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59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박혜경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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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소설로 기획된 이 작품에 풍자가 가득하다. 허무, 관념, 신이 이중적 구조로 얽히며 폭력과 죽음, 웃음이 뒤섞인다. 악령 들린 자들은 돼지떼에 실려 타인을 파멸시키고 스스로 사라진다. 독보적인 도선생님의 필력이 대단했지만, 그가 자주 인용하는 용서와 참회는 이곳에서만은 많이 과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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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부코스키 타자기 위픽
박지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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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부코스키의 작품을 아직 읽지 않아 작가에 대해 잘 모른다. 어쩌면 앞으로 그의 작품을 읽지 않을 수도 있고, 읽더라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어떤 소설의 제목에 찰스 부코스키라는, 살아있는 작가의 이름이 들어 있어 흥미로웠다.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는 순전히 제목 때문에 읽은 책이다. 박지영 작가에게 찰스 부코스키가 주는 의미는 무엇이며, 왜 제목에 그의 이름을 넣었는지 궁금했다. 사실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를 읽다보면 찰스 부코스키보다 타자기가 더 중요한 단어라는 걸 알게 되지만 왜 하필 찰스 부코스키였을까?

 

생애전환기 건강검진은 만 40세와 만 66세에 해당하는 건강보험 가입자와 의료급여 수급권자를 대상으로 하는 건강검진 프로그램이다. 이 소설은 두 번째 생애전환기 건강검진으로 시작된다. ‘건강‘60여 년의 생이라는 단어에서 이 단편 전체가 노년에 대해 서술된 것 인줄 알았다. 몸의 쇠락, 가난과 소외, 외로움에 대한 노년의 삶을 이해하지만 지겨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첫 부분에서부터 너무 흥미로운 내용이 나와 생각할 것이 많았다. 책을 읽는 동안 를 거기에 대입시키고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 재미있기도 했다.

 

소설 속 두 번의 생애전환기에는 다음 생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자율적으로 선택 가능(p.13)'하다. ’생애 전환 시행령이 국민 법안으로 채택된 후, 첫 번째 생애전환기(40)에는 이대로 계속 살 것인가, 아니면 전환 할 것인가의 가부를 결정한다. 이때 바로 전환된 생으로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 평균수명 120세를 기준으로 보통 두 번째 생애전환기(66)에 전환을 많이 한다. 그때 자신이 최종 선택한 형태의 삶으로 전환된다.

 

평균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늙어간다는 건 어느새 재앙이 되었다. 병을 달고 사는 세월이 길어지고, 그 기간만큼 다른 사람의 도움과 의료비용을 필요로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늙음을 관리하기 위해 보편적으로 부담해야 할 세금도 매년 증가한다. 개인적으로도 늙음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며 삶에 대한 의미를 없애버린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나머지 삶을 사람이 아닌 다른 것으로 전환해 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하지만 합리적이고 좋은 이유에도 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사회적 비용과 전환을 원하는 것에 대한 적절한 배분, 그것에 대한 관리 등, 어쨌든 이 제도도 국가의 관리 하에 엄격하게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내가 전환하고 싶은 것으로 무조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전환하고 싶지 않다는 인간의 의지도 사회적 비용 때문에 비판받을 수 있다.

 

60년의 삶을 그저 그렇게, 평생 과민성대장증후군을 달고 산 승혜는 두 번째 생애전환기 건강검진을 앞두고 있다. 첫 번째 생애전환기에 이미 전환하겠다고 정해 놓았다. 미리 다른 종으로의 전환을 선택해 노후 자금을 마련하지 않아도 되어 보다 여유 있게 살아왔다. 노인이 되어 가난하게 홀로 아프게 살기 싫어 별 고민 없이 전환을 선택했다. 전환을 결정하면 3지망까지 희망하는 생을 적어야 한다. 승혜가 1지망으로 적은 것은 맥반석이었다. 맥반석 정도는 쉽게 될 줄 알고, 2,3 지망은 적지 않았다.

 

소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난 이런 경우 어떤 결정을 할 것인지 생각했다. 나 역시 당연히 전환을 받아들일 것 같다. 복잡하고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내가 희망하는 1지망의 생은 벚나무가 되는 것이다. 높이 자라는 나무가 되는 것도 좋고, 봄이면 아름다운 꽃을 피워서도 멋지다. 잎이 하나하나 떨어져 땅에 모여지는 모습도 아름답다. 여름이면 잎이 무성해진 벚나무는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준다. 가을에 곱게 물든 잎은 낙엽이 되어 거리를 풍성하고도 운치 있게 만든다. 2지망은 소설이 쓰여지는 종이. 3지망은 천천히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승혜는 맥반석으로의 전환을 거부당한다. , 그러면 나도 벚나무로의 전환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세상과 사람에 대해 준 게 별로 없기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그늘을 만들어주며 예쁜 낙엽이 되는 벚나무로 전환되는 것이 거부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인간에서 다른 것으로의 전환도 어려운 결정인데 원하는 것이 바로 채택되지 않는 것 또한 힘들 것이다. 생태계의 균형과 소요될 자원이나 비용을 고려해야 하는 지구인의 삶은 언제, 어디서든 만만치 않다. 결국 승혜는 타자기로의 생을 부여받는다. 똑같은 무생물이지만 자연 상태의 무생물로의 전환은 더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했다. 타자기가 된 승혜는 기억예치소라는 곳에 있다가 여름이 지난 바닷가에서 해변의 타자기가 되어 생을 마감한다. 이 과정에서 아름다운 얘기가 너무나 많다.

 

작가의 말에서 박지영 작가는 너는 늙어서 뭐가 될래?’라고 묻는다면 해변의 타자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작가 아버지의 말의 잃어버림, 자신의 노화를 겪으며 불안과 소멸의 방식을 농담의 형태로 고민(97)'해 보고 싶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이처럼 좋은 소설로 승화된 것 같다. 상상된 재미있는 소재로 인간의 존엄과 늙음에 대해 깊이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마냥 무겁게 느껴지는 늙음을 이 책이 잠시나마 경쾌하게 해주었다. 기능을 잃어가는 육신보다 쓸쓸하지만 해변의 모래를 뒤집어 쓴 타자기로 남는 것이 더 견디기에 낫다는 생각을 해본다.

 

밥을 먹다 남편과 딸아이에게 이 소설의 내용을 들려주며, 당신들은 무엇으로 생애 전환을 하고 싶은가 물었다. 남편은 독수리라고 했고, 딸아이는 큰 고래라고 했다. 그들은 상상의 나래를 펴며 독수리와 고래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다른 인간으로의 전환을 말하지 않는 것에 다소 안도했지만 그래도 내 가족의 열정과 그에 따른 피로가 느껴져 마음속으로 웃었다. 나의 벚나무와 함께.

 

찰스 부코스키는 타자기를 사랑했던 여러 작가 중 한 명이다.

 

[온점. 마침표.

그것이 인간 여자 고승혜가 해변의 타자기의 생을 거쳐 전환된 마지막 생의 모습이었다. 마침내 승혜는 고요히 단단하고 가장 강한 작은 돌, 하나의 마침표로 남았다. -p,92]

 

고요히 단단하고 강한 온점. 마침표.

전환하지 못할 내 삶도 그렇게 온점을 찍으며 마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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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6-05-21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맥반석이요? ㅋㅋㅋ 너무 의외네요. 페넬로페님의 벚나무는 고개가 끄덕여집니다만.
생애전환기라는 말이 새삼 좋은 말로 느껴지네요. 그냥 늙어가는 게 아니라 전환하는 거..
저는 평소 까치를 좀 부러워했는데 - 천적도 없고 이미지도 좋고- 미국 국립공원에 있는 나무도 좋을 것 같아요 ㅋㅋ
 
갱년기 요가 - 한 권으로 완성하는 갱년기 리셋 솔루션
산토시마 가오리 지음, 한귀숙 옮김 / 버터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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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여성의 갱년기는 사회나 가정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내야 할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에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안 그래도 힘든데 갱년기의 습격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여성을 더 피폐하게 만든다. 이 책은 갱년기 여성에게 큰 도움은 안 되지만, 그럼에도 잠깐의 릴렉스에 이용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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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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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많은 소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거의 나뉘어 출간된다. 분절된 책은 가벼워 읽고 휴대하기 편하지만, 1권을 읽고 바로 2권을 시작하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다. 가뜩이나 벽돌책은 앞의 내용과 뒤를 연결하기 쉽지 않은데, 읽기를 잠깐만 쉬어버려도 소설의 흐름을 따라잡기 힘들다. 그러나 안나 카레니나1권을 읽고 거의 한 달 반 만에 2권을 읽었지만 괜찮았다. 내용이 어렵지 않아 잘 연결되었고, 2권만을 독자적으로 떼어놓아도 완성도가 높았다.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대작인 이유는 소설의 그 어느 부분에서도 형식이나 내용이 느슨해지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독이라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읽을수록 이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나싶게 새로운 것이 많았다.

 

사랑을 느끼는 것은 잠깐이다. 사랑은 대상을 향하지만, 어떤 사람의 숨겨진 내면의 모습도 들어있다. 안나에게 폭풍처럼 들이닥친 사랑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존재를 자각하게 한다. 안나에게 남편 카레닌은 아들 세료자의 아버지라는 역할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을 알게 된 이상 다시 카레닌에게 돌아갈 수는 없다. 안나는 거짓된 삶을 계속 살수 없었다. 찰나적으로 시작된 사랑은 안나를 카레닌의 둥지에서 벗어나 브론스키의 둥지로 옮겨가게 만든다. 그것은 여성으로서, 시대적 한계로써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브론스키 역시 남자라는 사실이 안나를 불행하게 할 것이다. 안나가 여자이기에 그녀가 추구하는 삶은 자립적이지 못하다.

 

이 소설의 실제 주인공은 톨스토이의 삶이 투영된 레빈이라고도 한다. 그는 자신의 영지에서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농업 혁명을 시도하지만 자주 벽에 부딪힌다. 농노 해방이후, 농민은 아직 농노와 노동자 사이에 어정쩡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들을 노동자나 민중으로 인식해 앞서나가는 레빈에 비해 농부들은 전근대적인 생각과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민중을 사랑하지만, 그들의 만사태평과 방종과 만취와 거짓말(p.12)’에 레빈은 좌절하기도 한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지만 그럼에도 레빈은 농부의 생명력을 사랑하고, 그들을 향한 이해로 다가간다. ‘개인의 이해와 공공의 이해 사이에 놓인 필연적인 연관을 찾기 위해(p.30)' 분투한다.

 

레빈과 농부들이 함께 풀베기를 하는 모습은 압도적이다. 이론적인 레빈에게 낫을 휘두르는 솜씨와 더위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지치지 않고 화살처럼 똑바르게 풀을 베어 나가는 농부의 관록에서 레빈은 경외심과 노동의 참모습을 본다. 그들과 점심을 먹고 크바스를 마시며 행복을 느끼고, 그들과 가까워진다. 소설에서 이 풀베기의 장면은 시각적이고도 웅장하다. 레빈이 자신이 아닌, 농부의 시선에서 개혁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안나에게 직접 임신 사실과 결별 통보를 들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카레닌의 심리 변화도 재미있고 현실적이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던 자신의 삶에 균열을 가져 온 안나에게 카레닌은 그녀가 잘못했다고 단정하며 안나를 벌하기로 한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행복한 생활을 용납하지 않고 사교계에 알려지기도 원치 않는다. 그는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안나를 사랑해서가 아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다. 안나가 그것을 거부하자 카레닌은 안나에게 치욕과 고통을 주기 위해 이혼을 원한다. 조건은 아들의 양육권을 주지 않는 것이다. 안나가 브론스키의 아이를 낳다가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가자 카레닌은 그녀에 대해 연민을 갖지만, 안나가 회복되자 다시 안나를 고립시킨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작가는 테레자와 토마시의 반려견에게 카레닌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여기에 많은 의미가 있겠지만, 밀란 쿤데라가 카레닌을 싫어해서 개에게 그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는 말도 있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사랑의 시작은 순간적이지만 그것을 지켜내는 데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결혼이라는 법적인 제도뿐 아니라 사회적 관습과 사교계의 시선, 자녀와 경제적 능력 등 여러 요소가 안정적으로 결합될 때, 사랑은 유지된다. 불륜으로 시작된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위태롭다. 공교롭게도 브론스키와 카레닌의 지위 역시 위협받는다. 어느 것 하나 그들에게 유리한 것이 없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확고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 불리해지자 안나의 마음은 흔들리고 불안해진다


톨스토이는 카레닌의 심리 변화뿐만 아니라 안나의 마음과 생각의 변화도 탁월하게 묘사한다. 안나가 받은 모욕과 수치는 그녀를 고립시킨다. 그로 인해 야기된 불안은 안나를 피폐하게 만들어 브론스키와의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 자신의 의도와 선택에 의해 안나는 점점 파멸되어 가지만, 그녀가 여성이었기에 짊어져야 할 무게와 편견, 비난은 분명 공평하지 않다. 만약 카레닌이 불륜을 저질렀다면 안나와 같은 무게를 짊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안나의 오빠인 스테판 오블론스키의 경우를 봐도 이것은 분명하다.

 

작가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도 그랬지만, <안나 카레니나>에서도 죽음에 대해 명쾌하게 서술한다. 레빈의 형, 니콜라이 레빈의 죽음을 통해 톨스토이는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여러 태도에 대해 묘사한다. 니콜라이는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진다. 그런 니콜라이의 죽음 앞에 레빈은 쉽게 다가가지 못하지만, 키티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는 침착하고도 지혜롭게 대처한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현상을 의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을 앞둔 인간의 고통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환자도 힘들지만,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는 건강한 사람의 견딤과 상실감도 힘들 수밖에 없다. 레빈은 형과 키티를 통해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살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p.563).‘ 레빈은 형의 죽음을 통해 오히려 사랑과 삶에 강하게 이끌린다.

 

안나는 카레닌이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아들 세료자를 보러 카레닌의 집으로 간다. 안나의 사랑으로 카레닌은 세료자를 다정하게 대하지 않고 다그친다. 안나의 사랑을 응원하지만, 앞으로 세료자에게 닥칠 상황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안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리디야 이바노브나 백작부인도 혐오스럽다. 도대체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안나는 이탈리아 오페라 가수인 카를로타 파티의 공연을 보러가고 싶었지만 브론스키는 반대한다. 혼자 그곳을 간 안나는 모든 사교계 사람들이 그녀를 무시하고 혐오한다는 것을 느낀다. 안나는 브론스키와의 관계가 삐걱대기 시작한다고 생각하고, 브론스키 역시 안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했을 때의 안나의 똑같은 행동과 표정에 이제는 분노와 증오를 느낀다. 그의 마음에 짜증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의 두 주인공인 안나와 레빈은 성장 중이다. 안나는 자신에게 돌아가고 있고, 레빈은 이론과 사상에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방식은 다르지만 둘 다 삶과 사람을 사랑한다. 다만 그들의 성장이 파멸과 결실로 끝맺을 것 같다는 나쁜 예감이 든다. 안나에게 성장의 다른 말은 불행일지도 모른다. 여자인 안나에게 그 시대는 불리했고 지금도 여전하다.

 

[“알고 싶지 않아요. 내가 한 일을 후회하냐고요? 아뇨,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다시 똑같은 상황으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할 거예요. 우리에게,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는가예요. 다른 것은 생각할 것도 없어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곳에서 따로 지내고 서로 만나지도 않는 거죠? 왜 난 갈 수 없다는 거예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녀는 눈동자에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광채를 띠고 그를 쳐다보며 러시아어로 말했다.

"만약 당신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요. 당신은 도대체 왜 날 바라보지 않는 거죠?"

-p.643~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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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5-14 1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인물 묘사가 입체적이고 탁월했으면 개에게까지 이름 짓고 저주했을까요? ㅎㅎ

페넬로페 2026-05-14 20:29   좋아요 0 | URL
정말이지 톨스토이의 인물 묘사와 상황 설정은 탁월합니다. 카레닌이 이해되면서도 밉더라고요.
쿤데라의 마음을 알겠습니다 ㅎㅎ
 













나에게 비극 읽기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 비극과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작품에 애통함과 절절함, 다수의 죽음이 있어야 비로소 비극으로 인식된다. ‘아서 밀러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은 분명 비극이지만, 내가 읽은 고전에 비해 조금 단순하며 담백한 느낌이 들었다. 쉽게 읽혀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독파할 수 있었다.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감정들과 집착, 그것으로 인해 모든 것이 파멸되는 비극의 전통적 요소가 들어 있었고, 뉴욕 브루클린 노동자 집단의 삶을 통해 장소와 시대가 주는 한계도 잘 녹아 있었다.

 

극에서 비극으로 치닫는 이유는 다양하다. 운명과 예언, 탐욕과 질투, 야망과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 복수 등이다. 보통 이런 이유들과 많은 인물들이 얽혀 극은 절정으로 향한다. 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난 다음에야 잘못된 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비극의 끝은 모두가 파멸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사실 시작은 한 사람의 악마적 욕망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역시 주인공인 <에디 카본>의 성격적 결함이 결정적이다. 특히 여기엔 다른 고전 비극에서 볼 수 있는 조력자나 이간질을 하는 선동자가 전혀 없다. 철저히 에디 카본 스스로 모든 잘못을 하며 그의 심리 변화로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 모두를 고통에 빠뜨린다. 그래서인지 이 희곡은 고대 희랍 비극의 구성을 가져와 코러스 역할을 하는 변호사 <앨피에리>를 등장시킨다. 그는 독백으로 에디의 행동에 대해 설명하고 경고도 하며, 직접 찾아와 호소하는 에디에게 법적으로 해결할 일은 하나도 없다고 냉정하게 말한다. 법은 결과론적 사건에 대해서만 적용될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뉴욕 브루클린 항만 근처인 레드훅이라는, 부두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슬럼가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써진 이 극은 한 인간이 갖는 감정의 변화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준다. 보호와 안전이라는 미명아래 덧씌워진 것은 실제로 질투와 집착의 촘촘한 그물이 되고 그것은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는 아집으로 변형된다. 극도의 가난으로 미국으로 밀항한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 역시 약자에게 주어진 선택 없음을 대변한다. 이 모든 대립과 갈등은 끝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막장을 보여준다. 그래서 코러스 앨피에리는 계속 중간을 강조한다.

 

[앨피에리 : 요즘 우리는 대개 중간쯤에서 타협을 하고 나는 그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거룩하며 나는 그(에디 카본)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그의 죽음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알면서도 전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를 기억할 때 뭔가 삐뚤어지게 순수한 무언가가-순수한 선이 아니라 순수한 그가-생각난다는 걸 고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진실을 온전하게 밝혔고 그래서 나는 모든 지각 있는 의뢰인들보다 그를 더 사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간쯤에서 타협하는 게 훨씬 낫고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일종의경각심을 가지고 그를 애도합니다.

-p.158]

 

앨피에리가 말한 것처럼 에디 카본의 죽음은 정말 허망한가? 에디의 비극은 결국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질투로 일어난 일이다. 오셀로에게는 천하의 악인, 이야고가 있었지만, 에디는 온전히 자신만의 도덕적 결함으로 주위 사람들과 자신을 파괴한다. 어쩌면 자신에게만 순수한 이 남자의 죽음으로써의 결말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이 힘들어 내가 나를 제어할 수 없을 때, 심지어 견딜 수 없는 수치와 모멸감을 느꼈을 때조차, 우리는 언제나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 삶은 내 맘대로 되지 않고, 세상은 나에게 무수히 좌절을 주지만, 비극으로 가지 않는 길은 결국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작가 아서 밀러는 이 희곡에 서문을 첨가했다. 작가의 생각과 관점인 담긴 희곡이 연극으로 상연되었을 때, 그것은 작가의 의도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 무대 장치, 배우가 말하는 방법과 액션의 디테일에 따라 극의 모습과 의미는 무수히 달라질 수 있다. 아서 밀러는 서문에서 그것을 인정한 듯하다.

 

[에디는 여전히 눈물의 대상이 되는 남자는 아니다. 이 극은 관객을 눈물바다에 빠뜨리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행동을 우리의 행동과 연관시키고, 우리 자신을 고립된 심리적 개체로서뿐 아니라 우리의 동료나 과거와 연결된 존재로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p.11, 작가 서문 중에서.]


오랜만에 혼자 연극을 보고 왔다.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된 국립극단의 <그의 어머니(Mother of Him)>이다. 영국 극작가 에반 플레이시의 희곡인데 국내에 아직 책으로 번역되어 있지는 않다.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처럼 이 극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이 기승전결의 성격을 뛴다면 그의 어머니는 사건의 결과를 먼저 말해주고 시작한다.

 

브렌다의 장남인 매튜(미성년자)는 하룻밤 사이 세 여자를 강간한다. 연극은 이 엄청난 사건 후, 가택연금 중인 매튜와 그와 같은 공간에서 살아야하는 엄마 브렌다, 동생 제이슨의 일상에서 시작된다. 집 앞에는 엄청난 취재진들이 몰려와있다. 매튜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사건의 원인은 매튜와 브렌다가 아닌 기자들에 의해 파헤쳐진다.

 

그들은 점점 매튜보다 브렌다에게 초점을 맞춘다. 브렌다를 아는 모든 사람을 인터뷰해 과거에 그녀가 했던 말까지 가져와, 사건의 원인을 브렌다에게로 가져간다. 점점 지쳐가는 브렌다는 엄마로서 매튜를 지켜야하지만 실제 감정은 싸늘하게 식어간다. 또한 둘째 아들인 제이슨을 보호하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키워내야 하기에 그를 구속하고 매튜와 연결되지 않게 한다. 차가워지고 상실감에 빠진 브렌다는 매튜를 변호사에게만 맡겨두지만, 결국 마지막에 용기를 내어 매튜와 함께 법정에 출석한다.

 

연극을 보는 내내 브렌다의 입장이 되었다. 답답했고, 벽이 느껴졌다. 도대체 세상은 왜 그렇게 엄마라는 존재에게 온갖 부담을 주는지 잘 모르겠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아이를 성장시키지 않는가? 아이의 모든 것의 결과의 원인은 왜 항상 엄마인지.....만약 내가 매튜의 엄마였다면 난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룻밤에 세 여자를 강간한 매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에디 카본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원인을 분석해야하는지도 모른다. , 영화, 뉴스, 연극에서 파헤쳐지는 인간의 모순과 딜레마는 다양해 그것의 해석 역시 어렵다. 이런 이유로 비극은 한 없이 재생되고 우리는 힘들게 그 속에 들어가 또 다른 감정을 작동시킨다

비록 그것이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처럼 흐릿하고 주관적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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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6-05-04 06: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매달 한두 번 대학로에 가면, 보고 싶은 공연들을 많이 마주치게 돼요. 페넬로페님은 이미 알고 계실 수 있겠지만, 대학로에 희곡 전문 서점 <인스크립트>가 있어요. 서점을 운영하는 젊은 부부 배우님이 있는데, 지난주 토요일에 남편 배우님이 나오는 공연을 보고 왔어요. 다음에 대학로에 공연 보러 오시면 <인스크립트> 방문해 보세요. 희곡 도서들이 많이 있어요. ^^

페넬로페 2026-05-04 08:55   좋아요 1 | URL
<인스크립트>
기억해 놓았다가
꼭 들러보겠습니다.

감은빛 2026-05-05 09: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삶도 뜻하지 않게 마주치는 별 것도 아닌 작은 계기로 희극이 되기도 하고 비극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상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페넬로페 2026-05-05 09:51   좋아요 1 | URL
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욕망과 집착을 조금만 줄이면 되는데 그게 또 잘 안되는 것이 인간이잖아요.

청아 2026-05-05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은 종종 연극을 보러 다녀요. 확실히 공연장에서 받는 에너지는 여타 장르와 다른 것 같아요.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읽어보고 싶네요. 역시 중용을 추구해야 하는 거죠? ㅎㅎ-집착에서 벗어나고자 늘 애?는 쓰는 청아가^^

페넬로페 2026-05-05 17:11   좋아요 2 | URL
중용을 추구해야 하는데, 그걸 행하기 어려워 여전히 책을 읽고 도를 닦는 중이예요. 돌아서면 까 먹으니 차에 기름 넣듯 계속 책을 읽어야 하는가 봐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