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것들 - 바르샤바 게토의 아카이브로 떠난 여행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지음, 여문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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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장의 이미지, 그것을 몽타주적이라고 하든 그 어떤 정동(affect)적 반영이라 하든 그 이미지들을 통한 사유 전개작업으로써의 글쓰기가 이 책이다. 그 대상은 1940년에서 1943년에 이르는 나치 독일에 의해 절멸 될 폴란드 유대인 게토 내 민중들의 모든 자료 - 편지, 절멸수용소로 이송되던 열차에서 밖으로 던져진 쪽지들, 사진들, 일기들, 유언들, 오고간 행정문서들, 은밀히 건네던 자체 소식 문서들, 그 밖의 타자원고와 등사본, 인쇄본 등의 문서들 - 오이네그 샤베스라는 비밀 모임을 통해 수집한 유대인 역사학자 에마누엘 린겔블룸의 35.269쪽 분량의 자료들을 모체로 한 상상과 반추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해석 에세이다.

 

이 상상과 반추는 흩어지고 누락된 결핍 속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적 이해의 목소리이며,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집단적으로 체험되고 전승된 고통과 흔적의 이미지들을 통해서이다. 어떤 미학적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터무니없는 지적(知的) 놀이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적 문화적 경험을 저장하고 전송하는 기억의 매체로서 해독하기이다. 첫 장의 이미지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절망 속에 쓰여진 글을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다시 읽을 때 그 글자들이 하나씩 사라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처럼 어떤 비극적인 탄식의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보인다. 이 첫 장의 일면 감성적 시작은 책 전체의 이미지를 아우르며, 린겔블룸의 아카이브들과 그 아카이브들의 매립과 발굴에서 감지되는 고통과 정념의 몸짓으로부터 시대를 초월하여 반복되고 변형되는 이미지들이 머금은 가능한 의미들의 추적을 실행해나간다.

 

19435, 750명 남짓 남은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봉기를 진압하는 SS(나치 친위대)장군 위르겐 슈트로프가 벌인 최종 게토 청산 작전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어 그 무엇도 남지 않은 폐허가 되어 폴란드 내 유대인은 절멸한다. 저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감응과 내 감응은 결코 동일한 것일 수 없을 게다. 높이 3미터 둘레 13킬로미터에 달하던 게토 장벽의 잔해들을 모아 전쟁 후 다시 세워놓은 붉은 벽돌 장벽의 틈새에 올려놓은 작은 돌멩이들을 탄식의 사물 혹은 결정화된 눈물로 읽어내는 그러한 감응을 나는 가질 수가 없다. 다만 그 파괴와 학살의 흔적으로부터 그 같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다시금 반복되지 않도록 어떻게 멈춰 세울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무력함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지하 통로의 바닥인지 벽인지 모를 이미지 아래 강제 노동을 시키고 일이 끝나면 얼굴을 벽에 대고 서 있게 하고서는 귀와 머리를 때려죽이는 끔찍한 인간 사냥, 유흥거리로 삼기위해 유대인을 죽이는 인간성 침식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1942722일부터 921일까지 나치는 최종 해결책(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는 조직적인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이 두 달 동안 유대인 30만 명을 가스실에서 처형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오늘 역사의 눈으로 해독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한 의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려는, 적어도 문서들만큼은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아 고통과 한탄의 기록들이 미래 세대에 전달될 수 있기를 거대한 욕망으로 생동하면서 죽어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바로 그 유대인들의 바람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폴란드 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절멸될 것임을 이미 잘고 있었던 듯하다. 게토 장벽에 갇힌 그들에게 모든 음식의 수급은 차단되었으며, 극단적 굶주림과 반복되는 처형, 가축열차에 실려 절멸 수용소로의 이송되어 사라지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참혹함은 구태여 고도의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도 없이 상상할 수 있다. 수집된 자료들은 양철상자에 담아 세 차례에 걸쳐 노블립키 거리 38번지, 시비에토 에르스카 거리 31번지 건물 지하에 각기 매립하였던 모양이다. 전쟁이 끝 난 후 19464월 게토봉기 3주년 기념일을 맞아 이렇게 매립되었던 린겔블룸 아카이브를 발굴해야 한다고 라헬이라는 여성이 호소한다. 그때 그녀가 마주한 것은 무엇일까. 아카이브를 찾을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며, 하찮은 종이쪽지를 찾아 땅을 파헤치는 것은 아무소용도 없는 일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거친 방해의 목소리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고 있는데 새삼스레 그것을 찾는 일은 무용하다는 것이다. 자기 역사의 진실을 바라보기를 회피하거나 무시하려는 종자들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가히 흉물스럽다. 오랜 시간과 우여곡절 끝에 수색이 결정되었지만 이미 잔해가 말끔히 정리된 바르샤바에서 그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니, 그 엄청난 길이와 높이의 장벽, 그리고 수많은 건축물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초토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항공사진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발굴을 시작하여 표면이 산화된 양철통이 발굴되기까지 4년 동안 물이 흘러들어가고 곰팡이가 서식하면서 습기와 팽창으로 상자에 눌러 붙고, 글자가 지워지고 부패되고 훼손된 문서들의 섬세한 복원 작업이 이루진다. 린겔블룸이 주도하여 수집한 오이네그 샤베스 아카이브는 그렇게 윤리적, 정치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힘을 세상에 물려준다.

 

사진 이미지 작업을 통해 사유이론을 전개하는 이 독특한 저자는 지워지고 뭉그러지고 종이끼리 들러붙어 흐려진 문서들과 사진으로부터 역사 지식에 대한 또 하나의 알레고리를 발견한다. 애초에 흐릿했기 때문에 사실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 아무 소용없이 역사의 사물들과 사건은 존재하게 되고, 광학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가독성의 조건을 독특한 방식으로 복잡하게 만드는 어떤 실재가 현실에 뒤섞여 역사는 그 흐릿함에서 건져내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마 매립된 양철통을 발굴해내 그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디디-위베르만은 그 자료들이 두 번 물에 잠겼다고 말한다. 한 번은 땅 속 지하의 물속에,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증언하는 눈물의 감동적 물속에서라고.

 


책은 이렇게 발굴해내 복원한 문서들의 내용이 빼곡하게 인용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긴박하고 다급함이 넘치는 목소리로 부모와 형제, 동료들의 안부를 확인하려는 간절함들, 비통한 메시지들이 넘쳐난다. 그들이 무사한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습니다. 기억해주세요. 제 이름은 나흠 그지바치입니다.”, “점점 더 옥죄어 오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동이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최후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내일 그곳으로 이송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오늘이 마지막 밤입니다.”

 

그런가하면 매립의 마지막 순간에 상자에 밀어 넣었던 19살 소년의 개인적 유언 같은 글도 있다. 우리가 당대의 세계를 향해 외치고 울부짖을 수 없었던 것을, 우리는 땅 속에 묻습니다. 나는 이 소중한 보물이 언젠가 발굴되어 세상에 진실을 외치는 순간을 정말 보고 싶습니다. 세상이 모든 것을 알게 되기를.” 이 어린 소년조차 자신들이 곧 절멸할 것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소소하고 개인적인 쪽지와 문서들이 미래 세계에 역사의 증언이 될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사사로워 보이는 서신들에는 당시의 급박한 동료들을 향한 정보들도 있는데, 트레블링카 절명 수용소를 급하게 그린 지도가 그려진 우편엽서, 특수 트럭에서 자행된 가스학살 작전에 대한 상세한 보고들도 있다. 헤움노 절명수용소에서 19421월 탈출하여 4개월 후 체포되어 베우제츠(Bełzec) 수용소 가스실에서 살해되는 슐라메크가 전한 정보기록이다.

 

그런데 더욱 아찔하고 끔찍한 상황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은 일명 상상하기의 재앙이라 불리는 것이다. 현실이 너무 가혹하여 사람들이 미칠 지경이 되면 스스로 고의적 무지나 자발적 예속의 심리상태로 빠져드는 현상이다. 상상력이 현실의 압도적 규모 앞에서 완전히 마비되거나 그러한 현실로부터, 아니 자신으로부터도 벗어나 현실의 가혹한 논리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아연한 목소리들, 경악스러운 사실들이 매장된 종이들의 아카이브에서 차마 감당할 수 없는 대량 학살의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일상적 생존의 단순한 몸짓들, 비참 속의 고귀 한 몸짓들, 비영웅적 몸짓들로 직조된 이들 자료를 그들로부터 물리적,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이방인에게도 텍스트 속 문자가 흐려지고 보이지 않기 시작한다. 감상적이라고? 어찌 감상적이기만 하겠는가, 더는 합리적 이성이란 것으로 해독되지 않는 사실을 접하면서 차가운 이성 어쩌구 하는 것이 오히려 비이성이고 문명적 퇴화의 비윤리 아닌가.

 

역사학자 린겔블룸의 이 수집행위, 가능한 많이 수집하라, 분류 작업은 전쟁 후의 일이 될 것이니라며 오이네그 샤베스의 동료들을 향한 간곡한 부탁은 현재의 무력함을 미래의 힘으로, 나중에 쓰일 당신들의 역사로 바꾸기 위한, 생존의 불가능성을 잔존의 기회로 만들고자하는 숭고한 작업이었음을 헤아리게 된다. 디디-위베르만의 진술처럼 일관된 무언가를 도출해내기에는 너무 흩어진 이미지들로부터 나치 독일의 비인간적 문명 퇴화적 표징이나 그들이 축조한 절멸용 기술장치들을 발견하는 것은 부차적인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이미지들의 해석을 통해 흩어진 도덕 관점들을 다시 주워 모을 수 있으며, 1942년 독일군이 게토에서 촬영한 사전 위조되고 연출되어 왜곡되고 억압되어 전복된 이미지들이 같은 이미지 자료임에도 얼마나 은밀하게 다른 관점을 생성하게 하는지도 분별하게도 된다.

 

게토 내에는 유대인 자체 행정기구인 유덴라트라는 것이 있었으며, 유대인 동료를 감시 통제하는 유대인 경찰도 있었다. 유덴라트라는 특권 계층 특유의 오만함을 과시하는 격식을 갖춘 단체 초상 사진과 유대인 경찰이 줄지어 세우거나 무리를 이루게 하여 조밀하게 모아 놓은 채로 찍은 일반 민중 사진의 뚜렷한 분할을 보는 것도 당시 게토 내 유대인들의 권력구조와 갈등을 상상케 한다. 어차피 19438월 이후에는 모두 절멸할 동족임에도 구별짓고 위계를 부리는 인간들의 그 던적스러움은 역사의 결과를 아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우스꽝스러움을 넘어 가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을, 아니 유대인 역사학자 린겔블룸의 아카이브에 담긴 그 고통스러운 역사에 대한 믿음의 기대가 들을 수 없는 목소리들, 얼굴들을 시간을 넘어 상상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평범성에 깃든 숭고함과 극악스러움이라는 양면에 대해 다시금 생각에 잠기게 한다. 디디-위베르만은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 속에서 늘 이런 외침은 반복되었고, 그 외침은 헛되이 울렸고, 훨씬 나중에야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때문에 글쓰기가 전달하고 재구성하고자 하는 고통의 외침 앞에서 글쓰기에 내재된 본질적 취약함을 외면하지 않는 윤리만큼은 절대 잃어버리지 말자고. 그때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세계일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에게도 일제 군국주의자들의 극악한 압제의 시기가 있었다. 어딘가에 시간을 멈춘 채 묻혀 있는 당대 식민지 조선인들의 목소리와 얼굴들, 일경에, 조선인 일제 주구(走狗)들에 쫓기면서 던져지듯 남긴 쪽지들, 색 바랜 사진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도 날뛰는 뉴라이트로 불리는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민족역사의 왜곡 날조를 서슴지 않고 있다. 역사는 오늘의 해석이고, 하찮아 보이는 그 묻힌 소소한 자료들에서 그날들의 진실을 우리는 읽어내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이 품고 있을 단 한 번의 단순한 감정적 체험의 틈 속 깊이 저마다 지니고 있을지 모를 흩어진 심리적 자리를 우리는 복원하고 해독해내야 한다. 어쩌면 이 책을 시작하는 이 문장이 이 책이 인류에게 전하고자 하는 요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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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고 단단하게, 법정의 말 - 내려놓음의 마음 공부 고요하고 단단하게
권민수 엮음 / 리텍콘텐츠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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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가 지녔던 모든 것을 놓아버릴 때가 온다. 반드시 온다! (...)

본래 내 것이 어디 있었던가. 우리는 가진 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 돌보는 사람들이다.“

- 다시 채소를 가꾸며. 아름다운 마무리, 46

 

법정 스님의 대표 저작을 비롯한 법화(法話)나 법문, 강연 기록들을 인쇄된 문자로 접할 길이 없는 가운데, 스님의 말씀을 엮은이의 체화된 사유의 깊이 있는 글과 더불어 하나의 총체적 흐름으로 만날 수 있게 펴낸 노고에 고마움을 먼저 전한다. 법정스님 하면 무소유를 떠 올리지만, 그 뜻을 헤아리는 데는 여전히 미숙하다. 아마 몸과 마음으로 수용하지 못했기에 앎이 되지 못하고 기억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부제가 내려놓음의 마음공부이듯, 무소유는 그저 모든 것을 내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몫을 덜어내는 선택의 기준을 세우라는 가르침이며, 그렇게 덜어내어 가벼워진 자리에서 단순화한 선택이 쌓이면 삶의 방향도 선명해지고 그럼으로써 더욱 단단하게 자기답게 살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일 게다.

 

이 책은 단순히 법정스님의 고귀한 문장들을 수집하여 배열한 문장모음집이 아니다. 엮은이라 표기하지만 스님의 말씀에 더해 엮은이의 글은 그 자체로 삶의 태도에 대한 오랜 경험과 깊은 사색의 결과임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은 법정 스님의 모든 법화를 총체화한 해설서이자 독자적인 명상록이라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비움과 자유, 가족과 사랑, 갈등에서 상실과 병, 죽음, 단련과 실천에 이르는 인생의 단면들인 7개 주제 아래 법정스님의 저작들과 법문, 법회 말씀을 망라한 총 245 문장과 각 해당 문장에 따른 엮은이의 풀어쓴 시의적 해설, 해당 문장에 스며든 사유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우리네 삶의 태도가 선택의 지점에서 방황하게 될 때 언제라도 다시 펴들고 읽게 될 그런 책으로 항시 눈에 띄는 곳에 놓아두어야 할 것 같다.

 

오늘의 걸음, , 시선을 조금만 바꾸고, 오래 붙잡고 있던 기대와 습관을

조금씩 내려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결이 달라진다.“ - 본문 36

 

소유냐 존재냐 또는 소유하기와 소유되기와 같이 그 어떤 대상을 취득하여 자기 지배하에 두려는 욕구와 이와 달리 내면적 경험에 의해 보증되는 자기창조의 능동적 과정으로서 공유와 결속의 양식은 삶을 대하는 태도의 뚜렷하게 다른 두 이해이다. 우리는 어느덧 물질과 부가 넘쳐흐르는 시대에 살게 되면서 물질을 비롯한 외적 대상을 자신을 확인하는 경험적 토대로 이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렇게 더, 더 소유함으로써 대상을 지배하는 느낌의 상승, 즉 새로운 자극의 무한 욕구에 종속됨으로써 욕구와 충동과 탈취의 능력이 행복이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아집과 소외와 굴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소유 집착은 자유의 족쇄가 되고 자기실현의 장애물이 된 그것에 얽매여 자기 자신에 대한 몰이해와 삶의 감각을 잃고 세상을 탓하게 하곤 한다. 자신임을 확신하게 하는 느낌의 이 왜곡된 현상에 대한 동서를 막론한 가르침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법정스님의 말씀은 바로 이 소유의식, 무언가를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동안 충만한 삶을 살아내기 위한 방향과 방법들에 대한 가르침일 것이다. 그것이 곧 비워냄, 덜어내 가벼워진 마음이고 그 내려놓고 가벼워져 단순해진 자리에서 삶의 선택 기준은 선명해지고 단단해져 오히려 그 텅 빔이 생에 대한 태도와 삶의 품격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소욕지족 소병소뇌(小慾知足 小病小惱) 라 하여 삶의 깊이는 얼마나 많이 가지느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또렷이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들의 지나 온 인생길을 가만히 돌아보면 삶의 길은 결코 물질의 풍요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한 생애에서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우리는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사랑과 베풂 말고 그 밖의 것들인 재화와 물질, 명예와 권력, 이런 것들이 뭐 그리 소중하겠는가. 무상한 것이다. 즉 항상성이 없다는 것이다.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비움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내 삶의 가치기준이 흐트러지기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때 내려놓음, 비움은 마음을 가볍게 하고 삶의 결이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이 오늘처럼 모든 것이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부자 되기는 어렵지 않지만. 투철한 삶의 질서를 지니고 가난하게 살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내 안에 중심이 잡히면 (...) 나를 스스로 돌볼 힘이 자란다.” - 본문 195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타자는 시선에서 지워지고 저 위만 보며 계속 달리다 보면 불안의 기분이 떠나지 않는다. 그 극렬한 경쟁의 전선을 쉬지 않고 내달림으로서 성취는 늘어나겠지만 삶의 이유가 흐려지고 자기 삶을 상실한 허전함, 공허가 밀려들어온다. 스님은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글에서 홀로 있는 시간은 본래의 자기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다.” 라 말하고 있다. 흩어진 마음을 거두어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인데, 이렇게 비워 간소해진 자리에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의 리듬과 속도를 찾아내고 그렇게 명확해진 기준을 삶의 방향으로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창으로 밝은 빛이 많이 들어와 오래 앉아 있게 한다.’는 의미인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 의 마음의 자세야말로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귀중한 태도일 것이다.

 

마음도 매달린 것을 조금 내려놓아야 새 감정과 풍경이 들어온다. 그 빈자리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곳이 아니라 내가 숨 쉬고 삶의 방향을 다시 고르는 자리가 된다.” -본문 196

 

양과 크기를 키우려는 우리네 자세는 타인의 우위에 서려는 사고 때문일 것이다. 결국 주위의 시선과 인식에 휘둘리는 삶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생의 리듬이 없다. 그래서 삶은 고통스럽고 쉽게 짜증나며 피곤하고, 지루하며 지친다. 이러한 비교와 너저분한 장식을 덜어내어 자신에 맞는 속도를 찾아 지켜내면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욕심의 속도도 느려지며, 계산하는 관계는 배려와 베풂으로 옮겨갈 것이다. 아마 이렇게 자기 리듬에 맞춰 세워진 자기만의 삶의 기준에 정성을 다하면 생의 밀도가 높아지고 그것은 충만한 행복감이 될 것이다.

 

어떤 세상을 사는지는 오늘 내가 고른 시선이 정한다.”고 엮은이는 말한다. 내려놓기, 비워내기는 자기답게 살기 위한 방식이지 그 뭐를 인색하게 절약하자는 애기가 아니다. 버릴수록 선택이 또렷해진다. 비교와 기대의 볼륨을 낮추고 내 속도를 지킬 때 여백이 생기고 그 위로 자연스레 삶의 여유와 평온이 찾아온다. 이렇게 과한 것을 덜어내 중심을 선명하게 만들면 그 어떤 화려한 장식보다 오래 남는 삶의 품위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아름다움이고 세련된 기품이며 멋이다.

 

한 줄 한 줄 자꾸 멈추게 만드는 책은 불친절한 글이 아니라, 내 삶을 끌어와 함께 생각하게 하는 친구에 가깝다. 결국 독서는 한 문장을 앞에 두고 얼마나 오래 멈춰 서서 나를 돌아봤는가에 따라 깊이가 달라진다.” - 본문 253

 

법정 스님의 말씀들은 시적 고아함이 배어나오고 그것에 엮은이의 사유 품격이 더해져 주위 사람들에게 마구 나누어주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문장은 절제되어 적은 말들임에도 그 속의 마음이 절로 건네져 옴을 느낀다. 엮은이는 이처럼 말 대신 눈길로 서로의 마음을 건네는 시간을 목격전수(目擊傳受)”라 알려준다. 책 속 문장을 바라보면 그 마음을 이내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간결하고 선명하여 이렇게 가르침과 문장의 리듬이 공명한 그 의미는 증폭되어 다가온다.

 

스님의 저작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무엇을 읽을 것인가라는 글에서 참된 앎이란 타인에게서 빌려 온 지식이 아니라 내 자신이 몸소 부딪혀 체험한 것이어야 한다.”의 지적처럼 이 책의 문장들은 그 인고의 체험을 겪은 것들이어서 술술 읽힘에도 수시로 책장을 덮고 반추하게 된다. 뭇 사람들은 진정한 자신을 찾는다고 정체성의 발견을 말하곤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었다면 그런 말은 조심스러워질 것이다. 정체성은 무언가를 껴입고 장식하여 구성한 것이다. 나를 발견하는 일은 오히려 남의 시선과 기준, 체면, 증명하고 과시하고픈 강박 등과 같은 것들을 떼어내는 일, 그렇게 단순화한 것 속에서 비로소 또렷해지는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난 후 책장을 덮으면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삶을 바꾸는 힘이 몸과 마음에 배어들고 있는 기분 좋은 충만감에 싸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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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3-14 1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의자를 가지려 함은 소유가 아닌 앉기 위한 필요에 의함임을 아는 것이 무소유의 첫걸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의식 2026-03-14 20:10   좋아요 0 | URL
네, 필요와 소유의 경계, 그 기준을 세우는 마음이겠지요. 좋은 주말 시간 되십시요, 잉크냄새님~
 
영한 인생 사전 - 두 언어를 오가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재미
박솔미 지음 / 북스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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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not perfect but Life's Good. 

(완벽하지 않아도, 삶은 여전히 좋은 것.)”

 

어떤 분야가 되었건 자기 삶의 기준을 선명히 세우고 자신만의 리듬, 속도와 분량을 정해 선택을 단순하게 하여 오랜 시간 작은 정성을 반복해 온 사람들은 인생에 대한 그 어떤 본질적 감각을 체득하는 순간을 맞이하기 마련인 듯하다. 글쓴이는 브랜드 내러티브 설계 및 메시지제작 일을 하는, 추정컨대 대략 15년쯤 광고 분야의 일에 종사해 온 듯싶다. 이 작은 책자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음을 당당하게 공표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독자들은 어느만큼 수긍할 수 있을 터이다.

 


영한(英韓) 인생 사전이라는 표제어가 곧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의 표현이라 말 할 수 있겠다. 영어 단어나 문장의 뜻을 깊이 있게 음미하기 위해 단어의 은밀한 부분에 놓인 부스러기까지 한 톨도 빠뜨리지 않고 옮기는고심의 작업의 결과이고. 바로 이를 통해 인생에서 뜻 깊은 열 가지 주제어로부터 삶의 소중한 이야기들을 길어 올려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선정된 자아(Identity), 직업, 성취, 자유 등 열 가지 주제어 아래 두세 꼭지의 함축된 문구와 체험한 인생을 교호하면서 통찰적 시선을 풀어내고 있다.

 

청년 시절에나 혹시 손에 들었을 법한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True integrity' 라는 어휘에 대한 작가의 직장에서의 경험이 녹아든 지혜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충분히 성찰적 인물로 여겨졌고, 바쁜 직업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자기 인생에 대한 건강한 균형의 태도가 엿보였던 까닭이다. 사실 이 어휘를 포함하는 “True integrity comes when we stop seeking approval. (다른 이의 인정을 갈구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완전해 진다.)”가 인생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말하는 문장은 아니지만, 온전함 또는 완전함으로 해석되는 'integrity'의 의미 수용의 맥락을 포함하는 애플에서의 경험 이야기는 단어의 뜻을 보다 풍부하게 전달해준다.

 

결국 이 책 전반에 흐르는 오랫동안 자신의 기준을 지켜나가기 위해 끈기를 가지고 오랫동안 공들인 사람만이 손에 쥘 수 있는 그러한 완전함에 대한 글쓴이의 생각으로 첫 장을 시작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글쓴이가 선택한 30여 인생문장 중 내 믿음과 공명하는 것 몇 문장을 중심으로 감상을 이어가련다. 글쓴이가 광고업계에 바탕을 둔 사람이다 보니 이들 문장의 다수가 브랜드 광고 문구나 옥외광고 문구 등 대중을 향한 메시지들이다. 그 첫째는 Life is not perfect but Life's Good. (완벽하지 않아도, 삶은 여전히 좋은 것.)”이라는 문장인데, 삶이란 완벽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좋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자세임을 말하는 것일 게다. 이는 내 오랜 좌우명이기도 한데,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은 좋은이라는 형용사의 모호함으로 인해 항상 반성적 정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삶이 주는 모든 순간을 충분히 경험하는 것, 그것이 좋은 삶이라고 쓰고 있는데, 항시 깨어있는 정신,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을 지각하려는 태도를 지닌 자신의 내면에서 다져진 목소리일 것이다.

 

두 번째 문장은 무수한 선택지로 들끓는 세계에서 자신을 정립하는 태도로서도, 또한 일상적 욕망의 발현과 절제의 균형에 있어서도, 혹은 글쓰기와 같은 심미적이거나 다수의 이해를 위한 쓰임새에 이르기까지 단순함은 살아가는 태도의 궁극적 섬세함의 구현일 것이다. “Simplicity is the ultimate sophistication. (단순함은 궁극적 섬세함이다.)” 이 간결한 문장이 품은 풍부한 의미들은 일본대중의 언어인 와비사비(侘寂, わびさび)와 어울려 고아한 품격과 정취까지 더한다. 오랜 시간의 풍화를 견뎌온 사람이나 사물들에서 드러나는 우아한 품격과 궁극적인 섬세함을 품은 단순함은 개인 고유의 기준을 위해 비워져 단순하고 선명해진 자신만의 단단한 생의 태도와 다시금 연결된다.

 

삶의 품질, 혹은 품격이란 이렇게 굳건하게 세워진 단순성에 대한 지극한 정성일 것이다. ()구절, 광고문구들, 유명가수의 노래가사, 연설문들을 아우르며 생의 지혜를 꼭꼭 눌러 담고 있는 이들 영어문장 또는 번역된 문장들에 글쓴이의 체험적 사유가 더해져 청년들에게는 다가오는 풍부한 미래에 대한 선배의 훌륭한 이정표가 되어주고, 중장년의 독자들에게는 인생을 반추하며 삶의 소중한 것들에 공감하는 시간이 되어 줄 것 같다.

 

【『영한 인생 사전(Life Dictionary)본문 83


법정(法頂) 스님은 산방한담에서 사람은 내일에 가서 잘 사는 게 아니라, 그날그날을 잘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자기만의 굳건한 기준을 지닌 인간의 바로 지금 순간에서의 철저한 열정과 지극한 공들임, 현재의 최선이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태도라고 지적한 것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사람들을 무수히 보곤 한다. 오늘을 흘려보내며 남의 시선에 휘둘리고 무수한 선택지를 우왕좌왕하는 인생은 기다리는 미래조차 무의미해지기 일쑤일 것이다. “Small habits compound into greatness.(작은 습관이 복리로 쌓여 위대함이 된다.)” 꾸준히 현재의 시간을 쌓아올리는 사람들은 어떠한 영역에서든 자신들만의 인생의 본질을 건져 올리는 만족스러움이라는 보상을 받을 터이다.

 

글쓴이는 성취의 장에서 'officially'라는 단어의 의미를 나이키 캠페인 문장인 “You don't need an official court or official uniforms to be officially great.(공식적 장소, 공식적 의상이 없어도 진정 위대해질 수 있다.)”를 통해 삶의 위대한 성취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국가나 사회의 인정이라는 official의 사전적 의미와 인기 노래 제목인 <Officially missing you(공식적으로 네가 그리워)>처럼 국가나 사회가 승인할 만큼 공식적으로 그리울 정도임을 뜻하는 과장된 관용적 표현을 오가며 정말로, 진짜로 그러함이란 의미를 품은 official의 의미를 풀어놓는다. 즉 그 누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으로 정성을 다한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함을 역설하는 것인데, 여기서도 글쓴이가 시종 가리키는 곳은 자기만의 리듬으로 정성스러운 반복, 꾸준한 공들임의 습관, 바로 지금의 열정일 것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이러한 자기 기준 확립의 태도만을 발견하더라도 충분히 이 인생사전은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게다.

 

아마 그것은 글쓴이가 단어 하나하나에 숨은 의미들을 이해하려는 수고와 닮아있을 것이다. 본질, 중요한 알맹이, 삶의 중요한 키워드를 또렷하게 손에 쥐고 살아가는 삶의 태도 말이다. 글쓴이의 바람처럼 자아, 시간, 유대, 건강, 직업, 취향, 낭만, 성취, 의식, 자유라는 핵심어 속에서 꿈꾸고자 하는 무엇을 통찰하는 데 소중한 참고 사전이 되어줄 수도 있을 터이다. 독자들 제위(諸位)없으면 자신이 성립되지 않을 단어를 골라보시라. 그것이 여러분을 지어올린 인생일 것이다. 그것에서 털어버릴 것이 있다면 버리고 선택해야 할 것이 있다면 선택하면서 단순한 자신만의 인생기준을 세우는 시간으로 아깝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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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3-12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쓰기의 소재는 역시 무궁무진하군요. 독특한 소재와 깊은 성찰이 어우러진 책일 것 같네요.

비의식 2026-03-12 21:15   좋아요 0 | URL
네, 글로벌 기업의 카피라이터이다보니 단어 하나하나가 품고 있는 의미에 대한 탐구가 깊었던 듯 합니다. 지적하신대로 자신의 인생 경험과 응축된 문구들이 적절하게 상호작용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구성이 특히, 청장년 독자들의 시선을 끌 것 같습니다. 잉크냄새님 댓글 고맙습니다.
 
죔레는 거기에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0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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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삶을 살아오며 한 가지는 분명히 깨달았소. (....) 큰 욕심의 끝은

신음이라고 하지 않았소, (...) 이 아름다운 인생의 끝은 결국 엿 같은 거요.” 

- 4134

 

"언어의 아름다움, 지옥의 재미"를 자신의 문체적 모토로 삼고 있다고 강조해 온 이 종말론적이고 해학적인 긴 문장의 미학적 경이로움을 창작하는 작가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던 2025년에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보다 전통적인 서사의 작품을 발표했다. 영리하고 다면적이며 정교한 구성으로 저항할 수 없는 부조리한 세계를 그려내는 그만의 강렬한 어둠의 문학적 기교가 조금은 더 유머러스해지고 서정적 아름다움으로 평온해진 느낌이다.

 

헝가리를 비롯한 동유럽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세계가 권위주의와 극우 과대망상으로 인해 불안정한 정치적 현실과 이념적 공허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현재적 상황일 것이다. 소설은 왕정복고라는 극단적인 퇴행적 향수의 서사를 중심으로 날로 심각해지는 반동적 정치모델에 대한 갈망을 신랄하고 냉소적인 유머로 지펴낸 정치 풍자소설이라 정의해도 될 것 같다. 그럼에도 이 멸시의 빈정거림의 거대 서사가 그렇게 진지한 무게로 느껴지지 않는데, 시적이고 서정적인, 아니 이보다는 애잔한 슬픔의 장막이 드리워진 듯 생의 어떤 순간들의 아름다움이 이를 경감시켜주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아흔 한 살의 노인 요제프 카다는 은퇴한 전기기사로 12년 전 아내 일리아를 떠나보내고 홀아비로 반려견 죔레와 함께 산 속 작은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 자신의 가문과 출신을 비밀에 부치고 세상의 시선에서 사라지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 온 칭기스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왕가의 후손이며, 헝가리 왕위 계승권까지 주장할 수 있는 아르파드 왕가의 왕위 계승자다. 그런데 정치를 피해 도망치는 자는 언제나 정치의 그림자에 시달린다.”는 격언처럼 정치에 관여하기를 거부하고 조상들처럼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그에게 전기 기술자, 기타를 든 순회 가수, 자동차 도장공, 종마 목장 주인(소위 옛 품종을 보존하는 사람), 경찰관, 회계 사무원, 은퇴한 하사관, 그리고 교사까지 한 무리의 왕정복고주의자들이 노인의 평온한 삶을 깨뜨린다.

 

이들은 오랜 조사 끝에 그가 1301년 사라진 아르파드 왕조의 후계자이며, 따라서 헝가리 왕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알아냈음을 말한다. 오직 그만이 부패하고 권력에 굶주린 독재정권으로 얼룩진 헝가리 정치에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기에 왕국의 수장임을 승인해줄 것을 간구(干求)한다. 헝가리는 쇠퇴하고 영광은 사라졌으며,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의식적으로 정치에 등을 돌렸고 다시 주목받고 싶어 하지 않은 노인에겐 이들 왕정복고에 열광하는 무리들이 달갑지 않다.

 

소설은 이렇듯 헝가리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이는 헝가리라는 단일 영토국가에 한정되지 않는다. 작가는 이러한 허구적 기원의 서사에 대한 자신의 목소리를 소설의 마무리 끝에 짧게 언명하고 있는데, 이 책은 상상의 산물이며 그것 자체로도 현실의 일부로서 이번에도 현실로부터 양분을 얻고 있지만에서와 같이 2022년 독일 사회에서 일어난 극우단체의 국가 전복 음모 사건을 거의 직접적으로 묘사하며 극우 파시스트들의 권위주의적 망상을 조롱하는 은유로 삼기도 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빅토르 오르반 극우 독재정권의 헝가리 정치 사회뿐 아니라 유럽, 나아가 현 세계의 반동적 정치질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기도 하다. 일명 '제국 시민(라이히스뷔르거,Reichsbürger)' 단체라는 군주주의와 반유대주의, 역사수정주의 등을 포함하는 퇴행적이고 종파적인 극우집단의 대규모 검거와 재판 사건인 극단주의자들의 행태가 이 소설의 중심 서사 축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과 같다. (소설에서는 '조율된 플랫폼(Koordinált Platform)', 줄여서 KP라는 왕정복고주의자 무리로 묘사됨)

 

노인 요제프 카다는 이들 찾아 온 무리에게 말한다. 그리곤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과 여기에서 우리가 이렇게 만난다는 사실은 일곱 겹으로 봉인된 비밀로 남아야 하오.”라며, 그를 추종하는 이 무리들이 폐하, 라 자신을 칭하는 것을 금지하며, 요지 아저씨로 부를 것을 요구한다. 이후 추종자들이 그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요지 아저씨로 부르는 것에 복종하자 마지못해 왕위 제안을 수락한다. 요지아저씨는 다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왕이 되고 싶을 뿐, 그렇지 않다면 기꺼이 거절하리라고 말하면서. 추종자 무리는 점점 늘어나고 이들과 소소한 대화를 거듭하면서 점차 옛 시절의 향수에 젖어들고, 이를 통해 자신의 지나 온 사적 삶에 대해 들려준다.

 

여기서 그는 헝가리 극우 민족시인 버시 얼베르트의 시작(詩作)들을 칭송하면서 한 때 자신과 연인 사이였던 열렬한 파시스트 가수겸 배우인 지타 셀레츠키의 노래와 그녀의 아름다움을 거듭 열정적 기억으로 소환한다. 이러한 사적 진술 속에 작가는 교묘하게 2022년 라이히스뷔르거 운동의 극단주의 주동자의 한 명인 로이스 공작 하인리히 13세와의 친분을 요지 아저씨의 입으로 발설하게 하는데, 이는 이 소설이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그 구분선을 흐릿하게 하여 역사적 사실의 진술로 수용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 소설의 이야기로서의 재미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 등장인물들에 부여한 고유한 은유적 역할은 아마도 작가의 탁월한 특징일 것이다.

 


추종자 무리에는 작가와 동명인 덩치 큰 젊은 유랑음악가인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라는 청년이 등장하는데, 이 떠돌이 음유시인은 기타를 치며 요지 아저씨에게 옛 권위주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되살려낸다. 물론 그것은 한때 소중히 여겼던 미덕과 현재의 타락에 대한 회의를 주제로 하고 있지만, 역시나 반동적 향수를 부추기는 역할이다. 작가가 왜 자신과 같은 이름의 인물에게 이러한 역할을 부여했는지, 어떤 또 다른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혹여 자신이 쓴 소설들이 의도하지 않은 수구적 반동성을 지닌 것은 아닌지에 대한 자기성찰적 회의를 위한 반영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인물이 있는데, 예순네 살의 역사 교수인 젊은 버지디로 불리는 인물이다. 이 인물은 모든 서사에 대해 역사적 기록, 즉 증거에 의존하지 않는 이야기들에 회의를 지닌 인물로 홀로 요지 아저씨를 찾아와 발칙한 말을 쏟아낸다. “이 모든 이야기는 동화입니다. (...)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 우리에게는 아르파트 왕가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좋은 서사가 필요합니다.” 이 말은 요지 아저씨 당신이 왕위 계승자라는 말은 헛소리다. 그러나 자신들에게는 합당한 서사가 필요하기에 당신을 이용하겠으니, 순순히 자신들의 요구에 따르라는 협박이다. 사실 요지 아저씨는 왕정복고에 관심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그 어떠한 증거도 필요치 않다고 버지디의 무례함을 비난하며, 내쫓아버린다. 이렇게 내쳐진 인물이 자료의 추적과 탐문 끝에 요지아저씨의 이야기가 자신의 조사기록들과 일치함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그 누구보다 헌신적인 추종자가 되어 현실 정치세계에 왕의 복귀를 은밀히 추진한다.

 

사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요지아저씨의 반려견인 죔레(Zsömle)는 왕정복고를 준비하는 무리들의 인간적 충동을 상징하는 은유로서 언제든 대체 될 수 있는 존재로 전락하는(처음 등장하는 죔레는 몇 페이지만에 죽고, 같은 이름을 가진 어린 개로 대체된다) 것 이외에 어떤 다른 의미를 지니는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또한 떠돌이 음악가가 왜 작가와 같은 이름을 가졌을까 에 대한 동일한 미해결의 과제가 독자를 답답한 궁지에 몰아넣는다. 이러한 해결되지 못하는 소재들은 정말 너무 찝찝하다. 아무튼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식() 은유와 상징, 암시는 온화한 우울함, 냉소적 유머와 더불어 높은 지적 통찰력으로 예술적 야망을 달성한다. 현재에 개입하고 현재를 서술적으로 탐구하면서도 문학성을 잃지 않는 이 특유의 기이한 문학은 기이한 놀라움과 매력을 선사한다. 이야기는 어느 순간 급전하여 요지 아저씨의 왕정복고를 위한 순탄하게 보였던 진행은 그들의 계획이 드러남과 동시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이 무너져 내림의 서사인 배신과 숙청, 느닷없는 인신 구속과 교도원의 구속된 삶의 기록들은 책에 맡기기로 하고, 다만 한 가지 작가의 동일 장면의 묘사 속 미세한 반복 기술이 가져오는 미학적 묘미는 여기서도 반복되는데, 꿈인가 하면 현실인 사태들은 민족주의적 파시스트들인 조국의 구원을 군주제의 복원으로 여기는 무리들이 또 다른 축의 독재정권에 의해 무참히 해체되는 형국과 함께 큰 욕심은 결국은 신음이요, 아름다운 인생의 끝은 결국 엿 같은 것임의 다른 표현인 것만 같아 왠지 코끝이 시큰거리고 목메는 느낌임만을 적어둔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끝없는 수다에 완벽하게 부합하듯 전작인 헤르쉬트 07769와 같이 호흡이 긴 문장과 거의 없는 마침표를 지닌 이 소설은 초월을 향한 잘못된 인간들의 열망을 그 이념적 공허함만큼 지옥 속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한다.

 

한편 이 소설은 정치 풍자의 무거운 서사적 은유에도 불구하고 어떤 애잔한 슬픔, 시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왕정복고를 모의하는 추종자 무리들의 파괴적 활동이 초래한 분노가 거의 드러나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평온함으로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테라스에 나와 앉아 죔레와 함께 석양을 감상하는 요지 아저씨의 관조의 장면은 내게 이 소설의 인상적 몇 장면의 하나로 남게 될 것 같다. "구름 줄기들이 서로 미끄러지듯 지나가거나, 마치 신의 한숨처럼 가볍게 하늘을 가로질러 떠다녔다. 핏빛 붉은색, 주황색, 노란색, 옅은 보라색과 진한 보라색, 무수한 색조가 있었고, 이 모든 것은 여전히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계곡 위로 솟아오르는 산양의 물결치는 듯한 모습과 어우러져 있었다."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한 장면일 것이다.

 

끝으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와 더불어 이야기의 모든 아이러니한 기록이 발하는 불쾌함과 세계의 발작적 모순의 현상들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듯한 탈주의 비상을 상상하게 해주었는데, 삶의 끈은 닳아 없어지고, 생각은 맴돌며, 행복은 오직 지나간 기억 속에만 존재함을 깨달은 자의 날아오름이다. 남은 것이 갇힌 곳에서의 탈출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마침내 기쁜 흥분에 떨고 있는 죔레를 꼭 끌어안은 채, 함께 열린 창으로 기어 올라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다음, 그에게 말했다. 꽉 잡아.” 나는 이 마지막 문장을 3층에 있는 그의 병실에서 뛰어내림이 아니라 비상(飛上)으로 해석코자 한다. 성탄 전야의 비상이 재생의 오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흔 두 살 노인의 삶의 행적, 그 미학적 경이로움의 기록으로부터 이 잔혹한 세계 속의 작은 행복을 기대하게 된다. 풍자적이고 재미있고 친근한 아이러니가 넘치는 유쾌하고 수다스러운 소설이다. 절망적 현재를 풍자적 냉소와 유머로 맞선 정치 풍자극의 위대한 금자탑이라 해도 지나친 수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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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6-03-08 1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앞부분만 몇 장 읽어봤지만 라슬로의 다른 작품보다 훨씬 편안하게 읽히고 묘하게 평온한 분위기가 느껴지더라고요. 좋은 인상을 받은 채 덮었는데, 비의식님 리뷰가 올라와서 반가운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유쾌하다고까지 해 주시니 더욱 기대돼요! ㅎㅎ

비의식 2026-03-10 08:23   좋아요 1 | URL
작품 전체 분량도 적고, 더구나 번역자의 역할이 큰 것 같은데요, 사실 총 11개 장인 각 장이 하나의 문장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이를 끊어 놓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헤르쉬트 07769]는 단 한 문장으로 구성되어있음에도 번역된 문장은 그렇지 않듯이요. 서로 다른 언어의 번역 과정에서 불가피했을 거예요. 이러한 기술적 문제 외에 이전 작품들에 비해 서사가 보다 전통적인 작법에 기초했기에 독자에게 수월하게 느껴질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유쾌한‘이라는 표현은 조금 과장되었던 것 같지만 그만큼 즐거운 독서였다고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곰돌이님의 독서에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메두사의 웃음 -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최초의 선언 앳(at) 시리즈 10
엘렌 식수 지음, 이혜인 옮김 / 마티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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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 친구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웃을(rire) 차례야.

우리가 쓰고-웃을(éc-rire) 때야.“ - 장미가시 효과, 113쪽에서

 

[Helene Cixous, The laugh of the Medusa]


2026년 제49회 이상 문학상 대상 및 우수상 수상작이 모두 여성 작가(위수정,김혜진·성혜령·이민진·정이현·함윤이)의 작품이라며 성비(性比)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담론을 보았다. 나는 이러한 잡설들에 대해 논의의 가치조차 느끼지 않는데, 억압되고 재갈 물려 처형되었던 존재들의 목소리가 표상 불가능하거나 짓눌림에서 풀려나 세계의 전체적 목소리를 지니게 되었음의 한 상징적 사건으로 환영할 따름이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글쓰기가 젊은 엘렌 식수가 아마존의 전사가 되어 팔루스로고스(pallogocentrique)중심의 여성 억압의 장막을 찢고 저 높이 비행(볼리;voler) - 飛行, 非行, 卑行 - 하며 분기탱천하여 깔깔대던 그 쾌활한 분노의 웃음소리 - 메두사의 웃음-가 요구되는 시대로부터 제법 멀리 날아올랐음의 증거일 게다.

 

하지만 한 문학상 수상 작가들이 모두 여성이라고 시비하는 자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전히 망상적인 팔루스를 쥐고흔들어대는 못난 남자들과 젠더에 의해 세뇌된 여성성에 잠자고 있는 팔루스적 여성들이 있다. 그건 불가피한 일이다, 이 세계의 모든 시대의 역사들이 보여주듯 동시대라고 모두 동시성의 인식이나 지각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항상 동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에 퇴행적이거나 반동적으로 역행하는 비동시성의 무리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장미가시가 필요한 것이다. 저 깊숙이 켜켜이 쌓인 먼지들 속까지 찔러대는 가시 말이다.

 

메두사의 웃음(1975)2003년에 쓰여지고 2010년 판본에 추가 수록된 장미가시 효과에서 위의 인용 문장처럼 우리(여성)가 웃을 차례라고, 쓰고-웃을 때라고 전하고 있듯, 이젠 여성이 그 몸으로 멍에와 검열을 깨부수고 사방으로 온몸을 관통하는 의미의 팽창을 발화한다고 피비린내 나는 처형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오늘의 웃음은 메두사의 분노에 찬 조롱의 웃음이 아니라 마음껏 여성 고유의 힘을 무한히 발산할 수 있음에 대한 자유의 유쾌한 웃음일 것이다.

 

이 책을 다시금 찾아 읽게 된 연유는 이처럼 동등한 주체로 자리매김한 여성의 시대에 대한 소회를 감각하는 것이 하나였고, 또 하나는 여성이 공적 공간에서 입을 열어 여성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이 곧 금지의 위반이던 시대에 살며 자신을 감금했던 초자아화된 팔루스중심 구조를 탈주하여 자신의 (1)섹스트들(sextes)을 보여주려 했던 김명순, 나혜석, 이선희 등 최초의 싸움의 현장에 나섰던 식민지조선 여전사들의 고통의 실체를 엘렌의 글쓰기로부터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 전사들을 무참히 처형했던 김기진, 김동인, 방정환 등 일군의 남성 문인들의 저열함에 나는 지금도 분개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그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성()위계의식에 터 잡은 비루한 권위의식이다. 지적으로 세련된 여성을 욕망하면서도 그 각성한 지성의 존재들의 행위는 참을 수 없어했던 뒤틀린 욕망의 소유자들이었던 당대 남성들의 전근대적 지각이 그렇게 싫을 수 없다.

 

사실 엘렌 식수의 이 텍스트를 나는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대, 즉 팔루스중심의 가부장적 권위가 극성을 부리던 시대에 그 전통적 남자들과 불가피하게 싸우며, 그녀들의 견지(와 성적충동)에서 여성들과 여성들의 역사를 도래하게 해야 하는 보편적인 여성-주체되기를 향해 여성들의 성기를 지닌 텍스트들, 여성들의 진정한 텍스트들을 썼던 여성 작가들의 불안 속 용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하는 교과서로 읽는다. 거의 모든 문장이 그 첨예한 최초의 경계 전장에 나섰던 김명순과 나혜석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언어인 것만 같다.

 


해서 엘렌의 문장들은 그 자체로 그녀들 삶의 목소리로 들리기까지 한다. 엘렌은 공식석상에서 여성이 말한다는 것은 만용이며 위반이었다는 것을, 설령 그 위반을 과감하게 수행했더라도 그 말이 닿는 곳은 거의 항상 귀먹은 남성들이었기에, 그 남성들은 오직 언어 속 남성으로 말하는 것으로만 해석할 줄 몰랐을 뿐임을 지적한다. 팔루스가 지배하는 담론에 도전하는 것은 처절한 응징에 맞서 싸우는 길 뿐이었을 게다. 엘렌은 마치 이러한 전장의 결과를 눈앞에서 보듯 쓰고 있는데,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는 누이이자 연인들, 어머니 같은 딸들, 어머니이자 누이들이 살기를 원하다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 통제 불가능한 분자들에 대한 즉각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처형으로 끝나는 싸움이었음을, 한국사회 최초의 여전사들은 정말 미치거나 죽어야만 했다.

 

창피함과 두려움을 집어삼켰어. 네가 미쳤구나! 혼잣말을 했지.” -18쪽에서

 

여성들의 역사를 도래하게 하기 위해 싸움에 나선 전사는 엘렌의 혼잣말처럼 미쳐버려야 하는 공간에서의 처절한 투신이었다. 오늘 우리들은 이렇게 미친 여성들의 텍스트들에서 차오르고 범람하여 펄펄 끓어오르는 전정한 목소리를 듣는다. 엘렌 식수의 여성 글쓰기의 본질에 대한 이 위대한 텍스트가 반백년이라는 시간을 건너 이렇게 현실 사회의 틀 내에서 유지, 수용 거부되어 내쳐졌던 불가능했던 여성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바로 이러한 점이 팔루스중심의 남성 지배사회가 용서 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게다. 성적 대립의 모든 기호를 조잡하게 운반하는 장소로서 대상화된 여성, 욕망의 배출구로서의 여성이 아닌 여성이 욕망의 주체가 된 텍스트는 질서, 자신들 권력의 전복이었을 테니 말이다.

 

엘렌의 이 텍스트 속 많은 문장들이 문학 비평이 주제인 글들의 해석도구로 인용되거나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연유일 것이다. ()로고스적 무기가 단련되게끔 글을 쓰기. 모든 상징체계 속에서, 모든 정치적 소송에서 마침내 그녀의 뜻대로, 그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이해관계자이자 전수자가 되기 위해서와 같이 팔루스가 지배하는 담론의 도전에 응하면서, 상징 안에, 상징으로 그녀에게 부과된 자리, 즉 침묵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여성을 긍정하게 하는 글쓰기의 전범인 까닭이다.

 

엘렌이 예언처럼 전하는 문장이 있는데. 과거에 사형당한 이 여성들을 앞서가고, 그녀들 이후에 오는 그 어떤 상호주관적 관계도 이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라며, 이 최초의 싸움에서 미치고 죽어간 여성들 이후의 여성 글쓰기는 결코 팔루스 지배질서로 회귀할 수 없음의 선언이기도 할 것이다. “그대, 길들일 수 없는 여자, 시적인 몸, 기표의 진정한 여주인’, 그대의 효력, 우리는 그걸 내일 이전에 볼 것이다!” 여성의 말은 더 이상 억눌리지 않을 것이며 그것의 효력은 바로 지금에서부터라는 얘기다.

 

이 텍스트에서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지적이 있는데, 그것은 페미니스트들이 빠지곤 하는 오해에 대한 지적이다. 바로 의식화를 가장하여 추가적인 금지 사항으로 여성을 짓누르지 말자.”, 결혼과 임신이 남성과의 싸움이라는 격전지에서 가당치 않다는 목소리에 대해 비판한다. 엘렌은 말한다. “쾌락과 현실이 서로 껴안은 모순들의 공감에서 그대의 위치를 그대가 결정하라. 타자를 살려 두어라. 다른 욕구를 기입하라(Mets l'autre en vie)” 만약 우리(여성)가 내킨다면, 임신의 감미로움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임신한 여성에 관한 터부, 그녀에게 투여된 팔루스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또 다른 여성 억압의 표현에 스스로 갇히지 말라고. 그러면서 내 텍스트들 속에서 페니스가 순환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라고, 남성이 대상화한 욕구가 아니라 여성 주체의 욕구 드러내기가 바로 여성의 글쓰기임을 공표한다. “나는 모든 걸 원한다. 나는 그의 전체를 원하고 동시에 내 자신 전체를 원한다. 내가 왜 나에게서 우리의 일부를 박탈하겠는가?” 라고 묻기까지 한다.

 

오래된 팔루스적 소극들(pharces)”에 위협받는 여성은 옛날 여성이라고 말이다. 남성들, 메두사를 마주 보는 것이 두려워 방패로 가리고 시선을 피한 채 검을 휘둘러대는 남성들을 겁나게 하는 정체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죽음과 여성의 성기다. 벌벌 떨며 뒷걸음치면서 방패와 부적으로 무장한 채 메두사에 다가서는 그 못난 남성 신화는 발가벗겨져 저 멀리 내팽개쳐진다. 우리가 웃을(rire) 차례야.” 가장 내밀하고, 가장 강렬하며 가장 경제적인 민주적 대리보충인 이 여성 글쓰기의 선언문은 이처럼 맑고 청아하며 유쾌한 웃음소리로 가득 차있다. 메두사, 퀴어의 퀸, 엘렌 식수의 텍스트는 모든 여성들은 물론 장 주네(Jean Genet)를 닮은 남성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기쁘게 해줄 것만 같다.

 

(1) 섹스트(sextes) : 섹스(sex)와 텍스트(texte)가 결합된 조어로 복수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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