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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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무 살 때 이걸 알았더라면…

영원한 사랑은 없다. 영원한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잃어버릴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없다. 잃어버릴 두려움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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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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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 하나의 문장도 낭비하지 않는다. 마치 그 문장, 단어, 음절 하나하나를 벽돌처럼 쌓아 아름다운 성당을 세우듯 클레어 키건은 이야기를 짓는다. 무심코 주위를 한번 쓱 들러보고 하는 배경의 묘사 같은 것들도 결국 결론이 나고 나면 이야기에 중요한 하나의 단서였음을 깨닫게 될 때, 이 작가의 작품은 비로소 그 의미를 온몸으로 드러낸다. 지금까지 이런 소설들을 읽어본 적이 있었나? 하고 묻는다면 바로 떠오르는 작가가 그녀를 빼고는 없다.


표제작 <푸른 들판을 걷다>에 초반부터 묘사되는 결혼식의 정경은 평범하다. 결혼식을 진행하는 사제의 시선을 따라 마을 사람들의 한담과 신랑, 신부의 긴장된 모습과 그들의 부모들의 어수선함은 언제나 그러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신부의 진주 목걸이가 끊어지고 그 진주알이 사제에게 굴러온 시점에서 이야기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방향을 튼다. 사제는 이 결혼식에서 소외된 사람이고 이 결혼식으로 고통받는 사람이었다. 그가 마을 사람들이 화제로 올릴 때는 무관심을 가장했던 중국 사람에게 가서 그의 손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당신 문제 있어요."라는 말을 연거푸 들을 때 사제는 예감한다. 자신의 상처를 그가 읽었음을. 그리고 이제 그는 다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함을. 그건 체념이나 절망과는 다르다는 것을.


하느님은 어디 있지? 그가 물었고, 오늘 밤 하느님이 대답하고 있다. 사방에서 야생 커런트 덤불이 풍기는 짙은 냄새가 또렷하다. 양 한 마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푸른 들판을 가로지른다. 머리 위에서 별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하느님은 자연이다.

-클레어 키건 <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은 자신이 자라난 아일랜드 전원 풍경 묘사를 통해 내밀한 곳의 울림을 자아낸다. 아일랜드에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사람들이 양 한 마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푸른 들판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상상함으로써 허락받지 못한 사랑을 한 사제의 내밀한 심리적 변화를 손에 만지듯 감지할 수 있는 그 지점을 알고 있다. 이제 사제에게는 한때 흔들렸던 평화가 돌아왔다. 상처의 웅덩이를 지나간 자리에 그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걸어가야 함을, 그리고 그 발걸음이 가지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읽는 이들은 저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깨닫게 된다. 


하루키가 선집에 실었던 <물가 가까이>에서 주인공은 겨우 스물한 살이다. 그의 아버지와 이혼한 후에 재력가와 재혼한 어머니는 아들의 생일을 맞아 호화 리조트에 그를 초대한다. 하버드에 다니는 의붓아들의 성취를 비웃고 빈정대는 계부와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어머니의 모습 앞에서 아직 어린 그가 안쓰럽다.  그는 어린 시절 이혼한 부모 대신에 가부장적 할아버지에 억압받으며 살아온 할머니의 손에 자란다. 할머니가 떠나고 난 후에도 단 하루도 할머니를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그는 바다를 보고 싶어했지만 그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아내를 바닷가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려 했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손녀가 아닌 손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전부라 여기고 그 안에서 견뎌야 했던 할머니의 슬픔을 해원하듯 자유롭게 물속을 유영하는 장면은 한없이 먹먹하다. 받고 싶었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던 청년에게 진짜 사랑과 돌봄을 줬던 할머니의 생의 비원을 실현이라도 하듯 익사 직전까지 헤엄치는 그의 이야기.


<삼림 관리원의 딸>은 도발적이고 귀엽고 또 한편 묵직한 울림이 있는 이야기다. MBTI로 극J로 보이는 디건은 가장 자신의 아내로 적합해 보이는 마사에게 매달려 결혼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게 되면서 부부 사이는 냉랭해진다. 마사는 디건을, 디건은 마사를 사랑하지 않는다. 어느 날 장미 묘목을 팔러 온 남자를 맞은 마사는 그와의 사이에서 임신하여 막내 딸을 낳게 되고 디건은 일말의 의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 귀엽고 이상한 막내딸을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이는 척한다. 

막내딸의 생일날 숲속에서 남의 리트리버를 몰래 가지고 와 생색을 내며 딸에게 선물로 줘버린다. 딸도 마사도 그 리트리버에 애착을 가지게 되고 어느 날, 그 주인이 나타나게 되는데.. 

발달장애를 가진 둘째 아들이 매사에 계산적인 아버지와 상처 입은 어머니를 관찰하고 내뱉는 이야기들이 촌철살인이다. 사회적 금기나 예의를 벗어던진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들에는 위트와 말하여지지 않은 진실이 숨어있다. 모든 것을 잃게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디건의 반응은 독자의 기대를 벗어난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가정의 어엿한 가장의 역할에 매달려 있던 그가 마침내 그 모든 것 뒤안에 숨겨져 있는 진짜를 발견하게 될까. 


다시 처음의 작품 <작별 선물>로 돌아온다. 어느 날, 가족을 두고 뉴욕으로 떠나는 딸인 당신. "당신이 떠나면 어머니는 어떨까." 이 질문에서 자유로웠던 작별이 있었을까. 그러나 여기에는 이 가족이 소유하는 더 큰 비밀이 있다. 딸을 성추행했던 아버지, 그를 방관, 방조한 어머니, 여동생의 그런 상황을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그 상황을 어떻게든 방지해 보려고 노력했던 오빠를 두고 떠나가게 되는 것이다. 남기고 가는 그것들의 추악함에는 남들이 기대하는 소박한 그리움이 없다. 여기에 클레어 키건만의 독특한 지문이 묻어난다. 아름다운 묘사의 간극 사이로 냉정하고 가혹한 현실이 비어져 나온다. 주인공은 고통받고 고민하고 표류하지만 결국 거기에서 씩씩하게 걸어나간다. 


"바람이 강할수록 나무도 강해진다."


아름답고 허무한데 강인하다.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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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7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8-27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9-24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24-08-27 1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blanca님 멋진 글 감사드립니다♡ 클레어 키건 새 책 나왔는지 몰랐네요 저도 읽어봐야겠습니다.

blanca 2024-08-28 08:59   좋아요 1 | URL
달밤님, 반가워요. 새 책이라지만 초기 단편집이더라고요. 초기 단편집 완성도가 이 정도라니, 정말 놀라운 작가랍니다.
 
달리는 말 풍요의 바다 2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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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의 유작이 되어버린 '풍요의 바다' 시리즈 2권이다. 전권 <봄눈>의 시점 인물은 마쓰에가 가문의 기요아키였다. <달리는 말>에서는 금기시되는 사랑에 정열을 바치고 요절한 주인공의 죽음을 목격한 친구 혼다가 삼십대 후반의 나이에 오사카 항소원의 판사가 되어 재등장한다. 기요아키는 죽음 직전에 혼다에게 환생을 암시하는 재회를 약속한다. 



"또 만날 거야. 분명히 만나게 돼. 폭포 밑에서."


혼다는 항소원장을 대신해서 가게 된 신전 봉납 검도 시합에서 빛나는 소년 이사오를 만나게 된다. 혼다는 우연히도 그 소년에게서 기요아키의 표식을 읽게 된다. 검은 점 세 개, 그리고 순수를 향한 무모한 열정. 기요아키의 열정이 사랑을 향한 것이었다면 이사오의 무모한 열정은 우국으로 향한다. 부정부패에 물들고 타락한 정재계의 거물 인사들을 암살하고 할복 자살하겠다는 청년의 치기는 실제 청년들을 이 기치 하에 규합하고 거사를 결행하려는 음모로 비화된다. 

<달리는 말>은 열아홉 소년의 순수를 향한 무모한 열정, 그 순수성이 현실과 어떻게 충돌하고 어그러지는지 또 그것을 뛰어넘어 어떻게 승화되는지에 대한 미시마 특유의 미문의 거대한 향연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탐미주의는 결국 아름다움과 젊음에 대한 천착이자 집착으로 이어진다. 그에게 있어 늙고 병들어 죽는 일은 하나의 치욕이었던 것 같다. <봄눈>에서 스무 살에 죽어버리는 기요아키와 <달리는 말>에서 열아홉 이사오로 환생한 친구를 확인하는 중년 혼다의 모습은 은연중 미시마의 그 아름다운 한때에 대한 회한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삶은 덧없고 청춘의 아름다움은 찰나인데 그 찰나에 갇힌 그 무의미의 향연은 미시마의 언어를 통과해서 하나의 예술이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르셀이 유장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너지는 삶의 취약성을 돌아보며 결국 그 시간을 넘어서는 예술에 닿았던 길을 닮았다. 아름다움은 시간 앞에 무력하지만 그 시간을 넘어서는 그 지점에서 예술로 위대해진다. 


아름다움 바로 뒤에 또 다른 아름다움이 오는 일은 이 세상에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우리의 역사적 배경을 감안할 때 <달리는 말>은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자살만큼이나 다층적이고 혼란스러운 면이 있다. 신사참배 의식, 신사 검도 대련, 노가쿠, 천황 숭배 등의 묘사는 마치 그 현장에 있는 착시를 일으킬 만큼 생생하고 세밀한 만큼 또 억누르기 힘든 거부감을 자아내는 대목이 있다. 특히 이사오가 일본의 역사적 봉기를 기록한 책을 교본 삼아 또래 청년들을 규합하여 숭모하는 천황 중심 국가 조직을 이루기 위해 지도층을 암살하고 할복 자살하는 혈맹을 맺는다는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를 통과한 우리가 편안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가정이다. 그러나 미시마는 여기에서 단순히 천황에 대한 무모한 충성이나 극단적 우익 사상을 강제 주입하려는 오만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지배층의 사리사욕을 채우느라 소외된 계층에 대한 이야기와 고루하고 단편적인 일률적 역사관으로 재단하는 현실에 대한 경계, 심지어 이사오 같은 청년들이 보지 못하는 전체적인 세계상에 대한 안타까움 등에 대한 길항하는 시선을 놓치지 않는 주도면밀함이 놀랍다. 



흰 눈 같은 죽음 이후


대단한 이상을 향해 투신하는 그 행위들이 놓치는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미시마 유키오 자신의 이야기가 가지는 한계에 대한 암시처럼 보여 인상적이다. 즉, 미시마 유키오는 스스로의 그 유려한 문장들, 탐미주의가 가지는 한계까지도 자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대의, 열혈, 우국, 죽음을 무릅쓴 뜻도 사라지고, 대신에 주변의 것들,옷가지와 일상품, 바늘꽂이, 화장도구 같은 소소하고 아름답고 다정한 것들과 자신이 서로 섞여 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사물과의 친밀함이 생겨났다. 

-pp.421


그의 문장들은 더없이 에로틱하고 신비롭고 환상적이지만, 그의 작품에서 이상화되었던 대의, 열혈, 우국, 죽음 등을 넘어서는 것들은 그보다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이 이야기에는 있다. 죽음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찾아 헤매는 작가의 도정에서 우리는 의외의 발견을 하게 된다. 작고 일상적인 것들에 대한 재발견이다. 죽음으로 부정했던 삶의 지리멸렬함을 그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다시 긍정하는 모순을 보여줬지만 그 모순 자체가 미시마 유키오다. 


소년 이사오가 간직했던 역사 속 이야기 소년들은 "올해의 벚꽃은 마지막 벚꽃"이라 노래했다. 그 노래의 후렴구 같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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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8-22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휴 저도 읽어야겠어요. 어휴 좋네요.

blanca 2024-08-22 13:34   좋아요 2 | URL
다락방님, <봄눈> 아직 읽으시기 전이라면 연이어 읽으시길 추천드려요. 저는 앞의 내용을 다 잊어버려서 둘이 같이 펼쳐 놓고 보게 되더라고요. 미시마 유키오는 참 드러내어 놓고 좋다,고 말하기 민감한 작가지만 예술적 묘사력만큼은 진짜 압권인 것 같아요.

은하수 2024-08-22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너무 좋네요^^
모든 외부적 요소를 제외하고 읽고 싶을만큼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은 너무 아름답고 또 아름답죠!
<봄눈> 읽고 도서관에 신청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언제나 올까요. 여세를 몰아 얼른 읽고 싶은데 안될 거 같아요 ㅠ.ㅠ
작품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거부감은 또 어쩔 수가 없네요. 이 딜레마를 어째야 할까요

blanca 2024-08-22 19:17   좋아요 1 | URL
미시마 유키오가 그래요. 누가 어떤 작가 좋아하냐, 고 물어볼 때 자신감 있게 얘기하기 힘든 작가죠. 그리고 이야기도 그래요. 일본 제국주의, 극단적 우익 사상 등을 작가의 미문으로 읽을 때는 참...마음이 힘들어요. 그런데 좀 문제가 있다,고 발끈하다가도 슬며시 이 작가는 자신의 사상 자체를 흔드는 통찰을 또 보여줘요. 이런 생각을 하지만, 이건 좀. 이런 식의 흔들림이요. 알다가도 모르겠다, 싶다가도 예술은 작가의 삶을 뛰어넘는 건가, 이러다가 참 어지러운 작품이에요. 아주 뛰어난 작품인 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너무 아름답습니다. 놀라울 정도예요.

은하수 2024-08-22 23:1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인정이요.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글을 쓴다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예요. 그래서 앞으로 계속 읽게 될 거 같아요.
이왕 읽는거 기쁘게 읽겠습니다. 놀라울 정도란 말씀어ㅣ 더더 얼른 읽고 싶네요^^
 
산둥 수용소 -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 개정판
랭던 길키 지음, 이선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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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이기적인 사람일까, 이타적인 사람일까? 위선자일까, 정직한 사람일까?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한때 내가 비교적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명백한 불의에 분노하고 약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MBTI가 INFJ로 나오자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라고 별 수 없다, 는 생각이 든다. 어떤 직접적인 상황의 압력을 받는다면, 즉 내 이익이 침해되고 내 가족이 피해를 받는 상황이 온다면, 그 안에서도 나는 여전히 정의로운 사람으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까? 그렇게나 욕하던 파렴치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상황의 바깥에서 정의로운 이상주의자가 되기란 너무 쉬운 일이지만, 내가 그 상황 속 당사자가 되어 그 역학의 압력과 긴장도 안에서도 그러기란 말처럼 쉬운 노릇이 아니다. 


<산둥수용소>는 한 마디로 경이로운 책이다. 사회실험학적 보고서도 이 책처럼 실증적이고 현실적인 인간 군상의 천태만상을 지근거리에서 심지어 자신도 그 대상으로 포함시켜 낱낱이 생생하게 이야기하진 못할 것이다. 가차 없다. 흥미로우면서도 가볍지 않다. 무거운 척하려 위장하지 않는다. "아무리 성자 같은 사람도 식사다운 식사를 못하면 죄인처럼 행동할 것이다."는 브레히트의 목소리가 제사에 인용된 것은 우리 인간이 기대만큼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는 비관적 발견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43년 스물네 살의 연경 대학 교사였던 저자 랭던 길키는 일본에 의해 중국 산둥의 위현 민간인 포로 수용소에 수감된다. 이 수용소는 나치의 그것과는 달리 육체적인 고문이나 굶주림 같은 극단적 상황은 없었다. 따라서 이 책은 다른 유대인 수용소와 달리 그것을 통제하는 지배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수감자였던 인간 집단에 대한 흔치 않은 관찰기다.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영국인, 미국인, 네덜란드인, 벨기에인 사업자, 수도자, 선교사, 교사, 은행가 등 다양한 계층, 민족, 연령 층이 하루 아침에 수용소의 통제된 일상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 앞의 고군분투 적응기이자 극단적 상황 앞에 노출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심층적인 탐구 보고서다. 



-신속한 적응


절대적인 공간과 물질적 한계 속에서 이루어낸 수용소 집단의 적응 이야기는 놀랍다. 마치 초창기 문명의 개화처럼 사람들은 팔을 걷어 부치고 맨땅에서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차근차근 그들의 공동체의 문명을 건설한다. 수의사는 모두를 먹이기 위해 200개의 쿠키를 굽기 시작했고,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공예품을 만들어 수용소 안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고, 연극 공연을 하고, 사제들은 수용소 안 작은 예배당을 만든다. 랭던 길키는 이러한 인간들의 문명의 놀라운 적응력에 감탄한다. 어떤 상황이든 인간은 적응하여 그들의 일상화를 이뤄냈다. 그러나 초기의 이런 역동적인 적응기는 저자가 이야기하려던 수용소 이야기의 서막에 불과했다. 이윽고 수용소 전체를 뒤덮는 도덕적 위기의 문제에 당면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비합리적인 이기심이다.


-무너지는 논리와 공정


일반적으로 사람들은(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이었다.

-pp.179

우리는 홀로코스트 수용소 이야기에서 그 안의 감동적인 인간의 연대나 희생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들었다.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을 나누고 심지어 자기 희생에 기반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감동의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런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중론이 아니다. 오히려 놀랍도록 탐욕스럽고 비합리적인 인간의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본국에서 보내 온 적십자 구호품을 다른 가난한 나라 사람들과 나누지 않으려다 일본군에게 다 압수 당하는 미국 사람들 이야기는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다. 미국인인 저자는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솔직히 기록하며 심지어 적군인 일본군의 개입이 없었으면 이 구호품을 둘러싼 내전이 일어났을 거라고 고백한다. 이미 배고픔을 채우고도 남은 물자를 옆의 궁핍한 이웃과 나누지 않으려는 사람들에는 심지어 평소에 이웃 사람을 외쳤던 신실한 신앙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의 이기심을 더 합리적으로 포장할 줄 알았다고 한다. 즉 일부가 아닌 대다수가 극도로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이었고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이웃의 필요를 폄하하고 남은 물자를 나누기를 거부했다.


우리는 자신의 진짜 욕망과 욕구를 스스로에게 감추기 위해 직업적이거나 도덕적인 옷을 입는다. 그러고는 이기적 관심이라는 진짜 속내 대신 객관성과 정직이라는 겉옷을 걸치고 세상에 나간다. 

-pp.214



-수용소 내의 정치


인간이 이렇게도 자신의 안위에 관련한 문제에 대해서는 비합리적인 이기심을 표출한다면 과연 그 대안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수용소 안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물자를 훔치고 거짓말하고 타인을 이용했고 그것을 통제할 방법은 자체 정치 기구의 설립과 그것을 통한 법적인 제약이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 수용소 안에서 그들이 자율적으로 설립한 정부는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집행부였던 랭던 길키는 점차 이 안에서 정치적인 힘에 대해서도 숙고하게 된다. 민주 정부의 힘은 자율적으로 창출되기 어려웠다. 그것조차 권위에 입각한 어떤 힘을 필요로 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도덕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빵을 굽고 남은 밀가루와 설탕을 훔쳐갔고, 때고 남은 석탄을 마음대로 가져갔다.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조차 그랬다. 차라리 어떤 한도 안의 재량권을 주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양보조차 곧 유명무실해졌다. 더 가져가고 더 훔쳐갔다. 랭던 길키가 속해 있던 집행부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체 규약을 만들고 사람들을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공동체의 도덕성은 공동체의 유지에 필수적이었다. 모두가 모두를 의심해야 한다면 그 사회는 영속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도덕성은 치트키가 아니었다. 이것은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성립된 민주 정부의 권위에 대한 고민과도 닿아 있었다. 가능하지 않은 정부는 아무리 그 의도가 선하더라도 현실과 멀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랭던 길키는 수용소에서 나와서 신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따라서 그의 마지막 결론은 그의 종교 안이라는 한계를 노출한다. 그러나 그가 수용소 생활을 하며 자신과 같은 종교인의 부끄러운 민낯을 목도하고 가감 없이 비판하고 자성한 대목은 그가 편협한 맹신주의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는 오히려 종교가 가지는 맹점을 가장 가까이에서 봤던 경험을 잊지 않고 자신의 신앙의 기반으로 삼는다. 


불안정한 삶을 경험하면서 배운 가장 기묘한 교훈은, 원하지 않던 상황이 파괴적인 역할을 하기보다 오히려 창조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위현 수용소에 오고 싶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이 거부하고 싶고 혐오스러웠던 경험 안에는 새로운 통찰력이라는 씨앗이 있어서, 우리 중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했다. 수용소에서의 삶은 너무도 불편하고 혼란스럽고 지루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이 삶을 더욱 창조적으로 헤쳐나갈 수 있었다. 

-pp.472


생존 앞에서 도덕성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기반 그 자체였다. 도덕적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더욱 그 도덕성은 빛을 발했다. 내가 더 많은 것을 가지고자 이웃의 필요를 간과할 때 나의 생존은 더욱 더 위협 받았다. 타인을 믿을 수 없을 때 그곳에 지옥이 있었다. 하지만 극단적인 궁핍 속에서도 내 옆의 이웃을 신뢰할 수 있을 때 그 궁핍은 채워짐으로 보답 받았다. 인간의 적나라한 이기심은 결국 이런 교훈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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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갈증 페이지터너스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빛소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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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라기보다는 이미 상실을 예비한 하나의 무모한 열정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상대라는 매개체를 필요로 할 뿐, 반드시 그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죽음과도 닮았다. 그것이 오는 것을 우리는 막을 수 없고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아내 뒤에서 외도를 일삼았던 남편을 잃은 에스코가 한큐 백화점에서 남자 양말 두 켤레를 사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언뜻 단조롭고 평화로운 일상을 가림막으로 드리운 채 펼쳐진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이 여인이 남편을 잃고 들어간 시가에서 시아버지와 맺은 부정과 청년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하인 사부로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저류를 통과할 때는 모든 사소한 행동들이 다른 의미로 확장, 심화된다. 미시마 유키오의 미문은 이들을 둘러싼 전원의 그 어떤 풍경에 대한 사소한 묘사 하나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을 통과한 모든 언어에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도사리고 있다. 


여자의 발소리처럼 가볍지도 않고, 중년 남자의 발소리처럼 침울하지도 않다. 발바닥에 젊음의 뜨거운 무게가 실려 있어, 이 어두운 밤 복도의 판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마치 신음처럼 듣게 했다.

-pp.34


시아버지 야키치와 바둑을 두는 에쓰코가 듣는 사부로의 발소리에 대한 묘사다. 이 대목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에스코의 사부로에 대한 은밀한 마음을 단번에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시들어가는, 퇴락해 가는 이 가문을 뚫고 들어온 단 하나의 희망, 미래, 청춘에 대한 예감이다. 그러나 물론 에스코와 사부로가 극복해야 할 수많은 난관은 간단치 않다. 신분, 연령 차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에쓰코는 사별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함께 산다. 여기에는 보이는 것 이상의 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녀의 생존은 거기에 기대어 있다. 만담가 같은 큰형 부부, 에쓰코를 감시하며 때로는 개입하고 방관하며 그녀의 삶에 끼어드는 야키치, 사부로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 하녀 미요. 그러나 그 무엇보다 사랑을 사치스러운 잉여의 감정으로만 인식하는 어린 사부로. 사부로는 에쓰코의 상대로서 더없이 부적절했다. 아니, 결국 그녀가 밟고 지나가고 말아야 했던 하나의 통과의례, 희생양, 제물로서 거기 필연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즉, 우리는 삶의 의미를 모색하고 아직 그것을 구하지 못한 동안에도 어쨌든 살아가고 있다. 찾아낸 삶의 의미를 소급함으로써 이 삶의 이중성을 통일하려는 욕망의 우리 삶의 실체라고 한다면, 삶의 보람이란 끊임없이 발현되는 이 통일의 환각, 아직은 소급할 수 없는 생의 의미를 가설적으로 소급해 보는 데서 생기는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pp.117


에쓰코가 마침내 찾아낸 삶의 의미는 불행히도 가설적으로 소급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 죽음과 대면하게 되니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그녀의 비참한 상황은 어떻게든 결국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삶의 무기력함에 대한 거대한 은유로 비치기도 한다. 처절하게 아름답지만 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결말에서도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들은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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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4-06-30 1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아. 오감을 일깨우는 표현입니다. 어떻게 저런 묘사를 할 생각이 들었을까요? 악상처럼 막 떠오르는 걸까요? 만약 글을 쓰는 게 업이었다면 그의 재능이 너무나 질투났을 것 같아요. 노력만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어나더 레벨의 감각. ㅠㅠ

blanca 2024-06-30 11:38   좋아요 2 | URL
천재적이더라고요. 미시마 유키오는 사상적으로 논란이 많은 작가지만 감각적 표현력 측면에서 감탄이 나오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