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어떤 새로운 현상에 대한 사실을 자신의 앎으로 인지하고 그로인한 반응에 적합한 행동을 취하는 것은 전혀 별개라는 것은 정말 인간만이 지닌 기괴함이 아닐 수 없다. 여타 동물은 자신에게 위협될 만한 어떤 사태가 발생하면 예외 없이 그에 따른 행동(반작용)을 취한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인간, 특히 자신이 특권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자들일수록 명백하고도 자명한 사실이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여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양상을 보이지만 그 정도는 권력의 정도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것도 기이한 현상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기 예외적 태도를 눈여겨 본 사람들은 예전에도 있었겠지만, 오늘날 이러한 실태는 우리들의 일상적 언행에서 매우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다.

 

너무도 명백한 사실 앞에서 그 사실에 대해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라며, 마치 복잡하고 미묘한 무엇이 있어 그것들을 샅샅이 검증해야 그 명백한 사실이 확정된다는 듯 주장하며, 당면한 사실을 상대화시켜버리는 것이다. 바로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하고 선관위 등 사법기구를 점탈하는 상황이 실시간으로 TV화면으로 송출되었는데도 상황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라고, 문제의 본질을 모호한 상대적 사실로 전락시키고는 폭력행위를 방어행위로 둔갑시켜버린다.

 

우리 인간은 이러한 양상에 대해서 기록으로 남겨왔다. 문학, 철학, 역사 등등에서 후각이 발달한 소설가, 철학자, 사가()들은 이 자명한 것을 복잡하고 모호하게 표현하는 사람들로부터 불온하고 구린내 나는 범죄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명언이 출현했다.

 

우리는 명백한 것의 힘을 절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어쨌거나 이 자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서의 행동(조치)에 나서지 않을 뿐 아니라, 만연한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무감각, 무반응, 무저항, ()행동, 나아가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을 옹호하거나, 둔갑한, 즉 왜곡된 사실에 동조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 자명한 사실, 혹은 범죄의 사실은 오리무중의 교착 상태에 빠지고, 방향을 상실하며 사회적 혼돈을 낳는다. 물론 이렇게 사실을 상대화하는 자들이 노리는 사태가 바로 이러한 혼란으로서의 사회적 무능력의 생산임을 말해 무엇 할까.


영화돈 룩업! Don't Look Up!에서 비지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메릴 스트립-출처 Netflix

 

아담 맥케이 감독의 2021년 블랙코미디로 범주화할 수 있는 영화 돈 룩업! Don't Look Up!은 이렇게 명백한 것을 자신들만은 회피할 수 있다고, 그 자명한 사실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인간 군상들을 묘사한다. 이것을 조금 현학적인 개념어로 비지식(non-knowledge)’이라고 부른다. 알지만 진심으로 믿지 않거나 자신과는 무관한 타자의 앎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을 지칭한다. 영화에서 대통령으로 연기하는 메릴 스트립은 혜성의 궤도가 지구와 충돌하는 것임을 알았는데에도 불구하고 혜성이 지구에 떨어지면 슈퍼볼 경기는 안 열리겠네?” 라고 지구의 생명체가 모두 사라져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위험도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가히 어처구니없으며, 천연덕스러운 질문을 한다. 자신의 질문이 종말적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것처럼 말이다.

 

영화 속 방송 앵커들 또한 혜성의 지구 충돌이 자신들의 세계와는 무관한 듯 웃고 떠들어댄다. 자명한 사실은 그저 자명할 뿐이다. 그 명백한 위험 앞에 누가 온전하겠는가? 영화는 허구 아니냐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을게다. 그렇지 않다. 불과 몇 년 전 지구촌을 온통 휩쓴 코로나19의 방역에 모든 인류가 참여해야 했음에도, 당시 영국의 총리 보리스 존슨은 그 위험이 자신에는 해당하지 않는 다고 여겼다. 결국 그는 위중한 상태에 빠져 요단강 근처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돌아왔다. 이것을 어리석음이라고 간단히 치부하면 인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모든 사람들을 안다고 가정(假定)된 주체로 이해하지만, 단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와 얘기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지난 3년 남짓한 검찰 독재 정권에서 각종 재해가 줄줄이 발생하고,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그 명백한 사실, 조금 완곡하게 표현해서 예측 가능한 사실을 무시하거나 무관심으로 외면함으로써 재난을 고스란히 재앙으로 만드는 꼴을 보았다. 재앙이 임박하고 있음에도 시장, 도지사가 현장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고, 그리곤 재난은 으레 재앙을 몰고 오는 것이기에 자신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대통령부터 책임 주무처 장관인 행자부 장관, 도지사. 시장, 군수, 그리고 관련 기관의 책임자들은 책임을 회피했으며, 남의 탓이고, 오히려 문제를 상대화시키고는, 야당과 비판적 언론을 향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한다며 매도하기까지 했다.

 

알지만 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거야...’라고 말하는 인간들은 정말 반사회적 인간들이거나, 그 사실에 대한 의미를 정작 알지 못한 인간들이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순진하게만 이해하는 것도 문제인 것이, 이러한 태도들에 상대화라는 속임 술책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 개, 돼지인 시민의 안위에 관심을 갖기 싫은 것뿐이다. 때문에 이들은 재앙의 도래를 알고 있었으며, 다만 사태의 책임으로부터 달아나는 전술로써 알지만 믿지 않는 척하는 술수를 사용 한 것이다. 지금 이 사회의 상부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자들인 법관, 검사, 각 부처의 고위관료들의 행태가 이러한 실상을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이 자들은 자명함에다 빈번하게 모호하고 복잡성이 있어 보이는 것처럼 명백한 사실이 아니라고 상대화하고는, 이어서 그 자명함을 뒤엎어 버린다. 이 자들에게는 오로지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앎이 실효적이기 때문이다. 비지식이 기득권의 책임 회피이자, 진실의 무력화 전술인 것은 그리 새로운 인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알지만,...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겠다는 말에 대해 지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다시금 기억의 상부에 떠올려 놓아야 할 것이다. 불법 계엄인 것은 알지만, 그것을 위헌적이고 불법행위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이 돈 룩업! Don't Look Up!을 관람하며 낄낄거리는 희극 장면은 과연 가관일 것이다.

 

관점을 조금 변경하여, 이 명백한 것을 보고는 우리들은 간혹 그 명백함으로 인해 소홀히 취급하곤 한다. 설마 저렇게 자명한데 거기에 무슨 사건적 진실이나 위험, 범죄가 있겠어? 라고 의심을 차단해버린다. 그런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 하는 인간들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특히 정치의 영역에서는 부정한 짓을 하고는 그 의심하게 만드는 단서를 의도적으로 명료하게 만들어 마치 그 사실의 명백성으로 인해 범죄적 요소가 없는 것처럼 연출한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속임수요, 범죄의 단서이기 일쑤다.

 

이와 반대로 의도적으로 어떤 사태를 포장하여 마치 은밀히 숨겨진 것을 가리키는 제스처를 쓰지만, 정작 그 이면에서는 저지른 범죄를 은폐하는 짓거리가 무수히 벌어진다. 이 두 종류의 속임수를 이중적 신비화 전술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점에서 이중적 신비화는 비지식의 행동과 그 본질이 같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할로 저택의 비극은 인위적으로 연출된 것처럼 보이는 지점이 바로 단서 그 자체임을, 의심하게 만드는 단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실제 행동을 감추는 이중적 신비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바로 알지만 진심으로 믿지 않는 인간의 심리적 속성을 역으로 이용하는 것인데, 이 교활한 술책이 지난 3년의 검찰 독재 권력이 매우 빈번하게 사용한 추악한 방법이다. 검찰이 마약과의 전쟁을 구호로 외칠 때, 대규모 마약사범은 유유히 세관을 통과했으며, 페이퍼 컴퍼니에 국가 석유자원 시추 사업권을 불하하는 행위들이 모두 이러한 이중적 신비화의 속임수의 한 형태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런 것이다. 왜 명약관화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동하지 않는가이다. 지금 바로 우리의 눈앞에 내란 세력들,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 이것들을 비호함으로써 기득권을 향유하는 세력들이 무도함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자명한 불의에 특정 지역의 군상들은 결단코 움직이지 않거나, 그 명료한 사실을 상대화, 무력화한 집단에 붙어 요지부동이다. 왜 그럴까? 그 은폐된, 속임수로 가려진 것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인데, 바로 강제된 자유를 자신들의 자유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지배하는 강제, 저항의 상대가 없는 까닭이다. 강제하는 상대가 없다고 여기기에 애초에 그들은 저항의 생각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과 다름, 타자들은 부정한 것이고, 그래서 타자는 말끔히 배제시켜야 할 대상일 뿐이기에 그들에게는 무조건의 긍정만이 있기 때문이다. 긍정성의 과잉에 흠뻑 젖어있다. 긍정성과잉은 곧 폭력의 산실이라고 슬라보예 지젝은 Freedom; A Disease Without Cure에서 역설한다. 지금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두르며 비지식을 과시하는 저열한 것들의 행태나 반도 동남지역 군상들의 행태가 폭력성과 혼돈의 양태를 보이는 이유이다.

 

나는 알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 비지식의 행태와 이의 유사양식인 이중 신비화의 위선이 이 사회의 정의와 도덕성, 그리고 진실을 방해하거나 후퇴시키고 있다. 이제 대선이 막바지에 들어섰다. 새로운 정상국가의 과정을 위해서 우리 모두는 모든 상황을 총체적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국면에 진입했다. 철저한 대개혁, 대수술을 통해 이 사회의 단물을 70여 년 간 독식하며 건강한 시민들을 병들게 했던 암세포를 확실히 도려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손상된 마음과 신체가 다시금 활력을 되찾는 선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선거가 끝나고 환희의 마음으로 이 글을 다시 다른 마음의 시선으로 읽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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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시인 워즈워스는 시집 서곡에서 수학을 논리적 아름다움의 시()라며 다음과 같이 썼다.

 

매혹적인 힘 / 마음을 괴롭히는 추상적인 생각 중에서 / 그 심성과 함께, 그래서 혼자 번민에 휩싸여도/ 내게는 특별한 기쁨이 되네 / 높게 세워진 그 명확한 통합 / 아주 우아하게 / 독립된 세계 / 순수한 지성이 빚어낸 세계라고.

 

물론 이 서양의 시인은 그네들 고전시의 전통인 압운과 운율, 강약격 등 제약의 이면에 있는 세기와 패턴을 노래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렇지만 과연 모든 문학작품들에 이러한 수학적 제약 자체가 작품의 예술성과 공존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웬걸, 정말 우아하고 빛나는 서사 문학들,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소설들이 그러한 수학적 구조를 기초로 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제약이 오히려 해당 작품들의 줄거리와 주제와 조응하며 더욱 우아하고 친밀함을 품고 있음에 조금 놀랍기도 했다. 물론 울리포(OULIPO;Ouvoir de Literature Potientiel)’로 알려진 잠재문학 작업실 정도로 해석되는 문학 그룹이 1960년대에 이미 활약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 앎이란 그야말로 겉핥기식 지식에 머물러 있었다.

 

역주행 작으로 국내에 잠깐의 선풍을 일으켰던 에이모 토올스모스크바의 신사, 최연소 부커상 수상자로 알려진 천재 작가 앨리너 캐턴루미너리스, ‘얀 마텔라이프 오브 파이는 신선한 발견이 되었다. 이들 작품이 정교한 수학적 틀에 세워져 그야말로 그 구조가 곧 작품의 주제와 긴밀하게 융합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림으로써 워즈워스의 말이 진실을 얼마만큼 함축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물론 나만의 수용이고 취향이니 이미 사자(死者)인 워즈워스가 불쾌해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울리포의 회원인 자크 루보가 설정한 수칙이란 것이 있다. 주어진 제약 조건 내에서 쓰인 텍스트는 어떤 식으로든 그 조건을 언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기교는 구조와 서사, 줄거리, 행위의 개념에 대한 자극제로 적극 사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부커상 심사위원들은 앨리너 캐턴의 루미너리스를 눈이 부시는 작품이라며, 제멋대로 뻗어 나가지 않았음에도 광대하다.”고 평가했다. 수학적 구조라는 틀의 제약 속에서 오히려 광대했다는 말이니 이 작품의 독특한 매력에 혹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은 구조와 서사가 별개가 아니라 줄거리와 전개가 일맥상통하며, 구조적 질서가 곧 서사적 긴장에 연결되고, 서사의 중심이 무엇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자연스럽게 가리킨다. 작품의 각 장은 특정 개수의 단락으로 나뉘며, 장 번호와 단락 수를 더하면 모두 13이 된다. 따라서 1장은 12개 단락, 2장은 11개 단락 .....마지막 장은 오직 1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각 장은 앞 장 길이의 딱 절반 길이여서, 등비가 1/2인 즉, 1, ½, ¼, ,.....로 이어지는 등비수열 구조를 하고 있다. 더구나 이 등비수열의 합인 책의 총길이를 구하면 2L(1-1/4096)로 표현할 수 있는데, 소설 속 도난당한 금괴 4,096파운드와 일치한다. 작가는 이 독특한 안으로 파고드는 나선구조를 통해 긴장의 조절을 내재시키고, 진정한 중심이 마지막 장임을 암시한다. 에이모 토올스가 말한 것처럼 구조는 예술적 창작에 매우 중요한 것일 수 있다.....규칙 안에서 새롭고 다른 것을 발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소설의 구조도 같은 역할을 맡을 수 있음을 시대의 걸작을 통해 확인하는 기쁨을 만끽하게 되었다.

 

에이모 토올스의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었지만 나는 이 작품이 수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전혀 깨닫지 못했었다. 호텔에 종신연금형을 받고 32년 동안 갇혀 지내던 로스토프 백작의 삶의 이야기정도로 기억되지만, 그 이야기 속 32년이라는 가택연금 기간이나, 이것이 2의 거듭제곱 2과 연관되어있음은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 3225제곱이다. 가택연금이 시작된 1922621일로부터 소설의 주요 사건일로 반복되는 621일을 기점으로 주기가 2, 4, 8, 16년으로 길어지다 1938621일 절반지점에서 선회하여 8, 4, 2년으로 주기가 대칭으로 감소한다. 반환점을 돌자 시간을 빨리 진행시킴으로써 흥미의 이탈을 제어한다. 이 구조와 관련하여 몇 가지 독자의 흥미를 돋우는 이야기들은 눈 밝은 독자들을 위해 남겨두기로 한다.

 

커트 보니것의 소설의 세 구조, 새라 하트, 서사의 기하학73쪽에서

 

5도살장으로 잘 알려진 커트 보니것은 그래프를 통하여 서사의 특징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아마 많은 소설작품들이 그의 세 분류에 포함될 듯하다. 그것은 사랑(행복)불행행복구조와 불행-행복-재앙-행복’, 그리고 모멸(불행)-비관적 결말(불행)’이라는 구분이다. 그는 오만과 편견》과 같은 로맨스 소설이 첫 번째 구조의 특징을 보인다고 설명하고, 두 번째는 대개의 신데렐라부류의 동화작품들이 포함된다고 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소위 부조리 작품으로 칭하는 카프카의 변신이나 카뮈의 페스트같은 작품들이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그럴듯한 단순 구조의 설명이어서 기억해 둘만하다.

 

이러한 소설 구조에 대한 그래프 표현은 로런스 스턴의 터무니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작품 트리스트럼 섄디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 소설은 자서전을 쓰기로 결심했지만 지나치게 많은 탈선과 분위기 전환으로 주제가 옆길로 새버려 좌절하기 일쑤인 작품이다. 때문에 주인공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는 3권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겨우 등장한다. 그는 6권이 끝날 무렵인 40장에 이르러 1권에서 5권까지의 자신의 서사를 선 그래프로 그려놓는다. 그래프들 아래로 설명을 달아놓고 있는데, 그 유치한 변명이나 낙관적 태도는 웃음이 슬며시 비어져 나왔던 것을 기억하게 된다. 아무튼 괴짜들의 그 유치찬란함은 기원이 아주 오래된 것일 게다.

 

로런스 스턴,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6-40에서

 

울리포를 대표하는 작가 조르주 페렉을 제외하고서 수학적 구조를 지닌 소설을 말한다는 것은 아무렴 중대한 실수가 될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인생 사용법은 이중방진, 다른 이름으로 라틴 방진구조를 하고 있다. ‘10X10’, 주인공인 괴짜 영국인 바틀부스가 100개의 방이 있는 건물을 중복 없이 다 둘러보는 데 실패하는 이야기다. 따라서 이 책은 100장이 아니라 99장에 머물고 만다. 지하실 방 하나가 빠진 것이다. 페렉은 구성 및 모든 방을 둘러보는 데 실패한 이유를 기술을 하고 있는데 그것 또한 걸작이다. 그 내용을 발설하는 것은 범죄가 될지도 몰라 여기서 기술하는 어리석음은 피하도록 하겠다. 직접 읽어보시라. 그리고 확인하는 즐거움을 만끽하시길 바란다.

 

조르주 페렉은 특정 글자를 금지하여 텍스트를 쓰는 리포그램 소설도 발표했는데, 프랑스어에서 제일 사용빈도가 높은 ‘e'의 사용을 금지한 실종이란 작품이다. 이 소설은 아주 오만하기 그지없는 예상 표절이라는 말을 아마 최초로 사용했을 것 같은데, 1939년에 발표된 어니스트 V. 라이트가 쓴 소설 개즈비Gadsby30년이나 후에 쓴 자신의 작품 실종을 예상 표절했다니 가히 하늘을 찌르는 교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이는 앞서 설명한 주어진 제약의 수칙을 철저하게 따른 전범이라 할 수 있다. e의 사용 금지가 소설의 구조와 서사, 행위 개념과 밀접하고도 타당한 이유로 소설에 드러나야 한다는 것인데, e의 부재는 정말 가슴 아픈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pere(아버지), mere(어머니), famille(가족), 자신의 이름인 Georges Perec 조차 사용할 수 없었는데, 2차 대전에 참전에서 사망한 아버지와 홀로코스트에 의해 살해된 어머니의 부재라는 통렬한 아픔의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즉 실존적 공백이라는 개인적 아픔을 가리키고 있었음이다. 울리포에 뒤늦게 합류했던 이탈로 칼비노의 국내에 잘 알려진 작품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눈치 채지 못했던 구조의 발견도 흥미롭다.

 

사실 칼비노가 소설 속 쿠빌라이 칸의 입을 빌려 소설구조를 암시하고 있었음에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구조의 설명을 아마 건성으로, 아마 소설 내용상의 어떤 상징적 의미정도로 지나쳤을 것이 분명하다.

 

나의 제국은 결정체로 이루어져 있고, 그 분자들은 완벽한 패턴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원소들이 솟구치는 화려하고 단단한 다이아몬드 모양을 이루지요.”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목차, 숫자는 도시 유형 번호

 

그래 맞다. 소설의 구조는 다이아몬드 구조를 하고 있다. 여기 발췌된 목록 사진의 형태를 보면 그것의 모양이 드러난다. 9장으로 이루어져 각 도시를 특정 유형으로 구분하고 다시 번호를 매겨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이제야 아하! 하고 알아차렸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수와 장의 수를 더하면 체스판의 정사각형 개수 64가 나오고 그것에 또한 의미가 있음은 독자들의 몫이다. 소설의 8장을 읽으며 게임을 즐겨보시라. 끝으로 소설의 구조와는 조금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얀 마텔의 라이프 오브 파이, 무리수 π가 상징하는 깔끔할 수 없는 우리네 인생의 상징은 명확한 결말을 원하는 소망을 빗겨나간다.

 

그런데, 주인공 파이 파텔은 뒤죽박죽인 내 이야기를 정확히 딱 100장으로 말해 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인생에서 일을 알맞게 마무리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가 바다에 표류한 시간은 정확하게 227일이다. 이것은 22/7로 무리수 π의 근사치로 유리수다. 그는 무리수를 유리수로 만듦으로써(π≒22/7) 소망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 깜찍한 상징적 장치다.

 

무리수, 이 무한한 수를 말하면 호르헤 보르헤스의 그 유명한, 가능한 모든 책이 있는 무한수로 된 육각형의 진열실로 이루어진 우주의 도서관, 모든 방향으로 무한히 계속되는, 즉 끝에 도달하지 않고 무한히 위, 아래, 좌로, 우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함과 동시에 유한해야 하는 도서관의 이야기인 바벨의 도서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도서관의 이미지를 좀처럼 그리지 못했었다. 유한하지만 끝이 없는 입체구조, 이 모순으로 가득해 보이는 우주 도서관은 4차원 구()3차원 표면에 존재하는 것으로 상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4차원의 이미지를 좀처럼 그릴 수 없는 나는 옛날 게임기 화면, 우주로켓들이 오른 쪽으로 사라졌다 왼쪽에서 나타나는 게임 이미지를 통해 비로소 어설프게나마 근접해 이해하게 되었다. 도넛 모양의 입체 원형 구조를 상상하면 아마 비슷한 이미지가 되지 않을까?

 

서사문학에 대한 이 새로운 구조적 접근의 시도로 이루어진 작품들의 세계는 사실 무진장하다. 독자나 관객과의 쌍방향 대화를 반영하여 만들어진 소설이나 희곡들도 있다. 다음에 일어날 일을 독자가 결정하게 만든 소설이나 희곡이다. 일명 극장 나무 구조라고 부른다. 많은 이야기가 별개로 작성되어야 하기에 이를 최소화하며 서사적 재미를 잃지 않게 대수적 계산에 의해 산출된 최소화된 이야기 수량에 의존한 서사구조 기법이다. 아무튼 이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조금은 보다 선명하고 명쾌한 우아함이 없는 아쉬움에 씁쓸하기만 하다. 잠시 달아오른 머리를 식힐 겸 이들 소설을 다시 혹은 새롭게 펼쳐 읽으며 이 무도함의 세계를 탈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일시적이어서 돌아와 울퉁불퉁, 전혀 아름답지 않은 세상을 다시 대면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  글은 런던 버크벡 칼리지 수학과 교수 새라 하트(Sarah Hart)가 쓴 Once Upon a Prime; The wondrous connections between mathematics and literature를 토대로 작성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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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의 역사를 말하는 책들을 읽다보면 역사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모멘트들을 발견하게 된다. 항시 무엇인가를 지키고자 하는, 또는 불변하는 정상(正常)이라 일컫는 것에서는 예외없이 반작용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발자크가 말했던가,  생리학은 병리학을 통해서 새로워지고 발전한다고. 세계에 병리적 현실이 켜켜이 쌓이기 시작할 때 역사는 새로 쓰기를 시작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작금의 한국사회 현실은 바로 이러한 역사교체의 적절한 하나의 보기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은 한 점의 회화, 1812년 프랑스 화가 제리코가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 권력층의 충동적 본능과 야망이 낳은 비이성적 욕망의 극단에 대한 폭로이자 비판이었다.

 

나는 여기서 역사 교체 분수령이 되는 세칭 말세(末世) 현상을 읽었는데, 아마 21세기 현재의 한국 사회는 물론 세계의 정치와 경제, 문화사회의 주소가 이와 다르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침 인간의 탐욕이 자초한 종말의 세계에 기술과학주의에 의해 가공된 기만적인 허구의 세계를 축조하고 제한없는 분노와 증언으로 오직 파괴와 죽음만이 실존을 가능케 하는 세계, 모데란을 읽고 있었다.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고, 생명의 참을 수 없는 충동적 표출이 가져온 파멸의 비극적 서사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반복되는 순환인 것처럼 여겨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선악의 논쟁 따윈 이미 무의미한 언설이 되고, 오직 실존에 대한 사고 실험으로 일관한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이러한 폭력적 잔인성에 의존해야 하는 세계가 지금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바로 그 세계라고 말하는 듯하다.

 

출처: 이광래 , 미술 철학사 1, 도판118,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9


제리코호의 뗏목은 모래톱에 좌초한 프리깃함의 선원을 모두 태울 구명보트가 부족해 선상에 있는 나뭇조각으로 뗏목을 만들어 보트에 밧줄로 연결하고, 그것에 149명을 태운 것이다. 뗏목으로 인해 보트가 나아가지 못하자 밧줄을 끊어 뗏목 위의 149명은 표류하게 되었고. 구조되기까지 단 7일 만에 악의에 찬 동료 선원의 살해와 식인의 야수성으로 단 15명만이 살아있었다는 충격적 사건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공포와 절망, 그리고 광기로 채워진 그림은 당대의 난파된 인간성의 적나라한 폭로였을 것이다. 이 파멸적 인간 군상의 얘기는 200년 전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이러한 인간 현실 세계에 대한 자성과 비판은 시공을 초월하여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왔으며, 또한 지역을 불문하고 동시적이기도 했다.

 

인간의 사악한 본성, 그 비이성적인 욕망과 광기의 폭로와 경고는 세기를 거듭하면서도 여전히 오늘에도 무수히 읽히고 있는 고전(古典)이 그 실례일 것이다. 16세기 영국 헨리 8세의 대법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지적하는 당대 영국사회 상류 지배계급의 파렴치와 야만성의 비판이나 18세기 독일의 문호 괴테의 파우스트가 묘사한 것도 인간의 그칠 줄 모르는 탐욕, 욕망의 광기 아니겠는가. 20세기 조지 오웰의 1984도 사실 이러한 인간성 말살의 세계에 대한 또 하나의 변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중엽부터 홍수처럼 배설된 문학작품들은 거의 모두 인간 세계에 만연한, 아니 만연함이 넘쳐 현실을 벗어난 환상과 가공의 세계로 넘어가 이 던적스러운 인간성을 떨어내려 몸부림치고들 있음을 본다.

 

이런 연유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우리들에 여전히 목소리를 내고, 인간 본연에 대한 물음을 통한 자기 성찰의 사유를 촉구하는 문학과 미술 등 예술작품들이 그 영향력을 잃지 않는 까닭이다. 어쩌면 괴팍한 취향 아니냐고 시비를 삼을 지도 모르겠다. 고작 末世라니 라고 말이다. 우리는 지속하여 말세를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경고의 언어를 잃어버리는 것은 곧 동질과 동일의 반복이고, 그것은 차이와 다름에 대한 갈라치기고 차별과 분리, 계급이라는 이원화된 불평등의 고착이요, 야만과 폭력의 안주이며 승인일 것이다. 같음의 반복은 정체이고, 타락이며, 부패이고, 착취이며, 탐욕이자 폭력이다.


1790~1794년에 잇달아 발표한 순수의 노래:Songs of Innocence경험의 노래: Songs of Experience에서 이 세계에 대한 회의와 부정적 세계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영국 시인이자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가 인간 타락의 근원을 대립을 강요해 온 이원론적 가치 체계임을 지적하였듯, 이 오래된 인간의 분리주의적 욕망은 환상적 세계에서나 그 개념 감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성의 부식과 마비로 인해 일어나는 오늘 한국사회에 진행되고 있는 극단적 상황은 아마 결코 새로운 인간세계의 현실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대안의 창조적 모색을 위해 함께 머리를 모아야 할 때인 것 같다.

 

나는 본질상 동일과 동질을 통한 기득적 권력의지의 항속화의 욕망을 위해 자기와 다른, 차이에 대해 억압과 구속을 정체성으로 하는 수구(守舊)주의자들에 대해 근원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자유와 해방을 삶의 조건으로 하는 인간의 태생적 본성을 폭력으로 제압하려는 그 동일성을 반복만 하려는 나르시시즘의 욕망에 역겨움을 느낀다. 끊임없는 자기회귀, 그 극한의 자기애에 대한 욕망은 타자를 보지 못하게 한다. 욕망의 본질이란 결핍이고 부족이다. 빼앗겨 상처받은 자들은 그 결핍으로부터 끊임없는 탈주를 시도하기 마련이고, 바로 그 시도의 역동적 동태성이 역사적 전환을 생산한다. 잃어버린 욕망의 억압과 구속에서 풀려나려는 자유와 해방의 추구가 거대한 새로운 흐름을 낳는 것이다.

 

이러한 탈주의 욕망, 문화적 불안정성과 영혼의 정신 분열증을 앓고 있는 인간 세계를 간파한 흔치않은 철학적 사유의 화가인 오딜롱 르동을 나는 사랑한다. 19세기 산업사회화 된 프랑스의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피폐와 야합하여 무관심과 몽매성에 빠져들었던 것은 21세기 오늘의 인류 사회와 그리 다르지 않다. 부정(不淨)한 나르시시즘, 요즘 유행하는 언어로 나를 사랑하기는 사실 탈출구가 막힌 부패한 영혼의 망상적 헛소리처럼 들린다. 타자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없는 라는 없는 것에서 대체 새로운 무엇이 발굴될 것이라는 것처럼 황당한 소리도 없을 것이다.

 

출처: 이광래, 미술 철학사 1, 도판 321, 오딜롱 르동 우는 거미, 1881


내가 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의 작품 우는 거미, 1881는 종()이나 생명의 일탈 같은 수구적 질서나 규범으로부터의 벗어남은 그 낯섦만큼이나 강렬하게 인식된다. 마치 카프카의 오드라데크(가장의 근심)나 갑충(변신)처럼 말이다. 즉 생리학의 지식이 병리학이라는 일탈로부터 얻어지듯, 그 어떤 인식론적 장애도 넘어서려는 초월적 욕구의 의지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르동을 신랄하게 공격했던 미라보나 불편해했던 졸라와 같은 기성의 권위를 등에 업은 자들의 비난이란, 역사라는 거대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보잘 것 없음이 보이듯, 우리는 역사의 조망 속에서 무엇이 인간이어야 하는지를 볼 수 있다.

 

나는 권력 담론을 휘두르던 에밀 졸라의 당대 예술인들을 향한 자의적 비난의 목소리들에서 권위와 동일성을 강요하려는 타자에 대한 억압을 본다. 자연주의자임을 자처하며, 당대 노동자와 농민의 처절하고 참혹한 삶에 주목케 하려던 사실주의에 대한 잔혹한 말들이 얼마나 일방적 언어였는지, 그 자폐적 언어의 무자비한 사용에 반감을 지우지 못한다. 때문에 즉물주의(卽物主義)의 그 발가벗은 사실화들로 비난을 받았음에도 쿠르베의 반()부르주아적 그림들을 좋아한다. 파리 코뮌의 적극적 선봉자로서 민중의 고통을, 지배층의 위선과 기만의 폭로에 주저함이 없었던 인물로 나는 기억한다. 어쩌면 이렇듯 인류는 소수의 눈 밝은 이들의 말세에 대한 통각(痛覺), 그 경고의 메시지들에 의해 아슬아슬하게 그 위기를 벗어나왔는지도 모르겠다.

 

21세기 오늘의 세계는 더 이상 지역적으로 고립된 시공이 아니다. 세계 어느 한 귀퉁이에서 발생한 현상이나 사건도 곧 세계 전체의 관심사가 된다. 한국 사회의 기득권을 누려왔던 친일 반민주적 일군의 소수집단은 변태적 극우화, 아니 사대주의적이고 극단적인 권력과 재화의 욕망 집단임을 수치심을 잊은 채 광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양상은 비단 동아시아의 귀퉁이 작은 반도 국가의 현상만이 아니다. 지구촌 곳곳이 이러한 우경화된 탐욕의 정치 세계를 항해하고 있다. 일종의 말세(末世) 현상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말세에 대한 자각, 소수의 민감한 통찰자들은 역사 교체시기에 여지없이 등장해왔다. 그것이 특정한 한 인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거대한 조류처럼 예술과 문학, 철학 등 인문적 흐름으로부터였다. 물론 자연과학도 인간 계몽의 한 축이었으나 그것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사상과 예술의 힘(반영)에 실려 왔다,

 

세계의 병리적 현상이 폭넓게 인류의 세계를 뒤덮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새로운 역사의 시대로 교체를 요구하는 역사적 순환주기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신권에 의한 1000년의 억압, 그리고 잠시의 소생시기인 르네상스, 다시 절대왕권에 의한 폭압, 인권과 평등의 시기, 또 다시 독재와 전체주의의 광기, 불안정한 평화, 오늘의 우경화된 광범위한 기술과학주의와 물질주의로 인한 인간성의 황폐화, 이제 무엇이 올 것인가? 우리들은 인간의 파멸적 본성을 무수히 보아왔다. 이것은 절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말세 현상을 직감할 때마다 선인들이 지적한 인간성의 본류가 변화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제 한국 사회는 불과 10여년 만에 두 차례의 몽매한 선출권력을 탄핵하였으며, 다시 새로운 리더를 선출하는 시간이 당도했다. 헛된 이데올로기적 망상에 사로잡혀 증오에 완전히 먹혀버려 나락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낯설어 멀리하려 했지만 그 낯섦이 새로운 세계의 질서로 향하는 시발점이 되기 위해 머리를 맞댈 것인지의 기로에 서 있다. 말세의 예언이 결정어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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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내게 책을 읽다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있다고, 물어봐도 되겠냐고 한다. 하라고 했다. 도대체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 어떤 상황이에요?’, 그리고 그 불가능성을 말하는 데, 가능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시도)한다는 말인가요?’라고 묻는다. , 쉬운 질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나 또한 수없이 이와 같거나 유사한 문장들을 접했었으니 말이다. 언뜻 칸트가 떠올랐지만, 그의 형이상학을 무턱대고 아이에게 들이민다면 더욱 난감하게 만들 공산이 컸다. 하지만 우리네 일상적 사고방식을 생각하면 그리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물음에 답하다보니 몇몇 생각이 더불어 엉켜 떠올랐기에 몇 글자 적어두기로 했다.

 

1.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

 

왜 말 할 수 없는 것을 기어이 말하려는 것일까? 그저 할 수 없다면 안 하면 되는 것이지, 이것이 왜 문제가 될까. 우선 말 할 수 없는 상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존재하지만 자신의 정신(지성)의 범위 내에 존재하지 않아 생각할 수 없으며, 따라서 말 할 수 없는 경우다. 아이가 질문 하듯 그 문자적 내용의 이해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관심이 없어서거나, 회피하거나 배제해버려 알지 못해 말 할 수 없는 경우도 포함될 수 있겠다. 이러한 경우는 너무도 다양하게 많아 열거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둘째는 인간의 인식 범주를 뛰어넘은 것, 이를테면 종교에서 말하는 궁극의 진리(혹은 지극한 도)이거나, 가톨릭 등 유일신 종교의 신의 존재에 대한 것과 같이 말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들 경우에 따라 그 말 할 수 없음의 의미는 달리 표현 될 것이다.

 

첫 번째의 경우는 보고 듣고 이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종의 자기 앎, 자기 정신에 의한 해석으로서 지평(地平), 즉 자신의 정신적 시야가 작동하는 범주를 초과하는 낯설고 모르는 것에 대한 문제다. 이것은 철학이나 여타 종교적 언어에서 초월적(超越的, transcendent) 혹은 *내재적(內在的)이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예수나 성자, 부처를 접하는 경험과 같은 신성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말하는 자신의 감각에 나타난 성스러운 감각을 초월적 경험이라 말하는 것과 같이 자신의 감각이나 정신을 넘어 다가오는 경험이다.

 

이를 자기 지평 밖의 세계, 자신의 정신 너머의 세계에 대한 체험이어서 초월적이라 말하지만,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존재나 양태와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결국 평소 자신이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마주함을 자신의 지평 안에 있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익숙한 지평 안에 끼워 맞춘 것이다. 따라서 초월적이라는 마치 지평 밖으로 자신의 정신 너머의 체험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아는 범주, 즉 자신을 둘러싼 시선이 가닿고 의지하는 생각으로 이해한 것 이상이 아니다. 이 말은 결국 내재적 인식의 범위, 근본적으로 자기 지평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반면에 두 번째 말 할 수 없는 경우는 낯설고 전혀 알지 못하는 지평 밖의 마주함으로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어 의문을 그대로 끌어안고 가는 물음만이 있는 경험이다. 이것이 초험적(超驗的, transcendental) 경험(인식)이다. 지평의 진정한 넘어섬, 자신을 넘어선 것을 넘어선 그 자체로 대면하는 인간 인식의 넘어섬(이진경 ,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에)”이다. 그 낯설고 당혹스러움을 그대로 껴안고 그것에 물음을 제기하며 자신이 지닌 지평 밖으로 나아가는 처절한 고투의 체험이다. 이 초험적(선험적) 경험으로서 넘어섬은 결코 쉽사리 가능한 접근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러한 세계를 상상하고, 그에 대한 자기 아집이라는 세계의 협소함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자기 지평에서 배제된 이 세계의 수많은 존재자들과 양태들의 그 이질적이고 생경함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우리는 아주 빈번하게 지평 밖의 세계를 자신들이 아는 범주, 지평 안의 의미로 해석하려 드는 많은 사람들의 오류를 접하곤 한다. 자기 앎의 언어로 말하려보니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표현이 궁색하거나 편벽됨을 면치 못하게 되고, 지평 밖의 진정한 의미는 여전히 배제되고 만다. 이것이 내재성, 또는 소위 초월적 인식의 한계다.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이처럼 내재성(초월성)과 선험성(초험성)에 따라 그 시선은 극명하게 다르다. 아전인수격 이해와 모름에 대한 인정에서 출발하는 적극적 접근을 통한 참된 본질을 향한 길은 이 세계에 확연히 다른 질서와 체계, 삶의 질을 만들어낸다. 갈라치기, 양극화,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 등등 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공존을 위협하는 내재성(초월성)의 인식은 지양(止揚)되어야 할, 진정 말 되지 말아야 할 말이 출현하는 데 있다.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하여야 하는 것은 오히려 초험성(선험성)의 그 곤혹스런 표현 불가능한 지대의 무엇이다. 그것이 진정 말 할 수 없는 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트라시마코스와 필라테스의 짧은 대화

 

내재적 경험(인식)과 선험적 경험(인식)은 자기 앎의 인식 한계에 대한 문제이고, 지평(地平) 넘어서 출현하는 문제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문제를 그리스 두 철학자의 짧은 대화로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고질적인 사후세계의 물음, 인간의 참된 본질이 죽음에 의해 파괴되는 것인지 여부에 관한 담론이다그 핵심 물음과 답변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트라시마코스내가 죽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지 분명하고도 간단히 말해 보게.

  필라테스모든 것이 되기도 하고 무()가 되기도 한다네


트라시마코스는 필라테스의 대답을 낡은 계략이라고, 모순투성이의 뻔한 말이라고 비아냥대지만 필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의 물음이 이미 초험성(선험성)을 담고 있어, 내재성, 즉 인간 인식을 위해 창조된 언어로는 이렇게 표현하는 외에는 말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대응한다. 그러고는 선험성과 내재성을 설명하는데, 선험적이란 경험의 모든 가능성을 넘어서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려 애쓰는 인식이고, 내재적이란 경험의 가능성을 벗어나지 않으므로, 오직 현상에 대해서만 말 할 수 있는 인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필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의 물음을 각기 선험적 인식과 내재적 인식에 따른 표현 가능한 말을 하려고 애쓴 것이고, 그 답변은 무한한 것과 무()라는 마치 극단의 표현처럼 여겨지는 말만이 가능했던 것일 게다. 우선 내재적 인식의 지평에서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 인간의 육체라는 개체성은 죽음과 함께 끝난다. 즉 무로 소멸한다. 반면에 선험적 인식으로 죽음을 이해하려하면 개체란 궁극의 본질이 아닌 질료의 임시적 형태이고, 본질의 시간적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은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이라는 전체로의 회귀다.

 

한 존재자의 죽음이 사실 무도 되고 무한도 된다는 것은 이만저만 모순이 아니다. 그런데, 이 모순을 말하는 인식은 인간의 내재적 인식이라는 지평 안으로 끌고 들어가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지, 그것을 초험성의 영역으로 데려가면 그저 말 할 수 없는 모든 것이라는 말 이외에는 형용할 언어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 선험성의 표현 불가능한 양태를 어떻게든 말하려하면 그 말의 논리 속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들 말의 궁지(窮地) 탓이다.

 

대승불교의 사상체계를 정립한 인도의 고승(高僧) 나가르주나(龍樹,150~?)어떤 것에 대해서도 본성이 없이 공()하다.”고 궁극의 진리, 지극한 도를 말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공하다고 말했으니 이 문장 자체도 공한,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궁극의 진리를 말로 표현하다보니 궁지에 이른 것이다. 문장이 말한 바가 자신에게 돌아와 작용되는 것을 자기 언급이라고 한다. 자기 언급을 통해 스스로가 부정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서구의 철학에도 거짓말의 역설이라는 유사한 사유가 있다. 무언가 우리의 인식 너머를 말하려 할 때면 우리는 이러한 궁지에 이르기 일쑤다. 이것이 바로 말 할 수 없는 것의 말하기의 불가능성이다. 여기에는 말 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커다란 심연이 있다. 이 심연을 우리는 말하려 애쓰는 것이다. 자신을 무력화하는 피할 수 없는 역설이 우리들의 말에는 있다.

 

3. 맺는 말


여기서 우리들이 알아차려야 할 것은 이 피할 수 역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어둠이다. 그 어둠의 지대에 있는 존재를 말해야 우리는 그나마 우리들의 지평 밖에 있는 것을 끌어안을 수 있다. 비록 명료한 언어가 되지 못했지만,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 불명확하고 알지 못하는 것에 접근 할 수 있다. 유발 하라리가 넥서스에서 지적하는 인류가 그 엄청난 지식의 축적을 으스대면서도 전혀 지혜는 축적시키지 못했음을 탄식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자신들의 지평 안으로 지평 밖의 낯섦을 들여와 그 알량한 인식의 범주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려는 익숙한 습성 때문이다.


아마 이 지평의 경계라는 분별심에 의해 나누고 구분해서 판단하려는 마음에서 떠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본래 세계란 지평 안과 밖이라는 그 어떤 간극이나 위계란 것이 없다. 자기 안의 앎의 세계와 외부로 가르면 말 할 수 없는 것이 무진장하게 늘어날 것이다. 이것을 눈가림하기 위해 좁아터진 자기의 언어로 말하다보면 그것은 거짓과 기만, 무지의 언어가 되고, 세계의 진실과는 점점 멀어질 것이다. 어쩌면 작금의 한국 정치사회에서 펼쳐지는 이 혼돈의 상황도 이 지평의 문제요, 선험적 인식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일 게다. 아이의 당연한 의문이 여기까지 왔다. 말 할 수 없는 말을 한다는 것, 그 불가능에도 불구하고 말하려는 것은 아마 이러한 것이지 않을까. ()

 















*내재적 경험(인식): 이 표현은 쇼펜하우어의 표현으로 그는 인식(경험)을 내재적, 선험적으로 분류하고 이 둘을 초월성의 두 범주로 설명하고 있다. - 쇼펜하우어의 논문, 우리의 참된 본질은 죽음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에 관한 이론8트라시마코스와 필라테스의 짧은 대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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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이진경 교수의 선불교를 철학하는(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8세기 당대(唐代) 선승(禪僧) 마조와 그의 제자 남전의 일화가 있다. 마조도일(馬組道一; 709~788)은 부처와 동격으로 추앙받는 지엄한 선종(禪宗)의 권위를 상징하는 고승이다. 그런 스승을 향해 거칠게 입을 막아버리는 일견 제자의 무례함으로 보이는 대화 장면이다. 남전(南泉普願: 748~835)이 대중에 죽을 돌리는 데 마조가 묻는다.

 

통 속은 무엇이냐?’

닥치거라 이 늙은이야! 무슨 말이냐?’

그러자 마조는 그만두었다.

 

이 짧은 대화의 장면에는 스승의 권위와 제자의 복종이라는 수직의 격차는 사라지고, 동등한 인간의 관계만이 넘실댄다. 아마 이 장면에 대해 권위자들을 대신해서 니체라면 고귀한 것을 알아보는 안목의 결여, 고귀한 것에 대한 경외심의 결여, 그리고 안목 없는 자의 불신과 무례만을 발견했을 것이다. 현대인들의 태도를 눈과 손의 안일한 후안무치 선악의 저편, 263라 비난했던 그것이다. 그러나 고귀한 종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마조가 제자의 욕설을 듣고 그만두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마조가 통 속에 든 죽을 물은 것이 아님을 남전이 모르지 않았으며, 통 속에 든 당체(當體), 즉 직접적 그 본체를 물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언어 이전의 것이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욕설로 스승의 입을 거침없이 다물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마조 또한 제자의 거친 말에 담긴 의미를 이미 헤아렸으며, 침묵으로 그에 대해 답변한 것이다. 두 사람의 깨달음의 지혜가 오고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이 공안의 해석은 주제넘은 짓이기에 논외로 하기로 한다. 내가 주목한 것은 오늘날 사상을 비롯한 학문과 문학, 예술의 세계에 넘쳐나는 담론지배 권력을 가진 이들의 행태에서 보이는 고형화(固形化)된 권위가 이 두 고승에게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 분야에서 높은 곳에 이른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발 딛고 선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새 권위적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권위관계가 지속되는 속에서는 가르치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무비판의 세계를 낳는다. 지엄한 위계 관계의 틀을 넘어서는 그 어떤 말이나 행위도 니체의 말처럼 무례로, 안목 없음으로 불신으로 비칠까 염려되는 마음에서 몸을 도사리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고와 행동의 여지를 열기위해서는 지고한 안목을 얻은 자, 경외 와 존경을 얻은 자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엎어버리는, 권위의 무게를 가볍게 하려는 경계의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 망각하고 수직적 권위 속에서 자신의 의사를 밀고 나가면 그것이 바로 독재와 전제적 권력이 되고, 수많은 진실의 목소리가 억압되어 멸실되게 된다. 외곬의 독선으로는 결코 그 어떤 진리의 근처에도 이르지 못하게 됨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마조는 바로 그 권위를 허물어 욕설마저 주고받는 스승과 제자의 고식적인 위계가 설 자리를 없애버렸다. 그럼으로써 제자, 배움에 있는 자들이 과감하게 자신의 기틀을 펼치고 밀고 나갈 수 있으며. 스승과 제자는 진리에 보다 견고하게 접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와 달리 경외감으로 시작되는 존중의 태도에 올라타 고귀한 것을 보호하려는 관습과 제도를 만들어내고, 이에 복종과 경배를 요구하며, 급기야 권력을 장착한 권위로 고형화되는 담론지배자들의 행태가 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횡행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하다보니 무수히 다양하고 창의적인 견해들이 권위의 그늘에 의해 지워지고, 폐기되어 사장되어버려 지식이 성장할 수 없는 불모지대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토양에서는 세계를 선도하는 학문의 출현이 지극히 어려울 것이다.

 

구조주의 인류학자 앨프리드 레드클리프-브라운(Alfred R. Radcliffe-Brown 1881~1955)은 그의 대표저술인 원시 사회의 구조와 기능(Structure and Function in Primitive Society)에서 특정한 종류의 언행 회피(금지) 여부에 따른 인간관계를 농담관계회피관계로 두 분류하였다. 무례와 비격식성을 특징으로 하는 동등한 지위를 갖는 관계를 농담관계로, 지위고저가 뚜렷하고 위계와 권위가 지배적이어서 특정한 언행이 금지된 관계를 회피관계로 구분한 것인데, 바로 이 회피관계의 태도가 한국의 학문과 문화계 전반을 잠식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의심이 내게 있다. 소설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바로 이 같은 권위의 수직관계에서 이탈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문학 담론권력의 질서에 있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마조와 남전의 이야기로 돌아가 이야기의 논의를 마쳐야겠다.

 

담론 권력들이 자신들의 분야에서 회피관계가 만들어내는 특성을 모른 체 하기로 일관한다면, 자연발생적 경외감과 존경심은 차단되고, 고귀한 것을 알아볼 기회를 제거하게 될 것이다. 자유로운 사고는 제약되고, 정해진 규칙들, 관습화된 권위의 규칙들이 사고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는 그 어떤 진실과 진리도 출현하지 못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서문 진정한 존경이란 모든 비판을 견뎌낸 것에 대해서만 주어진다.”는 글은 바로 이러한 관습화된 제도적 권위관계, 담론지배 권력의 권력을 깰 때만 진리의 가능함의 역설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웃음관계의 회복이다. 심각한 권위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웃음에 거리를 두었던 권위적 담론가였다. 이 같은 진지함, 딱딱하게 굳어진 관념이나 가치를 가볍게 넘어서고 흔들어 버리는 힘, 권위를 타고 넘어가는 힘으로서 웃음의 관계가 관(貫流)류 할 수 있도록 회피관계가 열려야 한다. 웃음은 여유와 유연성에서 나오는 확고함에 거리를 둔 능력이다. 또한 내가 확신하는 가치와 믿음이 망가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웃음은 집요하게 나라고 주장하는 아상(我相)을 깨드리는 시도이고 권위에 반항하는 행위이다. 지금 내가 목격하고 있는 한 담론 권력 앞에서 주눅 들은 젊은 천재들의 목소리가 죽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은 정말 소름끼친다. 이진경 교수가 이 웃음의 능력을 위해 소환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가상의 책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을 가슴에 안고 스스로 불타죽으며, 쉽게 웃는 놈들을 그냥 두지 마라!”는 호르헤의 외침은 오늘의 담론 권력자들의 독불장군식 권위의 집요한 탐욕의 소리로 들린다. 작가는 그의 죽음으로 더 큰 진실의 목소리인 웃음을 모르는 자들을 조심하라!”만 들리도록 한다. 진정 세계적 사상을 주도하고자 하며, 과학적 진리의 새로운 형상을 말하고자 한다면, 회피관계 속 권위놀음이 아니라 농담관계, 그 동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마조와 남전, 스승과 제자의 그 허물없는 진리를 향한 대화의 장면이 우리 담론세계에서도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이진경 교수의 번뜩이는 혜안에 의존해서 짧은 의견을 끄적여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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