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모두 늙는다. 병들고 아프다. 어떤 부모는 자식에게 미안해서 병을 숨긴다. 어떤 부모는 자식에게 당당하게 간병을 요청한다. 초고령 사회에서 늙은 부모를 돌보는 일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아픈 부모를 홀로 간병하고 돌보다 발생한 사건에 놀라지 않는다. 개인의 희생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라는 걸 알지만 뚜렷한 해결 방안은 없다. 가족이 모두 매달려 간병을 하다 지쳐 마지막으로 시설을 선택한다. 그나마 경제적으로 여유가 되는 경우에 가능한 일이다. 부모만 늙는 게 아니다. 우리는 모두 늙고 간병과 돌봄은 곧 모두에게 닥칠 일이다.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문미순의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를 읽으면서 친구들의 걱정이 스쳐 지나갔다. 부모님 두 분이 살아계시지만 언제 어떻게 병원 신세를 질지 몰라 무섭다고. 나 살기도 바빠 간병은 엄두도 나지 않고 병원비도 생각하면 벌써부터 걱정이라고.


소설은 엄마가 돌아가신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곧 등장해야 할 장례식장의 풍경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 이 소설은 좀 이상하다. 치매의 엄마는 죽었지만 연금이 들어왔고 딸 명주는 엄마의 죽음을 숨기기로 결심한다. 명주는 작은방 관에 죽은 엄마의 시신을 넣고 살아간다. 그게 가능하다고?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독사가 늘어나고 이웃 간의 왕래가 적은 사회에서는 놀랄 일도 아니다.


명주에게도 사정은 있다. 이혼 후 생계를 위해 일하다 발에 화상을 입었고 심각한 후유증으로 일 자리를 구하기 힘들다. 그런 명주에게 엄마가 간병을 제안했다. 엄마의 연금으로 생활한 명주에게 엄마는 살아있어야 했다. 다행히 아무도 엄마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단 한 사람, 옆집 청년만 빼고. 명주에게 아는 척을 하고 할머니 안부를 걱정하는 청년 준성이 문제였다. 물리치료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준성은 집에서 아버지를 간병하고 야간에 대리운전을 한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명주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준성은 한 번씩 반찬을 나눠주시던 할머니가 궁금했다. 할머니 딸인 게 분명한 명주는 시원하게 답을 하지 않았다. 그게 전부였다. 할머니가 걱정되었지만 준성에겐 아버지 하나로 벅찼다. 준성이 고등학생 때부터 뇌졸중을 앓았고 지금은 알코올성 치매까지 있다. 형은 빚만 남기고 외국으로 떠났고 준성은 가장이 되었다. 바로 옆집에 살지만 서로의 사정을 알 길이 없었다.


명주는 딸 은진이 찾아오기 전까지 엄마의 시신을 매장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혼 후 엄마와 살던 은진은 고등학교 때 사고를 치고 아빠의 집으로 들어갔다. 사고 수습은 모두 명주의 몫이었지만 하나뿐인 딸에게 마음이 늘 약했다. 대학을 졸업한 은진에게 좋은 엄마이고 싶었던 명주는 외할머니에 대해 꼬치꼬치 묻는 은진이 모든 걸 알게 될까 겁이 났다. 은진은 외할머니의 시골집을 찾아냈고 그걸 빌미로 돈을 요구했다.





명주는 엄마를 시골집에 모시기로 결정하니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그런 명주 앞에 손에 피를 묻히고 준성이 집에서 뛰어나왔다. 준성과 함께 들어간 집에는 준성의 아버지가 피를 흘린 채 누워있었다. 준성은 외제차 대리운전을 하다 사고가 났고 집에 불이 나서 아버지는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수리비와 병원비는 준성이 감당할 수 없어 아버지를 집에 모실 수밖에 없었다. 예전과는 다른 수준의 간병이었고 아버지를 목욕시키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명주는 담담하게 자신의 집으로 준성을 데리고 와 죽은 엄마의 관을 보여주고 준성에게 제안한다. 모든 건 다 자신이 할 수 있고 두 분을 시골집에 매장하자는 계획을 들려준다. 이삿짐을 옮길 트럭을 빌리고 운전은 준성이 하면 된다고.


품위 있는 삶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생존은 가능해야 하지 않겠어? 나라가 못 해주니 우리라도 하는 거지. 살아서, 끝까지 살아서,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하는지 보자고. 그때까진 법이고 나발이고 없는 거야. (218쪽)


50대의 명주와 20대의 준성의 연대는 서로의 사정을 잘 알기에 가능하다. 가족을 돌보는 어려움은 물론이고 육체적 경제적 한계로 보이지 않는 미래와 허방을 딛는 것 같은 삶을 끝내고 싶은 간절함. 서로를 위로하고 안아주고 싶은 마음 말이다.


문미순의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그런 간병과 돌봄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가장 깊숙하게 파고든다. 돌봄 노동의 피상적인 면이 아니라 진짜 이야기. 둘러보면 내 주변의 지인이 겪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생하다. 그래서 몰입하게 되고 한 편으로는 두려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부모와의 이별은 가까이 다가온다. 조금 더 미루고 싶은 마음과 병든 부모와 살아가는 시간이 막막하다. 가정의 달이라는 5얼에 너무 빨리 떠난 부모가 그리우면서도 아빠나 엄마가 오랜시간 병상에 있다고 생각하면 무서운 게 사실다.


늙고 병든 부모를 외면하고 돌봄을 다른 형제에게 미루고 마는 현실. 류현재의 소설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에서 “나한텐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게 가족이에요. 가장 질진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이 가족이라고요!”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 194쪽)외침은 가장 솔직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우리는 이런 가족이 되었을까. 누구의 잘못일까. 긴 병에 효자없다는 속담은 긴 병은 사회가 함께 돌봐야 한다로 바뀌어야 한다.


가족을 돌보느라 희생하고 정작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한 여성의 삶을 들려주는 김유담의 소설집 『돌보는 마음』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돌봄은 여성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돌봄 노동의 비용에 대해서도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부모를 간병하고 돌보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이제 정말 정부와 사회가 나서야 할 차례다. 아픈 가족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함께 돌보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내일을 기다리고 미래를 꿈꾸는 일이 당연한 일상이 되고. 명주가 살고 싶은 이유가,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는 일이 죄가 되지 않도록.


자신이 원한 것은 그저 한 끼의 소박한 식사, 겨울 숲의 청량한 바람, 눈꽃 속의 고요, 머리 위로 내려앉는 한 줌의 햇살, 들꽃의 의연함, 모르는 아이의 정겨운 인사 같은 것들이었다. 자신이 아직은 더 보고 싶고 느껴보고 싶은, 아직은 죽지 않고 살고 있고 싶은 이유였다.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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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5-09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가 외면하고 싶지만 결국 우리 본인이 당사자가 될 일인 것 같아요. 공감이 많이 갑니다.
 


주문한 작약이 도착했다. 해마다 작약을 주문하는 일은 새해 소망 리스트 같은 것이다. 새해를 기다리며 하고 싶은 목록을 작성하지 않는다. 기대를 품지 않는다. 하지만 작약은 다르다. 3월부터 나는 작약을 검색한다. 적확하게는 작약 생화. 그리고 기다린다.


작약을 기다린다. 나는 작약이 좋아서, 작약을 기다리는 4월이 좋고, 작약을 만나는 4월과 5월이 좋다. 올해의 작약은 작년보다 비쌌다. 구매 기록을 살펴보니 그렇다. 월급을 뺀 나머지가 다 오르니 당연하다. 코랄 작약 주문이라고 다이어리에 메모를 했지만 코랄 작약은 구매할 당시 품절이었고 나는 핑크를 주문했다.





그냥 좋다. 작약은 그냥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마구 찍는다. 꽃이 피기 전 이런 봉오리는 설렘 그 자체다. 하루 사이에 마구 피어나는 작약. 수요일에 만난 작약은 이틀이 지난 지금은 만개했다. 벌써부터 아쉽다. 풍성한 작약을 보고 있노라면 부자가 된 기분이다.






5월이니 새 책도 주문했다. 박세미의 신간(나, 박세미 좋아하나?)이다. 난다의 시의적절은 매달 구매하지는 않고 끌리는 제목이나 저자를 선택하는데 이번 5월은 박세미의 『11시 14분』였고 나는 냉큼 주문했다.






그리고 이런 시집을 펼친다. 작약이니까. 이승희의 시집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속 이런 시를 읽는다.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모른다고 종일 속삭인다

속삭이면서 발을 내어놓는다

발을 내어놓으며

맨발이라고 했다

참 따뜻한 발을 가졌으니

예쁜 모자가 어울릴 거야

그런 세계를 보게 되면 초대할게

모르는 세계는 그런 거니까

어긋나는 게 생활이야

어긋날 수 있다니

어긋나기 위해 사는 거라니

넌 정말 위대한 건축가가 되고 싶구나

자꾸 죽는 것과 자꾸 사는 것이

서로 좋아해서

물고기떼처럼 흘러가는 세계

그런 세계는 잘 모르지만

몇 번 죽으면 갈 수 있을까

나를 아주 가끔만 안아주는 사람이 있었어

안으면서도 몰랐고

몰랐으면서도 안았고

흩어지는 온도를 기록해보고 싶었는데

모르는 것이 생겨날수록

더 아름다워져야 했어

그냥 우리는 모르는 일에만 열중하자

모르는 것들 사이로

모르는 것들 조금씩 박아넣으며

모르는 것들을 낳을 때까지 (「정원을 파는 상점」, 전문)




5월은 작약과 시와 함께 시작한다. 활짝 핀 작약이 져도 5월은 작약으로 남을 것이다. 시를 다 읽어도 시를 다 읽지 못해도 5월은 이승희의 시로 기억될 것이다. 박세미의 책을 읽는 시간으로 채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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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5-02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사하고 은은하네요. 왠지 자목련님도 그런 분 같은... ㅎ

자목련 2025-05-07 10:52   좋아요 0 | URL
올해 작약은 더욱 은은한 것 같아요. 저는 그렇지 않지만요 ㅎㅎ

독서괭 2025-05-02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도 자목련님의 작약이^^ 넘 아름답네요 색도 은은하니 예쁩니다. 시도 좋고요~ 작약과 함께 향기로운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5-05-07 10:52   좋아요 1 | URL
작약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독서괭 님, 신나고 푸르른 5월 보내세요^^

다락방 2025-05-02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작약 검색해봐야겠어요.

자목련 2025-05-07 10:53   좋아요 0 | URL
작약, 강추합니다!!

레삭매냐 2025-05-02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약의 계절이네요.

저희 동네 곳곳에 작약이 올라
오고 있어서 기대 만빵입니다.

라일락 향기도 아주 그윽합니다.

자목련 2025-05-07 10:53   좋아요 0 | URL
작약을 볼 수 있는 동네, 부럽습니다!

서곡 2025-05-02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난 댓글로 선물받았다고 말씀드린 작약도 핑크에요 오늘 쓰레기버릴 때 시든꽃송이도 같이 버리려다가 말았습니다 오월 잘 보내시길요

자목련 2025-05-07 10:55   좋아요 0 | URL
꽃송이를 버리지 못하는 마음, 저도 당분간은 버리지 못할 것 같아요^^

젤소민아 2025-05-08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약은 특별히 또 이쁘네요~~~

자목련 2025-05-09 09:39   좋아요 0 | URL
작약은 볼 때마다 반합니다!
 


글을 쓴다. 빈 공간이 채워진다. 잡념으로 채워졌던 마음에 공간이 생긴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 그래서 쓰는 일은 좋고 제법 괜찮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빈 자리』 를 읽으면서 텅 빈 공간을 떠올렸다. 잠시 자리를 비운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 영영 돌아오지 않을 누군가의 부재를 채우려고 쓰는 마음. 어쩌면 그건 보뱅을 글을 빌미로 쓰고 싶은 내 마음인지도 모른다. 책 날개를 펼치고 마주하는 첫 문장(“살아갈 길이 없기에 우리는 글을 쓴다.”)에 울컥하고 말았으니까.


그러니까 이 글은 보뱅의 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누군가를 바라보고 관찰하는 어떤 시선, 그가 머물다 떠나간 자리에서 느끼려는 온기, 사라진 이의 흔적을 찾으려는 마음, 설명할 수 없는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 읽고 쓰는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보뱅의 글은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감탄하고 아름다워서 슬프다. 아름다워서 헤매고 아름다워서 아프다. 그가 당신이라 부르는 이는 유일한 존재이거나 무한의 존재다. 그런 존재의 부재를 인식하고 애도하는, 상실의 모든 감정을 맑고 맑은 글로 써 내려가는 보뱅. 그가 당신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나의 당신을 기억한다.


무심하게 흐르는 하루, 닿을 수 없는 당신,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을 차분하게 부드럽게 하나의 문장으로 매만지는 보뱅. 보뱅의 글은 읽을 때마다 같은 통점으로 다가온다. 처음에는 그녀가 너무 궁금해서 정체를 찾으려 노력한다. 그의 소설 『마지막 욕망』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하나가 되기 위해 죽음을 택한 여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보뱅이 사랑한 연인인가 짐작한다. 이내 포기한다. 그가 누구든 상관없다. 보뱅의 글은 그렇다. 단 한 사람만을 위한 글이자 모두를 위한 글이니까. 모두를 만하게 만드는 능력. 그러니 그의 부재는 그가 남긴 글로 채워진다.


괴로운 마음에서 벗어나려고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마음과 멀어지려고, 그 슬픔과 떨어지려고 모니터를 켜고 자판에 손을 얹고 아무 말이 쓰려 했지만 결국 내가 쓰고 있던 건 내 마음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 육체와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던 건 괴로움 마음이었다. 그제야 인정하니 오히려 쉬웠다. 왜 괴로운지, 무엇이 가장 힘든지 보였다. 그랬다. 나도 살아갈 길이 없기에 글을 쓴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그 글을 읽을 때 부끄러운 마음도 크지만 그때보다 괜찮은 나를 마주할 수 있어 반가움 마음도 크다. 상실과 부재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겼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걸 발견했다는 사실. 붙잡을 수 있었던 단 하나, 읽고 쓰는 일이 있었다는 큰 위안. 그것은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읽으며, 당신이 읽는 것은 곧 당신 자신이다.” (27쪽)란 보뱅의 문장과 맞닿아 포개질 수 있어 나는 보뱅의 글을 더 사랑할 수밖에. 나의 보잘것없는 글을 사랑할 용기가 자랄 수밖에.

그런 용기는 나를 둘러싼 주변을 살피는 마음으로 변한다. 나의 존재와 내 곁에 머무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만든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알게 되는 불변의 진리.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을 내일 같은 시간에 마주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 그리하여 정말 신비로운 비밀로 가득한 게 삶이라는 걸 알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결국 침묵으로 돌아가고, 붙잡은 것은 결국 손을 떠난다. 한 줌 속 맑은 물을 어찌할 수 없듯이 우리의 삶 역시 통제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벗어나 우리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것만을 소유할 뿐이다. 꿈속의 나무 한 그루, 침묵 속의 한 얼굴, 하늘의 빛 한 줄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머지는 모두 우리가 분노에 휩싸이는 날이나 정리하는 시간에 버리는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68쪽)


보뱅의 글을 읽으면 알 수 없는 고요가 샘솟는다. 활기차고 아름다운 소란 속에서 솟구치는 고요라고 할까. 다정하게 응시하는 눈빛, 보이지 않는 존재가 나를 감싸앉는 기분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쓴다. 당신에게 보뱅과의 만남을 주선하고자. 내가 받은 회복의 느낌을 전하고 싶어서.


시간은 일 속에서, 휴가 속에서, 어떤 이야기 속에서 소모된다. 시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활동 속에서 소모된다. 그러나 어쩌면 글쓰기는 다를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시간을 잃는 것과 매우 가까운 일이지만, 또한 시간을 온전히 들이는 일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남아서 눅눅해진 시간을 조리하는 것이다. 그러면 매 순간은 감미로워지고 모든 문장은 축제의 밤이 된다. 글을 쓰는 동안 영혼은 길 위에 흩어진다. 길을 잃어 헤매기도, 길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그러다 단 하나의 단어가, 단 한 차례의 숨결이 흩어진 영혼을 다시 모은다. 왕의 만찬처럼 풍요로운 말, 맛의 정수를 담은 사랑의 글자. (112쪽)


『빈 자리』 를 읽으면서 캐스린 슐츠의 『상실과 발견』이 계속 생각났다. 보뱅에게 부재의 대상은 특정 지을 수 없는 존재라 할 수 있지만 아버지의 부재로 글을 시작하는 캐스린 슐츠의 책은 다르지만 비슷한 결을 지녔다. 우리 삶에서 잃어버리는 것들,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닌 부재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들을 향한 그리움과 사랑은 삶을 지탱하는 한 방식이다. 그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인 글쓰기가 얼마다 훌륭한지 알게 된다. 상실과 부재 속에서 멈춘 삶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견해야 하는 사랑 속으로 나가야 한다고. 부재로 존재하는 사랑과 동시에 새롭게 발견하는 사랑.


우리는 삶의 모든 단계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상실하지만, 그 비율은 시간에 따라 고르게 나타나지 않고, 상실은 우리가 나이를 먹을수록 빈번하게, 더욱 파괴적인 내밀함으로 충격을 가한다. 그래서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서 직면하는 어려움의 유형이 달라진다. 사랑이 우리에게 처음 제기하는 문제는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이다. 한데 사랑이 꾸준하게 제기하는 문제는, 삶이 꾸준하게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한데, 우리는 결국그것을 잃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다루며 살 것인가이다. (『상실과 발견』, 290~291쪽)


『빈 자리』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살아갈 길이 없기에 우리는 글을 쓰고 읽는다. 한결 가벼워진 느낌. 주렁주렁 매달려있던 무거운 감정이 조금은 사라진다. 슬픔과 상실의 본질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막막했던 마음에 틈이 생긴다. 새롭게 생긴 틈을 채울 그것이 무엇이라도 괜찮다. 글쓰기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상실과 부재, 그리고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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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4월이 왔다. 내가 사는 곳의 4월은 짙은 안개와 함께 한다. 안개가 걷히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잠깐 새벽에 잠에서 깼을 때 밖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막막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기다리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기다림에 지쳐 그것을 잊어버리기를 기다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눈 내리던 봄은 꽃 피는 봄을 택한 것 같다. 친구가 이런 사진을 보냈다. 친구도 지인에게 받은 사진이라고 했다. 그곳에 봄이 있었고 자목련이 있었다. 나는 그 봄이 부러웠다. 그 봄을 갖고 싶었다. 그 봄이 있는 곳에 찾아가고 싶었다. 자목련은 난데, 나는 아직 피지 못했다.





피지 못했지만 뜨겁게 황홀한 글을 읽어야지. 크리스티앙 보뱅의 『빈 자리』를 구매하면서 책장에서 『환희의 인간』를 찾아보았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구매했는데 개정판이다. 다시 읽어도 보뱅의 글은 좋고 좋으니까.






사진첩에는 구판의 책 사진이 있는데 책은 없다. 그러가 불현듯 떠오른 기억. 나를 만나러 집으로 왔던 선배 언니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때 나는 크리스티앙 보뱅에게 반해있었고 그 아름다운 문장을 언니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책은 이렇게 다른 곳으로 가고 내개는 새로운 책이 왔다. 책의 여행이라고 할까. 책의 출발지는 같지만 도착지는 모르는 여행이다. 모든 글이 시 같은 보뱅의 글과 시인의 에세이 『이월되지 않는 엄마』는 나의 읽기의 목적지가 되었다. 빨리 도착해도 좋을 것 같고 천천히 느리게 도착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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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4-01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뱅의 글은 다시 읽어도 좋습니다. 완전 소중한 사람 보뱅 ㅋ 제 주위에는 보뱅 좋아하는 사람이 1도 없습니다 ㅜㅜ 삭막한 세상입니다 ㅜㅜ

자목련 2025-04-04 09:14   좋아요 1 | URL
보뱅을 전파하는 일, 새파랑 님의 특별 임무네요!

책읽는나무 2025-04-01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소식을 기다리시고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곧 그 소식이 들려왔음 싶네요.
4월이 가기 전엔 꼭 들으시길^^
자목련 지나가다 저희 동네 어느 곳에서 언뜻 보았던 것도 같아요. 아직 필 때가 아닐텐데, 아닌가? 지금 필 때인가?… 지금 피는 순간이었나 봅니다.
요즘 넘 추워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구요.
자목련 님의 계절과 시간을 맞이한만큼 모쪼록 많이 즐기시길 바랍니다.^^
보뱅의 바뀐 표지도 수수하니 이쁩니다.

자목련 2025-04-04 09:17   좋아요 1 | URL
오늘 모두가 기다린 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해요!
정말 봄이 오나 싶을 정도로 추웠어요. 이제 막 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나무 님 계신 곳에는 조금 빨리 꽃을 만나실 것 같고요^^
건강하고 환한 4월 이어가시길 바라요!

숲노래 2025-04-01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아가는 하루란, 늘 지켜보고서 다시 기다리는 오늘이지 싶습니다. 목빠지게 기다리더라도 오히려 안 오는 듯싶고, 문득 잊어버리면서 하루하루 살림을 이으면 어느새 눈앞에 마주한다고 느낍니다. 어느새 겨울이 저물듯, 어느덧 셋쨋달로 넘어오듯, 이윽고 넷쨋달로 접어들듯, 차분히 흐르는 해와 바람을 맞이하면, 모두 풀리면서 바뀌어 갈 테지요.

자목련 2025-04-04 09:19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기다리면 더디 오고 잊고 있어야 빨리 오는 것 같아요.
이 봄이 조금 더디 가면 좋겠습니다. 숲노래 님, 평온한 하루 이어가세요^^

거리의화가 2025-04-01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오전에 새로운 소식을 듣기는 했는데 부디 기다리던 결말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물론 그것이 결말이 아니고 이후 새로운 시작이 되겠지만요.
봄은 왔는데 마음이 이래서인지 봄이 여전히 온 것 같지 않은 기분입니다. 자목련 님 글과 사진을 보면서 잠시 힐링하며 봄의 기운을 얻었어요. 감사합니다. 보뱅 책 반갑게 만나시기를요!

자목련 2025-04-04 09:22   좋아요 1 | URL
곧 그 시작의 소식이 들리겠지요. 정말 올봄은 유난히 춥고 심란한 것 같아요.
보뱅의 책은 사랑입니다. 즐겁고 좋은 주말 맞으시길 바라요^^
 


야금야금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뭔가를 먹고 있다. 야금야금 맛있게. 이름하여 독서간식! 그래도 지난 계절보다 책을 읽는 양과 속도가 나아지고 있으니 뭐 나쁘지 않다. 최근에 먹은 마른 오징어가 너무 맛있어서 쿠팡에서 오징어를 검색하는 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오징어를 먹으면 맥주도 먹고 싶고 맥주를 먹으면...


백수린의 단편집을 다 읽었다. 수록된 단편 가운데 두 번째 읽는 단편도 있었는데 두 번 읽으며 더 좋아졌다. 그런 좋음을 기대하며 단편집을 한 권 더 구매했다. 윤성희의 단편집 『느리게 가는 마음』과 윌라 캐더의 『로스트 레이디』. 『루시 게이하트』로 만난 윌라 캐더의 소설은 이제야 생각났다. 이 소설도 좋다는 평이 많으니 얼마나 좋을까.






책보다 더 반가운 건 독서간식. 알라딘의 간식은 책보다 더 큰 유혹이다. 이번에 구매한 건 ‘촉촉 고구마 스틱’이다. 달지 않아서 좋다. 맛을 봤으니 이제 ‘촉촉 단호박 스틱’을 먹어봐야겠다. 다음에 책보다 간식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조금 따뜻해지나 싶더니 황사가 따뜻한 기운을 빼앗으려 한다. 뿌연 하늘에 익숙해지는 순간 봄꽃이 흐드러질지도 모르겠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올봄에는 좋은 소식이 많이 들렸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들려오는 안부도 듣고 싶다. 나도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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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3-13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구마 스틱 조금 고민하다 안 시켰는데 이 글 보니 벌써 후회되네요. 다음엔 꼭 먹어볼래요. ^^ 달지 않다,는 말에 더 관심이 갑니다. 윌라 캐더 책들도 정말 좋았어요. 읽고 정리하지 않고 갖고 있을 만큼 좋았어요.

자목련 2025-03-16 11:21   좋아요 0 | URL
제 기준에는 달지 않아서 추천합니다!
윌라 캐더 책들 좋다고 해주시니 더욱 기대가 큽니다^^

새파랑 2025-03-15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윌라캐더의 <나의 안토니아>도 좋아요~!! 백수린 작가 단편집은 읽어봐야 겠습니다~!!!!

자목련 2025-03-16 11:22   좋아요 0 | URL
윌라 캐더 추천하시는 새파랑 님께 백수린의 단편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