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옥을 재독하다

 

2년 전(2022), 그 유명한 단테의 신곡을 처음 읽었을 때, 신곡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베르길리우스를 따라가는 단테처럼 겸손했고 공부하는 자세였다. 오랫동안 도서관 독서동아리에 참여하여 주로 클래식을 읽다보니 고전에 대한 경외심이 나에게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다. 노트에 1곡부터 34곡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며, 1원부터 제9원까지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각기 어떤 벌을 받는지 자세히 필사하며 읽었다.

 

2년 후(2024), 단테의 신곡을 재독하며 그때 필사한 노트를 꺼내보았다. ‘참 열심히도 읽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용을 많이 잊었지만, 읽다보니 다시 기억났고, 주석의 해설 역시 이해가 잘 되었다. 지옥을 재독하며 계속 든 생각은 단테가 설계한 지옥 구조물의 형태와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떤 죄가 어떤 단계에서 무슨 벌을 받는가가 중심 주제가 아니었다. 나에게 중요한 건 지금 단테의 신곡을 읽는 이유이다. 신곡에서 내가 무엇을 가져올 것인지, 신곡이 나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단테 신곡 강의에서 단테의 신곡을 읽는 일은 우선 클래식에서 배우는 것, 단테에게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휴머니즘즉 인간에게 고유한 것을 체득하는 데에 있다고 했다. 단테(클래식)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단테가 묘사한 지옥은 표면적으로는 종교와 신에 의한 심판이지만, 내가 느낀 지옥은 그냥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세계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지옥을 순례하는 단테역시 인간적인 모습을 여러 차례 보이고 있다.

 

각성, 새로운 출발, 또는 어떤 완성을 향해가는 길에서 인간은 인간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를 짊어지고 나아가야만 무엇이든 깨닫고 변화하게 된다. 그것이 지옥이다.

 

나는 죄를 짓고, 반성하고, 또 죄를 짓고, 반성한다. 단테가 상세히 묘사한 지옥을 생각하고 거기에 갈 생각을 하면 무섭지만 그래도 죄를 짓는다. 여전히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2. 고전의 유용성


작년, 딸아이와 유럽 여행을 갔을 때, 혼자서 일정을 짠 딸아이는 고전을 열심히 읽는, 신곡을 읽은 엄마를 위한 이벤트를 하나 준비해 주었다. 마침 우리가 파리 여행을 할 때, 영국 로열 발레단이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극장에서 단테의 신곡 공연을 할 예정이었다. 딸아이는 발레 공연을 미리 예매했고, 우리는 영국 로열 발레단의 발레를 관람할 수 있었다. 엄마를 위한 딸아이의 마음은 좋았지만 최대한 여행비를 아끼기 위해 딸아이는 비교적 값이 싼 무대에 가까운 박스석을 예매했다.

 

박스석에는 우리 둘 말고 외국인 모자가 같이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 정도 되는 남학생은 발레 시작 전과 지옥, 연옥을 지나는 두 번의 인터미션동안 내내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어떤 책을 읽느냐고 물어보니 단테의 신곡을 읽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 남학생의 엄마는 그 책을 수없이 읽는다고 덧붙여 말해주었다. 반면 나의 딸아이는 발레를 보기 전 신곡이 어떤 내용이냐고 나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단테,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라는 세 인물과 간단하게 신곡의 내용에 대해 말해주었다.

 

공연장 천장이 샤갈의 멋진 그림으로 되어있는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는 분위기가 정말 클래식했고, 평일 낮이었는데도 관람객이 꽉 차 있었다. 신곡을 읽었기에 발레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적어도 단테,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값이 싼 무대에 가까운 박스석에 앉아 무대 전체의 흐름을 잘 볼 수 없어 아쉬웠고,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얼굴과 발레는 바로 직관할 수 있어 좋았다.

 

신곡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딸아이와는 계속 신곡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지만, 신곡 책에 빠져있는 남학생의 엄마는 그저 무심하게 앉아있어야만 했다. 이럴 때 신곡을 읽은 나는 유용한 사람이었다. 고전 읽기는 한 번씩 사람을 유용하게, 쓸모 있게 만든다.



 












3. 베르길리우스


로마의 대표 시인인 베르길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지시로 새로운 로마 건국 신화를 창작한다.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패배한 트로이아 사람 아이네아스는 이탈리아에서 조국을 재건하고자 한다. 아이네아스가 트로이를 떠나 이탈리아에서 로마를 세우는 과정을 그린 서사시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아이네아스의 여정에 관한 시)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이 시의 첫머리에 호메로스와는 달리 무사여신에게 스스로 내가 노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한다.

 

[단테는 신의 노래를 그대로 번역한 호메로스가 아니라 베르길리우스의 입장, 즉 스스로 미토스(신화)를 창조하면서도 뮤즈의 여신에 의지해 노래한 위대한 시인을 모범으로 삼는다.

단테의 신곡은 유혹에 무릎을 끓을 것 같은 패배자의 신분에서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신곡의 출발점은 호메로스보다 베르길리우스에 가깝다.

-p.69. p.84, ‘단테 신곡 강의’]

 

단테는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신분이다. 그에게는 고향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있다. 단테와 아이네아스의 공통점은 온갖 시련을 극복하여 다시 새로운 것을 완성해야 할 소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테가 길잡이로 베르길리우스를 내세운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이다.

 

단테는 길잡이 베르길리우스의 이름 앞에 온갖 미사여구를 붙인다. 지혜의 바다, 자애로운 아버지, 선한, 현자, 믿음직한 동반자, 모든 흐린 시선을 고쳐 주는 태양, 친절한 스승님, 어진 스승님.베르길리우스는 단테를 데리고 지옥을 순례하며 힘들어하는 단테를 위로하고 그의 어려움을 해결해준다. 갈 길이 바쁜데도 죄인에 대한 호기심이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단테를 혼내기도, 재촉하기도 한다.

 

 

 

같은 독서동아리 회원인 비아는 단테의 신곡을 읽고 나서 나에게 주는 생일 카드나 다른 축하카드에 꼭 나의 베르길리우스에게라는 문구를 써 준다. 말도 안 되고, 황송하며 감사하다. 어떤 동행에서든 길잡이는 결코 일방적인 것이 될 수 없다. 나이와 헤쳐 온 삶을 떠나 길잡이는 서로에게 영향을 끼쳐 결국 친구가 되는 것이다. 단테에게 베르길리우스는 선하고 책임을 다하는 영혼이다.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으로 계속 남기를 바란다.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고 있는 단테를 길잡이 베르길리우스는 저승 세계로 안내한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무사히 지옥을 빠져나와 연옥산을 평온하게 바라본다.

 

 

4. 프란체스카와 파올로


지옥 제5곡의 둘째 원은 음란함과 애욕의 죄인들이 벌 받고 있는 곳이다. 그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섭게 휘몰아치는 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벌을 받는다. 프란체스카는 라벤나의 귀족으로 리미니의 귀족 잔초토와 결혼한다. 잔초토는 불구의 몸이어서 결혼식장에 동생 파올로를 대신 내보낸다. 프란체스카는 파올로를 사랑하게 되고 잔초토에게 발각되어 두 사람은 죽임을 당한다. 단테는 비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프란체스카와 파올로를 만나 그들의 사연을 듣는다. 단테는 그 영혼이 너무 가여워 정신을 잃고 죽은 시체가 넘어지듯이 쓰러진다.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는 지옥에서 계속 붙어 다닌다. 그들의 사랑이 너무 지극하고 억울해서 지옥에서나마 같이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본문에서 받은 느낌은 그렇다. 하지만 아무리 애틋한 사랑이라도 고난을 겪으며 같이 다닌다면 계속 행복할지 잘 모르겠다. 인간이나 영혼이나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사실 별로 많지 않다. 운명적인 것에 훨씬 더 좌우된다. 이래저래 인간이나 영혼은 가련하다. 단테의 마음과 쓰러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5. 지옥의 이미지-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단테는 지옥을 불의 이미지로 묘사한다. 선홍색 불길, 영원한 불, 불그스름하게 물들인다, 불비, 온통 불타고 있다, 불꽃, 불의 도시, 불의 강.

 

지옥을 읽으며 지난여름에 봤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계속 연상되었다. 마틴 에이미스 실화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지옥과 비슷하게 불의 이미지가 강렬하다. 아우슈비츠의 소장인 루돌프 회스 중령의 사택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담장이 붙어있다. 이 영화는 수용소 안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회스의 사택과 그들의 가족의 편안함만 보여준다.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에서 들리는 소리로, 굴뚝에서 계속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로만 그 안의 상황을 보여준다.

 

나치는 인종청소를 위해 수용소로 계속해서 유대인을 보내고 가스실에서 죽는 사람이 늘어난다. 루돌프 회스의 머리는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하루에 최대치의 사람을 죽이고 그들을 불태울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다. 심지어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더 그런 생각에 몰두한다. 어떻게든 많이 죽이고, 많이 태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히틀러가 원한 인종 청소를 원활히 진행할 수 있으니까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으로 자신을 불태운다.

 

잔인하거나 직접적인 장면이 전혀 없었음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지옥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누군가는 벌레보다 못한 삶을 살고, 누군가는 왕과 같은 삶을 살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런 것을 인식하면서도 태연할 수 있는 태도였다.

 

내가 단테의 지옥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와 닿은 것은 인간의 죄 중 기만이었다. 이 단어의 뜻이 남을 속여 넘기는 것이라는 짧은 것이라 단순해 보이지만, 이 속에 내포된 의미는 수없이 많다. 타인에게 마음으로, 물리적으로 인간은 너무 많은 기만의 죄를 범한다. 우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지는 그런 기만이 섬뜩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주변에는 평범한 폴란드 마을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수용소 밖으로 나가 노동을 했다. 영화에서는 밤에 한 폴란드 소녀가 나치의 눈을 피해 유대인들이 노동을 하는 장소에 사과를 살짝 놓아두고 온다.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연옥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산 사람의 기도가 필요하듯, 지옥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이 소녀처럼 작지만 용기 있는 온정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쉽게 보이지만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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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4-11-21 1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테신곡에 관해 쓰신 내용도 정말 좋구요, 더욱이 저는 오페라 가르니에의 샤갈 천장화가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는것 같아요!ㅎ 눈 호강했습니다!

페넬로페 2024-11-21 19:00   좋아요 1 | URL
네, 오페라 가르니에의 천장화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오더라고요.
단테 신곡 지옥 읽었고
이제 연옥 시작했습니다 ㅎㅎ

전야제 2024-11-21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베르길리우스에게‘라고 불리우는 페넬로페님도, 그렇게 불러주시는 비아님도 정말 멋집니다. 단테의 신곡도 읽지 않은 고전인데, 이 서평을 읽고 저는 엄청난 숙제가 또 생겼습니다. 하지만 신곡을 읽을 생각에 설레기도 합니다ㅎㅎ 따님께서 어머님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저에게도 생생히 느껴집니다. 여행 일정도 다 계획하시고, 신곡을 읽은 어머님을 위한 발레 공연까지 예매하시다니. 저도 따님께 배워야겠어요ㅎㅎ 마지막 지옥의 이미지를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함께 제시해주신 글에서 참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요. 특히 ‘기만‘이라는 것이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조종하는 가스라이팅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경계해야만 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새겨봅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단테는 신곡 지옥의 7곡에서 재화는 운명의 손에 들려 있건만, 우리 인간들은 그 때문에 처절히도 싸운다(p.71, 신곡, 민음사)’고 했다. 돈은 어차피 운명의 여신(포르투나)이 관리하니 인간이 아무리 아등바등 해봐도 소용없다는 뜻이다. 인간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오는 죽음은 그 시기도, 형태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죽음은 그냥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인가? 죽음의 종류와 모습은 너무나 다양하다. 태초의 인간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간이 각자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면 아마 우주를 가득 채우고도 남아 뚫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번씩 죽음을 생각한다. 내 존재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이 아직은 두렵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사후세계, 그저 많은 이미지로만 축적된 어둠의 세계에 혼자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무섭다. 어쩌면 모든 것은 허상이고, 인간이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죽음은 온전히 자신만이 직면해야 하는 것이기에 인간을 외롭게 한다.

 

시그리드 누네즈의 어떻게 지내요는 짧은 시간에 엄청 많은 얘기를 들은 느낌이 드는 소설이다. 화자는 암 투병하는 친구와 그녀를 도와주는 자신 사이에 여러 다른 에피소드와 나(화자)의 생각을 뒤섞어 놓는다. 이 이야기들이 확실히 연결되지는(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않지만 멈춰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소설의 주된 소재는 늙음과 죽음이지만 별로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유머러스한 표현들에 웃음이 나기도 하고, ‘, 정말 맞는 말이야!’라며 크게 공감한 부분도 많다. 물론 슬프기도 하다.



작가인 잉그리드는 사인회에서 친구를 만나고, 그들의 친구인 마사가 암투병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곧바로 병원을 찾아간 잉그리드는 마사를 위로하고 자주 병문안을 간다. 마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치료를 하지만 암은 다른 곳으로 전이된다. 마사는 병원에서 고통을 겪을 만큼 겪고 결국 자신이 암에 굴복하며 죽어가야 하는 현실을 거부한다.

 

마사는 불법 사이트에서 안락사를 위한 약을 구해놓고 자신이 스스로 죽음을 실행할 때 옆방에 있어 달라고 잉그리드에게 부탁한다. 잉그리드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부탁을 부담스러워한다. 잉그리드는 마사와 병원에서, 또는 다른 장소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고 마사가 살아온 삶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다. 뉴욕 타임즈 종군기자로서 전 세계의 전쟁터를 누빈 마사는 딸에게 충실할 수 없었다. 딸에게는 처음부터 아빠도 다른 곳에 있었다. 마사와 그녀의 딸은 서로 없는 존재처럼 살아간다.

 

많은 고민 끝에 친구를 이해하게 된 잉그리드는 마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두 사람은 뉴욕에서 두 시간쯤 떨어져 있는 한적한 곳의 멋진 집을 대여해 그 곳에서 마사의 죽음을 준비한다. 죽음을 실행해야 할 마사와 죽음을 발견해야 할 잉그리드는 괴롭고 힘들지만 잘 극복해낸다. 마사는 옆방에 친구를 둔 채로의 죽음이 아닌, 잉그리드가 외출한 사이 햇볕이 잘 드는 벤치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같은 죽음을 선택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잉그리드와 마사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힘든 건 알지만 외롭게 죽기 싫어하는 마사가 이기적인 것 같았다. 죽음을 준비하고 목격해야 하는 고통을 친구에게 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를 생각했다. 마사의 부탁을 선뜻 들어주고 최선을 다해 마사를 위로하고 도와주는 잉그리드의 의도도 의심스러웠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엄청난 부탁을 순수한 마음으로만 들어줄 수 있는지, 혹시 잉그리드가 작가여서 나중에 글을 쓸 소재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며칠 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도 나를 우울하게 했다. 계속 영화의 내용과 장면이 생각났다. 그러다 문득 잉그리드는 그냥 그런 사람이라고 여기게 됐다. 타인에 대한 이해심이 많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 ‘착하다가 아닌, 자신이 받아들이고 결정한 것에 책임을 다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 잉그리드였다. 그것은 타고 나거나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노력하고 견뎌야만 하는 것이다. 이타심은 각성으로 생겨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가짐에서 오는 것이다. 당연히 쉽지 않다.

 

 

영화를 보고나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면 방해를 많이 받는다. 책의 인물들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와 겹쳐 이미지가 고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과 영화는 서로를 상호 보완해주어 이해가 더 잘되게 해주었다. 배우 틸다 스윈튼줄리안 무어의 캐스팅도 절묘했다. 영화는 <어떻게 지내요>의 내용 중 친구와 화자만을 압축해서 다루었고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암이라는 병에 걸리면, 투병생활이 시작된다.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한다. ‘환희와 우울 사이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신을 원망하기도 하며 살아있는 세포까지 죽이며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암에 패배한 채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고문을 사서 겪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았어야 했어. 구토, 설사, 피로-끔찍해, 끔찍해-그리고 결국엔-

 

늙고 쇠약해진 게 아니잖아. 나는 평생 내 건강을 잘 챙겨왔는데, 그렇게 열심히 건강을 챙기고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건강식을 먹어온 탓에 오히려 상황이 더 힘들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의사 말이 심장이 아주 튼튼하대. 그게 내 몸이 계속 싸워 나갈 거라는 말이 아니면 뭐겠어? 숨이 끊길 때까지 내가 시달리고 또 시달리게 될 거라는 뜻이지. -p86~87]

 

이런 아이러니가 허탈하다. 건강을 잘 챙겨왔지만 암에 걸렸고, 몸은 끝까지 암과 싸울 것이라는 사실이.그것만이 아니다. 주변에서는 잘 싸울 수 있다고, 온 힘을 다하고, 애를 써서 암과 싸우면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한다. 암을 선물이자 정신적 성숙의 기회, 자기 자신도 몰랐던 자질을 발달시킬 기회로 생각해라, 최고의 자아에 이르는 여정의 한 단계로 생각하라(p.132)’고 부추긴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암에 걸렸다고 무조건 포기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완치되는 사람도 많다.

 

어쨌든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병에 걸리거나 죽을 때, 우리는 철저히 타자화된다는 것이 팩트인 것이다. 작가 시그리드 누네즈가 다소 두서없지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그런 타자화에 대한 단 하나의 대안이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웃에게 어떻게 지내요(What are you going through)’라고 물어봐 주는 것, 그것만 해줘도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Quel est ton tourment?)

p.122]

 

소설의 끝은 영화와 달리 명확하지 않다. 화자는 그저 어떻게 지내요를 계속 실천중이다. 전 남친에게 비난받아도 그저 묵묵히 정말 딱 당신답게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를 유지하고 있다. 그냥 그것으로, 그 정도면 된 거다. 더할 나위 없다.



 













마사와 잉그리드는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쳐다본다. 마사는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죽은 사람들의 마지막 문장을 암송한다. 소설에서는 조이스의 다른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눈은 어두워진 중앙 평원 전역, 나무 없는 언덕들, 앨런 습지에 부드럽고 조용히 내리고 있었고, 더 멀리 서쪽으로 소란스럽게 흘러가는 시커먼 섀넌 강의 물결 위에도 조용하고 부드럽게 내리고 있었다. 눈은 또 마이클 퓨리가 묻혀 있는 언덕 위의 외로운 교회 묘지 구석구석에도 내리고 있었다. 눈은 비뚤어진 십자들과 묘석들, 작은 문의 창살들, 앙상한 가시나무들 위에 두껍게 쌓여 있었다. 그리고 눈이 부드럽게 살포시 전 우주에, 살포시 부드럽게, 마지막 종말을 향해 하강 하듯이, 모든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위에 내려앉는 소리를 들으며 그의 영혼도 천천히 희미해져 갔다.

-‘더블린 사람들’, 중 '죽은 사람들', 제임스 조이스, 열린책들]

 

죽은 사람들에는 온통 죽음의 그림자가 있다. 게이브리얼은 30년 동안 연말 파티를 열고 있는 두 이모에게 다가올 죽음을 본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육욕의 대상자인 아내 그레타의 마음에 오랫동안 죽은 남자가 들어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 앞에서는 살아있는 사람도 망령이 되고 이 세상 모든 것과 심지어 죽은 것들에게도 관용이 적용되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른 사람의 눈과 평판을 의식하고 위선을 떨며 사는 것이 죽음에 이르러서는 빈 껍데기일 뿐이다. 게이브리얼은 그제서야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마지막 종말을 향해 하강하는내 삶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이 중요한가?

 

만약 친구가 나에게 자신이 선택한 죽음을 실행하기 위해 옆방에 있어달라고 부탁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견디며, 최선을 다해 병과 싸워 이겨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친구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그런데 옆방에 있어주지는 못할 것 같다. 난 무섬을 많이 타는 편이다. 너무 무서울 것 같다. ‘친구야, 미안해, 네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서.“


눈이 내린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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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4-11-15 19: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과 좋은 영화가 잘 어울어진 정말 좋은 글을 좋은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즐거운 금욜 저녁 되십시요!ㅎ

페넬로페 2024-11-15 21:59   좋아요 2 | URL
책은 끝부분 마무리가 약간 그래서 호불호가 있는 것 같아요. 기회 되시면 영화를 보셔도 좋을 듯 싶습니다.
제 글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막시무스님,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요^^

새파랑 2024-11-16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읽었었는데 별 네개였습니다 ㅋ 어떻게 지내냐라는 안부를 물어보는것 만으로 위로가 되더라구요. 영화가 더 재미있나 보군요~!!

페넬로페 2024-11-16 18:57   좋아요 2 | URL
책이 약간 어수선 하잖아요 ㅎㅎ
반면에 영화는 하나의 주제로 압축시켜 놓아서 좋았어요.
각색과 연출을 잘 했더라고요.
배우들의 연기는 말할것도 없고요.
책도 나름 괜찮았어요^^
새파랑님!
어떻게 지내요?

새파랑 2024-11-16 19:57   좋아요 2 | URL
ㅋ 저는 정신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여유가 생길거 같습니다~!!!!

전야제 2024-11-16 1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침 안락사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어서 페넬로페님 리뷰 읽고 넘 신기했어요. 덕분에 어떻게 지내요, 더블린 사람들 두 소설 알게 되서 안락사라는 주제에 대해서 폭넓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영화부터 당장 보고 싶지만요ㅎㅎ 멋진 리뷰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4-11-16 20:53   좋아요 1 | URL
영화나 책에 안락사에 대한 내용이 많고, 최근에 안락사 캡슐에 대한 것도 있어 점점 더 관심이 커질 것 같아요.
근데 여기의 두 주인공은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인것 같아 일반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소설과 영화가 죽음을 많이 생각하게 해주었어요.
죽음은 참 공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야제 2024-11-16 23:34   좋아요 1 | URL
저는 그동안 편협하게 안락사에서 죽음을 결정할 주체에 대한 문제만 생각해왔는데 죽음은 공평하지 않다는 페넬로페님의 통찰 덕분에 접근성에 대한 것을 새롭게 생각해보게 되네요. 역시 페넬로페님의 글 너무 좋아요ㅠㅠ 많은 공부가 되고 있어요! 소개해주신 소설들 읽어볼 생각에 도서관가는 길이 두근거리네요ㅎㅎ 감사합니다!

청아 2024-11-16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행복에 관한 국가별 조사에서 우리나라만 유일하게 그 첫번째 조건을 돈으로 꼽았다는 이야길 들었어요. 몇년째 그대로라고.

이 영화 저도 봐야겠어요. 아마 저도 영화를 먼저 보게 될 듯 합니다^^*

페넬로페 2024-11-16 20:55   좋아요 1 | URL
우리나라만 유일하게요?
정말 씁쓸하네요. 점점 더 암울해질 것 같습니다.
영화, 꼭 보세요.

청아님!
어떻게 지내요?

그레이스 2024-11-17 00: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 사논지 꽤 됐는데,,, 아직도 못봤네요,
게다가 더블린 사람들은 읽었는데,,, 그 문장들 하나도 기억이 안나요 ㅠㅠ
영화관 가는걸 좋아하질 않아서,,, 시간이 지난 담에 봐야겠어요^^

페넬로페 2024-11-17 00:57   좋아요 2 | URL
아, 진작에 구매해 놓으셨군요.
책에는 조이스의 다른 문장이 나와요, 읽으시고 어느 소설 구절인지 가르쳐 주세요 ㅎㅎ
영화에서 조이스의 문장을 암송하는데 저는 여지껏 뭘 읽었는지 모르겠어요.
암송도 못하고 돌아서면 까먹고요 ㅎㅎ

희선 2024-11-19 0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모르지만 영화로 법 이야기 하는 게 생각납니다 그런 걸 생각하다니, 예전에 인터넷 기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과 함께 있었던 사람 이야기를 봐설지도... 자살방조죄... 이건 어떤 벌을 받을지... 영화나 소설은 그런 걸 쓰기도 해야겠지요 어떤 때는 그럴 수도 있지 하기도 하는데, 지금은 또 그런 게 별로네요 힘든 사람한테 힘내서 살라고는 안 할 것 같습니다 아무 말도 못할 것 같아요

사람은 잘 지낸다기보다 무언가에 고통 받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지내냐고 하면 그냥 그렇지 하잖아요 그렇다고 무엇에 고통 받고 사느냐고 묻지도 못하겠네요 그냥 잘 지내냐고 하겠습니다


희선

페넬로페 2024-11-19 08:36   좋아요 0 | URL
네, 법에 관련된 문제도 있어 안락사가 쉽지 않더라고요. 이 소설과 영화에서도 그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어요. 특히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은 이런 주제에 더 심한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니까요.
누구나 다 고통받고 살고 있는데 그럼에도 타인에게 잘 지내냐고 물어볼 수 있는것도 인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알라딘에서 문학적인 한 해라는 제목의 2024, 당신의 문학네권을 알려주세요.이벤트가 진행되고 있다. 책 다양하게 읽지 않는, 소설을 좋아하고 찬양하는 나, 페넬로페는 당연히 이 이벤트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적립금 1000원은 중요하지 않다.

 

문학소녀에서 시작된 내 인생에서, 시간이 나면 돈 벌 궁리를 하지 않고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를 생각하는, 남들이 인생 실패자라고도 여기는 나는 정말 문학을 사랑한다. 문학 속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어 나는 여기에 머물며 울고 웃고, 울컥하고 심란해하고, 한숨을 쉰다. 아마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 것 같다.

 

책 좀 읽는다는 독서가만 존재하는 알라딘 서재를 상대로, 이때껏 읽은 문학 작품 중 네 권만 고르라는 선택의 부당함을 알기에 알라딘은 영리하게도 ‘2024, 사사분기라는 단서를 달아놓았다. 아는 만큼 보이듯이, 책은 읽은 만큼만 얘기할 수 있는 정직함을 준다.



하반기 페넬로페의 문학네권은.

 

[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한강의 소설들 -그냥 한 권으로...

잃어버린 환상 오노레 드 발자크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피서객이 빠져나간 겨울의 바닷가에 선 것처럼 뒤늦게 이 책을 읽고 있다. ‘맡겨진 소녀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으며 작가 클레어 키건의 팬이 되었다. 짧고 명료한 그녀의 문장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서사와 다양한 삶의 모습에 반하게 되었다. 키건의 소설을 읽으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생각할 것이 많아지고, 어느새 소설 안으로 들어가 나를 저울질하게 된다. 문학이 주는 최고의 유용성과 고통을 키건이 주고 있다.

 

푸른 들판을 걷다는 키건의 단편집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별 선물부터 읽기가 힘들고 마음이 무거워져 잠시 멈추다 다시 읽었다. ‘푸른 들판을 걷다에도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는지, 특히 가톨릭교도인 나에게 종교란 무엇인지, 성당과 신부님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해주었다. ‘살림 관리인의 딸도 마찬가지다. 왜 이리 삶은 복잡한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고 추구하는 것이 다 다르지만 가장 기본적인 사랑의 부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키건은 말해주고 있다.

 

누가 신경이나 쓴대(p.141)?”처럼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를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현실이 슬프다. 본래부터 고통스럽게 설계되어 있는 듯한 힘겨운 우리네 삶도 버겁다. 아직 완독하지 않았지만 한국에 출간된 클레어 키건의 세 책 중 단연 최고다.




 











여수의 사랑부터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한강 작가의 소설을 계속 읽고 있었다. 사실 읽어내기 어려웠다. 한강의 소설은 바로 풀리지 않게 하고, 여러 번 꼬아낸, 그렇지만 개념에 충실한 수학의 킬러 문항 같다. 포기하기 쉽지만, 결국 풀어내면 자신만의 뿌듯함과 한 단계 높아진 실력을 발견할 수 있다.

 

20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소설 네 권을 다 읽었다. 검색해보지 않고 압둘라자크 구르나라는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구르나의 소설을 읽으며 동아프리카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노벨상을 받지 않았으면 그의 소설을 읽지 않을 수도 있었다. ‘욘 포세도 마찬가지다. 노벨문학상의 위력은 그런 면에서 대단하다.

 

한강 작가가 우리의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글로 표현해주어 고맙다. 노벨문학상을 받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역사를 알게 해주어 고맙다. 천천히 한 권씩 재독하며 계속 축하하겠다고 결심했다.



 














발자크와 헤밍웨이의 문장은 완전 결이 다르다.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지만 두 거장의 삶은 많이 닮아있다. 두 사람 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그들의 경험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소설의 형식은 다르지만, 이 두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상황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그들의 소설에서 묘사된 지나간 시대와 사람을 지금도 만날 수 있다. 어느 작가가 썼던, 어느 시대의 작품이건 '보편성'은 문학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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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1-04 15: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앗, 재밌겠네 싶어서 저도 써보려 했지만 올해 책 한 권도 사지 않아서 자격이 없군요.

페넬로페 2024-11-04 16:08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님!
책 구매는 굿즈를 받는 별개인 이벤트예요.
문학네권은 책 구매랑 상관없어요.
스크롤 내려 이벤트 참여하기 들어가셔서 네 권 고르시면 돼요.
꼭 올려주세요.
완전 기대하며 기다릴께요^^

Falstaff 2024-11-05 05:22   좋아요 1 | URL
근데 참... 4사분기에 읽은 책인데 11월 4일이란 말이지요. 그럼 10월 한 달 동안 읽은 책 가운데 네 권을 고르라는 이야깁니다. ㅋㅋㅋㅋ 그래서 10월에 서재에 감상을 올렸지만 사실은 9월에 읽은 책까지 포함시켜 한 번 골라보긴 했습니다.
근데 참여한 사람들은 4사분기가 아니라 인생 전체에서 ˝인생책˝ 네 권을 고른 것 같고요, 알라딘도 독자의 진짜 인생첵 네 권을 요구한 것 같기도 하고 막 헷갈리네요. ㅎㅎㅎ

페넬로페 2024-11-05 06:27   좋아요 0 | URL
저도 사사분기라는 말이 좀 그래서, 그렇다고 인생 전체로 하기엔 저번에 인생네권과 겹치기도 해서, 맘대로 그냥 하반기로 했어요 ㅎㅎ
폴스타프님께서는 평소에 워낙 많이 읽으셔서 고르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coolcat329 2024-11-04 16: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이벤트가 있군요. 올해 많이는 못 읽었지만 저도 이따가 한 번 해봐야겠어요. 내년엔 저도 페넬로페님처럼 한 작가의 전작읽기를 해보고 싶어요. 넘 좋은 자극을 주셨답니다.

페넬로페 2024-11-04 16:52   좋아요 1 | URL
어떤 문학네권일지 기대됩니다~~
쿨캣님 전작 읽기의 작가도요^^

서곡 2024-11-04 1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앗 또 네권 이벤트가 있군요!!!! ㅋㅋㅋㅋ

페넬로페 2024-11-04 20:13   좋아요 1 | URL
우연히 들어갔는데 있더라고요
ㅎㅎ
문학이라 반가워서요^

희선 2024-11-05 02: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아서 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게 아니었으면 안 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저는 노벨문학상 받았다고 해도 잘 안 읽는군요 어려울 것 같아서... 한강 작가 책은 예전에 조금 봤어요 앞으로 보고 싶기도 합니다 한국 사람뿐 아니라 세계 사람이 한강 작가 책을 보고 한국을 조금 더 알게 되겠습니다


희선

페넬로페 2024-11-05 06:31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문학이란 말을 붙인 것 같아요. 한강 작가의 작품은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꾸준히 읽어온 건 작가가 지닌 저력때문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yamoo 2024-11-06 1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이벤트를 페낼로페 님 이 페이퍼로 처음 알았는데, 내용에 대해 헷갈렸는데, 다행히 폴님과의 댓글을 보니 아무거나 좋았던 거 4권 택해도 되는가 봅니다...ㅎ
저도 해봐야 겠습니다! 불끈!!

페넬로페 2024-11-06 17:21   좋아요 0 | URL
네, 구매 상관없이 하셔도 됩니다. 한 번씩 이런 이벤트가 재미있더라고요. 기록도 되고요^^

singri 2024-11-06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이벤트가 있군요;;;

페넬로페 2024-11-06 17:32   좋아요 0 | URL
넵, 저도 오랜만에 이벤트 클릭했는데 있더라고요^^
 














거의 10년 전쯤, 성북동의 간송미술관 개방 전시에 간 적이 있다. 봄인지 가을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그 날 다섯 시간동안 줄을 서서 기다린 후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전시기간이 딱 2주간만이라 관람객이 엄청 많이 왔었다. 그때 중학생인 딸과 언니, 조카와 함께 갔는데, 카페에 자리를 잡고 서로 번갈아가며 줄을 섰었다. 줄 선 사람을 대상으로 김밥을 팔러온 상인에게 김밥을 사서 길에서 맛있게 먹었다. 그 사이 언니와 조카는 근처에 있는 길상사에 다녀오기도 했다.

 

오래 기다려 들어갔지만, 사람이 워낙 많아 한 작품 앞에 오래 머물 수 없었고 그냥 물 흐르듯 지나가며 보는 정도로 그쳐야했다. 미술관 안에는 엄청난 작품들이 포진해 있었다. 혼잡함과 작품을 자세히 감상할 수 없는 아쉬움 속에서도, 여러 작품이 뿜어내는 아우라와 위압감에 압도당했다. 그날 본 작품 중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건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와 단원 김홍도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어떤 위대한 작품과 맞닥뜨릴 때, 머릿속에서 생성되는 단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말보다는 눈과 가슴에 그 이미지가 바로 새겨진다. 정선의 산수화가 그랬다. 웅장하고 정제된, 조화롭고도 고요한 그림에 마음이 뭉클해지고 벅찼다. 풍속화가로만 알고 있던 김홍도는 다재다능한 예술가였다. 그날 김홍도의 글과 산수화, 풍속화를 보며 옛 화가에겐 이 정도가 기본이구나!를 생각했다.

 

1906년에 태어난 전형필(1906~1962)의 친가와 외가는 미곡상을 운영했다. 그의 나이 24세에 친부가 저세상으로 가며 엄청난 재산을 물려주었다. 기와집 2천 채 상당의 가치가 있는 논을 상속받아 백만장자가 되었다.(p.70). ‘간송이라는 호는 위창 오세창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주면서 인용한 논어 자한편의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에 들어있는 소나무 송()자를 넣어 준 것이다. 전형필은 오세창과 여러 지식인을 만나며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한 곳에 모을 결심을 한다. 간송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설립한다.


202493일 대구간송미술관이 개관되어 10월에 남편과 대구 간송미술관에 다녀왔다. 개관기념으로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국보. 보물전(여세동보(與世同寶)-세상 함께 보배 삼아)이 열렸다. 국보와 보물 4097점이 전시되었다. 이 모두가 간송 전형필 선생이 거금을 들여 수집한 작품들이다. ‘여세동보는 보화각 머릿돌에 새겨진 오세창의 글귀다. 간송미술관은 대구미술관과 나란히 있었다. 예약제로 운영되어 10년 전보다는 여유 있었지만, 평일이었는데도 관람객은 많았다. 특히 신윤복의 그림에 관람객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미인도>-신윤복

사진에 사각형의 빛이 들어가 아쉽다.

 

관람객이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 몰린 이유는 당연했다. 이번 대구 간송미술관 전시에서 나에게 가장 좋았던 작품은 단연 신윤복의 <미인도>였다. 가까이에서 직접 보니 이 여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기생인지 어느 부잣집의 첩인지는 모르지만, 제목이 왜 미인도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이 여인은 미인이었다. 지나가던 남자들이 이 여인을 보면 바로 사랑에 빠질 정도로 단아하고 예뻤다. 특히 눈이 매력적이었다. 그림 왼쪽 위의 제화시(題畫詩)도 감동이었다.

 

[화가의 가슴속에 만 가지 봄기운이 일어나니

붓끝은 능히 만물의 초상화를 그려내준다 혜원]

 

혹시 이 여인은 혜원이 사랑한 사람이 아닌지? 혜원 신윤복은 대대로 화원 출신의 집안에서 태어난 중인으로 그가 본 주위의 환경이 곧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그 유명한 신윤복의 <단오풍정>이다. ‘혜원전신첩의 그림 모두 좋았다. 혜원전신첩은 한량들의 주막 풍경부터 양반의 풍류놀이와 남녀의 밀회, 여인의 생활풍속 등이 담겨 있다. 그림에 사용된 색채가 여전히 선명했고, 특히 화가가 사용한 빨강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김득신의 긍재전신첩의 풍속화도 좋았다. 처음엔 김득신이 우리가 아는 그 책 많이 읽은 조선의 선비인줄 알았다. ‘! 이 사람이 그림도 잘 그렸구나!‘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은 동명이인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김득신은 조선 3대 풍속화가중의 한 사람으로, 조선 후기 도화서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추사 김정희의 <대팽고회><난맹첩>도 멋있어 그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김정희의 글씨는 그냥 바로 추사체였다. 김정희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이 보였다. 오래된 서체인 예서를 사용하여 예스러움을 풍기며 기교를 버린 마른 필획은 천진한 자연의 상태로 들어선 듯한 느낌을 준다. 두부나 오이처럼 흔한 반찬과 가족들이 모여앉은 자리가 최고의 음식이며 최고의 모임이라는 내용은 두 번의 유배를 겪은 뒤 김정희가 터득한 삶의 진리처럼 여겨진다.

 

난맹첩은 김정희의 유일한 묵란화첩으로 16폭의 묵란화와 7편의 글이 실려 있다. 묵란은 추사체라는 독특한 글씨 못지않게 김정희의 예술적 지향과 성취를 구체적으로 담고 있는 분야다. 붓을 세 번 굴려 난잎의 굵기를 조절하는 삼전법(三轉法)이나 점과 삐침으로 단순하게 꽃을 표현하는 점 등은 난맹첩에 적용된 서예적 법식이다.

 

[추사에게 그림은 하나의 학문이었다. 그는 학문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연구했다. 그것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최적의 루트, 즉 문경(門經)을 찾는 것이었다. 이것은 경학뿐만 아니라 시서화를 비롯한 추사 학문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방법론이다.문경을 따라가면서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두보를 뛰어넘는 시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글씨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누군가의 아류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꿈꾸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추사체가 바로 그런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묵란화와 산수화가 그것이다.

-p.107~110, ‘세한도’, 박철상, 문학동네]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고려시대(13세기) 중기)

 

일본의 도굴꾼 야마모토에 에 의해 도굴된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은 고려청자 거간 스즈키 다케오에게 팔렸고, 간송은 당시 돈 2만원, 기와집 20채의 가격으로 두말없이 다시 사들였다. (p.16~26)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12세기 중기

 

새끼를 품고 있는 어미 원숭이의 모습을 상형한 연적이다. 고려 시대에 원숭이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까? 아니면 불교의 승려들이 인도 등으로 가서 보고 온 것일까? 중국에서 들어온 것 일수도 있다. 새끼를 안고 있는 원숭이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이밖에도 김홍도의 고사인물도’, 이징의 산수화조도첩’ , 이정의 '삼청첩', 정선의 청풍계’, ‘동국정운’,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 ‘분청사기상감모란문합’,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청자상감국모란당초문모자함’, 등 위대한 작품들이 넘쳤다.


미술관을 나와 대구미술관과 간송미술관 사이에 있는 핸즈커피에서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미술관에 있는 카페라서 그런지 내부 구조와 인테리어가 예술적이었다. 혜원의 그림 앞에서 남자 큐레이터(학예사?)분이 관람객의 질문에 하나하나 친절히 대답해주셨다. 그러면서 이 작품들은 자주 볼 수 없으니 눈에 많이 담아 가시라고했다. ‘눈에 담다!‘ 이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날 좋은 날, 아름다운 미술 작품을 눈에 담아 갈 수 있게 해준 간송 전형필 선생이 고마웠다. 선생은 정말 대단한 분이다. 이 말 말고 더 어떤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작금의 대한민국에 나라와 후세를 위해 전형필 같은 분이 많이 나와 주면 좋겠다

지금이야말로 그런 위인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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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0-26 09: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다녀오셨군요! 그럼 간송 미술관이 아예 대구로 옮겨간 건가요? 어젠가 그제 뉴스 보니까 그동안 간송 미술관이 입장료를 안 받았는데 이제부터 받을 거라고해서 좀 놀랐습니다.
암튼 가을 알차게 보내고 계시네요. 간송 평전 읽고 싶은데 못 읽고 있네요. ㅠ
얼마 전 TV에 관장이 나왔는데 완전 똑같이 생기셨더군요. ㅎ

페넬로페 2024-10-26 10:11   좋아요 2 | URL
서울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은 그대로 두고 대구는 분점같은 의미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 개관 기념으로 좋은 작품 전시를 많이 해서 다녀 왔습니다.
입장료는 만 원인데 요즘 물가에 비해 그리 비싼편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서울에도 리움미술관 정도로 간송미술관이 재건축되면 좋겠습니다^^

서곡 2024-10-26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적이 너무 예뻐요! 덕택에 구경 잘 했습니다 카페도 멋지네요 주말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4-10-26 13:00   좋아요 1 | URL
청자모자원숭이연적 말고도 예쁜 연적이 많았습니다. 사진을 모두 올리지 못해 안타까워요. 핸즈 카페도 멋졌어요.
서곡님, 오늘 날씨가 너무 좋네요. 건강하고 행복한 주말 보내시길요^^

그레이스 2024-10-26 15: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서울 간송은 리뉴얼해서 전시했잖아요?
다녀온 사람들이 전시물품이 별로 없어서 그냥 그랬다고 해서 전 예약 안했어요
대구 전시 중이라고 해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는데,,, 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쉬워요
지방에 계신 분들이 서울 뮤지엄이나 갤러리 못오시고 아쉬워하시는 맘 알 것 같아요.

막내가 오주석, 간송 전형필 읽고 전공을 확실히 정한터라 제게도 남다르네요.
성북동에서 미인도 전시할 때 남편이랑 줄서서 보고 내려오는 길에 생선구이 먹었던 생각나네요 ^^
미인도가 생각보다 큰 사이즈여서 놀랐죠,,,
역시 감상은 사진이 아니라 실물로 봐야한다는 깨달음!
그 생선구이집은 아직도 있으려나...!^^

페넬로페 2024-10-26 17:34   좋아요 1 | URL
대구에서 미술관 유치를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중간에 위치하고 교통이 편리해 접근성이 좋아서요.
국보.보물 특별전이라서 그런지 전시 작품 모두 좋았어요^^

레삭매냐 2024-10-30 07: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술관 뮤지엄 가는 걸
참 좋아라하는데...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인지
기억이 다 가물가물하네요.

미술관 옆 커피... 고저 멋지네요.

눈에 담아가시라, 왠지 화두처럼
다가오네요. 멋지구요.

페넬로페 2024-10-30 12:16   좋아요 1 | URL
눈에 담아 가라는 말이 참 좋더라고요. 작품도 다 좋아 그 말 느낌이 더 다가왔어요.
카페가 널찍해서 좋았고 커피 맛도 괜찮았어요^^

전야제 2024-11-07 2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읽고 완전 반했던 글이었는데 그때는 부끄러워서 댓글도 못 달았어요ㅎㅎ 문화예술 쪽으로는 배경지식이 많이 부족한데 페넬로페님의 글에서 간접 여행도 하고, 문화 체험도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하나씩 천천히 읽어나갈게요!

페넬로페 2024-11-08 00:30   좋아요 1 | URL
저의 글을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많이 부족합니다. ㅎㅎ
전야제님의 서재도 자주 찾아 가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친정에 들렀다가 시댁으로 온 날, 큰 아주버님은 출장 중이어서 우리를 맞이할 수 없었다. 정이 넘쳐 파도처럼 넘실대는 마음을 가지신 아주버님은 많이 미안해하셨다. 그 미안함과 우리의 결혼을 또 한 번 축하하는 마음을 보태 시댁 가족 모두를 불러 밥을 사 주셨다.

 

식사를 하면서 아주버님께서 주시는 술을 한 잔 받고, 시동생들이 ! 형수님, 한 잔 하시지요.”하며 건네는 술을 또 넙죽 받고 하며, 엄청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친정 분위기와 달리 시끌시끌하며 허물없는 시댁의 분위기가 편하고 좋았다.

 

가족 회식을 한 며칠 후, 어머니를 뵈러 갔을 때, 어머니는 뜬금없이 나에게 셋째야, 너 술 잘 마시더라(아들 형제 중에 남편이 셋째여서)!”고 하셨다. 난 아무생각 없이 , , 근데 그렇게 잘 마시지는 못하는데요, 호홋!”하고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은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에 뼈가 들어있다고 했다. 술로 인한 간경화로 일찍 남편을 잃은(남편 10살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술 마시는 것을 싫어하신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은 되도록 어머니 앞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술은 이렇게 이중적이다. 아니 삼중, 사중적으로 상처, 고통, 지난(至難)함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술은 적당히 마시면 사람을 기쁘게, 행복하게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원인이 되고 그로인해 또 누군가에겐 평생 가슴에 한을 새겨놓는다.

 

 

언제나 음식과 술에 진심이 느껴지는 권여선 작가의 산문집, 술꾼들의 모국어는 술과 음식(안주)에 대한 이야기로 사람 마음을 환하게 해주는 책이다. 보통 음식과 안주는 별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지만 작가 권여선에게 둘은 분리될 수 없다. 맛있는 음식에 당연 술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음식에 약간의 술이 곁들여지기보다 맛있는 술을 마시기 위해 좋은 음식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술꾼은 모든 음식을 안주로 일체화시킨다./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줄이면 안주가 되는 수준이다.(p.8)’라고 하니 내가 생각한 게 맞다.

 

(안주)을 떠나 이 책에 나오는 4계절과 관련된 음식에 대한 작가의 비유는 계속 나의 입 꼬리를 올라가게 해주었다. 그녀가 사용한 유머러스하고 따뜻한 단어로, 음식은 곧 시각화되어 내 눈앞에 나타났고 거기에 온갖 추억과 오래된 사람을 떠오르게 했다. 정말 피 투성이만두는 사람을 화나게 하고, 경상도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턱 물회에 한참 웃었다. 마트에서는 청량고추라고 표기되는 고추를 작가는 시종일관 땡초라고 표현했는데, 나의 친정 식구들도 이 고추를 땡초라고 말한다. 반가웠다.

 

음식에 진심이 아닌 나에게는, 평생 음식에 진심인 엄마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계속 엄마 생각이 나 슬펐다. 작가가 언급한 음식 모두에 엄마가 존재했다. 음식 하나마다 엄마의 손맛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엄마도 제사상에 작은 가자미전을 올렸고, 겨울을 나기 위해 말린 시래기를 들통 가득 삶아 하나하나 껍질을 벗겼다. 껍질 벗긴 부드러운 시래기는 들깨를 넣어 나물을 무쳤고, 진하게 된장을 풀어 시래기 국도 끓였다. 엄마는 나물을 좋아하셔서 항상 제철 나물을 상에 올렸다. 가죽 나물 요리도 많이 했는데, 어릴 때는 그 맛을 몰라 잘 먹지 않았다. 지금 누워 액체 유동식으로만 연명하는 엄마는 더 이상 요리를 할 수 없다.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된장, 고추장, 집 간장이 거의 떨어져가고 있다. !, 엄마, 어떡해? 된장, 간장 만들어줘요.

 

나는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한다. 음식을 먹고 난 후의 포만감이 넘치면 견디기 힘들어, 조금만 먹으려고 한다. tv의 먹방을 보면 내 배가 차오르는 것 같아 괴롭다. 그래서 음식을 먹으며 술을 같이 잘 못 마신다. 술로 금방 배가 차버려 음식 맛을 느끼기도 전에 숟가락을 놓아야 한다. 권여선 작가는 세상에 맛없는 음식은 많아도 맛없는 안주는 없다고 했지만, , 특히 소주를 마시지 않으니 아직도 나는 잘 안 먹는 음식이 많다. 아무리 노력해도 삭힌 홍어와 곱창, 돼지비계, 순대국은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 추운 러시아에는 초콜릿 안에 돼지비계를 넣어 도수 높은 보드카와 먹는다고 하지만, 어쨌든 내 비위에는 맞지 않다.


요즘 친정에 가면 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먹는 대신 언니와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나간다. 사진은 추어탕, 삼계탕, 짬뽕, 생선회, 장어구이다. 서울에서 먹을 수 있는 약간 맵고 뻑뻑한 전라도식 추어탕도 맛있지만, 맑고 시원한 맛의 경상도식 추어탕도 좋다. 여기엔 꼭 산초가루와 방아 잎, 생마늘 다진 것을 넣어야 한다. 친정이 있는 도시의 유명한 삼계탕집의 삼계탕은 여전히 맛있다. 서울에서 먹어 본 삼계탕은 이 맛이 안 나, 서울에서는 삼계탕을 잘 사먹지 않는다. 남편도 인정하는 맛이라 처갓집에 가면 꼭 그 식당에 간다. 바다가 가까운 곳이라 싱싱한 생선회와 장어구이는 반드시 먹어야 한다. 최근에 발견한 친정 동네 중국집의 해물 짬뽕도 정말 맛있다. 해물도 많이 들어있고, 면발이 얇아 좋다. 국물도 적당히 얼큰하고 맵다. 주인 부부가 요리를 하고 아들이 서빙을 하는 전형적 가족 식당인데, 일단 배달을 하지 않아 맛이 더 깊다.


속초에 가면 무조건 먹는 음식이 물회다. 한 번씩 물회가 먹고 싶으면, 서울에 있는 이 식당의 분점에 가서 물회를 먹는다. ‘턱 물회는 아니고 그냥 보통으로 시킨다. 차가운 물회와 국수를 먹고 입가심으로 따뜻한 섭국과 밥을 조금 먹으면 속이 더 든든하다.


오늘같이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따끈한 칼국수를 자주 먹으러 간다. 주인장이 직접 밀가루를 반죽해 만든 쫄깃한 면발에, 해물이 들어 있지 않은 순수한 면으로만 만든 걸쭉한 칼국수를 좋아한다. 여기에 무조건 다대기와 맛있는 생김치가 있어야 한다. 먹고 나서 1시간쯤 지나면 그때부터 나타나는 짠맛의 여운에 물을 계속 들이켜야 하지만, 먹을 땐 다대기를 넣고 싱싱하고 시원한 생김치와 같이 칼국수 면을 흡입해야 한다. 나중에 후회해도 먹을 땐 그렇게.


이 책의 앞표지 뒷장엔 작가의 사진과 약력이 있고, 그 옆 페이지에 권여선 작가의 친필 편지가 있다. 작가의 깔끔한 글씨체와 반대로 내용은 뭉클하다. 음식, , 안주라는 단어만으로도 우리는 밤새 온갖 사연들을 쏟아낼 수 있다. 거기엔 기쁨과 행복보다는 상처와 고통이 더 많은 삶의 이면이 있을 것이다. 술꾼들의 모국어에도 작가의 아픔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술이란 그런 것이다. 마음 아파서, 힘들어서, 힘내려고 한 잔 마시는 것, 그래도 이 땅의 술꾼들이여! 작작 마셔 알코올 중독자는 되지 말며, 술로 인해 실수하거나 건강을 해치지 않기를 바란다.


책을 읽다 맥주 한 캔을 사왔다. 요즘 나의 주량의 최대치다. 안주로 부추 부침개를 부쳤다. 마트에서 파는 길고 잎이 넓고 뻣뻣한 부추가 아니라 재래시장에서 할머니들이 파는 키가 작은 부추를 사용해야 한다. 오징어를 듬뿍 넣고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해 땡초는 조금만 넣어 완전 바삭하게 구운 부침개다. 작가님은 부추 부침개의 비주얼을 보고 혀를 끌끌 찰지 모르지만, 맛은 최고다.

 

[변화나 발전도 좋지만 영영 그대로여서 좋은 것도 있는데 저에게는 이 그렇습니다. 저에게 행복을 주는 맛은 언제나 한결같은 의리에서 옵니다. 친구처럼, 오래된 독자처럼.

이 책은 제가 독자들에게 건네는 메뉴판입니다.

천천히 메뉴를 고르시고, 저와 한잔 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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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10-22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추 부침개와 맥주가 유혹하는 저녁입니다 🍺 🍻

페넬로페 2024-10-22 20:07   좋아요 0 | URL
오늘 서울은 하루 종일 비가 와요.
비 오는 날은 부침개죠 ㅎㅎ
시원한 맥주도 좋고요^^

마힐 2024-10-22 1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래시장에서 파는 할머니들이 파는 키가 작은 부추를 사용해야 한다˝ 역시.... ! 음식 사진만 봐도 최고의 맛이 느껴지네요. 나중에 페넬로페님이 뽑은 맛집 리뷰도 올려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ㅎㅎ _()_

페넬로페 2024-10-22 20:09   좋아요 1 | URL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 한정적이라 다양한 맛집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미각이 그리 나쁘진 않습니다 ㅎㅎ
앞으로도 기회된다면 음식 얘기 올리겠습니다^^

Falstaff 2024-10-22 18: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금 바그너의 발퀴레 라스트 씬 듣고 있는데요, 제가 음악 무지 좋아합니다.
음악 보다 조금 더 좋아하는 게 있는데요, 그게 책이고요, 더 좋아하는 게 밥입니다.
지금부터는 비밀인뎁쇼, 더 좋은 게 마누라고, 그 다음이 술입니다.
ㅋㅋ 다 글케 사는 것이지요 뭐.

페넬로페 2024-10-22 20:13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님 술 좋아하시는 거 다 아는데 부인께서는 뭐라고 하시는지요?
에그, 그냥 포기할란다~~
이신가요? ㅎㅎ
건강 생각하며 적당히 음주 하시길요.
우리는 끝까지 책 읽어야 합니다^^

cyrus 2024-10-22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저녁을 뭘 먹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칼국수와 부침개로 정했어요. ^^

페넬로페 2024-10-22 20:13   좋아요 0 | URL
칼국수와 부침개!
술은 막걸리 입니까?

서곡 2024-10-22 1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꽃무늬 맥주잔이 빈티지하게 예뻐서 눈길을 주게 됩니다 ㅎ 남은 시월 잘 보내시기 바래요 잘 읽었습니다!

페넬로페 2024-10-22 20:16   좋아요 1 | URL
꽃무늬 잔은 제가 결혼할 때, 엄마가 부엌장에 있던 거를 꺼내 싸 주더라고요.
그걸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돈 좀 주고 산 것 같은데,
지금은 조금 촌스럽고도 빈티지합니다 ㅎㅎ
서곡님께서도 남은 시월, 건강하게 잘 보내시길요^^

망고 2024-10-22 19: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엄마가 늘 정구지라고 하셔서 정구지가 사투리인지 몰랐어요ㅋㅋㅋ좀 커서야 그게 부추라는걸 알고 약간 배신감이ㅋㅋㅋㅋ
칼국수 사진 보니까 라면이 먹고 싶어요ㅋㅋㅋㅋ내일은 꼭 라면먹어야지😂

페넬로페 2024-10-22 20:19   좋아요 1 | URL
저도 당연 정구지라고 말했죠.
지금은 표준어로 부추라고 하지만요~~
부추 부침개보다는 정구지 찌짐이란 말이 훨씬 정겨워요.
망고님이 끓이시는 라면도 맛있을 것 같아요.

바람돌이 2024-10-23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방금 밥 먹었는데 사진에 나오는 음식은 다 먹고싶네요. ㅎㅎ
예전에 서울 식당가서 땡초좀 달랬다가 못 알아먹어서 땡초가 사투리라는걸 처음 알았어요. 그래도 청량고추보다는 땡초라는 말이 딱 직관적이고 선명하지 않나요? 저는 청랼고추보가는 땡츄를 좋아합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4-10-23 15:44   좋아요 1 | URL
정말 그렇죠?
재료를 나타내는 단어로도 그 맛의 느낌이 달라지거든요.
부추나 청량고추는 영 느낑이 안 살아요 ㅋㅋ
사진으로 보이는 음식은 다 맛있어 보여요.
바람돌이님께서 올리시는 음식 사진도요^^

감은빛 2024-10-23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비가 와서 저녁 늦게까지 같이 회의를 했던 일행들을 꼬드겨 녹두부침개에 막걸리를 마셨어요. 부추전에는 맥주는 왠지 안 어울리는 느낌이지만, 맛있으면 상관없죠. ㅎㅎ

권여선 작가의 친필 편지가 무척 인상적이네요.

페넬로페 2024-10-23 20:11   좋아요 0 | URL
녹두부침개와 막걸리의 조합도 너무 좋습니다.
맥주 한캔은 그냥 가볍게 마실 수 있어 선택했습니다.
작가님 편지의 글씨도, 내용도 모두 좋았습니다.

젤소민아 2024-10-26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밤에 괜히 봐갖고...ㅠㅠ 죽갔네요

페넬로페 2024-10-26 13:03   좋아요 0 | URL
ㅎㅎ
오늘 밤, 그냥 참으시고
낼 맛있는 음식, 드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