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왜 헌인릉에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딸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거기에 갔었다. 초여름 경이었고, 난 헌인릉의 존재도 몰랐으니 아마 남편이 가자고 했을 것이다. 지금은 왕릉의 모습보다 사람이 없는 고즈넉한 곳에서 유모차를 밀고 천천히 산책한 기억만 남아 있다. 왕이든, 속인이든, 죽음 앞에서는 언제나 무기력하고 쓸쓸함만 남는다. 그런 곳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아이를 데리고 우리는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 무심코 세월이 흘러버렸다.

 

책을 읽다 책에 나온 어떤 단어에 마음을 뺏길 때가 있다. 성해나 작가의 경장편인 두고 온 여름에서 두고 온이라는 말과 인릉이라는 단어에 생각이 그만 책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내 인생에서 두고 온 것들이 얼마나 많을지, 거기에 있을 수많은 내가 그리웠다.

 

사진관을 운영했던 기하의 아버지는 인릉으로 자주 출사를 갔다. (소설에서 왜 헌인릉이라 하지 않고 인릉이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는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사진기로 보는 피사체는 이미 시작부터 왜곡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도 사진에는 완벽히 담길 수 없다. 소설의 등장인물인 기하와 재하는 사진기 안에서만 존재하는 피사체처럼 서로를 담고 싶은 모습과 크기로만 볼 수 있는 관계다.

 

기억도 못할 만큼 일찍 어머니를 잃은 기하는 아버지와 둘이 산다. 그가 19살일 때 아버지는 아들이 있는 여자를 만나고 그들은 같이 살기 시작한다. 생각지도 않은 다른 가족이 나타나 기하는 겉돌기 시작한다. 반면 새어머니의 아들인 재하는 기하와 아버지를 잘 따른다. 4년간 함께 살았지만 기하는 끝까지 새어머니와 재하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 항상 그들에게 날 선 감정을 내보인다.

 

두 가족의 결합은 여태껏 살아온 방식에 균열이 일어나는 일이고, 자연스러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당연히 내 아이에게 사랑이 많이 가는 것임에도 아버지는 재하를, 새어머니는 기하를 먼저 배려하고 눈치를 보게 된다. 이런 것에 기하는 아버지에게는 섭섭함을, 새어머니에게는 부담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서먹하고 어색하지만 가족이기에 그들은 같이 사진을 찍고, 밥을 먹고, 서로에게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들이 인릉으로 나들이 간 날, 아버지가 재하에게 보인 다정함에 기하의 마음은 완전히 닫히고 만다. 새어머니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끊긴 마음은 이어지지 않는다. 기하가 대학에 들어가 기숙사로 나가고 세 사람이 살 때, 셋은 다시 인릉으로 간다. 거기서 거대한 사슴 떼가 지나가는 모습을 환상처럼 보고 셋이서 사진을 찍는다. 박복한 사람에겐 늘 그렇듯 재하 친아버지의 횡포로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헤어지고, 재하의 삶은 잘 풀리지 않는다. 차갑게만 굴고 정을 주지 않던 기하도 마찬가지다.

 

서른일곱이 된 기하는 스트리트 뷰를 보다 재하 모자를 우연히 발견해 재하를 찾아간다. 많은 세월이 지나 그들에게는 남들보다 더한 인생의 무게가 씌워져 있었고,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한다. 내세우고 싶은 것도, 공통된 화제도 없다. 서먹함으로 헤어질 찰나 재하는 기하에게 인릉에 가보자고 한다. 인릉은 그들에게 과거를 공유할 수 있는 장소였다. 생각과 입장이 달랐지만 가족이라는 모습으로 같이 추억을 만든 곳이었다. 끝까지 인릉을 인조의 능이라고 착각했고, 민망했지만 둘이 같이 사진을 찍었다. 앞으로 기하와 재하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둘은 그들이 가족이었을 때를 그리워 할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나도 기하처럼 남에게 상처준 일이 많았다. 지금에야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날을 세웠는지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소설 속 기하를 보며 안타까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때의 나 또한 나였고, 기하 역시 그 때의 기하였다. 그 한 때에 두고 온 것이 아쉽고 그리운 건 그때의 나를 바라보며 측은함을 느껴서일지도 모르겠다. 기하와 재하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옥춘당 조각을 집어 입안에 넣었다. 달고 화한 맛이 혀끝부터 천천히 퍼졌다. 입안에서 사탕 조각을 굴리며 내가 왜 이곳에 왔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재하에게 해주어야 했을 말들을 뒤늦게나마 중얼대보았다. 잘 지냈니, 보고 싶었어. 잘 지냈으면 좋겠다, 미안해 같은 평범하고도 어려운 말들. 이제 와 전송하기에는 늦어버린, 무용한 말들을. -p.131]

 

 

소설 두고 온 여름을 읽으며 헌인릉에 꼭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딸아이가 어릴 때 다녀왔던 곳을 먼 훗날 다시 다녀 온 기하와 재하처럼 나도 가고 싶었다. 친구 카리나 님께 같이 가자고 했다. 성해나 작가의 소설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를 읽고 민주화운동기념관을 가고 싶어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카리나 님이 그 소설을 읽었는데 이번에도 나를 위해 <두고 온 여름>을 급하게 읽으셨다. 소설에 언급된 장소에 가면 그 곳 자체도 좋지만 거기에서 소설 속 얘기를 할 수 있어 더 좋고 아름답다.

 

평일 오전의 헌인릉은 한적했다. 거의 우리 둘 만 있었다. 봄이 한창인 그곳엔 벚꽃을 비롯한 여러 꽃이 피어 있었다. 갑자기 꽃샘추위가 오는 바람에 소나무 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가 웅장했다. 소설 속에 들어있는 홍살문오리나무가 단연 먼저 눈에 띄었다.


[인릉은 아버지가 즐겨찾는 출사지였다. 울창한 오리나무숲이 봉분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 풍경이 계절마다, 순간마다 달랐다. -p.32

아버지는 능 한편에 서 있는 오리나무를 가리켰다. 우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선퇴가 줄기에 붙어 있었다. 선퇴를 톡 건드리자 나뭇잎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p.34]

 

오리라는 단어에서 처음엔 동물 오리가 연상되었는데, 직접 본 오리나무의 키가 워낙 커 오리(五里)가 거리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가에 이정표 삼아 5리마다 심었다고 해서 오리나무라고 한다.


[숲길을 지나 능에 다다랐을 즈음, 아버지가 불현듯 홍살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돌길을 뷰파인더로 유심히 들여다본 뒤 허공에 포커스를 맞추고 몇차례 셔터를 눌렀다.

산자도 망자도 이 문으로 드나든댄다. 보이냐 너희도? -p.33]

 

정문으로 들어가면 인릉의 홍살문이 있다. 문을 지나 능을 보기 위해 위쪽으로 올라갔지만 길이 없어 그만 잔디를 밟고 능 앞으로 가고 말았다. 왕릉이 있는 곳이라 당연히 능을 볼 수 있을줄 알았고 뒤늦게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푯말을 보게 되었다. 인릉은 인조가 아닌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으로 봉분이 하나이다. 헌릉은 조금 안쪽으로 산책길을 따라 들어가면 있다. 이곳 역시 능 앞으로 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것 같아 우리는 홍살문에서 멀리 있는 능을 봐야만 했다.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이 따로 있어 봉분이 두 개이다.

 

헌인릉 바로 옆에 큰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 앞에는 철제로 된 바리게이트가 촘촘히 있었다. 바리게이트는 지그재그로 서 있었고 그 건물에서 나오는 자동차는 미로를 빠져 나오는 것처럼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저 건물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저렇게 첩첩이 바리게이트를 쳐 놓았는지 궁금했다. 집에 와 검색해보니 그 건물은 말로만 듣던 국가정보원이었다. 인릉이 국정원과 바로 붙어 있어 인릉 앞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인릉 앞까지 가 사진을 찍었으니 국정원에 잡혀 갈지도 모르겠다.


-하늘에서 본 헌릉 능침, p.232, 왕릉 가는 길, 신정일, 쌤엔파커스


-인릉 능침 정면,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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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6-04-10 07: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글 읽다가 괜히 제 ‘두고 온 여름’ 같은 기억 하나 꺼내보게 됐어요. 아마 다들 하나쯤은 그런 시간과 사람이 있겠죠.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데, 가끔은 그때의 나를 다시 마주하고 싶은 순간이요. 아니면, 꼭 마주하고 싶은 건 아닌데 괜히 마음만 복잡해지는 순간들이기도 하고요.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가까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끝내 다 담지 못하는 관계일수록 결국 말 한마디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늦게 떠오르는 말들이 오래 남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렇게 글로 헌인릉의 한적한 고요함까지 느끼게 해주셨으니… 다행히(?) 안 붙잡혀가신 걸로 해야겠네요 ㅎㅎ

페넬로페 2026-04-10 08:16   좋아요 1 | URL
곰돌이님 말씀이 제가 이 글에 쓰고 싶은 말 전부입니다. 책을 읽다 생각이 많아지면 오히려 리뷰 쓰기가 힘들어지더라고요. 할 말은 많은데 그게 정리가 잘 안돼서요. 살아오면서 ‘두고 온 여름‘이 얼마나 많은지, 그 생각에 잠겨 자꾸 소설 읽다가 딴 생각했어요. 그때의 미숙했던 내가 싫은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도 지금부터라도 위에 인용한 문장에 들어 있는 평범한 말들을 꼭 하며 살고 싶어요.
헌인릉에 다시 가 봐 좋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행히 ㅎㅎ

책읽는나무 2026-04-10 1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그곳을 한 번 찾아가보는 것은 나름의 정취와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나 과거 가족과의 추억이 깃든 장소라면 더 특별할 것 같구요.
앞서 혼모노와 페넬로페 님의 리뷰가 늘 같이 떠오르는데 이번에 이 책도 또 페넬로페 님의 리뷰 사진과 사연들이 또 떠오를 것 같아요.
성해나 작가는 곧 페넬로페 님. 제겐 그리 기억될 것 같습니다.ㅋㅋㅋㅋ
늘 리뷰를 통해 성해나 작가의 소설의 분위기를 미리 느껴보게 되네요.
잘 읽고 갑니다.^^

페넬로페 2026-04-10 16:36   좋아요 1 | URL
우연히 성해나 작가님 책을 연속적으로 읽고 가고 싶은 곳이 생겼어요 ㅎㅎ
특히 인릉은 오래 전 다녀온 곳이라 한 번 더 가보고 싶었어요. 책나무님 말씀처럼 헌인릉 둘러보면서 책에 나온 여러 문장이 생각나더라고요. 같이 간 친구와 짧은 독서토론도 했어요.
밀리의 서재의 리딩 케미스트리에서 성해나 작가님이 자신의 소설에 대해 리뷰 써주는 독자에게 고맙다고 하셨는데 제가 그 독자에 해당되면 좋겠습니다.

잉크냄새 2026-04-10 2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책 속에 나온 곳을 찾아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한번쯤 따라하고픈 멋진 추억일 듯 합니다.

페넬로페 2026-04-10 23:10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소설 속 이야기들이 더 깊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도 생각나고요. 그들 입장이 되어 그때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이해도 해봅니다. 고즈넉하니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 좋은 추억 만들고 왔어요.
 
에티오피아 구지 G1 딤투 함벨라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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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미 있는 커피를 좋아하는 나에게 에티오피아 커피의 출시는 언제나 반갑다. 지구 온난화로 에티오피아 원두의 생산량이 감소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에티오피아 커피는 진한 맛의 남미 커피와 섞어 마시면 더 좋다. 여러 대륙의 커피가 모이면 맛이 좋아지듯, 전쟁 없는 지구의 평화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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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4-04 0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버전의 에티오피아 커피를 사서 마시고 있었어요.
지구 온난화로 커피 생산량이 감소한다니 조금뜨끔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렇군요.
나이들어가면서 카페인 어택을 자주 당해 커피양을 좀 많이 줄였는데 커피 생산량에 발 맞춰 더 줄여야하나?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눈을 좀 뜨고 있으려면..^^
그나저나 전쟁은 언제 끝날까요?ㅜ.ㅜ

페넬로페 2026-04-04 16:45   좋아요 1 | URL
저도 요즘 수면의 질이 안 좋아서 카페인을 줄이고 싶은데 잘 되지 않습니다.
진하게 한 두잔 마셔야 정신이 말짱해져요.
조금씩 줄여 나가야 하는데 잘 실천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전쟁이 어서 끝나야 할텐데 석유 문제로 우리나라가 직격탄을 맞는 것 같아요
ㅠㅠ
 
편안함의 습격 - 편리와 효율, 멸균과 풍족의 시대가 우리에게서 앗아간 것들에 관하여
마이클 이스터 지음, 김원진 옮김 / 수오서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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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마이클 이스터의 경험과 거기서 얻은 변화의 가치를 여러 다양한 이론과 접목시켜 편안함의 위험을 알린다. 다만 그의 경험이 너무 광대하고, 비교의 대상으로 먼 과거를 끌어와 현실을 반영하지 못했다. 편안함의 추구가 현대인을 구속시키지만 과거의 불편함으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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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3-31 2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동진 님 덕분에 유명하대서 오디오북으로 한참 듣다가 좀 지겨워서 멈춤했던 책입니다.
페넬로페 님의 마지막 문장. 왜 이렇게 와 닿을까요?ㅋㅋㅋㅋ

페넬로페 2026-03-31 23:45   좋아요 1 | URL
저도 이동진님 추천으로 이 책 읽게 되었어요. 내용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충분히 이해했는데, 왠지 우리와 너무 동떨어진 세계에 사는 것 같아서 조금 그랬어요. 제가 100자평에서 조금 오버한 면이 있지만 이 책에서는 더 그런것 같아서 약간의 반발심도 생기더라고요.
마지막 문장, 공감해주셔서 감사해요. ㅎㅎ
 
여행자와 달빛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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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사람들이 부러운 건, 물론 소설이나 영화에서 거의 대부분 접한 거지만, 유럽에 있는 다른 나라로 여행이 쉽고, 웬만하면 외국어도 두세 개쯤 너끈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륙으로의 진입이 꽉 막힌 우리와 달리 그들의 자유로운 이동은 깊고 폭 넓은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다양한 사고로 이어지고 문학 작품에 온갖 에피소드로도 반영된다. 유럽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느낌이 드는 이유에 그들의 지리적 환경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세르브 언털의 여행자와 달빛은 헝가리의 부더와 페스트, 이탈리아, 파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중산층 이상의, 부르주아가 등장인물로 나오고 그들의 생활 방식도 우리와 많이 달랐다. 이 소설의 주제를 파악하기 전, 일단 등장인물의 삶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다. 모든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행동이 평범하지 않고 독특했다.

 

작가의 경험이 많이 들어있는 이 소설에는 영적인 관점, 죽음,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묵직함이 있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은 속물적 내용도 많아 완독하고 나서도 소설에 관한 확실한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소설에 이질적인 것들이 많이 있어 배가 산으로 간 느낌도 들었다. 옮긴이 해설에 있는 용어인 에피스테메(어떤 특정한 시대의 문화를 규정하는 심층적인 규칙의 체계)가 나에게는 상당히 혼란스럽게 다가왔다. 아주 어려운 소설이었다.

 

학창시절에 만난 친구와 그들과 함께 한 경험에 여전히 지배당하고 있는 주인공 미하이는 어른이 되지 못한 인물이다. 미하이는 과거에서 벗어나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에르지와 결혼한다. 신혼여행으로 이탈리아로 가지만 그는 도중에 말도 없이 에르지를 떠나버린다. 청춘을 배신하지 못한 미하이는 15년이 지난 후, 결국 그 시절에 함께 했던 사람과 이탈리아에서 한 명씩 재회하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앞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된다. 타고난 성향에다 인생의 중심이 되었던 그 시절을 벗어나지 못한 미하이는 죽음을 선택하려 했지만 운명적으로 일면식도 없는 한 아이의 대부가 됨으로서 어느 정도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스스로가 아닌 아버지가 내민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지만 미하이에겐 그 어려운 한 발이 새 인생의 첫 걸음이었다.

 

미하이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인 울피우시 터마시는 자살하고 그의 여동생 에버는 죽음의 조력자가 된다. 이 책에서 죽음은 아주 미학적으로 서술된다. 어머니의 부재와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울피우시 남매에게 죽음은 자연스러운 선택이고 귀결이었다. 죽음의 순간에 황홀경을 겪는다는 터마시의 말에 죽음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삶을 위해 죽음을 망각해야 하는 현실을 사는 평범한 내가 터마시의 죽음을 쉽게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죽음은 언제나 내 옆에 꺼내 놓아야 하는 것임이 확실하다. 다른 친구인 에르빈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가 되고 세페트네키 야노시는 사기꾼이 된다. 같은 시절을 거쳤고 모두 다 거기에 몰두했지만 그들의 삶의 방향은 다 달랐다.


휴머니스트 출판사의 세계 문학 시리즈 중 다른 존재가 되어야만 나아갈 수 있는 삶의 결정적 한순간이라는 테마로 간행된 이 소설에서 미하이는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여행자가 된다.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학창 시절의 친구들과 새로운 사람들과 조우한다. 미하이에게 결정적 순간은 하나가 아닌 여러개가 될 것이다. 다만 그는 결정적 순간마다 우연을 믿고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여행은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희망을 갖고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 자신이 아닌 것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삶을 위한 준비였다. 앞으로 무수히 밀려 들 결정적 순간들마다 미하이는 도망가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을지.....

 

책의 앞표지 뒷장에 있는 작가 소개에서 <세르브 언털>은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1944년 헝가리 벌프의 노동 수용소로 끌려갔고 1년 뒤인 1945년 그곳의 간수들에게 구타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고 적혀있다. 1년 동안 수용소에서 겪었을 고통에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조차 안 된다. 책을 읽는 내내 끔찍한 이 말들이 생각나 내용에 잘 집중할 수 없었다. 현실에 비해 우리가 추구하는 허구는 얼마나 가당찮은지, 부질없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미하이는 우울해졌다. 머리에는 온갖 것이 떠올랐고, 일상적인 그 상황은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영세식에 참석하자며, 그들은 유서를 작성하고 있는 미하이를 방해한다. 그는 갑자기 이렇게 사랑스럽고도 엉뚱한 일들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끔찍하거나 숭고한 인생의 순간에 항상 사랑스럽고 엉뚱한 일들이 발생했으며, 사랑스럽고 엉뚱한 때에는 항상 끔찍하고 숭고한 것들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인생은 정해진 형식이 없는 것이거나 최소한 뭔가 매우 복합적인 장르다.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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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6-03-29 0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슬로의 소설 <라스트 울프>가 독서 모임 지정 도서라서 읽었는데, 어렵기만한 라슬로의 문학 세계보다 다른 헝가리 문학 작품들을 더 알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국내에 번역된 헝가리 작가들의 문학 작품이 있는지 찾고 있어요. 페넬로페님의 리뷰를 만난 덕분에 이 책을 알게 되었어요. ^^

페넬로페 2026-03-29 09:52   좋아요 1 | URL
<라스트 울프>와 <저함의 멜랑콜리>를 번역한 분이 의사이면서 번역 작업을 하시던 분이던데 아마 중역한 것 같았어요. 다른 책도 마찬가지이고요. <여행자와 달빛>은 최근에 출간된 <죔레는 거기에> 를 번역한 김보국 번역자가 번역하셨더라고요. 헝가리어 전공자라 당연히 직역을 하셨고요. 그것이 반가워 읽었는데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독서 모임에서 읽는다면 여러 개의 논제가 나올 듯 합니다. 다른 헝가리 작가의 작품은 임레 케르테스가 알려져 있는데 번역된 헝가리 작품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2026-03-31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고 온 여름 소설Q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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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뻔하고 식상한 소재이지만 매번 이런 글에 약한 나를 발견한다. 신파적인 것에서 삶의 반추가 더 쉬운 탓일까? 씁쓸하고도 아프다. 잘나지도 않은, 그저 그런 인생들의 해피엔딩은 왜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약간 어긋났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단절과 상처라고 크게만 포장하는 건 아닌지....날씨가 더 따뜻해지고 꽃이 피면 소설 속 장소였던 인릉에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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