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와 달빛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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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사람들이 부러운 건, 물론 소설이나 영화에서 거의 대부분 접한 거지만, 유럽에 있는 다른 나라로 여행이 쉽고, 웬만하면 외국어도 두세 개쯤 너끈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륙으로의 진입이 꽉 막힌 우리와 달리 그들의 자유로운 이동은 깊고 폭 넓은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다양한 사고로 이어지고 문학 작품에 온갖 에피소드로도 반영된다. 유럽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느낌이 드는 이유에 그들의 지리적 환경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세르브 언털의 여행자와 달빛은 헝가리의 부더와 페스트, 이탈리아, 파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중산층 이상의, 부르주아가 등장인물로 나오고 그들의 생활 방식도 우리와 많이 달랐다. 이 소설의 주제를 파악하기 전, 일단 등장인물의 삶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다. 모든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행동이 평범하지 않고 독특했다.

 

작가의 경험이 많이 들어있는 이 소설에는 영적인 관점, 죽음,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묵직함이 있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은 속물적 내용도 많아 완독하고 나서도 소설에 관한 확실한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소설에 이질적인 것들이 많이 있어 배가 산으로 간 느낌도 들었다. 옮긴이 해설에 있는 용어인 에피스테메(어떤 특정한 시대의 문화를 규정하는 심층적인 규칙의 체계)가 나에게는 상당히 혼란스럽게 다가왔다. 아주 어려운 소설이었다.

 

학창시절에 만난 친구와 그들과 함께 한 경험에 여전히 지배당하고 있는 주인공 미하이는 어른이 되지 못한 인물이다. 미하이는 과거에서 벗어나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에르지와 결혼한다. 신혼여행으로 이탈리아로 가지만 그는 도중에 말도 없이 에르지를 떠나버린다. 청춘을 배신하지 못한 미하이는 15년이 지난 후, 결국 그 시절에 함께 했던 사람과 이탈리아에서 한 명씩 재회하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앞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된다. 타고난 성향에다 인생의 중심이 되었던 그 시절을 벗어나지 못한 미하이는 죽음을 선택하려 했지만 운명적으로 일면식도 없는 한 아이의 대부가 됨으로서 어느 정도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스스로가 아닌 아버지가 내민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지만 미하이에겐 그 어려운 한 발이 새 인생의 첫 걸음이었다.

 

미하이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인 울피우시 터마시는 자살하고 그의 여동생 에버는 죽음의 조력자가 된다. 이 책에서 죽음은 아주 미학적으로 서술된다. 어머니의 부재와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울피우시 남매에게 죽음은 자연스러운 선택이고 귀결이었다. 죽음의 순간에 황홀경을 겪는다는 터마시의 말에 죽음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삶을 위해 죽음을 망각해야 하는 현실을 사는 평범한 내가 터마시의 죽음을 쉽게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죽음은 언제나 내 옆에 꺼내 놓아야 하는 것임이 확실하다. 다른 친구인 에르빈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가 되고 세페트네키 야노시는 사기꾼이 된다. 같은 시절을 거쳤고 모두 다 거기에 몰두했지만 그들의 삶의 방향은 다 달랐다.


휴머니스트 출판사의 세계 문학 시리즈 중 다른 존재가 되어야만 나아갈 수 있는 삶의 결정적 한순간이라는 테마로 간행된 이 소설에서 미하이는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여행자가 된다.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학창 시절의 친구들과 새로운 사람들과 조우한다. 미하이에게 결정적 순간은 하나가 아닌 여러개가 될 것이다. 다만 그는 결정적 순간마다 우연을 믿고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여행은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희망을 갖고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 자신이 아닌 것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삶을 위한 준비였다. 앞으로 무수히 밀려 들 결정적 순간들마다 미하이는 도망가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을지.....

 

책의 앞표지 뒷장에 있는 작가 소개에서 <세르브 언털>은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1944년 헝가리 벌프의 노동 수용소로 끌려갔고 1년 뒤인 1945년 그곳의 간수들에게 구타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고 적혀있다. 1년 동안 수용소에서 겪었을 고통에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조차 안 된다. 책을 읽는 내내 끔찍한 이 말들이 생각나 내용에 잘 집중할 수 없었다. 현실에 비해 우리가 추구하는 허구는 얼마나 가당찮은지, 부질없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미하이는 우울해졌다. 머리에는 온갖 것이 떠올랐고, 일상적인 그 상황은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영세식에 참석하자며, 그들은 유서를 작성하고 있는 미하이를 방해한다. 그는 갑자기 이렇게 사랑스럽고도 엉뚱한 일들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끔찍하거나 숭고한 인생의 순간에 항상 사랑스럽고 엉뚱한 일들이 발생했으며, 사랑스럽고 엉뚱한 때에는 항상 끔찍하고 숭고한 것들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인생은 정해진 형식이 없는 것이거나 최소한 뭔가 매우 복합적인 장르다.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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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6-03-29 0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슬로의 소설 <라스트 울프>가 독서 모임 지정 도서라서 읽었는데, 어렵기만한 라슬로의 문학 세계보다 다른 헝가리 문학 작품들을 더 알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국내에 번역된 헝가리 작가들의 문학 작품이 있는지 찾고 있어요. 페넬로페님의 리뷰를 만난 덕분에 이 책을 알게 되었어요. ^^

페넬로페 2026-03-29 09:52   좋아요 1 | URL
<라스트 울프>와 <저함의 멜랑콜리>를 번역한 분이 의사이면서 번역 작업을 하시던 분이던데 아마 중역한 것 같았어요. 다른 책도 마찬가지이고요. <여행자와 달빛>은 최근에 출간된 <죔레는 거기에> 를 번역한 김보국 번역자가 번역하셨더라고요. 헝가리어 전공자라 당연히 직역을 하셨고요. 그것이 반가워 읽었는데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독서 모임에서 읽는다면 여러 개의 논제가 나올 듯 합니다. 다른 헝가리 작가의 작품은 임레 케르테스가 알려져 있는데 번역된 헝가리 작품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두고 온 여름 소설Q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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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뻔하고 식상한 소재이지만 매번 이런 글에 약한 나를 발견한다. 신파적인 것에서 삶의 반추가 더 쉬운 탓일까? 씁쓸하고도 아프다. 잘나지도 않은, 그저 그런 인생들의 해피엔딩은 왜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약간 어긋났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단절과 상처라고 크게만 포장하는 건 아닌지....날씨가 더 따뜻해지고 꽃이 피면 소설 속 장소였던 인릉에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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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핑 도스토옙스키 - 대문호의 공간을 다시 여행하다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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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탄생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가 살았던 공간을 직접 따라가며 서술한 연대기다. 제목대로 도스토옙스키 전체 삶에 대한 장소, 작품, 의미를 기록한 매핑이다. 신문에 연재되어서인지 쉽게 읽히면서도 깊이 있고 볼거리가 많다. 도선생님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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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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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에게 세계 문학에서 가장 강렬하게 기억나는 주인공 이름 딱 10개만 말해보라고 할 때, ‘안나 카레니나는 거의 빠지지 않을 것이다. 너무나 유명한, 주인공의 이름이 표제작인 이 작품을 거의 10년 만에 재독했다. 처음 읽었을 땐 약간 지루했는데, 다시 읽은 안나 카레니나는 그렇지 않았다. 톨스토이의 담백한 문장과 세련된 소설 구성에 감탄하며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일관되게 애정하고 러시아 최고의 작가라 생각하는 도스토옙스키가 톨스토이에게 자리를 내 줄것 같은 나쁜 예감마저 들 정도로 좋았다.(일단 1권에서)

 

여기엔 여러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독자적 삶을 살아간다. 소설 첫 문장의 저마다 나름의 이유(p.13)"는 가정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도 적용되며 나름의 선택으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지만 그것은 어차피 내가 아닌 타인이 내린 판단일 뿐이다. 언뜻 안나 카레니나의 생의 결말이 불행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녀의 선택은 행복을 위해서였다. 행복과 불행은 다양한 삶에서 어쩔 수 없이 교차될 수밖에 없는 빛과 그림자와 같은 양면성이다.

 

이 소설은 안나 카레니나와 브론스키와 카레닌, 레닌과 카체리나(키티)의 두 축으로 진행된다. 물론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불륜)이 가장 주된 내용이지만 이 두 사람이 소설 전반을 완전히 지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톨스토이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의 시작을 찰나적으로만 표현한다. 모스크바 기차역에서 스치면서 서로를 본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진다. 사랑이라는 것에 구구절절한 이유가 필요 없다는 듯하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사랑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서술되기 전, 안나의 오빠 스테판 오블론스키콘스탄친 드미트리치 레빈이 먼저 등장한다. 소설의 첫 문장으로 너무나 유명한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스테판의 가정에서 먼저 시작된다. 자기 집의 프랑스 가정교사와 바람이 난 스테판은 아내 다리야(돌리)와 냉전중이다. 이 에피소드는 사건의 포문을 여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을 중재하기 위해 안나 카레니나가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오게 되고 그것은 브론스키를 만나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또 하나는 여기에서 스테판과 레빈의 사랑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보여준다.

 

스테판은 쉽게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다. 서른 네 살의 미남인 그는 벌써 다섯 아이와 죽은 두 아이를 낳은 서른 세 살의 아내 돌리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바람피운 것을 후회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제 아름답지도 않고 쇠잔해진 돌리가 관대함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뻔뻔한 남자이다.(소설 초반의 스테판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재미있다.) 브론스키도 이런 유형에 속한다. 브론스키는 키티에게 결혼할 의사도 없으면서 유혹하는 짓(p.128)’을 한다.

 

반면 레빈은 사랑과 가정은 연결되고 하나인 것으로 생각하며, 절대 배반이란 있을 수 없고 서로에게 충실해야만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사람이다. 돌리의 동생 키티에게 청혼했지만 거절당한 레빈은 실의에 빠지고, 괴로운 상황을 벗어나고자 농민 운동에 몰두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키티를 사랑하며 그녀에게만 관심을 둔다. 맑고 선하며 빛나는 키티는 그에게 영원하며 끝까지 지켜져야 할 여자인 것이다.

 

얼핏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안나의 남편 카레닌이 레빈과 비슷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두 사람의 사랑관에는 차이가 많다. 레빈에게 사랑은 자신의 삶 자체이지만 카레닌의 사랑은 남에게 보여 지는 것에 불과하다. 카레닌은 사교계에서 자신의 가정이 완벽하게 보여 지고 구설수에 오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카레닌에게 가정은 정치가로서 자신이 갖추어야 할 많은 것 중의 하나일 뿐이다.

 

기차역에서 안나를 우연히 마주친 브론스키는 한 번 더 그녀를 꼭 보아야겠다는 충동(p.137)‘을 가진다. 안나 역시 다정한 눈빛으로 브론스키를 유심히 바라본다. 그것으로 그들의 사랑은 시작된다. 하지만 기차역에서 기차에 치인 경비원의 사고와 스테판의 집에 잠깐 들른 브론스키를 보며 안나는 어떤 공포감과 불길함을 느낀다. 여지껏 평온했던 안나의 삶에 불쑥 들어 온 브론스키를 떨쳐버리려 그녀는 모스크바를 급히 떠나지만 곧바로 브론스키는 안나를 따라 페테르부르크로 온다.

 

안나 카레니나 1권에서의 압권은 어쩌면 처음일 수 있는, 운명적 사랑에 빠진 안나의 심리적 변화이다. 이 부분을 톨스토이는 기가 막히게 표현한다. 모범적이고 습관적인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에 오른 안나에게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삶을 좇는 것보다 자신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p.221)'였다. 브론스키를 떠올리며 뜨거움을 느끼는 그녀는 이제 자신이 예전의 안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페테르부르크 역에서 마중 나온 남편을 본 순간 안나는 , 어쩜! 저이의 귀는 어떻게 저렇게 생긴 걸까?(p.229)'라고 생각하며 남편에 대한 불쾌한 감정에 심장이 조이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 그러한 감정은 오랫동안 느껴온 것이지만 이제야 그것이 고통스럽고 더 이상 남편에게 위선적 행동을 취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안나의 시선은 이제 카레닌이 아닌 브론스키로 향한다. 분명하고도 확고한 사랑의 시작은 안나를 솔직하게 만든다. 그녀의 전부였던 아들에게조차 다른 감정이 든다. 안나와 브론스키는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표적이 되고 비난의 대상이 된다. 평소 모든 것이 완벽했던 안나를 시샘한 사교계 사람들은 이때다 여기며 덥석 미끼를 문다. 사교계 사람들 대부분은 보통 공공연히 불륜을 저지른다. 다만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몰래 숨기지만, 안나와 브론스키는 서로를 너무나 사랑해 숨길 수가 없다.

 

아내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고 인식한 카레닌은 안나를 통해 처음으로 인생의 벽을 느낀다. 그는 예의와 법도를 언급하며 안나에게 경고한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거침없이 진행되고 급기야 안나는 브론스키의 아이를 임신한다. 경마 대회에 출전한 브론스키가 말에서 떨어지자 그것을 구경하던 안나는 일어나 비명을 지른다. 그 일을 계기로 안나는 확실하게 카레닌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브론스키라고 못을 박는다. 키티에게 청혼을 거절당한 레빈은 시골로 돌아가 농장일에 몰두하고, 브론스키에 의해 실의에 빠진 키티는 온천으로 요양을 가 건강을 회복하는 것으로 2부는 끝이난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분명 불륜이지만 적어도 그들의 시작은 사랑이었다. 아무 의심 없이 이러한 인식을 할 수 있는 건 분명 작가 톨스토이의 힘이다. 잔잔하고도 애잔하게, 때론 유머러스하면서도 강렬한 이 소설의 흐름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2권이 기대된다.


[“당신은 정말로 모르십니까내게는 당신이 삶의 전부라는 걸난 평온이란 걸 모릅니다그래서 당신에게 줄 수도 없습니다나의 모든 것사랑...., 그렇습니다난 당신과 나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내게는 당신과 내가 하나입니다그리고 앞으로도 나에게든 당신에게든 평온 따윈 있을 것 같지 않군요내 눈에는 정말과 불행아니면 행복그것도 커다란 행복의 가능성만 보일 뿐입니다그것이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요?.“ -p.305]

 

 


독서 동아리에서 항상 고민되는 건 읽어야 할 책을 선정하는 것이다. 동아리 멤버들과 2026년에 읽어야 할 책을 정하다가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로 했다. 1년에 한 번은 굵직한 고전을 읽고자 한 것이었다. 나에게는 재독이지만 언젠가는 꼭 다시 읽고 싶었던 책이라 반가웠다. 마침 안나 카레니나 뮤지컬이 상연된다는 소식에 본격적으로 이 소설을 읽기 전에 뮤지컬을 먼저 관람하기로 하고 얼리버드로 예매했다. 안나 역에 세 배우가 더블캐스팅 되었지만 아무래도 옥주현 배우가 출연하는 회차를 관람하고 싶었다.

 

예매할 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안 사실은 총 38회 공연 중 출연 횟수가 옥주현은 23~25, 나머지 두 배우는 8회와 7회에 불과한 사실이었다. 한 작품을 올리기 위해 몇 개월 동안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소화하기 위해 똑같이 연습할 건데도 출연 횟수가 이렇게 차이가 나면 나머지 배우는 정말 허탈할 것 같았다. 옥주현의 욕심에 실망했지만 이왕 예매를 했으니 이번에만 보고 다음에는 옥주현은 패스하기로 했다.

 

안나 카레니나라는 방대한 내용의 작품을 뮤지컬에 다 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안나, 브론스키, 카레닌 VS 키티, 레빈의 두 관계만을 집중해 보여주었다. 기차역을 중심으로 이미지를 계속 변화시켜 보여주는 무대 연출도 괜찮았고, 끊임없이 변화되는 앙상블의 출연도 좋았다. 계속 어두운 분위기로 이어지는 뮤지컬을 보면서 안나는 불행해지더라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느꼈다.

 

옥주현 배우의 노래와 연기는 전성기에 비해 많이 떨어졌다. 안나 카레니나에 걸맞는 카리스마도 보이지 않았다. 뮤지컬의 넘버는 거의 같은 분위기였다. 이 넘버를 살리기 위해서는 노래 실력이 좋아야한다. 옥배우의 기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상당히 지루했다. 뮤지컬 말미에 패티 역의 한경미 소프라노가 나와 아리아를 부른다. 한경미 배우가 노래를 너무 잘 불러 옥주현 배우가 너무 묻혀버렸다. 많이 아쉬웠다. 그리고 세종문화회관은 뮤지컬을 상연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였다. 오케스트라 소리에 묻혀 배우들의 발음이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국립 뮤지컬 전용극장이 새롭게 건설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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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이름 2026-03-13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어본적은 없는데 읽어봐야겠네요

페넬로페 2026-03-14 00:27   좋아요 0 | URL
네, 좋은 독서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곡 2026-03-14 1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옥주현 안나 카레니나 생생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6-03-14 19:19   좋아요 1 | URL
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래요.
 
오래된 빛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8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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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재의 내가 과거로 되돌아간다. 굳어지고 완고해진, 온전하지 못한 기억 속에서 성기고 희미해진 빛을 따라 움직인다. 기억의 숲에서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오래된 빛은 나를 왜곡되거나 잘못된, 또는 혼란스러운 길로 안내한다. 설령 확실하게 다가오는 몇 안 되는 지나간 인생의 밝은 빛조차 완벽하게 재현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식으로 해석되고 비틀어진 그 기억들에 얼마만큼의 의미를 두고 무슨 단어로 그 느낌들을 생생하고도 자세히 표현할 수 있을까?

 

작가 존 밴빌은 제목 그대로 <Ancient Light>를 따라 한 남자의 50년 전과 10년 전의 과거, 현재를 오가며 집요하게 희미한 기억을 끄집어내어 준다. ’알렉산더 클리브의 인생 전체를 지배한 그의 15세 때의 몇 달에 대해-‘머나먼 과거의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우글거리고 대개는 그게 기억인지 내가 만들어낸 것인지 알 수 없지만(p.14)’-서술한다. 매 페이지마다 아름다운 문장이 가득했지만, 하이픈으로 연결된 부연설명이 가득한 삽입구가 읽기를 방해했다. 마치 영어 독해를 할 때, 주어 찾기의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의 기억의 파편 조각들을 짜 맞춰 연결시키는 일이 쉽지 않음을 작가는 그런 복잡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거의 끝부분까지 힘들게 따라가다 마지막에 가서야 소설 전반에 대한 이해를 했고, 결국 나에게 감동과 여운, 무수한 생각을 하게 한 작가의 필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50년 전, 15세의 소년 앨릭스는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다 봄바람에 치마가 뒤집어져 팬티가 노출된 어떤 여인을 우연히 보게 된다. 처음엔 그를 향해 하늘에서 곧장 덮쳐 내려오는 듯한 여신의 모습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그의 엄마 같은 중년 여성이었다. 그것이 앨릭스와 가장 친한 친구인 빌리 그레이의 엄마인 미시즈 그레이(실리아 그레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 뒤 빌리의 집에서, 거울 속에 자신의 나신을 비추고 있는 미시즈 그레이의 모습을 또 다른 거울을 통해 엿 본 그는 그녀를 향한 수줍지만 은밀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욕망하지만, 사실 그 대상이 늘 배경에 불과한, 무슨 일을 하느라 바쁜 엄마의 모습이기도 한 미시즈 그레이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저 우연히 마주친 미시즈 그레이의 모습이 한 사춘기 소년의 성을 자극했고 그는 어떤 다른 여자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었을 것이다.

 

며칠이 지나고 테니스 클럽에서 그들은 우연히 다시 만난다. 미시즈 그레이는 소년을 차에 태우고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가 이렇게 질문한다. “나한테 키스하고 싶어?(p.61)” 이 말을 계기로 그들의 사랑은 시작된다. 여기에서 궁금해진다. 왜 미시즈 그레이는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아들의 친구를 선택하게 되었을까? 소설의 끝에 그 당시 미시즈 그레이의 사정이 조금 밝혀지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녀의 심리를 따라가기 쉽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의 관계에 대한 비판이나 도덕적 심판이 아니었다. 계속 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드는 의문점이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자의 마지막 불꽃이었는지, 한 번의 일탈로 거침없이 시작된 육욕의 향연이었는지, 그 일탈이 소년에게 가져다준 변화에 대한 미안함의 책임이었는지, 답답한 시골구석에 갇혀 사는 중년 여자의 몸부림이었는지.....결국 이 모든 것이 노년이 된 알렉산더의 회상이기에 그 역시 추측과 자신의 생각으로만 머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알렉산더와 미시즈 그레이의 사랑뿐만 아니라 10년 전 임신한 채 자살한 알렉산더의 딸 캐스로 인해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자신과 아내 리디아의 현재의 모습. 또한 악셀 판더(문인, 비평가, 교사)‘라는 사람을 기반으로 한 영화에 출연한 알렉산더와 그의 상대배우인 돈 데번포트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조사원인 빌리 스트라이커의 인생에 대해서도 나이 든 알렉산더는 관심을 갖는다.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그 속에서 우리는 그 날 하루를 감당하며살아간다. 각자 견디며 살아내야 한다. 늙어버린 알렉산더 역시 아픔과 회한을 가진 채 하루를 감당하지만 지나온 세월이 준 쓰라림을 그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순명으로 승화시킨다. 딸아이를 잃은 슬픔으로 밤새 광증에 시달린 아내 리디아를 진정시키고 힘들어 둘이 침대에 누웠을 때, 커튼 사이의 바늘구멍만한 틈으로 빛이 들어와 마치 카메라 옵스쿠라의 형태로 보이는 바깥세상의 이미지는 아름다웠다. 새벽빛에 비친 선명하게 뒤집힌 세상의 모습에서 이 세상에 완벽하게 슬픈 것도, 온전히 기쁜 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설 오래된 빛에는 몇 개의 단편 소설로 출간해도 좋을 풍성한 내용들이 서로 교차되며 서술된다. 매 페이지마다 단편 소설 하나가 들어있다고 느낄 정도로 생각할 것이 많았다. 단어 하나마다에 들어있는 비유도 좋았다. 구절구절 멈추어, 작가 존 밴빌, 아니 소년 앨릭스 그리고 노년이 된 알렉산더와 얘기 나누면 좋을 것 같았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고 공감하고 싶었다. 그랬기에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이 많은 아름다운 문장의 감상을 표현하기 어려워 책을 들고 카페에 간 날이 많았다.

 

산책길에서 찍은 많은 사진들을 다시 보면, 햇빛에 완전히 노출된 사진보다 빛이 살짝 들어간 사진이 훨씬 더 아름답고 신비롭다. 세상 모든 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없듯, 노년에서 바라 본 과거는 전체적인 난파 속에서 건져 낸 무작위적인 표류물(p.14)’일 뿐이다. 그것들로 고해성사를 하든, 미숙함에 대한 어리석음을 인정하든, 지나온 인생의 여정은 그 어떤 것이라도 슬프고 아름답다. 여전히 모호하고 불안하기도 하지만 삶의 전진적인 난파에 부표가 되어주기엔 충분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여러 우주가 있고 그것이 모두 함께 존재하며 모두 동시에 진행되는데, 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키티의 낙원의 평원과 마찬가지로, 이 무한한 층이 있고, 무한히 가지를 뻗는 현실 안 어딘가에서도 캐스는 죽지 않았고, 그애의 아이가 태어났고, 스미드리가일로프는 미국으로 가지 않았다. 어딘가에서는 또 미시즈 그레이가 살아남았고,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 있고, 여전히 젊고 여전히 나를 기억하고 있다. 내가 그녀를 기억하듯이. 어떤 영원한 영역을 믿어야 할까. 어느 쪽을 택해야 할까? 어느 쪽도 아니다. 나의 모든 죽은 자는 어차피 나에게 다 살아 있고 나에게 과거란 영원히 빛나는 현재이기 때문에. 그들은 나에게 다 살아 있지만 사라졌다. 이렇게 말들로 이루어진 연약한 내세에만 있을 뿐.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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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6-02-26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억이란 빛처럼 한 순간에 왔다가 사라지거나, 또 잠시 길게 남아 있기도 하네요.
올려주신 리뷰글을 읽으니 소설의 이미지가 빛처럼 다가 왔네요. ^^
항상 좋은 책, 좋은 리뷰에 감사드리며,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도 좋은 글을 말의 등에 태운 것처럼 올려 주세요. ㅎㅎ
감사 합니다.

페넬로페 2026-02-26 11:09   좋아요 1 | URL
이 책은 제목처럼 빛의 이미지가 많아요. 어떤 삶을 살았던 과거를 돌아보면 모든 것이 빛의 이미지로 다가올 것 같아요.
요즘은 과거를 회고하는 글이 그 어떤 내용이라도 좋아요.
삶의 관조와 여운, 씁쓸함이 느껴져 그런가봐요.
항상 제 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마힐님께서도 올 한해 건강하게 보내시고 언제나 타국에서의 생활이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레삭매냐 2026-03-02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다 말았는데...

도서관에 가서 다시 빌려다
마저 읽어야지 싶습니다.

존 밴빌의 다른 소설인
<블루 기타>의 국내 출간
을 기대해 봅니다.

페넬로페 2026-03-02 18:35   좋아요 1 | URL
읽기가 쉽지는 않았는데
전체적인 느낌이 좋았어요.
저는 존 밴빌의 ‘바다‘를 조만간 읽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