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갈증 페이지터너스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빛소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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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라기보다는 이미 상실을 예비한 하나의 무모한 열정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상대라는 매개체를 필요로 할 뿐, 반드시 그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죽음과도 닮았다. 그것이 오는 것을 우리는 막을 수 없고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아내 뒤에서 외도를 일삼았던 남편을 잃은 에스코가 한큐 백화점에서 남자 양말 두 켤레를 사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언뜻 단조롭고 평화로운 일상을 가림막으로 드리운 채 펼쳐진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이 여인이 남편을 잃고 들어간 시가에서 시아버지와 맺은 부정과 청년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하인 사부로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저류를 통과할 때는 모든 사소한 행동들이 다른 의미로 확장, 심화된다. 미시마 유키오의 미문은 이들을 둘러싼 전원의 그 어떤 풍경에 대한 사소한 묘사 하나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을 통과한 모든 언어에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도사리고 있다. 


여자의 발소리처럼 가볍지도 않고, 중년 남자의 발소리처럼 침울하지도 않다. 발바닥에 젊음의 뜨거운 무게가 실려 있어, 이 어두운 밤 복도의 판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마치 신음처럼 듣게 했다.

-pp.34


시아버지 야키치와 바둑을 두는 에쓰코가 듣는 사부로의 발소리에 대한 묘사다. 이 대목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에스코의 사부로에 대한 은밀한 마음을 단번에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시들어가는, 퇴락해 가는 이 가문을 뚫고 들어온 단 하나의 희망, 미래, 청춘에 대한 예감이다. 그러나 물론 에스코와 사부로가 극복해야 할 수많은 난관은 간단치 않다. 신분, 연령 차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에쓰코는 사별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함께 산다. 여기에는 보이는 것 이상의 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녀의 생존은 거기에 기대어 있다. 만담가 같은 큰형 부부, 에쓰코를 감시하며 때로는 개입하고 방관하며 그녀의 삶에 끼어드는 야키치, 사부로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 하녀 미요. 그러나 그 무엇보다 사랑을 사치스러운 잉여의 감정으로만 인식하는 어린 사부로. 사부로는 에쓰코의 상대로서 더없이 부적절했다. 아니, 결국 그녀가 밟고 지나가고 말아야 했던 하나의 통과의례, 희생양, 제물로서 거기 필연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즉, 우리는 삶의 의미를 모색하고 아직 그것을 구하지 못한 동안에도 어쨌든 살아가고 있다. 찾아낸 삶의 의미를 소급함으로써 이 삶의 이중성을 통일하려는 욕망의 우리 삶의 실체라고 한다면, 삶의 보람이란 끊임없이 발현되는 이 통일의 환각, 아직은 소급할 수 없는 생의 의미를 가설적으로 소급해 보는 데서 생기는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pp.117


에쓰코가 마침내 찾아낸 삶의 의미는 불행히도 가설적으로 소급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 죽음과 대면하게 되니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그녀의 비참한 상황은 어떻게든 결국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삶의 무기력함에 대한 거대한 은유로 비치기도 한다. 처절하게 아름답지만 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결말에서도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들은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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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4-06-30 1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아. 오감을 일깨우는 표현입니다. 어떻게 저런 묘사를 할 생각이 들었을까요? 악상처럼 막 떠오르는 걸까요? 만약 글을 쓰는 게 업이었다면 그의 재능이 너무나 질투났을 것 같아요. 노력만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어나더 레벨의 감각. ㅠㅠ

blanca 2024-06-30 11:38   좋아요 2 | URL
천재적이더라고요. 미시마 유키오는 사상적으로 논란이 많은 작가지만 감각적 표현력 측면에서 감탄이 나오더라고요.
 
소송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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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T와 KTX를 구별하지 못했다. 당연히 열차가 지상으로 달릴 것이라 여기고 앉았는데 전광석화처럼 지하로 통과하면서 이따금씩 요동치는 느낌과 번쩍이는 불빛 등에 당황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카프카의 <소송>을 펴들었다. <소송>과 시속 300킬로미터의 고속열차는 이제 뇌리에 깊이 남을 것이다. 둘 다 인생의 거대 은유로.


첫 장부터 '체포'로 출발한다. 은행의 간부로 근무하는 요제프 K는 서른 살 생일에 영문도 모르는 채로 체포된다. <소송>은 그가 이 소송에서 자신을 소명하고 변호하기 위해 1년 간 법원을 찾아다니며 변호사와 화가, 신부 등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과정이 허무하게 처형으로 마무리지어지는 이야기다. 끝까지 그는 누가 대체 왜 자신에게 소송을 했는지 그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다. 당연히 자신이 무죄라 확신하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판사", "아직 이르지 못한 상급 법원"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카프카는 무수한 질문들을 제기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그 어떤 답도 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 모호함이 가지는 기이한 매력이 이 한없이 안개 속 미로를 헤매는 것만 같은 불친절한 이야기의 동력 그 자체다. 대체 이 동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요제프 K의 비극은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직장에서의 페르소나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객 상담을 해야 하고 심지어 이탈리아 고객의 관광에도 동행해야 한다. 자신이 이유도 알 수 없는 체포와 소송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상의 난제들을 해결하고 자본주의의 부속품으로서의 역할을 유지해야만 하는 그 질곡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우리의 모습과 놀랄 정도로 닮아 있다. 죽고 사는 문제 앞에서도 먹고 사는 문제를 방기할 수 없는 게 생존의 비극이다. 그러면서 정작 중요한 질문들과 시급한 일들은 주변부로 밀려난다. 카프카는 이 지점의 묘한 아이러니를 포착한 것이다. 요제프 K의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려 드는 주변인들의 모습의 묘사는 다분히 희극적이다. 내가 쓰러지면 그런 나를 짓밟으려는 무리들. 그 무리들 앞에서 어떻게든 나의 정상성을 연기해야 하는 압박감. 거대한 사회 체제의 부속품으로 기능하는 우리 인간들이 가지는 고뇌의 상황이다.



소송이란 무엇인가



요제프 K는 이 소송이 무결한 자신에게 제기된 불합리한 것으로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그런 그의 기대를 일거에 깨뜨리는 이 일에 도움을 주겠다는 화가의 말은 언뜻 모순처럼 보이면서 인간 실존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즉 그는 우리 인간이 바라는 석방이 우리의 삶 안에서 불가능함을 인지하고 있다. 우리 인간의 존재 자체가 무죄가 될 수 없으므로 "외견상의 무죄 판결", "판결 지연" 등의 미봉책으로 그 심판을 유예하는 것이지 결코 소송 그 자체에서 해방될 수는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소송'은 결국 인간의 실존의 한계, 필멸자로서의 숙명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평온한 일상이 영원할 수 없다. 생로병사의 기본 전제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실존은 그 자체로 유죄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한계, 공허함에서 우리는 어떤 순간이든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고 카프카는 그것을 직시하지 않고는 우리가 삶을 영위할 수 없음을 요제프 K의 소송으로 보여주고 있다. 카프카의 인식은 자의적인 것도 개인적인 것도 아니다. 그 보편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에 요제프 K가 욕설을 하며 처형 당하는 장면에서는 몸이 떨리는 것이다. 우리도 결국 그런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카프카의 마침표다.


<소송>은 우리가 일상의 지엽적인 문제들로 괴로움을 느낄 때 우리가 정작 중시해야 하는 것이 뭔지에 대한 아픈 각성의 순간을 줄 수 있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 이미 지리멸렬한 소송의 피고가 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만든 체제가 될 수도 있고 가치 규범일 수 있다. 연약한 육체에 갇혀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기본 명제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들과 마찰하고 때로 복종하고 종종 반역을 꾀할 것이다. 의료 기술의 발달, 다른 유흥거리들로 잠시 눌러 놓을 수도 있다. 그러다 대체 누가 왜 어떻게 그 소송을 제기했는지 알지 못한 채로 결국 죽게 될 것이다. 이 비관적인 숙명 속에 인간이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 사랑할 수 있는 것,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일 것이다. 염세적인 세계관이 절망으로 가지 않는 유일한 출구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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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2-07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blanca 2023-02-08 10:25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 - 되찾은 시간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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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릴 시간을 살고 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내가 잃어버린 나의 시간을 찾을 수 있는 읽기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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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우물 1 펭귄클래식 22
래드클리프 홀 지음, 임옥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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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28년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가 출간되었다. 같은 해에 평생 남장을 하고 다녔던 작가 레드클리프 홀의 <고독의 우물>은 출간 즉시 여성들의 동성애를 그렸다는 이유로 금서 처분을 받는다. 2022년에 1928년에 출간된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읽는 일은 우리 사회가 당시의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던 편견의 시선에서 얼마만큼 더 자유로워지고 진보했나를 자문하게 했다. 


그리고 비단 이 이야기는 성소수자의 이야기로서만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 세상이 부여하는 관습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고 그것은 때로 엄청난 소외감과 고독을 유발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근원적 고독, 소외감, 상실에 대한 처절하리만치 아름다운 애가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레드클리프 홀의 문장은 각별히 아름답다. 특히 주인공 스티븐이 태어나 자라는 고든 가의 시골 영지 모턴의 자연 풍광의 묘사는 절창이다. 스티븐이 그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동과 분리가 되지 않는 슬픔은 자신의 몸이 자신이 지향하는 남성성에 부합하지 않는 데서 오는 간극과 모순에서 느끼는 혼란과 닿아 있다. 아들을 바랐던 아버지 필립 경과 어머니 애너에게서 태어난 이 엉뚱한 아이는 결국 자신이 지향하는 남성성으로 자연스럽게 이행한다. 여성의 몸을 한 남성은 여성들과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랑은 번번이 어긋나고 매번 실패한다. 무엇보다 세상에 떳떳하게 인정받을 수 없었다. 세상이 요구하는 준거틀에 부합할 수 없었다. 세상이 누리는 양지에서 자랑스럽게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 안에 시체를 짊어지고 다녔다. 안젤라에 대한 사랑의 시체였던가?


무엇보다 미망인이 된 어머니의 반응은 충격적이다. 평범한 여성으로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기를 바랐던 애너는 딸이 남성의 옷을 입고 같은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행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심지어 그 이유로 딸을 사랑할 수 없었고 거부감을 느꼈다. 스티븐이 결국 목숨보다 사랑했던 유년의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러한 어머니의 단죄 때문이었다. 이후로도 스티븐은 사랑하는 제인을 그곳에 데려갈 수 없었다. 자신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보여줄 수 없다는 사실은 그녀를 내도록 괴롭혔다. 



영문학사 최초의 레즈비언 소설이라는 문구는 <고독의 우물>을 반 정도밖에 설명하지 못한 말이다.  그 틀 안에서 이 이야기를 받아들인다면 여러 한계가 보인다. 무엇보다 주인공 스티븐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남성이 되고 싶어했으며 여성과 사람에 빠질 때마다 자신을 남성적 위치에 상정한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여성과 사랑하지 않는다. 당시 이성애적 사랑에 빠질 때 남성이 점유하는 위계에 집착한다. 연인을 보호하고 경제적으로 지원하며 생활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모순에 빠진다. 이 이야기 안에서 남성성은 때로 폭력적이고 위압적이지만 강력하고 우월한 것으로 그려진다. 즉 레즈비언의 이야기이면서 여성과 여성성을 존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또한 성적 소수자들의 아픔과 소외감에 집중하면서 정작 흑인들을 검둥이라고 부르고 하대하는 장면들을 그린 것은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작가가 실제 귀족주의자였고 파시즘을 지원한 경력 등으로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여러 소수자적 집단에 속할 수 있다. 남성이자 백인인 성소수자가 될 수도 있고 흑인 이성애자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분류에 따라 어떤 곳에서는 우위를 점하거나 어떤 곳에서는 약자적 소외감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자신의 모든 행동과 말이 자신의 소수자적 정체성만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소수자가 인종차별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이 대목은 이 작품의 높은 완성도를 볼 때 상당히 아쉬운 대목이다. 


<고독의 우물>은 인간이 사회적 정상성 기준에 부합하지 못할 때 느끼는 고독을 처절할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답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스티븐이 끝내 극복해내지 못하고 만 것들의 잔향이 여전히 오늘날에도 심연을 드리운다. 대다수가 정상이라고 상정하고 만들어 놓은 틀 바깥으로 내쳐지는 수많은 주변인들의 고독과 그 소외감을 상상해 본다. 사랑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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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4-08 1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자들의 사랑을 그린 모리스, 를 읽은 적이 있어요. 포스터의 작품 같아요. 장편소설.
뒤에 반전이 있어 멋진 작품으로 기억하게 됐어요.
요즘 드라마에도 동성애 사랑을 그린 거 예고편인가 본 것 같아요. 세상이 진보하고 있는 중이네요. 늦은 감이 있지만.

blanca 2022-04-08 12:34   좋아요 2 | URL
페크님, 저도 <모리스> 정말 좋아해요.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새파랑 2022-05-07 0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축하드려요~!! 저도 이 책 읽으려고 계속 꺼내놨는데 아직 못읽었네요 ㅜㅜ 이번달에는 읽어봐야 겠습니다 ^^

blanca 2022-05-07 09:10   좋아요 1 | URL
오, 새파랑님 덕분에 알았네요.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05-07 17: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blanca 2022-05-08 08: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산소리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6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신인섭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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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애정에는 사회적으로 합의한 금기와 금제가 있다. 그것을 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은 가능하지만 대단히 예민하고 어려운 과정이라 자칫 발을 헛디디면 저속한 배설,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산소리>에서 어려운 지점을 여러 번 통과한다. 그가 통과하며 말한 언어들은 전락하지 않으려 분투하지만 그 노력은 섬세하게 감추어져 있다. 우리는 그저 세련되게 정제된, 정화한 인간의 근원적 흔들림에 대해서만 포착할 수 있을 뿐이다. 역시 가와바타 야스나리라는 말이 나오는 작품이다.


주인공 신고는 육십 대의 할아버지다. 기실은 사랑했던 여자의 동생과 결혼했고 전쟁에 참전했던 아들 슈이치는 아름다운 아내 기쿠코를 두고 끊임없이 외도를 하고 마약 중독에 빠진 남편과 불화하여 친정에 돌아온 딸 후사코는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가정 문제에 개입하여 해결해 주지 않는 아버지 신고를 원망한다. 여기에서 신고가 가장 안쓰러움을 느끼고 애정과 때로 욕망을 느끼는 대상은 며느리인 기쿠코다. 이 욕망은 저급하거나 화급하지 않고 대단히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 그것은 남편에게서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과 사물과 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 풍광에 대한 공통의 공감을 기반에 둔 동지애적 것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저변에서 신고의 꿈을 통해 신고가 욕망하는 것들이 시시각각 드러난다. 


그는 며느리를 사랑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남녀의 그것과 동일하냐는 의문에 대한 답은 애매하다. 그 지점을 대단히 정묘하게 감침질함으로써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신고가 그렇고 그런 욕망에 이끌리는 노인으로 추락하는 것을 방지한다. 전후 조금씩 추락하고 붕괴되는 개인 군상이 가족의 틀 안에 모여 어떻게 나날을 영위해 나가는지를 그 사소하지만 귀한 일상성을 통해 그려내는 작가의 노련한 언어들에는 묘한 중독성이 있다. 


"우리들도 지하에 천 년이나 이천 년 정도 묻혀서 죽지 않고 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

기쿠코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땅속에 묻혀 있다니."

"무덤이 아니고 말이다. 죽는 것이 아니라, 쉬는 거야. 정말로 땅속에라도 묻혀서 쉴 수 없는 것일까. 오만 년이나 지나서 일어나면 자신의 고민도 사회적 난제도 완전히 해결되고 세계는 낙원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

-pp.379


며느리와 시아버지는 이런 대화가 일어나는 관계다. 그것은 시종일관 생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이고도 근본적인 의문과 심오한 성찰과 맞닿아 있다. 신고는 끊임없이 아들 슈이치의 외도로 인해 파생되는 일들에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고 그것을 해결하려 애쓴다. 그는 아들 대신 죄책감을 느낀다. 자신에게는 없는 젊음과 삶의 시간들이 쌓여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누리지도 인지하지도 못하는 아들을 대신해서 그가 느끼는 생의 비의와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신비로움들은 며느리와의 대화들로 표출된다. 


마치 죽음을 예고하는 것 같았던 "산소리"의 결말은 그러나 죽음이 아니다. 어딘가에서 여전히 신고는 계속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다. 그가 바랐던 것처럼 그가 비록 죽어서도 쉬는 것처럼 오만 년이 지나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 깨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는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고민과 상처와 상실이 깨끗하게 잊히고 풀려 있을지도. 그러나 산다는 일은 또다른 종류의 고뇌와 고민을 또 품고 올 것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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