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여름 - 태양, 입맞춤, 압생트 향… 청년 카뮈의 찬란한 감성
알베르 카뮈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 알베르 카뮈에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이름이 있다. 번역가 김화영 선생이다. 그가 카뮈의 많은 작품을 번역했기에 결혼여름도 김화영 선생의 번역으로 읽고 싶었다. 그러나 녹색광선 출판사의 표지에 마음이 바뀌었다. 바람에 넘실대는, 흰 포말이 가득한 파도가 일렁이는 푸른 바닷가에서 한 쌍의 남녀가 행복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을 본 순간, 이 책을 선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책의 제목인 결혼과 완벽히 어울렸기 때문이다.

 

결혼여름이라는 제목에서 나는 이 책의 내용이 카뮈의 연예사와 결혼에 대한 것 인줄 알았다. 하지만 여기에 카뮈 자신은 물론, 그 어떤 남녀의 사랑에 대한 것도 들어있지 않다. 제목과 책표지에서 내가 오해하고 착각한 것이었다. 물론 이건 나의 책임만은 아니다. 출판사의 책표지 역시 한 몫 한 셈이다. 결혼여름1936년에서 1937년 사이에 쓴 에세이를 모은 결혼, 1939년에서 1953년 사이에 쓴 에세이를 모은 여름을 한데 묶은 책이다.(p.9)

 

여기에서 카뮈가 선택한 단어인 결혼은 작가의 알제리에 대한 사랑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카뮈가 태어나서 자란 알제리에 대한 경의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느끼는 무한한 애정과 같다. 알제리의 강렬한 태양과 바다, 그곳의 사람들은 카뮈에게 지금 이 순간의 환희와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다음 생을 삭제시켜 버린다. 현실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그들 인생의 목표이자 가치인 것이다.

 

나에게 알제리는 카뮈의 소설 이방인페스트를 통해 먼저 보고 들은 나라다. 이 책에서 카뮈가 여행하며 서술한 알제리의 도시인 티파사, 오랑, 제밀라, 알제는 여전히 나에게 이국적이다. (나의 남은 생 동안 이곳에 가보기는 할 수 있을까? 어려울 것이다.) 너무 이국적이라 상상만으로는 카뮈의 표현을 모두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길목에서 만나게 될 아름다움, 슬픔, 행복, 죽음이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가진 삶의 열정과 감정을 모두 소진할 필요를 말해준다. 애써 남기고 맹세하며 인내하여 신의 약속을 받아낼 이유도 없다고 한다. 카뮈가 서술한 결혼에서 그의 소설 이방인의 의미가 뚜렷하게 보인다.

 

'봄에 티파사엔 신들이 머문다(p.19)’로 시작하는 티파사에 대한 자연찬미는 살아가는 동안 명심해야 할 기본 조건을 가르쳐준다. 편견에 맞서 지금 있는 그대로의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쁨이고 생활의 기술인 것이다. 내가 보는 것이 바로 믿는 것이고, 거기에 자유가 있다.

 

침묵과 황폐함이 지배하는, 사멸한 도시인 제밀라에서는 그 어느 것도 기대하지 않게 된다. 내일도, 다른 날도 오늘과 같을 것인 우리의 현존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포기가 아니라 거부라고 카뮈는 말한다. 세상의 모든 훗날을 거부하고 내 앞에 놓인 현재의 풍요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내 현존의 불안과 무력함을 없애는 것이다. 거기에 나머지는 내 소관이 아니라는여유만 있다면 그럭저럭 우리는 이 세계에 머물 수 있다.

 

카뮈의 알제에 대한 사랑에는 그곳에서 살아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감정과 위트가 있다. 알제는 자연의 혜택이 넘쳐난다. 가르침, 약속, 암시도 없이 그저 아낌없이 내주는 곳이라 그곳에서 맘껏 누리기만 하면 된다. 아름다움과 가난이 공존한 알제에서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젊음을 소진하고 곧바로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수영을 때리고’, 여인들에게 다가가 풍요를 만끽할 수 있는 그 짧은 찰나를 그들은 즐긴다. 나머지 세월을 뒷골목의 카페에서 수다로 보낼지언정. 알제의 시민은 청춘을 만끽하고 서른 살이 되면 다 쓰고 남아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나머지 삶을 살아간다. 부모가 되고 자식을 키우며 인생의 끝을 기다린다. 서울 시민들이 절대 할 수 없는 모험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우리의 나머지 생은 안정되고 풍요로운가? 걱정은 없으며 행복한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알제인처럼 우리에게도 자부심이 있는가?

 

[한 존재와 삶 사이에 단순한 일치가 행복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행복이라 부른단 말인가? 또한 장수하고 싶은 욕망과 죽을 운명에 대한 이중의 자각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조화가 더 온당하게 인간과 삶을 이어줄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아무것에도 기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오직 현재만을 우리에게 덤으로주어진 유일한 진실로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내가 나의 척도와 만족을 찾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도록 내버려 두란 말이다! 아니 그럴 것도 없이 눈에 보인다. 피에솔레, 제밀라, 그리고 햇빛을 받고 있는 항구들이. -p.71~72]

 

 

1939년 이후에 쓴 에세이를 모은 여름은 지중해에 관련된 것들이 많다. 소설 페스트의 도시인 오랑, 레 콩쉴 계곡의 아몬드 나무, 유럽의 여러 도시, 남아메리카, 이탈리아, 그리스, 토스카나의 화가, 셰익스피어, 호메로스, 아이스킬로스, 프로메테우스, 헬레네, 신화, 전쟁을 넘나들며 카뮈는 순례자가 된다.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는 인간의 부름과 세계의 불합리한 침묵이 대면할 때 탄생한다고 했다. ‘수수께끼에서 그는 작가의 부조리에 대해 서술했다. 책을 많이 읽지 않은 대중은 그저 신문의 기삿거리 하나로 작가를 알게 된다. 대중은 그의 작품을 읽지 않고도 신문기자가 만들어낸 작가의 이미지로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되고, 작가는 명성을 얻게 된다. 작가가 여러 작품을 쓸 필요도 없다. 보통 작가는 성실하게 글을 쓰고, 작품을 위해 술도 마시지 않지만 대중은 작가가 해롱거리고 평범한 삶을 살지 않을 거라 믿는다.

 

또한 작가가 책에 쓴 내용이 작가 자신의 얘기가 분명 아닌데도 대중은 그것이 작가 본인의 얘기라고 생각한다. 카뮈는 그것이 낭만주의가 물러준 유치한 유산 중 하나라고 말한다. ‘한 인간의 작품들은 대체로 그가 느끼는 향수나 유혹의 역사를 되짚은 것이지, 실제 자신의 이야기인 경우는 거의 없다....어떤 작가도 감히 자신을 곧이곧대로 묘사하지는 못한다(p.156)’고 말하고 있다.

 

김화영 선생은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장 그르니에의 과 더불어 카뮈의 결혼여름20세기 프랑스 3대 시적 산문이라고 했다. 확실히 카뮈가 쓴 이 에세이는 아름답고도 철학적이며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녹색광선 장소미 선생의 번역은 현대적이고 깔끔하지만 카뮈 문장의 아름다움이 살짝 덜 묻어나오는 것 같아 아쉬웠다. 김화영 선생의 번역에 비해 건조한 느낌이 들었다.

 

카뮈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알제리에 대해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프랑스의 알제리에 대한 식민지배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알제리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때 카뮈의 어머니는 알제리에 계속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는 알제리계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택하여 프랑스 정부를 옹호했다. 카뮈는 알제리 자치권을 인정하거나 연방정부를 구성하면 알제리계 프랑스인과 아랍인들 간의 공존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으며, 알제리의 완전 독립에는 부정적이었다. 전쟁기간 동안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정전협정을 위해 헌신했으며 체포된 알제리인들을 구하기 위해 비밀리에 활동하기도 했다.(작가연보 중, 1954) 나는 카뮈의 인간 실존과 부조리 사상을 좋아하지만 그의 알제리의 독립에 대한 생각에는 항상 실망한다.


젊은 시절의 카뮈는 배우 알랭 들롱을 닮았다.


[우리가 남에게 어떻게 비치든 어떤 온당치 않은 자리를 차지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가 누구이고 마땅히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문제만으로도 삶을 채우고 노력을 쏟기에 충분하다.....또한 죽기 전에 완수해야 할 우리의 책무는 모든 단어들을 동원하여 그것에 이름을 붙이려 노력하는 것임을 배웠다. 예술가들은 저마다 자신의 진실을 찾고 있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라면 작품마다 진실에 가까워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언젠가는 모두가 찾아와 불타오를, 숨어있는 태양의 중심에서 좀 더 가까이 맴돌 것이다. -p. 158~1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규식과 그의 시대 1 - 고아 소년 “존”의 근대로의 여정 (1881~1918) 김규식과 그의 시대 1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통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김규식의 삶과 그를 통해 대한민국의 근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오랜 기간 김규식에 대한 자료를 추적해 평전을 완성한 저자의 노고에 감사한다. 완벽한 평전이지만, 책의 자세한 내용과 높은 가격으로 대중에게 멀어지고 학술서의 역할만 할 것 같아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먼저 온 미래 -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장강명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 네이버에 일론 머스크가 한 말이 올라와 읽은 적이 있다. 머스크의 말이 약간 생뚱맞았는데, 거기에 달린 댓글 하나가 강렬해 잊혀지지 않는다. ‘저 미친X이 하는 말이 나중엔 다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머스크가 한 말처럼 설마 했던 일이, 인간의 상상이라고만 여겨졌던 것들이 지금 우리 눈앞에 버젓이 실현되고 있다. 단숨에 모든 것이 급변하고 있다.

 

바둑의 원리에 대해 거의 모르지만,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완패(물론 5국 중 이 9단이 1승은 챙겼지만)했을 때 나 또한 충격이 컸다. 바둑은 결코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엄청나게 다양한 기술과 바둑을 두는 사람의 창의력이 어우러진 고난도의 게임이다. 승부를 예측하기도 힘들다. 그런 진입 장벽이 높은 바둑의 세계를 알파고가 너무 쉽게 정복해버렸다.

 

알파고의 승리는 다시 말해 인공지능의 승리였다. 알파고는 바둑인 뿐만 아니라 다른 업계의 사람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알파고는 모든 사람에게 앞으로 어떤 세상이 올 것이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장강명 작가의 고민도 다르지 않았다. 인공지능이 소설을 쓰고, 그것이 좋고 감동을 준다면 많은 사람이 읽을 것이다. 소설을, 사람이 아닌 AI가 쓴다면 그 스펙트럼이 엄청나게 넓혀질 것은 확실하다. 하물며 거기에 신박함과 재미가 더해진다면 매번 소재가 거기서 거기인 한국 소설을 누가 읽겠는가?

 

장강명 작가뿐 아니라 여러 다른 작가도 인공지능의 영향과 전망에 대한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 책에 몇 개의 대답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들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담대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먹고 사는 문제에까지 영향을 준다면 그들의 대답이 그렇게 여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편리함을 도와주는 도구이지만, 자본주의 원리에 의해 빅테크 기업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밀어붙인다면 결국 인간이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장강명 작가가 202312월부터 20241월까지 전 현직 프로기사 30명과 바둑 전문가 6명에 대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해 서술된 책이다. 알파고와의 대결으로 바둑계에 먼저 온 미래에 대해 바둑 기사 각자의 생각과 앞으로의 대처방안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들어있다. 이들의 대답이 다른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말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책의 3분의 2정도 분량의, 지루하기까지 한 그들의 대답은 결국 AI가 대세이고 바둑은 인공지능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영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프로 기사들은 이제 거의 바둑 AI 프로그램을 내려 받아 훈련한다. 인공지능을 거부하고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면 전혀 승률을 낼 수 없다. 이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바둑기사들은 은퇴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인공지능을 이용한 바둑이 예전의 낭만을 잃었을지는 몰라도 나름 장점도 많아 기사들은 별 불만이 없다고 한다. 인공지능이 훨씬 더 창의적이고 독창적이라는 것을 대다수가 인정하는 분위기다.

 

인공지능이 이렇게 바둑 세계의 판도를 바꾸었다면 문학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장강명의 질문이 계속된다. 사실 그 질문은 끝이 없을 정도로 많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계속되지만 이에 대한 답이 확실치 않은 것은 이미 대세가 된 인공지능에 대한 대처방법이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도덕적이며 인간적인 것을 들이밀기는 늦었다.

 

작가 자신도 답답하고 잘 모르기에 고작 가져온 것이 소설 ‘1984’멋진 신세계. ‘멋진 신세계를 거부하고 ’1984‘를 경계할지라도 우리에게 달라질 것이 있을까? 작가 말대로 신자유주의의 원리로 빅테크 기업이 움직이고 그것을 권력이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멋진 신세계를 거부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오픈AI의 이미지 생성 기능을 이용해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의 인물로 자신이나 가족을 바꾸는 것이 인기를 끈 것도 인간은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대세가 된 인공지능이지만, 장강명 작가는 이 시점에서 멈추고 생각하고, 모두에게 더 좋은 방향으로의 진행을 위해 고민하자고 한다. 정말 작가의 말을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작가가 가져온 여러 가지에 역부족을 느낀다. 문학도로서의 한계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말대로 여기서 한 번 멈춰서 우리가 어떤 세상을 맞이하고,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생각과 고민은 분명히 필요하다. 이 책을 통해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시작과 목적이 바둑 기사와의 인터뷰와 분석이었지만 너무 길게 서술해 지루했다. 뒷부분 역시 관념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 누구나 느끼고 있는 위기와 거기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공감했다. 정말이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걱정된다.

 

장강명 작가의 아내의 쾌유를 빈다. AI이든 뭐든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밥벌이를 빼앗지 말고 인간의 병만 척척 고쳐주었으면 좋겠다. 암과 치매를, 지금 당장.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다. 인공지능처럼 쓸모 있고 강력한 기술은 마치 야수와 같다. 일단 거리에 뛰쳐나오면 붙잡아 우리에 가두는 것이 매우 어렵다. 강하든 약하든, 터미네이터처럼 인간에 적대감을 품고 있든, 아니면 월-E처럼 안전하고 유용한 도구처럼 보이든 간에 말이다. 사실상 그 야수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아직 거리에 나오기 전뿐이라고 봐야 한다. -p.107]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iano避我路 2026-01-28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강명 작가의 건조하리 만큼 사실적인, 그래서 더 또렷해지는 사태 파악과 의미 부여를 사랑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미화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포용하고 거기서 변화를 찾아야 하는 것이겠죠.

페넬로페 2026-01-28 17:51   좋아요 0 | URL
네^^

단발머리 2026-01-28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제를 내어 놓고, 정해져 있는 하나의 답이 아니라도, 그걸 진지하게 풀어간다는 점에서 저는 장강명이 한국 사회에서 소설가 이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합니다. 저도 이 책이 있습니다^^

가지고 있다고 알라딘에 자랑만 했었는데, 페넬로페님 글 읽고 나니 더 궁금해졌어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해요 : )

페넬로페 2026-01-28 20:18   좋아요 1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한국 사회의 여러 요소에 대한 장강명 작가의 치열한 고민을 존중하고 공감하며 응원해요.
단발머리님의 감상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보이체크><홈파티>

 

게오르크 뷔히너의 희곡인 보이체크를 알게 된 것은 김애란의 단편소설 <홈 파티>에서였다. 작가가 자신의 글에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인용하는 건 그 작품에 들어있는 어떤 의미를 가져오고 싶어서일 것이다. <보이체크>의 본문에는 배경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어 내용을 이해하기 상당히 어려웠다. 세 번을 반복해서 읽었지만 확실한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1836년경에 쓰인 <보이체크>는 미완성 희곡이다. 오스트리아 작가이자 출판업자인 카를 에밀 프란초스가 다시 정리해 1879년 뷔히너 전집에 넣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이 희곡의 주인공인 보이체크는 실존 인물이다. ‘요한 크리스티안 보이체크1821년 어떤 과부를 살해하고, 1824년 라이프치히 시청 앞 광장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보이체크는 어린 시절부터 힘든 삶을 살아갔고 용병으로 군대를 전전한다. 군 생활을 마감하고 1818년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과부 우스트와 연인관계가 되지만, 그녀가 다른 남자들을 만나자 보이체크는 칼로 찔러 죽인다. 그동안 보이체크는 실직해 일이 없는 상태에서 구걸과 노숙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상태였다.

 

[뷔히너는 이 사건에다 여러 다른 소재를 버무려 한 인간의 개인적 비극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 여기서 비극은 목적론적인 운명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한 인간의 존재 목적이 다른 어떤 존재에 있다면 개인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소외될 수밖에 없다. 뷔히너는 그런 목적론에 반기를 든다.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오히려 그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역사적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사회적역사적 결정론과 자기 소외는 뷔히너 문학의 주요 특징이다.

 

사회사적으로 보면 보이체크는 가장 비천한 계층 출신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독일 최초의 비극이다....이 작품에서 그는 주체적 인간이 아닌 타인의 도구이자 사회적 상황으로 파탄 난 개체로 그려진다.

-p.373~374, 뷔히너 전집, 열린책들, 역자해설 중에서]

 

 

이렇게 보이체크에 대한 배경을 알고 나니 작품에 대한 이해가 확실해졌다. 왜 보이체크에게 환청이 들리고 헛것이 보일 정도로 내내 불안해하며, 정신없이 쫓기듯 뛰어다니며 일을 해야만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보이체크는 이발사로 대위의 시중을 들고, 완두콩만 먹으며 의사의 실험 대상이 된다. 아내 마리와 아기를 위해 쉴 새 없이 돈을 벌어야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리는 남자들의 유혹 대상이 되고 결국 군악대장에게 넘어가고 만다. 보이체크는 본래 가지고 있던 불안과 세상에 대한 분노, 사랑에 대한 질투로 아내 마리를 살해한다.

 

김애란 작가는 홈 파티에서 배우인 이연의 입을 통해 왜 보이체크는 자신의 진짜 적인 대위나 군악대장, 하다못해 의사도 아닌 마리를 죽였는지 모르겠다고 질문한다.(p.31)" 이연의 말처럼 보이체크는 자신에게 착하지만 덕이 없다고 말하는 대위에게도, 자신을 짐승처럼 대하는 의사에게도, 아내에게 추근대는 군악대장에게도 아무 반발을 하지 못한다.

 

전염병의 영향으로 모든 바깥활동이 제약을 받을 때, 이연은 대학 동기인 성민의 초대로 오대표의 홈 파티에 가게 된다. 모 대학의 반년짜리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만난, 마음 맞는 몇 명이 집에서 만나는데 특별손님으로 끼이게 된 것이다. 계산이 정확한, 상류사회에 속한 그들은 처음에는 이연에게 관심을 가진다. 그러다 결국 돈에 대한 얘기에 집중한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그들 안의 생각으로만 정리한다. 그들에게 보이체크는 고유명사에 불과한, 아는 체하기 알맞은, 한때의 추억일 뿐이다. 보이체크와 같은 부류의 타인의 삶을 깊게 들여다보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부담 없이 가볍게 간 이연은 평소 술을 좋아하면서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 물만 마신다. 자신과 딴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그저 흥미롭게 지켜본다. 그러다 점점 그들의 생각과 말에 불편해진다. 이연은 자신도 모르게 와인을 마시며 그들의 말에 반박하고 급기야 먼저 집에 가겠다고 일어나면서 오대표의 80년 된 영국산 빈티지 커피 잔을 와장창 깨뜨리고 만다.

 

이연은 흔들렸지만, 그들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즐기고 있다. 이연이 보이체크에게 품었던 의문을 이연 스스로 답해주고 있다. 보이체크의 분노가 위가 아닌 아래로 향했듯이 이연 역시 자신이 흔들리고 실수하고 만다. 왜 항상 그들은 성처럼 굳건하고 완고한데 그 나머지사람은 실수하고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건지....물론 이연과 보이체크를 그대로 비교할 순 없지만, 어쨌든 불안과 허무, 소외를 느끼는 쪽은 항상 그 나머지사람 쪽이다.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 되는 게 있는이연과 보이체크는 각자의 방식으로 쓸쓸하고도 허무하게 홈 파티와 무대에서 내려온다.

 

[그렇지만, 아니 그렇다 해도 이연은 이 연극을 이대로 마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연은 무대에서 중요한 대사를 치기 전 순간처럼 숨을 깊이 들이쉬며 거실 창문 너머 하늘을 봤다. 미세먼지 탓인지 달이 비현실적으로 붉었다. 이연은 이 밤이, 그리고 또 이 계절이 낯선 듯 익숙해 마치 보이체크가 마리를 죽이기 전 한 말처럼 몸이 차가우면 더 이상 얼어붙지 않으므로많은 이들이 다 같이 추워지기로 결심한 어떤 시절 혹은 시대처럼 느껴졌다.

-p.42, ‘홈 파티중에서]

 

 

<당통의 죽음>

 

혁명이란 단어처럼 이율배반적인 것이 있을까! 고통의 과부하에 짓눌리다 필연적으로 뭔가를 전복시키지만, 분명 혁명의 목적은 민중의 해피엔딩이다. 그 과정에서 폭력과 죽음은 어쩔 수없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끝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뷔히너의 희곡 당통의 죽음은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만 잘 이해할 수 있지만, 알다시피 프랑스 혁명은 과정이 워낙 복잡하다.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은 에베르파가 처형된 후 당통마저 사형당할 때까지의 긴박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p.239, 작품해설 중에서)’ 여기에는 국민공회 대의원과 공안위원회 위원 등 여러 실제 인물이 등장한다.

 

실권을 잡은 로베스피에르는 당통파에 대한 숙청을 계획한다. 당통은 맞서든지, 도망을 가든지 해야 하지만, 이미 혁명에 대해 전의를 상실하고 피로감에 젖은 당통은 죽음을 받아들인다. 자신이 열렬히 원하고 실행시킨 혁명의 결과가 그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음에 대해 당통은 허무함을 느낀다. 당통이 죽고 얼마 뒤 단두대에 올라 갈 로베스피에르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강경한 입장을 취하며 정적을 제거하고 혁명을 계속 진행한다.

 

프랑스 혁명이 남긴 의미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듯이 이 희곡도 복잡하다. 일단 프랑스 혁명에 대해 자세히 알면 좋고,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사이의 의견 차이가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차이에 대한 서로의 이해 부족은 모든 권력이 가진 속성이자 민중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혁명의 목적을 쟁취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폭력과 공포가 따른다는 사실도 아이러니다.

 

[당통: ()안에 있지. 어디 한번 무의 세계보다 더 마음의 안식을 주는 곳에 빠져 보게나. 최고의 안식을 주는 것이 신이라면 무가 곧 신이 아닌가? 하지만 난 무신론자야. ‘그 무언가는 무가 될 수 없다!’라는 말은 지긋지긋해. 그런데 나는 그 무엇이야. 비통한 노릇이지! 창조가 자리를 다 차지하는 바람에, 무의 자리는 텅 비어있어. 어딜 가나 창조가 득시글거려. 무는 자살했고, 창조는 무의 상처야. 우리는 무의 핏방울이고, 세계는 무가 썩어 가는 무덤이야.

-p.188]



 











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당통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읽은 책이다. 발자크, 에밀 졸라, 빅토르 위고의 여러 소설에서도 이 시기가 다뤄지기에 한 번쯤은 제대로 정리하고 싶었다. 노명식 선생이 쓴 이 책은 프랑스 역사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한국 대학생들과 일반 독자들이 근대 시민혁명의 전형인 프랑스 혁명과 그 이후에 전개된 19세기 프랑스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기 쉽도록 기획되었다. 선생의 말대로 이 책은 쉽게 읽히며 연대기 순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여러 각도에서 다채롭게 프랑스 혁명에 대해 서술되어 있다. 다만 내용이 워낙 많아 요즘처럼 돌아서면 까먹는 내 뇌가 얼마나 많은 것을 기억할지 걱정된다. 역사는 암기가 필수인가보다.



 

 

 

 

 

 






<레옹스와 레나>

 

뷔히너의 유일한 희극인 레옹스와 레나는 희극작품답게 언어유희와 풍자가 가득한 극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나 몰리에르의 희극에서 보이는 왁자지껄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 작품은 오히려 비극적 인물인 햄릿을 닮은 레옹스 왕자의 내면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준다. 세상 모든 것에 시큰둥하고 지루함을 느끼는 우울한 왕자 레옹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가 단짝인 발레리오(희극의 광대와 비슷한 역할)와 주고받는 대사는 그 어떤 것에 대비시켜도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발레리오는 레옹스를 글자 없는 책(왕자가 자신의 삶을 빈 종이에 비유한 것을 빗댄 말)’이라고 하며 현실적 이기보다 이상주의자인 왕자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포포 왕국의 왕자인 레옹스와 피피 왕국의 공주 레나는 정략결혼을 해야 한다. 페터 왕은 그들의 결혼식 날에 레옹스에게 왕위를 물려줄 예정이다. 레옹스와 레나는 둘 다 그런 사랑 없는 결혼을 거부해 각자 이탈리아로 도망간다. 여행도중 우연히 한 여관에서 만난 레옹스와 레나는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사랑에 빠진다.

 

이 희극에는 정치적 풍자가 많다. 융통성이 전혀 없는 경직된 관료사회의 모습을 웃기게보여준다. 신랑과 신부가 없음에도 왕은 체면이 깎이지 않기 위해 정해진 날짜에 결혼식을 진행시키고자 한다. 거리에 농부들을 동원시키고, 발레리오가 레옹스와 레나에게 가면을 씌워 자동기계라고 속여 그것으로 신랑 신부를 대신하자고 해도 왕은 받아들인다. 실체가 없어도 형식만 갖춘다면 아무 문제없다는 것이다.

 

가면이 벗겨지고, 레옹스와 레나는 서로의 진짜 존재를 알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고 정해진 날짜에 결혼식까지 진행되며 막을 내린다. 이 극은 행복한 결말을 맞아 전형적인 희극처럼 보이지만, 다른 희극에 비해 훨씬 더 진행과정이 치밀하고 연결과정이 매끄럽다. 대사에 들어있는 여러 비유도 의미가 깊어 생각할 것이 많다. 물론 이 극에 들어있는 유머도 좋다.

 

[왕자님, 제가 인간 삶의 모습을 철학적으로 좀 씨불여 볼 테니까 한번 들어 보십시오. 저는 상처 난 발로 추위와 뙤약볕을 뚫고 이 짐을 질질 끌고 다니고 있습니다. 저녁에라도 깨끗한 셔츠를 한번 입고 싶어서요. 그런데 막상 저녁이 되면 이놈의 이마에는 주름이 파이고, 뺨은 움푹 들어가고, 눈은 침침해집니다. 그래도 이제 셔츠를 갈아입나 했더니 그게 수의인 거죠.....왕자님, 이제 여기서 응용과 실천이 나옵니다. 우리는 순전히 수치심 때문에 내면의 인간에게도 저고리와 바지를 입히고, 그 안에 속옷을 입히려고 합니다.

-p.216, 발레리오의 대사 중에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읽는나무 2026-01-24 13: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보이체크!
이연의 대화에 있었군요. 시간이 지났다고 기억이 가물하네요.ㅜ.ㅜ
페넬로페 님 덕분에 프랑스 역사 일부분도 주워 읽고 갑니다. 큰공부가 되었어요. 나중에 희곡을 찾아 읽어봐야겠어요.
저는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요.
주인공 이연의 어떤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았느냐면요. 상류층 계급에 속한 듯한 그 무리들 속에서 겉도는 이방인처럼 보이지 않으려 곧은 매무새로 잘 유지하다가 빈티지 커피잔을 깨뜨려 어떡해야 할지 난감할 때 이연은 상대가 원하는 하나를 내줘야 이긴다?(맞는지 모르겠네요?) 그 말이 떠올라 오늘 어땠냐는 오대표의 질문에 굉장히 즐거웠다고 오대표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준 그 장면이 참 인상깊었어요.
오대표는 빈티지 잔이 깨졌을 때보다 이연의 그 대답에 순간 표정이 살짝 굳어졌었다고 하여 오대표는 처음부터 이연에게 계급의 속성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위선을 가진 자처럼 보였었고 그리고 오대표가 원한 그 대답을 할 수 있었던 이연도 ‘몸이 차가우면 더 이상 얼어붙지 않으므로‘ 글을 읽으면서 본인이 차가워지기로 결심한 바로 그 순간이었던 건가? 그런 생각도 드네요. 읽고 나서 좀 씁쓸했었던 단편이었어요.

페넬로페 2026-01-24 18:13   좋아요 0 | URL
이 소설집에서 저는 <홈 파티>가 제일 인상적이었고 좋았어요. 저도 그랬어요.
이연이 오히려 너무 좋았다고 말하면서 하나를 내주는 거요.
근데 그 부분이 또 너무 씁쓸한거예요 ㅠㅠ
저도 이연처럼 그런 자리에서 괜히 주눅들고 그랬던 것 같아요.
신형철 평론가가 김애란 작가를 사회학자라고 표현한 게 이해가 돼요.
이 책이 좋았지만 너무 지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서 4별 줬어요.
 
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가 말하고, 비틀고, 깎아낸 문장에 너무 공감되어 한편으로 화가 나고 분노가 치민다. 왜 저쪽에 비해 이쪽은 매번 뒤로 물러나고 외롭고 허무해야 하는가? 언제쯤 여기도 ‘서사적 윤기’가 자르르 흘러내릴지...나 역시 김애란 작가가 쓴 ‘시절의 안녕과 모두의 안녕을 빌며’를 기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