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내리는 비(雨)의 어떤 처연(悽然)함은 마치 ‘제임스 조이스’가 부동의 자세로 응시하며 그려낸 ‘더블린 사람들’의 불안과 마비의 전경 같다는 생각을 하게한다. 의식의 밑바닥에 두껍게 가라앉은 익숙하고 고정된, 집요한 안착의 느낌이라 할까?
색 바랜 낡은 의자에 앉아 어, 세상이 왜 이 모양이지 하고 의아해하며 의심에 가득찬 시선을 보내면서도 무언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마침내는 무엇인가에 속았다고 외치는 어리석은, 아니 어쩔 수 없이 펼쳐져야만 하는 그런 장면을 떠 올리게 된다.
내게 소설 『더블린 사람들(Dubliners)』은 『피네간의 경야』를 향한 여정의 중간 기착지라 할 수 있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부터 무수히 점화되는 에피파니(顯現)에 대한 익숙함과, 『율리시즈』 ‘아이올로스’ 에피소드나 ‘이타카’의 장면에 등장하는 ‘더블린 사람들’의 편린들, 『피네간의 경야』에 지속되는 시간의 순환과 직선적 사유의 오래된 인간적 사유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그 시원의 줄기를 어렴풋이나마 지녀보자는 의도에서 이다.
『더블린 사람들』에 수록된 14편의 단편과 1편의 중편(‘死者’ 혹은 ‘죽은 사람들’)은 그 묘사에 있어 가히 “꼼꼼한 비속성”의 문장으로 그려냈다는 작가의 말처럼 지형적, 연대기적 사실의 정확성, 외모에서 의상에 이르는 추오와 부조화 등 초상화적 기법과 당대 사람들의 관습과 행동, 사상 등 그들의 억눌린 심리적 표현까지 가히 정교함 그것이라 느낄 수 있다. 다만, 사회적, 직업적 언어의 다양성에 대한 묘사는 내 언어적 이해의 불비로 만끽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 소년기, 청년기의 작품들
작품의 배열순서는 작가의 의도대로 ‘소년기, 청년기, 성숙기, 대중 생활’이라는 4개의 구분된 14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지막 작품인 ‘死者’ 혹은 ‘죽은 사람들’이라는 중편 1편은 악곡의 마침부문처럼 종곡(coda: 終曲)으로서 소설집 전체의 주제를 총괄한다.
늙은 신부의 죽음을 소재로 소년의 눈에 비친 망자의 여동생들인 두 노파의 속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매」, 발전소 구경을 위해 학교를 빠진 채 길을 나선 두 소년의 보잘 것 없는 하루의 풍경에 기성세대의 고착된 반복적 사고의 비루함과 관계의 편협성을 무심히 그려나간 듯한 「만난 사람」, 그리고 작은 설렘조차 발산 될 수 없는 매몰된 생활의 세계에 고뇌와 분노를 터뜨리는 소년의 이야기인 「애러비」, 이렇게 3편을 통해 아이들, 아일랜드의 미래에 대한 무관심의 현실을 고발한다.
청년기에 속한 작품은 「이블린」을 비롯하여 「경주가 끝난 뒤에」 「두 부랑자」 「하숙집」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백화점 점원으로 동생들과 아버지를 부양하고 가사를 책임져야 하는 열아홉 살 처녀의 짓눌린 삶으로부터의 도피라는 갈등을 세밀하게 포착한 단편, 「이블린」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는 창 커튼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오랫동안 집안을 보살피겠다고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심해지는 아버지의 폭력적 위험, 동생들의 뒷바라지, 생활고 등 자신을 감금하는 삶으로부터의 도주를 고민하는 내면의 목소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그녀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새 삶을 시작하자는 연인 프랭크의 유혹은 번민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쨌든 집에 있으면 먹을 것과 잘 것은 걱정 없다. 그리고 나면서부터 사귀어 온 사람들이 있다.”고 망설이며, 결국 부에노스아이레스 행 밤배를 타는 프랭크의 손을 잡지 않는다. 그녀는 왜 떠나지 않았나? 에 대해 해외 영문학자들의 많은 해석이 있다.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프랭크는 여자를 팔아넘기는 포주였기 때문이라는 급진적 해석부터 ‘미지의 공포에 대한 몸의 부동’으로 정체된, 변화에 저항하는 아일랜드 현실의 비판적 은유라는 분석도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소설의 형식적 측면에서 ‘열린 결말’을 도입한 선구적인 작가로서 ‘제임스 조이스’를 위치케 하였다는 점이다. 해석이야 독자들 마음일 것이다!
‘빠른 속도, 평판, 돈’ 이라는 당시 더블린 중산층을 장악하던 의식의 속물성을 빗댄 자동차 경주대회에 참가한 프랑스, 영국, 미국, 독일인 등 선진국에 대한 맹목적 경외를 이야기하는 「경주가 끝난 뒤에」나, 재산 있는 청년을 유혹하여 성적 관계를 성사시키기 위하여 딸과 청년의 행위를 모른 체하며 이를 미끼로 활용하는 하숙집 여주인과 열아홉 살 딸의 암묵적 음모의 천박성을 다룬 「하숙집」 , 하녀를 꾀어 돈을 갈취하며 살아가는 젊은 세태의 비열한 속성을 그린 「두 부랑자」 역시 아일랜드 무기력의 저변을 이루는 저열함과 속물성, 식민지 의식의 통렬한 까발림이라 할 것이다.
2. 성숙기, 대중생활의 작품들
성숙기의 작품은 「구름 한점(작은 구름)」 「분풀이(짝패)」 「진흙」 「끔찍한 사건(참혹한 사건)」 4편을 이루고 있다. 자기 삶의 무책임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패링튼’이란 인물의 비루한 속성이 전편을 이루는 「분풀이(짝패)」, 옛 시절의 감상을 노래하는 「진흙」, 도덕성, 예술성 등 사회의 저변을 형성하는 중산층에 냉소를 보이는 중년 남자의 외곬성과 타인의 고독에 대한 이해조차 형성시키지 못했던 뒤늦은 자기 발견을 이야기하는 「끔찍한 사건(참혹한 사건)」을 통해 아일랜드의 정신적 성숙을 표상하는 계층의 실상이란 이러한 것, 이처럼 하찮은 유아적이고 보수적이며, 정체되어 있고 또한 감상에 머물러 있음을 응시하고 있다.
“내 살기를 꿈꾸었네 대리석 궁궐에서
시종과 하인을 양 옆에 거느리고
이 궁에 모인 만 사람 중에
나야말로 희망이요 자랑이었네”
라고 세탁소 직원인 장년의 여성 ‘마리아’가 노래하는 「진흙」의 장면은 옛 시절의 영화에 멈추어버린 당대 기성계층의 고착된, 즉 마비되어버린 사유의 전형적 비유처럼 보인다.
그러나 4편의 소설 중 단연 압권은 「구름 한 점(작은 구름)」이다. 오늘의 21세기 여느 현대소설의 의식흐름 묘사를 능가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또한 이 작품은 조이스의 후기 작품인 『율리시즈』와 『피네간의 경야』의 하나의 질료로서 그 흔적을 남겨주는 빼놓을 수 없는 사유의 시작점이라는 중요한 작품적 지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의 제목은 『성서』 「열왕기」 상편 18장 44절, “그가 말하기를 보라, 사람의 손만큼 ‘작은 구름’이 바다에서 솟도다.”에서 차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인간행동과 사유의 오랜 갈등, 지금도 우리네 관념의 충돌을 지배하는 시간의 순환과 직선적 흐름, 고정과 변화, 보수와 진보, 자기만족과 타인의 배려 등 예언자 엘리아와 바알신 예언자들의 투쟁에 기초를 둔 인간 삶의 경이로운 대립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런던의 신문기자로 성공하여 더블린에 잠시 들른 8년 만에 만나는 친구와의 약속장소를 향한 걸음의 의식에서 시작된다. 유명 법률회사 직원으로 전형적 중산계급인 일명 ‘꼬마 챈들러(토미)’에게 약속장소인 ‘콜레스 요리집’은 한 번의 눈길도 던지려 하지 않았던 고급 식당이며, 이곳에서 성공한 친구 ‘갤러허’를 만나게 된 것에 자신의 자부심까지 상승한 것으로 여긴다. 더구나 가는 길에 드러난 강가에 옹기종기 초라하게 일그러진 채 모여있는 서민들의 집과 낡아빠진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그를 더욱 강박적으로 더블린이라는 현실 삶으로부터의 이탈을 꿈꾸게 한다.
이 환상적인 희망은 런던 신문기자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좌절된 꿈인 시(詩)의 발표를 이뤄냄으로써 자신 또한 런던으로 좀더 가까이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이다. 두 사람은 살아온 - 결혼, 아이, ... - 이야기들을 유쾌하게 나눈다. 갤러허는 돈과 미모를 갖춘 여성들이 자신의 주변에 넘쳐나고 있음을 자랑하며 결혼을 폄하하면서도 토미의 결혼과 아이의 출산에 대한 뒤늦은 축하를 보낸다. 토미의 집으로의 초대는 거절되고, 아내가 부탁한 커피 구입을 잊어버린 채 집으로 돌아간다. 상점으로 나간 아내 대신에 아기를 안지만 아기는 울음을 터뜨린다.
“이 좁은 무덤 속에서 그대의 몸은 잠들고, 한때는 그 몸에도....나는 종신(終身) 갇힌 몸이다. 노여움으로 두 팔이 부르르 떨리며, 갑자기 아기의 얼굴 쪽으로 몸을 숙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아기는 애처롭게 울기 시작하더니...”
돌아온 아내는 그의 얼굴을 노려본다. 아기를 빼앗아 들고 “아가야! 우리 아가야! 놀랐어? ....” 아기의 울음은 잦아들고, “꼬마 챈들러는 부끄러워서 두 뺨이 빨개지는 것을 느끼고 ... 그리고 뉘우침의 눈물이 그의 두 눈에 괴어들었다.”
갤러허의 독신 생활과 대조되는 꼬마 챈들러의 가정적 평형을 이루는 이 장면은 정말 통렬한 아이러니를 시사한다. 엘리아와 바알, 진정 무엇이 올바른가? 아니 우리들은 이 둘 모두의 저울대 위를 끊임없이 서성거리는 존재일 밖에 없는 것 아닌가? 끝없는 내적 갈등에 시달리는 존재로서.
한편 대중생활을 기록한 「10월 6일 위원실(위원실의 담쟁이 날)」 「어머니」 「은총」, 3편은 정치, 경제, 사회문화, 종교에 만연한 대중의 허름하기 그지없는 위선과 무지와 부조리와 무기력을 각기 민중의 지도자였던 ‘파넬’의 기념일과 영국왕의 방문, 어떤 정체성조차 지니지 못한 오합지졸들 선거판의 잡설들에 끼워 식민성과 자본의 교환을 말하고,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의 이면에 놓여있는 편협성과 초라한 이기심을 드러내는가하면, 술에 취해 나자빠져 있는 한 인간의 잘 난체 하는 정신이란 것에 들어앉은 정말 하찮은 신념의 구조를 목격하게도 한다.
3. 중편 「죽은 사람들(死者)」
죽음의 또 다른 언어로서 더블린 사람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마비와 불안이라는 단어로 정의되는 이 소설집의 전체 주제를 아우르는 작품이다. 소설의 배경은 케이트와 줄리아 두 자매가 가족들과 이웃 친지들을 초대하여 서로의 추억과 우정을 나누고 감사하는 크리마스 연례파티의 소박한 묘사와 두 자매의 조카인 가브리엘과 그의 아내 그레타의 어긋나는 의식의 묘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시시콜콜한 피아노 연주와 노래의 장면이나, 마련된 음식들의 나열과 서빙, 분위기라는 전형적인 아일랜드인들(더블린 사람들)의 관습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형태를 보여주면서, 자연스레 옛날 가수의 향수에 목말라 하는 세대들의 젊은 가수들에 대한 가치 폄하와 같은 신구의 묘한 갈등 양상을 드러낸다. 행사의 주관자인 이모 두 사람을 비롯한 참석자들을 향해 가브리엘이 하는 감사의 말에 이 배경의 주요 주제의식이 모여 있다고 해도 그리 벗어난 이해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원칙에 자극 받은 한 세대가 자라나고 있으며, 비록 그것이 그릇되더라도 진정한 것으로 믿고 싶다고 말하며, “저는 과거에 집착하려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가브리엘의 연설이다. 그럼에도 단서를 다는데 “지난날의 유산이었던 자애와 환대와 유머같은 것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라며, 성대한 시절이었던 옛날을 소중히 간직하자고 주장한다. 사실 진부하기 그지없는 뻔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럴듯하게 뻔지르르한 신구의 균형 있는 자세를 표방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나 말 할 수 있는 구태의 반복적 발언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다음의 배경으로 연결시키는 절묘한 장면이 등장한다.
파티 내내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지 않던 ‘다아시’라는 젊은 가수가 파티가 종료되어 모두 귀가하는 과정에서 비애감 넘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인데, 이것은 이중의 의미로 다가온다. 기성의 요구에 대한 저항과 단절의 표현이 하나이며, 죽음이라는 마비의 현상을 일깨우는 슬픈 가사의 의미가 그 둘이다. 이것은 아득히 들려오는 감성의 노래로서 가브리엘의 아내 그레타를 계단에 서서 추억에 잠기게 한다. 가브리엘은 어둠 속에서 그 노래를 듣고 서있는 아내의 우아한 자태에 빠져 화가가 되어 <먼 음악>이라는 이름의 그림에 그 모습을 담아내는 상상을 하기조차 한다. 부부는 호텔에 묵기 위해 마차를 달리고, 가브리엘은 아내에 대한 정념에 휩싸여 즐거움에 차 있지만, 아내의 표정은 이러한 가브리엘에는 무심한 다른 세계의 회상에 빠져있다.
따라서 가브리엘의 환상은 좌절되고 마는데, 다아시의 노래가 자신 때문에 죽은 것 같은 옛 연인을 생각나게 했다며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아내 그레타의 추억에 직면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간에도 어찌 할 수 없는 영혼의 고독을 깨닫게 될 때 죽음의 의미는 정말 새롭게 떠오른다. 그레타의 회상으로 그려지는 옛 사랑의 모습과 묘지의 전경은 가히 ‘죽음에로의 편향’이라 할 만큼 애절함으로 가득 들어찬다.
‘제임스 조이스’가 옛 연인을 마음에서 지워내지 못했던 아내 ‘노라 바나클’을 생각하며 자신의 사랑을 초월적인 무엇으로 사유하려했던 『한 푼짜리 시들(Poems Penyeach)』에 수록된 아름다운 시가 변주되어 소설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라훈을 슬퍼한다」
비가 라훈에 조용히 내린다. 조용히 내리고 있다.
나의 침울한 애인이 누워 있는 곳.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실로 슬프다. 슬프게 부르고 있다.
회색의 달이 떠오를 때.
사랑이여 그대는 듣느뇨.
얼마나 부드럽게, 얼마나 슬프게 그의 목소리가 여태 부르고 있는지를.
여태 대답도 없이 그리고 어두운 비가 내리고 있다.
그 옛날처럼 지금도.
우리의 심장도 또한 침울하게, 오 사랑아, 잠들리라, 그리고 차갑게.
그의 슬픈 심장이 누워 있듯이
회색 달빛, 쐐기풀, 파란 곰팡이
그리고 속삭이는 비아래.
조이스에게 전기적 의미를 지니는 이 시는 소설 「죽은 사람들(死者)」의 장면과 어울려 묘한 울림을 준다. “인간의 생과 사, 탐욕과 사랑, 과거와 현재의 갈등을 초월한 보편적 은총”이라는 해외 평자들의 해석은 많은 서술적 부재로 시달리는 독자의 해석상 불확실성을 충당해준다. 설혹 네 시기의 형상으로 새로운 윤리사회를 제시하려 했던 ‘제임스 조이스’의 의도를 모두 읽어내는 데 미치지 못할지라도 인간에 대한 그의 응시로부터 1세기가 지난 오늘, 우리는 충분한 사유의 양분을 거둬들이게 된다. 한 신부의 죽음의 이야기(「자매」)로 시작된 소설은 이렇게 죽음의 이야기로 맺는다. 어쩌면 작가는 그가 발표한 작품들이 지닌 급진적 형식과 달리 바알, 즉 시간의 순환성에 더 매혹되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옛날처럼 지금도 내리는 비와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