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키아 여자의 웃음 - 이론의 원 역사 모나드 인문학 시리즈 1
한스 블루멘베르크 지음, 모나드 출판사 옮김 / 모나드출판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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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영면(永眠)에 들 때까지 독일 뮌스터고전문헌학과 철학교수로서 위대한 은유 속에 압축 변형되고 정교화된 인류 사상의 그 독특한 과정을 탐색했던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몇 안 되는 국내 출간저술이다. 이 저술을 만나기 전에 난파선과 구경꾼이라는 출중한 은유의 사상사에 매료되었었다. 그 책의 서문에는 모든 문화에서 개념적 파악에서 벗어나는 것, 즉 세계, , 역사 전체에 대한 조망은 오랫동안 조탁되는 이미지 가공 작업 쪽에 이양되어왔다는 글이 있다. 바로 이에 해당되는 저술이 이 책이다. 고대 천문학자의 우물 추락이라는 우화를 화두로 하여 시대라는 시간 경과에 따른 수용사를 통해 대표되는 사상가들의 입장과 사유를 추적한 철학적 사건들의 조명이고, 인간 인식의 변화사라 할 수 있겠다.

 

블루멘베르크의 저술을 읽는 것은 늘 즐겁다. 아마 천박한 지적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동일 사태에 대한 그 무수히 변화되는 인간들의 관점들이 푸짐하게 펼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화두(話頭)는 기원전 6세기 이솝우화(Aesop‘s Fables)<점성술사(The Astrologer)>의 이야기다.

 

 【《Aesop‘s Fables, 'The Astrologer(점성술사)'

 

사실 이솝우화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이 책의 시작이 되는 원()이론이 아니다. 최초의 출발점이 되는 원 이론으로서의 이야기는 이것을 변주한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가 사형에 선고되어 감옥에 갇혀있는 사태를 투영하여 수정한 이야기다. 이솝우화의 내용은 <한 천문학자가가 별을 관찰하기 위해 밤 외출을 하곤 했는데, 자신의 모든 집중력을 하늘로 돌렸을 때 발밑에 놓인 진흙구덩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안에 빠졌으며, 고통 속에서 도와달라고 외쳤다. 이때 어떤 사람이 다가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피고선 당신은 하늘에 무엇이 있는지 보려고 노력하던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땅 밑에 무엇이 있는지를 모르고 지나쳤단 말이요?’>라고 힐난하였다는 지극히 짧은 일화다. 1927년에 출간된 에밀 샹브리판본을 번역한 국내 번역서에는 매우 표피적인 교훈이 주석으로 달려 있는데, 나는 아주 크게 웃었다. 물론 실소를 하였다는 얘기다. 거창한 일을 한답시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상의 작은 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해주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사실 이 주석은 기존 질서에 대한 매우 순응적인 기계적 해석일 것이다. 블루멘베르크의 이야기에서 한참 비켜나간 것이기에 이런 읽기도 있다는 것으로 이 얘기는 그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이솝 우화에는 익명의 천문학자와 또 익명의 행인만이 등장할 뿐이다. 이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가 철학의 역사에 한 기원을 부여하는 이론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맞이한 운명의 부조리함, 즉 아테네 시민의 인식과 철학자의 인식과의 괴리에서 오는 몰이해, 그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사유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의 발견이었다. 그는 1세기 전부터 전해오는 우화의 등장인물에 구체적 면면을 부여한다. 익명의 천문학자는 밀레토스의 탈레스로, 행인은 재치있고 예쁜 트라키아 하녀가 된다. 천체의 궁창에 전념하던 탈레스는 하늘을 쳐다보았을 때 우물에 빠지고, 트라키아의 하녀는 그를 보고 웃는다. 그분께서 코앞과 발밑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볼 수 없었던 가운데 하늘에 있는 것은 열렬히 알고자 하셨습니다.”(테아테토스174 AB번역)


표지 뒷면 이미지: 우물에 빠진 천문학자를 바라보고 트라키아 하녀는 웃는다

 

플라톤이 그려낸 탈레스와 트라키아 하녀의 이 이야기가 원 이론의 자리를 잡는다. 이름없는 한 천문학자가 플라톤에 의해 밀레투스의 탈레스라는 원철학자로 명명된 것이다. 플라톤은 밀레투스 철학자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철학적 실재론의 고유한 방식으로 자신과 남을 웃도록 한 것이다. 즉 밤하늘 세계 관찰자의 기괴함과 그가 실재와 부딪친 충동 반경에서 구경하는 구경꾼의 웃음을 묘사함으로서 당대의 근본적 사태인 스승의 죽음을 순교자로 발견하려는 참을 수 없었던 시대성의 반영이며, 그때까지 중심이었던 자연철학의 시선을 인간사회를 향한 전향으로 설정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인데 이로써 하늘의 공간적 원거리 도달은 철학적 관심에서 사라진 것이다. 트라키아 여자는 당대 그리스 시민들처럼 천문학자의 권리로써 추구하는 이론적 순수성을 오해하는 사람들의 표본으로 등장시켰던 것이다. 이제 이것은 원 이론으로서 표준이 되어, 이름께나 날린 사상가들은 개인적이고 시대적인 입장에 따른 성공 스토리를 지어내기 시작한다. 최초의 인물로부터 이 이론에 종지부를 찍는 최후의 인물이 되고자 이야기의 요소들은 탈락과 장식적 유입, 수정과 변경, 변조를 통해 시대성과 도덕적, 사상적 이익을 드러낸다. 그것은 천문학자 탈레스의 원철학자로서의 반영여부이며. 트라키아 여자의 역할 변화이거나 배제를 통한 인식 투쟁이다.

 

이같이 탈레스 일화의 수용사(受用史)는 이천 년을 가로지르며 이론의 역사에서 무엇이 본래적으로 우스운 것인지의 작업을 수행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기원전 3세기 초의 냉소주의 철학자 비온을 거치고 키케로와 에피쿠로스를 지나 기원후 1세기의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과 우물에 처박힌 천문학자를 죽임으로써 사라졌던 중세를 통과하며 11세기 다시 부상하는 천체관측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천체관측자의 곤두박질에 부여된 두 유형의 의미를 쫓고, 몽테뉴, 볼테르, 포이에르바하, 훔볼트, 니체, 하이데거가 수용한 이야기에까지 이른다. 플라톤의 원 이론을 표준으로 불과 5세기 남짓이 지났을 때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의 텍스트와 해석을 읽다보면 인류 지성의 퇴행이 어떻게 저질러지는지를 봄으로써 염오(厭惡)에 빠지게도 한다.

 

이들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은 천체관측자의 곤두박질이야기에서 탈레스를 아예 배제해 버리는데 발밑에 무엇이 놓인 줄 알게 하는 것이 하늘을 아는 일보다 절박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주 내부 표면에 대한 이교도적 성격으로 천문학자의 곤두박질을 영원한 구원의 중요성에 대한 위협으로 느꼈던 까닭이다. 그리곤 재빠르게 탈레스를 지워버리고 스토아 철학자 키케로를 그 자리에 끼워 넣는다. 교부 철학자 테르톨리아누스는 원철학자 탈레스를 우물 추락 즉시 악의 뿌리에 박힌 자로 낙인을 찍어버리고, 트라키아 하녀의 관념에서 철학적 세계관 입장을 조롱하는 자리에 빨간 밑줄을 그어 기독교 교리의 정당화에 이용한다. 그는 말한다. 우리에게 머리 위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Quod supra nos, nihil as nos), 하늘의 재앙과 세상의 운명과 비밀을 읽으려 하지 말라. 발만 보아도 충분하다.”.



이제 천문학자의 이론인 일식은 기독교 박해에 대한 신적인 기호의 경고여야 하고, 임박한 하나님의 노여움의 공포(公布)이다. 그래서 천체의 경과는 오히려 예외적이었음을 확증하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조짐이 된다. 천문학자는 사라졌고, 별을 우주 운명의 점성술적 위상배열로 인정하는 대신에 운명의 돌파구를 위한 기호로 보려했기에 더 이상 하늘을 관찰할 동기가 없었던 것이다. 인류의 지성이 정체되고 퇴보하는 데에는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전체주의적 압박만 있으면 아주 쉽사리 저질러 질 수 있다는 것의 증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은 텍스트와 해석을 반대자를 확정하는 위장 전투로 삼는다. 저마다 세련된 입장의 해명으로 원 이론에 대한 무지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너희는 입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다 구멍으로 처박아 들어갔다. 누가 하나님인지를 모르면서 탐구하였다.” 시리아 출신의 기독교 변증론자의 이 무시무시한 문장은 이성과 철학, 학문을 질식시켜버린다.

 

중세의 해가 저물 즈음인 11세기에 이러한 교부 철학의 갱신이 움트기 시작한다. 다미아누스의 전능에 대하여에서 천체 관측자의 우물 추락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철학자 탈레스는 여전히 익명으로 머물지만, 트라키아의 하녀는 대지의 여신 테메테르의 슬픔을 위로하고 기분을 불어주는 조력자로 엘레시우스 창립 신화의 구성원인 이암베의 이름을 부여받는다. ()의 의례적 기능을 담당하던 이암베로 하여금 트라키아 여자의 조롱을 위안과 기쁨과 결합시킨 것이다. 주인의 불운으로 생겨난 교훈을 시적으로 공연하는 하녀의 모습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다미아누스는 이암베로 하여금 다음의 대사를 읊게 한다. 나의 주님은 발밑에 있는 똥을 모르고 별을 보려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문학자의 곤두박질은 상황 극화를 위한 장식으로 처리하고, 이암베를 통해 철학을 짓밟아 으깨고 신성으로 포장한 것이다.

 

이렇게 역사의 시간이 경과함에 따른 인간들의 윤색을 열거하다보면 이들에게서 역사적 주인공 자리를 성취하려는 야심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을 역류하여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실로 오늘의 타산적 이해관계의 이데올로기를 관전하게 하는데, 아마도 블루멘베르크의 지적처럼 그는 스승의 대화록 테아테토스를 읽지 않았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를 창작해 냈는데, 아마도 당대 그리스인들은 철학이 얼마나 무용한지를 가리키는 가난 때문에 탈레스를 욕하고 있었던 연유도 있었을 것이다.

 

천문학 지식에 근거한 올리브 풍작을 사전에 알게 된 탈레스는 올리브 압착기를 전부 확보하여 올리브 수요가 일어나 큰돈을 벌었다는 일화다. 철학자도 원하기만 하면 쉽게 부자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려는 의도였을 것이고, 이를 통해 철학의 목표는 돈이 아니며, 어떤 물질적 혜택도 도출하지 않는 순수 무결점의 이론적 업적을 증명하여 탈레스를 보호하려는 필요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탈레스는 그가 일구었던 유산을 철학에 무상으로 제공하였다.) 이 올리브 이야기는 2,000년이 지나 지혜에 대한 조롱의 이야기로 윤색되어 다시 등장한다. “소유할 수 없으면 쓸모없다.”, 그런가하면 14세기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술에 취한 뮐러 이야기에서 천문학자의 추락이야기를 변조하여 쓰고 있다. 미래를 예견하기 위하여 별들을 응시하였다. 그는 거기서 시궁창에 빠졌다. 그는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고 당대 점성술을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이야기의 원 의미는 탈색되고, 자신들의 상황에 유리한 용도로 변형시켜 상대를 비난하는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몽테뉴는 또 어떨까? 에세(Esse)212절에 원이론에서 필요한 트라키아 하녀의 증언만 남기고 천문학자는 사라진다. 그리고 하녀도 더 이상 웃지 않는다. 이 도덕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에게는 가설이나 추측보다 많은 것을 약속하는 바로 발밑 땅을 위해 포기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탈레스는 우물에 빠지지도 않을뿐더러 역사 속에서 완전히 지워진다. 그녀는 확실히 그에게 하늘보다 자기 자신을 보라고 충고했습니다.”라고, 하녀가 현장에서 벌인 행위를 선의로 간주하는 이야기로 변질된다. 볼테르, 니체, 하이데거 등 이러한 변주된 이야기들이 계속되며, 시대의 사상적 진화와 철학자 개별의 사유를 쫓을 수 있으나 이쯤에서 그들의 구체적 이야기는 멈추어야겠다.

 

끝으로 니체의 한 걸음 더 나간 기원전 6세기에 벌어졌던 신화와 철학 대결의 탐지로 마무리하는 것이 이 책에 대한 도리이겠다. 탈레스는 존재의 통일을 직관하기 위해 밤하늘의 도시에서 등을 돌렸고, 별들의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그 지점에서 물에 빠졌다.” 철학의 시초 역사인 원이론의 이야기에서 니체는 사물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고 결정적 공포를 환기하기 위한 자기 신뢰의 철인을 발견한다. 탈레스의 정치적 좌절로 인한 신화에 대한 도시국가의 관계로 읽어내는 독법에서 가히 초인의 철학자를 거듭 발견하는 과정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 독창적인 은유의 독법을 지닌 독일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저술은 역자의 해설처럼 우물과 하녀를 오가며 우리들의 부족한 앎을 대체하여 우리 자신을 비웃을 수 있도록 이끈다. 또한 철학으로부터 실패하는 방법을 배우고 유리한 지점에서 자빠짐으로써 웃음을 은유적 상상의 토대에 세울 수 있음을 발견토록 한다. 수많은 사유의 실험과 이론의 발전을 한 권의 책으로 누린다는 것은 항시 유쾌한 일이다. 오늘 우리들은 탈레스의 추락과 여자의 웃음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쓰고 싶을까? 여기에 우리 시대의 숨어있는 진실, 욕망이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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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많은 탈오자와 비문은 열악한 번역 출판시장에도 불구한 귀중한 저술의 출간이라는 고마움을 상쇄할 정도로 심각하다. 적극적 개정이 뒤따라야 할 성의가 요구된다. 이러한 흠결은 정말 아쉽다. 별 다섯 개를 받아야 할 위대한 저술임에도 별 네 개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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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사피엔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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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끔찍한 악의 세계가 될 것이다!

이 소설은 그 이유를 생각케 하는 이야기다.


소설의 제목 ‘Anti-Sapience’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비이성적 인류?, 이성적 인간이 아닌 것? 아마 이 둘의 개념을 모두 지닌 것 같다. 한 편으론 비이성적인 현생인류에 대한 고발이고, 다른 한편으론 현생인류가 아닌 다른 무엇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인간을 기억과 의식만의 존재로 인식하고 육체는 이것들을 담고있는 일시적인 유한성의 물체정도로 이해하여 뇌 임플란트를 비롯하여 이 소설의 인물처럼 뇌 매핑을 통한 초지능의 컴퓨터와 일체가 된 존재를 꿈꾸는 세계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한 IT천재가 말기 췌장암으로 사망하기까지 스스로 과제를 생산하고 실행하는 인간형 AI 개발 여정을 토대로, 상업적 욕망과 죽음의 정의를 초월하는 불멸에 대한 급진적 기술의 욕망에 어우러진 윤리적, 도덕적 여정을 이끈다, 나는 이 여정의 핵심적 물음을 두 축으로 읽어내려 갔는데, 그 하나는 인간 육신의 죽음과, 기억과 의식의 불멸을 대비한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일 것이다. 한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문서는 사망진단서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때 그가 존재했다는 가장 분명하고 진실한 증거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처럼 인간의 죽음을 존재 증명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로 소설이 시작되듯 죽음으로서 살아가는 존재의 이야기이며, 인간이 순진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한 그 인간형 인공지능이 살아있는 인간들의 현실적 삶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가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줄거리 축은 컴퓨터에 이식된 의식만으로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에 존재하는 인격체의 인식의 세계를 기술주의자들의 유토피아라 설정한다면 과연 그것이 현 인류가 당면한 무수히 모순된 긴장을 극복한 대안의 세계가 될 수 있겠는가에 대한 물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은 디스토피아임을 설득하고자 하는 것 같다. 죽어서 초지능과 일체가 된 AI 인격체는 개발한 인간의 의지와 다른 결과를 생성하고 그것은 자신의 광활한 네트워크에서의 학습으로 인간의 지적, 경험적 능력이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결국 인간은 인공지능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아닌 이상의 장소 아르카디아로 도피한다. 이 이상향이 인류의 기술문명이 도달하지 않은 지대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에서 인류의 어떤 역사적 퇴행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정말 아이러니는 AI의 완전성을 위해 인간의 흠결까지 학습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인공지능의 개발이 인간과 다른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곧 인간으로부터 학습된 원초적 악에 기인함을 지적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소설이 보여주는 이 유토피아 혹은 아르카디아라는 종말론적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고 싶지만은 않다. 꿈꾸던 이상적 사고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무가치한 무엇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는 것이 그 이상의 잘못된 실천에 의해 현실 변화에 대한 개혁 의지의 촉매작용으로서 우리 의식의 현실적 상황을 다시금 점검할 여지를 제안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위한 어떤 가능성, 더 나은 세계를 위한 활동을 위한 참조 요인으로서.

 

육신을 버리고 의식만으로 이루어진 존재, 그래서 불멸을 이룬 존재가 되고자하는 이 기이한 욕망은 소설의 중심인물(혹은 인격체)IT천재 케이시의 주장들인 오늘날 급진적 기술자들의 신념과 맞닿을 것이다. 중요한 건 육체가 아니라 육체의 데이터다.”라며, 의식을 어딘가에 탑재해야 한다면 살아있는 인간 육체가 낫다는 말과 함께, 이의 정당화 논리로 인간의 역사가 늘 타인의 육체를 이용하는 행위로 이루어졌음을, 즉 타인의 노동력 탈취라는 개념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까지 이른다. 또한 인간이 AI에게 노동력을 제공한다는 개념은 너무도 위험하다는 말에 대해 이미 현실 사회에서 인간들이 AI의 손과 발이 되고 있음을 열거한다. 생성형 AI가 그린 그림을 복제하는 화가 마크 허먼, AI가 짠 퍼포먼스를 실연하는 무용가 제프 토드, 알파고의 충실한 손 역할을 했던 구글 딥마인드 엔지니어 아자 황 등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이미 펼쳐지고 있듯이.

 

오늘 우리들은 인간을 AI의 육체로 활용하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시대에 이미 들어서 있다. 육체가 없는 앨런(소설 속 죽은 IT천재와 일체가 된 AI)이 인간의 육체를 의도대로 움직일 힘을 이미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 힘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곧 인간기술의 미래에 대한 기만과 부정성을 연결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 소설의 아주 중요한 주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죽음의 정의에 관한 개념이다. 이것은 모두(冒頭)에 인용한 소설의 첫 문장에서부터 줄 곧 이어지는 질문의 하나인데, 죽은 것이 아니라 죽었다고 정의되었을 뿐이라며 죽음을 단순한 하나의 사실로서의 인지 상태에 불과한 것으로 주장하며, 오히려 나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것은 나의 인지 기능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증거다.”라고 죽음을 인정함으로써 불멸을 증언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육체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의식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도구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아마 우리 인간은 이처럼 영원한 선택과 갈등의 길을 걷는 종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AI 시대라는 삶과 죽음의 정의에서부터 의식과 육체의 관련성, 노동의 형태, 기술 윤리 등 새로운 정의의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소설은 바로 이러한 직면한 과제들에 맞선 인간들의 멍청함과 침잠한 원초적 악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 불완전성에 대한 사랑의 두 얼굴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얼굴, 어떤 길을 선택해 낼 수 있을까? 무엇인가 그 안에 들어있는 존재는 밖을 볼 수가 없다. AI시대 속에 들어선 우리는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지 못한다. 이 흥미로운 소설을 읽으며 일상에서는 잊고 있던 우리들의 현안 문제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 인간을 명료하게 파악해내지 못한 상태에서 그 무엇인가에 인간을 학습시키는 것만큼 위험한 행위는 없을 것 같다. 믿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인간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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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려 고백하다
박설호 지음 / 울력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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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면한 문제점과 부딪칠 때 견지해야 할 사항이 저항의 지조라면,

미래의 먼 목표를 설정할 때 견지해야 할 사항은 꿈의 정서일 것입니다.”

꿈과 저항을 위하여 - 에른스트 블로흐 읽기Ⅰ』, 박설호, 2011, 울력

 

에른스트 블로흐를 읽다가 단 한 문장에 스치듯 지나가는 라스카사스(Las Casas)'란 인물명이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인류의 명예, 그 자체로 호명되는 인물에 대해 어째서 한국사회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16세기 에스파냐가 서인도제도, 즉 오늘날의 중남미 대륙을 마구잡이로 정벌하던 식민주의 시대에 살았던 수도사다. 이 책 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려 고백하다는 한신박설호 교수가 2008년도에 바로 이 인물 일생의 언행을 모범삼아 한국사회 소시민들과 역사학도들이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펴낸 정치와 문화를 아우르는 굳이 범주화 하자면 역사 에세이라 할 수 있겠다.

 

루터와 칼뱅 두 사람은 16세기 종교 개혁가로 교과서에 등장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작 진짜배기 종교개혁가인 토마스 뮌터바르톨로메 라스카사스는 배운 적도 없을 뿐 아니라, 그네들의 이렇다 할 저작도 번역 출간된 것이 없다 보니, 대체 이 사회는 내게 무얼 가르쳐 온 거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많은 저술을 남긴 라스카사스의 국역(國譯)물은 고작 콜럼부스 항해록이라는 무색무취한 책 하나다.

 

루터와 칼뱅은 체제 순응적이고 봉건적 계층 사회를 옹호하던 수구주의자들로서 종교개혁가라는 희한한 타이틀을 부여받아 진실 호도에 한 몫 한 자들이다. 루터는 1525<...쓰레기 같은 농민들에 반대하며>라는 하층민에 대한 악명 높은 발언을 담은 책을 발행하여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이데올로기와 이익에 헌신한 지독한 보수주의자였다. 이 분파주의자가 교과서를 채우고 있는 반면에, 사상과 행동의 일치를 보여준 인물들로서 농민혁명을 주도하며 진정 교회의 개혁을 주창했던 토마스 뮌처는 한국의 교과서에 없다. 더구나 종교재판의 광기가 극에 달했던 시기에 현대의 종교적 관용을 선취했던 담대하게 변화의 기독교를 주창하고 실천했던 라스카사스를 한국의 학계에서조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그악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반공주의 망령이 여전히 떠돌며 역사의 정의와 진실의 앎을 방해하려는 듯하다. 16세기 인물에 대해 에스파냐의 국수주의 역사가들을 비롯한 유럽중심주의 사가들의 음해론인 그가 알지도 못했던 먼 후대의 인물인 마르크스를 덧씌워 공산주의 괴물이라 비난한 것을 지식으로 삼아 서구가 은폐하려는 사고의 의지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 작금의 한국 학계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라스카사스는 생의 전부를 신대륙 정벌의 현장과 유럽을 오가며 서인도제도에서 벌어지는 에스파냐 사람들의 잔혹한 인디언 착취와 학살을 금지할 것과 그네들의 문화에 대한 존중과 평화의 공존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수도사이며 주교였던 고귀한 개혁자였다.

 

이 책은 매우 알차게 구성되어 있는데, 라스카사스라는 인물과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에서부터 이를 토대로 하여 오늘의 한국사회를 향한 저자의 목소리가 있으며, 신학자와 역사학자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유명한 1550년에 펼쳐졌던 바야돌리드 논쟁에 대한 주요 쟁점과 그 역사적이고 철학적이며 정치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다루고 있으며, 어쩌면 이 책의 발단이랄 수 있는 서인도제도에서 저질러졌던 인디언들에 대한 무차별 대학살을 현장에서 목격한 진술을 다룬  인도 제국의 황폐화와 인구 섬멸에 관한 짧은 보고서를 비롯한 라스카사스의 논설 몇 편을 포함해 보론으로 실려 있다. 문헌적으로도 국내에서는 귀한 책이다.

 

1. 라스카사스를 우리들은 오늘 왜 알아야 하는가?

 

수많은 역사의 기록들이 전해 오고, 또 그를 시대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기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또 그만큼의 역사가 가려져 있어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 그렇게 은폐된 역사들은 그 역사 속에 포함된 사람들의 양심이나 이해와 충돌하기에 비난되거나 숨겨지고, 배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라스카사스는 에스파냐의 소시민들과 수구 역사학자들에 의해  조국의 경제를 망치는 매국노라 매도되고, 둥지를 더럽히는 자라며 자신들의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이에 가세하여 서구와 백인 중심적 사관을 지닌 미국의 우파 사회학자 엘프리드 크로스처럼 인디언 멸망은 살육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천연두에서 비롯되었고 에스파냐의 피 비린내 나는 정복의 역사를 희석시켜, 자신들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그리고 패권주의의 야욕을 축소 은폐하거나 부정하려 한다.

 

라스카사스의  『인도 제국의 황폐화와 인구 섬멸에 관한 짧은 보고서(1520)는 황제 카를 5세의 알현을 기다리며, 서인도제도(신대륙)에서 벌어지는 온갖 살육 사건을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짤막한 문서이다.  인디언들의 무차별 학살을 막고, 그들의 노예화를 금지하며, 문화와 생명을 보호하기위한 노력이었다.  이 보고서는 신대륙 개발의 역사를 끔찍한 착취와 살인의 역사로 규정하고  유럽 중심적 관점에서 나온 휴머니즘의 카테고리를 완전히 뛰어넘는보편적 인류 개념을 선언한 기록이다. 당대의 시각인 인디아언은 열등한 인종이므로 당연히 백인의 노예로 이용되는 도구이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이론에 대한 정면의 저항이랄 수 있다. 악명 높은 피차로, 코르테스, 나르바예즈, 알바라도 등의 에스파냐 정복자들을 위시한 추악한 가해자들은 이러한 논리에 의해 인디언 삶의 터전을 불법적으로 강탈하고 도륙하는 것이 정당화 되었다.

 

50년에 걸쳐 서인도제도와 에스파냐 등 유럽대륙을 오가며 에스파냐 정복자들의 신대륙에서의 참혹한 만행을 목격하고 그를 저지하기 위해, 또한 낯설고 이질적인 신대륙 사람들의 문화와 신앙에 대한 다름의 수용을 이해시키려 한 박애주의자이다. 또한 당대 기독교 독단주의의 관점을 뛰어넘은 다원주의 시각을 통해서 자신과 타인의 문화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 지에 대한 세기를 앞선 탁월한 예지자이기도 했다. 그의 노력이 실천되던 이 5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서인도제도에서 인디언을 발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될 만큼 그들은 멸종되었다. 2,0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이 참담한 인종학살의 역사가 부인됨으로써 인간들은 그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게 되었다. 이 앎의 회피와 양심에 대한 무감증은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는 인종 학살, 인종에 대한 편협한 차별과 배제로 인한 갈등과 전쟁의 역사를 보여준다.

 

타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 평화와 공존을 위해 자기 삶의 전부를 투여했던 한 인물의 행적으로부터 여러 형태의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을 터이지만 아마 하나의 핵심적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어째서 정의를 관철시키는 일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요하는가? 사람 죽이는 일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자행되는 반면, 선의 실천은 그다지도 오랫동안 애면글면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간단히 반동주의적 간섭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을 테지만, 남의 재물에 대한 질투, 경쟁심, 이기주의, 수구적 경제 실리주의, 소시민주의 등의 이유를 들이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이권에 대한 탐욕과 결탁한 세력들의 정의라는 도덕적 정서에 대한 반감이라는 오래된 인간의 심리 구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서구인들의 무의식과 의식적 사고와 행동을 오랫동안 좌우했던 폐쇄적인 구대륙에서의 기독교의 부패가 절정을 향하던 시대에 새로운 대륙과 전혀 이질적인 문화를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향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라스카사스는 재조명되고 그가 향하고자했던 인간애는 오늘 우리들에게 앎과 양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깨우치게 한다.

 

2. 서인도 제도의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역사와 바야돌리드 논쟁

 

서인도 제도의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역사라는 간행물은 당대 정복자의 관점에서 써진, 즉 라스카사스의 인도적 조처에 대한 비난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오늘날 에스파냐의 역사가들은 이 제국주의 정당화와 정복행위의 합리화로 가득한 일방적 거짓말의 책을 모범적 문헌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유럽중심의 정통주의와 국수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온갖 편견으로 채워진 책의 진술들이 오늘의 세계에 주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불순한 책은 서인도 제도의 정복행위에서 단 하나의 원주민 살인과 강탈, 착취, 강간도 서술하지 않는다. 오직 인디언들의 희생제의를 야만성으로 부각하고, 그네들의 종교적 이단성을 문제 삼아 폭력과 전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에스파냐인의 권리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정말 가소롭고 터무니없는 주장들이 난무하는데, 6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세계 모든 곳에 구원의 신비를 내린다는 칙서를 공포했으므로 인디언들이 그 신성한 기독교 신앙을 모른다는 것은 망각했거나 파기한 것이므로 그들 신대륙의 원주민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유럽대륙의 어느 한 명이 했던 말을 15세기 말에 첫 조우를 했던 인간들이 대체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사실 이러한 논의 가치조차 없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가당찮은 거짓말의 책이 서구 역사학자들의 모범적 문헌이라는 점이다. 온갖 편견을 침소봉대하여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비인간적 야수로 몰아가기 위한 의도로 써진 것이 이 세계의 진실된 앎을 가리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신대륙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을 희생자의 관점에서 묘사한 라스카사스의 짧은 보고서의 대척점에 있는 금광 채굴제련소 감독관이 쓴 이 거짓으로 도배된 책은 정말 지독하게 극단적 간극을 보여준다. 에스파냐 사회의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무주선점으로 인한 무한한 이익, 즉 무어인과 막 끝난 전쟁으로 피폐해져 파멸해가는 에스파냐 국가경제의 뜻밖의 젖줄이었으니, 설혹 알지 못하는 먼 대륙의 이질적 인간들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인데, 라스카사스의 진실한 보고가 자신들의 이익을 방해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관점 이상의 그 어떤 도덕적 성찰도 성가시고 불쾌한 것이었을 테다. 에스파냐인들은 자신들을 살인의 원흉으로 몰아넣는 진실에 심리적 거부감을 느꼈으며, 진실을 왜곡,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과정을 택했다. 그리고는 라스카사스를 자신의 둥지에 침을 뱉는 정신병자, 미친개 취급을 했다. 실로 인간의 역사는 이런 것이다. 저자 박설호 교수는 이를 이렇게 쓰고 있다 . 역사적 죄악은 유감스럽게도 당대에 분명히 척결되거나 청산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와 무관해 보이는 역사적 사실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어떤 가르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라고 불의한 역사의 진실을 반면교사로 삼아 하나의 경고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말이다.

 

역사는 권력과 금력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부당한 폭력이 주류의 질서가 되는 것을 수없이 보여준다. 그렇다고 이러한 불의한 현실을 마냥 팔짱끼고 수수방관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라스카사스와 같이 저항과 거역의 실천을 통해 시대를 살아가는 민초들의 근본적 자세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역사는 이러한 고결한 인물들의 끊임없는 출현으로 아주 더디게 선의 길을 조금씩 진척시키며 걸을 수 있게 된 것일 게다. 1550년에 두 차례 이뤄진 바야돌리드 논쟁은 카를 5세의 요청에 의한 황태자 필립2세의 명의로 15504~5, 그리고 8~9월 라스카사스와 세풀베다 두 사람이 각기 세 시간씩 자기 입장을 피력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이 논쟁의 계기가 된 것은 황태자를 가르치던 권력을 늘 기웃거리며 기득권에 취해있던 세풀베다라는 신학자의 또 하나의 거짓말로 채워진 인디언에 대항하는 정당한 전쟁의 이유라는 신대륙 원주민 학살의 정당화를 주장하며 라스카사스를 비난하는 책이었다. 야만적 원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서 무력 사용은 불가피한 신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특히 당국의 허락도 없이 터무니없고 이단적인 주장들로 채워진 책을 썼다고 라스카사스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소책자까지 발행하기도 했다. 황실은 정치와 학문의 차원에서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견해를 공적으로 조정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지배계층 역시 인디언 학살극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태도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체제 옹호적 보수주의자인 어용학자 세풀베다와 힘없는 신부 박애주의자 라스카사스의 토론이 벌어진 배경이다.

 

세풀베다는 신대륙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으며, 이 논쟁에는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세풀베다는 서인도제도 현지의 그 어떤 상황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며, 더욱이 인디언들이 어떤 품성의 존재인지, 그네들의 정신적 수용능력이나 문화의 양상에 대한 그 어떤 이해도 갖지 못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이 논쟁은 대부분 기독교 교리의 타당한 적용에 대한 격론과 유럽이 아닌 새로운 지역에서의 기독교 선교 활동의 교리적 적법성의 문제라는 종교적 쟁점이 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세풀베다는 라스카사스를 이단으로 몰아 그를 죽음에 몰아넣고자하는 의도의 공격이요, 라스카사스는 이러한 함정을 피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적절한 기독교 교리의 타당한 관점 변화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많은 논쟁의 쟁점 중 하나를 소개한다면 세풀베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근거로 기독교 전파를 위해 필요한 것은 총과 칼이라는 폭력의 도구를 이용한 들어오라고 강요하기를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스카사스는 세풀베다의 인용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며 맥락을 무시하고 한 문장만을 빼서 마치 그것이 진실이라 말하는 것은 학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저열한 짓이라 지적하고, 아무런 조건 없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15세기까지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했던 수많은 이교도들에게 막무가내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선교의 원칙이란 인간과 시간, 장소를 초월한 보편타당한 원칙으로 확정 될 수 없는 것이고, 선교의 원칙은 언제든 변형 될 수 있는 것이며, 교회가 전쟁을 허용하는 것은 복음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 선언하기도 한다. 신앙은 강요에 의해 전파될 수 없는 것이며, 기독교 교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인간 법정에서 그들을 처벌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로지 신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고, 때문에 이교도들의 용서받을 수 있는 무지를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아마 당대의 광기가 지배하던 기독교 세계에서는 위험천만한 발언이었을 것이다.

 

그는 새롭게 변화된 세계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교회법이 새롭게 정립될 필요를 역설한 것이다. 파격이다. 유럽이라는 구체적 현실의 조건에서 적용되던 것으로 그 밖의 세계에 그것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겠는가라는 자기 인식과 반성의 필요를 역설한 것이다. 서구의 잣대로 동양을 제식으로 재단하는 오리엔탈리즘처럼 그 시선에 내재한 무한한 오류를 인식한 선취적인 지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 결어; 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려 고백하다

 


우리 인류는 역사에서 아직도 무언가를 배우지 못하고 있다, 라스카사스를 읽는 이유는 에스파냐인들의 16세기 서인도제도에서 벌였던 만행을 일회적 사건으로 읽는 것에 있지 않다. 그의 저항과 투쟁이라는 일생의 행적을 통해 낯선 문화와 인간 사이의 침탈과 학대와 살해라는 범행의 기록을 역사의 상징적 범례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지구상의 16세기에 발생한 대학살극은 외면되어왔으며, 인류는 정말 그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아마 인간의 태생적 탐욕과 이기심이 가로 막은 탓일 게다.

 

이 책은 역사 연구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한 편의 지향일 것이다. 그 지향은 바로 찾아서 얻어낸 지식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를 포괄하는 역사임을 전하려는 의지일 것이다.  은폐된 16세기 서구 백인들의 이 야만의 역사는 아주 뚜렷한 문제를 드러낸다. 바로 앎과 양심이라는 복합적 문제이다. 이것은 라스카다스와 세풀베다의 역사적 논쟁이 시사하듯,  재화와 정의 사이의 문제이며, 이로움의 추구와 의로움의 추구 간의 대결이며, 경제적 실리와 도의적 명분의 싸움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무엇이 재화와 정의를 함께 날 수 없도록 인류의 비행을 방해하는 것일까라는 시대 모순을 지적하는 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린 박설호 교수는 말한다. 이 역사의 한 장면을 보며 우리가 인간임을 가장 부끄럽게 하는 것은 인디언들에게 가한 끔찍한 범죄를 교묘하게 은폐하려는 태도, 범죄를 은폐하려는 자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앎과 양심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잘못을 공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 진실의 발설이 마치 자신의 모욕, 자기 존엄성을 해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자기 죄의 은폐가 21세기 오늘에도 우리의 정치 상황과 역사인식에서 아주 쉽사리 발견되는 이유일 것이다. 1923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 내무성은 조선인 폭도들의 짓이라 선동하여 6,000 여명의 조선인을 학살했다. 그때 일본인들의 구호는 야만인 조센징(朝鮮人)을 절멸(絶滅)하라!”였다, 오늘의 일본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금기로 하며, 역사적 사실을 부인한다.

 

에스파냐의 역사가들도 자신들의 선조가 저지른 16세기 인류사의 가장 무참한 대량학살을 부인하기는 마찬가지다. 에스파냐의 역사학자 라몬 메넨데즈 피달은 라스카사스 수사, 그 음험한 인간성이라는 소책자를 펴내 터무니없는 음해로 가득 채워 역사를 노골적으로 부정한다. 부패한 민족주의와 국수주의가 인류가 배워야 할 진실을 집요하게 호도한다. 세계를 끝없이 음침한 불의의 세계에서 탈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다름에 대한 불관용과 적의가 사라지지 않고 반복하여 인류의 역사를 어지럽히는 것일 게다.

 

저자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상처 입은 소크라테스를 인용하며 전장에서 비굴하게 도망치다 선인장 가시에 발이 찔려 주저앉게 됨으로써 우연히 전쟁 영웅이 된 주인공의 진실을 털어놓기로 결정하게 된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앎과 양심의 역사적 중요성을 시사하는 것인데,  너의 죄, 혹은 비겁함을 은폐하지 말라!”  이 자발적 비판의 말이야말로 앎과 양심의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적 관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궁극적 역사를 찾아서 얻어내게 하는 근본이유임을 가르쳐준다. 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려 고백하는 주제는 무려 25가지 제언에 이른다. 이제 이 중 하나의 제안을 소개하는 것으로 잊혀진 역사 찾아 읽기의 감상을 마치련다.

 

얼마 전 작고하신 홍세화 선생의 쎄느 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라는 책의 인용 문장이다. 책은 프랑스 르몽드기자의 글을 재인용하고 있는데 프랑스를 사랑한다는 것, 그 정체성을 쓰다듬는다는 것, 그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 다만 잃어버린 위대한 과거를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저질렀을 수 있는 잘못을 기억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이다. 남이 저지른 잘못은 심한 질책의 대상이 되지만 자신의 죄는 쉽사리 용서하는 인간 개인과 집단, 국가의 심리적 무능력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피해자로서의 자기 권리를 찾는 것 보다 가해자로서 자기반성을 더욱 철저하게 행하여야 함을 일깨우는 말이기도 하다. 혹여 반복되는 죄악을 저지르며 더 이상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작동하는 습관화에 매몰된 마비 상태로 둔감해진 것이 아닌가를 수시로 경계하고 자기 성찰을 거듭해야 함에 대한 지적일 것이다.

 

눈앞의 이익, 권력과 인습, 여러 유형의 권위에 결탁하여 기회주의적이거나 소시민적 무사안일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치와 경제라는 이데올로기에 순응하여 자기 독립성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을 잃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금력과 권력의 묘약은 비판력을 순식간에 앗아가곤 한다. 다른 생각을 지닌 자들은 내쫓고 처단하며,  우리가 남이가를 부르짖으며 당동벌이(黨同伐異)하는 파벌이 사회의 건강성을 얼마나 무참하게 파괴하는지를 지금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이 수구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의 세계가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어둠으로 가린다. 요즈음 나는 기득권에 봉사하는 그 어떤 범주의 것이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었다. 참됨과 새로움을 견지할 수 없게 하는 어둠의 그림자를 헤치고 숨겨진 진실의 장소를 찾는 일로부터 내 무지와 편협을 떨치기 위함이다.


모르면서 중립을 취하는 자는 바보이며, 알면서 중립을 취하는 자는 배반자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갈릴레이의 삶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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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린비 도슨트 세계문학 1
루이스 캐럴 지음, 정해영 옮김, 이진경 해설 / 그린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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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비 출간의 이 번역판본을 읽게 된 동기는 극히 단순하다. 도슨트의 작품 안내를 기대했기 때문이고 더구나 그 안내자가 존재론과 감응의 철학자 이진경 이었던 까닭이다. 아마도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 번역판본의 양적인 측면에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순위에 있는 작품일 것이고, 또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읽었음에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이제 이 작품 읽기에 대한 내 감응 여부와 상관없이 이번 판본으로 그 미진함의 미련을 버리려 한다.

 


해설자는 이 작품을 앨리스의 놀이 정신으로 정의하며, 놀이에 대한 책이자 놀이에 의한 책이라고 설명을 시작한다. 앨리스가 놀이의 주어가 아니라 대상이 되었다가, 놀이의 주어로서 그 위치를 엎치락뒤치락하는 이야기의 왕래를 일컫는 것 같다. 어쨌든 도슨트는 이 놀이에서 중요한 건 열린 공간과 개방성이라며, 느슨하거나 부재한 놀이의 규칙, 바꾸거나 슬쩍 새로 만들 수 있는 규칙의 개방성과 어떤 장치나 도구에 의한 제약 없이 무수한 창조가 가능한 열린 공간을 열거하고 있다.

 

즉 이 동화는 뜻하지 않은 일들을 놀이로 받아들이는 정신에 대한 이야기이고, 바로 이 예기치 못한 일에서 마주하는 사건을 새로운 길이 열리는 즐거움으로 인식하는 정신이라 읽고 있다. 들뢰즈도 이 작품을 의미와 무의미가 얽힌 즐거움의 요소들을 모두 갖춘 한바탕 놀이라 평하기도 했다. 굳이 이 작품에 대한 여러 비평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놀이에 대한 동화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도슨트는 앨리스가 엮여 들어가는 놀이의 규칙의 없음과 유연성으로 놀이를 정의하고 있는데, 이에는 보다 섬세한 놀이 성격에 따른 정의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규정이 요구되는 이유는 다른 해석에 도달케 하기 때문이다.

 

놀이가 자유로운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은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기본 조건이다. 그러나 놀이에 규칙이 없거나 부재한 것은 아주 예외적 놀이로서 즉흥적 발상을 전제로 하는 인형놀이나 동화 속 앨리스에게 펼쳐지는 상황 속에서 특정 역할을 맡게 되는 것처럼 감정이나 허구가 곧 규칙이어서 어떤 기준으로서의 규범이 없는 경우이거나, 일종의 홀림이나 현기증과 같은 환각 상태에 의한 착란과 혼란의 추구와 같은 환상 상태에서의 놀이 경우에 한정 된다. 이처럼 규칙 없이 감정이나 허구, 환상을 즐기는 놀이를 프랑스 사회학자 로제 카이와는 규칙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놀이와 구별하여 미미크리(Mimicry; 흉내,연기,모의)’일링크스(Ilinx; 현기증,홀림,소용돌이)’로 명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앨리스가 참여하고 있는 동화 속 상황을 놀이라 한다면, 그것은 흉내와 홀림의 놀이라는 예외적 놀이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된다.

 

동화에는 약속(규칙)이 있는 놀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내력, 체력, 기억력, 재주와 같은 공정하고 평등함을 전제로 하는, 즉 불공평함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규칙이란 것이 설 자리가 없는 상황들만이 연출되고 있다. 일례로 도도새가 제안하여 하게 되는 코커스 경주처럼 출발하는 위치도 모두 다르고 도달지점도 제각기여서 그저 달리다 멈추고 싶으면 끝나는 그야말로 승패도, 목적도 없는 놀이가 있으며, 하트여왕의 명령에 의해 치러지는 크로케 놀이도 골문이 카드병정들이 허리를 굽혀 만들어 어떤 고정되거나 정형성도 없으며, 공 또한 움직이는 고슴도치이고, 타구봉도 홍학이어서 그 참가자의 그 어떤 의지도 반영되지 못할 뿐 아니라 특정한 규칙도 없는 것과 같다. 여기서 이 작품에 대한 첫 번째 관점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 소질, 노력, 근면, 보상이 무의미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그리는 것이며, 책임의 고통이나 기억의 부담 등 현실 세계의 모든 압력으로부터 해방된 세상에 대한 소망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할 놀이 또는 환상 놀이를 창의성이나 창조성으로 직접 연결짓는 해석은 과도한 건너뛰기로 보인다. 특히 토끼를 따라 굴에 들어갔다가 한없이 아래로 추락하고, 작은 병 속 액체를 마시고 커졌다 케이크를 먹고 작아지며, 키가 너무 커져서 멀어진 자신의 발에게 선물을 보내는 상상처럼 다분히 환각적이거나 어떤 홀림 상태를 보여주듯 앨리스의 놀이들은 모두 허구적 환상적 범주의 놀이라는 점이.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동화는 규칙에 맞춰 생활해야하는 학교생활에서의 경쟁이나 강제로부터 벗어나려는 어린 소녀의 일탈에 대한 갈망의 투사이고, 그 지루함과 압박감, 피로감의 배출이요, 순화의 실현이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창의성은 어쩌면 이러한 실현 속에서 얻어질 수 있는 부수적 결과물로 보아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측면에서 앨리스가 경험하는 놀이는 다분히 경쟁적인 현대 사회에서의 일종의 탈출로 보인다고 해야겠다.

 

두 번째 관점은 이 작품의 구성을 신체적 놀이와 언어적 놀이로 해독하고 있는 것인데, 키가 너무 커져서 이동할 수 없게 된 앨리스가 울어 흘린 눈물이 강물처럼 방을 채워 옷과 몸이 젖어 감기를 우려할 때 생쥐가 충분히 마르게 해주겠다며 들려주는 건조한 얘기가 결코 마르게 해주지 않는다는 실망과 같이 캐럴은 이러한 관념적 언어는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역설하는 듯하다. 그리고는 원 모양의 경주코스를 그저 달리는 코커스 경주를 제안하는 도도새는 이렇게 말한다. 글쎄, 그것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해보는 겁니다.”, 즉 신체를 통한 체험과 그로부터 체득되는 것의 가치를 강조한다. 사실 신체적 놀이로서의 해석은 그리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주지 않는 진부한 교훈의 무리한 도출로 이해된다.


세 번째 관점은 언어적 놀이에 대한 부분인데, 대화들에는 실제 무수한 언어 장난이 있다. 도슨트는 발설된 언어의 의미가 누구에게나 확정된 개념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바로 이러한 규칙성의 파괴가 가져오는 말장난으로서의 즐거움을 지적하면서 규칙의 무게에 대한 가벼움이라는 놀이의 덕목을 강조한다. 그런데 규칙이 가벼운 놀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놀이에서 규칙의 존재여부를 지나치게 뭉뚱그려 이해하다보면 그 놀이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아주 단순한 눈 깜빡거리지 않기, 숨 오래 참기와 같은 놀이에 조차 명료한 규칙이 있다. 누가 오래 견디는가라는 개인의 순수한 능력을 척도로 한다. 이러한 능력 드러내기 놀이에는 보다 세련된 놀이들인 적절한 연습과 부단한 노력이나 성취에 대한 의지와 지속적 주의력을 요구하는 체스, 축구 등 견고한 규칙으로 구성된 놀이들이 있다. 이들 놀이의 규칙이 유연하거나 수시로 변경된다면 아마 놀이 이기를 멈추게 될 것이고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작품 후반부 재판 장면은 전형적 역할놀이일 것이다. 재판 의례 형식은 있으나 그 어떤 규칙도 무용지물이어서 재판은 한 바탕 말 장난으로 끝난다. 즉 규칙의 가벼움이 아니라 규칙이 부재한 놀이어서 즐거운 것이다.)

 

앨리스가 일어나자 베심원석이 뒤집어져 난장판이 된 장면, 본문 146쪽 삽화


이와는 다른 성격의 놀이도 있는데, 아예 의지를 포기하거나 운명에 맡기고 숙명의 결정을 수동적, 혹은 고의적으로 기다리는 놀이다. 이것은 노력과 성과에 대한 경멸이 자리잡은 놀이들인데, 가혹한 현실 세계에 대한 반작용인 놀이다. 주사위 놀이, 윷놀이 등등의 현실에는 없는 순수하게 평등한 조건의 인위적 조성을 마련한 놀이들이다. 이들에게도 반드시 규칙이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범주의 놀이를 제외하면 모두 앞서 언급한 규칙없는 흉내와 연기, 환상의 놀이들이다. 따라서 놀이에서 가벼움의 특성을 부여할 수 있는 놀이는 현실 세계로부터 벗어난 놀이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가벼움의 놀이는 흥분의 즐거움, 환상의 즐거움, 충격의 즐거움, 홀림과 취함의 세계에서 가능한 것이지 현실적 감각의 실제적 세계에는 적합한 의미가 되지 못할 것이다.

 

아마 이러한 가벼움의 해석 때문에 도슨트는 놀이의 무력화 요인의 하나로 규칙 준수 강제장치를 예시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이보다는 앨리스가 참여하는 흉내와 일종의 가면(역할)놀이가 놀이기를 멈추고 주술과 미신으로 실생활과 섞이기 시작하면 오히려 사회적 부패가 시작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놀이가 우연성에만 맡겨지게 되면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무차별적 평등이 되어 공정 실현 불능의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놀이가 문화적 창조성을 설명해줄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사회의 스타일, 가치, 얼굴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루이스 캐럴의 이 동화는 발표된 186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산물임을 떠나서 21세기의 가치로 이해할 때 왜곡된 해석을 가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게 된다.

 

캐럴의 활동하던 시대는 전근대적 유산인 미신과 전설, 괴담이 여전히 횡행하며 합리주의와 뒤얽혀 공존하였으며, 도덕적 엄숙주의와 허영이라는 위선도 뒤엉켜 있었다. 이러한 시대상을 토대로 이 작품을 보면, 작가 캐럴이 그린 앨리스의 모험 세계는 합리성이라는 규칙 놀이의 세계 대두에서 감정과 허구의 세계인 연극과 환상 놀이에 머물기를 바란 일종의 문학적 수구의 갈망 아니었을까? 라는 데 이르게 된다. 물론 일시적 도피 수단으로서의 앨리스의 모험을 구성하는 역할, 환상 놀이가 사회적 순화 기능을 할 수 있다는 데 공감하지만 이것이 곧 창의성이고 정신의 자유에 토대를 둔 삶의 낯설고 새로운 길에 당당히 맞서는 적극적 유연성이라 해석하는 데에는 주춤거리게 된다.

 

다만 특별하게 이 작품이 내게 인식된 것은 의미의 역설이라는 언어의 다의성을 통한 타자의 세계에 대한 관용의 시선이다. 어쩌면 작가가 마지막 문장에서 앨리스 언니의 말을 빌려 유년 시절 행복한 여름날을 떠올리듯, 순수한 기쁨에서 즐거움을 찾으려했던 한 때의 기억 이야기 그 자체로 읽는 것, 그 이상은 아닌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도슨트 이진경 교수의 놀이라는 화두로 인해 이 책을 이제 내 마음에서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다. 내 편협한 이해에서 더 나아가는 것은 분명 앎인지 모르게 다가 올 것이라 믿는다. 정말 쓸 만한 교훈이란 게 있다면 (...) 뻔한 교훈을 깨며 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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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및 사회 조건이나 그네들의 세계인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우화, 민담, 동화라는 유사성의 장르는 당대 사람들은 물론 변하지 않는 사람들 일반에 대한 이해를 위한 효과적인 경로가 된다. 특히 인문학을 비롯해 문학서들은 전해오는 이들의 인용을 통해 인류라는 인간 종()에 대한 어떤 본질적 성격을 헤아리기도 하고 하는데, 아마 오래되었다는 고대 우화에서 토속적 민담이나 17세기부터 공식화되어 집필되기 시작한 고전동화에서 상징화되거나 은유된 양상들이 오늘의 사람들이나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발견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우화 또는 동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지펴진 것은 조금 뜬금없어 보이지만 작품을 통해 일생을 삶과 죽음의 문제와 윤회와 구원의 문제임을 궁구(窮究)했던 박상륭 소설가의 雜說品속 발견으로부터이다. 이 장편소설은 성배(聖杯)를 안치하고 있다는 문잘베쉐(Munsalvaesche)라는   생기를 잃어 찬바람과 대막(大莫;엄청난 적막함) 휩싸인 악취 맡고 날아든 까마귀들이 떼 지어 울부짖는 곳이 배경인 소설이다. 아마 그이의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이해가 대중에 다가서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그나마 조금 부연 설명을 곁들여가며 다시금 인간 생에 대한 그의 철학을 풀어 반복하려했던 작품으로 여겨진다.

 

 박상륭 소설 雜說品』 문학과지성사, 80쪽 부분 발췌


낳지 않는 상처를 지닌 왕의 치유를 위해 불새를 찾아 떠난 시동(侍童)의 꿈 속 이야기인지, 현실 속 대화인지 모를 장황한 이야기가 초반부에 등장하는데, 아마도 작가의 작품 속 칠조(七祖)로 추정되는 순레자로 불리는 노승과 11’로 불리는 문잘베쉐로 유학 온 어느 나라 공주가 주고받는 설법을 가장한 시론에서 고대 인도의 우화인 판차탄트라(Pancatantra), ‘빤짜딴뜨라로도 읽음와 이와 동일유사 내용을 지닌 이솝 우화중 하나의 이야기가 그 시발(始發)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왕을 세워 달라 요구한 개구리들로 번역되는 이야기인 듯한데, 이 이야기가 씨앗 불이 되어 내 읽기의 욕망에 불을 싸질러댄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이 근심을 해소하는 것은 그것으로 찾아드는 것인데, 그것이 그저 들불로 확 번져 동화(童話)의 세계로까지 번져 페로와 그림형제, 안데르센으로 대표되는 체제와 권력 유지를 위한 기성 질서의 내면화라는 역겨운 고전동화에 반기를 든 전복의 문학을 도모했던 조지 맥도널드와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서력 3세기에 써진 것으로 추정되는 인도의 우화집인 판차탄트라(Pancatantra)'다섯(panca) 논설(tantra)'이라는 뜻처럼 다섯 장으로 구성된 작은 이야기 논집이다. 매우 어리석고 아둔한 세 왕자의 아버지인 왕이 이들을 가르칠 선생을 찾고, 마침내 위싀누샤르만(visusarman)’이란 현자가 세 왕자에게 통치학을 깨닫도록 가르친 논설집이라 할 수 있다. 이 통치학의 개념이 이솝우화의 개구리 이야기로 연결된 것으로 이해되는데, 개구리들은 인간 대중을 가리키는 것이고, 연못 속 개구리들은 그들 집단의 리더를 찾는다.

 

신은 이들에게 나무토막을 내려준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 말없는 나무토막의 다스림없는 다스림에 만족하지만 이내 그 무용함으로 짜증을 낸다. 결국 신은 그 웅덩이에 뱀을 보내는데, 개구리들, 즉 이 노예근성의 피학쟁이들에게 가학적 능동성을 구비케 하려면 독사(毒蛇)로 인한 혼비백산의 허둥거림과 살기위한 극악한 발버둥만한 처방이 없는 것이었을 테다. 노승(老僧)은 말한다. 미온적, 수동적, 또는 노예근성의 피학적, 반 잠에 들어있는 질료를 독사(毒死)시키기 같은 것이 아니겠다구?” 라고. 이는 수많은 동화들에서 공주가 개구리에게 행하는 입맞춤이 바로 이같은 충격요법 이라는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人間의 저 적나라한 재림(再臨)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곧 인간 삶의 고달픔으로 안일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나무토막을 그리워하게 될 터이다. 이 이야기가 노승에 의해 발설된 까닭은 황폐해져가는 문잘베쉐의 진짜 현상은 바로 이러한 독()날것-썩히기날것-익히기라는 두 변용을 도모하기 위함이라 설명하며, 어떤 특정 사회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는 그 구성원의 깨우침일 것이라고 미루는 것 같다. 여기서 정치철학을 얘기할 것은 아니고, 이 야기기로부터 작금의 우리네 정치현상이 이 독과 같은 것 아니겠는가? 하는 자문으로 이어졌다는 말에 그치기로 한다.

 

아무튼 이 기발한 인간세(人間世)에 대한 은유 이야기는 우화와 동화의 의도, 그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는데, 17세기 샤를 페로로부터 시작되어 19세기 후반 그림 형제크리스티안 안데르센으로 이어진 고전 동화(이후 이들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사용함)의 그 던적스럽고 위선적이며 체제 옹호적이었던 문학적 보수주의를 띤 것들은 차치하고 20세기 전후하여 이러한 질서 수호와 강화에 이바지했던 사회정치적 조류에 반기를 내걸고 전복의 문학을 도모했던 작가들의 동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박상륭의 소설 속 화자인 패관(稗官)이 전하는 우화는 17~19세기 보수주의 동화의 지배질서 내면화 동기와는 다른 것이고, 이는 오히려 이들에 비판적이고 전복적 시선을 가했던, 즉 기성의 관습과 관행, 규범 일반적 담론을 변경하고자 권력과의 타협을 거부했던 일군의 작가들과 그네들의 동화에 고대 우화의 전통이 연결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신비주의자라는 편견 때문에 그의 환상소설에 대해 오해를 가지고 있던 조지 맥도널드에 대한 재발견은 내겐 앎에 대한 겸허를 다시금 환기토록 했다. 오히려 그의 기독교 신비주의가 인간 존엄에 대한 근본적 신념의 자양분으로 작동했으며, 종교적 에피파니가 그의 동화 속 상징들과 연결되어 인간의 창조적 잠재력 계발의 자극원으로 동원되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맥도널드와 함께 위선에 대한 혐오, 상층계급의 위선적 관습과 고전동화의 체제 수호적 문명화 담론에 반대하여 문명화과정의 재()맥락화를 시도한 오스카 와일드는 동화의 또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와일드는 전통적 동화 담론에 개입하여 그 방향을 급진적으로 바꾸어 동화의 사회 미학적 경향을 위한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다. 그는 비판 대상의 언어와 행위를 차용하여 그것이 내재한 부정과 불합리, 불명예를 지적함으로써 그것에 반기를 들게 하는 전복의 문학을 저돌적으로 밀고 나갔다.

 

이들은 고전동화가 현실 세계의 가치를 비판하고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가치에 사후적이고 우의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데 그치고, 결코 현실 사회를 문제 삼거나 그 대안 세계나 관념들에 어떠한 봉사도 하지 않았음을 비판한다. 즉 이들 그림형제나 안데르센 등의 고전동화들은 지배 계급이 도모하는 안전한 세계의 질서를 옹호하고 그 질서에 편입되기 위한 고통의 내면화에 몰두했다는 지적이다. 안데르센의 경우는 마치 하층계급의 고난에 관심을 보내는 듯 하지만 결국 상층 계급이 원하는 질서에 편입하고자 그네들의 규범과 권위에 타협했다. 이는 안데르센 부류의 동화가 '부르주아의 교양 이데올로기'의 내면화에 헌신함으로써 일반 사람들의 보편적 심리 속에서 작용, 인간 제반 기억 내지 판단을 왜곡시키도록 작용했다고 지적한 발터 벤야민의 비판 그것이다. 바로 이러한 비판의 관점에서 맥도널드와 와일드는 지배관계와 지배담론에 대해 강도 높게 불만을 표시했으며, 동화의 세계에서 이를 역전시키고 전복시켰다.

 

두 사람은 전통적 고전동화 담론이 분명 아이들에게 해악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배계급의 관습과 규범, 가치를 내면화시켜 그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시민을 양성하려는 의도를 사회와 타자에 책임을 가지는 인간, 창조적 인간상이라는 가치로 문명화과정의 담론을 변형하고자 한 것이다. 여전히 안데르센 부류의 굴종적이고 순응적 인간을 만들어 체제에 길들이고자하는 동화가 출판과 영상 시장에서 활개를 치는 세상이지만, 왜 이러한 것이 우리들의 세상이 아름답지 않음을 멈출 수 없게 하는지에 대해 자성의 필요를 요구하는지의 반면교사가 되기도 할 것이다.

 

맥도널드의 동화 한 편을 읽는다면 그의 대표작이라 할 가벼운 공주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라푼젤에 대한 경멸적 태도를 반영한 패러디 작품이랄 수 있다. 아이가 없어 슬퍼하는 왕과 왕비에게 늦게나마 공주가 태어나지만 아기를 태어나게 도와준 마녀에게 이를 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중에 떠다니는 가벼움의 마법에 걸린다. 이 과정에서 맥도널드는 관습적 사회질서와 사회관계를 희화화하는데, 왕실 형이상학자들은 바보로, 전형적 왕자는 푼수 짓으로 조롱당한다. 그럼으로써 상층계급의 어법과 규약의 가면들을 벗겨낸다.

 

떠다니는 공주의 가벼움, 공주는 중력(重力)을 체득하지 못하는 것인데, 여기서 중력은 사회적 책임과 연민의 은유로 사용되고 있다. 중력은 추상적으로 강요하거나 가르친다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과 경험을 통해서 체득되는 것이기에 그녀는 수영을 통해 이를 알아간다. 이때 왕자는 수영장의 물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물속에서 물마개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공주는 물속에서 물마개를 하는 왕자의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고, 연민의 감정을 갖게 된다. 사회적 책임과 연민을 말하고 있지만, 여성과 낭성의 역할도 전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가치와 성의 행동양식과 가치를 창조할 가능성을 제시하고 이를 인식하는데 주력하는 것이다. 아마도 라푼젤을 읽는 아이와 가벼운 공주를 읽은 아이는 자기 성의 행동양식이나 사회관계에서 많은 사유와 행위의 차이를 보이지 않을까?

 

맥도널드의 작품으로 황금 열쇠라는 내면세계의 탐색을 떠나는 상징 여행의 이야기가 있다. 남녀 상호존중과 상호의존 관계라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는 다른 사람들과 외부 세계에 대한 이해의 토대를 구축토록 하는 정말 아름다운 동화다. 인생의 진짜 보화는 물질적 부가 아니라는 통찰의 실현을 약속해주는 다른 세계가 있는 길로의 안내이며, 유토피아적 성적 탐색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맥도널드는 상상력과 도덕적 위력의 끊임없는 발휘를 재촉하여 이상사회를 향한 인류의 걸음을 재촉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사회적 명성에 연정을 품고 권위와 지배 계급이 요구하는 질서에 순응적이었던 안데르센의 대척점에 오스카 와일드가 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는 사회적 관습과 권위에 머리 조아리기를 거부했으며, 규범을 깨뜨리면서 잔인한 계급의 정의 체계가 보여주는 억압적 관용을 끊임없이 시험한 용납될 수 없는 사람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는 동화 창작의 근본 목적을 전복이라 공언했으며, 기성사회 옹호론과 결별하고,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 문제를 반영하여 변혁하고자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작가였다.

 

다행스럽게도 국내에 그의 동화집 두 편인 행복한 왕자와 그 밖의 이야기들(이하 행복한 왕자로 표기함 『석류의 집이 한 권의 책으로 엮여 오스카 와일드의 아홉 가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있다. 그는 여기서 사회가 청소년들에게 조건반사 체계를 주입하는 방식, 정해진 규칙에 순응하지 않는 자에게 가하는 처벌방식의 부조리함에 강력하게 저항하며, 엄청난 불평등의 사회가 지배계급에 얼마나 큰 책임이 있는지를 깨우치게 한다.

 

동화집 행복한 왕자에는 동명의 동화 행복한 왕자가 있는데, 이는 납으로 제작된 죽은 왕자의 동상이다. 왕자는 비로소 높게 세워진 동상이 됨으로써 백성이 얼마나 고통 받는지 알게 된다. 생전의 무관심과 이기심을 보상하기 위해 헌신적 제비를 통해 재물을 나눠주고 구휼한다. 결국 제비는 추운 겨울에 왕자 곁을 지키다 세상을 등지고, 시장과 의원들은 왕자의 동상을 녹인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동상을 세우기를 갈구한다. 동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왕자라는 한 인간의 개인적 행동은 빈곤과 불의와 착취를 끝내기에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도시는 여전히 시장과 시의원들의 지배하에 있다. 우쭐대는 이 광대들이 분명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할 것이고 왕자와 제비의 박애적 행동은 곧 잊혀지고 말 것임을 안다. 탐욕과 허세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 체계와 질서의 근본적 변혁 없이는 결코 새로운 세계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와일드 동화의 강력한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결코 해결되지 않는 긴장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와일드는 지배와 착취의 메커니즘에 맞서 투쟁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존의 문명화과정이 인간성의 퇴화에 이바지 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었고, 이의 작동 방식을 매우 분명하게 묘사한 동화들이 석류 나무집에 수록된 어린 왕, 별 아이 등 네 작품이다. 어린 왕의주인공은 염소 치는 소년이 어느 날 왕족 할아버지의 유일한 상속자로 밝혀지면서 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이야기다. 소년은 사교계의 아름다움이 노동자에 대한 잔인한 착취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고, 대관식에 화려한 복식과 빛나는 왕관을 쓰기를 거부하고 염소 칠 때 입었던 옷과 찔레나무 관을 쓰고 대관식을 치른다. 구경꾼들은 왕의 허름한 모습에서 더 없는 품위와 찬란함을 본다. 자신의 잠재력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장면이다.

 

그런데도 역시 작가는 사회적 반목이 작품이 끝날 때까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열어둔다. 한 사람의 실천으로 사회의 케케묵은 수구성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그는 이렇게 열어 둠으로써 왜 우리가 사는 세계의 사회관계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가에 대한 반성의 물음을 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동화는 위선적 사회 관습과 지배질서가 지닌 이중적 척도가 부당하게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방식을 묘사하여 그 실체를 숙고하게 만드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과 흡사하면서도 또 다른 울림을 전하는 동화인 별 아이는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를 역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일종의 본질주의에 대한 철저한 조롱을 담고 있다. 오만함과 잔인성과 이기심을 모두 갖춘 준수한 외모의 소년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만, 그 자신이 추하게 됨으로써 함부로 대했던 사람들의 입장에 처하게 된다. 이후 시련을 겪고 왕이 되어 백성을 자비로 다스린다는 이야기다.

 

와일드는 주인공 한 사람의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식으로 끝나는 고전 동화의 위선을 전복시킨다. 그리고는   그러나 그는 오래 다스리지 못했다. 3년을 보내고 세상을 떠난 것은 그가 겪은 고통이 극심했고, 그를 시험한 불길이 너무 뜨거웠음이라. 그의 뒤를 이은 자()는 다스림에 악()했도다.” 작가는 아름다움, 선의 본질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지배관계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고 천명하는 것이다. 이처럼 와일드는 안데르센의 동화 작품을 역전시켜 새로 쓴 작품들을 많이 썼다. 인어 공주를 역전시킨 어부와 그의 영혼도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인어공주가 자신의 꼬리가 다리가 될 때의 고통이 이 작품에서는 인어를 사랑하게 된 어부의 사회적 관습의 상징인 영혼의 복수로 인한 고통으로 대치된다. 성과 계급의 전복이다. 그리고 어부가 죽는 순간 비로소 인어와 하나가 된다. 안데르센이 고통을 합리화했던 기독교의 위선을 고발하는 것이고,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왜 우리 사회 내부에서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나를 자문케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이며, 성역할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사회과 과정을 강조하고, 권위주의와 지배질서에의 순응을 내면화시키고자 한 페로, 그림형제, 안데르센 부류의 고전동화의 획일적 사회화 과정에 적응시키려하는 순응주의적 동화가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의 고전독서 목록에 자리 잡지 못하게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라는 물음을 꽤나 오래 한 것만 같다. 조지 맥도널드와 오스카 와일드, 그리고 프랭크 바움의 창조적 사유와 자신과 외부세계와의 관계 등에 대한 사유로 안내하는 동화들의 세계가 더욱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또한 우리에게 낯설지만 인도를 비롯 페르시아, 그리스 등 고대 우화의 세계가 특정 이데올로기에 편향되지 않고 드넒은 삶의 세계를 탐험하는 유익한 읽기가 되리라 생각된다.

 

살욕(殺慾,파괴)과 생식욕(生殖慾,창조)의 이 상극(相剋)적 질서 체계가 바로 우리네 인간이 사는 지상의 현실계임을 말하며, ‘->->마음을 토대로 하는 인간의 진화론적 틀을 규명하고자 했던, 그래서 , 小說하기의 스러움!”이라 수없이 반복하여 뇌까려야 했던 한 작가의 잡설이 이렇게 전복의 동화에까지 이르게 했다. 독서란 어쩌면 이렇게 널뛰는 정신의 방랑인지도 모르겠다. 그러함으로써 예기치 못한 앎의 세계를 거닐게 되고, 아주 작은 앎의 지평이 조금 축적된다. 아마 지배 질서에 켜켜이 내려앉은 곰팡이를 제거하는 데는 동화만큼 적절한 형식도 없으리라. (, 讀書하기의 스러움이란!)

 

사회적 행위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미학적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는 오스카 와일드의 문장은 우리를 에워싼 회색빛 세계를 벗어날 출구를 보여주고, 창조적 에너지를 일깨우는 동화의 위력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출판과 영상시장에 감시를 게을리 하는 순간 우리의 아이들은 길들여지고 체제에 순응하는 이솝의 왕을 요구한  연못 속 개구리들처럼 우리의 세계는 나락으로 가는 과정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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