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임신 26주째이다. (32쪽)
눈에 쏙 들어오는 문장이다. 아이를 낳은 후, 자신의 임신 과정을 돌아보면서 이 책을 쓴 게 아니고, 아이를 양육하면서, 그 고통과 기쁨의 순간을 기록하며 쓴 게 아니다. 아기를 품고, 뱃속의 아기를 느끼며 이 글을 쓴다. 저자는 이 책을 그렇게 썼다.
재생산권에 대한 논의 때문에 제일 먼저 떠오른 책은 로이스 로리의 『더 기버』, 『시녀 이야기』, 그리고 이 책에 소개된 『멋진 신세계』이다. 저자가 묻는다.
왜 사람들은 인공 자궁으로 인해 자녀를 공동으로 양육하는 페미니즘적 유토피아보다 권위주의적 디스토피아를 더 쉽게 상상할까? (29쪽)
왜 그럴까. 재생산권이 여성의 특권이 아닌 한계가 분명하다면, 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데 주저하게 되는 걸까.
페미니즘을 읽어가면서 아무래도 여성들의 책을 많이 읽게 된다. 그동안 남성들의 책만을 읽어왔으니, 앞으로 계속 여성들의 책만을 읽는다 해도 5:5에 이르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을 발판으로 한 남성 우위 문화의 본질을 꽤 뚫어본 여성들은 천재다. '천재적인'으로는 부족하다. 그냥 천재다. 그중에서도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을 나는 탑티어 중의 하나로 꼽는다. 1970년대에 파이어스톤은 이미 이렇게 썼다.
여성 억압의 핵심은 자녀 출산과 자녀 양육의 역할이다. (『성의 변증법』, 109쪽)
그렇다. 임신과 출산, 양육의 과정은 지극히 고단하고 괴로운 시간을 '약속'한다. 덜한 사람이 있고, 잘 참는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임신과 출산, 자녀 양육은 여성의 생존과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벗어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파이어스톤의 주장은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에 이렇게 정리되어 있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카를 마르크스가 노동자의 해방에 경제적 혁명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던 것과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여성 해방에 생물학적 혁명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프롤레타리아가 경제적 계급 체계를 타파하기 위해서 생산수단을 장악해야 하는 것과 같이, 여성들은 성적 계급 체계를 타파하려면 재생산수단의 지배권을 장악해야 한다. 공산주의 혁명의 궁극적 목표가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 계급의 구분을 종식하는 것이듯이, 페미니즘 혁명의 궁극적 목표는 양성적 사회에서 성의 구분을 종식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92쪽)
재생산수단의 지배권을 장악할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현대의 여성들이, 특별히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자신의 자궁의 '재생산'을 위한 접근을 자발적으로 금지함으로써 이러한 생물학적 혁명에 참여했다고 생각한다. 생존과 번식의 명령, 자연의 지휘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은 페미니즘 혁명을 실천했고, 이를 통계로 입증해 보였다. 인구 감소로 인한 사회적 혼란은 그들의 결정보다 오히려 더 미시적인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물학적 혁명은 또 다른 방식으로 가능하다. 인공 자궁의 창조.
상상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고민되는 부분이다. 나는 아이를 둘 낳았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낳았는데, 둘 다 자연분만이었고, 한 아이는 4개월, 다른 아이는 15개월을 모유수유했다. 이제 둘 다 성인이 되었고, 나름 자신들의 삶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내게 아이들은 '내 아가'이고, '내 새끼'이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고단한 시간에 양가 부모님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내가, 아이 키우는 고단함을 말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라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라리 엄마인 나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들고, 끌어안기 힘든 순간들이 있었다. 내 새끼였는데도 그랬다. 내 배 아파서 낳은 내 새끼가 나를 미치게 할 때, 혈연이라는 환상에 세뇌된, 새로운 가족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내가 아니었다면 그 폭풍의 밤을 어떻게 견뎌냈을 것인가.
『친밀한 착취』에서 알바 갓비는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감정노동과 돌봄 노동, 그리고 모성에 대한 요구를 해결할 방법으로 '가족 폐지'를 주장한다. 이는 이성애 이외 다른 사랑에 대한 고찰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자본에 대한 투쟁, 근본적으로는 '사유 재산 폐지'를 포함한다. 하지만,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역사적 사회주의 실험이 이미 실패한 상황에서, 인간 역사에 축적된 모순을 혁파할 새로운 모델이 가능한가. 혈연이 아닌 방식으로 맺어져 친밀한 관계로 이어지는, 백인 이성애 가정 모델이 아닌, '또 다른'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 것인가. 상상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좀 멀게 느껴진다.
이 책의 초반부는 미숙아들의 생존을 돕기 위한 방법으로서 '인공 자궁' 연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준다. 엄마의 뱃속(자궁) 안에서 보호받던 미숙아들은 이른 출산으로 인해 죽음 이외의 다른 가능성을 예측할 수 없었는데,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미묘하게 줄다리기하던 과학자들에 의해 이제 초미숙아도 현대적 의료 시설과 전문가들의 보살핌에 의해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문제는, 언제부터이다. 과학적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이것이 가능하다면 몇 주부터 인간은 '인공 자궁' 안에서 자랄 수 있게 될 것인가. 아예 임신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 난자와 정자의 수정은 실험실에서 정교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 수정란이 인공 자궁에서 40주를 자랄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임신하지 않고 아이를 만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주위의 쌍둥이들은 많은 경우 시험관 아기들이다. 성별은 여성과 남성. 인간 삶을 결정하는 제일 주요한 요인 중 하나인 성별은 수정란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선택'된다. 부모의 바람대로, 한 명의 여자아이와 한 명의 남자아이로. 난임 치료를 위해 시작된 이 여정이 어디로 갈지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 『나를 보내지 마』 속 '헤일셤'이 이 지구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 다 읽지 못한 나의 결론은 이렇다. 이러한 논의, 사회적 합의와 상관없이 인간은, 이 오만하고 겁대가리 없는 인간들은, 인간의 자궁이 아닌 실험실 비커 위에서 인간을 조합해 만들어내고, 인공 자궁에서 그 인간을 키워내면서 이 세계의 새로운 창조주가 될 것이다. 인간은 끝내 신이 되려고 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폭주하는 과학자들과 돈밖에 모르는 자본가들은 끝내 인류를 그 길을 인도하고 말 것이다. 복제양 돌리가 가능하면, 복제돼지도 가능하고, 복제소도 가능하다. 설마 거기에서 인간을 빼놓을 것인가.
재생산 유토피아가 정말 유토피아일까. 상상력 없는 내게, 아직은 디스토피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