 저기 부두 근처 석탄 야적장에서 일해. 무슨 일 있으면, 거기로 찾아오거나 아니면 나를 불러. 일요일만 빼고 늘 거기 있으니까.” (『아처럼 사소한 것들』, 82쪽)

키건은 카헐과 펄롱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지만 그 방법을 달리했다. 카헐 개인의 문제를 여성 혐오로 이끌어냈고 수녀원의 소녀를 돕는 펄롱의 모습으로 잘못된 사회 규범을 고발한다고 할까. 놀라운 통찰력은 키건 고유의 아름답고 비범한 문장으로 그려낸다. 「너무 늦은 시간」의 첫 문장처럼 말이다. 고요할 정도로 차분해 강한 울림으로 남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그런 이유로 키건의 소설은 두 번 읽게 된다.

얽히고설킨 인간의 싸움과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날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대체로 매끄럽게 흘러갔다. (「너무 늦은 시간」, 12~13쪽)

두 번째 단편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에킬섬 하인리히 뵐 하우스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정된 여성 작가의 이야기다. 혼자만의 시간, 자신만을 위한 공간에서 글을 쓰려는 순간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상대는 독문학 교수라며 집을 둘러보고 싶다고 말한다. 집 앞에 와 있다고. 무례한 남자에게 여성 작가는 저녁에 다시 오라고 전한다. 그러면서 손님을 위한 케이크를 준비한다. 남자는 대접받은 차와 케이크를 맛있게 먹으면 글을 쓰지 않고 케이크나 굽는다며 여성 작가를 가르치려 한다. 생전 처음 보는 여성 작가에게 권위를 내세우며 무시하는 태도에는 여성차별이 깔려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어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는 남자의 표본이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마지막 단편 「남극」은 추리나 스릴러 소설처럼 보인다. 남편과 아이가 전부였던 여성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간 도시에서 벌어진 이야기. 술집에서 만난 낯선 남성과의 하룻밤은 일탈이 아니라 가장 위험한 일이었다. 남편과 다르게 세심하고 친절한 남자. 그 끝엔 무엇이 있을까.

체로 매끄럽게 흘러가는 삶의 이면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불편한 진실은 소설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에도 여전하다는 걸 키건은 말한다. 그녀만의 시선과 방식을 세상을 향해 계속 외친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까지. 한쪽이 사라질 때까지.

우리가 아는 것, 항상 알았던 것,

피할 수 없지만 받아들 수도 없는 것은

옷장만큼이나 명백하다.

한쪽은 사라져야 한다.

필립 라킨, 「새벽의 노래 Aub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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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0-29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헐 같은 남자와 결혼하는 게 쉽지 않을 듯 보이네요.ㅠㅠ

자목련 2025-10-30 12:22   좋아요 0 | URL
그쵸, 완벽하게 변하지 않는 한 어려울 것 같아요.

책읽는나무 2025-10-30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건의 소설은 참….대단한 내공인 듯 합니다.
무조건 좋아요.^^

자목련 2025-10-31 09:42   좋아요 0 | URL
얼마나 많은 시간 공들이고 연습했을까, 저도 무조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