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인생 공부 - 오만과 냉정 사이, 천하를 가른 심리전 인생공부 시리즈
김태현 지음, 사마천 원작 / PASCAL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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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내면에 꿈틀대는 야수적 정신(animal sprit)이 표출되는 실체의 현장을 보는 것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것이 설령 반복되는 읽기여도 내 영혼은 그 적나라한 광경들에서 예기치 않은 삶의 지혜라는 수확을 건져 올리게 된다. 초한(楚漢)쟁투, 항우와 유방을 비롯한 걸출한 인물들이 발산하는 그 동물성과 그것의 미묘한 절제와 절충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빛나는 인간 존재에 대한 한 걸음의 이해는 지금 여기서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세상과 인간들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지대를 열어 보여준다. 사마천 사기(史記,의 변주된 이야기들인 초한지가 바로 그러한 이야기다. 이 책 초한지 인생 공부는 그 이야기들의 또 다른 관점에서의 해석이다.

 

인생 공부라고 하지만 지은이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면 이 책은 2,200년 전 초,(楚漢)이라는 시대적 무대를 거대한 전장이기 이전에 인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충돌하는 심리의 실험실’”로써, 인간학의 문법과 존재의 교과서라는 표현이 오히려 적절할 것 같다. 인간 욕망과 권력의 미묘한 충돌, 혼란과 안정기의 두 다른 체제에서 변화하는 인간의 모습들, 리더의 태도와 자질이 빚어내는 인과의 상황들로부터 인간 존재의 무수한 갈림길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우리는 목격할 수 있게 된다.

 

초한지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토대로 하여 초한충돌 시대의 이야기들을 모아 각색한 이야기다. 따라서 기원전 3세기 중원의 역사를 말한다는 것은 곧 사기(史記)의 역사를 재구성, 해석하는 작업일 것이다. 이 책은 역사적 사건과 대사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기반하고, 문학적 장면 묘사는 서한연의(西漢演義)를 인용하여 저자가 오늘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생존과 존엄, 권력과 사랑 사이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인간들의 내면 심리에 관한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이미 이 시대의 역사와 영웅들에 대한 내용은 사마천의 史記本紀史記世家》 《史記列傳을 통해, 그리고 장편소설로 재구성된 서한연의(西漢演義)의 무수한 아류본(亞流本)들인 초한지등을 통해 잘 알려져 있으며, 더구나 장국영, 공리가 열연한 첸카이거(陳凱歌) 감독의 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로 익숙한 것이다. 또한 파부침주(破釜沈舟), 배수진(背水陣), 성동격서(聲東擊西), 사면초가(四面楚歌),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토사구팽(兔死狗烹)과 같이 비근하게 우리들 일상에서 사용되는 이들 성어(成語)들로도 전투(심리)전략, 인간 본성, 정치 책략 등 배후의 의미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학(人間學)이라 불릴만한 하나의 집적된 관점으로 이들 역사 속 인물들을 통해 상황의 변화에 따른 인간의 면모를 통찰할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오늘의 언어로 수려하게 한 시대의 역사 전체를 조망하는 관점에서 들려주는 이 책은 빠져들 수밖에 없는데, 아무렴 바로 우리들이 실제로 이 세상과 인간들의 관계에서 겪게 되는 경험들의 다채로운 형상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지극히 협소할 때 읽었던 사기(史記)속 인물들과 그들의 행적은 그저 서사적 흐름이 주는 이야기의 재미와 흔한 교훈들을 주워 삼키는 것에 불과했던 것 같다. 이제 인간사에 대한 경험이 제법 싸인 지금, ()의 수도 함양을 복속시키고 난 후 승리의 축연자리인 홍문연(鴻門宴)에서의 항우와 유방, 그네들의 책사 범증과 장량의 언행이 역사 행방에 얼마나 중대한 전환적 사건이었는지를 새삼스레 곰곰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 과연 내가 항우였다면, 유방이었다면 어떤 결단을 내렸을까하고 상상의 자리에 참석해보기도 한다. 절대적 힘의 우위에 있다고 여겼던 항우의 미적거림과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을까? 유방처럼 대담하게 자신의 죽음의 장소에 참석할 수 있었을까? 엄청난 우위의 힘을 가진 항우 앞에서 나는 어떻게 닥친 위기를 넘겼을까?

 

지금 죽이지 않으면 후일 반드시 화를 입을 것입니다. (불자,약속개차위소로, 不者,若屬皆且爲所盧)” 라는 책사 장량의 말을 항우가 아닌 나라면 어떻게 수용했을까? 이 말은 훗날 항우를 포위한 역전된 상황에서 홍구화약(鴻溝和約)으로 일시적 휴전에 합의함으로써 다 잡은 항우의 숨통을 트여주려 할 때 양호자유환(養虎自遺患)’, 호랑이를 길러 스스로 화근을 만드는 것이라는 유방 책사의 말로 변주되어 반복된다. 여기서 우리네가 빈번하게 망각하는 자성(自省)과 경청의 중대함을 발견하게 된다. 리더의 본질은 말하는 힘이 아니라 듣는 힘이라는 것, 즉 리더는 귀가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권력을 장악한 이들이 보이는 행보를 보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운 일방적 말만 쏟아내는 현상을 보게 된다. 절대 우위 의식이라는 오만은 항상 실패를 몰고 온다. 폐쇄된 소통과 열린 소통, 이보다 보편적 진실의 감각이 어디 있겠는가.

 

진을 복속시킴으로써 천하를 쥔 항우가 측근을 챙기고 잠재적 적들을 고립시키는 사실상의 정치적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험준한 산맥에 가로막혀 중원으로 나오기 힘든 파촉(巴蜀)지역 한중(漢中) 땅을 다스리는 한왕(漢王)으로 밀려나는 유방의 처지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을 품게 될까. 책사 장량의 권유에 따라 지나온 잔도(棧道)를 불태워 오가는 길을 막아버리는 행위 속 정치적, 전략적 의미를 헤아리는 것도 쏠쏠한 흥미로움이다. 홍문연에서의 항우의 행위에서 드러나듯 그는 타인의 조언을 자신의 완벽함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자기애적 인물이다. 그 심리를 꿰뚫은 유방의 책사 진평의 이간계(離間戒)는 사마천이 성인의 경지에 오른 지략가로 평가한 책사 범증과 항우의 사이를 갈라놓는데 성공한다. 귀가 닫힌 자는 곧 눈도 먼다.”는 이 평범한 진실이 사실로 입증되는 현장이다.

 

절대적 힘의 우위에 대한 환상, 과거의 승리에 집착하여 상황 변화의 유연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폐쇄된 소통으로 고립되어 자만에 빠지는 실상들은 우리네의 일상 환경에서 즐비하게 목격되는 현상이다. 한미(寒微)한 집안 출신의 동네 건달이었던 유방이 대귀족 금수저 출신의 항우를 몰락시키는 것은 그네들의 출신성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람에 대한 태도, 상황에 대한 전체적 인식의 여부, 즉 겸허와 오만, 듣는 이와 말하는 이의 차이가 갈라놓는다.

 

하급 창고관리 병사에 머물던 한신의 출중한 전략술을 감지한 유방의 탁월한 행정책임자인 재상 소하의 수차례에 걸친 천거에 힘입어 유방은 그를 대장으로 임명한다. 이때 한신의 확신에 찬 비전과 항우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의 언급이 그 까닭이 될 것이다. 항우가 준 땅이 아니라 백성이 주는 땅을 차지하십시오. 그러면 천하는 대왕의 것이 됩니다.” 소하가 유방에게 한신을 천거하며 했다는 말을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평생 한중의 왕으로 남으려 하신다면 한신이 필요 없겠지만,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서는 이 일을 도모할 사람이 결코 없습니다.” 사기열전》〈회음후열전

 

유방은 한신에게 중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관중 땅의 정벌을 명한다. 여기서 한신은 그 유명한 동쪽에서 소리 내어 주의를 끌고 서쪽을 격퇴한다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함정을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으로 변모시켜 가짜 행동 뒤에 숨겨진 진짜 기동의 전략적 의미를 보여준다. 잔도 수리에 적의 시선을 모아놓고는 험난한 우회로를 통해 관중의 중심인 진창(陳倉)을 기습 점령하고 연이어 삼진을 평정해버린다. 유방이 얼마나 신났을까. 연이은 승리의 동력으로 유방은 한신과 함께 제나라 반란에 출정하여 빈집이 된 항우의 초나라 수도 팽성을 공격, 무혈 입성하기까지 한다. 손쉽게 얻은 승리(성취), 이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임을 다시금 목격하게 된다. 신중하고 절제를 미덕으로 하던 유방이 순간적으로 승리에 도취하여 절제력을 상실하고 상황을 방기하고 만다.

 


팽성 대전, 훗날 항우가 자결하는 초한(,)의 마지막 전쟁인 해하전투만큼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다. 제후국들과 연합한 유방의 56만 대군에게는 급하게 비보를 전해 듣고 달려오는 항우의 정예기병 3만은 가소로운 것이었는지 모른다. 항우가 초패왕(楚覇王)이라는 천하의 군웅으로 이름을 얻게 된 거록전투에서 보인 타고 온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부수고 막사는 불태우고, 식량은 사흘치만 남긴 채 돌아 길은 앞길만 있다고 적에게 쇄도하는 파부침주(破釜沈舟)’의 결단은 실로 가공할 만한 심리 전술이라 할 수 있다. 항우본기에 사마천은 팽성대전의 참상을 세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나라 죽은 병사가 10, ()나라 군대가 영벽 동쪽 수수(睡水)까지 추격했다. 10만이 모두 수수로 빠지니 수수의 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 자연의 섭리마저 거스르게 했던 참혹함의 이 생생한 증언만큼이나 성공의 도취가 부르는 참사에 경계의 교훈은 없을 것이다.

 

팽성의 참사와 동일한 유방의 실기로 형양 공방전이 있는데, 팽성의 참패는 유방 연합군의 와해 움직임을 초래한다. 위나라 위표가 배신한 것인데, 이것은 유방의 미래전략에 대한 큰 상처가 되었을 게다. 이를 급히 봉쇄하지 않으면 연합군의 연쇄적 이탈을 초래할 시발이 될 것이기에 한신을 좌승상으로 임명하며 위표를 칠 것을 명한다. 한신은 여기서도 명수잔도 임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술책을 감행한다. 위표의 주의력을 황하(黃河)나루에 집중시키고 정예부대를 이끌고 은밀히 상류로 이동, 뗏목을 타고 위의 수도 안읍을 기습, 위표를 생포함으로써 관중과 형양을 잇는 북방 제후국을 격파하는 교두보의 확보와 아울러 연합세력의 이탈을 방지하는 효과를 얻은 것이다. 적이 성동격서의 잘 알려진 교훈을 왜 망각하고 대비하지 못하는 반복된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일까? 바로 교만이다. 수적, 지리적 우위에 대한 자만이 이 뻔한 인식을 하지 못하게 한다. 인간의 우매함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방은 여기서도 반복된 실수를 하는데 형양성 함락의 승리로 다시금 도취되어 방어를 방기한다. 형양은 항우의 초군에게 틈도 없이 완벽하게 포위되어 탈주의 희망이 사라지고 있었다. 기신이라는 충신의 자신이 유방 대신 죽겠다며 변장을 통한 탈출 양동작전으로 구사일생 형양 포위 망에서 벗어난다. 사마천은 기신의 행위를 사기열전에 기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충신이어서? 제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인물을 알아본 예지력 때문에?, 생명의 희생이 전달하는 인간의 고귀한 정신을 위해서? 나는 잘 모르겠다.

 

초한 전쟁의 가장 안타까운 인물은 한신임을 쉽사리 떨치기 어려운 데, 분노를 복수로 쓸지, 삶의 미래 설계를 위한 동력으로 쓸지 인간 존재의 방향을 가늠할 줄 알았던 냉정의 미학을 실천한 차가운 이성의 두뇌를 가진 인물이 왜 결정적 순간 자기 삶의 주체로서 행동하지 못했는가에 곤혹감마저 들게 하는 장수이기 때문이다. 내 단순한 결론은 유방이나 항우와 같은 동물적 영혼을 그는 수없이 압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야수적 욕망의 표출 말이다. 한신의 내면, 특히 감정을 규율로 구조화한 인물이라는 저자의 평가는 참신하고 탁월한 해석으로 여겨진다. 감정의 파도를 지적 구조로 재조립하여 이성의 설계도로 만들어 낼 줄 아는 인물임에도 공이 커질수록 증가하는 권력자의 의심 속에서 장수가 스스로 자신을 지킬 방법을 냉정하게 구축하지 못했다는 것은 더욱더 그에게 동물적 감각이라는 야수적 충동의 표출 능력이 없었다는 심증을 강화시킨다.


한신은 많은 성어(成語)와 관련된 주인공이다. 이미 언급된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은 물론 배수진(背水陣), 토사구팽(兔死狗烹), 또 하나의 역사적 전투인 조나라 정벌에서 벌인 정형(井陘)전투에서의 전략이 바로 배수진(背水陣)이다. 사실 항우가 앞서 보인 파부침주(破釜沈舟)와 유사한 전술이다. 당대 전술에는 금기인 도망칠 길을 스스로 끊는 것은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어리석은 방책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전장 자체를 하나의 무대로 계산한 치밀한 전략의 결과라는 점이다. 패배할 줄 모르는 전쟁의 신, 한신은 조나라의 격파에 이어 연과 초와 국경을 맞닿은 제나라까지 복속시키고는 유방에게 제나라의 가왕(假王)으로 봉해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 임시왕 봉책의 사건은 한신의 소심함을 드러내 보여주고, 이 요청의 서신을 받은 유방의 불쾌함에서는 공적에 대한 인색함, 언제 적으로 둔갑할 줄 모르는 증대하는 힘에 대한 의심을 보게 된다.

 

가장 주목해서 골똘히 생각하며 읽게 된 장면은 이로 인한 한신이 겪는 갈등의 본질을 드러내는 그의 책사 괴통(蒯通)과의 대화이다.

충성으로만 스스로를 지키려하면 훗날 의심이 덮칠 때 구원할 논리와 힘이 없게 됩니다. (...) 제나라 땅은 전리품이 아닙니다. 이곳의 풍부한 경제기반과 병참의 지속성은 대왕을 지탱하기에 충분합니다. 반역을 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냉혹한 안전 설계입니다. ()왕은 겉으로 기뻐하나 속으로는 이미 의심하고 있습니다.

 

전승의 결과로 높아진 명성이 최고 권력자에게 곧 죄로 비칠 수 있음의 지적이고, 현실권력의 의심 앞에서 스스로 지킬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없다면 곧 죽음으로 돌아 올 것이라는 말이다. 사실 결과론적으로 우리는 역사를 알고 있기에 괴통의 진언은 인간사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라고, 그의 말을 듣고 초()와 한()과 제()의 삼분지계(酸三分之堺)를 형성해야 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한신은 자신이 유방에게 충성을 다한다면 괜찮을 거라고, 수동적 무능성에 좌초되고 만다.

 

이것은 한()의 제국통일, 즉 적이 사라진 제도화된 국가의 정비안정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대들은 모두 토끼를 잡는 사냥개와 같소, 소하는 그 사냥개들에게 토끼가 어디 있는지 알려준 사람일 뿐이오.” 라는 유방의 말처럼 모든 공은 한순간에 사냥도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유방의 행정책임자인 소하의 말처럼 왕의 신뢰는 언제나 경계와 함께 오는 것이며, 충성은 언제나 의심의 그림자 속에서 증명되어야 하는 것.” 이라는 이 깨달음의 음성은 어떤 조직이던 그 수장과 수뇌부와의 관계에 내재된 보이지 않는 인간학의 보편법칙일지도 모른다.

 

권력의 절정은 언제나 낭떠러지와 맞닿아 있는 것이라는 인식 하에 권력자의 의심을 처리하는 태도와 방책들의 모범이랄 수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도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귀중한 지혜가 될 줄 터이다. 소하와 실행의 결은 조금 다르지만 형식과 체면보다 생존과 실리를 중시하는 책략가 진평의 권력자의 의심을 흡수하는 피뢰침같은 태도는 꽤 호감을 자아낸다.

 

승상, 내가 다스리는 나라가 과연 평안하겠는가?

폐하의 마음이 평안하시면 나라 또한 평안해집니다.

 

모두가 좋다 하는데, 승상만 말이 없구나.

모두가 좋다 하면 그 안에 분명히 허점이 있을 것이옵니다.

 

승상은 참 이상하오, 내 마음을 읽는 듯하오.

폐하의 뜻이 곧 천하의 뜻 이옵니다.“ 사기세가》 〈진승상세가

 

왕과 승상 진평의 이 대화 장면은 왕이 자신을 통제한다고 느끼게 하면서 실제로는 왕의 감정을 조율할 줄 아는 자의 가히 우아하기까지 한 조용한 통치의 예술을 보여준다. 침묵과 순응 속에서 왕이 폭주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제동장치로서 역할, 칭송도, 간언도, 조언도 없지만 미묘하게 안심되는 진평의 대답에는 언어의 온도를 낮추어 안정의 언어로 돌려주는 신묘함이 있다. 충성과 처세의 경계선, 권력의 미세한 줄 위를 걸었던 회색지대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생존기술과 불안한 제국을 다스렸던 인물들을 이렇게 읽다보면 마치 세계의 한 지대를 달관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

 

조직의 리더로서, 권력자로서, 때로는 권력의 전략가로서, 인간사의 한 지평으로서, 어떠한 태도가 우리들의 삶을 보다 안정적인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척도들의 집약된 한 편의 탁월한 실험 사례라 해도 될 것 같다. 그래, 인간 본성,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왔을 때의 상황은 이미 많이 변한 것이다. 그 상태에 따라 우리에게 다른 태도와 기준이 필요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 당위를 망각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상황의 인식, 듣는 귀에 대해서, 언어의 온도에 대해서, 그 균형 감각을 되새기는 아무쪼록 의미 있는 독서가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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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살았던 문사(文士) 포송령(蒲松齡,1640-1715)이란 인물에 대한 호감이 읽어나갈수록 크게 자라난 책이다. 천재로 불렸으나 일평생 계속된 과거 응시의 낙방에서 오는 시름을 덜어내고 혼자 술잔을 기울여가며 붓끝을 놀려 세상에 분개하고 부조리한 풍속의 해악을 써내려가는 이 고분지서(孤憤之書)는 그가 마음을 기댈 유일한 것이었을 게다. 이 작고 아담한 책은 주워들은 민담, 자신의 경험담을 합쳐 죽기 직전까지 수십 년간 모은 포송령이라는 인생 자체이기도 한 일생의 자취인 대표작 요재지이(聊齋志異)에서 아주 작은 분량인 열편의 이야기를 골라 담은 발췌 선집이다.

 

【1776년 출간,요재지이(聊齋志異)』판본


요재(聊齋)는 포송령이 사용한 서재의 이름이자 호()이기도하니, 요재에서 또는 요재가 기록했음을 뜻하고, 지이(志異)란 기이한 일이라는 뜻으로 책의 성격을 의미한다. 즉 요재지이(聊齋志異)요재에서 기록한 기이한 이야기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책의 표제인 천녀유혼은 동명의 다소 변형된 내용의 영화로도 알려진 원제 섭소천(聶小倩)’의 번안 제목이다. 소천이라는 예쁜 처녀의 소곤거림 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책의 서문 격으로 포송령 자서가 실려 있는데, 왜 그가 이렇게 기이한 이야기를 모아 써내려가야만 했는지, 신선과 귀신들의 이야기의 흥취에 몰입했는지에 대한 쓸쓸하면서도 당당한 변명을 마주하게 된다.

 

서리에 놀란 겨울 참새는 나뭇가지를 껴안아 보지만 아무런 온기도 느낄 수 없고.

(...) 고적한 나는 난간에 기대어 감상한다.

진정 나를 알아줄 이는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귀신들뿐이런가?”

 

환상의 세계에서나 자신의 기개를 마음껏 뽐낼 수 있음에 삶을 지탱해낼 수 있었을 고독한 문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책의 마지막에 수록되어있는 동전 점의 주인공 하상이라는 인물은 주변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거듭 실패하고야마는 인물인데, 아버지, 껍질 버리는 태위 나리라는 낭비벽과 방탕한 조상의 악행으로 후손인 그가 그 악업의 화가 종결되는 쉰여덟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운으로 바뀐다는 점()의 이야기다. 욕심없이 분수를 지켜내어 마침내 한평생 나쁜 짓하고는 인연이 없었으나 내세의 복이 무궁무진 할 거라는 인물의 해피엔딩에도 불구하고 그의 안빈낙도의 삶이 포송령의 삶과 닮아 있어 더욱 아릿하게 다가온다.

 

이처럼 작가의 삶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로 신선 세계에 다녀 온 동안의 주인공 역시 재주가 당대 제일이라고 일컬어지지만 시험만 보면 낙방하는 불운한 서생 가봉치가 있는데, 내적 훌륭함의 미덕과 부귀영화와 공명이라는 두 갈래 삶의 길을 경험하며 마침내 부귀영화의 장이란 한갓 고통이나 따른 지옥 땅에 불과한 것을 알겠소.”라며, 세상사 공명이란 것의 휘장 뒤에 있는 인간세태의 더러움을 은연히 비판하기도 한다. 각 이야기들의 끝에는 이사씨(異史氏曰)는 말한다, 포송령 자신의 의견, 즉 이야기가 지닌 교훈이나 비판적 의지를 펼치곤 하는데, 이 이야기의 끝에는 가난이 인간에 미치는 해악이 실로 적지 않다, 물질적 삶의 해악을 꿰뚫어 보기도 한다. 41녀의 가장이었던 포송령으로서는 이렇다 할 직위나 부를 쌓지 못한 처지고보니 이러한 가상의 이야기로나마 자신의 불운을 다독일 수 있었을 것만 같다.

 

상상의 이야기 속에서 현실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태를 전도시켜 자신이 이루지 못하거나 저지당했던 고통의 실체를 뛰어넘어보는 즐거움은 그의 말처럼 마음 기댈 유일한 흥취였을 것이다. 저승도 무전 유죄?!는 층층이 사슬처럼 이어져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관료조직의 부패상을 고발하는데, 저승 서열의 최상층인 옥황상제의 감찰에 의해 염라대왕부터 저 말단 옥사장, 그 졸개들로 이어지는 탐욕상에 대한 판결문은 오늘 한국사회의 관료조직 도처에 스며있는 더러움의 일목요연한 기록이라 하여도 될 것만 같다. 가난한 귀신이야 더욱 안중에도 없었겠지. 죄 지은자의 죄를 죄 없는 자에게 덮어 씌워 조작하는 짓거리에서부터 원숭이처럼 교활한 간계나 부리는 자를 제멋대로 발호하도록 내버려두고 오로지 뇌물이나 받아먹고 국법을 어기는 것에만 관심을 두니 진정 인면수심(人面獸心)이 따로 없구나!”에 이르는 탐욕의 사슬은 인간사회에서 사라질 수 없는 것인 모양이다. 4백 년 전 청나라의 사법관리나 21세기 한국사회의 법()과 검찰(檢察)관리들의 행태가 복사한 듯 동일한 양상을 보이니 말이다.

 

민음북클럽 에디션


비둘기 애호가라는 장유령이라는 공자의 이야기는 무지하고 옹렬한 인간들에게 제아무리 귀하고 좋은 것인들 고작 자신들의 입속에 처넣는 맛밖에 알지 못하거나, 허튼 예의로 가장된 볼품없는 무식함뿐임을 신랄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지극한 정성을 들여 비둘기를 돌보는 장공자는 자기 살을 베는 듯 아까운 희귀종 두 마리를 아버지 친구인 고관대작에게 선물한다. 후일 장공자가 그 고관을 만나 저번에 보내드린 비둘기가 마음에 드셨는지요?”라고 묻는다. 그 고관대작 왈, , 살이 통통하게 쪄서 맛이 괜찮던 걸”, “삶아 잡수셨단 말입니까? 그건 세간에서 말하는 단달이란 희귀한 새에요.”, “맛은 그다지 대단치 않던데.” 이를 말하는 사자성어가 있다. 섭공호룡(葉公好龍)”, 겉으로만 좋아하는 척, 실제 그 내용과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는 사이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부하지 않는, 고작 한 때 시험의 결과로 평생을 놀며 호가호위하는 것들의 무지가 이 사회를 얼마나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가. 아무튼 이 무지라는 병은 인간세계의 가장 더러운 악이리라.


표제작 천녀유혼으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한평생 아내 말고는 다른 여자는 없다를 신조로 살아가는 품행이 단정하며 자중하는 영채신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과거시험으로 인해 방 값이 급등하자 마땅히 머물 곳이 없어 찾아 든 곳이 주인 없는 절간이다. 영생은 먼저 머물고 있던 연적하라는 서생을 만나자 그곳에 거처할 것을 결심하고 머물기로 한다. 마침내 잠을 청하는데 미모의 여인이 찾아들어 이렇게 말한다. 달빛이 너무 좋아 잠을 이루지 못하겠어요, 당신과 함께 사랑을 나누고 싶네요.” ~, 영생은 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도리어 이렇게 꾸짖는다. 한 번의 실수로 염치와 도리를 모두 잃어버리고 싶은 거요?” 여자는 황금덩어리를 그의 이부자리에 놓으며 다시 한 번 유혹한다. 의롭지 않은 재물로 내 호주머니를 더럽히려 들다니!”, 그렇게 요괴의 시험에 빠지지 않아 죽지 않는다. 정말 대단한 성인(聖人) 납시셨다. 물론 죽음을 피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영생은 군자 소리를 들을 만하다.

 

다음날 아침 동쪽 승방에 묵었던 서생이 한 밤중에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다음 날 밤 여자는 다시 찾아들어 영생에게 자신이 유혼이 되어 떠도는 사연을 말하고 버려져 묻힌 곳에서 뼈를 거둬 조용한 곳에 묻어준다면 그 은혜는 새 생명을 주는 거와 다름없음을 하소연한다. 영생은 집으로 돌아와 거둔 뼈를 정성들여 묻어준다. 이 유혼(幽魂)의 이름이 소천(小倩)’이다. 소천이 영생을 찾아와 고마움을 표시하며 영생의 노모를 섬길 것을 제안한다. 그 후로 이야기는 일사천리다. 영생은 과거에 급제하고 소천은 그의 아내가 되어 아들 둘을 낳고 해로했다는 포송령이 꿈꾸는 미인과 함께하는 삶, 공명을 누리는 삶, 정겨운 가정생활은 이렇게 상상에서 화려하게 자라나 그의 마음을 풍성한 꽃밭으로 만들어주었을 게다. 포송령의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그 상상의 세계들은 현실의 가치관, 시선들이 전도(顚倒)되어 그려지곤 한다. 못 생길수록 출세하는 나라는 그 대표적인 작품이랄 수 있겠다.

 

이는 그가 오호라, 출세와 부귀영화는 *신루해시(蜃樓海市)로나 가서 찾아야 할까보다!”라고 말하듯, 그를 거부하는 현실세계에 대한 냉엄한 비판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환상의 세계를 거니는 아홉 편의 이야기들은 우리들의 시원적 소망의 심연들을 건드린다.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그의 바람이 그 누구들처럼 그리 밉지 않고 등을 토닥여 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아마 그 까닭은 우리들이 잃어버린 경험지로서의 이야기, 인간 삶의 의미에 대한 소박한 진심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이 무너지고 개인이 고립된 오늘의 세계에서 포송령의 이야기들은 우리들 얼어붙은 삶의 추위를 녹여내 준다.

 

이 환상의 이야기들은 무언가를 분석하고 증명하려들지 않는다. 권태롭고 얼어붙은 삶을 녹이고 싶을 때 이 책을 펼쳐 삶이라는 심지를 은은히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시대를 초월하여 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사회학적 음화(陰畵)라는 벤야민의 이야기에 대한 정의가 바로 포송령이 모은 이 이야기들일 것만 같다. 부쩍 이런 정말의 이야기들이 그리워지는 즈음이다. 전도된, 세계의 음화같은 잃어버린 경험지로서의 이야기 말이다. 지금은 품절되어 요재지이 전권을 구입할 수가 없다. 한 질 전체를 옆에 두고 쉬엄쉬엄 읽고 싶은 책이다. 돈 대신 맞바꿀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요재지이에서 한 편 마음에 담아 들려주면 아마 들은 이들의 표정에 피어나는 평온한 미소와 함께 공짜 커피를 내 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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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루해시: 교룡이 숨을 내쉬면 누각이 만들어지듯, 빛의 반사작용으로 인해 바다나 사막에 나타나는 환상으로 환상의 세계를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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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 플랜더스, 질서 탈주 인물인가, 체제 순응 인물인가?

 

시대의 걸작이자 삶의 방식에 대한 수많은 물음과 비평적 논의의 대상으로 꾸준히 회자되는 몰 플랜더스(moll flanders),1722가 종이책으로 국역 출간되었다는 데 늦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열렬하게 환영한다. 이 걸출한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660-1731)의 작품은 초기 자본주의의 물질화의 욕망이 거세게 세상을 지배할 때, 그 가운데 여성의 사회적 자리가 여전히 협소하여 삶의 주체자로 설 수 있는 길이 제한되어 있을 때, 그러한 사회적 배치 속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욕망의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디포의 잘 알려진 로빈슨 크루소 (The life and adventure of Robinson Crusoe),1719를 넘어서는 1722년 발표된 대표작이다. 한 여성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1인칭 자기 고백의 형식으로 서술한 작품이다. 주인공 몰이라는 인물을 통해 사회의 도덕, 경제, 여성의 생존 조건을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몰은 감옥에서 태어나 숙녀가 되기를 꿈꾸며 성장하지만 그녀의 삶은 일관된 도덕적 성장보다는 생존을 위한 자기 선택과 자기 합리화의 반복으로 전개된다.

 

다섯 번의 결혼, 이 결혼들은 사랑에 있지 않고 오직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상승을 향한 전략의 일환이고, 자신의 형제인 줄도 모르고 하는 결혼은 개인의 도덕성보다는 불안정한 사회적 신분 구조와 정보의 결핍이 낳은 비극으로 읽을 수 있다. 남편과 재산을 잃은 후 본격적으로 범죄의 세계로 들어가 도둑으로 살아간다. 깜쪽 같은 변장과 뛰어난 기지로 수많은 절도를 저지르지만 이를 죄라고 여기기보다는 필요한 생존 기술로 정당화한다. 그녀는 이러한 반도덕적 행위에 대해 내면적 갈등보다는 계산적이고 실용적 태도를 보이면서 당대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가치가 어떻게 물리적 기준으로 환원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주인공 몰이 생존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현실성의 존재임을 보여주는 “I saw world was so taken up with self...(세상이 너무 자기중심적이라는 걸 알았어요..)” 처럼 자기 살기 바쁘다는 인식, 즉 도덕보다 생존을 우선시하는 배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기 합리화와 죄 의식의 공존, 물질적 성공에 대한 집착은 “I had no remorse about me...(나는 나 자신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Get money. honestly if you can...(가능하면 정직하게 돈을 벌되그렇지 못하더라도 결국 돈이 중요하다는 냉혹한 가치관을 도처에서 보여준다.

 

결국 몰은 체포되어 뉴게이트 감옥에 수감되고, 이 시점에서 그녀는 회개의 태도를 보이며 소설은 구원의 서사로 전환된다. 식민지로 이송되었다가 영국으로 돌아와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게 되는데, 이것은 디포의 체제 수호적 의지가 반영된 인위적 결말로 작품의 아쉬운 흠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해는 몰의 회개가 진정한 도덕적 각성인지 아니면 처벌을 회피하기 위한 또 다른 전략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랄 수 있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몰이라는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무한한 비평적 물음을 가능케 하는 특출한 모델을 설립했다는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학적 업적이랄 수 있다.

 

몰 플랜더스는 테스마담 보바리, 제인 에어와 비교되곤 하는데, 이러한 비교를 통해 읽는다면 몰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위치를 보다 거시적 관점에서 해독하는 즐거움이 되어줄 수 있다. 이를테면 몰과 테스는 여성의 운명이 사회구조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테스는 가난과 계급 때문에 삶이 무너지고 도덕적 낙인이 따라다닌다. 테스는 몰과 달리 끝내 구원받지 못하고 비극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몰이 생존형 현실주의자라면 테스는 사회적 희생양에 가깝다. 한편 마담 보바리는 물질적 욕망과 환상을 좇는다는 측면에서 몰과 유사하지만 엠마 보바리는 낭만적 환상을 좇다가 파멸하고 만다. 그러나 몰은 현실적 계산이 뛰어나다. 엠마의 감정적 욕망과 몰의 실용적 욕망을 대비하며 읽어나가면 결국 두 인물 모두 사회가 만든 욕망에 갇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제인 에어는 여성 독립의 문제를 말한다는 측면에서 몰과 동일하지만 둘은 도덕적으로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는 점에서 같은 조건에서도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는 반례로서 사회적 조건이 인간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주장을 회의적으로 사유케 한다. 몰은 이러한 비교대상의 여성 인물 중에서도 특출한 역사적 모델이다.


이러한 비교 독서를 이 작품은 자연스레 이끄는데, 그만큼 몰이라는 인물은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여러 방향의 물음을 요구하는 독특한 존재다. 죄의식 없는 반도덕적 실용주의적 삶을 수행하는 나쁜 여자로서의 몰은 정말 악의 화신인가, 나아가 이 타락한 여성이라는 구분 자체가 사회질서, 즉 주류 권력이 만든 틀 속의 체제 종속적 인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이와는 대비되어 소위 페미니즘적 관점, 혹은 들뢰즈의 욕망의 생산의 관점에서 몰의 지배질서를 교란하는 반도덕적 행위는 사회적 흐름(화폐, 신분계급, 성적지위)에 반응하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생산적 욕망의 수행이라는 자신을 계속해서 새롭게 조립하는 긍정적 존재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몰은 기성의 사회적 배치를 가로지르며 끊임없이 되기(becoming)를 실험하는 존재로 해독할 수 있다. 결국 우리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으며 몰과 같은 삶이 가능해진 사회적 배치(질서와 제도, 체제)란 어떤 것인가를 물을 수 있게 되고, 우리는 그러한 사회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7~18세기 영국 사회란 초기 자본주의로 진입하면서 물질과 화폐에 대한 물신적 풍조가 전통적 미덕을 강하게 밀어내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여성의 경제적, 정치사회적 지위는 전통에서 풀려나지 못한 그야말로  취약 지대에 놓여있었으며, 이는 결혼이 화폐에 의해 거래되는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가난한 여성이 그러한 시대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 가에 대한 심원한 질문을 품고 있는 것이다. 나는 페미니즘적 비평의 관점, 즉 사회적 배치를 가로지르며 기존의 질서로부터 탈주하는 여성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데, 여기에는 몰을 타락한 여성이라고 바라보는 기성의 관점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 담론에 이미 종속되어있는 비평이라는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합법과 범죄, 아내와 창녀, 정숙한 여성과 타락한 여성이라는 구분 자체가 이미 권력이 사람을 이해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든 틀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몰은 소설의 전환점 이후에 구원과 지배질서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소설이 1인칭 고백(confession)의 서사라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증명된다고 할 수 있다. 몰의 서사는 거의 전부 자신의 죄라는 과거를 서술하고 자신을 해석하는 과정인데, 이는 단순 서술이 아니라 권력에 순응하는 방식인 까닭이다. 다시 말해 고백하는 순간 개인은 자신을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이며, 이는 곧 스스로 말함으로써 권력에 협력하는 주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몰은 감옥에 가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건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도덕적으로 재구성하고 정상(?)적 삶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러한 양태를 자기 통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외부의 권력(, 제도, 처벌)보다 내부 권력(양심, 자기감시)이 더 강력해지고, 결국 몰은 순종적인 주체로 재형성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몰을 권력에서 탈주하는 여성으로 해독하고 있는데, 이러한 측면을 간과할 수 없기는 하지만 그녀는 자기 통치라는 그물망에 포획되기에 이는 과잉해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여성과 사회경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바라보는 여성의 성적 규율, 결혼 제도, 빈곤과 노동, 범죄화 등 중요 요소들이 어떻게 개인에 작동하는지를 발견토록 하는 거대한 사례연구라 할 수 있는 지금 여기에서도 작용하는 인간 삶의 조건을 생각토록 하는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몰이 자신을 범죄자, 타락한 여성으로 자성토록 하는 것은 사회가 읽고 관리 가능한 범주에 포획된 존재에 대한 계도(啓導)적 인물로 이해할 것을 은근히 제안하는 디포의 수구적 의지표명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이러한 의도야 어쨌건 몰 플랜더스라는 여성의 삶의 행적은 도덕 이전의 문제로서 인간 욕망과 생존 실험의 방식으로 그 작동 방식에 대한 무한한 비평적 검토를 요구한다.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으로서, 욕망의 배치가 드러나는 공간으로서, 독자를 훈육하는 장치인 규율 장치로서의 소설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하게 하는 문제적 소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활하고 기회주의적 여성인물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누구나 이 매혹적 서사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소설이기도 하다. 마땅한 국역본이 없어 원서를 통해 어설프게 읽었던 작품을 우리말로 다시 읽게 될 기대가 크다. 이 기회에 테스와 마담 보바리, 제인 에어를 다시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과연 몰의 반도덕과 타락은 개인의 윤리문제인가, 아니면 경제사회구조가 만든 선택인가? 이 입체적 인물은 질서 탈주의 존재인가 아니면 체제 순응적 인물인가? 독자들의 감상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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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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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가장 평온하고 즐거운 마음을 주는 작가와 동시대를 살고 있음이 기쁘다. 그 호감의 정체는 선물(膳物) 같은 감정의 풍경들이 선사하는 내적 단단함 속에 내재된 어진 마음의 인물들이 어른거리고, 딱딱하게 굳은 마음의 벽을 허물어뜨릴 만큼 밀고 들어오는 진짜배기 웃음 코드에 심어져 있는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의 관계에 벌어진 틈을 연결하려는 애씀과 그 지혜이다.1) 이처럼 관계들이 빚어내는 온갖 감정들의 풍속화는 기 발표작인 단편 우리는 계절마다에서의 이상한 낙차라는 타자와의 간극에서부터, 그 개와 혁명에서의 간극의 이해, 간극이 벌어진 틈새로서가 아니라 의미작용의 변화로써 유대의 가능성이 되고, 이 소설집 너의 나쁜 무리에서는 그 간극의 봉합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냄으로써 극복의 가능성을 열어보이고자 한다.

 

아마 이 작품집은 문학평론가 박혜진이 발문에서 말하는 바로 새로운 관계를 형상화하기 위한 이 시대 풍경의 채집(採集)”일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의 감각을 포착하는 섬세한 시선이고, 그로부터 소원하고 단절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얽매인 질곡(桎梏)들의 형상을 풀어 보여줌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공감을 통해 연결의 가능성을 엿보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수록된 일곱 편의 작품 모두가 이러한 중심에 모이는 이야기들이지만 특히 표제작 너의 나쁜 무리를 비롯하여 아무 사이소란한 속삭임, 이 세 편의 단편소설만큼 기분 좋은 가벼움, 웃음의 평온 속에서 읽은 작품은 근래에 없었던 듯하다.

 

경쾌하고 소박한 감정들의 정경 속에서 이 시대 사람들이 느끼는 무수한 관계의 형태들을 포착해 드러내는 이야기들은 그대로 내 감각에 스며들어 그 어떤 해석도 요구되지 않는 온전히 평온한 공감과 이해가 되었다.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그 가운데 절로 수긍케 되는 다채로운 관계의 상황들에서 우리들이 꾸는 작은 소망, 그것은 아무 사이의 노인 돌봄 일을 하는 희지가 최소한의 것을 지키기 위해, 오롯이 그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라 말하는 그 작고 높은 자부심에 깃든 소박한 삶의 책임성이고, 뜰의 미래의 문주의 둘째 고모, 뚜비의 도자기 안 쪽지에 써진 유언 지름길로 가지 않을 것이다. (...) 사랑하는 이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서, 나의 방식대로 나를 물림할 것일 게다.

 

나는 소란한 속삭임에서 시내가 모아에게 귓속말로 비밀을 속삭이진 않으나 그것이 마치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속삭이듯 들려주는 속삭임을 사람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하는 힘 같은 것이라 할 때, 이 소설집 전체를 표현하는 말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래, 이 소설집 전체는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힘으로 가득 차있다. 이 표현이 너무 좋아 몇 번이고 입 밖으로 소리 내 본다. 이 작품은 서로들 자기주장을 어떻게든 펼쳐 보이려는 사람들로 들끓는 이 세계, 그래서 서로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해 갈등과 혐오에 지쳐 타인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우리들의 초상인 네 사람 - 모아, 시내, 수자, 두리 - 이 저마다 안고 있는 질병 아닌 질병을 극복해내려는 시도, 그럼으로써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려는 속삭임 모임의 인간 풍경이다. 누군가에 속삭이듯 귀엣말을 나누는 것은 친밀감으로 거리감, 단절감을 없앤다. 물론 이 속삭임 모임의 시도는 커다란 은유일 것이지만 나는 그 말랑말랑함이 이 세계의 소외에 대한 하나의 처방이 되어줄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제발 목소리들을 낮추어주시기를. , 저는요, 저렇게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너무 싫어요, 거기엔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2)

 

속삭임은 거리감을 해소하고 친밀감을 만들어주는, 단절의 관계를 연결의 관계로, 서로를 책임의 관계로 연결해주는 하나의 시도이다. 노인들의 돌봄 일을 하는 아무 사이의 일산 일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베스트 시터(sitter) 중 한 명인 희지의 이야기는 이 시도의 변주된 하나의 현실 속 이야기로 다가온다. 희지는 자신의 일, 노인 돌봄 노동을 가족 사이에 끼어들어 어느 정도의 친밀감을 형성하되, 분명한 선을 지켜야만 하고 가사 노동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제 몫의 일을 해야 하기 때문, 고되다 못해 서러운 노동이라고 정의한다. 친밀감과 책임감,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의 선(경계)을 지켜야 하듯 적정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관계의 애매성이 놓여있는 일이다.

 

두부 할머니의 돌봄 노동으로 가사일을 하던 중 노인이 희지 모르게 사라지고, 당황한 희지는 노인이 갈만한 전통시장, 성당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 달린다. 노인은 어디에도 없고 찾기를 포기한 채 노인의 집에 돌아왔을 때 보호자인 며느리의 전화로부터 모멸어린 싫은 소리를 듣는다.

 

며느리: 희지 씨, 어머니한테 초콜릿 사다 주지 말라고 했잖아요. 속상하게 왜 자꾸 그러세요?

희지: 저는 최선을 다했는데.

며느리: 희지 씨, 그러지 말아요.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요.

 

희지는 노인 돌봄 노동이라는 자신의 일을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사회에 비집고 들어갈 자리를 마련했다는 야트막한 기쁨을 느끼게 해준 일로써, 그 작고 높은 자부심을 지키기 온 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데, 이 이상한 모멸을 주는 언어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그 깎이는 마음을 도로 채우는 법을 알 수 없어 고통스러워한다. 희지가 담당하는 뮤 할머니, 오 할머니는 희지를 자신들의 연락 목록에 아줌마로 저장해 놓거나, 설거지나 변실금 심한 속옷들의 빨래조차 한겨울에 찬 물만 쓰게 할 만큼 그녀가 선뜻 다정해지는 것을 어렵게 하고, 가슴 한편에 켜켜이 부정적 감정이 일어나 자신을 괴롭혀 안타까워한다.

 

누구도 그런 말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건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는데라고 자책하는 희지의 마음에서 나는 굴욕을 무수하게 만들어내는 우리의 던적스럽기 그지없는 세계를 떠올리며 진저리친다. 그녀는 그 최소한의 것을 지키기 위해, 오롯이 그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다짐한다. , 두부 할머니의 연락처 목록에는 희지라고 저장되어있다.줌마도 아니고, 유희지도 아닌, ‘희지’,그걸 본 순간 앞으로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아차렸다.”고 할 때, 그녀가 모호하기 그지없는 친밀과 거리의 딜레마를 극복한 관계성을 찾았음에 안도했다. 제발 사람들아,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한다. 관계의 균형성을 적중하는 적도(適度), 즉 관계의 좋은 상태를 실현하는 것의 곤란함을 아우르는 우리들 세계의 아무 사이라는 이 문구의 울림이 꽤 크다.

 


표제작인 너의 나쁜 무리는 그 무엇보다 성인이 된 유선이 들려주는 독특한 성장기를 함축하는 발칙한 서사다. 부모에게 버려져 여사로 부르는 할머니의 손에 키워진 손녀 유선이 46년이라는 세월의 격차를 건너뛰어 여사와 주저없이 나누는 서로의 이야기는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무게 때문에 정말이지 지적으로 웃었다. “여사 58, 나는 12. 분명히 해두고 싶은 건 나와 여사의 관계가 시종일관 괜찮은 편에 속했다는 것이다. 여사는 나를 아꼈다.”고 시작하는 이야기에서 그 반전의 목소리를 예상해야 했는데, 속절없이 12살 소녀의 음성에 나는 그만 그 경쾌하게 날아오를 듯한 솔직한 시선들에 빠져들고 말았다.

 

여사가 자신을 아꼈다는 것이나,  주저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을 정도라는 말은  유선과 여사의 친밀의 정도에서 거의 거리가 없는 관계임을 말하는 것일 게다. 여기에 입시를 위해 가입한 동아리 동료로서 토론대회 파트너인 남자 친구 이해신, 여사의 숫한 남자들, 특히 현구 아저씨로 불리는 인물까지 가세하며 나쁜 무리를 구성한다.

 

유선: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여사가 했던 말 기억나?

여사: ?

유선: 함부로 다리 벌리지 말라고. 기억나지. 근데 왜 여사는 그렇게 살아? 왜 맨날 다리를 벌리느냐고.

여사: 나는 그러지 않고 살기 힘들어. 너는 그러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고.

 

유선이 성인이 되자마자 여사의 집을 도망치듯 떠나 5년 남짓 되는 세월 동안 여사를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것은 정말 괘씸한 일이다. 두 사람이 5년 만에 대면하는 장면은 짜릿하다. 흑갈색으로 염색한 컬이 돋보이는 머리와 감색 모직 재킷을 입은 허리가 꼿꼿한 여사를 보자 유선은 알 수 없는 기쁨이 흘러나와 활짝 웃어 보인다.” 그런데 여사는 다짜고짜 유선의 뺨을 후려친다. 못된 년”, “나는 그럴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구, 이 쿨함이란. 관계에 내재한 책임성을 소홀히 한 댓가임을 유선이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친밀한 사람들, 그렇게 사람들은 감염을 주고받는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는 나쁜이라는 이 형용사를 멋진 선택으로 보았는데,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닌, 좋고 나쁘다는, 언제든지 뒤집어져 해석될 수 있는 언어여서 좋았다. 그래서 나쁜 무리는 선악의 판단과 다른 차원의 얘기가 되어준다. 새로운 다짐과 그에 대한 좌절의 반복이라는 굴레에 대해 아주 잘 배웠다는 유선이 여사와 해신, 현구 아저씨가 징그러운 사건으로 다시 함께하게 되었을 때 이곳에 온 이유는 그 다짐과 가장 큰 관련이 있었다.”는 상처받고 입히면서 떨어질 수 없는 그 친밀감이 주는 말로 표현 가능하지 않은 유대를 지닌 삶을 어렴풋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그동안 나름 그들의 재산이라 할 수 있는 덩그러니 놓인 굴착기를 바라보며 징그럽다, 그치, 징그러워 암만 봐도.”를 중얼거리는 유선과 여사의 목소리, 바로 그러한 관계가 우리들의 삶일 게다. 사람냄새 물씬나는 너의 나쁜 무리란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관계의 감각 그것이지 않을까. 그래서 유선과 여사에게는 어떤 관계의 구원 같은 것은 소용없는 것이기에 그들에게 함께 더불어 울고 웃는 연결의 관계는 좋은 것일 수 있을 테다.

 

이들 작품보다 조금은 애잔하고 쓸쓸한 감정이 느껴지는 단편 작은 별은 자기 삶을 이상한 평화라고 정의내리는 삶의 허무에 시달리는 사설 구급차 요원인 이중일이라는 인물이 환자 이송에서 우연히 겪게 되는 자기 삶의 윤곽이자 견뎌내야 할 현실로부터의 탈주라는 예기치 않은 구원의 이야기다. 서사는 이 중심축과 더불어 우리네 세계의 얄팍한 표상들에 깃든 욕망3) 을 해독하는 깨알같은 시선들이 깜찍하게 병행하며 이상한 평화를 가져다주는 좌절된 꿈의 표상인 구급차, 그 유지를 깨뜨릴 용기가 없어 탈주하지 못했던 구급차를 벗어나게 된다.

 

닥쳐올 죽음을 기다리지 않기 위해 구급차가 필요했던 이송 환자와 보호자의 엉뚱한 요구에 그들이 무엇을 해나가며 함께 그 상태에 당도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이해에 이르고 마침내 가져가세요. 제 구급차를 가져가 주세요.”라고 활력 있는 형벌죽지 말라는 지령에 굴복되었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게 된다. 구급차로로부터 탈주하는, 그 이상한 평화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의 세계를 내딛는 감동적 전환이 가슴을 찡하게 한다. 뜰의 미래의 문주와 둘째 고모 뚜비, 너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있는가?(오마에니 마모루 모노와 아루카 (は あるか?)”라는 극장판 야누야사 3: 천하패도의 검에 나오는 대사를 중심으로 마치 아무 사이의 요동치는 관계에 대한 의미의 변주된 판본으로 읽히기도 한다.

 

한편 통신 광장은 제법 시간이 지난 영화 접속을 원인으로 하여 온라인 채팅 공간을 매개로 한 오류의 만남들이 영원히 잔류하는 존재들의 관계를 그려가며, 추운 뺨에 더운 손은 영화촬영을 위한 섭외장소에 내키지 않은 동행을 하게 된 선이의 옛 동네 친구 기문과의 관계의 깊이, 관계의 연루성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마치 뿌옇게 그려진 영화장면을 본 듯한 기분이 드는데, 정신차려보면 누군가의 공범이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 있듯 그렇게 몽롱한 느낌이 어느덧 한통속으로 얽히고 마는 관계의 그 불가해성과 어울려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한다.

 

이제야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낼 줄 알게 되었다작가의 말처럼 이 작품집 일곱 편의 소설들에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말랑말랑한 음성을 지닌 사랑스런 대상의 타자들, 우리 이웃의 초상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속삭인다. 유선의 남친 이해신이 나는 원하는 대로 되려는 게 아니야. 최소한으로라도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노력해야 하는 거야.” 라는 이 작은 소망을 실현하는 그 소박한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서로 얽혀들며 그 관계 속에서 사랑과 결함의 자취들을 발견하는 온갖 감정들을 포용하게 되는 기분 좋은 감정의 풍속화라 말해도 될 것 같다. 이 작품집을 어느 누구든 읽는 내내 진심의 웃음을 머금으며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을 잔뜩 보게 될 것이다. 어찌 관계라는 사이, 간극으로만 사람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이미 모두 공범으로 서로 얽힌 존재들인데


타자와의 관계는 완결적일 수 없는 관계라고 타자성의 철학자 레비나스는 제 아무리 타자와의 관계에 주목할지라도 삶의 무대에서의 어려움이 모두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끝없는 문제와 끝없는 응답, 타자에 대한 무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기적이고 경쟁의 폭력이 공기처럼 퍼진 오늘의 세계를 개선해 나가는 길일 것이다. 이 작품집은 그러한 관계의 형상들, 우리에게 익숙한 관계 영역 너머의 보다 근원적인 차원의 삶을 엿보게 해준다.


각주:

1)이전 발표 작품들에 대한 감상글에서 인용함.

2)작은 글 자체는 제 속삭임이에요.(소설 속 글자구성 형식을 흉내 내 봤음)

3)출신대학과 온갖 추상명사를 갖다붙인 흔하디흔한, 또한 환자와 보호자 입장에서는 더없이 중요한 것들로만 들어찬 이름의 병원 이름”, 이를테면 연세기적사랑희망병원이라고 말하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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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와 준》의 아나이스 닌과 《악령》의 스타브로긴 

- 악마와 그 주변을 맴도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

 

아나이스 닌은 우리 대부분이 감히 인정하거나 생각조차 하지 못할 일들을 저질렀다.”

 

소설가 킴 크리잔(Kim Krizan)은 아나이스 닌(Anais Nin;1903-1977))에 대한 전기소설 속에서 거침없는 여성의 욕망을 드러냈음을, 시대적 당혹감으로서 위와 같이 썼다. 그것은 엘렌 식수가 말한 ()로고스적 무기가 단련되게끔 글쓰기로서 여성 억압의 표현에 스스로 갇히지 않은, 텍스트들 속에서 페니스가 순환하는섹스트(sextes)의 출현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사건으로 이해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을 게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의 전경(全景)으로서의 시선이지, 아나이스의 텍스트 자체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발판으로 자신의, 한 여자로서의 자기 자리의 발견을 향한 고투, 자각을 향한 수행(遂行)적 걸음이었음을 발견해야 한다.

 

출처: The Anaïs Nin Foundation


1. 아나이스 닌을 말하고자 하는 동기에 대해서

 

우리의 독서시장에는 193110월부터 19328월까지에 이르는 아나이스 닌의 헨리 밀러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준과의 에로틱한 모험의 내용이 담겨진 헨리와 준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 일기를 읽은 독자들, 일부 평자들은 도덕적 규범이 붕괴된 한 여인의 성적 편력 행위의 묘사들에 빠져 아나이스가 찾아 헤매는 것이 무엇인지를, 즉 그녀가 왜 이 글쓰기를 실행하고 있는가를 망각하고 마는 듯하다. 나 또한 나는 창녀처럼 그에게 본능적으로 충실했다. 그와 함께하지 않으면 쾌락을 느낄 수 없다 라는 문장처럼 유부녀가 뭇 남성들을 옮겨다니며 자신의 성적 쾌락을 마치 자아발견의 행로인양 위선을 떨어대는 자기 정당화의 궤변으로 읽기도 했다.

 

그러나 작품 속 빈번하게 등장하는 도스토엡스키의 악령속 스타브로긴의 몰인격, 악의 화신이 헨리와 준, 그리고 자신과 비교되는 성찰의 말들을 보며 이 텍스트를 완전하게 잘 못 읽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묘사하는 성적 쾌락의 장면들은 단지 자기 욕망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일 뿐, 그것이 글쓰기의 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나이스가 헨리를 생각하면 나는 다리를 벌리고 싶다라고 쓰는 것, 마치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이 드러났음에 현혹당한 읽기로 본질을 읽지 못하는 우를 저질렀다는 자각이었다. 이 글을 쓰고자 한 충동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아나이스라는 여인이 이 일기를 씀으로써 추구하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왜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로인해 그녀가 발견한 것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규명으로서의 읽기로 전환된 것이다. 스타브로긴과 아나이스, 헨리, 준의 도식(圖式)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가 그 해명이 되어 줄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아나이스 작품들에 대한 문학적 폄하의 시선을 불식시키고, 그녀의 문학적 업적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아보자는 취지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헨리와 준은 아나이스 닌이 자신의 문학적 명성이 절정에 이르기 시작했을 때 다듬어진 일기의 일부분으로 1966(63)에 첫 출판되어 자아 발견의 여정을 통찰력 있게 그려냈음을 문학적 업적으로 찬사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실제 일기 속 여러 인물들이 삭제되어 순탄치 않은 편집과정을 거쳐 탄생한, 소설적 윤색이 더해진 일기라 할 수 있다. 물론 1932년에 출판한 D.H. 로렌스 비전문 연구서를 필두로 1939년에 소설 인위의 겨울(The Winter of Artifice), 1944년 단편소설집 유리 종 아래에서가 발표되며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얻어냈지만 문학적 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후 1950년대 내내 내면의 도시들, 불의 사다리, 알바트로스의 아이들, 네 개의 방이 있는 심장, 사랑의 집에 들어온 스파이등의 소설을 발표하며 독자층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냈으며, 1964년 소설 콜라주가 그해 타임지 최고 도서로 선정되면서 독보적 여성 작가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즉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문학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1971년 공쿠르, 메디치 등 프랑스 4대 문학상의 하나인 세비네 상의 수상, 1974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1974년 미국 국립 예술문학 협회 정식회원으로 선출되며 그녀의 문학적 업적은 공인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1970년대라는 시대는 여전히 이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반감과 옹호가 상존하고 있었음의 반증일 것이다. 이 같은 글쓰기를 수행한 후배 작가 아니 에르노가 202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어쩌면 숱한 아나이스들이 맺은 결실 일 것이다. 아나이스는 폄하 또는 비하와 격하 대상의 작가가 아니다. 즉 그녀는 악령속 스타브로긴처럼 이 세계에 악을 전염시키는 위험하거나 배제되어야 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 지 스타브로긴과 아나이스를 비교하며 그 차이 속에서 이 여인이 발견하고자 고통스럽게 애쓴 것의 자취를 우리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도스토엡스키의 악령속 스타브로긴은 어떤 인물인가

 

아나이스가 악의 화신으로 대입하는 악령의 스타브로긴이라는 인물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 스타브로긴은 내 삶의 법은 내가 만든다는 태도를 지닌, 이 세계의 모든 확고한 신념이 무너진 뒤 남은 공허에 가까운 인간이다. 그에게는 하나님도, 전통의 도덕도, 외부 권위도 자신을 규정하지 못한다고 여기며 자기 의지만이 기준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선과 악을 초월해 있다고 믿는 이 인물은 영웅적 행위와 타락한 행위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없으며, 스스로 도덕 바깥에 선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한 마디로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서 자기 의지만 믿는 태도의 인간이다.

 

이 인물을 악령, 악의 화신으로서 두려운, 아니 무서운 인간으로 말하는 이유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의지란 것이 실제 아무런 방향성도 없는, 삶의 의미를 조직해주지 않는 욕망과 결단으로서의 의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처럼 그 어떠한 교리나 신념을 설파하지 않음에도 그의 공허와 카리스마가 주변 인물들의 과격 사상과 행동을 촉발하는 중심점이 되는 데 있다. 의미와 믿음이 빠져나간 자리를 차지한 텅 빈 공백, 이것이 개인과 사회를 얼마나 위험에 빠지게 만드는지를 표상하는 것이 도스토옙스키가 구현하고자 한 핵심적 시선이다. 이를 정리하면, 도덕을 상대화하고, 자기 의지를 절대화하려 하지만 결국 공허와 양심의 반격 앞에서 붕괴하는 인물이고, 그래서 그의 신념은 어떤 적극적 이상이라기보다, 믿음의 상실이 낳은 허무주의적 자기숭배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존재다. 그래서 헨리와 준에서 헨리가 아나이스에게 당신은 물론 나르시시스트야, 이 일기가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지.”라고 말하는 것, 바로 그것에 닿는다.

 

그렇다면 헨리가 농담처럼 뱉은 지적처럼 아나이스는 스타브로긴의 텅빈 공허로서의 의지를 수행하며 악의 덧을 마구 뿌려대는 팜므파탈인가? 스타브로긴처럼 스스로를 선악을 초월한 인간인가라고 묻게 되면 아나이스는 바로 그러한 스타브로긴의 매혹과 파괴성을 감지하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미학화하고 관계화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다름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스타브로긴이 공허한 의지의 중심이라면 아나이스는 그 공허 주변을 맴돌며 그것을 감수성, 욕망, 자기 서사로 번역하는 인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스타브로긴은 소설 속에서 준과 헨리 중 누구인가라는 점에 귀착된다고 할 수 있다.

 


3. 헨리와 준의 자기해석자로서의 아나이스

 

헨리가 말한다. (...) 그녀를 처음 만난 날, 준은 내가 자신을

팜므파탈로 생각해 주기 바란다고 했어. 나는 악마성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도스토옙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악마에 몰두해 있지.”

 

준이었다면 헨리가 글 쓰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다, 난리를 피웠을 것이고,

화려한 팜므파탈의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아나이스)”

 

아나이스는 스타브로긴적 매혹을 맴도는 인간이라고 해석했다. 그것은 아나이스가 준에 대해 말하는 문장에서 다시금 확인되는데, 악을 낳고 범죄를 일으키지만 스스로는 거의 행동하지 않는 인물인 도스토옙스키적 인물인 스타브로긴을 인용하는 것에서 그녀의 무의식이 드러난다. 실제 준은 헨리를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움직이게 하는 힘의 중심으로서 악의 자기장 같은 존재로서 행동하는 것에서 확인된다. 즉 아나이스는 준이라는 스타브로긴적 인물에 매혹되는 해석자이자 매개자이다. 아나이스가 자신을 “the revealer, the harmonizer(드러내는 자, 조화시키는 자)”라고 부르며, 준에게는 도스토옙스키를, 헨리에게는 준을 준다고 쓰는 것에서 그녀가 파괴의 중심이 아니라 파괴적 매혹을 언어와 관계 속에 배치하는 연출자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아나이스의 헨리와의 지독한 성애와 그에 대한 집착은 자기 쾌락, 삶의 안정 장소를 찾아내기 위한 그녀만의 일련의 고통스러운 수행(遂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수행의 여정 자체가 제공하는 쾌락의 감각은 하나의 요소이지 그것이 곧 욕망이 지향하는 궁극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나이스는 전통적 가치가 무너진 자리에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식의 자기절대화에 접근하고자 하는 스타브로긴과 같은 인물이 아니다. 스타브로긴으로 아나이스를 해석하는 것, 즉 그녀를 성적 쾌락에 목매단 탕녀 정도로 이해하는 것, 그래서 뭇 남성들의 자존과 삶을 파괴하고, 그들의 가정을 궤멸시키려는 그러한 성의 화신이 아니다.

 

아나이스는 욕망과 위험, 심지어 악의 매혹에 끌리면서도 자신 안의 잔혹성에 대한 저항이 남아있음을 분명히 말한다. 잔인함에 대한 무능력은 약점에 가깝다, 또한 우리는 가장 자기답지 않을 때 가장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고 할 때 그녀는 자기모순을 감지하고 자의식적 기록자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결국 아나이스는 준이라는 팜므파탈이 낳는 정동을 흡수하고 서사화하는 인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나는 타인의 욕망과 어둠을 통과하며 나를 발견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나이스는 준 혹은 스타브로긴의 공허 그 자체와 달리, 그 공허를 견디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고백, 이미지, 역할극을 만들어내서 허무의 매혹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미학적 자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나이스는 매우 지적인 여성이고 인간을 단순한 현실의 개인으로 읽기보다는 하나의 심연적 유형, 상징적 배치로 해독한다. 아나이스는 스타브로긴적 중심으로 준을, 창조적 노동과 육체성을 가진 인물로 헨리를 읽으며, 자신은 이 둘 사이를 통과하며 스스로를 분열시키기고 확장하는 의식의 존재로서 위치한다. 즉 준의 중력장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멀리 혹은 깊이 끌려갈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그녀는 허무의 공백과 타락의 에로스를 자기해석의 연료로 바꾸는 고백적 미학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악의 매혹을 사랑과 글쓰기의 형식으로 번역하는 감수성의 공모자로서 아나이스는 끝내 양심과 문장 속으로 되돌아오는 미학적 증인이라 할 수 있다.

 

4. 결어 - 아나이스의 글쓰기가 말하는 것

 

아나이스 닌이 일기를 쓰는 것은 이상화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때문에 일기 속 자기 정당화의 변들이 위선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그 생경한 날 것의 성적 묘사들이 혐오와 당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작 글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말단의 감각이 야기하는 도덕이라는 오래되고 낡은 인식에 지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나이스는 이 일기를 쓰는 동안 자신의 진정한 내적 실체를 발견하고 이 분열된 욕망들인 자신을 통합하고 진실된 인격을 형성하고자 고투했다. 그녀는 글 속에서 글쓰기가 분열되고 혼란스러운 자아 속에서 가장 강력한 요소라고 믿었으며, 어떤 파괴적 영향을 받더라도 온전함을 만들어내는 행위였다고 말한다. 이처럼 아나이스의 일기는 한 인격의 진화로 나아가기 위한 독특한 문서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자아 속으로 도피했다가 진정한 자아를 재발견하는 과정의 역동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이 여러 인격을 연기해왔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이 길을 잃은 허위와 망상의 미로를 인내심 있게 해쳐나가지 않고서는 자아의 통합과 일치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었음은 분명하다. 그녀는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있으며, 인간이 추구하는 질서는 바로 자신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아나이스는 자신의 진실한 본성을 찾아가는 철저한 여정에 대한 경이로움과 인간 정신의 신비로운 작용에 대한 깊은 외경을 통해 미학과 질서, 이상을 마침내 버렸을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의 질서와 지혜를 발견한다. 그녀를 메를로 퐁티의 몸의 철학을 실천한 사람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모든 세포가 기능할 때, 즉 꿈, 욕망, 본능, 식욕이 모두 살아날 때 풍요로움에 도달합니다라고 쓸 때 깨달음의 충만함 속에 존재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을 왜곡하는 거울을 부수고 온전함과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 삶의 투쟁을 벌여 나갔던 인간의 특출한 사례라 해도 될 것이다.

 

나는 창녀처럼 그에게 본능적으로 충실했다. 그와 함께하지 않으면 쾌락을 느낄 수 없었다. 헨리와 관계를 가진 날 휴고가 나를 원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어젯밤 그는 열광하며 절정을 느꼈다. 나는 그에게 순종하며 그를 기만했다. 즐기는 척 했을 뿐이다.”  - 헨리와 준,165

 

이 문장을 읽을 때 교활하고 발칙한 색정적 여인을 떠올리며 도덕적 분노가 슬그머니 일어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이러한 묘사에 함몰된 읽기에 그친다면 그것은 매우 편향된, 남성적 시선의 읽기, 즉 절름발이 독서가 되고 말 것이다. 여성의 자신의 성 욕망 드러내기를 남성들은 관음의 시선으로 읽어내며, 그것에 편협한 (팔루스의)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그럼으로써 죄의식을 부과하고 그것에 악의 그림자를 덧씌우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여성의 시선으로 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회가 억압으로 눌러 온 것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며 개방된 세상 속에서 그 어떤 구속도 없이 자기를 발견하려는 처절한 탐색의 여정임을 발견할 수 있다.

 

출처헨리 밀러북회귀선》 中 아나이스 닌의 서문 일부 발췌


아나이스는 성 탐닉에 안달하는 성 탐닉자가 아니며, 자신의 성적 자유를 위해 타인을 파괴하는 인물도 아니다. 헨리와 준에는 작가로서 또한 불륜의 관계자로서 헨리 밀러에 대한 재정적 지원에 대한 직접적 표현은 없지만 그녀는 그의 문학적 동행자이자 지지자로서 많은 영향을 서로 나누었다. 스치듯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의 초고를 아나이스가 읽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이 소설의 서문을 쓰기도 했는데, 아마 그것을 읽었던 사람들은 이미 아나이스의 문학적 역량에 대한 비판은 거두었으리라 믿어진다. 매우 높은 지성의 소지자이면서 밤의 여왕으로서 재능이라는 이 낯선 조합의 여인은 헨리를 비롯한 프레드, 그녀의 남편 휴고나 사촌 에두아르도에게도 낯설면서도 매혹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녀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것을 연출하기 위한 세련된 감각의 소지자였음이 일기 속 도처에서 드러난다. 아나이스 닌의 텍스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엄한 검열의 시대에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글로 옮기는 것은 한 여인에게 실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음을 상기해보면 그 미학적이고 문학적 작업의 결과를 당연하게 볼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일기는 죽지 않았다. 그가 내 옆에 없어서 그를 애무할 수 도 없을 때, 일기를 쓰는 것 외에 그를 사랑할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헨리와 준)” 문장은 단절된 욕망을 대신하여 삶의 충일함을 지속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글쓰기에 매달리는 아니 에르노가 탐닉에서 반복한다. 에로티즘은 존재 자체를 문제삼는, 여자를 존재적 물음에 빠뜨리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삶의 의미로서 사라져 버리는 괘락으로서의 욕망, 욕망의 부재인 삶의 멸실로서 죽음으로, 사회적 통념을 박살내는 이 격렬하고 천박한 음란의 노래는 스스로를 정의하려는 각고의 자기 탐색의 투쟁이다.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려는 자기성찰적 반영의 역동적 상호작용의 결실이기도 했을 것이다. 도덕주의를 앞세워 비난당하고 잊혀지는 작가를 대신해 항변 하고 싶었다.

 

이 글은 부분적으로 루퍼트 폴이 세운 아나이스 닌 재단(The Anaïs Nin Foundation)’의 아카이브를 참조했음을 밝힙니다. (루퍼트 폴은 1947년 이후 아나이스의 연인이자 1955년 정식 혼인한 남편으로 1977년 아나이스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한 그녀의 동행자였다. 폴은 200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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