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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ㅣ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평점 :
상상의 공간에서의 위치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실체감을 지닌 ‘내’가 느끼는 위치로서의 ‘자리’로 체감되는 것의 규명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 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라고 여겼던 것이 문득 불편과 불쾌로 가득 차올라, 그것을 명료하게 하여야만 이후 삶의 균형 감각을 찾을 수 있다고 강하게 느낀 까닭이다. ‘장 아메리’의 시간이 축적된 몸, 세계 신뢰의 배신감에 몸을 떠는 이 책, 『늙어감에 대하여; 체념과 저항 사이에서』 ‘그것’의 실체를 찾을 수 있으리라며 읽었다. ‘죽음’에 관한 인류의 영원한 고전을 쓴 블라디미르 장(얀)켈레비치가 있다면, ‘늙어감’의 가장 진솔한 사색은 장 아메리의 몫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라.
“최초의 일격으로 이미 뭔가를 잃어버린다. 뭔가라는 게 무엇인가? 일단 세계에 대한 신뢰라고 해 두자. 바로 그걸 잃게 된다.”
- Jean Améry, 《죄와 속죄의 저편; Jenseits von Schuld und Sühne》
그래, 돌연 일격을 당했으며, 지금 내가 점유하고 있다고 여겼던 자리, 그 공간의 불안정성을 느끼게 하는, 잃어버린 그 ‘뭔가’의 실체를 발견한 것이다. ‘살아낸 시간(temps vécu)'인 바로 나의 실존감, 그 주관적인 시간이라는 절박한 문제가 내 인식에 불현 듯 등장한 것이다. 이 책은 어떤 생물학적 혹은 물리적이거나 사회학적 이론 탐구서가 아니다. 누구나 지각할 수 있는 직관과 정서적 사색이다. 그 누가 감히 ’늙어감‘을 현학인 체 떠벌릴 수 있다는 말인가?
“시간을, 시간 그 자체를, 온전히 따로 떼어낸 시간을 이야기 할 수 있는가?”
-Thomas Mann, 《마의 산; Der Zauberberg》
1. 늙어가는 몸 - 살아낸 시간
시간은 흐르며, 스쳐 지나가고, 흩날려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과 더불어 사라진다. 대체 시간이라는 게 뭔지 자문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모든 게 그저 시간과 더불어 훅 불려 날아가듯 사라져버린다는 것일 뿐이다. 시간은 객관적인 그 어떤 정형화된 묘사가 불가능한 전적으로 인간 저마다가 작자 홀로 소유하는 측량할 길 없는 상대적 감각이다. 정밀하게 이해하려는 지성의 노력을 뼈아플 정도로 비웃는 게 시간이다. 빨리 지나가기만을 조바심으로 안달하는 젊은 날의 좋은 시간이 있는가하면, 어느 한 순간도 떨 칠 수 없이 소중해서 마냥 느리게 가기를 기대하는 사형수의 나쁜 시간도 있다.
창창한 미래를 앞에 두었다고 여겼던 젊은 날의 시간은 왜 그리도 풍족하게 생각되었는지, 시간을 말하는 자들의 입을 쳐다보지도 듣지도 않았었다. 지금의 자리에 대한 이 권태감과 불편함의 실체, 아니 그 감정을 유발하는 근인(根因)이 바로 이 시간의 발견이었다는 것이다. ‘늙어가는 자’의 감각, 과거의 무게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을 맞이하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양 놀라 당혹스러워 하는 것이다.
게르망트의 대저택에서 환상에 몰입하여 ‘되찾은 시간(temps retrouvé)'으로 기억을 음미하는 프루스트는 글을 쓸 때 시간의 지향성을 이미 깨달은 늙어가는 자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시간에 이토록 직면하기 주저하는 것의 본질과 하나씩 하나씩 대면하고 있다. 나는 늙어가는 자임을 승인한다. 장 아메리가 적시하는 사실들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론 바로 내가 직면한 현실의 사태임을 부정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늙어가는 이는 미래를 공간의 부정으로 경험하고,
이로써 실제로 일어나는 일의 부정으로 경험한다.” -38쪽에서
맞아, 미래는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자 세계인 까닭에 그토록 세계로부터의 소외를 느꼈던 것이다. 자리에 대한 불쾌감, 공간과 장소의 불편함은 다가 올 미래가 이 세계와 단절감의 연속임을,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불가항력의 숙명임을 알았기에 그랬던 것일 게다. 한때 인생이었던 것, 공간이었던 것이 이제 그저 시간뿐임을 깨달았기에 헛된 자기 연민으로 안타까워했던 것일 게다. 이제 공간인 세계를 내게서 떠나보내야 함을 안다. 시간이 되기 위해, 내 자신이 되기 위해, 그러나 나는 저항한다. 비록 살아낸 시간, 그 안에서만 살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는 세계 속에서 타자의 눈치를 보고, 그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에서 벗어나 시간인 내 안에 홀로 있고 싶은 충동이 뻣뻣이 고개를 쳐든다.
2. 나 아닌 나, 낯선 자아와 세계 추방
세계에서 자리를 잃은 늙어가는 자는 살아있음의 무의함으로 매일 저항의 광기 언저리로 내몰린다. 어쩌면 위안을 찾을 방도를 찾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뒤늦게나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나서는 것, 살아온 시간, 시간이 된 내 몸인 이 존재에 대한 물음인 인생의 의미라는 가짜 물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 게다. “시간을 두고 성찰하는 일은 곧, 인생을 두고 경악하는 인간의 작업“임을 처절할 만큼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은 늙어가는 가는 자임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장 아메리는 늙어감의 의도적 부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늙어감의 충격과 혼란, 체념과 저항에 깃들어 있는 사실들을 직면케 함으로써 타협? 아니, 마지막 시간에 이르기까지 분열되는 자아의 봉합과 안정을 위한 균형을 마련하는 것이다. 젊음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거울을 보며 돌연 낯설게 느껴지는 내가 ‘나 아닌 나’를 바라보는 그 충격의 순간을. 나아닌 나가 평소 익숙했던 나를 문제 삼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 젊게 느껴져”라는 의식 한 층의 속삭임이 절정의 시절 이끌고 다니던 외적인 나와 상관없어 보이는 형상에 경악하는 것이다.
타인이 되어버린 거울의 자화상, 자신을 실감하라는 이 운명의 심판에 아연실색하는 것이다. 얼굴이 세계의 부분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세계에 속했으며 나의 얼굴은 나 자신인 동시에 세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낯설기만 한 얼굴은 더는 세계로 향해진 게 아니라는 것, 세계로부터 추방당한 얼굴임을 제시한다.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동시에 자신이 된 이 역설이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되어, 자기 소외와 자기 신뢰 사이의 불협화음 속에 지치게 한다.

건강을 잃었을 때에만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이 말이 진부함을 떨쳐낼 수 없듯, 뭐 대단한 진리는 아니지만, 어떤 ‘느낌’을 갖는 다는 것은 그리 즐거운 감흥이 아니다. 온전한 건강을 누릴 때는 이 ‘느낌’이란 걸 가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 바깥에 머문다. 세계라는 공간(자리)에서 떼려야 뗄 수 없이 자아와 맞물려 있는 까닭이다. 늙어가는 자는 갈수록 이 세계를 잃어가는 ‘나’가되며, 정신과 몸의 기억을 끌어모은 과거로의 시간이 되고, 갈수록 ‘몸’ 그자체가 된다. 이제 몸은 한때 세계를 매개해 주던 그것이 더는 아님을 깨닫게 된다. 아니 오히려 세계와 공간을 나에게서 막아버리는 장애물이 되었음을 인식한다. 이 “몸이 바로 인간인 내가 지닌 가장 지극한 진정성”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생명의 권리를 담보하는 것은 결국 몸임을 절실하게 깨닫는 까닭이다.
나는 세계에서 후퇴해 굴욕을 주는 공간으로부터 이탈해 자기 방에 은거한다. 세계이자 사회인 세상은 의학치료와 악의적 농담들을 지어내며 청춘노인이라는 모순된 부조리한 언어로 윽박지르지만, 꼿꼿한 자세와 건강함을 과시하라는 이런 가짜 논리들이 늙어가는 사람에게 세상이 등을 돌린다는 사실을 반박하지는 못한다. 정신 승리하는, 마치 늙음을 무슨 지고의 정신적 경지처럼 설레발치는 자들을 본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무슨 정신적 자아, 사유실체는 연장실체인 몸과 다른 양 헛소리들로 엮인 공갈말로 채워진 책들로 노익장?을 과시하지만 늙어감이라는 오로지 몸이라는 실체만 남아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님을 기만하는 것일 뿐이다. 빌어먹을 위장, 더럽게 아픈 다리, 이렇게 몸을 ‘비(非)-자아’로 폄하하며 대항하려 하지만 허리를 곧추세운 진정한 사유실체로서의 자아라는 것이 과연 따로 있겠는가? 늙어감, 본격적인 진리가 밝혀지기 시작하는 과정이 열리는 고통 축제의 시간으로서 이렇게 세계로부터의 소외, 자기 부정으로 그 실체를 알려온다.
세계에서 퇴장을 강요하는 늙어감에 대한 이 부정이란 달리 표현하자면 타인의 시선으로 정의되는 나임을 우리가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돌 숭배가 사회의 지배적 흐름인 시대 분위기 탓에 시대는 물질의 생산과 성장, 경제적 요구를 재촉하며, 이 강요된 흐름은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닌다. 세계와 재산은 타인과 그 소유여부를 놓고 끝없이 다툼을 벌일 때에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는 늙어가는 자에게 미래의 신용을 더는 인정해주려 하지 않으며, 나아가 미래 자체를 인정해주지 않으려 한다. 사회는 절대 앞으로 뭐 할래? 라고 묻지 않는다. 늙어가는 자는 깨닫는다.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제까지 시도해왔고 포기한 일의 총량일 뿐”이라는 것을, 이것이 남은 세월을 결정한다는 것을. 타인의 시선이 늙어가는 자에게 측정해주는 사회적 연령의 굴레에 갇혀있다는 것을. 이미 해낸 일을 헤아려 무게가 재어진 늙어가는 인간은 심판을 받은 것이다.
인생 2막? 가소로운 얘기다. 2막이란 1막을 단지 재조명하는 것으로 반론 혹은 대답으로서의 행동이란 차원이지, 이미 심판된 것을 넘어서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지만 각자의 지평선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으려 시도하면 정신병자, 광인 취급을 받기 시작한다. 세계가 저주를 퍼붓는다. 얌전하게 있으라고. 하지만 살아있는 한 세계 단절의 요구를 거부하고 저항하며 막판까지 결판을 내야만 하는 싸움, 가진 모두를 내건 도박의 시도를 거둘 수 없다. 나는 어떻게 균형을 찾아야 할까? 나는 거듭 제자리를 향한 자리의 이동, 공간에서 퇴장, 세계로부터의 퇴출을 수용하지 못한다.
3. 소유의 세계가 강요하는 사회적 연령의 굴레
이 세계는 인생 방향의 선택을 소유의 영역으로 설정하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소유의 세계임을 부정할 수 없다. 가진 게 없다면 사회적 나이 먹음이라는 과정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실존도 인정받지 못하는 쓰라림을 곱씹게 하는 세계이다. 아무것도 벌어들인 게 없다면 신분을 가지지 못한 무명씨에 지나지 않는다. 고작해야 다락방에서 눈물 젖은 빵이나 씹는 천재일 따름이다. 소유사회는 개인의 자율성을 무력하게 만든다. 소유해야만 한다는 압력 아래 개인은 타인의 시선 앞에서 자신의 뜻을 펼쳐나가는 자기만의 전망을 추구하는 인격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소유의 이정표에 맞춰 인생의 방향을 잡도록 강요된다. 소유가 존재를 규정하는 세계인 것이다. 이 마수로부터 벗어나려 하거나 소유를 키울 경제적 수단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시장가치를 수집하지 않는 개인에게 사회의 빈자리나 지키라고 심판한다. 자신을 새롭게 기획해보려는 이탈자, 아웃사이더를 허락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 우리의 잠재력은 세상 전체이며 모든 공간이었다. 툭 터진 공간이 펼쳐져 있었기에 그 공간이 모두 자신의 공간이라 믿었다. 그러나 가진 게 별로 없이 근근이 존재할 따름인 인간에게 사회는 일찌감치 사회적 연령을 정해버린다. 사회적 연령은 곧 마주하는 ‘현실’ 그 자체다.
소유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자신을 구축하는 일에만 몰두하느라 황폐해진 늙어가는 사람은 돌연 사회가 그에게 요구한 것에 자신을 맞춘 정도에 국한 된 사회적 연령을 부과받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타인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 새로운 자리를 향한 떠남의 여정이 가능할까? 나는 기어이 세계가 강요하는 시선에서 탈주할 것이다. 나는 아직 체념할 수 없어 저항한다. 그렇다고 늙어감을 저지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자기기만을 그 어떤 순간에 이를 때까지 계속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는 이것이 나의 고유한 자아 균형이 될 것이라고 결심한다. 나는 사회가 은근히 체념하도록 몰아붙이는 사회적 실존의 죽음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밤이 이미 시작되었을지라도 말이다.
왕성한 정력을 자랑하는 어느 기업총수, 학문적 담론의 영향력을 뽐내는 어느 학자, 정치적 권력을 발휘하는 정상급의 연로한 인사들의 사회적 연령을 말하며 그들은 여전히 늙어가는 자들이 아니라는 무식한 소리도 들려온다. 세계는 그들에게 사회관리의 기술로써 맞춤의 자리로 이용하는 것일 뿐, 그 노인들에게 과연 젊었던 시절의 그 광활한 삶의 공간, 의미 충만한 인생이 남아 있기는 할까? 황혼의 노년, 청춘을 사는 노년이니 하며 드라마, 광고에서 떠들어대지만, 그 늙어가는 자들의 공간은 기껏해야 나무랄 데 없는 양로원에 불과할 것이다. 이들의 배후에는 한창 빛나는 지성을 자랑하는 우수한 젊은이들의 떠받듦이 있을 뿐이고, 노인들은 점잖게 시치미를 떼며 아직 젊은 체 할 뿐이다. 저명한 교수는 이미 지적인 능력에서 서른 살 조교에게 추월당했으며 단지 채집한 명예의 학위를 자랑할 뿐임을 눈가림할 따름인 것을,
늙어가는 것은 결단코 아름답지 않다. 젊은이가 바라보는 노인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반감, 존경으로 위장된 반감, 이 빛바랜 인습의 공경은 아무것도 아님에 대한 두려움의 반감이다. 그 의미 없는 늙음이 존재로 밀고 들어오는 저항으로서의 반감. 이러한 반감은 젊은이의 노인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늙어가는 자들 동년배에 대한 반감은 마주하는 늙음에서 읽히는 존재 부정의 표시에 대한 거리감에서 오는 반감이다. 박수갈채를 받았던, 무명씨로 살아왔던 모든 인간은 늙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세계로부터 해체당하는 것이다.
감히 늙음의 긍정을 설파하는 자들, 긍정적 태도, 품위 있고, 불평하지 않는 노인, 젊음과 더불어 젊게 살자!, 인생은 예순부터! 이 기만적 구호들은 세계로부터 배제하면서도 불변의 존재라는 정장을 강제로 노인들에게 입히며 소비경제 주체로서 착취의 대상임을 잊지 않는다. 늙음을 바라보는 긍정적 태도? 그래, 일말의 편안한 기분은 줄 것이다. 그렇다고 늙어감의 파괴라는 본질을 가릴 수는 없는 것이다. 타인이 늙어가는 자를 바라보는 시선 안에 녹아있는 부정이 바로 자신의 문제임을 알아차리고 몸을 일으킨다. 결코 실행 할 수 없는 일을 하려 과감하게 떨쳐 일어나는 것, 아마 진정 품위 있게 늙어갈 유일한 가능성이자 기회일 것이다.
4. 결어 - 문화적 소외, 그리고 늙어감의 체념과 저항의 양면성
늙어가는 자는 이 같은 몸의 노화인 자기소외, 사회적 연령이라는 세계배제의 소외와 더불어 문화적 소외도 겪는다. 젊은 시절의 유행, 기억으로 구성된 각자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철지난 유행은 새로운 신호로 가득한 현재의 표시체계들의 해석에 곤혹스러워 한다. 자신의 해석은 과거라는 관계의 지점에서 새로운 현실이라는 시대의 관계로부터 해석을 알지 못한다. 교양을 쌓지 않은, 혹은 공부하지 않은 늙어가는 자는 낯섦의 정체에 무기력한 거부와 불쾌감을 드러낸다. 사실 이러한 문화적 표시체계는 동시대 내부에서조차 커다란 편차를 드러내기에 그가 아는 만큼 현재로부터 소외된다.
그럼에도 새로운 표시와 그 관계는 오로지 그 고안과 배열에 참가한 사람들에게만 완전히 유효하며 그들만이 쉽게 알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옛날만을 기억하는 늙어가는 이들의 아집은 곤욕을 치러야만 한다. 새로운 표시의 도전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진 이러한 인구가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퇴행의 저항과 마주해야한다. 그런데 이 퇴행의 주체인 늙어가는 자들이 세계에 저항할 때 그 반동의 영향은 정말 끔찍한 것이다. 오늘의 많은 세계가 극단적 우경화로 폭력과 거짓, 기만의 세계로 이동하는 것은 늙은 것들의 양적 증가, 그 양적 지배력 때문일 것이다.
세계의 몰이해로 빚어진 거부(拒否)들은 단지 개인적 소외의 처연함이 아니라 사회적 퇴행의 역사 반동적 사건의 투사(投射)이기도 하다. 이 늙음의 사색은 바로 그 늙음이 직면해야만 하는 피해 갈 수 없는 현실의 실체들을 여과 없이 드러내 체념할 할 것인가? 아니면 저항 할 것인가 묻는다. 우리는 무수한 자기모순과 세계의 부조리에 당면하고, 그 모호성에서 언젠가 직면했는지도 모르게 다가 올 것에 이르기까지 살아내야 한다. 체념의 모습들은 각양각색일 것이다. 또한 저항의 태도들도 무수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저항의 태도는 체념의 이면이고 또한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늙어감은 이렇게 애매모호함 사이에서 방황하며 시간으로 사라짐을 자각케 하는 어느 순간에 시작되는 표시체계인지도 모르겠다. 노년의 지혜나 노년의 행복 따위의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들은 이 책에 접근하지 말라. 바로 그러한 통속적이고 싸구려인 위선과 기만을 걷어내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늙어감의 진실을 말하는 책이니까 말이다. 그럼으로써 늙어감, 그 시간성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 늙어가는 자로서 직면한 곤혹의 실체를 더욱 극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다. 자신의 늙어가는 자아가 느끼는 그 분열된 자아가 지금 무얼 할 수 있는지, 그 내실에 품위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잿빛의 육중한 묘비가 그 삶의 흔적을 증언하리라”-장 아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