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기록 STORAGE BOOK & FILM 5
안윤 지음 / 저스트스토리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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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물은 대지의 시선이 되고, 시간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 폴 크로델, 해 뜨는 나라의 검은 새, p229에서

 

예순 편의 글로 엮인 이 산문집은 작가의 못다 한 말들킬 수밖에 없는 저의 일부분이라서 당장 숨을 곳을 찾는 게 먼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라 하듯, 한 사람으로서의 원초적 반영의 산물들 일 것이다. 작가의 소설집 모린을 읽으면서 나는 안윤 이라는 존재자를 구축해 온 세계들을 알고 싶어졌다.

 

그것은 생각하기도 전에 입에서 먼저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 원인일 수도 있는 엄마가 늦잠 자는 딸을 깨우기 위해 옆에 누워 즉흥으로 불러주던 우엉 반찬 노래의 기억이기도 하고(그 노래), 시간보다 뒤늦고 여전히 익숙해질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계절의 흐름 사이에 겪는 환절통이며, 네 살 이후 부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한 후 도시 유목민의 습성을 갖게 한 근거없는 불안과 불쾌가 들끓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고향을 말하게 하는 안윤이란 사적 개인이다.


한편으로는 시간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 작가의 여러 소설 속 서사 축으로서 흐르는 시간과 적절한 거리에서 관찰하는 조망자의 시선에 대한 어떤 성향 혹은 심리적 배경에 대한 이해다. 이 이해에 대한 요구는 좋아하게 된 작가의 작품들에 보다 감응의 깊이를 더 갖기를 원하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 산문집 물의 기록()’이 지닌 상징적 의미가 가리키듯 이미 시간의 흐름, 시차, , 간극과 같은 어떤 식별의 시선을 획득하려는 의지의 반영일 것이다. 산문들의 제목인 강을 건너다, 문턱을 넘다, 얼룩, 얼굴 퇴적층, 간극에 닿다처럼 이미 시간의 차이로 인해 거리를 확보한 관찰자의 시선이나 명상으로서의 관념화된 반성적 사념들이 흐른다.

 

산문 환절통에서 작가는 계절이 변화할 때 몸살을 앓는 자신은 미련하고 뒤늦은 통각으로부터 나는, 내 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현재를, 계절을 본다.”, 생의 감정주기에 견주어 볼 때 시차가 있다는 가설에 설득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는 나무의 칠이 벗겨지고 마모되어 거친 속을 드러낸 문지방을 짚어보며 거기 시간의 속살, 시간의 주름이 있다(문턱을 넘다)”고 말하듯 지나간 시간에 대한 비로소의 애도와 그 기록을 통해 해석하고 유추하며 자기 삶의 현재를 감각한다.

 

이 시간과 거리의 필요는 그 풍경의 마지막 기억과 현재 사이에 조금씩 틈이 벌어지고 내가 미처 겪지 못한 시간과 공간이 그 틈으로 들어서기 때문이고, 나의 부재에도 풍경이 제 나름의 기억들을 축적하며 변화해 왔다는 사실(간극에 닿다)”에 연유한다. 즉 생의 연속되는 간극에서 충실하게 서성이는 것만이 가능한 존재로서 자신의 부재에 대한 미련에 어떤 결벽성이 작동하는 까닭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작가는 섣부를 수밖에 없지만 그 섣부름을 지연하기 위해, 그 틈을 충실히 서성이기 위해 애쓰는 시간 낭비자임을 무릅쓴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자신이 가진 시력을 초월한 어떤 시선이 한꺼번에 세계의 깊이를 조망(비존재 느낌)”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 산문들을 통해 독자들은 독특한 조망자의 시선을 가진 작가 안윤의 작품 세계에 보다 친근하고 밀착된 이해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이 산문들에서 소설의 어느 한 문장과 유사한 문장을 발견하고 그 맥락과 분위기에서 연상되는 감정에 다가가는 간접적 통로가 되어 주기도 하고, 어떤 특정 소재나 작품의 배경에 대한 단서에 기초해 보다 심층의 함의(含意)로 접근 하는 읽기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설집 모린에 수록된 단편 에는 계약기간이 육년인 행복주택의 잔여 계약기간이 일 년 남짓 남은 시점부터 불신과 의혹을 가득 품은 틋한 소리를 듣는 수진이란 인물이 등장하는데, 작가를 도시 유목민으로 살도록 만든 사연이 흐르는 산문 이사 에서도 곧 있으면 계약 기간이 일 년 남게 된다.”는 문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불안과 불쾌를 상시적으로 강요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이러한 소재나 부분적 배경들에 얽힌 사연들의 발견은 눈 밝은 독자들에게 아마 몹시 반가운 발견이 될 것이다. 산문 나무를 심다에는 친구 G와 노을 공원까지 걸어 꾸지닥나무 두 그루를 심는 이야기가 있다. 단편 하지 夏至에 등장하는 지언과 함께하는 노을공원 이별 캠핑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독자로서 당연한 연결일 것이다. , 혹시 소설 속 지언이 바로 G와의 기억과 관련된 것일까? 하는 상상 말이다. 흙과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자기 몫의 삶을 스스로 살아 주었다는 한 토막의 에피소드는 살아있음, 현존을 실감함으로써 삶의 활력을 느끼는 감응의 시간을 바라봄으로써 어떤 충만한 안정감을 공유케 하는 소설을 보다 깊게 읽을 수 있는 어쩌면 상상의 확장에 기여할 지도 모른다.

 

아마 이 산문집의 글을 또 하나의 산문으로 정리한다면 어쩌면 하려는 말의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한 사람이 전 생애를 거치며 구축한 고유의 언어 체계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희망, 아니 차라리 탐욕인지도 모른다. (...) 흩어지고 깨지기 쉬운 이 말들이 당신 앞에 가닿아 미끄러지기를, 아름답게 미끄러질 수 있기를 바란다. 언젠가 당신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고 밑바닥만 내려다보게 되는 어떤 날에, (...) 도달하지 못했던 나의 말들 중 하나를 발치에서 집어 올려 들여다봐 주길 기다린다. 뻔뻔한 이 탐욕을 나는 아직 버리지 못했다.”

 

시간과 거리의 적절한 확보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성찰의 대상이 되어준다. 작가는 이를 통해 생의 아픔이나 더러움, 부정하고 싶었던 것들이 문득 아름다움으로 변이한다는 사실도 발견하고, 때론 그 아름답지 않은 아름다운 생이 비로소 생을 아름답게 이룩한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작가의 시간은 이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물들기를, 피할 수 없이 기다리기 위한 사유의 지체인 듯하다. 안윤 작가의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면 정말 좋겠다. 천천히 말없이 차를 마시지만 오랫동안 무수한 대화를 나눈 기분이다. 산문집 물의 기록은 작가 안윤의 작품 세계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그 세계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글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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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린
안윤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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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자주

바라봅니다. 흔들리고 있는 것들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갑니다.

수필집 수기 手記를 썼습니다.“

-안윤, 물의 기록에서

 

이 작품집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당치 않은 것이겠지만, 수록작 단편 의 한 구절이 아마 어느 만큼은 대표하리라 생각되어 옮겨본다.

 

일기를 쓰듯, 때로는 수행을 하듯 성실하게 셔터를 눌렀다. 황량하고 덧없는, 무위에 가까운 풍경을, 자신의 내면과 어딘가 닮은 대상들을 포착했다. (...) 사희는 철저히 관찰자가 되었다. 자신이 이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건너다보고 있다는 감각이, (...)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위안을 줬다.” - 단편 , 240쪽에서

 

그래, 소설집은 철저한 관찰자, 인생을 조망하는 시선들, 다시 말해 자기 인생의 궤적과 곡절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시야와 거리를 가짐으로써, 의 사희 말처럼, 인생에서 열기 두려웠던, 여전히 열지 못한 문 앞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감정과 대화를 나누도록 독자를 텍스트 안으로 이끄는 느낌을 갖게 한다. 어쩌면 한 번도 상상해 본적 없는 자기 내면의 그 변덕스러운 실체를 마치 다른 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내 마음이나 행동 또는 그 주체라고 여기는 나라는 존재는 결코 불변하는 무엇이 아님을 알면서도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흔들리는존재임을 망각하곤 한다.

 

표제작인 단편 모린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낭독 봉사를 하는 미란과 장애인 영은의 반걸음 만큼 떨어진 사랑의 이야기가 흐른다. 이 작품의 독특함은 요제프 코발스키라는 무명의 작가가 쓴 보이지 않은 것들 Invisible things이라는 수필집의 문장들이 인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서술자인 미란 혹은 영은의 목소리이기도 하고, 인생 조망자의 시선이기도 한 듯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라는 문장을 접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 강렬한 아픔 때문에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넘어서는 감정을 마주하는 순간들이란 주의깊고 세밀하게 총동원된 감각의 종합이다. 시각장애인을 안내하기 위해 영은으로부터 배우는 팔꿈치를 내어주는 반걸음 앞선 자연스러운 동작, 왼쪽 빗장뼈 손바닥만큼 내려오면 깨알 같은 두 개의 점을 스쳐가도록 자신의 몸을 하나의 텍스트로 내어주는 마음, 어느 일방적인 보호와 의지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 유일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는 첫 문장은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남으로써 비로소 해독되는 소설이다.

 

작가 안윤은 이 세계에 펼쳐진 야만적 문제들을 배경으로 삼아 그것에 내재된 현재의 실상을 노출하면서도 그보다는 그것들과의 상호작용 속에 내면화된 인간성을 관찰하게 한다. 단편 핀홀 Pinhole은 단란한 가정과 무관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보라가 스스로 인정하지 못했던 훼손 된 자신의 마음과 마주하기 일 것이다. 그녀는 동거하는 승원의 가족과 자신을 위한 결혼선물로 천에 수를 놓지만 자신의 얼굴만은 빈 공간으로 남겨놓고 주저한다. 누군가를 아는 일에 그 대상을 두고 앎의 정도를 따져보는 일에 사실 나도 서툴다. “(당신은 그를 혹은 그녀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세요?”라는 물음은 참으로 심사를 복잡하게 만드는 물음이다.

 

소설은 어느 중증장애인이 자신의 온 몸을 투쟁하듯 더디게 완성하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떨리는 집게손가락 끝을 문자판 글자에 가리키고 그리고 비로소 원하는 글자에 멈춰 톡, 한 번 건드리며 완성하는 문장, ‘하 여 행 복 을 산 다 오 로 지. 이것은 승원이 싱크대 밑, 소파 밑처럼 아무 곳에나 처박아놓아 집쥐처럼 보이는 양말뭉치의 무신경처럼, 삼십일 년을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에 갇혀 있다가 석연치 않은 죽음을 한 승원의 형, 정원의 존재를 알게 됨으로써 보라와 승원은 결코 이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내 앞에 나타난 이 구멍들은 무엇으로 이어야 해, 할머니?” 보라가 죽은 정원이 갇혀 지내던 폐쇄된 시설을 찾아들고, 정원이 남긴 쉴 새 없이 떨리며 남긴 불운의 증명, 행복의 위치 이동을 쫓는 글과의 대면은 자신과의 만남과 다름 아니었을 것만 같다.

 


담담은 양성애자를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 혜재의 자신 안에 도사린 의심과 불안의 실체 마주하기라 해야 할까? 스스로 설명하거나 증명하려고 안달하는 자기 존재에 대한 멀리서 보기, 철저히 관찰하기의 또 다른 판본이다. 결혼과 출산 생각은 없다고 못 박은 자신에게 묻는다. 결혼은 내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일까, 나는 약속이 싫은 건가, 조금도 손해 보거나 희생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사랑은 믿지도 않으면서 욕망만 채우는 것뿐일까에 대한 이 모호한 자기 불일치에 대한 응답을 향한 여정이다.

 

혜재는 은석과의 첫 만남에서 저는 바이예요라는 무심한 발설에 그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가요?’라는 예상치 못한 응답으로 둘은 가까워진다. 이 두 문장에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깨달음이 모두 있다. 대체 정체성이라는 것, 뭔가 고정된 불변의 근본이 있다는 생각처럼 인간에 대한 몰이해도 없을 것이다. 혜재는 은석과의 만남, 동행을 통해 잔잔하게 흘러들어오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둘이 마주한 설렁탕의 맛을 은석이 담담한 맛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곧 삶의 형식이며, 내용의 실체에 대한 깨달음일 것이다.

 

작은 눈덩이 하나는 눈 내리는 어느 겨울 밤, 사랑하는 이의 집 앞을 서성거리다 이내 돌아서는 사람의 서글픈 허기, 울적한 공허감을 상상하게 했다. 지난 시절 한 때의 아련하게 남은 기억, 그래서 쓸쓸하지만 아름다웠던 이미지로 남아있다고 자기위로를 삼는 씁쓸한 기억. 첫 장편으로 해외 영화제 수상을 한 영화감독이 된 친구 세진, 전문대를 졸업해 세진보다 일찍 직장생활을 시작한 의선이 함께 살았던 대학시절의 시간이 흐른다. 사년 제 대학을 다니는 세진의 영화동아리 일원들은 세진으로 인해 의선의 집을 아지트로 삼아 어울린다.

 

의선은 영화 앞에서 울고 웃는 날것의 활기를 뿜어내는 그들의 열기와 함께하면서도 은근한 소외감을 떨어내지 못한다. 표현하기 어렵고 정량화가 불가능한 내면화된 계급의 주관적인 정신적 상처는 실로 복잡하면서 더러운 사회적 감정이다. 세진의 동아리 선배인 준수는 단편 영화 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해 질 때 여기 빛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의선의 자취방을 찾아오고, 둘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몇 차례 만남을 갖는다. 준수의 궁핍을 발견한 의선은 이백만원을 꾸어주고 그가 단편을 마무리하도록 성원한다. 그러나 준수는 단편을 마치지 못하고 학업을 그만둔 채 소식이 끊기고 만다. 의선에게 갚지 않은 돈, 훗날 세진의 수상 축하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준수를 보지만, 둘은 그저 조심스러운 몇 마디만을 주고받은 채 헤어진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서울숲 근처에 카페를 냈다는 소문을 듣고 의선은 찾아가지만 카페는 문을 열지 않았다. 의선은 스스로의 행동을 미학적 영상미를 흉내 내듯, 몇 발짝 뒤로 물러난 닫힌 카페 문과 유리창 너머에 고인 짙은 어둠을. 그 어둠 속에 희미하게 비친 내 얼굴을본다. 즉 관찰자의 시선으로 의선 자신을 보는 것이다. 그녀는 첫눈을 봉하여 지인의 집 앞에 갖다놓는 약이(藥餌)’의 옛 이야기를 따라한다. 묶인 듯 사로잡힌 정신을 풀어놓는 일에는 오랜 시간의 흐름이 필요하다. 관찰자의 시선을 얻기까지.

 

거듭, 반복의 의미를 지닌 부사가 제목인 단편 는 유효기간이 육년인 행복주택 계약기간이 일 년 남짓 남은 시점부터 도수진에게만 들리는 불신과 의혹을 가득 품은 듯한 소리다. 수진은 연인이었던 치완과의 이별에 일말의 미련도 죄책감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다 삼년 반이 지난 시간, 아마 소리가 들리고부터인가? 혹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며 휴가계를 내던 직장 동료 강주임이 겪는 전세 사기의 고통을 알고 나면서부터인가, 사람들은 자신이 비로소 유사한 불안에 맞닥뜨려야 감응의 심장이 작동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에도 작은 눈덩이 하나에서 내면화된 계급사회의 언어가 스치듯 준수에 의해 발설되어 배경이 되듯, 에서도 인간에 대한 무심코 저지르는 모멸의 장면이 배경처럼 반복되어 출현한다. 도수진 대리는 대리로, 강주임은 주임으로 부르는 직장 상사인 과장이 있다. 직원의 성을 된소리로 발음함으로써 상대방을 은근히 멸시하는 기만적이고 흉측스런 괴물같은 계급권위를 으스대는 행위 말이다. 물론 소설은 이를 말하고자 함은 아니지만 작가는 이러한 던적스러움을 배경에 삽입하며 이 사회에 만연한 민낯을 풍경처럼 풀어놓는 듯하다. 전세사기로 인한 대출금을 갚기 위해 퇴직금이 필요해 나타난 강주임이 자신의 짐을 정리할 때 그 순간 들려오는 라는 소리는 와 함께 삶의 곤혹스러움에 대한 그들 내면의 소리인 것만 같다. 두 사람이 동시에 , 라는 서로의 소리를 듣는 이유일 것이다.

 

단편 하지 夏至는 어느 순간 자신이 운영하던 일인(一人)빵가게를 접고, 타향인 서울과 삼십대와 이별하는 수림이 오랜 벗 지언과 함께하는 이별 캠핑에서의 나지막하지만 삶에 대한 강렬한 깨달음의 목소리들이 깊은 여운을 지닌 작품이다. 자기 성찰이란 상상력이라는 저 밑바닥에 연원을 지닌 무의식과의 만남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면서 적당한 자기로부터의 거리가 주는 시차는 타인의 행위가 의미하는 투영으로서의 자신을 돌아보는 상상력, 진실에 가까이갈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하는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이네” “인간은 모순 그 자체 내라며, 허상인 이유를 쫓으며 자신을 보호하는 인간의 조금은 서글프고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수림이 고향 부안의 바닷가에 낮춰 앉을 수밖에 없는 캠핑용 의자에 앉음으로써 더 높은 하늘을 보며 흩날리는 하얀 가루 입자의 반죽과, 컨벡션 오븐 유리에 맺힌 물방울들을 상상하며 그 모든 게 전생처럼 아득하다.”고 말 할 때, 그 이미지의 힘들이 발산하는 부드러운 걸음과 평온함의 강렬한 물성이 수림의 마음 깊숙이에서 스며든 것을 불현 듯 본다. 살아있음, 현존을 실감함으로써 삶의 활력을 느끼는 감응의 시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충만한 안정감을 공유케 하는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치유와 세상과의 연결을 상징하는 킨츠기 공예와 사진 작업이 어우러져 조각조작 깨진 마음의 상처와 충동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채 자신을 속여 왔던 인물이 마침내 자신의 진짜 얼굴과 마주함으로써 그 깨어짐의 실체를 말하는 은 아마 수록된 일곱 편의 소설을 모린과 함께 대표하는 시대의 작품이라 해도 될 것 같다.

 

나만의 기억으로 삼기 위해 내 너절한 감상은 여기서 맺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어느 한 작품도 소홀히 읽을 수 없는 정화되고 고귀한 느낌이다. 작가의 책()으로는 네 번째이다. 책을 사놓고는 몇 개월의 뜸을 들였다. 냉큼 읽어버리기에 아까워서였다. 이 작품집 또한 내게 소중하게 간직될 것이다.


고이거나 흐르거나 때로는 나를 넘어 범람하던 말들,

당신에게 무자비하게 뱉거나 묵묵히 삼가던 말들,

내게로 쏟아지거나 증발하던 말들,

나의 언어는 형태를 갖기에 희미하거나 무르다.“

- 안윤, 물의 기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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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란 미래의 문학 11
데이비드 R. 번치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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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자신의 증오에 완전히 먹혀버렸거나, 적어도 그것에 그대로 사로잡힌 한 존재의 증오가 차가운 바람처럼, 모든 것을 불사르는 화염처럼, 인간의 모든 시도와 포부를 녹여 없애는 독액을 질질 흘리는 산성 물질의 구체처럼 이야기 속을 휘감아 돈다.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 낸 세계에 대한 불신, 그들이 자초한 조잡하고 기만적인 허구의 세계가 기어코 초래한 종말적 실체에 대한 이가 빠드득 갈리는 증오와 분노, 무한한 살육과 파괴가 지면을 흥건히 적시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선혈이 낭자한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모데란(Moderan)1960년대 발표된 40편 남짓한 장,단편(,短篇)으로 하나의 서사적 연결을 하고 있는 작품들이 엮인 일종의 우화적 사변(思辨)소설이다.

 

이 작품의 감상을 시작하기 전에 작가 데이비드 R.번치1965에메이징 스토리즈6월호에 남긴 유명한 선언은 그가 쓰고자 한 이야기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좌표가 되기에 짧게 소개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저는 뭔가를 서술하거나 설명하거나 즐거움을 제공하려고 이 업계에 뛰어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독자들을 생각하게 만들려고 여기에 섰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끔찍한 세계를 만들어버린 대가로. (...) 제가 원하는 독자는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커다란 흑십자에 올라갈 독자입니다....”

 

, 그가 묘사한 끔찍하다는 지옥같은 세계는 소설의 주인공인 신금속으로 교체된 강철인간 10번 성채에게는 기쁨이요, 삶의 이유이자, 쾌락이니 오히려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까운 세계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세계는 지독한 오염과 잔혹하고 무참한 전쟁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신세계 모데란은 독성 물질로 오염되고 파괴된 폐허를 로봇들이 단단하게 평탄 작업을 하고, 그 위에 무균 플라스틱 층으로 매끈하게 덮어버리고, 오염된 공기를 날려버리기 위해 대기층을 파괴하고는 증기 방어막을 월별로 쏘아올리는 인공의 세계다. 사실 소설의 배경인 모데란의 세계는 오늘 우리들이 망가뜨리고 있는 이 지구 생태계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대양과 대륙 어디에든 넘쳐나는 플라스틱 쓰레기와 매일 대기오염도가 발표되어야 할 지경에 이른 대기의 악화는 어쩌면 이들과 같은 무한한 과학기술의 낙관성, 그 임기웅변과 매우 닮아있다.

 

이야기는 이미 또 다른 종말에 이른,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자임을 증명하겠다고 울부짖었던 존재, 신금속 인간 10번 성채가 남긴 테이프를 발견한 그네들의 후손이랄 수 있는 일종의 빛줄기인 미래 종족이 그 테이프를 해독해 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존재 역시 인간이란, ‘체제를 무너뜨릴방법을 찾아 헤매는 행위를 멈출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듯, 인간이라는 꾸러미는 자기 파괴성이 그 요소라고 설명한다.

 

이 소설과 병행하여 읽던 책이 계급의 숨은 상처였는데, 나와 너로 위계의 등급을 만들어내기 위해 능력이란 해괴한 가치체계를 사회화하고 다수에게 상처를 주며 권력을 독차지하는 끈질긴 인간 세계의 파국적 현상을 규명하는 저술이다. 그 책에는 손상된 자기 존엄과 억압된 자유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들의 세계가 있다. 이를 위해 사용되는 경쟁의 심리는 곧 모데란 최고의 전사인 10번 성채가 망치와 인간에 대하여에서 읊조리는 매일이 경쟁으로 구성, 서로에게 고약하게 구는 일진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교양인의 일과라 말하는 것과 흡사하다. 소설은 양심의 경향성, 도덕관념을 정신적 장애물이라 일컫기까지 한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성채를 부수거나 이웃의 머리를 망치를 내리치는 것이야말로 쾌락이라고 부르는 세계이다. 작가가 부여한 ‘10번 성채라는 존재는 바로 오늘의 인간들과 이 세계의 소수 엘리트들이 주장하는 능력주의, 경쟁주의, 과학중심주의의 화신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전쟁이 교양인의 가늠자이며 파괴는 곧 창조의 다른 이름이라고 외친다.

 


소설은 작가의 선언처럼, ‘설명하거나 즐거움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완전히 배반할 만큼 서사적이고 블랙유머로 무장된 재미가 넘쳐흐른다. 10번 성채가 되어 모데란 최고 전쟁의 신이 되는 존재의 외관도 주목할 필요가 상당한데, 그가 아홉 달에 걸친 신체 훼손수술을 통해 92.5%의 신금속과 결합한 7.5%의 살점을 너덜거리며, 그 살점이 바로 인간성, 인간으로서 존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존재론적 의미임을 말하는 것은 정말 괴기스럽고도 우스꽝스럽다. 여기에는 과학은 인간을 만들었다! 신금속 인간을!”하며 과학에 대한 무한한 찬양의 의미에 못지않게 일말의 완전성인 7.5%로 의미되는 인간성이란 것에 대한 의구심이 남아있다. 외전의 한 작품인 언제나 조금씩에서 내구성은 강철보다 견고해졌지만, 그럼에도 증오하고 기쁨을 누리는 능력에서는 그대로 인간이었다.”는 금속인간의 자긍심 어린 선언은 역설적으로 과학실증주의의 낙관성에 대한 은밀한 의심과 조롱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사실 이 소설 40여 편의 작품들 면면을 관류하는 사유의 제안들은 인류의 존재론적 재앙을 만들어낼 위험들에 대한 현재라는 시간에서의 이해에, 삶의 경쟁에 매몰된 우리들이 얼마나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지, 마치 내일도 오늘처럼 삶을 이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환상에 불과한 것임을 각성(覺醒)케 하려는 물음들의 연결인 듯하다. 그 첫째는 충동조절에 실패하기 일쑤고, 각종 질병과 부상에 취약하며, 제한된 환경 조건에서만 살아갈 수 있으며 늘 죽음이 따라다니는 조잡한 내재적 조건을 지닌 인간의 탈신체화의 욕망’, 이에 편승한 극단적 실증주의에 심취한 기술자본주의의 지향성에 대한 선견적인 소름끼치는 인간 욕망의 현주소를 일깨우는 것일 게다.

 

한때 붉은 양탄자가에서 과학은 지저분한 흙덩이 구체에 플라스틱을 입혀 매끈하게 만들어 신금속 인간이 딛고 설 자리를 마련했노라.”라고 외치는 것이나, 신금속에서 궁극의 물질, 신금속, 플라스틱...시간을 뒷전으로 몰아내 우리의 꿈이 살아 움직이는 물질이었다.”라거나, 마음 약하고 망설임이 심하며, 감상적이고 불안하며, 죽기 직전까지 모든 시간을 겁에 질려 보내며 쉽사리 감상에 빠지는....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꿈틀거리는 공포를, 불안을, 위험을, 죽음을! ....”이라고, 살점 인간에서 금속 인간으로 거듭남을 긍정하는 과거에의 일별등이 그러한 과학기술 실증주의에 대한 역설, 혹은 반어적 조크일 것이다.

 

둘째는 모두에서 잠깐 언급했던 경쟁과 계급을 만들어내는 능력주의 신화에 도사리고 있는 그 신념의 반도덕적 무양심적 사회적 무의식의 관성에 대한 자성일 것이다. 모데란의 일상이란 끊임없는 전쟁이다. 영원을 마주하며에는 이웃 사람을 찍어 누르고 우리의 주도권을 확장할 수 있다면, 우리는 뭐든 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이 불멸의 존재가 된 금속 인간은 영원을 마주하기에 실패하지 않는 수단으로서, 여전히 신선하게 느껴지고 보상이 되는 일거리는 단연 계속되는 전면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특히 반구형 거품 주택이라는 수백만의 평범한 인간이 살아가는 단독 거주공간을 설명하는 단편에서는 이들 연약한 존재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모두 낭비일 뿐이며, “이 얼마나 한심한 낭비인가! 라고, ! 번쩍! 하고 검은 얼룩으로 변할 것이다, 강철 관리인이 한번 쓸어버리면 간단히 사라질 것이다.”라며, 고작 신체 교체술로 최강의 능력을 지녔을 뿐인 자신을 망각하고, 다수의 존재들을 일거에 쓸어버려도 될 사회적 잉여로 취급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인간, 생물학적 신체를 지닌 인간에 대한 지독한 염오(厭惡)가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였는지, 망치와 인간에 대하여에서는 올데란, 즉 구세계의 살점 인간인 구도자가 삶의 의미를”, 소문난 위대한 불멸의 전사로서 그 의미를 현현하는 10번 성채의 초상화로 마무리하기 위해 찾아들지만, 10번 성채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좌절하고 이내 왔던 길로 돌아간다. 그런데 더욱 악취미인 것은 그가 폭탄에 맞아 사망하자 개들에게 구도자에 보내는 선물이라고 적힌 플라스틱 뼈다귀를 물게하여 조롱하기까지 한다. 아마 양심에서 해방되고 도덕을 말끔히 씻어낸, 현대의 내면화된 계급주의의 교활하고 기만적인 인간성을 환기하려는 의도처럼 보인다.

 

셋째는 과학실증주의자들의 그 낙관적 실체가 실현되어 불멸의 존재가 되었을 때, 인간의 실존성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낡은 살점을 버리고 새로운 불멸의 존재가 되었을 때, 그 영구히 지속되는 매일 매일의 삶이란 것은 대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은 전쟁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재회라는 200년이란 시간이 흐른 강철인간이 옛날 살점인간이던 시절의 신앙과 자립심을 키우고 약속을 신뢰했던 옛 친구의 방문을 걱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플라스틱으로 뒤덮인 대지를 폄하하는 논리에 반박하려면, 그리고, 자기 신체를 버리고 강철로 교체된 존재에 대한 의심에 답하기 위해 고심하는 것인데, 그를 폭사시키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기억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더욱이 모데란이라는 신공정 땅 전체는 기억에 의존해 세워진 곳이다. 그렇다! 신공정은 과거로부터, 기억하는 온갖 것들로부터의 도주 과정이고, 그 안에는 기억자체로부터의 도망이라는 뜻이 내포되었다는 생각에 이르러,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의심, 비교를 견딜 수 있을까하는 의심에 빠지기도 한다.

 

둘은 서로 만나 눈물만을 주고받고는 바로 이별의 걸음을 걷는다. 돌아서는 친구의 입이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지만 들리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200년 강철의 시대가 흘러간 지금, 그의 길이든, 나의 길이든 전부 슬픔과 의심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말하려던 것일까?“라고. 어쩌면 그의 삶은 고작 희망찬 죽음학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반문(反問)인 것만 같다. 의심이나 유령이나 공포가 들어앉을 자리를 조금도 남기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벌이는 극한의 살육과 전쟁. 종말에는 전조(前兆)가 있다. 사랑과 자기 의심의 상실, 무한 폭력, 금속에도 내려앉는 금속세균의 점진적 침투, 그리고 아주 작은 우연의 돌발성이 그 어떤 불멸도, 쾌락도, 의미도 확신해주지 못한다. 이 강렬하고 독특한 이야기 속 지성의 웅변에 집중하다보면 작가의 말처럼 저 높은 흑십자의 고지에서 인간 세계의 그 흉물스러움을, 그 던적스러움을 옴팍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에 빠졌다 나오는 기분이 든다.

 

이 세계는 이대로는 괜찮지 않은 것인데, 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는 것일까? 뒤틀린 계급의식과 감정을 내면화시켜 합리적으로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세계, 기술자본주의의 지향성에 기초한 인공지능과 탈신체화의 욕망으로 치닫는 과학실증주의의 세계, 보편적 심원한 사색에 매진한다는 지식인들의 편협성 등 파국의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인간의 실존적 문제에 대한 근원적 물음으로 내모는 소설이다. SF계의 혁명적 작품으로 불리는 이 소설은 경험의 지대를 벗어나 우리의 선험적 이성, 그 도덕의 근원을 헤쳐 보게 한다. 이대로 우리들의 인간성은 손 댈 필요가 없는 것인지, 이 사회에 내재된 가치들은 신뢰할 만한 것인지를 자성해보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60여 년 전에 쓰인 작품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21세기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 정말 문제작이다. 이제라도 읽게 되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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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附 記:

이 작품을 왜 이처럼 증오로 가득한 전쟁놀이에 광분한 세계로 창조해야만 했을까하는 대목에 대한 생각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말세의 징후(오늘의 전지구적 극우정치화, 전쟁과 민족주의의 부활, 자기이익 우선주의 등 극단적 탐욕과 같은)가 보일 때, 이 같은 현실에 대해 심판 증후군이나 데카당스, 어떤 극단적 형태의 돌발적인 사건을 성찰케 하는 시선들이 있어왔다는 점이다.

 

철학자 이광래 교수가 미술철학사에서 지적하였듯, 아마 16세기 60세의 노구를 끌고 6년여 천장화에 매달려 최후의 심판을 그렸던 미켈란젤로가 성스러운 제단에 굳이 벌거벗은 인물들의 저승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현실세계에 광란하는 인간들의 무분별한 욕망을 심판하려했듯  '가학적피학애(sadomasochism)'를 숨기지 않은 것은 적절한 예가 될 것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데이비드 R.번치가 창조한 신금속 인간 10번 성채가 읊조리는 극단적 폭력성이나 그의 신체는 바로 인류와 인류사회에 대한 하나의 강박적 치유과정의 역설적 상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아마 21세기 바로 지금, 우리는 성큼 인류 종말의 시간에 다가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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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의 질문, 베스트셀러 필사노트 (양장) - 필사로부터의 질문, 나를 알아가는 시간
김태현 지음 / 리텍콘텐츠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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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그의 소품 중 스스로 사고하기라는 글에서 많은 독서는 정신의 탄력성을 모두 빼앗아 간다.”라고 시인 알렉산더 포프를 인용하며, 쉴 새 없는 다독(多讀)이 사고를 못하게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책 읽기의 태도를 되돌아 볼 것을 권하기도 했다.

 

모두의 머릿속에 산더미 같은 책이 담겨 있어

끊임없이 읽고 있지만 도무지 읽히지 않는다." - 愚人列傳3.194, Alexander Pope

 

진리나 통찰이 어떤 책에 그대로 쓰인 것을 편리하게 발견할 수 있지만, 그저 남의 생각을 읽기만 하면 독자적 사고와 자발적 사고의 샘이 막혀 자신의 원초적 사유의 힘을 잃어버리게 됨을 경고하는 말이다. 이 책 백년의 질문. 베스트셀러 필사노트의 취지도 이처럼 그저 한 줄의 문장을 읽는 순간에 공감하고 머리로 이해한 것으로 그치지 말고, 그 공감과 이해의 글 앞에 멈춰 질문을 자신에게 돌림으로써 생의 현실과 미지의 미래를 성찰할 것을, 숨 가쁘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잠시 멈춰면밀히 숙고하는 시간을 가질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책은 총 14(Part), 112개의 문장 또는 한 절의 글귀들로 엮여, 인생의 안목과 센스, 인간관계, 시간의 주재자(主宰者)가 되는 법, 지친 마음을 보듬어주는 위무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현재 직면한 불안이나 살아오며 고민해 본 주제들은 독자들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자신의 현재와 공명하는 Part에 수록된, 오랜 성찰을 통해 견인된 문장들을 곱씹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기대치 않은 생각의 흐름을 만들고, 어쩌면 어떤 방법적 실마리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우선 전체의 문장들을 모두 읽으며, 내 마음에 다가온 12개의 글귀를 필사했다.

 

그리고는 해당 필사의 문장으로 돌아가 내게 질문을 던지고 그에 답하기 위한 생각의 시간을 가졌다. 아마 이들 물음에 대해서 보다 여유로운 시간을 만들어내고 그 홀로만의 고독한 사색의 흐름을 쫓아보아야 할 것 같다. 책의 14번째 글귀는 컨셔스에서 발췌된 문장인데, 바로 고독하게 사유할 시간의 엄중함을 제안한다. 고독해야 사유할 수 있다. (...) 고요히 생각할 마음이 주어진다.(...) 그래야 자발적으로 내 몸을 일으키고 나의 주체성을 되찾고 내가 해야 할이 무엇인지 계획할 수 있게 된다.”.

 

종일 관계의 소요 속에 휘말려 지내다 지친 몸을 눕히기에 급급한 것이 우리네 일상이다 보니,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58번째 글귀에 이르면 Change Way 변화, 그 아름다운 선택에서 발췌된 시간 전망(tome perspective)’, 즉 현재의 행동과 의사결정이 미래에 끼칠 영향력을 얼마나 길게 내다보는가의 헤아림 역량과, 당신의 시간은 곧 당신의 인생이다라는 오프라 윈프리의 정곡을 찌르는 말을 대하게 된다. 내 인생을 위한 시간보다 귀중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시간이 없다는 말은 정말이지 자신을 함부로 취급하는 무책임한 말일게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스스로를 제대로 볼 수 있음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요즘 나는 부모님들의 노환을 옆에서 바라보며 더없이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해인 수녀의 꽃이 지고나면 앞이 보이듯이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주변에 보물 아닌 것이 없는 듯합니다.”라는 문장이 내 가슴에 치밀어 들어온다. 보물같은 부모님, 이 생()에 함께하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는지 이 필사집을 통해 새롭게 읽어본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면서도 사랑을 현실보다 더 사랑한다.” 비록 내 마음이 그려낸 사랑이 환상일지언정, 나는 현실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본다. 반백년 넘어 살았음에도 사랑의 환상에 현실을 걸 수 있는 나는 아마도 아이의 마음에 머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변화를 도모해야할 만큼 진부함의 깊은 골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데 마침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속 문장을 만나게 되었다. 아무 확신도 없지만 더 이상 지금 삶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문에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심리학자 토니 로빈스의 변화를 원하는 사람은 기회가 있다고 믿는다.”는 말이 공명한다. 아무래도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 그 여정에서 내 삶의 행로에 놓인 물음들의 응답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라는 권유로 들린다.

 

책의 72번째 글귀는 아네테 블라이가 쓴 날아라 펭귄의 한 구절이 있다. 어린 펭귄 브루노가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내가 갈매기처럼 날 수 있을까요? 너는 너만의 방법으로 날개 될 거야, 브루노.“ 그래, 우리는 우리만의 비행법이 있다. 남과 다른 고유한 나만의 비행술이 있음을, 아마 이 비행술이 무엇인지 나를 더듬어보는 시간이 될 것 같다.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어 걷다보면 내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낸 무의식으로 변해버린 어떤 고집스러운 상태를 발견하게 될 터이다. 변화를 위해 그것을 끊어내는 시간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내 삶을 구성하는 많은 사람들과 상황들, 이 모두에 겸손해지는 시간이 된다. 겸허함으로 이 책의 문장들의 울림에 귀 기울이고, 천천히 그 글귀들을 필사하며 작은 위로도 받고, 조금은 더 삶에 관대해지는 그런 시간이 된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책의 문장들을 통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보다 더욱 스스로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느낌을 갖게 되리라 믿는다. 저자의 프롤로그 글처럼 백년의 질문 베스트셀러 필사노트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고독하고 고귀한 시간이 되어 주는 길잡이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모든 선견을 잠시 묻어두고 겸양의 시선으로 다가가면 훨씬 많은 것들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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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얼굴 - 얼굴로 본 인간 진화의 기원
애덤 윌킨스 지음, 김수민 옮김, 김준홍 감수 / 을유문화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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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얼굴 구조에 대한 21세기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미시간해부학교수를 지낸 도널드 엔로(Donald H. Enlow)인간의 얼굴은 특이하다. 일반적 포유류의 기준에서 인간의 이목구비는 이례적이고 전문화되었으며, 어떻게 보면 기이하기까지 하다.”며 그 특이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보아 온 인간 얼굴의 익숙함은 한 번도 왜 이런 형태를 갖게 되었는지 생각해 볼 여지가 없었다. 해부학자의 말처럼 그 어떤 포유류와도 닮지 않은 피부가 드러난 얼굴과, 주둥이가 길게 튀어나오지도 않았으며, 한 평면에 나란히 눈과 코, , 그리고 이마가 수직으로 정면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신기하기 그지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 인간 얼굴(Making Faces)은 바로 이러한 인간 얼굴의 형태가 왜 오늘의 모습을 하게 되었는가의 물음에 대한 지난한 추적의 기록이다. 그것은 5억 년 전 눈도 코도 없는 동물로부터 시작되어 눈과 입, 턱과 뇌를 지니는 동물로 변화하는 진화적 사건들과 그것들을 촉발한 자연의 선택압들, 그때 이러한 선택압에 대응하여 변이를 만들어내고 적응케 하였던 유전자와 세포들, 유전자 네트워크, 그리고 사회적, 문화적 환경이 가한 선택압에 대한 복잡하기 이를데없는 유전자 조절 시스템의 기능과 역할, 작용을 탐사한다. 고생물학에서 시작하여 생물의 본질인 유전자와 세포의 기능과 역할, 그 구조와 형태의 발현에 이르는 진화론적 이론들과 증거를 파헤치고 추정하며 규명한다. 생물학적 진화의 그 꾸밈없이 자연스러운 우아함과 완벽함의 과정을 따라가며,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게 된다.

 

1장에서 4장에 이르는 얼굴을 만드는 유전자와 유전적 기반, 발생학적 이론들의 어려움을 겪고 나면, 그야말로 5장에서 10장에 이르는 흥미진진한 얼굴의 진화역사와 얼굴 형성에 작용하는 정신적, 사회적 역할을 통해 오늘의 우리들 얼굴이 품고 있는 그 풍부하고 다채로운 생물학적 의미는 물론 역사성과 사회성의 의미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된다. 이 책의 논지, 즉 지향점은 인간의 얼굴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거들기 위한 형태로 진화했다는 것으로 압축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문장은 척추동물 문에서 그 하위 계통인 포유동물 아문으로 분지하면서 영장류인 현대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인 호미닌의 진화에 작용한 힘을 시사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눈도 코도, 얼굴이 없는 동물이 눈과 턱, 이빨이 있는 얼굴을 지니게 되는 5억 년이란 긴 시간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 진행된 진화 과정에서의 유전자의 기능과 역할을 보는 것은 이후의 진화적 사건을 이해하는 과학 지식의 토대를 제공하고, 다시금 두뇌와 사지(四肢)가 발생하고, 그 생성에 작용하는 유전자 기반을 이해하는 것도 쏠쏠한 생물학적 유전학에 대한 배움의 기회가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지금, 우리들이 하고 있는 얼굴의 형태가 지닌 함의(含意). 왜 다른 포유동물들은 주둥이가 앞으로 길게 튀어나와 있는데 유독 인간을 비롯한 호미닌 계열의 종은 주둥이가 퇴화되었을까? 하는 질문이나, 왜 얼굴에서 털이 사라졌을까?, 한 쌍의 눈과 입, 작은 턱이 대칭으로 구성되고, 이마를 지니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수직적인 평면에 정면을 보도록 모아져 있을까? 의 물음에 대한 경이로운 응답이 바로 이 책을 가득 채우고 있다.

 

형태상의 차이점들은 진화적 변이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징후이자

변이가 구체적인 형태로 실현된 것이다.”

 

인류가 하고 있는 지금의 얼굴에 이르는 데는 놀라운 다양성을 가진 모든 복잡한 유전자 조절 시스템의 진화를 통한 발현이 있다. 진화 과정은 어떤 계획에 의한 제작물의 일사천리식 조립이 아니다. ‘어설픈 땜장이의 작업’ 처럼 기존의 유전적 장치의 일부를 차용하고 조정하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생산하는 시행착오의 반복이다. 실패하면 자연계에서 버려지고, 성공하면 남아 후손에 그 형질을 전달하면서 살아남아 지속되는 적응의 존재들이다. 침팬지는 눈 위부분이 뒤로 경사면을 이루어 이마가 거의 없다. 반면 인간은 이마가 앞으로 튀어나와 얼굴 전체의 수직면 상부를 이룬다. 뇌 특히 대뇌피질의 발달 때문이다. 대뇌피질의 발달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주둥이의 퇴화도 단지 입으로 사냥감을 묻어 뜯을 일이 없어졌다거나 나뭇가지나 풀로부터 눈을 보호하려는 이유만이 아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네 개의 다리가 아닌 이족 보행과 앞발의 손으로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손의 사용으로 턱과 입의 형태가 돌출될 필요가 없어진 것이고, 이러한 선택압은 유전자의 돌연변이, 형질 변이를 통해 점진적으로 축소되었을 것이다.

 

주둥이의 퇴화는 눈이 정면으로 모이고, 손에 자유를 주었을 것이다. 이로써 감각 수신 정보는 더욱 입체적이 되었고, 손은 사회적 동물인 조상 호미닌들의 몸짓과 손짓이라는 의사소통의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집단 구성원 간의 상호작용의 증대는 정보의 해석과 활용을 위한 신경계의 증가를 압박했을 것이며, 이는 다시금 두뇌의 크기를 증가토록 하는 압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의사소통의 증대는 단지 눈과 코와 턱의 조정과 손의 사용만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닐 것이고, 얼굴에 있던 털이 제거된 일부 종이 성선택에서 유리한 혜택을 지니게 됨으로써 변이 형질로 폭넓게 채택되었을 것이다. 털이 사라지고 드러난 입과 눈을 통해 보다 선명하게 상대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됨으로써 이는 의사소통을 더욱 증진시켰을 것이며, 두뇌의 신경세포들과 연결망 확장의 강한 선택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마 언어의 사용과 뇌 규모의 물리적 한계에 이르면서 지금의 얼굴 형태로 안정화되었을 것이다. 이 간략하고 거칠게 표현된 인간 얼굴의 진화과정은 일관되게 하나의 현상으로 향하고 있다. 얼굴은 의사소통 시스템으로 진화하는 정신적 능력의 되먹임 과정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유전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저자 애덤 윌킨스는 앞서 언급했듯 인간의 얼굴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거들기 위한 것이었다는 강조처럼 사회적 두뇌가설 동물의 문화적 진화를 기반으로 인류 진화의 비밀을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새롭게 야기된 상태의 등장, 이 상태가 세대를 넘어 지속된다면 이를 생명체의 고정된 부분으로 만드는 돌연변이를 위한 선택압이 되어 유전되고, 결국 표현형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지금의 인류 얼굴은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한 적응의 필연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얼굴 의식이라는 개성과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동요인을 말한다. 이러한 의식은 인류 역사에서 아주 최근에 새롭게 획득된 특성으로써, 사회적 정보 교환을 위해 얼굴 인식이 증가했음을 그 방증으로 세우고 있다. 즉 문화가 지속적으로 성장함으로써 더 많고 다양한 사회적 접촉이 발생하고 이러한 되먹임은 얼굴 의식을 더욱 성장하고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아울러 얼굴 이미지의 과잉시대가 된 현대사회의 얼굴에 대한 관심의 증가를 말한다.

 

, , 입술, 턱에 이르는 미용 성형의 증가라는 자신의 매력을 높이기 위해 얼굴에 물리적 변화를 가하는 최초의 동물로서 인간의 얼굴에 대한 집착을 성찰하기도 한다. 이에 더해 세계화의 물결 속에 민족적으로 다른 생김새를 한 사람들의 이동은 이들 교배라는 상호작용을 통해 점점 균질화되어 아마도 아시아인에 가까운 생김새로 수렴될 것이라 예측하기도 한다. 결국 민족 집단의 차이들을 만드는 표현형 요소도 감소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민족 집단에서 타자의 다른 얼굴들을 구분할 줄 안다. 아마 70억 인류의 얼굴은 쌍둥이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모두 다르다. 이러한 다양성의 존재 이유는 물론 차이의 인지 능력 또한 적극적으로 선택된 진화의 산물이다.

 

인간의 유전자 총 개수 21천개 중 단 32개면 70억 인간이 모두 다른 얼굴을 가질 수 있는 증식 가능성과 조합 능력을 우리들은 지니고 있다. 정말 경이로운 것은 겉모습은 전부 다르지만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인간이 가진 수없이 다양한 얼굴은 바로 이러한 잠재된 엄청난 유전적 능력의 소산이다. 그저 이 신비로운 자연선택의 과정에 경탄을 내지를 밖에 없다. 인간 개개인 모두의 존엄함의 생물학적 표현이라 해도 될 것이다. 얼굴은 한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대표하는 신분증이다. 그 어떤 타자도 이 뚜렷한 개성을 지닌 얼굴을 대신할 수 없음이다. ‘자네 얼굴 한 번 보여주게.’라는 말은 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드러내 보여 달라는 주문이다. 이 품격 있는 인간 진화의 책은 바로 인간 삶에서 얼굴이 이렇게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된 것에 대한 집요한 탐구이다. “인간의 얼굴은 자신의 감정 상태를 광범위하게 표현 할 수 있도록 매우 정교하고 민감하게 진화한 도구라 할 수 있다.

 

획득 형질도 동물 행태의 변화에 기여하는 진화적 힘일 수 있다.”

 

이제 라마르크의 개선된 후성 유전에 대한 설명으로 야기된 하나의 돌발 상상으로 감상을 마쳐야겠다. 발생 생물학자 C.H. 와딩턴은 환경에 의해 발생한 새로운 발달 변화들이 새로운 요구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형태를 바꾼다면, 그래서 적응적 가치를 가진다면, 발달적 변화들이 자동적으로 일어나게 만드는 돌연변이를 위한 선택압이 있을 것이라며, 새로운 행동들이 유전적 변화들을 위한 선택압을 만들어내, 이 변화들이 새로운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형태변화를 촉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싶은 기대를 하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성형을 하는 인간 집단의 세계에서 그 행동들로 인해 변화된 얼굴 형태의 유전자 변이가 발생하고 세대로 이어질까하는 상각이었다. 일견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행동이 유전자 변형의 선택압으로 작용했으며, 진화의 적응 산물이라면, 즉 동물의 문화적 진화도 하나의 선택압으로 작용한다면 왜 후성 유전이 안 된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하는 상상이었다. 과연 자연은 이러한 인위적 인간의 행동에 어떤 적응으로 화답할지 모르겠다. 미래 인류의 얼굴은 정말 균질화 될까?

 

인간 얼굴의 진화를 담은 이 책의 현실적 실익은 무엇일까를 계산하는 독자들은 그 이해판단을 멈추어도 될 것이다. 영장류 진화의 기간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런 진화의 연속적 사건들을 발생시킨 다양한 선택압과 아울러 사회적, 정신적 요소들이 얼굴의 신체적 진화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천기누설에 가까운 이 성찰적 연구 성과를 읽게 되면, 우리 인간 사회는 물론 인간 개체에 대한 더할 수 없는 관대함과 애정이 솟아날 것이다. 우리의 얼굴은 사회적 소통의 촉진을 위해 진화되어왔다, 바로 그 산물이 우리들의 얼굴이다. 미래에 민족적 다름이 감소하고 인류가 균질화된 얼굴의 형태를 지니게 된다면 비과학적 용어인 인종이란 언어의 멸실과 아울러 보다 사회 응집력이 촉진되는 세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추세가 지속된다면 인류라는 집단 구성원들의 생존을 높이는 변화가 될 수 있을지를 생각게 된다.

 

수없이 증가하는 사회적 소통망(SNS)의 증가는 표현력의 증대를 가져오면서 그 상호작용의 증가만큼 갈등의 골도 깊어졌다. "사회성이 사회성을 부른다."고 했지만, 그 사회성이란 것이 인간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기적 자기 강화과정으로만 작동한다면 인간의 얼굴은 지금까지의 진화의 동역학을 폐기하고 다른 선택압, 단절의 선택, 분열의 선택을 또다른 선택압으로 인식하지 않을까? 과연 어떤 얼굴이 미래 인간의 얼굴이 될까, 자못 궁금해진다. 이 흥미진진한 인류 진화의 미스터리로 독자들을 적극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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