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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 릴케의 로댕, 그 절대성과 상실에 관하여
레이첼 코벳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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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대의 거장 조각가 로댕과 이십대의 낭만파 시인 릴케가 함께 있는 모습은 언뜻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실제로 이 둘의 관계는 거의 부자 관계에 비견될 정도로 친밀했고 서로 주고 받은 영향의 파급 정도가 크다. 릴케가 오늘날의 릴케가 된 데에 로댕과의 교류는 결정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작용을 했다. 릴케가 이십대에 로댕을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릴케는 어쩌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종종 간과된다. 


저자 레이첼 코벳은 스무 살의 어느 날 어머니가 준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우연히 읽게 됨으로써 차후 만개할 이 책의 씨앗을 품게 된다. 릴케 자신도 아직 자리 잡은 시인이 아니었을 때 시인 지망생으로부터 받은 하나의 편지로부터 출발하여 한 청년의 삶을 예기치 않은 곳으로 인도하게 되었듯 릴케의 이 책 또한 저자에게 그런 작용을 하게 된다. 코벳이 로댕으로부터 그런 인도자의 손길을 발견한 릴케의 이야기에 매혹당한 것이 우연이 아니었듯이.


루브르 박물관의 그림들 앞에 앉아 그 그림들의 붓질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십대 시절의 로댕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는 한 해 전 딸을 잃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릴케의 삶의 출발에 대한 것으로 연결된다. 마침내 파리에 와서 로댕에게 밀려드는 서신을 처리하는 조수가 되어 로댕과 한적한 전원 뫼동에서 함께 살게 된 릴케의 이야기는 아직은 무명의 시인이었던 청년이 이미 엄청난 업적을 이룬 노예술가에게서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버림으로써 위대한 시인의 길을 걷게 되는지에 대한 놀랍도록 생생한 연대기의 복원이다. 


릴케는 로댕을 숭배한다. 사소한 오해로 로댕이 거의 릴케를 쫓아내다시피 한 이후에도 릴케는 로댕에 대한 마음을 쉽사리 접지 않는다. 릴케에게 로댕은 아버지이자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넘어서야 하는 하나의 장애물이기도 했다. 로댕의 스승이 "예술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다"라고 했던 이야기는 릴케에게 와서 비로소 실현되었다. 로댕이 늘그막에 추락하는 노추의 모습을 릴케에게 들킴으로써 릴케에게 죽음 앞에서 어떻게 의연해야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반면교사가 되었다는 결말은 서글프다. 


릴케의 시 '고대 아폴론의 토르소'에는 이 책의 제목이 된 시구가 나온다. 로댕과의 애증의 관계에서 마침내 릴케가 얻어낸 삶과 예술의 교훈은 애틋하고 의미심장하다. 예술가가 되는 것보다 삶을 먼저 살아야 한다는 뒤늦은 깨달음은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간직한 릴케의 아름다운 시들에 대한 하나의 대가였을지 모른다. 


릴케와 로댕이 흡사 사랑하는 부자처럼 친밀했던 날들. 로댕은 릴케와의 하루를 마감하며 침실로 떠나려는 그에게 '잘 자' 대신 항상 '봉 쿠라주'라고 했다. 릴케는 처음에 그런 그의 '힘 내!'라는 말이 의아했지만 마침내 늙은 아버지가 아직 젊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이해했다. 삶에도 예술에도 가장 필요한 건 결국 포기하지 않고 다시 힘을 그러모으는 것이라는 얘기는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공명하는 메시지다. 릴케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던 건 그러지 못했지만 그랬던 날들 로댕이 해줬던 마지막 인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힘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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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1-06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blanca 2023-01-09 18:2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덕분에 따뜻한 주말 보냈어용^^
 
진리의 발견 - 앞서 나간 자들
마리아 포포바 지음, 지여울 옮김 / 다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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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광대하다. 다루는 시간은 사 세기 가량이고 공간은 지구와 우주를 넘나든다. 분량은 팔백 페이지를 넘는다. 저자 마리아 포포바는 "나 자신의 전부를 쏟아부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요하네스 케플러, 마리아 미첼, 허먼 멜빌, 브라우닝, 마거릿 풀러, 찰스 다윈, 플레밍, 해리엇 호스머, 에밀리 디킨스, 레이첼 카슨의 "원자적 상호 관계의 일면"이 "교차점의 지도"를 이룬다. 포포바의 역할은 "광대한 규모의 사실주의"의 "의미의 해석자"로서 자리한다. 과학과 예술의 교차수분의 그림은 경이롭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하는 이 사소한 모든 고민들이 결국 40억 년이 지나면 사라질 "창백한 푸른 별" 위의 지엽적인 드라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야기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깨닫고 받아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존재가 지니는 의미와 무게를 고민하게 만드는 도발적인 책이다. 어렵지 않고 복잡하지 않으면서 아름답고 거대하고 무한한 책이다. 


이 경이로운 여성 과학자들의 이야기는 17세기 요하네스 케플러에게서 시작된다. 남성과 인습과 권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그녀들이 밟았던 새로 내었던 그 길은 남성들이 걸은 길과 어긋난 것이 아니다. 겹치고 만나고 때로 하나가 된다. 접점은 어쩌면 시대와의 불화일지도 모른다. 선견지명과 통찰은 항상 한 발짝 앞섰고 그것은 포용되거나 칭송되지 않고  기존의 기대와 통념과 반목했다. 그러니 남자 수학자 케플러의 어머니가 아들의 저작인 <꿈>에 대한 오해로 마녀 재판을 받게 되고 결국 죽음을 맞게 되는 이야기는 <진리의 발견>을 열기에 적합하다. 케플러가 자신의 <꿈>의 주석을 다는 일에 그토록 매달린 것은 그 이해의 간극을 채우기 위함이었고 죽은 어머니에 대한 그 시대에서 기초 교육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늙고 무고한 여자들에 대한 대변인으로서의 역할을 자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의 최초의 여성 천문학자가 되는 열두 살의 마리아 미첼이 19세기 작고 고립된 고래잡이 마을에서 아버지가 사준 망원경으로 일식을 관찰하다 경이로움에 몸을 떨고  허먼 멜빌이 동경해 마지않던 나다니엘 호손을 비평하며 "모든 대상은 무한하다"고 감격하고 마거릿 풀러가 에머슨에게 자신의 모든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넘긴 일, 에밀리 디킨슨이 오빠의 아내가 된 수전에게 끊임없이 연서를 쓴 일, 레이첼 카슨이 남편이 있는 도로시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 일들은 개별적인 사실들이 아니다. 그것은 형태가 다른 사랑들이다. 그 사랑들은 완전한 귀결도 아니고 완벽한 응답도 받지 못한 채 때로 발신자들의 열정으로 마침표를 찍을 때도 있지만 그건 그 자체로도 어쩌면 충분한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특별했고 끈질겼고 자신들의 창조의 동력이 되기도 했고 묘한 형태로 사후에 응답받기도 했다. 저자 포포바는 이러한 그들의 삶을 끊임없이 교차시키고 병행시키며 하나의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짠다. 


우리의 개별의 삶은 각자에게 거대하고 대단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영속적인 시간 차원에서 조망하면 때로 하찮고 허무하고 무의미해 보인다. 포포바가 이러한 이야기를 과학자들을 통해 반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떻게 우리의 영혼에 우리의 우주의 때로 우리의 세포에 남아 불멸하는지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안겨주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사라질 것이기에 하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으로 영원, 불멸에 합류하는 것이므로 존귀하다. 


나도 죽으리라.

당신도 죽으리라.

우주적 관점에서 아주 잠깐 자아의 그림자 주위로 뭉쳤던 원자들은 우리를 만들어낸 바다로 돌아가게 되리라.

우리 중에 살아남게 될 것은 기슭 없는 씨앗과 우주먼지뿐이리라.

-마리아 포포바 <진리의 발견> 


오늘 지금 여기에서 애타게 사는 당신과 나에게 새겨주고 싶은 이야기. 우리는 무한하다고 믿는 시간과 우주의 공간 안에서 유한하고  미소하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그 무한조차 유한하다면 여기 이 지점은 얼마나 흔들리며 한정된 것인가. 그걸 깨달을 때 삶과 사랑과 생은 눈물날 정도로 가치롭고 허무하도록 아름답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일도 벌써 과거가 되어 간다. 우리는 모두 과거로 돌아가는 존재들이다. 사랑하고 읽고 쓰는 일로도 찰나 같은 시간들이 앞에 있다. 존재는 하루하루 풀려 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무로 돌아갈 그날을 상기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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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2-23 14: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 다 읽으셨어요! 전 사놓고 그냥 보관만...ㅎㅎ

blanca 2021-02-23 14:19   좋아요 1 | URL
번역이 좋아서 금방 읽혀요. 잠자냥님도 시작만 하시면 완독 금방 하실 겁니다. 사실 이 책 한 권으로 이월 말까지 버티기로 스스로와 약속했는데... 음... 오늘이 23일이니까. 일주일을 ㅋ 제가 과연 책을 안 살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유부만두 2021-03-07 17: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다 읽었어요. 일주일 지났는데 아직 뭐라고 정리하기가 어렵네요. 태그는 잔뜩 붙여두었는데 그 구절들을 옮겨 써보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아마 전 블랑카 님처럼 리뷰는 못 쓸 것 같아요. ㅜ ㅜ

찰라와 영원, 티끌과 전 우주를 오가는 위인들, 또 흔들리는 인간들을 교차해가며 만나고 오니 인간사 허망하지만 또 소중하게 보여요. 그래서 더 많이 많이 읽고 배우고 생각하고 싶은데 ... 어쩌지요?

blanca 2021-03-07 18:05   좋아요 1 | URL
짝짝짝. 완독하셨군요. 그렇죠. 이 책 자체가 워낙 심오하고 거대해서 참 좋기도 했지만 그냥 흘려 보내기엔 뭔가 아직 다 읽은 듯한 느낌. 그래서 저 태그 붙인 부분을 필사했어요. 손은 아팠는데 이 과정에서 무언가 조금 정리되는 느낌이었어요. 구절들 옮겨 쓰는 것 충분히 의미 있습니다. 그리고 쓰는 과정에서 내가 정말 기억하고 받아들이고 싶은 대목도 정리가 되더라고요. 유부만두님 감상 저도 공감해요. 뭔가 정말 말로 다 설명하기 힘든 감정들이 드는데 이걸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저도 혼란스럽더라고요.

유부만두 2021-03-07 18:19   좋아요 1 | URL
저도 구절들을 따로 정리해 불게요. ^^ 이 책은 아직도 제가 읽는 (읽었던) 다른 책들 속에서 연결되고 있어요. 마치 이 책의 여러 위인들이 시간과 장소에서 교차하는 식으로요. 프루스트 3권에서 ‘친화력‘ 얘기가 나올 때 얼마나 반갑던지요.

참, 전 번역이 너무 엄격한 느낌이어서 영어책을 조금씩 읽어봤는데요. 영문이 더 리드미컬 하달까, 활기찹니다. 영어로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보려고요. (이런 계획 세운 책이 어디 한두 권이겠습니까마는요;;;;)
 
사자와 생쥐가 한 번도 생각 못 한 것들
전김해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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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 우화와 우리 전통 구전 설화가 엮여 책장도 잘 넘어가지만 멈추어 서서 한 번씩 생각에 잠기게 할 만큼 진지한 동화다. 진실이란 어렵고 복잡한 성인 이야기가 아니라 이렇게 간명하고 맑은 아이들의 이야기에서 더 쉽게 깨달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는 책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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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5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7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렉산더 맥퀸 - 광기와 매혹 현대 예술의 거장
앤드루 윌슨 지음, 성소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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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사가 된다는 건 거물이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심지어 자기 분야에서 전위적인 선구자의 역할을 맡는다는 건 대체 어떤 부담감과 압박감을 가져오는지 그 당사자의 마음을 짐작하는 일은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누군가의 가족이자 친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당위명제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그 두 세계의 균형점을 찾아 그 지점에서 줄타기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사적 개인과 공적 개인의 두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그 분열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통합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없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누리는 명성, 권력, 재력에만 주목하고 그 뒤안길에서 흘릴 눈물은 흔히 무시해버린다. 이제 그러한 이름을 가지고 자신에게 어떤 목적이 있어 다가오는 이들, 상업적 이윤을 끊임없이 창출해야 하는 부담감, 혁명적인 새로움을 항상 창출해야 하는 부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어린 시절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이 한 천재를 좀먹어 가는 과정에 동행하는 일은 참으로 힘겨웠다. 마치 그의 주변인, 심지어 그 자신에게 들어가 그러한 고강도의 삶을 체험하는 느낌, 그리고 그 비극적인 결말. 과연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알렉산더 맥퀸. 그의 이름은 거의 하나의 고유 명사가 되었다. 노동자 계층 가정에서 자라나 성적 학대와 빈곤에 시달리던 그가 최상류층으로 진입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다. 열두 살이 되자 그는 패션계의 거물이 될 거라는 것을 알았다고 능청스럽게 이야기한다. 패션 서적을 읽기 시작했고 디자이너들의 경력을 찾아봤다고 한다. 소년의 꿈은 실현되었다. 고모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진학하게 된 패션 스쿨 패션쇼에서 그는 '보그'의 이사벨라 블로의 눈에 들게 된다. 이후로 둘의 기이한 공생 관계는 난임이었던 블로가 맥퀸을 자신의 아들이자 또다른 자아로까지 생각하는 관계로 진전하게 된다. 천재적인 패션 디자이너에 빠진 블로는 맥퀸을 자신의 상류층 세계에 끌어들이고 지원하여 알렉산더 맥퀸이라는 브랜드를 완성하는 데 실질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맥퀸은 전위적이고 반역적이었고 혁명적이었다. 패션쇼 자체를 보수적인 세계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하나의 퍼포먼스로 그 자신의 위인전으로 격상시킨다. 언론의 혹평과 호평은 항상 동시에 쏟아져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인간 본능의 어둡고 심오한 악마적 분위기에 그는 침잠한다. 그의 노골적이고 기이한 옷들과 쇼는 그 자신을 유명하게도 만들었지만 그의 아킬레스건이 되기도 했다.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되었을 때 그에게 가해진 어마어마한 압력과 부담은 상상 이상이었다. 패션계는 냉엄하고 잔혹한 자본주의의 집약체였다. 그는 소진되었고 구속되었다. 약물과 방탕한 생활과 천재적 성취는 혼재되었다. 끊임없이 사랑하고 배신하고 배신 당하고 이용하고 이용 당하고 실험하고 선도하고 창조하고 절망하고 넘어지고 무너졌다 다시 일어섰지만 영혼의 쌍둥이 같았던 블로의 자살과 어머니의 죽음은 결국 그를 허물어뜨렸다.


"죽음은 슬픈 일이죠. 우울하지만 동시에 낭만적이에요. 죽음은 인생이라는 한 주기의 끝이에요. 무엇이든 끝을 맺어야 해요. 죽음은 새로운 것이 태어날 공간을 마련해 주니 긍정적이죠."


악동 훌리건이라는 호칭을 얻었던 맥퀸은 6형제 중 막내였다. 도저히 실현 불가능할 것 같았던 엄청난 부를 거머쥔 후에도 노모 앞에서는 목이 메는 아들이었다.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을 믿을 수 없었고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았던 어린 시절의 상흔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렀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무엇이 가장 두려운지 물었을 때 그가 한 대답은 슬프다. 대답은 "엄마보다 먼저 죽는 거요."였다. 맥퀸은 그러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썼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머니보다 먼저 죽지 않겠다는 약속과 자신이 세상을 향해 남긴 작품들이 남길 의미들을 기약하며 그는 새로운 것이 태어날 공간을 예비하고 떠나 버렸다. 


맥퀸의 친구는 그가 아무리 대가들에게 극찬을 받고 인정을 받아도 자존감이 낮았다고 얘기한다. 돈을 보고 접근하는 사람들, 순간의 새로움에 탐닉해서 끊임없이 그것을 강박적으로 쥐어짜야 하는 패션계, 본질적 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로 교환되는 세계에서 그는 불행했다. 그의 모습에서 읽는 자들은 스스로의 단편들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남긴 채 사라져버린 그의 비극적인 결단이 남기는 여운이 가지는 두려움에서 우리의 삶,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자본주의의 무모한 룰렛 돌리기에 잠식 당하지 않기 위해 과연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 더 난해하고 심오한 질문에 둘러싸일지도 모른다. 맥퀸은 죽어서도 이렇듯 논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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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1-24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 내려서 신난 멍뭉이처럼 연휴 왔다고 여기저기 인사댓글 달고 다니는 syo입니다.
blanca님, 복된 연휴 되세요^-^

blanca 2020-01-24 13:21   좋아요 0 | URL
멍뭉이 ㅋㅋ syo님도 즐거운 신나는 연휴 되기를 바랍니다. 날씨도 따뜻해서 한층 더 좋네요.
 
죽음의 부정 - 복간본
어니스트 베커 지음, 노승영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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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쑥 크는 아이의 모습은 삶의 시계를 연상시킨다. 나는 늙고 아이는 큰다. 지금 나는 영원한 현재를 살고 있다고 여기지만 수백 년이 지나면 이 현재는 머나먼 과거로 붙박힌다. 깊이 생각하다 보면 가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같은 순간이 있다. 정말 여기 지금을 의식하는 내가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면 숨이 막힌다. 다른 사람들은 잘도 견디고 능란하게 모든 일을 헤쳐나가는 것만 같은데 나는 무능하고 무력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책은 그런 나의 느낌을 정확하게 간파한다. '죽음의 공포'를 직시하는 것이 삶의 부적응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저자 어니스트 베커는 실제 말기암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이 책은 그의 사후 퓰리처 상을 수상한다. 그는 죽음을 얘기하기에 너무나 잔인할 정도로 적절한 시점에 도달한 셈이었다. 가차없는 분석은 우리의 삶 자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괴롭고 더욱 불안했고 그럼에도 무언가 흐릿한 장막이 걷히는 느낌에 시원했다. 




인간은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다.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무'로 돌아간다고 항상 의식한다면 도저히 일상을 살아낼 수 없을 것이다. 어니스트 베커는 그 허울에 사회에서 제공하는 세속적 영웅주의의 상징적 행위 체계를 제시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상급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을 가지고 사회적 성취,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한편 대의, 이상적 신념 체계, 심지어 종교에 빠지는 행위조차도 결국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라는 얘기다. 



인간은 말 그대로 둘로 나뉘어 있다. 위풍당당하게 우뚝 솟아 자연으로부터 돋보인다는 점에서 자신이 독보적임을 자각하면서도, 눈멀고 벙어리가 된 채 1미터 아래 땅속으로 돌아가 영영 썩어 사라진다. 이것은 우리가 처한,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하는 끔찍한 딜레마다. 

p.69


이러한 딜레마를 말끔하게 해결할 방법은 없다. 그는 프로이트가 역설한 모든 인간 행동의 말썽의 원인이 성적 충동에서 비롯되었다는 명제가 지극히 편협하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죽음의 공포를 간과한 분석이다. 그의 정신의학적 분석의 깊이와 넓이에 대한 경의는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성적 본능으로 환원시키는 단편적인 시선에는 과감하게 반기를 든다. 어니스트 베커는 프로이트를 시종일관 개관하면서도 그의 이론의 한계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프로이트를 넘어서서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심리학과 종교를 결합한 키에르케고르가 있다. 실존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에 인간 존재의 차원에서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 한계는 결국 더 시원적이고 절대적이고 무한한 이상에 기대는 것으로밖에는 해결한 방법이 없다는 결론은 좀 모호하다. 


그의 결론이 명쾌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 자신이 바로 그 실존적 한계에 갇힌 그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누가 인간 존재의 근본적 소멸에 따른 허무감과 공포에 대한 절대적인 답을 삶 안에서 찾아낼 수 있을까? 어니스트 베커는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 대신 그의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과 혜안은 놀라운 차원의 깊이와 명철함을 보여준다. 우리가 두려워하며 정작 응시할 수 없었던 것들을 가감없이 추려내어 가차없이 논증한다. 이 책의 후반부가 절망의 마침표를 찍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사람은 오랜 세월을 들여 독자적 존재가 되고, 자기만의 재능을 발전시키고, 세상에 대한 분별력을 가다듬고, 취향을 넓히고 벼리고, 삶의 실망거리를 감당하는 법을 배우고, 성숙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연 속의 고유한 피조물이 되고, 존엄과 고귀함을 갖춰 동물적 조건을 초월하며, 더는 휘둘리지 않고 더는 완전한 반사작용에 머물지 않고, 어떠한 틀에서도 찍혀 나오지 않는다. 그러고 나면 앙드레 말로가 <인간적 조건>에서 말한 진짜 비극이 시작된다. 60년간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어가며 그런 개인을 만들어놨는데, 이제 그가 잘하는 것은 죽는 일 뿐인 것이다. 이 고통스러운 역설은 당사자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p.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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