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영국에서 출생한 데미언 허스트는 어머니와 외할머니와 함께 살아간다.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데미언도 성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곳에서 미래에 자신의 주요 작품 주제가 될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앨러튼 그레인지 스쿨과 리즈 예술 대학을 거쳐 런던의 골드 스미스 대학에 진학해 그림을 배운다. 1970년대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던 시기에, 데미언과 그의 동료들은 런던 항만 구역의 창고에서 <프리즈>라는 전시를 연다. 자신들의 힘으로만 전시를 기획해야 했지만, 이 전시를 계기로 데미언은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큐레이터의 자질을 배웠고, 젊은 영국 예술가 그룹인 'yBa'를 탄생시킨다.

 

데미언 허스트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작품 속에서만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적극적으로 큐레이팅의 전 과정에 참여한다. ‘공간, 사물 및 전시회 자체를 매체로 사용하여 자신의 아이디어와 관심사를 시각과 예술적 실천 의지에 맞춰 큐레이팅(p.35)'하는 것이다. 세계적인 컬렉터인 찰스 사치는 데미언의 작품에 관심을 가져 그를 후원한다. 남다르고 기발하며 파격적인 데미언의 작품은 사회적 관심과 함께 상대적으로 많은 비판도 받는다.

 

어렸을 때부터 데미언은 돌멩이나 광물, 책 등을 수집했다. 머더미(murderme-데미언의 수집 전반을 지칭하는 용어) 컬렉션으로 포름알데히드 동물, 곤충 캐비닛과 같은 작품으로 표현했다.

 

[데미언의 수집품 머더미는 그의 주된 관심사였던 과학과 예술, 자연사, 죽음과 그 죽음을 이해하려는, 또는 그것을 피하려는 인간의 염원을 수집하고 정리한 행위로 보인다. 그렇기에 그의 수집벽은 불멸의 숭고함을 추구한 인간의 욕망과 절대로 죽음을 이길 수 없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얘기하고자 한 생각을 대변한다. 이런 일관적 태도가 머더미 컬렉션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데미언의 삶의 지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p.47~48]

 

데미언은 나비와 곤충, 해골과 동물 등을 이용한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이를 통해 삶에서의 죽음이라는 개념을 자연의 역사에 대한 시각으로 조명하는 데 전념해 왔음을(p.52)' 보여준다. 데미언 작품의 특이성은 그가 창립한 회사인 사이언스를 통해 조직적인 차원에서 창작을 하는 것이다. 체계적 시스템이 움직이는 곳에서 예술과 돈이라는 두 개의 목표에 가치를 둔다. 약국 레스토랑 운영도 하고 비지니스 매니저를 고용하여 그의 작품의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려놓았다. 이런 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지만 예술 창작에 돈이 필수적이라는 사실도 간과하기 어렵다.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에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많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오랫동안 의지한 것이 종교였다면 현대의 인간에게는 과학이 신앙을 대체한다는 사실이 그의 수많은 작품 속에 들어 있다. 이런 작품의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데미언은 해골, 시신 머리, 약병과 각종 수술 도구, 소머리, 파리, 상어와 소를 포름알데히드에 담는 것, 박제된 나비 등을 이용한다. 그런 오브제를 통해 죽음을 직면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한다. 죽음은 외면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삶의 일부라는 사실과 생명이 들어있는 육신은 죽으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약장작업을 통해 현대 사회의 의학과 과학도 비판한다. 진열장 속의 수많은 약병에서 죽음을 멀리하고 생명 연장을 실현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표현한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신을 섬기면서도 약을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태도(p.75)’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약은 약 자체로의 효능도 있지만, 형태와 포장에서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데미언의 스팟 페인팅은 제약회사가 약을 제조하듯, 동그라미를 반복적으로 그리며 약을 맹신하며 죽음을 멀리하는 인간의 생각을 풍자하고 있다. 또한 약과 포장 용기의 세련됨과 심미적인 것들이 사람을 기분좋게 해 그것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스핀 페인팅‘, ‘팩트 페인팅’, ‘다이아몬드 해골 작업을 통해서도 계속적으로 죽음, , 예술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한다.

 

 

내가 만난 데미언 허스트는 국립현대미술관 김성희 관장이 집필한 책이다. 데미언 허스트의 연대기적 삶과 그에 따른 작품 세계를 설명했고, 작가와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데미언 허스트에 전시에 맞춰 먼저 출간한 것으로 보인다. 책에 실려 있는 작품이 이번에 전시된 작품에 맞춰 잘 설명되어 있다. 마로니에 북스의 여러 화가에 대한 책은 보통 번역된 것이었는데 이번엔 한국인이 집필한 책이어서 반가웠다. 한국어로 쓰여진 책이라 읽기에 어렵지는 않았지만 김성희 관장의 문장은 많이 아쉬웠다. 또한 이 책은 화가에 대한 객관성이 부족했다. 화가의 예술론과 작품에 대한 설명만 있다. 데미언 허스트가 굉장히 사회적으로 비판받는 예술가라는 언급은 그 어디에도 없다. 화가의 이름을 계속 데미언으로 표기하다 마지막 작가 소개 페이지에 데미안‘으로 표시되었다. 데미언이나 데미안이나 그 어떤 발음도 가능하다는 뜻인지?

 

[데미안 허스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설치미술, 조각, 회화, 드로잉을 통해 현대사회가 의식적으로 외면하거나 놓치면서 만들어낸 고정관념/신념 체계를 고찰하며, 미술과 과학, 종교, 그리고 대중 문화의 전통적인 경계에 도전해 왔다. 그는 특히 죽음속에 있는 강렬한 생명의 아름다움과 그 일시성의 불가피한 부패 등 삶의 이면에 담긴 숭고한 관념에 주목하며, 이를 관객 개개인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물과 물질의 기발한 조합으로 표현한다. -p.222]


-<미다스와 무한>, 나비, 큐빅, p.151


-<신만이 아신다>, 유리, , 포름알데히드 용액, p.155


-<신의 사랑을 위하여>와 함께 한 작가, p.182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전시되는 <데이미언 허스트전>을 보러가기 위해 작가와 작품에 대해 먼저 알고 싶었다. (이번 전시는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데미언 허스트를 데이미언 허스트로 표기했다.) 책을 읽고 인터넷 검색을 했다. 책에 비해 다른 매체에서는 이 작가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너무 상업적이라는 것과 그것을 위한 작가의 비도덕적인 사건도 있었다. 특히 예술을 표현하기 위해 인골이나 곤충의 박제,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구는 동물을 이용하는 것에 많은 비판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논란도 많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관람료를 8000원으로 저렴하게 책정했고, 오디오 가이드도 무료로 제공해 다른 미술관에 비해 상업적인 것을 지양하는 인상을 주었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비용이 충당되었는지, 아니면 부족분을 국민의 세금으로 상쇄시켰는지는 잘 모르겠다.

 

데미언 허스트 작가의 작품에 대한 호기심과 너무 돈을 밝히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양가감정으로 전시회 관람을 시작했지만, 완전히 그의 작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데미언의 창의력에 놀랐고, 그가 추구하는 예술적 의미에 공감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아이러니를 이렇게나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작가의 천재성에 감탄했다. 주제가 작가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사회적 문제와 철학으로 확대되는 것에 생각할 것도 많았다. 무엇보다 작가의 메시지가 잘 이해되는 것이 좋았다. 지난겨울 관람한 <장 미쉘 바스키아>의 작품은 너무 어려워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데미언 허스트는 현대 미술의 판도를 뒤바꿔 놓았지만,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하나이다. 이번 전시의 여러 섹션 중 <모든 질문에는 의심이 따른다>는 그의 20대 시절에 제작한 작품을 모아 놓았다. 회화의 소재가 너무 많은 것에 길을 잃은 허스트는 콜라주 시리즈 돌파구를 찾는다. ‘스팟 페인팅은 한 화면 안에 같은 색을 반복하지 않으며 점 사이에 똑같은 간격을 유지한다. 여기에서 나중에 알약 시리즈로 확대해 나간다. ‘스핀 페인팅1994년부터 연작 시리즈로 시작했으며 모터를 이용해 캔버스를 회전시키며 그 위에 물감을 뿌린다. 스팟 페인팅이 철저히 계산된 것이라면 스핀 페인팅은 우연성과 즉흥성을 표현한다.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이 유리 상자는 20톤이 넘고 길이 4m가 넘는 상어가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겨있다.


-’천년

이 상자 앞에 서면 뭔가 썩어가는 냄새가 난다. 두 개로 나뉘어진 부분 중 한 쪽은 죽은 소의 머리와 피가 있고, 다른 쪽은 구더기들이 파리로 부화한다. 두 쪽의 가운데에 나 있는 구멍으로 부화한 파리는 죽은 소의 머리로 갈 수 있다. 거기에서 영양을 섭취한 파리는 빛에 이끌려 위쪽의 보라색 전기 살충기로 가 죽는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과 죽음의 순환을 우리는 이 상자를 통해 보게 된다. 애써 잊으려고 하는 죽음을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죽음으로 인해 또 누군가는 생명을 얻으며 그 또한 허망한 죽음을 향해 질주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는 거대한 유리 상자 안에 내용물을 넣어 관객을 철저히 관찰자적인 입장에서만 작품을 감상하게 한다. 여기서는 주로 죽음에 대한 메시지를 준다. 우리는 누구나 죽는 줄 알지만 그 실체에 대해 경험하지 못한 채 마치 그것이 없는 듯 살아간다.




-‘신의 사랑을 위해

18세기에 실제 살았던 사람의 두개골을 백금으로 주조하고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붙였다. 치아는 원래의 것을 살리기로 해 전문적인 세척을 거쳐 다시 이식했다.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를 통해 죽음을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결국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고 죽으면 누구나 해골의 상태로 남을 뿐이다.



-사람과 동물의 겉모습은 매끄럽고 아름답지만 피부를 한 꺼풀만 벗기면, 뼈와 혈관, 근육으로 이루어진 물리적 조직체에 불과하다. 하나의 작품에 안과 밖의 두 가지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역시 죽음을 상기시킨다.


-‘벚꽃 시리즈

데미언의 어머니가 좋아했던 벚꽃


<침묵의 사치> 섹션은 이전에는 종교와 신을 숭배한 인간이 현대에는 의학과 돈을 맹신한다는 의미의 작품들이 있다. 종교와 과학이 만난 인간의 욕망의 허망함을 보여준다.

 

**전시 작품에 대한 설명은 오디오 가이드중 일부분을 인용했다.


전시회장을 나와 뜨끈한 수제비와 기름진 빈대떡을 먹었다.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과 그가 말해주는 죽음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어쨌든 죽을 수밖에 없는 내가 왜 이리 온갖 감정과 고통을 가지고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지 많이 허망했다. 그 헛헛함을 일단 따뜻한 국물과 기름으로 채워야 할 것 같았다. 돌아서면 언제 죽음을 생각했냐는 듯 다시 욕망 가득한 삶을 살겠지만, 그럼에도 전시회장에서 잠시 겸손했고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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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6-02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시장에 사람 많았나요? 왠지 삼청동 수제비 집에 더 많았을 거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6-06-02 15:24   좋아요 0 | URL
관람객이 엄청 많아요. 특히 MZ세대가 많더라고요.
삼청동 수제비가 맛집이라 그런지 여기도 줄을 길게 섰어요.
수제비 맛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맛있었습니다.

단발머리 2026-06-03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으로만 봐도.... 무척 강렬하네요. ‘
‘신의 사랑을 위해‘ 특히 더 그래요. 백금에 다이아몬드를 둘렀어도 결국.... 해골인 것을.
전시회 관람 후에는 수제비집에 꼭 가야겠군요. 전시회만큼 수제비도 끌려요~~

페넬로페 2026-06-03 11:39   좋아요 1 | URL
데미언 허스트의 죽음에 대한 메시지가 정말 강렬했어요.
작가의 천재성도 특별했는데 여기서 호불호가 나눠질 것 같아요. 그래도 저는 좋더라고요.
수제비도 한 번쯤은 드셔도 좋을 것 같아요. 삼청동 산책과 북촌 쪽 카페도 갈 곳이 많은데 날씨가 더운게 복병입니다^^

카리나 2026-06-06 0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토요일 오후에 가서인지 시간예약을 했는데도 입장줄이 너무나길었고, 전시작품 앞도 관람객들이 북새통이라 작품감상을 제대로 하지못해 아쉬웠어요.

작가의 삶과 죽음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이 의미는 있었지만, 실제 사람의 해골이나 나비의 박제 등을 이용한 예술작품들은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가 실체를 알면 섬뜩함으로 바뀌는 기이한 느낌을 경험하게 했어요.
자극적인 작품들로 젊은 세대들의 호기심을 일으켜 입소문이 난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구요.
현대인들에게는 의학과 약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주며 종교를 대체하는 역할을 한다는 메세지도 생각해보지못했던 부분이라
과연 그럴수있는지..
그건 다른 영역이지않을까 하고 깊게 생각해보게되더라구요.

삼청동 수제비를 못먹고와서 더 아쉬운가봅니다ㅎㅎ

페넬로페 2026-06-06 07:03   좋아요 1 | URL
관람객이 너무 많죠! 입소문으로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아요. 특히 다른 전시에 비해 젊은 세대들이 많던데 그들이 작가가 전하는 죽음의 메시지를 다 이해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작가가 사용한 오브제에 더 관심이 있는 것도 같고요. 저는 상어와 해골에 대해서는 정보를 알고 갔는데 나비에서 많이 놀랐어요. 처음에 스테인드 글라스인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수많은 박제된 나비라서 허걱 했어요. 파리도 그렇고요.
현대인들이 의학과 약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에는 완전 동의했어요. 신에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절대적인 것은 맞는 것 같기도 하는데 그것들 역시 자본주의의 끝판왕 같아서 암울하기도 해요

가을에 은행잎 노랗게 될 때 같이 삼청동 산책하고 수제비 먹어요.

카리나 2026-06-06 0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좋아요^^
삼청동 수제비먹고,
두번째로 잘하는
단팥죽도 먹으러가요~~ㅎㅎ

페넬로페 2026-06-06 07:35   좋아요 0 | URL
네네.
두번째로 잘하는 단팥죽
기대되는데요.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배우 장미란(한선화 분)은 황동만(구교환 분)의 집에 놀러간다. 술을 마시다 미란은 동만의 작업실에 가본다. 원룸 같은 좁은 집의 베란다 한 구석에 동만은 글을 쓰는 공간을 마련해 두고 있다. 난방도 들어오지 않는 추운 곳이다. 미란은 그곳 책장에서 동만의 형인 황진만(박해준 분)의 시집 <어딘가 묻어 있는 잘못>을 꺼내 읽는다. 무심코 읽던 미란은 눈물을 흘린다. 진만의 시에 위로받은 미란은 위스키(분명 비싼 술일 것 같다)를 사서 진만을 찾아간다. 매번 소주만 마시는 진만에게 미란의 마음이 주는 감사였다.

 

오랜만에 시를 읽었다. 한 때 윤후명 작가의 소설을 거의 다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은 알아도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소설이 쉽지는 않았다. 작가가 영면하신지 1주년이 되었다는 잠자냥 님의 글을 읽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행간과 은유와 상징을 애써 찾아보지 않고 그저 소리내서 읽었다. 그런 것을 알려고 하면 시를 어려워하는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할 것 같았다. 그냥 미란처럼 읽었다. 그러자 나도 미란이 되었다. 글이 이미지가 되고 나는 작가의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강릉과 부산, 부암동, 서촌, 고흐와 테오가 잠든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무덤이 생각났고, 하얼빈, 차마고도, 둔황,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호, 파미르고원, 황하를 상상했다. 시에 윤후명 삶의 궤적이 있었다. 시라는 형식을 빌려와 압축만 시켰지 그냥 나 여기 있소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었다. 시는 그저 짧을 글일 뿐이지, 우주처럼 크고 웅장하다.

 

강릉에서 태어난 윤후명은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빙하의 새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많은 양의 시와 소설을 집필했고, 그림도 그렸다. 작가가 화가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윤후명 시의 주된 키워드는 이다. 더 정확하게는 떠남과 귀환이 한 몸이 되는 길, 멀리 갈수록 자기 자신의 기원과 더 가까워지는 길이다(p.107)'라는 문학평론가 허희의 해설처럼 이 시집에는 여러 장소가 나온다. 작가 자신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새아버지, 친구, 스승, 다른 작가가 지나온 장소이다.

 

1998년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강원도의 힘>을 보고 나의 지인은 우리는 왜 강원도란 말만 들어도 주눅 들며, 지고 마는 걸까?’라며 자조 섞인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듣고 우리는 한참 웃었고 수긍했다. 지금도 난 강원도의 힘을 믿으며 그곳을 좋아한다. 언제 가도 변함없는 산과 바다가 좋다. 윤후명의 고향은 강원도 강릉이다. 이 시집에는 강릉과 연어가 거슬러 올라오는 남대천에 관한 것이 많다. 그에게 강원도는 전쟁, 가난을 거쳐 살아 온, 어머니가 계셨던 삶의 현장이다. 그곳의 모든 것이 작가와 연결된다.

 

나의 시어머니는 투 머치 토커에 해당되는 분이시다. 결혼하고 어머니를 뵐 때마다 어머니는 나에게 쉴새 없이 당신이 살아 온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야기를 들어 줄 새 대상이 생겨 좋으셨나 보다. 어머니의 말씀은 재미있었고, 난 항상 감탄하며 넉넉한 추임새를 넣어 주었다. 시댁 식구들은 강원도에 산 적이 있다. 어머니는 그 시절의 얘기도 많이 들려주셨다. 한 번은 장독을 사러 기차를 타고 장에 다녀왔는데, 집에 돌아와 장독을 보니 거기에 미세한 구멍이 있었다고 했다. 그 당시 어머니가 느꼈을 속상함과 허무함이 시처럼 아득하게 보였다.

 

어머니는 이제 거동도 잘 못하시고, 귀가 안 들려 내가 가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다. 나이 든 시인은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그리워하고, 윤동주, 미당, 목월, 이상과 구보, 동리, 김춘수, 김민기, 박완서, 이미륵을 생각한다. 팔순에 이르렀지만, 아득하고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어디론가 걸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시인과 내 엄마는 떠나고 아직 시어머니는 살아 계신다.


윤후명의 시를 읽으려고 그랬는지 마침 지난주에 부암동에 다녀왔다. ‘오징어 배를 탄 랭보에서 시인은 시를 이해하려고 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p.49)'고 했다.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이 시집이 잘 읽히고 이해되어 시인에게 고맙다. 두둥실 두리둥실을 읽고 나도 오랜만에 사공의 노래를 듣고 따라 불렀다.

 

[풀밭 길

 

풀꽃 핀 풀밭 길로 가고 싶다

노란 꽃, 파란 꽃, 붉은 꽃 흐리게나마 피어

가끔 마주치는 길이기를 바란다

내 발길이 그 옆에 놓여

신발을 벗어놓을 길이기를 바란다

그동안 멀고 먼 길을 걸어왔건만

이건 내 길이라고 할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 험한 길이 모두 이건 내 길이었던가

신발을 벗어놓고 그 길로 들어가고 싶었던 길

비밀의 문이 없어도

아무도 몰래 들어가 언제까지 있어도 좋을

풀밭 길로 가고 싶다

거기서 어디론가 사라져도 좋을

풀밭 길로 가고 싶다

이건 내 길로 어느덧 가고 싶다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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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5-24 2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루가 대장간의 모루더군요.
책으로 삶을 단련하는 사람들을 위한 도서관이더군요.

페넬로페 2026-05-25 01:21   좋아요 0 | URL
시에
‘모루‘가 대장간에서 흔히 본 받침쇠라고 씌여 있어요.
제가 인용은 안했는데
이 시의 제목이 표제작이 된 건 이 시 속에 시인 삶을 관통하는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나에게 비극 읽기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 비극과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작품에 애통함과 절절함, 다수의 죽음이 있어야 비로소 비극으로 인식된다. ‘아서 밀러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은 분명 비극이지만, 내가 읽은 고전에 비해 조금 단순하며 담백한 느낌이 들었다. 쉽게 읽혀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독파할 수 있었다.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감정들과 집착, 그것으로 인해 모든 것이 파멸되는 비극의 전통적 요소가 들어 있었고, 뉴욕 브루클린 노동자 집단의 삶을 통해 장소와 시대가 주는 한계도 잘 녹아 있었다.

 

극에서 비극으로 치닫는 이유는 다양하다. 운명과 예언, 탐욕과 질투, 야망과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 복수 등이다. 보통 이런 이유들과 많은 인물들이 얽혀 극은 절정으로 향한다. 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난 다음에야 잘못된 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비극의 끝은 모두가 파멸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사실 시작은 한 사람의 악마적 욕망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역시 주인공인 <에디 카본>의 성격적 결함이 결정적이다. 특히 여기엔 다른 고전 비극에서 볼 수 있는 조력자나 이간질을 하는 선동자가 전혀 없다. 철저히 에디 카본 스스로 모든 잘못을 하며 그의 심리 변화로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 모두를 고통에 빠뜨린다. 그래서인지 이 희곡은 고대 희랍 비극의 구성을 가져와 코러스 역할을 하는 변호사 <앨피에리>를 등장시킨다. 그는 독백으로 에디의 행동에 대해 설명하고 경고도 하며, 직접 찾아와 호소하는 에디에게 법적으로 해결할 일은 하나도 없다고 냉정하게 말한다. 법은 결과론적 사건에 대해서만 적용될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뉴욕 브루클린 항만 근처인 레드훅이라는, 부두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슬럼가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써진 이 극은 한 인간이 갖는 감정의 변화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준다. 보호와 안전이라는 미명아래 덧씌워진 것은 실제로 질투와 집착의 촘촘한 그물이 되고 그것은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는 아집으로 변형된다. 극도의 가난으로 미국으로 밀항한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 역시 약자에게 주어진 선택 없음을 대변한다. 이 모든 대립과 갈등은 끝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막장을 보여준다. 그래서 코러스 앨피에리는 계속 중간을 강조한다.

 

[앨피에리 : 요즘 우리는 대개 중간쯤에서 타협을 하고 나는 그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거룩하며 나는 그(에디 카본)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그의 죽음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알면서도 전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를 기억할 때 뭔가 삐뚤어지게 순수한 무언가가-순수한 선이 아니라 순수한 그가-생각난다는 걸 고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진실을 온전하게 밝혔고 그래서 나는 모든 지각 있는 의뢰인들보다 그를 더 사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간쯤에서 타협하는 게 훨씬 낫고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일종의경각심을 가지고 그를 애도합니다.

-p.158]

 

앨피에리가 말한 것처럼 에디 카본의 죽음은 정말 허망한가? 에디의 비극은 결국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질투로 일어난 일이다. 오셀로에게는 천하의 악인, 이야고가 있었지만, 에디는 온전히 자신만의 도덕적 결함으로 주위 사람들과 자신을 파괴한다. 어쩌면 자신에게만 순수한 이 남자의 죽음으로써의 결말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이 힘들어 내가 나를 제어할 수 없을 때, 심지어 견딜 수 없는 수치와 모멸감을 느꼈을 때조차, 우리는 언제나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 삶은 내 맘대로 되지 않고, 세상은 나에게 무수히 좌절을 주지만, 비극으로 가지 않는 길은 결국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작가 아서 밀러는 이 희곡에 서문을 첨가했다. 작가의 생각과 관점인 담긴 희곡이 연극으로 상연되었을 때, 그것은 작가의 의도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 무대 장치, 배우가 말하는 방법과 액션의 디테일에 따라 극의 모습과 의미는 무수히 달라질 수 있다. 아서 밀러는 서문에서 그것을 인정한 듯하다.

 

[에디는 여전히 눈물의 대상이 되는 남자는 아니다. 이 극은 관객을 눈물바다에 빠뜨리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행동을 우리의 행동과 연관시키고, 우리 자신을 고립된 심리적 개체로서뿐 아니라 우리의 동료나 과거와 연결된 존재로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p.11, 작가 서문 중에서.]


오랜만에 혼자 연극을 보고 왔다.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된 국립극단의 <그의 어머니(Mother of Him)>이다. 영국 극작가 에반 플레이시의 희곡인데 국내에 아직 책으로 번역되어 있지는 않다.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처럼 이 극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이 기승전결의 성격을 뛴다면 그의 어머니는 사건의 결과를 먼저 말해주고 시작한다.

 

브렌다의 장남인 매튜(미성년자)는 하룻밤 사이 세 여자를 강간한다. 연극은 이 엄청난 사건 후, 가택연금 중인 매튜와 그와 같은 공간에서 살아야하는 엄마 브렌다, 동생 제이슨의 일상에서 시작된다. 집 앞에는 엄청난 취재진들이 몰려와있다. 매튜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사건의 원인은 매튜와 브렌다가 아닌 기자들에 의해 파헤쳐진다.

 

그들은 점점 매튜보다 브렌다에게 초점을 맞춘다. 브렌다를 아는 모든 사람을 인터뷰해 과거에 그녀가 했던 말까지 가져와, 사건의 원인을 브렌다에게로 가져간다. 점점 지쳐가는 브렌다는 엄마로서 매튜를 지켜야하지만 실제 감정은 싸늘하게 식어간다. 또한 둘째 아들인 제이슨을 보호하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키워내야 하기에 그를 구속하고 매튜와 연결되지 않게 한다. 차가워지고 상실감에 빠진 브렌다는 매튜를 변호사에게만 맡겨두지만, 결국 마지막에 용기를 내어 매튜와 함께 법정에 출석한다.

 

연극을 보는 내내 브렌다의 입장이 되었다. 답답했고, 벽이 느껴졌다. 도대체 세상은 왜 그렇게 엄마라는 존재에게 온갖 부담을 주는지 잘 모르겠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아이를 성장시키지 않는가? 아이의 모든 것의 결과의 원인은 왜 항상 엄마인지.....만약 내가 매튜의 엄마였다면 난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룻밤에 세 여자를 강간한 매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에디 카본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원인을 분석해야하는지도 모른다. , 영화, 뉴스, 연극에서 파헤쳐지는 인간의 모순과 딜레마는 다양해 그것의 해석 역시 어렵다. 이런 이유로 비극은 한 없이 재생되고 우리는 힘들게 그 속에 들어가 또 다른 감정을 작동시킨다

비록 그것이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처럼 흐릿하고 주관적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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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6-05-04 06: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매달 한두 번 대학로에 가면, 보고 싶은 공연들을 많이 마주치게 돼요. 페넬로페님은 이미 알고 계실 수 있겠지만, 대학로에 희곡 전문 서점 <인스크립트>가 있어요. 서점을 운영하는 젊은 부부 배우님이 있는데, 지난주 토요일에 남편 배우님이 나오는 공연을 보고 왔어요. 다음에 대학로에 공연 보러 오시면 <인스크립트> 방문해 보세요. 희곡 도서들이 많이 있어요. ^^

페넬로페 2026-05-04 08:55   좋아요 2 | URL
<인스크립트>
기억해 놓았다가
꼭 들러보겠습니다.

감은빛 2026-05-05 09: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삶도 뜻하지 않게 마주치는 별 것도 아닌 작은 계기로 희극이 되기도 하고 비극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상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페넬로페 2026-05-05 09:51   좋아요 2 | URL
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욕망과 집착을 조금만 줄이면 되는데 그게 또 잘 안되는 것이 인간이잖아요.

청아 2026-05-05 13: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은 종종 연극을 보러 다녀요. 확실히 공연장에서 받는 에너지는 여타 장르와 다른 것 같아요.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읽어보고 싶네요. 역시 중용을 추구해야 하는 거죠? ㅎㅎ-집착에서 벗어나고자 늘 애?는 쓰는 청아가^^

페넬로페 2026-05-05 17:11   좋아요 3 | URL
중용을 추구해야 하는데, 그걸 행하기 어려워 여전히 책을 읽고 도를 닦는 중이예요. 돌아서면 까 먹으니 차에 기름 넣듯 계속 책을 읽어야 하는가 봐요 ㅎㅎ
 













그때 왜 헌인릉에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딸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거기에 갔었다. 초여름 경이었고, 난 헌인릉의 존재도 몰랐으니 아마 남편이 가자고 했을 것이다. 지금은 왕릉의 모습보다 사람이 없는 고즈넉한 곳에서 유모차를 밀고 천천히 산책한 기억만 남아 있다. 왕이든, 속인이든, 죽음 앞에서는 언제나 무기력하고 쓸쓸함만 남는다. 그런 곳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아이를 데리고 우리는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 무심코 세월이 흘러버렸다.

 

책을 읽다 책에 나온 어떤 단어에 마음을 뺏길 때가 있다. 성해나 작가의 경장편인 두고 온 여름에서 두고 온이라는 말과 인릉이라는 단어에 생각이 그만 책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내 인생에서 두고 온 것들이 얼마나 많을지, 거기에 있을 수많은 내가 그리웠다.

 

사진관을 운영했던 기하의 아버지는 인릉으로 자주 출사를 갔다. (소설에서 왜 헌인릉이라 하지 않고 인릉이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는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사진기로 보는 피사체는 이미 시작부터 왜곡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도 사진에는 완벽히 담길 수 없다. 소설의 등장인물인 기하와 재하는 사진기 안에서만 존재하는 피사체처럼 서로를 담고 싶은 모습과 크기로만 볼 수 있는 관계다.

 

기억도 못할 만큼 일찍 어머니를 잃은 기하는 아버지와 둘이 산다. 그가 19살일 때 아버지는 아들이 있는 여자를 만나고 그들은 같이 살기 시작한다. 생각지도 않은 다른 가족이 나타나 기하는 겉돌기 시작한다. 반면 새어머니의 아들인 재하는 기하와 아버지를 잘 따른다. 4년간 함께 살았지만 기하는 끝까지 새어머니와 재하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 항상 그들에게 날 선 감정을 내보인다.

 

두 가족의 결합은 여태껏 살아온 방식에 균열이 일어나는 일이고, 자연스러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당연히 내 아이에게 사랑이 많이 가는 것임에도 아버지는 재하를, 새어머니는 기하를 먼저 배려하고 눈치를 보게 된다. 이런 것에 기하는 아버지에게는 섭섭함을, 새어머니에게는 부담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서먹하고 어색하지만 가족이기에 그들은 같이 사진을 찍고, 밥을 먹고, 서로에게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들이 인릉으로 나들이 간 날, 아버지가 재하에게 보인 다정함에 기하의 마음은 완전히 닫히고 만다. 새어머니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끊긴 마음은 이어지지 않는다. 기하가 대학에 들어가 기숙사로 나가고 세 사람이 살 때, 셋은 다시 인릉으로 간다. 거기서 거대한 사슴 떼가 지나가는 모습을 환상처럼 보고 셋이서 사진을 찍는다. 박복한 사람에겐 늘 그렇듯 재하 친아버지의 횡포로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헤어지고, 재하의 삶은 잘 풀리지 않는다. 차갑게만 굴고 정을 주지 않던 기하도 마찬가지다.

 

서른일곱이 된 기하는 스트리트 뷰를 보다 재하 모자를 우연히 발견해 재하를 찾아간다. 많은 세월이 지나 그들에게는 남들보다 더한 인생의 무게가 씌워져 있었고,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한다. 내세우고 싶은 것도, 공통된 화제도 없다. 서먹함으로 헤어질 찰나 재하는 기하에게 인릉에 가보자고 한다. 인릉은 그들에게 과거를 공유할 수 있는 장소였다. 생각과 입장이 달랐지만 가족이라는 모습으로 같이 추억을 만든 곳이었다. 끝까지 인릉을 인조의 능이라고 착각했고, 민망했지만 둘이 같이 사진을 찍었다. 앞으로 기하와 재하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둘은 그들이 가족이었을 때를 그리워 할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나도 기하처럼 남에게 상처준 일이 많았다. 지금에야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날을 세웠는지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소설 속 기하를 보며 안타까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때의 나 또한 나였고, 기하 역시 그 때의 기하였다. 그 한 때에 두고 온 것이 아쉽고 그리운 건 그때의 나를 바라보며 측은함을 느껴서일지도 모르겠다. 기하와 재하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옥춘당 조각을 집어 입안에 넣었다. 달고 화한 맛이 혀끝부터 천천히 퍼졌다. 입안에서 사탕 조각을 굴리며 내가 왜 이곳에 왔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재하에게 해주어야 했을 말들을 뒤늦게나마 중얼대보았다. 잘 지냈니, 보고 싶었어. 잘 지냈으면 좋겠다, 미안해 같은 평범하고도 어려운 말들. 이제 와 전송하기에는 늦어버린, 무용한 말들을. -p.131]

 

 

소설 두고 온 여름을 읽으며 헌인릉에 꼭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딸아이가 어릴 때 다녀왔던 곳을 먼 훗날 다시 다녀 온 기하와 재하처럼 나도 가고 싶었다. 친구 카리나 님께 같이 가자고 했다. 성해나 작가의 소설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를 읽고 민주화운동기념관을 가고 싶어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카리나 님이 그 소설을 읽었는데 이번에도 나를 위해 <두고 온 여름>을 급하게 읽으셨다. 소설에 언급된 장소에 가면 그 곳 자체도 좋지만 거기에서 소설 속 얘기를 할 수 있어 더 좋고 아름답다.

 

평일 오전의 헌인릉은 한적했다. 거의 우리 둘 만 있었다. 봄이 한창인 그곳엔 벚꽃을 비롯한 여러 꽃이 피어 있었다. 갑자기 꽃샘추위가 오는 바람에 소나무 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가 웅장했다. 소설 속에 들어있는 홍살문오리나무가 단연 먼저 눈에 띄었다.


[인릉은 아버지가 즐겨찾는 출사지였다. 울창한 오리나무숲이 봉분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 풍경이 계절마다, 순간마다 달랐다. -p.32

아버지는 능 한편에 서 있는 오리나무를 가리켰다. 우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선퇴가 줄기에 붙어 있었다. 선퇴를 톡 건드리자 나뭇잎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p.34]

 

오리라는 단어에서 처음엔 동물 오리가 연상되었는데, 직접 본 오리나무의 키가 워낙 커 오리(五里)가 거리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가에 이정표 삼아 5리마다 심었다고 해서 오리나무라고 한다.


[숲길을 지나 능에 다다랐을 즈음, 아버지가 불현듯 홍살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돌길을 뷰파인더로 유심히 들여다본 뒤 허공에 포커스를 맞추고 몇차례 셔터를 눌렀다.

산자도 망자도 이 문으로 드나든댄다. 보이냐 너희도? -p.33]

 

정문으로 들어가면 인릉의 홍살문이 있다. 문을 지나 능을 보기 위해 위쪽으로 올라갔지만 길이 없어 그만 잔디를 밟고 능 앞으로 가고 말았다. 왕릉이 있는 곳이라 당연히 능을 볼 수 있을줄 알았고 뒤늦게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푯말을 보게 되었다. 인릉은 인조가 아닌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으로 봉분이 하나이다. 헌릉은 조금 안쪽으로 산책길을 따라 들어가면 있다. 이곳 역시 능 앞으로 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것 같아 우리는 홍살문에서 멀리 있는 능을 봐야만 했다.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이 따로 있어 봉분이 두 개이다.

 

헌인릉 바로 옆에 큰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 앞에는 철제로 된 바리게이트가 촘촘히 있었다. 바리게이트는 지그재그로 서 있었고 그 건물에서 나오는 자동차는 미로를 빠져 나오는 것처럼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저 건물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저렇게 첩첩이 바리게이트를 쳐 놓았는지 궁금했다. 집에 와 검색해보니 그 건물은 말로만 듣던 국가정보원이었다. 인릉이 국정원과 바로 붙어 있어 인릉 앞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인릉 앞까지 가 사진을 찍었으니 국정원에 잡혀 갈지도 모르겠다.


-하늘에서 본 헌릉 능침, p.232, 왕릉 가는 길, 신정일, 쌤엔파커스


-인릉 능침 정면,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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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6-04-10 07: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글 읽다가 괜히 제 ‘두고 온 여름’ 같은 기억 하나 꺼내보게 됐어요. 아마 다들 하나쯤은 그런 시간과 사람이 있겠죠.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데, 가끔은 그때의 나를 다시 마주하고 싶은 순간이요. 아니면, 꼭 마주하고 싶은 건 아닌데 괜히 마음만 복잡해지는 순간들이기도 하고요.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가까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끝내 다 담지 못하는 관계일수록 결국 말 한마디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늦게 떠오르는 말들이 오래 남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렇게 글로 헌인릉의 한적한 고요함까지 느끼게 해주셨으니… 다행히(?) 안 붙잡혀가신 걸로 해야겠네요 ㅎㅎ

페넬로페 2026-04-10 08:16   좋아요 2 | URL
곰돌이님 말씀이 제가 이 글에 쓰고 싶은 말 전부입니다. 책을 읽다 생각이 많아지면 오히려 리뷰 쓰기가 힘들어지더라고요. 할 말은 많은데 그게 정리가 잘 안돼서요. 살아오면서 ‘두고 온 여름‘이 얼마나 많은지, 그 생각에 잠겨 자꾸 소설 읽다가 딴 생각했어요. 그때의 미숙했던 내가 싫은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도 지금부터라도 위에 인용한 문장에 들어 있는 평범한 말들을 꼭 하며 살고 싶어요.
헌인릉에 다시 가 봐 좋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행히 ㅎㅎ

책읽는나무 2026-04-10 12: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그곳을 한 번 찾아가보는 것은 나름의 정취와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나 과거 가족과의 추억이 깃든 장소라면 더 특별할 것 같구요.
앞서 혼모노와 페넬로페 님의 리뷰가 늘 같이 떠오르는데 이번에 이 책도 또 페넬로페 님의 리뷰 사진과 사연들이 또 떠오를 것 같아요.
성해나 작가는 곧 페넬로페 님. 제겐 그리 기억될 것 같습니다.ㅋㅋㅋㅋ
늘 리뷰를 통해 성해나 작가의 소설의 분위기를 미리 느껴보게 되네요.
잘 읽고 갑니다.^^

페넬로페 2026-04-10 16:36   좋아요 2 | URL
우연히 성해나 작가님 책을 연속적으로 읽고 가고 싶은 곳이 생겼어요 ㅎㅎ
특히 인릉은 오래 전 다녀온 곳이라 한 번 더 가보고 싶었어요. 책나무님 말씀처럼 헌인릉 둘러보면서 책에 나온 여러 문장이 생각나더라고요. 같이 간 친구와 짧은 독서토론도 했어요.
밀리의 서재의 리딩 케미스트리에서 성해나 작가님이 자신의 소설에 대해 리뷰 써주는 독자에게 고맙다고 하셨는데 제가 그 독자에 해당되면 좋겠습니다.

잉크냄새 2026-04-10 2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책 속에 나온 곳을 찾아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한번쯤 따라하고픈 멋진 추억일 듯 합니다.

페넬로페 2026-04-10 23:10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소설 속 이야기들이 더 깊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도 생각나고요. 그들 입장이 되어 그때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이해도 해봅니다. 고즈넉하니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 좋은 추억 만들고 왔어요.

독서괭 2026-04-11 1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헌인릉이 어딘가 찾아봤어요. 서초구에 있군요?! 사진이 아름답네요.
두고 온 것들을 떠올리신 걸 보다보니 <사라진 것들> 책도 생각나네요. 내 인생에서 두고온 것들.. ㅜㅜ

페넬로페 2026-04-12 17:52   좋아요 2 | URL
헌인릉은 서초구에서도 아주 한적한 곳에 있어 조용해서 좋더라고요. 독서괭님께서 두고 온 것들은 무엇일까요? 궁금합니다.
 















TV 프로그램 중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것이 있다. 재미있어서 내가 자주 시청하는 프로그램이다. 2명의 게스트를 초대해, 그들 집의 냉장고 속 재료를 스튜디오에 그대로 가져와 그들이 원하는 요리를 15분 만에 셰프 들이 뚝딱 만들어내야 하는 미션이 주어지는 내용이다. 그 중 중식요리를 전공한 셰프 들이 중국 요리를 만드는 방식에는 항상 비슷한 법칙이 있다. 일단 재료 손질을 먼저, 완벽히 하고 나서 나중에 불 쇼를 하며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벽돌책으로 분류되는 고전 읽기도 중국 요리를 준비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보통 고전이라 알려진 작품을 읽을 땐 처음 50페이지나 100페이지 정도는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 본격적으로 중요한 사건(요리)이 나오기 전 작가들은 지루하고도 끈질기게 독자들에게 재료 준비하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그러다 불 쇼가 진행되면 그제서야 독자들은 기다려온 보람을 느낀다. 고전이란 언제나 읽다 지칠만할 때가 되어서야 진가가 발휘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도 당연히 그런 고전의 법칙이 적용된다. 한 명씩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설명만 있을 뿐 1권이 끝나도록 그럴듯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계속 뭔가를 추측하게만 한다. 내가 뭔가 잘못 읽었거나 번역의 문제인가 싶어 다른 출판사 버전으로 다시 읽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민음사판 1권과 열린책들판 상은 주요 인물인 니콜라이와 표트르의 동시 등장으로 그냥 끝나버린다. 아마 2,3권에 중요한 사건이 집중되어 있을 것이다.

 

대작가 도스토옙스키는 이 초반 부분에 엄청 공을 들여 차례로 나오는 등장인물에 따라 문체와 어투를 달리한다. 스테판과 바르바라의 에피소드에서는 이제껏 읽은 도작가의 다른 작품에 비해 엄청 가볍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꽉 차 있으므로 작품의 내용에 대해 얘기하기가 너무 어렵다. 뭔가 짧게 요약하기가 힘들다. 도작가의 작품은 그저 묵묵히, 반복해서 읽어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1800년대 중반 러시아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사상적 혼란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하고 왕위를 물러 받은 그의 동생인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 날 여러 파벌의 혁명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2월에 반란이 일어났기에 이 사건은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명명되었다. 러시아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모든 것이 뒤처진 상태였는데 당시 젊은 지식인이나 장교들은 강력한 개혁과 자유의 필요성을 체감하고 있었다. 니콜라이 1세는 이들을 진압하고, 이 사건에 놀라 극도의 보수주의자가 되어 자유사상을 탄압했다. 도스토옙스키가 1849년부터 참가한 공상적 사회주의의 경향의 페트라쎕스키 모임에서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은 시기도 니콜라이 1세 때였다.

 

도스토옙스키가 악령을 집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세르게이 네차예프(1847~1882) 사건>이었다. 여러 급진 사상을 접한 니힐리스트 네차예프는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제네바로 가 바쿠닌을 만난다. 그의 영향을 받은 네차예프는 러시아로 돌아와 혁명 조직을 결성한다. 급진주의자인 네차예프는 폭력 적이었고 살인마저 저질러 체포되고, 이 일은 러시아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악령은 이 사건을 토대로 여진 작품이다. 악령에서의 혁명가들은 모두 니힐리스트였고 도스토옙스키는 그런 그들을 비판하고자 이 소설을 썼다. 그러므로 악령은 작가의 정치소설이다.


[본래 니힐리즘은 19세기 러시아의 극도로 반동적이고 압제적인 현실에서 파생되었던 일종의 자유사상이었다. 이 자유사상, 즉 니힐리즘은 유물론과 개인주의라는 두 개의 사상에 기반했고 그것을 극한으로 추구했다. 니힐리스트들은 유물론자로서 모든 종교, 미신, 형이상학 등 물질적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무언가, 과학으로 분석되지 않은 것, 실질적인 유용성을 가지지 않은 것을 부정했다. 한편으로 개인주의자로서 그들은 완전한 개인의 자유를 위하여 개인에게 부과된 전통을 부정했다....이 니힐리즘이 오늘날 떠올리는 음울한 극단적 혁명이론으로 각인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네차예프라는 인물의 역할이다. 제정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조차 네차예프를 상종 못할 인간으로 간주했다.

-네이버 나무위키에서 발췌]


 

악령은 안톤 라브렌티예비치라는 화자의 연대기적 기술로 진행된다. 아버지 세대를 대표하는 스테판과 바르바라, 아들 세대를 대표하는 니콜라이와 표트르의 대립적 구조로 여러 사건이 얽힌다. 인물 하나하나가 새롭게 등장하며 각자가 가진 캐릭터가 독자를 긴장시키고 나중에 일어날 사건에 대해 추측하게 한다. ‘어떤 도시에서 최근에 일어난 그토록 이상한 사건을 기술(p.13)' 하기 위해 2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상세히 설명한다. 연대기의 서론에 해당하는 것은 20년 동안 계속된 스테판 베르호벤스키와 바르바라 스타브로기나 사이의 미묘하고도 복잡한 관계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친구이자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다. 친구이지만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고 평생 그렇게 살면서도 헤어질 수는 없는(p.24)’ 사이로 뒤엉켜 지금은 영지를 소유한 돈 많은 바르바라가 스테판을 지켜주고 유모처럼 보살피고 있다.

 

<니콜라이 스타브로긴>은 바르바라의 외아들이다. 스테판 트로피모보치는 니콜라이의 교육자로 처음 이곳에 왔다. 바르바라는 스테판에게 니콜라이의 교육을 위임했지만 아들에 대한 관심은 지나칠 정도였고 그것을 니콜라이는 병적일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병약하고 조용하고 생각에 골몰하는열 여섯이 되었을 때 다른 도시로 공부하러 간다. 그 뒤 군대에 들어가지만 그때부터 니콜라이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에 나오는 해리 왕자와 비슷한 행동을 해 그 이름이 별명이 되었다. 니콜라이는 방탕해지고 괜한 시비를 일삼고, 여러 번의 결투로 사람을 죽이고 불구로 만들어 재판까지 회부된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사회의 인간쓰레기들과 살고 뒷골목을 전전한다. 소문과는 다르게 교양있고 지식을 갖춘, 잘 생기고 우아하며 단정한 신사로 고향에 돌아 온 니콜라이는 야수처럼 이상한 행동을 한다.


[우리의 왕자는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여러 인물에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두세 가지 뻔뻔스러운 짓을 저질렀는데, 중요한 것은 그 뻔뻔스러운 짓이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것, 그 어떤 것과도 닮지 않은 것, 흔히 통용되는 것이 전혀 아닌, 완전히 걸레짝 같고 어린애 같은 짓, 도무지 목적도, 동기도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그래도 나중에는 그가 이런 행동을 하던 그 순간에 꼭 미친 것처럼거의 생각에 빠진 모습이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그가 이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잘 이해했으되 당황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일말의 후회도 없이악의에 찬 즐거운 미소를 짓던 두 번째 순간만을 열렬히 기억할 뿐이었다-p.77~78]


 

사람들은 니콜라이를 증오하고 미워한다. 어떤 이유에선지 바르바라는 이러한 일을 예상하고 있었으며 드디어 시작됐구나라고 생각한다. 간교하고 냉소적인, 때론 섬망 상태의 니콜라는 병원에 입원하고 회복 후에 삼 년 정도 여행을 다녀 점점 잊힌 존재가 된다.

 

스테판은 아들 표트르를 그동안 두 번 보았는데 한 번은 태어났을 때고 두 번째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대학에 입학하려고 준비할 때였다. 표트르는 바르바라가 대 주는 생활비로 이모들 손에서 자랐다. 금발에 괴짜 같기도 하지만 예의범절이 훌륭하고 자기 확신에 찬 사람으로 스테판에게 돌아온 표트르는 아직은 신비로운 사람이다. 그에 대한 설명에 어쩐지라는 말이 계속 따라 붙는다.


[그는 다급히, 성급히 말하지만 동시에 자기 확신에 차 있고 말이 막히는 일도 없다. 그의 생각은 성급한 듯 보여도 실은 침착하고 분명하며 단정적인데 특히 이 점이 두드러진다. 그의 발음은 놀라울 정도로 또렷하다. 그의 단어는 언제나 당신의 비위에 맞게 선별되고 준비된 것으로 고르고 굵은 밀알처럼 흩뿌려진다. 처음에는 이것이 마음에 들겠지만 나중에는 바로 이 너무 또렷한 발음 때문에, 또 영원토록 준비된 구슬 같은 말 때문에 오히려 혐오스러워진다. 어쩐지 입속에 든 그의 혀가 어쩐지 특별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어쩐지 이례적으로 길고 가늘며 끔찍이도 붉고 혀끝이 굉장히 뾰족하며 저도 모르게 끊임없이 날름거린다는 생각이 어쩐지 들게 한다-p.305]


 

니콜라이와 표트르, 바르바라의 친구인 프라스코비야 부인과 그녀의 딸 리자베타, 새 도지사인 렘브케와 그의 아내 율리아가 이 도시로 들어오고, 퇴역 대위이자 주정뱅이인 레뱌드킨의 동생 마리야와 니콜라이의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 이 연대기의 진짜 시작이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책의 제사로 4대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마귀에 대한 것을 인용한다. 사람 속에 들어있던 마귀는 예수에게 자기들을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예수가 허락하자 마귀 떼는 돼지 속으로 들어가 모두 호수로 가서 빠져죽는다. 이렇게 예수는 마귀 들린 사람을 낫게 했다. 악령은 이 구절의 마귀와 뜻이 같다. 악령의 등장인물들에게는 다 마귀가 들어있는 듯하다. 예수같이 이들을 구해줄 것은 무엇이며, 그들 속에 있던 악령은 어디로 갈 것인지 다음 내용이 기대된다.



 

 

 









매핑 도스토옙스키는 제목 그대로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삶을 따라 그가 살았던 곳과 거기서 집필된 작품을 따라가는 연대기적 매핑(mapping)이다. 오랫동안 러시아 문학, 특히 도스토옙스키를 연구한 석영중 교수가 직접 그의 길을 따라 가며 서술한 책이라 더 깊이있고 볼거리가 많다. 신문에 연재되어서인지 글이 쉬워 읽기에 좋다.

 

1867년 재혼한 도스토옙스키는 부인 안나와 함께 유럽으로 떠난다. 주변의 버거운 사람들로부터의 탈출이었다. 43개월 동안 여러 도시를 떠돌며 산 작가는 타국에서 백치악령을 완성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드레스덴에서 자신의 세 번째 장편소설인 악령을 집필했다. ‘1860년대 러시아에서 니힐리스트란 모든 사상, 모든 의미, 모든 권위, 모든 도덕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급진주의자를 지칭한다(p.335).' 외국에 있으면서도 러시아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가지고 있던 작가는 네차예프 사건에 충격을 받고 그것을 계기로 정치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악령의 표트르는 네차예프가 모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악령에서 니힐리스트의 폭력을 고발하면서도 더 나아가 인간 본성과 자신을 포함한 아버지 세대의 무책임에 대한 반성을 한다.


[그가 네차예프 사건에서 파헤친 것은 특정 사상의 문제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인간 본성의 문제였다. 그는 인간 본성의 심연에 뿌리 내린 권력 의지를 끄집어내서 하나의 인간 유형을 창조했다. 그는 네차예프를 광신자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멍청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표트르로 <재탄생한> 네차예프는 인간의 권력 의지를 증폭시켜 보여 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정치 소설로 기획된 작품은 결국 철학 소설로 굳어졌다. -p.339

카뮈는 악령이 도스토옙스키 작품 중 가장 예언적인 작품이라 상찬했다....악령은 분명 테러리즘을 예고한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소설에서 당대 현실과 미래에 대한 우려뿐 아니라 과거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p.342]


 

-p.336, 세르게이 네차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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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3-21 2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참 적절한 비유입니다. 고전을 읽어보려하는데 매번 재료 손질만 하다가 웍 한번 못 돌려보고 포기하는 경우가 자주 생깁니다. 완성된 요리가 아닌 ‘이 음식 맛이 없을거야‘ 라는 자기 합리화로 마무리 합니다. 고전은 인내심이 필요하더군요. ㅎㅎ

페넬로페 2026-03-21 21:10   좋아요 1 | URL
혼자 완독하기 힘들어,
주로 고전만 읽는 도서관 독서 동아리에 참여하여 읽고 있어요. 아무래도 동아리에 참여하면 의무적으로 완독은 해야하기에 숙제처럼 읽고 있습니다. 고전은 그 책에서 주는 의미도 좋지만 계속 고전을 읽음으로써 다른 책으로의 사다리가 되어 주는 점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마힐 2026-03-21 2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몇 일전 유튜브 ‘일당백‘에 도스토옙스키의 우리나라 전도사라는 분의 ‘도선생님‘ 작품 세계에 대해 재미있게 들었어요. 도선생의 작품중 ‘백치‘ 가 끌려 알라딘 장바구니에 저장을 일단 했어요. ^^ 악령 소개도 했는데 페넬로페님 올리신 글 참고하고 전 좀 더 내공이 쌓이면 도전해야 될 것 같습니다. ^^

페넬로페 2026-03-21 23:32   좋아요 1 | URL
저도 그 유튜브 방송 들었어요. 도스토옙스키 작가의 책 모두 완독하는게 목표인데 저도 기회되면 백치 읽으려고 합니다. 악령 2, 3권도 열심히 읽고 리뷰 올려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