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로 이어지는 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 결정된 어떤 일, 어떤 선택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만약에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 앞에 설까 생각하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는 맨 처음이 아닐까. 그럴 수 없기에 그것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일은 수많은 고민과 갈등을 하더라도 단 하나의 선택으로 끝난다. 과거로 돌아가도 그 선택을 할 거라는 알기에, 그게 나라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윤리적 딜레마’란 주제로 김연수와 히라노 게이치로가 참여한 『근접한 세계』를 읽다 보면 누구나 어떤 선택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이는 나만을 위한 선택, 어떤 이는 모두를 위한 선택을 생각할 것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걸 알지만 선택은 책임이 따라오기에 언제나 어렵다. 공익을 위한 제보,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비밀을 공개한 뒤 남은 인생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김연수의 「우리들의 실패」는 그런 삶을 조명한다. 소설은 화자인 기자가 ‘손동하’란 인물을 인터뷰하는 이야기다.

손동하의 선택은 비상계엄 선포, 대통령 탄핵안 가결로 이어졌고 그는 한국을 떠나야 했다. 대의를 위한 그의 선택은 개인의 인생을 포기해야만 가능했다. 모두를 위한 선택이 개인에게도 이로운 일일까. 소설을 읽는 우리는 그의 선택을 지지한다. 선택 밖에 있기에, 선택 안의 그의 복잡한 내면을 모르면서 응원한다. 어쩌면 모르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김연수는 어렵고 주제의 무게감을 내려놓고 한 사람의 선택과 과거의 이야기로 풀어간다. 손동하가 들려주는 그가 어린 시절 만난 소녀의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미래는 가능한가 묻는다. 그렇다면 그의 선택으로 다가올 미래는 어떤가.

삶이란 불확실하지만 분명한 과거가 존재하기에 현재와 미래가 있는 것이다. 결국 미래를 사는 일은 오늘을 사는 일이며 무엇을 선택하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히라노 게이치로의 「우리들의 실패」속 큐레이터 ‘가스미’는 고인이 된 사진작가의 작품 전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고민하고 고민한다. 전시할 작품이 아닌 공개되지 않은 사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고인의 취향이라 할 수 없는 범죄인 사진이었다. 사진작가와 자신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냥 넘어가야 할까. 자신이 알았다고 믿은 모습은 거짓이란 말인가.

사진작가의 아들은 반발한다. 아버지는 죽었고 그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묵인할 수 있다 주장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공론화할 수는 없지만 전시를 강행할 수 없었다. 세상은 모르고 나만 아는 일, 그러니 비밀로 묻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누가 그를 비난할 것인가. 한편으로 이처럼 세상은 모르고 소수만 아는 엄청난 비밀은 얼마나 될까. 시간이 지나 드러나고 밝혀지는 일들 말이다.





왜 그때 그 상자를 열었을까. 다시 그 생각으로 돌아온다. 열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시회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을 텐데. 그런 세계가 어딘가 있다면 지금이 세계의 나를 잃더라도 그곳에 가고 싶다. 하지만 그 세계에서 피해자가 있다는 걸 모른 채 전시회 성공을 기뻐하는 나도,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나도, 내가 되고 싶은 나는 아니다. (「결정적 순간」, 167~168쪽)


예술이라는 주제를 놓고 보면 큐레이터가 조언을 구하고 고민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개인의 일이라면 어떨까. 가까운 이의 비밀, 그러니까 범죄에 관련된 비밀을 알았다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내가 알았던 이가 전혀 다른 이로 존재하는 순간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울까. 한 사람을 아는 일은 현재뿐이 아닐까. 함께 할 미래를 아는 일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한 번 더 살 수 있다면 모든 것은 가능할까. 아니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

뒤에 이어지는 김연수와 히라노 게이치로의 대화는 소설이 어떻게 쓰여졌고 그 과정을 이해하기에 충분하고 대화를 읽고 나면 소설이 더 좋아진다. 두 작가가 소설가로 살아가는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가늠하게 된다고 할까.

저는 그 다정함이 과거의 기록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상상을 통해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미래적 시점’에서 오는 것이라 믿습니다. 운명론의 노예가 아닌 결단의 주체로써 독자에게 인물을 제시하는 것, 그것이 소설가로써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큰 다정함일 것입니다. (김연수, 201쪽)

『근접한 세계』 는 ‘윤리적 딜레마’란 주제로 쓰였지만 김연수의 소설은 미래를 사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최근 그가 가장 주목하는 주제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떠올랐고 가장 최근에 읽은 『겨울 정원』 속 「조금 뒤의 세계」를 생각하면 그렇다. 김연수의 소설을 읽다 보면 지금의 삶을 가만히 생각한다. 나와 연결된 우리가 만드는 미래. 만약에는 불가능하지만 한 번 더 살 수 있다면 우리가 꿈꾸는 미래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진지한 사랑과 격려가 필요하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이토록 평범한 미래」, 34~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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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3-11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어떨까? 궁금했었는데 리뷰를 읽다보니 금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자목련 2026-03-11 11:55   좋아요 1 | URL
나무 님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아파트에 매화가 다 폈다는 카톡과 함께 사진을 받았다. 봄이니까 당연한 일인데 한참을 보았다. 만개한 매화 사진을 보면서 벚꽃도 금방일 듯이란 답을 보냈다. 그러니까, 이제는 봄이다. 봄! 봄! 봄! 눈 닿는 곳에 눈의 흔적이 여전하지만 봄이다. 이제 내게 날아올 꽃들은 얼마나 많을까. 반갑고 예뻐서 꽃 사진을 찍을 내 친구들과 가까운 이들. 나는 벌써 작약을 검색하니까.

그러니까 나는 이런 봄을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이런 책을 기다렸다. 김지연의 신간 『꿈 목욕』이다. 온라인 서점에서 가장 많이 검색하는 작가는 인기 있는 성해나와 위수정이 아닌 김지연, 예소연이다. 김지연의 짧은 소설과 어울리는 원두는 <니카라과 산 살바도르 카투라>다. 땡스투는 맛이 정직하다는 페넬로페 님께. 어쩜 이리 잘 어울리는 색인가.





김지연의 짧은 소설이 나왔다는 걸 안 건 알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김지연의 신간 소식을 알았고 구매했다. 음, 이걸 김지연 작가가 보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같이 구매한 정해연의 『홍학의 자리』는 충동적이었다. 어쩌다 이 책이 검색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유괴의 날>을 쓴 작가라는 걸 알았고 드라마를 재밌게 봐서 구매했다. 이 소설도 재밌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간 김지연 작가다. 김지연 작가의 소설이 좋아서, 많은 이들이 읽으면 좋겠다. 점점 더 좋아지는 작가 중 하나다. 좋은, 좋아지는 이유를 설명하긴 어렵다. 그러니까 내가 그의 소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실은 황정은의 소설도 기다리고 있다.


좋아하는 걸 기다리는 일은 지루하지 않다. 기다리는 시간도 기쁨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좋아하는 것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좋아하는 작약이 피기를 기다리는 일. 그 대상이 된다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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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6-03-08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매화가 핀 곳이 많은가 보더라고요.
김지연 작가의 소설은 아직인데, 관심 가져 보겠습니다.
땡스 투 감사해요, 자목련님.

자목련 2026-03-10 09:28   좋아요 1 | URL
노란 개나리도 보이는 것 같아요!
김지연 작가, 괜찮은 느낌이면 좋겠습니다. 페넬로페 님의 100자평 제가 감사하고요^^
 


화요일 같은 수요일이다. 입학식을 마친 이들에게는 두 번째 등교 일일 것이다. 처음이 아닌 두 번째는 안도일까. 쓸데없는 생각은 처음이었던 그 순간이 어렴풋이 떠올라서다. 설레면서도 두려워서 내심 괜찮은 척하며 서툰 미소를 연습했던 시절들.

아무튼 3월은 벌써 네 번째 날이다. 사용하는 보일러에는 온수 온도를 조정하기 위한 계절 선택이 있다. 어젯밤에는 겨울이었던 계절을 봄으로 바꿨다. 그리고 주말에는 그런 봄이 내게로 왔다. 근처에 볼일이 있던 친구가 다녀갔고 우리는 아주 기쁜 눈 맞춤을 시작으로 귀한 시간을 보냈다. 짧아서 더 귀했다. 과일과 간식으로 가득했던 박스에는 노란 튤립과 분홍 장미가 있었다. 장미는 친구가 고른 것이고 튤립은 친구의 남편이 고른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친구는 장미를 좋아하고 그녀의 남편은 튤립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나는 둘 다 마냥 좋았다.





그리고 반가운 작가의 신간 소식은 또 얼마나 좋은가. 바로 김연수 작가다. 김연수와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근접한 세계』와 장편은 처음이라 궁금한 이유리 작가의 장편소설 『구름 사람들』은 3월의 책이다. 읽기의 속도는 회복되지 않고 쓰기는 거의 멈춤과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책은 이어진다. 느리고 멈춘 모양새지만 끊어지지 않고 연결된다는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다. 알라딘에서 새로 나온 커피는 어떤 맛일까. 다음에 구매해야겠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계절은 계절을 부르고 계절은 계절과 인사한다. 계절을 오가는 바람의 인사를 상상한다. 안녕, 잘 부탁해라는 부드럽고 다정한 속삭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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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6-03-04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둘다 좋아요 꽃들이 참 탐스럽고 크네요😍

자목련 2026-03-08 09:29   좋아요 0 | URL
사진이라 꽃송이가 크게 나오긴 했는데, 정말 예뻐요!
그래도 망고 님 마당에서 피어날 튤립을 따라가지는 못하겠지요.

구단씨 2026-03-06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을 보니 정말 봄이 오나 싶어요.
예뻐요.

자목련 2026-03-08 09:30   좋아요 0 | URL
엊그제 눈이 와서 다시 겨울인가 했는데 오늘은 햇살이 참 좋습니다^^

책읽는나무 2026-03-06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도 예쁘고 튤립도 예쁘네요.
거기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도 좋구요.
근데 김연수 작가님 얼굴을 왜 저렇게 표지로 실었을까요?ㅜ.ㅜ

자목련 2026-03-08 09:32   좋아요 1 | URL
꽃과 책은 다 좋아요!
<근접한 세계>는 책을 읽고 나니 의도한 표지구나 싶어요^^
 


내가 갖지 못한 어떤 것, 그 능력을 질투한다. 질투는 나의 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를 향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건 꽤 괜찮다. 모방이라는 노력이라는 방향으로 뻗어가거나 수집으로 남기 때문이다. 2월을 기억하고 말하고 쓴 김상혁의 에세이 『그냥 못 넘겼어요』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그의 시집을 읽었다는 게 참 다행이구나 싶었다. 겨우 한 권하지만 말이다. 나만 아는 문장, 나만 쓸 수 있는 무언가를 갈망하던 시절이 있었다. 적극적으로 배우거나 강의를 찾는 대신 그저 읽기에 최선을 다했던 때였다. 그때의 인연은 나에게 시집을 많이 읽으라고 했다. 시집을 모으고 읽으려고 하던 노력도 다 그 인연 덕이다.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할 다짐과 수많은 용기로 채워진 1월과 왠지 모를 설렘으로 기대하는 3월 사이에서 날도 적어 움츠러든 2월이 진짜 나라고 말하는 김상혁 시인의 글은 어떤 꾸밈없이 솔직하다. 부모의 이혼 당시 엄마의 뱃속에 있었던 시인, 아버지는 곧 재혼했으니 아버지와의 시간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 천천히 알아도 좋았을 슬픔은 존재와 동시에 느꼈을지도 모른다. 손에 꼽을 정도의 만남과 함께 한 시간은 그에게 어떤 감각이었을까. 때문에 그는 아들에게 그 사랑을 온전히 전하고 싶었을지도. 어쩌면 이건 나의 오지랖이겠다.


일하는 엄마, 손주를 향한 끔찍한 사랑이나 다정함보다는 자신들의 분노와 고통을 돌본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안에서 자라는 그가 외로움을 친구로 두는 일은 가장 쉽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우울했던 유년 시절 할아버지 방에서 보았던 주말의 영화는 그를 안아주고 달래주었다. 늦은 밤 TV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영화를 보던 그 소년을 상상한다. 우리는 어느 시절 같은 영화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나는 그의 플레이리스트에 겹치는 곡이 있는 독자, 여기 있다고 외친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내가 자주 듣는 노래가 두 곡이나 있다고 말이다. 시인의 플레이리스트가 궁금한가? 궁금하면 『그냥 못 넘겼어요』를 읽어보길.


이렇듯 책이란 참 이상하다. 김상혁이란 시인에 대해 나는 아는 게 없었는데 이제 조금 안다고 할 수 있다. 책에 썼고 그걸 읽었으니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작가가 책에 쓴 모든 게 나에게 흡수되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재밌게 읽었다는 기억으로 남거나 심지어 읽은 기억도 잊게 되니까. 물론 이 책에 대한 기억도 그런 수순을 밟을지도 모르지만 기록으로 남기니 다를 것이다. 그가 즐겨드는 노래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는 것, 그가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은 등단작을 얄궂게 검색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글이 좋아서 가끔씩 저녁이 되면 생각날지도 모른다.





저녁이 우리집 대문을 열고 나를 찾으로 온다. 서서히 다가오는 저녁은 짐짓 엄격해 보이는 표정이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서 밥 먹고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더 놀지 못해 좀 슬프다. 그렇지만 나도 종일 노느라 지쳤기 때문에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며, 실은 매일 돌아가자고 이야기해주는 저녁이 고맙다. 집에 가자고 강권하는 저녁의 얼굴을 쳐다보고, 그 진지하고도 차가운 사랑의 목소리를 들으며, 놀이에 미련이 남아 공터 쪽을 연신 돌아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이 매일같이 찾아온다는 사실이 고맙다. (95~96쪽)


그러니까 ‘저녁’은 김상혁 시인의 고유한 정서 같다고 할까. 그의 시집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에서도 만난 저녁이니까. 어떤 슬픔과 안도가 동시에 전해지는 저녁. 어떤 저녁은 그를 위로하고 어떤 저녁은 그를 더 외롭게 만들고 어떤 저녁은 그를 포근히 안아주었을 것이다.


문득 나의 저녁도 떠올려본다. 빨리 밤이 오기를 바랐기에 저녁은 존재하지 않았던 날들. 나는 왜 그토록 밤을 기다렸던 것일까. 어둡고 짙은 밤의 깊이에 숨을 수 있어서 그랬다. 그 시절의 나는 저녁의 애틋함 따위는 알지 못했다. 오직 밤 만이 계속되기를. 그리하여 끝내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저녁이 있었기에 이런 저녁의 아름다움을 흠모할 수 있다.


저녁은 헤어지기 좋은 시간이다. 지치기도 쉬운 시간이구. 하지만 제 손으로 머리칼을 털며 고갤 숙이고 있는 장면만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런 말도 가능하다. 내가 매일 현관으로 쓰러지며 쏟은 별과 모래를 아침마다 네가 예쁘게 비질한다고. (「가정」의 일부)


『그냥 못 넘겼어요』를 읽기 전 내가 기대했던 2월은 풍성한 꽃다발과 서툰 웃음으로 채워진 사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2월은 각자의 사정과 기억으로 채워진다. 여느 달이 그렇듯 말이다. 누군가의 2월은 쓸쓸하고 누군가의 2월은 분주하고 누군가의 2월은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졸업과 시작으로 이어지던 2월은 없다. 내가 기다렸던 봄 방학을 지금의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계절은 조금씩 다르게 흐르고 열두 달의 의미도 새롭게 변화한다.


시 쓰는 강의에서 만난 천재 수강생이 수업에 나오지 않아 연락했더니 자신의 이름도 정확하게 모르고 있어 씁쓸하지만. 어렸던 자기를 질투하는 귀여운 아들과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냥 개가 된 개와 살아가는 2월의 이야기는 흐뭇한 미소로 끝난다. 마냥 즐겁고 행복해서가 아니라 그 모든 일상이 소중한 풍경이라서. 정말 시의적절하다고 할까. 3월만 기다리지 말고 남은 2월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얹는다. 2월이 있어야 3월이 오고 춥고 변덕스러운 2월이 있기에 그보다 포근한 3월은 폼 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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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가 시작되었다. 특별한 일정이 있는 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말이다. 설날 아침에 오빠네 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간단한 식사를 하는 게 전부다. 작년 11월 올케언니가 골절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라 걱정이 많지만 얼굴을 뵈니 마음이 놓였다. 겨울이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평소처럼 그렇게 명절을 보내면 될 것 같다.


친구와 가까운 이에게 짧은 인사를 전하고 통화를 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반갑고 정겨웠다. 뭐가 그리 바쁘고 대단한 일을 하는지 목소리를 나누는 게 어렵다. 그래서 더 귀하게 다가온다. 무고하고 무탈하길 바라지만 어떤 일들은 일어나고 어떤 일상은 계속된다. 그럼에도 무언가에 휩쓸리지 않고 단단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냈다.


이번 설에는 쿠키 선물이 많다. 커피와 곁들이면 좋을 다양한 수제 쿠키다.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하나씩 꺼내 먹으면 될 것이다. 연휴에 뭔가 읽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마도 먹다가 보다가 자다가 먹다가를 반복할 게 뻔하다. 그래도 알라딘이 적립금으로 유혹해서 제일 좋아하는 커피를 샀다. 주문하고 나니 알라딘이 커피 할인 쿠폰을 줬다. 타이밍이 아쉽다. 새로운 커피를 주문할지도 모르겠다. 책도 한 권 샀다. 『나만 아는 단어』란 제목에 끌려서. 정용준, 김화진의 소설을 읽었기에 그들이 선택한 주머니, 유령, 산책이란 단어가 내게 아는 척을 하는 것 같아서.





좋아하는 커피를 쟁여둔다. 곁에 두기만 해도 향이 좋아서 자꾸만 생각난다. 좋아하는 것들을 쟁여두면 나쁜 것들이 사라질 것 같다. 무엇이 나쁜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그런 기꺼운 마음을 쟁여두면 좋겠다. 쟁여두는 마음, 쟁여두는 안부, 쟁여두는 안녕.


기척도 없이 미세먼지가 찾아오고 봄이 가까이 있다는 걸 느낀다. 옷차림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잠깐이라도 집 밖을 나갈 때면 마스크를 챙긴다. 누군가 꽃이 피는 소리를 알려줄 것이다. 여기저기서 그런 소식이 날아들 순간이 곧 들이닥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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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6-02-15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꽃향 대신 커피 향을 따라 들렀어요. 쿠키 선물이 많으셨군요? 살은 저만 쟁여두는 걸로 하고, 자목련님은 맛있게 즐기세요!

자목련 2026-02-20 08:36   좋아요 1 | URL
다양한 쿠키의 달콤함에 빠져 지내고 있어요!
봄이 가까운지 제법 공기가 부드러운 느낌이에요. 곰돌이 님, 따뜻한 하루 이어가세요^^

페넬로페 2026-02-15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키와 커피는 최고의 환상 조합이죠.
미세 먼지가 많지만 산책길을 비추는 햇빛에 봄이 느껴집니다.
자목련님!
설 연휴 잘 보내시길요^^

자목련 2026-02-20 08:38   좋아요 1 | URL
커피를 좀 줄여야겠다 싶은데 쉽지 않습니다 ㅎ
봄빛을 기대하며 지내는 날들, 환한 시간 보내세요!

책읽는나무 2026-02-15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날이 너무 따뜻해 겉옷을 벗고 다녔어요. 겨울 외투가 너무 더운 거에요. 순간 3월인 줄 알았어요. 벌써 목련나무랑 벚나무가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어요. 통통하게 차올라 있구요.^^
쟁여두는 커피와 쿠키 덕분에 설 연휴가 든든하시겠네요. 부럽습니다.
암튼 설 연휴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자목련 2026-02-20 08:39   좋아요 1 | URL
통통하게 차오른 봄이 나무 님을 반갑게 맞았을 것 같아요^^
뒹굴거리는 연휴가 끝났는데 뒹굴거림은 끝나지 않아서 ㅋㅋ

서니데이 2026-02-15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잘 지내셨나요. 한파가 길었는데 갑자기 따뜻해졌어요.
연휴가 시작되고 날짜가 빨리 지나고 있어요.
즐거운 명절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26-02-20 08:40   좋아요 1 | URL
주말에 비 오고 다시 추워지겠지 싶어요. 그래도 따뜻한 추위가 아닐까 싶고요!
건강하고 활기찬 시간 이어가세요^^

거리의화가 2026-02-20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쟁여두는 마음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읽지 않아도 일단 쟁이고 굳이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쟁이는 마음... 1월은 안 사고 잘 넘겼는데 2월에는 책을 왕창 쟁였습니다!ㅎㅎㅎ
저는 설 연휴 때 친가 쪽 식구들과 함께 식사를 한 것 말고는 특별한 일정은 없었어요. 시가 쪽은 시부모님도 안 계신 상태에서 시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산소에 갈 때나 가게 되더라구요. 굳이 명절 때 왔다갔다 피곤하지 않아도 되니 그건 편한 것 같기도 합니다.
쿠키 선물 참 좋네요. 커피든 차든 함께 할 때 준 사람의 마음이 느껴질테니까요. 날이 따뜻해진 건 좋은데 역시 미세먼지가 스멀스멀... 그래도 저는 봄기운이 느껴져서 좋네요. 얼른 개나리가 보고 싶습니다^^

자목련 2026-02-23 15:59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을 왕창 챙여두셨을까, 궁금하네요.
화가 님은 열심히 읽으시니 마구 쟁여두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쿠키 덕분에 커피를 마구 마십니다 ㅎㅎ
화가 님이 산책에서 만날 노란 개나리, 저도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