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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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많이 보았던 미국 서부 영화의 주된 배경이 텍사스였다. 사람이 전혀 살지 않을 것 같은 황량한 곳, 마을 한가운데에 어김없이 있는 술집, 문을 열면 언제나 거친 사람들이 가득하고, 항상 그곳을 혼자 찾아오는 주인공 남자, 관을 끌고 다니는 으스스한 분노의 추적자인 장고, 악을 몰아내고 결국 마을을 지켜내는 보안관 존 웨인, 선인장 하나만 달랑 있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총격전과 마지막 결투그 시절의 내게 텍사스는 영화에서만 존재하고, 내가 사는 세상과는 완전 다른,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척박한 땅이었다. 내가 가졌던 텍사스에 대한 이미지는 분명 틀렸을 것이다.

 

미국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와 주도인 오스틴의 지도를 찾아본다. 내가 사는 곳과 텍사스의 정서가 약간 다르겠지만, 세상 어디서나 인간이 사는 모습은 비슷할 것이다. 소설 <사라진 것들>의 등장인물은 거의 텍사스에 산다. 주로 예술가이거나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친다. 그들은 불안하고 혼란스러워 와인을 많이 마신다. 어느 누구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사는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결혼한 부부에게 아이는 언제나 부담감을 준다. 아이가 주는 감동과 행복은 잠시뿐이다. 책임을 지고 성인이 될 때까지 아이를 잘 키워내야 한다. <오스틴>에서의 나, <담배>에서의 나, <숨을 쉬어>에서의 나, <>에서의 나는 모두 아이를 가진 아빠지만 그들은 똑같이 고독하고 위태롭다. 아이는 어른의 상황이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들은 어른도 자기와 똑같이 힘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아이는 부부사이를 멀어지게도 하고 각자의 세계로 침잠하게 만든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오히려 안전하지 못하다. 가족을 지키려는 마음과 그들로부터 떨어져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공존한다. 이 단편들, 특히 <>을 읽으며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부부와 친구가 된다는 건 모호하다. 부부 사이에 끼여 있어 어중간한 느낌도 들고, 소외되고 이용당할 수도 있다. 그들이 필요로 할 땐 환영받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애물단지가 되기 쉽다. 주책맞은 사람이라고 오해받기도 한다. <라인벡>에서의 나와 <히메나>에서의 히메나가 그렇다. 친구인 부부와 우정을 나누지만 약간의 아슬아슬함도 있다. 문제는 이들 부부 사이가 그리 탄탄하지 않다는 것이다.

 

<넝쿨식물>에서 나의 아내 마야는 화가이다. 이웃에 사는 나이든 예술가인 라이어널을 포식자라 부르지만 자신의 작품을 위해 정황상 라이어널의 누드 모델이 되어 주고 그의 도움으로 전시회를 열게 된다. 아마 사랑을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거의 그랬을 것이다. 결국 이들 관계는 헤어짐으로 끝난다. 라인벡의 나는 그들을 따라 떠나지 않고, 히메나는 다른 곳으로 떠나고, 마야도 떠나 다른 곳에서 재혼해 아이들도 낳지만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있고, 엄청나게 돈도 많은 <사라진 것들>의 대니얼은 옐로스톤과 알래스카, 조슈아트리로 혼자 여행을 다닌다. 가본 적은 없지만 그곳은 내가 상상도 못할 만큼 광활하고 웅장할 것 같다. 대니얼은 조슈아트리 국립공원의 포티나인 팜스 오아시스 트레일(길기도 하다.)’에서 실종된다. 대니얼 스스로 선택한 실종이든, 아님 사고로 인한 실종이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어간다는 사실은 너무 외롭고 쓸쓸하다. 완벽한 삶을 살 것 같은 사람에게 오는 위기가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에게 실감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이틀 동안 와 대니얼의 여자 친구인 앙투아네트가 대니얼의 물건을 정리하면서 그의 부재를 느끼고 그와의 추억을 공유하지만, 그들에게 보여 지는 것은 불안이다. 소설 <사라진 것들>뿐만 아니라 나머지 소설에 나오는 거의 모든 내용도 사라짐에 관한 것이다. 어떤 종류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감정, 추억, 물건은 사라지기 마련이고 그 사라짐의 의미는 점점 퇴색된다. 나중에 무엇이 남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40대 주인공들이 앓고 있는 정신적 방황과 공황, 현실의 무게감이 버거워 보여 마음이 무겁다. 견디며 그저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 삶이라는 사실이 슬프다.

 

인생에서 어려운 시기는 항상 있겠지만 난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갈 때 가장 힘들었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피폐해졌다. 이 시기가 이렇게 힘든데 50은 어떻게 넘길 수 있을까, 미리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50은 즐겁고 행복하게 잘 넘어갔다. 40대에 비해 형편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고, 나를 둘러싼 환경이 거의 똑같은데도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공자가 말한 불혹(不惑)이 뭔지 잘 모르겠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도 생각한다. 어느 나이가 되면 흔들리지 않을까? 그때가 오기는 할까? 어쩌면 40에 인간은 사춘기를 다시 겪고, 육체가 재배치된다. 삶에 대해 처음으로 되돌아보며 내가 늙어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비로소 자신의 부모가 이해되기도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와인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마침 봄 미나리에 오징어를 듬뿍 넣어 미나리 전을 부친 날, 집에 오래된 와인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어디 두었는지 몰라 한참을 찾았다. 식탁을 차리며 남편에게 와인 뚜껑을 열어 달라고 했다. 평소 와인을 잘 마시지 않아 와인따개도 여기저기로 찾아다녔다. 와인이 오래되어서인지, 남편이 미숙해서인지 결국 와인 병의 코르크 마개는 중간쯤 올라오다 와자작 부서지고 말았다. 코르크조각이 와인 속으로 많이 들어갔다. 이 소설속의 라면 지하저장고로 내려가 새 와인을 가지고 오겠지만 나는 컵에 올이 촘촘한 얇은 면포를 올리고 와인을 부었다. 코르크조각은 완벽하게 제거되었고, 적당히 알코올 도수가 높은 와인의 맛은 좋았다. 나는 이렇게 인생을 살고 있다.

 

[“가끔은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매달려 너무 애쓰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 알아? 그걸 놓아버리기가 너무 힘들어.”

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실 넌 그다지 다르지 않아.”

더 성공한 사람으로 변하지 않은 건 확실하지.” 나는 말했다. “혹은 현명한 사람으로.”

……

모르겠어.” 나는 말했다.

어쩌면 참을성이 더 많아졌겠지.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는 확실히 낮아졌고.”

자신에게 더 관대해졌다고 생각해?”

아니.” 나는 말했다. “그냥 기대가 낮아진 것뿐이야.”

-p287~288, ‘히메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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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3-30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ㅡ작중 화자 ˝나˝ 느낌이.비슷해서 저는 단편모음인줄로 모르고 이상하다.하며 읽었는데.페넬로피님께서.ㄱ ˝나˝들의 공통점 정리해주시니 확.이해가 ^^

페넬로페 2024-03-30 20:25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의 ‘나‘가 처한 상황들과 느낌이 거의 비슷하게 느껴지죠? 저도 그랬어요. 그렇기도 하고, 약간 일기같은 느낌도 들어 별점 하나 뺐어요. 얄라님의 감상, 기다리겠습니다^^

새파랑 2024-03-31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나리전에는 와인보다

막걸리 아닌가요? ㅋㅋ

이 책은 제목을 너무 잘 지은거 같아요. 사라진 것들이라니~!!

40대가 된 후부터는 뭔가가 생기기 보다는 계속 사라지는 느낌이 듭니다. 전 그래서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이 남애기 같지 않더라구요~~!!

페넬로페 2024-03-31 14:54   좋아요 1 | URL
미나리전엔 막걸리인데 이 책의 인물들이 계속 와인 마셔서 저도 마시고 싶더라고요.
새파랑님 말씀처럼 제 얘기 같기도 해서 좀 씁쓸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와 프랑스혁명 - 베르사유와 프랑스혁명 츠바이크 선집 3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육혜원 옮김 / 이화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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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선생님이 들려주신 프랑스 혁명에 관한 얘기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신비한 단어들에 프랑스 사람들이, 혁명이 환상적으로 보였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형편과는 다른, 인간 중심적이고 자유롭게 살고 있을 것 같은 그곳이 멋지게 느껴졌다. 똑같이 혁명이라는 단어로 시작했지만 사람만 바뀌면서 1인 독재 정치가 계속되고 있는, 여고생의 뺨을 수시로 갈기고 심지어 구둣발로 교실로 들어와 자신에게 항의한 여학생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선생들이 있는 학교에서, 자유와 평등은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서, 난 숨을 참으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프랑스 혁명은 민중이 아닌 부르주아 계급을 역사의 흐름의 중심에 서게 만든 것이라는 것을 어른이 되고도 한참이 지나 알게 되었다. 혁명은 굉장히 폭력적이었고 그 결과도 내가 상상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뿐만 아니라 혁명이라는 것은 모두 폭력적인 것이었다. 국민과 민중을 위한다면서 한 쪽이 다른 진영의 자리를 빼앗아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혁명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 누가 되었던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적들에게 대항해야하기에 민중은 안중에도 없었다. 민중은 또 어떤가? 당장 눈앞의 빵 한 조각이 급하니 그들은 성급했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분위기에 휩쓸린다. 혁명에 늘 이용당해 맨 앞의 총알받이로 나서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 울분으로 싸구려 선술집은 항상 붐비고 그들의 자식은 다시 민중으로 살아간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혁명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다만 역사가 거의 그 결과로 말해지는 것이라 그녀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기소설의 형태로 프랑스 혁명 속의 마리 앙투아네트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한다. 그는 그 시대의 모든 신문과 편지, 소송 서류들까지 조사(p.324)’해 사실적인 것들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조명했다. 츠바이크의 말대로 앙투아네트의 인생에 대혁명이라는 역사적 부침이 없었다면 그녀는 왕비의 자리에서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인간의 의지와는 다르게 나타나고 그녀는 불행하게 삶을 마쳤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 부르봉 가문은 두 왕가의 왕자와 공주의 결혼으로 오랜 경쟁 관계를 청산하고자 한다.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졌지만 공부와 생각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공주는, 아무런 재능이 없고 못 생긴 루이 15세의 손자인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위해 어린 나이에 프랑스로 건너온다. 재정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두 가문이지만 결혼식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다. 7년 동안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맺지 못하고, 황실의 숨 막힌 생활에 우울증이 걸린 앙투아네트는 드레스, 보석, 헤어 장신구에만 관심이 있었다. 트리아농 성을 자신의 도피처로 만들어, 그곳을 자신만의 연극장으로 꾸며 위안 받는다. 파리의 매력에 빠져 매일 밤, 오페라 극장, 가면무도회, 도박장에 드나들며 새벽에 귀가한다. 도박 빚은 늘어나고 향락의 생활은 끝이 없다.

 

[놀면서 세월을 보낸 그녀는 왕비의 이념에 정신적인 의미를 부여할 줄 모르고 다만 완성된 형태만을 가질 뿐이었다. 그녀의 손안에 들어가면 위대한 임무는 덧없는 놀이로, 높은 지위는 배우의 역할로 축소되어 버렸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왕비라는 것은 궁정에서 가장 우아하고 매혹적이며, 제일 귀한 대우를 받는 사람, 무엇보다 가장 행복한 여성으로 추앙받는 것, 즉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가장 영향력 있는 여인이 되는 것이었다. 20년 동안 그녀는 베르사유라는 무대 위에서 프리마돈나로서 우아한 로코코 왕비의 역할을 연기했다.

-p.62]

 

왕비가 백성을 돌보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무심했던 사이, 시민 계급 의식은 깨어나고, 대흉작과 물가 상승으로 서민의 삶은 힘들어졌다. 프랑스 왕국은 부채가 늘어나 재정이 파탄나기 직전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목걸이 사건이라는 희대의 사기극에 휘말리고,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던 재무대신 네케르마저 해임하여 국민은 왕실에 등을 돌린다. 뒤늦은 각성에 루이 16세는 삼부회를 소집하지만, 1789714일 바스티유가 습격당하고 만다.

 

주관과 결단력이 없는 루이 16세도 문제가 많았다. 항상 무덤덤한 태도로 일관하며 사냥만을 즐긴 그는 왕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뿐 아니라 처음부터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루이 16세 역시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이 부족해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강압적이지 않고 양보만 하면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막상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어도 혁명에 대한 개념이나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리앙쿠르 공작은 파리에서 일어난 사태를 알리려고 베르사유로 달려와 급히 잠든 루이 16세를 깨웠다.

바스티유가 습격을 받아 지휘관이 피살되었습니다! 시민들은 그의 목을 창에 꽂고 파리 시내를 누비고 있습니다!”

반란(révolte)이 일어났소?”

놀란 루이 16세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공작은

전하, 그렇지 않습니다. 혁명(révolution)입니다.”라고 답했다.

-p.157]

 

베르사유가 침입당하고 왕과 왕비는 파리의 튈르리 궁으로 옮겨 간다. 바렌으로 도주해 프랑스를 탈출하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들은 코뮌에 의해 탕플 탑에 감금된다. 9월 대학살이 일어나고 루이 16세는 처형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콩시에르주리에 수용되고 반역죄로 17931016일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그녀는 죽기 전에 자식을 걱정했고 신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끝까지 왕비의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했는가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왕권을 신의 선물로 여긴 그녀는 혁명을 통한 국민의 요구를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밖에는 박피공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다리가 달린 싸구려 마차였다....

공화국은 기요틴에서조차 평등을 요구했다. 왕비라고 해서 시민보다 더 편하게 죽을 이유가 없었다. 사다리 마차면 충분했다. 사다리 사이에 놓인 널빤지가 의자 역할을 할 뿐 깔개도 없었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를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들, 마담 로랑, 당통, 로베스피에르, 푸키에, 에베르 또한 이 마차를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들도 모두 이 딱딱한 널빤지에 앉아 최후의 길을 갔다. 단지 그녀가 한 발 먼저 가는 것뿐이었다.

-p312~313]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뿐만 아니라 혁명은 사람을 너무 쉽게 죽였으며, 혁명으로 권좌에 오른 사람들마저 다 죽어야 했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이다. 츠바이크는 이 책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 사실적으로 서술하며 대체적으로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지만, 그녀에게 정상 참작의 기회를 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녀로 태어나 다른 나라의 왕비가 되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당연히 누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국민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환호는 당연한 것이고 자유와 권리는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인간이 가지는 편안과 즐거움은 누군가의 희생과 빈곤으로 얻어지는 것이고, 자신의 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사람은 구제받을 수 없다. 그녀가 프랑스 혁명의 희생양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인정되지만, 앙투아네트는 근본적으로 세상의 모든 비애와 어둠에 관해 무지함(p.63)’의 죄를 지었다.

 

츠바이크는 프롤로그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평범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천재나 권력욕이 강한 사람의 반대적 의미로 평범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 같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순수하고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에 사명감도 없었고 거대한 역사적 운명과 싸우기에 한계가 많은 보통의 사람이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저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보통이 마리 앙투아네트와 연결되지는 않는다. 마지막까지 혁명의 선동자를 증오한 그녀는 대혁명의 과정과 결말에 많은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화북스의 츠바이크 선집 마리 앙투아네트는 번역이 좋지 않았다. 문장의 문맥이나 조사의 사용에서 틀린 부분이 많았다. 또한,

국왕을 위해 싸우다 쓰러진 전사들은 무시한 결정이었다’-p.163 전사들을

내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을 오로지 내 아이들 덕분입니다.’-p.192 그것은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무턱대로 윽박지르면 도리어’-p.193 무턱대고

(내가 여기에 적지 않은 것도 많고, 알아내지 못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슈테판 츠바이크의 문장과 마리 앙투아네트와 프랑스 대혁명을 연결시킨 저자의 구성은 훌륭했다



**사진은 이 책에서 발췌했고 페이지는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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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3-05 01: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왕녀, 왕비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마리앙투아네트는 그런 걸 생각하지 못했군요 집에서 가르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정략결혼이기는 해도 왕비가 됐으니 왕비로서 해야 할 게 있었을 텐데... 그런 건 거의 생각하지 않았군요 그 나라에 사는 백성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백성이 괜찮게 살까 해야 하는데... 루이16세도 다르지 않았군요 왕 자리는 무겁기는 하겠습니다 평범한 백성이 낫죠 조선시대 왕도 힘들었겠습니다 어느 시대나... 지금도 그건 다르지 않을 텐데...


희선

페넬로페 2024-03-05 08:48   좋아요 2 | URL
네, 요즘은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좋다는 생각을 해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왕권을 너무 당연하게만 생각하고 그것을 누리면서 산 것 같아요.
국민이 낸 세금을 자신의 돈인 것 처럼 사용한 것도 문제지요.

미미 2024-03-06 15: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전 책으로 사두었었는데 이 책이 새로 나와서 마음이 좀 쓰렸습니다ㅎㅎ

하...저또한 여고때 몇몇 아이들이 끌려가 맞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다녔어요. 젠틀해 보이는 쌤들도...

저도 이 책 읽고 싶네요^^

페넬로페 2024-03-06 17:06   좋아요 3 | URL
역시 츠바이크의 글은 좋았어요.
역사와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인물을 잘 연결시켰고 읽기에 재미 있었어요.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과정도 조금 알 수 있었어요.
여학교때 괴로웠어요.
물론 좋은 쌤들도 많았지만요.

레삭매냐 2024-03-09 09: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놔, 이 책 읽다 말았어요 -
벌써 두 번째네요 ㅠㅠ

한창 회자가 되서 금세 다 읽을
줄 알았는데 더 재밌는 책들에
정신이 팔려서리.

리뷰 버프를 받아 다시 한 번 도
전해 보려구요.

페넬로페 2024-03-09 12:20   좋아요 3 | URL
제가 참가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 올해 상반기에 발자크 읽기를 하고 있는데, 그 시대 프랑스의 사회와 역사를 모르고서는 발자크 읽기가 힘들겠더라고요.
그래서 참고 문헌들을 조금씩 읽고 있어요.
지금 《어둠 속의 사건》읽고 있는데 이 책이 도움이 되네요.
츠바이크의 구성력도 좋고 인물에 대한 해석도 공감되어 흥미롭게 잘 읽었어요^^

알파카 2024-03-16 2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해당 도서 출판사 담당자입니다! 리뷰들을 읽어보다가 답글 남깁니다. 저희 책 소개보다도 더 와닿고 깊이 있는 내용인 것 같아서 ㅎㅎ 정성스러운 리뷰에 감사의 말씀 드리려 댓글 달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오탈자 지적해 주신 부분은 독서하는데 지장을 드려 정말 죄송한 마음이고 저희도 내부적으로 발견하여 수정작업을 마쳐 다음 쇄에는 오탈자 없는 책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4-03-16 23:03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이화북스의 더 좋은 책 출간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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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알려진 대로 발자크는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따라서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든 것을 소설을 통해 완벽하게 그려내려는 큰 뜻(p.432, 작품 해설)’을 품고 인간희극(La Comédie humaine)이라는 거대한 덩어리를 창작해 낸다. 평론가 김화영 선생은 프랑스어 ‘Comédie’는 비극의 반대인 희극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을 의미하므로 인간극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관행적으로 인간희극이라고 불린다. 발자크의 소설을 읽을 때는 이러한 인간희극에 대한 배경이나 작가의 집필 의도를 알고 시작하는 편이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더 좋을 것 같다.

 

1789714, 민중 봉기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으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고,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제1제정이 시작된다. 나폴레옹은 유럽 여러 나라를 정복하지만 1812년 러시아 원정 실패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1815년에 사망한다. 1814년에서 1830년까지 부르봉 왕가의 왕정복고 시대에서 샤를 10세는 보수적 정치를 실시해 부르주아는 반발한다. 18307, 부르주아는 혁명을 일으키고 부르주아의 왕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추대한다. 7월 혁명을 계기로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산업 혁명이 진행되었고 18482월 혁명이 일어난다.

 

1799년에 태어나 1850년에 사망한 발자크는 프랑스 혁명 이후와 2월 혁명의 시기에 걸쳐 살았고, 그의 작품은 대부분 왕정복고 시기와 7월 왕정을 시대적인 배경으로 한다. 고리오 영감181911월 말부터 1820221일의 대략 3개월 동안을 시간적인 배경으로 하는 왕정복고 시대에 놓인 소설이다.

 

발자크의 당대 프랑스 사회의 전모를 밝히고자 하는 의도에 걸맞게 이 소설은 독자가 뭔가를 생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세하고도 성실하게 인물과 사건에 대해 작가가 서술해주고 있다. 허구와 실제의 경계가 잘 구분되지 않아 어디까지를 소설적 요소로 받아들일지가 모호했다. 그렇지만 발자크 시대의 풍속이 지금 시대와 완전 다르지는 않았다. 이미 그때부터 돈과 돈을 가진 자가 최고인 시대가 되어 있었다. 당연히 돈을 좇는 자가 생성되고 그들은 악마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원리는 지금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빈곤과 권태만이 있는, 파리의 그 어느 구역보다 소름끼치고 낯선뇌브생트 주느비에브 거리에서 보케르 부인은 40년 동안 하숙집을 운영하고 있다. 퀴퀴하고 가난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보케르 하숙집에서조차 내는 돈에 따라 대우는 달라진다. 이 소설을 이끌어 갈 중요 인물은 7명의 하숙생 중 세 사람이다.

 

제면업자였던 고리오 영감은 프랑스 대혁명 때의 혼란을 틈타 한 몫 잡아 부자가 된, 선하지만 어긋난 부성애로 자기와 두 딸의 삶까지 망쳐버리고 외롭게 죽는 69세의 노인이다. 그는 1200프랑의 하숙비에서 지금 45프랑의 하숙비를 지불하며 점점 가난해지는데, 그 이유는 모두 다 사교계에 목숨을 거는 그의 두 딸 때문이다.

 

남부 지방(앙굴렘) 출신의 가난한 법학도인 외젠 드 라스티냐크는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자신의 출세가 가족 전체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파리 입성에서 그가 금방 알아낸 진리는 자신을 사교계에 입문시켜 줄 여자가 필요하며, 사교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출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도형장에서 탈옥해 보트랭이란 이름으로 위장해 살고 있는 자크 콜랭이 있다. 그는 라스티냐크의 야망을 알고 그것이 실현되기 위한 위험한 거래를 제안한다. 보트랭은 체포되면서 나는 장 자크 루소의 얘기처럼 사회계약이 지닌 뿌리 깊은 기만에 반항하는 사람이오. 나는 그의 제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오.(p.305)”라고 말한다. 김화영 선생은 이 보트랭이란 인물에 발자크의 내면이 투영되어 있다고 한다. ‘발자크는 분명 그의 내면에 무시무시하고 마력적인 보트랭의 위대함에 대한 동경을 감추고 있다. 그 동경 속에는 쾌락의 본능과 권력 의지가 결합되어 있다.(p.105, ’프랑스 현대 소설의 탄생‘, 돌베개) 발자크는 이 세 인물을 통해 촘촘하게 이 소설을 전개해 나간다.

 

여전히 지금도 계속 방영되고 있는 막장 드라마에는 항상 이분법적인 구조가 있다. 똑같이 주어진 사회적 환경에서도 곧게 나가려는 사람과 남을 이용하고 밟아 위악적으로 출세하려는 대조적인 인물을 등장시킨다. 드라마에서는 결국 전자에게 행운을 주고 웃게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꼭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만 후자가 성공하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고 한 번 시작된 질주는 끝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그렇다. 알면서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권력이나 돈은 그 맛을 보면 내려놓기 힘들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발자크의 소설을 읽고, 분노하면서도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은 나, 우리가 가진 인간의 본성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재미있기도,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부 출신의 라스티냐크는 출세 지향적인 인물이지만 마지막까지 고리오 영감을 돌보는 순수성과 동정심을 지닌 사람이다. 발자크가 인간희극에서 사용한 인물 재현법으로 라스티냐크는 다른 소설에서 어떻게 변해 있을지 흥미롭다. 그가 마지막에 말한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p.430)”로 어느 정도 그의 행동이 짐작이 가긴 하다.

 

처음 읽은 발자크의 소설로 이 작가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문장의 깊이가 없어 아쉬웠지만, 그가 그려낸 파리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재미있었고 발자크 특유의 위트 있고 깊이 있는 해석이 있어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19세기 프랑스의 풍속도는 지금도 유효하다.

 

[인생이란 부엌보다 더 아름답지 않으면서도 썩은 냄새는 더 나는 거라네. 인생의 맛있는 음식을 훔쳐 먹으려면 손을 더렵혀야 하네. 다만 손 씻을 줄만 알면 되지. 우리 세대의 모든 윤리가 거기에 있네. 내가 이처럼 자네에게 세상 얘기를 하는 것은 세상이 나에게 그럴 권리를 주었기 때문이야. 나는 세상을 알아. 내가 세상을 비난한다고 생각하나? 천만에. 세상은 늘 이런 모양이었네. 도덕군자도 이 세상을 결코 고치지 못할 걸세. 인간은 불완전하지.

-p.167]

 

**제목의 위대한 풍속역사가는 앙드레 모루아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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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2-12 2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전 아직도 읽고 있는 중인데... 왤케 안읽혀지는지...
클났어요;;;

페넬로페 2024-02-12 21:11   좋아요 3 | URL
발자크가 그 시대를 그대로 재현하기로 했으니 그냥 그 의미나 상징을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작가가 이끄는 대로만 갔습니다. 막장의 전형이더군요 ㅎㅎ
드라마 작가는 모두 다 발자크를 읽은 것 같아요.
별점 고민 많이 했어요^^

독서괭 2024-02-14 1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막장.. 재밌겠는데요? 전 발자크 한권도 안 읽어봤어요 ㅎㅎ ˝선하지만 어긋난 부성애로 자기와 두 딸의 삶까지 망쳐버린˝ -이 부분이 궁금해지네요. 프랑스 역사공부에도 도움이 되겠습니다!

페넬로페 2024-02-14 16:04   좋아요 1 | URL
저도 이번에 처음 발자크의 작품을 읽었어요. 19세기 초반의 프랑스를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했다고 하더라고요.
고리오 영감은
한국판 사랑과 야망 정도가 되고
절대 자식에게 재산을 빨리 넘겨주지 말라는 교훈이 그대로 담겨 있어요^^

페크pek0501 2024-02-17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가지고 있는 1인인데(저는 다른 출판사 걸로) 왜 읽게 되지 않는지... 아마 앞부분을 읽다가 말았던 것 같은데 꼭 완독할 작품으로 생각합니다. 뽑으신 167쪽의 글, 좋네요. 음미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갑니다. 페넬로페 님 덕분입니다.^^

페넬로페 2024-02-17 16:49   좋아요 0 | URL
저도 발자크의 작품, 어렵게 시작했어요. 사실주의 문학을 읽을 때엔 나름의 각오를 가지고 시작해야하는데 다 읽고 나면 어떤 의미를 주더라고요. ‘옛 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란 말을 실감하며 이 책 읽었던 것 같아요^^

새파랑 2024-02-17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9세기 프랑스에는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사실주의(?) 작품을 쓰는 작가가 많았던 걸까요? 전 너무 세밀한 묘사는 오히려 잘 안읽히더라구요... ㅋㅋ

역시 페넬로페님은 프랑스 문학 마니아 이십니다~!!

페넬로페 2024-02-21 10:04   좋아요 1 | URL
그 시대가 워낙 변화가 심하고 빈부와 신분의 차이가 커서 작가들이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나봐요.
어찌하다보니 계속 프랑스 문학을 읽게 되네요 ㅎㅎ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 - 나이가 들어도 몸의 시간은 젊게
정희원 지음 / 더퀘스트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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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아버지 기일이 있었다. 재작년부터 몸이 많이 안 좋으신 엄마와 엄마를 케어하고 있는 둘째 언니는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 서울에 사는 형제들만 오빠의 집에서 지내는 제사에 참석한다. 직장생활과 함께 육아까지 병행해야 하는 조카들도 참석하기 힘들어 아버지의 제사는 나이 들어가는 자식들만 모여 조촐하게 지내는 연례행사가 되어가고 있다.

 

제사상 앞에 무릎을 꿇고 차례로 제주(祭酒)를 올릴 때, 오빠와 형부의 뒷머리가 휑한 것(좀 많이)을 볼 수 있었다. 오빠야 대머리가 유전인 집안의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형부의 머리가 저 정도까지 빠질 줄은 몰랐다. 머리숱이 많은 집안의 유전자를 가진 남편은 이번 달부터 고지혈증 약을 먹게 되었다고, 이제 평생 약 먹는 사람이 되었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그게 뭐 그리 떠벌릴 말이며, 약을 먹어야 할 지경이 됐는데도 왜 담배는 끊지 않는지 절대 이해가 되지 않기에 나는 남편을 원망의 눈초리로 쏘아본다.

 

제사를 마치고 술을 곁들인 식사와 후식까지 먹고 설거지 할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전자레인지에서 데운 생선을 꺼내지 않고 밥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갈 때, 올케 언니가 싸준 제사 음식이 든 쇼핑백을 들고 지하주차장에 내려갔는데, 차에 탄 언니가 가방을 오빠네 집에 놔두고 그냥 온 사실을 또 알게 되었다. 오빠의 아들인 Y가 잽싸게 올라가 다시 들고 내려왔다. 우리는 이러한 멍청하고 기가 찬 사건들에 전혀 놀라거나 서로에 대해 원망하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도중이 아닌 지하주차장에서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게 그나마 다행이고, 전자레인지에 덩그렇게 놓였던 생선은 다음에 먹으면 되는 거고, 누군가가 먹기 시작한 고지혈증 약은 이미 자신들이 먹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허무하고 속상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른 물리적 노화는 받아들여야 하는 게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암과 알츠하이머치매만은 걸리지 않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질 뿐이다.

 

딸아이가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책상에는 노트북과 아이패드가 동시에 켜져 있고,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져 있으며 귀에는 무선 이어폰이 꽂혀 있다. 외출할 때는 헤드셋을 쓰고 나간다. 지하철을 타면 잠을 자거나 아님 핸드폰을 볼 것이다. 하루 종일 귀와 눈이 전자기기에 연결되어 있다. 랜싯위원회에서 치매 발병 위험과 관련된 연구를 종합해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무언가를 시도해볼 수 있는 치매의 예방 가능한 요인 중 청력저하가 8%나 된다.(p.129) 흡연 5%, 우울 4%, 음주 1%에 비해 월등히 높다. 이런 딸아이가 나중에 나이 들면, 아니 나와 우리 형제들의 나이에 이르기도 전에 건강을 잃으면 어떡할지 걱정된다.

-p.81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의 정희원 저자는 시계는 하루 24시간만 가지만 몸과 마음은 하루에 28시간, 36시간, 48시간씩 늙어가는(p.5)’ 우리시대 가속노화의 현상을 우려한다. 이 책의 부제목인 당신의 삶이 노화의 속도를 결정한다는 말처럼 건강하게 잘 살려면 젊었을 때부터 전반적인 일상의 삶 전체를 잘 챙기면서 살아야 한다. 내재역량은 신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인 기능, 질병 유무, 혈압, 운동시간, 적절한 휴식, 마음챙김, 인생의 목표와 자기효능감 등이 골고루 잘 구성된 것이다. 이러한 필수적 조건이 균형적으로 잘 갖춰져야 느리게 나이 들 수 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시적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p.83

미국병원협회와 미국노인병학회에서 보급한 4M은 내재역량을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노년의 삶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이동성과 질병 없음은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저자는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신체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요소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 시대의 소비자본주는 건강을 해치는 가장 위험한 원인이 된다. SNS 중독, ‘불편을 최소화하고 행복을 최대화하려는 노력(p,7)’, 포모증후군(자신만 뒤처지고 소외될까 두려움을 느끼는 증상), 쇼핑앱의 소비를 부추기는 자극, 집중하지 못하는 주의력 결핍 상태는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며 더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항노화에 좋다고 알려진 항노화 수액, 호르몬 보충요법, 줄기세포요법, 뇌영양제 등의 효과도 검증되지 않은 것이다. 정신적인 건강을 위해 덜어내기의 기술, 마음챙김, 좋은 수면, 명상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건강하게 나이 드는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일단 초가공 식품, 단순당, 정제곡물을 섭취하지 않는 것이다. 콜라, 사이다, 시리얼, 밀가루나 흰 쌀로 만든 음식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 담배는 무조건 좋지 않다. 걷기나 달리기 같은 유산소운동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근력운동이다. 일주일에 두세 번 고강도나 중강도 운동도 필요하다고 한다.

 

모르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다 알고 있다. 다만 실천하기가 힘들 뿐이다. 콜라, 사이다, 시리얼은 평소에 잘 먹지 않지만 문제는 밀가루다. 식탁에 차릴 음식에 밀가루를 없애려면 하루 세 끼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몸에 좋다는 두부, 렌틸콩, 귀리도 계속 먹으면 우울증에 걸릴 거다. 건강해지려면 몸에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하지만, 음식이 주는 스트레스도 많다. 좋은 음식을 준비하기 위한 노동 강도, 비슷한 음식을 계속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요리 실력의 한계, 새로운 것을 찾는 사람의 입맛 등도 고려해야 한다.

 

시어머니를 뵈러 갈 때 얼큰한 순두부찌개를 포장해 가면 굉장히 좋아 하신다. 집에서는 결코 그 맛이 나지 않는 MSG가 가득 들어간 짜고 얼큰한 것이 몸에 좋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식욕이 없으신 어머니가 밥을 많이 드시고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 수는 있다.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자제하고 이왕이면 좋은 음식을 먹어야 건강에 좋다는 말로 저자의 의도를 받아들이겠다.

 

얼마 전에 자동차 지붕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일이 있다. SUV가 아닌 일반적인 자동차를 차려면 몸을 숙이고 차에 타야 한다. 그날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아직도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동차 앞문을 열고는 몸을 숙이지 않고 그대로 직진해 자동차에 이마를 완전 세게 부딪쳤다.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 아팠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엄청나게 맞고도 다시 일어나 상대방을 때려눕히는 주인공을 믿지 않게 될 정도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통증도 문제지만 이러한 나의 행동이 정말 창피했다. 세상에 몸을 숙이지 않고 자동차를 타려는 미치광이가 어디 있느냐 말이다. ‘내가 정말 왜 그랬을까?’하고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모르겠다. 그날 뭔가에 씌인 것이 분명했다.

 

 

유감스럽지만 나의 나이듦에 대한 토로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 내가 요즘 어떠하다는 말을 하면 듣는 사람은 난 벌써부터 그랬어. 너는 그 정도면 아주 건강한 거야.’라고 일축해 버린다. 남편은 천하의 페넬로페가 왜 이렇게 됐어라며 탄식하지만 그가 나를 위해 뭔가를 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번 생에 내 팔자에 없는 큰 아들이 되어가고 있다. 시어머니께서는 나는 니 나이때는 펄펄 날아다녔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은? 그저 슬프게 웃지요.

 

늙는다는 것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고 그것의 인식도 자신이 가장 잘 알 수 있다. 그러니 내 건강은 내가 지켜야 하고, 힘들지만 노력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짧고 굵게 산다는 것은 그저 말로만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우리는 이미 길게 사는 시대에 살고 있고 얼마나 효율적으로, 건강하게 잘 사느냐의 문제만 남겨져 있다. 그건 물론 각자의 노력의 결과로 결정되겠지만 사회나 국가가 해주어야 할 일도 많다. 국민 개개인의 건강에 신경 쓰는 정부를 원한다.

 

tvn의 유퀴즈를 통해 노년내과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거기에 출연한 정희원 교수의 말이 좋았다.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는 우리가 건강을 챙겨야 할 이유와 방법을 과학적, 의학적으로 어렵지 않게 잘 알려주어서 나의 현재 상태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해주었다. 나에게 필요한 구체적인 실천 계획도 세울 수 있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나 자신을 잘 챙겨 되도록 병원에 가지 않는 노년을 맞이해야겠다는 결심도 했다.

 

-죽을 때까지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페넬로페가 되기 위한 다짐 :

 

무조건 정신 차리며 살기.

귀찮은 일상의 일(설거지, 청소, 빨래)도 건강하니까 할 수 있다는 자기 최면.

무소의 뿔처럼 흔들리지 않기.

담담하고 의연한 삶의 자세.

스마트폰 들여다보는 시간 완전 줄여 집중력 회복하기.

렌틸콩과 올리브유 먹기.

헬스장 다시 등록하기.

맥주와 과자 먹지 않기.

 

★★ 페넬로페, 아자아자!!

 

[사람의 몸과 마음은 2,3차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가지 요소가 무너져 있으면 악순환은 끝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악순환의 원리를 이해하고 광범위한 노력으로 그 원동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해결방법이다. -p.8

 

노화의 재설계는 습관부터 시작하고 자각해야 한다. 나쁜 습관회로를 없애고 좋은 습관회로를 만들어야 한다. -p.54~56

 

안 아프고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으면서도 스스로의 가속노화 사이클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의 심리적 기제는 인류가 기후변화에 무심한 것과 무척 비슷하다. .....기후변화와 마찬가지고 노화와 건강, 질병은 사람들이 금기시하는 죽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삶에 직접 대입해보는 것을 꺼린다. 나아가 올바른 습관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으므로 그러한 습관 자체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한다.

- p.195~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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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02-06 15: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천하의 페넬로페가 왜 이렇게 됐어 나는 니 나이때는 펄펄 날아다녔다. ㅋㅋㅋㅋ 저도 빠르게는 설연휴 후 늦게는 삼월부터 헬스장에 꼭 ....어흑 ~~~

페넬로페 2024-02-06 16:12   좋아요 1 | URL
천하의 페넬로페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ㅎㅎ
걷기로만은 운동이 되지 않는다고 하네요. 서곡 님께서도 꼭 근력 운동 열심히 하시기 바래요^^

거리의화가 2024-02-06 1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저도 최근에 정말 근력 운동이 필요하다라는 걸 느꼈답니다. 걷기 이외에는 하지를 않았는데요. 여기저기 쑤시고 결리는데가 늘어나고 그냥 계속 피곤한 거에요. 이렇게 현상 유지로는 안되겠다 싶었답니다. 근력 운동 응원해요. 화이팅!

페넬로페 2024-02-06 17:47   좋아요 1 | URL
이상하게도 헬스장에 들어가면 운동을 열심히 하는데 거기까지 가기가 왜그리 힘든지 모르겠어요 ㅠㅠ
이 책의 저자는 정말 근육이 중요하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운동 열심히 하기로 결심했어요.
거리의화가님께서 지금 컨디션이 안좋은 상태이신거죠?
화가님께서도 운동이나 건강식 잘 챙겨드시고 좋은 몸 상태로 회복하시기 바래요^^

서니데이 2024-02-06 2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읽었는데 좋았어요. 생활방식이나 평균수명도 이전과 조금씩 달라져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데 그게 알아도 유지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어요. 그래도 참고할 내용이 많아서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페넬로페님 잘 읽었습니다.
좋은하루되세요.^^

페넬로페 2024-02-06 22:46   좋아요 1 | URL
건강을 위한 책을 읽으면 건강을 위해 노력하자고 다짐하지만 금방 또 실천하지 않는게 문제입니다.
이번엔 정말 오랫동안 실천해야 할텐데요 ㅎㅎ
서니데이님께서도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래요^^

단발머리 2024-02-06 2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정말 좋았어요. 실천하지 못해서, 결론은 ‘어쩌지....‘ 약간 이런 상태가 되긴 했지만요.
저는 책 읽으면서 저자 유튜브 찾아보면서 ‘렌틸콩 밥(?)‘ 이런 것도 도전해야겠다 다짐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제게는 운동이 가장 큰 결심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더라구요.
페넬로페님의 다짐을 저의 다짐으로 ㅋㅋㅋㅋㅋㅋ ‘과자 먹지 않기‘ 빼고요 ㅋ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4-02-06 22:54   좋아요 0 | URL
보통 건강에 관한 책들은 일본 의사들이 쓴 책이 많은데 매번 별로였거든요.
근데 이 책이 저도 너무 좋은 거예요. 깊이도 있고 왠지 꼭 건강을 위해 노력해야 겠다는 마음도 들게 했어요.
정희원쌤도 좋고요 ㅎㅎ
단발머리님의 건강을 위한 다짐도, 아자아자 입니다^^

희선 2024-02-07 0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이 들어도 몸은 젊은 사람 같다는 사람도 있군요 나이는 누구나 드는 거지만 느리게 나이 들면 더 좋겠습니다 세상이 빠르게 간다 해도 그런가 보다 하고 느긋하게 생각하는 게 좋죠 그렇게 해도 괜찮은 사람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할 것 같은 사람도 있겠습니다 늘 열심히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기에 세상이 돌아가기도 하는데... 세상은 이십퍼센트 사람이 끌고 간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런 사람도 쉬어야 할 텐데...

늘 좋은 것만 먹는 것도 힘들겠습니다 아주 안 좋다는 것만 먹지 않으면 좀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희선

페넬로페 2024-02-07 08:43   좋아요 1 | URL
누구나 나이 들겠지만 이왕이면 질병없이 건강하면 좋을 것 같아요.
요즘의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 더 빨리 늙을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더 많다고 해요. 문명의 이기를 받아들이지 않을수도 없고요 ㅠㅠ

독서괭 2024-02-08 09: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급하게 차 타려고 문 열다가 문에 눈썹 부분을 세게 부딪힌 적이 있습니다.. 아무도 못 봐서 다행;;
페넬로페님 아자아자 화이팅!!!

페넬로페 2024-02-08 11:31   좋아요 1 | URL
문에 부딪힌 독서괭님의 아픔이 같은 경험을 한 사람으로써 저에게도 느껴집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자신이 한심스럽게도 보이고요 ㅠㅠ
독서괭님의 응원 잘 받아 건강을 위해 노력해야겠어요.
근데 부딪친, 부딪힌...뭐가 맞을까요?
전에 은오님이 분명히 말해 주셨는데 까먹었어요. ㅎㅎ

독서괭 2024-02-08 15:38   좋아요 1 | URL
맞춤법 특공대 출동을 기다려야겠네요 ㅋㅋ

그레이스 2024-02-08 09: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이미 30대에 경험해본 일!
머리 안빼고 옷장문 닫기!^^;;

페넬로페 2024-02-08 11:32   좋아요 2 | URL
30대라....위로 받아야 하는 건가요? ㅎㅎ
우리 끝까지 책 읽으려면 건강해야 합니다. 그레이스님도 함께 동참하시죠~~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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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라는 제목만 보고도 이 책 내용의 반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을 펼치기도 전에 단지 제목만으로, 지나온 세월에 대한 상념과 회한에 빠질 수 있었다. 타고 나지 못해 겪었던 무수한 좌절들, 남보다 시간을 더 들이고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의 속상함 등,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포기해야하는 것들이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어디 문과와 이과의 구분에만 적용되겠는가? 수학을 잘해도 과학을 못 할 수 있고, 책을 읽지 않아도 말 잘하는 사람도 많다. 세상살이에 필요한 모든 자리에 운명적 타고남은 확실히 존재한다.

 

나는 처음에 이 책을 밀리의 서재,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AI로 들려주는 것이 싫어 보통 성우가 낭독하는 것을 선택해 듣는 편인데, 처음에 아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었다. 유시민 선생이었다. 방송이나 유튜브로 저자를 많이 봐왔으므로 그의 목소리를 잘 안다. 선생은 7페이지에서 11페이지의 서문을 낭독해주었다. 듣는 동안 사실 좀 괴로웠다. 뒤의 본문도 선생이 낭독한다면 듣기를 포기할 생각이었다. 본문은 이민혁 성우가 낭독했다. 목소리, 발음, 읽는 속도가 완벽했다. 타고난 것이 이렇게 무섭다.

 

갈릴레이뉴턴다윈아인슈타인하이젠베르크슈뢰딩거까지 갈 필요도 없다. 초등학교 수학에서 전개도, 쌓기 나무를 통해 공간 감각을 배우는데 그때부터 아이의 문, 이과 성향을 알 수 있다. 어떤 아이는 그저 눈으로 보고 머리로 완벽한 공간을 상상한다. 그것이 되지 않는 아이는 전개도를 그려서 오려 직육면체를 만들어 보고, 쌓기 나무를 직접 쌓아서 그 원리를 이해하게 된다. 그 과정이 조금 힘들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것이 전자에 비해 나쁜 것은 아니다.

 

관심이 없다는 것은 잘 모른다의 다른 말이 될 수 있다. 모르고 이해하기 힘드니까, 열심히 해도 성과가 없으니 관심이 없어지고 재미가 없어진다. ‘운명적 문과에게 과학은 그렇게 다가온다. 이 책은 거의 평생을 인문학에 대한 공부를 한 저자가 타고난 것을 극복하고 자신이 잘 몰랐던 과학의 세계에 눈뜨고 거기서 느꼈던 것을 서술한 것이다. , 존재, 언어 등 보통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생각과 주제를 자신이 공부한 과학으로 생각의 범위를 옮겨보는 과정을 나타내었다.

 

이 책은 단순히 저자가 과학을 공부하는 과정과 거기에서 느낀 새로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문과생도 어려워하는 경제, 철학, 사회 등을 과학에 접목시키며 인문학이 앞으로 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목에서 상상한 것과는 많은 것이 달랐고 생각보다 내용이 상당히 어려웠다. 많은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해 저자의 주장과 의도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저자의 인문학에 대한 생각에 약간의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물론 나의 부족함 때문일 것이다.

 

타고난 것을 거스르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고 잘 하는 것만 알고 살면 저자가 말하는 거만한 바보가 될지도 모른다. 세상의 흐름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자가 소개하는 좋은 과학 서적이 많다. 요즘은 지적이고 글도 잘 쓰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들도 많다. 책과 그들을 따라 조금씩이라도 과학에 대한 지평을 넓힌다면 내가 나를 더 정확히 알게 될 것이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인문학이 준 이 질문에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생물학을 들여다보고서야 뻔한 답이 있는데도 모르고 살았음을 알았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의미는 없다.‘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찾지 못한다. 남한테 찾아 달라고 할 수도 없다. 삶의 의미는 각자 만들어야 한다. ’내 인생에 나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어떤 의미로 내 삶을 채울까?‘ 이것이 과학적으로 옳은 질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런 것을 연구하지 않는다. 질문은 과학적으로 하되 답을 찾으려면 인문학을 소환해야 한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인문학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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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1-30 18: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도 운명적 문과!!
저자가 직접 서문 읽어주는 바람에 오디오북 망할 뻔 했군요 ㅋㅋㅋㅋ 역시 전문가가 낭독해야 합니다^^

페넬로페 2024-01-30 19:00   좋아요 2 | URL
저는 전공도 그렇고,
문과와 이과에 걸쳐져 있는 사람인데요.
저한테 타고 난 것의 회한은 손재주 입니다.
뭘 그려도 못 그리고
뭘 만들어도 못 만들고 ㅠㅠ
노래도 엄청 못해요.
다음 생엔 예술가로 한 번 살고 싶어요.

미미 2024-01-30 2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문 들으실 때 괴로우셨다니ㅋㅋㅋㅋ 유시민 작가님이
페페님의 리뷰를 보신다면 조금 섭섭해 하시겠는데요?ㅋㅋ
어느정도일지 밀리의 서재를 구독하고 싶을 정도로 궁금해요^^

책은 진작에 사두었는데 책 탑 중간에 슬프게 낑겨?있습니다.

페넬로페 2024-01-30 21:27   좋아요 2 | URL
다른 많은 걸 갖춘 분이라 아마 인정하실지도 모르겠어요.ㅎㅎ
밀리의 서재에서 낭독해 주시는 성우분들이 엄청 잘 하시더라고요.
미미님께서는 양자역학도 혼자 독학하시는 분이라 이 책 저보다 훨씬 더 이해를 잘 하실 것 같아요^^

미미 2024-01-30 21:37   좋아요 2 | URL
저 결국 궁금해서 1분 미리듣기 찾아 들어봤어요ㅋㅋㅋ
페페님이 왜 괴롭다 하셨는지 알것같아요ㅋ

페넬로페 2024-01-30 21:48   좋아요 2 | URL
오, 정말 그렇죠!
본문을 읽는 성우분이 엄청 미남일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니까요~~

서곡 2024-01-30 22:58   좋아요 2 | URL
두 분 대화가 너무 우껴요 ㅋㅋㅋㅋㅋ

미미 2024-01-30 23:03   좋아요 2 | URL
유시민 작가님 의문의1패, 성우는 의문의1승입니다. 저 페페님 덕분에 구독 진지하게 고민중이에요ㅋㅋㅋ

페넬로페 2024-01-30 23:40   좋아요 2 | URL
밀리의 서재가 은근 좋은 책도 많고,
불편한 편의점이나 세이노의 가르침같은 베스트셀러를 살짝 엿보기도 좋더라고요.
오디오북도 많고요^^

서곡 2024-01-30 22: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아 지못미 유시민 작가님 ㅎㅎㅎ

페넬로페 2024-01-30 23:42   좋아요 2 | URL
제가 유시민 작가님 팬인데~~
작가님,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요.
충분히 다른데서 커버할 수 있으시죠?

은오 2024-01-31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듣기를 포기할 생각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낭독은 성우분들께 맡깁시다..
관심이 없다는 것은 ‘잘 모른다’의 다른 말이 될 수 있다. 맞습니다 ㅠㅠ

페넬로페 2024-01-31 23:18   좋아요 1 | URL
저는 모든 것을 잘하는 사람 싫어해요.
적당히 못하는 게 있어야 다른 사람도 빛이 나지요. ㅡㅎㅎ
제 스스로 저를 위로하는 말입니다.

저는 잘 모르면 너무 관심이 없는 게 문제인 사람이어서 이번 기회에 과학책에 입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서곡 2024-01-31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밀리 이용권 선물을 받아서 쓰는 중인데요 오디오북을 더 들어야겠어요! 오늘 말일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4-01-31 23:20   좋아요 1 | URL
밀리의 서재 오디오북을 잠자기 전에 많이 듣는데 완전 자장가예요 ㅎㅎ
서곡님!
2월에도 건강하시고
더 즐거운 독서 하시길요^^

책읽는나무 2024-01-31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만한 바보‘
뭔가 쿡 찌르는 명칭입니다.
낭독은 전문가에게!!ㅋㅋㅋ
이렇게 우아하면서도 예리한 문장은 역시 페페 님만의 매력입니다.
그나저나 문과 이과....저는 문과생도 아니요. 이과생도 아니요. 저도 애매하게 걸쳐진 인간이라 이도 저도 확실하게 아는 게 없어서 얄팍한 지식을 좀 많이 채워가야겠군요.^^
안부 물어주셔 감사합니다.
늘 그리웠어요.^^

페넬로페 2024-01-31 23:24   좋아요 1 | URL
이 책에서 ‘거만한 바보‘가 나왔는데 누구나 한번쯤은 이 말에 양심이 찔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완전 그랬고요.
책나무님 전공이 무지 궁금합니다.

책나무님, 언제나 그리워요.
힘드실줄 알지만 그래도 가끔씩 안부 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