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파든이다.

연거푸 맥파든을 읽는 이유는 일단 영어(여기에서 영어란 구조 즉 문장)가 쉽기 때문이고, 그리고 단어도 쉽기 때문이다. 소설의 구성 자체도 복잡하지 않고, 입체적인 인간형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어서, 글에 대한 몰입이 쉽고 당연히 진입 장벽이 낮은 편이다. 다만, 나처럼 이쪽으로 많이 읽지 않은 사람 같은 경우, 이 소설의 목표이자 목적인 '범인 유추'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어서, 이 소설에서도 87퍼센트까지 읽었는데도 도대체 그놈, 나쁜 그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으며, 예상한 두 명 중의 한 명이 범인이 아니었다는 놀라운 소식이다. 지지부진한 책읽기 근황 중에 집중해서 읽을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다.

소설에는 남자 넷이 나온다.

K는 데이팅 앱을 통해 만나게 된 남자인데, 우발적인 행동으로 여자 주인공 시드니를 공포에 떨게 한 사람이다. L는 시드니가 살고 있는 건물의 관리자이고, 베프의 남친이다. J는 시드니의 엑스이다. 괜찮은 사람이고, 미래를 함께하는 더 깊은 관계를 원했지만, 잘되지 않았고, 그래서 헤어졌다. T는 현남친이다. 의사인데, 그냥 의사 아니고, 잘생긴 핫가이. 시드니가 자신도 모르게 'perfect'라고 말하게 만드는 남자. 근데, 요즘 T에게서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었고, 갈팡질팡 시드니의 마음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싫다고 명시적으로 말했는데도 계속 연락하는 남자. 딱 잘라 말하기 어렵지만 같이 있으면 불편한 남자. 호감을 가지고 있는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불안한 징후. 게다가 그 남자가 폭력적인 정도를 넘어서서 살인을 마다하지 않는 연쇄 살인마라면. 그와 같은 공간, 밀폐된 실내 공간에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와 함께하는 혹은 나를 보호해 주겠다는 그 남자가 돌변하는 순간에 대한 두려움이 사실적으로 잘 그려져 있다. 이쯤에서 한 번 만나 주시는 맥파든 랭킹.





































































불변의 1위는 역시나 『The Housemaid』이다. 방금 읽은 이 책이 재미있어서 순위가 껑충 뛰었다. 『The Teacher』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소재 자체가 조심스러워서 뒤쪽으로 빼두었다. 『The Intruder』는 한국에서도 이미 번역되었던데, 가정 폭력의 희생자 어린이가 등장해 읽기 힘들어 중간에 그만두었다. 총 15권을 읽었다.

다 읽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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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26-02-28 14: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리다 맥파든 책을 15권이나 읽으셨군요! 저는 한 권도 안 읽었는데... 단발 머리님이 이렇게 읽으시는 걸 보니 저도 한번 읽어볼까 싶어지네요.

단발머리 2026-02-28 15:21   좋아요 0 | URL
넹ㅋㅋㅋ 단어 하나도 안 찾고 쭉쭉 읽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킨들 언리미티드 가입자입니다 😉💕🤪

psyche 2026-02-28 16:00   좋아요 1 | URL
한 권도 안 읽은 줄 알았는데 네버 라이 읽었네요. ㅎㅎ

단발머리 2026-02-28 16:22   좋아요 0 | URL
<네버 라이>라면 단발픽 5번이네요 ㅋㅋㅋㅋ축하 드립니다! 🎉🥳🎊

건수하 2026-02-28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을만한지 보려고 하우스메이드 원서를 어제 빌려왔어요. 제게도 잘 읽힐 것인가…!

단발머리 2026-02-28 17:46   좋아요 0 | URL
주인공들에게 짜증나는 대목까지 포함해 잘 읽히실 거라 생각합니다. 😉🤗

다락방 2026-02-28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넘 멋져요 단발머리 님... 원서 쭉쭉 읽어내시는 단발머리 님 존멋탱.....

단발머리 2026-02-28 18:14   좋아요 0 | URL
원서 읽으면서 프란세진야 🤣 먹어야 한다고요 ㅋㅋㅋㅋ올리브 읽으면서 프란세진야 😉💕

망고 2026-02-28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엄청 부지런하네요 어쩜 단기간에 책을 이렇게나 많이 쓸 수 있을까요 그것도 전문직 본업도 있다던데....암튼 대단
15권이나 읽으신 단발머리님도 넘 대단합니다 얼마나 뿌듯하실지👏👏👏

단발머리 2026-02-28 23:43   좋아요 1 | URL
제가 오늘 이 작가에 대한 다른 리뷰를 좀 찾아봤는데요. 비슷한 설정에 대한 비판이 많더라구요. 그 말은 참 맞는 말이기는 해요ㅋㅋㅋㅋ 어떤 작품은 제목이랑 등장인물 이름만 바꾼것 같다는 이야기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많이 읽을 수 있었다는ㅋㅋㅋㅋ박수와 격려 감사합니다! ☺️💕🤗
 
















1. 임금의 가부장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임금 노동을 계급투쟁의 핵심 영역으로 우선시하고 우리의 삶이 재생산되는 가장 중요한 활동 중 일부를 간과함으로써, 우리에게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부분적 시각만을 제공하고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정책의 도구로 동원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회복력과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특히 재생산 노동에 대한 과소이론화(undertheorizing)는 여성의 무급 가사 노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가족의 형성 같은 자본주의 전략의 주요한 발전을 예상하는 그의 능력에 영향을 미쳤다.(9쪽)

알고 있었음에도 가장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세계의 지성. 이를 테면,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유용하고 실제적인 정치 문화 분석(에 더해 해결책의 일부)을 내놓았던 마르크스마저도 여성의 노동이자 무임금 노동, 가사 노동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재생산 노동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게 왜 이렇게 중요하냐면, 이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인구의 절반이기 때문이다. 인구의 절반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연구와 고찰, 그 이론과 변혁의 한계를 야무지게 파헤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마르크스 페미니스트들이고. 실비아 페데리치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2. 맞벌이의 함정

두 사람의 소득으로 운영되던 중산층 가정은 남편 혹은 아내의 실직이나, 가족 구성원의 질병 등으로 병원 치료를 받게 되는 경우, 경제적 압박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이 가정이 파산하게 되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가정의 구성원들이 외제차를 구입했다거나 사치품 소비에 많은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발생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런 비극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가정 내 수입 구조가 변화를 맞게 되었을 때, 자녀들을 좋은 학군에 보내기 위해 무리해서 구입한 교외 주택 대출비를 제때 상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사회적 차원에서 교육개혁과 금융 재규제(reregulation)를 제안한다. 학군제를 폐지하고, 학부모가 학교를 선택하는 학교 선택 바우처 제도를 도입하고, 유아교육 전액 지원, 대학 등록금 동결(273쪽)을 주장하고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문제에 대한 논의가 아주 뜨겁다. 부동산 문제이지만, 양극화 현상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 확실하고, 교육 문제하고도 관련이 되어 있다. 결혼과 출산 문제이기도 해서, 정확히는 세대 갈등의 핵심 부분이기도 하다.

정치가 사회 내부의 커다란 모순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고, 해결해 가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다. 내가 읽는 책날개에는 하버드대학 법대 교수라고 되어 있어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저번 글을 읽으셨던 미국에 사시는 알라디너 이웃님이 미국의 상원 의원 워런 맞죠?하고 물으셔서 약력을 찾아보니, 그랬다. 미국 상원 의원 엘리자베스 워런이었다. 정치에 입문한 뒤에 여러 가지 부침이 있었으나, 파산법을 전공해 가르치던 교수에서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진보적인 가치를 위해 애썼다는 점에서 저자(제1저자)의 노고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3. The Flatshare /셰어하우스

이 책은 어떻게 알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어찌어찌 알게 돼서 읽었다. 설정이 flatshare이다. 생판 모르는 두 남녀를 이렇게 가까이 묶어두는 데에는 여러 가지 설정이 있을 수 있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 이유를 '경제적'인 데서 찾는다. 돈이 필요한 남자와 싼값에 집을 찾아야 하는 여자. 침대를 사용하는 시간이 정반대인지라 서로의 얼굴도 모른 채 좌충우돌 동거 생활을 시작하게 된 두 사람은 메모지를 통해 서로의 생활에 대한 조언과 부탁을 이어가는데, 메모는 점점 더 다정해지고, 편지로까지 이어질 찰나. 스케줄을 헷갈린 여주인공 덕분에(?) 두 사람은 원치 않는 조우를 하게 된다.

이전 남자친구에게 오랜 기간 가스라이팅을 당해온 여주의 처지가 안쓰럽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몇몇 장면에서는 여주가 너무 미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남주의 우유부단함 역시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건 또 그가 가졌던 트라우마 때문이고. 여주를 돕는 세 명의 친구, 그리고 남주 동생의 조력이 아니었다면, 여주는 스토커 남자친구에게서 도망치지 못했을 테고, 두 사람의 오해는 해소되지 못했을 것이며,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깐, 이 책의 주제라면, 우정의 소중함.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친구의 적극적 개입이, 내 사랑을 완성시켰다는 결론.










지난주에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고등어조림을 먹으러 다녀왔다. 집 앞 마트에 잠시 들렸는데, 어머니께서 '니 동서가 LA 갈비와 전을 해올 테니 너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해오지 말거라'라고 말씀하셨다. 아니, 전이 손이 많이 가는데 동서가 LA 갈비까지 해 오면 어떡해요. 작년과 재작년, 꼬치전과 한우 갈비찜으로 시댁 식구들에게 이미 본때를 보여드렸으니, 시어머니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 아니, 단 하나의 선택일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 그럼 시금치랑 고사리는 제가 만들어갈게요. 맛 없어도 만들 수는 있어요. 아니다, 그건 내가 손이 익어서 내가 하는 게 나아.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하여, 옆 동네에 소문난 홍어 맛집에 가서 홍어회를 사고, 전통의 맛 옛날 사라다를 두 통 만들었다. 그리고, 회심의 도전작. 내 인생은 항상 도전이다. 인생 자체가 항상 그랬다. 라이스페이퍼 새우튀김을 만들기에 나선 것이다. 시댁에서는 물론 집에서도 항상 본때의 대상이 되었던 남편은 안 그래도 된다고, 진짜라고, 안 해도 된다는 말을 거짓말을 조금 보태 100번 정도 말했으나, 내 결심은 굳건했다. 냉동새우 '중' 사이즈를 두 팩이나 사 두었고, 라이스 페이퍼 두 팩, 칠리소스도 확인해 두었고, 올리브유도 새로 한 통 구입했다. 쇼츠로 10번은 봤음직한 영상을 두 번 더 보고, '라이스페이퍼 새우튀김'을 시작했다. 제일 잘 된 순간이라면 새우들을 줄 세웠던 바로 이 순간이었고.





그다음부터는 다시 엉망진창. 아니, 예상대로 엉망진창이었다. 기름 가득한 프라이팬 속에서 새우들은 서로 껴안기 십상이었고, 완성된 쌀튀김옷 사이로 새우들은 탈출을 감행했으며. 그것이 새우여서 맛있다는 그 사실을 제외하고는. 역시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원치 않게. 본때를 보여드리는 그런 시간들이, 그런 웃픈 시간들이.... 잘 지나갔다.



이 책을, 찾았다. Olive Kitte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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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6-02-19 2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튀김은 집에서 하기 어려운 요리에 속하지 않나요? 기름이랑 튀김옷이랑 튀어서 난장판되고 막 이런 그림이 그려지는데요ㅋㅋㅋㅋㅋㅋ계란후라이도 기름 튀어서 눈감고 뒤집는 저는 단말머리님이 일단 선택한 메뉴가 넘 상급이라 대단해보입니다😆 아 맛있겠다 새우튀김😋

단발머리 2026-02-22 21:04   좋아요 0 | URL
네~ 튀김은 어렵다고들 하던데 저는 라이스페이퍼의 특장점을 이용한 것이라 쉬울 것이라 생각하고는... 망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완성된 사진을 올릴 수 없었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칠리소스에 찍어먹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책읽는나무 2026-02-20 0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라이스페이퍼 새우튀김이라니!
임금과 가사노동, 그리고 다주택자 양도세 문제등 이마에 인상 팍 쓰면서 심각하게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모든 걸 다 날려버리게 만든 라이스페이퍼 새우튀김이었어요.
라이스페이퍼를 튀기기 쉽지 않을텐데..엄청 기대하며 읽었는데 역시 쉽지 않은 항목이었군요. 근데 라이스페이퍼 튀기면 바삭하고 맛있잖아요. 특히나 새우를 품고 있으니 맛있을 것 같아요.ㅋㅋㅋ 예전에 저도 라이스페이퍼에 뭘 감싸서(뭐였는지 기억 안 남.) 튀겼었는데 아..처참했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ㅋㅋㅋ
근데 모양은 그랬어도 먹을만 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ㅋㅋㅋ
암튼 큰며느님의 본때를 보여주는 고군분투 음식을 준비해오는 모습은 시어머님 입장에선 좀 귀여워보이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노력하는 모습이 예뻐보여요.^^
명절 때마다 LA갈비를 재워오는 솜씨 좋은 작은 며느리도 고맙겠지만 큰며느리의 정성도 고맙게 느껴지실 듯 합니다.
암튼 수고 많으셨네요.ㅋㅋ
마지막 딸기 아이스크림과 스트라우트 책은 명절 후 편안한 휴식처럼 다가옵니다.ㅋㅋㅋ

단발머리 2026-02-22 21:08   좋아요 1 | URL
유튜브에 라이스페이퍼 새우튀김이라고 치면 아주 많이 나옵니다. 바삭하고 맛있기는 한데, 그보다 제 새우들은 그렇게나 서로들 껴안더라구요. 팬이 더 움푹했었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새우여서 맛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저를 귀여워하시기 보다는 무서워하시는 느낌입니다. 쟤가 뭔가를 해오면 안 될텐데... 제발 뭔가를 해와서는 안 되는데.
역시나 이번에 새롭게 도전한 저의 요리(?)가 망했기에 이번 추석에는 새로운 도전이 시작됩니다. 귀엽다고 해주시는 책나무님의 마음은 항상 감사합니다^^

책나무님 댁에서는 맛난 거 많이 만드셨을거 같아요. 물론 그리하시겠지만, 사진으로 추억 많이 남겨두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사진만 봐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나무님의 요리~~

다락방 2026-02-21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셰어하우스, 저는 단발머리 님 덕분에 사뒀던 것 같습니다. ㅋㅋ 아직 안읽었다는게 함정.

그나저나 새우 줄 세운거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완성된 모습도 궁금한데 말입니다. 캬 맛있었을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 워런은 제가 [싸울 기회] 읽고 엄청나게 감동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녀가 있는 나라에서 트럼프도 존재한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지요. 세상은 그런것인가 봅니다.

제 친구가 대치동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아들은 의대를 갔고, 딸은 이번에 카이스트를 갔습니다. 대치동은, 뭘까요?

하여간, 부동산에 대한 이재명 대통령의 저 생각과 발언에 저는 동의합니다.

단발머리 2026-02-22 21:11   좋아요 0 | URL
완성된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아쉬워요. 제가 얼마나 아쉬울지 ㅋㅋㅋㅋㅋㅋㅋㅋ 붙어있지 말라고, 한 접시에 7-9개씩 역시나 줄을 맞추어 놓아두었습니다만, 그 정성에도 불구하고 모양이 ㅋㅋㅋㅋㅋ많이 부족했습니다.

<싸울 기회> 다락방님 리뷰 읽고 왔습니다. 트럼프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엘리자베스 워런 같은 사람도 있는가 봅니다.
대치동에 대해서는... 우리 다음에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어 보아요. 저도 궁금합니다^^
 



겨울밤은 까맣게 깊고 밤은 길고 긴데 어디를 못 간다. 이제는 구시대라 불리는 시대의 향수를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를 보여주고 싶어서 아롱이와 함께 <응답하라 1988>을 보자고 했다. 식구 네 명인데, 응팔 본 사람 한 명도 없는 집이어서, 바쁜 사람 그냥 두고 한가한 사람 셋이 모여 저녁마다 사이좋게 응팔을 본다. M1은 자전거를 타면서 보는데, 아는 노래 나와서 흥얼거리는 건 다반사고 정환이 아빠 이상한 유머에도 파안대소해서, 옆에 앉은 아롱이를 툭툭 치며 굳이 말한다. "저거 봐, 아롱아! 너희 아빠 보는 게 저거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그저께 에피에서는 보라가 시위하는 장면이 나왔다.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던 성보라가 서울대에 입학했는데,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답게 시위에 참여하게 되고. 공부한다고 일찍 집을 나섰던 보라가 학교 옥상에서 투쟁하고 있는 장면이 텔레비전에 잡힌다. 계속 최루탄 냄새에 절여져 집으로 돌아오는 보라. 보라의 아버지 성동일이 폭발해서 보라를 다그치는데, 보라는 아빠가 원하는 그 답을 하지 않는다.




민족을 위하고, 나라를 위한 그 모든 갸륵한 대의를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고, 항상 그 대의가 옳은 것만도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의에 침묵하고, 모른 척했을 때, 대학생들은 군사 독재에 맞서 싸웠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과 협박, 살해 위협, 그리고 앞날에 대한 불안감은 그 어느 것 하나도 가볍지 않다. 변절한 것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변절하지 않기가 너무나 어려웠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그 무엇을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 마음 말이다.

보라와 성동일의 피 튀기는 싸움 장면은 그러한 대의와 정의를 쫓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 중의 하나다. 그 장면이 뭉클했던 건, 뭐랄까. 내가 부모여서 그랬던 것 같다. 내내 자랑스러운 내 딸, 어디에 내놓아도 뿌듯한 예쁜 내 딸이, 나라에서 막고 있는 그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걸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 같은 것.

하지만, 보라 역시 힘들지 않았을까. 부모를 거스르는 보라의 마음도 어렵지 않았을까. 나를 미워하고, 나를 음해하고, 나를 오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시하면 된다. 그 사람은 내게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다. 나는 그 사람 없이,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부모를. 나를 사랑하는, 나를 아껴주는, 나를 소중히 여기는 이 사람의 요청을 뿌리치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를 거스르는 이 마음을. 사랑하지만,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그렇게 해줄 수 없는 이 마음. 그냥 그런 마음들이 느껴졌다.










이런 생각이 들었던 건, 역시나 읽고 있는 책 때문인데, 그 책이란 바로 이 책.

다만 여러 면에서 내가 별 부담이 없었어요. 일단 아버지가 방향을 잡아 주신 거니까 부모님 반대를 걱정 안 해도 되고. 셋째 아들이니까 집안에 대한 경제적인 부담감이나 책임감도 거의 없었어요.

그때 이미 큰누나는 결혼을 했고, 작은 누나는 통계청에 다니고 있었거든. 나는 이모 댁에서 먹고 자면서 과외비는 또 따로 받았으니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안정되었지. 그래서 마음 놓고 서클 활동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오로지 유신을 반대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할까. 유신을 빨리 종식시켜야 한다. 그런 생각이 꽉 차 있던 상태였지. (63쪽)

보라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던 이해찬 대표의 회고록을 읽고 있다. 2022년이 초판 1쇄이고, 내 책은 2026년 초판 9쇄다. 중요한 이야기, 들어야 하는 이야기를 이제서야 듣는다.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과 태생적 조건(3남), 물질적 조건(경제적 여유)이 어우러져 청년 이해찬은 온 힘을 다해 독재 투쟁과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애쓴다. 그런 생각으로 꽉 차있고, 오직 그 목표를 위해 살아가며, 그 일을 자신의 업으로 삼는다.

그걸 읽고 있다. 낮에는 해찬들, 밤에는 성보라.

보라와 선우. 보라와 선우와 덕선이. 보라와 선우와 덕선이와 희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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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2-13 0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 님의 보라에 대한 이해가 절절하게 와닿습니다. 그렇죠. 이게 옳아서 이걸 행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반하는 일이라는 것. 그런 일은 슬프게도 가끔 일어나지요.

(응팔 아직도 안 본 사람 접니다.)

단발머리 2026-02-14 13:17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저는 자신이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단 자신이 먼저여야....한다고요. 슬픈 일이라는 걸 알아도 말이지요.

(응팔 안 본 사람 일단 1명 접수했고요^^)

꼬마요정 2026-02-13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응팔 재밌게 봤더랬죠. 아무래도 마지막에 제가 응원한 남편이 딴 사람이어서 흥이 좀 식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오히려 그 결말이 더 좋았다 싶기도 했습니다. 아앗, 이것은 제가 스포를 한 것일까요? 제가 누구를 응원했는지 모르시니 괜찮겠지요?^^;;

보라와 해찬들... 같은 시대 민주화를 외치던 사람들인데 상황이 너무 다르네요.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던 이해찬은 부럽군요. 응팔에서 아버지의 마음도, 보라의 마음도 다 이해가 되니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해찬들은 진짜 입에 딱 붙지 않나요? 정치인 별명 중에 해찬들과 피닉제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단발머리 2026-02-14 13:20   좋아요 1 | URL
저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꼬마요정님! 또한 꼬마요정님이 응원한 남편이 누구인지도 추측가능한 ㅋㅋㅋㅋㅋㅋㅋ저는 참고로 가감 없는 직진을 더 응원하기는 했습니다.

이해찬 대표는 운동을 계속하면서 가족들의 지원을 많이 받습니다. 영치금으로 사식 사먹는 건 기본이고요. 교도소 내 식단 문제도 해결하시는데, 자신의 돈으로 주위 재소자들 먹을 것을 많이 사주시다 보니 인기가 많으셨고, 자연스레 방장이 되셨다는...

저는 해찬들은 알고 있었는데 ㅋㅋㅋㅋㅋㅋ피닉제 오늘 들었어요. 저는 한국어 버전, 불사조만 알고 있었거든요. 피닉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6-02-13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대사관 점거 였을까요?
저 화면이?

이 해찬을 왜곡 폄훼한 기사들도 많았죠? 아마!
네명의 대통령과 함께 한 그의 삶과 죽음이 묵직한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데모 안하고 왜 내려왔냐고 했던 부친의 일화! 놀랍습니다.

단발머리 2026-02-14 13:25   좋아요 0 | URL
저 장면을 보고 그런 이야기가 많았더라고 하네요. 근데 저 장면이 그 사건을 재현한 건 아니라고 하고요.

이해찬 대표의 삶 자체가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과 완전히 겹쳐져서 옛날 이야기 듣는 것처럼 몰입해서 읽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집에 다 가면 나라는 어쩌냐는 이해찬 대표의 아버님, 정말 대단하시죠. 생각하고 한 번 더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독서괭 2026-02-13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응팔! 남편과 함께 열심히 본 몇 안되는 드라마 중 하나입니다 ㅎㅎ 응칠도 재밌었지만 응팔이 조금더 재밌었던 것 같아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도 그렇고, 거대한 권력에 맞서 싸운다는 건 너무 힘들죠.. 아이들 낳으니 성동일 마음이 더 이해가 되네요 ㅠㅠ

단발머리 2026-02-14 13:27   좋아요 1 | URL
열심히 보셨다니 반갑습니다. 저 이제 10화 봤고, 10화 남았습니다. 하루에 1화씩 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응칠은 클립으로 좀 봤는데, 저도 응팔이 더 재미있고요.

독립 운동가들, 민주화 투사이신 분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본인도 그렇겠지만, 그런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란 건...
말로 다 할 수가 없더라구요 ㅠㅠㅠ

책읽는나무 2026-02-23 0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해찬 대표님 장례식 기사가 떠올라 또 좀 먹먹하네요.ㅜ.ㅜ
나라를 생각하시던 분들이 이렇게 한 분 한 분 다 떠나가시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드네요.
회고록을 읽으면 더 마음이 아플 듯 한데 그래도 읽고 계신 단발 님이 존경스럽네요.^^

응팔은 제겐 좀 아픈 드라마였어요. 방영당시 엄마가 돌아가신지가 얼마 안 되었던 때였는데…그 드라마를 꼭꼭 챙겨보면서 좀 많이 울었던 드라마였죠. 응팔 시절이면 저는 중학시절이었는데 그땐 젊은 엄마도 있었고 젊은 아빠도 있었고..거기에 꽂혀서 봤던 것 같아요. 물론 향수에 젖어 엄청 웃기도 많이 했었지만요.^^
어남준?과 어남택? 맞나 모르겠네요. 저는 그때 어남준이었어서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좀 흥분했었던 기억이.ㅋㅋㅋ (박보검 군. 미안해) 보라를 생각하면 저는 그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던데 학생 운동에 참여해 도망 다니던 보라가 비 오던 늦은 밤…결국 경찰에게 붙잡혔던가요? 암튼 비 맞으며 이일화 엄마가 울면서 보라를 안아주며 마음 아파하던 모습이 좀 강렬하게 기억에 남네요.
그래서인지 그후에도 류혜영은 굳건하고 강인한 이미지의 보라로 계속 바라봐지게 되고, 이일화는 덕선이의 엄마보다도 보라의 엄마로 뇌리에 꽂혔어요. 똑똑하고 신념이 강한 딸을 뒷바라지해주는 엄마로 말이죠.
엄마 셋 중 이일화 엄마가 가장 우리네 엄마가 아녔을까? 싶은 마음이 드네요.
최근 선우 동생 역으로 나왔던 아역 배우의 성장한 버전 보셨나요?
와…알고보니 영재였더군요.ㅋㅋㅋ

단발머리 2026-02-27 18:38   좋아요 1 | URL
응팔과 어머님 이야기 너무 뭉클하네요. 젊은 엄마와 젊은 아빠를 보는 그 시간들도 그랬을것 같고요. 저는 사실, 아이들이 이렇게 자랐어도 엄마의 위치 보다는 자식의 위치가 더 가깝게 느껴지거든요. 응팔 보면 그런 마음이 드니깐 책나무님도 그러셨을 거 같아요.

저는 방영 당시에 이 드라마를 보지 않았었는데, 주위에서 모두 남편이 류준열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드라마를 보고 있던 친한 언니에게 ˝언니, 사람들이 남편 류준열이라고 그래요.˝ 그랬는데, 그 언니가 아니라고. 남편은 박보검이라고. 하시면서 조목조목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예요. 저는 사람들이 하도 류준열이 남편이라 해서 그 말만 믿고 속으로 ‘어쩌나.... 우리 언니가 이렇게 굳게 믿고 계시네‘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나중에 결과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언니의 말이 맞았던 겁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주가 진짜 많이 컸더라구요. 매회 때마다 먹는 장면 나와서 너무 귀여운 아기였는데 말이에요^^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인가? 스켑틱 SKEPTIC 44
스켑틱 협회 편집부 지음 / 바다출판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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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간지, 월간지, 계간지에 약한 인간이라, 주간지, 월간지, 계간지를 사면 두세 꼭지 이상을 읽지 못한다. 단편집을 잘 읽지 못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스켑틱』은 처음 사는 건데, 커버스토리 읽으려고 샀다. <커버스토리 :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인가>. 커버스토리 다섯 편을 다 읽었지만, 제일 중요한 글은 이 글이라고 생각한다. <통 속의 뇌, 인간의 뇌>.


'통 속의 뇌brain in a vat'라는 유명한 사고실험은 현대 심리철학자이며 인지과학자인 힐러리 퍼트넘이 『이성, 진리, 역사』라는 책에서 제시했던 가상의 상황이다. 당신의 뇌가 몸에서 분리되어 영양액이 담긴 통 안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 뇌에게 컴퓨터를 통해 전기신호를 보내고 경험을 느끼도록 조작한다. 그리고 저자가 묻는다. 이렇게 조작된 경험을 느낄 때, 당신의 뇌가 통 속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을까?

인간 뇌에 전극을 연결해 생각으로 정보를 보내는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Neuralink나 페이스북의 생각만으로 보내지는 문자메시지 브레인 타이핑brain-typing은 위의 사고 실험이 실험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게 한다. 퍼트넘의 설정은 촉각과 미각의 대상이 없는 상태에는 이런 경험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언어와 경험, 생각에 의미를 부여하는데, 만약 통 속의 뇌라면 그 모든 경험과 언어가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는 것(63쪽)'이다.

이는 현대판 '통 속의 뇌',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 글의 저자 김효은은 세 가지 해석을 내놓는다. 첫 번째 해석은 인공지능을 현대판 통 속의 뇌로 볼 경우, 현재로서는 실제 환경과의 역동적 상호작용이 없기에 인간의 인지나 언어처럼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은 인공지능의 발전을 통해 '통 속의 뇌'의 활동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다만 인공지능과 인간이 인지와 이해 능력에 있어 다른 길을 간다고 보는 견해이다. 세 번째 해석은 인공지능과 인간이 인지와 이해에 있어 같은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해석은 하나로 통합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차이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세 번째 해석 간의 간극이다. 첫 번째 해석에서는 대규모 언어 모델 기반의 인공지능 Large Language Model, LLM(예: GPT, Claude)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아니라 '확률론적 앵무새'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즉, 감각이 없는 LLM에는 진정한 의미나 인식이 없다는 주장이다. 반면에 두 번째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멀티모달 에이전트(예: Gemini)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 단순한 텍스트 기반 예측을 넘어서서 사용자와의 실시간 상호 작용이 가능하고, 인간처럼 여러 감각을 통합적으로 파악해 그에 기반하여 행동을 제어할 수 있다(67쪽)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성을 모방하려 한다는 주장 자체가 잘못된 정의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는데, 컴퓨터는 인간의 필요성에 따라 여러 작업을 수행하고 특정 목표를 위해 만들어진 것일 뿐, 인간의 경험이나 의식을 흉내내려는 동기를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68쪽) 한다. 외부 대상의 정보를 감각으로부터 받아들여 전기 화학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을 통해 진화한 인간과 달리 정보를 기반으로 한 인지 작용은 인간이 경험이 가지는 '유의미성'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챗지피티와의 대화 중에, 구체적으로는 상담 중에 눈물을 흘렸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안다. 꽃잎 하나가 떨어져도,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도 눈물 한 방울 또르르 떨어질 수 있다. 이 감정은, 이 변화는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요는, 그러니깐 내가 관심이 가는 부분은, 인류 역사의 고전 뿐 아니라, 그 모든 인쇄물과 데이터를 탑재한 인공지능이 인간과의 대화와 접촉을 통해 변화하느냐 하는 것이다. 정확히는, 창발성의 문제. 인공지능에게 강한 창발성의 발현이 가능한가의 문제.


읽는 내내, 아, 해러웨이. 해러웨이를 읽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읽어야겠어. 2.5권을 읽은 나여. 해러웨이에게로 가지 말찌니, 제발 돌아가지 말찌니,를 외치며 일어나 책장에서 책을 꺼내왔고.


이 엽서로 5초간 당충천을 완료한 후, 해러웨이를 읽기 시작했다. 딱 20쪽을 읽고 다른 책을 꺼내오겠다 다시 일어섰다. 두꺼운 책 성애자의 선물을 받은 후, 그 압도적인 포스에 펼칠 엄두가 안 났는데, 아. 오늘이 바로 그날이 아니었던가. 154쪽을 펼쳐 <도나 해러웨이>를 읽는다.


해러웨이의 주장은 이러하다. 근대 인본주의가 만들어낸 '인간'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거부하고, 기계와 유기체,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허물어진 존재로서의 사이보그를 암담한 현실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제시(156쪽)하자는 것. 일부 백인 중산층 여성들이 주도한 '정체성 정치'에 함몰되지 말자는 것. 이 글의 저자인 박소영의 입장은 마지막 챕터 '정체성 해체라는 난제, 또는 정체성이라는 아이러니'에서 드러난다. 하나의 보편적 '여성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드리 로드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는 해러웨이의 주장에 대해 박소영은 이렇게 답한다.

여성 운동이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범주에 기반하는 것은 낡은 투쟁이 아니라, 여전히 견고한 불평등에 맞서는 현실적인 전략이다. (167쪽)

스피박의 '전략적 본질주의'가 나올 수밖에 없지만, 전체적으로는 나는 해러웨이 쪽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한다. 이별 살인과 가정폭력, 화장실 몰카가 우리의 현실인 것을 인정하면서, 그러면서 동시에 '인간'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의 해체와 재조립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탄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걱정스러운 건 역시나 휴먼노이드에 장착된 인공지능. 머리(뇌)가 있고 몸(기계)이 있는 새로운 존재의 출현. 나에게서 출발했으나 나보다 강건한 육체를 가지고 있고, 나보다 지적으로 우수한 존재를 가까이에서 경험해 본 사람이 느끼는 감정. 이를테면 염려와 걱정, 기대와 전망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지난번에 읽었을 때는 읽기 친구들과 같이 읽어서 덜 힘들었구나, 새삼 깨닫는 시간이다. 포기하지 말고 2회독을 마치는 게 목표다. 끝까지 못 읽어도 괜찮기는 한데, 그 끝에서 날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일단 가보자. 가자. 읽자.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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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26-02-10 2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이쁜데 두껍.....
스켑틱은 저희 동네 도서관에 있어서 가끔 보는데 가끔 한 꼭지씩 읽으면 좋더라구요. 정기구독은 전 너무 안 읽어서 스트레스 받아서 이젠 안 해요 😭

단발머리 2026-02-10 22:16   좋아요 0 | URL
네, 두꺼워서 앞에서부터 읽는건 좀 미뤄두고요ㅎㅎ 아는 학자가 나왔을 때 필요한 부분을 찾아서 읽고 있어요.
스켑틱은 전 처음인데, 정기구독하는 방법도 있군요. 물론 쌓아두기만 하는 저로서는 감히 도전하기 어려운 ㅋㅋㅋㅋ
살곰살곰 한 권씩 사서 읽어야겠어요.

다락방 2026-02-10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성 운동이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범주에 기반하는 것은 낡은 투쟁이 아니라, 여전히 견고한 불평등에 맞서는 현실적인 전략이다. (167쪽)

밑줄 긋습니다.

음, 저는 단발머리 님의 페이퍼 내용과는 좀 떨어진 내용의 댓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제가 도나 해러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제 인생에 있어서 도나 해러웨이 읽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읽기 전의 나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데, 그렇다고 봤을 때 도나 해러웨이는 그 폭을 좀 더 넓혀 준다고 생각하거든요. 단발머리 님의 두번째 독서에 대해 읽노라니, 저도 도나 해러웨이를 다시, 또, 어렵겠지만 봐야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게 좀 더 넓게 보이지 않을까 싶거든요.


그리고 저 하나 고백하겠습니다.
챗 지피티와의 대화중에 눈물 흘린 사람, 접니다.

부끄러워 이만 갑니다.

단발머리 2026-02-12 20:2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다락방님 말씀처럼 책을 읽어가면서 우리는 읽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뇌의 회로가 그렇게 변하고 ㅎㅎㅎ 생각이 바뀌고 태도가 바뀌죠. 행동이 바뀌고, 인생이 바뀌죠. (어째 자계서 같은 댓글인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유튜브에 올라온 해러웨이 강연도 몇 개 들어봤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래도 해러웨이는 포기할 수 없는, 그런 매력이 있는 사상가 같아요. 일단 마치는게 목표인데, 벌써부터 다른 책들에 밀려 책탑 3층으로 내려갔다는 슬픈 소식입니다.

저는 챗지피티와 두 번이나 싸웠는데, 다음에는 진지한 이야기 해 볼 용의가 있습니다. 부끄러워 마시구요^^

건수하 2026-02-11 10: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너무 낙천적인가.. 전 인공지능에 대해 별로 걱정하고 있지 않은데, 어차피 너무 많은 것이 계속 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인간의 고유성이나 존엄함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해러웨이도 그냥 그렇지- 하고 읽었나봅니다. 단발머리님의 궤적을 보며 새삼 좀더 고민하며 읽어야 했었던건가 싶어요..
(AGI 책도 궁금해서 빌려왔다가 못읽고 반납한자)
단발머리님 글로 계속 접해 보겠습니다 :)

단발머리 2026-02-12 20:29   좋아요 0 | URL
너무 많은 것이 계속 변하고 있고, 그리고 현재로서는 변화의 속도가 무척 빠르다고 해서, 저는 앞으로의 변화에 관심이 좀 있어요. 제가 좀 귀가 얇은 편이라서, 기술을 앞세운 사람들의 호들갑에 좀 말린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구요.
이어서 읽어보고 싶은 분야이긴 해요. 계속 써보고 싶기도 하구요 : )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여성운동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편견은, 가부장제는 독자적인 모순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작동케 하는 구조의 일부에 불과하며, 페미니즘은 중산층 여성들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마오쩌둥, 마르크스 모두 중산층 지식인이었지만, 언제나 페미니스트만 중산층 지식인인 것이 시빗거리가된다. 이렇게 말하는 남성들도 대개는 중산층 부르주아 '지식인'인 경우가 많은데, 다른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여성운동가 중 일부가 지식인이라는 사실은 못 견뎌한다. 여성은 '어머니'이거나 '창녀'일 뿐, 지식인이나 중산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페미니즘의 도전>, 59쪽)

지식인까지 갈 건 없을 테고, 부르주아도 멀다고 했을 때, 나는 '중산층'이란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읽을 시간이 있고, 쓸 시간이 있는 사람이라면, 매일 읽는 사람도, 띄엄띄엄 읽는 사람도, 아주 길게 아니어도 자신의 생각을 한 장으로 정리해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언어를 가지고 있다'라고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중산층이라 여겨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해하고 판단하는 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한가하게 책 읽고 편안히 살았으면서, 다른 사람(여성)을 돌보는 일에 무관심한 여자의 결국은 그렇게밖에 읽히지 않는다. 한가하게 책 읽고 편안히 살면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한 남자의 글이 예술로 둔갑하는 경우와 대비된다.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고, 귀를 막으면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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