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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 우리 본성의 빛과 그림자를 찾아서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2월
평점 :
이 에세이는 “현란하지 않고 화려한 수식 없이 오직 진리를 찾고 싶어 한 절박한 욕구를 위해”, 또한 “대중의 행복과는 대조적인 소수 계급의 교만과 권력을 혐오한”, “인간성의 유익을 위해 이득과 명성을 포기”하고, 도덕적 용기를 멈추지 않았던 시대의 비판가로서 ‘윌리엄 해즐릿’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글들이다. 1830년 9월 18일, 그의 아들과 찰스 램 단 두 사람만이 지킨 임종 후, 세인트 앤 교회 묘지에 묻혔지만,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날선 것이었는지 영국 당대 귀족사회와 이에 기생하는 무리들은 고인(故人)의 묘지를 무참히 파괴하였다. 상층의 지배계급들에게 그는 가히 “화끈거리는 상처”였으며, 그의 영향력이 그만큼 두려웠던 것이었음의 반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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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채 근 200년의 풍파를 거친 2003년이 되어서야 노동당 당수 마이틀 풋의 주도하에 〈가디언〉紙 의 모금으로 복구되었으며, 위의 인용문장은 묘비명의 일부 문장으로서 그 기념비에 새겨졌다. 해즐릿의 글은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 이은 두 번째의 마주함이다. “진리와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애(人間愛)의 지지 않는 옹호자”로서의 그의 격정적인 글 속에서 한 인간에 대한 고귀한 열정과 경애의 마음을 갖게 된다. 해즐릿의 신랄하면서 결코 가볍지 않은 숙고된 통찰의 예리한 비판적 시선들은 이후 수많은 철학과 문학, 사회비평의 귀중한 아카이브로서 역할을 했을 것임을 나는 19세기 이후의 문장들에서 확인한다.
이권과 허영심이 결합한 수구의 전형인 에드먼드 버크와 이러한 무리들의 권력지향성과 몰염치한 가면, 부패한 매춘(賣春) 경향성의 근저를 파헤쳐 그 더러움의 심연을 지적하거나, 소위 패션이라는 유행이 지닌 태생적 자기모순의 현상을 알아 본 것도 아마도 그가 처음일 것이다. “고상함을 가장하는 태도가 많은 곳에 반드시 두 배로 많은 상스러움이 있다.(110쪽)”는 이 간결한 문장은 “손에 넣기 힘든 신속함과 변화무상에 공을 들여 허세를 유지”하는 패션의 본질에 대한 그의 심안(審眼)을 반영한다. 해즐릿의 글은 이렇게 폐부를 깊숙이 찔러대는 냉혹한 비판적 성찰만이 아니라 그에 이르는 여정의 글들에는 시적 향취와 여느 소박한 소시민의 애틋한 경험들이 또한 놓여있다.
이러한 시정(詩情)은 표제인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에서 단연 두드러지는데, 우리는 친숙해서 하찮아진 지금 여기에서 숨 쉬며 저 너머 멀리 펼쳐져 흐릿한 시야에서 사라지는 풍경에 욕망과 고상한 존재 양식을 투사하곤 한다. 그리곤 그 먼 것에 비현실적 상상의 색을 입히며, 발견하고 싶은 희망과 소원을 품는다. 그는 말한다. “지평선의 아련한 능선을 바라보며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어떤 흥미로운 것들이 있을까 상상”하는 인간을. 윌리엄 워즈워스와 윌리엄 콜린스의 시구가 어우러져 발산되는 풍부한 상상의 이미지들인 우리네 착각, 그 자체의 고귀함과 신비로움에 감사케 한다.
“나는 기억 상자를 열어 기억의 포로들을 끌어낸다.” -61쪽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거닐던 ‘월위스 몽펠리에’의 차(茶)농원의 추억, 해즐릿은 이 빛나고 생생하고 육감적이며 섬세한, “슬픔을 생각과 격정의 보존액에 계속 담금질되어” 변형된 당의(糖衣)가 씌워지고 축제 장식이 장식된 듯한 지나간 멀고 먼 기억을 더듬는다. 그는 이것이 상상 속에 색을 입힌 착각임을 모르지 않는다. 소망이 투영된 흔적임을. 그렇게 아득한 것은 좋아 보인다.
어쩌면 마르셀 프루스트는 해즐릿의 이 산문을 읽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냄새와 맛과 소리가 시각보다 더 원형적이어서 반복에 따른 마모가 덜한 것”이라는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마들렌의 그 맛과 향기에서 연원하는 기억의 향연 말이다. 해즐릿은 연인의 목소리, 청각에 각인된 고유한 특성을 세익스피어의 문장을 통해 소리가 주는 그 은은한 마법을 들려준다. “밤이 되면 연인의 혀는 어찌나 달콤한 음악소리 같은지. 《로미오와 줄리엣》Ⅱ.ⅱ.207”, 상상의 자극을 받은 우리의 귀로 들려온 목소리는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천국을 항해한다.
오~, 시적 애상 넘치는 이 에세이는 곧이어 시대에 대한 격정으로 전환되어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엄혹한 통찰, 실체 자체를 마치 꿰뚫어내기라 하듯 혜안 번뜩이는 글들이 펼쳐진다.
“편견과 악의는 언제나 결점을 실제보다 크게 과장한다.
우리는 무지만으로도 그 사람들을 괴물이나 유령으로 만든다.” - 74쪽
멀어서 흐릿한 것, 그래서 가까이 접촉하지 못해 알지 못하는 것은 이처럼 매혹적인 추억이나 소망의 투영인 것만은 아니다. 소문이나 추측만으로 특정한 결점을 과장하여 비현실적 관념을 씌우는 짓들이 얼마나 난무하고 있는가! 알지도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적의를 품고, 관념상의 증오와 무자비한 혐오를 들씌워 대상화하는 부당한 적의(敵意) 말이다. 당파적 적개심에 휩싸여 인간과 세계를 잔혹하게 갈라치기하는 그 던적스러움 또한 눈에 멀리 보이는 것에 입혀지는 부당한 상상이며 착각이다. 우리들은 관념적으로 완벽한 존재가 아닐뿐더러, 결함으로 가득한 동물이기도 하다. 시인 존 세필드가 그의 「詩論」에서 “세상에 결함이 없는 괴물 같은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고 쓴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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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첨꾼과 독재자에 관하여」, 148쪽에서 】
오늘 한국사회를 대상으로 써진 것이라해도 손색이 없을, 아니 그 정치적 시각이 지닌 보편성의 통찰이야말로 현재를 문제적으로 성찰토록 돕는다. 「아첨꾼과 독재자에 관하여」라는 글이 그것인데, 프랑스 혁명을 비난하는 책인 《프랑스 혁명 고찰》,(1792)을 쓴 에드먼드 버크를 시작으로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비열함, 그리고 압제하고 압제당하는 사회체제를 정당화하는 그 부패한 시선들의 민낯을 여지없이 발가벗긴다.
공화주의를 대표하는 신문인 《모닝 클로니클》의 정치기자 생활은 인간 심리와 세상사의 이치를 그 스스로 납득하는 사유의 시간을 충분히 제공하였을 터이다. 이에 터 잡은 준엄한 지성은 “독재자 하나에 ‘수없이 많은 준비된 노예들’이 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독재자를 사랑한다. (...) 필연적으로 불행과 퇴보가 일반인들에게 너무 널리 만연하고 깊게 침투한다.”며, 독재자인 군주와 그에 빌붙은 기회주의자, 아첨꾼들의 노예근성을 파헤치기도 한다.
이들 비열한 노예들은 가장 이상적 아첨꾼이며, 언제나 가장 확고한 독재의 토대라는 것이다. “주인 마차 꽁무니에 올라타 민중을 개와 돼지라고 경멸의 눈초리로 내려다보는 것들”을 우리는 수없이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이성이 마비된 인간들, 자발적 복종의 노예근성에 찌든 저 비루한 인간무리들을 보라! 동정의 여지조차 없는 저 열등함과 무지로 버무려진 인간 군상들을. ”경배가 변태적일수록 욕망 어린 아집에 만족해하는“ 당대 귀족계급들과 그 기생의 무리들을 지켜보면서 일구어낸 생생한 증언일 것이다.
지금 독재를 획책하던 내란 범 윤의 지지를 떠들며 성조기를 흔드는 사대주의, 독재와 친일을 찬양하는 저 노예근성의 무리들은 해즐릿이 통찰한 바로 200년 전 영국의 그 흉측스러운 폭력의 무리들 바로 그것일 것이다. 나는 해즐릿의 권력의 본성에 대한 이 비범한 에세이에서 훗날 윌리엄 골딩이 쓴 《파리 대왕》에서 그려내고 있는 파괴적이고 무력에 기승한 권력과 공포와 짐승의 다른 이름인 종교의 묘사를 발견한다.
이 에세이집에는 이 밖에도 근대 형법의 교범으로 일컬어지는 베카리아의 《죄와 벌 논고》(1764)에서 주장한 사형제도 비난에 대한 반박의 글을 비롯하여 삶의 애착과 죽음에 대한 불쾌감의 상관성에 대한 논의, 허영과 배타적 자기본위의 산물로서 패션에 대한 비판, 성공의 조건에 대한 실제성 존중이라는 독특한 논의 등 인간애와 일반 민중의 상식이라는 눈높이에서 바라본 당위적이어야 할 도덕의 논의도 있다. 사실 어느 글 하나, 어느 문장 하나 소홀히 읽어나갈 것이 없는 빛나는 지혜의 시선으로 가득하다.
특히, 옮긴이의 글은 해즐릿의 소설 《리베르 아모리스》의 일부 소개와 함께 산문 〈런던의 고독〉으로 갈음되고 있는데, 그것은 “늘 그 자리를 지키는 등대와 같은 사랑”의 이야기이며, 지배계급의 기만과 악의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주저하지 않음으로써, 생애 내내 고통을 감수하여야만 했던 인류의 용기인 지성이 대도시 런던에서 얼마나 소외의 고독을 느껴야 했는지에 대한 은유의 기록으로 읽히기도 한다.
“밖에는 박애의 이슬이 땅을 적시는데 그의 마음은
기드온의 양털 한 뭉치처럼 말라 있을 것이다.” - 190쪽
돈과 권력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파렴치한 도시에서, 외롭게 귀족들과 그 노예들 무리의 부조리와 부당성과 기만과 이기심과 거짓을, 그리고 탐욕스러움과 무지와 은밀한 폭력과 열등함을 보았으며, 그를 주저하지 않고 비판했던 용기있는 지식인의 고독과 쓸쓸한 죽음을 본다. 비록 진정한 친구 찰스 램과 아들 두 사람에 불과한 임종이었지만, “나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노라”라는 유언은 시공을 초월한 오늘의 독자인 나에게 겸허와 존경의 마음을, 어떤 위로의 감정을 지니게 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아직 접하지 못한 그의 문장들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갖게 된다. 혹여 그의 소설 《리베르 아모리스》의 출간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