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플들, 행인들 을유세계문학전집 7
보토 슈트라우스 지음, 정항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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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 엘프리데 엘리네크와 함께 20세기 독일 문학예술의 삼두마차로 불리던 보토 슈트라우스(1944~)사랑, 고향, 문학, 회상이라는 네 가지 주제의 연작 형식의 에세이다. 202482세의 노령에도 신작을 발표할 만큼 창작활동이 활발한 인물이다. 작가의 성향은 그의 글 속 한단원의 문장으로 대신한다.

 

낙오자들이나 폭도들 또는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 이들은 아직도 정상적인 기준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경찰이 친히 나서서 냉정함이라는 사람의 전략을 근거로 두들겨 패서 정상적 기준 속에 처넣어야 되지 않겠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겠어, 저절로 그렇게 될 텐데. 삶이란 그런 것이다.” - 차량의 강물, 105쪽에서

 

이 문장은 굳이 해석하지 않겠다. 보토 슈트라우스는 이라는 에세이에서 완성된 모든 글은 작가가 자신도 예견치 못한 순진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그 누구도 예외없이 쓴 글에는 작가의 정체성이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쓰고 있다. 자신만은 이를 회피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듯 말이다. 그런데 그의 생각들인 이 에세이에는 딸기가 수북이 담긴 쟁반 위에서 가장 좋은 딸기만을 주워 담고 남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식의 체리피킹(cherry-picking)의 얄궂음을 보게 된다. 그는 예술비평 담론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영락한 자기중심적인 소박함이 아주 진부한 말들로 견해를 주도하고 있다. (...) 예술 작품을 비판적인 사용 가치에 따라서만 면밀하게 검토하고, 주관적인 관련성이나 천박한 사회비판주의의 검사대 위에서 평가하는 악습은 예술이 가진 자유로운 상징적 기본 질서를 어느 정도 침해한다.” - , 117쪽에서

 

비평 담론은 싸잡혀 천박한 비판주의요, 영락한 자기중심적 소박함이며, 진부한 말들이고, 자유로운 상징질서를 침해하는 악습이 된다. 타인의 비판은 주관성에 매몰된 진부함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주관성만은 독자적 예술의 상징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러한 궤변을 천연덕스럽게 미문으로 포장하는 인격은 괴기스럽기조차 하다. 그런데 시인 옥타비오파스의 진정한 작가는 맨 먼저 자신의 실존을 의심한다. 문학은 누군가가 내가 말할 때, 내 안에서 말하는 것은 누구인가?’라고 자문할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기 성찰을 강변한다. 아무튼 자기성찰과는 거리가 먼 글을 쓰면서 자성을 옹호하는 이러한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을 대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일지 당혹스러움 속에서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독자를 생각해보라. 막대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읽기였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혹여 아주 작은 영감의 불씨라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보상의 기대심리 속에서.

 


1. 첫사랑, 첫키스, 도달 불가능한 강도의 경제학(economy intensive)’

- 감각의 제국, 최초의 황홀을 현재화하려는 그 파국의 형상을 중심으로

 

물론 긍정의 읽기를 한 순간이 있었으니 다행스럽게도 가장 분량이 많은 에세이 커플들들이 제일 앞에 수록되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이 책을 읽는 수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사랑은 등 뒤에 유토피아를 만든다. 이 보잘 것 없는 파트너 관계의 근원도 행복과 노래로 넘쳐나던 아득한 옛날에 있다. 그러나 시작은 이제 꽁꽁 얼어붙은 경직된 순간으로 바뀌어 (...) 꽁꽁 얼려 냉동된, 그래서 별로 영양이 풍부하지 않은 여행용 식량과 같은 바로 그 최초의 시기가.“ - 커플들, 9쪽에서

 

이 회상의 작가는 이후 그의 모든 글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이미 지나가버린 최초의 경험들의 절대적 환상,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흐릿한 기억의 감각을 야기한 시간의 흐름 속 부패한 사랑을 돌리려하는 인간의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을 말한다.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권태와 혼란 속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두 남녀의 모습에서 무미건조해진 사랑의 냉기를 그려낸다. 이어지는 글들에서 현대의 육체적 관계만 갖는 사이의 남녀로 이동한다. 마치 최초의 저 지나가버린 인생 1라운드의 열정, 사람을 흥분시키는 저 보존된 사랑의 흔적, 그 쾌락을 찾아 헤매는 애정 없는 사랑의 관계들로 귀결된 오늘을 비춘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새로운 기회들과 교류하고, 새로운 외적 자극들로 신속히 주거지를 바꾸는 오늘의 파트너들에게서 작가는 소망하는 것과 주어진 것이 항상 단기적으로만 일치할 수 있는 이러한 교류에는 약속된 결합은 생겨날 수 없을 것이라고, 오늘의 세태에서 숙고해 보아야할 현대 성애에 은폐된 의미를 묻는다.

 

순수한 성애가 사랑 그 자체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란 오직 광기라는 이미지 속뿐이다.”

- 커플들, 60쪽에서

 

그는 말한다. 우리는 가치나 규칙 또는 문화전체, 즉 형식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사랑의 기술, 섹스의 즐거움이라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도 사회적 제약이라는 밀실에 갇힐 수밖에 없다고. 때문에 이러한 현실 세계를 벗어나는 길은 광기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진술을 하는 보토 슈트라우스에게 놀랐는데, 지배질서의 어떤 영역에서 탈주하는 자들은 미쳐야 가능한 것임을 알기에 그의 이해와 공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시마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등장인물 창녀 사다가 자신이 살해한 애인의 왼쪽 허벅지에 새겨놓은 우리 두 사람 영원히라는 글귀에서 두 사람의 위대한 첫 만남의 황홀을 영원히 박제하려는, 1라운드의 무한한 육체의 시간의 소멸에 대한 반항의 행위로 해석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진 근본적 딜레마를 다룬 기초적 교훈이라고 말이다.

 

결국 보토 슈트라우스는 최초의 황홀이라는 지나가버린 쾌락, 되찾고 싶은 쾌락을 통해 회상의 감미로움, 회상의 미학(예술)을 말하고자 하였지만, 그의 의지를 넘어 욕망의 운동, 그 본질인 현대 자본주의 속성을 드러내고 말게 된다. 그가 수호하고자하는 현대자본주의의 영원한 성장, 영원한 혁신, 영원한 소비를 요구하는 욕망의 형식을 말이다. 첫 키스, 첫 사랑, 첫 혁명, 첫 승리, 첫 성적 황홀 등 이 예상치 못한 강렬한 경험은 두 번 다시 동일한 강도로 경험 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점점 더 강한 자극, 더 위험한 행위, 더 철저한 독점을 추구하고, 한 번 경험한 그 절대적 강도를 반복하려는 욕망은 결국 자기 파괴에 이른다. 그래서 보토는 욕망의 끝인 도달 불가능한 회상 재현의 욕망의 끝인 파괴를 읽어내지 못한다.

 

2. 시간의 물결과 진리의 관계, 비판담론과 지양(止揚)에 대해서

 

현대 사회는 욕망의 결핍으로 괴로워하는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이미지, 너무 많은 상품, 너무 많은 쾌락 가능성 때문에 고통 받는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 지점, 욕망을 억압하는 체제가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끝없이 동원하는 체제라는 점에서 인간의 욕망 운동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보토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감각의 제국의 두 연인의 광기는 잃어버린 최초의 황홀을 현재화하려는 시도이며, 이는 결코 충분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본주의 자기증식 운동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욕망의 형식이다. ‘>상품>더 많은 돈이라는 자본의 회로는 욕망>만족>더 큰 욕망이라는 욕망의 회로와 닮아있다. 여기서 감각의 제국의 비극성이 드러난다. 극단적 에로티즘과 극단적 자본주의는 둘 다 한계를 초과하려는 운동이다. 그 초과의 논리가 육체를 파괴하는 순간을 그린 현대성에 대한 우화가 바로 오시마 나기사가 의도한 영상일 것이다. 보토는 예술은 비판이어서는 안 되며, 미학적 기호, 유희에서 느끼는 쾌락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례로서 오기사의 영화를 설명하지만, 이 영화는 이미 사회 비판을 중심 의제로 삼고 있는 작품이기에 그는 분명 잘못 이용한 것일 게다.

 

大島渚(오시마 나기사)감독感覺帝國에서


그는 이 최초의 욕망의 강도에 대한 그리움, 회상을 말하면서 시간이라는 속도, 점증하는 가속화에 모든 존재는 전면적인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설파하면서 이 법칙을 벗어나는 그 어떤 것도 없기에 좌파의 세미나를 통해 발간된 무수한 책들이 몇 년 전 겪은 운명과 똑같이 서점의 계산대 한 모퉁이의 전문서적코너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고 증오의 말을 쏟아 놓는다. 그러면서 가장 철저한 진리조차도 잠시 머무는 하나의 물결에 지나지 않을 운명을 맞이하기에, 그 비판적 발언에 대중은 싫증을 느끼게 되고, 사회운동 역시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최소의 시도를 하기도 전에 스스로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라며 싫증은 우리 인간 문화의 절대적 지배자이기에 파국을 말하는 비판에 대한 관심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시점에나 정말의 파국이 찾아 올 것이라고 비판담론을 폄훼한다.

 

그런데 파국에 대한 관심이 존재하지 않을 때 파국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파국을 예견하는 목소리가 파국을 막는 것이고, 그 파국의 목소리가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파국이 발생하는 것이니, 파국을 말하는 비판담론은 헛된 것이 아니다. 비판을 고작 싫증, 염증, 피곤함으로 인식하는 사람의 자기 직시 회피, 비판을 거부하는 태도가 바로 파국을 가속화하는 사회일 것이다. 그래, 시간의 흐름은 많은 것들을 빛바랜 누추함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렇지만 그 시간의 풍화를 견뎌내고 여전히 진실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그러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과 미래의 삶에 지평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와 만날 때 계승하면서 동시에 극복한다라는 지양(止揚)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보수성을 비난한 적이 없다. 그저 이러한 지양 없이 몽매와 편협으로 과거를 붙들고 신봉하는 것을 보수라고 우길 때 그것을 나는 비판하는 것이다.

 

3. 문학의 몽롱함, 회상의 미학이라는 이면(裏面)

 

보토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술에 천착한 낭만적 고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렸던 19세기 독일 화가 안셀름 포이어바흐(Anselm Feuerbach: 1829-1880)를 설명하면서 그의 회화들에 대한 도피적 몸짓과 복고적 도취’라는 비평을 비판한다. 포이어바흐는 초기 산업사회의 비참한 시대에 등을 돌리고 인문주의 이상을 쫒은 진정한 창작 예술가라고 말이다. 비방하려면 예술분야 내의 진보주의가 지금보다 더 큰 의미를 지녀야만 할 것이라고 비평담론이 현재라는 시간을 탈피하지 못한 현재성에 얽매인, 곧 시간의 풍파로 사라질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것이라고.  이러한 비난은 정의롭지 못한 악의에 불과한데, 현재라는 동시대의 안목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그 어떤 담론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가히 절대적 상대주의의 궤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더구나 포이어바흐에 대한 비평은 매우 중요한 역사성을 지닌 담론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도 하지 않고 매도하는 글쓰기는 비열하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안셀름 포이어바흐가 현실 도피로서 그리스 로마제국의 예술을 소환한 것은 다분히 곧이어 다가올 훗날의 독일민족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폭넓게 세계지성들에 의해 비판받는 핵심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져 있듯 19세기 말 독일 지성인들이 그리스 로마 문화에 열광한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 즉 아리안 족의 순혈성(純血性)을 그곳에서 찾았기 때문이고, 그것이 곧 타자 배제의 전체주의 파시즘을 출산하는 정치문화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훗날 나치가 남긴 참혹한 인류 역사인 까닭이다. 보토는 나치에 대한 그리움, 파시즘의 복귀에 대한 회상에 젖어 비판 담론들을 천박한 비판주의라고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다. 누가 더 혐오스러운가? 나치의 폭력인가? 파국을 외치는 비평가들인가?

 

보토는 이런 얘기까지 쏟아낸다. 제기발랄하면 할수록 그 속에는 깊은 사고가 결여되어 있다. 이렇게 톡 쏘는 이성은 멍청하다.” 물론 재담들에는 무모와 편협, 우둔함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제기발랄의 이성이 모두 멍청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에 곰브로치의 소설 페르디두르케 무모하고 편협하며 우둔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깨어있고 섬세하며 정신이 예리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자기 논리 옹호의 문장을 인용하며 몽롱함은 중요한 가치라고 주장하고 나선다. 물론 모호성, 흐릿한 몽롱함은 문학의 전반적 기술의 하나인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몽롱함이 제기발랄의 톡 쏘는 이성의 멍청함과 대극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보토는 플로베르, 샤르트르까지 발췌하여 몽롱함을 그들의 무감각증, 기면증, 격정적 태만함과 비교하면서 마치 무슨 문학의 절대가치나 되는 양 자신의 회상의 미학을 포장한다. 보토의 회상, 명석한 기억이 아닌 몽롱하고 흐릿한 불분명한 기억으로서의 그리움, 자신이 자라난 옛 집이 있던 시절, 과거로의 회귀를 예찬한다.

 

현재의 열정을 비난하는 이 작가는 몽롱함은 모든 예술가, 특히 이야기꾼에게 있어서는 지각의 필수 불가결한 수단인 동시에 아주 가까운 주변의 매우 구체적인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현실회피와 과거 복귀에의 열망을 더없이 정당화한다.  브레히트의 희곡 억척어멈과 히치콕의 를 대비하며, 브레히트를 멍청한 이성으로, 또한 억견(臆見)으로 매도하며, 히치콕을 신화의 일부로서 이 땅의 순수이미지의 개가(凱歌)라고 말할 때 정신 비판 지능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극한에 이르러 있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보토의 신화에 대한 환상과 집착, 즉 과거의 흐릿한 전설에 대한 맹목적이다시피 한 애정은 그의 독일민족 순혈주의, 나치에 대한 그리움을 문학의 광휘로 덮어 쓰려는 기만성으로 비친다. 황혼/여명; Dämmer이라는 글의 한 문장은 캐리어를 안고 자신의 차 앞에 앉아있는 낯선 여자아이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에서 성적 향응을 받는 이야기 끝에 먹물을 온통 뒤집어 쓴 몽롱함에 의탁한 아래와 같은 기만적 언어의 향연을 펼친다.

 

인간의 성애와 그 문화는 신화의 저장고였다. 이 잠적해 있는 비밀스러운 존재들이 사는 고요한 신들의 세계, 피곤한 상태에서 사랑을 하려고 하는 지친 욕망은 때때로 신들의 세계를 들어 올려 우리에게 선사한다.” - 황혼/여명, 135쪽에서


음란함이 지배하는 인간 왕국을 신화화하는 글장이의 솜씨는 얼마나 교묘하게 세련되었는가. 이 글장이 극작가는 현재의 비판을 이렇게 신화라는 과거의 영예 속으로 침수시켜 그 더러운 죄악을 회상, 몽롱함이라는 신비의 심연 속으로 수장해 버린다. 여기에는 역사라는 것도 없고, 만일 이 글장이가 역사를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흐리멍텅해서 사실 또는 진실일 수 없는 모호함이 되어버려 부정될 것이다. 사실 이 40년이 지난 케케묵은 에세이를 읽게 된 것은 내 불찰이지만, 그 어떤 책이 의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반면교사로서, 아니 생각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유럽의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주류 예술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겠다.

 

옐리네크의 반대 자리에 있는 작가, 보토 슈트라우스로 인해 잊고 있던 오시마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을 다시금 복기하는 시간이 되었음은 작은 보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글을 한 마디로 묘사한다면 세심하고 주의 깊으며 발칙하기까지 한 인간 관찰자의 흉물스러운 시선이 느껴지는 불쾌한 관능이라고 해야 할까? “회상 자체는 다정하며, 정신적 승화의 선물인 것이다.”라며 고향집 란 강변 천 년 된 떡갈나무 옆에 있는 제국 직속 도시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며 회상에 잠긴 장면의 묘사는 얼마나 끔찍했는지. 급류에 휘말려 뒤집어진 보트로 인해 물속에 빠진 소녀를 비젠트 강변 둥근 바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이 사태를 거만하게 관람하던 남자(작가로 짐작되는)가 소녀를 건져 올리며 잠시 동안 중단된 소녀의 삶, 그녀의 어린 얼굴에 남겨 놓은 달콤한 공포를 즐기는 모습에서 파시스트의 모습을 떠올렸다면 너무 나아간 것일까? 아무튼 내 지평의 영역에 없던 글을 이렇게 예기치 않게 읽게도 된다. 몽롱함, 회상, 사랑의 광기 등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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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계 2026 5.6 - 신오적, 마피아를 해부하다! | 사상계 통권 212호, 재창간 7호
사상계 편집위원회 지음 / 사상계(잡지)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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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파시즘 사회에 놓인 과제들, 그리고 민주주의 장애물 신오적(新五賊) 해체를 위한 논의

 

2026년이라는 시대는 1970년 폐간 이전의 사상계의 논조와 다를 수밖에 없다. 냉전이데올로기에 기생하여 국민대중을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찍어 누르던, 폭력을 지배수단으로 하던 공포시대에서는 문자 그대로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저항 정신이 바탕이었다. 독재 권력이 횡행하던 시대에서 민주주의 기반의 사회로 이행했다는 관점에 비록 많은 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김누리 교수(중앙대 독일연구소 소장)의 말처럼 제도로서의 파시즘적 형태에서 비교적 건전한 민주주의 법제도로 이행되었으니 절반은 옳은 이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태도로서의 파시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닌 상태에 여전히 놓여있기에 이 사회에 비판 정신의 뿌리가 다른 것은 아닐 것이다.

 

수구란, 낡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대체로 외세와 영합하여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정파를 지칭한다. 한국정치의 비극은 좋은 보수가 없었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지형에서 사상계에 거는 독자들의 기대는 이 사회의 새로운 질서 구축을 위한 다양한 상상들에 기초한 요구일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를 깡그리 지워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이정옥(대구카톨릭대)교수와 김누리교수의 지적처럼 계승하면서 동시에 극복한다는 의미로서의 지양(止揚), 과거와 만날 때 지양하면서 현재와 만날 때 비판하고, 미래와 만날 때 상상해야 하는것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극복했다고 여겼던 파시즘, 권위주의와 독재의 잔재가 여전히 태도로서 잔존하며 이 사회의 온갖 누추함과 볼품없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권력비판과 자본비판이라는 성숙한 시민적 역량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절이기도 하다. 인간 역사는 바로 이 지양을 망각했을 때 벌어지는 야만의 출현이 없었던 적이 없었음을 입증하고 있듯이.

 

우리사회 민주주의의 장애물, 신오적(新五賊)의 해부

 

법피아, 검피아에서, 핵마피아, 종교마피아, 언론마피아, 재벌마피아에 이르는 우리 사회를 더럽히는 다섯 마피아가 온전한 민주주의 실현의 거대한 장애물이 되어 이 사회의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지체, 역행시키고 있다. 사상계 통권 212(2026.5~6월호)가 그래서 신오적(新五賊)의 실체를 꼼꼼하게 해부하여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국민대중의 현실의 직시를 돕고, 나아가 미래의 삶을 설계하는 토대로 삼고 있음은 시의적절한 기획이라 할 것이다. 사법부와 검찰의 행태와 그 역사적 기회주의와 파렴치는 구태여 거론하지 않겠다. 지면을 채운 글들은 아마 많은 지성인들이 이미 헤아리고 있는 바이니까 말이다. 특히 주목을 끈 글은 내가 알지 못했던 전력(電力)과 관련한 에너지 마피아에 대한 글인데, 매번 거론되는 한전의 거대한 적자 누증, 해마다 몇 차례씩 오르던 전기요금의 이면에 놓인 불의한 메커니즘을 비로소 직시하는, 내 천박한 에너지 문해력이 깨어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는 마피아 기본 작동원리이다.”

 

아마 우리들이 사용하는 전력의 상당량을 민간 전력사들이 생산하는, 다시 말해 사적이윤을 위한 기업들이 전기요금을 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대다수 국민은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1981년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이 특정 기업이 발전소를 건설하여 운영할 수 있도록 전기사업법을 개정하면서, 그리고 추가 개정을 통해 민간 에너지 대기업에 특혜적 지위를 공고히 해줌으로써 시작된 에너지 마피아의 탄생에 근거한다. 각설하고 그 핵심은 민간 에너지 대기업에 발전 설비와 일정 수익을 보장해주는 구조로 설계된 정경유착 요금 산정원칙의 토대인 무위험 수익 창출이 가능토록 만든 법률이다. 너무도 중요한 앎이라서 그 요금 메커니즘의 두 요소를 책에서 그대로 옮긴다. 계통한계가격(SMP)과 용량요금(CP)이라는 것인데, 민간발전재벌의 수익을 국민전기요금으로 보장해주는 정교한 법적 장치다.

 

“SMP는 전력시장에서 거래되는 전력의 시간대별 가격으로 그 시간에 가동되는 가장 비용이 높은 발전기(LNG 발전기)의 변동비를 기준으로 책정. 자신의 실제 발전기와 무관하게 이 SMP로 정산되기에 저()원가 발전기를 보유한 사업자에게 막대한 이윤을 남겨주는 구조이고, 용량요금(CP)은 발전소가 실제로 전기를 생산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전력거래소에 보고된 공급가능 용량에 따라 지급되는 고정 보상금이다.” - 에너지 마피아가 에너지를 죽인다, ()행복한동행이앤지 유치종 대표의 글에서

 

여기에 정산조정계수라는 더욱 모순된 구조를 더하여 한전과 한전자회사인 공기업은 만성적자에, 반면 민간대기업은 절대적 수익으로 환호작약하는 기현상이 40여 년간 지속되고 있다. 이익되는 것만 누리고 손실을 야기하는 것은 왜곡하여 배제해버려 순수 알짜만 누리는 체리피킹(Cherry Picking)의 형태로 공공의 혈세에 기생하여 수익을 약탈하는 실상은 가히 재앙적 쳬계임을 목격하게 한다. 이권 카르텔로 짜여진 회전문인사로 관료와 기업, 언론, 사법의 결탁으로 송전망 독점은 물론 탈원전 재생에너지 정책의 조직적 방해, 국가를 상대로 한 헌법소원과 행정소송 등으로 그악하게 사적이익을 국민혈세인 공기업에 전가하는 부조리는 당혹스러움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너무도 몰랐던 우리들의 무지, 무관심, 낮은 에너지 문해력이 몰고 온 참사이다.

 

이와 더불어 전력 과잉생산이 대규모 정전사태를 몰고 있다는 사실과 그 속사정도 국민들이 알아두어야 할 중대 정보일 것이다. 전력부족이 정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잉생산이 만들어낸다는 현실이다. 즉 단일 송전망으로 인한 과부하를 통제하기 위해 출력을 제한 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 전력 생산을 비롯, 가스와 석탄 발전의 출력을 제한하는 것인데, 이것이 해마다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의 출력 제한의 경직성에서 비롯된 전력수요 변화 대응에 고질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우라늄의 핵분열 수준을 인간이 원하는 만큼 즉시 조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까닭에 원전 출력을 감발하는 것이 유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너지 마피아가 에너지를 죽인다라는 ()행복한동행이앤지 유치종 대표의 글은 내 부족한 에너지 문해력을 기르는데 날카로운 자극이 되었다.

 

청정에너지, 저렴한 전력 생산원가를 주장하는 원자력 지상론자들의 거짓 주장들의 실체가 발가벗겨진다.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에너지의 오랜 갈등의 수면 아래 암약하는 원자력 마피아들의 그 끈질긴 자기이익 증대의 탐욕이 공공의 현실과 미래를 갉아먹고 있다. 212호 사상계는 이들 신오적의 해부만으로도 더불어 살아가는 오늘의 시민들에게 사회 정의를 향한 충분한 영감과 생각의 창고를 채워 줄 것이라 여겨진다. 언론이나 재벌마피아 또한 심대한 민주주의 장애이지만 더 이상 이들에 대한 부연 설명이 불필요 할 만큼 대중적 공감이 형성되어있으리라 생각되어진다. 심층적 내용은 책에 미룬다. 다만 신오적의 한 영역인 기독교마피아의 실체는 눈여겨 볼 새로운 이해를 제공하고 있기에 간략하게 약술해본다.

 

마침 병행하여 읽고 있던 책인 미국의 대표 역사저술가인 바바라 터크먼이 쓴 A Distant Mirror(먼 거울)14세기 중세 말이라는 탐욕과 폭력이 휩쓸던 야만의 시대에 이들 현상의 온상지였던 기독교의 망령됨의 복사판인 듯한 작금의 개신교 세력이 보이는 자본에 대한 탐욕과 언론의 선동, 사법권력의 비호 아래 벌이는 영적 테러리즘은 그 더러운 방식조차 닮아있음을 보게 된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 행동은 항상 반복 된다는 볼테르의 인간본성 불변에 대한 진술을 입증하듯 기독교의 파멸적 부패를 작동시키는 인간의 행태는 정말 변하지 못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인격과 삶을 파괴하는 테러리즘, 복음은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치명적 흉기로 사용되며, 타자를 향한 증오와 배제를 신의 명령으로 포장하는 주문(呪文)”으로 쓰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는 야만의 끝을 위해 질주하던 타락이 만연했던 중세 기독교의 판박이다. 아마 지금도 이단이라고 자신들의 도그마에 순응하지 않는다고 린치를 가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뻐젓이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이 해괴한 개신교의 막장 놀음판, 여기에 결탁한 언론과 사법 권력의 행태는 차마 눈뜨고 보는 것이 역겨울 따름이다. 이들 더럽고[], 그릇된[], 끼리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며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 사회 오적((五賊)들의 탐욕의 고리를 끊어내고 상서롭고 이로운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은 오늘 우리들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고집 세고 우둔한 벽창우(碧昌牛)의 주장이 강단(剛斷)이나 의기(意氣)

포장되어서도 안 되고, 명백한 오류의 왜곡이 있을 수 있는

다양한 견해의 하나로 용서되거나 포장되어서는 안 된다.”

- 서예가 김병기 선생의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현실의 비판 글에서

 

요사이 그릇된 역사관과 탐욕스러운 더러운 마케팅으로 왜곡을 일삼는 인간이 다른 견해의 표현일 뿐이라며 역사부정을 마치 정당한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모습에서 틀린 것을 다른 것이라고 호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저 틀린 것이고 잘못된 것이다. 사람을 죽였으면 그것이 살인죄이지 다른 다양성의 모습이라고 긍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5.18 광주시민혁명은 군부의 무고한 시민 학살에 대한 저항이었다. 시민의 무차별 학살을 한낱 돈벌이를 위한 장사치의 상업이벤트로 조롱할 수 있는 다름이라는 다양성의 소재가 아니다. 이러한 양태는 정치적 쟁투가 벌어져도 대자보 한 장 붙지 않는 오늘의 대학의 현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후기 파시즘 사회에 놓인 한국의 현실 - 우리 자신을 아는 것으로부터

 

그래서 우리나라 지식인들 다 어디 갔나요?”라는 끔찍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비판하는 지식인들이 보이지 않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냉소적 비판의 물음이 등장하는 것일 게다. 김누리 교수가 인용하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학자의 본분은 급진적으로 사유하고 급진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무관심에 근거한 침묵의 오리무중과 타협은 정치가들의 몫이지 학자의 몫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식이란 비타협적 비판의 역할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지식의 산실로서 대학과 학자는 사라지고 지위 획득을 위한 자격증 발부를 위한 지식생산 방법론에 매몰된 기능자 양성 공간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고작 양비론으로 기회주의적 눈치만 살피며 중용, 중도의 논설로 지식인입네 하며, 자기 정당화를 주장하는 위선적 지식인들의 무리가 침묵하고 눈감는 사회는 아무렴 정의로운 사회는 분명 아닐 것이다. 이정옥, 김누리 교수의 대담기록은 오늘 우리 사회를 냉철하게 돌아보게 하는 기획으로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남은 파시즘이다라는 브레히트의 경고의 말은 오롯이 오늘의 한국사회 우리들에게 전해진다. 한국은 군사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한 사회가 아니라는 진단은 뼈저린 반성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엄청난 착각! 진정 한국사회는 파시즘, 오랜 독재정치 사회를 벗어난 것일까? 아니라고 선언한다. 권위주의 문화, 군사문화가 청산되지 못하고 사회 전 부문에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12.3 계엄사태는 여전히 이 사회에 잔재하는 파시즘을 증거한다. 아도르노가 대표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후기 파시즘, 즉 한국사회와 같은 전기 파시즘 사회에서 후기 파시즘으로 이행된 사회의 네 가지 형태(특징)를 설명하고 있는데,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오적을 비롯한 기득권 카르텔과 이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사람들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 첫째는 자신을 무조건 강자와 동일시하는 성향이다.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사람들의 심리, 그들의 사대주의적 노예근성이 바로 이러한 강자동일시의 예일 것이다. 이의 거울효과이기도 한 약자 혐오는 그 둘째 성향이다. 약자 공격으로 돈을 버는 작태들의 만연, 선진국 중 유일하게 차별금지법이 없는 나라라는 수치스러운 사실이 그 예이다. 셋째는 폭력성의 미화. 깡패들이 싸우고 패는 부류의 영화들이 천만 관중을 끌어 모으는, 유독 폭력의 미학을 향유하는 대중의 취향은 파시즘의 내면화의 무의식적 발현일 것이다. 마지막은 동조강박이다. 어처구니없는 집단행동에 당당히 반대 의사를 밝히는 개인이 없는, 의사들의 집단적 이기적 행태에 대해 해당 집단 내에 어떻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인간이 없을까? 다수에 무조건 동조하려는 이러한 강박적 태도는 파시즘의 전체주의 성향을 청산하지 못한 우리 시대의 어두운 그늘이다.

 

스스로 우리들의 내면을 살펴 볼 일이다. 우리사회는 일찍이 보수라는 정체성을 지녀보지 못했다. 오직 사적 이익이라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탐욕과 폭력의 집단은 있었지만 진정 공동체를 중시하고, 역사를 중시하고, 문화를 중시하는 보수 정파를 갖지 못했음은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역사를 부정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며, 사대적 발상의 매판 기회주의자들은 보수가 아니다. 이제 수구를 정치 무대에서 퇴장시키고 합리적 진보가 등장할 공간을 위해서 민주당은 좋은 보수가 되어야 할 시간이다. 정식 복간되어 세 번째 출간되는 사상계 212호는 우리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준엄하고 냉철한 담론들과 논의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생각창고의 구실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물론 여전히 자리잡아가고 있는 과정임이 도처에서 드러나지만 응원한다.

 

인공지능 기반 전쟁이 만들어 낸 것(무책임과 증발된 정의)/ 패권이 사라진 공위기(空位期: interrgnum)의 세계 지형이 몰고 오는 것들

 

끝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침공 첫날 이란 남부 샤자레흐 타에베흐 여자초등학교에 세 차례 가해진 폭격으로 168명의 어린이와 14명의 교사가 현장에서 사망케 한 미 중부사령부가 사용한 인공지능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의 서두른 사용이 초래한 오류와 책임성에 대한 분석 논평인 문아영 피스모모 대표의 글은 인공지능 기반 전쟁이 만들어낸 새로운 윤리적 지형으로 인한 정의와 책임의 귀속 구조에 대해서 묻고 있다. 분산된 책임, 증발한 정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 차가운 군사적 용어인 부수적 피해라고 얼버무리는 국제규범 공백 사태에 우리의 시선과 사유가 오늘 어디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 일깨운다. 더불어 K-방산이라는 살상을 팔아 얻는 이윤에는 열광하면서도 그 살상을 통제할 책임에는 눈감아버리는 우리들의 윤리의식에 대해서도 반성토록 한다. 과연 이스라엘과 미국의 폭력, 무법적 폭력성을 비난할 수 있는지 되묻게 한다. 이러한 물음은 우리 정치사회의 폐쇄 조직의 하나인 국가안보분야에 대한 자성으로 이끈다.

 

국방,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법 바깥, 민주주의 예외지대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밀실 구조는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그것의 원천을 해체해야 하는 것 아닐까. 독립된 시민 감시기구의 설립을 통해 장막 뒤에서 그 판단근거가 무엇인지 투명하게 이뤄져야 12.3과 같은 퇴행적인 시대착오적 헌법 파괴적 행태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며, 권력의 안위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저질러지는 위험을 제거 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사회학자인 우에노 지즈코와 문화인류학자인 조한혜정의 상호 서신 교환을 통한 시대비평의 나눔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계속되어 온 잘 알려진 학문적 승화의 예이다. 그네들의 여성 정책 담론 또한 주목할 글이다. 또한 막무가내식 트럼프의 외교정책 행태인 일명 돈로 독트린(Donroe Doctrine)’으로 시작되는 미국 중심의 패권주의의 실체 분석을 통해 수렁에 빠진 패권주의적 종말의 실상에 대한 짧은 시사(時思)의 글도 이 세계에 끼칠 영향에 대한 개괄적 환경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아무쪼록 미래세대를 위한, 또한 문명 전환의 응답을 사유하는 시간이 되어주는데 손색이 없는 이 잡지는 많은 청년 세대를 비롯한 민주 시민 모두가 가정에 두고 짬짬이 읽고 작은 실천으로 이어지는데 분명 일조할 것임을 확신한다. 정말 좋은 사회의 구현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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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6-06-02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의 심금을 울리는 글입니다. 적극 동감합니다!

비의식 2026-06-02 12:22   좋아요 1 | URL
우리 사회의 도처를 갉아먹는 좀벌레들을 어떻게든 청산해야 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의 과제일 것 같습니다. 차트랑님 동감의 댓글 고맙습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 소나무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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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종과 선조 대의 두 사림(士林)간의 성리학 논쟁으로 사단칠정(四端七情)논변(論辯), 줄여서 사칠논변(四七論辯)’ 또는 두 사람의 호를 따서 퇴고(退高)논변이라 일컫는, 본체(혹은 실재)()’와 현상인 ()’의 근본이 하나인가 둘인가를 두고 나눈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서신집이다.

 

고봉 기대승은 이조 정랑, 승정원 좌승지,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공조 참의를 지냈으며 비교적 이른 나이인 46(1572)에 병사했다, 퇴계 이황 또한 성균관 대사성,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두루 지낸 사림의 거두로 70세에 노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두 인물의 나이 차이는 26, 아버지와 아들 세대의 차이이며, 고봉이 문과 을과에 1등으로 합격하던 1558년 명종 13년에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오늘날 국립대학 총장)이었으니 그 지위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았다. 이처럼 연령과 그 지위가 같지 않은 두 사람이 퇴계가 사망하는 1570년까지의 13년에 이르는 편지 일백여 통이 이 책이다. 이들 편지 글은 안부와 정사(政事)에서의 고충에 대한 서로의 위로와 조언, 정치적 처신에 대한 논의를 비롯하여,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이 바로 사칠논변(四七論辯)에 대한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비판적 논구(論究)의 글이다.

 

오늘날의 정치적 논쟁(論爭)’이 보이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싸움으로 인해, 두 대척하는 의견이 서로 상대의 주장을 거꾸러뜨리기 위한 말싸움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더구나 조선조 붕당(朋黨)의 폐해를 아는 우리들은 이 논쟁을 정치적 세력간의 싸움을 대리한 표면적 학문 싸움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때문에 성리학이라는 조선조 독자적 철학의 기초가 되는 학문연구의 기틀이었음을 간과하기도 한다. 모두 그 논변의 내용과 과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일 것이다. 나 또한 퇴계가 동인(東人)의 시조로 불리게 됨으로써, 특히 이 사단칠정 논변에서 비롯된 훗날의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극한의 대립이 조선 후기 동인과 서인의 참혹한 정치적 파당으로 이어진 것에 대한 무모한 책임을 덮어씌우는 어리석음을 면치 못하기도 했다. 사실 이 서신집을 읽기 전에 두 사람간의 연령과 지위의 차이로 인해 유교 질서가 팽배한 사회에서 이미 기울어진 논쟁이 아닐까하는, 즉 한쪽의 고압적 자세와 겸허 또는 굴종의 자세가 빚어내는 비정상적인 일방적 논의가 아닐까하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기우에 그치고 말았는데, 퇴계가 고봉에게 보낸 사단칠정을 이와 기로 나눈 변론(四端七情分理氣辯)에 대한 퇴계에게 보내는 반론의 글에 무릇 학자라면 자기 마음속에서 스스로 터득하려고 해야지, 한갓 이미 만들어진 이론을 대략 이해하고서 진리는 바로 이것일 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대찬 고봉의 지적 질을 보았을 때 이것이 그저 물렁물렁한 논쟁이 아니구나! 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렇다고 고봉이 퇴계를 한낱 논쟁의 상대로만 여긴 것은 아닌데, 깍듯한 예의와 겸양의 언어, 선학(先學)을 대하는 낮은 배움의 자세와 진심의 안위를 걱정하는 태도는 상대를 향한 공경(恭敬)이상의 덕목을 보여준다. 학문 연구자로서 고봉의 글은 날카롭고 준엄하지만, 일상의 인간관계에서는 더없이 겸손과 존경의 자세로 일관한다. 해가 거듭될수록 두 사람의 편지 내용은 정치적 동지이자 학문적 벗, 인간적 이해를 축적해 온 신뢰가 두터워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신뢰의 면목이 드러나는 글들이 있는데, 그대처럼 저와 지극히 각별한 사이에 있는 이조차 제가 해야 할 행동에 대해 너그럽게 헤아리지 못하니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관직을 받들지 않고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학문연구를 하고자하는 퇴계의 소망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정에 붙들어두려는 고봉에게 서운한 마음을 전하는 내용이다. 고봉을 칭하는 표현도 급제 후에 관직을 받기 전의 고봉에게는 기선달로, 그 후로 최초의 관직을 받자 기정자로, 이후 정3품 관직에 오르자 영공(令公)으로, 잠시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있을 때에는 고봉의 자()인 명언으로 부르며, 관직의 오름에 따른 칭호와 친근함이 더해진 자로 부를 만큼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그런데 또 한 번 고봉이 선의의 실수를 저지르는데, 그대는 아직도 나를 모릅니까?”라며, 퇴계 자신을 추켜세워 임금께 아뢴 고봉을 강하게 힐난한다. 앞으로는 사람을 보내 서로 안부를 묻는 일도 다 그만두어 주면 편하겠다는 절교의 편지를 보낸다. (물론 이 단교의 표현은 친근한 이에게 할 수 있는 화의 표현일 것) 이런 상황에서 임금에게 그 같은 말을 하는 것은 공정하다고 믿기 어려운 것 아니겠냐며, 고봉의 섣부른 행동을 나무란다. 두 사람이 얼마나 밀착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내용 중 하나이다.

 

위와 같은 해인 선조 원년, 1568년에는 퇴계가 고봉에게 영공께 아룁니다, 병환이 어떤지, 근자에 소식이 막혀 그리움이 간절하다는 편지를 보낸다. 두 사람은 서로 웃으며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라며 우스개 이야기도 전하고, 부채, 서책과 약, 꿩고기 등을 보내 마음 속 정성을 보내기도 한다. 사실 퇴계는 고봉의 정치적, 학문적 후견인이자 스승이었으며, 고봉은 퇴계의 학문적 벗이자 정치적 동지이며 자신의 부친 묘비 갈문을 부탁할 정도의 신망을 지닌 아들같은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두 사람이 주고받는 논변은 당대 고관대작들은 물론 유생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서신이었기에 이들의 편지는 여느 선비들의 것과는 다른 무게를 가진 것이었던 것 같다. 붕당정치의 싹이 자라기 시작할 즈음해서 정국의 혼란스러움이 더해지는 상황이 빈번하게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퇴계가 고봉에게 서신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은 당시 말 한마디가 생사를 가르는 살엄음판 같은 것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세대와 지위를 뛰어넘는 두 사람의 학문적, 인간적 우정의 깊이를 통한 삶의 고귀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그 품격을 완수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사단칠정논변으로 얘기를 이어가면, 그 발단은 이러하다. 사단은 이에서 발현되므로 언제나 선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현되므로 선악이 있다.”고 이와 기를 나누어 둘이 있다고 주장한 퇴계의 글이 온당치 못하다는 고봉의 논박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를 말하기 위해서는 성()과 정()에 대한 이해의 전제가 필요한데, 무릇 아직 발현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성()이라 하고, 이미 발현 된 것을 정()이라 하는데, 성은 언제나 선하고, 정은 선악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이치라는 데 두 사람은 의견을 달리하지 않는다.

 

여기서 고봉은 성과 정이 다른 까닭에는 네 가지 단서인 사단(四端;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과 감정인 칠정(七情: (), (), (), (). (), (), ())이라는 구별이 있을 뿐, 칠정의 바깥에 사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와 기를 나누어 둘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퇴계는 사단의 발현은 순수한 이이므로 언제나 선하고, 칠정의 발현은 기를 겸하므로 선악이 있다고고 고쳐 쓰지만, 이 역시 사단과 칠정의 연원이 다르다는 분리의 전제를 하고 있기에 불만스럽기는 마찬가지라고 논박한다. 무릇 이는 기의 주재자요, 기는 이의 재료라고 구분을 하지만 실제 사물에서는 완전히 섞여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고봉은 사단은 칠정과 다르지 않은 연원을 지닌 것으로 단지 발현되기 전의 성()일 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와 기는 그 연원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고, 퇴계는 이와 기는 다른 연원을 가진 둘 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이에 대한 세세한 철학적 논구들, 이에따라 부속되는 철학적 논변들이 이들이 5년에 걸쳐 주고받는 논변들의 내용이다. 그 철학적 함의들을 논구하는 것은 책에 맡기기로 하고, 두 사람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주의 깊게 상대의 논변을 연구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은 그네들 학문의 자세에서 오늘 우리들이 잃고 있는 것들을 상기하게 된다. 스승은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후학은 학문적 겸허를 잃지 않으면서 선학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가운데, 그 날카로움은 잃지 않으면서도 서로 배움에 성심을 다하는 모습이다. 최근에 그대가 찾아낸 서너 조항을 김이정이 전해주었습니다. (...) 비로소 제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옛 견해는 남김없이 다 씻어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주의를 기울여 라며 자신의 그릇된 이해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철회하는 퇴계의 학문적 자세는 숭고한 전율을 일으키기도 한다.

 

한편 고봉 역시 기운을 드러내고 변론을 마음대로 하여 남을 업신여기고 꺾어버린다는 자신의 고질병과 공부의 소홀함에 대한 경계를 다짐하거나, 선생님께서 꾸짖지 않으시고 이렇게까지 자세히 답해주시니, 제 평생 이보다 큰 은혜는 없었습니다.”라며 거듭하여 자신의 소견을 깨우쳐 주신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다. 나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는, 고봉의 사유에 귀 기울이는 편이어서 고봉 중심의 독해를 하였는데, 퇴계의 후학에 대한 성심의 인물됨을 발견한 것은 하나의 큰 수확이기도 하다. 이기이원론을 주장하는 후일 동인(남+북인)의 갈라치기, 그 분리의 원천이 되기에 붕당정치의 파멸성 이전에 고봉의 이기일원론의 사변은 오늘 다시 재고되고 심층 연구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사실 퇴고(退,)논변은 조선 중기까지의 훈구파에 대항한 사림간의 논구라는, 다시 말해 같은 왕권수호 세력의 일원이었기에 반목이 심하게 충돌하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중심주의적 이원론이 파기되고 객체지향의 존재론이라는 일원론적 모색으로 전환되는 오늘에 고봉의 일원론적 접근은 다시금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사유가 될 수 도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조선조 성리학 두 거두의 인간적 우애와 학문적 교감의 성숙된 면모를 읽어 볼 기회가 되었음은 내겐 예기치 못한 감응의 시간이 되었다. 인간 존재자를 비롯한 우주 만물의 존재 자체에 선악의 구별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것이 형체라는 보이는 것의 간섭과 마주치면서 비로소 드러나는 실체에 대해 구별하려는 인간의 습관인 것 아니겠는가. 고봉 사후 82년이 지난 1654년 효종이 고봉을 기리기 위해 월봉 서원을 내렸는가 보다. 언제 시간을 내서 한 번 찾아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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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5-21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도서네요. 조만간 저도 읽어보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비의식 2026-05-21 09:53   좋아요 0 | URL
퇴계의 후학에 대한 사랑과 존중에서 대학자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한편 강직함으로 인해 곤란을 겪는 고봉이지만 퇴계선생에게만은 깍듯한 품성에서도 선학에 대한 깊은 공경심이 묻어나고 있어요.
또한 두 사람의 사단칠정 논박을 비롯한 궁궐 예에 대한 글들은 그들 사변의 깊이와 폭넓은 독서와 지적 역량을 엿보게 됩니다.
호시우행님 댓글 고맙습니다. 당시 영남과 호남이라는 지리적 거리와 인편에 의한 서신 왕래라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그리움과 학문적 우애가 이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지요.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증거라 하겠지요.

차트랑 2026-06-02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고, 편지는 이퇴계 처럼, 논리는 기고봉처럼!!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글은 비의식님 처럼~!!

비의식 2026-06-02 12:32   좋아요 1 | URL
퇴계와 고봉에 대한 말씀에 공감합니다. 격려의 말씀은 황송스러운 마음입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세희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8
조해진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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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윤리의식 갱신을 위해,  우리’ 라고 부를 수 있기 위해

 

 


그들이 내게 들려 준 이야기는 고스란히 내 몸 안에 새겨져 있다.

숨이 멎는 날까지 내 피와 뼈에 저장된 그들의 이야기는 

단 한 줄도 분실되지 않으리라.”  -116

 

“‘우리세희, 함께 기억하기 위하여라는 조해진 작가의 말에 담긴 지향(指向)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록새록 깊숙이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우리라고 말하여야 하고 말 할 수 있는 사람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감히 타인이 껴안아야만 했던 고통의 내밀함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내 몸에 새겨지듯 치밀어 들어오는 관계성에 대한 배움과 적극적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일 게다.

 

한글 이름 세희는 화자인 미술평론가 남연주의 엄마, 스스로를 자이니치(在日)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일본에 사는 한반도 출신의 무국적자를 가리킨다. 일본명 미나가와 히로코, 어머니 아버지를 오마니, 아바이로 부르며, 히로코가 그저 몸에 맞는 옷이라면 세희는 보호막 같은 옷에 가까웠다고 말하는 일본에서 나고 자라 대학졸업 후 취업한 일본 회사에 협력 업체로 드나들던 한국 남자와 결혼하여 한국에 거주하게 된 연주의 엄마다.

 

“1940년대 후반 제주를 혼란에 빠뜨린 제노사이드를 다룬 신작을 발표하는 제이비 류라는 설치미술작가의 작품전과 작가 인터뷰기획을 취재하기 위해 도착한 영국 런던에서의 사흘에 걸쳐 마주하게 된 이방인으로서의 낯선 현실과 기억의 기록이다. 도착한 첫날 런던의 밤 거리에서 두 백인 남성이 연주를 향해 니하오가 담배를 피우고 있네, 칭챙총 칭챙총...”, 아시아인을 향한 이 명백한 조롱, 차가운 돌덩어리 같은 모멸의 감정이 스스로를 향한 분노로 치밀어든다. 그녀의 기억은 쪽바리, 매국노라며 저들끼리 웃어대며 슬픈 공포심을 안겨주었던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로 향한다.

 

1942년 원산에서 오사카 항만공사 인부로 강제 징용되어 온 부모에게서 태어난 엄마 세희는 자이니치로 분류되어 사실상의 무국적자이었으니 단 한 번도 일본 사람이었던 적이 없음에도 한국의 이웃들은 끝없이 악의적 뒷담화로 조롱하고 멸시했음을. 아무 잘못이 없어도 내력이 죄가 되고 죄로 수렴되는한국에서의 삶, 엄마 세희를 향한 이 시선들은 국가의 무능과 잘못을 어느 순간인가부터 피해자인 개인을 향해 마치 개인의 허물인 듯 바라보도록 한 권력의 오랜 세뇌였을 것이다.

 

엄마 세희의 아바이, 연주의 외할아버지 박태식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간부로 북한을 저버리고 일본에 귀화하는 자이니치들을 경멸하는 사람으로 딸 세희를 검정색 치마와 흰색 저고리를 입고 다녀야 하는 민족학교를 고집했다. 일본 사회에서 이 뚜렷한 복식이 그네들에게 어떤 반감을 불러일으켰을지 상상하는 데에는 조금의 어려움도 없다. 무관심으로 가장된 경멸, 어린 소녀에게 그 시선과 무례에 대한 반항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무서움과 서글픔이 섞인 혼탁한 외로움은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의 무게가 되었을 것이다.

 

여섯 살 위 스물두 살의 오빠는 고집스런 아바이에게 세희는 원하는 삶을 살게 해주자고, 자신이 졸업하면 북송사업에 지원하겠으니 세희에겐 그 무엇도 강요하지 말자는 설득으로 고등학교부터는 일반 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고, 그러나 미나가와 히로코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지만 자이니치는 그저 조센진일 뿐, 교실에서 물건이 없어지면 무조건 오세희가 제일 먼저 용의자로 지목되는 차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엄마의 말, 그 기억이 런던에서 이방인으로 겪게 되는 자신의 모멸과 겹쳐 흐른다.

 

어린 시절 엄마의 손을 잡고 자주 찾던 북촌에서의 남녀 두 어른과의 만남, 서정우 선생님, 선생님의 아내 기쿠치 사치에 센세는 엄마 세희와 어느 곳에서도 이방인이어야 하는 서로의 삶을 위무하는 그런 관계 맺음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나 자이니치에게는 공무원도 기업 취업의 문도 봉쇄되어 빠칭코 매장의 매니저로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던 선생님과 엄마 세희의 만남의 사연, 자이니치를 위한 시위에선 늘 맨 앞에서 구호를 외쳤던 전사나 다름없었다는 엄마의 얘기를 떠올린다. 이처럼 연주는 엄마의 영혼을 구성하는 입자가 단 한 번도 그녀의 곁을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기 전 암 투병 중 마지막 말처럼 연주에게 남긴 말, 우리 오마니와 아바이, 그리고 오빠를.... 잊지 말아줄래?” “잊지 않아...” 아바이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북송선을 타고 이북으로 간 오빠의 죽음에 대한 부모에 대한 원망, 자신을 위한 오빠의 희생이라는 죄책감과 더불어 결혼 이후 자기 부모와 단절한 삶을 살았던 엄마와 일본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 오사카 이쿠노구 골목에 있는 첫 외갓집 방문에서의 다감한 외조부모의 따뜻한 정감을 떠올린다. 엄마가 죽고 난 이후 치매로 요양원에 살고 있는 외할머니의 방문에서 연주 자신을 발견하고 세희야, 라고 부르는 외할머니, 오세희를 연기하는 연주가 그 연기가 어렵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은 이미 연주가 오세희를 자신의 몸에 완벽하게 새겼기 때문일 것이다.

 


해방 이후 왜 일본에 있던 한반도의 사람들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을까? 국적 없는 이들의 필요서류 작성 불가, 받지 못한 노임으로 무일푼으로 당장 살아가기조차 곤궁한 이들의 처지, 설혹 밀항으로 고향을 찾아 떠났지만 일경(日警)을 승계한 한국 경찰의 무조건의 사상범 취급과 갖은 고문 끝에 길거리에 내버려져 다시 남루하지만 돌아가야 할 곳이 일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들이 이어진다. 제이비 류, 한국의 성씨인 류가 드러나는 인물과의 인터뷰는 그의 가계에 대한 이야기 속 할아버지 류성철의 이야기로, 해방 후 돌아간 고향 제주를 지배하던 광기어린 살의, 이승만 독재정권이 도민 모두를 심판과 처형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던 시대를 들려준다.

 

사랑하던 연인이 해안가 절벽에 무참하게 뭉개져 매달린 시신으로 발견된 사연, 그녀의 시신을 몰래 매장했다는 사유만으로 숨어 지내야 했으며, 그를 숨겨준 사촌이 살해되고, 돌아간 집에는 이미 끌려가 처형된 부모의 소식만이 고통스럽게 나뒹군다. 한국이라는 사회가 그 어떤 다름도 수용할 수 없이 극단적인 전체주의의 독단성을 띰으로써 살아갈 수 없는 지대였음의 한 조각의 기억이다. 일본계 영국인 제이비 류의 가계는 그렇게 우리와 무관한 듯 보이던 사람에게서 우리들이 지워버리고 방치한 역사 속의 관계를 드러낸다.

 

엄마 세희가 단절했던 외조부모를 다시 찾게 되었을 때, 엄마는 연주에게 말한다. 외삼촌의 죽음에 부모의 오판을 끌어들이지 말라고, 그것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역사와 국가 차원의 문제였다고.”, 내가 부모님과 화해하지 않는다면 딸 연주에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모르는 상태로 자라게 함으로써 그분들의 사랑을 받을 기회까지 빼앗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고멘네(ごめんね, 미안하다)라고. 낯선 일본 땅, 그치지 않는 차별과 멸시 속에서도 그곳을 떠날 수 없이 묶인 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국가 공동체와 역사가 떠안아야 할 책임의 문제임을 증언한다.

 

연주, 그녀를 부르는 선생님, 센세, 외할머니의 욘짱은 그렇게 "알지 못하던 이국의 그들이 자신의 뿌리이자 가족이었음을, 아니, 바로 그녀 자신이었음을" 몸에 그려 넣는다. 한 덩어리 배신감만을 안기던 조국은 그들을 내치기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끌어안으려 하지 않았음을, 이 작품은 우리 공동체가 너무 쉽사리 타자로 치부하는 존재들에 대해 그들이 바로 임을, 그래서 그들의 기억이 바로 우리 몸의 기억임을 되살려내고자 하는 것일 게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 우리라고 말 할 수 있는 공감을 향한 치열한 노력이어야 하는 것임을. 우리의 역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조차 가능치 않게 하는 그런 불온한 시간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이 어찌 개인이 떠안아야 할 시선이고, 배제되어야 할 이유가 될 수 있겠는가.

 

그 이야기들이 내 몸 안에 새겨져 있으며, 단 한 줄도 분실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연주의 목소리는 바로 우리들의 것임을 외면할 수 없다. 자이니치(在日) 뒤에 동포, 교포를 붙이는 건 민족개념으로 제한된 배제의 표현이고, 이어 한국인을 붙여 쓰면 고국 분단 이전의 북한 출신을 제외하는 표현이기에 자이니치(在日)’로 규정하는 것만이 자신들의 올바른 규정이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볼 것이다. 우리들의 언어, 무심한 시선과 행동에 얼마나 많은 차별과 배제를 담고 있는가, 결코 우리들의 몸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이 흔적들을 우리는 공유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역사적 고통의 재현은 제아무리 완전을 지향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초월의 폭력성을 모두 담아낼 수 없다. 그래서 현재의 언어로 환원할 수 없는 고통의 실체에 대한 우리네 윤리적 자기 한계에 대한 고뇌는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일 게다. 제주 4.3의 가공할 잔악한 폭력, 자이니치가 겪는 이중의 차별에 놓인 또 다른 폭력의 시선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빼곡하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모두 주워 담을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들은 어떤 지배 이데올로기에 압도되어 냉담함과 잔인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이렇게 하나의 서사를 통해 거듭 새롭게 우리들 윤리의식을 갱신해야 하는 것일 게다. 그래서 감히 우리라고 말 할 수 있기 위해, 아니 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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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5-17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만으로도 그 처절한 서러움과 서글픔이 묻어나는 것 같네요. 소설이지만 결코 소설이 아닌 아픈 현실이네요.

비의식 2026-05-17 14:50   좋아요 0 | URL
네, 잉크냄새님. 오늘 우리들이 망각하고 있는 것을 이렇게 환기하는 이유는 그 기억이 바로 타인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기억임을 새롭게 하려는 것일 겁니다.
우리의 부모세대들, 그리고 여전히 재일민들은 참 악랄한 폭력의 시대를 살아왔어요. 국가폭력을 미화하려는 것들이 지금도 발호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역사의 기억을 망실하는 바로 우리들 공동체의 책임일 겁니다. 저는 작가 조해진이 천착하는 이러한 역사기억의 꾸준한 환기는 결코 중단될 수 없는 것임에 동의하고 있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의 실존 모델이 있는 까닭일까요....
 
초한지 인생 공부 - 오만과 냉정 사이, 천하를 가른 심리전 인생공부 시리즈
김태현 지음, 사마천 원작 / PASCAL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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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내면에 꿈틀대는 야수적 정신(animal sprit)이 표출되는 실체의 현장을 보는 것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것이 설령 반복되는 읽기여도 내 영혼은 그 적나라한 광경들에서 예기치 않은 삶의 지혜라는 수확을 건져 올리게 된다. 초한(楚漢)쟁투, 항우와 유방을 비롯한 걸출한 인물들이 발산하는 그 동물성과 그것의 미묘한 절제와 절충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빛나는 인간 존재에 대한 한 걸음의 이해는 지금 여기서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세상과 인간들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지대를 열어 보여준다. 사마천 사기(史記,의 변주된 이야기들인 초한지가 바로 그러한 이야기다. 이 책 초한지 인생 공부는 그 이야기들의 또 다른 관점에서의 해석이다.

 

인생 공부라고 하지만 지은이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면 이 책은 2,200년 전 초,(楚漢)이라는 시대적 무대를 거대한 전장이기 이전에 인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충돌하는 심리의 실험실’”로써, 인간학의 문법과 존재의 교과서라는 표현이 오히려 적절할 것 같다. 인간 욕망과 권력의 미묘한 충돌, 혼란과 안정기의 두 다른 체제에서 변화하는 인간의 모습들, 리더의 태도와 자질이 빚어내는 인과의 상황들로부터 인간 존재의 무수한 갈림길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우리는 목격할 수 있게 된다.

 

초한지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토대로 하여 초한충돌 시대의 이야기들을 모아 각색한 이야기다. 따라서 기원전 3세기 중원의 역사를 말한다는 것은 곧 사기(史記)의 역사를 재구성, 해석하는 작업일 것이다. 이 책은 역사적 사건과 대사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기반하고, 문학적 장면 묘사는 서한연의(西漢演義)를 인용하여 저자가 오늘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생존과 존엄, 권력과 사랑 사이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인간들의 내면 심리에 관한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이미 이 시대의 역사와 영웅들에 대한 내용은 사마천의 史記本紀史記世家》 《史記列傳을 통해, 그리고 장편소설로 재구성된 서한연의(西漢演義)의 무수한 아류본(亞流本)들인 초한지등을 통해 잘 알려져 있으며, 더구나 장국영, 공리가 열연한 첸카이거(陳凱歌) 감독의 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로 익숙한 것이다. 또한 파부침주(破釜沈舟), 배수진(背水陣), 성동격서(聲東擊西), 사면초가(四面楚歌),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토사구팽(兔死狗烹)과 같이 비근하게 우리들 일상에서 사용되는 이들 성어(成語)들로도 전투(심리)전략, 인간 본성, 정치 책략 등 배후의 의미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학(人間學)이라 불릴만한 하나의 집적된 관점으로 이들 역사 속 인물들을 통해 상황의 변화에 따른 인간의 면모를 통찰할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오늘의 언어로 수려하게 한 시대의 역사 전체를 조망하는 관점에서 들려주는 이 책은 빠져들 수밖에 없는데, 아무렴 바로 우리들이 실제로 이 세상과 인간들의 관계에서 겪게 되는 경험들의 다채로운 형상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지극히 협소할 때 읽었던 사기(史記)속 인물들과 그들의 행적은 그저 서사적 흐름이 주는 이야기의 재미와 흔한 교훈들을 주워 삼키는 것에 불과했던 것 같다. 이제 인간사에 대한 경험이 제법 싸인 지금, ()의 수도 함양을 복속시키고 난 후 승리의 축연 자리인 홍문연(鴻門宴)에서의 항우와 유방, 그네들의 책사 범증과 장량의 언행이 역사 행방에 얼마나 중대한 전환적 사건이었는지를 새삼스레 곰곰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 과연 내가 항우였다면, 유방이었다면 어떤 결단을 내렸을까하고 상상의 자리에 참석해보기도 한다. 절대적 힘의 우위에 있다고 여겼던 항우의 미적거림과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을까? 유방처럼 대담하게 자신의 죽음의 장소에 참석할 수 있었을까? 엄청난 우위의 힘을 가진 항우 앞에서 나는 어떻게 닥친 위기를 넘겼을까?

 

지금 죽이지 않으면 후일 반드시 화를 입을 것입니다. (불자,약속개차위소로, 不者,若屬皆且爲所盧)” 라는 책사 범증의 말을 항우가 아닌 나라면 어떻게 수용했을까? 이 말은 훗날 항우를 포위한 역전된 상황에서 홍구화약(鴻溝和約)으로 일시적 휴전에 합의함으로써 다 잡은 항우의 숨통을 트여주려 할 때 양호자유환(養虎自遺患)’, 호랑이를 길러 스스로 화근을 만드는 것이라는 유방 책사의 말로 변주되어 반복된다. 여기서 우리네가 빈번하게 망각하는 자성(自省)과 경청의 중대함을 발견하게 된다. 리더의 본질은 말하는 힘이 아니라 듣는 힘이라는 것, 즉 리더는 귀가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권력을 장악한 이들이 보이는 행보를 보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운 일방적 말만 쏟아내는 현상을 보게 된다. 절대 우위 의식이라는 오만은 항상 실패를 몰고 온다. 폐쇄된 소통과 열린 소통, 이보다 보편적 진실의 감각이 어디 있겠는가.

 

진을 복속시킴으로써 천하를 쥔 항우가 측근을 챙기고 잠재적 적들을 고립시키는 사실상의 정치적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험준한 산맥에 가로막혀 중원으로 나오기 힘든 파촉(巴蜀)지역 한중(漢中) 땅을 다스리는 한왕(漢王)으로 밀려나는 유방의 처지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을 품게 될까. 책사 장량의 권유에 따라 지나온 잔도(棧道)를 불태워 오가는 길을 막아버리는 행위 속 정치적, 전략적 의미를 헤아리는 것도 쏠쏠한 흥미로움이다. 홍문연에서의 항우의 행위에서 드러나듯 그는 타인의 조언을 자신의 완벽함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자기애적 인물이다. 그 심리를 꿰뚫은 유방의 책사 진평의 이간계(離間戒)는 사마천이 성인의 경지에 오른 지략가로 평가한 책사 범증과 항우의 사이를 갈라놓는데 성공한다. 귀가 닫힌 자는 곧 눈도 먼다.”는 이 평범한 진실이 사실로 입증되는 현장이다.

 

절대적 힘의 우위에 대한 환상, 과거의 승리에 집착하여 상황 변화의 유연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폐쇄된 소통으로 고립되어 자만에 빠지는 실상들은 우리네의 일상 환경에서 즐비하게 목격되는 현상이다. 한미(寒微)한 집안 출신의 동네 건달이었던 유방이 대귀족 금수저 출신의 항우를 몰락시키는 것은 그네들의 출신성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람에 대한 태도, 상황에 대한 전체적 인식의 여부, 즉 겸허와 오만, 듣는 이와 말하는 이의 차이가 갈라놓는다.

 

하급 창고관리 병사에 머물던 한신의 출중한 전략술을 감지한 유방의 탁월한 행정책임자인 재상 소하의 수차례에 걸친 천거에 유방은 그를 대장으로 임명한다. 이때 한신의 확신에 찬 비전과 항우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의 언급이 그 까닭이 될 것이다. 항우가 준 땅이 아니라 백성이 주는 땅을 차지하십시오. 그러면 천하는 대왕의 것이 됩니다.” 소하가 유방에게 한신을 천거하며 했다는 말을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평생 한중의 왕으로 남으려 하신다면 한신이 필요 없겠지만,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서는 이 일을 도모할 사람이 결코 없습니다.” 사기열전》〈회음후열전

 

유방은 한신에게 중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관중 땅의 정벌을 명한다. 여기서 한신은 그 유명한 동쪽에서 소리 내어 주의를 끌고 서쪽을 격퇴한다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함정을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으로 변모시켜 가짜 행동 뒤에 숨겨진 진짜 기동의 전략적 의미를 보여준다. 잔도 수리에 적의 시선을 모아 놓고는 험난한 우회로를 통해 관중의 중심인 진창(陳倉)을 기습 점령하고 연이어 삼진을 평정해버린다. 유방이 얼마나 신이 났을까. 연이은 승리의 동력으로 유방은 한신과 함께 제나라 반란에 출정하여 빈집이 된 항우의 초나라 수도 팽성을 공격, 무혈 입성하기까지 한다. 손쉽게 얻은 승리(성취), 이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임을 다시금 목격하게 된다. 신중하고 절제를 미덕으로 하던 유방이 순간적으로 승리에 도취하여 절제력을 상실하고 상황을 방기하고 만다.

 


팽성 대전, 훗날 항우가 자결하는 초한(,)의 마지막 전쟁인 해하전투만큼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다. 제후국들과 연합한 유방의 56만 대군에게는 급하게 비보를 전해 듣고 달려오는 항우의 정예기병 3만은 가소로운 것이었는지 모른다. 항우가 초패왕(楚覇王)이라는 천하의 군웅으로 이름을 얻게 된 거록전투에서 보인 타고 온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부수고 막사는 불태우고, 식량은 사흘치만 남긴 채 돌아갈 길은 앞길만 있다고 적에게 쇄도하는 파부침주(破釜沈舟)’의 결단은 실로 가공할 만한 심리 전술이라 할 수 있다. 항우본기에 사마천은 팽성대전의 참상을 세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나라 죽은 병사가 10, ()나라 군대가 영벽 동쪽 수수(睡水)까지 추격했다. 10만이 모두 수수로 빠지니 수수의 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 자연의 섭리마저 거스르게 했던 참혹함의 이 생생한 증언만큼이나 성공의 도취가 부르는 참사에 대한 경계의 교훈은 없을 것이다.

 

팽성의 참사와 동일한 유방의 실기로 형양 공방전이 있는데, 팽성의 참패는 유방 연합군의 와해 움직임을 초래한다. 위나라 위표가 배신한 것인데, 이것은 유방의 미래전략에 대한 큰 상처가 되었을 게다. 이를 급히 봉쇄하지 않으면 연합군의 연쇄적 이탈을 초래할 시발이 될 것이기에 한신을 좌승상으로 임명하며 위표를 칠 것을 명한다. 한신은 여기서도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술책을 감행한다. 위표의 주의력을 황하(黃河)나루에 집중시키고 정예부대를 이끌고 은밀히 상류로 이동, 뗏목을 타고 위의 수도 안읍을 기습, 위표를 생포함으로써 관중과 형양을 잇는 북방 제후국을 격파하는 교두보의 확보와 아울러 연합세력의 이탈을 방지하는 효과를 얻은 것이다. 적이 성동격서의 잘 알려진 교훈을 왜 망각하고 대비하지 못하는 반복된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일까? 바로 교만이다. 수적, 지리적 우위에 대한 자만이 이 뻔한 인식을 하지 못하게 한다. 인간의 우매함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방은 여기서도 반복된 실수를 하는데 형양성 함락의 승리로 다시금 도취되어 방어를 소홀히 한다. 형양은 항우의 초군에게 틈도 없이 완벽하게 포위되어 탈주의 희망이 사라지고 있었다. 기신이라는 충신의 자신이 유방 대신 죽겠다며 변장을 통한 탈출 양동작전으로 구사일생 형양 포위 망에서 벗어난다. 사마천은 기신의 행위를 사기열전에 기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충신이어서? 제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인물을 알아본 예지력 때문에?, 생명의 희생이 전달하는 인간의 고귀한 정신을 위해서? 나는 잘 모르겠다.

 

초한 전쟁의 가장 안타까운 인물은 한신임을 쉽사리 떨치기 어려운 데, 분노를 복수로 쓸지, 삶의 미래 설계를 위한 동력으로 쓸지 인간 존재의 방향을 가늠할 줄 알았던 냉정의 미학을 실천한 차가운 이성의 두뇌를 가진 인물이 왜 결정적 순간 자기 삶의 주체로서 행동하지 못했는가에 곤혹감마저 들게 하는 장수이기 때문이다. 내 단순한 결론은 유방이나 항우와 같은 동물적 영혼을 그는 수없이 압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야수적 욕망의 표출 말이다. 한신의 내면, 특히 감정을 규율로 구조화한 인물이라는 저자의 평가는 참신하고 탁월한 해석으로 여겨진다. 감정의 파도를 지적 구조로 재조립하여 이성의 설계도로 만들어 낼 줄 아는 인물임에도 공이 커질수록 증가하는 권력자의 의심 속에서 장수가 스스로 자신을 지킬 방법을 냉정하게 구축하지 못했다는 것은 더욱더 그에게 동물적 감각이라는 야수적 충동의 표출 능력이 없었다는 심증을 강화시킨다.


한신은 많은 성어(成語)와 관련된 주인공이다. 이미 언급된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은 물론 배수진(背水陣), 토사구팽(兔死狗烹), 또 하나의 역사적 전투인 조나라 정벌에서 벌인 정형(井陘)전투에서의 전략이 바로 배수진(背水陣)이다. 사실 항우가 앞서 보인 파부침주(破釜沈舟)와 유사한 전술이다. 당대 전술에는 금기인 도망칠 길을 스스로 끊는 것은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어리석은 방책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전장 자체를 하나의 무대로 계산한 치밀한 전략의 결과라는 점이다. 패배할 줄 모르는 전쟁의 신, 한신은 조나라의 격파에 이어 연과 초와 국경을 맞닿은 제나라까지 복속시키고는 유방에게 제나라의 가왕(假王)으로 봉해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 임시왕 봉책의 사건은 한신의 소심함을 드러내 보여주고, 이 요청의 서신을 받은 유방의 불쾌함에서는 공적에 대한 인색함, 언제 적으로 둔갑할 줄 모르는 증대하는 힘에 대한 의심을 보게 된다.

 

가장 주목해서 골똘히 생각하며 읽게 된 장면은 이로 인한 한신이 겪는 갈등의 본질을 드러내는 그의 책사 괴통(蒯通)과의 대화이다.

충성으로만 스스로를 지키려 하면 훗날 의심이 덮칠 때 구원할 논리와 힘이 없게 됩니다. (...) 제나라 땅은 전리품이 아닙니다. 이곳의 풍부한 경제기반과 병참의 지속성은 대왕을 지탱하기에 충분합니다. 반역을 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냉혹한 안전 설계입니다. ()왕은 겉으로 기뻐하나 속으로는 이미 의심하고 있습니다.

 

전승의 결과로 높아진 명성이 최고 권력자에게 곧 죄로 비칠 수 있음의 지적이고, 현실권력의 의심 앞에서 스스로 지킬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없다면 곧 죽음으로 돌아 올 것이라는 말이다. 사실 결과론적으로 우리는 역사를 알고 있기에 괴통의 진언은 인간사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라고, 그의 말을 듣고 초()와 한()과 제()의 삼분지계(酸三分之堺)를 형성해야 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한신은 자신이 유방에게 충성을 다한다면 괜찮을 거라고, 수동적 무능성에 좌초되고 만다오 애재(哀哉)라, 토사구팽(兔死狗烹)은 인간사 만고의 진리인 것을!

 

이것은 한()의 제국통일, 즉 적이 사라진 제도화된 국가의 정비 안정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대들은 모두 토끼를 잡는 사냥개와 같소, 소하는 그 사냥개들에게 토끼가 어디 있는지 알려준 사람일 뿐이오.” 라는 유방의 말처럼 모든 공은 한순간에 사냥 도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유방의 행정 책임자인 소하의 말처럼 왕의 신뢰는 언제나 경계와 함께 오는 것이며, 충성은 언제나 의심의 그림자 속에서 증명되어야 하는 것.” 이라는 이 깨달음의 음성은 어떤 조직이던 그 수장과 수뇌부와의 관계에 내재된 보이지 않는 인간학의 보편 법칙일지도 모른다.

 

권력의 절정은 언제나 낭떠러지와 맞닿아 있는 것이라는 인식 하에 권력자의 의심을 처리하는 태도와 방책들의 모범이랄 수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귀중한 지혜가 되어 줄 터이다. 소하와 실행의 결은 조금 다르지만 형식과 체면보다 생존과 실리를 중시하는 책략가 진평의 권력자의 의심을 흡수하는 피뢰침같은 태도는 꽤 호감을 자아낸다.

 

승상, 내가 다스리는 나라가 과연 평안하겠는가?

폐하의 마음이 평안하시면 나라 또한 평안해집니다.

 

모두가 좋다 하는데, 승상만 말이 없구나.

모두가 좋다 하면 그 안에 분명히 허점이 있을 것이옵니다.

 

승상은 참 이상하오, 내 마음을 읽는 듯하오.

폐하의 뜻이 곧 천하의 뜻 이옵니다.“ 사기세가》 〈진승상세가

 

왕과 승상 진평의 이 대화 장면은 왕이 자신을 통제한다고 느끼게 하면서 실제로는 왕의 감정을 조율할 줄 아는 자의 가히 우아하기까지 한 조용한 통치의 예술을 보여준다. 침묵과 순응 속에서 왕이 폭주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제동장치로서 역할, 칭송도, 간언도, 조언도 없지만 미묘하게 안심되는 진평의 대답에는 언어의 온도를 낮추어 안정의 언어로 돌려주는 신묘함이 있다. 충성과 처세의 경계선, 권력의 미세한 줄 위를 걸었던 회색지대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생존기술과 불안한 제국을 다스렸던 인물들을 이렇게 읽다보면 마치 세계의 한 지대를 달관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

 

조직의 리더로서, 권력자로서, 때로는 권력의 전략가로서, 인간사의 한 지평으로서, 어떠한 태도가 우리들의 삶을 보다 안정적인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척도들의 집약된 한 편의 탁월한 실험 사례라 해도 될 것 같다. 그래, 인간 본성,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왔을 때의 상황은 이미 많이 변한 것이다. 그 상태에 따라 우리에게 다른 태도와 기준이 필요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 당위를 망각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상황의 인식, 듣는 귀에 대해서, 언어의 온도에 대해서, 그 균형 감각을 되새기는 아무쪼록 의미 있는 독서가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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