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옥’을 재독하다
2년 전(2022년), 그 유명한 단테의 신곡을 처음 읽었을 때, 신곡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베르길리우스를 따라가는 단테처럼 겸손했고 공부하는 자세였다. 오랫동안 도서관 독서동아리에 참여하여 주로 클래식을 읽다보니 고전에 대한 경외심이 나에게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다. 노트에 1곡부터 34곡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며, 제1원부터 제9원까지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각기 어떤 벌을 받는지 자세히 필사하며 읽었다.
2년 후(2024), 단테의 신곡을 재독하며 그때 필사한 노트를 꺼내보았다. ‘참 열심히도 읽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용을 많이 잊었지만, 읽다보니 다시 기억났고, 주석의 해설 역시 이해가 잘 되었다. 지옥을 재독하며 계속 든 생각은 단테가 설계한 지옥 구조물의 형태와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떤 죄가 어떤 단계에서 무슨 벌을 받는가가 중심 주제가 아니었다. 나에게 중요한 건 지금 단테의 신곡을 읽는 이유이다. 신곡에서 내가 무엇을 가져올 것인지, 신곡이 나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단테 신곡 강의』에서 단테의 『신곡』을 읽는 일은 우선 ‘클래식’에서 배우는 것, 단테에게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휴머니즘’ 즉 인간에게 고유한 것을 체득하는 데에 있다고 했다. 단테(클래식)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단테가 묘사한 지옥은 표면적으로는 종교와 신에 의한 심판이지만, 내가 느낀 지옥은 그냥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세계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지옥을 순례하는 단테역시 인간적인 모습을 여러 차례 보이고 있다.
각성, 새로운 출발, 또는 어떤 완성을 향해가는 길에서 인간은 인간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나’를 짊어지고 나아가야만 무엇이든 깨닫고 변화하게 된다. 그것이 지옥이다.
나는 죄를 짓고, 반성하고, 또 죄를 짓고, 반성한다. 단테가 상세히 묘사한 지옥을 생각하고 거기에 갈 생각을 하면 무섭지만 그래도 죄를 짓는다. 여전히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2. 고전의 유용성
작년, 딸아이와 유럽 여행을 갔을 때, 혼자서 일정을 짠 딸아이는 고전을 열심히 읽는, 신곡을 읽은 엄마를 위한 이벤트를 하나 준비해 주었다. 마침 우리가 파리 여행을 할 때, 영국 로열 발레단이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극장’에서 단테의 신곡 공연을 할 예정이었다. 딸아이는 발레 공연을 미리 예매했고, 우리는 영국 로열 발레단의 발레를 관람할 수 있었다. 엄마를 위한 딸아이의 마음은 좋았지만 최대한 여행비를 아끼기 위해 딸아이는 비교적 값이 싼 무대에 가까운 박스석을 예매했다.
박스석에는 우리 둘 말고 외국인 모자가 같이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 정도 되는 남학생은 발레 시작 전과 지옥, 연옥을 지나는 두 번의 인터미션동안 내내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어떤 책을 읽느냐고 물어보니 단테의 신곡을 읽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 남학생의 엄마는 그 책을 수없이 읽는다고 덧붙여 말해주었다. 반면 나의 딸아이는 발레를 보기 전 신곡이 어떤 내용이냐고 나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단테,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라는 세 인물과 간단하게 신곡의 내용에 대해 말해주었다.
공연장 천장이 샤갈의 멋진 그림으로 되어있는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는 분위기가 정말 클래식했고, 평일 낮이었는데도 관람객이 꽉 차 있었다. 신곡을 읽었기에 발레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적어도 단테,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값이 싼 무대에 가까운 박스석에 앉아 무대 전체의 흐름을 잘 볼 수 없어 아쉬웠고,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얼굴과 발레는 바로 직관할 수 있어 좋았다.
신곡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딸아이와는 계속 신곡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지만, 신곡 책에 빠져있는 남학생의 엄마는 그저 무심하게 앉아있어야만 했다. 이럴 때 신곡을 읽은 나는 유용한 사람이었다. 고전 읽기는 한 번씩 사람을 유용하게, 쓸모 있게 만든다.
3. 베르길리우스
로마의 대표 시인인 베르길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지시로 새로운 로마 건국 신화를 창작한다.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패배한 트로이아 사람 아이네아스는 이탈리아에서 조국을 재건하고자 한다. 아이네아스가 트로이를 떠나 이탈리아에서 로마를 세우는 과정을 그린 서사시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아이네아스의 여정에 관한 시)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이 시의 첫머리에 호메로스와는 달리 무사여신에게 스스로 내가 노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한다.
[단테는 신의 노래를 그대로 번역한 호메로스가 아니라 베르길리우스의 입장, 즉 스스로 미토스(신화)를 창조하면서도 뮤즈의 여신에 의지해 노래한 위대한 시인을 모범으로 삼는다.…
단테의 『신곡』은 유혹에 무릎을 끓을 것 같은 패배자의 신분에서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신곡』의 출발점은 호메로스보다 베르길리우스에 가깝다.
-p.69. p.84, ‘단테 신곡 강의’]
단테는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신분이다. 그에게는 고향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있다. 단테와 아이네아스의 공통점은 온갖 시련을 극복하여 다시 새로운 것을 완성해야 할 소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테가 길잡이로 베르길리우스를 내세운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이다.
단테는 길잡이 베르길리우스의 이름 앞에 온갖 미사여구를 붙인다. 지혜의 바다, 자애로운 아버지, 선한, 현자, 믿음직한 동반자, 모든 흐린 시선을 고쳐 주는 태양, 친절한 스승님, 어진 스승님.…베르길리우스는 단테를 데리고 지옥을 순례하며 힘들어하는 단테를 위로하고 그의 어려움을 해결해준다. 갈 길이 바쁜데도 죄인에 대한 호기심이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단테를 혼내기도, 재촉하기도 한다.
같은 독서동아리 회원인 비아는 단테의 신곡을 읽고 나서 나에게 주는 생일 카드나 다른 축하카드에 꼭 ‘나의 베르길리우스에게’라는 문구를 써 준다. 말도 안 되고, 황송하며 감사하다. 어떤 동행에서든 길잡이는 결코 일방적인 것이 될 수 없다. 나이와 헤쳐 온 삶을 떠나 길잡이는 서로에게 영향을 끼쳐 결국 친구가 되는 것이다. 단테에게 베르길리우스는 선하고 책임을 다하는 영혼이다.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으로 계속 남기를 바란다.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고 있는 단테를 길잡이 베르길리우스는 저승 세계로 안내한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무사히 지옥을 빠져나와 연옥산을 평온하게 바라본다.
4. 프란체스카와 파올로
지옥 제5곡의 둘째 원은 음란함과 애욕의 죄인들이 벌 받고 있는 곳이다. 그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섭게 휘몰아치는 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벌을 받는다. 프란체스카는 라벤나의 귀족으로 리미니의 귀족 잔초토와 결혼한다. 잔초토는 불구의 몸이어서 결혼식장에 동생 파올로를 대신 내보낸다. 프란체스카는 파올로를 사랑하게 되고 잔초토에게 발각되어 두 사람은 죽임을 당한다. 단테는 비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프란체스카와 파올로를 만나 그들의 사연을 듣는다. 단테는 그 영혼이 너무 가여워 정신을 잃고 죽은 시체가 넘어지듯이 쓰러진다.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는 지옥에서 계속 붙어 다닌다. 그들의 사랑이 너무 지극하고 억울해서 지옥에서나마 같이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본문에서 받은 느낌은 그렇다. 하지만 아무리 애틋한 사랑이라도 고난을 겪으며 같이 다닌다면 계속 행복할지 잘 모르겠다. 인간이나 영혼이나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사실 별로 많지 않다. 운명적인 것에 훨씬 더 좌우된다. 이래저래 인간이나 영혼은 가련하다. 단테의 마음과 쓰러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5. 지옥의 이미지-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단테는 지옥을 불의 이미지로 묘사한다. 선홍색 불길, 영원한 불, 불그스름하게 물들인다, 불비, 온통 불타고 있다, 불꽃, 불의 도시, 불의 강.…
지옥을 읽으며 지난여름에 봤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계속 연상되었다. 마틴 에이미스 실화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지옥과 비슷하게 불의 이미지가 강렬하다. 아우슈비츠의 소장인 루돌프 회스 중령의 사택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담장이 붙어있다. 이 영화는 수용소 안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회스의 사택과 그들의 가족의 편안함만 보여준다.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에서 들리는 소리로, 굴뚝에서 계속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로만 그 안의 상황을 보여준다.
나치는 인종청소를 위해 수용소로 계속해서 유대인을 보내고 가스실에서 죽는 사람이 늘어난다. 루돌프 회스의 머리는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하루에 최대치의 사람을 죽이고 그들을 불태울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다. 심지어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더 그런 생각에 몰두한다. 어떻게든 많이 죽이고, 많이 태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히틀러가 원한 인종 청소를 원활히 진행할 수 있으니까.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으로 자신을 불태운다.
잔인하거나 직접적인 장면이 전혀 없었음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지옥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누군가는 벌레보다 못한 삶을 살고, 누군가는 왕과 같은 삶을 살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런 것을 인식하면서도 태연할 수 있는 태도였다.
내가 단테의 지옥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와 닿은 것은 인간의 죄 중 ‘기만’이었다. 이 단어의 뜻이 ‘남을 속여 넘기는 것’이라는 짧은 것이라 단순해 보이지만, 이 속에 내포된 의미는 수없이 많다. 타인에게 마음으로, 물리적으로 인간은 너무 많은 기만의 죄를 범한다. 우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지는 그런 기만이 섬뜩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주변에는 평범한 폴란드 마을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수용소 밖으로 나가 노동을 했다. 영화에서는 밤에 한 폴란드 소녀가 나치의 눈을 피해 유대인들이 노동을 하는 장소에 사과를 살짝 놓아두고 온다.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연옥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산 사람의 기도가 필요하듯, 지옥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이 소녀처럼 작지만 용기 있는 온정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쉽게 보이지만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