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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며칠전 ‘외교 참사’라 불린 두 정상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언어의 불평등, 소통의 부재, 그리고 의도된 비난, 비아냥, 모욕 등 언어의 모든 폭력성을 본 듯하다. 구사한 언어의 내용도 그렇지만 분위기, 태도 때문에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럴 땐 언어가 없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들 사이엔 날이 시퍼런 ‘칼’이 놓여있다. 그 칼은 자본, 권력의 언어일 것이다.
보르헤스의 묘비명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로 남자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87세의 보르헤스가 젊은 부인에게 이 묘비명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한 침상에서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밤 두 사람 사이에 장검을 놓았다는「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로부터 보르헤스가 가져온 말이다. 그 ‘서슬 퍼런’ 칼날이,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失明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8p)”라고 생각하는 남자 역시 시력을 거의 잃어버린, 시각 장애인이다.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민 가서 살았던 그는 십대에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 17살에 청각 장애를 갖고 있는 R과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은 성립될 수 없는 오류가 되어 버렸다. 그의 얼굴에 있는 흉터는 실명이 휘두른 칼날에 의한 상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R을 위해 수어를 배워 수어로 대화하던 남자는, 완전한 실명이 오기 전, 그녀에게 목소리로 말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남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화가 난 R은 남자의 얼굴에 상처를 남긴다. 20년이 지났어도 남자는 그 순간을 후회한다.
남자는 한국으로 돌아와 아카데미에서 희랍어를 강의한다. 그의 강의를 듣는 여자는 손목에 흉터를 갖고 있다. 여자와 남자의 흉터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상흔이다. 여자는 강단에 선 남자의 “눈시울께에서 입술 가장자리까지 가늘고 희끗한 곡선으로 그어진 흉터”를 처음 보았을 때 “오래전 눈물이 흘렀던 곳을 표시한 고古지도 같다(12p)”고 생각했다.
여자가 고어古語이자 사어死語인 희랍어를 배우는 이유는 낯선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첫 번째 실어증에 걸렸던 때, 불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비블리오떼끄’라는 낯선 단어가 그녀의 입술을 움직이게 했었다. 여자는 입술이 달싹이던 그 순간을 오히려 공포스럽게 기억한다.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17p)“
이혼과 양육권 포기로 인해, 20년 만에 다시 침묵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는 의지적으로 낯선 언어를 배우고 있다. 첫 번째 실어증은 소름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리는 문장이 선명하게 드러내는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 때문에 오는 수치심과 구토와 비명을 지르고 싶은 절망감(혹은 공포)때문이었다. 스스로가 하는 말의 거짓에 대한 정죄, 불완전함에 대한 부끄러움, 추함에 대한 역겨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렇게까지 예민할 수 있을까? 발화의 순간보다는 뒤돌아보며 부끄러움에 휩싸이는 때가 있지만 말이다.
그녀는 언어 없이 생각하고 이해했다.
“말을 배우기 전, 아니, 생명을 얻기 전 같은, 뭉클뭉클한 솜처럼 시간의 흐름을 빨아들이는 침묵이 안팎으로 그녀의 몸을 에워쌌다.(16p)“
첫 번째 침묵이 농밀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웠다면, 20년 후에 다시 온 침묵은 차고 희박하고 어둡다.
여자를 상담했던 심리치료사의 ‘그녀가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 지 의심하는 내적질문에 응답해가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진단은 불편하다. 본성을 억누르고 살았기 때문에 실어증이 왔을 거라는 것이다. 전편 『바람이 분다, 가라』의 표현대로 한다면 내담자의 삶을 “함부로 요약”하는 것이다. 여자가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이해한다는 상담사의 말에 그녀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55p)“라고 대답한다. 남자의 실명보다 여자의 상실보다 세상과 그들 사이에 놓인 칼은 말이 아닐까?
여자는 “인간의 모든 언어가 압축된 하나의 단어, 어마어마한 밀도와 중력으로 단단히 뭉쳐진 단 한 단어. …… 누군가 입을 열어 그것을 발음하는 순간, 태초의 물질처럼 폭발하며 팽창할 언어. ……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그 언어의 결정結晶이 그녀의 더운 심장에, 꿈틀거리는 심실들 가운데 차디찬 폭약처럼 장전되는 꿈(55p)”을 꾸었다. 생명, 사랑과 같은 단어들을 생각하게 되지만, 그녀가 상상하는 단어는 형태도 소리도 갖추지 않은 직관적 언어다. 어쩌면 의식만으로 이어진 이미지나 감각으로 전달되는 에너지 같은 형태의 언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 의미를 전달함에 있어 오류도 거짓도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가? 그런 언어를 갖고 있는가? 스스로 질문해본다. 말의 부정확성, 추함, 거짓이 나와 타인 사이에 놓인 칼이다.
διεφθάρθαι, 강의 시간에 여자는 받아 적으면서, διεφθάρθαι(He kill himself)를 “차갑고 단단하다” “다른 어떤 단어와도 결합되어 구사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 “돌이킬 수 없이 인과와 태도를 결정한 뒤에야 마침내 입술을 뗄 수 있는 언어”라고 생각한다. διεφθάρθαι의 발음, 주어와 목적어가 하나로 동일하게 만드는 중간태(영어의 재귀대명사를 포함하는 의미)는 다른 뜻이 파생될 수 없는 완전하고 정확한 의미를 전달한다고 한다. 여자가 희랍어를 배우게 되는 이유이다.
희랍어를 잘 모르기에 이 느낌을 완전히 공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에게 보르헤스의 칼은 소통과 언어의 부정확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언어는 발화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의미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폭력을 행사하고 고통을 가할 수 있다. 그러기에 여자는 모든 의미, 언어가 하나로 압축된 단어, 언어의 결정結晶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몸짓은?
건물 안으로 들어온 새를 도우려는 남자를 공격하는 새, 차에 깔린 개를 안아주던 여자를 물었던 개의 장면에서 인간의 몸짓조차 전달되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두려움은 선의의 몸짓을 오해하게 만든다. 이 폭력적 반응은 R이 남자의 얼굴을 후려친 억센 주먹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그녀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그녀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이 있다.(168p)“
남자와 여자는 밤을 함께 보내고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연한 부분을 보여 주었다. 그는 그녀를 껴안고 입을 맞춘다. 사랑의 행위는 시(詩)로 이어진다.
소설의 앞부분에서 “여자의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9p)”이라고 했던 강의실 장면은 이 시(詩)에서 “두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191p)”으로 재현된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는 행이 반복된다.
“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183p)”
우리는 사랑하는 순간에도 서로를 모른다.
‘심해의 숲’은 말없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라고 한 작가의 질문에 희망적인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두 사람조차 서로를 알지 못하고, 언어는 부정확하고 소통은 단절된다. 여전히 스스로를 가둔다. 그들 사이에 칼은 여전히 놓여 있고, 세계와의 사이에도 칼이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뚝거리는 언어와 몸짓으로 자신을 내보이며 온기를 나누는 게 인간이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가끔은 그 칼에 베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