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와 준》의 아나이스 닌과 《악령》의 스타브로긴 

- 악마와 그 주변을 맴도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

 

아나이스 닌은 우리 대부분이 감히 인정하거나 생각조차 하지 못할 일들을 저질렀다.”

 

소설가 킴 크리잔(Kim Krizan)은 아나이스 닌(Anais Nin;1903-1977))에 대한 전기소설 속에서 거침없는 여성의 욕망을 드러냈음을, 시대적 당혹감으로서 위와 같이 썼다. 그것은 엘렌 식수가 말한 ()로고스적 무기가 단련되게끔 글쓰기로서 여성 억압의 표현에 스스로 갇히지 않은, 텍스트들 속에서 페니스가 순환하는섹스트(sextes)의 출현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사건으로 이해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을 게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의 전경(全景)으로서의 시선이지, 아나이스의 텍스트 자체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발판으로 자신의, 한 여자로서의 자기 자리의 발견을 향한 고투, 자각을 향한 수행(遂行)적 걸음이었음을 발견해야 한다.

 

출처: The Anaïs Nin Foundation


1. 아나이스 닌을 말하고자 하는 동기에 대해서

 

우리의 독서시장에는 193110월부터 19328월까지에 이르는 아나이스 닌의 헨리 밀러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준과의 에로틱한 모험의 내용이 담겨진 헨리와 준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 일기를 읽은 독자들, 일부 평자들은 도덕적 규범이 붕괴된 한 여인의 성적 편력 행위의 묘사들에 빠져 아나이스가 찾아 헤매는 것이 무엇인지를, 즉 그녀가 왜 이 글쓰기를 실행하고 있는가를 망각하고 마는 듯하다. 나 또한 나는 창녀처럼 그에게 본능적으로 충실했다. 그와 함께하지 않으면 쾌락을 느낄 수 없다 라는 문장처럼 유부녀가 뭇 남성들을 옮겨다니며 자신의 성적 쾌락을 마치 자아발견의 행로인양 위선을 떨어대는 자기 정당화의 궤변으로 읽기도 했다.

 

그러나 작품 속 빈번하게 등장하는 도스토엡스키의 악령속 스타브로긴의 몰인격, 악의 화신이 헨리와 준, 그리고 자신과 비교되는 성찰의 말들을 보며 이 텍스트를 완전하게 잘 못 읽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묘사하는 성적 쾌락의 장면들은 단지 자기 욕망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일 뿐, 그것이 글쓰기의 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나이스가 헨리를 생각하면 나는 다리를 벌리고 싶다라고 쓰는 것, 마치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이 드러났음에 현혹당한 읽기로 본질을 읽지 못하는 우를 저질렀다는 자각이었다. 이 글을 쓰고자 한 충동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아나이스라는 여인이 이 일기를 씀으로써 추구하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왜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로인해 그녀가 발견한 것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규명으로서의 읽기로 전환된 것이다. 스타브로긴과 아나이스, 헨리, 준의 도식(圖式)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가 그 해명이 되어 줄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아나이스 작품들에 대한 문학적 폄하의 시선을 불식시키고, 그녀의 문학적 업적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아보자는 취지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헨리와 준은 아나이스 닌이 자신의 문학적 명성이 절정에 이르기 시작했을 때 다듬어진 일기의 일부분으로 1966(63)에 첫 출판되어 자아 발견의 여정을 통찰력 있게 그려냈음을 문학적 업적으로 찬사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실제 일기 속 여러 인물들이 삭제되어 순탄치 않은 편집과정을 거쳐 탄생한, 소설적 윤색이 더해진 일기라 할 수 있다. 물론 1932년에 출판한 D.H. 로렌스 비전문 연구서를 필두로 1939년에 소설 인위의 겨울(The Winter of Artifice), 1944년 단편소설집 유리 종 아래에서가 발표되며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얻어냈지만 문학적 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후 1950년대 내내 내면의 도시들, 불의 사다리, 알바트로스의 아이들, 네 개의 방이 있는 심장, 사랑의 집에 들어온 스파이등의 소설을 발표하며 독자층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냈으며, 1964년 소설 콜라주가 그해 타임지 최고 도서로 선정되면서 독보적 여성 작가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즉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문학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1971년 공쿠르, 메디치 등 프랑스 4대 문학상의 하나인 세비네 상의 수상, 1974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1974년 미국 국립 예술문학 협회 정식회원으로 선출되며 그녀의 문학적 업적은 공인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1970년대라는 시대는 여전히 이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반감과 옹호가 상존하고 있었음의 반증일 것이다. 이 같은 글쓰기를 수행한 후배 작가 아니 에르노가 202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어쩌면 숱한 아나이스들이 맺은 결실 일 것이다. 아나이스는 폄하 또는 비하와 격하 대상의 작가가 아니다. 즉 그녀는 악령속 스타브로긴처럼 이 세계에 악을 전염시키는 위험하거나 배제되어야 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 지 스타브로긴과 아나이스를 비교하며 그 차이 속에서 이 여인이 발견하고자 고통스럽게 애쓴 것의 자취를 우리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도스토엡스키의 악령속 스타브로긴은 어떤 인물인가

 

아나이스가 악의 화신으로 대입하는 악령의 스타브로긴이라는 인물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 스타브로긴은 내 삶의 법은 내가 만든다는 태도를 지닌, 이 세계의 모든 확고한 신념이 무너진 뒤 남은 공허에 가까운 인간이다. 그에게는 하나님도, 전통의 도덕도, 외부 권위도 자신을 규정하지 못한다고 여기며 자기 의지만이 기준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선과 악을 초월해 있다고 믿는 이 인물은 영웅적 행위와 타락한 행위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없으며, 스스로 도덕 바깥에 선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한 마디로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서 자기 의지만 믿는 태도의 인간이다.

 

이 인물을 악령, 악의 화신으로서 두려운, 아니 무서운 인간으로 말하는 이유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의지란 것이 실제 아무런 방향성도 없는, 삶의 의미를 조직해주지 않는 욕망과 결단으로서의 의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처럼 그 어떠한 교리나 신념을 설파하지 않음에도 그의 공허와 카리스마가 주변 인물들의 과격 사상과 행동을 촉발하는 중심점이 되는 데 있다. 의미와 믿음이 빠져나간 자리를 차지한 텅 빈 공백, 이것이 개인과 사회를 얼마나 위험에 빠지게 만드는지를 표상하는 것이 도스토옙스키가 구현하고자 한 핵심적 시선이다. 이를 정리하면, 도덕을 상대화하고, 자기 의지를 절대화하려 하지만 결국 공허와 양심의 반격 앞에서 붕괴하는 인물이고, 그래서 그의 신념은 어떤 적극적 이상이라기보다, 믿음의 상실이 낳은 허무주의적 자기숭배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존재다. 그래서 헨리와 준에서 헨리가 아나이스에게 당신은 물론 나르시시스트야, 이 일기가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지.”라고 말하는 것, 바로 그것에 닿는다.

 

그렇다면 헨리가 농담처럼 뱉은 저적처럼 아나이스는 스타브로긴의 텅빈 공허로서의 의지를 수행하며 악의 덧을 마구 뿌려대는 팜므파탈인가? 스타브로긴처럼 스스로를 선악을 초월한 인간인가라고 묻게 되면 아나이스는 바로 그러한 스타브로긴의 매혹과 파괴성을 감지하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미학화하고 관계화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다름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스타브로긴이 공허한 의지의 중심이라면 아나이스는 그 공허 주변을 맴돌며 그것을 감수성, 욕망, 자기 서사로 번역하는 인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스타브로긴은 소설 속에서 준과 헨리 중 누구인가라는 점에 귀착된다고 할 수 있다.

 


3. 헨리와 준의 자기해석자로서의 아나이스

 

헨리가 말한다. (...) 그녀를 처음 만난 날, 준은 내가 자신을

팜므파탈로 생각해 주기 바란다고 했어. 나는 악마성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도스토옙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악마에 몰두해 있지.”

 

준이었다면 헨리가 글 쓰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다, 난리를 피웠을 것이고,

화려한 팜므파탈의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아나이스)”

 

아나이스는 스타브로긴적 매혹을 맴도는 인간이라고 해석했다. 그것은 아나이스가 준에 대해 말하는 문장에서 다시금 확인되는데, 악을 낳고 범죄를 일으키지만 스스로는 거의 행동하지 않는 인물인 도스토옙스키적 인물인 스타브로긴을 인용하는 것에서 그녀의 무의식이 드러난다. 실제 준은 헨리를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움직이게 하는 힘의 중심으로서 악의 자기장 같은 존재로서 행동하는 것에서 확인된다. 즉 아나이스는 준이라는 스타브로긴적 인물에 매혹되는 해석자이자 매개자이다. 아나이스가 자신을 “the revealer, the harmonizer(드러내는 자, 조화시키는 자)”라고 부르며, 준에게는 도스토옙스키를, 헨리에게는 준을 준다고 쓰는 것에서 그녀가 파괴의 중심이 아니라 파괴적 매혹을 언어와 관계 속에 배치하는 연출자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아나이스의 헨리와의 지독한 성애와 그에 대한 집착은 자기 쾌락, 삶의 안정 장소를 찾아내기 위한 그녀만의 일련의 고통스러운 수행(遂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수행의 여정 자체가 제공하는 쾌락의 감각은 하나의 요소이지 그것이 곧 욕망이 지향하는 궁극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나이스는 전통적 가치가 무너진 자리에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식의 자기절대화에 접근하고자 하는 스타브로긴과 같은 인물이 아니다. 스타브로긴으로 아나이스를 해석하는 것, 즉 그녀를 성적 쾌락에 목매단 탕녀 정도로 이해하는 것, 그래서 뭍 남성들의 자존과 삶을 파괴하고, 그들의 가정을 궤멸시키려는 그러한 성의 화신이 아니다.

 

아나이스는 욕망과 위험, 심지어 악의 매혹에 끌리면서도 자신 안의 잔혹성에 대한 저항이 남아있음을 분명히 말한다. 잔인함에 대한 무능력은 약점에 가깝다, 또한 우리는 가장 자기답지 않을 때 가장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고 할 때 그녀는 자기모순을 감지하고 자의식적 기록자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결국 아나이스는 준이라는 팜므파탈이 낳는 정동을 흡수하고 서사화하는 인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나는 타인의 욕망과 어둠을 통과하며 나를 발견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나이스는 준 혹은 스타브로긴의 공허 그 자체와 달리, 그 공허를 견디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고백, 이미지, 역할극을 만들어내서 허무의 매혹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미학적 자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나이스는 매우 지적인 여성이고 인간을 단순한 현실의 개인으로 읽기보다는 하나의 심연적 유형, 상징적 배치로 해독한다. 아나이스는 스타브로긴적 중심으로 준을, 창조적 노동과 육체성을 가진 인물로 헨리를 읽으며, 자신은 이 둘 사이를 통과하며 스스로를 분열시키기고 확장하는 의식의 존재로서 위치한다. 즉 준의 중력장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멀리 혹은 깊이 끌려갈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그녀는 허무의 공백과 타락의 에로스를 자기해석의 연료로 바꾸는 고백적 미학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악의 매혹을 사랑과 글쓰기의 형식으로 번역하는 감수성의 공모자로서 아나이스는 끝내 양심과 문장 속으로 되돌아오는 미학적 증인이라 할 수 있다.

 

4. 결어 - 아나이스의 글쓰기가 말하는 것

 

아나이스 닌이 일기를 쓰는 것은 이상화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때문에 일기 속 자기 정당화의 변들이 위선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그 생경한 날 것의 성적 묘사들이 혐오와 당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작 글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말단의 감각이 야기하는 도덕이라는 오래되고 낡은 인식에 지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헨리와 준은 이 일기를 쓰는 동안 자신의 진정한 내적 실체를 발견하고 이 분열된 욕망들인 자신을 통합하고 진실된 인격을 형성하고자 고투했다. 그녀는 글 속에서 글쓰기가 분열되고 혼란스러운 자아 속에서 가장 강력한 요소라고 믿었으며, 어떤 파괴적 영향을 받더라도 온전함을 만들어내는 행위였다고 말한다. 이처럼 아나이스의 일기는 한 인격의 진화로 나아가기 위한 독특한 문서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자아 속으로 도피했다가 진정한 자아를 재발견하는 과정의 역동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이 여러 인격을 연기해왔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이 길을 잃은 허위와 망상의 미로를 인내심 있게 해쳐나가지 않고서는 자아의 통합과 일치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었음은 분명하다. 그녀는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있으며, 인간이 추구하는 질서는 바로 자신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아나이스는 자신의 진실한 본성을 찾아가는 철저한 여정에 대한 경이로움과 인간 정신의 신비로운 작용에 대한 깊은 외경을 통해 미학과 질서, 이상을 마침내 버렸을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의 질서와 지혜를 발견한다. 그녀를 메를로 퐁티의 몸의 철학을 실천한 사람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모든 세포가 기능할 때, 즉 꿈, 욕망, 본능, 식욕이 모두 살아날 때 풍요로움에 도달합니다라고 쓸 때 깨달음의 충만함 속에 존재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을 왜곡하는 거울을 부수고 온전함과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 삶의 투쟁을 벌여 나갔던 인간의 특출한 사례라 해도 될 것이다.

 

나는 창녀처럼 그에게 본능적으로 충실했다. 그와 함께하지 않으면 쾌락을 느낄 수 없었다. 헨리와 관계를 가진 날 휴고가 나를 원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어젯밤 그는 열광하며 절정을 느꼈다. 나는 그에게 순종하며 그를 기만했다. 즐기는 척 했을 뿐이다.”  - 헨리와 준,165

 

이 문장을 읽을 때 교활하고 발칙한 색정적 여인을 떠올리며 도덕적 분노가 슬그머니 일어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이러한 묘사에 함몰된 읽기에 그친다면 그것은 매우 편향된, 남성적 시선의 읽기, 즉 절름발이 독서가 되고 말 것이다. 여성의 자신의 성 욕망 드러내기를 남성들은 관음의 시선으로 읽어내며, 그것에 편협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그럼으로써 죄의식을 부과하고 그것에 악의 그림자를 덧씌우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여성의 시선으로 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회가 억압으로 눌러 온 것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며 개방된 세상 속에서 그 어떤 구속도 없이 자기를 발견하려는 처절한 탐색의 여정임을 발견할 수 있다.

 

출처헨리 밀러북회귀선》 中 아나이스 닌의 서문 일부 발췌


아나이스는 성 탐닉에 안달하는 성 탐닉자가 아니며, 자신의 성적 자유를 위해 타인을 파괴하는 인물도 아니다. 헨리와 준에는 작가로서 또한 불륜의 관계자로서 헨리 밀러에 대한 재정적 지원에 대한 직접적 표현은 없지만 그녀는 그의 문학적 동행자이자 지지자로서 많은 영향을 서로 나누었다. 스치듯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의 초고를 아나이스가 읽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이 소설의 서문을 쓰기도 했는데, 아마 그것을 읽었던 사람들은 이미 아나이스의 문학적 역량에 대한 비판은 거두었으리라 믿어진다. 매우 높은 지성의 소지자이면서 밤의 여왕으로서 재능이라는 이 낯선 조합의 여인은 헨리를 비롯한 프레드, 그녀의 남편 휴고나 사촌 에두아르도에게도 낯설면서도 매혹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녀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것을 연출하기 위한 세련된 감각의 소지자였음이 일기 속 도처에서 드러난다. 아나이스 닌의 텍스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엄한 검열의 시대에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글로 옮기는 것은 한 여인에게 실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음을 상기해보면 그 미학적이고 문학적 작업의 결과를 당연하게 볼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일기는 죽지 않았다. 그가 내 옆에 없어서 그를 애무할 수 도 없을 때, 일기를 쓰는 것 외에 그를 사랑할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헨리와 준)” 문장은 단절된 욕망을 대신하여 삶의 충일함을 지속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글쓰기에 매달리는 아니 에르노가 탐닉에서 반복한다. 에로티즘은 존재 자체를 문제삼는, 여자를 존재적 물음에 빠뜨리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삶의 의미로서 사라져 버리는 괘락으로서의 욕망, 욕망의 부재인 삶의 멸실로서 죽음으로, 사회적 통념을 박살내는 이 격렬하고 천박한 음란의 노래는 스스로를 정의하려는 각고의 자기 탐색의 투쟁이다.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려는 자기성찰적 반영의 역동적 상호작용의 결실이기도 했을 것이다. 도덕주의를 앞세워 비난당하고 잊혀지는 작가를 대신해 항변 하고 싶었다.

 

이 글은 부분적으로 루퍼트 폴이 세운 아나이스 닌 재단(The Anaïs Nin Foundation)’의 아카이브를 참조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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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다른 곳에 밀란 쿤데라 전집 (리커버) 3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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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나리우스: 자네 소설이 따분하지나 않을까 염려되는군,

밀란 쿤데라: 소설은 사이클 경주를 닮을 게 아니라, 많은 요리가 나오는 향연을 닮아야 해.

- 불멸(L'immortalite), 225쪽에서

 

인간 행위 수행에 이르는 의사(意思)들을 요소들로 해체하면 그것은 더 할 수 없이 경박한 것들의 수행임이 드러난다는 것이 쿤데라의 지론인 듯싶다. 그래서 그의 모든 소설들은 하나의 제목을 붙여도 될 것만 같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가벼움말이다. 이 소설 삶은 다른 곳에(La vie est ailleurs) 이후에 발표된 불멸(L'immortalite)에서도 쿤데라는 제목이 잘 못 달렸다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제목이어야 한다고 말하듯, 이 소설 역시 동일한 제목을 붙여도 결코 잘못된 것이라고 말 할 독자는 없으리라 여겨진다.

 

이 작품을 부랴부랴 펼쳐든 이유는 불멸(L'immortalite)』 「3, 투쟁에서 삶은 다른 곳에의 주인공인 야로밀에 대한 인물평을 하는 한 단원 때문이었다. 랭보의 지옥에서 한 철에 등장하는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시구를 맹신함으로써 자기 무덤 파는 자들의 동맹자가 된 풋내기에 대한 이야기가 호기심을 잡아챈 것이다. 배속을 간질이는 쿤데라의 그 흔쾌하게 날아갈 듯한 가벼움이 빚어내는 해학적 문장들에 대한 기대는 물론이고, 한 인간의 출생과 성장 속에서 어떻게 시인을 꿈꾸고 그 꿈의 성분이 된 것들이 무엇인지, 어쩌면 그것도 희극들일 것일 텐데, 그 빚어지는 삶의 현실태(現實態)를 보면서 한바탕 웃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나는 진정 웃음에 목말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쿤데라의 소설들이 다채로운 요리들이 나오는 향연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1)배실배실 나오는 웃음, 혼자 킥킥대며 그 가볍기 그지없는 문장을 쓰는 작가의 심사(心思)를 떠올리며 인간의 세계가 한없이 경박한 것들의 집합임에 수긍한다. 서너 줄로 내용을 요약한다면 랭보의 문구를 자신의 슬로건으로 삼은 현대시를 사랑하는 야로밀이라는 풋내기가 어느 날 갑자기 프라하에서 절대적으로 현대적이 된 것이 사회주의 혁명이 되자, 죽도록 사랑하던 현대 예술을 즉각 거침없이 규탄한다. 그리곤 이 위대한 계명을 거역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사랑하던 모든 것을 냉소하며 부인하고, 이 난폭행위를 통해 성년(여자를 알게 되는 사내 됨)의 삶으로 들어가는 이 젊은이는 부인 행위, 즉 절대성(그에게는 현대성이 곡 절대이고, 그래서 죽음의 절대성은 곧 그에게 달콤한 향기이다)에 자신의 모든 열정과 광신을 쏟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희생하는 사내로서의 용기 때문에 가담하는 광경, 그리고 그 행위로 인해 꿈과 각성의 비극적 불일치 속에 서글프게 죽는다는 이야기다.

 

내용을 간추리고 보니 보잘 것 없기 그지없지만, 그침 없이 흐르는 사람들의 그 경박한 배경 속에 혁명의 시대가 소극(笑劇)이 되어 흐르고, 역사는 희극(戱劇)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인간들의 욕망의 의지와 달리 늘 여기가 아닌 저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삶이 놓여있음을 뼈저리게 감각하게 만든다. 정말 참을 수 없이 가벼워 비참의 웃음이 그만 묵직하게 가라앉을 정도다. 이 풋내기가 고수하는 절대적 현대성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그 하찮은 죽음이 외려 연민보다는 고작 그렇게? 라는 조소가 흘러나오니 말이다.

 

, 웃기는 것은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열정에 찬 확신이 그가 체험으로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기에 더욱 어리둥절하게 하고, ‘현대적이라는 단어가 늘 내용이 변하는 파악할 수 없는 개념임을 어떻게 깨닫지 못했는가라는, 또한 그렇게 절대적 현대성을 위해 사랑의 절대성을 확신하는 인간이 사랑하는 여자를 배반하고 사회주의혁명 정부의 경찰에 고발함으로써 현대성을 수호한다는 광신은 사실 혐오스럽고 소름끼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따분한 얘기는 소설이 자아내는 진정한 의미가 아니기에 예서 줄이기로 하고, 야로밀의 출생부터 시인을 꿈꾸는 일련의 성장과정을 따라가 보자. 삶이란 콩트이고, 코미디이며, 한낱 유희적 행위의 우연적 더미일 뿐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힘겨울 정도다.

 

시인의 어머니가 어디에서 시인이 잉태되었던 것일까를 생각해

볼 때면 딱 세 가지 가능성이 고려 대상에 들어갔다.”

- 소설 첫 문장

 

잉태 장소에 대한 설레발이 몇 쪽에 걸쳐 진술되는데, 이 기억이란 것이 삶의 상황 맥락에 따라 자기 정당화와 합리화다. 가능성이 고려 대상에 들어갔다는 말도 우습기 짝이 없지 않은가. 어쨌건 가난한 엔지니어 청년의 씨를 잉태한 시인의 어머니는 아버지 재산의 권위에 의지해 결혼을 성사시키고,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 여인은 아들에게 그 사랑을 쏟아 붓는다. 아이는 학교에서 아이들의 마음에 들지 못하여 외톨이로 겉도는데, 아이들의 신경을 거스르는 무엇, 야로밀을 다르게 만드는 것의 정체가 엄마의 사랑이었음을, 이 사랑이 야로밀의 모든 것에 흔적을 남겼으니, 셔츠, 머리 모양, 사용하는 단어.., 이 어머니의 사랑이 아들의 이마 위에 친구들의 호감을 밀어놓는 표지를 새겨놓은 것이다.

 

이것은 시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시인의 어머니가 그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아들의 목줄을 잡고 놓지 않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일 것이다. ‘삶은 다른 곳에라는 표현은 이같이 그 의지 또는 의도와는 거리가 먼 저쪽 다른 곳에 있다는 가벼운 진실을 말하는 것일 게다. 소설은 처음부터 이렇게 엉뚱하고 예상과 다른 반전들이 야기하는 웃음의 연속이다. 사람 얼굴을 잘 그리지 못하는 탓에 인간의 몸을 한 짐승으로 개를 그리는데, 이 기묘한 그림을 아들의 비범한 재능으로 여긴 시인의 어머니는 화가에게 전문 교습을 보내기에 이른다. 그림을 받아든 현대예술의 전문가인 화가 또한 아이가 종이 위에 표출해 놓은 저 너무도 독창적인 내면세계를 해독한다. 야로밀은 단지 사람의 얼굴을 못 그리는 바람에 그냥 어쩌다가 개() 인간이라는 경탄할 만한 발견을 하게 되었음에 불과한 것인데, 이 황당한 내면의 독창성은 아이에게 금지된 이해의 심연을 바라보듯 하는 자기 관찰에의 관심을 부여한다. 쿤데라의 이러한 해프닝의 연출, 삶의 모든 수행들이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유희임을 발견해냄으로써 그 가벼운 존재들인 인간에 대한 참을 수 없음에 독자를 동참하게 한다.

 


이 사내에도 어린 아이에서 소년으로, 또 청년으로 자라기 마련이다. 자기 부모의 집 벽에 걸린 정물화나 풍경화와는 아주 다른 현대 예술을 그리는 화가의 그림은 현대 예술에 대한 우월적 환상을 심어준다. 야로밀은 자신이 집에서 그린 그림을 화가에게 보여주고, 그 그림들이 모두 머리가 없는 여자 나체들이기에, 화가는 인간의 얼굴을 인정하기를 집요하게 거부하는 몸짓으로 이해한다. 급기야 시인의 어머니는 인간 본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는 아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따지기 위해 화가를 방문한다. 이 방문에서 화가와 시인의 어머니의 대화와 간음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그야말로 대단한 해프닝, 길이 남을 소극의 명장면이라 해도 될 듯싶다.

 

머리 없는 여자들의 그림은 매순간 우리 삶을 뒤흔드는 전쟁 사이에 어떤 숨은 연관의 느낌이 되고, 전쟁의 피로 물든 세상 뒤에서 나타나는 사랑이 되기까지 한다. 그리고는 이 의미심장한 진지한 해석에 매료된 시인의 어머니는 화가의 혀가 자기 입안으로 들어 온 것을 느낀다. 이 순간적 상황에 봉착한 여인의 머리에 스쳐가는 찰나의 생각들의 묘사는 그야말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인데, 그 간음의 자기 정당화에 대한 내심의 변은 재미있어 죽을 지경이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잠깐 생각할 틈이 있었지만 논의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므로 답은 뒤로 미루고 지금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순간의 일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는 얘기에서부터 자신을 순진무구한 반-성숙 상태 속에 놓아둔 남편에 대한 즉각적 분노로 옮겨가며, 그 분노가 장막이 되어 자신의 헐떡이는 숨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고 로 이어지는데 어찌 진지함 속에 이렇게 가벼움이 잔뜩 내재할 수 있는지 아연실색하게 된다.(물론 당사자는 진지함에 빠져있다고 여기겠지만)

 

이 소극들로 빼곡한 소설을 모두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기에 시인 야로밀의 시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쿤데라가 어깃장을 놓으려는, 아니 통상의 시인들이 시 속에서 자신의 초라함과 어떻게 멀리 떨어진 저 위에 있을 수 있는지를 밝히는, 그 가벼움의 진상 드러내기이기도 할 것이기에 옮겨본다. 녹아내려 물로 변하는 슬픔/ 수면이 올라오고 또 올라가 내 눈까지 차오르는 초록빛 물/ 슬픈 몸 / 한없는 물을 가로질러 내가 쫓아가는, 이 시는 자기 집 하녀 마그다가 목욕하는 것을 열쇠구멍에 바짝 눈을 갖다 대고 훔쳐보며 처음 보는 여체에 대한 갈망을 적은 것이다. 대체 어느 누가 이 시를 사춘기 소년의 관음이라고 읽겠는가. 이 시의 근원에 욕조 안의 마그다가 있음을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야로밀은 이 시를 타자기로 쳐서 종이에 옮겨 놓고는 그 시가 단순한 단어의 연속이기를 멈추고 하나의 사물이 됨으로써 시가 자율성을 획득하고 소멸이 아니라 오랜 지속이 예정되었음을 느꼈다고 묘사하고 있다. 사실 쿤데라의 소설은 그 주제의 용의주도한 이야기 속 배치를 넘어서는 이러한 존재의 경박성에 대한 까발림이 주는 흔쾌한 즐거움, 생이 무겁다고 쳐진 몸을 가볍게 떠올려주는 그 가벼움이 만들어내는 배에서 올라오는 웃음의 즐거움으로 가득 차있다.

 

이 가벼움의 미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무엇보다 둔중한 역사성, 즉 역사를 해석하는 자의 지금 여기서 라는 상황 맥락이라는 조건에 따라 얼마나 달리 수용되는가를 시인의 어머니가 화가와의 화간(和姦)을 단절하고 아들과 남편에 충실한 여인으로 되돌아와 자책함으로써 애인을 잃었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나치에 박해받는 유대 여자와의 사랑을 위해 끌려가 사망했음을 알았을 때 그 배반이 얼마나 뼈아픈 것이었겠는가. “이제 그녀는 남편 때문에 자신의 유일한 사랑을 배신했다고 머리카락을 집어 뜯는다. 이때 작가의 분신인 화자는 말한다. 역사란 이미 일어난 일이므로 완전히 끝나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돌아 볼 때마다 매번 다른 색깔로 보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역사성이란 것은 한 여인의 상황변화에 따라 춤추는 사랑의 감정을 빗대 이렇게 경박하게 날아오른다.

 

자신의 삶이 아무 사건 없이 빈약하기 때문에 자화상을 더 극적으로 만든다.” -347

 

소설은 내내 자기 경험의 한계 너머에 있는 여자의 몸, 여자에 대한 몽환적이고 유희적 몽상으로 가득한 풋내기 야로밀의 애정사로 가득하다. 시인의 어머니가 읽는 아들의 시는 저 높은 형이상학적 지대를 거닐지만 정작 그 시들은 생식과 성교의 기관, 달콤한 사랑의 나라를 그린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추상의 지대, 상상의 테마였을 뿐임을.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목줄로 길게 연결되어 묶인 야로밀의 경험의 협소함은 그야말로 궁핍의 영역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야로밀은 이 궁핍의 지대에서 자유의 지대, 진정한 현대성의 왕국을 향한 도약이 도래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 마르크스주의자 동아리에서 알게 된 여자와의 첫 잠자리의 실패 이후 못생긴 가게 점원 빨강머리 여자가 그를 성년의 남자로 만들어준다. 사랑의 영역, 여자에 대한 몽상이 현실의 사건이 되는 야로밀이라는 풋내기 인간의 생의 변곡점도 그가 주도하고자 하는, 꿈꾸던 그런 것과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것이 삶은 다른 곳에있음을,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자기 고유의 자동성이라는 법의 실존이 삶의 진실임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여기서 우리네 인간의 자기 삶에 대한 통제의 실패, 자기 삶의 이야기이기를 분명하게 직시하여 적절하게 보지 못하는 무능력의 실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자기 의문을 갖는 것의 불가능성, 그리고 사랑의 절대성을, 삶의 궁극의 질서를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알지 못하는 삶의 행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불행의 도정에 서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이 소설은 분명 비극이지만 그것을 비극이라 말 할 수 없을 만큼 너무 가볍고 하찮아 비극이 되지 못한다. 혁명의 대열에 참가한 열렬한 사회주의 혁명 시인, 절대성의 메신저가 되고자 하지만, 그 무모한 열정에 깃든 경박함으로 인해 그의 죽음조차 불꽃처럼 승화하는 혁명시인의 그럴듯한 자살이 아니라 몽매한 시 나부랭이, 기막힌 똥덩어리를 써대는 애송이라는 웃음거리가 되어 차가운 밖으로 내던져지고 폐렴으로 앓다가 죽듯, 불꽃 없는 죽음을 맞기에 더욱더 비극의 그 어떤 위대성도 없는 소극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되고 만다.

 

이 소극은 삶은 항상 다른 곳에 있기에 생의 통제는 궁극적으로 실패를 맞이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 같다. 정작 자기 생에 대한 치열한 진지함을 믿었던 야로밀이지만 그 인생의 무엇도 자신의 것으로 삼지 못한 표피적 삶이라는 경박한 생의 걸음에 불과했음을 독자는 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만이 인간의 실체임을 확인케 하는 쿤데라 의도의 발칙함에 굴복하게 된다. 실상 누구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 야로밀이라는 풋내기보다 더 아는 것도 없음을 아는 독자 어느 누가 자기 삶의 가벼움을 부인 할 수 있을까. 공포의 시대, 경찰 연수원 단상에 앉아 시를 읊었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하기를 거부당하는 부끄러운 이름 모를 시인의 피 흘리는 미소를 띤 순진무구, 나는 그 익살극의 함정에 빠져 어떻게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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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배실배실 웃음이 나오다: 모순적이거나 예상과 다른 반전, 또는 누군가의 어설픈 행동이 엉뚱하게 느껴질 때 나오는 웃음의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합니다.

(2)소설 주인공 야로밀은 체코 사회주의 시의 창시자로 알려진 야로밀과 같은 24년 남짓 삶을 살다간 체코 시인, 이르지 볼케르(Jiri Wolker, 1900-1924)’를 모델로 한 것 아닐까하고 추정해본다. 소설 속에서도 스치듯 한 번 거론되는 시인이다. 고난에 찬 프롤레타리아들의 삶이 있고, 사회적 모순과 구조적인 부조리에 대한 고발과 사회정의의 실현에 대한 믿음, 해방과 혁명의 필연성에 대한 역설, 집단주의와 상호연대와 자기희생에 대한 강조를 실천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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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
웨인 케스텐바움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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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의 상처는 신체의 은밀한 부위를 직접 침해한다. 굴욕은 괴로움, 취약함, 욕구, 몸의 풀리지 않는 매듭이라는 사적 차원을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공적 차원으로 끌어냄으로써 안이 밖으로 나오게 하고 밖이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155쪽에서

 

어쩌면 웨인 케스텐바움의 이 책은 숭고와 굴욕사이에 길을 내는 삶 살았던 장 주네가 부활하여 쓴 것 같은, 굴욕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의 정당화를 위해 굴욕의 변신술을 익혀 온 인간 존엄의 내밀한 기록이라 하여도 될 것 같다. 11개의 푸가로 구성된 이 책은 제 1푸가 알몸 수색에서 굴욕이라는 감정 또는 정동에 대한 정의와 유형들의 정리를 시작으로 이 세계에서 벌어지거나 상상될 수 있는 사실들 속에서 저자 자신의 일상적 굴욕에 대한 경험들을 풀어놓는다. 어찌나 투명하게 자신을 드러내는지 그것이 마치 굴욕이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아니 이 악의로 범벅된 치욕의 단어가 역설적이게도 그의 연금술에 의해 생의 유익하고 긍정적인 성소(聖所)로 변화하기까지 한다.

 

심란하기 짝이 없는 저자 자신의 굴욕적 전사(全史 혹은 前史)를 발가벗겨 드러내는 글을 쓰는 이유를 바로 그 굴욕의 역사라는 심해의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서라고 쓰고 있듯, ‘굴욕이라는 단어를 되뇌는 데서 고통과 슬픔보다는 기쁨을 느끼고, 이 단어의 되풀이가 용서와 위로의 향기가 되어주는 까닭이기 때문일 것이다. 굴욕의 감정이란 정말 더러운 정동(affect)인데, 내 안의 무언가가 뒤집혀 수모가 되고 불안정을 야기하는, 누군가에 의해 더렵혀졌다는 느낌이다. 육체이건, 정신이건, 이 굴욕의 감정은 신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이고, 그래서 굴욕은 한 사람의 육체와 정신을 고갈시키고 소모시키는 과정이다. 굴욕은 현존했던 것, 온전하고 견고하고 중요했던 한 인간의 모든 것을 너덜너덜하게 만들고, 그 존재의 주체를 한없이 축소시켜 마침내 탈주체화하여 더 이상 인간이기를 그치게까지 하는 추악한 감정이다.

 

웨인 케스텐바움시인이자 미술가이며 영화제작자이고 예술비평가로

 뉴욕시립대 비교문학 석좌교수이기도 한 퀴어연구 창시자 중 한 명이다

퀴어연구의 대표적 창시자 이브 코소프스키 새지윅에 영향을 

받은 학문적 동료이자 정서적 친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내면서 굴욕과 결코 마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케스텐바움은 굴욕을 필수 덕목으로 하는 사회를 상상해보자고 한다. 사실 상상해 볼 것도 없이 인간들의 사회에서 굴욕은 이미 모든 곳에서 차고 넘쳐 통과의례적 사건임을 부정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신체가 뒤집어지는 이 수모의 체제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즉 굴욕을 겪어냄으로써, 아니 굴욕의 만연, 그 짓밟힘을 침착하게 견뎌내기 위해서 양감감정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굴욕을 생의 필연적 운명으로 수용하는 로베르트 발저의 소설 주인공 야곱이거나, 혁명의 에너지이자 전주곡으로 삼은 프란츠 파농이거나, 자아 행진을 강제 중지당한 예수의 숭고함처럼 자기 인식의 길을 내는 선행사건 쯤으로 수용하는 것 말이다. 굴욕을 유용하고 유익한 것으로 바꿔내는 감정능력을 갖추는 것일 게다.

 

하지만 굴욕을 이렇게 긍정성으로 수용하기에는 용납되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할 것이다. 해서 저자 케스텐바움의 이러한 양가감정 갖추기의 주장에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책의 작업을 남들에게 가해지는 굴욕을 감지하는 굴욕 레이다(humiliation-radar)를 새로 만들어내는 작업이라며 관찰자 혹은 조사자로서 굴욕의 연금술이 가능함을 역설하고 있지만, 미군 병사에 의해, 개 목줄에 묶여 알몸으로 발가벗겨진 채 교도소 바닥에 쌓아올려진 이라크 병사들의 굴욕이 과연 긍정성과 유익의 원천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일까? 나치의 아우슈비츠 절명수용소에서 인간이 아닌 한낱 물건으로 취급되는 유대인 수감자의 굴욕은? 백인들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절단당한 신체로 거꾸로 매달린 흑인의 참담한 굴욕은? 케스텐바움은 굴욕 받아 죽을 때까지 씻어내지 못할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처럼 대속이라고 정신 승리를 하라는 말인가?

 

케스텐바움의 주장들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비인간으로 탈주체화를 강요당한 인간에게 세계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지 않을까. 굴욕을 다 겪고 반대편으로 빠져나오면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문장처럼 굴욕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경우, 그래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경우라면, 혹 에밀리 디킨슨의 시 구절처럼 큰 고통이 지나면 형식적인 감정이 올 수도 있겠다. 케스텐바움은 시몬 베유의 글을 오독한 것으로 보이는데, 진실 안에 들어갈 방법은 자기 소멸뿐, 극심하고 전면적인 굴욕의 상태에 오래 머무는 것뿐이다. (시몬베유,인간의 성격)”는 글은 낮고 작아져 스스로 겸허 속에서 살아갈 때, 즉 무아(無我)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지, ‘전면적 굴욕이란 인간적 지위와 위치의 하락을 강요하는 일시적 관계적 긁힘인 굴욕이 아니다.

 

더구나 조르조 아감벤이 탈주체화라고 명명했듯 원치 않는 물질이나 작용력에 의해 무방비의 육체가 갑작스레 침범당하여 고통을 느끼고, 그 불가해함으로 인해 주체이기를 멈추도록 강제 작용당하는 대상이 되고 훼손당하는 지형이 되었을 때, 한 인간은 존재할 가능성을 부인당하고, 결국 소멸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지 않는가. 케스텐바움은 성추행자인 상원의원, 자기 딸에게 욕설을 퍼붓는 헐리웃 대스타, 고급매춘부를 출장에 동행하여 시민에 지탄받는 뉴욕주지사의 공개 석상에서의 사과연설을 굴욕이라 칭하고 있는데, 과연 그 추락이 숱한 약자들이 겪어내야 하는 굴종과 같은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러한 냉정한 비교분석 없이 그저 그네들의 오만이 초래한 도덕적 법적 부정의 감정에 대한 질타보다는 연민과 동정의 감정이 앞선다고 자신의 양가감정 능력을 자랑하는 것은 도덕적 무능력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 책 전반의 논지에 대해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분명 케스텐바움은 굴욕의 본질이 더럽고 악한 것임을, 그래서 이 세계를 함께하는 인간들이 겪는 고통을 해소하고 나아가 승화하는 동기로 삼고 싶어 함을 안다. 훼손당한 주체들이 안고 가야만 하는 그 고통을 흔쾌하게 털어내기 위한 그만의 사고과정을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다. 바로 그 해소하고 싶어함을 이 글쓰기를 통해 케스텐바움은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크리스테바가 언어가 침을 흘린다. 대화가 똥을 싼다.”라고 통제되지 않은 단어를 마구 흘려내어 올바름의 규칙들을 뒤집어 소위 구리고 습하기 그지없는 비체(卑體)문학의 영광(?)을 구현했다는 루이 페르디낭-셀린의 밤 끝으로의 여행처럼, 표준화된 언행을 위해 무언의 조절이라는 고된 작업을 내던진 속 뚫림의 시원함이 역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이 케스텐바움이 굴욕의 퍼포먼스들을 즐기고자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 굴욕의 대문은 우리들 삶의 일상에 늘 열려있기에, 그것에 익숙해져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가 하나의 장을 할애하여 소개하는 짐 크로(Jim-Coow)눈총이라는, 다른 사람이 존재할 가능성을 고려하기를 그친 인간의 얼굴에 나타나는 침 뱉는 자의 눈총, 앞에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냉담함이나 무반응, 옹졸하고 편협한 비승인의 악의적 눈길에는 인간이 없다. 더러운 것, 기분 나쁜 것, 사람이 없는 것을 보는 가해자의 눈길은 다른 누군가에게 굴욕을 가하겠다는 집요한 선언이다.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출처: 사람, 장소, 환대)”는 인류학자 김현경의 정의에서처럼 사회가 이름을 불러주기를, 자리를 내어주기를 거부함으로써 사람이 아닌 사물로 처해지는 굴욕을 당한 존재가 과연 그 굴욕의 경험을 구원 또는 승화의 원천으로 삼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굴욕을 야기하는 내용이나 상황, 당하는 사람의 현실적 지위나 위치에 따라 결코 동일한 의미를 지닐 수 없다고 생각된다. 저자는 일률적으로 이러한 결코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의 단어에 개념화함으로써 굴욕의 의미를 호도(糊塗)하고 있는 듯 보인다.


매춘부를 데리고 공적 행사를 다닌 뉴욕지사가 자신의 아내와 딸을 동반하여 TV화면을 마주보고 수사를 동반한 전혀 사죄 같지 않은 사죄 담화를 발표하는 상황과 발길질을 일방적으로 감수하여야 하는 한국의 아파트 경비원의 굴욕이 동일한 것인가? 목소리 톤이 높고, 긴 머리를 한 남자 아이가 아이스크림 점원에게 여자 아이로 인식되는 것과 흑인들을 거꾸러뜨리고 종속상태를 선전하고 강화하기 위해 흑인들을 대상으로 집요하게 린치와 같은 폭력을 행사하는 뉴욕경찰이 가하는 굴욕이 같은 범주로 말 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케스텐바움이 이들 굴욕을 옹호나 찬양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굴욕이 사회의 시스템이고 인간 사회의 먹이사슬이기에 그것을 삶의 배경처럼 인식함으로써 승화된 삶의 태도를 견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지독하게 이상주의적이며, 윤리의식을 모호하게 할 우려가 심각해 보인다.

 

성소수자로 인식되어 누군가에게는 따가운 눈총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게이나 레즈비언으로 산다는 것이 사람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굴욕이 사람임을 부정하는, 즉 탈주체화를 목적으로 하는 굴욕과 일시적, 상황적 모욕으로서의 굴욕은 구분되어야 한다. 즉 나는 케스텐바움과 같이 굴욕과 부끄러움을 구분하는 회피적 정의에 동의하지 못한다. 굴욕을 나는 탈주체화로서의 굴욕과 모욕으로서의 굴욕으로 크게 구분하여 설명하여야 후자의 굴욕을 케스텐바움의 삶의 필수적 요소로서, 즉 자기 인식의 길을 내는 선행사건으로서 굴욕에 겨우 동의 할 수 있을 것 같다.

 


케스텐바움은 말한다. 나는 굴욕에는 이골이 났어요 / 최근에는 / 굴욕을 당해도 굴욕을 느낄 수 없을 정도예요.” 라는 그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내 목표다라 선언하며 그곳에 행복한 마취가 있고 무심이 있으며, 굴욕이 더러움을 씻어낸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미학 놀음, 예술적 신선놀이라는 상상의 공감에서나 거둘 과실(果實)로 여겨진다. 그는 장 주네를 호출하여 침과 악취, 분비물로 흥건한 음습함을 반복적으로 성애화하는 방식으로 윤리적 가치의 안과 밖을 뒤집어 굴욕의 아픔을 초월로 가는 우회로로 삼았다고, 더러움 속에서 새로운 신성함을 발견했다고 평가한다. 주네가 찾은 것이 정말 칵테일 빛깔의 신성함이었을까?

 

관념적 추상에 터 잡은 존재론적 성찰과 현실적 인간들 간의 상호관계에서 빚어지는 굴욕은 결코 동일한 개념적 범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케스텐바움의 글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는데, 굴욕을 성상화(聖像化)하기까지 하다가 너무 잔인하게 취급당한 굴욕의 기억 앞에서 사람들은 뒷걸음친다, 그 심한 고통 탓에 묘사의 재능을 상실하고, 그들의 언어는 굴욕의 흔적인 공백을 가리켜 보일뿐, 그 공백을 충만하게 채워내지 못한다고 까지 굴욕 이후에 말을 잃은, 부재하게 된 존재의 극한적 고통을 이해하는 듯 말하기도 한다. 굴욕이 이러한 극한적인 것이라면 이것을 그 무슨 승화와 성화의 원천으로 삼겠는가? 언어도단이요, 미학에 몸을 감춘 채 머리로 하는 공허한 사적 위안 놀음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예수의 굴욕을 반복할 수 있는 자는 신이 되리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공중화장실, 백화점, 극장 등을 배회하는, 즉 크루징(cruising)을 하는 게이에겐 굴욕의 시선이 항상 온몸에 들러붙어 존재를 한없이 축소시킬 것이다. 그런 사람에겐 상시적 굴욕을 일상성으로 삼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고, 나아가 그 굴욕이라는 주체의 훼손을 신선한 쾌감으로 전도해야만 살아 갈 수 있을 터이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매 순간을 눌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굴욕의 상시적 고통의 자리에 있지 아니하다. 다시 말해 굴욕이 인간 세계에서 피할 수 없는 관계성이 빚어내는 불가피성이라면 존재의 주체성을 앗아가는 이 악의성에 대한 세계의 환기가 필요한 것이지, 굴욕 그 자체를 내면화하는 것은 영원한 시선의 노예적 삶의 익숙성의 요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의 바닥으로의 추락, 즉 왕의 굴욕이 도덕적 부주의가 초래하는 결과들을 알게 됨으로써 정신적으로 오히려 풍요로워졌다는 해석은 물론 옳다. 굴욕이 만들어 낸 여파(餘波)의 위안에 대한 이러한 황량한 통찰이 굴욕을 신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케스텐바움은 자신의 도덕적 패착이 몰고 온 비극의 결과를 자기 지위의 추락이라는 굴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굴욕이 외부의 침입으로 인해 발생하는 굴욕의 본질과는 다른 것이다. 자신의 내적 도덕성의 결여, 위치의 우월성이 가져온 교만의 착각에 동반되는 정상화로의 복귀이다. 케스텐바움의 자가당착적 해독이 불러온 두루뭉술한 개념 정의의 불비로 인해 그의 다채롭고 풍부한 사회적 감정의 고찰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아쉬운 텍스트가 되고 마는 것 같다.

 

오히려 케스텐바움의 여러 푸가 중에서도 조지 엘리엇의 아담 비드에서 점령군 나치의 첩이라고 조리돌림 당하느니 자기 아이를 죽이는 영아 살해범의 길을 선택한 헤티 소렐의 인용이 가장 동의의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시민대중의 무감각에 의한 집단적 짐크로의 눈총이 도덕적 무능력이라는 악의임을 해독 하는 시선 말이다. 프랑스 시골마을 주민들의 자신들만은 확고한 윤리적 우월감을 갖추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환상에 기초해 헤티를 향해 더러운 존재라 손가락질하며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깎아버리곤 추방하는 그 무심한 굴욕의 강제 말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이어 케스텐바움은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다 공개된 공간에서 자신이 남자로 읽히는 데 실패함에 따른 굴욕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 감정적 긁힘의 정도를 객관적 척도로 잴 수는 없다. 그러나 헤티 소렐의 굴욕과 무성성, 혹은 양성성의 존재로 읽혔음으로 인한 내적 굴욕은 조금 터무니없어 보이기도 한다. 전자에는 탈주체화의 강제가 있지만 후자에는 그런 시도가 없다. 즉 동일한 비교대상으로서의 굴욕이 아니다.

 

다만 케스텐바움 자신이 백인으로서 굴욕의 가해자라는, 즉 짐크로 눈총의 역사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윤리적 수렁인 시선을 내재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는 성찰적 이해는 고귀한 교훈을 던져준다. 우리들은 굴욕의 수용자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굴욕을 가해하는 자의 시선을 내면화한 존재이기도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에게 무심히 행사되는 굴욕의 강제는 그 상대에게 끔찍한 내면의 좌절감과 자기혐오, 굴욕의 장면이 초래한 기억으로 야기된 인격의 훼손과 마비로 삶의 황폐화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케스텐바움은 매우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자기 황폐화, 굴욕의 길로 스스로 걸어들어 가도록 이끄는 오늘의 세계에 대한 통찰이다. TV 리얼리티 쇼, 특히 여자들을 대상으로 한 패션이나 신체의 교정을 통해 'before vs after'를 선보이며 자신의 맵시나 몸을 굴욕스러워 하는 여자들의 변화과정을 카메라에 담아 미운오리새끼들을 백조로 바꿔준다고 선전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하는 물음이다.

 

시청자들은 왜 이러한 굴욕의 퍼레이드에 흥분하고 감동하며 채널을 돌리지 못하는 것일까. 자기 몸을 수술대에 바치거나 의상과 미용술에 맡기는 계약에 동의하고 그 수술 또는 성형과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굴욕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 이유일까. 시청자들은 운명을 바꾸고 행복을 쟁취한다는 잘못된 신화적 감동, 그 근거 없는 믿음에 근거한 기쁨에 도취하려는 것일 테고, 참가자는 여성성 혹은 미적 성취라는 것을 확보함으로써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감격하고 그것이 곧 행복쟁취의 길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수술의사로 참여한 의사들의 말을 보면 정말 가관인데, “XX에게는 여성화 대책이 더 필요합니다.”라거나, 우리가 목표를 성취한다면 그녀는 정말 예쁜 아가씨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말들에서 우리는 의료윤리를 찾아볼 수가 없다. 소비자들의 허위의식을 조장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하려는 욕구말고 그 무엇이 있는가. 여성화 대책이라니, 예쁜 아가씨가 목표라니, 더구나 이러한 굴욕 프로그램에 환호하는 시청자 시민대중의 그 무심한 가해자의 동참행위는 정말 끔찍스럽기까지 하다.

 

어느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이 OO이 아빠는 청소부이시니 도시 청소에 대해 급우들에게 설명해주면 좋겠구나 라고 말했다고 상상해보자. 그 아이가 도시 청소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유사한 사례들이 학교, 직장, 여러 공동체에서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다. 무심을 가장한 채 앞에 있는 인간의 내부를 외부로 꺼집어내 존재를 축소시키는 행위들 말이다. 저자 케스텐바움의 내적 고백의 이야기들은 텍스트에 맡기련다. 아마 이 책을 읽다보면 굴욕의 똥통을 뒹굴다가 나온 느낌이다. 똥통에 떨어진 더러워진 인간 존엄의 이야기들을 헤엄치다보면 잠간 내민 머리통에 다가오는 신선함이 마치 세계의 신성처럼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굴욕이란 그 어떤 미화로도 깨끗함으로 돌아오는 감정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동의 할 수 없는 글들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굴욕으로 뭉쳐진 케스텐바움 몸의 항변, 굴욕의 승화를 향한 글쓰기의 의도를 알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문학을 비롯한 현대 예술, 음악 등 황홀할 정도의 예시들만으로도 이 책은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리라. 더불어 우리들이 잃어가고 있거나 망각한 도덕감각을 회복하는 데 어떤 단서를 수확할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굴욕의 백과전적 탐색을 통한 이 자전적 고백서는 굴욕의 밑바닥을 지나온 한 인간의 내밀한 성찰 과정이기도 하다. 이 굴욕의 다이어리는 훔쳐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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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프로이트 자신의 정신분석적 발견에 오이디푸스 콤플레스라는 이름을 부여했을까? 이것은 21세기 오늘의 개인적이거나 정치적인 삶에 있어서도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계급주의적,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유산을 과신하는 논자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의 그 무참한 몽매성에 대한 하나의 역사적이고 실체적인 통찰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1. 고대 그리스 비극 공연의 의미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공연되었던 기원전 5세기의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수고를 조금은 해야 한다. 당대의 아테네인들은 비극(연극)을 자신들 도시국가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겼다는 것인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리스 비극들이 모두 기원전 5세기의 70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생겨나고 사라졌음은 비상한 의미를 갖는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 혁명의 일부로서 폭발한 문화적 혁신이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비극은 그들의 교육과정에서 읽고 암기되었으며, 비평가와 철학자들은 이 극들을 읽고 연구했다. 일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이 시민에게 감정적, 지적 영향을 미침으로써 긍정적인 교육경험을 준다고 보았으며, 비극이 불러일으키는 연민과 공포는 시민이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적 인식으로 이끈다고 생각했음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매우 중대한 사실인데, 이 비극(연극)들은 아테네에서 매년 개최되던 디오니소스 대축제(국가적 종교축제였음)의 주요행사로 단 한 번 공연되기 위해 쓰여져 무대에 올려진 것이라는 점이다. 아테네인에게는 이 비극 관람이 오늘날 우리들이 연극을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는데, 연극관람, 디오니소스 축제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시민으로서 해야만 하는 중요한 시민활동이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이 축제에는 아테네 시민은 물론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있는 외교사절들의 의무적 참석과 국가 관료인 아르콘(집정관)이 직접 경연에 참가할 세 명의 극작가 선발부터 행사를 주관했다는 점에서도 비극 공연 참관이 시민정치 생활에 있어 얼마나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 행사의 의식은 지중해 패권을 차지하고 있는 아테네 제국의 군사적 이데올로기를 과시하는 의식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지배력과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의도된 스펙터클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자부심 가득한 의식이 끝나면 하루에 한 작가의 세 작품씩 3일에 걸쳐 공연되었다. 그런데 이 화려한 힘의 과시라는 의식 이후에 시민생활의 토대가 산산이 깨어지고 찢어지는 세계를 보여주는 비극과 정치적 부패를 비롯한 부정한 삶들에 대한 풍자를 주제로 한 희극이 공연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게 여겨지지만 이 두 극단인 긍정성의 의식과 부정성의 연극이 결합된 축제는 바람직한 도시국가는 어떠해야 하는 가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점에서 낯설면서도 신선한 그들의 감각을 발견하게 된다.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시민적 자부심이 불러 올 자만이 일으킬 비극성을 통해 시민의 바람직한 도덕적 인식을 이끌어내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 비극 작품들은 그들에게 지적, 감정적 긍정적인 경험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도 이러한 시민적 삶의 태도에 대한 자기성찰을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는 점은 오늘 우리들이 이 작품에서 발견해야 할 앎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필수적 배경이 된다. 오이디푸스가 이러한 배경을 함축하고 있는 인물임은 그래서 지극히 당연하다. 지중해 패권자로 군림하는 아테네 제국처럼 오이디푸스는 지적이고 존경받는 성공한 인물로써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통제할 줄 알지만 신탁이 예언한 운명을 필사적으로 피하고자 하며,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도 알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모범적인 사람이 곤경에 처하는데서 아테네 시민들은 그 인간적 비극의 고통을 보면서 자기성찰로 나아가게 된다


현전하는 고대 그리스 비극은 예외 없이 이러한 구도를 따른다. 디오니소스 대축제(이데올로기 과시의 의식+비극(연극)공연)는 이렇게 시민들이 일반적 관심사를 공유하면서 자기반성을 하는 감정적 연대의 장()이었다.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이 같은 시민적 자기성찰과 비판적 감정적 연대의 장을 생각조차 할 수 없기에 더욱 매혹적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고대 그리스 비극이 어떠한 의미를 지닌 배경 아래 있었는지에 대한 대강의 이해는 갖춘 것 같다. 이제 20세기 독일의 한 정신분석가가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인물을 자신의 발견 이론의 이름으로 삼았는지를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2. 20세기 독일 사회의 고대 그리스의 집착과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 또 다른 배경의 파악이 필요한데, 19세기 전후에 시작된 독일인들의 정체성 발견을 위한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물음, 즉 자기이해의 열쇠를 고대 그리스에서 찾았다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헤겔부터 시작해서 실러, 바그너, 니체에 이르는 독일 사상가들은 마치 입을 모아 말하듯 그리스를 자신들의 고향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헤겔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는 역사에서의 빛의 초점이었으며, 고대 그리스는 그리스의 이름으로 유럽의 교양인들, 특히 우리 독일인들이 고향처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라거나, 니체 또한 더 이상 어느 곳도 우리의 고향이 아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고향일 수 있는 유일한 곳을 동경한다. 왜냐하면 그곳이 우리가 우리의 고향이기를 바라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바로 그리스다.”라며 독일인들의 뿌리가 고대 그리스에 있었음을 천명한다.

 


이것은 바그너의 독일국가주의라는 흉물스러운 정치적 열정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독일과 그리스 사이에 친족관계라는 무모한 혼합을 통해 자신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기이한 논법들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타키투스가 묘사한 북방으로부터 그리스를 침입하여 스파르타와 코린토인을 구성하게 되는 도리스인을 독일인 자신들이라고 신화적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들의 공통된 신체적 특징인 큰 키, 금발, 푸른 눈동자, 잘 발달된 근육을 종족 아리아인의 전형적 표지라고 진리로 확증하기에 이른다. 독일인들은 이같은 날조된 정당화의 궤변에 열광하며 감명 받은 것은 물론이다.

 

독일의 모든 교육기관에는 그리스 비극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에 대한 교육과정이 필수가 되고, 모든 교육제도는 이러한 그리스 애호 열풍에 부응하기위해 재편되기까지 한다. 국민이 세대에 걸쳐 그 나라의 본질을 유지하며, 국가는 없을지언정 독일 국민은 언제나 존재한다. (...) 신화는 한 국민에게 특유한 것으로 한 국민에게는 그러한 신화가 있어야 한다.”는 민족과 독일 정체성의 신화 발명이 이렇게 독일에서 출현한다. 이황당한 계보학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혈통에 대한 왜곡된 극단적 환상이 지속되어 편견의 역사를 만들고 그릇된 독단은 확실성이 된다.

 

멀쩡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이러한 사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프로이트는 이렇게 환상에 맹목적으로 심취한 독일인의 정신과 섹슈얼리티의 발달에 대한 거대 서사를 고대 그리스 비극작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시대의 대유행에 따르는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이 탁월한 지성은 오이디푸스에서 자신의 태생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탐구해나가는 그 고통스럽고 집요한 자아탐색이 독일인들과 쌍둥이처럼 닮았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이 유대계 독일인은 국가주의적 열정이 절정에 이른 독일인들의 민족적 가족사에 욕망과 폭력이 얽힌 추악한 비밀을 폭로하기로 한다. 그리스에 순수하고 순결한 기원을 두고 있다는 독일 국가 신화를 위협하는 망측한 진실을 드러낸 것이다.

 

독일인들의 정체성에 심각한 도전을 한 것이다. 날조된 독일인들의 순혈주의와 국가주의적 신화를 깨뜨림은 물론 이 똑똑한 천재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최신 유행하는 그리스 고전이 갖는 위상, 즉 그 권위를 올라타기 위한 전략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 꾀바름은 곧바로 권위를 지닌 이론으로 격상된다. 프로이트는 독일인들의 그리스 열광을 고의로 이용한 것이었다. 프로이트가 왜 오이디푸스를 자신의 이론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는가의 배경까지 더듬어보았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의 의식과 독일 사회의 국가주의적 신화를 깨부수는 이름의 배경과 더불어 그 토대로서 오늘의 우리들에게 이것들이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이르렀다.

 

3.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이 말하려는 것 ; 앎의 불가능성

 

앞서 언급했지만 그리스 비극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기반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의도된 연극이라고 했다. 영국 케임브리지그리스고전문학 교수를 지낸 사이먼 골드힐은 그의 역작 Love, Sex and Tragedy에서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Oidipous)라는 말로 말장난을 하였다고 쓰고 있다. ‘나는 안다라는 뜻을 가진 oida라는 말과 어디라는 의미인 pou를 조합하여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이름은 나는 어디인지 안다라고 외치는 것이라고, 이 분열적 말놀이를 통해 앎에 대한 매혹과 은폐와 폭로에서 하나의 전기를 맞게 하려한 것이라고 해독하고 있다.

 

오이디푸스 왕은 단순히 근친상간이나 오인된 정체성에 관한 슬픈 이야기에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포클레스가 그 이름에서 말장난을 하였듯, ‘너는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하도록 이끄는 것이 바로 소포클레스의 의도이자 공연행사에 부합하는 주제였다. 이 극이 정체성 문제와 관련해서 보여주는 통찰에 주목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이 비극을 읽어본 사람들은 극 전체에 걸쳐 끊임없이 너는 어디서 왔는가?’ 라는 물음이 울려 퍼지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나쁘거나 타락한 사람이 아니다. 지적이고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며, 주변 상황의 통제를 위해 자신이 지닌 온갖 수완을 사용하여 운명에 투쟁하는 인간이다.

 

자기 삶의 방향을 통제하려고 애쓰지만 운명 또는 우연이라 불리는 다른 힘들이 그를 다른 길로 이끈다. 자기 삶의 이야기의 통제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지만 그것은 철저한 자기 삶의 파괴, 삶의 실패로 귀결된다. 이 비극은 인간 삶에 대한 인간의 통제 실패, 다시 말해 자기 삶의 이야기이기를 분명하게 직시하여 적절히 보지 못하는 무능함을 가리킨다. 우리들 모든 인간은 오이디푸스와 같이 자기 삶을 통제하려고 하기에 오이디푸스를 바라보는 우리들은 자극 혹은 충격을 받게 되고, 자신들의 삶에서 적절한 자기 의문을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을 한 남자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잠자리를 했음을 알게 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비극이라고 여기지만, 이 극의 진짜 충격적인 목소리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누구인지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야말로 가장 자기기만의 참극을 초래하기 쉬운 순간임을 끈질기고 불안할 정도로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 극한의 비극성이 있다.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의 해독자이자 문제해결사이며 앎의 추구자이다. 그리고 성공을 거둠에도 그럴수록 점점 더 불운한 자기파멸을 향해 나간다. 다시 말해 이것이 비극인 것은 인간이 자신이 알고자 하는 욕구와 답을 찾는 능력을 훼손시켜 놓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 비극의 중추골조는 한 인간의 혈연의 관계망이 뒤엎어지면서 그 관계망이 뒤죽박죽이 되어 찢어발겨지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내이기에 오이디푸스의 아이들은 그의 형제이거나 자매이기도 하다. 자아를 규정하는 통상의 언어가, 근친상간에서는 내파(內波)하는 것이다. 여기서 작동할 수 있는 범주는 아무것도 없다. 오이디푸스에게 자신의 기원을 안다는 것은 세계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상실하고, 가족 가치가 붕괴되는 전조일 뿐이다. 잘 안다고,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미 불행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어느 길을 가야 하는지 잘 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프로이트는 어쩌면 이러한 앎의 진실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오이디푸스를 선택한 것은 결과론적이지만 정말 매우 통찰력 있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이디푸스로부터 독일인과 그네들 사회의 순혈주의와 국가주의적 망상이 초래할 자기파멸을 보았던 것일 게다.

 

4. 결어 ; 범국민적 자기비판의 공통감각은 불가능한 것인가

 

오늘 한국 사회의 모든 개인, 사회, 정치적 수행에 있어서 갈등과 반목은 앎에 대한 그릇된 확신에서 초래되는 것이라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배에 대한 오만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오인은 지금 벌어지는 이 세계의 모든 비극의 원인이라 해도 될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바로 지금 여기에대한 적절한 인식을 형성하는 지에 대해 안다는 것, 이러한 앎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시도가 야기하는 불행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 비극을 오늘날에는 소설과 시 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 분야가 대신하고 있지만 우리 자신이게 하는 과거와 그 파묻혀 있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그리스 비극공연처럼 그 감정적 연대적 자기비판을 공유하게 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있다.

 

오늘에도 대단히 매혹적이고 독자(관객)로 하여금 한 인간의 자멸을 공포감에 차서 바라보게 함으로서 내가, 우리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에 대해 고통스러운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이 비극 작품은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데 필수적 역할을 하는 말들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한 뜻 깊은 의미를 열어놓는다. 오만해지고 부패하는 인간의 삶에 대해 그 앎의 경계를 두려울 만큼 읊어대는 이 비극은 인간 앎의 궁극적 불가능성에 대한 비통함을 상기시킨다. 내 날 것의 마음을 보려는, 생의 통제력을 지니려고 시도하는 내 교만이 이 비극 작품과 그 역사적 배경을 더듬게 했다.

 

독일인들은 그렇게 그리스 문화를 자신들의 고향이라고 열렬히 떠들면서도 오이디푸스의 비극의 본질을 알지 못했다는 점은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프로이트가 이들의 환상을 깨부수려 하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도 이러한 비극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만 같다. 자기 성찰 없는 인간들이 너무도 날뛰고 있다. 이러한 비극 작품을 모든 국민이 관객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획은 불가능한 것일까? 공통의 자기비판이라는 감각적 유대를 지닐 수 있는 방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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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과 더불어 사이먼 골드힐의 Love, Sex and Tragdy(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임을 밝힙니다. 자기 삶의 이야기를 통제한다고 생각하는 우리 인간의 오만이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비통한 앎의 불가능성이 점점 더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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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마음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57
김복희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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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에게서 존경받을 만한 데를 전혀 찾을 수 없다니,

이렇게 작다니, 커지지 않아도 된다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야콥 폰 군텐 이야기에서


시(詩)의 시대가 사라져버린 것 같은 시대라고들 말하지만 사실 시는 사라져버린 적도 없고, 사라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시를 읽기에 적절한 시대가 아니게 되었을 뿐일 게다. 시 비평가이기도 한 조연정 시인은 『시 보다 2025』에 실린 「보조 영혼」, 「요정의 마당」 등 김복희 시인의 시를 말하는 문장 속에서 “회한에 얽매이고 불행에 저당 잡혀 조금은 위축된 마음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삶을 들여다보는, 그 삶의 표면과 속살을 샅샅이 눈으로 생각으로 매만지며 관찰하여야만 하는 시 읽기는 더욱 곤혹스러운 것이기 때문일 터이다. 그래서 삶 자체인 시는 더욱 읽어야 할 시대의 언어라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시의 본질 상 도래할 언어의 순간에 먼저 도착해 사람들을 기다리는 언어이고, 동시대의 감각을 발명하는 것이기에 그 낯선 감각이 사람들의 접근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 까닭일 것이다. 바로 그 고민 하는 시간을 참을 수 없도록 몰아세우는 것이 이 시대의 실상이라는 점이 시의 시대가 사라져버렸다는 곤란의 변()일 것이다. 김복희 시인의 시는 바로 이러한 오늘의 우리들에게 시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그러한 시를 읽는 영혼들에 마음의 양식을 함께 고양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다가온다. 시인의 시에는 귀신, 요정, 소인(小人), 새와 같은 작은 것들, 비인간 존재들이 도처에서 출몰한다. 이를 문학비평가 강동호 교수는 작은 것의 큼을 드러내며 존재와 삶의 역설과 아이러니를 발견하는 미묘한 기쁨으로 충만하여, 결코 단일한 의미로 단순화될 수 없는 세계의 다차원성과 그 뜻밖의 광활함을 마주하게 된다고 김복희 시인의 시작(詩作)들을 말한다.

 

또한 이 시집의 발문을 쓴 임유영 시인은 말의 몸집을 끝없이 부풀리는 언어, 그렇게 커진 말을 뒤집어 까서 이것들 속에 축적된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김복희 시인의 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마음을 시인은 생 마음에서 백지에 놓기 위해 백지부터 만들기로 한다. 그때 그 재료인 필요한 것으로 티끌 없는 오전 / 진솔 속옷 진솔 양말 / 온갖 말 가르쳐준 이들 /생각처럼 들어와 / 피도 땀도 함께 흘려주는 것 이라고 한다.

 

........(前略)

내 피 내 땀

스미는 것

 

백지에

 

생 마음은 독한 것이군

 

백지를 가리키며

말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넌지시 보여줄 수도 있으리라

생 마음은 독하지만 정한 것이라고

 

- 생 마음, 생 마음60~61쪽에서

 

나는 이 시를 통해 내가 알지 못하는 도래하고 있거나 도래하는 낯선 감각의 언어를 배운다. 그래서 익히 알고 있는 계절의 바뀜을 뜻하는 환절(換節)’ 짧지만 강렬하게 느껴지는 기묘한 상태라는 새로운 감각을 내 몸에 기입한다. 그리고 시 속 작은 것들 - , 요정, 소인 - 인 이 젊은 시어들을 이해하기 위해 시인이 발표했던 새 입장속 시구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대한민국에 사는 희망은 키가 작다. 발이 작다. 손이 작

. 그래도 성인용 속옷을 입는다. 어느 날 희망은 자신의

몸이 커졌다 생각했다. 희망이 발을 쿵 구르자 현관 계단

이 와르르 무너졌기 때문에, 희망은 드디어 내가 소인국

에 왔군 올 곳에 오고야 말았어 흥분했다.

 

.............(中略)

 

더 커질 것을 알기에 더 커져도 되는 곳, 희망에게

작은 손 작은 발의 소인들 더 작아져도 되는 곳,

희망에게

- 새 입장, 보조 영혼, 110쪽에서

 

대한민국의 희망이 스스로 커졌다는 망상에 잠기자 현관 계단이 와르르 무너진다. 이 역설적 장면은 그것이 망상임을 자각하게도 하지만 바로 이 자각으로 그 작음을 인식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가능성, 희망은 더 작아져도 되는 희망이 된다. 시인의 언어에는 그 어떤 윤리적 잣대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있는 사실 그대로에서 지금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가볍게 날아오르는 듯하다. 그것은 샅샅이 관찰하는 것, 작은 상대라도 더 유심히 살피는 감각 그것일 게다.

 


장시(長詩)라고 할까, 우화라고 할까, 아무튼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옛 이야기도 있는데, 그 제목 또한 여느 시처럼 기묘하다. 환절, 호랑이 사람으로 / 돌아오지 못하는 기록이다.

 

...........(前略)

 

저는 환절기가 되면, , 내가 호랑이 되어 개 백 마리를 죽일 결심하고, 마침내 고민 없이 아흔아홉 마리를 죽이고 사람도 죽인 호랑이 되어 이제 다시 사람 될 길 없겠네. (...) 매일매일 내 기분 내 심정 내 상황 내 허기, 호랑이 고개 넘듯 뛰어넘고 싶어집니다. (中略) 뉘우침 없이 내 서러운 것만 생각할까요. 기구하다 하며 아득해 할까요. 그럴 수 없기에 짧은 틈을 놓치지 않으려 배를 깔고 엎드려봅니다.

- 환절, 호랑이 사람으로 / 돌아오지 못하는 기록, 생 마음, 69~79쪽에서

 

나라를 온통 자신의 허기 채우기 놀음으로 구렁텅이로 몰아넣던 인간이 떠오른다. 배를 깔고 엎드려 그 인간은 그 강렬하고 짧은 환절의 시간에 과연 제 서러움만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 괘씸한 생각이 내 마음을 더럽힌다. 아 털어내고 날 것의 내 마음, 생 마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참으로 삶이란 아쉬움투성이 같다. 시와 시의 제목이 마치 선문답처럼 대조를 이루는 몇몇 시들은 그 자체로 낯설어 힘겹게 읽어가는 독자에게 신선한 재미도 불러일으키는데, 춘향이 집 가리키기, 목마른 송아지 우물 들여다보듯과 같은 시들은 잘 알려진 관용적 의미를 앞세워 읽어나가며 시어의 감각을 학습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前略)

 

잠들어 깨어났다

모르는 여자 남자가 우리 딸 왜 벌써 일어났느냐고

목마르냐고 차가운 물 한 사발을 내밀었다

찰랑찰랑 물 코 닿을 듯 들여다보았으나

묘하게 닿지 않는 것이었다

- 목마른 송아지 우물 들여다보듯, 생 마음, 30쪽에서

 

잠결에 마주한 낯선 상황에서 닿을 듯 닿지 않는 골똘한 생각 끝에도 해결되지 않는 그 안타까운 우리네 현실의 많은 실재들을 생각게 된다. 이왕 이 낯선 감각의 언어들과 정직하게 대면하기로 마음먹은 것이기 때문이겠지만 시를 배우겠다고 찾아간 요정에게 시의 화자(話者)를 쓰는 법부터 가르치고, 요정은 “‘를 향해 / 멀리 돌아가는 시를 쓴다 그리곤 요정은 시에 외롭다는 말을 없애는 법을 알려달라고 한다. 그때 화자는 요정의 시에/ 손대지 않고/ 요정의 앉을 자리를 정돈해둔다. 보이지 않는, 아니 미력한 존재를 위한 환대의 모습, 아마 시를 읽는 독자들을 위한 넉넉한 품일 것이다.

 

모기가 앉은 작은 토끼를 돕는다고 찰싹 휘두르는 곰의 친절(곰의 친절, 130)은 그 약자를 죽인다. 강자의 몰이해에 천착한 친절이란 곧 무지의 폭력이기 십상일 것이다. 이렇게 민담, 민요나 속담을 인용할 때 시인의 시는 임유영 시인의 말처럼 인간의 마음들에 대한 까발림으로 다가온다. 지금 바로 여기와의 연루됨을 잃지 않는 예리한 시선과 더불어 작은 것들에 대한 연민과 회한이 찌든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이 되었다. 시인의 시집이 어쩌면 소원해졌던 시에 대한 감각을 다지는 전환이 되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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