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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지금 나의 깨달음, 앎을 가지고 다시 스무 살이 된다면... 나는 더 행복해질까? 젊고 에너지가 넘치던 그때로 돌아가서 무모하고 어리석었던 실수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한층 근사해질까? 그렇다고 여겼던 것은 삼십 대이고 그건 아니라고 체념하게 된 것은 사십 대이다. 시간은 내 바깥을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통과하여 흐른다는 것은 바로 하루키의 이야기다. 즉, 지금의 나를 스무 살의 나로 변환시키는 행위는 그 시간의 통과 자체를 무용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지금 나의 기억과 의식을 가지고 다시 스무 살을 경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열일곱 살 소년과 열여섯 살 소녀의 아름답고 아련한 사랑의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문장 하나하나가 산문시의 그것처럼 정제되어 있고 빛난다. 순식간에 소녀에 대한 마음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소년을 눈앞에 불러온다.
마치 수천 가닥의 보이지 않는 실이 너의 몸과 나의 마음을 촘촘히 엮어가는 것 같다. 네 눈꺼풀이 한 번 깜박일 때도, 입술이 희미하게 떨릴 때도 내 마음은 출렁인다.
-pp.12
소년의 마음에 소녀의 몸이 연결되는 것. 소녀의 이야기로 축조된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 진짜 소녀가 있다고 주장하는 그곳. 그 여름의 열일곱 살과 열여섯 살은 가상의 도시를 함께 건설해 나간다. 이 도시는 기묘하다. 모든 욕망과 꿈이 실현되는 이상적인 곳이 아니라, 간소하고 엄격하고 건조한 곳, 사람들이 그림자를 지니지 않은 곳이다. 시계탑에는 바늘이 없고 소녀가 일하는 도서관에는 책이 없다. 이야기는 현실 세계에서의 소년의 성장과 소녀와의 헤어짐, 그 가상의 도시에서의 소녀와의 재회로 넘나든다. 그 도시에서의 소녀는 어른이 된 소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꿈 읽는 자'로서의 역할을 보조할 뿐이다.
현실에서 소년은 차곡차곡 나이를 먹어 어느덧 마흔다섯 살이 되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시골의 작은 도서관의 관장으로 취임하며 그 도서관의 설립자이자 고문인 노인 고야스를 만나게 된다. 치마를 입는 노인의 캐릭터는 상당히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주인공이 이런저런 도서관 일로 헤맬 때나 , '그 도시'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감정으로 고민할 때마다 나타나 실질적인 조언을 해준다. 고야스가 주인공의 나이에 사고로 아내와 아이를 잃고 사재를 털어 설립한 도서관의 관장으로 재직하지만 그 자신도 결국 심장마비로 사망한 유령이라는 반전은 그 둘의 관계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고민하는 그림자와 본체와의 분리와 통합에 대한 그의 해석은 현실에서 우리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기능하는 사회 생활에 대한 심오한 조언 같아 귀 기울여 듣게 된다.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 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pp.452
주인공은 그 도시에서 분리된 그림자만 벽 바깥으로 탈출시킨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 도시에서 거주하려면 기꺼이 자신의 그림자를 포기해야 한다. 이 그림자는 현실에서 우리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 입는 일종의 역할의 옷이 아닐까 싶다. 내가 믿는 나, 그렇다고 믿으며 기능하는 나의 모습이 그림자일 것이다. 그것이 무의미한 껍질이라 폄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게 바로 나라고 섣불리 단정 짓지도 않는 그 경계에서 하루키는 삶과 자아를 다룬다. 현실과 가상의 세계의 끊임없는 왕복은 결국 우리의 의식 속 심해를 탐구하는 과정의 은유다. 내 안에 가상의 도시를 짓고 벽을 세우고 때로는 그 벽을 넘어 탈출하기도 하고 다시 회귀하기도 하는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묘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루키 월드는 어떤 논리적 정합성으로 독자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저에 있는 깊은 의식에 대한 천착의 울림으로 그 이야기에 직관적으로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다. 이게 말이 되나? 같은 질문은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말이 되기 이전에 어, 어, 하면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 세계는 모두에게 낯선 곳이 아니라 그런 것일까? 우리는 모두 우리의 내면에서 만난다.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열여섯 살 소년의 등장은 결국 이 현실과 도시의 세계의 통합을 위한 것이었다. 정규 교육 과정에서 이탈하고 세상과도 소통하지 못하는 소년은 오직 도서관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내면에 개인화된 서고를 만들어 나간다. 어느 날 그가 사라지고 주인공이 그 도시에서 소년과 재회하며 역할 분담을 하게 되는 결말은 결국 이 형상화된 인물들이 어쩌면 주인공의 내면의 여러 요소들을 인물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하게 한다. 심지어 유령 고야스까지도.
"그래요. 이 도시에는 현재뿐입니다. 축적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덮어쓰이고 갱신됩니다. 그게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계입니다."
-pp.738
소년의 축적에 대한 이야기는 이 761페이지의 이야기가 결국 말하고자 한 핵심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뭔가를 쌓아나간다고 착각하며 살아가지만 결국 삶의 어느 순간, 내가 쌓은 것은 내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아프게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소년은 하고 있다. 이 세계는 현재뿐으로 순간순간 갱신되고 있다. 그 새로움은 그 자체로 순간을 만들고 그 속의 나는 매시간 다시 태어난다. 그 이행은 진실의 유동성을 만들어 나간다. 고정되고 영원불멸인 진실은 없다. 진실은 끊임없이 변하고 갱신된다. 그것은 하루키의 말이기도 하다.
중편의 소설을 발표하고 사십 년이 흐른 후 장편으로 개작한 이야기는 이제는 노년으로 접어든 하루키 월드의 집대성으로 보인다. 그때 쓸 수 없었던 이야기는 작가 인생의 흐름과 더불어 숙성되어 더 깊이 있고 넓은 이야기로 확장, 심화되어 독자 앞에 나타났다. 삼십 년을 더 산 하루키가 인지한 세계와 깨달음을 내가 온전히 다 이해하고 체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먼저 깨달은 그가 언어의 병기를 써서 만들어 낸 이야기의 세계는 내 전체를 흔들었다. 무릇 좋은 이야기란 이런 것일 테다. 완벽하지 않아도 독자의 마음에 울림을 자아내는 이야기에는 작가의 삶 그자체가 들어가야 한다.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다. 더불어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작가 후기' 또한 명문이다. 그의 둔중한 마침표가 마음의 현을 건드린다.
이 이야기가 부디 끝이 아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