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격자의 차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6
연여름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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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빛은 이미 자기의 삶을 장악한 자의 것이었거든.” - 116쪽에서


강렬한 이야기다. 경계를 두르고 그 내부에 폐쇄적 집단을 형성하는 인간 무리들의 삶의 형식과 내용을 통해, 그들의 언어와 행동 양태를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바라보는 것은 야릇한 흥분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의 힘, 상상력의 힘이란 어쩌면 인류가 자신들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위대한 방편인지도 모르겠다. “2692823, 생애한도가 연장될 수 있다는 소문이 병원을 도는 중이었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그리곤 이번 오류 사건이 규모가 컸기 때문이라는 문장이 뒤따른다. ‘오류 사건은 소설의 표제에 있는 부적격자와 하나의 관련어로 묶여 이 소설의 서사를 이끄는 핵심어랄 수 있겠다.

 

부적격자라는 단어는 개념 자체에 어떤 기준을 내포함으로써 특정한 시대와 공간, 그리고 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새로운 다섯 차례의 세계대전과 기후변화, 바이러스로 인한 식수오염으로 종말의 위기에 내몰린 일군의 생존 무리들은 오염되지 않은 식수원을 찾아 방벽을 쌓고, 외부로부터의 오염원을 차단하여 생존을 보호하기 위한 경계를 두른다. 즉 경계 내부가 된 집단은 자신들만의 규범을 통해 적절함과 부적절함을 나눈다. 부적절함이란 이처럼 특정 집단 체제가 자신들의 안전이라는 명목 하에 배제하는 것들이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 허구가 되어버리고 금지되거나 사장되어 버린다. 보이지 않는 폭력의 한 유형이다.

 

그런데 배제라는 것은 영구적으로 고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 상황의 다름, 적용 대상의 구분 등등 무수한 요인들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다. 본래적으로 자의성을 내재하는 것이고, 개념상 상대성을 지닌다. 모세라는 인공지능의 제안으로 발견된 오염되지 않은 식수원의 발견에 따라, 한정된 자원 내에서 살기위해 불가피하게 구성원들의 생몰(生沒) 연령의 한계를 설정하게 되고, 집단의 리더가 지닌 인류의 경험, 권력이 고이고, 내부분열과 탐욕과 악의, 도덕적 해이로 인해 자멸하는 것을 알기에 인공지능과 인간은 상호협력 관계자로서 인공지능 모세를 중재자로 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을 실무자로 하여 한정된 공간에서 8만 명의 인간이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는 대략 40년을 생애한도를 설정한다. 따라서 중재도시에는 그 어떤 리더도 없으며, 중재자인 인공지능 모세 또한 실무자들이 중재자의 제안을 받기를 원치 않는다면 언제든 사용을 중지할 수 있는 그런 존재이다.

 

중재자와 실무자가 합의한 생애한도 연령에 도달한 실무자는 소거된다. 소설의 시간은 그로부터 대략 9세대에 이른 시기이고, 주요 배경은 중재도시 중앙병원이다. 8만 명의 집단구성원은 모두 실무자로 불리는데, 제각기 방벽 내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일을 수행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책은 애초부터 부적격자 차트임을 거듭 강조한다. 어떤 실무자가 부적격자일까. 소설은 바로 이 부적격에 내포된 무수한 함의들을 통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조건, 그리고 산다는 것은 진정 무엇인지를 생각게 한다. 우리들은 생존을 위해 무엇까지 포기할 수 있는가?

 

세대를 이어가며 상시 8만 명의 생존유지가 가능한 세계가 목적인 곳, 그래서 최소의 필요로 살아가야 하는 곳이기에 효율성을 덕목으로 하는 합리(合理)가 최고의 원칙이다. 사치, 유희, 쾌락, 종교, 예술, 감정 등 인간의 모순을 촉발하는 변수들은 금지, 제거되고, 욕망과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균형제라는 약물을 정기적으로 투여한다. 한편, 세대를 거듭하며 방벽 바깥이란 모두에게 각인된 근원적 거부로서의 의미를 띠게 됨에 따라, 모든 허구는 모순이라 여겨지고, 상상력은 죽은 단어가 된다. 실무자로 지칭되는 모든 구성원들은 점차 중재자의 합리에 길들여져 간다. 허구, 이야기, 상상력은 도시의 안정과 지속을 위협하는 개념이 된 것이다. 합리를 구성하는 효율성의 관점에서 허구는 불필요한, 군더더기요, 생존의 필요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기록은 그래서 철저하게 군더더기가 제거된 사실인 필요 내용이외에는 기재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융통성, 충동, 소중함. 애착, 애도와 같은 생존의 필요라는 효율성의 기준과 모순되는 단어들은 전부 죽은 단어가 된다. 한편, 사실로 확인되지 않거나 확인될 수 없는 꿈이나 상상과 허구를 이야기 하거나 이를 듣고도 중재자에게 고발하지 않는 실무자도 결점을 부과 받는다. 생애 연령 한도에 이르기까지 결점이 7회 누적되면 즉시 부적격자가 되어 3병동에서 소거된다. 하나의 예로 워터드롭이라는 중재자와 소통하는 일종의 리시버가 있는데, 이의 미착용도 결점 대상이다. 모든 대화는 이 워터드롭을 통해 중재자에게 전송되고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다. 일종의 감시체계이다.

 

따라서 이를 귀에서 제거하는 행위는 집단규범을 위협하는 행위가 된다. 이제 오류사건의 의미를 말 할 때가 된 것 같다. 오류사건이란 생애연령 한도에 도달하기 전에 몽증을 겪으며, 욕망과 감정을 통제하는 균형제라는 약물의 투입으로도 완화되지 않는, 결국 자기 소거를 감행하는 부적격자의 발생이며, 이는 실무자들에게 심리적 영향을 끼쳐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실무자가 사망하는 일종의 재난을 일컫는다. 소설의 시작문장에 생애한도가 연장될 수 있다는 것은 실무자의 무더기 결손으로 불가피하게 한도에 도달한 실무자들의 연령한도를 연장하여, 중재도시의 정상적 순환을 가능토록 하는 조치이다.

 


실무자들은 중재도시에서 세대를 이어가며 생존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자신들의 감정과 쾌감과 욕망, 그리고 꿈과 상상력, 이야기마저도 효율성이라는 합리를 위해서. 이는 다시 말해서 인간이 지닌 모순성, 즉 두 가지의 판단, 사태 따위가 양립하지 못하고 서로 배척하는 상태에서 갈등하는 존재이기에 이 모순을 소거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꿈이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현상이고, 이는 다양한 상상을 낳는다. 이 상상은 마음에 홀로 담기에는 버거운 것이고, 발설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또한 방벽 밖의 세계가 제아무리 근본적 부정을 의미한다지만 호기심, 궁금증은 물론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무수한 가공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지식을 늘려나가고, 그 무지를 줄여나감으로써 경계 밖의 존재자들은 물론 다름을 수용하고 포용성을 확대해 나간다.

 

그러나 중재도시에서 이것은 도시의 생존을 위협하는 범죄적 행위다. 합리의 저해는 곧 도시의 생존성 저해인 까닭이다. 오류사건으로 인해 생애 한도가 연장되자 소거 대상자의 최후 기록을 담당하던 1병동 근무자인 세인은 한시적으로 부상 또는 질병 실무자들을 치료하는 2병동에 근무하게 된다. 세인은 방벽에서 떨어져 기억을 상실한 방벽유지 보수 실무자인 레드를 담당하게 된다. 기억을 상실한 레드는 세인에게 허용되지 않는 군더더기의 이야기들, 사용하지 않는 죽은 단어들은 물론 도시 공용어인 존중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어느 날 레드는 자신의 귀에서 리시버인 모세를 빼 내고는 세인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암묵적 신호를 보낸다.

 

중재자가 들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지만 모세를 차단한 시간이 168시간, 일주일이 경과하면 결점이 1회 누적된다. 168시간은 레드가 결점 부과 한계시간을 알기 위해 자신의 귀에서 빼내 알아낸 사실이다. 부적격자로 강제 소거 될 위험을 알면서도 저지른 행위라는 점이다. 자신에게 죽음의 가능성이 설정된 한도보다 빨리 도래할 것임을 알면서도 저지른 이 행위는 그저 단순한 일탈이 아니다. 그는 내부 체계가 금지한 것, 특히 상실된 선택이라는 자유를 행사한 것이다. 무결점 실무자인 세인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 역시 발설되지 않은 자신만의 꿈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 머릿속 상상의 세계에서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에 레드의 제안을 수락한다. 모세를 자신의 귀에서 빼내고 레드와 세인은 자유롭게 확인되지 않은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군더더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너무도 많은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물음들이 내재하고 있다. 생애 한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날이 도래하면 자발적으로 소거되는 삶에 대한 물음, 타인의 상상과 그에 기초한 이야기 나눔의 금지란 대체 인간에게 무엇인지, 그리고 방벽 바깥이라는 잊혀진 부정의 세계, 다시 말해 금지된 무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 그 앎의 욕구에 대한 본질적 물음이다. 이에 더해 적격과 부적격의 구분이란 것의 그 자의적 분별이란 것 또한 중재도시가 금지한 허구의 하나가 아닌가하는 것이다. 이제 모두에 인용한 자기의 삶을 장악한 자의 의미가 조금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외부에 무언가를 바라거나 거기에 어떤 목적을 두지 않는 내적 확신을 지닌 주체적 존재의 힘으로서 인간의 존재 조건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체계에 순종한 한 실무자의 고발에 의해 강제 소거된 레드가 14년 전 방벽 너머에서 보았던 하얀 머리를 한 낯선 인간에서 발견된 자기 삶을 장악한 자로서의 삶을 위해 세인은 3세대 이후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굳게 닫힌 방벽의 육중한 출입문을 열어젖힌다. 세인의 이 행위에도 여러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는데, 그는 레드의 몽증(夢症)을 공유했으며, 부적격자인 레드에 대한 애착을, 그리고 허구를 재생산하고, 이윽고 그것을 실행한 것이다. 그리고 세인은 레드를 이렇게 기록한다. 얼마나 비합리적인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반짝거리던 사람이었는지.”라고.

 

우리는 이야기를, 허구의 소설을 왜 읽는가? 우리는 왜 꿈을, 희망을 갈구하는가? 아마 그것은 알지 못하는 내 인식 경계 너머의 존재와 존재자들을 알고자 함이요, 그를 통해 혹여 금지와 배제로 자기만의 동굴 속, 그 편협과 왜곡에 묻히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또한 두려움의 지대를 벗어나 가능성이 숨 쉬고 있을 경계, 방벽 너머로 나아가려는 삶에 대한 무한한 의지와 용기일 것이다. 세인을 따라나선 이폴, 그들은 언어라는 한정된 영토를 떠남으로써 새로운 언어를, 그 낯선 지대를 발견하고, 허구로 치부되었던 바깥이 곧 진실임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은 왜 허구의 이야기가 읽혀야 하는지를 강하게 역설하는 작품이다. 또한 바로 그 상상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언어와 삶의 조건들을 발견하게 되고, 자유라는 선택의 주체로서 자기 삶의 지평을 확장해 나갈 수 있는 것임을 이야기 속에서 절로 깨닫게 이끈다. 레드의 차트를 기록하는 세인의 눈동자에 깃든 작은 불꽃, 또 그것을 바라보고 기쁨을 느끼는 이폴의 마지막 모습에서 인간의 모순성, 절망적 상황에서 죽음을 희망하며 한편으론 삶을 갈구하는 비합리가 어쩌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일 우리들이 어떤 특정한 집단만의 공동체를 꾸린다면, 그래서 그곳에서 생을 누려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생존을 위해 꿈과 감정과 선택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을까? 효율과 합리성만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 수 있을까? 이 소설은 자본주의의 척추인 이들 합리가 최고의 원칙인 오늘의 세계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앗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반면교사일 것이고, 감정과 상상력과 허구의 이야기가 지닌 그 강력한 힘이란 무엇인지를 깨우치게 하는 작품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한 호흡에 내쳐 달려 읽게 되는, 그와 동시에 굵직한 인간 삶의 본래적 조건을 생각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너의 처지를 기꺼이 상상하는 용기, 그러한 힘들이 이 무심한 세상을 완전히 박살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은 거라는 작가의 말로 감상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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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정치+철학 총서 5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최장집 한국어판 서문, 박상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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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다시금 소환되는 까닭은 바로 지금 한국사회가 처한, ‘위기가 일상화된 비상한 시기에 대응하는 정치론으로 써진 책이라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오늘의 민주주의 정치사회에서 수용될 수 있는 것은 극히 소수의 문장일 것이고, 다만, 최초의 사실주의 정치 행동론의 저술이라는 점에서 반면교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군주론단지 절대적 전제군주의 치국과 치정을 위한 책략과 자질(태도)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다만, 그것은 제15사람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군주가 칭찬 또는 비난받는 일들에 관하여에서 거듭 강조하듯, 사변적 상상력보다는 사물에 실효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한 일이라며, 군주론은 정치적 행동주의로서 군주의 행동 방향을 말하는 것이지, 군주이외의 정치권력을 상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군주론이 집필된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가 이전투구(泥田鬪狗)의 혼돈과 약육강식의 시대였음을 새삼스레 설명하는 것은 진부할 정도이니 여기서 서술하는 것은 생략한다.

 

상호 먹고 먹히는 침략과 병합의 반복을 지속하는 이탈리아의 분열상을 끝내고 통일된 강대국의 건설을 위한 절대군주의 한 정형적 모델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군주론은 오직 이 소임을 달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절대군주의 비르투(virtu ;자질, 역량)의 서술이다. 이 자질이 수행됨에 있어 그 배경이나 수단에 있어 백성의 호감은 음모에 대한 안전책이라던가, 군주에게 가장 훌륭한 요새는 백성이다. 훌륭한 요새는 백성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것과 같이 민의 기반을 말하는 것은 오직 군주의 통치 안정과 유지를 위한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이것을 공화주의 토대니 민주주의의 토대니 하는 것은 책의 의도가 아닌 후대의 자의적 해석일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은 통치 권력의 쟁취와 그 유지술책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마 이 책의 가치를 구태여 논한다면 도덕적 혹은 종교적 이상주의의 낡은 정치적 관념을 벗어나 정치적 사실주의에 기초한 최초의 경험주의적 정치의 장을 열었다는 점일 것이다. 정치를 도덕적 규범이나 종교의 세속적 실천 규칙으로 접근하면 할수록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멀어지고 정치의 타락은 심화되기 때문이다. 도덕적, 종교적 담론이 자기 이익추구의 인간 욕구를 배제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공공선을 의무로 해야 하는 자들에게서 도덕적 종교적 의무감으로부터 이탈하게 하기 때문이다. 정치를 허울 좋은 이상주의 장막으로 가리고 그 뒤에서 얼마나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추악함이 요동치는가. 마키아벨리는 그 장막 이면을 드러내놓음으로써 현실 정치의 효능을 갖는 진짜배기 정치윤리를 찾으려 한 것이다. 군주론은 부정성(否定性)의 반성적 측면으로 독해함으로써 오늘의 이해를 지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읽어야 할 곳으로 제 7타인의 군대와 행운으로 얻은 신생 공화국에서 군주론의 절대군주 모델이 된 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서자로서 로마냐 공국의 군주가 되었던 체사레 보르자(발렌티노 공작)의 기만술 사례다. 점령지 로마냐 지방에서 저항과 반란의 목소리가 빈번해지자 심복인 레미로 데 오르코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파견한다. 레미로가 잔혹한 조치의 수행으로 평정하자, 그 잔인성은 체사레 보르자 자신과는 무관한 오직 그 자의 성품 탓이라고, 그를 참살하여 두 토막 내 광장에 놓아둠으로써 비난이 자신에게 향하지 못하게 한 일화다. 악역으로 이용하고 죽음으로 내치는 것인데, 한국의 작금의 상황에서 펼쳐지는 어제의 심복을 사살 명단에 넣은 것은 살아있는 실례(實例)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군주론은 엄청 나쁜 머리라도 이해 할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이며, 나쁜 머리로 이해될 수 있는 책이기에 그 나쁨을 그대로 모방할 능력이외에는 없는 인간들 때문에 이 책은 불온하기 그지없는 책이라고도 하겠다.

 

마키아벨리는 유독 포르투나(fortuna ; 행운, 운명)와 비르투(virtu ; 용기, 자질, 역량, 야만성)의 적절한 조화와 더불어 비르투의 함양을 강조하고 있는데, 결국 포르투나는 인간 개체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비르투가 절대군주, 이를테면 오늘의 독재자에게 더없이 요구되는 역량이라 할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권력 쟁취를 위한 모든 자질을 비르투라 하는 것은 아니다. 동료 시민을 죽이고, 배신하고, 신의 없이 무자비한 행위로 찬탈하는 것은 비르투가 아니라고 제 8극악무도한 행위로 군주가 된 인물들에서 시칠리아의 폭군 아가토클레스의 힘은 비르투가 아니라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사례의 기저로부터 마키아벨리 이전의 정치와 그의 정치술, 즉 근대적 정치론으로 나뉘는 하는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출현한 것일 테다. 그는 폭력이 단번에 모두 실행되어 이후에 지속되지 않으며,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 수단으로 바뀔 경우잘하는 정치라고 부르고, 폭력(잔혹한 행위)이 드물게 시행되다 점차 그 빈도가 증가하는 경우.”잘 못하는(나쁜) 정치라고 부르고 있다. 인민을 안심시키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위협과 가혹행위를 저지르는 권력자는 권력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15장과 17장은 군주론 중에서도 악랄한 독재자(절대군주)의 행위를 정당화 하는 몇 장에 해당한다. 15사람들, 특히 군주가 칭송받거나 비난받는 행동들에는 선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곧 몰락할 것이다.” 라며, 자신을 보존하고자 한다면 상황에 따라 선하지 않게 행동하는 법을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악덕 없이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면, 그 악행으로 인해 나쁜 평판이 발생하는 것을 개의치 말아야 한다.”, 절대군주의 지위 보신에 역점을 두고 있다. 오늘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악덕이다. 주권의 소재가 인민에 있는 정치사회에서 가당치도 않은 자멸적 행태라 할 수 있다.

 


17인자함과 잔인함, 두려움의 대상이 될 것인가는 한 술 더 떠서 백성의 결속과 충성을 바치도록 할 수 있다면 잔인하다는 비난을 걱정할 필요 없다. 소수의 몇 명을 가혹하게 처벌해서 질서를 잡는 것이 공동체 전체를 위해 자비로운 행위다.”라며, 인간은 본디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럽고, 위선적이고 기만에 능하며, 비겁해서 위험을 피하려고만 하고, 이익에 눈이 어둡기에, 걱정 요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인간 본성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다. 이것은 한국의 특정 지역민의 선거투표 행태가 보여주는 자신들을 개, 돼지 취급해도 다시 자신들을 무시하는 인물을 위해 투표하는 행위가 여실히 마키아벨리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니 인간 오물에 불과한 잡놈이 1년만 지나면 저것들은 모두 잊어버린다는 망발(妄發)을 할 수 있는 것일 게다.

 

해서 마키아벨리는 이런 말이 가능했을 것이다. 가장 악명 높은 장으로 지목되는 제 18약속을 지키는 법에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군주들은 신의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기만을 통해 사람들을 혼란시키는 데 능숙했다며, 인간은 매우 단순하고 눈앞의 필요에 따라 쉽게 움직이기에, 능숙한 기만자이자 위선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마키아벨리가 살던 당대의 정치 감시체제는 오늘의 정치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폐쇄적이고 낙후된 것이었기에 가능한 말일 것이다. 물론 지금에도 폐쇄된 장막 안에서의 밀실 정치를 모두 헤아리는데 한계가 있으나. 그 정치적 행위가 표면화되는 순간, 엄청난 저항과 법의 세례를 마주해야 할 것이다.

 

이어서 사람들은 겉모습과 결과에 현혹되기에 외양만 자비롭고 신의가 있으며 정직한 것처럼 보이면 된다.”고 주장한다. 오늘은 이러한 위선과 기만이 가려지는 시대가 아니다. 이 말을 오늘에 실천하려했던 머리 나쁘고 탐욕스러운 인간의 저 비겁한 작태를 보라. 19경멸과 미움을 피하는 법에 이르면, 권력유지를 도와주는 집단이 부패했다면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이 좋아하는 방식을 따라야 한다. 군주의 선행은 오히려 군주에게 해로운 일이다.”고 부패에 합류하고, 그 부패를 막아서는 군주는 오히려 위험하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것이 지금 파면을 앞둔 독재자를 지지하는 파렴치한 무리들의 작태이다. 보수란 이처럼 무엇인가의 근절을 막는 반동적이고 퇴행적 행태, 즉 마키아벨리가 인간의 본성이라 인식한 그 더러운 습속의 다름 아니다.

 

25운명은 인간사에 얼마나 강력하고, 인간은 운명에 대하여...에서는 급기야 나쁜 짓을 하고도 벌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이라는 군주론의 정치핵심이 드러난다. 필요할 때 주저 없이 사악해져라. 오로지 선만으로는 권력을 지킬 수 없다. 덕이 없어도 그것을 갖춘 것처럼 위장하라.”라고, 중요한 것은 오직 결과라고 선악의 잣대는 정치에서 부질없는 것임을 역설한다. 이것이 바로 세간에 회자되는 그 악명 높은 마키아벨리즘의 실체다. 이것은 마키아벨리가 시종일관 사용하는 개념어인 네체시타(necessita;불가피성)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은데, 세상만사는 모두 인간 의지와 이성의 통제 밖에서 움직인다는 상황 대응론이다. 이것이 모순인 것은 포르투나에 제약 받음에도 비르투를 통해 극복하고 대응하여야 한다는, 책 속 무수한 성공 군주들의 사례와 상충하는 것이다.

 

막상 잔혹한 폭력성과 거짓, 기만, 위선을 행할 때면 상황론, 즉 네체시타라는 운명론을 들고 나오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나의 독해와 반대 측에 선 정치론자들은 군주론은 선악을 초월한 정치 고유의 윤리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 고유의 윤리란 것이 인간 사회의 보편적 도덕윤리와 별도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의 대답은 대의를 위해 작은 의의는 희생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나는 이러한 영웅주의적 대의 정당화 논리의 역겨움을 여러 지면에서 지적한 바 있다. 제국주의의 논리요, 서세동점의 논리이며, 강자의 논리이다.

 

이것에 적절한 응답이라면 제21탁월한 존재로 여겨지려면 군주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발견되는 정치에서의 어떤 국가든 항상 안전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어떤 선택이든 꼭 필요한 것인지 의심해봐야 한다.”는 문장일 것이다. 정치에는 완벽하게 안전한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선택은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어야 하며, 배제됨이 가장 작은 다수의 충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일 것이다. 악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선하지 않을 수 있음을 배워야하는 것만으로는 바른 정치가 설 수 없다. 폭력에 비폭력으로 대항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어야 하고, 그 비폭력적 저항이 수용될 수 있는 사회만이 인민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정치 이론가들은 말한다. 수단의 합리성만 다루는 정치론은 오늘의 정치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헛소리! 이렇게 기만적인 소리들이 식자연(識者然)하며 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 오늘의 정치는 그 어느 때보다 수단의 합리성, 법적 근거와 국민의 목소리라는 정당성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지, 이 수단을 배제하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실천적 결과주의는 지금과 같은 패덕(悖德)을 낳는다. 목적론적 초법적 행위는 언제나 민의 희생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이상적 정치를 향한 노력의 경주가 그치는 순간,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근간에 대한 경계의 감시를 게을리하는 순간 인간 사회는 다시금 저 퇴행적 야만의 세계로 회귀할 것이기에.

 

이 책은 그칠 줄 모르고 피바람을 몰고 오는 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좌절하는 수많은 인민들의 갈망이 담겨있는 저술이다. 힘의 논리에 의해 수없이 반복되는 불안정한 생의 환경에서 절망하는 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통일된 이탈리아를 세울 강력한 군주의 출현을 위한 한 순간의 대의를 위한 참담한 제언으로 읽혀야 한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시종 인민(백성)의 시선을 그 권력의 토대로 삼고 있는 것일 게다. 그는 실효적 진실을 추구함으로써 정치의 그 생생한 민낯을 드러내어 권력의 한계를 인식시키고, 술책의 한계가 절로 떠오르게 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간과하고 특정 문장의 서술만을 꺼내 그것을 아전인수격으로 사용하는 것은 곧 독재자와 그 기생자들의 불의한 정당화 논리가 될 뿐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세심하게 읽어야 하는 저술이다. 이것은 독재자를 위한 저술이다. 그러나 그 한계를 말한 것이고, 그 저변에 흐르는 정치 윤리적 토양은 민중주권과 시민참여의 정치다. 군주론으로 마키아벨리를 읽는 것으로 그쳐서는 이러한 그의 정치적 신념을 해독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를 읽는다면 필히 공화정과 민주정을 말하는 그의 로마사 론을 읽음으로서 완성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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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가 다른 곳에서 이미 말했다는 것은 그의 저술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 첫 10권에 대한 강론(Discorsi sopra la prima daca di Tito Livio)이다. 국내 번역본으로는 로마사 론, 로마사 논고마키아벨리 로마사 이야기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 이 글은 세 권의 국역본 군주론을 읽고 그 감상을 쓴 글이다. 주로 읽은 책은 후마니타스에서 출간한 박상훈 옮김, 최장집 해제의 군주론이고, 보조 읽기용 책으로 이시연 번역자의 더스트리 출간본이며, 이상두 선생 번역의 범우사 출간본은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1975년의 번역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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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7 13: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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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7 13: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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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니트 에디션) (3종 중 1종 랜덤)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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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허물을 벗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인 채 존재하는 기분이 어떨지 궁금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부분은 간직하는지...” - 59

 

소리, 지우, 채운, 소설의 세 주인공이다. 아이들은 오직 자신만이 답할 수 있거나, 스스로가 깨고 나와야 하는, 제 각기 자신에게 던져진 물음에 묻혀 있다. 그것은 폭력 가장에 대한 분노이고, 엄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이며,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원망이기도 하다. 마음에 버거운 물음들이란 그 정답이란 것이 애초에 있지도 않은 것이고, 어쩌면 생의 여정이라는 시간 속에서 여물게 되는 것일 게다.

 

지우는 뇌종양을 앓던 엄마가 실족사하고, 엄마의 남자 선호아저씨 집에 의탁하여 산다. 지우는 작은 도마뱀인 용식을 돌보며, 서로 의지하는 삶을 산다. 지우는 엄마의 실족사가 자신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엄마로부터의 버림받음과 희생이라는 원망과 안타까움의 감정을 오가게 한다. 소리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손이 닿은 사람들의 윤곽이 흐려지면 상대가 죽는다는 느낌을 갖게 됨에 따라 쾌활한 성품에서 사람들과 차츰 멀어지는 고립된 삶 속으로 들어간다. 소리는 오랜 투병을 하던 엄마를 잃었다.

 

채운은 지우와 소리가 있는 학급의 전학생이다. 그는 축구 선수의 삶을 의도된 부상으로 중단했다. 아버지의 무능과 폭력, 엄마에게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던 아버지의 살의에 대항하다 사고가 난다. 엄마는 채운을 대신하여 수감된다. 채운은 엄마의 수감, 그리고 사고의 불가피성과 응징하고 싶었던 욕망의 소용돌이에서 번민한다. 채운은 그의 반려견 뭉치에 의지하며 이모 내 신세를 진다.



소설은 그렇게 각자의 작은 재능과 타인의 시선을 반영하며 자기 이해를 넓혀나간다. 고사리 숲 사이로 노란 홍채가 고요히 빛나는용식이 여러 번 허물을 벗으면서 여전히 자신인 채 존재하듯, 세 사람은 그렇게 자신들 밖의 세계를 겪어내며, 동일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해 나간다. 지우가 연재하는 많은 지문을 지닌 만화 <내가 본 것>을 통해 채운이 자신과 타인의 번뇌를 읽어내고, 공사장 노동현장에서 하루하루 악착같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로소 인식하며, 자신이 그리는 이야기 속 주인공들을 다 죽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결국 그 마음을 내려놓는 것임을 깨닫는 것처럼, 아주 조금씩 미세하게 변하는 세 사람의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세상은 남의 불행을 바라는 저열함도 있으며, 상대적 약자를 무시하고 따돌리려는 유치하고 가혹한 놀이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부모님 병원비 마련을 위해 혹독한 노동을 감내하는 사람들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를 향한 따뜻한 손길도 존재하며, 순간의 비뚤어진 감정을 관대하게 용서하는 엄마와 같은 마음도 있다. 이 작품도 많은 성장소설들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지만, 세상의 편력을 거친 끝에 어떤 특별한 재능이나 지위를 이루었네 하는 얘기는 아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냥 그래도 괜찮다고, 우리 안의 무언가 작은 변화를 깨달은 그 마음을 지니는 것 자체를 긍정하는 이야기다. 소설을 읽어나가며 어느 순간부터 지우, 소리, 채운이 자신들의 물음을 쫓아 내딛는 발걸음들을 숨죽이고 응원하게 되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어른들이 할 일이 아주 많다. 내부자의 시선은 많을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경계 너머의 타자의 세계를 생각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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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K사상을 위하여 -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2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2
백낙청 외 지음 / 창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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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일체(一體). 풀잎 하나도 나의 동포이며, 경외의 대상이라는 자각이 없으면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구현할 길이 없다.” -23쪽에서

 

대표 저자인 백낙청 선생과 유학연구자의 대담 중 세계 정신의 지도국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력, 군사력을 토대로 다른 나라의 자발적 복종이나 수긍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이념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접할 수 있다. 그러한 사상의 씨알을 우리는 일찍이 가지고 있으며, ‘궁극적 변혁을 위한 수단으로서 한국 근 현대 사상의 뿌리인 개벽 사상’, 특히 후천개벽의 사상으로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 개교 표어는 물론, 동학과 천도교 등 20세기를 전후하여 등장한 종교 사상들이 현실의 냉철한 직시와 그에 부합하는 정신의 각성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특히 산업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이 몰고 온 인간의 노예로의 전락이라는 심각성에 주목하고, 정신 주체를 바로 세워 물질을 선용할 주인의 위치로 되돌려 놓으려는 원불교 소태산(少太山) 대종사의 사상이야말로, 오늘 인간 사회가 마주한 긴박한 문제들을 모색하기 위한 보편적 사상의 길을 열어놓았다고 수용하는 것 같다. 결국 후천개벽의 사상이 작금의 세계 - AI의 세계 침투로 인한 인간 삶의 변화, 기후 변화에 따른 인간 태도,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인간정신의 물신화 풍조, 사회적 양극화 심화 및 성 평등의 문제 등등 - 를 올바르게 진단 해석하고 그 대응을 위해 한국과 동아시아는 물론 서양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의 태도에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인가의 모색이다. 인류가 함께 사는 길이 무엇일지 탐구하기 위해 동학과 원불교, 천도교의 사상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시야를 광대하게 넓혀 보편성을 가지는 우리의 사상, K사상이 무엇일지 고민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책은 앞서 출간된 개벽 사상과 종교공부에 이은 보완으로서의 공부 과정으로, 대표저자인 백낙청 선생의 주제 하에 비교 종교학자, 원불교 교무, 유학(儒學) 연구자, 그리고 개벽 사상의 공부를 함께했던 두 전문 독자와의 대담을 담고 있다. 두 전문 독자는 대표 필자의 두 저술인 인간 해방의 논리를 찾아서서양의 개벽 사상가 D.H. 로런스를 전제로 후천 개벽 사상과의 연결된 논리, 서양 사상 특히 하이데거와의 충실한 만남을 통한 K사상의 나아갈 길을 성찰한다. 사실 서양 사상의 계보와 흐름은 근대라는 과학 계몽과 식민제국주의와 더불어 과격하게 흘러 동양의 사상을 제압하고 여전히 유유히 흐르고 있다. 냉정하게 말해 그들의 철학과 사상 이외에 보편적 사상이라고 세계에 제시하여 새로운 정신세계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그 어떤 것도 동양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일 것이다. 한국의 철학자, 일본의 철학자라 해도 서구 철학의 아류로서 그네들의 철학 논리 하에서 답습하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어쨌거나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국 사회의 담론과 사상의 주도자들이 자신들의 관점을 되살려 서양 사상이 좌절하거나 실패하고 있는 지점에서 동양의 사상이 바로 그 지점에서 사상적 해법을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을 알게 된 것은 반갑고 기쁜 일이다. 하지만 서양 사상가들의 주객 이원화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된 현상학의 출발 이래 그 계보의 흐름은 객체지향의 철학, 존재론적 실재론 등의 관점 하에 직면한 이 세계를 성찰하고자 하는 노력들에 대한 대표 저자의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사고에 관해서는 무슨 커다란 새로운 이론을 내놓았다는 듯이 그러는 게 좀 가당찮다는 생각은 서구 사상과의 충실한 만남이라는 태도를 의심케 한다.

 

또한 K사상의 세계 선도사상으로의 모색처럼 이웃 나라인 일본의 경우에도 이미 서양의 상투적 형식논리를 벗어나 자신들의 정토신앙과 선불교, 그리고 대중에 내재된 민간신앙에 의해 사물과 주변 환경 속에서 일상의 경험을 조직하는 것으로서의 애니미즘을 융합한 J 사상을 모색하고 있기도 하다. 지상에 존재하는 생명이나 여타의 것들에 대해 겸허한 자세를 갖추는 것,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소중히 여기며 풍부하게 만들어가고자 하는 시대 변화에 따른 보편성의 철학을 사유하고 있다. 그들도 동아시아의 이중과제인 서구의 근대과학문명과 형이상학의 극복이라는 인식은 공히 우리와 다르지 않다. 대표저자의 지적처럼 모든 생명이 존귀하고 살생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벌써 수천 년 동안 해 온 것이 사실일지언정, 서구 휴머니즘과 하이데거의 존재론 또한 존재론의 부활을 위한 시도임에는 분명하지만 이 시도는 존재론의 의미를 변화시킴으로써 이루어졌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그의 존재론은 존재 자체에 대한 탐구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존재에 대한 존재에 관한 탐구가 되어 인간에-대한-존재에 관한 탐구로 변화되어 인간의 접근에 관한 심문이 되었다는 비판이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에서라도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바로 오늘의 시대에 인간인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관점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폄훼할 것이 아니다. 그동안 이러한 사유가 우리에게 있었고,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될 것이라고 주도하지 못하지 않았나? 공부는 겸허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남의 생각을 보다 깊고 넓게 되새겨 볼 수 있는 것 아닐까하고 여겨지는 지점이라 잡설을 늘어놓게 되었다. 대표 저자의 설명처럼 존재론은 결국 모든 존재자가 공유하는 그 존재성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토론이듯, 현재 진행 중인 서양과 동양의 사상 속 존재론에 대한 탐구에 보다 열린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원불교가 중시하는 독트린의 하나인 무아윤회(無我輪廻)또한 그렇게 독특한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개체의 해체이자 새로운 형성으로 환생을 정의하며, 개체는 단순한 결합으로 소멸하지만 본질 자체는 형이상학적으로 존속한다는 서양 사상의 흐름도 있다. 쇼펜하우어의 소품과 부록중 한 논문으로 우리의 참된 본질은 죽음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에 관한 이론과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Ⅱ43<특성의 유전성>은 무아유전의 서양인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K사상을 어떻게 세계 보편 사상의 길로 걷게 할 수 있을지에 탐구인 동시에 공부이기에 특정 종교와 신앙에 갇혀 사상이 독불장군식 편협함으로 기울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에서 얕은 생각을 소개해 보았다.

 

끝으로 공부하는 책으로서 탐구의 한 과정이라 인식하기에 한 가지 납득하기 거북한 지점을 제기해 본다. 인과보응에 기반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가 정도를 걸어야 할 이유가 사라지고 인생은 무너진다. 세상은 답이 없는 혼란한 세상이 될 것이라는 구절이다. 과학성과 과학적 지식의 구별을 설명하는 여정에서 인식이 과학적이어야 함의 강조와 어쩌면 관련된 물음이기도 할 것 같다. 이 문제는 이미 오래된 철학적 논의라서 새삼스럽기까지 하지만, ‘만일 법칙들이 필연적이지 않다면 세계도 의식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단지 일관성도 잇따름도 없는 순수한 잡다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라는 근대 계몽주의자들의 과학적 인식의 주장은 과학적 인식이 약화되거나 사라지면 곧 세계에 대한 주관적 표상 일체가 와해된다고 결론짓는 것인데, 여기에는 중대한 결점이 있어 보인다. 어떤 법칙도 따르지 않는 세계는 그것이 정돈되어 있는 대신 카오스적이어야만 한다는 필연적 법칙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 가이다.

 

대체 그 정당성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자연의 안전성과 필연성을 동일시하는 연역은 심하게 그릇된 것 아닌가? 필연성, 즉 인과성의 부재를 곧바로 안정성의 부재로 확장하는 그 무의식적 추론에 대해 그 출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여겨진다. 과연 과학적 인식의 세계는 정말 선물인가에 대한 위험을 동일하게 지각하지만 그 근원에서 커다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중요한 차이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사유를 위해 과학적 인식이란 정말 요구되는 것인가에서 바로 갈라질 것이다.

 

나는 은혜 속에 살고 있으면서 보은의 생각이 없는 오늘의 우리네에게 요구되는 타력(他力)의 지적이나, 공변 될 공()과 빌 공()의 밀접한 관계에 주목한 원불교의 사상, 물질개벽이라는 현실 체제의 이해와 그에 맞춘 필요개념과 인재를 만들어 내려는 정신이 이미 우리네 사유에 깃들어 있음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음에 감사한다. 아무쪼록 후천개벽 사상을 토대로 하여 보다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세계의 사상으로 내딛는 걸음걸이가 확고하게 다져지고, 그 정신에 깃든 양성평등과 민초들이 역사의 주체임과 배타성이 사라진 모든 사상이 하나의 진리로 구현 될 수 있기를 진정 응원하고 기대하는 마음이다. 퇴계의 충고처럼 부디 치열한 부석(剖析)’의 과정을 통해 당당히 K사상이야말로 당면한 인류의 현안을 분석 규명하고 그 대안적 가치를 제안할 수 있는 보편 철학으로 거듭 나기를 기원한다. 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지원한 ()창비에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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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에 관하여
요한 G. 치머만 지음, 이민정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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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든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진정으로 위대해질 수 없다.

더불어 우리는 고독을 통해서만 자신을 파악해 낼 수 있다.” - <서문>중에서


나는 고독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오래 전 서울대 문리대가 있었던 동숭동 가로수 길의 작은 카페 오감도의 실내에서 타오르던 난로와 적막한 고요를 더욱 깊어지게 하던 책 장 넘기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리던 분위기에 대한 기억으로 향한다. 지금은 그 풍부한 적요함의 풍광이 모두 사라져버려 더는 찾지 않는 곳이 되었지만, 내 기억 속에는 그때만큼 마음을 가득 채운 충만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소음과 관계로부터 차단된 느낌, 오직 세계에 홀로 내 존재로 가득해진 마음, 그 평온과 온전함의 순간을 다시 찾기 위해 내 상상은 달려가곤 한다.

 

그렇게 달려가곤 했던 회수만큼 나는 고독의 상념이 고착화되어 있다. 때문에 그 고독의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18세기 사상가의 고독에 관한 이 에세이를 읽게 된 것은 쇼펜하우어가 고독을 찬미할 때 잠깐 언급한 인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줄곧 고독(solitude)’에 대한 그리움의 의지였을 것이다. 나는 고독을 사회관계를 위한 열정의 회복이나 활기의 충전과 같은 사람들의 세계 진입의 휴식으로 말할 생각도 없으며, 심원하고 고매한 사색의 방법론과 같은 삶의 유별난 지혜라고 말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어쩌면 오래도록 봉인되어 적절한 순간에 힘을 발휘하기를 기다려 온 젊음의 감정, 혹은 사랑의 불씨를 되살려내 달콤한 회상에 젖어들고 싶어 하는 욕구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의 저자 요한 게오르그 치머만은 고독을 말하기보다는 고독의 영향, 고독의 이점과 같은 실리의 측면에서 기술하고 있다. 물론 고독은 인생의 온갖 우여곡절을 정신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부수적 과실로 효과와 효용성을 말할 수 있다. 아마 삶을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이 그 삶의 유익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행위라면 고개를 돌릴까 저어되는 마음에서 혼자 하는 시간에 대한 화려한 수사들을 늘어놓은 것일 게다. 고독과 침묵 속에서 명상에 잠기다보면 일상의 상태와는 다른 더 고양된 상상력의 촉진과 고상한 구상의 산물이 출현하기도 하고, 순수하고 정제된 기쁨을 맛봄과 동시에 지적 즐거움에 몰입함으로써 존재에 들러붙었던 세상의 오물들을 생각에서 떨어낼 수도 있다. 더구나 자기 내면의 힘을 마음껏 즐기는 가운데 고양된 정신은 자연스레 고결한 주제의 사색으로 더없이 행복한 느낌을 가져다주며 삶의 시간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깨우치게 한다.

 


혹자들은 말하곤 한다. 바삐 살아가는 지엄한 경쟁사회에서 한가하게 고독 타령을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감상(感傷)에 불과하다고, 서둘러 정신 차리고 대열에서 이탈하지 말고, 더욱 현실에 매진하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현실의 삶이라 부르는 바쁜 경쟁의 한복판에서 지속하려면, 그 소진과 소멸의 억제를 위한 휴지기가 있어야하고, 나아가 삶의 투쟁을 계속할 수 있는 열정의 충전이 필요하다. 잠시의 오롯한 사색의 시간, 고독한 시간을 상실한 오늘의 우리네 얼굴들은 텅 빈, 내면의 공허로 그득한 그 결핍을 반증하듯, 온통 마음공부니, 자기사랑이니 하는 책들과 강연이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지 않은가. 치머만의 지적처럼 고독은 인생이란 험난한 바다를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타고 나갈 수 있는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고독은 이처럼 삶의 동력이기도 하지만, 보다 궁극적인 것은 마음의 평온이고, 이것이야말로 산다는 것의 지고(至高)한 행복일 것이다. 어느 한 때, 바위 들 사이에서 작은 물줄기의 부드러운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평원을 거닐며 신선한 미풍을 들이마시던 기억 속으로 돌아가는 것, 그 순간 속에서 잇따르는 사유의 세계를 헤아리는 시간만큼은 완전한 자유와 고고한 우수(憂愁)의 경외와 황홀의 기쁨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옆에 누군가 있어도 좋다. 서로의 침묵 속에서 고독의 기쁨을 이해하고 다정한 눈빛의 교환만으로 사랑과 축복의 시간이 되어 줄 터이다.

 

치머만의 고독에 대한 찬미의 많은 에피소드와 단상들을 읽다보면 절로 고독의 시간, 그 내밀하고 기품있는 시간에 시샘이 일어날 것이다. 세상과 관계의 번잡스러움에서 잠시 거리를 두고 싶을 때 치머만의 책 어느 곳을 펴들고 읽다보면 어느 덧 행복의 고요한 열기가 맴돌던 장소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깨끗하고 고결한 마음의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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