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은 “발자크는 정확한 지형적 등고선을 그려 세계의 신화적 정체성을 확고히 세웠다”그리고 “파리는 그의 신화가 자라난 곳”이라고 말한다. 이런 문장들 때문에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읽고 싶은 것이다. 파리는 발자크의 『인간극』에 등장하는 은행가, 의사, 고리대금업자, 매춘부, 변호사, 군인, 언론인, 작가, 예술가 등 잡다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발자크는 이들을 등장시켜 파리의 평면을 구석구석 그리고, 그들의 풍속을 전시한다. 발자크의 작품은 19세기 파리라는 도시를 조망하고, 그 거리에 위치한 건물의 내실을 들여다보는 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도시 공간을 점유하고, 이주하고, 계층을 형성해가는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를 전달한다. 그의 작품 덕에 흩어져있는 여러 자료들이 통합되고 재구성된 도시의 이미지가 전달된다. 그렇게 완성된 이미지, 19세기 파리 증강현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파리는 발자크의 작품 거의 모든 곳에서 등장한다. 때로는 시골 지형에 그늘을 던지는 그림자다. 한 도시의 “역사적 지형의 온갖 양상을 노출한다.”
“그는 도시에서 신화를 제거하고 그 도시에 충만해 있는 근대성의 신화를 제거함으로써 그 도시의 현 상황에 대해서뿐 아니라 그것의 장래 모습까지를 조망하는 새로운 시야를 열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으로, 그는 자신의 진술이 기대고 있는 심리적 버팀대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노출시키며 도시의 문서고에 소장된 생명 없는 자료들이 길을 잃곤 하는 욕망이 혼탁한 연극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근대적 자아가 구축되는 방식과 도시가 이루는 변증법이 밝혀진다.(『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데이비드 하비, 45-50p)“
『13인당 이야기』에 실려 있는 3편의 소설 「페라귀스」, 「랑제 공작 부인」, 「황금 눈의 여인」을 읽다보면 사건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각각의 소설에 등장하는 특정 인물들은 혁명 이후 결성된 비밀결사의 멤버이거나 연루된 사람들이다. ‘페라귀스’는 혁명 후 결성된 여러 결사체 중 하나인 ‘데보랑’의 수장을 일컫는 말이다. ‘데보랑’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예루살렘 성전의 석공들에게까지 이른다. 이런 기원은 이 집단에 비밀스러움과 신화성을 부여한다. 13인당은 흩어져버린 ‘데보랑’의 13인의 조직원들이다. 3편의 소설들은 이들이나 사건들보다는 파리의 지형과 힘의 이동, 내밀한 공간의 풍경들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작가 스스로 이런 내용에 더 힘을 쏟고 있다는 생각이다.
발자크는 「페라귀스」에서 파리는 “살아있는 괴물”, “가장 매력적인 괴물”이라고 말한다.
“여기는 아름다운 여인인가 하면, 저기는 늙고 가난한 남자다. 여기는 마치 새로운 왕조의 화폐처럼 아주 새것인가 하면, 이쪽 구석은 유행을 따르는 여인처럼 우아하다. 완벽한 괴물이지 않는가! 학문과 천재성으로 가득한 다락방이 머리에 해당된다면, 낮은 층들은 포만감으로 행복한 위장에 해당되며, 상점들은 진정 발에 해당될 것이다. 분주히 걸어다니는 사람들, 바쁜 사람들이 그곳에서 나온다. 이 괴물은 항상 얼마나 활기찬 삶을 살고 있는가! 무도회의 마지막 마차가 파리라는 괴물의 심장 한가운데에서 멈추는 새벽 시간이 되기 무섭게 괴물의 팔에 해당되는, 외곽에 퍼져 있는 구역들은 벌써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한다. 집집마다 하품하듯 살짝 틈이 보이던 문들은 이제 활짝 열린다. 그 문들은 마치 수만 명의 남자 혹은 여자에게 보이지 않게 조종당하는 거대한 바닷가재의 점막과도 같다.(25p)”
“그러나 오, 파리여! 너의 음침한 풍경, 어둠 사이로 살짝 비치는 빛, 깊고도 고요한 너의 막다른 골목들을 찬미해보지 않은 자, 밤 열두시와 새벽 두시 사이에 너의 웅성거림을 들어보지 않은 자, 그들은 너의 진정한 시(詩)에 대해, 너의 기이할 정도로 몹시 상반된 두 얼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극소수의 몇몇 애호가들은 파리를 음미하면서 절대로 아무 생각 없이 걷지 않으며, 파리의 생김새를 너무나 잘 알기에 무사마귀 하나도 부스럼 하나도 붉은 반점 하나도 다 가려낸다. 그 외의 사람들에게 파리는 늘 괴물 같으면서도 경이로운 그 무엇이요, 활동과 기계와 사유의 놀라운 집합체다. 또한 수십만 개의 소설이 탄생하는 도시오, 지성이 모여드는 세계의 머리다. 그러나 파리 애호가들에게 파리는 슬프거나 쾌활하고, 추하거나 아름다우며, 생명이 넘치거나 죽은 것과도 같다. 그들에게 파리는 하나의 창조물이다.(27p)”
「페라귀스」는 오귀스트 드 몰랭쿠르가 생 제르맹 사교계의 여왕 쥘 부인(클레망스)이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거리, 솔리 가에서 목격하고 미심쩍어 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발자크는 파리의 길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다.
“파렴치한 죄를 저지른 수치스러운 인간이 존재하듯, 파리에는 불명예스러운 길이 존재한다. 그런가 하면 고상한 길도 있고, 정직한 길도 있으며, 아직 그 길이 도덕적으로 어떤지에 대한 평판이 형성하지 않은 새로운 길도 있다. 또한 암살자의 길도, 상속받은 늙은 과부보다 더 늙어 보이는 길도, 존경받을 만한 길도 있으며, 늘 깨끗한 길이 있는가 하면 늘 더러운 길도 있다. 노동자의 길도, 근로자의 길도, 장사꾼의 길도 있다. 다시 말해 파리의 길은 인간의 속성을 지닌다. 또한 길이 생긴 모양에 따라 우리는 그 길에 대해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고정된 생각을 품게 된다(23-25p)”
파리의 길은 인간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길, 뒷골목은 도시의 상징과 기호, 역사를 담고 있다. 더 나아가 현대의 도시에서도 ‘내가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혹은 ‘어느 거리에 살고 있는가’가 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클레망스의 시신을 찾아 화장해서 재를 간직하려는 쥘 공작, 그를 위해 친구 자케가 행정 처리를 한다. 그가 수행하는 서류작성과 절차의 지난한 과정은 “파리에서의 죽음은 그 어떤 수도에서의 죽음과 다르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검은 시트 위로 흐른 눈물 자국의 수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는 도시, 법적으로 일곱 등급의 장례식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도시, 돈의 액수에 따라 망자를 덮는 흙을 파는 도시, 고통을 이중으로 이용하는 도시, 교회의 사제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기 위해서도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도시, <진노의 날>을 부를 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성가대원이 참여할 경우 교회 재산 관리자가 개입해 돈을 더 요구하는 도시, 그런 도시에서는 그 무엇도, 설사 그게 고통과 관련된 것일지라도 관료적 인습에서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다.(185p)”
관 속에서도 관료주의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반면 그물이 쳐진 다리의 하류 쪽 강에 몸을 던지는 이다의 죽음은 클레망스의 죽음과 대조된다.
랑제 공작 부인은 “귀족계급의 특징을 완벽히 지니고 얼마 동안 그 계급의 전형으로 간주되던” 여인이다. 그녀를 사랑했던 몽리보 후작은 혁명을 지지하는 비밀결사의 일원이며 유능한 군인이다. 몽리보를 유혹하기 위한 그녀의 아양과 교태는 사교계에서 생존하기 위한 태도다. 몽리보는 그녀에게 빠졌었으나 배신감을 느끼고 그녀를 무시한다. 그녀의 이 태도는 구태에 빠진,여전히 과거를 답습하고 있는 왕정복고시대 복귀한 망명 귀족들을 비판하기 위한 상징이다.
이들은 생 제르맹 사교계에서 만났다. “사십여 년 전부터, 파리에서는 그들의 태도나 말투 등 한마디로 생 제르맹의 관습이 일찍이 궁정이 하던 역할을 하게 되었다.(240p)” 파리의 상류계급에게는 그들의 중심지가 있었고, 그 장소는 이동해 왔다. “14세기에는 생 폴 저택이, 15세기에는 루브르궁이, 16세기에는 궁정과 랑부예 부인의 저택과 루아얄 광장이, 그리고 17세기와 18세기에는 베르사유 궁이 그런 역할을 수행했었다.” 루아얄 광장 주변에 거주하던 귀족들은 주변에 상점들이 들어서고 구역의 평판이 나빠지자 강 건너 생 제르맹 구역으로 이동했다. 언제나 도시의 상류 계급은 여유 있는 공간을 점유하고 배타적인 세계를 만들려는 욕구를 갖고 있다. 이런 욕구들의 흐름이 파리를 모습을 형성하고 바꿔간다. 도시 전체라는 공간적 관점과 긴 시간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살아있는 생물(괴물)로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는 왕정복고 이후 귀족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몰락의 원인을 서술한다. 왕정복고 이후 시대의 변화에 맞춰 그들이 해야 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그 의무는 저버리고 벼락출세자들처럼 자신의 탐욕만을 쫓았다. 벼락출세자들이라면 부르주아이고, 탐욕의 대상은 돈이다. 돈은 힘을 나타내는 하나의 기호일 뿐인데, 사실 그들이 갖고 있는 내재적 가치를 버리고 똑같이 돈을 쫓고, 버려야할 전통과 구습을 쫓았기에 힘을 잃었다고 발자크는 말한다. 그들의 폐쇄성 또한 영국의 상원과 비교하면서 비판받는다. 랑제공작부인의 죽음은 생 제르맹의 귀족들의 몰락을 상징한다.
「황금 눈의 여인」 ‘파리의 인상학’에서 발자크는 파리 사람들의 얼굴에서 지옥의 기운을 읽는다. 그리고 『신곡』의 지옥 이미지를 불러온다.(436p) 그리고 파리에 사는 사람들을 네 계급—노동자(프롤레타리아), 하류 중산층, 상류 중산계층, 예술가—으로 나눈다.
“노동자들에게 휴식처럼 보이는 쾌락은 몸을 지치게 만드는 방탕이다. ……모든 피조물에는 다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존재할 터, 아마 그들도 멋진 남자가 되기 위해 태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릴 적부터 힘과 망치와 절단기와 방적공장의 지배하에 들어가, 일찍이 유황을 뒤집어 쓴 흉한 처지가 된다. 못생기고 힘센 그 집단을 상징하리라. 기계에 대한 이해력은 숭고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도 안다.(440p)”
이 계급에 대한 묘사들은 마르크스가 주목하고 인용했다는 이미지들이다. 이 계급을 나누는 데 작동하는 시스템은 당연히 자본이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와 별로 차이가 없다. 발자크의 통찰과 예지가 빛나는 지점이다.
“이렇듯 파리에서 하층민들은 살기 위해 과도하게 움직이고, 두 부류의 부르주아지들은 몸을 망가뜨려가면서 취한 이득을 타락을 위해 낭비하고, 예술가들의 사유는 너무도 냉혹하며, 상류층 사람들은 끊임없이 과도한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니 파리 사람들 얼굴이 어찌 흉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러나 파리에서는 하층민이건 중산층이건 상류층이건 모두가 ‘필요’라고 하는 냉혹한 여신의 채찍을 맞으면서 계속해서 달리고, 뛰어다닌다. 펄쩍펄쩍 뛰고, 깡충깡충 뛴다.(458p)”
가히 『신곡』의 「지옥」에서 채찍을 피해 이리저리 달리고 있는 무리의 이미지다.
자신의 신분과 맞지 않는 곳에서 목격된 쥘 부인의 불행은 파리의 공간이 갖고 있는 계급을 보여준다. 몽리보가 랑제 공작 부인의 내실에 들어가는 것은 한 사람의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몽리보가 랑제 공작 부인을 자신의 방으로 납치하는 것과 앙리가 파키타의 비밀 저택으로 가는 것은 파리의 공간에 존재하는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힘을 가지려는 시도다. 묘지는 그 힘에서 벗어난 장소임에도 역시 권력이 그들의 사후에도 작동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13인당 이야기』 인물들의 삶은 파리의 공간과 연결되어 있다. 공간의 권력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권력을 상징하는 공간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욕망 또한 마찬가지다. 수많은 도시계획의 성공과 실패는 인간이 무엇을 욕망하는가를 파악하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게 하는 거리를 만드는 것은 욕망을 읽는 인문학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저자가 거대 도시를 읽는 방법에 있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의 진단과 해법에는 반대한다.
파리를 살아있는 괴물이라 말했던 발자크의 통찰, 그리고 그 도시를 괴물로 만들어가는 인간의 욕망, 그 욕망이 만들어낸 채찍에 쫓겨 이리저리 달리는 지옥의 이미지! 우리가 사는 도시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