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은 좋지만 작가 개인으로는 도저히 호감을 가질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작품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작가를 만나보고 싶은 경우도 있고. 작품도 좋고 작가 개인으로도 매력적인 경우가 내겐 체호프다. 톨스토이가 위대한 작가인 걸 알지만 중간중간 틈입하여 교조주의적 연설을 시작할 때는 좀 숨 막힌다. 반면 체호프는 유연하고 너그러운 위트가 있으면서도 심오하다. 내 말이 맞다고 애써 강변하지 않는다. 내 이야기가 최고라 도취되지도 않는다. 어떤 머뭇거림의 왈츠 속에 그 특유의 예리한 직관이 빛난다. 재미있게도 톨스토이와 체호프는 서로 합이 맞았다. 이 사랑이 세간의 일부에서 떠드는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관계였다고나 할까?(확신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교감의 흔적이 작품 곳곳에 숨어 있다. 톨스토이는 체호프의 <귀염둥이>를 정말 좋아해서 방문객들에게 그 이야기를 읽었는지 재차 확인하고 몸소 여러 번 낭독해주기도 했다. (박현섭 해설 참고) 체호프의 이야기를 마치 자기 아들의 작품처럼 자랑스러워했다.


















한편 체호프의 <약혼녀>에는 흥미롭게도 이런 대사가 나온다.


"모르겠구나, 얘야.. 나는 밤에 잠이 안 오면 눈을 이렇게 꼭 감고서, 안나 카레니나가 걸어다니며 말하는 모습이라든지, 아니면 역사적인 장면 같은 걸 떠올린단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자신의 작품 속에서 굳이 언급해 주는 센스는 톨스토이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걸까.


<상자 속의 사나이>에 실린 체호프의 모든 작품이 골고루 좋았지만, 특히나 <로트실트의 바이올린>은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의 감동이 있었다. "죽는 사람이 좀처럼 없어서 짜증이 날 정도"의 시골마을서 관 짜는 일을 하는 괴팍한 야코프의 개과천선은 죽음 직전에 온다. 그는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고 잇속을 차리는 탐욕스럽고 괴팍한 노인이다. 그런 남편에게 평생을 헌신한 아내가 결국 죽어가며 한참 전의 과거의 아픈 상실을 떠올리는 장면은 그를 회심하게 한다. 부업으로 했던 바이올린 연주 악단에서 야코프가 구박하고 무시하던 유대인 청년에게 그가 아끼던 바이올린을 물려주는 장면은 우리가 삶을 사느라 놓쳐버린 정작 소중한 것들의 회한에 대해 경고하는 듯하다. 가뭇없이 빠져나간 세월들 사이로 산다고 주장하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시선을 줘야 할 것들을 놓치다 보면 어느새 죽음은 눈앞에 와 있을 것이다. 체호프의 주인공들은 급작스런 죽음을 맞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장면이 비극적이라기보다는 뭔가 환기하는 바가 큰 종결어미처럼 보인다. 괴로워하거나 후회하거나 허무해하거나 하는 감정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아직은, 깨달을 시간이 있다는 일종의 위안이 되기도 한다. 


<구스베리>에서 늙은 이반이 연못에서 비를 맞으며 수영을 하는 장면의 묘사 같은 것. 심지어 젊은 동행인이 말릴 정도로 만끽하는 생의 막간의 휴식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도 지극히 체호프적인 것이다. 체호프에게는 모든 것이 있다. 어느 한쪽의 극단이 없다. 그리고 그게 참 좋다.


구스베리는 딱딱하고 시었지만, 푸시킨이 이런 말을 했죠. '우리를 북돋워주는 기만은 진실의 어둠보다 소중하다'라고요. 

-체호프 <구스베리>


모든 화려한 것, 세속적인 세상사에서 물러나 마침내 자신이 바라던 전원의 드넓은 영지를 소유하게 된 이반의 동생은 그 이후로 행복했던 것이 아니라 이반에게 그 행복의 뒤안길에서 놓친 타인들의 희생과 비참함을 드러낸다. 우리는 기만의 행복에 순간 취할 수 있지만 삶은 그러도록 우리를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파한 그는 그러나 그 자신이 알몸으로 연못에서 생이 주는 그 환희를 즐길 줄도 아는 사람이다. 톨스토이라면 이 지점에서 이반의 연설로 마침표를 맺었을 것이지만. 체호프는 그러는 대신 그 자신이 모순의 결정체인 인간적인 약점을 노출한다. 


톨스토이는 이런 체호프의 글을 좋아했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톨스토이의 죽음을 두려워했던 체호프는 톨스토이보다 먼저 떠난다. 마치 그 자신이 만든 이야기의 반전처럼. 그 죽음조차도 그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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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1-2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네요, 블랑카 님. 저도 이 책 읽어볼래요. 소중한 소개입니다.

blanca 2024-11-20 13:49   좋아요 1 | URL
체호프가 좋아요. 평전도 읽어보고 싶은데 번역이 안되어 있더라고요. 개인적 삶도 너무 드라마틱하더라고요.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인 여배우를 사십대에 만나 결혼까지 하고 얼마 안돼 죽어버리는...제일 웃긴 대목은 톨스토이 아내가 그렇게 체호프와 톨스토이 사이를 질투했다고 ㅋㅋ
 
무지의 즐거움 - 지적 흥분을 부르는 천진한 어른의 공부 이야기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동섭 옮김 / 유유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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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 우치다 다쓰루 앞에서 ‘정체성 정치‘, ‘진정한 나‘, ‘민주주의‘, ‘구원‘, ‘지혜‘에 대한 틀에 갇힌 해석은 해체되고 재조립된다. 끊임없는 자기 쇄신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 칠십 대 노장의 사고의 유연함에 거듭 놀라고 비판 없이 받아들였던 모든 고정 관념의 뿌리가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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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1-07 19: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블랑카 님의 별 다섯!!!!!

blanca 2024-11-07 19:44   좋아요 0 | URL
강력 추천입니다. 저는 소장하려고요.
 

어느 영상에서 죽음이 별로 두렵지 않다는 젊은 시인의 얘기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네가 죽음을 알 나이가 아니니까."


그 시인의 다감한 인상에 나는 어떤 냉소를 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고명재 시인을 잘 몰랐다. 지금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시인이 얘기하는 죽음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진지하고 짙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고백할 수 있다. 자신을 키웠다는 비구니의 이야기에 무심결 집어 든 그의 책은 나를 많이 울렸다. 



나이듦은 무조건적 사랑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게 되는 일과 가깝다. 어떤 선의에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지혜도 경험지도 아니다. 내가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옅어지는 일은 서글프다. 그러나 나는 이미 받은 무한사랑의 기억을 잊고 있었다. 고명재 시인이 이 책을 헌사한 비구니가 그에게 베풀어 준 사랑의 시어들을 읽으며 나는 잊었던 그 사랑들을 기억해 냈고 그 기억의 복원에 압도됐다. 지금의 나에게도 어린 시절 그런 사랑을 퍼부어 준 사람이 있었다. 무조건적인 사랑. 나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 사랑으로 견딜 것이다.


반드시 요동치고 심장 뛰고 들썩여야만 사랑인 것은 아니다. 마음과 존재를 아래에서부터 떠받친 채로 기둥처럼 지속되는 사랑도 있다. 사시사철 최선을 다해 존재하는 것. 은은한 지속. 그 기쁨, 놀라운 세계. 창호 너머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 만물이 견고하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바로 거기 있구나. 

-<너무 보고플 때 눈이 온다> 고명재


너무너무 가난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동생과 할머니에게 맡겨진 시인이 또 어느 한 시기 절의 비구니와 함께 한 유년은 눈물겹도록 애잔하고 아름답다. 작디작은 비구니는 시인에게 무한정의 사랑과 무소유의 고결한 삶과 그것의 존엄한 마지막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시인이 시인이 되게 한다. 그러니 이 시인이 죽음에 대하여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었구나. 숨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런 사랑이 있구나. 한 어린 아이를, 부모와도 헤어져 자라야 했던 그 가난하고 작은 아이에게 무한의 사랑과 미래에 대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구나. 세상에 대한 냉소로 온마음을 꽉꽉 채울 수도 있었을 아이가 자라 사랑을 노래하는 좋은 시인이 될 수 있게 하는 그런 빛나는 사랑이 있었구나.
















슈테판 츠바이크의 슬픈 최후를 우리는 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 그의 마지막 이야기들은 그러니 절망과 체념과 세상에 대한 비관으로 가득 차 있었을까? 오히려 반대다. 그는 여전히 사랑과 인간에 대한 믿음과 연민을 노래한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그가 포기하지 않은 인간에 대한 믿음들이 빛난다. 어떤 사람이 위대해지는 것은 그 사람이 많은 것을 가지거나 이룩해서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빼앗기는 그 지점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그 불굴의 희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그 여린 구석이야말로 가장 짓밟기 힘든 인간의 고결한 실재가 아닐까 한다. 


<걱정 없이 사는 기술>에서 돈이 없이 그저 자신이 가진 기술과 도움을 타인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살아가는 청년에 대한 이야기, 최악의 인플레에서도 여전히 일상을 영위하고 서로 돕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는 <나에게 돈이란>, 혁명이 지척에서 일어나는데도 무감하게 낚시를 하는 방관자의 역사가 사실은 우리들의 지금의 모습 그 자체라는 통찰이 인상적인 <센강의 낚시꾼>, 젊은 시절 우연히 방문하게 된 로댕의 작업실에서 배운 무아지경의 몰입의 순간에 대한 교훈을 얻은 <영원한 교훈> 등 짤막한 이야기 하나하나하가 가지는 심오한 메시지에 절로 공명하게 됐다. 짧아서 아쉽고 또 그만큼 농밀하게 압축된 이야기들이 주는 감동의 여운이 길다. 


그러니까 우리의 두려움에 이기는 건 여전히 진부한 사랑이다. 그런 걸 믿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쉽고 내 존재 자체가 그 사랑으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하는 건 어려운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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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악마의 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1
에드나 오브라이언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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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살 아이를 두고 이혼한 이십대 아일랜드 여자가 8월에 휴가를 떠난 이야기라 하면, 흔히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전복시키는 이야기. 감각적이고 도발적인데 헛헛한 아름다움의 마침표를 찍는 이야기. 에드나 오브라이언이라는 작가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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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4-10-26 0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이런 내용이었군요…왠지 책 내용을 엄청 기대하게 하는 리뷰네요.

blanca 2024-10-26 08:52   좋아요 1 | URL
분량도 많지 않은데 깊이와 재미를 다 잡은 작품 같아요. 일단 아주 재미있어요.
 
망고와 수류탄 - 생활사 이론
기시 마사히코 지음, 정세경 옮김 / 두번째테제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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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가 오키나와 거주민들의 이야기를 청취하여 오키나와의 '역사와 구조'에 연결한 보고서다. 이렇게 요약하면 딱딱한 이론서처럼 들리지만, '약속으로서의 실재론'인 조사자와 구술자의 대화는 참혹한 역사적 관계에 우연히 엮여 들어간 평범한 인간 군상의 묘사로 감동적인 이야기들의 태피스트리다. 


표제작인 <망고와 수류탄>은 패전 후 일본군이 오키나와 민간인들에게 수류탄을 지급하고 자결을 명령한 역사적 비극을 기억하는 할머니의 구술 이야기다. 당시 소녀는 엄마의 용기와 기지로 거기에서 탈출하지만, 미군이 쏜 박격포에 바로 옆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겪는다. 오십 년이 지나서야 소녀가 그날 뒤집어 쓴 게 아버지의 피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할머니의 이야기는 마지막에 손수 얼려서 이고 지고 온 망고를 이 연구에 참가한 젊은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끝난다. 훈훈한 결말을 품은 이야기 중에 이렇게 슬픈 사연을 지닌 것을 들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사회학자에게 소녀 시절 겪은 역사적 참상을 담담히 이야기하고 그 후에 깨달은 비극적인 진실까지 덧붙인 노인은 인간에 대한 불신과 삶의 잔인함, 비관을 한탄하는 대신 다음 세대에 대한 사랑의 마침표를 찍는다. 


1945년 저 섬에서 그녀는 일본군에게 두 개의 수류탄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2015년 이 공민관에서 수류탄 대신 그녀가 우리에게 건네준 것은 몇 개의 다디단 망고였다.



저자는 본인이 택한 생활사 이론의 질적 연구에서 조사자의 경계짓기, 범주화를 통한 이해에 어떤 편견과 폭력이 게재되거나 연구 대상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거짓과 모순이 드러날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이 한계조차도 연구의 실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구를 완성하는 하나의 조각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즉 그 불완전함, 그 한계가 인간이 인간을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읽어내는 것의 실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생애를 구술하면서 잘못된 기억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진심 전체가 호도되고 그것을 들은 사람의 시간이 낭비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하는 행위 그 자체에 어떤 진실의 핵이 있음을 저자는 이야기한다.


말하고 듣는다,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감정의 상호교환이 있고 이것은 수치로 계량화할 수 없기에 특유의 가치를 지닌다. 누군가의 아픈 생애를 그 우연적인 역사의 폭력에 다친 한 사람의 특별한 이야기를 듣는 일은 그 자체로 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이 세계에 의미란 없다. 우리가 어떤 전쟁에 휘말려들게 되는 것에도, 어떤 계층의 집에 태어나는 것에도, 혹은 '남자'나 '여자'인 것 그 어느 것에도 의미는 없다. 우리들은 절대적인 외부에 연쇄하고 있는 무한한 인과관계의 흐름 안에 갑자기 던져졌고, 거기서 살아가야 한다.



사회학자인 저자의 연구 방법론에 대한 책에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살아내는 인간 군상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여러 명의 주인공들의 순간을 담은 아름답고 슬픈 단편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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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0-25 1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사두었는데 블랑카 님의 리뷰를 읽으니 얼른 이 책을 읽고 싶어집니다. 망고와 수류탄 이라는 제목부터가 참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잖아요? 그것들이 이야기 속에서 어떤 조화를 이뤄낼지, 이 리뷰를 통해 엿본 느낌입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24-10-25 14:19   좋아요 1 | URL
저 이 책 망설이다 다락방님도 사셨다길래 산 거예요. 중간 방법론은 좀 지루한 대목들이 있긴 한데 전반적으로 정말 좋았어요. 땡스투를 사고 나서 해서 다락방님한테 제대로 갔을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