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에 친구와 나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대화를 나눴다. 그것은 작가 한강에 대해서였다.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은 친구는 책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도 그런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책을 좋아했던가. 모르겠다. 현재의 나는 책을 좋아하고 책을 사들이고 책을 쌓아둔다. 친구는 내게 한강의 책 가운데 『소년이 온다』의 내용이 뭐냐고 물었다. 대표적인 한강의 소설로 가장 많이 언급되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솔직하게 그 소설은 읽기 힘들 거라고 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도 마찬가지라고. 내가 좋아하는 단편집을 추천했지만 친구는 장편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알라딘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려고 하자 친구는 극구 말렸다. 친구에게 책은 도서관에서 빌리는 것이었고 내게는 사는 것이었다. 마침 곁에 둔 『디 에센셜 한강』을 건넸다. 이 책이 정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책을 구매했고 천천히 읽었다. 아니, 게으르게.


나는 한강 작가를 좋아한다. 한강 작가가 무얼 말하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 차분한 슬픔이, 애써 고르고 고른 순수한 언어가 좋았다. 어렵게 다가왔지만 자꾸 그렸다. 어쩌면 그의 소설을 읽을 당시 내 감정과 상태가 그러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여전히 그의 초기 소설을 아낀다. 『디 에센셜 한강』에 수록된 작품은 그런 이유로 읽으면서 조금 울컥했고 많이 아팠다. 어떤 면에서 한강의 소설은 상실과 애도로 가득한 생을 버티고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것 같다. 아니,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강에게 그것은 문학이자 언어였을 것이다. 유일하고 고유한 목소리.


말을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는 남자와의 이야기인 『희랍어 시간』을 다시 읽으며 나는 조마조마했다. 아름답게 보이기만 했던 소설이 아니었다. 처음 읽는 기분이었다. 처음 읽는 기분이 맞을지도 모른다. 한순간 그 삶이 깨질 것 같아서, 무너져내릴 것만 같아서. 그들이 겪는 상실과 고통을 나는 알 수 없으니 느낄 수 없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이 바라는 간절함이 나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서. 절망의 순간을 지나왔다고 여겼지만 여전히 절망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게 부끄러웠다. 말을 잃은 그녀가 시력을 잃은 희랍어 강사의 집으로 돌아와 그를 위해 안경점에 가려는 마음에 안도했다. 그것은 당연한 마음이 아니었기에. 이상한 일이었다. 과거에 옮겨 적었던 문장은 보이지 않았다. 오롯이 두 사람의 실루엣만 내게 들어왔다. 그들의 움직임, 사소한 떨림, 귀 기울이고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몸짓.


그런 기분은 단편소설 「회복하는 인간」과 「파란 돌」을 읽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의 소설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다. 그게 맞았다. 「회복하는 인간」을 읽으면서 이런 내용이었던가. 나는 「회복하는 인간」을 「노랑무늬영원」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육체적 고통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는 마음. 그렇다면 한강이 주목하는 고통은 무엇일까. 내면을 가득 채운 고통은 무엇일까. 인간으로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나 반가운 점도 있었다. 「파란 돌」을 읽으며 한강의 소설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파란 돌」에서 등장한 삼촌의 그림은 『바람이 분다, 가라』에 등장하는 먹그림을 불러왔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강의 「어깨뼈」를 떠올렸다. 한강의 소설 곳곳에서 느껴지는 봄의 기운. 겨울을 견디고 봄을 기다리는 이미지가 한강의 그것은 아니었을까 혼자 짐작했다.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이 가슴으로 올라왔습니다. 가슴뼈 사이 오목한 곳, 어떤 장기도 없는, 그렇게 아파보기 전에는 그런 장소가 몸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곳이었습니다. 당신은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손을 뻗어 내 손을 가볍게 쥐었습니다. 담담하게, 무언가를 위로하듯이. ( 「파란 돌」, 263쪽)





그래, 나는 이런 문장에 반하고 반했었다. 감히 만질 수 없는 감각과 숨죽여야만 들을 수 있는 소리. 그 모든 것은 슬픔에 기반된 것이었다. 그러나 슬픔에 싸였거나 갇힌 게 아니었다. 슬픔과 함께 성장하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눈이 되어 사라지고 말을 잃고 시력을 잃어도 멈출 수 없는 삶은 이어지고 계속된다는 당연하고 당연한 삶의 의무에 대한 위로이자 토닥임이었다. 거대한 역사의 슬픔을 통해서 한강이 전하고 싶은 게 이런 것이었지 오래전 나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부재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나와 우리를 버티게 만드는 그것이었다. 사라졌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지.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어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 때면 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 소리였으면. 처음으로 당신과 나란히 포도(鋪道)를 걸을 때였다. 길이 갑자기 좁아져서 우리 상반신이 바싹 가까워졌지. 기억나? 당신의 마른 어깨와 내 마른 어깨가 부딪힌 순간, 외로운 흰 뼈들이 달그랑, 먼 풍경(風磬) 소리를 낸 순간. (『내 여자의 열매』 속 「어깨뼈」)


『디 에센셜 한강』에서 만난 산문은 정말 처음이었다. 처음이라서 새로웠고 더 깊게 집중할 수 있었다. 작가 한강이 아닌 소녀 한강, 딸 한강, 인간 한강을 마주하는 순간이라고 할까. 피아노를 열망하던 어린 한강을 상상하며 읽은 「종이 피아노」는 비슷한 경험이 있어 더 애틋했다. 딸이 원하는 피아노 학원을 보내주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형편이 나아졌을 때 피아노 학원에 엄마 아빠를 위해 일 년만 다녀주라는 그 마음. 그리하여 중학교 3학년이 되어 다니게 된 피아노 학원의 이야기 「저녁 여섯 시, 검고 긴 바늘」은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언제 기회가 되면 피아노에 대해 말할 수 있기를.


그런가 하면 「여름의 소년들에게」는 『소년이 온다』를 읽기 전이나 읽은 후에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이 책을 읽고 어떤 느낌이었을까. 친구가 궁금해했던 『소년이 온다』를 읽게 될까. 아니면 읽지 못하게 될까. 친구는 한강의 다른 책을 더 읽게 될까. 아니면 멈추게 될까. 다음에 친구를 만나면 우리는 한강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다. 예상하지 않았던 대화지만 예전과 같으면서도 다른 그 무언가에 대해서.


‘언어’라는 나이 불충분하고 때로 불가능한 도구가, 결국은 그것을 읽을 누군가를 향해 열려 있는 통로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마침내 첫 문장을 쓰는 순간, 내는 백 년 뒤의 세계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쓴 것을 읽을 사람들이 거기 아직 살아남아 있으리라는 불확실한 가능성을. (「백 년 동안의 기도」, 340쪽)


저마다 독립적이었다고 여겼던 한강의 소설이 동그라미가 되었다. 동그랗게 커지고 있었다. 내가 만난 소설이 그 동그라미의 일부였고 전체였다는 게 기쁘다. 잘 모르고 끝내 알 수 없더라도 읽을 수 있고 읽는 일이 작가와 나를 연결하는 통로라는 사실이.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읽는나무 2026-01-27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희랍어 시간>을 사서 읽었었어요. 참 좋더군요. 그리고 <여수의 사랑>도 좋았구요. 한강의 소설은 애잔하게 아픈 것 같아요. 그래도 어딘가 강한 힘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한강 디에션셜>은 책을 선물해주시겠다고 하셔서 저 책을 선물해주십사. 부탁해서 받은 선물이에요. 아직 읽진 않았지만요.^^˝
제법 많은 목차를 가지고 있군요.
서점을 가면 늘 한 켠에 마련된 한강 작가 코너가 눈에 밟혀 기회가 되면 한강 작가의 소설을 한 권씩 사가지고 와서 수집하고 있네요. 책들이 이쁘니까 자꾸 눈길이 가고, 소설을 쓰는 작가를 상상하며 떠올리곤 합니다.^^
 


빈둥거림이 지나쳐서 이제는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바람이 강하게 불고 기온이 영하 저 아래로 떨어지는 날들이다. 몸만 추운 게 아니라 마음까지도 바람이 들이치는 것만 같다. 새해에 맞게 뭔가 새롭게 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은 어디서 오는 걸까. 주변에 뭐라 말하는 이도 없고 눈치를 주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어쩌면 이런 마음은 새해 증후군일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이즈음의 글에는 계획을 세우는 게 세우지 않는 것보다 낫지 않겠냐는 큰 언니와의 대화가 있었다.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는 지금의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계획 없이 사는 나에게, 조금은 계획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지난 계획을 기록한 글을 찾아보니 대단한 게 없었다. 책을 조금 더 읽고 쓰고 친구를 만나는 일, 그게 전부였다. 운동을 하거나 외국어 공부를 하거나 투자를 하거나 하는 건 없었다. 그런 계획을 다시 세워보기로 한다. 읽는 즐거움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책을 고른다. 올해의 첫 시와 첫 책은 이렇다. 조용미 시인의 『초록의 어두운 부분』에서 만난 시, 디디에 에리봉의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책이다.




기이하다 오래전에 나는 당신과 함께 모든 걸 나누었던 것 같다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서로에게 마음을 다했던 것 같다

왜 지금은 이토록 남인가 다른 생을 받으면 이렇게 다시 시작되는가

이전의 모든 생은 분명하고 또 어렴풋하다 모든 생에서 나는 나의 기억과 함께였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런 걸 알 수가 있을까 당신은 지독한 타인이고 다음 생까지는 너무 멀다

언제나 다음 생을 믿을 만큼 나는 어리석었다

여기서 그쳐야 한다 끝이라는 말을 늘 생각한다 끝은 여러 생을 거쳐 행할 줄 모르는 습관이 생겨났다

끝은 끝끝내 오지 않아서 우리는 끝에 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다 끝이 없는 마음이 지옥인데도 죽어도 마음은 끝을 모른다 끝이 저 스스로 죽고 싶도록 아름답게, 처절하게 우리는

(「구제적인 삶」, 전문)


모든 게 불확실하고 모호하지만 구체적인 것들을 생각한다. 하루의 일상, 하루의 시간,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분명하고 명확한 것들을 떠올린다. 하루하루 늙고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다. 나이를 헤아리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 혼자만의 새해 증후군은 조금 더 길어질지 모르지만 제주도에서 온 동백 사진은 반갑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26-01-13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끝은 끝끝내 오지 않아서‘ 결국 오는 순간은 죽음일까요. 동백 사진이 정말 너무 예쁘네요.

자목련 2026-01-14 15:54   좋아요 1 | URL
문득, 죽음을 대면하는 일도 모두에게 주어진 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동백은 직접 보면 얼마나 예쁠까요! 아쉽지만 사진으로 담아준 이가 고맙지요^^

거리의화가 2026-01-14 0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도 글인데 사진이 예뻐서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화사한 색감이 회색 겨울을 날려보내는 것 같은... 추위에 건강 조심하세요^^

자목련 2026-01-14 15:55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예뻐서 자꾸 보고 있어요. 덕분에 마음도 환해지는 것 같고요!
화가 님도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하게 보내세요^^
 


김지연의 소설 『새해 연습』을 생각한다. 소설의 주인공 홍미가 올해를 살아가며 하는 다짐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올해는 늘 새해를 위해 연습하는 해였다.’ 새해를 위한 연습이라는 말이 괜히 안쓰러우면서도 이상하게 좋았다. 새해를 기대하거나 소망을 품지 않으면서도 연습할 수 있다는 말이 좋았던 것 같다. 연습하고 연습하면 잘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해가 바뀌면 나이의 뒷자리 숫자가 바뀐다는 것, 큰 의미는 없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과 오늘과 다르지 않을 내일을 생각할 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하루에 대한 감사, 그 무사함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닫는 삶이 되었다. 재미나는 게 없다는 친구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재미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내가 조금 쓸쓸했다. 그러면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은 사라지지 않아서 며칠 전에는 자동이체로 빠져나가는 연금에 대해 문의를 했다. 해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납입 만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우선은 그냥 두기로 했다. 금액이 적은 이유가 가장 컸다. 적어도 너무 적었다. 납입액이 적으니 당연한데 그걸 간과했다.


그건 그렇고, 새해를 위해 나는 클레어 키건의 단편집 『남극』을 샀다. 땡스투는 원서로 읽고 있는데 번역본이 나왔다는 건조한 분께. 커피도 샀다. 주문한 커피의 맛은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다는 건 좋지도 않다는 것. 그래도 좋은 쪽으로 약간은 기울고 있다는 것. 이제는 알라딘 커피가 제일 맛있는 커피가 되었으니까. 싱가포르에 다녀오면서 작은 언니가 사 온 드립 커피를 마시지 않았지만 기대가 크지 않다.





다시 추워진다고 한다. 올해 12월은 작년과 비교하면 평온한 달이다. 어떤 일이든 최악의 것과 비교하면 괜찮아보인다. 그러나 최악은 다른 최악을 불러오기도 하고 살아가는 일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사는 일이니까. 현재를 기준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쿠팡의 개인정보는 유출되었지만 비밀번호만 바꾸고 탈퇴는 못했다. 못한 게 아니라 안 했다.


내년 12월에 기억할 올해 12월은 어떨까. 이것은 내년을 기대한다는 뜻인가. 기대하지 않는 것보다 기대하는 일이 좋은 것일까. 새해를 연습하는 올해는 이틀 남았고 나는 이런 시를 읽는다.

남은 이야기들은

지워지거나 모르거나

겨울이었지

무슨 말을 덧댈 수 있을까

우리 늘 모호했는데 유독

당신의 정맥,

유난히 추웠던 겨울 집에서

우리 무언가를 보았는데

어떤 이야기들은 선반 위에 둔 흐린 바깥이고

휘파람 같은 거라고

안경 알을 닦을 때도

파르스름한 정맥이,

그런 슬픈 그물에 걸려 다시 넘어지더라도

조금 근사하고 싶어

붉은 이상한 저녁에

우린 서로 미래를 돌려주었는데

사랑은 뒤를 봉합하지도 않고 사라지곤 했지

참 추운 날이야

새들의 부리가 작아졌어

이 딱한 부재를 이월하는 상자 밖으로 버리며

이것은

혼자라는

없음에 대한 일

(「그런 12월」 - 전문)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은빛 2025-12-30 14: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 작년 12월에는 우리 국민 모두가 너무 큰 일을 겪었었죠.
말씀하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들의 무사함에 대해 저도 생각해보게 되네요.

자목련 2025-12-31 11:28   좋아요 0 | URL
새해에는 밝고 신나는 뉴스를 만났으면 좋겠어요.
감은빛 님, 건강하고 따뜻한 새해 맞으시길 바라요^^

서곡 2026-01-01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자목련님 해피 뉴이어~~

자목련 2026-01-04 10:37   좋아요 0 | URL
서곡 님, 건강하고 행복한 2026년 시작하셨길 바라요^^
 

책장을 정리 중이다. 이제는 많다고 할 수 없는 책들을 골라낸다. 요즘 가장 자주 들여다보는 건 시집이다. 욕심껏 사들인 시집, 시인의 첫 시집,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좋아하는 작가가 읽고 있거나 추천해서 구매한 시집. 그리고 내가 좋아서 계속 좋아하려고 구매한 시집들을 본다. 그리고 발견하고 질문한다. 아, 나는 이 시집도 갖고 있구나, 나는 이 시집을 읽었던가. 허연의 시집 『오십 미터』도 그러했다. 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쓴 글을 검색하고 책장을 살피니 정갈한 자세로 있었다. 이 시집이. 그러니까 이 글은 미안하고 미안해서 쓰는 글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에게, 내가 좋아한다고 여긴 허연 시인의 시집에게. 그리고 내 마음에게.


시인의 시를 따라 읽다 보면 과거에 읽었던 시의 분위기와 마주할 때가 있다. 같은 제목이거나, 어디선가 듣거나 읽은 시인에 대한 기억들. 그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냥 내가 그렇게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뭐 그래도 상관없다. 모든 글들이 창작자의 손을 떠나 독자로 칭하는 이들에게 건네졌을 때 그것은 독립적인 것이 되기도 하니까.


『오십 미터』가 출간할 당시 나는 수술 후 회복 중이었다. 지난 글을 읽어보니 그랬다. 그래서 나의 처지를 생각하며 「자세」란 시에 끌렸다. 단어, 그 자체에 말이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어쩌면 처음 읽게 된 시는 이랬다. 최근에 가장 많이 펼쳐보는 『작약과 공터』에서 만난 「시월이 시」 때문이다. 시인에게 10월은 특별한 달이구나 생각하면서. 어느 시절 나를 가장 아프게 했던 11월의 기억이 떠올라 기억은 불편하고 기억이 슬퍼서 서러웠다.


기억은 우리보다 빠르고 허름하다. 기억은 피로 말한다. 행복해도 짐일 뿐인 것. 어짜피 모든 별의 소식은 우리가 사라진 다음 이곳에 도달한다. 캄차카 반도의 반딧불이도, 북해의 일각고래도 기억 속에 있다. 기억은 불편한 짐이다. 석관(石棺)보다 무거운 짐이다. 기억은 피를 흘린다.


가면극이 끝날 때까지 그녀에게 세 번쯤의 통증이 찾아온다. 세 번의 기억이 그녀를 직면한다. 그녀는 세 번쯤 피를 흘린다. 피 앞에서 자비는 언제나 착각이다. 배우의 실수에서 시를 찾기 위해 그녀는 피를 흘린다. 기억은 피가 된다.


시월에 대해 울고, 시월에 대한 기억을 흘리며, 시월에 대해 시를 쓴다. 시월은 기억이다. 시월은 피다. 구체제 같은 완행열차 소리가 들린다. 왠지 편안하다. 오늘의 구도(構圖)는 피를 흘리고 완행열차와 함께 기억이 됐다.


‘기억’ 그 어감을 피가 말해주지 않는가.

(「word 시월」, 전문)




기억이 소멸하길 바라지만 기억은 언제나 굳건하다. 그래서 기억을 지우려 애쓴다. 댕강 잘려 나가기를 바라지만 불행하게도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시구절을 반복하고 반복한다. 주문처럼 그렇게.

망각이여 오라

지층을 읽으려고 했던 날들은

속죄할 테니

망각이여 오라

거대하고 흰 망각이여 오라

전부가 사라져도 좋다

망각이여 달려오라

뒷모습으로만 남아도 좋다

망각이여 오라

(「망각이여」, 일부)


내가 좋아했던 허연의 시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계속 좋아한다고 여긴 허연의 시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첫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에서 만난 이런 시 때문은 아니었을까.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너무나 처연하게 늘 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을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전문)


그렇게 서슬 퍼런 유리 조작으로 살기를 바랐던 나쁜 소년은 여전할까. 아니, 독자인 나는 그런 마음을 품었나 보다. 그래서 여전히 조금은 불행하고 하루에 한 끼는 슬픔을 먹는 그런 시인이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시인의 바람을 모른 채. 그리고 시를 읽으며 인사를 건넨다. 반가우면서도 왠지 미안하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이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 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 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때가 오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

(「오십 미터」, 전문)

다시 또 책장 앞을 서성인다. 내가 좋아한다고 여겼던 시집을 본다. 정리는 계속해야 한다. 그러나 당분간 이곳을 서성이는 시간은 조금 더 길어질 것이다. 모르겠다. 그냥 우선은 시인을 따라 해본다. 때가 오면 벚꽃 날리는 그 길에서 너와 이별하고 싶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25-12-28 1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허연 시인의 시집 <오십 미터> 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나서 덕분에 오랜만에 꺼내서 다시 읽어보았어요.
잔뜩 끄적거려놓은 메모가 많네요.

자목련 2025-12-29 11:46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시집을 갖고 있는 줄 몰랐습니다 ㅠ.ㅠ
다락방 님 덕분에 찾아보았고 다시 읽게 되었어요 ㅎㅎ

그레이스 2025-12-28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황지우 시 읽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ㅠ
단어가 시인들에게 가면 부서지기도 하고, 피를 철철 흘리기도 하고, 적셔지기도 하는 듯요. 저렇게 꽂아놓으니 넘 예쁘네요.
전 시집을 너무 막대하는듯요

자목련 2025-12-29 11:47   좋아요 1 | URL
맞아요, 정말 시인의 능력은 대단해요!
언제 읽어도 반가운 시가 있고, 처음 만나는 것 같은 시도 있고 ㅎㅎ
요즘은 시집이 너무 예뻐요. 출판사의 놀라운 마케팅~~!
 



누군가 눈이 오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포기하지 않고 오늘, 내일 눈이 오기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눈 대신 쏟아진 많은 비로 아파트 입구는 미끄럽고 위험하다. 나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다. 아니다, 기다린 건 친구였고 책이었다. 지난주 친구를 만났고 엊그제는 책이 도착했다. 친구와 책은 다 좋고 반갑다. 길고 긴 수다로 다음 날은 피곤한 하루였지만 즐거운 피곤함이었다. 그리고 즐거움을 예고하는 책이 있다. 그 즐거움을 언제 만끽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책은 좋지 아니한가.





많은 책은 아니다. 작은 책탑이다. 세 권의 책 가운데 수잰 스캔런의 『의미들』은 도착한 지 꽤 된 책이다. 앨리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고 『의미들』이란 제목에 끌려 구매한 책이다. 앤솔러지 ‘얽힘’의 네 번째 프로젝트 『우리 사이에 금지된 말들』은 예소연 작가가 참여해서 선택했다.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은 잠자냥의 5별로 궁금해서 땡스투 하고 구매했다.


알라딘 통계를 보니 올해는 정말 책을 많이 사지도 않았고 읽지 않았다. 그러니 리뷰를 쓴 책도 적다. 내년에는 어떤 책을 얼마나 읽게 될까. 목표를 세우는 건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올해보다는 조금 더 많은 책을 읽고 싶다. 주구장창 책을 읽던 예전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지만 책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크리스마스이브이니 인사를 전해야겠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망고 2025-12-24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긴 눈이 왔는데 자목련님 사시는 곳엔 비가 내렸군요 날씨가 춥지 않아서 빙판길이 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자목련님 메리 크리스마스🎅

자목련 2025-12-24 16:02   좋아요 0 | URL
제가 있는 곳은 꽤 많은 비가 내렸어요.
망고 님, 해피 크리스마스 🎄

페넬로페 2025-12-24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겨울엔 비가 많아요.
비 내리는 날은 겨울의 색깔을 좀 더 어둡게 하는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책읽기는 좋네요.
집중이 잘 돼요.
자목련님!
메리 크리스마스^^
내년에도 같이 열심히 책 읽자고요.

자목련 2025-12-24 16:06   좋아요 0 | URL
저는 이래저래 집중을 못해서 걱정입니다.
페넬로페 님의 깊고 알찬 책읽기, 응원합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잠자냥 2025-12-24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워진다고는 하지만....) 따뜻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

자목련 2025-12-24 16:08   좋아요 0 | URL
잠자냥 님도 냥이들과 포근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해피 크리스마스 🐱 🐱 🎅 🎅

독서괭 2025-12-24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메리 크리스마스!!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 저도 궁금하네요~

자목련 2025-12-27 11:25   좋아요 1 | URL
독서괭 님 덕분에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냈습니다.
이곳엔 눈이 와요, 함박눈으로~~
주말 평온하게 보내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