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 인도의 이력서 / 동방순례 헤르만 헤세 작품선 2
헤르만 헤세 지음, 이인웅 옮김 / 이유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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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언제나 집으로 가는 것이지.”

- 노발리스, 푸른꽃2실현중에서

 

동방 순례;Die morgenlandfahrt1932, 히틀러의 나치정권이 들어서기 1년 전에 발표된 글이다. 이 시점에 주목하고 읽었는데, 독일 사회는 그야말로 혼돈의 정국이었기 때문이다. 지배 엘리트간의 권력투쟁이 극한에 이르렀던 시기이기에, 이미 유명세를 얻은 작가로서 담론세계에서 침묵만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본국 독일로부터 벗어나 스위스에 둥지를 틀고 있었던 인물이었기에 그 물리적 거리로 인해, 한편으론 외부 세계에 보여지듯 융의 심리학으로 대변되는 무의식의 신비주의 세계를 통한 은유의 공간에 침잠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이 공개적으로 천명했듯 개인주의자임을, 그 정당성을 내세웠기에 내면세계는 그의 독보적인 문학세계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헤르만 헤세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독일인들의 시선에서 그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노벨상을 수상한 독일문학의 자랑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의 문학에 대한 격하의 타당한 이유가 있을지언정 결코 표면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독서 시장에서도 데미안은 마치 성서처럼 읽힌다, 무수한 번역본들이 사흘이 멀다 하고 새로운 표지와 번역으로 출간이 그치질 않는다.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그의 작품들의 한결같은 인물구도이다. 불완전한 인격에서 완전한 인격으로의 이행을 삶의 여정으로 보여주며 초월적 인격형성을 제안한다. 이 작품이라고 이러한 구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H.H와 레오는 이름만 달리하는 거의 동일한 인격들이다. 따라서 작품 발표 시기에 따라 그 유사 동일 구조 속에서 작가가 의도한 본래의 의미는 이야기의 외피 아래로 숨어든다.

 

드러난 이야기는 숨어든 진짜 본심을 은폐하는 미학적 테크닉이다. 헤세는 이 미학적인 글쓰기의 달인이다. 어떤 문학작품이 독자에게 휘감기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지만, 노벨상 수상을 하게 되자 한국 독서시장에서 급작스레 읽히기 시작하는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이 이러한 미학적 글쓰기의 대표적일 것이다. 물론 크러스너호르커이는 헤세처럼 의도를 숨기려는 글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르지만 말이다. 책의 제목이 동방순례라고 하여 어떤 지역이나 방향으로서 동방(東邦)이 아니다. 이것은 원제목 모르겐란트파르트(morgenlandfahrt)광명()의 땅으로 해독하여야 하듯, 어떤 나라, 지리적인 것이 아니고, 영혼의 고향이자 청춘이며, 모든 시간이 하나가 되어 버리는 그런 관념적 이상(理想)의 지대이다.

 

즉 소설은 바이올리니스트인 H.H 라는 예술가가 일종의 정신 공동체로서 순례자들의 단체인 결맹(Bund;結盟)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결맹의 일원들과 함께 빛의 땅을 향한 순례의 기록이다. 이 순례의 구성원들에는 레오라는 하인이 있는데, 이 인물이 예사로운 존재가 아니다. 모든 구성원들을 흡족하게 하고, 그 누구보다 고매한 영적인 인물이다. 데미안의 다른 화신이다. H.H는 이 순례 길의 여정을 실제로 꿈을 꾸면서 느끼는 행복과 같은, 내면과 외면을 유희하듯 시공간을 자유롭게 옮겨 다니는 소중한 과정으로 믿으며 긍정의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사달이 나고 마는데, 믿음을 상실하고 회의에 빠지는 죽음에 이르는 영혼의 병을 뜻하는 모르비오 인페리오레(Morbio Inferiore)’협곡에 이르러 하인 레오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결맹의 일원들은 순례의 보이지 않는 구심점 역할을 하던 존재가 사라지자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의심으로 의견이 갈기갈기 나뉘어 갈등하고 분열된다. 광명의 땅, 이상의 꿈을 함께 향했던 결맹원들은 여기서 산산이 분해되어 흩어지고 만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H.H가 결맹의 비밀은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준수하며 온전히 개인적인 행로에 관한 기록만을 하는 과정에 서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여기에 하나의 중대한 은폐가 있는데, 독자는 H.H가 쓴 기록의 이야기를 쫓아가다 갑자기 H.H가 레오의 사라짐 이후 기록을 더 밀고나가지 못했던 이유를 나중에 듣게 되는 것이고, 그것도 H.H가 결맹의 최고법정인 거대한 문서고(文書庫)에 보존된 당시 결맹원들의 주장이 담긴 각각의 기록에서 모르비오 인페리오레에서 해체되게 된 원인들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을 읽으면서 드러난 사실들에 입각한 실상이다. 이에 대해 H.H는 자신만의 해석을 말하는데, 모두가 서로 상반되고 서로 다른 것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래, 우리의 역사학적 노력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었다. 이런 역사적 기술을 계속할 필요도 없고, 읽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진실을 오리무중(五里霧中)으로 묻어버리는 것이다. 당대 독일사회가 휩싸인 시국 혼돈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인데, 동일한 사실에 대해서 저마다 다른 주장을 하고 있으니 조용히 먼지가 쌓이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진실에서 자신을 멀리 이격시켜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양식은 그의 산문 고집이라는 글의 정치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성장에 관심을 두는 것이 삶의 최고의 미덕이라는 주장과 맞닿아있다.

 

개인주의의 끝판 왕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왜 옳고 그름이 없겠는가.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 내면의 완성이 곧 미래의 길이라고 독일인들을 향해 설파하면서, 현실은 외면하는 개인주의, 이러한 독일 지식인들의 무관심과 책임회피가 나치의 발흥에 일조한 것일 수도 있다. 독일 본국의 지식인들, 특히 작가그룹의 일원들은 스위스에서 주절거리는 헤세의 안일한 개인주의적 내면성장의 담론이 불쾌했음은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당시 스위스에 어렵게 도피하여 빈궁한 삶을 지탱하던 로베르트 무질이 근거리에 있는 헤세가 아니라 미국에 도피해있는 토마스 만에게 5달러를 도와줄 수 없느냐는 편지를 썼겠는가. 동료의 삶에 관심도 없는 사람이 독일인의 삶을 위해 무의식 세계의 탐닉을 통해 신비주의적 행복의 낙원을 말하는, 인격의 궁극적 합일성을 향한 관념적 이상론은 정말 괴이쩍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의 대단원으로 옮겨가보면 더욱 가관이다. 협곡에서 사라져버렸던 하인 레오는 결맹의 최고법정 심판관으로 결맹의 최고권위자로 출현하여 결맹을 이탈하여 순례를 중단시킨 H.H의 중대한 잘못에 대해 유죄임을 지적하면서도 인간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가벼운 행위로 웃어넘긴다. H.H는 법정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가벼움을 느낀다. 그러자 최고심판관 레오는 이 가벼움을 경고하며, 양심의 법정으로 자신의 죄를 이끌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이 논법이 향하는 곳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하는 것 같다. 모든 보고와 반증과 꾸며댄 이야기들 배후에서 얼마나 비웃으며 도달할 수 없다는 듯이 그 정체를 감추고 있었던가! 진실이란 대체 무엇이며 (...) .이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정보를 알게 된다 할지라도 대체 무엇이 남을 것이란 말인가?”라며, 다시금 다른 이들이 쓴 문서는 진실이 아니며, 자신의 체험 사실만이 신뢰할 수 있음을 강변하는 것이다. 체험 사실이라는 주관적 기억, 그 변조되기 일쑤인 불안정한 기억이 다른 어떤 것보다 진실하다는 말처럼 터무니없는 말도 없을 것이다.

 

거울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비뚤어지고 달라지고 일그러져 버렸던가!”, 물론 기록 또한 기록자들의 작위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에는 일말의 진실들이 잠재하고 있을 것이고, 그 속에서 진위를 밝혀내는 작업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진실에 근접하려는 노력을 추구한다. 문명의 기록자인 작가가 이것들을 거짓이라 폄하하면서 자기의 글만은 진실이라 주장한다면 그런 독단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문서고에 자신의 기록이 보관된 함에 이르러 문을 열었을 때, 안에는 어떤 서류도 없다, 오직 오래되고 낡아 보이는 조각상 하나만 있다. 정말 매우 유치하게도 서로 등이 붙어있는 두 개의 상()이 하나가 된 조각상이다. 헤세의 작품을 읽었던 독자들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장면이다.

 

촛불을 켜자 한 쪽 상의 모든 정수가 다른 쪽 상으로 흘러들어가서 오로지 하나의 상, 레오만이 남는다. 데미안이 싱클레어 내면의 또다른 인격이듯 레오는 H.H의 또다른 인격이다. 즉 완전함에 이른 초월적인 궁극의 합일체인 레오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는 멋진 말을 남긴다. (레오)는 번창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H.H)는 소멸해야만 했다.” 새로운 존재자로 태어나기 위해 자기 소멸의 희생이라는 용기를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째 나치의 정치 강령(綱領)과 닮지 않았나


마치 소멸과 생성이라는 우주자연 궁극의 법을 각성한 듯하지만, 나치가 타자의 철저한 배제를 얼마나 잔혹하게 자행했는가. 그 참담한 소멸이 진정 새로운 생성을 창출했는가? 인간 인격의 완전성이라는 구원을 향한 이 낭만적 신비주의자의 기록은 읽을수록 흉물스럽다. 조금 더 쓰게 되면 거친 말이 연장될 것 같아 예서 그친다. 헤세의 글들은 세밀한 주의를 요구한다. 그는 무관심으로 외면함으로써 나치에 부역했다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없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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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로베르트 발저 지음, 안미현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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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내게 밀려드는 이미지는 낯선 길을 쓸쓸히 고독하게 걸어가는 떠돌이 산책자의 형형(炯炯)한 눈빛이다. 그것은 탁월성을 간직했지만, ‘소유하기를 원치 않고 자신이기를 포기한인간의 모습이어서 와락 눈물이 흐르게 한다. 예리한 관찰력에 더해 상상력이 더해진 고매한 정신이 안주할 그 어느 곳도 마땅치 않았던 현실 속 한 인간의 초상(肖像)을 통해 인간 보편의 고독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까닭일 것이다.

 

번역자 안미현 교수는 해설의 글에서 1929년 정신요양원에 들어가기 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마지막 작품집인 Die Rose(장미)의 산문들은 사심 없고 얽매이지 않고 건강한 영혼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사소한 주인공들의 파편화된 허약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분열되고 해체된 현대의 신경증적이고 통일되지 않은 자아를 통한 시대의 징후적 모습이라고 평하고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글들에는 이렇다 할 플롯이나 줄거리가 없는 어떤 상황들이 그저 의미 없이 배열된 듯 보인다.

 

평생을 산책하는 삶으로 살다 간 작가의 모습이 그려진 일요일 산책에서 그의 방랑하는 삶에 대한 하나의 의미를 엿볼 수 있는데, 사람들이 내가 길을 잃었다고 주장할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길을 잃는 것은 인간적인 일이라고 당당하게 믿기 때문이다.”라 말하듯, 알지 못하는 것을 알기 위해 불가피하게 이동해야만 하는 존재가 인간임의 수행(遂行)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의 산책은 상상을 하거나 시를 짓거나 하는, 삶의 풍부함이 만들어지는 기분 좋은 삶의 방법이기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루트비히 티크의 소설 금발의 에크베르트의 등장인물을 연상시키는 산문 에리히에는 늦은 밤 등불을 밝힌 실업자를 위한 필경사 사무실에서 경건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예의바르게 글을 쓰는, 삶의 행운을 믿는 한 젊은 작가의 모습이 시리게 다가온다. 그는 믿는 행위 속에 들어있는 황홀감때문에 행운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리곤 금발의 순진함과 이상주의를 표현하는 이름이기 때문에에리히라고 부르기로 한다고 말한다.

 

어제 나는 초봄의 황금빛에 둘러싸인 풍경 속으로 나가서 부드러운 어머니 자연 앞에 모자를 벗고 벤치에 앉아서 울었다.”라는 산문 타투스의 문장을 접했을 때, 발음의 유사성 때문이었는지 앙드레 지드의 소설 Paludes (팔뤼드)속 타튀루스가 내 쓸모없는 결심들이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곳, 내 생각들이 마침내는 거의 사라져 버리는 곳.”이라며 바라보는 늪의 전경, 인간의 삶과 자연의 총체가 존재하는 궁극의 공간에 놓인 자의 해방의 울음에 가 닿아 목이 메여왔다. 몇 몇 산문의 이 같은 생의 비의(秘義)가 짙게 배어있는 어떤 격함으로 가슴을 저미는 듯한 느낌에 젖어들기도 했다.

 

책의 첫 산문 블라디미르는 작가 자신을 외부의 시선으로 묘사한 듯한 겸허하지만 냉철한 인물 판단이 내려진 존재다. 나는 발저의 생의 태도의 일면으로 읽었는데,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대하지 않는 사람들을 내버려두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영혼이 거칠어지는 것을, 생각이 병들고 경직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자기 모습대로 남아있기를 고집하는 이 독창적 삶의 태도는 어쩌면 1920년대 전쟁의 폐허와 혼돈에 휩싸인 유럽인들의 정신이 숨어든 개인들의 자기 보호를 위한 유일한 탈출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산문집에는 일종의 서평이라고 부를 만한 글들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형식성과 현학성을 배격하는 발저 고유의 글들처럼 지극히 표면적 감상이다. 나는 표면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산문 아이의 문장처럼, 발저는 이 경박함이 종종 호응을 얻지 못함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세밀하게 관찰하는 시선을 지닌 사람의 날카로움, 비평적 눈빛이 번뜩이는 겸허함이다. 산문 켈러의 노벨레는 고트프리트 켈러의 소설, 기분이 좋아져서 보다 예리한 분별력을 찾기 위해 간 레스토랑에 앉아 주변을 깡그리 잊을 정도로 빠져들었다는 단편 마을의 로메오와 율리아에 대한 감상은 그가 인간 삶의 어느 측면을 아름답다고 느끼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부당한 선을 소유하는 것이 초래하는 불행에 관해 서술하는 부분이 특별히 아름다웠고”, “행복에 취한 불행한 사람들을 남다른 심오한 기질을 이유로 그렇게 솔직하게 동정하고 시기하는지를 암시하는것이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위축된 영혼에 깃든 선이 이 세계에서 결코 행복으로 보상되지 않음을 꿰똟는 켈러의 경이로운 문장들이 발하는 성스러움, 그 시적 숨결에 매혹되었던 모양이다. 산문 몇몇 작가와 어느 성실한 부인에 관해는 당대 작가들과 작품에 대한 비교적 진솔한 비평의 시선이다. 그에게 몰리에르의 희극과 모파상의 소설, 이 두 위대한 작가들을 기쁜 마음으로 나란히 두었다.”고 할 만큼 기질이나 인간에 대한 통찰이 그와 교감했던 모양이다. 특히 모파상에 대해서는 더 위대한 단편 작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며 칭송한다.

 

또한 근원적이고 환상적인 글로 문학적 가치를 보여준 두 명의 작가로 뒤마와 외젠 쉬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젊은 여성의 회고를 각기 거론하고 있기도 하며,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갑자기 과대평가된 작가라며, 정서와 이성에서 억지로 끌어낸 것처럼 보이는 그의 운문이지만 성공적이었다고 여긴다며 세평(世評)의 천박성을 은연히 힐난하기도 한다. 발자크에 대한 넘치는 교양이란 평가는 슬그머니 그의 조크가 읽혀 미소를 짓게 된다. 산문 자허마조흐는 발저가 수용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기꺼이 복종했던 부인은 그를 너무 싱겁다고 여겨 그를 버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기 삶의 권리가 약화되는 것을 즐거워하는 저 멍청한 사내를 자신이라면 더 심하게 다루게 했을 텐데라며 한 방향으로 치닫는 영혼에 대한 불쾌를 표현하기도 한다. 발저식 유머일 것이다.

 

산문 따귀 한 대와 그 외에는 촌철살인의 문장 모음이라 일컬어도 될 만큼, 인간 삶과 그 심리의 형태에 대한 세밀한 관찰들이 돋보인다. "저와 함께 가실래요?”라는 그의 제안에 당신은 따귀 한 대를 맞고 싶은 모양이군요!”라고 반응하는 여성의 말에 이어진 우리는 자기 자신을 누군가와 연결시키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하나의 목적에 맞출 무수한 기회를, 그리고 쾌활함과 직관을 함께 나눌 무수한 기회를 이용하지 않은 채 흘려보낸다.” 라는 이 문장은 그 비약만큼 재밌다. 그렇게 쌀쌀맞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이다. 여자는 삶 속 하나의 기회, 그 풍요로운 관계의 하나를 놓친 것이다. 아마 요즘에 이러한 수작을 하였다간 성추행이라고 고발 당하기 십상일 것이다. 발저의 소망이었던 아이 하나를 낳고 거절하지 않을 출판사에 작품을 내미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는 삶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는 것 만 같다


무심히 의미를 두지 않고 내뱉은 말에 상처입은 자의 표정과 태도를 보여주는 한 에피소드도 있는데, 자신의 이해력에서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단순한 것에 대해 자신의 높이에서 내려다보듯 말한다.알아들었어요?”, 이 말을 들은 상대는 순간 모욕적이고 굴욕을 강요하는 듯한 이 표현에 어떻게 대응하여야 할지 난감할 것이다. 바르르 떨며 대거리를 할 것인지, 아니면 감정을 감추고 슬기롭게 대처할지. 발저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간계와 사랑에 나오는 루이제처럼, 무능한 작은 뇌처럼 아주 딱해보였다.”.

 

전혀 흠잡을 데 없다는 것은 얼마나 역겨운지- 46

나는 자부심 때문에 자부심 없이 행동했고

강인함 때문에 부드럽게 행동했다.”

수줍어하는 자와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 사이의 전쟁은 

아마도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92

 

발저는 자의식에 차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삶을 극도로 싫어했다.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며, 하나의 움직임이 있는 곳을 둘러보는, 오히려 올려다보는 삶의 믿음이 그에게는 훨씬 풍요롭고 흥미로운 것이었다고. 엄숙주의와 규범주의를 거부하는 삶을 추구하며 무고하고 정직한 삶을 고수했던 한 고귀한 예술인의 이 미미하고 존재성 희미한 파편의 글들에서 어떤 불가불의 절대 고독의 감응에 휩싸인다. 세계의 주변부에서 익명의 인물로 살아가는 대다수의 현대인의 삶의 속성들이 나열된 글이라 해도 될 것 같다. 때문에 발저의 글 속 우연한 일상의 표정들과 목소리를 읽어가며 분열되고 해체된 우리네 조각난 마음을 토닥여주는 시간이 될 지도 모르겠다. 발저를 읽는 것은 항상 쓸쓸한 사랑의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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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바바라 몰리나르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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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앙(Viens), 이 말은 어디서 들려오는 것일까? 누군가가 이리 오라고, 여기라고 부르는 이 애처롭고 을씨년스러운 목소리, 왠지 결코 직면하고 싶지 않은, 그럼에도 언젠가는 들려오고야 말 것 같은 음성 같기만 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오랜 설득 끝에 바바라 몰리나르의 글을 수집하여 엮어 펴낸 소설집이다. 뒤라스의 서문과 바바라 몰리나르와의 짧은 대화록인 지하 납골당, 그리고 총 열세 편의 소설로 이루어진 어렵사리 출간된 책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읽는 것은 바바라 몰리나르가 여덟 해 동안 쓴 글 가운데 극히 일부, 어쩌면 100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모두 폐기되었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서문중에서

 

책의 원제목 viens(와줘)은 수록작 중 한 편이지만, 몇몇 작품에서도 와 줘라는 문장은 의미심장하게 출현한다. 어쩌면 이야기들 모두가 궁극으로 향하는 심연에서 울려오는 존재근원의 그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끝없는 추락, 캄캄한 어둠이 지배하는 좁은 방, 살아있는 존재가 없는 거리, 지향점이 없어 보이는, 목적지 없는 장소를 향한 부조리한 걸음, 적대적이고 기묘하며 자신이 속할 수 없는 다른 이들의 세계에 있다는 절망과 두려움이 거의 모든 지면을 장악하고 있다. 뒤라스의 말처럼 그럼에도 사람들은 순진한 믿음을 지니고 사랑하고 섬기고 기다리는 불치병을결코 알지 못하기에, 사는 것이 때론 기쁨이고 환희일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글쎄 삶이란 것의 궁극에 직면해서도 그럴 수 있는 것일지.

 

거의 전편(全篇)을 지배하고 있는 극한까지 치닫는 끔찍하리만큼 황폐한 여정은 고통으로부터의 광적인 도주처럼 보인다. 아니 평화와 평온만이 있는 종국의 장소를 향한 불가능한 행보인지도. 쓰고 나서는 찢어발겨 버려졌던 그녀의 모든 글들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유일한 배설통로였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몰리나르의 계속된 출판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뒤라스의 거듭된 요구로 관철된 단 한 권의 책을 구성하게 된 이 글들은 그렇기에 폐기되는 것이 옳았을 것만 같다. 영원히 반복되는 고통의 순환인 이 세계 속 삶과의 분투의 기록은 단지 버텨내는 하나의 분출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읽는 이의 마음조차 어둡고 아프고 낯선 암흑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는 그런 절망 가득한 여정이었다. 책장을 넘기면 대면하는 첫 작품 산타로사에서 오는 비행기는 한 여자가 갈망하는 행복의 언어들이 오가는 장소에의 참여일 뿐, 산타로사도, 비행기도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단지 산타로사에 출발한 비행기가 도착하는 시간에 공항 대합실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을 보기 위한, 죽은 시간에서 도망치기 위한, 매일 매일 그것조차 어려워지는 삶의 고통으로부터의 탈주라는 너무도 우울한 장면들만 그저 씌어있을 뿐이다. 여느 소설과도 확연히 다른 이 황량한 하루의 일정을 담은 이야기에 직면하면 이 책을 모두 읽어낼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런데 어떻게 마지막 작품까지 모두 읽어냈는지 내 자신이 의아스러울 정도다.

 


사실 내 자신이 의아스러웠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만날 약속이라는 상처 입은 인간이 암흑 속에 갇힌 채 벽을 더듬으며 탈출로를 찾아 반복적인 행위를 거듭하는, 보이지 않아 더듬는 목적을 잃은 행위 속에서 더 이상의 움직임이 무용함을 깨닫고 부동의 상태로 머물기로 하는 순간, 내 신체에 스며드는 일체의 감정이 예전에 지워버렸던 기억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도착한 것을 알았다는 X의 공포에 찬 비명, 얼빠진 눈으로 공포에 사로잡혀 뒤로 물러서려는 X의 저항불능의 고통이 내가 알고 있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는 동류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성이 길을 잃게 될 심연을 파는 동굴 속 짐승처럼 웅크리고 기다림에 짓눌려 있을 몰리나르의 상태를 그릴 수 있음에 나는 진저리치면서 그녀의 글속에 매몰되어갔다.

 

짐승 우리라는 작품은 타 작품과 달리 서사의 줄기가 비교적 선명하게 다가왔는데, 감금된 철창에 갇힌 동물원 동물들에 대한 슬픔, 그 비참함의 감정이 베르트와 피에르 두 연인의 사랑 속에서 환상적 이야기로 선회한다. 두 사람이 즐겨 찾던 동물원 보아뱀 앞에서 존재를 잃은 듯 멈추어 서곤 했던 피에르의 죽음 이후 보아뱀과 뒤엉킨 채 발견되는 베르트의 모습에서 몰리나르가 세상의 어떤 지평에 이르렀는가를 짐작케 된다. 아마도 그녀가 본 것은 존재 일원성, 심연이 도달하는 곳 아니었을까. 동물원 관리인처럼 뭇 사람들의 시선이 결여한 다름의 이해 부재가 없었더라면 베르트의 고통과 불행은 발생치 않았을 텐데.

 


이렇듯 폭력과 정신의 혼돈, 죽음과 신체 자율성의 통제에 대한 바바라 몰리나르의 통찰은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하다. 아니 집착한다. 그 광란적이고 불안정한 정서는 마치 카프카 혹은 실비아 플라스의 전통을 잇는 또 다른 차원의 문학 줄기라 하여야 할까. 이 초현실적이고 악몽같은 글들이 열정적으로 써진 것과 마찬가지로 광적으로 폐기되었던 것은 그녀의 글쓰기가 곧 살아냄 그 자체로서의 행위였기 때문이었을 것만 같다.


쓴 글을 모두 찢어 폐기하며 출판을 거부하던 몰리나르가 출판 직전 뒤라스에게 손수 가져온 네 편의 작품이 있는데, 와줘는 그중 한 편이다. 모든 것을 기록하는 일기인 듯한데, 기차역 대합실 벤치에서 졸음 속에 헤매는 상태라고 하는 것을 보면 몽상의 기록 같기도 하다. 그런데 와줘라는 말로 기억되는 B는 대체 누구일까 하고 의심하며 읽게 되는데, 당신을 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문이 열려 깊은 계단을 내려간 곳이 거대하고 황량한 지하실이다. 그리곤 내려가고 내려가고 또 내려간다. 이렇게 해서 정말로 도착했을 때 기다리고 있겠다는 B에 이른 것일 게다. 사자(死者)가 된 연인을 향한 지하여행의 신화 같기도 하고, 고통의 심연을 한없이 파들어 가는 그 실체를 직면하는 아찔하고 음울한 너무도 아프고 두렵기조차 한 극단의 몸부림같기도 하다.

 

국역본의 표제작인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는 침구에 가죽 끈으로 묶여있는 정신병원 수감자를 상상하게 하는 인물 혹은 악몽처럼 읽힌다. 모든 것이 억압된 존재, 입에 바늘을 가득 꽂아놓아 음식을 먹을 수 없음에도 음식을 갖다놓는 행위, 두 팔을 절단하고, 눈을 보지 못하도록 실명케 하고서는 우리는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모든 걸 준비해 드렸습니다.”라며, 어떻게 활용할지는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제 가셔도 됩니다. 일어나세요.”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뭐가 다른가.

 

권위를 가진 자들의 폭력은 고상한 미덕의 언어로 포장되어 마치 어떤 배려처럼 들리게 하지 않는가. 나가십시오. (...) 당신은 이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 이후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라고 말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모두 빼앗기고 세계에 내던져진 우리들의 초상(肖像) 같기만 하다. 이 소설집은 번역자 백수린 작가의 말처럼 작품이 시간의 지층 위로 그녀들의 이야기에 매혹된 한 여성에 의해, 그리고 또 한 여성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된, 자칫 존재 할 수 없었던 작품의 존재물이다. 깊은 고통과 절망의 극단적 목소리의 음울한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기쁜 일은 아닐 것이지만, 우리들의 신체에는 이 목소리에 감응하는 근원적 장소가 분명 있을게다. 그렇기에 이 희귀한 작품에 매혹될 수도 있으리라. 2026년 첫 번째 독서 인연이 참 기이하게 맺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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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3 2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06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자이 오사무, 문장의 기억 (양장) - 살아 있음의 슬픔, 고독을 건너는 문장들 Memory of Sentences Series 4
다자이 오사무 원작, 박예진 편역 / 리텍콘텐츠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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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며 써내려간, 인간이라는 병의 기록- 프롤로그에서

 

위 문장은 엮은이 박예진 작가의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작품에 대한 총체적 감응의 표현일 것이다. 인간이기에 겪어야만 하는 생의 질곡(桎梏)들이 그 모습과 유형을 달리하며 우리네 삶을 고통의 시련 속에 빠뜨린다. 이 자기고백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그 삶의 형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분투했던 작가라고 이해해도 될 듯하다. 그럼에도 나는 이들 자기고백 류()의 사()소설 작품들에 대해 회의적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일본의 사소설을 모두 섭렵했다는 말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라는 한 인간의 신변에 극단적으로 시선이 좁아진 관조의 리얼리즘으로 세계와의 격리, 다시 말해 세계와 관계없이 분리된 사적 자기표출이라는 나르시시즘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다.

 

특히 내게 고착된 이러한 관점은 자기 객관화 능력이 떨어지는 일본인 전형의 유아적 인격구조의 산물로서 자기고백 소설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문학의 한계는 한 개인의 경험에 기반함으로써 불가불 소재의 고갈에 직면하게 되고, 결국 이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소재를 위한 자기 연출을 필요로 하게 된다. 다자이 오사무의 이른 죽음을 이러한 한계, 즉 극단에 내몰린 존재의 필연으로 이해하게 되었었다. 이제 사()소설에 대한 내 편협한 관점을 수정해야 할 만큼 경험의 시간이 흘렀다. 무엇보다 문장의 기억(Memory of Sentences)시리즈를 그 동안 읽으며 몇 가지 느낀 점이 있다.

 

그 첫째는 하나의 텍스트에 대한 대척점에 선 해석들을 만나게 된 것인데, 그로인해 삶의 시선들에 대한 조금 관대하고 열린 수용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소개되는 많은 작품들을 모두 읽어야할 만큼 삶의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독자에게 각 개인에게 특정한 감응으로 연결되는 작품의 선택이 가능토록 충분한 지향적 읽기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저마다의 취향이 다르고, 삶에 직면한 상황이 다를 것이며, 특히 개인의 생명력 혹은 활력에 어떤 번뜩이는 에너지의 생성을 일으키는 작품을 만나는 계기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읽기의 초입에 들어선 독자나 특정 작가의 작품을 선택하기에 망설이는 많은 일반 독자들에게 문장의 기억 시리즈는 훌륭한 방향등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속 문장들과 박예진 작가의 간결하고 압축적인 작품 설명의 글은 내게 어떤 새로운 문()을 발견하는 데 열쇠가 되었다고 해야겠다. 물론 그것은 이 절망의 작가로부터 생의 긍정성을 읽어내는 시선이다. 회의(懷疑)로 눈을 가린 채 읽었던 그 비판에 절어있는 내 시선이 읽어내기를 거부했던 지점에서 박예진 작가는 다자이 오사무가 분투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극복해내려 했지만 극복할 수 없어 고뇌하는 인간 속에서 빛나는 생의 찬연함을 보는 시선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여러 대조적 작품들을 떠올리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는데, 작가 한강과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이었다.

 


인간실격의 요조와 그대의 차가운 손의 장운형,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도달하는 길의 동일함과 차이이다. 어쩌면 동양과 서양의 차이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을 것인데, 내면의 어둠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이고, 그 마주한 인간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수용하는가의 결과의 차이이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으로 자신의 내면을 감추게 되는 것은 이들 모두 그 출발지점은 같다. 요조는 가면을 쓴 삶을 거부하고 자아와 직접 마주하며 그 인간성이라는 괴물과 투쟁한다. 장운형은 가면으로 철저히 자신을 감춘 채 사는 길을 선택한다. 싱클레어는 자기 안의 신으로 상징되는 데미안을 통해 자기 존엄과 가치를 발견한다. 너무도 다른 길이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내면의 끔찍한 괴물성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회피하거나 도주 하거나, 자신을 기만하는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위장된 얼굴로 살아가기 일쑤다. 가장 쉬운 방편일 것이다. 그 자기혐오와 자기증오의 돌파구를 찾아내지 못하면 살아낸다는 것은 지옥일 것이다. 그래서 요조의 다음의 말이 가능했을 것이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다. 나에게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도무지 짐작되지 않는다.(人間失格에서)


사양, 斜陽, 달려라 메로스, 사랑과 에 대하여, 인간실격12작품의 문장들과 설명으로부터 독자마다의 정서에 어떤 반향을 일으키는 작품이나 문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학생, 女生徒이라는 작품에서는 성장하는 청년이 겪는 세상에 대한 시선의 확장 속에서 다가오는 불안과 방황, 고독과 존재 결핍의 감정들을 헤쳐 나가는 그 슬기로운 분투의 아름다움을, 앵두, 櫻桃에서는 한 가장인 남자의 가족 양육의 책임과 이기심에서의 내적 방황을 오가는 인간의 취약성, 그 연약함에 대한 연민을 공유하게 되고, 비용의 아내 로부터는 무능한 가장의 아내이자 지켜야할 아이들의 어머니인 여자의 자기희생적 삶의 종속적이고 닫힌 삶을 사는 자신의 성찰과 나아가 삶의 주인으로서 새롭게 생을 설계해 나가는 인물을 발견할 수도 있다. 자기고백이라는 사적표출이라는 제한적 시선에 가두어 두었던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편견이 무너지고, 그의 관찰이 머문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곡절들에 대한 아픈 공감의 연민이 흐르고 있음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내겐 나만의 어떤 생성의 표식으로 다가 온 작품이 있는데, 달려라 메로스, 직소, 비용의 아내세 편을 들 수 있겠다. 달려라 메로스는 눈물겨운 인간의 믿음이라는 이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형식에 기초한 책임의 문제일 것 같은데, 그 서사적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신뢰에 보답해야 한다, 지금은 오직 그 한 가지 뿐이다.”라며, 친구의 목숨을 위해 달려가는 인물의 분투의 여정이 더없이 아름답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조용히 나를 믿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 나는 믿음을 받고 있다. 내 목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죽음으로 속죄하겠다는 따위의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달려라 메로스에서)

 

한편 직소는 신약성경의 가롯유다의 예수에 대한 애증의 감정으로부터 인간의 배반과 분노조차 사랑의 기원임을 적나라하게 그 심적 형상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다자이 오사무가 인간의 심연에 대해 얼마나 깊은 통찰적 이해에 이르렀는지를 발견케 하는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던 까닭이다. 비용의 아내는 박예진 작가가 해당 글의 마지막에 발췌해 놓은 문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별로 기쁘지도 않았고, 그저 인간답지 못하면 어때, 우리, 살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했다.” 불안과 절망에 빠진 자신과 가족을 보듬으며 희생도 도피도 아닌, 삶이란 견뎌내는 것, 살아있음이 곧 생의 의미라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용의 아내인간실격의 목소리가 그 대척점에 놓여있는 작품으로 비교하며 읽는다면, 삶의 의미라는 것이 구태여 있는 것이라면 삶의 의지가 무엇인지 그 정체를 탐사하는 읽기가 되어 주리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비용의 아내현실 속 비용의 아내로 불리던 다자이 오사무의 마지막 연인으로 그와 동반 자살하는 야마자키 도미에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인간으로 실격되었다인간실격의 요조의 말과 비용의 아내에서 인간답지 못하면 어때라는 두 문장은 극단적으로 흔들리는 심적 동요를 보게 된다.

 

우리들은 끝없이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이것을 묻는 것이 인간의 삶 자체이기 때문인 것만 같다. 이 인간 고독과 절망의 탐사를 문학의 본령으로 여겼던 작가의 면모를 흘긋 엿보는 기회가 되어 주었다. 그 짧은 엿보기 속에서 내 읽기의 걸음을 재촉하는 작품들을 발견한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수확일 것이다. 그래, 인간 삶의 비참함이 곧 생의 아름다움인지도 모를 일이다. 붉은 표지의 아담한 이 책이 삶의 새로운 시작의 계기가 되어 줄지도 모르겠다. 절망과 좌절이란 모두 지우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내적 명령인지도. 다자이 오사무로 접근하는 우아하고 지적인 지도(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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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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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세상에 하나의 모습을 입어 태어나 풍파 속에서 사랑하고 꿈을 꾸고, 투쟁하다 다시 형태를 갖기 이전의 본래로 돌아가는 것을, 무한한 양태로 연결의 순환을 거듭하게 되는 것을, 한낱 꿈과 같은 찰나의 연()인 것이 것만 뭐 그리 대단한 영화(榮華)를 천세만세 만만세 누릴 것인 양 인간들은 교만을 떨어대고, 잔악과 폭력을 휘둘러대는 것인가. 장구(長久)해 보이기만 하던 육백년의 시간을 견뎌온 팽나무 할매에게 명멸하는 존재들의 덧없는 생의 분투는 얼마나 시린 것이었을까, 모든 만물은 거대한 자연의 순환 속에서 서로 연결된 하나인 것을 알지 못하는 존재들의 미련스러움과 탐욕스러움도 한단지몽(邯鄲之夢)인 것을 말이다.

 

【군산시 옥서면 하제 마을 600년 팽나무, 군산시 지정 보호수


아무르 강변 산자락이 끝나는 낮은 관목 숲으로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날아든다. 소설의 시간은 그렇게 시작된다. 천적의 공격을 피하고, 짝을 찾아 새끼를 낳고, 겨울을 나기 위해 남쪽을 향한 생을 건 비행을 한다. 조선 반도 서해안 하구에 긴 여정에서 바닥난 신체를 보충한다. 겨울이라 바짝 마른 열매를 달고 있는 팽나무는 개똥지빠귀의 고마운 양식이다. 그의 짝 암컷 개똥지빠귀 개암이날개의 고통스런 외침이 들려온다. 황조롱이에 낚아 채여 도움을 요청하는 울음이다. 그는 날아올라 황조롱이로부터 개암이날개가 풀려나도록 만들고 자신은 황조롱이에게 쫓긴다. 집요한 공격과 도주비행, 개똥지빠귀는 날개에 치명적 상처를 입어 동료들이 있는 하구 부근 곰솔이 무성한 숲에 이르지 못할 것임을 안다.

 

그는 잡풀이 듬성듬성 자라난 빈터에 떨어진다. 기진맥진한 작은 새의 몸 위에 눈보라가 들씌워졌고 체온이 떨어진 개똥지빠귀는 숨이 끊어졌다. ...죽은 새는 눈 밑에서 썩어갔고, 그의 뱃속 팽나무 열매 몇 개 중 거죽이 사라진 딱딱하게 굳은 씨앗은 부드러운 모래 흙속으로 들어가 습기에 불고 싹이 트고 실 같은 뿌리가 생겼다. 개똥지빠귀의 분해된 몸이 녹아들어 기름진 땅....바람과 햇빛과 물안개와 가랑비와 폭풍까지 견뎌낸 어린 팽나무는 스스로 죽음 같은 겨울의 정지와 봄마다 찾아오는 생명의 활기를 깨달으며 거목으로 성장한다. (31쪽에서)

 

인간의 시간으로 조선초엽 어느 시절의 한반도 서해안 한 하구(河口)에서 이렇게 역사의 시침은 흘러, 지배층의 무능과 착취에 내몰린 헐벗고 굶주린 민초들의 생을 건 행로에서 한 노승은 유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다섯 살 아이를 거두어들인다. 긍휼(矜恤), 측은지심이다. 보경사 광덕스님은 아이에게 몽각(夢覺)이라는 불가(佛家)의 계명을 준다. 아이는 불법과 경전에 뜻을 두지 못하고, 노스님은 몽각에게 절의 식량과 채소를 가꿀 밭을 내준다. 몽각은 성실히 절에 자신이 수확한 양식들을 나른다. 수박과 참외를 한 지게 지고 공양간에 건네주던 그 어느 날 불공드리러 온 강릉부사의 여식과 만나게 되고, 몽각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하고 애태운다. 그렇게 일심으로 여인을 그리워하며 절을 올리다 법당에서 잠깐의 잠을 이룬다. 아마도 몽각이 꾸는 이 한나절의 일취지몽(一炊之夢)이 소설의 주제를 관통하는 생의 깨달음, 팽나무 할매가 지켜본 삶의 궁극에 대한 견성(見性) 그것일 것이다.

 

꿈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다는 이름처럼 몽각은 소녀와 이룬 금슬지락과 나라의 폭력에 내몰린 유민의 곤궁함, 그리고 이별이라는 한 생애를 현생처럼 겪는다. 세속의 한평생 덧없는 희로애락을 겪은 몽각은 홀로 수도(修道)의 길에 나선다. 몽각의 견성은 이미 그에게 내재해 있었을 것이다. 그가 여정에서 보게 되는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수백만 백성의 끔찍한 재해와 외딴 섬 팽나무 할매가 있는 하제로 불리는 장소의 절대 고독의 삶과 갯벌에 앉아 그를 연명하게 했던 생물들에게 자신의 몸을 보시하는 장면은 모든 미혹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어떤 숭엄함에 젖게 한다.

 


칠게들이 그의 주검을 덮어버리고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듯, 하제 앞 수라 갯벌에는 철새들이 날아들고 먼 비행과 폭풍우에 지친 도요새의 주검은 생합들의 몸이 된다. 바닷물이 밀려나가자 호미로 갯벌을 긁어 생합을 캐는 아낙들의 분주한 손이 작은 섬 하제의 팽나무 빈터에 사람들이 어느덧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제 개똥지빠귀의 주검을 거름삼아 성장했던 팽나무가 삼백 살의 거목이 되었다. 망념(妄念)과 미혹(迷惑)으로 분주한 인간들의 그 악착같은 욕심의 시간들이 한없이 축소된다. 결국 본래의 성품인 우주자연 그 어느 곳의 일원으로 합류할 존재인 것을.

 

소설의 후반부는 서낭목이 된 팽나무 할매를 중심으로 하제 포구와 갯벌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찰나처럼 흐른다. 동네 사람들이 섬기는 팽나무 할매를 몸주 삼은 당골네에 시집온 고창댁 자근연이가 낳은 배춘삼과 그녀 남편의 시신을 거두어 주었던 뱃사람 유 사공의 정성스럽고 충실한 여느 보통 사람들의 삶이 펼쳐진다. 사대부들의 가렴주구로 혹독한 궁핍에 내몰린 백성들의 오갈 곳 없는 의지를 기댈 수단이 되었던 천주교와 서학의 탄압 속에 이 민초들의 가계(家系)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신산한 삶이 무한히 내어주는 자연, 갯벌과 드넓은 어장에 기탁하여 다시금 생을 지속해 나간다. 어언 팽나무의 수령이 오백년에 이르렀을 때, 그 잘난 조선의 사대부들과 왕은 외세를 불러 구국(救國)의 길, 온 백성이 형제자매이고 만물이 평등한 세상을 향한 외침을 무차별 학살하며, 나라를 팔아먹기에 이른다. 시천주(侍天主), 누구나 자기 안에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 동학의 우주만물의 평등과 그 존귀함의 정신은 망령된 집념에 사로잡힌 사대부 기득권자들에 의해 파괴된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들의 야욕의 시간이라고 달리 흐르겠는가. 그것들 또한 썩어 흙과 강과 대기의 한낱 원소로, 그 본래의 성격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을. 하제 위에 있는 중제와 상제에 조선을 식민통치하던 일본은 군용기 활주로를 건설하고, 팽나무 할매는 그 위기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난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흐르고 패망한 일본이 물러난 자리에 미군이 들어서고, 미군 군용기 활주로 확장과 갯벌을 막아 농토를 만든다는 미명 하에 간척지 사업으로 사람들과 온갖 생명의 터전을 탐욕으로 물들인다. 병인년 박해로 한 가계가 무너져 내리고 살아남은 유일한 핏덩이가 살아 그의 후손인 신부가 되어 국가폭력과 생태파괴를 무참히 저지르는 탐욕의 정치에 맞서는 길 위의 신부가 되고, 인적이 사라진 저녁 갯벌에서 들려오는 생명들의 대합창 소리를 들은 춘삼의 후손 배동수의 연대의 목소리가 더해져 숭고한 만물의 대합창이 되어 울려온다,

 

소설의 목소리는 견성이요, 시천주이고, 만물의 인연이며, 존재의 일원성에 대한 깨우침일 것이다. 이제 섬이었던 팽나무 할매가 있는 하제는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이 저지른 갯벌의 간척화로 인해 섬의 흔적은 사라지고 군산 옥서면 선연리 하계 마을이라는 육지가 되었는가보다. 새와 나무와 갯벌과 인간, 지상의 모든 개체들의 그 짧은 순환의 순간으로 경유하는 생의 찬연(燦然)함과 인연과 궁극의 본성을 생각게 된다.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이 명상과 성찰의 시간을 좀체 갖지 못하는 것 같다. 온갖 인위적 관습에 순응하며 저마다 분주히 자기 욕망에 몰두할 때 타자의 세계는 저만치 물러나 보이지 않게 된다. 그 얼마나 짧은 순간 우리들은 이 형상을 함께하며 살아가는가. 이름없이 서있는 나무들과 풀과 꽃, 곤충들과 새, 강과 갯벌과 바다의 수많은 개체들, 이 모두가 우주의 근원인 하늘님을 지닌 존재인 것을. 꼭 사람을 하늘처럼 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이기만 하겠는가. 事萬物如天인 것을. 생태소설이며, 인간과, 동물과, 식물의 모든 목소리로 들려주는 한반도 우리네 터전의 통사(通史)이고, 생명에 대한 찬란한 서정시이자, 만물의 감응과 인연에 대한 견성의 경전이다. 오늘 우리네 지성의 깨우침은 여기에 이르렀다. 모두 잠든 새벽 시간에 귀 기울이면 듣지 못했던 무수한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그들과 이 작은 몸뚱이가 하나로 연결된 존재임을. 이 겨울 점점 더욱 땅의 흙내가 내 코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저 개똥지빠귀의 시간에 합류하게 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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