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로베르트 발저 지음, 안미현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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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내게 밀려드는 이미지는 낯선 길을 쓸쓸히 고독하게 걸어가는 떠돌이 산책자의 형형(炯炯)한 눈빛이다. 그것은 탁월성을 간직했지만, ‘소유하기를 원치 않고 자신이기를 포기한인간의 모습이어서 와락 눈물이 흐르게 한다. 예리한 관찰력에 더해 상상력이 더해진 고매한 정신이 안주할 그 어느 곳도 마땅치 않았던 현실 속 한 인간의 초상(肖像)을 통해 인간 보편의 고독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까닭일 것이다.

 

번역자 안미현 교수는 해설의 글에서 1929년 정신요양원에 들어가기 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마지막 작품집인 Die Rose(장미)의 산문들은 사심 없고 얽매이지 않고 건강한 영혼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사소한 주인공들의 파편화된 허약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분열되고 해체된 현대의 신경증적이고 통일되지 않은 자아를 통한 시대의 징후적 모습이라고 평하고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글들에는 이렇다 할 플롯이나 줄거리가 없는 어떤 상황들이 그저 의미 없이 배열된 듯 보인다.

 

평생을 산책하는 삶으로 살다 간 작가의 모습이 그려진 일요일 산책에서 그의 방랑하는 삶에 대한 하나의 의미를 엿볼 수 있는데, 사람들이 내가 길을 잃었다고 주장할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길을 잃는 것은 인간적인 일이라고 당당하게 믿기 때문이다.”라 말하듯, 알지 못하는 것을 알기 위해 불가피하게 이동해야만 하는 존재가 인간임의 수행(遂行)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의 산책은 상상을 하거나 시를 짓거나 하는, 삶의 풍부함이 만들어지는 기분 좋은 삶의 방법이기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루트비히 티크의 소설 금발의 에크베르트의 등장인물을 연상시키는 산문 에리히에는 늦은 밤 등불을 밝힌 실업자를 위한 필경사 사무실에서 경건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예의바르게 글을 쓰는, 삶의 행운을 믿는 한 젊은 작가의 모습이 시리게 다가온다. 그는 믿는 행위 속에 들어있는 황홀감때문에 행운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리곤 금발의 순진함과 이상주의를 표현하는 이름이기 때문에에리히라고 부르기로 한다고 말한다.

 

어제 나는 초봄의 황금빛에 둘러싸인 풍경 속으로 나가서 부드러운 어머니 자연 앞에 모자를 벗고 벤치에 앉아서 울었다.”라는 산문 타투스의 문장을 접했을 때, 발음의 유사성 때문이었는지 앙드레 지드의 소설 Paludes (팔뤼드)속 타튀루스가 내 쓸모없는 결심들이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곳, 내 생각들이 마침내는 거의 사라져 버리는 곳.”이라며 바라보는 늪의 전경, 인간의 삶과 자연의 총체가 존재하는 궁극의 공간에 놓인 자의 해방의 울음에 가 닿아 목이 메여왔다. 몇 몇 산문의 이 같은 생의 비의(秘義)가 짙게 배어있는 어떤 격함으로 가슴을 저미는 듯한 느낌에 젖어들기도 했다.

 

책의 첫 산문 블라디미르는 작가 자신을 외부의 시선으로 묘사한 듯한 겸허하지만 냉철한 인물 판단이 내려진 존재다. 나는 발저의 생의 태도의 일면으로 읽었는데,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대하지 않는 사람들을 내버려두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영혼이 거칠어지는 것을, 생각이 병들고 경직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자기 모습대로 남아있기를 고집하는 이 독창적 삶의 태도는 어쩌면 1920년대 전쟁의 폐허와 혼돈에 휩싸인 유럽인들의 정신이 숨어든 개인들의 자기 보호를 위한 유일한 탈출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산문집에는 일종의 서평이라고 부를 만한 글들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형식성과 현학성을 배격하는 발저 고유의 글들처럼 지극히 표면적 감상이다. 나는 표면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산문 아이의 문장처럼, 발저는 이 경박함이 종종 호응을 얻지 못함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세밀하게 관찰하는 시선을 지닌 사람의 날카로움, 비평적 눈빛이 번뜩이는 겸허함이다. 산문 켈러의 노벨레는 고트프리트 켈러의 소설, 기분이 좋아져서 보다 예리한 분별력을 찾기 위해 간 레스토랑에 앉아 주변을 깡그리 잊을 정도로 빠져들었다는 단편 마을의 로메오와 율리아에 대한 감상은 그가 인간 삶의 어느 측면을 아름답다고 느끼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부당한 선을 소유하는 것이 초래하는 불행에 관해 서술하는 부분이 특별히 아름다웠고”, “행복에 취한 불행한 사람들을 남다른 심오한 기질을 이유로 그렇게 솔직하게 동정하고 시기하는지를 암시하는것이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위축된 영혼에 깃든 선이 이 세계에서 결코 행복으로 보상되지 않음을 꿰똟는 켈러의 경이로운 문장들이 발하는 성스러움, 그 시적 숨결에 매혹되었던 모양이다. 산문 몇몇 작가와 어느 성실한 부인에 관해는 당대 작가들과 작품에 대한 비교적 진솔한 비평의 시선이다. 그에게 몰리에르의 희극과 모파상의 소설, 이 두 위대한 작가들을 기쁜 마음으로 나란히 두었다.”고 할 만큼 기질이나 인간에 대한 통찰이 그와 교감했던 모양이다. 특히 모파상에 대해서는 더 위대한 단편 작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며 칭송한다.

 

또한 근원적이고 환상적인 글로 문학적 가치를 보여준 두 명의 작가로 뒤마와 외젠 쉬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젊은 여성의 회고를 각기 거론하고 있기도 하며,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갑자기 과대평가된 작가라며, 정서와 이성에서 억지로 끌어낸 것처럼 보이는 그의 운문이지만 성공적이었다고 여긴다며 세평(世評)의 천박성을 은연히 힐난하기도 한다. 발자크에 대한 넘치는 교양이란 평가는 슬그머니 그의 조크가 읽혀 미소를 짓게 된다. 산문 자허마조흐는 발저가 수용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기꺼이 복종했던 부인은 그를 너무 싱겁다고 여겨 그를 버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기 삶의 권리가 약화되는 것을 즐거워하는 저 멍청한 사내를 자신이라면 더 심하게 다루게 했을 텐데라며 한 방향으로 치닫는 영혼에 대한 불쾌를 표현하기도 한다. 발저식 유머일 것이다.

 

산문 따귀 한 대와 그 외에는 촌철살인의 문장 모음이라 일컬어도 될 만큼, 인간 삶과 그 심리의 형태에 대한 세밀한 관찰들이 돋보인다. "저와 함께 가실래요?”라는 그의 제안에 당신은 따귀 한 대를 맞고 싶은 모양이군요!”라고 반응하는 여성의 말에 이어진 우리는 자기 자신을 누군가와 연결시키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하나의 목적에 맞출 무수한 기회를, 그리고 쾌활함과 직관을 함께 나눌 무수한 기회를 이용하지 않은 채 흘려보낸다.” 라는 이 문장은 그 비약만큼 재밌다. 그렇게 쌀쌀맞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이다. 여자는 삶 속 하나의 기회, 그 풍요로운 관계의 하나를 놓친 것이다. 아마 요즘에 이러한 수작을 하였다간 성추행이라고 고발 당하기 십상일 것이다. 발저의 소망이었던 아이 하나를 낳고 거절하지 않을 출판사에 작품을 내미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는 삶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는 것 만 같다


무심히 의미를 두지 않고 내뱉은 말에 상처입은 자의 표정과 태도를 보여주는 한 에피소드도 있는데, 자신의 이해력에서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단순한 것에 대해 자신의 높이에서 내려다보듯 말한다.알아들었어요?”, 이 말을 들은 상대는 순간 모욕적이고 굴욕을 강요하는 듯한 이 표현에 어떻게 대응하여야 할지 난감할 것이다. 바르르 떨며 대거리를 할 것인지, 아니면 감정을 감추고 슬기롭게 대처할지. 발저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간계와 사랑에 나오는 루이제처럼, 무능한 작은 뇌처럼 아주 딱해보였다.”.

 

전혀 흠잡을 데 없다는 것은 얼마나 역겨운지- 46

나는 자부심 때문에 자부심 없이 행동했고

강인함 때문에 부드럽게 행동했다.”

수줍어하는 자와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 사이의 전쟁은 

아마도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92

 

발저는 자의식에 차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삶을 극도로 싫어했다.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며, 하나의 움직임이 있는 곳을 둘러보는, 오히려 올려다보는 삶의 믿음이 그에게는 훨씬 풍요롭고 흥미로운 것이었다고. 엄숙주의와 규범주의를 거부하는 삶을 추구하며 무고하고 정직한 삶을 고수했던 한 고귀한 예술인의 이 미미하고 존재성 희미한 파편의 글들에서 어떤 불가불의 절대 고독의 감응에 휩싸인다. 세계의 주변부에서 익명의 인물로 살아가는 대다수의 현대인의 삶의 속성들이 나열된 글이라 해도 될 것 같다. 때문에 발저의 글 속 우연한 일상의 표정들과 목소리를 읽어가며 분열되고 해체된 우리네 조각난 마음을 토닥여주는 시간이 될 지도 모르겠다. 발저를 읽는 것은 항상 쓸쓸한 사랑의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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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바바라 몰리나르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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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앙(Viens), 이 말은 어디서 들려오는 것일까? 누군가가 이리 오라고, 여기라고 부르는 이 애처롭고 을씨년스러운 목소리, 왠지 결코 직면하고 싶지 않은, 그럼에도 언젠가는 들려오고야 말 것 같은 음성 같기만 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오랜 설득 끝에 바바라 몰리나르의 글을 수집하여 엮어 펴낸 소설집이다. 뒤라스의 서문과 바바라 몰리나르와의 짧은 대화록인 지하 납골당, 그리고 총 열세 편의 소설로 이루어진 어렵사리 출간된 책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읽는 것은 바바라 몰리나르가 여덟 해 동안 쓴 글 가운데 극히 일부, 어쩌면 100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모두 폐기되었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서문중에서

 

책의 원제목 viens(와줘)은 수록작 중 한 편이지만, 몇몇 작품에서도 와 줘라는 문장은 의미심장하게 출현한다. 어쩌면 이야기들 모두가 궁극으로 향하는 심연에서 울려오는 존재근원의 그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끝없는 추락, 캄캄한 어둠이 지배하는 좁은 방, 살아있는 존재가 없는 거리, 지향점이 없어 보이는, 목적지 없는 장소를 향한 부조리한 걸음, 적대적이고 기묘하며 자신이 속할 수 없는 다른 이들의 세계에 있다는 절망과 두려움이 거의 모든 지면을 장악하고 있다. 뒤라스의 말처럼 그럼에도 사람들은 순진한 믿음을 지니고 사랑하고 섬기고 기다리는 불치병을결코 알지 못하기에, 사는 것이 때론 기쁨이고 환희일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글쎄 삶이란 것의 궁극에 직면해서도 그럴 수 있는 것일지.

 

거의 전편(全篇)을 지배하고 있는 극한까지 치닫는 끔찍하리만큼 황폐한 여정은 고통으로부터의 광적인 도주처럼 보인다. 아니 평화와 평온만이 있는 종국의 장소를 향한 불가능한 행보인지도. 쓰고 나서는 찢어발겨 버려졌던 그녀의 모든 글들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유일한 배설통로였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몰리나르의 계속된 출판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뒤라스의 거듭된 요구로 관철된 단 한 권의 책을 구성하게 된 이 글들은 그렇기에 폐기되는 것이 옳았을 것만 같다. 영원히 반복되는 고통의 순환인 이 세계 속 삶과의 분투의 기록은 단지 버텨내는 하나의 분출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읽는 이의 마음조차 어둡고 아프고 낯선 암흑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는 그런 절망 가득한 여정이었다. 책장을 넘기면 대면하는 첫 작품 산타로사에서 오는 비행기는 한 여자가 갈망하는 행복의 언어들이 오가는 장소에의 참여일 뿐, 산타로사도, 비행기도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단지 산타로사에 출발한 비행기가 도착하는 시간에 공항 대합실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을 보기 위한, 죽은 시간에서 도망치기 위한, 매일 매일 그것조차 어려워지는 삶의 고통으로부터의 탈주라는 너무도 우울한 장면들만 그저 씌어있을 뿐이다. 여느 소설과도 확연히 다른 이 황량한 하루의 일정을 담은 이야기에 직면하면 이 책을 모두 읽어낼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런데 어떻게 마지막 작품까지 모두 읽어냈는지 내 자신이 의아스러울 정도다.

 


사실 내 자신이 의아스러웠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만날 약속이라는 상처 입은 인간이 암흑 속에 갇힌 채 벽을 더듬으며 탈출로를 찾아 반복적인 행위를 거듭하는, 보이지 않아 더듬는 목적을 잃은 행위 속에서 더 이상의 움직임이 무용함을 깨닫고 부동의 상태로 머물기로 하는 순간, 내 신체에 스며드는 일체의 감정이 예전에 지워버렸던 기억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도착한 것을 알았다는 X의 공포에 찬 비명, 얼빠진 눈으로 공포에 사로잡혀 뒤로 물러서려는 X의 저항불능의 고통이 내가 알고 있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는 동류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성이 길을 잃게 될 심연을 파는 동굴 속 짐승처럼 웅크리고 기다림에 짓눌려 있을 몰리나르의 상태를 그릴 수 있음에 나는 진저리치면서 그녀의 글속에 매몰되어갔다.

 

짐승 우리라는 작품은 타 작품과 달리 서사의 줄기가 비교적 선명하게 다가왔는데, 감금된 철창에 갇힌 동물원 동물들에 대한 슬픔, 그 비참함의 감정이 베르트와 피에르 두 연인의 사랑 속에서 환상적 이야기로 선회한다. 두 사람이 즐겨 찾던 동물원 보아뱀 앞에서 존재를 잃은 듯 멈추어 서곤 했던 피에르의 죽음 이후 보아뱀과 뒤엉킨 채 발견되는 베르트의 모습에서 몰리나르가 세상의 어떤 지평에 이르렀는가를 짐작케 된다. 아마도 그녀가 본 것은 존재 일원성, 심연이 도달하는 곳 아니었을까. 동물원 관리인처럼 뭇 사람들의 시선이 결여한 다름의 이해 부재가 없었더라면 베르트의 고통과 불행은 발생치 않았을 텐데.

 


이렇듯 폭력과 정신의 혼돈, 죽음과 신체 자율성의 통제에 대한 바바라 몰리나르의 통찰은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하다. 아니 집착한다. 그 광란적이고 불안정한 정서는 마치 카프카 혹은 실비아 플라스의 전통을 잇는 또 다른 차원의 문학 줄기라 하여야 할까. 이 초현실적이고 악몽같은 글들이 열정적으로 써진 것과 마찬가지로 광적으로 폐기되었던 것은 그녀의 글쓰기가 곧 살아냄 그 자체로서의 행위였기 때문이었을 것만 같다.


쓴 글을 모두 찢어 폐기하며 출판을 거부하던 몰리나르가 출판 직전 뒤라스에게 손수 가져온 네 편의 작품이 있는데, 와줘는 그중 한 편이다. 모든 것을 기록하는 일기인 듯한데, 기차역 대합실 벤치에서 졸음 속에 헤매는 상태라고 하는 것을 보면 몽상의 기록 같기도 하다. 그런데 와줘라는 말로 기억되는 B는 대체 누구일까 하고 의심하며 읽게 되는데, 당신을 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문이 열려 깊은 계단을 내려간 곳이 거대하고 황량한 지하실이다. 그리곤 내려가고 내려가고 또 내려간다. 이렇게 해서 정말로 도착했을 때 기다리고 있겠다는 B에 이른 것일 게다. 사자(死者)가 된 연인을 향한 지하여행의 신화 같기도 하고, 고통의 심연을 한없이 파들어 가는 그 실체를 직면하는 아찔하고 음울한 너무도 아프고 두렵기조차 한 극단의 몸부림같기도 하다.

 

국역본의 표제작인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는 침구에 가죽 끈으로 묶여있는 정신병원 수감자를 상상하게 하는 인물 혹은 악몽처럼 읽힌다. 모든 것이 억압된 존재, 입에 바늘을 가득 꽂아놓아 음식을 먹을 수 없음에도 음식을 갖다놓는 행위, 두 팔을 절단하고, 눈을 보지 못하도록 실명케 하고서는 우리는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모든 걸 준비해 드렸습니다.”라며, 어떻게 활용할지는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제 가셔도 됩니다. 일어나세요.”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뭐가 다른가.

 

권위를 가진 자들의 폭력은 고상한 미덕의 언어로 포장되어 마치 어떤 배려처럼 들리게 하지 않는가. 나가십시오. (...) 당신은 이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 이후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라고 말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모두 빼앗기고 세계에 내던져진 우리들의 초상(肖像) 같기만 하다. 이 소설집은 번역자 백수린 작가의 말처럼 작품이 시간의 지층 위로 그녀들의 이야기에 매혹된 한 여성에 의해, 그리고 또 한 여성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된, 자칫 존재 할 수 없었던 작품의 존재물이다. 깊은 고통과 절망의 극단적 목소리의 음울한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기쁜 일은 아닐 것이지만, 우리들의 신체에는 이 목소리에 감응하는 근원적 장소가 분명 있을게다. 그렇기에 이 희귀한 작품에 매혹될 수도 있으리라. 2026년 첫 번째 독서 인연이 참 기이하게 맺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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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3 2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06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자이 오사무, 문장의 기억 (양장) - 살아 있음의 슬픔, 고독을 건너는 문장들 Memory of Sentences Series 4
다자이 오사무 원작, 박예진 편역 / 리텍콘텐츠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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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며 써내려간, 인간이라는 병의 기록- 프롤로그에서

 

위 문장은 엮은이 박예진 작가의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작품에 대한 총체적 감응의 표현일 것이다. 인간이기에 겪어야만 하는 생의 질곡(桎梏)들이 그 모습과 유형을 달리하며 우리네 삶을 고통의 시련 속에 빠뜨린다. 이 자기고백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그 삶의 형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분투했던 작가라고 이해해도 될 듯하다. 그럼에도 나는 이들 자기고백 류()의 사()소설 작품들에 대해 회의적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일본의 사소설을 모두 섭렵했다는 말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라는 한 인간의 신변에 극단적으로 시선이 좁아진 관조의 리얼리즘으로 세계와의 격리, 다시 말해 세계와 관계없이 분리된 사적 자기표출이라는 나르시시즘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다.

 

특히 내게 고착된 이러한 관점은 자기 객관화 능력이 떨어지는 일본인 전형의 유아적 인격구조의 산물로서 자기고백 소설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문학의 한계는 한 개인의 경험에 기반함으로써 불가불 소재의 고갈에 직면하게 되고, 결국 이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소재를 위한 자기 연출을 필요로 하게 된다. 다자이 오사무의 이른 죽음을 이러한 한계, 즉 극단에 내몰린 존재의 필연으로 이해하게 되었었다. 이제 사()소설에 대한 내 편협한 관점을 수정해야 할 만큼 경험의 시간이 흘렀다. 무엇보다 문장의 기억(Memory of Sentences)시리즈를 그 동안 읽으며 몇 가지 느낀 점이 있다.

 

그 첫째는 하나의 텍스트에 대한 대척점에 선 해석들을 만나게 된 것인데, 그로인해 삶의 시선들에 대한 조금 관대하고 열린 수용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소개되는 많은 작품들을 모두 읽어야할 만큼 삶의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독자에게 각 개인에게 특정한 감응으로 연결되는 작품의 선택이 가능토록 충분한 지향적 읽기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저마다의 취향이 다르고, 삶에 직면한 상황이 다를 것이며, 특히 개인의 생명력 혹은 활력에 어떤 번뜩이는 에너지의 생성을 일으키는 작품을 만나는 계기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읽기의 초입에 들어선 독자나 특정 작가의 작품을 선택하기에 망설이는 많은 일반 독자들에게 문장의 기억 시리즈는 훌륭한 방향등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속 문장들과 박예진 작가의 간결하고 압축적인 작품 설명의 글은 내게 어떤 새로운 문()을 발견하는 데 열쇠가 되었다고 해야겠다. 물론 그것은 이 절망의 작가로부터 생의 긍정성을 읽어내는 시선이다. 회의(懷疑)로 눈을 가린 채 읽었던 그 비판에 절어있는 내 시선이 읽어내기를 거부했던 지점에서 박예진 작가는 다자이 오사무가 분투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극복해내려 했지만 극복할 수 없어 고뇌하는 인간 속에서 빛나는 생의 찬연함을 보는 시선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여러 대조적 작품들을 떠올리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는데, 작가 한강과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이었다.

 


인간실격의 요조와 그대의 차가운 손의 장운형,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도달하는 길의 동일함과 차이이다. 어쩌면 동양과 서양의 차이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을 것인데, 내면의 어둠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이고, 그 마주한 인간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수용하는가의 결과의 차이이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으로 자신의 내면을 감추게 되는 것은 이들 모두 그 출발지점은 같다. 요조는 가면을 쓴 삶을 거부하고 자아와 직접 마주하며 그 인간성이라는 괴물과 투쟁한다. 장운형은 가면으로 철저히 자신을 감춘 채 사는 길을 선택한다. 싱클레어는 자기 안의 신으로 상징되는 데미안을 통해 자기 존엄과 가치를 발견한다. 너무도 다른 길이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내면의 끔찍한 괴물성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회피하거나 도주 하거나, 자신을 기만하는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위장된 얼굴로 살아가기 일쑤다. 가장 쉬운 방편일 것이다. 그 자기혐오와 자기증오의 돌파구를 찾아내지 못하면 살아낸다는 것은 지옥일 것이다. 그래서 요조의 다음의 말이 가능했을 것이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다. 나에게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도무지 짐작되지 않는다.(人間失格에서)


사양, 斜陽, 달려라 메로스, 사랑과 에 대하여, 인간실격12작품의 문장들과 설명으로부터 독자마다의 정서에 어떤 반향을 일으키는 작품이나 문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학생, 女生徒이라는 작품에서는 성장하는 청년이 겪는 세상에 대한 시선의 확장 속에서 다가오는 불안과 방황, 고독과 존재 결핍의 감정들을 헤쳐 나가는 그 슬기로운 분투의 아름다움을, 앵두, 櫻桃에서는 한 가장인 남자의 가족 양육의 책임과 이기심에서의 내적 방황을 오가는 인간의 취약성, 그 연약함에 대한 연민을 공유하게 되고, 비용의 아내 로부터는 무능한 가장의 아내이자 지켜야할 아이들의 어머니인 여자의 자기희생적 삶의 종속적이고 닫힌 삶을 사는 자신의 성찰과 나아가 삶의 주인으로서 새롭게 생을 설계해 나가는 인물을 발견할 수도 있다. 자기고백이라는 사적표출이라는 제한적 시선에 가두어 두었던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편견이 무너지고, 그의 관찰이 머문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곡절들에 대한 아픈 공감의 연민이 흐르고 있음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내겐 나만의 어떤 생성의 표식으로 다가 온 작품이 있는데, 달려라 메로스, 직소, 비용의 아내세 편을 들 수 있겠다. 달려라 메로스는 눈물겨운 인간의 믿음이라는 이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형식에 기초한 책임의 문제일 것 같은데, 그 서사적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신뢰에 보답해야 한다, 지금은 오직 그 한 가지 뿐이다.”라며, 친구의 목숨을 위해 달려가는 인물의 분투의 여정이 더없이 아름답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조용히 나를 믿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 나는 믿음을 받고 있다. 내 목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죽음으로 속죄하겠다는 따위의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달려라 메로스에서)

 

한편 직소는 신약성경의 가롯유다의 예수에 대한 애증의 감정으로부터 인간의 배반과 분노조차 사랑의 기원임을 적나라하게 그 심적 형상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다자이 오사무가 인간의 심연에 대해 얼마나 깊은 통찰적 이해에 이르렀는지를 발견케 하는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던 까닭이다. 비용의 아내는 박예진 작가가 해당 글의 마지막에 발췌해 놓은 문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별로 기쁘지도 않았고, 그저 인간답지 못하면 어때, 우리, 살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했다.” 불안과 절망에 빠진 자신과 가족을 보듬으며 희생도 도피도 아닌, 삶이란 견뎌내는 것, 살아있음이 곧 생의 의미라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용의 아내인간실격의 목소리가 그 대척점에 놓여있는 작품으로 비교하며 읽는다면, 삶의 의미라는 것이 구태여 있는 것이라면 삶의 의지가 무엇인지 그 정체를 탐사하는 읽기가 되어 주리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비용의 아내현실 속 비용의 아내로 불리던 다자이 오사무의 마지막 연인으로 그와 동반 자살하는 야마자키 도미에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인간으로 실격되었다인간실격의 요조의 말과 비용의 아내에서 인간답지 못하면 어때라는 두 문장은 극단적으로 흔들리는 심적 동요를 보게 된다.

 

우리들은 끝없이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이것을 묻는 것이 인간의 삶 자체이기 때문인 것만 같다. 이 인간 고독과 절망의 탐사를 문학의 본령으로 여겼던 작가의 면모를 흘긋 엿보는 기회가 되어 주었다. 그 짧은 엿보기 속에서 내 읽기의 걸음을 재촉하는 작품들을 발견한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수확일 것이다. 그래, 인간 삶의 비참함이 곧 생의 아름다움인지도 모를 일이다. 붉은 표지의 아담한 이 책이 삶의 새로운 시작의 계기가 되어 줄지도 모르겠다. 절망과 좌절이란 모두 지우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내적 명령인지도. 다자이 오사무로 접근하는 우아하고 지적인 지도(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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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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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세상에 하나의 모습을 입어 태어나 풍파 속에서 사랑하고 꿈을 꾸고, 투쟁하다 다시 형태를 갖기 이전의 본래로 돌아가는 것을, 무한한 양태로 연결의 순환을 거듭하게 되는 것을, 한낱 꿈과 같은 찰나의 연()인 것이 것만 뭐 그리 대단한 영화(榮華)를 천세만세 만만세 누릴 것인 양 인간들은 교만을 떨어대고, 잔악과 폭력을 휘둘러대는 것인가. 장구(長久)해 보이기만 하던 육백년의 시간을 견뎌온 팽나무 할매에게 명멸하는 존재들의 덧없는 생의 분투는 얼마나 시린 것이었을까, 모든 만물은 거대한 자연의 순환 속에서 서로 연결된 하나인 것을 알지 못하는 존재들의 미련스러움과 탐욕스러움도 한단지몽(邯鄲之夢)인 것을 말이다.

 

【군산시 옥서면 하제 마을 600년 팽나무, 군산시 지정 보호수


아무르 강변 산자락이 끝나는 낮은 관목 숲으로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날아든다. 소설의 시간은 그렇게 시작된다. 천적의 공격을 피하고, 짝을 찾아 새끼를 낳고, 겨울을 나기 위해 남쪽을 향한 생을 건 비행을 한다. 조선 반도 서해안 하구에 긴 여정에서 바닥난 신체를 보충한다. 겨울이라 바짝 마른 열매를 달고 있는 팽나무는 개똥지빠귀의 고마운 양식이다. 그의 짝 암컷 개똥지빠귀 개암이날개의 고통스런 외침이 들려온다. 황조롱이에 낚아 채여 도움을 요청하는 울음이다. 그는 날아올라 황조롱이로부터 개암이날개가 풀려나도록 만들고 자신은 황조롱이에게 쫓긴다. 집요한 공격과 도주비행, 개똥지빠귀는 날개에 치명적 상처를 입어 동료들이 있는 하구 부근 곰솔이 무성한 숲에 이르지 못할 것임을 안다.

 

그는 잡풀이 듬성듬성 자라난 빈터에 떨어진다. 기진맥진한 작은 새의 몸 위에 눈보라가 들씌워졌고 체온이 떨어진 개똥지빠귀는 숨이 끊어졌다. ...죽은 새는 눈 밑에서 썩어갔고, 그의 뱃속 팽나무 열매 몇 개 중 거죽이 사라진 딱딱하게 굳은 씨앗은 부드러운 모래 흙속으로 들어가 습기에 불고 싹이 트고 실 같은 뿌리가 생겼다. 개똥지빠귀의 분해된 몸이 녹아들어 기름진 땅....바람과 햇빛과 물안개와 가랑비와 폭풍까지 견뎌낸 어린 팽나무는 스스로 죽음 같은 겨울의 정지와 봄마다 찾아오는 생명의 활기를 깨달으며 거목으로 성장한다. (31쪽에서)

 

인간의 시간으로 조선초엽 어느 시절의 한반도 서해안 한 하구(河口)에서 이렇게 역사의 시침은 흘러, 지배층의 무능과 착취에 내몰린 헐벗고 굶주린 민초들의 생을 건 행로에서 한 노승은 유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다섯 살 아이를 거두어들인다. 긍휼(矜恤), 측은지심이다. 보경사 광덕스님은 아이에게 몽각(夢覺)이라는 불가(佛家)의 계명을 준다. 아이는 불법과 경전에 뜻을 두지 못하고, 노스님은 몽각에게 절의 식량과 채소를 가꿀 밭을 내준다. 몽각은 성실히 절에 자신이 수확한 양식들을 나른다. 수박과 참외를 한 지게 지고 공양간에 건네주던 그 어느 날 불공드리러 온 강릉부사의 여식과 만나게 되고, 몽각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하고 애태운다. 그렇게 일심으로 여인을 그리워하며 절을 올리다 법당에서 잠깐의 잠을 이룬다. 아마도 몽각이 꾸는 이 한나절의 일취지몽(一炊之夢)이 소설의 주제를 관통하는 생의 깨달음, 팽나무 할매가 지켜본 삶의 궁극에 대한 견성(見性) 그것일 것이다.

 

꿈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다는 이름처럼 몽각은 소녀와 이룬 금슬지락과 나라의 폭력에 내몰린 유민의 곤궁함, 그리고 이별이라는 한 생애를 현생처럼 겪는다. 세속의 한평생 덧없는 희로애락을 겪은 몽각은 홀로 수도(修道)의 길에 나선다. 몽각의 견성은 이미 그에게 내재해 있었을 것이다. 그가 여정에서 보게 되는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수백만 백성의 끔찍한 재해와 외딴 섬 팽나무 할매가 있는 하제로 불리는 장소의 절대 고독의 삶과 갯벌에 앉아 그를 연명하게 했던 생물들에게 자신의 몸을 보시하는 장면은 모든 미혹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어떤 숭엄함에 젖게 한다.

 


칠게들이 그의 주검을 덮어버리고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듯, 하제 앞 수라 갯벌에는 철새들이 날아들고 먼 비행과 폭풍우에 지친 도요새의 주검은 생합들의 몸이 된다. 바닷물이 밀려나가자 호미로 갯벌을 긁어 생합을 캐는 아낙들의 분주한 손이 작은 섬 하제의 팽나무 빈터에 사람들이 어느덧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제 개똥지빠귀의 주검을 거름삼아 성장했던 팽나무가 삼백 살의 거목이 되었다. 망념(妄念)과 미혹(迷惑)으로 분주한 인간들의 그 악착같은 욕심의 시간들이 한없이 축소된다. 결국 본래의 성품인 우주자연 그 어느 곳의 일원으로 합류할 존재인 것을.

 

소설의 후반부는 서낭목이 된 팽나무 할매를 중심으로 하제 포구와 갯벌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찰나처럼 흐른다. 동네 사람들이 섬기는 팽나무 할매를 몸주 삼은 당골네에 시집온 고창댁 자근연이가 낳은 배춘삼과 그녀 남편의 시신을 거두어 주었던 뱃사람 유 사공의 정성스럽고 충실한 여느 보통 사람들의 삶이 펼쳐진다. 사대부들의 가렴주구로 혹독한 궁핍에 내몰린 백성들의 오갈 곳 없는 의지를 기댈 수단이 되었던 천주교와 서학의 탄압 속에 이 민초들의 가계(家系)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신산한 삶이 무한히 내어주는 자연, 갯벌과 드넓은 어장에 기탁하여 다시금 생을 지속해 나간다. 어언 팽나무의 수령이 오백년에 이르렀을 때, 그 잘난 조선의 사대부들과 왕은 외세를 불러 구국(救國)의 길, 온 백성이 형제자매이고 만물이 평등한 세상을 향한 외침을 무차별 학살하며, 나라를 팔아먹기에 이른다. 시천주(侍天主), 누구나 자기 안에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 동학의 우주만물의 평등과 그 존귀함의 정신은 망령된 집념에 사로잡힌 사대부 기득권자들에 의해 파괴된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들의 야욕의 시간이라고 달리 흐르겠는가. 그것들 또한 썩어 흙과 강과 대기의 한낱 원소로, 그 본래의 성격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을. 하제 위에 있는 중제와 상제에 조선을 식민통치하던 일본은 군용기 활주로를 건설하고, 팽나무 할매는 그 위기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난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흐르고 패망한 일본이 물러난 자리에 미군이 들어서고, 미군 군용기 활주로 확장과 갯벌을 막아 농토를 만든다는 미명 하에 간척지 사업으로 사람들과 온갖 생명의 터전을 탐욕으로 물들인다. 병인년 박해로 한 가계가 무너져 내리고 살아남은 유일한 핏덩이가 살아 그의 후손인 신부가 되어 국가폭력과 생태파괴를 무참히 저지르는 탐욕의 정치에 맞서는 길 위의 신부가 되고, 인적이 사라진 저녁 갯벌에서 들려오는 생명들의 대합창 소리를 들은 춘삼의 후손 배동수의 연대의 목소리가 더해져 숭고한 만물의 대합창이 되어 울려온다,

 

소설의 목소리는 견성이요, 시천주이고, 만물의 인연이며, 존재의 일원성에 대한 깨우침일 것이다. 이제 섬이었던 팽나무 할매가 있는 하제는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이 저지른 갯벌의 간척화로 인해 섬의 흔적은 사라지고 군산 옥서면 선연리 하계 마을이라는 육지가 되었는가보다. 새와 나무와 갯벌과 인간, 지상의 모든 개체들의 그 짧은 순환의 순간으로 경유하는 생의 찬연(燦然)함과 인연과 궁극의 본성을 생각게 된다.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이 명상과 성찰의 시간을 좀체 갖지 못하는 것 같다. 온갖 인위적 관습에 순응하며 저마다 분주히 자기 욕망에 몰두할 때 타자의 세계는 저만치 물러나 보이지 않게 된다. 그 얼마나 짧은 순간 우리들은 이 형상을 함께하며 살아가는가. 이름없이 서있는 나무들과 풀과 꽃, 곤충들과 새, 강과 갯벌과 바다의 수많은 개체들, 이 모두가 우주의 근원인 하늘님을 지닌 존재인 것을. 꼭 사람을 하늘처럼 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이기만 하겠는가. 事萬物如天인 것을. 생태소설이며, 인간과, 동물과, 식물의 모든 목소리로 들려주는 한반도 우리네 터전의 통사(通史)이고, 생명에 대한 찬란한 서정시이자, 만물의 감응과 인연에 대한 견성의 경전이다. 오늘 우리네 지성의 깨우침은 여기에 이르렀다. 모두 잠든 새벽 시간에 귀 기울이면 듣지 못했던 무수한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그들과 이 작은 몸뚱이가 하나로 연결된 존재임을. 이 겨울 점점 더욱 땅의 흙내가 내 코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저 개똥지빠귀의 시간에 합류하게 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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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클레어 노트 쏜살 문고
헤르만 헤세 지음, 박광자 옮김 / 민음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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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문집을 두 층()의 관점으로 읽게 되면 보다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 같다. 하나는 글의 표층(表層)인 삶의 주체자로서 자기-되기의 내면적 사유이고, 다른 하나는 그 표층의 아래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꿈틀대는 당대 독일사회와 독일인들을 잠식하고 있던 과대망상과 퇴행적 개인주의의 실체라는 정치문화적 실상이다. 전쟁에 패망하면 항시 전쟁기획과 추동에 참여했던 부역자들, 선동자들은 자신들의 죄과를 은폐하는 행태를 보이곤 한다.

 

설혹 적극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긍정하거나 시민적 몽매성으로 인해 부화뇌동하였다고 변명, 발뺌하는 것 등이다. 정말 인간의 비굴한 얼굴들은 어떠한 형식으로든 자신을 정당화하려 한다. 헤세는 적어도 1910년대 이후부터 스위스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한 것 같다. 그가 조국 독일과 독일인들을 외부의 시각에서 관찰할 수 있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러한 자리의 관계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바로 이점이 이 산문집을 두 층의 관점으로 읽을 수 있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수록된 열네 편의 산문 중, 세 편의 산문 은신처〈『데미안에 대한 메모, 아델레에게 쓴 편지를 제외하면, 전쟁 중이거나 전쟁 직후(1차 세계대전 및 2차 세계대전)에 독일인 및 독일의 젊은이들을 향해 써진 글들이다. 어떤 의미에선 위의 세 편의 글들도 독일인을 향한 다른 글들의 진실성을 담보하고자 헤세 자신의 정당화를 위한 언어처럼 보인다. 산문집 모든 글을 관류(貫流)하는 하나의 언어, 즉 표층의 주제는 자기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생명력, 자기 스스로에 도달한 사람이 되고자하는, 자기 안에 깃든 신성(神性)의 깨우침으로서, 자신에 대한 용기를 가지고 스스로의 운명에 귀 기울이는 존재를 향한 노력에 대한 성찰이자 권고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쟁은 인간 떼거리의 비굴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듯하다. 헤세의 글을 읽으면서 1918년부터 1933년까지의 독일 정치문화사인 피터 게이의 명저 Weimar Culture(바이마르 문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피터 게이는 1차 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에서 이뤄진 민주공화정을 시작케 한 바이마르 혁명 정부가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분석하는 가운데, 그것은 기득권 세력의 집요한 반동, 하나의 소극(笑劇), 허구로 보이도록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인 탐욕의 광기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폭넓게 대중의 마음에 침윤된 맹목적 비이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말한다. 헤르만 헤세는 산문 은신처에서 자신의 거처를 스위스로 옮기게 된 이주의 정당성을 사적으로 겪었던 내면의 혼돈을 치유하는 여정에서 자리매김한 당위로서 말하고 있다. 또한 〈『데미안에 대한 메모라는 글도 전쟁터(1차 대전)에서 죽은 동료들을 말하면서, 살육과 파괴의 목표가 그 대상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음을 통찰하게 되었노라고, 새로 태어나기 위해 분노하고 도륙하고 말살하고 죽고자하는 영혼의 발산이었다고 쓰고 있다.

 

글 쓰는 이로써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마치 전쟁의 참화를 잘 알고 있다는 듯 그들 중 어떤 이는, 바로 내 곁에서 죽었다, 자신이 말 할 권리를 지녔음을 시사(示唆)하지만, 피터 게이 교수의 지적처럼 헤세는 패전 직후인 1918년에 쓴 세계사라는 글에서 황제에 대한 신념을 갑자기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교체하는 것은 그저 깃발만을 바꿔드는 데에 불과하다.”, 새로운 민주공화정(바이마르 정부)의 시작에 회의적 시선을 보낸다. 이에 더해 갑자기 세계사가 다시 등장했다. 논설위원들, 교수들, 교사들...이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라며, 당대 독일의 엘리트라 자처하던 종교 및 정치, 경제 분야를 지배하던 구 권력 전반의 의식과 그가 결코 다르지 않았음을 읽게 된다.

 

각 글들의 표층에 드러난 의미는 내적 수양, 즉 자기-되기의 강변이지만, 그 이면을 파고들어가 보면 양차대전의 참화에서 비껴난 중립국 스위스에서의 자기 삶의 고충에 대한 정당화의 변임을 읽을 수 있다. 아주 짧게 거론되는 자신에게 도착한 토마스 만에 대한 비난의 편지에 대해서 우회적인 비난을 보내기도 하는데, 두 사람 공히 스위스로 망명 또는 이주한 인물이며, 나치에 대한 적극적 저항의 태도를 드러낸 적이 없기에 의심받기에 충분했음에 대한 반감이었을 것이다. 토마스 만은 바이마르 민주정에 대한 지독한 혐오를 보였던 대표적 지식인의 일원이었다. 결국 바이마르 민주공화정이 나치들에게 무너짐으로써 인류 비극의 대참화를 겪게 했던 책임을 지녀야 마땅한 일원이었음에도 그 어떤 인식도 보이지 않는 것은 비난의 대상임을 피해 갈 수 없게 한다.

 

특히 2차 대전 종전 해인 1945년과 1946년에 쓰여진 세 편의 산문 리기산의 마지막 일기, 그의 두 살 손위 누이인 아델레에게 쓴 편지, 19464, 루이제린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독일에 부치는 편지에는 파괴된 독일 본국과 달리 파괴되지 않은 따사로운 집 안에 앉아서 매일 굶주림 걱정 없이 무사태평하게 지내 온 사람, (...) 직접 위협받은 적도, 더군다나 폭력을 당한 일조차 없는 사람이라며, 자신을 이처럼 인식하는 독일 본토 내 동료 지식인들과 민중의 비난을 뒤틀린 긍정의 언어로 말하면서, 그래도 한 마디 충고를 건 넬 수 있지 않냐고 운을 떼고서는 자신이 “1918년 당시, 여러분은 나쁜 헌법을 가진 군주제 대신에 자유스러운 공화제를 수립할 수 있었습니다.”라며, 마치 자신이 바이마르 공화정을 지지한 듯 말한다거나, 모든 국수주의적 망상을 통찰하고 거기서 벗어나야함을 역설하는 것은 다분히 기만이고 위선으로 읽힌다. 자신이 패망(1차 대전) 후 광기에 휩싸인 독일인들이 다시금 저지를 화를 예감했음을 지적했는데도 너희들은 거듭 불속에 뛰어들어 동일한 화를 자초하기 않았느냐는 지나가는 객이면 모두 할 수 있는 객쩍은 소리 같기만 하다.

 

특히 본국에서 전쟁(2차 대전)의 고통을 오롯이 겪어내야 했던 두 살 손위 누이인 아델레에게 쓴 편지에는 나는 홀로 이곳 언덕 위의 집에서 누이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고독에 젖어, 나를 오해하거나 이용할 염려가 없는 사람에게...”와 같은 표현에서 드러나듯, 아델레가 그에게 어떤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랜 전쟁의 참화 속에서 끔찍한 고통을 보냈을 병든 누이에게 오히려 자신이 더 심한 고통에 놓여있음을 항변하는 것으로 읽힌다. 헤세가 1877년생이니 예순여덟 살이었을 것이고, 누이는 일흔 살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국에서 늙어가는 이로서의 외로움과 여러 고통이 있을 것이지만 과연 히틀러의 나치 독재 치하에서 겪어내야 했던 전쟁, 그 지옥 같은 죽음의 환경에 감히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1918년 또는 1945년의 글들은 이러한 자기 정당화와 이에 토대를 둔 독일인들에 대한 자기 성찰의 변들이라 말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표층적 내용인 자기-되기의 내용이 가장 깊이 있게 드러난 글은 고집전쟁과 평화, 차라투스트라의 귀환세 편의 산문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글들 또한 1차 대전 직후인 1918년에 써진 글들로 패망한 독일인들의 괴로움과 분노의 실체가 대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작업이지만, 그것의 바탕인 정신의 성찰은 철저한 자기 내면의 인식이야말로 자기 삶의 근본적 변화의 동력임에 대한 역설로 채워져 있다. 고집의 글을 보면, 모든 미덕은 인간이 만든 법칙에 복종을 의미하는 반면에 오로지 고집만큼은 이러한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다면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미덕이라고 말문을 연다. 그리고선 고집이 있는 사람은 전혀 다른 법칙, 곧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극히 성스러운 법칙인 자신만의 생각을 따른다.”고 고집 예찬론을 펼친다. 여기서 말하는 고집이란, 우주에서 아무리 미미한 것일지라도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완전하고 확실하고 흔들림 없이 자기 법칙을 철저하게 따르기 때문에 그러할 수 있는 것이라는 표현처럼 그것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살아가고 행동하고 느끼는 소신 또는 개성과 같은 긍정적인 의지이다.

 


그런데 이 글은 현실정치에의 참여를 시민적 의무로 여기는 내게는 지극히 부당한 견해로 읽힌다. 이를테면 고집의 미덕을 가진 사람은 자신에 대해 용기를 가지고, 스스로의 운명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며, 정치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성장에 관심을 두는 것이 삶의 최고의 미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의 삶을 지배했던 은신처로서 스위스의 이주라던가, 철저한 정치적 무관심(물론 그는 자신의 작품으로 말했다고 하겠지만)이라는 이기주의(egoism)가 어디에 터 잡은 것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는 자신을 이기주의라 부르려면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자신의 이기주의는 돈과 권력을 탐하는 천박한 이기주의가 아니라고. 돈과 권력만 탐하지 않으면 이기주의가 타자와의 관계로 이루어진 인간 세계에서 무조건 용납될 수 있는 것인가? 가당치도 않은 궤변이다.

 

개성의 발현인 예술의 세계에서는 너 자신이 되어라는 어쩌면 필요한 미덕이고 요구되는 자질일 것이겠지만, 자신을 둘러싼 완벽한 담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의 완벽성과 가치를 드높이는 세계는 타자들이 모인 세계와 불화할 수밖에 없게 된다. 헤세의 이기주의가 자기 욕구의 실현을 위해 다른 이들의 수용과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에고티즘(egotism;개인주의), 즉 다른 사람들의 간섭과 침해를 배제하고 무한한 다양성을 인식하며 자기 완벽을 추구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납득될 만한 주장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과연 전쟁과 정치의 세계에 얽매여 있는 독일인들에게 소용될 수 있는 미덕일지에 대해서는 의혹이 짙게 드리운다. 그는 패전의 분노에 매여 증오를 쏟아내느라 여념 없는 독일인들에게 에고티즘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되기에 철저하게 열중하면 삶을 더없이 완벽히 충만하게 꽃피우는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물론 모든 시민이 빠짐없이 자기-되기의 높은 탁월성에 이르면, 그 사회는 완전한 공화국으로서의 이상에 도달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적 삶, 전쟁의 소용돌이에 직면한 현실에서 그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쓸데없는 소리요, 잡소리요, 자기 안락에 빠져 세상모르는 서생의 옹알이가 아닌가?

 

이 산문집에서 단연 오늘의 지성에게 공히 울림을 지닌 산문이라면 전쟁과 평화, 차라투스트라의 귀환두 편이라 말하고 싶다. 전쟁과 평화는 전쟁이란 인간의 원초적이며 자연스러운 본능인 반면에 평화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 여전히 탐구하고 예감해야 하는 대상이라 말하는 지점에서 그가 평화주의자임을, 희망과 이상주의에 경도되어 있었음을 보게 된다. 물론 긍정적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희생으로 살며 타인을 두려워하고 증오하며 사는 것이 인간 삶이라는 측면에서 전쟁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그저 방치하면 얼마든지 자연 발생하는 것일 게다.

 

따라서 평화는 얼마나 어려운가. 조금이라도 눈앞에서 소홀히 취급하면 평화는 저 멀리 도망치고 곧 속박과 폭력의 독재와 전제정치가 사람들을 찍어 누르거나, 전쟁의 참화에 휩쓸리게 된다. 결국 여기서도 헤세는 평화는 인식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바로 인간인 우리 내면에 대한, 생명에 대한 인식, 그 비밀스러운 마법에 대한 인식을 사랑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자기-되기의 또 다른 표현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귀환에 이르면, 패전에 대한 괴로움과 울분으로 이를 외부의 적을 향해 돌리는 독일 국민들에게 팽배한 의식의 실체에 대한 자기 성찰의 권고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정치 일반에 대한 보편성의 진실을 읽게 되는데, 왜 너희 독일인들은 모든 나라가 너희의 적이 되었는지, 또 너희를 외면하고 비난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본적 없느냐고 묻는다. 그리고는 너희는 결코 오해받지 않았다고 단정하면서, 이해받지 못하고 착각한 쪽은 바로 너희 자신이라고, 자신이 가지고 있지도 않는 덕을 내세우며 적들의 악덕을 맹렬히 비난하는 독일인의 자기 성찰 없는 맹목성, 과대망상을 지적한다.

 

우리들은 항시 자신의 좌절이나 패배를 타인의 악덕으로 전가하는 데 선수들이다. 선거에 지면, 이긴 자를 부정한 나쁜 놈이라 적대시하고, 패망하고는 엉뚱한 곳에 대해 온갖 악의를 퍼붓는 것이 바로 이러한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이다. 고약한 충동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라면 너희는 모두 적들의 소행이라 치부해왔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괴로움을 주거나 괴로움을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그럼으로써 우주의 차가운 냉기, 그 차가운 황홀경의 지각인 이성의 세계를 일궈낼 수 있으리라 조언한다. 자기 괴로움이 발생하면 그 괴로움을 받아들이고 귀 기울이기는커녕, 곧 그 괴로움을 외부의 대상으로 돌려 존재치도 않은 악덕의 적을 만들어 헛된 행짜로 열정을 낭비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이 작은 산문집은 1919년 발표된 정치평론집 성격의 차라투스트라의 귀환1923년 출간된 일종의 비망록인 싱클레어 노트에서 몇 편씩이 발췌된 산문집으로, 14 꼭지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글 쓴 시기의 표시를 보면 1916~1919년 즈음하여 써진 글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1945~1946년에 써진 글들이 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연설문을 포함 4 꼭지가 있다. 각각 1차 대전과 2차 대전 즈음과 직후에 발표된 글들이듯 패전에 따른 독일인, 특히 젊은 세대를 향한 제언의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글들의 울림을 오늘로 확장하여 읽는다면, 달리 표현하자면 패전이라는 절망과 울분의 나락에 떨어진 패망국 독일인의 좌절과 고통을 인간 일반의 절망과 고뇌로 전용하여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전용하여 읽게 되면 앞선 감상의 글과 같이 전쟁일반에 대해서, 평화의 어려움에 대해서, 괴로움과 외로움의 직면에 대해서, 자기 성찰이라는 내면 가꿈의 삶의 필요에 대해서 우리들은 어떤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1918~1946년의 독일 사회의 지성을 대표하는 작가를 통해 이들의 정치문화적 이데올로기를, 그 전반적인 가치의식을 엿볼 수도 있다. ‘루이제 린저를 향한 공개서한이라는 부제를 한 산문은 헤세가 전후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판을 불식시키려는 저의가 보인다. 나치에 저항하여 혹독한 고문과 구금의 고통을 겪었던 젊은 여성 지식인의 고초에 적극적 이해와 공감의 글을 공개적인 글로 발표함으로써 토마스 만과 같은 이들처럼 회색지대에 안주했던 인사가 아님을 불식시키려 했던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고 이러한 의혹이 절로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바이마르 정부시대의 한 지식인의 사고를 바라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글들이다. 그의 에고티즘의 역설(力說)은 그리 새로운 제안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게다. 이미 1890년대부터 이러한 자기-되기의 철학은 니체는 물론 예술과 철학에 넓게 편재한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융의 정신분석학과 맞닿아 있음도 한 영향이 되겠지만, 글쎄 그것에 지나친 조명을 비추는 세간의 저술들은 침소봉대가 아닐까. 1910~1945년의 독일 지성의 읽기는 너무도 인류 사회에 각양의 산물 -나치즘(전체주의), 민주주의 실험, 민중의 몽매성, 지성의 총체적 파괴적 흐름, 전쟁과 종전의 후과의 특정한 사례들 - 을 출현시켰으며, 그것이 오늘에도 하나의 전례로서 암약하고 있기에 관심 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질풍노도의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지나치게 협의적인 시선으로 이 책을 읽을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는 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데미안을 한 아이의 내면의 성장으로 읽는 판에 박힌 독서는 어쩌면 헤세가 가장 싫어하는 순응성, 길들이기의 악덕이듯, 이 책 또한 무한히 다양한 읽기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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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2-19 0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한민국 정치인들도 이런 책을 읽으면 좋을텐데.ㅠㅠ

비의식 2025-12-19 08:08   좋아요 0 | URL
오~ 그들에게 성찰의 읽기는커녕 독서조차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호시우행님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