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사십대의 내 앞에 이십대의 내가 나타난다면 아마도 나는 상대를 반쯤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십대에 나를 알았던 사람 그 누구도 지금 이 나이의 내 모습을 상상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때의 나는 겁이 없었다. 추억 속의 나는 낯설다. 세월이라는 것은 신비롭다. 새로운 모든 걸 시도해보고 싶어했던 사람도 어느새 겁쟁이로 만들어버린다.


앤드루 포터가 돌아왔다. 텍사스 주에 사는 사십대 초반의 남자 화자로. 백인 중산층 남자. 서너 살의 아이가 있거나 없다. 결혼했다. 과거 대학 시절의 친구들과 재회하거나 혹은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젊은 여자를 통해 이삼십 대의 과거와 만난다. 나는 무언가를 세월과 함께 잃어버렸다. 그건 나다움일 수도 있고 내가 두고 온 그 무엇일 수도 있다. 대체로 이런 스타일의 이야기들이다. 언뜻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일 것 같은데 모든 이야기가 하나하나 다 새롭게 느껴진다. 앤드루 포터 특유의 섬세한 서정성은 내가 감각했지만 언어화할 수 없었던 수많은 모호한 감정들을 하나하나 소환하여 명명한다. 바로 그거였다. 


어떠다 이렇게 됐는지는 몰라도 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구분하는 시각을 잃어버렸으며 살인과 죽음 같은 문제라면 그저 다 슬플 뿐이다.

-<오스틴>


첫작품에서 '나'는 대학 시절 친구들과 파티에서 우연히 주거침입을 했다 집주인의 정당방위로 살해당하게 된 십대 소년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유일하게 아이를 낳은 '나'에게 친구들은 이 사건의 촌평을 요구한다. 나는 옳고 그름 그 너머에 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절절하게 이해할 수 있다. 옳고 그름에 선명하게 경계를 그을 수 있다고 믿고 흥분했던 시절이 있다. 이제 나는 그런 것과는 멀어졌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나는 일단 마음이 무거워진다. 살면서 많은 실수를 했고 그 대부분이 내가 생각했던 옳고 그름의 잣대 너머에서 벌어졌다. 나는 이제 확신이 무섭고 그 주장이 때로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그가 결국 친구들에게 답을 주지 못한 그 사정을 공감한다.


<라인벡>이라는 작품은 특히 마음을 울렸다. 연인 사이에 낀 나. 이런 구도는 청춘의 친구들 사이에서 흔하다. 이상하게 그 시절은 그랬다. 연인은 꼭 교집합 친구를 부른다. 그들의 권태, 갈등의 접점에 그 친구를 동원한다. 그 시간은 아름답기도 하고 기만적이기도 하다. 이십 년이나 그런 구도 속에서 한 연인의 사랑, 권태, 이별, 재결합의 경로를 함께 통과한 내가 마침내 그들에게서 걸어나오는 장면은 눈물겹다. 그건 성장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서글프고 그렇지 않다고 하기엔 또 동원할 다른 수사가 없다. 공허한 아름다움이다.


"가끔은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매달려 너무 애쓰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 알아? 그걸 놓아버리기가 너무 힘들어."

-<히메나>


나와 내 아내 앞에 나타난 여대생 히메나. 그녀는 나와도 아내와도 어떤 묘한 관계를 맺는다. 부부는 각자 그 관계에 대해 함구한다. 어느 날 히메나가 사라지고 부부는 각성의 순간을 맞는다. 어쩌면 히메나는 그들의 과거의 자신들의 모습의 환영일지도 모른다. "히메나의 이야기는 항상 바뀐다."는 문장이 갖는 의미다. 살면서 다시 쓰게 되는 과거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도 공유할 수 없다. 


표제작 <사라진 것들>에서 내가 죽은 친구의 연인과 함께 하게 된 마지막 삼십 분에 느끼는 그 묘한 환희와도 통하는 이야기다. 이 감정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그건 불륜도 외도도 아니다. 다만 어떤 순간이다. 앤드루 포터는 내 옆에 있는 사람과의 사이에 등장하는 제3자를 통한 그 모호한 비밀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통점은 그들이 환기하는 내 과거의 시간이다. 내가 감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어떤 것을 일깨우는 시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곳에서 내가 두고 온 그 무엇들을 뒤돌아보게 되는 시간. 


사라진 것들의 시간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4-01-23 0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휴 잠자냥 님에 이어 블랑카 님도 오별이라니!!

blanca 2024-01-23 09:32   좋아요 0 | URL
요새 아주 줄줄이네요. 이제 저는 미들마치로 갑니다.

잠자냥 2024-01-23 11:11   좋아요 1 | URL
다락방 님 우리 나이에.... ㅋㅋ 이거 오별 안 주기 어렵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blanca 2024-01-23 11:12   좋아요 1 | URL
맞아요. 우리 나이 ㅋㅋ 정곡을 때리시네요. 이것은 마치 딱 우리 나이 남자 버전 이야기예요.

새파랑 2024-01-23 11:44   좋아요 1 | URL
40대를 위한 책인가요? ㅋ이번주에 서점가서 구매해야겠습니다~!!

blanca 2024-01-23 11:45   좋아요 1 | URL
이 책 읽으면 앤드루 포터 만나보고 싶어집니다. 내가 느낀 개인적인 감정들이 실은 다 사십 대의 공통된 정서였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요. ㅋㅋ

감은빛 2024-01-24 0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이거 그냥 지나치기 어렵게 만드는 글이네요. 조만간 서점 가서 찾아봐야겠어요.

제목이 [사라진 것들]이라서 더 와닿는 느낌이네요.

blanca 2024-01-24 11:41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그 나이듦이 주는 소외감, 상실감이 그냥 절창이에요. 왜 내가 기분이 안 좋았지?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그랬던 게 결국 그런 거였더라고요. 강추입니다.
 
레티파크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산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까지 자라다 서울에 와서 줄곧 살았다. 부산의 바다를 보며 <레티파크>를 읽기로 했다. 일부러 노력한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일출과 일몰을 다 봤다. 언젠가 쏟아질 것 같던 별을 보고 감동 받았던 것처럼, 내가 늙고 죽는 건 거대한 자연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체념하는 순간을 다시 만났다. 


유디트 헤르만의 한국의 독자들에게 쓴 글(이 글 또한 정말 아름답다. 그냥 형식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고뇌와 고민과 정성을 가득 들인 흔적이 역력한 선물처럼)을 다시 읽으니 이 짧은 열일곱 편의 시 같은 이야기들이 의도했던 바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다채롭고 수수께끼 같은 의미가 실린 타인들의 일상"을 읽으며 사는 건 이런 거구나, 정말 이런 미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눈물겹구나, 했다. 


모든 이야기가 다 골고루 좋았고 마음의 현을 건드렸지만 특히 좋았던 이야기를 꼽아보고 싶다.


<페티시> 

떠난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 엘라의 이야기. 그 여자는 남자가 피워두고 떠난 모닥불을 다시 피우는데 유독 그 크기에 연연한다. "그녀는 불이 너무 커지면 누가 와서 자리를 함께할까 봐 두렵다." 왜냐하면 그녀는 떠난 남자가 돌아올 자리를 남겨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눈치챈듯 그녀의 곁을 차지한 사람은 놀랍게도 조그마한 아이다. 어쩌면 가장 어울리는 대상일지도 모른다. 아이는 작으니까, 남자가 떠난 자리를 다 채우지 않으면서 그가 돌아올 수 있는 공간을 남긴다. 그러나 아이도 결국 떠나야 하는 날이 오고 만다. 아이는 떠나며 외친다. "우린 출발해요." 떠나는 어른은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는 이별에서 출발을 연상하지 않는다. 거기에 아이가 온다. 기다리는 일에 등장한 이 꼬마 손님의 반전이 아름답다. 끝과 작별에 파고드는 새로운 시작과 출발. 


실제 유디트 헤르만의 아버지와의 사연이 투영되어 있다는 <시>는 늙어가는 아버지를 둔 우리 모두에게 호소하는 서정시다. 화자의 아버지는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쳤다". 그는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한다. 나는 아주 가끔 그런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가 좋아하는 자두 케이크를 사들고. 

당시 그는 시를 견디는 연습을 했다. 그는 시를 읽으면서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그에게 몹시,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는 걸 말해야겠다. 우리는 함께 그걸 연습했다. 그 병원에서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을 일은 그것 외에 많지 않았으니까.

-<시>

 

어쩌면 가장 무용한 시를 이런 참혹한 상황에서 함께 연습했을까. 사위도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붙잡고 딸은 함께 시를 읽는다. 부서지고 무너지는 아버지의 존엄을 찾기 위해. 그 마지막 보루는 가장 고상하고 가장 쓸데없어 보이는 시였다. 모든 무의미와 부조리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그 헛된 사랑의 힘. 그건 시였다.


<포플러 꽃가루>에서 모든 안정적으로 보이던 사랑은 붕괴한다. 시누이 관계였던 두 여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남자를 모두 잃는다. 그리고 그 둘만 남는다. 자연발화한 포플러 꽃가루. 사랑은 그런 거였을 거라고 마침내 체념하는 그 순간에도 그 생각마저 언젠가 버리게 될 수 있음을 상기하는 인물을 만든 작가의 머뭇거림이 너무나 좋다. 유디트 헤르만은 모든 각성의 순간을 잠정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완벽한, 완전한 깨달음은 삶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녀는 본능적으로 안다. 


<꿈>에서 같은 정신분석의를 공유했던 친밀했던 친구 사이는 끝나고, 굽타 박사라 불리는 그 의사와 테레자만 남는다. 

그는 거의 모든 질문에 답을 주지 않고, 거의 모든 질문을 열린 채로 놔둔다. 마치 단 하나의 질문에도 유효한 답은 없으며 어떤 결정에도 정말 타당한 근거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꿈>

그는 환자의 뒤에 서 있다. 조언하지도 분석하지도 않는다. 그저 거기 있을 뿐이다. 유디트 헤르만의 작가로서의 페르소나도 그런 것 같다. 그녀는 독자의 뒤에 서 있다. 그런데 굽타 박사가 테레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 존재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있는 것,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것은 중요하다. 흐린 형체임에도 확고한 크기를 가진 존재로서."


<교차로>에서 난동을 부리는 십대 세입자를 함부로 신고하고 내칠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은 타인의 삶 전부를 타자화할 수 없기 때문일 거다. 그 안에서 나의 과거를, 오늘을, 미래를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머니>에서 나의 어머니가 단짝 친구의 늙은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보살피고 심지어 그의 조카의 부고까지 챙기는 그 마음과도 통할 것이다. 그 오지랖은 생존의 치트키다. 나만의 것은 없다. 삶이란 그렇게 지탱할 수가 없다.


섣불리 가능한 아름다운 결말 대신 진한 여운을 남기는 모호한 말줄임표를 찍는 작가의 이야기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나간다. 그렇게 여러 날이 반복되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일출과 일몰의 약속처럼 약동하는 이야기들이 빛난다. 정말 진실한 이야기는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생략된 지점은 독자의 몫이다. 

그녀는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문장 하나하나는 모두 심연이라고. 이렇게 말할까, 아니면 다르게 말할까, 아니면 그냥 아예 말하지 않는 게 상책일까.

-<교차로>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4-01-17 0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네요, 블랑카 님. 특히 <페티시>의 모닥불 이야기가 너무 인상적입니다.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blanca 2024-01-17 11:43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진짜 좋아하실 거예요. 오랜만에 참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좋은 단편집이었어요. 정말 독특한데 잘 읽히더라고요.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거 사실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 작가는 그걸 제대로 해냈더라고요.

다락방 2024-01-17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땡투 드렸습니다. 부자되세요.

2024-02-01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01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지금 나의 깨달음, 앎을 가지고 다시 스무 살이 된다면... 나는 더 행복해질까? 젊고 에너지가 넘치던 그때로 돌아가서 무모하고 어리석었던 실수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한층 근사해질까? 그렇다고 여겼던 것은 삼십 대이고 그건 아니라고 체념하게 된 것은 사십 대이다. 시간은 내 바깥을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통과하여 흐른다는 것은 바로 하루키의 이야기다. 즉, 지금의 나를 스무 살의 나로 변환시키는 행위는 그 시간의 통과 자체를 무용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지금 나의 기억과 의식을 가지고 다시 스무 살을 경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열일곱 살 소년과 열여섯 살 소녀의 아름답고 아련한 사랑의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문장 하나하나가 산문시의 그것처럼 정제되어 있고 빛난다. 순식간에 소녀에 대한 마음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소년을 눈앞에 불러온다. 


마치 수천 가닥의 보이지 않는 실이 너의 몸과 나의 마음을 촘촘히 엮어가는 것 같다. 네 눈꺼풀이 한 번 깜박일 때도, 입술이 희미하게 떨릴 때도 내 마음은 출렁인다.

-pp.12


소년의 마음에 소녀의 몸이 연결되는 것. 소녀의 이야기로 축조된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 진짜 소녀가 있다고 주장하는 그곳. 그 여름의 열일곱 살과 열여섯 살은 가상의 도시를 함께 건설해 나간다. 이 도시는 기묘하다. 모든 욕망과 꿈이 실현되는 이상적인 곳이 아니라, 간소하고 엄격하고 건조한 곳, 사람들이 그림자를 지니지 않은 곳이다. 시계탑에는 바늘이 없고 소녀가 일하는 도서관에는 책이 없다. 이야기는 현실 세계에서의 소년의 성장과 소녀와의 헤어짐, 그 가상의 도시에서의 소녀와의 재회로 넘나든다.  그 도시에서의 소녀는 어른이 된 소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꿈 읽는 자'로서의 역할을 보조할 뿐이다. 



현실에서 소년은 차곡차곡 나이를 먹어 어느덧 마흔다섯 살이 되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시골의 작은 도서관의 관장으로 취임하며 그 도서관의 설립자이자 고문인 노인 고야스를 만나게 된다. 치마를 입는 노인의 캐릭터는 상당히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주인공이 이런저런 도서관 일로 헤맬 때나 , '그 도시'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감정으로 고민할 때마다 나타나 실질적인 조언을 해준다. 고야스가 주인공의 나이에 사고로 아내와 아이를 잃고 사재를 털어 설립한 도서관의 관장으로 재직하지만 그 자신도 결국 심장마비로 사망한 유령이라는 반전은 그 둘의 관계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고민하는 그림자와 본체와의 분리와 통합에 대한 그의 해석은 현실에서 우리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기능하는 사회 생활에 대한 심오한 조언 같아 귀 기울여 듣게 된다.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 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pp.452


주인공은 그 도시에서 분리된 그림자만 벽 바깥으로 탈출시킨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 도시에서 거주하려면 기꺼이 자신의 그림자를 포기해야 한다. 이 그림자는 현실에서 우리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 입는 일종의 역할의 옷이 아닐까 싶다. 내가 믿는 나, 그렇다고 믿으며 기능하는 나의 모습이 그림자일 것이다. 그것이 무의미한 껍질이라 폄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게 바로 나라고 섣불리 단정 짓지도 않는 그 경계에서 하루키는 삶과 자아를 다룬다. 현실과 가상의 세계의 끊임없는 왕복은 결국 우리의 의식 속 심해를 탐구하는 과정의 은유다. 내 안에 가상의 도시를 짓고 벽을 세우고 때로는 그 벽을 넘어 탈출하기도 하고 다시 회귀하기도 하는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묘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루키 월드는 어떤 논리적 정합성으로 독자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저에 있는 깊은 의식에 대한 천착의 울림으로 그 이야기에 직관적으로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다. 이게 말이 되나? 같은 질문은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말이 되기 이전에 어, 어, 하면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 세계는 모두에게 낯선 곳이 아니라 그런 것일까? 우리는 모두 우리의 내면에서 만난다.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열여섯 살 소년의 등장은 결국 이 현실과 도시의 세계의 통합을 위한 것이었다. 정규 교육 과정에서 이탈하고 세상과도 소통하지 못하는 소년은 오직 도서관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내면에 개인화된 서고를 만들어 나간다. 어느 날 그가 사라지고 주인공이 그 도시에서 소년과 재회하며 역할 분담을 하게 되는 결말은 결국 이 형상화된 인물들이 어쩌면 주인공의 내면의 여러 요소들을 인물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하게 한다. 심지어 유령 고야스까지도. 


"그래요. 이 도시에는 현재뿐입니다. 축적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덮어쓰이고 갱신됩니다. 그게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계입니다."

-pp.738


소년의 축적에 대한 이야기는 이 761페이지의 이야기가 결국 말하고자 한 핵심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뭔가를 쌓아나간다고 착각하며 살아가지만 결국 삶의 어느 순간, 내가 쌓은 것은 내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아프게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소년은 하고 있다. 이 세계는 현재뿐으로 순간순간 갱신되고 있다. 그 새로움은 그 자체로 순간을 만들고 그 속의 나는 매시간 다시 태어난다. 그 이행은 진실의 유동성을 만들어 나간다. 고정되고 영원불멸인 진실은 없다. 진실은 끊임없이 변하고 갱신된다. 그것은 하루키의 말이기도 하다.


중편의 소설을 발표하고 사십 년이 흐른 후 장편으로 개작한 이야기는 이제는 노년으로 접어든 하루키 월드의 집대성으로 보인다. 그때 쓸 수 없었던 이야기는 작가 인생의 흐름과 더불어 숙성되어 더 깊이 있고 넓은 이야기로 확장, 심화되어 독자 앞에 나타났다. 삼십 년을 더 산 하루키가 인지한 세계와 깨달음을 내가 온전히 다 이해하고 체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먼저 깨달은 그가 언어의 병기를 써서 만들어 낸 이야기의 세계는 내 전체를 흔들었다. 무릇 좋은 이야기란 이런 것일 테다. 완벽하지 않아도 독자의 마음에 울림을 자아내는 이야기에는 작가의 삶 그자체가 들어가야 한다.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다. 더불어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작가 후기' 또한 명문이다. 그의 둔중한 마침표가 마음의 현을 건드린다. 


이 이야기가 부디 끝이 아니기를...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3-09-13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 블랑카 님의 리뷰 너무 좋네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하셨지만 그럼에도 제가 이 책을 읽게 될 재미를 조금도 해치지 않을 것 같아요.

blanca 2023-09-13 13:07   좋아요 2 | URL
다행이네요. 물론 부족하고 아쉬운 대목도 있어요. 작가가 이미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를 위해 인물을 활용하는 느낌이 있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평범한 사람을 넘어서는 지점을 통과했고 그걸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여느 다른 소설들과는 정말 달랐어요. 일단 문장들이...특히 첫 챕터는 그 누구도 이 사람을 흉내는 내더라도 하루키만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는 없겠구나 싶더라고요.

보물선 2023-09-13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 다 읽으셨네요! 리뷰 좋아요♡

blanca 2023-09-13 13:08   좋아요 1 | URL
벽돌책이었는데 워낙 문장이 좋아서 그냥 쭉쭉 나가더라고요. 아쉬워요. 무엇보다 작가 나이를 생각할 때 저는 역주행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안 읽어본 작품들을 하나하나 독파해 나가야겠어요.

호시우행 2023-09-13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찜했어요.

blanca 2023-09-13 13:09   좋아요 0 | URL
호시우행님 즐거운 독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거라 믿고요.

책읽는나무 2023-09-13 1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장 하나 하나가 하루키의 소설을 직접 읽는 듯한 느낌입니다.
문장 속에서 블랑카 님의 세상을 보는 시선 또는 소설을 대하는 자세랄까요? 그런 모습을 본받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blanca 2023-09-13 13:11   좋아요 1 | URL
이 소설은, 정말 묘한 구석이 있는 게 제가 고민하던 문제들을 다 들킨 기분이 들더라고요. 보통 그런 진지함을 기대하며 소설을 읽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읽다가 멈추고, 줄치고, 플래그 붙이고 그랬답니다. 그리고 저를 본받으시면 안 됩니다. ㅋㅋ

새파랑 2023-09-14 0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이야기가 끝이 아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돌아가고 싶은곳이 있다는건 행복한거 같아요. 그게 가상의 기억? 꿈? 이더라도요 ㅋ

이 책 다시 읽고 싶어집니다^^

blanca 2023-09-14 10:03   좋아요 1 | URL
주인공이 다시 젊어지는 장면 있잖아요. 강에 발을 담그고 과거로 과거로. 이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요. 마치 주인공처럼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암스테르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4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 좋을 때에 좋은 우정을 유지하기란 쉽다. 그러나 각자의 상황이 여의치 않고 하필 서로가 친구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누를 단추 앞에 서 있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그때에도 우리는 담백하고 좋은 친구로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내 삶이 엉망인데 하필 친구가 나의 열등감을 자극하고 거기에 더한 무엇을 투척해 준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 우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언 매큐언의 블랙 코미디는 여기에서 벌어진다. 기본적으로 그는 낭만화와 이상화를 경계한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둘러싼 페르소나로 사회에서 기능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참극은 가까이에서 지켜보면 터무니없이 힘을 잔뜩 준 진지한 희극에 가깝다. 고작 단지 그것 때문에 우리는 서로와 자기 자신을 파멸시킬 수 있는 어리석은 존재다. 


여기서 만나 얼싸안았던 친구들은 떠났다.

각자 저마다의 과오를향해.

W.H. 오든 [십자로]


제사에 인용된 오든의 [십자로]는 <암스테르담>의 핵심 메시지를 응축하고 있다. 친밀한 우정을 나누고 서로를 믿어서 심지어 각자가 쇠락해졌을 때의 안락사의 동반자로 생각했던 클라이브와 버넌은 그 과오에서 결국 다시 만난다. 


마흔 여섯에 죽은 몰리 레인의 장례식에서 한데 모인 중년의 네 남자들은 남편 조지를 비롯해서 모두 어떤 시기이든, 어떤 형태로든 그녀와의 한 시절을 공유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학교의 하숙집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차기 총리로 부상하는 외무장관 가머니 또한 그랬다. 그는 몰리에게 자신의 독특한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진을 찍게 한다. 이 사진은 세상에 드러날 시 그의 정치 인생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는 은밀한 비밀이었다. 그의 이런 복장 도착 사진 특종건을 둘러싼 긴장감은 언론인 버넌과 작곡가 클라이브의 갈등에서 정점에 이른다. 둘의 의견차는 작곡가 클라이브가 하필 자신의 음악적 영감의 순간에 목격하게 되어 무심코 방관하게 된 강간 사건의 증언을 둘러싸고 우정의 파열음을 내고 만다. 가머니의 사진 보도로 언론사에서 조기 퇴직을 하게 된 버넌은 자신의 좌절감을 친구 클라이브가 보낸 엽서에 모두 쏟아내고 마침내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클라이브는 클라이브대로 자신의 은밀한 방조를 경찰서에 고발한 친구 버넌에 대한 배신감으로 몸을 떨게 된다. 서로의 윤리적 결점을 각자의 위치에서 심판하고 고발하며 둘은 각자의 윤리의 염결성과 입지의 정당성을 변호하게 되지만, 재회한 곳은 바로 그 서로가 얼싸안았던 그 지점이다. 암스테르담은 결국 이 두 친구에게 남긴 마지막을 깔끔하게 끝맺음 할  합리적이고 호의적인 장소로서의 첫인상과는 달리 의도치 않았던 죽음의 장소로 둔갑하게 된다. 배신과 어처구니 없는 사고의 장소로. 


우리 모두는 어떤 면에서 결백하지 않다. 윤리의 자잘한 체로 거르면 그 위에 떠오를 많은 죄과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을 영위하는 우리들을 포박한다. 그 위선이 드러날 때 각자가 추구했던 이상화된 길은 오명과 오점으로 얼룩진다. 선한 처음의 의도에서 벗어나 저마다 목표하지 않았던 엉뚱한 곳에서 서로 반목하고 어처구니 없는 결말을 맞을 수도 있다. 이런 삶의 아이러니를 이언 매큐언보다 더 생생하게 설득력 있게 그릴 수 있는 작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서로 사랑했던 친구를 죽이게 되는 비극이 희극처럼 느껴지는 건 그게 바로 삶의 아이러니의 핵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진짜 나의 그 머나먼 간극에서 이언 매큐언이 만들어낸 정밀한 촌극. 인간은 생각한 것처럼 대단치도 그렇다고 함부로 폄하할 존재도 아니라는 명징한 자각을 주는 작품에 박수를 보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3-03-17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7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2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미와 뼈대가 있는 소설이 내 소원"이라는 박완서 작가의 말이 여실히 증명된 작품인 것 같다. 순식간에 빨려 들어갈 정도로 재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본주의의 속악함과 가부장제도의 그 주도면밀한 세뇌성을 다층적으로 진지하게 다룬 작품이라 묵직하다. 서문에 인용한 전경자의 <꿈>에 나온 아득한 옛날 왕뱀한테 반한 새끼여우가 마침내 왕뱀을 찾아 땅으로 내려간 날, 공교롭게도 왕뱀은 용 되어 하늘로 오르던 날이었다는 우화 같은 시가 애틋하게도 여운이 길어 한참 머뭇대다 드디어 의사 심영빈의 초등학교 동창 광과 현금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갔다. 


심영빈은 초등 시절 동창 현금을 두고 친구 광과 묘한 애정 다툼을 벌인다. 사춘기에 들어서며 현금에 대해 느낀 은밀한 사랑은그녀의 집 앞에 피어 있던 능소화로 환기된다. 결국 이 짝사랑은 사십 대 중반이 되어 우연히 재회하게 된 현금과의 외도로 귀결된다. 두 딸의 아버지이자 재벌가에 시집간 나이 차 많은 여동생 영묘의 오빠, 홀로 세 남매를 키워내고 며느리에게 이런 저런 유세를 떠는 어머니의 아들이기도 한 영빈은 이 모든 책임의 갑옷을 은밀하게 벗어 던지고 현금이라는 여자 앞에서만은 하염없이 욕망하고 설레고 허무해한다. 


불빛을 볼 때마다 가슴이 후둑후둑 오기 직전의 숲처럼 설레곤 했다. 곁에 있어도 한강만큼의 거리가 느껴지는 만큼, 헤어져 있어도 예민한 현 같은 게 당겨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녀, 그 소통의 끈은 미세한 바람에도 오묘하게 떨릴 것처럼 긴장돼 있었고, 영빈은 그 소리를 가슴으로 들을 때 살아 있음의 번뇌와 희열을 오싹하니 실감하곤 했다.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둘의 사랑이 중심 이야기는 아니다. 뼈대는 오히려 동생 영묘의 남편, 영빈의 매제 송경호의 때이른 죽음이다. 재벌가의 후계자였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폐암 진단을 받은 사실은커녕 죽음 자체가 가지는 의미도 모른 체 두 어린 아이와 젊은 아내를 남기고 눈을 뜨고 죽게 된다. 투병 과정, 죽음, 장례식도 하나의 전시 효과처럼 전시되고 사후 유언조차 남길 기회를 박탈하는 재벌가의 추악한 작태를 목도하게 되는 심영빈은 물질이 얼마나 인간의 정신을, 생명을 하찮게 폄하할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다. 자본주의의의 폐해는 추상이지만 남들이 부러워하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집안에서 한 사람의 생의 서사를 무참히 파괴해버리는 박완서의 서사는 현실의 요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우리가 끊임없이 욕망에 휘둘리며 결국 잃게 되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심영빈은 자신의 어머니까지 모시며 맞벌이를 한 아내를 두고 외도를 했다는 점, 아내가 단지 딸이라는 이유로 낙태를 하고 늦은 나이에 아들을 가지겠다는 일념으로 동창 광의 병원까지 찾아가게 한 가부장제의 방관자였다는 점에서는 분명 비난 받을 여지가 많은 주인공이다. 박완서는 여동생 영묘의 시가의 작태로는 물질만능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심영빈의 유약하고 자기합리주의의 뻔뻔함으로는 가부장제의 뿌리깊은 병폐를 드러냄으로써 이중의 뼈대를 갖춘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준다. 어쩌면 그 중간의 그물에 걸린 심영빈은 두 제도의 포로이자 은밀한 공모자로서 역할 했는지도 모르고 그 모습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된 농담>이 출간된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도의 질곡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서야 전경자의 시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아, 하루가 하루가 아니던 그 옛날"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걸어왔나. 여전히 우리는 만날 수 없는 가질 수 없는 것들을 향해 땅으로 추락하고 우리가 바라던 것들은 그 타이밍을 기가 차게 파악하고 승천해 버리고 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