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비극 읽기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 비극과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작품에 애통함과 절절함, 다수의 죽음이 있어야 비로소 비극으로 인식된다. ‘아서 밀러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은 분명 비극이지만, 내가 읽은 고전에 비해 조금 단순하며 담백한 느낌이 들었다. 쉽게 읽혀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독파할 수 있었다.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감정들과 집착, 그것으로 인해 모든 것이 파멸되는 비극의 전통적 요소가 들어 있었고, 뉴욕 브루클린 노동자 집단의 삶을 통해 장소와 시대가 주는 한계도 잘 녹아 있었다.

 

극에서 비극으로 치닫는 이유는 다양하다. 운명과 예언, 탐욕과 질투, 야망과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 복수 등이다. 보통 이런 이유들과 많은 인물들이 얽혀 극은 절정으로 향한다. 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난 다음에야 잘못된 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비극의 끝은 모두가 파멸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사실 시작은 한 사람의 악마적 욕망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역시 주인공인 <에디 카본>의 성격적 결함이 결정적이다. 특히 여기엔 다른 고전 비극에서 볼 수 있는 조력자나 이간질을 하는 선동자가 전혀 없다. 철저히 에디 카본 스스로 모든 잘못을 하며 그의 심리 변화로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 모두를 고통에 빠뜨린다. 그래서인지 이 희곡은 고대 희랍 비극의 구성을 가져와 코러스 역할을 하는 변호사 <앨피에리>를 등장시킨다. 그는 독백으로 에디의 행동에 대해 설명하고 경고도 하며, 직접 찾아와 호소하는 에디에게 법적으로 해결할 일은 하나도 없다고 냉정하게 말한다. 법은 결과론적 사건에 대해서만 적용될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뉴욕 브루클린 항만 근처인 레드훅이라는, 부두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슬럼가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써진 이 극은 한 인간이 갖는 감정의 변화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준다. 보호와 안전이라는 미명아래 덧씌워진 것은 실제로 질투와 집착의 촘촘한 그물이 되고 그것은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는 아집으로 변형된다. 극도의 가난으로 미국으로 밀항한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 역시 약자에게 주어진 선택 없음을 대변한다. 이 모든 대립과 갈등은 끝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막장을 보여준다. 그래서 코러스 앨피에리는 계속 중간을 강조한다.

 

[앨피에리 : 요즘 우리는 대개 중간쯤에서 타협을 하고 나는 그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거룩하며 나는 그(에디 카본)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그의 죽음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알면서도 전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를 기억할 때 뭔가 삐뚤어지게 순수한 무언가가-순수한 선이 아니라 순수한 그가-생각난다는 걸 고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진실을 온전하게 밝혔고 그래서 나는 모든 지각 있는 의뢰인들보다 그를 더 사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간쯤에서 타협하는 게 훨씬 낫고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일종의경각심을 가지고 그를 애도합니다.

-p.158]

 

앨피에리가 말한 것처럼 에디 카본의 죽음은 정말 허망한가? 에디의 비극은 결국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질투로 일어난 일이다. 오셀로에게는 천하의 악인, 이야고가 있었지만, 에디는 온전히 자신만의 도덕적 결함으로 주위 사람들과 자신을 파괴한다. 어쩌면 자신에게만 순수한 이 남자의 죽음으로써의 결말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이 힘들어 내가 나를 제어할 수 없을 때, 심지어 견딜 수 없는 수치와 모멸감을 느꼈을 때조차, 우리는 언제나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 삶은 내 맘대로 되지 않고, 세상은 나에게 무수히 좌절을 주지만, 비극으로 가지 않는 길은 결국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작가 아서 밀러는 이 희곡에 서문을 첨가했다. 작가의 생각과 관점인 담긴 희곡이 연극으로 상연되었을 때, 그것은 작가의 의도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 무대 장치, 배우가 말하는 방법과 액션의 디테일에 따라 극의 모습과 의미는 무수히 달라질 수 있다. 아서 밀러는 서문에서 그것을 인정한 듯하다.

 

[에디는 여전히 눈물의 대상이 되는 남자는 아니다. 이 극은 관객을 눈물바다에 빠뜨리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행동을 우리의 행동과 연관시키고, 우리 자신을 고립된 심리적 개체로서뿐 아니라 우리의 동료나 과거와 연결된 존재로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p.11, 작가 서문 중에서.]


오랜만에 혼자 연극을 보고 왔다.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된 국립극단의 <그의 어머니(Mother of Him)>이다. 영국 극작가 에반 플레이시의 희곡인데 국내에 아직 책으로 번역되어 있지는 않다.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처럼 이 극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이 기승전결의 성격을 뛴다면 그의 어머니는 사건의 결과를 먼저 말해주고 시작한다.

 

브렌다의 장남인 매튜(미성년자)는 하룻밤 사이 세 여자를 강간한다. 연극은 이 엄청난 사건 후, 가택연금 중인 매튜와 그와 같은 공간에서 살아야하는 엄마 브렌다, 동생 제이슨의 일상에서 시작된다. 집 앞에는 엄청난 취재진들이 몰려와있다. 매튜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사건의 원인은 매튜와 브렌다가 아닌 기자들에 의해 파헤쳐진다.

 

그들은 점점 매튜보다 브렌다에게 초점을 맞춘다. 브렌다를 아는 모든 사람을 인터뷰해 과거에 그녀가 했던 말까지 가져와, 사건의 원인을 브렌다에게로 가져간다. 점점 지쳐가는 브렌다는 엄마로서 매튜를 지켜야하지만 실제 감정은 싸늘하게 식어간다. 또한 둘째 아들인 제이슨을 보호하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키워내야 하기에 그를 구속하고 매튜와 연결되지 않게 한다. 차가워지고 상실감에 빠진 브렌다는 매튜를 변호사에게만 맡겨두지만, 결국 마지막에 용기를 내어 매튜와 함께 법정에 출석한다.

 

연극을 보는 내내 브렌다의 입장이 되었다. 답답했고, 벽이 느껴졌다. 도대체 세상은 왜 그렇게 엄마라는 존재에게 온갖 부담을 주는지 잘 모르겠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아이를 성장시키지 않는가? 아이의 모든 것의 결과의 원인은 왜 항상 엄마인지.....만약 내가 매튜의 엄마였다면 난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룻밤에 세 여자를 강간한 매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에디 카본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원인을 분석해야하는지도 모른다. , 영화, 뉴스, 연극에서 파헤쳐지는 인간의 모순과 딜레마는 다양해 그것의 해석 역시 어렵다. 이런 이유로 비극은 한 없이 재생되고 우리는 힘들게 그 속에 들어가 또 다른 감정을 작동시킨다

비록 그것이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처럼 흐릿하고 주관적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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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6-05-04 06: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매달 한두 번 대학로에 가면, 보고 싶은 공연들을 많이 마주치게 돼요. 페넬로페님은 이미 알고 계실 수 있겠지만, 대학로에 희곡 전문 서점 <인스크립트>가 있어요. 서점을 운영하는 젊은 부부 배우님이 있는데, 지난주 토요일에 남편 배우님이 나오는 공연을 보고 왔어요. 다음에 대학로에 공연 보러 오시면 <인스크립트> 방문해 보세요. 희곡 도서들이 많이 있어요. ^^

페넬로페 2026-05-04 08:55   좋아요 1 | URL
<인스크립트>
기억해 놓았다가
꼭 들러보겠습니다.

감은빛 2026-05-05 09: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삶도 뜻하지 않게 마주치는 별 것도 아닌 작은 계기로 희극이 되기도 하고 비극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상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페넬로페 2026-05-05 09:51   좋아요 1 | URL
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욕망과 집착을 조금만 줄이면 되는데 그게 또 잘 안되는 것이 인간이잖아요.

청아 2026-05-05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은 종종 연극을 보러 다녀요. 확실히 공연장에서 받는 에너지는 여타 장르와 다른 것 같아요.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읽어보고 싶네요. 역시 중용을 추구해야 하는 거죠? ㅎㅎ-집착에서 벗어나고자 늘 애?는 쓰는 청아가^^

페넬로페 2026-05-05 17:11   좋아요 1 | URL
중용을 추구해야 하는데, 그걸 행하기 어려워 여전히 책을 읽고 도를 닦는 중이예요. 돌아서면 까 먹으니 차에 기름 넣듯 계속 책을 읽어야 하는가 봐요 ㅎㅎ
 













그때 왜 헌인릉에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딸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거기에 갔었다. 초여름 경이었고, 난 헌인릉의 존재도 몰랐으니 아마 남편이 가자고 했을 것이다. 지금은 왕릉의 모습보다 사람이 없는 고즈넉한 곳에서 유모차를 밀고 천천히 산책한 기억만 남아 있다. 왕이든, 속인이든, 죽음 앞에서는 언제나 무기력하고 쓸쓸함만 남는다. 그런 곳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아이를 데리고 우리는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 무심코 세월이 흘러버렸다.

 

책을 읽다 책에 나온 어떤 단어에 마음을 뺏길 때가 있다. 성해나 작가의 경장편인 두고 온 여름에서 두고 온이라는 말과 인릉이라는 단어에 생각이 그만 책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내 인생에서 두고 온 것들이 얼마나 많을지, 거기에 있을 수많은 내가 그리웠다.

 

사진관을 운영했던 기하의 아버지는 인릉으로 자주 출사를 갔다. (소설에서 왜 헌인릉이라 하지 않고 인릉이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는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사진기로 보는 피사체는 이미 시작부터 왜곡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도 사진에는 완벽히 담길 수 없다. 소설의 등장인물인 기하와 재하는 사진기 안에서만 존재하는 피사체처럼 서로를 담고 싶은 모습과 크기로만 볼 수 있는 관계다.

 

기억도 못할 만큼 일찍 어머니를 잃은 기하는 아버지와 둘이 산다. 그가 19살일 때 아버지는 아들이 있는 여자를 만나고 그들은 같이 살기 시작한다. 생각지도 않은 다른 가족이 나타나 기하는 겉돌기 시작한다. 반면 새어머니의 아들인 재하는 기하와 아버지를 잘 따른다. 4년간 함께 살았지만 기하는 끝까지 새어머니와 재하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 항상 그들에게 날 선 감정을 내보인다.

 

두 가족의 결합은 여태껏 살아온 방식에 균열이 일어나는 일이고, 자연스러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당연히 내 아이에게 사랑이 많이 가는 것임에도 아버지는 재하를, 새어머니는 기하를 먼저 배려하고 눈치를 보게 된다. 이런 것에 기하는 아버지에게는 섭섭함을, 새어머니에게는 부담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서먹하고 어색하지만 가족이기에 그들은 같이 사진을 찍고, 밥을 먹고, 서로에게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들이 인릉으로 나들이 간 날, 아버지가 재하에게 보인 다정함에 기하의 마음은 완전히 닫히고 만다. 새어머니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끊긴 마음은 이어지지 않는다. 기하가 대학에 들어가 기숙사로 나가고 세 사람이 살 때, 셋은 다시 인릉으로 간다. 거기서 거대한 사슴 떼가 지나가는 모습을 환상처럼 보고 셋이서 사진을 찍는다. 박복한 사람에겐 늘 그렇듯 재하 친아버지의 횡포로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헤어지고, 재하의 삶은 잘 풀리지 않는다. 차갑게만 굴고 정을 주지 않던 기하도 마찬가지다.

 

서른일곱이 된 기하는 스트리트 뷰를 보다 재하 모자를 우연히 발견해 재하를 찾아간다. 많은 세월이 지나 그들에게는 남들보다 더한 인생의 무게가 씌워져 있었고,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한다. 내세우고 싶은 것도, 공통된 화제도 없다. 서먹함으로 헤어질 찰나 재하는 기하에게 인릉에 가보자고 한다. 인릉은 그들에게 과거를 공유할 수 있는 장소였다. 생각과 입장이 달랐지만 가족이라는 모습으로 같이 추억을 만든 곳이었다. 끝까지 인릉을 인조의 능이라고 착각했고, 민망했지만 둘이 같이 사진을 찍었다. 앞으로 기하와 재하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둘은 그들이 가족이었을 때를 그리워 할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나도 기하처럼 남에게 상처준 일이 많았다. 지금에야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날을 세웠는지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소설 속 기하를 보며 안타까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때의 나 또한 나였고, 기하 역시 그 때의 기하였다. 그 한 때에 두고 온 것이 아쉽고 그리운 건 그때의 나를 바라보며 측은함을 느껴서일지도 모르겠다. 기하와 재하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옥춘당 조각을 집어 입안에 넣었다. 달고 화한 맛이 혀끝부터 천천히 퍼졌다. 입안에서 사탕 조각을 굴리며 내가 왜 이곳에 왔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재하에게 해주어야 했을 말들을 뒤늦게나마 중얼대보았다. 잘 지냈니, 보고 싶었어. 잘 지냈으면 좋겠다, 미안해 같은 평범하고도 어려운 말들. 이제 와 전송하기에는 늦어버린, 무용한 말들을. -p.131]

 

 

소설 두고 온 여름을 읽으며 헌인릉에 꼭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딸아이가 어릴 때 다녀왔던 곳을 먼 훗날 다시 다녀 온 기하와 재하처럼 나도 가고 싶었다. 친구 카리나 님께 같이 가자고 했다. 성해나 작가의 소설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를 읽고 민주화운동기념관을 가고 싶어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카리나 님이 그 소설을 읽었는데 이번에도 나를 위해 <두고 온 여름>을 급하게 읽으셨다. 소설에 언급된 장소에 가면 그 곳 자체도 좋지만 거기에서 소설 속 얘기를 할 수 있어 더 좋고 아름답다.

 

평일 오전의 헌인릉은 한적했다. 거의 우리 둘 만 있었다. 봄이 한창인 그곳엔 벚꽃을 비롯한 여러 꽃이 피어 있었다. 갑자기 꽃샘추위가 오는 바람에 소나무 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가 웅장했다. 소설 속에 들어있는 홍살문오리나무가 단연 먼저 눈에 띄었다.


[인릉은 아버지가 즐겨찾는 출사지였다. 울창한 오리나무숲이 봉분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 풍경이 계절마다, 순간마다 달랐다. -p.32

아버지는 능 한편에 서 있는 오리나무를 가리켰다. 우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선퇴가 줄기에 붙어 있었다. 선퇴를 톡 건드리자 나뭇잎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p.34]

 

오리라는 단어에서 처음엔 동물 오리가 연상되었는데, 직접 본 오리나무의 키가 워낙 커 오리(五里)가 거리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가에 이정표 삼아 5리마다 심었다고 해서 오리나무라고 한다.


[숲길을 지나 능에 다다랐을 즈음, 아버지가 불현듯 홍살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돌길을 뷰파인더로 유심히 들여다본 뒤 허공에 포커스를 맞추고 몇차례 셔터를 눌렀다.

산자도 망자도 이 문으로 드나든댄다. 보이냐 너희도? -p.33]

 

정문으로 들어가면 인릉의 홍살문이 있다. 문을 지나 능을 보기 위해 위쪽으로 올라갔지만 길이 없어 그만 잔디를 밟고 능 앞으로 가고 말았다. 왕릉이 있는 곳이라 당연히 능을 볼 수 있을줄 알았고 뒤늦게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푯말을 보게 되었다. 인릉은 인조가 아닌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으로 봉분이 하나이다. 헌릉은 조금 안쪽으로 산책길을 따라 들어가면 있다. 이곳 역시 능 앞으로 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것 같아 우리는 홍살문에서 멀리 있는 능을 봐야만 했다.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이 따로 있어 봉분이 두 개이다.

 

헌인릉 바로 옆에 큰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 앞에는 철제로 된 바리게이트가 촘촘히 있었다. 바리게이트는 지그재그로 서 있었고 그 건물에서 나오는 자동차는 미로를 빠져 나오는 것처럼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저 건물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저렇게 첩첩이 바리게이트를 쳐 놓았는지 궁금했다. 집에 와 검색해보니 그 건물은 말로만 듣던 국가정보원이었다. 인릉이 국정원과 바로 붙어 있어 인릉 앞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인릉 앞까지 가 사진을 찍었으니 국정원에 잡혀 갈지도 모르겠다.


-하늘에서 본 헌릉 능침, p.232, 왕릉 가는 길, 신정일, 쌤엔파커스


-인릉 능침 정면,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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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6-04-10 07: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글 읽다가 괜히 제 ‘두고 온 여름’ 같은 기억 하나 꺼내보게 됐어요. 아마 다들 하나쯤은 그런 시간과 사람이 있겠죠.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데, 가끔은 그때의 나를 다시 마주하고 싶은 순간이요. 아니면, 꼭 마주하고 싶은 건 아닌데 괜히 마음만 복잡해지는 순간들이기도 하고요.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가까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끝내 다 담지 못하는 관계일수록 결국 말 한마디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늦게 떠오르는 말들이 오래 남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렇게 글로 헌인릉의 한적한 고요함까지 느끼게 해주셨으니… 다행히(?) 안 붙잡혀가신 걸로 해야겠네요 ㅎㅎ

페넬로페 2026-04-10 08:16   좋아요 1 | URL
곰돌이님 말씀이 제가 이 글에 쓰고 싶은 말 전부입니다. 책을 읽다 생각이 많아지면 오히려 리뷰 쓰기가 힘들어지더라고요. 할 말은 많은데 그게 정리가 잘 안돼서요. 살아오면서 ‘두고 온 여름‘이 얼마나 많은지, 그 생각에 잠겨 자꾸 소설 읽다가 딴 생각했어요. 그때의 미숙했던 내가 싫은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도 지금부터라도 위에 인용한 문장에 들어 있는 평범한 말들을 꼭 하며 살고 싶어요.
헌인릉에 다시 가 봐 좋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행히 ㅎㅎ

책읽는나무 2026-04-10 1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그곳을 한 번 찾아가보는 것은 나름의 정취와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나 과거 가족과의 추억이 깃든 장소라면 더 특별할 것 같구요.
앞서 혼모노와 페넬로페 님의 리뷰가 늘 같이 떠오르는데 이번에 이 책도 또 페넬로페 님의 리뷰 사진과 사연들이 또 떠오를 것 같아요.
성해나 작가는 곧 페넬로페 님. 제겐 그리 기억될 것 같습니다.ㅋㅋㅋㅋ
늘 리뷰를 통해 성해나 작가의 소설의 분위기를 미리 느껴보게 되네요.
잘 읽고 갑니다.^^

페넬로페 2026-04-10 16:36   좋아요 1 | URL
우연히 성해나 작가님 책을 연속적으로 읽고 가고 싶은 곳이 생겼어요 ㅎㅎ
특히 인릉은 오래 전 다녀온 곳이라 한 번 더 가보고 싶었어요. 책나무님 말씀처럼 헌인릉 둘러보면서 책에 나온 여러 문장이 생각나더라고요. 같이 간 친구와 짧은 독서토론도 했어요.
밀리의 서재의 리딩 케미스트리에서 성해나 작가님이 자신의 소설에 대해 리뷰 써주는 독자에게 고맙다고 하셨는데 제가 그 독자에 해당되면 좋겠습니다.

잉크냄새 2026-04-10 2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책 속에 나온 곳을 찾아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한번쯤 따라하고픈 멋진 추억일 듯 합니다.

페넬로페 2026-04-10 23:10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소설 속 이야기들이 더 깊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도 생각나고요. 그들 입장이 되어 그때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이해도 해봅니다. 고즈넉하니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 좋은 추억 만들고 왔어요.

독서괭 2026-04-11 1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헌인릉이 어딘가 찾아봤어요. 서초구에 있군요?! 사진이 아름답네요.
두고 온 것들을 떠올리신 걸 보다보니 <사라진 것들> 책도 생각나네요. 내 인생에서 두고온 것들.. ㅜㅜ

페넬로페 2026-04-12 17:52   좋아요 1 | URL
헌인릉은 서초구에서도 아주 한적한 곳에 있어 조용해서 좋더라고요. 독서괭님께서 두고 온 것들은 무엇일까요? 궁금합니다.
 















TV 프로그램 중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것이 있다. 재미있어서 내가 자주 시청하는 프로그램이다. 2명의 게스트를 초대해, 그들 집의 냉장고 속 재료를 스튜디오에 그대로 가져와 그들이 원하는 요리를 15분 만에 셰프 들이 뚝딱 만들어내야 하는 미션이 주어지는 내용이다. 그 중 중식요리를 전공한 셰프 들이 중국 요리를 만드는 방식에는 항상 비슷한 법칙이 있다. 일단 재료 손질을 먼저, 완벽히 하고 나서 나중에 불 쇼를 하며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벽돌책으로 분류되는 고전 읽기도 중국 요리를 준비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보통 고전이라 알려진 작품을 읽을 땐 처음 50페이지나 100페이지 정도는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 본격적으로 중요한 사건(요리)이 나오기 전 작가들은 지루하고도 끈질기게 독자들에게 재료 준비하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그러다 불 쇼가 진행되면 그제서야 독자들은 기다려온 보람을 느낀다. 고전이란 언제나 읽다 지칠만할 때가 되어서야 진가가 발휘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도 당연히 그런 고전의 법칙이 적용된다. 한 명씩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설명만 있을 뿐 1권이 끝나도록 그럴듯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계속 뭔가를 추측하게만 한다. 내가 뭔가 잘못 읽었거나 번역의 문제인가 싶어 다른 출판사 버전으로 다시 읽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민음사판 1권과 열린책들판 상은 주요 인물인 니콜라이와 표트르의 동시 등장으로 그냥 끝나버린다. 아마 2,3권에 중요한 사건이 집중되어 있을 것이다.

 

대작가 도스토옙스키는 이 초반 부분에 엄청 공을 들여 차례로 나오는 등장인물에 따라 문체와 어투를 달리한다. 스테판과 바르바라의 에피소드에서는 이제껏 읽은 도작가의 다른 작품에 비해 엄청 가볍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꽉 차 있으므로 작품의 내용에 대해 얘기하기가 너무 어렵다. 뭔가 짧게 요약하기가 힘들다. 도작가의 작품은 그저 묵묵히, 반복해서 읽어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1800년대 중반 러시아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사상적 혼란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하고 왕위를 물러 받은 그의 동생인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 날 여러 파벌의 혁명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2월에 반란이 일어났기에 이 사건은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명명되었다. 러시아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모든 것이 뒤처진 상태였는데 당시 젊은 지식인이나 장교들은 강력한 개혁과 자유의 필요성을 체감하고 있었다. 니콜라이 1세는 이들을 진압하고, 이 사건에 놀라 극도의 보수주의자가 되어 자유사상을 탄압했다. 도스토옙스키가 1849년부터 참가한 공상적 사회주의의 경향의 페트라쎕스키 모임에서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은 시기도 니콜라이 1세 때였다.

 

도스토옙스키가 악령을 집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세르게이 네차예프(1847~1882) 사건>이었다. 여러 급진 사상을 접한 니힐리스트 네차예프는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제네바로 가 바쿠닌을 만난다. 그의 영향을 받은 네차예프는 러시아로 돌아와 혁명 조직을 결성한다. 급진주의자인 네차예프는 폭력 적이었고 살인마저 저질러 체포되고, 이 일은 러시아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악령은 이 사건을 토대로 여진 작품이다. 악령에서의 혁명가들은 모두 니힐리스트였고 도스토옙스키는 그런 그들을 비판하고자 이 소설을 썼다. 그러므로 악령은 작가의 정치소설이다.


[본래 니힐리즘은 19세기 러시아의 극도로 반동적이고 압제적인 현실에서 파생되었던 일종의 자유사상이었다. 이 자유사상, 즉 니힐리즘은 유물론과 개인주의라는 두 개의 사상에 기반했고 그것을 극한으로 추구했다. 니힐리스트들은 유물론자로서 모든 종교, 미신, 형이상학 등 물질적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무언가, 과학으로 분석되지 않은 것, 실질적인 유용성을 가지지 않은 것을 부정했다. 한편으로 개인주의자로서 그들은 완전한 개인의 자유를 위하여 개인에게 부과된 전통을 부정했다....이 니힐리즘이 오늘날 떠올리는 음울한 극단적 혁명이론으로 각인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네차예프라는 인물의 역할이다. 제정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조차 네차예프를 상종 못할 인간으로 간주했다.

-네이버 나무위키에서 발췌]


 

악령은 안톤 라브렌티예비치라는 화자의 연대기적 기술로 진행된다. 아버지 세대를 대표하는 스테판과 바르바라, 아들 세대를 대표하는 니콜라이와 표트르의 대립적 구조로 여러 사건이 얽힌다. 인물 하나하나가 새롭게 등장하며 각자가 가진 캐릭터가 독자를 긴장시키고 나중에 일어날 사건에 대해 추측하게 한다. ‘어떤 도시에서 최근에 일어난 그토록 이상한 사건을 기술(p.13)' 하기 위해 2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상세히 설명한다. 연대기의 서론에 해당하는 것은 20년 동안 계속된 스테판 베르호벤스키와 바르바라 스타브로기나 사이의 미묘하고도 복잡한 관계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친구이자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다. 친구이지만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고 평생 그렇게 살면서도 헤어질 수는 없는(p.24)’ 사이로 뒤엉켜 지금은 영지를 소유한 돈 많은 바르바라가 스테판을 지켜주고 유모처럼 보살피고 있다.

 

<니콜라이 스타브로긴>은 바르바라의 외아들이다. 스테판 트로피모보치는 니콜라이의 교육자로 처음 이곳에 왔다. 바르바라는 스테판에게 니콜라이의 교육을 위임했지만 아들에 대한 관심은 지나칠 정도였고 그것을 니콜라이는 병적일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병약하고 조용하고 생각에 골몰하는열 여섯이 되었을 때 다른 도시로 공부하러 간다. 그 뒤 군대에 들어가지만 그때부터 니콜라이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에 나오는 해리 왕자와 비슷한 행동을 해 그 이름이 별명이 되었다. 니콜라이는 방탕해지고 괜한 시비를 일삼고, 여러 번의 결투로 사람을 죽이고 불구로 만들어 재판까지 회부된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사회의 인간쓰레기들과 살고 뒷골목을 전전한다. 소문과는 다르게 교양있고 지식을 갖춘, 잘 생기고 우아하며 단정한 신사로 고향에 돌아 온 니콜라이는 야수처럼 이상한 행동을 한다.


[우리의 왕자는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여러 인물에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두세 가지 뻔뻔스러운 짓을 저질렀는데, 중요한 것은 그 뻔뻔스러운 짓이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것, 그 어떤 것과도 닮지 않은 것, 흔히 통용되는 것이 전혀 아닌, 완전히 걸레짝 같고 어린애 같은 짓, 도무지 목적도, 동기도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그래도 나중에는 그가 이런 행동을 하던 그 순간에 꼭 미친 것처럼거의 생각에 빠진 모습이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그가 이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잘 이해했으되 당황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일말의 후회도 없이악의에 찬 즐거운 미소를 짓던 두 번째 순간만을 열렬히 기억할 뿐이었다-p.77~78]


 

사람들은 니콜라이를 증오하고 미워한다. 어떤 이유에선지 바르바라는 이러한 일을 예상하고 있었으며 드디어 시작됐구나라고 생각한다. 간교하고 냉소적인, 때론 섬망 상태의 니콜라는 병원에 입원하고 회복 후에 삼 년 정도 여행을 다녀 점점 잊힌 존재가 된다.

 

스테판은 아들 표트르를 그동안 두 번 보았는데 한 번은 태어났을 때고 두 번째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대학에 입학하려고 준비할 때였다. 표트르는 바르바라가 대 주는 생활비로 이모들 손에서 자랐다. 금발에 괴짜 같기도 하지만 예의범절이 훌륭하고 자기 확신에 찬 사람으로 스테판에게 돌아온 표트르는 아직은 신비로운 사람이다. 그에 대한 설명에 어쩐지라는 말이 계속 따라 붙는다.


[그는 다급히, 성급히 말하지만 동시에 자기 확신에 차 있고 말이 막히는 일도 없다. 그의 생각은 성급한 듯 보여도 실은 침착하고 분명하며 단정적인데 특히 이 점이 두드러진다. 그의 발음은 놀라울 정도로 또렷하다. 그의 단어는 언제나 당신의 비위에 맞게 선별되고 준비된 것으로 고르고 굵은 밀알처럼 흩뿌려진다. 처음에는 이것이 마음에 들겠지만 나중에는 바로 이 너무 또렷한 발음 때문에, 또 영원토록 준비된 구슬 같은 말 때문에 오히려 혐오스러워진다. 어쩐지 입속에 든 그의 혀가 어쩐지 특별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어쩐지 이례적으로 길고 가늘며 끔찍이도 붉고 혀끝이 굉장히 뾰족하며 저도 모르게 끊임없이 날름거린다는 생각이 어쩐지 들게 한다-p.305]


 

니콜라이와 표트르, 바르바라의 친구인 프라스코비야 부인과 그녀의 딸 리자베타, 새 도지사인 렘브케와 그의 아내 율리아가 이 도시로 들어오고, 퇴역 대위이자 주정뱅이인 레뱌드킨의 동생 마리야와 니콜라이의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 이 연대기의 진짜 시작이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책의 제사로 4대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마귀에 대한 것을 인용한다. 사람 속에 들어있던 마귀는 예수에게 자기들을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예수가 허락하자 마귀 떼는 돼지 속으로 들어가 모두 호수로 가서 빠져죽는다. 이렇게 예수는 마귀 들린 사람을 낫게 했다. 악령은 이 구절의 마귀와 뜻이 같다. 악령의 등장인물들에게는 다 마귀가 들어있는 듯하다. 예수같이 이들을 구해줄 것은 무엇이며, 그들 속에 있던 악령은 어디로 갈 것인지 다음 내용이 기대된다.



 

 

 









매핑 도스토옙스키는 제목 그대로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삶을 따라 그가 살았던 곳과 거기서 집필된 작품을 따라가는 연대기적 매핑(mapping)이다. 오랫동안 러시아 문학, 특히 도스토옙스키를 연구한 석영중 교수가 직접 그의 길을 따라 가며 서술한 책이라 더 깊이있고 볼거리가 많다. 신문에 연재되어서인지 글이 쉬워 읽기에 좋다.

 

1867년 재혼한 도스토옙스키는 부인 안나와 함께 유럽으로 떠난다. 주변의 버거운 사람들로부터의 탈출이었다. 43개월 동안 여러 도시를 떠돌며 산 작가는 타국에서 백치악령을 완성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드레스덴에서 자신의 세 번째 장편소설인 악령을 집필했다. ‘1860년대 러시아에서 니힐리스트란 모든 사상, 모든 의미, 모든 권위, 모든 도덕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급진주의자를 지칭한다(p.335).' 외국에 있으면서도 러시아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가지고 있던 작가는 네차예프 사건에 충격을 받고 그것을 계기로 정치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악령의 표트르는 네차예프가 모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악령에서 니힐리스트의 폭력을 고발하면서도 더 나아가 인간 본성과 자신을 포함한 아버지 세대의 무책임에 대한 반성을 한다.


[그가 네차예프 사건에서 파헤친 것은 특정 사상의 문제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인간 본성의 문제였다. 그는 인간 본성의 심연에 뿌리 내린 권력 의지를 끄집어내서 하나의 인간 유형을 창조했다. 그는 네차예프를 광신자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멍청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표트르로 <재탄생한> 네차예프는 인간의 권력 의지를 증폭시켜 보여 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정치 소설로 기획된 작품은 결국 철학 소설로 굳어졌다. -p.339

카뮈는 악령이 도스토옙스키 작품 중 가장 예언적인 작품이라 상찬했다....악령은 분명 테러리즘을 예고한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소설에서 당대 현실과 미래에 대한 우려뿐 아니라 과거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p.342]


 

-p.336, 세르게이 네차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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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3-21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적절한 비유입니다. 고전을 읽어보려하는데 매번 재료 손질만 하다가 웍 한번 못 돌려보고 포기하는 경우가 자주 생깁니다. 완성된 요리가 아닌 ‘이 음식 맛이 없을거야‘ 라는 자기 합리화로 마무리 합니다. 고전은 인내심이 필요하더군요. ㅎㅎ

페넬로페 2026-03-21 21:10   좋아요 1 | URL
혼자 완독하기 힘들어,
주로 고전만 읽는 도서관 독서 동아리에 참여하여 읽고 있어요. 아무래도 동아리에 참여하면 의무적으로 완독은 해야하기에 숙제처럼 읽고 있습니다. 고전은 그 책에서 주는 의미도 좋지만 계속 고전을 읽음으로써 다른 책으로의 사다리가 되어 주는 점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마힐 2026-03-21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몇 일전 유튜브 ‘일당백‘에 도스토옙스키의 우리나라 전도사라는 분의 ‘도선생님‘ 작품 세계에 대해 재미있게 들었어요. 도선생의 작품중 ‘백치‘ 가 끌려 알라딘 장바구니에 저장을 일단 했어요. ^^ 악령 소개도 했는데 페넬로페님 올리신 글 참고하고 전 좀 더 내공이 쌓이면 도전해야 될 것 같습니다. ^^

페넬로페 2026-03-21 23:32   좋아요 1 | URL
저도 그 유튜브 방송 들었어요. 도스토옙스키 작가의 책 모두 완독하는게 목표인데 저도 기회되면 백치 읽으려고 합니다. 악령 2, 3권도 열심히 읽고 리뷰 올려 보겠습니다^^
 














아무 의심 없이 이 소설의 제목인 비행운비행기가 지나간 자리에 꼬리 모양으로 생성되는 구름이라는 뜻의 飛行雲으로 받아들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볼 때, 또는 더 높아서 비행기는 보이지 않고 비행운만 보일 때 드는 감정은 언제나 한결같다. 아련함과 왠지 모를 슬픔, 막막함과 동경.다 늙어버린 지금도 그 모습만 보면 어릴 때 느꼈던 것과 똑같다. 살풋한 희망도 섞인 그 눈부심은 결국 어지러움만 남긴 채 사라지지만 여운은 길었다.

 

김애란 작가는 이 책 어디에도 제목에 대한 한자어를 남겨두지 않았다. ‘비행운이란 단어는 <하루의 축>에서 인천공항 청소부인 기옥 씨가 이륙한 비행기가 남긴 비행운을 안도의 긴 한숨 자국(p.176)’으로 표현하는 문장에만 한 번 나올 뿐이다. 나머지는 다 이미지와 상징으로 숨겨져 표현된다.

 

작가는 모질게 작정한 듯 여기에 수록된 8개의 단편에 불행을 심어 놓았다. 소설이 아닌 르포를 읽고 있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자세하고도 집요하게 어떤 이들의 쫓겨남과 비루함, 막막함을 드러낸다. 그 어디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사람 사는 게 이래도 되는 건가 싶게 우울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 의미로 제목인 비행운은 불운이나 고달픈 현실을 뜻하는 非幸運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飛行雲非幸運은 뜻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통한다. 누구나 갖고 있는 동경과 희망은 모두에게 성취될 수 없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지독하며, 거기에 자본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불운한 사람들은 하늘로 올라간 비행기가 남긴 흔적만 볼 수 있도록 남겨졌다.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좋은 이웃><빗방울처럼>의 소재와 비슷한, 이 책의 <벌레들><물속 골리앗>은 집과 관련된 것이다. 인간에게 먹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집이 부의 상징이자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 된 것은 고대에서부터 있어온 일이라 새삼스럽지는 않다. 다만 월급 받아 아껴 성실히 저축해 주택을 구입할 수 있는 자연스러움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무서운 현실이 되어 버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경계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고단한 삶을 작가는 가감 없이 서술한다.

 

나머지 단편 역시 다양한 소재의 내용으로 구성되었지만, 모두 살아가는 것이 녹록치 않음을 보여준다. 많이 바라지 않고 그저 의식주의 기본만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개인들이 각자의 사연으로 좌절하고 배반한다. 어쩔 수 없어서, 잘못된 선택으로, 그저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김애란은 그 잘못된 행위를, 변명으로 읽힐 수 있는 것들을, 쉽게 나쁜 것이라 단정하지 못하게 한다. 다시, 더 깊이 생각해 그들을 수긍하게 만든다. <하루의 축>에서 기옥 씨는 아들인 영웅이 범죄자가 되고 한 가족의 단란이 이렇게도 시시하게 망가지는 것이 어찌 이리 쉽냐고 반문한다. “엄마, 사식 좀.”이라는 영웅의 편지에 무너지지만, 그 사식을 위해 저녁 근무를 신청하는 기옥 씨를 이해하기 위해 소설가 김애란의 글은 꼭 필요하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단편은 물속 골리앗이었다. 시각적 이미지와 상징, 내용의 흐름이 완벽히 들어맞았고 그 절절한 문장에 전율이 일었다. 끊임없이 내리는 비와 거기에 고립된 소년과 그의 어머니, 타워 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다 죽은 소년의 아버지, 끝내 죽어버린 어머니를 녹색 테이프로 칭칭 감던 모습, 모든 것이 물에 잠긴 곳에서 거친 물살에 그만 놓쳐 버린 어머니의 시체, 물속에서 골리앗처럼 서 있던 타워 크레인, 꼭대기에 올라가 발견한 사이다와 라면 한 봉지. 구조를 바라며 희망을 버리지 않는 소년.그 모든 것이 너무 슬펐고 아름다웠다. 여기에 온갖 의미를 다 갖다 붙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저 김애란 작가의 문장만으로 모든 것이 느껴진다.

 

[주위는 조금씩 밝아졌다. 놀랍게도 비가 거의 멎은 듯했다. 이러다 다시 내릴지, 완전히 개일지 알 수 없었다. 이 마을 끝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것처럼.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하늘에 뜬 노란 달을 보았다. 먹구름 사이로 천천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반달이었다. 비록 흐릿하긴 했지만 그걸 보니 엄마, 나무뿌리에 안겨 떠내려간 엄마 생각이 났다. 녹색 테이프에 감긴 얼굴로 오랫동안 내 쪽을 바라보던 모습도. 어머니는 지금쯤 어디 계실까. 어디쯤 가셨을까. 부디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는 곳에서 편히 쉬고 계시면 좋을 텐데.그러곤 파랗게 질린 입술을 덜덜 떨며, 조그맣게 중얼댔다. “누군가 올 거야.” 칼바람이 불자 골리앗크레인이 휘청휘청 흔들렸다.

-p.126]


비행운을 읽으며 영화 <만약에 우리>를 봤다. 소설과 영화가 통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서른>에서 만난 힘겹게 사는 청년들이 영화에 있었다. 정원(문가영)과 은호(구교환)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가난하다. 가난한 사람이나 연인에게 들이닥치는 여러 악재가 이들에게도 비껴가지 않는다. 그런 여러 가지 일들이나 부족한 돈이 그들을 헤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그건 그저 변명일 뿐이다. 사실 그들이 헤어진 건 마음 때문이다. 특히 힘들어진 은호의 뒤틀림은 결국 정원을 떠나가게 한다.

 

정원과 은호는 헤어진 후 각자 자신이 원했던 길로 잘 간다. 그렇게 잘 가면서 왜 같이 있을 땐 안 되었던 걸까? 먼 훗날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정원과 은호는 만약 그때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헤어지지 않았을지 생각한다. 돌이킬 수 없어 소용없지만, 과거에 대한 미련으로 우리 모두가 많이 하는 질문이다. 만약에 그때, 정원과 은호, 비행운에서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지금의 인생이 좀 더 나아졌을까? 힘들어도 마음만은 단단히 잡아 흔들리지 않은 너와 내가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 내 집이 되어줘서 정말 고마웠어 은호야.

-정원

 


작년에 김애란 작가의 두 소설과 커피, ‘안녕이라 그랬어표지의 북커버를 서재 친구에게 선물로 받았다. 이제야 보내주신 책을 다 읽었다. 비슷한 시기에 투병 중이셨던 아버지와 엄마를 여윈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녀와 나의 애도가 너무 차이가 났다. 난 담담했지만 그녀는 장례 후 일 년이 지난 후에도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 마음이 너무 애틋하고 따뜻해 난 엄마에게 미안했다. 마음이 점점 굳어지고 냉정해지는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비행운을 읽으며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노력하지 않으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도 다시 한 번 새기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이 친구도 한국 소설을 좋아한다는 걸 안다. 친구가 아니었으면 아마 이 소설을 영원히 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좋은 책을 보내준 친구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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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8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3-08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26-03-09 04: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편소설집의 제목은 수록작들 중에 표제작으로 삼을만한 단편의 제목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죠. 가끔 작가와 출판사가 표제작으로 생각하는 작품이 달라 의견 충돌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 책 제목 [비행운]은 수록작들 제목이 아닌가봐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군요.

책도 안 읽고 영화도 안 봤지만 이 책과 영화 [만약에 우리]가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말씀에 저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럴 것 같아요. 저도 이 책과 이 영화를 보고 읽어야겠어요. 고맙습니다!

페넬로페 2026-03-09 07:56   좋아요 0 | URL
<비행운>이라는 제목은 이 책의 단편들 내용을 고려해 작가가 따로 정한 것 같아요.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하고, 단편들의 느낌을 잘 살려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좋았어요.
특히 여자 주인공인 정원 캐릭터가 인상에 많이 남았습니다. 제에게 이제 밥벌이를 해야 할 딸아이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청년들의 고달픔이 예사로 보이지 않아요.

2026-03-09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3-09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목련 2026-03-10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장 좋아다고 하신 <물속의 골리앗>기억나요. 저는 이 단편집이 아닌 젊은작가수상 대상으로 읽었어요. 영화 <만약에 우리>는 평이 좋던데 보고 싶네요^^

페넬로페 2026-03-10 11:38   좋아요 0 | URL
<물속 골리앗>은 충분히 대상을 받을만 한 작품인 것 같아요. 너무 좋았어요.
영화는 내용이 사실 뻔한데 문가영, 구교환배우의 연기가 좋아 괜찮았어요. 특히 여자 주인공 정원의 역할이 좋아 영화를 살리더라고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재해석한 퍼시벌 에버렛 작가의 소설 제임스를 읽기 위해 먼저 이 두 소설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때, 동화로 읽은 톰 소여의 모험은 너무 재미있어 계속 반복해서 읽은 기억이 있다. TV에서 방영된 만화도 여러 번 봤다. 특히 톰 소여가 폴리 이모의 명령으로 높이가 3미터나 되는 30m 판자 담장을 회반죽으로 칠해야 할 때, 그의 기지로 다른 친구들이 신나게 담장을 칠하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다시 읽은 톰 소여의 모험에서 이 부분은 책의 처음에 속하는데 그동안 내 기억은 딱 여기에서 멈추었던 것 같다.

 

그 뒤의 내용은 이제껏 한 번도 읽지 않았던 것처럼 새로웠다. 개구쟁이 톰, 모험을 좋아하는 이 소년은 황당하고도 게걸스럽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머리 회전이 빠르고(조금 나쁜 쪽으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먼저 깨우친 톰은 꼬마 갱단의 리더가 될 수밖에 없었다. 꾀바르고 능청스럽기도 한, 밥 먹듯이 하는 속임수나 거짓이 장난이나 모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했지만, 톰은 소년이었고 성장하고 있었다. 마음에 사랑이 피어나고, 가족을 생각하며, 결정적일 때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를 낼 줄 알았다.

 

톰 소여의 모험에서 허클베리 핀은 동네에서 이름난 주정뱅이의 아들이자 부랑 소년으로 서술된다. 동네 어머니들이 하나같이 미워하고 두려워하며,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제멋대로인 데다 상스럽고 질이 좋지 않은 아이로 소개된다. 심지어 담배도 피운다. 만약 이번에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헉을 그렇게만 생각했을 거고 영원히 톰에 붙은 곁가지라고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으면 톰의 모험은 딱히 별 거 아닌 게 된다. 톰은 그가 사는 동네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헉은 여러 지역을 오가며 모험을 벌인다. 거기엔 흑인 노예 짐이 함께 있다. 헉은 아버지의 폭력과 더글라스 부인과 왓츤 부인의 양육, 학교, 사회의 구속과 도덕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난다. 짐은 주인인 왓츤 부인이 그를 다른 사람에게 팔겠다는 말을 듣고 도망친다. 이유는 다르지만 두 사람의 목적은 같다. 둘 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다.

 

자유를 찾으려는 그들의 여정은 험난하다. 백인이지만 어리다는 것과 도망자의 신분인 흑인 노예는 그 어느 곳에서도 의심과 탐욕의 대상이 된다. 특히 흑인 노예에 대한 그 당시의 가혹한 폭력은 지금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도 없다. 소설 전반에 있는 거짓과 속임은 헉과 짐이 자신들 앞에 놓인 힘들고 어려운 길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 역시 소설을 읽는 내내 그 부분이 힘들고 지루했다. 하지만 떠난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던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마지막에 황당하지만 톰이 등장했던 것도 그들의 힘만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그 당시 사회의 폭력과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악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가장 불리한 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선한 방법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백인인 헉은 짐이 도망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해주고 도와준다. 백인은 누군가 다른 백인이 도망자인 흑인 노예를 고발하지 않는다면 깔봐도 되는 시절이었다. 헉은 평등주의자도 아니고 거창한 인류애 같은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헉은 짐을 고발하지 않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자신을 거두고 교육시켜준 왓츤 아줌마에게 지독한 짓을 한다고도 생각한다. 자신의 행동이 비열하고 비참해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마저 든다. 그럼에도 헉은 자유를 갈망하는 짐을, 자신을 도와줘 고맙다고 말하는 짐을 고발하지 못한다. 자신을 하나밖에 없는 친구이자 가장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 짐을 도와주고 함께 하기로 결심한다.

 

요즘 아이들은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을 잘 모른다. ‘흔한 남매에 열광하는 아이들은 톰과 헉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미국 현대 문학의 아버지이자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마크 트웨인은 이 소설로 그 시대를 살렸다. 여기에 자신의 경험과 여러 실제 인물이 녹아 있어 우리가 그 시대로 들어가 이 글을 읽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다. 이 두개의 소설 내용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지만, 과연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 울림을 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헉은 짐이 비상한 머리를 가졌다고 말한다. 살다 살다 이런 검둥이는 난생 처음이라고 혀를 내두른다. 헉과 짐이 솔로몬 왕의 재판에 대해 얘기할 때, 짐은 솔로몬이 아이를 반쪽으로 나눠 두 여자에게 준다는 판결에 분노한다. 그것은 어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 반쪽짜리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재판은 반쪽이 아닌 완전한 애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짐은 만약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이웃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아이의 진짜 엄마를 찾아주겠다고 한다. 헉이 짐에게 요점을 놓치고 있다고 말하자 짐은 요점 같은 소리 하지 말랑게 그러네! 내사 알고 있는 건 알고 있다고 생각헝게. 정말이지, 요점이라는 건 좀 더 멀리, 좀 더 깊은 데 있는 거제. 그건 솔로몬이 자라난 방식과 관련이 있당께. 솔로몬에게는 애새끼 하나둘쯤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이랑께라고 말한다.

 

솔로몬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할 수 있다. 요점은 좀 더 깊이 있는 것이고 사람은 자라난 방식과 관련이 있다는 말은 결국 헉과 짐에게 주어진 운명의 무게를 말한다. 두 사람 모두 운명을 거부하고 모험을 시작하지만 그 둘의 끝은 다르다. 짐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그의 소유주인 왓츤 부인의 유언으로 자유를 찾는다. 반면 헉은 교양 있는 세계로 돌아가길 거부하고 인디언이 사는 지역으로 떠난다. 장난꾸러기 톰이 신사의 세계를 선택했다면 헉은 톰과는 정반대의 길로 간다. 문명과 속박에 얽매이지 않은, 야생에서 영원한 자유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결국 자유를 찾은 헉과 짐의 여정은 헛되지 않았지만 능동과 수동의 차이는 엄청나다. 짐의 자유는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의 자유는 불안하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수록된 삽화,

전자책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다운로드 함






 

 







2024 전미도서상커커스 프라이즈, 2025년 퓰리처상브리티시북어워드를 수상한 제임스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재해석한 소설이다. ’허클베리 핀이 백인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면 제임스는 철저히 흑인 노예 짐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제임스는 짐의 완전한 이름이다. 짐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한 번도 제대로 이름이 불린 적이 없다. 그런 이유로 여기에는 마크 트웨인의 글보다 훨씬 더 많은 흑인 노예의 비참한 삶이 들어있다. 그들을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대하는데 거침없는 백인들의 생각과 행동도 그대로 전달된다.

 

소설 제임스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과정이 거의 그대로 진행된다. 이 두 소설이 헷갈릴 정도다. 그러나 그 두 소설에 등장하는 똑같은 사람인 흑인 노예 제임스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제임스는 헉보다 훨씬 더 아는 것이 많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구속하는 잘못된 법과 볼테르, 루소, 로크의 자유론과 관용론을 비교할 수도 있다.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은 제임스에게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계급 사회의 모순을 조목조목 따질 수 있고 그것에 대한 합리적 분노를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제임스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숨기고 흑인의 말을 사용해야 하며, 무조건 백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영화 노예 12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악랄한 백인 주인이 일요일에 목사로 변신하는 것이었다. 주인은 흑인 노예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진행하며 천국에 대해 설교한다. 참고 견디면 끝내 천국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을 노예들에게 심어준다. 제임스는 그런 종교를 비판한다. 백인 주인은 언젠가 하느님이 줄 보상에 대해 말하지만, 그들이 받을 처벌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교는 그저 그들이 편리할 때만 신봉하며 사용하는 통제 수단일 뿐이라고 제임스는 말한다.

 

헉과 제임스는 같이 자유를 찾아 떠나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제임스가 헉을 떠나지 않는다. 오로지 절체절명의 생존 자체가 목표인 제임스를 위해 헉은 여기서도 계속 거짓과 속임수를 사용한다. 가장 좋은 친구 사이인 그들의 여정은 여전히 험난하다. 백인과 유색 인종의 경계적 인물인 헉은 보다 더 성숙한 노예해방론자가 되어 있다.

 

이 책은 가독성이 좋다. 원작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재해석도 성공적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약간의 억지스러움과 황당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퍼시벌 에버렛 작가는 그런 모험적인 시도에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독자에게 분명히 전달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과 불평등은 잘못된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이 사실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거기엔 수만 가지의 법과 철학, 사상이 동원되어야 한다. 다만 떠나고 투쟁하며 쟁취하기 위한 기본이 읽고 쓰고 해석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제임스는 한 노예의 죽음으로 얻은 몽당연필과 훔친 책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작중인물들이 추구하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 정신은 다름 아닌 미국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이상이다(p.650, 작품 해설 중에서)‘ 이러한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미국 정신이 지금은 어떤지 궁금하다. 여전히 유효한가?

 

[믿음은 진실과 아무 관련도 없어. 좋을 대로 믿으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으면, 백인 소년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어도, 어쨌든 백인 소년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어. 어느 쪽이든 달라지는 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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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2-26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앞니 빠진 허크 씩씩한 소년 유유히 흐르는 미시시피강 저 멀리 증기선이 부웅~ 붕........
허클베리 핀 만화영화 주제곡은 아직도 기억나네요.

제임스는 영화의 스핀오프를 떠올리게 하네요. 독립적이지 않은, 시점 전환된 스핀오프 느낌이랄까요. 흥미로운 소설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6-02-26 21:00   좋아요 0 | URL
제가 위의 글에도 썼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제대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었어요. 안 읽었으면 후회할 뻔 했어요. 소설 제임스 덕분이었어요.
이 작품이 스핀오프 맞는데, 심하게 전환된 면도 있어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잘 만들어 진 것 같아요.

꼬마요정 2026-02-26 2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생각보다 재미있게 읽었어요. 심장이 쫄깃할 때도 제법 있었구요. 제임스가 말 똑바로 할 때 좀 통쾌했어요. 근데 진짜 그 백인들은 흑인들이 짐승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페넬로페 2026-02-26 23:11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좋았어요.
마크 트웨인이 보여주지 못한 부분을 세밀하게 잘 보여주었던 것 같아요.

아유, 그럼요.
백인들이 흑인에게 가했던 폭력은 정말 우리가 상상도 못할 것들이 수두룩 할거예요.

감은빛 2026-02-27 0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핀오프 라는 개념은 주로 미국 슈퍼 히어로 영화에서 봤었는데, 문학 작품에서도 이런 시도가 있고, 또 상을 받고 유명해졌다는 사실이 흥미롭네요. 이 책을 읽기 위해 마크 트웨인의 두 소설을 먼저 읽으신 페넬로페님 대단하세요. 덕분에 제가 읽었던 허클베리 핀과 톰 소여에 대해 한참 기억을 떠올려봤는데, 어릴 때여서 별로 생각나는 장면이 없네요.

페넬로페 2026-02-27 08:12   좋아요 0 | URL
어릴 때 동화로 재미있게 읽은 이 소설들에 제가 기억하지 못한 다른 내용들이 이렇게나 많이 들어 있는지 몰랐어요. 그 시대 미국 남부의 모습이 저랬구나 생각되었습니다. 제임스 읽으면서 백인이 가한 흑인 노예에 대한 많은 것들을 새삼스레 다시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yamoo 2026-02-27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봤습니다! 이달의 당선작으로 선정합니다~~^^

페넬로페 2026-02-27 11:5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

책읽는나무 2026-02-27 1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톰 소여의 모험 만화 영화 엄청 좋아했었는데 저도 떠올려보면 톰이 벌을 받아서인가? 담장에 페인트 칠을 하던 장면밖에 안 떠오르네요?
그리고 허클베리 핀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던 기억도 떠올라요. 동네 아주머니들이 핀을 싫어해서 나도 어린 맘에 세뇌를 당했던 듯도 하고…부랑자같은 모양새도 좀 그랬었고..ㅋㅋ
근데 책을 읽어보면 그동안의 편견을 확 깨버릴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드네요.
안그래도 며칠 전 아기공룡 둘리 이야기를 우연찮케 유튜브로 보다가 고길동 아저씨에 대한 편견을 깨게 되었어요. 어릴 땐 고길동 아저씨 엄청 못된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바라봤었거든요. 근데 둘리 일당들이 엄청난 말썽꾸러기들이더라는…
암튼 이 책은 인종 차별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를 접해볼 수 있겠군요.

페넬로페 2026-02-27 19:03   좋아요 1 | URL
그때는 어린 마음에 폴리 이모가 톰을 구박한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이모가 이해가 되더라고요 ㅎㅎ
허클베리는 이번에 제대로 읽었는데 이 소설에 이렇게나 깊은 뜻이 있는지 몰랐어요.
둘리 이야기도 새롭게 들려요. 저도 고길동 아저씨가 너무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제임스 읽어보니 그 시절 흑인 노예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겠더라고요.

마힐 2026-03-07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톰이 짐을 구출하기 위해 온갖 기발난 상상과 복잡한 연출로 작전을 꾸몄다면, 허클은 아주 간단히 구출할 수 있음에도 톰이 하자는 대로 합니다. 톰이 세계에 의미를 만들려는 인간형이라면 허클은 세계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인간형 같았어요. 톰은 사회의 리더나 지도자 같은 역할로 세상을 이끌어가지만 허클은 세상 밖에서 안으로 뛰어들어 세상을 구원하는 역할이라고 봤어요. 이 두 소년의 이야기는 그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디지털 시대에도 필요한 인간상이 아닐까 싶어요. 소년을 탄생시킨 마크 트웨인이 그래서 대단한 것 같아요. 전 개인적으로 허클이 너무나 좋았어요.
페넬로페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페넬로페 2026-03-07 22:16   좋아요 1 | URL
톰과 헉에 대한 마힐님의 해석에 공감합니다. 동화로만 접해 단순하게 생각했던 두 소설에 이렇게 엄청난 세계가 있는 줄 몰랐어요. 개구쟁이 톰이 그냥 저냥 살아갈 줄 알았는데 전형적 미국의 제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놀라웠어요. 그리고 헉의 선택이 주는 의미도 대단했고요. 그 시대 미국과 노예 제도도 다시 엿볼 수 있었습니다.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