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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1
에밀리 브론테 지음, 황유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평점 :
소설의 전문을 읽지 않아도, 아니 아예 책을 펼친 적이 없어도 내용을 안다고 여겨지는 소설 중, 대표적인 것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일 것이다. 작가 브론테 자매의 이력이 특별해 소설을 떠나 이미 그들의 삶이 우리에게 흥미를 제공한다. 여러 번 영화로 제작되어 이 소설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그런 이유로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 사랑과 복수’로 요약되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 소설이 읽지 않아도 읽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제야(드디어) 『폭풍의 언덕』을 읽었다. 이 소설의 원제가 『워더링 하이츠(WURTHERING HEIGHTS)』라는 것도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되었다. ‘워더링’은 영국 요크셔 지방의 방언으로 ‘폭풍이 휘몰아치면 높은 언덕에 자리한 위치상 그대로 노출되고 마는 속성’을 나타낸다. ‘워더링 하이츠’는 나중에 히스클리프의 소유가 되는 언쇼가(家)의 집의 이름이다. ‘폭풍의 언덕’이란 제목은 일본어로 번역된 책을 중역하는 과정에서 가져왔는데,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그 제목이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소설은 좁은 면에서 보면 언쇼가의 ‘워더링 하이츠’와 린턴가의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가 이름으로만 인식되는 것이 아닌, 문화와 사회적인 면에서 서로 대척되는 관계로 전개된다. 언쇼가는 많은 토지를 소유한 자영농이지만, 린턴가는 소작만 주는 젠트리 계층으로 그 당시 점점 부각되는 중간계급인 부르주아의 속성도 갖추었다. 하지만 주인공인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요크셔 지방의 거칠고 변화무쌍한 황야에서 서로 닮은꼴로 자유를 추구해야 살아있음을 느끼는 존재론적 관점으로 접근할 때, ‘폭풍의 언덕’이란 제목은 그리 낯설지 않다.
『폭풍의 언덕』은 히스클리프 소유의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를 임대해 낯선 고장에 들어온 ‘록우드’와 그 집의 가정부인 ‘넬리 딘’이 서술하는 액자 식 구성의 소설이다. 주로 ‘넬리 딘’에 의해 서술되는 이 소설의 내용은 1771년부터 1802년, 거의 30년에 걸친 언쇼가와 린턴가, 그 사이에서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히스클리프와의 얽히고설킨 애증의 이야기다. 서술자 ‘넬리 딘‘은 인정 많고 의리 있으면서도 객관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 사건의 양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하며 위기에 잘 대처한다. 때때로 신랄하게 잘못된 점을 인식시켜 주는, 극의 흐름에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다만 빅토리아 시대의 관습이나 고정관념을 넘어서지 못하기에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광적인 사랑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세상의 소란으로부터 완벽히 동떨어진 곳’을 찾아 요크셔 지방의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를 임대한 록우드는 주인 히스클리프를 만나고 그와 약간의 동질성을 느낀다. 그는 바람이 차갑고 소낙눈이 내릴 때, 다시 ‘워더링 하이츠’를 방문한다. 히스클리프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냉대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험악한 날씨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옛 캐서린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그곳에서 록우드는 캐서린의 유령을 보고 그 다음 날 바로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로 줄행랑을 친다. 감기가 걸려 심하게 앓게 된 록우드는 넬리에게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에 대한 얘기를 해달라고 요청한다.
1771년,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인 언쇼씨가 리버풀에 갔다가 태생에 대해 어떤 정보도 알 수 없는 아이를 데려와 자신의 죽은 아들의 이름인 ‘히스클리프’라 부르며 친자식처럼 대한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 언쇼와는 영혼의 단짝이 되어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힌들리 언쇼는 그를 싫어하고 구박한다. 언쇼씨가 죽자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하인으로 내몰고, 아내 프랜시스와의 사이에서 헤어턴 언쇼를 얻는다. 린턴가의 장남인 에드거 린턴은 캐서린을 사랑하게 되고 그녀에게 청혼한다. 신분의 차이를 인식한 캐서린은 자신과 히스클리프 두 사람의 장래를 위해 에드거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히스클리프는 에드거 린턴을 연적으로 증오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느낀 가장 큰 고통은 히스클리프가 느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 하나하나를 처음부터 지켜보고 느껴왔어.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건 바로 히스클리프야. 만일 다른 모든 게 사라지고 그 애만 남는다면 나는 계속 존재하겠지만, 다른 모든 게 남고 그 애가 소멸한다면 온 세상은 완전히 낯선 곳으로 변해버릴 거야. 나는 이 세상에 속한 것처럼 보이지 않을 거야.…넬리, 내가 곧 히스클리프야. 히스클리프는 언제나, 항상 내 마음속에 있어. 내가 늘 나 자신에게 기쁨은 아닌 것처럼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으로서. 그러니 우리가 떨어진다는 말은 하지 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게다가.…
-p.142~143]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이 말은 듣지 못하고, 린턴과 결혼하겠다는 말만 듣는다. 그는 떠났고, 캐서린은 3년 후인 1783년 3월에 에드거 린턴과 결혼한다. 그해 9월에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언쇼가와 린턴가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다. 두 집안의 재산을 서서히 빼앗고, 에드거의 동생 이저벨라와 사랑 없는 결혼을 해 아들 ‘린턴 히스클리프’를 낳는다. 캐서린, 에드거, 이저벨라가 차례로 죽고, 캐서린의 딸 캐시 린턴은 히스클리프의 강압과 폭력에 의해 그의 아들 린턴과 결혼한다. 몸이 약한 린턴은 곧 죽고 히스클리프가 모든 것을 차지하지만, 그는 복수에 대한 전의를 상실하고 캐서린의 유령과 만나 식음을 거부하고 죽는다. 1803년 고종사촌간인 캐시 린턴과 헤어턴 언쇼는 결혼하기로 한다.
[“형편없는 결말이야, 안 그래?” 그가 방금 목격한 장면을 한동안 곱씹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지독히도 애를 썼건만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끝나버리고 말다니? 두 집안을 무너뜨리려고 지렛대와 곡괭이를 준비해놓고, 헤라클레스처럼 일할 힘을 기르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했는데, 정작 만반의 준비가 끝나고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때가 되니 어느 한 집 지붕에서 슬레이트 한 장 들어내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져버렸어! 나의 옛 적들은 아직 나를 이기지 못했고, 지금이야말로 그들의 후손들에게 복수해줄 때야. 나는 그럴 수 있고,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못해. 그런데 그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지? 나는 때리고 싶지 않아. 굳이 손을 들어 올릴 필요도 못 느끼겠어! 이렇게 말하니 마치 그동안 내가 관대함이라는 미덕이나 드러내려고 애써온 것처럼 들리는군. 전혀 그렇지 않아. 나는 저들의 파멸을 즐길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헛되이 남을 파멸시키기에는 너무 게을러져버렸어. -p544]
복수심에 불타올라 그 당시의 법을 악용해 야비하고도 비열하게 두 집안을 망가뜨리고, 모든 것을 차지하는 히스클리프는 결국 마지막에 모든 것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자신의 뜻대로 성취되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인 캐서린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의 삶은 빈껍데기와 같은 것이었다. 히스클리프는 실재하지 않는 캐서린 대신 자신의 머리로 만든 캐서린의 유령이라도 붙잡아 삶의 궁극을 이루려하지만, 그것은 죽음으로 마감되고 만다. 그 죽음으로 다른 사람들은 행복을 되찾는다. 히스클리프의 죽음을 슬퍼한 유일한 사람이 헤어턴 언쇼라는 사실도 아이러니하다. 이 소설이 지극히 비극적인 이유는 진정한 사랑과 관용이 없는 삶은 허무만이 남겨진다는 서늘한 교훈이 히스클리프를 통해 보여 지기 때문이다.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친 황야의 히스를 닮아서인지 돌같이 강하고 자주 광기에 사로잡힌다. 특히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황야의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가야 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구속이나 정해진 삶의 강요는 죽음과도 같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빅토리아 시대의 관습을 뛰어넘지 못한다. 그로 인한 정신적 착란은 몸의 균열을 가져오고 병으로 연결되어 건강한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 심하게 비틀린 상처받은 마음들은 폭력적으로 변해 계속적인 불행으로 연결된다. 이 인물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한 번씩 정나미가 떨어지지만, 소설을 읽는 목적이 그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기에,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면서 읽느라 약간 힘이 들기도 했다.
브론테 자매가 활동한 빅토리아 시대는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허용된 시기가 아니었다. 그런 시대에 샬롯 브론테는 ‘제인 에어’를 에밀리 브론테는 뒤틀린 사랑과 성정을 광적으로 표현한 ‘워더링 하이츠’를 탄생시켰다. 아일랜드 출신의 가난한 성직자의 딸인 그들은 요크셔 지방에 은둔했으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다른 집의 가정교사로 가는 것으로 열악한 인생을 살아야했다. 특히 에밀리 브론테는 샬롯보다 더 은둔하며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상상 속에서 소설의 인물과 드라마를 창조했으며 이 소설 한 편만을 남겨두고 요절했다.
이 소설의 중간정도까지는 예상한 대로였는데, 그 이후로 에드거 린턴이 죽고 그의 딸인 캐시 린턴이 히스클리프에 의해 불행해질 때, 눈물이 났다. 소설의 결말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작가라면 모두 떠나고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이란 유령을 붙잡고 오랫동안 고통을 느끼며 외롭게 살게 했을 것이다. 언쇼 씨가 히스클리프를 워더링 하이츠로 데려오지 않았다면 캐서린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캐서린의 본질은 폭풍의 언덕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그 어떤 것이라도 그녀의 자유와 광기를 구속하고 제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히스클리프가 존재하지 않는 캐서린의 삶이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