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사원 풍요의 바다 3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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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 연작 시리즈 중 3권에 해당하는 <새벽의 사원>에서 주인공 혼다는 마흔일곱에서 쉰여덟이 된다. 1권이었던 <봄눈>에서 친구 기요아키의 죽음과 2권 <달리는 말>에서 소년 이사오로의 환생과 죽음을 목도한 그는 이제 그의 두 번째 환생을 둘러싼 대승불교의 윤회환생설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게 된다. <봄눈>에서 일본에 왔던 시암의 왕자 차오 피가 약혼녀에게 선물하려 했던 잃어버린 반지를 매개로 혼다의 여정은 소송 건으로 방문한 태국으로 이어진다. 그곳에서 만난 공주 잉 찬이 성장하여 일본을 방문함으로써 둘의 재회는 혼다의 묘한 관음증적 욕망으로까지 치닫는다. 


전반부에 중년의 혼다가 인도의 바라나시 화장터에서 목도한 죽음의 풍경과 후반부의 노년의 혼다가 품게 된 어린 공주에 대한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대비는 이 둘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는 그 생래적 모순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피처럼 떨어지는 시간"이 결국 인도하는 죽음이라는 귀결점을 품은 생을 사는 인간이 역사에 궁극의 미에 예술에 행사하려는 의지는 모두 무용하다. 그 너머로 가닿으려는 그 처절할 정도로 미약한 시도는 결국 죽음으로써만 가능함을 암시하는 이야기는 불가능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이생이 가지는 궁극의 의미는 갱신되는 순간의 전념에 있으며 이 반복이 결국 환생 그 자체임을 일깨우는 것이 아닐까. 미시마 유키오가 이 작품에서 천착한 대승불교의 유식과 환생에 대한 이야기도 결국 끊임없이 갱신되는 현생의 이 순간의 현전에 대한 궁극의 인식으로 귀결된다.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은 깊고 예술적 승화의 체로 걸러져 더없이 농밀하다. 노화, 죽음에 대한 치열한 탐구도 깊이가 남다르다. 분명 미시마 유키오만 할 수 있고 쓸 수 있는 독특한 미학적 세계가 있고 이건 그 어떤 다른 이도 모방할 수 없다. 다만, 당연히 한국 독자로 역사적 특수성을 감안한다 해도 전후 폐허가 된 일본에 대한 감정적 묘사라든가, 혼다의 관음증의 대상이 된 여성을 그리는 대목은 불편하고 거슬린다. 미시마 유키오를 읽는 일은 그런 모순과 긴장까지 안고 가야 하는 과정이다. 


이제 분명한 점은 혼다의 욕망이 바라는 궁극적인 것, 그가 정말로,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은 그가 없는 세계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이다.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을 보려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pp.403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이 궁극의 실재를 지향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그의 생과의 낙차에 대한 정교한 탐방기다. 그것을 포기하고 죽음이라고 명명해 버릴 때 읽는 이들이 느낄 허탈함은 미시마 유키오의 한계이기도 하고 강점이기도 하다. 윤회를 얘기함으로써 다음 생에 대한 희망을 얘기하는 대신 이 순간의 허무를 아름답게 세공해 버리는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은 결국 끝나버릴 생과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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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5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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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이쉬킨 공작의 이야기에는 실제 이십 대의 도스토예프스키가 사형 직전 감형 받은 체험이 녹아 있다. 고작 이십대 후반의 청년 앞에 당도한 확실한 죽음의 인식. 그것은 그의 전생애를 바꾼다. 내 눈 앞에 백퍼센트가 되어 도착한 나의 종결 앞에서 비대해지는 삶의 무게와 가치에 대한 각성이 이 천진하고 진실한 백치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그에게 무엇보다 괴로웠던 것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이었습니다. ‘만일 죽지 않는다면 어떨까! 만일 삶을 되찾을 수 있다면 어떨까 -그야말로 무한이리라! 그리고 그건 고스란히 내 것이 될 테지! 그렇게만 되면 나는 일분일초를 한 세기로 만들어 그 무엇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며, 일분일초까지 정확히 계산해서 그 무엇도 헛되이 써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 생각은 마침내 증오감으로까지 변해서, 차라리 한순간이라도빨리 총살시켜줬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는 겁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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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5-01-09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옛날에 읽은 것 같은데 기억이 전혀 나지 않네요. 지금부터 열심히 고전을 읽어도 2-3번은 읽어야하니 갈 길이 멉니다.ㅎ
 
삼체 1~3 세트 - 전3권
류츠신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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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는 하드SF, 즉 과학 이론적 원리가 이야기를 위한 보조장치가 아니라 이야기의 근간이 된 SF소설이다. 컴퓨터 엔지니어인 작가 류츠신의 방대한 이론물리학, 천체물리학적 지식이 <삼체>의 도입 장벽이 되기도 하지만 이야기 자체의 동력이자 흡인력이 되기도 한다.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해리와 친구들의 마법이 마치 현실에 기반한 것처럼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처럼 태양이 세 개인 삼체의 외계문명도 류츠신의 탄탄한 이론적 설계도 하에서는 생생한 현장감을 띤다. 


류츠신의 유니버스는 태양계를 벗어나 외우주로 향하고, 우리가 익숙한 3차원의 세계를 벗어나 4차원으로 확장되다 마침내 2차원으로 붕괴되고, 유한한 시간을 벗어나 몇 십만년도 우스운 미래로 뻗어나간다. 80년 남짓을 한정된 영토 안에서 살며 모두가 한 방향으로 질주하는 현대 문명의 한계와 인류의 오만을 냉정히 조망하는 관조적 시선은 이런 방대한 스케일의 SF만이 가질 수 있는 혜안일 것이다. 


1부 삼체문제


'중화 2호' 고에너지 가속기 프로젝트 나노 부품 책임자 왕먀오는 '과학의 경계' 학술단체 소속 여성 과학자의 자살과 관련하여 경찰의 조사를 받으며 협조 요청을 받게 된다. 왕먀오가 하는 삼체 세계 발전사를 시뮬레이션한 VR 게임 속에서 진시황, 공자 등과의 상호작용은 사이버 세계와 현실을 넘나들며 항세기와 난세기를 갈마들며 생존을 향해 발버둥치는 문명사의 복기와 예행 연습의 기능을 한다. 한편 죽은 과학자 양둥의 어머니인 예원제는 문화대혁명기에 물리학자인 아버지가 어린  홍위병들에 의해 공개처형된 후 홍안기지에 가게 된다. 이곳에서 예원제는 삼체 문명에서 보낸 신호를 수신하게 되고 지구의 좌표를 노출함으로써 결정적으로 4광년 떨어진 삼체의 우주선이 침략을 위해 지구를 향하는 400년의 여정을 시작하게 한다.



2부 암흑의 숲


삼체문명에서는 지구에 일종의 정보원인 지자들을 보내게 되고 지구에서는 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지구를 방위하고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면벽자' 프로젝트 및 태양계 방어기지 건설을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분열과 배신이 일어난다.



3부 사신의 영생


말기암에 걸린 청년 윈톈밍이 대학 시절 짝사랑하던 여학생 청신에게 별을 선물하고 안락사를 택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우주 엔지니어인 청신이 인류 문명을 외계 침입에서 수호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다 동면으로 뛰어넘은 미래의 은하계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삼체 세계의 지령으로 호주로 집단 이민을 떠나기도 하고 우주 도시, 우주선에서 혹은 동면을 통한 미래에서 생존의 딜레마를 극복하려는 인류의 노력에 대한 묘사가 현 인류의 생존 위기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전체주의를 동원하고 타인을 공격하는 참상은 그리 먼 것이 아니다. 


생존 자체가 행운입니다. 과거에 지구에서 그랬듯이 지금 이 냉혹한 우주에서도 마차가지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턴지 모르게 인류가 환상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생존을 아주 당연한 일로 여겼지요. 이것이 바로 당신들이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삼체>의 핵심 메시지는 인류의 문명이 무한정 진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흐름이 과연 선인가? 우리의 도덕률은 미지의 광활한 우주 세계에서 존재할지 모르는 외계 생명체의 세계에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 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고 그것에 대한 진지한 해답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드러난다. 즉, 생존 의지는 도덕적 기본 원리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것이 악으로 명명될 여지가 언제나 있으며, 그럼에도 살아남는 그 무엇은 결국 인간의 연대와 사랑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또한 전부는 아니라는 것. 시공간에 대한 경직된 선입견은 인간의 지적 한계의 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인간 존재 자체가 거대한 우주 전체에서 가지는 의미는 지극히 미소하다는 것. 


지금 여기에서 내가 느끼는 고통과 희열은 우주의 끝과 우주 최후의 날까지 확장되는 이야기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지평 너머로 희석된다. 그 다음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 자체가 가지는 힘이 <삼체> 읽기의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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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1-26 1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브랑카님은 드디어 sf를 영접하셨군요. 좋으셨나 봅니다. 저는 일단 과포자라 읽을 자신이 영...ㅠ

blanca 2024-11-27 09:21   좋아요 2 | URL
저도 솔직히 다 이해는 안가더라고요. 영혼 없이 읽은 대목도 많아요. 그래도 워낙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푹 빠져 읽었어요.

transient-guest 2024-12-14 09: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즐겁게 푹 빠져 읽었지만 결말은 아직도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SF를 동양의 언어로 풀어낸 것이 너무 좋았어요. 무협지를 읽는 듯한 느낌도 좋았구요.

blanca 2024-12-14 10:06   좋아요 1 | URL
이해 안가는 대목이 저는 많았어요. ^^;; 그런데 스토리 장악력으로 다 넘어가지더라고요. 이색적인 SF라 오랜만에 푹 빠져 정말 즐겁게 읽었어요. 작가 나이가 벌써 꽤 들었더라고요.
 
표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6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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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통일운동이 한창이던 19세기 중반 한 몰락하는 귀족 가문의 이야기가 <표범>이라고 한다면, 이는 이 매혹적인 이야기의 일부만 드러낸 것이다. 사십 대 중반의 시칠리아 영주가 아들처럼 사랑했던 신세대 조카의 혁명 참가와 실리적인 판단에 따른 결혼을 지지하며 삶과 죽음에 대하여 탐구하는 이야기이고 이 주인공이 작가 자신의 가문 증조 할아버지를 모델로 한 일생 유일한 장편소설로 생전에는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절당했다 사후에야 출판되어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하고 국민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뒷얘기는 부수적인 것이 아니다. 한 작가가 평생에 걸쳐 단 한 권 남긴 가문의 이야기는 고전이 됐고, 알랑들롱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다시 넷플릭스 시리즈 제작 중이다. 직업적 소설가도 아니고 전문적인 작가 수업을 받지도 않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표범>은 이야기 자체로 그만큼 매력적인 스토리의 재미와 인간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 돋보이는 이야기다. 


주인공인 시칠리아 귀족 돈 파브리초 살리나 영주는 자신이 가진 것들을 마음껏 향유하는 한편 천문학에 심취하고 장엄한 미사를 드려 자신의 방종을 회개하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호화로운 별장을 순례하고 사냥터를 누비고 거리의 여자를 안는 그가 죽은 누나 대신 돌본 조카가 영주의 딸 대신 혁명의 세례를 받은 신흥 부자인 시장의 딸과 결혼하게 되자 화통하게 그 결혼을 응원해 주는 배포를 보여주기도 한다. 구체제에서 누린 계급적 특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급변하는 정세의 변화에도 흔쾌히 열린 마음으로 그 변화를 맞이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돈 파브리초는 정작 중요한 것이 그런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가 정작 천착하는 주제는 인간에게 닥치는 필연적 죽음이었고 <표범>의 비상한 흡인력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살리나 가문의 문장인 표범은 지배계급의 그 간악한 공격성과 지배 욕구, 탐욕 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인간의 삶을 결국 기습적으로 먹어버리는 죽음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그는 화려한 무도회에서 춤추는 사람들에게서도 결국 닥칠 죽음을 보게 되고, 인간 전체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그 누구보다 삶 자체를 만끽하며 누리는 그가 역설적으로 죽음의 안식을 동경하고 거기에 기꺼이 승복하는 모습에 대한 이야기는 이 남자의 일대기의 압축이 향하는 그 종착점에 대한 작가의 치열한 성찰이 뒷받침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려한 이야기 이면에는 이토록 어둡고 깊은 생의 유한함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다.


우리는 영원을 제외하고는 무엇도 증오할 수 없다.


사람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다. 이 세상에 영원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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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12-01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가 참 대단하고 아름답죠......원작이 번역되었군요!

blanca 2024-12-02 18:58   좋아요 0 | URL
알랑들롱 영화 아직 못 봤어요.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무지의 즐거움 - 지적 흥분을 부르는 천진한 어른의 공부 이야기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동섭 옮김 / 유유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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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 우치다 다쓰루 앞에서 ‘정체성 정치‘, ‘진정한 나‘, ‘민주주의‘, ‘구원‘, ‘지혜‘에 대한 틀에 갇힌 해석은 해체되고 재조립된다. 끊임없는 자기 쇄신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 칠십 대 노장의 사고의 유연함에 거듭 놀라고 비판 없이 받아들였던 모든 고정 관념의 뿌리가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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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1-07 19: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블랑카 님의 별 다섯!!!!!

blanca 2024-11-07 19:44   좋아요 0 | URL
강력 추천입니다. 저는 소장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