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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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간 디디에 에리봉이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우리 모두가 통과하게 되는 필연의 늙음과 죽음을 가지고. 가장 내밀한 사적 이야기를 공적인 장에 펼쳐 놓는 그의 쓰기에는 답이 없다. 묻어버릴 수 없는 질문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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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1-01 1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럽은 그나마 기본적인 사회 복지가 잘 되어 있어 다행이지마 한국의 경우 저 소득츠의 노년은 오로지 자식에게 의지해야만 합니다.나라의 보조는 일 부분이어서 독거 노인들은 누구의 보살핌도 없이 쓸쓸히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고 자녀가 있는 경우라면 요양원이라고 갈 수 있지만 비용 부담으로 자식들도 가난의 악습에 빠지게 되지요.
특히나 요즘은 남녀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아 혼자사는 가구가 늘어나는데 향후 20~30년 내에 커다란 사화적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blanca 2026-01-02 09:03   좋아요 0 | URL
에리봉 얘기처럼 이 노인 복지에 관련된 구조적, 사회적 문제가 너무 거대해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아예 손 놓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

다락방 2026-01-01 1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 랭스도 안읽었는데 에리봉의 새 책이군요. 저 순간적으로 디디봉 이라고 쓰려고 했네요. 하핫.
한국가면 랭스 부터 읽어야겠어요. 불끈!

블랑카 님, 해피 뉴 이어!

blanca 2026-01-02 09:06   좋아요 0 | URL
디디에 에리봉이 쓴 여성 서사도 정말 공감이 많이 갔어요. 랭스는 걸작이라 감히 말씀드립니다. 아, 오늘 영하 11도예요. 나갔다가 와, 정초부터 따귀 맞는 느낌이었네요. 다락방님도 해피 뉴 이어!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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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핌에 두 번밖에 가지 못할 것이었다."


이 첫문장의 '핌'은  "오랫동안 그곳은 내게 하나의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로 표현됐던 디디에 에리봉의 고향 랭스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요양원이다.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통해 고백한 디디에 에리봉의 계급 탈주의 오디세이는 이제 그의 어머니인 서민 여성 노동자의 내밀한 개인적 늙음과 죽음의 서사를 사회학적 역사적, 철학적으로 치열하게 재해석하는 속편으로 이어진다. 


디디에 에리봉은 스스로를 아주 나쁜 아들이라 지칭하지만, 어머니의 사후 씌어진 이 '사회학적 전기'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십대 시절부터 하녀와 가정부 일을 하다 만난 노동자 계급의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55년간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다 끝내 끝까지 가고 싶어하지 않았던 요양원에서 고독사한 한 여인의 비참한 삶을 생생하게 복원하여 단순히 개인적 특수성에 한정시키지 않고 사회구조적, 제도적인 측면에서 조망하고 해석하여 유의미한 부고로 탈바꿈시켰다. 디디에 에리봉 특유의 내밀한 개인사의 사회학적 해부는 우리가 가족 관계 안에서 통과하는 필연적인 늙음과 죽음에 대해 그 어떤 이도 제시해주지 못했던 번뜩이는 통찰을 발견하게 한다. 


하지만 제약의 톱니바퀴들 안에서도 언제나 '게임'은 있다. 구조적 타성들에 의해 아무리 축소되고 위축되어 있다 해도 개인적 혹은 집단적 변화를 위한 자리는 있는 것이다.

-.28


디디에 에리봉은 단순히 모든 개인의 문제를 사회적, 구조적 문제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비록 늙음이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관계에서의 소외, 단절을 표상하는 요양원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한국의 상황과도 겹쳐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이 현재가 결국 우리 모두의 미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글쓰기는 변화의 자리를 예비한다. "노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지경까지 다다른다."는 그의 적나라한 표현은 "늙는 것이 죽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한" 우리가 반드시 도달하게 되는 비참한 존재의 단계가 된다. 디디에 에리봉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공명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그는 언제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면서도 그 안으로 침잠하는 대신 그 개인사를 사회학적 고배율 현미경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밝혀낼 수 있을까 싶은 지점까지 세세하게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난 아들이었고, 이제는 그렇지 않다. 어머니 생전에 우리 관계가 아무리 멀고 간헐적이었다 해도, 그리고 근본적으로 내가 평생 아들로서 노력한 적이 거의 없었다 해도 난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었다.

-pp.154


이 한 대목만 놓고 본다면 사람들은 오해할지 모른다. 그래, 그는 가부장적 구조에서 한 몸에 기대를 받고 자라 어깨가 무거운 아들이구나. 이제 이런 고백은 진부하지 않나? 이렇게. 그러나 디디에 에리봉이 말한 아들의 의미는 다르다. 그는 노동자 집안에서 공부한 유일한 아이였고, 유일한 게이였다. 실제 그는 <랭스로 되돌아가다>의 대대적인 성공 이후 타인이 아닌 친동생에게서 그의 성정체성의 암시에 관련한 적대적인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모자의 관계는 사회적 편견의 지형을 고스란히 재현한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든의 어머니가 뒤늦게 빠진 사랑을 가장 먼저 고백한 이는 바로 디디에 에리봉이었다는 점은 그녀가 아들에 대해 가지는 모순적인 애증을 드러낸다. 즉 노년의 사랑과 동성애가 이해하고 이해받을 수 있는 지대에 있다는 공통된 감각 말이다. 인종차별주의자에 극우로 변신한 늙은 노동자 어머니는 아들이 쓰는 글에서 자신이 차지해야 할 위치를 알았다. 이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존재, 다양한 층위에서 느끼는 정동이 결집된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시선은 그가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이야기해도 이 작가의 탁월한 글쓰기의 핵심을 보여준다. 즉, 그는 우리가 모두 단정하는 그것들의 지반을 기꺼이 흔들어댄다. 우리가 옳다,고 여기며 말하는 것들이 소외시키는 실재들에 대해서. 



디디에 에리봉이 결국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 한 문장에 응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철학에는 늙음의 자리는 없다."

이 철학은 실존주의다. 인간의 실존에 천착하는 이 철학에서 늙음을 은폐하고 묻어버리고 있다는 발견은 충격적인 발견이다. 인간 존재의 필연적 스펙트럼의 끝에 있는 시기를 부재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성립하는 철학을 우리는 신봉해왔다. 그러나 정작 거기에서 얘기하지 않는 것은 결코 '우리'로 연대하여 세력화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미래, 늙음이다. 


디디에 에리봉 어머니의 삶, 노년,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우리 자신의 그것에 대해 암시하고 촉구한다. 지금 소외시키는 그것들이 결국 우리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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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1-01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년에 홀로 있는 것은 참 슬프고 외로운 일이지요.특히 요즘은 비혼에 따란 1인 가구가 증가되는데 제대로 된 노후 대책을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면 향후 십 수년내에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됩니다.
블랑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lanca 2026-01-01 14:32   좋아요 0 | URL
결국은 다 홀로 그 길을 가게 되는 것 같아요. 새해 벽두부터 조금 우울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괜히 그랬나 싶기도 해요. 카스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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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언 매큐언의 <레슨>은 주인공 롤런드가 열한 살 때 피아노 레슨을 받는 장면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건 그리 특별한 도입부가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언 매큐언의 영리한 계략에 걸려든 것이다. 

이 이야기의 제목이 <레슨>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충격적이다. 당신이 어떤 것을 상상하든 그건 당신의 상상의 영역을 뛰어 넘고야 만다. 


일단 롤런드는 이름만 들어도 연상되듯 영국의 백인 남자다. 그의 아내 앨리사는 돌도 안된 아들을 남겨두고 갑자기 집을 나갔다. 그는 졸지에 정부로부터 한부모 지원금을 받는 싱글 대디가 됐다. 그의 생계를 해결해준 공권력은 그를 사라진 앨리사의 살해 용의자로 의심하고 신문한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실패한 시인이다. 

한때 그는 전도유망한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될 거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실제 그런 기대를 실현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던 피아노 강사 미리엄 코넬에게서 레슨을 받았다. 애석하게도 그 레슨은 단지 피아노 레슨만이 아니었다. 부모와 떨어져 소년들만 모인 기숙학교에서 사춘기에 진입하게 된 롤런드는 그녀의 교묘한 통제와 조종에 의해 성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말려든다. 그리고, 소년 롤런드는 우스꽝스럽지만 당시 쿠바 미사일 위기 상태로 전운이 고조됐던 국제 정세로 어쩌면 이 세계가 하루 아침에 멸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 의식으로 열한 살이나 많은 그녀에게 달려가 첫경험을 하게 된다. 둘은 이를 계기로 부적절한 관계의 구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관계가 의미하는 바를 깨닫게 된 것은 아주 나중, 심지어 롤런드가 노년기의 초입에 들어갔을 때다. 이언 매큐언은 이 아슬아슬한 어쩌면 역겹기까지 한 관계를 그 관계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사춘기 소년의 치기, 욕망, 조급함과 그 소년을 어떤 의미로든 사랑하고 소유하고 싶었던 젊은 여자의 미숙하고 불안한 통제욕과 교차시키며 놀랍도록 강렬하고 노련하게 형상화한다. 이 이야기를 이 칠백 쪽에 육박하는 긴 이야기의 저류로 은밀히 침투시킨다. 

우리는 이제 그런 위험한 경험을 하게 된 소년이 성장해 어떤 어른으로 되고 심지어 어떻게 노인이 되는지까지 그저 이언 매큐언의 세련된 언어의 쾌속정에 올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아직 어린 아들을 롤런드에게 남겨두고 소설을 쓰겠다고 충동적으로 집을 나간 아내 앨리사는 언뜻 보면 무책임해 보이고 무모하다. 앨리사라는 캐릭터는 비현실적이다. 그런 그녀가 독일 문학계의 거물이 되고 심지어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성공한다는 스토리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고는 위대한 소설가가 될 수 없고, 남성 작가는 가정을 유지하며 할 수 있는 그것을 여성은 갖지 않거나 기꺼이 버리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상대적으로 가정과 가족을 버리고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캐릭터가 언제나 남자였던 진부한 클리쉐를 작가가 전복한 걸까. 어떤 것을 향한 강한 열망으로 강력한 모험을 감행한 결과는 외부적인 성취가 다가 아닌 것이라는 결말은 또 다른 이야기다. 노년의 앨리사는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꿈꾸던 피아니스트도 시인도 되지 못한 채 라운지바 피아니스트가 된 롤런드는 가족으로 둘러싸여 다복한 나날을 보낸다. 물론 이언 매큐언은 이런 단편적인 이야기로 만족할 작가가 아니다. 


롤런드에게는 어머니가 첫결혼에서 낳은 이부 형과 누나가 있다. 어머니 로절린드와 군인 출신 아버지 로버트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아버지는 반세기가 넘는 결혼 생활 동안 강압적인 폭군 행세를 했다. 그러나 이 거칠고 통제적인 남자는 아들인 롤런드에게는 이따금 다정한 부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롤런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에 일종의 숨겨진 이야기가 있음을 알게 된다. 로절린드의 남편이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만나 생긴 아이를 그들은 유기한다. 그리고 롤런드는 있는지도 몰랐던 그 형을 노년에 만나게 된다. 여기에는 이언 매큐언 자신의 자전적 경험이 투영돼 있다고 한다.


모든 것들의 이면에는 상상 이상의 스토리가 있었고, 그 모순과 불협화음과 부조화 그 사이에 삶이 있었다. 우리가 흔히 삶에 기대하는 어떤 정합성과 균형은 어느 순간 하나의 환상이자 헛된 기대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오늘 가혹했던 사람이 내일 갑자기 따뜻한 손길을 내밀기도 하고 믿었던 누군가가 생각지도 못했던 비행이나 악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내가 확신했던 신념들이 하루 아침에 붕괴되기도 한다. 그 엔트로피, 그 혼란이 어떤 악이나 물리쳐야 할 비정상적 상태가 아니라 삶과 생명의 치트키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언제나 너무나 늦게 오고 만다. 


롤런드는 인생의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에게 기대했던 그 완벽함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헛되고 무의미했던 것인지 깨닫는다. 후반기에 기록한 사십 권의 일기장을 다 읽고 다 태워버리는 장면은 압권이다. 


롤런드에게 죽음의 한 가지 심각한 문제점은, 이야기에서 제외된다는 점이었다. 이야기를 이렇게 멀리까지 따라왔으니,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pp.674


롤런드의 개인적 삶은 공적 역사의 흐름과 분리될 수 없다. 2차 세계대전으로 전장에 파병된 남편의 부재를 롤런드의 아버지로 채우게 된 어머니로 인해 그는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독일 나치의 만행에 맞선 용기 있는 백장미단의 활약으로 아내가 태어날 수 있었고, 그들 사이에 아들 로런스가 태어날 수 있었다. 아내가 다시 자신의 고향인 독일로 돌아가 그 이야기를 씀으로써 그녀는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었고, 롤런드는 대프니와 재혼해 새 가정을 이루고 진짜 사랑을 다시 찾아갈 수 있었다. 이 모든 일련의 흐름은 특별한 개인의 것이 아닌, 시대와 역사의 격랑 사이에 맞물린 혼합물이다. 이언 매큐언이 끊임없이 한 나라의 사회, 정치, 역사, 경제를 이야기하고 인물의 입을 빌려 그것에 대한 나름의 견해나 감상을 피력하는 건 바로 이런 불가분성과 불가해성을 직시하기 때문이다. 롤런드가 자신의 앞에 놓인 죽음을 애석해한 것 또한 이 새로운 세기의 역사를 목도하는 관찰자가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깊은 감동을 받은 기억하고 싶은 대목이 있다. 싱글 대디가 된 롤런드와 공동 육육아를 하다 사랑에 빠져 결국 재혼을 결심한 그 순간 말기암 진단을 받은 대프니와 함께 그녀의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의 담긴 에스크강 근처에서 대프니가 아홉 살 아버지와 나눈 대화 장면이다.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어 죽음을 앞둔 딸은 아홉 살 때 그 아버지가 바로 그 장소에서 어머니와 연인이던 시절 전장에서 보낸 편지에서  "돌아가면 결혼해서 나 같은 딸을 갖자고 했대." 라고 말하며 그 순간 얼마나 행복했는지 롤런드에게 들려준다. 사랑을 함부로 말하지 않았던 시대, 표현하는 걸 약하다고 여겼던 당시에 그 문장은 사랑 그 자체로 화한 표현이었다. 사람은 죽음을 앞둔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 나온 그 순간의 서사로 위로 받을 수 있다. 묘한 아이러니다. 


레슨은 이언 매큐언의 노년에 완성된 역작이다. <속죄>에서의 그 서늘하지만 찬란했던 반전의 대목을 이제 이 작가는 자신이 직접 살아낸 삶의 레슨으로 숙성하여 더 깊고 아름답고 넓은 이야기로 우리 앞에 내어 놓았다. 이야기의 힘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고, 삶은 허망하고 헛되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믿게 하는 일. 

이언 매큐언이니까 할 수 있는 그런 일.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끌리는 이 매혹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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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12-09 1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다 읽고 그리고 이 리뷰를 다시 읽으러 왔어요. 블랑카 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다시 보자, 하고요. 확실히 블랑카님은 작품을 약간 멀리서 보실줄도 아는 분이라는 생각을, 지금 했습니다. 이 리뷰를 읽으면서 제가 인지한 지점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제가 인지하지 못한 지점들도 알게 됐거든요. 저는 이 책을 다 읽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과연 그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blanca 2025-12-16 09:24   좋아요 0 | URL
저도 사실 처음부터 들이닥치는 그 성인 여자와 중학생 남학생의 관계가 너무 황당해서 이게 뭐지? 했어요. 계속 이건 범죄, 폭력 아닌가, 하는 의심과 함께 굳이 왜 이렇게 여기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지? 했어요. 극단까지 밀어부치는 이언 매큐언이 불편한 지점이 있지만, 결국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뭔지는 알겠다 싶었는데, 그래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궁금증, 의아함은 저도 남아 있어요. 그리고 ㅋㅋ 이건 저의 비합리적 추정인데... 이언 매큐언이 어떤 경험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그렇지 않고서야. 여튼 이런 수많은 고민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써내는 것도 이언 매큐언이니 가능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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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경이로운 소설의 종반부를 향해 가고 있는데 차마 나아갈 수가 없다. 마치 인생의 종반부를 대리 경험하는 것 같아서. 삶의 레슨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묻는다면, 이언 매큐언의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불가능할지라도 있다고 믿게 만드는 책이니까. 좋고 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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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11-12 1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 님의 이런 평이라니요. 안그래도 읽어보고 싶었는데 꼭 읽어보겠습니다!!

blanca 2025-11-13 09:0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정말 놀라운 소설이에요. 이언 매큐언 나이 계산해 보고 그 연세에 이런 정교한 플롯의 소설을 쓸 수 있다는 데 또 한번 감탄했네요. 물론, 좀 거슬리는 몇몇 표현들이 있긴 합니다. ^^;;
 
AI는 인간을 꿈꾸는가 - 인간과 비인간, 그 경계를 묻다
제임스 보일 지음 / 미래의창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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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인간을 꿈꾸는가]라는 한글 제목과 표지가 개인적으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공지능 과학 분야 책이라기보다는 저자가 실제 듀크대학교 로스쿨 석좌교수임을 감안하면 AI의 법적 지위에 대해 고찰한 사회학 저서에 더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저자 제임스 보일은 다루어야 했던 주제의 방대함 때문에 거의 십 년에 걸쳐 이 책을 연구하고 집필했다고 한다. 법인격, 인공지능, 생명공학 분야를 종횡무진하는 책은 500페이지가 넘는데도 시종일관 특유의 리듬감과 깊이, 넓이로 읽는 즐거움을 준다. 

AI의 등장으로 인한 사회 전반적인 파급력 그 자체보다는 결국 우리 사회가 향후 정말 인간의 의식과 비슷한 범용 AI가 나왔을 때 과연 어떤 사회적, 법적 지위와 대우를 해줘야 할지에 대한 진지하고 심오한 공론화의 장을 열어준 책이다. 딱딱하고 어려울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 책은 일반 대중들이 쉽게 직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저자도 번역자도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와 <블레이드 러너>를 예로 들어 설명한 대목도 흥미로웠다. 


이 책의 원제는 [THE LINE]이다. 그 경계는 바로 인간과 기계뿐 아니라 법인, 비인간 동물, 혼종 동물, 형질 전환 개체, 키메라까지 포괄한다. 그리고 이 구분은 결국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인간만의 특수한 언어 능력이 챗봇의 등장으로 위협받게 됨으로써 보다 근원적인 질문인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 다다른다. 흔히 이 진단 기준으로 사용됐던 튜링 테스트를 AI가 간단히 통과할 수 있다는 데에서 우리는 머지않아 우리가 생각했던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경계선이 조정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미국에서 법인의 인격 개념이 도입된 역사에 할애된 장은 결국 기업을 소송의 당사자로 취급하기 위한 편의에 의해 도입한 법인의 개념이 얼마나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지점에서 왜곡되고 임의로 조정되었는지 그 취약점을 노출함으로써 결국 우리가 지금 본질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 또한 충분히 무너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지금 당장 AI는 의식이 없고 독립된 인격의 개념이나 법적 지위도 없지만 향후 그들의 법적 지위가 어떻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는 노릇이다.


유전공학의 기술로 서로 다른 두 종의 DNA를 재조합하거나 인간의 만능줄기세포, DNA를 포함한 동물들도 종을 구분하는 경계선에 혼란을 몰고 왔다.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에게 위험한 임상이나 각종 난치병의 치료제 개발을 위해 이 경계를 임의적으로 자의적으로 설정하는 것에 일말의 도덕적 가책을 면제하는 것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자는 하나하나 묻고 있다. 


결국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고유한 특성이라 믿었던 것들이 새로 등장한 기계나 유전자 조작 생명체로 무너질 때 우리는 과연 그 종을 가르는 경계선을 기꺼이 포기하고 그들을 우리와 동등한 인격권을 가진 존재로 존중하고 대우할 수 있는가에 대한 도발적인 물음은 쉽게 답하여질 수 없다는 결론으로 맺는다. 어쩌면 허무한 이야기로 오해 받을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질문을 하는 과정 그 자체에서 앎의 지평과 공감의 지대는 더 넓어질 수 있지 않을까. 근미래에 정말 특이점이 와 출현한 범용 AI가 독자적으로 자신의 인격권, 법적 지위를 주장할 때 과연 우리 사회는 어느 정도의 적절한 합의 기준을 마련할 수 있을지 상상하는 일이 SF적인 공상으로 그칠지, 아니면 현실이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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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0-29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 아시모프의 sf소설을 읽으면 안든로이드나 로봇의 권리(일종의 인격권)을 다룬 작품들이 있었는데,그런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의 상상은 무궁무진하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현재 AI개발속도를 보면 상상만 했던 일들이 현실이 될카봐 무섭기도 합니다.

blanca 2025-10-30 10:16   좋아요 0 | URL
챗봇 발달 속도 보면 이제 sf가 그저 허무맹랑한 공상이 아니구나 싶어요. 순간순간 섬뜩하죠.

단발머리 2025-10-30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 부분이 참 걱정스럽기는 하네요. 저는 워낙 기계치이고 문과이기도 해서 이쪽의 발전이 이렇게나 많이 이루어진걸 전혀 몰랐는데, 최근에는 좀 관심이 가더라구요.
이 책도 찬찬히 읽어봐야겠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blanca님!

blanca 2025-10-31 09:31   좋아요 1 | URL
AI가 나와서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많은 것 같아요. AI가 가짜 정보를 진짜처럼 제공하는 환각 현상도 있는데 잘 걸러지지도 않고요. 세상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 가끔은 참 숨이 가쁘다는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