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계 2026 신년특별호
사상계 편집위원회 지음 / 사상계(잡지)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705월 김지하 시인의 풍자시 오적(五賊)사상계(思想界)가 게재하자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은 북한의 선전에 이용될 수 있다는 망상적인 가능성을 적용 확대하여 시의 표현을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아 창작자와 발행인의 일신을 구속하고 당대의 지성과 양심을 대표하던 종합지 사상계(思想界)는 강제 폐간 시켰다. 그 던적스러웠던 시절의 사정은 건너뛰기로 하고, 55년 만인 2025년 복간되어 1년의 실험 출간을 거쳐 20261월부터 격월간의 지성인 반려 문명전환종합지로 변화된 시대정신에 맞춰 출간됨을 함께 축하하는 마음이다.

 

시대의 사정이 1960~70년대와 달라졌다고 하지만, 내겐 이 사회의 지성과 양심의 현주소에 있어서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따라서 思想界의 시대비판적 정신의 기조가 변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이 기본적 토대가 흔들린다면 새로운 기치인 문명전환이든 지성인들의 반려로든 대중의 지성들은 외면할 것이다. 물론 시대정신과 함께하여야 하지만 그것에 부응한다는 명분으로 양심의 목소리를 잃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호의 원로 대담의 참여자인 강대인선생의 思想界에 거는 기대와 조언 중에 불특정 다수를 위한 잡지가 되면 좋겠습니다.”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대립하는 시민 집단의 연결을 제안하는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움을 느꼈다.

 

지난 정권 아래서 권력에 충성하며 언론의 기능을 걷어찼던 신문, 잡지, 기타 방송 미디어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은 중립적이라는 말을 앞세우며, 옳음과 그름, 정당함과 부당함이란 이 세상에 존재치 않다는 듯, 옳음과 정당함을 거짓과 부정과 동일한 비중으로 다룸으로써 불편부당(不偏不黨)의 균형을 유지했다고 주장하곤 했다. 매체들의 이러한 양비론적 회색지대에 갇히면 옳음과 정당함이라는 진실은 상대화되어 부패와 불의에 대한 비판이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비판의 시선이 어느 한쪽, 즉 옳음의 자리에 서는 것이 잘못이라면 대체 지성의 양심이란 것이 무얼 의미하는 것일 수 있겠는가? 또한 불특정 다수라는 표현처럼 모호한 말도 없다. 요즘 대중문화 속에 발견되는 저급함으로써의 통속성을 지적하면 우르르 몰려들어 엘리트적 위계의식의 반동성이라며 뭇매를 가한다. 하지만 어떠한 매체건 고유하고 특정한 대상 층이 있다. 모두를 위한 것이 존재한다면 아마 그것은 일용의 소비물이기 십상이다.

 

종합(綜合)’은 단순히 여러 가지를 한데 모으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종합은 서로 모순되고 대립되는 것을 지성과 양심의 판단을 거쳐 통합하여 새로운 단계를 창출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새로운 관념이나 개념을 구성, 창발하기 위해 종합하는 것이지, 그저 여러 가지를 나열하여 산만한 집합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종합이라는 단어 앞에 문명전환이라는 목적개념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분명 이에 부합하는 지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불특정한 홍길동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불특정 다수와 한쪽으로 쏠리지 말아야 한다는 주문은 매우 우려스러운 말로 여겨진다. 이쯤에서 꼰대의 노파심은 접어두기로 한다.

 


이번 호에서 주목하여 읽은 것은 ‘K-문화특집지면이다. 2026년 현재의 한국문화는 주변부 문화에서 세계의 중심부로 이동하는 과정중인 것 같다. 이에따라 접두사 ‘K’가 의미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문학과 영화, 음악을 비롯 음식에서 민주주의에 이르는 분야별 전문연구자들의 담론은 시의 적절한 반성과 새로운 목표 설정의 뜻있는 지표가 되어줄 것 같다.

 

특히 K로 표기되는 기표가 담지하고 있는 의미의 변화를 분석한 계간 K-Writer의 설재원 발행인의 그 기의의 통제와 가치 축적에 대한 사유의 제안은 많은 관련자들이 반드시 생각해야 할 지적으로 여겨진다. 또한 독일 힐데스하임철학과 박술 교수의 한국문학의 세계 내 보편성 획득의 사정을 피해자로서 목소리를 빼앗겼던 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목소리를 찾은 자로서 주류문화의 세련된 언어를 다루면서도 동시에 피지배자와 폭력의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있는 매우 특수한 담론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지적은 국내 비평가들로부터 들을 수 없었던 외부적 시선이어서 신선한 인상을 받았다. 한강이나 김혜순이 서구 주류의 시선에 수용되는 저간의 사정을 읽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아마 이번 호의 가장 인상적인 담론은 미중 기술패권전쟁과 격변의 세계질서의 중국과 미국의 대표적 전문가로부터 두 국가의 기술 전선의 현황과 전선의 이동과 AI의 현 국면을 전해들을 수 있는 적절한 기회가 되어 준 듯하다. 중국과 미국의 기술전략 사이에서 한국의 위기는 무엇이고 기회는 무엇일지에 대한 제언들은 우리의 미래전략에 대한 귀중한 조언으로 읽힌다. 과연 이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새로운 광역질서의 주체적 창조자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새로운 문명과 질서를 만들어내는 선도자가 될 것인지, 이 거대한 질서의 변화를 조망하는 기회가 되어주었다.

 

한편 쿠팡과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시론(時論)은 왜 이런 기형적 기업이 탄생했으며 사회적 물의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지를 우리사회가 방치한 구조적 공백에서 발견하고 있다. 시민대중을 비롯한 정부와 각종 사회기구, 기업들 모두가 더불어 풀어야 할 과제이다. 바쁨의 덧에 갇힌 과로사회, 살림의 외주화와 돌봄 공백, 지역소멸이라는 불편한 장기적 과제가 놓여있다. 이 괴물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상상은 이제 우리 모두의 몫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K-방산에 관한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글들에서부터 김장하 선생과의 인터부(inter) 또는 taboo의 희귀한 대담글은 반가움이었다. 기타 문예란의 글이나 여러 종교에 터 잡은 글들이 과연 지성의 반려인지는 머리를 갸우뚱하게 한다. 글의 내용적 깊이나 사유의 미흡이 드러나는 몇몇 글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思想界가 자리 잡아 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성과 통속성은 구별되어야 한다. 211호는 안정되고 짜임새 있는 내용과 구성으로 더욱 성숙된 지성인의 잡지로 거듭나기를 응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싯다르타 / 인도의 이력서 / 동방순례 헤르만 헤세 작품선 2
헤르만 헤세 지음, 이인웅 옮김 / 이유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언제나 집으로 가는 것이지.”

- 노발리스, 푸른꽃2실현중에서

 

동방 순례;Die morgenlandfahrt1932, 히틀러의 나치정권이 들어서기 1년 전에 발표된 글이다. 이 시점에 주목하고 읽었는데, 독일 사회는 그야말로 혼돈의 정국이었기 때문이다. 지배 엘리트간의 권력투쟁이 극한에 이르렀던 시기이기에, 이미 유명세를 얻은 작가로서 담론세계에서 침묵만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본국 독일로부터 벗어나 스위스에 둥지를 틀고 있었던 인물이었기에 그 물리적 거리로 인해, 한편으론 외부 세계에 보여지듯 융의 심리학으로 대변되는 무의식의 신비주의 세계를 통한 은유의 공간에 침잠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이 공개적으로 천명했듯 개인주의자임을, 그 정당성을 내세웠기에 내면세계는 그의 독보적인 문학세계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헤르만 헤세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독일인들의 시선에서 그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노벨상을 수상한 독일문학의 자랑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의 문학에 대한 격하의 타당한 이유가 있을지언정 결코 표면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독서 시장에서도 데미안은 마치 성서처럼 읽힌다, 무수한 번역본들이 사흘이 멀다 하고 새로운 표지와 번역으로 출간이 그치질 않는다.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그의 작품들의 한결같은 인물구도이다. 불완전한 인격에서 완전한 인격으로의 이행을 삶의 여정으로 보여주며 초월적 인격형성을 제안한다. 이 작품이라고 이러한 구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H.H와 레오는 이름만 달리하는 거의 동일한 인격들이다. 따라서 작품 발표 시기에 따라 그 유사 동일 구조 속에서 작가가 의도한 본래의 의미는 이야기의 외피 아래로 숨어든다.

 

드러난 이야기는 숨어든 진짜 본심을 은폐하는 미학적 테크닉이다. 헤세는 이 미학적인 글쓰기의 달인이다. 어떤 문학작품이 독자에게 휘감기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지만, 노벨상 수상을 하게 되자 한국 독서시장에서 급작스레 읽히기 시작하는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이 이러한 미학적 글쓰기의 대표적일 것이다. 물론 크러스너호르커이는 헤세처럼 의도를 숨기려는 글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르지만 말이다. 책의 제목이 동방순례라고 하여 어떤 지역이나 방향으로서 동방(東邦)이 아니다. 이것은 원제목 모르겐란트파르트(morgenlandfahrt)광명()의 땅으로 해독하여야 하듯, 어떤 나라, 지리적인 것이 아니고, 영혼의 고향이자 청춘이며, 모든 시간이 하나가 되어 버리는 그런 관념적 이상(理想)의 지대이다.

 

즉 소설은 바이올리니스트인 H.H 라는 예술가가 일종의 정신 공동체로서 순례자들의 단체인 결맹(Bund;結盟)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결맹의 일원들과 함께 빛의 땅을 향한 순례의 기록이다. 이 순례의 구성원들에는 레오라는 하인이 있는데, 이 인물이 예사로운 존재가 아니다. 모든 구성원들을 흡족하게 하고, 그 누구보다 고매한 영적인 인물이다. 데미안의 다른 화신이다. H.H는 이 순례 길의 여정을 실제로 꿈을 꾸면서 느끼는 행복과 같은, 내면과 외면을 유희하듯 시공간을 자유롭게 옮겨 다니는 소중한 과정으로 믿으며 긍정의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사달이 나고 마는데, 믿음을 상실하고 회의에 빠지는 죽음에 이르는 영혼의 병을 뜻하는 모르비오 인페리오레(Morbio Inferiore)’협곡에 이르러 하인 레오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결맹의 일원들은 순례의 보이지 않는 구심점 역할을 하던 존재가 사라지자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의심으로 의견이 갈기갈기 나뉘어 갈등하고 분열된다. 광명의 땅, 이상의 꿈을 함께 향했던 결맹원들은 여기서 산산이 분해되어 흩어지고 만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H.H가 결맹의 비밀은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준수하며 온전히 개인적인 행로에 관한 기록만을 하는 과정에 서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여기에 하나의 중대한 은폐가 있는데, 독자는 H.H가 쓴 기록의 이야기를 쫓아가다 갑자기 H.H가 레오의 사라짐 이후 기록을 더 밀고나가지 못했던 이유를 나중에 듣게 되는 것이고, 그것도 H.H가 결맹의 최고법정인 거대한 문서고(文書庫)에 보존된 당시 결맹원들의 주장이 담긴 각각의 기록에서 모르비오 인페리오레에서 해체되게 된 원인들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을 읽으면서 드러난 사실들에 입각한 실상이다. 이에 대해 H.H는 자신만의 해석을 말하는데, 모두가 서로 상반되고 서로 다른 것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래, 우리의 역사학적 노력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었다. 이런 역사적 기술을 계속할 필요도 없고, 읽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진실을 오리무중(五里霧中)으로 묻어버리는 것이다. 당대 독일사회가 휩싸인 시국 혼돈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인데, 동일한 사실에 대해서 저마다 다른 주장을 하고 있으니 조용히 먼지가 쌓이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진실에서 자신을 멀리 이격시켜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양식은 그의 산문 고집이라는 글의 정치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성장에 관심을 두는 것이 삶의 최고의 미덕이라는 주장과 맞닿아있다.

 

개인주의의 끝판 왕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왜 옳고 그름이 없겠는가.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 내면의 완성이 곧 미래의 길이라고 독일인들을 향해 설파하면서, 현실은 외면하는 개인주의, 이러한 독일 지식인들의 무관심과 책임회피가 나치의 발흥에 일조한 것일 수도 있다. 독일 본국의 지식인들, 특히 작가그룹의 일원들은 스위스에서 주절거리는 헤세의 안일한 개인주의적 내면성장의 담론이 불쾌했음은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당시 스위스에 어렵게 도피하여 빈궁한 삶을 지탱하던 로베르트 무질이 근거리에 있는 헤세가 아니라 미국에 도피해있는 토마스 만에게 5달러를 도와줄 수 없느냐는 편지를 썼겠는가. 동료의 삶에 관심도 없는 사람이 독일인의 삶을 위해 무의식 세계의 탐닉을 통해 신비주의적 행복의 낙원을 말하는, 인격의 궁극적 합일성을 향한 관념적 이상론은 정말 괴이쩍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의 대단원으로 옮겨가보면 더욱 가관이다. 협곡에서 사라져버렸던 하인 레오는 결맹의 최고법정 심판관으로 결맹의 최고권위자로 출현하여 결맹을 이탈하여 순례를 중단시킨 H.H의 중대한 잘못에 대해 유죄임을 지적하면서도 인간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가벼운 행위로 웃어넘긴다. H.H는 법정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가벼움을 느낀다. 그러자 최고심판관 레오는 이 가벼움을 경고하며, 양심의 법정으로 자신의 죄를 이끌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이 논법이 향하는 곳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하는 것 같다. 모든 보고와 반증과 꾸며댄 이야기들 배후에서 얼마나 비웃으며 도달할 수 없다는 듯이 그 정체를 감추고 있었던가! 진실이란 대체 무엇이며 (...) .이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정보를 알게 된다 할지라도 대체 무엇이 남을 것이란 말인가?”라며, 다시금 다른 이들이 쓴 문서는 진실이 아니며, 자신의 체험 사실만이 신뢰할 수 있음을 강변하는 것이다. 체험 사실이라는 주관적 기억, 그 변조되기 일쑤인 불안정한 기억이 다른 어떤 것보다 진실하다는 말처럼 터무니없는 말도 없을 것이다.

 

거울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비뚤어지고 달라지고 일그러져 버렸던가!”, 물론 기록 또한 기록자들의 작위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에는 일말의 진실들이 잠재하고 있을 것이고, 그 속에서 진위를 밝혀내는 작업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진실에 근접하려는 노력을 추구한다. 문명의 기록자인 작가가 이것들을 거짓이라 폄하하면서 자기의 글만은 진실이라 주장한다면 그런 독단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문서고에 자신의 기록이 보관된 함에 이르러 문을 열었을 때, 안에는 어떤 서류도 없다, 오직 오래되고 낡아 보이는 조각상 하나만 있다. 정말 매우 유치하게도 서로 등이 붙어있는 두 개의 상()이 하나가 된 조각상이다. 헤세의 작품을 읽었던 독자들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장면이다.

 

촛불을 켜자 한 쪽 상의 모든 정수가 다른 쪽 상으로 흘러들어가서 오로지 하나의 상, 레오만이 남는다. 데미안이 싱클레어 내면의 또다른 인격이듯 레오는 H.H의 또다른 인격이다. 즉 완전함에 이른 초월적인 궁극의 합일체인 레오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는 멋진 말을 남긴다. (레오)는 번창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H.H)는 소멸해야만 했다.” 새로운 존재자로 태어나기 위해 자기 소멸의 희생이라는 용기를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째 나치의 정치 강령(綱領)과 닮지 않았나


마치 소멸과 생성이라는 우주자연 궁극의 법을 각성한 듯하지만, 나치가 타자의 철저한 배제를 얼마나 잔혹하게 자행했는가. 그 참담한 소멸이 진정 새로운 생성을 창출했는가? 인간 인격의 완전성이라는 구원을 향한 이 낭만적 신비주의자의 기록은 읽을수록 흉물스럽다. 조금 더 쓰게 되면 거친 말이 연장될 것 같아 예서 그친다. 헤세의 글들은 세밀한 주의를 요구한다. 그는 무관심으로 외면함으로써 나치에 부역했다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없을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통속(通俗)이라는 어휘는 20세기 식민지 사회로 이행되기 전 조선사회에서는 그 사용례가 드문 말이었다. 굳이 그 용례를 살펴보자면 사대부 양반계층이 하위계층의 문화를 자신들과 구분하기 위해 아()와 속()으로 분별하는 용도로 사용했던 듯하다. 강용훈 교수는 통속에 대한 개념사 연구서인 통속의 계보학에서 “1906년 이후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에서 '통속'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식민지 지배권력이 속의 세계로 통치성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등장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20세기 일제의 식민통치권력이 식민지민들을 자신들의 통치 질서에 복속시키려는 의도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한 어휘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인 최초의 한글사전인 조선어 사전1938년이 되어서야 출간되었는데, 거기에서 통속모든 세상에 널리 통하는이라는 의미라고 기술되어 있는 모양이다. 서두가 길어졌다. 어쨌거나 통속이라는 어휘의 본격적 사용은 20세기 들어서면서 부터라는, 다시 말해 식민통치권력이 피지배민의 소위 계몽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하려다보니 장황한 시작이 되었다.

 

오늘날 한글사전에는 1938년의 사전적 의미와 더불어 저급, 저속한이란 의미가 추가되어있다. 사실 우리들의 일상 대화 속에서 , 그거 너무 통속적인데라고 한다면, 그것은 누구나 다 아는 뻔한 것이라는 의미와 함께 조금 저급하다고 얕잡는 어감을 품고 있다. 그래서 말인데, 통속을 말하고자 한 계기가 저급함을 느낀 소설 때문이다. 누군가가 쓴 창작품, 더군다나 해외에서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설에 나는 그야말로 통속적이라는 평을 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이것이 꼭 비하하려는 의도이기 보다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너무도 상식적인 이야기여서 그 진부함을, 기대 이하의 것이었음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그 소설은 20세기 일제 식민치하 한국인들의 일상적 삶의 모습들을 매우 정형화된, 아니 유형화(類型化)된 이라고 해야 할 인물들이 꼭 그만큼 유형화된 행태를 하는 인물전개나, 시대적 통찰의 세부를 표현하지 못하고 이미 드러난 외피의 변죽만을 우려먹는, 한마디로 저급하다고 느낀 것이었다. 대중적 인기를 얻은 기생이 인력거를 끄는 가난한 고학생을 도와 성공시키고, 거지 대장이었던 인물이 사랑에 눈멀어 일제에 저항하는 투사가 되는, 또 다른 한편은 친일로 부를 축적한 부자의 딸과 결혼을 위해 성장의 토대를 마련해준 연인을 배반하는, 1920~30년대 식민지 한국의 신문에 연재되던 심훈, 염상섭, 김말봉 등의 통속소설, 그리고 오늘날의 막장 TV드라마와 빼닮지 않았나? 21세기 한국계 미국인 작가가 한국인만을 위해 쓴 소설은 물론 아니지만 마치 누군가를 계몽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매몰되어 있음에 대한 불쾌감이었다고 해야 할까? 상식,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런 것으로 계몽한다는 생각을 오늘에도 하고 있다는 그 불순한 저의라니.

 


오늘에는 이 어휘, 통속이라는 말은 거의 사라진 것 같다. 그리고는 대중이라는 말이 그 개념의 상당부분을 대체 수용하여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때문에 통속소설이라는 표현보다는 대중소설이라는 범주로 뭉뚱그려 싸잡아 넣고, 소설문학이라는 문화의 한 범주를 평등화시켜버린 것만 같다. , 여기서 대중문학과 통속문학, 또는 고급문학과 저급문학의 2000년대 한창이었던 철지난 문학논쟁을 재현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대중문학이라 불리는 오늘의 소설작품들을 세분하여 문학을 서열화하는 위계질서를 부활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통속이라는 사용례가 드물어진 어휘의 부활을 도모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현실적 과제가 있음을 회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통속이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갈아탄 것도 대략 50년 쯤 된 것 같다. 한국사회에 TV가 널리 보급되던 1970년대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등장이 본격화된 이후부터 통속은 슬그머니 대중문화, 대중문학, 대중 예술로 불리기 시작했을 테다. 20세기 내내 계도(啓導)되고 훈육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던 수많은 사람의 집단이었던 '통속'으로 멸시되던 존재들이 문화주체인 대중(大衆)’으로 그 지위가 격상되어야 할 필요가 대두되었으니 말이다. 통속이 사회적, 매체 기술의 발달로 인해 대중으로 불리게 된 사람들의 앎의 수준도 갑자기 뛰어오른 것일까? 매체가 쏟아내는 잡다한 정보의 영향으로 어느 만큼의 도약이 있었을 것이지만, 대중 구성원들이 한결같이 동일한 앎의 질적 도약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도 사리에 맞지 않아 보인다.

 

어쨌거나 대중이라는 이 의뭉스런 어휘에는 온갖 잡다한 의미들을 상층부 지배계층과 다른 일반의 사람들이 지닌 속성 모두를 싸잡아 넣은 두루뭉술한 어휘가 되어 그 용례의 폭이 무한하게 넓어졌다. 즉 평준화되고, 평등화된 대다수의 사람들과 그 집합을 지칭하는 효율적 어휘가 되었다. 그렇다보니 무언가 저급함을 말하려하면 대중을 비하하여만 하게 된다. 곧 대중이 저급한 것이 된다. 통속이 지닌 저급, 천속한 의미가 구별짓기의 엘리트주의적 문화관이라는 날선 비판을 지우기 위해 대중이라고 퉁치면서 비하의 목소리는 이면으로 은닉되었다. ‘대중은 문화의 주체입니다.’ 라고 말하지만 이때 그것은 단지 소비대상이거나 투표의 수량이라는 계산적 필요성에 근거한 가장된 권력주체로서의 기만적인 가면의 언어일 뿐이다.

 

그렇다면 통속소설이라고, 통속문화라고 분별하는 것이 오히려 진솔한 표현이 아닌가. 음흉하게 대중소설이라고 그 문학적 품질의 분별을 감춘 채 독자 일반인 대중 감식안의 천박성을 말하는 것은 더욱 기만적이다. 20세기를 관류하면서 통속이라는 어휘의 개념은 많은 변화를 거쳐 왔다. 그러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이 있는데, ‘세상에 널리 통하는이라는 뭇 사람들과의 원활한 소통의 긍정적 시선과 저속 또는 저급한의 의미가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통속에 교육(계몽), 윤리, 상식, 도덕의 의미와 연결하여 사용하며 그 긍정적 용례로 해석하려는 의지와 천속(賤俗)한 것 일반이라는 부정적 용례 사이에서 끊임없이 요동쳐 왔다는 사실이다.

 

통속에 대한 이러한 개념변천의 관점을 나는 거부한다. 마치 용례의 긍정과 부정의 부단한 충돌처럼 보이는 시대적 담론들은 말장난이기 십상이다. 그때그때 자신이 처한 상황 또는 입지에 따라 통속의 잣대를 돌리는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신문연재 소설을 쓰면서 통속소설 작가로 비하되어 불리던 김말봉은 통속의 가치 폄하에 다음과 같이 강력한 반론을 편다.

 

대중문학이라면 통속과 통하는 것으로 믿고, 통속이기에 멸시해도 좋다는 일부 그릇된 인식에 사로잡힌 족속이 있다. (...) 저속이 대중의 취미라고 속단하는 작가배가 있다면 이것은 대중을 모욕하는 뜻이 된다. 대중은 문자 그대로 수많은 민중을 의미하는 것이다. (..) 건전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모랄(morals)’ 아래서 대중이 진정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정신문화를 지향해준다면 대중문학의 사명은 수행된다 해도 좋다.” - 출처: 경향신문1958.3.5.기사 대중문화에서

 

김말봉은 이렇게 통속을 저속과 구별하며 슬며시 통속을 대중과 또한 구별해버린다. 이 글에는 통속을 저속이라 말한다면 대중의 취미를 모욕하는 것이라는 것, 건전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윤리의식과 정신문화 지향을 앞세워 재미가 대중문학의 사명이라는 것이라는 문제적 정의가 보인다. 어떤 문화적 생산물에 통속성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대중을 욕보이지 말라는 것이다. 대중 뒤에 숨어든 통속, 대중의 의미는 이렇듯 흉측스러운 전략이 있다. 자기 저급성을 은폐, 대중에 영합하여 사욕을 충족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대중성이라는 것의 민낯이다. 또한 윤리의식과 정신문화를 앞세워 재미를 판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는 김말봉의 주장에는 별개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대체 어떤 윤리이고 정신이냐는 것이다.

 


김말봉은 오늘날 TV의 막장드라마의 효시이다. 말초적이고 선정적인 내용과 기성의 질서에의 순응이라는 규율과 상식에 봉사하는 정신이라면 그것은 매우 그럴듯한 말의 수사(修辭)로 부패한 양심을 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통속은 대중과 분리하여 그 선명성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문화를 대하는 소비대중(독자, 관객, 청중)의 안목을 대우하는 것이 된다. 통속성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대중을 저속하다고 폄하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취향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어떤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통속의 딱지를 붙이는 사람이 있다면 대중으로부터 뭇매를 맞고 나가떨어지기 십상이다. 더구나 문화생산자 당사자가 고급과 저급을 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입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비평가들이 나서야 할 때다.

 

통속에 대한 긍정적 수용과 부정적 배제의 논쟁들은 모두 거기서 거기다. 시대에 따른 담론의 주체적 성질의 표현들만 달라졌을 뿐이지 그 본질은 모두 동일한 선상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여기에는 통속이 지니는 의미를 그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두 다른 대척의 뜻으로 받아들였기에 발생한 편의주의적 해석이 있어 보인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상식의 의미는 현상을 사실 그 자체로 믿어버리는 긍정의 의식, 즉 현실 질서에 그대로 순응하며 어떤 이의도 지니지 않는 이라는 의미와 저급 저속하다는 것은 다른 의미의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표면적 시선에서는 충돌이지만 어휘가 내재하고 있는 함의에는 아무런 충돌도 없는 것이다. 통속은 그저 저속한 것이지, 여기에 그 어떤 시대적 담론을 끼얹어봐야 자기 이해에 터 잡은 말장난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아는 것이 통속이다. 규율 순응을 반복하는 것, 자신이 모르거나 다른 것을 배제하려는 폭력성의 다른 표현이다. 대다수 식민지민에게 자신들의 통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상식을 위해 통속강의, 통속교육을 시키면서 통속은 우리사회에 자리 잡은 언어다. 이를 뒤집어 바라보면 식민지 한국인들을 싸잡아 무지와 몽매에 안주하고 있는 저속함이라는 멸시의 의미와 더불어, 이를 적정한 앎의 궤도에 올려놓고자 하는, 즉 자신들의 통치 질서에 길들이겠다는 의도된 의미가 있다.

 

통속성은 이처럼 오만한 태도와 전체주의적 욕망이 들끓고 있다. 통속성을 답습하는 것과 통속성을 지적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내란범 재판에서 윤은 최후변론에서 계엄명령은 계몽(啓蒙)령이라고 비굴한 항변을 반복했다. 누가 누군가를 대상으로 계몽하겠다는 것은 이처럼 폭력과 교만의 다른 얼굴이다. 20세기 상반기 식민지민들의 문자 해독능력과 새롭게 쏟아져 들어오는 문물에 대한 앎이 일천했던 시대와 21세기 K-Culture로 상징되고 대중지성 또는 집합지성이라 불리는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계몽, 통속성을 향한 행보는 그 무엇이든 퇴행적인 것이다.

 

개념사 연구자인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개념 자체가 정치, 사회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개념의 잣대를 통해 인지된다.” 개념적 변화와 사회적 변화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제 통속은 저급으로 분명하게 해석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 문화에서 분명 몰아내야 할 선명한 것으로 지목되어야 한다. 또 한명의 개념사가인 레이먼드 윌리엄스도 어휘들의 의미변화 양상은 역사적이고 사회적 관점에서 서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듯, 이제 통속은 한국사회의 변화적 관점에서 재정의 되어야 한다. 공론장에서 은폐되었지만 일상의 이해에서의 용례에 주목해 우리 문학의 수용자들인 대중의 의미를 격상시키기 위해서라도 통속은 저급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

 

어느 평론가가 대중의 문학적 역량에 대해 불신을 보이면서 대중의 문학적 취향을 통속으로 싸잡아 단정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대중이 곧 통속이라고 여긴 것인데, 이러한 대중의 용례에서 보이듯 통속은 분별되어 지적되어야만 한다. 통속이 계속해서 대중 속에 암약하게 방치하면 지금 한국사회에서 날뛰는 저 통속적인 것들처럼 대중을 전락시킨다. 일종의 낙인찍기라는 극약의 처방으로서 대중과 통속의 분리, 나아가 통속의 부활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통속을 주장하는 것은 엘리트주의적 차별의지도 아니며, 문화민주주의를 역행하려는 반민주적 반동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비난 속에 내포된 은밀성과 폭력성의 은폐를 모르는 체 하려는 대중 뒤에 숨은 불순한 의지들을 봉쇄하기 위함이다. 계몽령이라는 반시대적 수작이 가능한 것도 대중이라는 언어 뒤에 숨어있는 통속이 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을 동질화 형성하겠다는 이 전체주의적 욕망의 싹을 뽑아내기 위해서라도, 문화 선진국으로의 진정한 돋움을 위해서라도 통속성은 지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정적 감상주의와 상업주의가 판을 치는 문화, 통속적 취향에 입맛을 맞춘 문화는 자기 파멸적이다. 대중의 지성을 갉아먹는 암세포다. 하나의 소설이 장황한 설레발을 치도록 만들었다. 이 잡설을 쓰면서 우리의 20세기 상반기 근대문학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음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통속과 순수, 정통문학과 대중, 통속문학의 논의를 뜨겁게 달구었던 김기진, 안회남, 이태준 등을 읽어보아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언어가 시대와 상호반응 변천하는 개념사도 더불어서

---------------------------------------

* 이 글은 강용훈 교수의 통속의 계보학이 부분적 바탕지식이 되었으며, 김주혜 작가의 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Beasts of a little land)에 대한 비판적 읽기에서 비롯되었으며김말봉 소설들에 대한 회의적 읽기로의 전환을 계기로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미
로베르트 발저 지음, 안미현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베르트 발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내게 밀려드는 이미지는 낯선 길을 쓸쓸히 고독하게 걸어가는 떠돌이 산책자의 형형(炯炯)한 눈빛이다. 그것은 탁월성을 간직했지만, ‘소유하기를 원치 않고 자신이기를 포기한인간의 모습이어서 와락 눈물이 흐르게 한다. 예리한 관찰력에 더해 상상력이 더해진 고매한 정신이 안주할 그 어느 곳도 마땅치 않았던 현실 속 한 인간의 초상(肖像)을 통해 인간 보편의 고독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까닭일 것이다.

 

번역자 안미현 교수는 해설의 글에서 1929년 정신요양원에 들어가기 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마지막 작품집인 Die Rose(장미)의 산문들은 사심 없고 얽매이지 않고 건강한 영혼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사소한 주인공들의 파편화된 허약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분열되고 해체된 현대의 신경증적이고 통일되지 않은 자아를 통한 시대의 징후적 모습이라고 평하고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글들에는 이렇다 할 플롯이나 줄거리가 없는 어떤 상황들이 그저 의미 없이 배열된 듯 보인다.

 

평생을 산책하는 삶으로 살다 간 작가의 모습이 그려진 일요일 산책에서 그의 방랑하는 삶에 대한 하나의 의미를 엿볼 수 있는데, 사람들이 내가 길을 잃었다고 주장할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길을 잃는 것은 인간적인 일이라고 당당하게 믿기 때문이다.”라 말하듯, 알지 못하는 것을 알기 위해 불가피하게 이동해야만 하는 존재가 인간임의 수행(遂行)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의 산책은 상상을 하거나 시를 짓거나 하는, 삶의 풍부함이 만들어지는 기분 좋은 삶의 방법이기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루트비히 티크의 소설 금발의 에크베르트의 등장인물을 연상시키는 산문 에리히에는 늦은 밤 등불을 밝힌 실업자를 위한 필경사 사무실에서 경건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예의바르게 글을 쓰는, 삶의 행운을 믿는 한 젊은 작가의 모습이 시리게 다가온다. 그는 믿는 행위 속에 들어있는 황홀감때문에 행운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리곤 금발의 순진함과 이상주의를 표현하는 이름이기 때문에에리히라고 부르기로 한다고 말한다.

 

어제 나는 초봄의 황금빛에 둘러싸인 풍경 속으로 나가서 부드러운 어머니 자연 앞에 모자를 벗고 벤치에 앉아서 울었다.”라는 산문 타투스의 문장을 접했을 때, 발음의 유사성 때문이었는지 앙드레 지드의 소설 Paludes (팔뤼드)속 타튀루스가 내 쓸모없는 결심들이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곳, 내 생각들이 마침내는 거의 사라져 버리는 곳.”이라며 바라보는 늪의 전경, 인간의 삶과 자연의 총체가 존재하는 궁극의 공간에 놓인 자의 해방의 울음에 가 닿아 목이 메여왔다. 몇 몇 산문의 이 같은 생의 비의(秘義)가 짙게 배어있는 어떤 격함으로 가슴을 저미는 듯한 느낌에 젖어들기도 했다.

 

책의 첫 산문 블라디미르는 작가 자신을 외부의 시선으로 묘사한 듯한 겸허하지만 냉철한 인물 판단이 내려진 존재다. 나는 발저의 생의 태도의 일면으로 읽었는데,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대하지 않는 사람들을 내버려두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영혼이 거칠어지는 것을, 생각이 병들고 경직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자기 모습대로 남아있기를 고집하는 이 독창적 삶의 태도는 어쩌면 1920년대 전쟁의 폐허와 혼돈에 휩싸인 유럽인들의 정신이 숨어든 개인들의 자기 보호를 위한 유일한 탈출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산문집에는 일종의 서평이라고 부를 만한 글들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형식성과 현학성을 배격하는 발저 고유의 글들처럼 지극히 표면적 감상이다. 나는 표면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산문 아이의 문장처럼, 발저는 이 경박함이 종종 호응을 얻지 못함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세밀하게 관찰하는 시선을 지닌 사람의 날카로움, 비평적 눈빛이 번뜩이는 겸허함이다. 산문 켈러의 노벨레는 고트프리트 켈러의 소설, 기분이 좋아져서 보다 예리한 분별력을 찾기 위해 간 레스토랑에 앉아 주변을 깡그리 잊을 정도로 빠져들었다는 단편 마을의 로메오와 율리아에 대한 감상은 그가 인간 삶의 어느 측면을 아름답다고 느끼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부당한 선을 소유하는 것이 초래하는 불행에 관해 서술하는 부분이 특별히 아름다웠고”, “행복에 취한 불행한 사람들을 남다른 심오한 기질을 이유로 그렇게 솔직하게 동정하고 시기하는지를 암시하는것이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위축된 영혼에 깃든 선이 이 세계에서 결코 행복으로 보상되지 않음을 꿰똟는 켈러의 경이로운 문장들이 발하는 성스러움, 그 시적 숨결에 매혹되었던 모양이다. 산문 몇몇 작가와 어느 성실한 부인에 관해는 당대 작가들과 작품에 대한 비교적 진솔한 비평의 시선이다. 그에게 몰리에르의 희극과 모파상의 소설, 이 두 위대한 작가들을 기쁜 마음으로 나란히 두었다.”고 할 만큼 기질이나 인간에 대한 통찰이 그와 교감했던 모양이다. 특히 모파상에 대해서는 더 위대한 단편 작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며 칭송한다.

 

또한 근원적이고 환상적인 글로 문학적 가치를 보여준 두 명의 작가로 뒤마와 외젠 쉬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젊은 여성의 회고를 각기 거론하고 있기도 하며,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갑자기 과대평가된 작가라며, 정서와 이성에서 억지로 끌어낸 것처럼 보이는 그의 운문이지만 성공적이었다고 여긴다며 세평(世評)의 천박성을 은연히 힐난하기도 한다. 발자크에 대한 넘치는 교양이란 평가는 슬그머니 그의 조크가 읽혀 미소를 짓게 된다. 산문 자허마조흐는 발저가 수용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기꺼이 복종했던 부인은 그를 너무 싱겁다고 여겨 그를 버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기 삶의 권리가 약화되는 것을 즐거워하는 저 멍청한 사내를 자신이라면 더 심하게 다루게 했을 텐데라며 한 방향으로 치닫는 영혼에 대한 불쾌를 표현하기도 한다. 발저식 유머일 것이다.

 

산문 따귀 한 대와 그 외에는 촌철살인의 문장 모음이라 일컬어도 될 만큼, 인간 삶과 그 심리의 형태에 대한 세밀한 관찰들이 돋보인다. "저와 함께 가실래요?”라는 그의 제안에 당신은 따귀 한 대를 맞고 싶은 모양이군요!”라고 반응하는 여성의 말에 이어진 우리는 자기 자신을 누군가와 연결시키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하나의 목적에 맞출 무수한 기회를, 그리고 쾌활함과 직관을 함께 나눌 무수한 기회를 이용하지 않은 채 흘려보낸다.” 라는 이 문장은 그 비약만큼 재밌다. 그렇게 쌀쌀맞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이다. 여자는 삶 속 하나의 기회, 그 풍요로운 관계의 하나를 놓친 것이다. 아마 요즘에 이러한 수작을 하였다간 성추행이라고 고발 당하기 십상일 것이다. 발저의 소망이었던 아이 하나를 낳고 거절하지 않을 출판사에 작품을 내미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는 삶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는 것 만 같다


무심히 의미를 두지 않고 내뱉은 말에 상처입은 자의 표정과 태도를 보여주는 한 에피소드도 있는데, 자신의 이해력에서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단순한 것에 대해 자신의 높이에서 내려다보듯 말한다.알아들었어요?”, 이 말을 들은 상대는 순간 모욕적이고 굴욕을 강요하는 듯한 이 표현에 어떻게 대응하여야 할지 난감할 것이다. 바르르 떨며 대거리를 할 것인지, 아니면 감정을 감추고 슬기롭게 대처할지. 발저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간계와 사랑에 나오는 루이제처럼, 무능한 작은 뇌처럼 아주 딱해보였다.”.

 

전혀 흠잡을 데 없다는 것은 얼마나 역겨운지- 46

나는 자부심 때문에 자부심 없이 행동했고

강인함 때문에 부드럽게 행동했다.”

수줍어하는 자와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 사이의 전쟁은 

아마도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92

 

발저는 자의식에 차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삶을 극도로 싫어했다.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며, 하나의 움직임이 있는 곳을 둘러보는, 오히려 올려다보는 삶의 믿음이 그에게는 훨씬 풍요롭고 흥미로운 것이었다고. 엄숙주의와 규범주의를 거부하는 삶을 추구하며 무고하고 정직한 삶을 고수했던 한 고귀한 예술인의 이 미미하고 존재성 희미한 파편의 글들에서 어떤 불가불의 절대 고독의 감응에 휩싸인다. 세계의 주변부에서 익명의 인물로 살아가는 대다수의 현대인의 삶의 속성들이 나열된 글이라 해도 될 것 같다. 때문에 발저의 글 속 우연한 일상의 표정들과 목소리를 읽어가며 분열되고 해체된 우리네 조각난 마음을 토닥여주는 시간이 될 지도 모르겠다. 발저를 읽는 것은 항상 쓸쓸한 사랑의 느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바바라 몰리나르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앙(Viens), 이 말은 어디서 들려오는 것일까? 누군가가 이리 오라고, 여기라고 부르는 이 애처롭고 을씨년스러운 목소리, 왠지 결코 직면하고 싶지 않은, 그럼에도 언젠가는 들려오고야 말 것 같은 음성 같기만 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오랜 설득 끝에 바바라 몰리나르의 글을 수집하여 엮어 펴낸 소설집이다. 뒤라스의 서문과 바바라 몰리나르와의 짧은 대화록인 지하 납골당, 그리고 총 열세 편의 소설로 이루어진 어렵사리 출간된 책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읽는 것은 바바라 몰리나르가 여덟 해 동안 쓴 글 가운데 극히 일부, 어쩌면 100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모두 폐기되었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서문중에서

 

책의 원제목 viens(와줘)은 수록작 중 한 편이지만, 몇몇 작품에서도 와 줘라는 문장은 의미심장하게 출현한다. 어쩌면 이야기들 모두가 궁극으로 향하는 심연에서 울려오는 존재근원의 그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끝없는 추락, 캄캄한 어둠이 지배하는 좁은 방, 살아있는 존재가 없는 거리, 지향점이 없어 보이는, 목적지 없는 장소를 향한 부조리한 걸음, 적대적이고 기묘하며 자신이 속할 수 없는 다른 이들의 세계에 있다는 절망과 두려움이 거의 모든 지면을 장악하고 있다. 뒤라스의 말처럼 그럼에도 사람들은 순진한 믿음을 지니고 사랑하고 섬기고 기다리는 불치병을결코 알지 못하기에, 사는 것이 때론 기쁨이고 환희일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글쎄 삶이란 것의 궁극에 직면해서도 그럴 수 있는 것일지.

 

거의 전편(全篇)을 지배하고 있는 극한까지 치닫는 끔찍하리만큼 황폐한 여정은 고통으로부터의 광적인 도주처럼 보인다. 아니 평화와 평온만이 있는 종국의 장소를 향한 불가능한 행보인지도. 쓰고 나서는 찢어발겨 버려졌던 그녀의 모든 글들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유일한 배설통로였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몰리나르의 계속된 출판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뒤라스의 거듭된 요구로 관철된 단 한 권의 책을 구성하게 된 이 글들은 그렇기에 폐기되는 것이 옳았을 것만 같다. 영원히 반복되는 고통의 순환인 이 세계 속 삶과의 분투의 기록은 단지 버텨내는 하나의 분출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읽는 이의 마음조차 어둡고 아프고 낯선 암흑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는 그런 절망 가득한 여정이었다. 책장을 넘기면 대면하는 첫 작품 산타로사에서 오는 비행기는 한 여자가 갈망하는 행복의 언어들이 오가는 장소에의 참여일 뿐, 산타로사도, 비행기도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단지 산타로사에 출발한 비행기가 도착하는 시간에 공항 대합실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을 보기 위한, 죽은 시간에서 도망치기 위한, 매일 매일 그것조차 어려워지는 삶의 고통으로부터의 탈주라는 너무도 우울한 장면들만 그저 씌어있을 뿐이다. 여느 소설과도 확연히 다른 이 황량한 하루의 일정을 담은 이야기에 직면하면 이 책을 모두 읽어낼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런데 어떻게 마지막 작품까지 모두 읽어냈는지 내 자신이 의아스러울 정도다.

 


사실 내 자신이 의아스러웠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만날 약속이라는 상처 입은 인간이 암흑 속에 갇힌 채 벽을 더듬으며 탈출로를 찾아 반복적인 행위를 거듭하는, 보이지 않아 더듬는 목적을 잃은 행위 속에서 더 이상의 움직임이 무용함을 깨닫고 부동의 상태로 머물기로 하는 순간, 내 신체에 스며드는 일체의 감정이 예전에 지워버렸던 기억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도착한 것을 알았다는 X의 공포에 찬 비명, 얼빠진 눈으로 공포에 사로잡혀 뒤로 물러서려는 X의 저항불능의 고통이 내가 알고 있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는 동류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성이 길을 잃게 될 심연을 파는 동굴 속 짐승처럼 웅크리고 기다림에 짓눌려 있을 몰리나르의 상태를 그릴 수 있음에 나는 진저리치면서 그녀의 글속에 매몰되어갔다.

 

짐승 우리라는 작품은 타 작품과 달리 서사의 줄기가 비교적 선명하게 다가왔는데, 감금된 철창에 갇힌 동물원 동물들에 대한 슬픔, 그 비참함의 감정이 베르트와 피에르 두 연인의 사랑 속에서 환상적 이야기로 선회한다. 두 사람이 즐겨 찾던 동물원 보아뱀 앞에서 존재를 잃은 듯 멈추어 서곤 했던 피에르의 죽음 이후 보아뱀과 뒤엉킨 채 발견되는 베르트의 모습에서 몰리나르가 세상의 어떤 지평에 이르렀는가를 짐작케 된다. 아마도 그녀가 본 것은 존재 일원성, 심연이 도달하는 곳 아니었을까. 동물원 관리인처럼 뭇 사람들의 시선이 결여한 다름의 이해 부재가 없었더라면 베르트의 고통과 불행은 발생치 않았을 텐데.

 


이렇듯 폭력과 정신의 혼돈, 죽음과 신체 자율성의 통제에 대한 바바라 몰리나르의 통찰은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하다. 아니 집착한다. 그 광란적이고 불안정한 정서는 마치 카프카 혹은 실비아 플라스의 전통을 잇는 또 다른 차원의 문학 줄기라 하여야 할까. 이 초현실적이고 악몽같은 글들이 열정적으로 써진 것과 마찬가지로 광적으로 폐기되었던 것은 그녀의 글쓰기가 곧 살아냄 그 자체로서의 행위였기 때문이었을 것만 같다.


쓴 글을 모두 찢어 폐기하며 출판을 거부하던 몰리나르가 출판 직전 뒤라스에게 손수 가져온 네 편의 작품이 있는데, 와줘는 그중 한 편이다. 모든 것을 기록하는 일기인 듯한데, 기차역 대합실 벤치에서 졸음 속에 헤매는 상태라고 하는 것을 보면 몽상의 기록 같기도 하다. 그런데 와줘라는 말로 기억되는 B는 대체 누구일까 하고 의심하며 읽게 되는데, 당신을 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문이 열려 깊은 계단을 내려간 곳이 거대하고 황량한 지하실이다. 그리곤 내려가고 내려가고 또 내려간다. 이렇게 해서 정말로 도착했을 때 기다리고 있겠다는 B에 이른 것일 게다. 사자(死者)가 된 연인을 향한 지하여행의 신화 같기도 하고, 고통의 심연을 한없이 파들어 가는 그 실체를 직면하는 아찔하고 음울한 너무도 아프고 두렵기조차 한 극단의 몸부림같기도 하다.

 

국역본의 표제작인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는 침구에 가죽 끈으로 묶여있는 정신병원 수감자를 상상하게 하는 인물 혹은 악몽처럼 읽힌다. 모든 것이 억압된 존재, 입에 바늘을 가득 꽂아놓아 음식을 먹을 수 없음에도 음식을 갖다놓는 행위, 두 팔을 절단하고, 눈을 보지 못하도록 실명케 하고서는 우리는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모든 걸 준비해 드렸습니다.”라며, 어떻게 활용할지는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제 가셔도 됩니다. 일어나세요.”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뭐가 다른가.

 

권위를 가진 자들의 폭력은 고상한 미덕의 언어로 포장되어 마치 어떤 배려처럼 들리게 하지 않는가. 나가십시오. (...) 당신은 이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 이후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라고 말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모두 빼앗기고 세계에 내던져진 우리들의 초상(肖像) 같기만 하다. 이 소설집은 번역자 백수린 작가의 말처럼 작품이 시간의 지층 위로 그녀들의 이야기에 매혹된 한 여성에 의해, 그리고 또 한 여성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된, 자칫 존재 할 수 없었던 작품의 존재물이다. 깊은 고통과 절망의 극단적 목소리의 음울한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기쁜 일은 아닐 것이지만, 우리들의 신체에는 이 목소리에 감응하는 근원적 장소가 분명 있을게다. 그렇기에 이 희귀한 작품에 매혹될 수도 있으리라. 2026년 첫 번째 독서 인연이 참 기이하게 맺어진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6-01-03 2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06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