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 문장의 기억 (양장) - 살아 있음의 슬픔, 고독을 건너는 문장들 Memory of Sentences Series 4
다자이 오사무 원작, 박예진 편역 / 리텍콘텐츠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너지며 써내려간, 인간이라는 병의 기록- 프롤로그에서

 

위 문장은 엮은이 박예진 작가의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작품에 대한 총체적 감응의 표현일 것이다. 인간이기에 겪어야만 하는 생의 질곡(桎梏)들이 그 모습과 유형을 달리하며 우리네 삶을 고통의 시련 속에 빠뜨린다. 이 자기고백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그 삶의 형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분투했던 작가라고 이해해도 될 듯하다. 그럼에도 나는 이들 자기고백 류()의 사()소설 작품들에 대해 회의적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일본의 사소설을 모두 섭렵했다는 말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라는 한 인간의 신변에 극단적으로 시선이 좁아진 관조의 리얼리즘으로 세계와의 격리, 다시 말해 세계와 관계없이 분리된 사적 자기표출이라는 나르시시즘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다.

 

특히 내게 고착된 이러한 관점은 자기 객관화 능력이 떨어지는 일본인 전형의 유아적 인격구조의 산물로서 자기고백 소설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문학의 한계는 한 개인의 경험에 기반함으로써 불가불 소재의 고갈에 직면하게 되고, 결국 이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소재를 위한 자기 연출을 필요로 하게 된다. 다자이 오사무의 이른 죽음을 이러한 한계, 즉 극단에 내몰린 존재의 필연으로 이해하게 되었었다. 이제 사()소설에 대한 내 편협한 관점을 수정해야 할 만큼 경험의 시간이 흘렀다. 무엇보다 문장의 기억(Memory of Sentences)시리즈를 그 동안 읽으며 몇 가지 느낀 점이 있다.

 

그 첫째는 하나의 텍스트에 대한 대척점에 선 해석들을 만나게 된 것인데, 그로인해 삶의 시선들에 대한 조금 관대하고 열린 수용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소개되는 많은 작품들을 모두 읽어야할 만큼 삶의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독자에게 각 개인에게 특정한 감응으로 연결되는 작품의 선택이 가능토록 충분한 지향적 읽기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저마다의 취향이 다르고, 삶에 직면한 상황이 다를 것이며, 특히 개인의 생명력 혹은 활력에 어떤 번뜩이는 에너지의 생성을 일으키는 작품을 만나는 계기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읽기의 초입에 들어선 독자나 특정 작가의 작품을 선택하기에 망설이는 많은 일반 독자들에게 문장의 기억 시리즈는 훌륭한 방향등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속 문장들과 박예진 작가의 간결하고 압축적인 작품 설명의 글은 내게 어떤 새로운 문()을 발견하는 데 열쇠가 되었다고 해야겠다. 물론 그것은 이 절망의 작가로부터 생의 긍정성을 읽어내는 시선이다. 회의(懷疑)로 눈을 가린 채 읽었던 그 비판에 절어있는 내 시선이 읽어내기를 거부했던 지점에서 박예진 작가는 다자이 오사무가 분투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극복해내려 했지만 극복할 수 없어 고뇌하는 인간 속에서 빛나는 생의 찬연함을 보는 시선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여러 대조적 작품들을 떠올리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는데, 작가 한강과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이었다.

 


인간실격의 요조와 그대의 차가운 손의 장운형,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도달하는 길의 동일함과 차이이다. 어쩌면 동양과 서양의 차이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을 것인데, 내면의 어둠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이고, 그 마주한 인간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수용하는가의 결과의 차이이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으로 자신의 내면을 감추게 되는 것은 이들 모두 그 출발지점은 같다. 요조는 가면을 쓴 삶을 거부하고 자아와 직접 마주하며 그 인간성이라는 괴물과 투쟁한다. 장운형은 가면으로 철저히 자신을 감춘 채 사는 길을 선택한다. 싱클레어는 자기 안의 신으로 상징되는 데미안을 통해 자기 존엄과 가치를 발견한다. 너무도 다른 길이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내면의 끔찍한 괴물성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회피하거나 도주 하거나, 자신을 기만하는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위장된 얼굴로 살아가기 일쑤다. 가장 쉬운 방편일 것이다. 그 자기혐오와 자기증오의 돌파구를 찾아내지 못하면 살아낸다는 것은 지옥일 것이다. 그래서 요조의 다음의 말이 가능했을 것이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다. 나에게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도무지 짐작되지 않는다.(人間失格에서)


사양, 斜陽, 달려라 메로스, 사랑과 에 대하여, 인간실격12작품의 문장들과 설명으로부터 독자마다의 정서에 어떤 반향을 일으키는 작품이나 문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학생, 女生徒이라는 작품에서는 성장하는 청년이 겪는 세상에 대한 시선의 확장 속에서 다가오는 불안과 방황, 고독과 존재 결핍의 감정들을 헤쳐 나가는 그 슬기로운 분투의 아름다움을, 앵두, 櫻桃에서는 한 가장인 남자의 가족 양육의 책임과 이기심에서의 내적 방황을 오가는 인간의 취약성, 그 연약함에 대한 연민을 공유하게 되고, 비용의 아내 로부터는 무능한 가장의 아내이자 지켜야할 아이들의 어머니인 여자의 자기희생적 삶의 종속적이고 닫힌 삶을 사는 자신의 성찰과 나아가 삶의 주인으로서 새롭게 생을 설계해 나가는 인물을 발견할 수도 있다. 자기고백이라는 사적표출이라는 제한적 시선에 가두어 두었던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편견이 무너지고, 그의 관찰이 머문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곡절들에 대한 아픈 공감의 연민이 흐르고 있음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내겐 나만의 어떤 생성의 표식으로 다가 온 작품이 있는데, 달려라 메로스, 직소, 비용의 아내세 편을 들 수 있겠다. 달려라 메로스는 눈물겨운 인간의 믿음이라는 이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형식에 기초한 책임의 문제일 것 같은데, 그 서사적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신뢰에 보답해야 한다, 지금은 오직 그 한 가지 뿐이다.”라며, 친구의 목숨을 위해 달려가는 인물의 분투의 여정이 더없이 아름답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조용히 나를 믿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 나는 믿음을 받고 있다. 내 목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죽음으로 속죄하겠다는 따위의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달려라 메로스에서)

 

한편 직소는 신약성경의 가롯유다의 예수에 대한 애증의 감정으로부터 인간의 배반과 분노조차 사랑의 기원임을 적나라하게 그 심적 형상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다자이 오사무가 인간의 심연에 대해 얼마나 깊은 통찰적 이해에 이르렀는지를 발견케 하는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던 까닭이다. 비용의 아내는 박예진 작가가 해당 글의 마지막에 발췌해 놓은 문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별로 기쁘지도 않았고, 그저 인간답지 못하면 어때, 우리, 살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했다.” 불안과 절망에 빠진 자신과 가족을 보듬으며 희생도 도피도 아닌, 삶이란 견뎌내는 것, 살아있음이 곧 생의 의미라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용의 아내인간실격의 목소리가 그 대척점에 놓여있는 작품으로 비교하며 읽는다면, 삶의 의미라는 것이 구태여 있는 것이라면 삶의 의지가 무엇인지 그 정체를 탐사하는 읽기가 되어 주리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비용의 아내현실 속 비용의 아내로 불리던 다자이 오사무의 마지막 연인으로 그와 동반 자살하는 야마자키 도미에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인간으로 실격되었다인간실격의 요조의 말과 비용의 아내에서 인간답지 못하면 어때라는 두 문장은 극단적으로 흔들리는 심적 동요를 보게 된다.

 

우리들은 끝없이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이것을 묻는 것이 인간의 삶 자체이기 때문인 것만 같다. 이 인간 고독과 절망의 탐사를 문학의 본령으로 여겼던 작가의 면모를 흘긋 엿보는 기회가 되어 주었다. 그 짧은 엿보기 속에서 내 읽기의 걸음을 재촉하는 작품들을 발견한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수확일 것이다. 그래, 인간 삶의 비참함이 곧 생의 아름다움인지도 모를 일이다. 붉은 표지의 아담한 이 책이 삶의 새로운 시작의 계기가 되어 줄지도 모르겠다. 절망과 좌절이란 모두 지우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내적 명령인지도. 다자이 오사무로 접근하는 우아하고 지적인 지도(地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할매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그렇게 세상에 하나의 모습을 입어 태어나 풍파 속에서 사랑하고 꿈을 꾸고, 투쟁하다 다시 형태를 갖기 이전의 본래로 돌아가는 것을, 무한한 양태로 연결의 순환을 거듭하게 되는 것을, 한낱 꿈과 같은 찰나의 연()인 것이 것만 뭐 그리 대단한 영화(榮華)를 천세만세 만만세 누릴 것인 양 인간들은 교만을 떨어대고, 잔악과 폭력을 휘둘러대는 것인가. 장구(長久)해 보이기만 하던 육백년의 시간을 견뎌온 팽나무 할매에게 명멸하는 존재들의 덧없는 생의 분투는 얼마나 시린 것이었을까, 모든 만물은 거대한 자연의 순환 속에서 서로 연결된 하나인 것을 알지 못하는 존재들의 미련스러움과 탐욕스러움도 한단지몽(邯鄲之夢)인 것을 말이다.

 

【군산시 옥서면 하제 마을 600년 팽나무, 군산시 지정 보호수


아무르 강변 산자락이 끝나는 낮은 관목 숲으로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날아든다. 소설의 시간은 그렇게 시작된다. 천적의 공격을 피하고, 짝을 찾아 새끼를 낳고, 겨울을 나기 위해 남쪽을 향한 생을 건 비행을 한다. 조선 반도 서해안 하구에 긴 여정에서 바닥난 신체를 보충한다. 겨울이라 바짝 마른 열매를 달고 있는 팽나무는 개똥지빠귀의 고마운 양식이다. 그의 짝 암컷 개똥지빠귀 개암이날개의 고통스런 외침이 들려온다. 황조롱이에 낚아 채여 도움을 요청하는 울음이다. 그는 날아올라 황조롱이로부터 개암이날개가 풀려나도록 만들고 자신은 황조롱이에게 쫓긴다. 집요한 공격과 도주비행, 개똥지빠귀는 날개에 치명적 상처를 입어 동료들이 있는 하구 부근 곰솔이 무성한 숲에 이르지 못할 것임을 안다.

 

그는 잡풀이 듬성듬성 자라난 빈터에 떨어진다. 기진맥진한 작은 새의 몸 위에 눈보라가 들씌워졌고 체온이 떨어진 개똥지빠귀는 숨이 끊어졌다. ...죽은 새는 눈 밑에서 썩어갔고, 그의 뱃속 팽나무 열매 몇 개 중 거죽이 사라진 딱딱하게 굳은 씨앗은 부드러운 모래 흙속으로 들어가 습기에 불고 싹이 트고 실 같은 뿌리가 생겼다. 개똥지빠귀의 분해된 몸이 녹아들어 기름진 땅....바람과 햇빛과 물안개와 가랑비와 폭풍까지 견뎌낸 어린 팽나무는 스스로 죽음 같은 겨울의 정지와 봄마다 찾아오는 생명의 활기를 깨달으며 거목으로 성장한다. (31쪽에서)

 

인간의 시간으로 조선초엽 어느 시절의 한반도 서해안 한 하구(河口)에서 이렇게 역사의 시침은 흘러, 지배층의 무능과 착취에 내몰린 헐벗고 굶주린 민초들의 생을 건 행로에서 한 노승은 유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다섯 살 아이를 거두어들인다. 긍휼(矜恤), 측은지심이다. 보경사 광덕스님은 아이에게 몽각(夢覺)이라는 불가(佛家)의 계명을 준다. 아이는 불법과 경전에 뜻을 두지 못하고, 노스님은 몽각에게 절의 식량과 채소를 가꿀 밭을 내준다. 몽각은 성실히 절에 자신이 수확한 양식들을 나른다. 수박과 참외를 한 지게 지고 공양간에 건네주던 그 어느 날 불공드리러 온 강릉부사의 여식과 만나게 되고, 몽각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하고 애태운다. 그렇게 일심으로 여인을 그리워하며 절을 올리다 법당에서 잠깐의 잠을 이룬다. 아마도 몽각이 꾸는 이 한나절의 일취지몽(一炊之夢)이 소설의 주제를 관통하는 생의 깨달음, 팽나무 할매가 지켜본 삶의 궁극에 대한 견성(見性) 그것일 것이다.

 

꿈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다는 이름처럼 몽각은 소녀와 이룬 금슬지락과 나라의 폭력에 내몰린 유민의 곤궁함, 그리고 이별이라는 한 생애를 현생처럼 겪는다. 세속의 한평생 덧없는 희로애락을 겪은 몽각은 홀로 수도(修道)의 길에 나선다. 몽각의 견성은 이미 그에게 내재해 있었을 것이다. 그가 여정에서 보게 되는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수백만 백성의 끔찍한 재해와 외딴 섬 팽나무 할매가 있는 하제로 불리는 장소의 절대 고독의 삶과 갯벌에 앉아 그를 연명하게 했던 생물들에게 자신의 몸을 보시하는 장면은 모든 미혹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어떤 숭엄함에 젖게 한다.

 


칠게들이 그의 주검을 덮어버리고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듯, 하제 앞 수라 갯벌에는 철새들이 날아들고 먼 비행과 폭풍우에 지친 도요새의 주검은 생합들의 몸이 된다. 바닷물이 밀려나가자 호미로 갯벌을 긁어 생합을 캐는 아낙들의 분주한 손이 작은 섬 하제의 팽나무 빈터에 사람들이 어느덧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제 개똥지빠귀의 주검을 거름삼아 성장했던 팽나무가 삼백 살의 거목이 되었다. 망념(妄念)과 미혹(迷惑)으로 분주한 인간들의 그 악착같은 욕심의 시간들이 한없이 축소된다. 결국 본래의 성품인 우주자연 그 어느 곳의 일원으로 합류할 존재인 것을.

 

소설의 후반부는 서낭목이 된 팽나무 할매를 중심으로 하제 포구와 갯벌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찰나처럼 흐른다. 동네 사람들이 섬기는 팽나무 할매를 몸주 삼은 당골네에 시집온 고창댁 자근연이가 낳은 배춘삼과 그녀 남편의 시신을 거두어 주었던 뱃사람 유 사공의 정성스럽고 충실한 여느 보통 사람들의 삶이 펼쳐진다. 사대부들의 가렴주구로 혹독한 궁핍에 내몰린 백성들의 오갈 곳 없는 의지를 기댈 수단이 되었던 천주교와 서학의 탄압 속에 이 민초들의 가계(家系)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신산한 삶이 무한히 내어주는 자연, 갯벌과 드넓은 어장에 기탁하여 다시금 생을 지속해 나간다. 어언 팽나무의 수령이 오백년에 이르렀을 때, 그 잘난 조선의 사대부들과 왕은 외세를 불러 구국(救國)의 길, 온 백성이 형제자매이고 만물이 평등한 세상을 향한 외침을 무차별 학살하며, 나라를 팔아먹기에 이른다. 시천주(侍天主), 누구나 자기 안에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 동학의 우주만물의 평등과 그 존귀함의 정신은 망령된 집념에 사로잡힌 사대부 기득권자들에 의해 파괴된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들의 야욕의 시간이라고 달리 흐르겠는가. 그것들 또한 썩어 흙과 강과 대기의 한낱 원소로, 그 본래의 성격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을. 하제 위에 있는 중제와 상제에 조선을 식민통치하던 일본은 군용기 활주로를 건설하고, 팽나무 할매는 그 위기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난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흐르고 패망한 일본이 물러난 자리에 미군이 들어서고, 미군 군용기 활주로 확장과 갯벌을 막아 농토를 만든다는 미명 하에 간척지 사업으로 사람들과 온갖 생명의 터전을 탐욕으로 물들인다. 병인년 박해로 한 가계가 무너져 내리고 살아남은 유일한 핏덩이가 살아 그의 후손인 신부가 되어 국가폭력과 생태파괴를 무참히 저지르는 탐욕의 정치에 맞서는 길 위의 신부가 되고, 인적이 사라진 저녁 갯벌에서 들려오는 생명들의 대합창 소리를 들은 춘삼의 후손 배동수의 연대의 목소리가 더해져 숭고한 만물의 대합창이 되어 울려온다,

 

소설의 목소리는 견성이요, 시천주이고, 만물의 인연이며, 존재의 일원성에 대한 깨우침일 것이다. 이제 섬이었던 팽나무 할매가 있는 하제는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이 저지른 갯벌의 간척화로 인해 섬의 흔적은 사라지고 군산 옥서면 선연리 하계 마을이라는 육지가 되었는가보다. 새와 나무와 갯벌과 인간, 지상의 모든 개체들의 그 짧은 순환의 순간으로 경유하는 생의 찬연(燦然)함과 인연과 궁극의 본성을 생각게 된다.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이 명상과 성찰의 시간을 좀체 갖지 못하는 것 같다. 온갖 인위적 관습에 순응하며 저마다 분주히 자기 욕망에 몰두할 때 타자의 세계는 저만치 물러나 보이지 않게 된다. 그 얼마나 짧은 순간 우리들은 이 형상을 함께하며 살아가는가. 이름없이 서있는 나무들과 풀과 꽃, 곤충들과 새, 강과 갯벌과 바다의 수많은 개체들, 이 모두가 우주의 근원인 하늘님을 지닌 존재인 것을. 꼭 사람을 하늘처럼 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이기만 하겠는가. 事萬物如天인 것을. 생태소설이며, 인간과, 동물과, 식물의 모든 목소리로 들려주는 한반도 우리네 터전의 통사(通史)이고, 생명에 대한 찬란한 서정시이자, 만물의 감응과 인연에 대한 견성의 경전이다. 오늘 우리네 지성의 깨우침은 여기에 이르렀다. 모두 잠든 새벽 시간에 귀 기울이면 듣지 못했던 무수한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그들과 이 작은 몸뚱이가 하나로 연결된 존재임을. 이 겨울 점점 더욱 땅의 흙내가 내 코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저 개똥지빠귀의 시간에 합류하게 될 것임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싱클레어 노트 쏜살 문고
헤르만 헤세 지음, 박광자 옮김 / 민음사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산문집을 두 층()의 관점으로 읽게 되면 보다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 같다. 하나는 글의 표층(表層)인 삶의 주체자로서 자기-되기의 내면적 사유이고, 다른 하나는 그 표층의 아래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꿈틀대는 당대 독일사회와 독일인들을 잠식하고 있던 과대망상과 퇴행적 개인주의의 실체라는 정치문화적 실상이다. 전쟁에 패망하면 항시 전쟁기획과 추동에 참여했던 부역자들, 선동자들은 자신들의 죄과를 은폐하는 행태를 보이곤 한다.

 

설혹 적극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긍정하거나 시민적 몽매성으로 인해 부화뇌동하였다고 변명, 발뺌하는 것 등이다. 정말 인간의 비굴한 얼굴들은 어떠한 형식으로든 자신을 정당화하려 한다. 헤세는 적어도 1910년대 이후부터 스위스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한 것 같다. 그가 조국 독일과 독일인들을 외부의 시각에서 관찰할 수 있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러한 자리의 관계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바로 이점이 이 산문집을 두 층의 관점으로 읽을 수 있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수록된 열네 편의 산문 중, 세 편의 산문 은신처〈『데미안에 대한 메모, 아델레에게 쓴 편지를 제외하면, 전쟁 중이거나 전쟁 직후(1차 세계대전 및 2차 세계대전)에 독일인 및 독일의 젊은이들을 향해 써진 글들이다. 어떤 의미에선 위의 세 편의 글들도 독일인을 향한 다른 글들의 진실성을 담보하고자 헤세 자신의 정당화를 위한 언어처럼 보인다. 산문집 모든 글을 관류(貫流)하는 하나의 언어, 즉 표층의 주제는 자기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생명력, 자기 스스로에 도달한 사람이 되고자하는, 자기 안에 깃든 신성(神性)의 깨우침으로서, 자신에 대한 용기를 가지고 스스로의 운명에 귀 기울이는 존재를 향한 노력에 대한 성찰이자 권고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쟁은 인간 떼거리의 비굴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듯하다. 헤세의 글을 읽으면서 1918년부터 1933년까지의 독일 정치문화사인 피터 게이의 명저 Weimar Culture(바이마르 문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피터 게이는 1차 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에서 이뤄진 민주공화정을 시작케 한 바이마르 혁명 정부가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분석하는 가운데, 그것은 기득권 세력의 집요한 반동, 하나의 소극(笑劇), 허구로 보이도록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인 탐욕의 광기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폭넓게 대중의 마음에 침윤된 맹목적 비이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말한다. 헤르만 헤세는 산문 은신처에서 자신의 거처를 스위스로 옮기게 된 이주의 정당성을 사적으로 겪었던 내면의 혼돈을 치유하는 여정에서 자리매김한 당위로서 말하고 있다. 또한 〈『데미안에 대한 메모라는 글도 전쟁터(1차 대전)에서 죽은 동료들을 말하면서, 살육과 파괴의 목표가 그 대상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음을 통찰하게 되었노라고, 새로 태어나기 위해 분노하고 도륙하고 말살하고 죽고자하는 영혼의 발산이었다고 쓰고 있다.

 

글 쓰는 이로써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마치 전쟁의 참화를 잘 알고 있다는 듯 그들 중 어떤 이는, 바로 내 곁에서 죽었다, 자신이 말 할 권리를 지녔음을 시사(示唆)하지만, 피터 게이 교수의 지적처럼 헤세는 패전 직후인 1918년에 쓴 세계사라는 글에서 황제에 대한 신념을 갑자기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교체하는 것은 그저 깃발만을 바꿔드는 데에 불과하다.”, 새로운 민주공화정(바이마르 정부)의 시작에 회의적 시선을 보낸다. 이에 더해 갑자기 세계사가 다시 등장했다. 논설위원들, 교수들, 교사들...이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라며, 당대 독일의 엘리트라 자처하던 종교 및 정치, 경제 분야를 지배하던 구 권력 전반의 의식과 그가 결코 다르지 않았음을 읽게 된다.

 

각 글들의 표층에 드러난 의미는 내적 수양, 즉 자기-되기의 강변이지만, 그 이면을 파고들어가 보면 양차대전의 참화에서 비껴난 중립국 스위스에서의 자기 삶의 고충에 대한 정당화의 변임을 읽을 수 있다. 아주 짧게 거론되는 자신에게 도착한 토마스 만에 대한 비난의 편지에 대해서 우회적인 비난을 보내기도 하는데, 두 사람 공히 스위스로 망명 또는 이주한 인물이며, 나치에 대한 적극적 저항의 태도를 드러낸 적이 없기에 의심받기에 충분했음에 대한 반감이었을 것이다. 토마스 만은 바이마르 민주정에 대한 지독한 혐오를 보였던 대표적 지식인의 일원이었다. 결국 바이마르 민주공화정이 나치들에게 무너짐으로써 인류 비극의 대참화를 겪게 했던 책임을 지녀야 마땅한 일원이었음에도 그 어떤 인식도 보이지 않는 것은 비난의 대상임을 피해 갈 수 없게 한다.

 

특히 2차 대전 종전 해인 1945년과 1946년에 쓰여진 세 편의 산문 리기산의 마지막 일기, 그의 두 살 손위 누이인 아델레에게 쓴 편지, 19464, 루이제린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독일에 부치는 편지에는 파괴된 독일 본국과 달리 파괴되지 않은 따사로운 집 안에 앉아서 매일 굶주림 걱정 없이 무사태평하게 지내 온 사람, (...) 직접 위협받은 적도, 더군다나 폭력을 당한 일조차 없는 사람이라며, 자신을 이처럼 인식하는 독일 본토 내 동료 지식인들과 민중의 비난을 뒤틀린 긍정의 언어로 말하면서, 그래도 한 마디 충고를 건 넬 수 있지 않냐고 운을 떼고서는 자신이 “1918년 당시, 여러분은 나쁜 헌법을 가진 군주제 대신에 자유스러운 공화제를 수립할 수 있었습니다.”라며, 마치 자신이 바이마르 공화정을 지지한 듯 말한다거나, 모든 국수주의적 망상을 통찰하고 거기서 벗어나야함을 역설하는 것은 다분히 기만이고 위선으로 읽힌다. 자신이 패망(1차 대전) 후 광기에 휩싸인 독일인들이 다시금 저지를 화를 예감했음을 지적했는데도 너희들은 거듭 불속에 뛰어들어 동일한 화를 자초하기 않았느냐는 지나가는 객이면 모두 할 수 있는 객쩍은 소리 같기만 하다.

 

특히 본국에서 전쟁(2차 대전)의 고통을 오롯이 겪어내야 했던 두 살 손위 누이인 아델레에게 쓴 편지에는 나는 홀로 이곳 언덕 위의 집에서 누이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고독에 젖어, 나를 오해하거나 이용할 염려가 없는 사람에게...”와 같은 표현에서 드러나듯, 아델레가 그에게 어떤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랜 전쟁의 참화 속에서 끔찍한 고통을 보냈을 병든 누이에게 오히려 자신이 더 심한 고통에 놓여있음을 항변하는 것으로 읽힌다. 헤세가 1877년생이니 예순여덟 살이었을 것이고, 누이는 일흔 살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국에서 늙어가는 이로서의 외로움과 여러 고통이 있을 것이지만 과연 히틀러의 나치 독재 치하에서 겪어내야 했던 전쟁, 그 지옥 같은 죽음의 환경에 감히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1918년 또는 1945년의 글들은 이러한 자기 정당화와 이에 토대를 둔 독일인들에 대한 자기 성찰의 변들이라 말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표층적 내용인 자기-되기의 내용이 가장 깊이 있게 드러난 글은 고집전쟁과 평화, 차라투스트라의 귀환세 편의 산문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글들 또한 1차 대전 직후인 1918년에 써진 글들로 패망한 독일인들의 괴로움과 분노의 실체가 대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작업이지만, 그것의 바탕인 정신의 성찰은 철저한 자기 내면의 인식이야말로 자기 삶의 근본적 변화의 동력임에 대한 역설로 채워져 있다. 고집의 글을 보면, 모든 미덕은 인간이 만든 법칙에 복종을 의미하는 반면에 오로지 고집만큼은 이러한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다면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미덕이라고 말문을 연다. 그리고선 고집이 있는 사람은 전혀 다른 법칙, 곧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극히 성스러운 법칙인 자신만의 생각을 따른다.”고 고집 예찬론을 펼친다. 여기서 말하는 고집이란, 우주에서 아무리 미미한 것일지라도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완전하고 확실하고 흔들림 없이 자기 법칙을 철저하게 따르기 때문에 그러할 수 있는 것이라는 표현처럼 그것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살아가고 행동하고 느끼는 소신 또는 개성과 같은 긍정적인 의지이다.

 


그런데 이 글은 현실정치에의 참여를 시민적 의무로 여기는 내게는 지극히 부당한 견해로 읽힌다. 이를테면 고집의 미덕을 가진 사람은 자신에 대해 용기를 가지고, 스스로의 운명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며, 정치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성장에 관심을 두는 것이 삶의 최고의 미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의 삶을 지배했던 은신처로서 스위스의 이주라던가, 철저한 정치적 무관심(물론 그는 자신의 작품으로 말했다고 하겠지만)이라는 이기주의(egoism)가 어디에 터 잡은 것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는 자신을 이기주의라 부르려면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자신의 이기주의는 돈과 권력을 탐하는 천박한 이기주의가 아니라고. 돈과 권력만 탐하지 않으면 이기주의가 타자와의 관계로 이루어진 인간 세계에서 무조건 용납될 수 있는 것인가? 가당치도 않은 궤변이다.

 

개성의 발현인 예술의 세계에서는 너 자신이 되어라는 어쩌면 필요한 미덕이고 요구되는 자질일 것이겠지만, 자신을 둘러싼 완벽한 담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의 완벽성과 가치를 드높이는 세계는 타자들이 모인 세계와 불화할 수밖에 없게 된다. 헤세의 이기주의가 자기 욕구의 실현을 위해 다른 이들의 수용과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에고티즘(egotism;개인주의), 즉 다른 사람들의 간섭과 침해를 배제하고 무한한 다양성을 인식하며 자기 완벽을 추구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납득될 만한 주장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과연 전쟁과 정치의 세계에 얽매여 있는 독일인들에게 소용될 수 있는 미덕일지에 대해서는 의혹이 짙게 드리운다. 그는 패전의 분노에 매여 증오를 쏟아내느라 여념 없는 독일인들에게 에고티즘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되기에 철저하게 열중하면 삶을 더없이 완벽히 충만하게 꽃피우는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물론 모든 시민이 빠짐없이 자기-되기의 높은 탁월성에 이르면, 그 사회는 완전한 공화국으로서의 이상에 도달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적 삶, 전쟁의 소용돌이에 직면한 현실에서 그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쓸데없는 소리요, 잡소리요, 자기 안락에 빠져 세상모르는 서생의 옹알이가 아닌가?

 

이 산문집에서 단연 오늘의 지성에게 공히 울림을 지닌 산문이라면 전쟁과 평화, 차라투스트라의 귀환두 편이라 말하고 싶다. 전쟁과 평화는 전쟁이란 인간의 원초적이며 자연스러운 본능인 반면에 평화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 여전히 탐구하고 예감해야 하는 대상이라 말하는 지점에서 그가 평화주의자임을, 희망과 이상주의에 경도되어 있었음을 보게 된다. 물론 긍정적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희생으로 살며 타인을 두려워하고 증오하며 사는 것이 인간 삶이라는 측면에서 전쟁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그저 방치하면 얼마든지 자연 발생하는 것일 게다.

 

따라서 평화는 얼마나 어려운가. 조금이라도 눈앞에서 소홀히 취급하면 평화는 저 멀리 도망치고 곧 속박과 폭력의 독재와 전제정치가 사람들을 찍어 누르거나, 전쟁의 참화에 휩쓸리게 된다. 결국 여기서도 헤세는 평화는 인식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바로 인간인 우리 내면에 대한, 생명에 대한 인식, 그 비밀스러운 마법에 대한 인식을 사랑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자기-되기의 또 다른 표현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귀환에 이르면, 패전에 대한 괴로움과 울분으로 이를 외부의 적을 향해 돌리는 독일 국민들에게 팽배한 의식의 실체에 대한 자기 성찰의 권고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정치 일반에 대한 보편성의 진실을 읽게 되는데, 왜 너희 독일인들은 모든 나라가 너희의 적이 되었는지, 또 너희를 외면하고 비난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본적 없느냐고 묻는다. 그리고는 너희는 결코 오해받지 않았다고 단정하면서, 이해받지 못하고 착각한 쪽은 바로 너희 자신이라고, 자신이 가지고 있지도 않는 덕을 내세우며 적들의 악덕을 맹렬히 비난하는 독일인의 자기 성찰 없는 맹목성, 과대망상을 지적한다.

 

우리들은 항시 자신의 좌절이나 패배를 타인의 악덕으로 전가하는 데 선수들이다. 선거에 지면, 이긴 자를 부정한 나쁜 놈이라 적대시하고, 패망하고는 엉뚱한 곳에 대해 온갖 악의를 퍼붓는 것이 바로 이러한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이다. 고약한 충동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라면 너희는 모두 적들의 소행이라 치부해왔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괴로움을 주거나 괴로움을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그럼으로써 우주의 차가운 냉기, 그 차가운 황홀경의 지각인 이성의 세계를 일궈낼 수 있으리라 조언한다. 자기 괴로움이 발생하면 그 괴로움을 받아들이고 귀 기울이기는커녕, 곧 그 괴로움을 외부의 대상으로 돌려 존재치도 않은 악덕의 적을 만들어 헛된 행짜로 열정을 낭비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이 작은 산문집은 1919년 발표된 정치평론집 성격의 차라투스트라의 귀환1923년 출간된 일종의 비망록인 싱클레어 노트에서 몇 편씩이 발췌된 산문집으로, 14 꼭지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글 쓴 시기의 표시를 보면 1916~1919년 즈음하여 써진 글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1945~1946년에 써진 글들이 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연설문을 포함 4 꼭지가 있다. 각각 1차 대전과 2차 대전 즈음과 직후에 발표된 글들이듯 패전에 따른 독일인, 특히 젊은 세대를 향한 제언의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글들의 울림을 오늘로 확장하여 읽는다면, 달리 표현하자면 패전이라는 절망과 울분의 나락에 떨어진 패망국 독일인의 좌절과 고통을 인간 일반의 절망과 고뇌로 전용하여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전용하여 읽게 되면 앞선 감상의 글과 같이 전쟁일반에 대해서, 평화의 어려움에 대해서, 괴로움과 외로움의 직면에 대해서, 자기 성찰이라는 내면 가꿈의 삶의 필요에 대해서 우리들은 어떤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1918~1946년의 독일 사회의 지성을 대표하는 작가를 통해 이들의 정치문화적 이데올로기를, 그 전반적인 가치의식을 엿볼 수도 있다. ‘루이제 린저를 향한 공개서한이라는 부제를 한 산문은 헤세가 전후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판을 불식시키려는 저의가 보인다. 나치에 저항하여 혹독한 고문과 구금의 고통을 겪었던 젊은 여성 지식인의 고초에 적극적 이해와 공감의 글을 공개적인 글로 발표함으로써 토마스 만과 같은 이들처럼 회색지대에 안주했던 인사가 아님을 불식시키려 했던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고 이러한 의혹이 절로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바이마르 정부시대의 한 지식인의 사고를 바라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글들이다. 그의 에고티즘의 역설(力說)은 그리 새로운 제안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게다. 이미 1890년대부터 이러한 자기-되기의 철학은 니체는 물론 예술과 철학에 넓게 편재한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융의 정신분석학과 맞닿아 있음도 한 영향이 되겠지만, 글쎄 그것에 지나친 조명을 비추는 세간의 저술들은 침소봉대가 아닐까. 1910~1945년의 독일 지성의 읽기는 너무도 인류 사회에 각양의 산물 -나치즘(전체주의), 민주주의 실험, 민중의 몽매성, 지성의 총체적 파괴적 흐름, 전쟁과 종전의 후과의 특정한 사례들 - 을 출현시켰으며, 그것이 오늘에도 하나의 전례로서 암약하고 있기에 관심 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질풍노도의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지나치게 협의적인 시선으로 이 책을 읽을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는 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데미안을 한 아이의 내면의 성장으로 읽는 판에 박힌 독서는 어쩌면 헤세가 가장 싫어하는 순응성, 길들이기의 악덕이듯, 이 책 또한 무한히 다양한 읽기가 가능할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시우행 2025-12-19 0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한민국 정치인들도 이런 책을 읽으면 좋을텐데.ㅠㅠ

비의식 2025-12-19 08:08   좋아요 0 | URL
오~ 그들에게 성찰의 읽기는커녕 독서조차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호시우행님 댓글 고맙습니다~
 
자연의 비너스 b판고전 14
피에르 루이 모로 드 모페르튀 지음, 이충훈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8세기 초, 뉴턴(Isaac Newton)주의 수학자이자 자연철학자인 모페르튀(Pierre Louis Moreau De Maupertuis,16981759)의 네 편의 논문으로 구성된 이 책, 자연의 비너스(Venus Physique)는 인류 지성의 무지(無知)에 대한 적나라한 이해가 되어 줄 뿐만 아니라, 한 탁월한 지성의 경탄할 만한 사유의 진행과정, 즉 통찰력으로서의 치밀한 사유의 방법을 발견할 수도 있는 놀라울 만큼 흥미로운 저작이다.

 

이 논문들이 쓰여지고 발표된 시기는 대략 1740~1750년대로 여겨지는데, 당대에는 세포, ‘진화에 대한 어떠한 과학적 발견이나 이해도 없었던 것 같다. 따라서 동물의 생식에 관해서 당대 자연철학자들은 ()에 태아가 들어있다는 이론정자(精子) 동물 이론이 각축을 벌였던 무지의 논쟁으로 마치 두 편 중 한 편이 죽어야 끝날 듯한 논의의 격전을 벌였던 모양이다. 모페르튀는 이러한 논의들을 전술(前述)하고, 이어서 각 논의가 지닌 결점과 난제들을 종합하여 독자적인 태아형성 가설을 제시한다. 이 논의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당대 최고의 과학지성이라는 사람들의 확신을 보는 것은 우스꽝스럽기조차 하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너무 무지해서 그런 것일 뿐이다. 우리의 정신은 감각이 발견한 것을 추론하는 데 그칠 운명인 것 같다.” -58

 

하지만 한편으론 이러한 자기 확신에 의혹을 가지고 인간의 지성은 항상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는 반성적 사유를 하는 인간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인간에 대한 어떤 희망적 가능성을 발견하게도 된다. 책은 동물의 기원에 관하여, 인간 종의 다양성, 그리고 부록으로 수록된 자연의 체계: 유기체 형성에 대한 시론디드로 씨의 반박에 대한 답변,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적 이성을 내세운 계몽주의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어서 오늘의 앎의 토대에서 볼 때, 당대에 이러한 터무니없는 생각들로 최고의 지성들이 논쟁을 벌였다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난에 태아가 들어 있다는 난()주의자들의 주장을 오늘 우리들은 전성설(preformation theory,前成說)이라고 부르고, 남자의 정액에 들어있는 동물 벌레가 태아를 만든다는 주장을 후성설이라고 거칠게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간략히 말해서 전성설은 개체 발생에서 완성되어야 할 개체 각각의 형태와 구조가 발생 출발 시에 이미 미리 존재하고 있어 발생에 즈음하여 분명한 형태를 갖는다는 학설이고, 후성설은 난주의자들이 압도하고 있던 학계에 네덜란드의 자연학자 하르트소커(Hartsoeker, 1656~1725)가 남성의 액체를 현미경으로 관찰함으로써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는 살아있는 동물을 발견하게 됨에 따라 생식능력이 전적으로 수컷에 귀속된다고 하는 학설이다.

 

오늘 우리들은 이 두 이론의 터무니없음을 잘 안다. 난에 태아가 들어있다는 학설의 내용은 이렇다. 난소 안에 이미 완전한 형성을 끝낸 암컷들이 들어 있어서 이들이 무한한 생식의 원천이 되고, 모든 암컷은 하나 안에 다른 하나가 들어있는 식으로 존재하므로...”와 같은 도토리 안에 참나무가 들어있어 그것이 성장하여 가지를 뻗고 대지를 덮게 되는 자연의 법칙과 같다는, 눈에 보여 자신들이 잘 아는 유비(類比)에 근거한 주장이다. 그리곤 이런 작은 조각상으로 사람을 만들려면 새로운 재료와 정기(精氣)가 필요한데 그것이 남자의 정액으로 여성의 몸에 들어가 팔다리에 스며들어 난소 안에 이미 완전한 형성을 끝낸 그것을 움직이게 하고, 성장하게 하고, 생명을 얻게 해준다는 학설이다.

 

그런데 이것이 한 젊은 자연학자의 현미경 관찰로 뒤집혔다. 정액의 한 방울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작은 물고기들이 사방으로 헤엄치고 있는 대양(大洋)을 본 것이다. 일련의 학자들은 성급하게 이 발견을 토대로 동물들이 언젠가 그 수컷의 후손이 되리라 단정 짓고, 크기도 작고 모양도 물고기를 닮았지만 나중에 그것의 크기와 모양이 변할 것이라고, 자신들이 주변에서 관찰해 잘 알고 있던 곤충의 변태 등과 같은 것이라고 수컷에 생명의 능력이 있음을 선언한다.

 

난은 수정이 이루어지기 전에도 태아를 갖고 있거나, 태아에 영양분을 제공하고 최초의 거처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한다.” - année, 왕립 아카데미 논문집, 1701

 

그런데 이것도 생명 발생에 대한 이론으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음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고, 난이론과 정자활동 이론을 혼합한 이론이 대두된다. 그렇다면 대체 난()이 왜 필요한 것인가? 완전한 인간이 정액에 들어있지만, 난은 여전히 필요한 데, 영양분을 제공하고 성장에 책임을 지는 물질 덩어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곤충들이 과일 속에 들어가 과육을 영양분으로 삼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당대의 이러한 생명 발생이론들을 보고 있노라면, 다시금 무지의 지(), 즉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우리 인간들에게 얼마나 쓰라리고 중대한 것인지를 생각게 된다. 사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어떤 과학적 발견이 아니더라도 주변의 경험에 기초한 사유만으로도 결점들이 충분히 드러났을 텐데 말이다.

 

심장의 혈액 펌프 운동 운반설로 유명스타가 된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도 일종의 전성설 주장자의 일원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영국 왕 찰스 1세의 전폭적 지원 하에 수많은 사슴을 살육하며 생식 실험을 하였는데, 교미 직후 사슴 암컷을 해부해 자궁을 보았으나 정액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실험에 따라 수컷의 정액은 자궁에 머무는 일도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일도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는 수태과정에 대한 기이한 논문을 발표하는데, 모페르튀는 이것을 자연학이 아니라 스콜라철학에 가까운 형이상학이라고 비난한다. 자궁은 아이를 배고 뇌는 머리에서 형성된 관념을 밴다.”, 정말 괴이한 결론이다. 인간들은 뭔가 모르면 모른다고 여기지 않고, 자신의 지성을 확신한다는 듯 정신(머리), 관념에 돌리곤 마치 무언가 아는 체 하곤 한다. 인류 지성의 몽매함을 이렇게 둘러보다보면 어쩌면 우리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오늘의 지식이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서있는가를 반성하게 된다. 모페르튀의 이 책을 읽는 것은 바로 이 모르고 있음을 깨우친 인간의 치열한 앎으로의 지향의 노력, 진실에 이르고자 하는 탐구정신의 발견이자 앎에 대한 겸허의 자세이기도 할 것이다. 깨우친다(éclairer)는 것이 무언가? 정신에 지성과 명증성을 부여하는 일이지 않은가? 대체 아무것도 명증한 것이 없는데 확신하는 진실처럼 주장하는 것은 그 잘 난 지성의 모독이 아닌가 말이다.

 

데카르트의 생명 발생이론은 하비와 거의 다르지 않은데, 오직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역학인 운동과 발효의 법칙만으로 심장, 두뇌, , , 귀가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정신적인 작용이 모종의 작용을 일으켜..” 운운하는 지성의 교만을 보는 것은 자신의 오류를 승인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태도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난이론이건 정자동물이론이건 간에 생활의 주변을 보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나뉘어 닮은 아이들이나 백인과 흑인 사이에 출생한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난에 이미 새로운 생명이 갖춰져 있다거나 정액 속 동물벌레에 이미 형상이 갖춰져 있다는 주장으로 설명할 수 없었음을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모페르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생식이 이루어질 때마다 유기체, 동물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는 것인지 우리는 정말이지 전혀 모른다고 하겠다.”. 그는 자신들의 잘못을 벗어나야 난점을 해결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난의 영양분을 먹고 정자 벌레가 형체로 발육한다면 섭취하는 먹이의 모양을 닮게 된다는 믿음이 얼마나 황당한 것이냐고, 또한 하나 안에 다른 하나가 이미 포함되어 있고 이런 식으로 무한히 연쇄된 동물들이 동시에 형성되었다는 믿음이 가능한 것이냐고 반문한다.

 


이에 더해 가히 터무니없음의 극치를 이루는 레므리와 윈슬로라는 두 자연학자의 괴물논쟁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 역시 생명발생론에 터 잡은 논란이다. 윈슬로는 애초에 괴물로 태어날 난이 있어, 완전히 형성이 끝난 괴물이 들어있는 난이 있다는 것이고. 레므리는 안에 어떤 사고가 일어나 생겨난 결과일 뿐이라는 주장이 맞선 것이다. 실은 기형아에 대한 논쟁인데 당대인들은 괴물이라고 지칭했던 모양이다. 두 주장 모두 분명하게 틀렸지만, 결국 이 논쟁은 당대 지성을 짓누르고 있던 기독교 유일신의 모독 여부, 즉 형이상학적 원인의 문제로 치닫는다. 신이 태초에 괴물의 종자를 창조했다는 생각은 신성모독이라고, 반론은 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광범위한 단일성과 규칙성에 국한시키는 일은 신의 능력을 제한하는 또 다른 모독이라고 맞섰다나. 과학의 언어로 말하지만 결국은 형이상학적 비이성을 최고의 자연학자들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의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실상은 18세기나 21세기 오늘에나 과학의 언어를 사용하여 대중의 인식을 호도하는 예는 한 치의 차이도 없다.

 

당대 자연학자들의 기이한 믿음들이 줄줄이 소개되고 있는데, 산모의 상상력이 괴물을 출생시킨다는 믿음에서부터 욕망이 기형아를 출산시킨다는 믿음에 이르기까지, 가히 존재 추적이 불가능한 그 믿음이라는 것의 불쾌함을 보게 된다. 서구의 정신이 자랑하는 디드로, 달랑베르 등 과학적 이성의 계몽주의가 피어나던 1700년대 프랑스에서 말이다. 모페르튀는 각 이론과 모순되는 작은 반론을 말하는 실험들을 소홀히 취급하지 않는다. 정액은 항상 자궁에 들어가지만 다량으로 머무는 일은 없다시피 하다는 베르헤얀의 실험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명백히 모순되는 현상이 존재함에도 한 이론을 계속 따라가야만 한다면 자연학은 쇠퇴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모페르튀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태아형성 가설을 내놓는다. 당대의 과학적 발견이 오늘날 비전문가들이 알고 있는 것들에도 미치지 못한, 다시 말해, 세포는 물론 세포분할, 유전체(DNA), 정자와 난자의 결합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현대 과학에 근접한 생각에 이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현대 과학 용어에 미치지 못하는 그만의 언어로 말하기에 세련되지 못했지만, 그는 새로이 발견되어야 하는 어떤 힘에 도움을 구해야 함을 직관하고 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에티엔 프랑수아 조프루아(1627~1731)’1718년 발표한 물질 상호간 화학 결합을 이루는 정도를 나타내는 친화력과 모든 개체의 구성 일원론의 주장에서 관계라는 새로운 힘으로서 서로 결합될 수 있는 성향을 가진 두 실체의 결합의 사유로 나아간다.

 

정말 경탄하고 싶은 통찰적이고 반성적인 지성을 볼 때면 어떤 감동의 울음이 터져 나온다. 스스로 반문하는 내용들을 보면 이렇다 이러한 힘이 자연에 존재한다면 동물의 몸을 형성할 때 작용하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스스로 동물 자체가 되지 않으면서 동물을 만드는 데 어떤 식으로든 소용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등등, 모페르튀의 지성은 거의 현대적이다. 그는 물질의 거대한 더미에 어떤 지성의 원리가 존재함을 감지한다. 감정이란 결국 지각이고 사유라는 점을 그는 현대의 객체지향 이론가들이나 감관주의적 실천철학자들에 앞서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지성의 원리가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부분들에서도 역시 존재할 것이고, 어떻게 조직이 되었느냐에 따라 차이가 생기는 것일 뿐이라는 그의 가설적 생각들은 현대과학과 철학에 그대로 가닿는다. 물론 그의 결론인 가설들에는 역시 미흡한 요소들이 산재하고 있으며, 서양 백인 남성의 구조에 익숙한 인물이 지닌 한계가 노출되기도 한다. 일례로 인류의 흑인 기원설을 백인 기원설로 둔갑시키는 조잡하고 무지에서 비롯되는 논증들은 가증스럽기도 하다. 흑인의 피부 망상조직에서 발생하는 질병인 백색증을 증거로 하여 백인에게는 흑인이 출현하지 않는데, 흑인 부모가 백색의 피부를 가진 아이를 낳는 것은 본래 백인이 인간 종의 기원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나, 백인이 아닌 아시아 아프리카의 인종들은 추하고 인간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며, 육손이 등 기형아를 괴물로 지칭하는 것 등은 시대성에 속박된 인식의 한계일 것이다.

 

다만, 그가 낯선 기괴함을 자연의 광경에 감탄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이종(異種)에 대해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만큼 지적 편협에서 벗어난 인물임에는 분명해 보이기도 한다. 반면, 그로부터 100년은 지나야 대두될 진화론적 발상들을 발견할 수도 있는데, 다양성의 근원이 정액 자체에 있다고 가정하고 있지만 나는 환경과 양식의 영향도 배제하지 않는다.”라거나 계속 세대를 거듭하는 종족이 되려면 이 세대가 반드시 여러 차례 거듭되어야 하고와 같은 구절에서 그가 생명의 발생에 대해 상당부분 그의 시대보다 진전된 시선을 지니고 있었음의 증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적응도에 따른 종의 발생과 멸종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진화론의 선구자적 면모를 발견하게도 된다.

 

이렇게 앞 선 태아 발생에 관한 논쟁을 통한 가설의 제안을 말하는 두 논문에 이은 그가 가명으로 발표한 자연의 체계: 유기체 형성에 대한 시론과 이를 두고 당대의 스타 지성인 디드로의 오류와 몰이해로 가득 찬 비판에 대한 답변의 논문은 그야말로 지성의 백미(白眉. 디드로의 논지는 한마디로 모페르튀의 논문이 유물적인 신의 부정이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자신도 근본주의자들로부터 무신론자라는 누명에 시달렸던 과학적 이성의 선봉자로 자처하는 인물이 정작 과학적 이성의 가설에다 무신론자라는 낙인을 찍으려 하는 괴이쩍은 비난이다. 생명 발생론에 대한 논의는 결국 존재론, 다시 말해 존재의 기원, 궁극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모페르튀에게서 발견되는 탁월함이란 물질의 가장 작은 부분으로서의 원소에 지성의 원리, 다른 말로 감각지성의 존재를 사고했다는 점일 것이다. 물질에 지성, 욕망, 혐오, 기억이 있다고주장하는 것에서 오늘날 모든 물질 개체의 정동(affect)을 말하는 철학적 접근에서의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바로 그것이 개체의 조직과 차이를 형성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사(近似)하다. 특히 그의 논문 유기체 형성에 대한 시론은 영혼이 고유한 본질이 사유이며, 물체에 고유한 본질이 연장이라는 데카르트의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어, 그가 비록 유기체라고 한정하고 있긴 하지만 존재 일원으로 확장 가능한 존재 발생에 대한 세 분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에도 전혀 손색없는 지성을 읽을 수 있다.

 

신이 단 한번 원소들 가운데 내뿜었던 속성들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 더 위대하고 전능한 신에 걸맞은 것 같다.” , 이 표현에 신이 들먹여지지만 그것은 당대 유일신론자들의 비난을 비켜가기 위한 에두른 언어로 내게는 우주자연의 근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혔다. 그가 조프루아의 모든 개체의 구성 일원론을 계승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읽기일지도 모르겠다. 들뢰즈의 정동 이론을 구성하는 존재 일원론의 원천으로 조프루아를 말했을 때, 모페르튀의 유기체 형성론은 어쩌면 그 영향의 한 원천으로 읽었을 법도 하다. 화려한 지성사를 수놓았던 시대의 한가운데 있었던 뛰어난 학자를 통해 앎이란 무엇인지, 그 앎의 토대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고, 바로 그것으로부터 앎의 진전이 아주 느리지만 인류에게 찬란한 지성의 빛이 되어주는 것을 목격하게도 된다.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우리들에게 존재란 그 근원을 사유하려는 과정과 노력으로부터 체득되는 것이기에 유기체 발생에 대한 이 오래된 논문은 또 다른 지성의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데카르트 주의자들이 주류로 구성된 당시 프랑스왕립아카데미에서 이 뉴턴주의 자연철학자는 고난을 겪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항시 주류집단의 기득권이 새로운 진실의 접근을 방해하곤 한다. 만일 이러한 패거리 문화의 반이성과 반지성이 없었다면 인류는 아마 저 멀리 앞선 지혜로운 종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끔 지난 시대의 지성들의 논의를 들여다보는 것이 우리들 무지를 반성하는 뜻 깊은 계기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찬란한 무지의 확신들에 어린 어리석음을 바라보며 모처럼 크게 웃으며 읽었다. 웃음이 고픈 지성들에게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그림책 b판고전 7
야콥 폰 윅스퀼 지음, 정지은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익숙하지 않은, 어떤 낯선 사유를 접하게 될 때면, 그 사유의 기원이나 연관을 상상해보고, 찾아보는 여정에 나서게 된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쓴 천개의 고원은 자연 전체의 정동(affect,情動)을 포괄하는 내재성의 평면을 그리고자 시도하는, ‘존재의 일의성을 말하는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렇게 간략하게 압축된 문장으로 한 권의 책을 정의한다는 것이 말도 되지 않을뿐더러, 존재, 일의성, 내재성, 정동과 같은 개념어들은 철학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난관일 것이다. 천개의 고원은 동물행동학에 사유의 기원을 둔 새로운 윤리학이기도 하다.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라는 책의 감상이 아닌 들뢰즈의 책을 앞서 말하는 것은 이 책으로 이끈 계기가 곧 이 책에 대한 감응, 또는 정동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각 개체는 자신의 고유한 환경 세계 속에서 형성되는 정동(情動)의 목록을 소유한다또는 각 개체는 그 목록 자체이다.” - 들뢰즈, 과타리, 천개의 고원에서

 

윅스퀼(Jakob von Uexküll, 1864~1944)은 생태학적 생물학자로서 현대 생태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독일의 생태철학자라 하여도 될 인물이다. 들뢰즈는 윅스퀼을 가리켜 동물행동학의 대가로 평하며, 윅스퀼의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서 말하는 환경 세계모든 개체의 신체는 개체의 고유한 환경세계 속 대상들의 의미의 담지자로서 관계 맺는정동과 같은 강렬한 영향에 토대를 둔 것임을 천개의 고원그 자체로 드러냈다. 사실 정동이라는 좀처럼 압축된 의미로 정리되지 않는 이 개념어도 윅스퀼의 이 저작을 읽으며, 각 개체가 의미의 담지자로서 수용하는 감관적 지각의 특징을 자신의 철학적 음색으로 변용한 말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윅스퀼의 이 책을 읽으면 들뢰즈 철학을 이루는 상당부분 낯선 개념들의 입구를 여는 엄청난 단서와 암시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 감상글을 이어가기에 앞서 여기에서는 정동(情動)의 의미를 정동은 생성이다. 신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에 근거하여, 어떤 개체의 실재적인 변화, 생성을 일으키는 에너지 또는 생성 그 자체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이해하기로 한다. 순서가 밀렸지만 이 책은 1934년과 1940년에 각각 발표된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그리고 의미의 이론으로 구성된 현대 생태학의 문을 연 걸출한 두 논문의 합본이다. 전자(前者)는 모든 동물 개체 각각은 그가 지각하는 모든 것이 그의 지각 세계가 되고, 행하는 모든 것은 그의 행동세계가 되기에 행동의 세계와 지각의 세계는 함께 닫힌 총체성을, 즉 고유의 체험된 개체만의 환경세계를 형성함을 구체적 실험과 관찰의 사례들을 통해 인간이 고집하는 하나로 수렴되는 세계가 아닌 다양한 환경세계가 있음을 열어 보여준다.

 

그리고 후자는 전자의 이론적 접근으로서 생명활동의 기계론적 설명의 비판, 객관적으로 결정된 환경으로서의 숲은 존재하지 않는다.” 는 말처럼 인간중심의 목적론적 세계이해의 비판, 그리고 개체의 지각적 반응을 의미()’라는 급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생태학적 접근의 논문이다. 들뢰즈가 윅스퀼의 개체와 세계 이해에 경탄했기 때문이 아니라, 책을 열면 마주하게 되는 진드기 삶의 묘사부터 앎의 전복성이 일어남으로써 그 신선한 사유의 시선에 매료된다. 전환적 시선을 요구함에도 거북하지 않은 친근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내 신체 고유의 리듬이, 묘사되는 모든 개체들의 정동과 다르지 않기 때문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앞서 인용한 천개의 고원을 대표하는 문장의 기원을 이 책에서 속속들이 발견하게 되고, 그 발견은 너무도 친숙한 어휘로 설명되고 있어, 마치 들뢰즈 사유의 구체적 증거들의 풀이를 접하고 있다고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만큼 이 책이 들뢰즈의 철학적 사유 전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 복잡하고 다층적 의미를 지닌 정동의 개념은 지렁이, 나방, 성게, 진드기, 갈가마귀 등등의 지각과 행동의 기능적 원환(圓環,고리)을 보면서 절로 체득되고, ‘존재의 일의성과 같은 추상적 어구의 의미가 무수히 다양한 신체가 단일한 구성임을 발견케 하는, 즉 각 개체의 환경세계들이 모두를 포함하는 하나의 장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에 휘감김으로써 구체화된 이미지로 체화된다. 특히 들뢰즈가 사용하는 환경세계는 윅스퀼의 어휘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음으로써 그 의미 전반이 책의 기조인 만큼 쉽사리 이해 가능한 언어로 와 닿는다. 나는 이 책을 들뢰즈 사유의 일정부분을 이해하는 원천적 사유로 읽었다.

 

이를테면 들뢰즈가 말하는 신체의 상형문자-되기’, 주체의 이집트학자-되기와 같은 ‘~되기의 생성 개념은 이 책의 두 번째 논문 의미의 이론, 특히 의미의 담지자들이라는 개체가 자신들 고유의 환경 세계 속에서 관계의 정동을 통해 제법 명쾌하게 수용되기도 한다. 들뢰즈의 이해라는 측면에서만 이 책이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편협성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목적론적, 기계론적 이해에 기초한 인간중심 관점의 대변환을 느낄 수 있다.

 

진드기가 체험하는 일생의 시공간과 환경세계가 인간과 얼마나 다른 것임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들 인식속의 세계는 무한히 포용적인 세계로 확장되고, ‘라고 여기는 오만한 주체는 사라지게 된다. 윅스퀼이 서문에서 비판적으로 외치듯 이 책은 미지의 세계들로의 산책에 대한 묘사이고, 인간의 에고를 주장하는 주류 생리학에 대한 강력한 거부로서, 그네들이 부인하는 세계 존재에 관한 새로운 과학을 위한 안내서이기도 하다. 진드기는 포유동물인 인간과 함께 산다. 그렇다고 진드기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와 같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모든 동물들은 각자 자신의 공간의 한계를 표시하는 원형집으로 둘러싸여 있다.

(...) 주체와 무관한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48

 

진드기는 단 세 가지의 지각신호를 받고 기능적 원환운동을 하는 개체다. 이 개체는 오직 포유동물의 피부에서 발하는 낙산에 대한 후각 지각에 의해 그 지각을 발산케 한 것으로 떨어진다. 그리곤 충돌과 함께 촉 지각이 따뜻한 피부로 이동케 하고, 열의 지각으로 침을 찔러 넣어 액()을 빨아먹고 산란한다. 진드기는 이 세 지각적 특징에 의해 아주 분명하고 강력하게 규정되어 행동한다. 그에게는 하늘도 대지도 물도 빛도 어둠도 없다. 또한 낙산이 그의 후각을 자극하는 시간이 18년이 결려도 견딜 수 있도록 형성되어 있다. 결국 진드기에겐 낙산 신호가 새로운 활동을 불러일으킬 때 실질적 시간이 된다. 인간의 시간은 순간들의 연속으로 매우 짧은 시간 간격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 인간에게 18년이라는 오로지 견뎌야하는 멈춘 시간이란 참을 수 없는 것일 게다. 진드기의 환경세계(Umwelt)란 이처럼 빈약하지만 이 빈약한 환경 세계가 그의 행동의 확실성의 조건이 된다. 환경의 풍부함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에게 확실성은 풍부함보다 압도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드기의 세 가지 지각활동이 행동 활동으로 이어지는 기능적 원환관계를 알게 되고, 세 가지 지각특징을 촉발하는 의미의 담지자로 구성되는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8년 동안이나 변하지 않는 환경세계를 견딜 수 있는 진드기의 능력이 가능성의 영역 너머에 있음을 발견하게도 한다. 그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르며, 세계 공간의 영역도 다르다. 이제 이것으로부터 동물들 모두에게 타당한 환경세계들의 구조의 근본적 특징들을 우리는 그려볼 수 있게 된다.

 

지각적 시간을 생각해보자. 독일의 발생학자 카를 에른스트 폰 베어(Karl Ernst von Baer,1792~1876)시간은 주체의 생산물이다.” 라고 말했다. 인간에게 순간의 지속은 1/18초다. 따라서 18번의 진동은 그것들 개별로 식별되지 않지만 하나의 음처럼 지각된다. 초당 18번의 피부의 타격도 하나의 균등한 압력으로 지각한다. 그런데 물고기는 초당 18회만으로는 이미지를 인지하지 못한다. 초당 30회 이상이 되어야만 인지한다. 인간의 리듬으로 지나치게 빠른 곤충이나 새의 날개짓을 우리는 구분하지 못한다. 슬로우비디오로 긴 시간 간격으로 전개시켜야만 식별할 수 있다. 달팽이의 환경에서 초당 4회로 막대기로 두들기면 그는 막대기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지각한다. 결국 우리의 환경세계에서보다 달팽이의 환경세계 속에서 시간은 더 빠르게 흘러가고, 물고기의 세계 속에서는 더 느리게 흘러간다. 모든 개체들 각각의 세계는 이처럼 시간도, 공간도, 의미의 담지자로서 맺는 관계 대상의 양도 다르다. 그렇게 다른 개체들만의 세계를 환경세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목적성에 기반한 모든 잘못된 생각들로부터

환경세계들에 대한 검토를 구제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69

 

우리는 성게가 움직일 때 성게라는 동물 개체가 움직인다고 말하는 데 익숙하다. 개가 달릴 때 다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개라는 동물이라고 인식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성게의 다리들은 각각의 기관인 다리가 오직 각각의 다리 자신을 위한 개별반사를 소유한다. 따라서 성게는 개가 걷는다’ 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 ‘성게의 다리들 각자가 걷는다.’가 진실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든 개별 반사라는 완전한 독립성에도 불구하고 마치 시민적 평화가 지배하는 공화국적 반사 행동을 할까. 성게에게는 인간처럼 상위의 중추기관이란 것이 없어 그 어떤 지휘도 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떻게 조화로운 일체된 행동이 발현되는 것일까? 인간적 관점이란 이렇게 자신의 이해에서 풀려나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의외의 단순성에 있다. 어둠에 반응하는 표피의 광감각적 지각의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더 자세한 상술은 피하겠다. 인간적 실존의 일상적 염려들을 자연의 개체들에게 투사하는 이런 오류의 예는 차고 넘친다. 우리는 진드기가 먹잇감을 노린다.’고 표현한다. 다분히 목적성을 기반으로 한 말이다. 그러나 모든 동물들의 행동들은 목적론적이지 않다. 진드기 단지 낙산에 반응한 것이고, 그것은 그의 정동의 발현이다. 낙산 반응이라는 후각적 지각의 특징은 포유동물의 피부에 떨어짐으로써 촉지각적 지각으로 바뀌고 후각지각은 사라진다. 진드기의 행동은 낙산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일련의 지각적 기능 원환의 전개는 다음 단계의 행동을 사전에 계획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기능적 원환운동은 어떤 지각적 특징에 의해 활성화될 뿐인 것이다.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관 없는 신체(부분신체)’의 단서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 인간은 어떤 목표에서 다른 목표로 삶을 힘겹게 끌고 가는데 익숙하다. 때문에 동물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살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 외의 자연에 대한 근본적 오류다. 하나의 예만 소개한다면 어미 닭의 행동에 관한 관찰이다. 줄에 묶여 병아리가 삐약 대면 어미 닭은 달려와 가상의 적을 향해 부리를 쪼아댄다. 그런데 유리컵 속 다리 묶인 병아리를 어미 닭이 보았을 때, 어미닭은 아무런 동요도 행동도 하지 않는다. 어미 닭에게는 삐약 소리라는 지각적 특징이 부리로 쪼아대기라는 작동적 특징을 발현할 뿐이다. 병아리가 아무리 발버둥 처도 삐약 소리가 나지 않으면 어미닭에게는 아무런 작동적 행동이 발현되지 않는 것이다. 즉 기능적 원환운동을 촉발하는 지각적 특징이 없다면 아무런 행동도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미 닭에게는 목적론적 지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의미의 이야기로 옮겨 가보자. 다시 진드기를 떠올려보면 그에게는 세 가지 자극물에 따른 작동적 행동인 떨어지다’, ‘탐사하다’, ‘찌르다라는 각 지각에 대응하는 활동이 있으며, 그것을 우리들은 활동의 내포적 의미라고 지칭할 수 있다. 나뭇가지를 향해 날아가는 잠자리는 그의 환경세계 속에 나뭇가지는 앉다라는 내포적 의미에 의해 특징 지워지는 지각적 특성이 일으킨 작동적 행동일 것이다. 바로 이 내포적 의미가 나뭇가지를 구별짓고 다른 모든 것들 가운데 그것을 선택하게 만든다.

 

인간의 환경세계 속에서 대상들의 활동적 내포 의미는 의자는 앉기, 탁자는 식사하기, 잔과 접시들은 마시기와 먹기, 마루판은 걷기, 책장은 독서와 같이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달리 동일 대상에 대해 개의 환경세계 속에서는 앉기, 식사하기, 걷기에 한정된다. 따라서 탁자, 책장 등은 그에게 장애물의 내포적 의미에 불과할 것이다. 파리의 환경세계 속에서는 자극물이 되는 열기 말고는 모든 대상물이 그저 도정(道程)의 내포적 의미만을 소유한다. 환경세계는 외부 자극물이 촉발한 지각 신호들의 산물이다. 모든 개체들은 그들만의 자극이 다르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저마다의 강력한 효력이 드러나는 환경세계, 개체 자신만이 유일하게 지각할 수 있는 환경세계들을 우리는 관찰하고 통찰 할 수 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일 주체는 그 자신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여러 다양한 환경세계들 속에서, 대상으로서의 자신을 어떻게 현시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가질 때, 우리들은 전체의 시각에 이를 수 있음을 알게 된다고 말이다. 떡갈나무는 노력한 벌목꾼에게는 일정량의 목재로서 나무둥치들의 크기로 선별되는 것일 게다. 여우에게는 나무와 뿌리 사이에 자신의 소굴을 만들어 가족을 보호하는 거주지로, 다람쥐에겐 기어오르다 라는 내포적 의미일 것이고, 어린 아이에게는 나무껍질의 주름이 만들어내는 마녀의 얼굴이 주는 공포심이 내포적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떡갈나무의 세계에 있는 거주자들의 지각 이미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구조화되고 그들 활동의 다양한 내포적 의미들과 일치할 것이다. 중립적 대상으로서의 떡갈나무는 주체와 관계하자마자 의미의 담지자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대상이 주체에 의해 부여된 담지자로 변하는 것은 오로지 관계를 통과하면서 발생하는 사건임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동일한 꽃의 줄기도 환경세계에 따라 장식적 역할(인간), 도로의 역할(개미), 펌프의 역할(매미 애벌레), 영양물의 역할(암소)을 한다. 꽃의 줄기가 이처럼 의미의 담지자 역할을 수행하는 순간 주체의 신체 안에서도 의미의 이용자와 관련한 무엇인가와 연결된다. 개체의 각 행동은 그 지각적 구성성분과 작동적 구성성분을 가지고 대상에 대해 의미를 각인하고, 각각의 환경세계에서 그 대상을 주체와 밀착된 의미의 담지자로 만든다. 각각의 의미담지자는 자신의 기능적 원환에 자리 잡으면서 다른 개체의 보체(補體, complement)가 된다.

 

모든 개체의 기관들은 모두 외부에서 오는 의미의 요소들의 이용자들인 한에서 어떤 권위를 입게 되고, 이 권위에 따라 기관들의 형태나 물질의 분배가 일어난다. 따라서 모든 생명체에게서 의미에 관한 물음은 최초의 중요성을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개별 세포들의 운명은 오로지 그 세포들이 구성하는 중인 형태 안에서

각 세포가 차지하는 자리에 달려있다.” -160

 

동식물의 생식세포는 산딸기 형태에서 극점이 오목하게 함입된 구체로 변화하고, 이 구체는 단번에 세 개의 배엽으로 나누어진다. 이렇게 낭배(囊胚,gastrula)를 형성하며, 이것은 대부분의 동물들의 시원적 형태, 즉 모든 고동동물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개시하는 것은 이러한 단선적 멜로디다. 인간이라고 뭐 그렇게 대단하거나 다른 발생학적 기원을 갖는 위계질서의 상위를 차지할 그 무엇도 아니다. 이렇게 낭배, 낭포라는 기본적 초기 형태로 완성된 생애를 가지는 동물들도 아주 많다. 해파리, 말미잘, 변형균류 등등은 그것들 나름의 의미관계를 구성하기 위한 형태잡기로 충분하다는 인상을 준다. 독일의 배아생물학자 스페만(hans Spemann, 1894~1941)의 배아조직 이식의 사례를 거론할 것도 없이 이식 세포가 다른 의미의 질서를 수용하게 될 장소에 놓이게 될 때, 숙주의 의미의 질서에 따른다. 그런 다음 이식된 세포는 자신의 고유한 형태화의 멜로디에 복종한다. 이 실험에서 의미를 획득하는 질서는 언제나 동일하다. 그러나 형태를 획득하는 질서는 전적으로 다양하다.”는 사실만을 확인하도록 하자.

 

스페만의 실험은 생명체의 기관들이 기계의 부분들과는 정반대로 본래적인 의미의 음색을 소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원심적 방식이 아닌 다른 식으로는 그 형태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의미의 개념에 입각해서 세워진 자연에 대한 포괄적 개념화를 이룬 놀라운 업적임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중요한 인식의 전환이 될 것이다. 거미는 실제의 파리를 만나기도 전에 거미줄을 짠다, 그 결과 거미줄이 물리적인 파리의 복제물일 수는 없지만 물리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파리의 원형을 재현한다. 생물학적 통찰이 갑자기 형이상학으로 이전된 된 듯한 곤혹감이 들기도 하지만, 모든 동물 개체에서 지각적 특징으로 이루어진 환경세계를 인식한 사람에겐 오로지 대상들의 상호관계, 즉 자연의 사건에 대한 주체의 영향력을 알지 못하는 기계론적 유물론자들의 물질적 실체에 대한 다분히 상상적인 형이상학에 비하면 윅스퀼의 주장은 오히려 더욱 과학적이다. 책의 설명으로 흘러가다보니 너무도 장황한 글이 되어버렸다.

 

아마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 주장으로 읽혔을 법한데, ‘발달과 형태발생의 모티프에 이르면 의미의 담지자와 대위점이라는 두 개념에 의해 대위법의 점은 언제나 대상의 실존을 결정하는 모티프라고 주장하는 데서 정점에 이른다. 그것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꽃이 꿀벌에 대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꿀벌이 꽃에 대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결코 저들은 화합하지 못할 것이다.“ -219

 

이를 다른 말로 해석하면 이렇게 옮길 수 있겠다. 손잡이가 달린 커피잔은 인간의 손과 갖는 대위법적 관계다. 커피잔을 제작할 때 작용하는 모티프들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결국 이 말은 일상적 대상의 의미는 그 대상이 완수하는 기능에 놓여있으며 그러한 기능은 언제나 대상과 환경세계 사이에 놓인 어떤 대위법의 점으로 보내져 실존을 결정하는 모티프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윅스퀼은 결론에 이르러 각 개체의 신체는 의미의 담지자의 발달 멜로디를 자신의 고유한 구조 속의 모티프처럼 사용한다는 주장에 이르고, 위대한 문장을 남긴다.

 

나는 자연 전체가 나의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인격 형성에 모티프로서

참여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자연을 인식하기 위한

기관들을 갖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233

 

결국 모든 개체가 지니는 지각적 특징, 들뢰즈의 용어로 정동은 존재 개체를 형성하며 존재는 정동 그 자체다. 라는 말로 이해해도 될 듯하다. 우리들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개체들은 자연이 자신의 구성들 가운데 하나로서 우리를 들어오게 했던 한에서만 우리들은 자연에 참여한다고 말 할 수 있게 된다. 모든 환경세계가 오로지 이러한 의미의 상징들만을 포함한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의미의 상징이 개체의 형태 발생과 발달에서의 의미의 모티프임을 직시하게 되면, 이 모두를 포함하는 하나의 장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다. 구성의 단일성을 주창하는 이 외침은 들뢰즈의 존재의 일의성이 되어, “정동은 생성이다,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놀라운 테제가 의미하는 것, 다시 말해 개체 각자에 주어지는 미지의 자연에 대한 믿을 수 없는 느낌, 정동으로서 고무되고 동요되어 개체의 역량이 실현되는 환경세계에 대한 이해를 갖출 수 있게 된다. 생성은 결코 단독으로 일어나지 않으며, 언제나 환경세계 속에서, 사이에서 일어난다.

 

생성(~되기)은 자신의 고유성을 상실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새로운 정동을 획득하는 것이다. 자연이 정동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개체들이 생성과 의미의 존재임을 깨우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사유의 전환을 설득해낸다. ~되기란 정말 힘겨운 일이다. 말이 쉽지 자기 고유의 지각적 특징을 변환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인식에 마음을 열고 감응을 위한 노력을 한다면 어쩌면 우리의 신체에 새로운 정동이 내려앉아 어떤 창발적 행동을 낳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이 반()목적론적, ()유물론적 생물학 저작은 아마도 다채로운 영감을 독자들에게 선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더구나 들뢰즈에 호감과 그 지향하는 사유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없는 원천적 지식의 선물이 되어 줄 것 같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힐 2025-12-10 1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께서 소개해 주신 생성-의미-정동은 제 눈엔 불교의 ‘공‘ 을 서양 철학 언어로 풀어내신 것 처럼 느껴졌어요. 둘다 관계에 의해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같지만 공은 ‘비워내기‘에 가깝고, 생성과 정동은 ‘확장과 변형‘ 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해서요. 제 이해가 맞는지 궁금하네요.
같은 산을 다른 능선에서 오르다 보면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ㅎㅎ
생각할 수 있는 텍스트 남겨 주셔서 감사 합니다.
참, 이 달의 당선작 선정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비의식 2025-12-10 14:53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확장과 변형에 ‘가깝다‘와 근사한 개념이지만, 오히려 개체의 환경세계에서 지각되는 어떤 기호로 인해 개체의 신체가 즉자적으로 반응하는 정서, 혹은 감응의 결과라고 이해될 수 있는 ‘변용‘을 지칭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공(空)‘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어서 어설프게 말을 한다는 것이 저어 되지만. 들뢰즈는 ‘존재 일의성‘의 철학자로 불리거든요. 여기서 존재의 일의성이란 궁극적 모든 존재는 하나의 전체에 이를 수 밖에 없음이라고 거칠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이 일의성이 공의 다른 표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마힐님, 댓글 고맙습니다. ^^

비의식 2025-12-10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양과 서양의 사유 접근에 관한 흥미있는 비유가 있네요.
동양은 전체(궁극)에서 개체로, 서양은 개체에서 전체로라는 것인데요, 동양(한국, 중국, 일본)은 주소를 표기할 때, 나라, 큰지역명, 작은 작은지역명,이름(개체)으로 쓰고, 서양은 이름에서 점진적으로 큰지역, 국가로 표기하는 것처럼, 동서의 사유접근의 방향이 마힐님의 지적처럼 비워내기,형성화 또는 생성의 극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 들뢰즈가 공(空)에 대해 나름의 식견을 지니고 있었네요. 그의 저술 <시네마 1>에서, ˝동양의 근본적 원리의 하나인 근원적인 공(空)˝을 말하면서, ˝그것은 일자 안에 있는 사물에 스며들어 있으며, 그 모든 사물들을 하나로 회집하고, 거대한 원환 내지는 유기적 나선의 움직임을 따라 사물들을 변형하는 생명의 숨결이다.˝ 고 인식하고 있는 문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