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여자
라비 알라메딘 지음, 이다희 옮김 / 뮤진트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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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주식 얘기를 하는 불장의 시대에 난 아직도 문학을 읽고 있다. 여전히 책이 좋아서 그럴 것이다. 아니 관성으로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뭔가 다른 것을 할 엄두도 안 나고 사실 귀찮기도 하다. 세상을 등지고 홀로 떠 있는 섬처럼 외롭게 책을 읽고 있지만 라비 알라메딘불필요한 여자같이 책 속에 책이 많이 나오면 반갑기보다 좌절을 더 하게 된다. 여기에 들어있는 책 중 읽은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여태껏 읽은 것들을 이 책의 주인공인 알리야처럼 적시적소에 인용하며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닐 수 있느냐면, 그러지도 못한다. 외로운 섬은 작은 바람에도 사라지고 마는 작고 허술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는가 보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청춘이다고 말하는 사람을 존경한다. 어떻게 살면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궁금하다. 요즘 몸과 함께 마음도 늙어버린 느낌이 많이 들어서인지 불필요한 여자의 소설 속 여러 얘기 중, 알리야의 노년이 더 눈에 들어왔다. 72세의 알리야가 움직이는 공간에서 그녀가 느끼는 미세한 고통과 좌절이 이해되고 심지어 그 감각마저 내 몸에 전달되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세상과 단절한 채 혼자 살아가는 알리야의 삶은 위태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지난 주, 3개월 동안 전주에서 근무하는 딸아이에게 다녀왔다. 밤늦게 도착해 피곤한 것 같아 식탁위에 있는 쏠라 c를 먹고 자겠다고 했다. 다른 비타민처럼 이 약도 물로 삼키면 될 줄 알았는데, 딸아이가 이건 씹어 먹는 거고 두 알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시키는 대로 두 알을 씹어 먹고 물을 마시고 잤다. 다음 날, 간단한 요기를 하고 딸아이와 나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딸아이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역시나 피곤할 수 있으니 비타민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아 식탁 위의 쏠라 c 두 알을 한꺼번에 삼키고 물을 마셔버렸다. 알약 두 개가 목에 딱 걸리는 순간, 그제야 이 약은 씹어 먹는 것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목에 걸린 알약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계속 가슴을 치고 물을 마시며 넘어가기를 기다렸고, 그 사이 병원에 갈까도 생각했다. 5분쯤 사투(?)를 벌이니 알약은 서서히 목을 지나 식도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목이 많이 아팠다.

 

이 겁나는 상황에서, 나는 내 몸만 걱정해야 하는데도 머리에서 계속 나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나를 내가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자꾸 잊어먹고, 되풀이되는 황당한 일이 단순한 실수로 인정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럴까? 왜 이리 멍청한 사람이 되는 걸까?’라고 계속 푸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음만은 청춘일 수가 없는 것이다. 마음도 덩달아 초췌해지고 쪼그라들며 작아진다. 노년이란 자신을 명쾌하게 설득할 수 없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여자도 나의 경우와 비슷한 사건으로 시작된다. 알리야는 노안으로 설명서를 잘못 읽어 염색용 샴푸를 정량보다 10배나 더 많이 사용해 머리색이 그만 파란색으로 변해버렸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멀티태스킹에 약한 알리야는 72세의 혼자 사는 여성이다. 50년 동안 서점에서 근무했으며, 새해 첫 날에 새 책을 번역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37권의 책을 번역했다. 하지만 번역된 원고는 출간하지 않고 자신의 집에 쌓아두고 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자신이 정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아왔지만, 이혼당하고 난 뒤에 그녀는 서점, , , 음악만을 선택한 은둔의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은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그녀에게 평화로운 고립의 삶을 허용하지 않았던 적도 많았지만, 다행히 수차례 위기를 넘겨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알리야는 평생 문학과 함께 살아왔다. 바깥세상의 관습에 순종하지 않고 문학에 파묻혀 칩거하며 산다. 유일하게 한나와 교류하며 살았지만, 한나가 죽고 다시 혼자만의 삶을 이어간다. 문학이 그녀의 삶을 지배하기에 그녀에게 모든 것은 문학으로 인용되고 표현된다. 알리야에게 책은 운명이다. 책은 그녀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며 세상과 단절해도 좋은 이유이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많이 든 그녀에게 고립은 위험하고도 힘들다. ‘이 나이가 되니 삶은 계속되는 패배의 인정이다. 노년과 패배는 끝까지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피를 나눈 형제이다(p.78~79)’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불필요한 여자라고 인정한다. ‘가까스로 작동하는몸으로 인해 힘들지만 그럼에도 읽는 사람인 알리야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언제나 그 정체성을 사랑한다.

 

이 책에는 알리야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혼란스러운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살아가는 것(최근에 이스라엘의 네타냐후는 또 레바논에 미사일을 날렸다), 알리야가 읽은 책과 음악에 관한 얘기도 많고, 여성과 우정이 엮어내는 슬픔도 있다. 특히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알리야의 현재의 모습과 생각이 다른 책의 문장으로 인용되며 유머러스하고도 애잔하게 표현된다. 책 속에 이렇게 다양한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 좋다. 생각이 많아지며, 내 삶을 여기에 대비시키기 좋기 때문이다. 레바논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관심 가지게 되었다.

 

알리야는 끊임없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결코 녹록치 않았던 그녀의 삶 속에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은 빼고, 나머지 모두는 알리야가 자신의 인생을 주도한다. 쉽지 않았을 알리야의 선택, 고집과 묵묵함이 멋있었다. 거기에 담겨있는 회한과 허무를 받아들이는 태도도 좋았다. 소설의 마지막에 웃기게도 와장장창 깨져버리는 알리야의 은둔 생활도 재미있었다. 이웃 여자들에게 발견된 숨겨진 번역 원고도 어떤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그것으로 뭔가 많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알리야가 혼자가 아닌, 조금은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늘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무엇이 되고 싶다고 바랄 수조차 없다.

그와 별개로, 내 안에는 온 세상의 꿈이 다 있다.

-알바로데 캄포스, p.409]


벚꽃이 만발한 봄날에, 도라야키(밀가루, 달걀, 설탕을 섞은 반죽을 넣어 둥글납작하게 구워 두 쪽을 맞붙인 사이에 팥소를 넣은 화과자-위키백과) 가게에 한 할머니가 찾아온다. ‘아르바이트 구함이라는 쪽지를 보고 자신이 이 가게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76세의 요시이 도쿠에(키키 키린)’는 손에 상처가 많고 손가락이 불편하지만 아무 문제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 가게의 점장인 센타로는 도쿠에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하며 자신이 만든 도라야키 하나를 도쿠에에게 준다.

 

도라야키 가게를 운영하지만 단것을 싫어하고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얼굴에 세상의 모든 비애를 짊어진 것 같은 사장 센타로는 사실 빚을 많이 져 이 가게에 빚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하고 있다. 마치 지옥에 있는 사람처럼 그는 재미없이 하루하루를 견뎌나가고 있다. 이 가게에는 단골인 여중생 와카나가 자주 온다. 젊고 철없는 엄마와 함께 사는 와카나는 가난하기에 학원도 다니지 않고, 엄마에게 고등학교도 진학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 우울한 소녀이다. 그렇지만 와카나는 불만스러운 삶을 살기보다 센타로의 말벗이 되어주고, 보다 더 긍정적이고 따뜻하게 사는 학생이다.

 

며칠 후 다시 찾아온 도쿠에는 센타로에게 자신이 만든 단팥소를 먹게 한다. 그 맛에 반한 그는 도쿠에를 고용한다. 여태껏 업소용 팥을 사용했던 센타로는 도쿠에와 함께 이제 새벽 일찍부터 팥을 삶고 으깨고 설탕을 넣어 소를 만든다. 그들이 합작해 만든 도라야키는 너무 맛있어졌고,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 문 열기 전부터 손님들이 줄을 선다. 모처럼 센타로의 얼굴은 밝아졌고 웃게 된다. 그러나 벚꽃이 지고 파란 잎이 무성해진 어느 날 , 가게 주인이 와서 전하는 말은 충격적이다. 도쿠에는 한센병 환자라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소문이 퍼져 가게엔 손님이 한 명도 찾아오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도쿠에는 더 이상 가게에 오지 않는다.

 

다시 얼굴에 그늘이 지고 침울해진 센타로는 와카나의 제안으로 단풍이 든 가을에, 도쿠에를 찾아간다. 사실 소문은 와카나가 그녀의 엄마에게 얘기해서 나기 시작한 것이었고, 센타로는 도쿠에를 지켜주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었다. 와카나와 비슷한 나이에 병을 앓게 되어 한센병 격리 시설에 들어간 도쿠에는 그때부터 자유를 얻지 못하고 갇혀 살아야만 했다. 결혼하고 임신도 했지만 아이는 낳을 수 없었다. 평생 그곳에서 팥을 이용해 과자를 만드는 일을 했었다.

 

가게 주인이 자신의 조카와 같이 일하라고 해 더 곤란해진 센타로는 와카나와 다시 도쿠에를 찾아가지만 이미 그녀는 저 세상으로 간 상태였다. 센타로는 도쿠에가 자신에게 남긴 말에 용기를 얻어 가게에서 독립한다. 다시 벚꽃이 만발한 봄날에 사람들이 봄을 즐기는 한가운데에서 도라야키를 판다 그는 큰소리로 미소 지으며 도라야키 사세요! 도라야키 왔어요!’라고 외친다.

 

소설 불필요한 여자와 영화 : 단팥 인생 이야기70대 여자의 이야기다. 둘 다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지나왔지만, 한 사람은 자발적 의지로 세상과 자신을 단절시켰고, 다른 사람은 타의에 의해 자유를 잃었다는 큰 차이가 있다. 소설의 내용도 좋았고 나 역시 알리야와 같은 노년을 보내고 싶다는 로망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 을 보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알리야보다 도쿠에에 연민과 정이 갔고 더 따스함을 느꼈다. 책에 파묻혀 책 속의 문장에서 세상을 들여다보기보다, 세상과 직접 만나며 그 모든 것에 말을 걸며 극진히 모시는 도쿠에의 품위와 정성을 닮고 싶었다. 센타로와 와카나에게도 선하고 좋은 영향을 주는 노년의 모습도 아름다웠다. 모처럼 영화 보면서 펑펑 울었다.

 

[항상 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그것은 팥이 보아 왔을 비 오는 날과 맑은 날들을 상상하는 일이지. 어떠한 바람들 속에서 팥이 여기까지 왔는지 팥의 긴 여행 이야기들을 듣는 일이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언어를 가졌다고 믿어. 햇빛이나 바람의 이야기도 들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지. 그래서일까? 지난밤에 울타리를 넘어 불어오는 바람이 사장님에게 연락을 해 보라고 속삭이는 듯 느껴졌어. 아무 잘못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데도 타인을 이해하지 않는 세상에 짓밟힐 때가 있어.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도 있지. 이런 인생 이야기도 들려줄 걸 그랬어. 언젠가는 사장님이 사장님만의 특별한 도라야키를 만들어 낼 거라 믿어. 스스로 개척한 길을 걸어가야 해. 사장님은 해낼 수 있어.

 

주중 행사인 산책 중 달콤한 냄새에 끌린 날이었지. 사장님을 처음 보았는데 너무나 슬픈 눈빛이었어. 뭐가 그리 슬프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슬픈 눈을 하고 있었지. 그것은 예전의 내 눈이었어. 평생 담장 밖으로 못나간다고 인정했을 때의 내 눈이었지. 그래서 난 이끌리듯 가게 앞까지 갔던 것 같아. 내 아이가 태어났더라면 사장님 정도의 나이가 됐겠지. 우리 사장님, 그 날 보름달은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어. ‘네가 봐 주길 바랐단다. 그래서 빛나고 있었던 거야.” 우리 사장님, 잊지 마.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세상을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므로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 각자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 -센타로에게 들려주는 도쿠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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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여자
라비 알라메딘 지음, 이다희 옮김 / 뮤진트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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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는 들어있는 것이 많다. 삶은 물론이고, 여러 책과 문장들, 여성, 노년, 관습, 우정, 레바논과 베이루트, 비극들...한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인생을 이어가야 한다는 고집과 묵묵함도. 책의 지나친 인용이 지치게도 하지만 ‘불필요한 알리야’가 책 자체이니 인정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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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 중 열린책들 세계문학 58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박혜경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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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대적 뿌리라고 단정해 러시아 정교를 전복시키려 하지만, 악령 들린 니힐리스트는 또 다른 종교가 필요하다. 숨겨놓고 언젠가 나타날 것이라 선동하며, 보여주지는 않는 광기의 허상이다. 거기엔 예수와 같은 순교자와 희생자가 설계된다. 모든 혁명은 이런 식이고, 그래서 폭력적이며 허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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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왜 헌인릉에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딸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거기에 갔었다. 초여름 경이었고, 난 헌인릉의 존재도 몰랐으니 아마 남편이 가자고 했을 것이다. 지금은 왕릉의 모습보다 사람이 없는 고즈넉한 곳에서 유모차를 밀고 천천히 산책한 기억만 남아 있다. 왕이든, 속인이든, 죽음 앞에서는 언제나 무기력하고 쓸쓸함만 남는다. 그런 곳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아이를 데리고 우리는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 무심코 세월이 흘러버렸다.

 

책을 읽다 책에 나온 어떤 단어에 마음을 뺏길 때가 있다. 성해나 작가의 경장편인 두고 온 여름에서 두고 온이라는 말과 인릉이라는 단어에 생각이 그만 책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내 인생에서 두고 온 것들이 얼마나 많을지, 거기에 있을 수많은 내가 그리웠다.

 

사진관을 운영했던 기하의 아버지는 인릉으로 자주 출사를 갔다. (소설에서 왜 헌인릉이라 하지 않고 인릉이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는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사진기로 보는 피사체는 이미 시작부터 왜곡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도 사진에는 완벽히 담길 수 없다. 소설의 등장인물인 기하와 재하는 사진기 안에서만 존재하는 피사체처럼 서로를 담고 싶은 모습과 크기로만 볼 수 있는 관계다.

 

기억도 못할 만큼 일찍 어머니를 잃은 기하는 아버지와 둘이 산다. 그가 19살일 때 아버지는 아들이 있는 여자를 만나고 그들은 같이 살기 시작한다. 생각지도 않은 다른 가족이 나타나 기하는 겉돌기 시작한다. 반면 새어머니의 아들인 재하는 기하와 아버지를 잘 따른다. 4년간 함께 살았지만 기하는 끝까지 새어머니와 재하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 항상 그들에게 날 선 감정을 내보인다.

 

두 가족의 결합은 여태껏 살아온 방식에 균열이 일어나는 일이고, 자연스러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당연히 내 아이에게 사랑이 많이 가는 것임에도 아버지는 재하를, 새어머니는 기하를 먼저 배려하고 눈치를 보게 된다. 이런 것에 기하는 아버지에게는 섭섭함을, 새어머니에게는 부담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서먹하고 어색하지만 가족이기에 그들은 같이 사진을 찍고, 밥을 먹고, 서로에게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들이 인릉으로 나들이 간 날, 아버지가 재하에게 보인 다정함에 기하의 마음은 완전히 닫히고 만다. 새어머니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끊긴 마음은 이어지지 않는다. 기하가 대학에 들어가 기숙사로 나가고 세 사람이 살 때, 셋은 다시 인릉으로 간다. 거기서 거대한 사슴 떼가 지나가는 모습을 환상처럼 보고 셋이서 사진을 찍는다. 박복한 사람에겐 늘 그렇듯 재하 친아버지의 횡포로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헤어지고, 재하의 삶은 잘 풀리지 않는다. 차갑게만 굴고 정을 주지 않던 기하도 마찬가지다.

 

서른일곱이 된 기하는 스트리트 뷰를 보다 재하 모자를 우연히 발견해 재하를 찾아간다. 많은 세월이 지나 그들에게는 남들보다 더한 인생의 무게가 씌워져 있었고,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한다. 내세우고 싶은 것도, 공통된 화제도 없다. 서먹함으로 헤어질 찰나 재하는 기하에게 인릉에 가보자고 한다. 인릉은 그들에게 과거를 공유할 수 있는 장소였다. 생각과 입장이 달랐지만 가족이라는 모습으로 같이 추억을 만든 곳이었다. 끝까지 인릉을 인조의 능이라고 착각했고, 민망했지만 둘이 같이 사진을 찍었다. 앞으로 기하와 재하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둘은 그들이 가족이었을 때를 그리워 할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나도 기하처럼 남에게 상처준 일이 많았다. 지금에야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날을 세웠는지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소설 속 기하를 보며 안타까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때의 나 또한 나였고, 기하 역시 그 때의 기하였다. 그 한 때에 두고 온 것이 아쉽고 그리운 건 그때의 나를 바라보며 측은함을 느껴서일지도 모르겠다. 기하와 재하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옥춘당 조각을 집어 입안에 넣었다. 달고 화한 맛이 혀끝부터 천천히 퍼졌다. 입안에서 사탕 조각을 굴리며 내가 왜 이곳에 왔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재하에게 해주어야 했을 말들을 뒤늦게나마 중얼대보았다. 잘 지냈니, 보고 싶었어. 잘 지냈으면 좋겠다, 미안해 같은 평범하고도 어려운 말들. 이제 와 전송하기에는 늦어버린, 무용한 말들을. -p.131]

 

 

소설 두고 온 여름을 읽으며 헌인릉에 꼭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딸아이가 어릴 때 다녀왔던 곳을 먼 훗날 다시 다녀 온 기하와 재하처럼 나도 가고 싶었다. 친구 카리나 님께 같이 가자고 했다. 성해나 작가의 소설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를 읽고 민주화운동기념관을 가고 싶어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카리나 님이 그 소설을 읽었는데 이번에도 나를 위해 <두고 온 여름>을 급하게 읽으셨다. 소설에 언급된 장소에 가면 그 곳 자체도 좋지만 거기에서 소설 속 얘기를 할 수 있어 더 좋고 아름답다.

 

평일 오전의 헌인릉은 한적했다. 거의 우리 둘 만 있었다. 봄이 한창인 그곳엔 벚꽃을 비롯한 여러 꽃이 피어 있었다. 갑자기 꽃샘추위가 오는 바람에 소나무 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가 웅장했다. 소설 속에 들어있는 홍살문오리나무가 단연 먼저 눈에 띄었다.


[인릉은 아버지가 즐겨찾는 출사지였다. 울창한 오리나무숲이 봉분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 풍경이 계절마다, 순간마다 달랐다. -p.32

아버지는 능 한편에 서 있는 오리나무를 가리켰다. 우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선퇴가 줄기에 붙어 있었다. 선퇴를 톡 건드리자 나뭇잎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p.34]

 

오리라는 단어에서 처음엔 동물 오리가 연상되었는데, 직접 본 오리나무의 키가 워낙 커 오리(五里)가 거리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가에 이정표 삼아 5리마다 심었다고 해서 오리나무라고 한다.


[숲길을 지나 능에 다다랐을 즈음, 아버지가 불현듯 홍살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돌길을 뷰파인더로 유심히 들여다본 뒤 허공에 포커스를 맞추고 몇차례 셔터를 눌렀다.

산자도 망자도 이 문으로 드나든댄다. 보이냐 너희도? -p.33]

 

정문으로 들어가면 인릉의 홍살문이 있다. 문을 지나 능을 보기 위해 위쪽으로 올라갔지만 길이 없어 그만 잔디를 밟고 능 앞으로 가고 말았다. 왕릉이 있는 곳이라 당연히 능을 볼 수 있을줄 알았고 뒤늦게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푯말을 보게 되었다. 인릉은 인조가 아닌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으로 봉분이 하나이다. 헌릉은 조금 안쪽으로 산책길을 따라 들어가면 있다. 이곳 역시 능 앞으로 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것 같아 우리는 홍살문에서 멀리 있는 능을 봐야만 했다.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이 따로 있어 봉분이 두 개이다.

 

헌인릉 바로 옆에 큰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 앞에는 철제로 된 바리게이트가 촘촘히 있었다. 바리게이트는 지그재그로 서 있었고 그 건물에서 나오는 자동차는 미로를 빠져 나오는 것처럼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저 건물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저렇게 첩첩이 바리게이트를 쳐 놓았는지 궁금했다. 집에 와 검색해보니 그 건물은 말로만 듣던 국가정보원이었다. 인릉이 국정원과 바로 붙어 있어 인릉 앞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인릉 앞까지 가 사진을 찍었으니 국정원에 잡혀 갈지도 모르겠다.


-하늘에서 본 헌릉 능침, p.232, 왕릉 가는 길, 신정일, 쌤엔파커스


-인릉 능침 정면,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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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6-04-10 07: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글 읽다가 괜히 제 ‘두고 온 여름’ 같은 기억 하나 꺼내보게 됐어요. 아마 다들 하나쯤은 그런 시간과 사람이 있겠죠.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데, 가끔은 그때의 나를 다시 마주하고 싶은 순간이요. 아니면, 꼭 마주하고 싶은 건 아닌데 괜히 마음만 복잡해지는 순간들이기도 하고요.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가까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끝내 다 담지 못하는 관계일수록 결국 말 한마디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늦게 떠오르는 말들이 오래 남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렇게 글로 헌인릉의 한적한 고요함까지 느끼게 해주셨으니… 다행히(?) 안 붙잡혀가신 걸로 해야겠네요 ㅎㅎ

페넬로페 2026-04-10 08:16   좋아요 1 | URL
곰돌이님 말씀이 제가 이 글에 쓰고 싶은 말 전부입니다. 책을 읽다 생각이 많아지면 오히려 리뷰 쓰기가 힘들어지더라고요. 할 말은 많은데 그게 정리가 잘 안돼서요. 살아오면서 ‘두고 온 여름‘이 얼마나 많은지, 그 생각에 잠겨 자꾸 소설 읽다가 딴 생각했어요. 그때의 미숙했던 내가 싫은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도 지금부터라도 위에 인용한 문장에 들어 있는 평범한 말들을 꼭 하며 살고 싶어요.
헌인릉에 다시 가 봐 좋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행히 ㅎㅎ

책읽는나무 2026-04-10 1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그곳을 한 번 찾아가보는 것은 나름의 정취와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나 과거 가족과의 추억이 깃든 장소라면 더 특별할 것 같구요.
앞서 혼모노와 페넬로페 님의 리뷰가 늘 같이 떠오르는데 이번에 이 책도 또 페넬로페 님의 리뷰 사진과 사연들이 또 떠오를 것 같아요.
성해나 작가는 곧 페넬로페 님. 제겐 그리 기억될 것 같습니다.ㅋㅋㅋㅋ
늘 리뷰를 통해 성해나 작가의 소설의 분위기를 미리 느껴보게 되네요.
잘 읽고 갑니다.^^

페넬로페 2026-04-10 16:36   좋아요 1 | URL
우연히 성해나 작가님 책을 연속적으로 읽고 가고 싶은 곳이 생겼어요 ㅎㅎ
특히 인릉은 오래 전 다녀온 곳이라 한 번 더 가보고 싶었어요. 책나무님 말씀처럼 헌인릉 둘러보면서 책에 나온 여러 문장이 생각나더라고요. 같이 간 친구와 짧은 독서토론도 했어요.
밀리의 서재의 리딩 케미스트리에서 성해나 작가님이 자신의 소설에 대해 리뷰 써주는 독자에게 고맙다고 하셨는데 제가 그 독자에 해당되면 좋겠습니다.

잉크냄새 2026-04-10 2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책 속에 나온 곳을 찾아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한번쯤 따라하고픈 멋진 추억일 듯 합니다.

페넬로페 2026-04-10 23:10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소설 속 이야기들이 더 깊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도 생각나고요. 그들 입장이 되어 그때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이해도 해봅니다. 고즈넉하니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 좋은 추억 만들고 왔어요.

독서괭 2026-04-11 1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헌인릉이 어딘가 찾아봤어요. 서초구에 있군요?! 사진이 아름답네요.
두고 온 것들을 떠올리신 걸 보다보니 <사라진 것들> 책도 생각나네요. 내 인생에서 두고온 것들.. ㅜㅜ

페넬로페 2026-04-12 17:52   좋아요 1 | URL
헌인릉은 서초구에서도 아주 한적한 곳에 있어 조용해서 좋더라고요. 독서괭님께서 두고 온 것들은 무엇일까요? 궁금합니다.
 
에티오피아 구지 G1 딤투 함벨라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6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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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미 있는 커피를 좋아하는 나에게 에티오피아 커피의 출시는 언제나 반갑다. 지구 온난화로 에티오피아 원두의 생산량이 감소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에티오피아 커피는 진한 맛의 남미 커피와 섞어 마시면 더 좋다. 여러 대륙의 커피가 모이면 맛이 좋아지듯, 전쟁 없는 지구의 평화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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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4-04 0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버전의 에티오피아 커피를 사서 마시고 있었어요.
지구 온난화로 커피 생산량이 감소한다니 조금뜨끔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렇군요.
나이들어가면서 카페인 어택을 자주 당해 커피양을 좀 많이 줄였는데 커피 생산량에 발 맞춰 더 줄여야하나?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눈을 좀 뜨고 있으려면..^^
그나저나 전쟁은 언제 끝날까요?ㅜ.ㅜ

페넬로페 2026-04-04 16:45   좋아요 1 | URL
저도 요즘 수면의 질이 안 좋아서 카페인을 줄이고 싶은데 잘 되지 않습니다.
진하게 한 두잔 마셔야 정신이 말짱해져요.
조금씩 줄여 나가야 하는데 잘 실천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전쟁이 어서 끝나야 할텐데 석유 문제로 우리나라가 직격탄을 맞는 것 같아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