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여름 2025 소설 보다
김지연.이서아.함윤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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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계절이 다가올 즈음이면 세 작가의 작품이 수록된 이 계절의 소설 선정 작품집인 소설보다를 읽는 것이 내겐 거의 습관적 독서가 된 것 같다. 그럼에도 좀처럼 책장을 펼치지 못하고 한 달 남짓 묵힌 끝에 책장을 열었다. 김지연 작가의 무덤을 보살피다의 어떤 낭패감을 느끼게 하는 화수는 길을 잃었다.”는 문장에 이어지는 뒤늦은 후회겨울이 시작되고도 썩지 않은 낙엽들이 불현 듯 내 후각을 자극해왔다. 아마 이 기분 나쁜 후각 때문이었겠지만 이 자극적 인상이 곧장 책장을 넘기게 했으니 내 취향도 조금은 특이한 모양이다.

 

이서아 작가의 방랑, 파도는 이젠 시간 덩어리가 되어 세계에서 점차 소외되어가는 나에게는 통통 튀는 문체의 발랄함이 기분 좋은, 아니 잃어버린 기억의 시간을 되살리는 기분이었다. 아마 장소라는 한 공간을 점유하던 이들로부터 계승되는 공터’, 그 무한히 열린 가능태로서의 세계를 생각할 수 있는 화자 파도를 타기 위한 노력이 부러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무언가 익숙해지기 위해서 배우지 않게 된 내 체념에 스쳐가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 같은 작품이었다고 할까?

 

함윤이 작가의 작품은 내겐 두 번째 만남이다. 왠지 치밀하게 준비된 꼼꼼함이 떠올랐는데,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역시 이러한 내 선입견은 빗나가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단편은 공무원을 주인공으로 하는 3부작인 연작 중 두 번째가 되는 것 같다. 소도시 산길의 천문대에서 들려오는 낮은 음의 노래,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 이 낯선 소리에 스며있는 적의와 호기심의 이중적 감각의 공간을 거닐게 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세 작품은 낯설거나 혹은 새롭거나 이질적인 것에 대한 경계를 생각게 한다는 점에서 닮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바의 내적 이해는 조금씩 다른 곳을 가리킨다. 김지연 작가의 성묘(省墓)를 풀어 쓴 무덤을 보살피다가 대체 무엇을’ ‘보살피자는 것인지와 같이 주관적 믿음의 자의적이고 모호함을 빗대 산속 외딴 곳의 기이한 양어장의 썩은 비린내가 진동하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공존해야만 하는 악의에 대한 직시를 감각케 하고 있다면, 이서아 작가의 화자인 마을의 외지인이자 젊은이 는 그 낯섦을 해석해야 할 삶의 의미이자 무의미의 무게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 함윤이 작가의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는 익숙함과 낯선 것의 마주침에 엮여들어, 이를테면 변증법적인 출현인 적극적 호기심으로서의 새로운 세상의 상상적 시도처럼 보인다.

 

이처럼 이들 작품들은 함윤이 작가의 말처럼 낯선 것이란 결국 내가 자주 보거나 듣거나 겪지 못한 것은 나로부터 먼 것 일뿐임을 통해서 그것들의 실체에 다가가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밝혀내고 알아내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 장소, 생각 등의 세계를 규명하는 작업일 것이다. 무덤을 보살피다의 화수가 산속 성묘길 하산에서 길을 잃어 도달한 곳, 있지 않아야 할 곳에 있는 양어장의 먹이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드는 검은 입들의 징그러움은 그것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인물과 어울려 그 부정성의 존재가 풍기는 악의가 확 끼쳐온다.

 

이 기이한 장소를 배경으로 자기 믿음에 대한 패배의 사실을 인정하는 것의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공고(鞏固)하게 엮여있는 거미줄 같은 세계를 체험하게 한다. 아마 사촌지간인 듯한 화수와 수동이 가족집단으로 기피되었던 삼촌이란 인물로 이해되는 양어장의 인간, 두 사람에게 알지 못할 악의를 내뿜었던 인간이 화수네 집 안에서 어서 와라며 그들을 맞이하는 장면은 어떤 기시감처럼 낯익은 불쾌감이 몰려온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 내면에 축적된 악의를 발산할 기회만 나면 이 세계를 어지럽힐 그것들을 피해 갈 수 없음의 경고인 것만 같다. 지금 한국 사회의 곳곳에서 발호하는 추악한 기득권자들의 그악스러운 악의를. 언제든 우리집 거실에 출몰할 수 있는 혈연으로서의 악처럼 피할 수 없는 공존을 버텨내야 하는 그것들을 직시케 하면서 이 소설은 내게 충격적으로 각인된다.

 

방랑, 파도는 균형을 잡고 파도와 일체가 되어 그 흐름에 올라타 서핑을 배우는 외지인 의 내적 성장의 기록으로 읽힌다. 요양원, 백반 식당 등 에게 곁을 내어 준 사람들과 함께하며 삶의 무게를 배우고, 그 의미 혹은 무의미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 같다. 한가한 백반 식당의 무료한 시간을 유익하게 활용키 위해 자신이 좋아서 하는 요양원 할머니들을 돌보는, 아니 그들과 함께함으로써 배우며, 향자 할머니의 공원을 그녀의 죽음과 더불어 공터로 계승하듯 잔잔하게 이 세계를 성찰하는 시선이 있다.

 

 

【「방랑, 파도본문 82쪽에서

 

소설에는 하늘에서 내려다본 백반 식당 주인 남매와 가 파도를 타는 이미지가 있다. 파도 위에서 서핑을 타는 인간의 동작은 매우 역동적이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우리가 하늘을 나는 새들의 대형이 한없이 고요하게 느껴지듯 매우 정적인 것처럼, 그 시선, 사유의 낯설게 하기는 작가의 말처럼 삶의 허무와 반항으로서의 인간 행위를 모두 아우르는 우주적 관점을 선사해준다. 향자 할머니가 남긴 밑줄 그어진 책과 보잘것 없는 반지와 같이 유산 아닌 유산이 주는 기쁨과 부채감이라는 이중성이 그것일 것이다.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는 소도시 면사무소 신입 공무원 이노아가 졸린 개처럼 생긴 눈으로 훑으며 어디를 다녀오라고 지시하는 과장의 말에 따라 선배 공무원 박녹원 주사와 민원 속에서도 유난히 도드라진 천문대를 향한 첫 외근업무의 여정으로 시작된다. 괜스레 주변이 온통 적의감에 물든 것 같은 느낌이다. 민원인들의 목소리에 스며있던 불안”, “너무 오래 눈 마주치 마세요,” 와 같은 경계의 적의와 낯선 장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교접하는 삶의 신비적 흐름이 독자의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리며 모호한 마음을 깨운다.

 

소설에 등장하는 독수리들처럼 무섭지만 매혹적인 것이 비밀 종교인들의 이벤트로서의 천문대의 행사와 서로 교호하면서 그 낯섦의 정체로부터 출현하는 것의 수용을 도전케 자극한다. 그 결정은 김지연 작가의 악이 점유하는 불쾌일수도 있고, 이서아 작가의 이 공터는 내거야, 내가 하늘이랑 계약했거든처럼 활짝 열린 드넓은 공간으로서의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이기도 할 것이며, 함윤이 작가의 소설처럼 무언가 알 수 없는 새로운 세계의 도래에 대한 기대이기도 할 것이다. 이 번 계절의 소설들은 내겐 그 낯섦에 대한 긍정과 부정성을 모두 함축하는 이해의 폭을 조금 넓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이 작품집에서도 나는 또 한 명의 작가를 내 마음에 심어둔다. 좋은 작가로 성장하기를 마음속으로 응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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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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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공간에서의 위치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실체감을 지닌 가 느끼는 위치로서의 자리로 체감되는 것의 규명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 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라고 여겼던 것이 문득 불편과 불쾌로 가득 차올라, 그것을 명료하게 하여야만 이후 삶의 균형 감각을 찾을 수 있다고 강하게 느낀 까닭이다. ‘장 아메리의 시간이 축적된 몸, 세계 신뢰의 배신감에 몸을 떠는 이 책, 늙어감에 대하여; 체념과 저항 사이에서그것의 실체를 찾을 수 있으리라며 읽었다. ‘죽음에 관한 인류의 영원한 고전을 쓴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가 있다면, ‘늙어감의 가장 진솔한 사색은 장 아메리의 몫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라.

 

최초의 일격으로 이미 뭔가를 잃어버린다. 뭔가라는 게 무엇인가? 일단 세계에 대한 신뢰라고 해 두자. 바로 그걸 잃게 된다.”

- Jean Améry, 죄와 속죄의 저편; Jenseits von Schuld und Sühne

 

그래, 돌연 일격을 당했으며, 지금 내가 점유하고 있다고 여겼던 자리, 그 공간의 불안정성을 느끼게 하는, 잃어버린 그 뭔가의 실체를 발견한 것이다. ‘살아낸 시간(temps vécu)'인 바로 나의 실존감, 그 주관적인 시간이라는 절박한 문제가 내 인식에 불현 듯 등장한 것이다. 이 책은 어떤 생물학적 혹은 물리적이거나 사회학적 이론 탐구서가 아니다. 누구나 지각할 수 있는 직관과 정서적 사색이다. 그 누가 감히 늙어감을 현학인 체 떠벌릴 수 있다는 말인가?

 

시간을, 시간 그 자체를, 온전히 따로 떼어낸 시간을 이야기 할 수 있는가?”

-Thomas Mann, 마의 산; Der Zauberberg

 

1. 늙어가는 몸 - 살아낸 시간

 

시간은 흐르며, 스쳐 지나가고, 흩날려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과 더불어 사라진다. 대체 시간이라는 게 뭔지 자문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모든 게 그저 시간과 더불어 훅 불려 날아가듯 사라져버린다는 것일 뿐이다. 시간은 객관적인 그 어떤 정형화된 묘사가 불가능한 전적으로 인간 저마다가 작자 홀로 소유하는 측량할 길 없는 상대적 감각이다. 정밀하게 이해하려는 지성의 노력을 뼈아플 정도로 비웃는 게 시간이다. 빨리 지나가기만을 조바심으로 안달하는 젊은 날의 좋은 시간이 있는가하면, 어느 한 순간도 떨 칠 수 없이 소중해서 마냥 느리게 가기를 기대하는 사형수의 나쁜 시간도 있다.

 

창창한 미래를 앞에 두었다고 여겼던 젊은 날의 시간은 왜 그리도 풍족하게 생각되었는지, 시간을 말하는 자들의 입을 쳐다보지도 듣지도 않았었다. 지금의 자리에 대한 이 권태감과 불편함의 실체, 아니 그 감정을 유발하는 근인(根因)이 바로 이 시간의 발견이었다는 것이다. ‘늙어가는 자의 감각, 과거의 무게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을 맞이하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양 놀라 당혹스러워 하는 것이다.

 

게르망트의 대저택에서 환상에 몰입하여 되찾은 시간(temps retrouvé)'으로 기억을 음미하는 프루스트는 글을 쓸 때 시간의 지향성을 이미 깨달은 늙어가는 자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시간에 이토록 직면하기 주저하는 것의 본질과 하나씩 하나씩 대면하고 있다. 나는 늙어가는 자임을 승인한다. 장 아메리가 적시하는 사실들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론 바로 내가 직면한 현실의 사태임을 부정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늙어가는 이는 미래를 공간의 부정으로 경험하고,

이로써 실제로 일어나는 일의 부정으로 경험한다.” -38쪽에서

 

맞아, 미래는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자 세계인 까닭에 그토록 세계로부터의 소외를 느꼈던 것이다. 자리에 대한 불쾌감, 공간과 장소의 불편함은 다가 올 미래가 이 세계와 단절감의 연속임을,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불가항력의 숙명임을 알았기에 그랬던 것일 게다. 한때 인생이었던 것, 공간이었던 것이 이제 그저 시간뿐임을 깨달았기에 헛된 자기 연민으로 안타까워했던 것일 게다. 이제 공간인 세계를 내게서 떠나보내야 함을 안다. 시간이 되기 위해, 내 자신이 되기 위해, 그러나 나는 저항한다. 비록 살아낸 시간, 그 안에서만 살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는 세계 속에서 타자의 눈치를 보고, 그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에서 벗어나 시간인 내 안에 홀로 있고 싶은 충동이 뻣뻣이 고개를 쳐든다.

 

2. 나 아닌 나, 낯선 자아와 세계 추방

 

세계에서 자리를 잃은 늙어가는 자는 살아있음의 무의함으로 매일 저항의 광기 언저리로 내몰린다. 어쩌면 위안을 찾을 방도를 찾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뒤늦게나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나서는 것, 살아온 시간, 시간이 된 내 몸인 이 존재에 대한 물음인 인생의 의미라는 가짜 물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 게다. 시간을 두고 성찰하는 일은 곧, 인생을 두고 경악하는 인간의 작업임을 처절할 만큼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은 늙어가는 가는 자임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장 아메리는 늙어감의 의도적 부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늙어감의 충격과 혼란, 체념과 저항에 깃들어 있는 사실들을 직면케 함으로써 타협? 아니, 마지막 시간에 이르기까지 분열되는 자아의 봉합과 안정을 위한 균형을 마련하는 것이다. 젊음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거울을 보며 돌연 낯설게 느껴지는 내가 나 아닌 나를 바라보는 그 충격의 순간을. 나아닌 나가 평소 익숙했던 나를 문제 삼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 젊게 느껴져라는 의식 한 층의 속삭임이 절정의 시절 이끌고 다니던 외적인 나와 상관없어 보이는 형상에 경악하는 것이다.

 

타인이 되어버린 거울의 자화상, 자신을 실감하라는 이 운명의 심판에 아연실색하는 것이다. 얼굴이 세계의 부분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세계에 속했으며 나의 얼굴은 나 자신인 동시에 세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낯설기만 한 얼굴은 더는 세계로 향해진 게 아니라는 것, 세계로부터 추방당한 얼굴임을 제시한다.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동시에 자신이 된 이 역설이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되어, 자기 소외와 자기 신뢰 사이의 불협화음 속에 지치게 한다.

 


건강을 잃었을 때에만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이 말이 진부함을 떨쳐낼 수 없듯, 뭐 대단한 진리는 아니지만, 어떤 느낌을 갖는 다는 것은 그리 즐거운 감흥이 아니다. 온전한 건강을 누릴 때는 이 느낌이란 걸 가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 바깥에 머문다. 세계라는 공간(자리)에서 떼려야 뗄 수 없이 자아와 맞물려 있는 까닭이다. 늙어가는 자는 갈수록 이 세계를 잃어가는 가되며, 정신과 몸의 기억을 끌어모은 과거로의 시간이 되고, 갈수록 그자체가 된다. 이제 몸은 한때 세계를 매개해 주던 그것이 더는 아님을 깨닫게 된다. 아니 오히려 세계와 공간을 나에게서 막아버리는 장애물이 되었음을 인식한다. 몸이 바로 인간인 내가 지닌 가장 지극한 진정성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생명의 권리를 담보하는 것은 결국 몸임을 절실하게 깨닫는 까닭이다.

 

나는 세계에서 후퇴해 굴욕을 주는 공간으로부터 이탈해 자기 방에 은거한다. 세계이자 사회인 세상은 의학치료와 악의적 농담들을 지어내며 청춘노인이라는 모순된 부조리한 언어로 윽박지르지만, 꼿꼿한 자세와 건강함을 과시하라는 이런 가짜 논리들이 늙어가는 사람에게 세상이 등을 돌린다는 사실을 반박하지는 못한다. 정신 승리하는, 마치 늙음을 무슨 지고의 정신적 경지처럼 설레발치는 자들을 본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무슨 정신적 자아, 사유실체는 연장실체인 몸과 다른 양 헛소리들로 엮인 공갈말로 채워진 책들로 노익장?을 과시하지만 늙어감이라는 오로지 몸이라는 실체만 남아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님을 기만하는 것일 뿐이다. 빌어먹을 위장, 더럽게 아픈 다리, 이렇게 몸을 ()-자아로 폄하하며 대항하려 하지만 허리를 곧추세운 진정한 사유실체로서의 자아라는 것이 과연 따로 있겠는가? 늙어감, 본격적인 진리가 밝혀지기 시작하는 과정이 열리는 고통 축제의 시간으로서 이렇게 세계로부터의 소외, 자기 부정으로 그 실체를 알려온다.

 

세계에서 퇴장을 강요하는 늙어감에 대한 이 부정이란 달리 표현하자면 타인의 시선으로 정의되는 나임을 우리가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돌 숭배가 사회의 지배적 흐름인 시대 분위기 탓에 시대는 물질의 생산과 성장, 경제적 요구를 재촉하며, 이 강요된 흐름은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닌다. 세계와 재산은 타인과 그 소유여부를 놓고 끝없이 다툼을 벌일 때에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는 늙어가는 자에게 미래의 신용을 더는 인정해주려 하지 않으며, 나아가 미래 자체를 인정해주지 않으려 한다. 사회는 절대 앞으로 뭐 할래? 라고 묻지 않는다. 늙어가는 자는 깨닫는다.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제까지 시도해왔고 포기한 일의 총량일 뿐이라는 것을, 이것이 남은 세월을 결정한다는 것을. 타인의 시선이 늙어가는 자에게 측정해주는 사회적 연령의 굴레에 갇혀있다는 것을. 이미 해낸 일을 헤아려 무게가 재어진 늙어가는 인간은 심판을 받은 것이다.

 

인생 2? 가소로운 얘기다. 2막이란 1막을 단지 재조명하는 것으로 반론 혹은 대답으로서의 행동이란 차원이지, 이미 심판된 것을 넘어서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지만 각자의 지평선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으려 시도하면 정신병자, 광인 취급을 받기 시작한다. 세계가 저주를 퍼붓는다. 얌전하게 있으라고. 하지만 살아있는 한 세계 단절의 요구를 거부하고 저항하며 막판까지 결판을 내야만 하는 싸움, 가진 모두를 내건 도박의 시도를 거둘 수 없다. 나는 어떻게 균형을 찾아야 할까? 나는 거듭 제자리를 향한 자리의 이동, 공간에서 퇴장, 세계로부터의 퇴출을 수용하지 못한다.

 

3. 소유의 세계가 강요하는 사회적 연령의 굴레

 

이 세계는 인생 방향의 선택을 소유의 영역으로 설정하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소유의 세계임을 부정할 수 없다. 가진 게 없다면 사회적 나이 먹음이라는 과정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실존도 인정받지 못하는 쓰라림을 곱씹게 하는 세계이다. 아무것도 벌어들인 게 없다면 신분을 가지지 못한 무명씨에 지나지 않는다. 고작해야 다락방에서 눈물 젖은 빵이나 씹는 천재일 따름이다. 소유사회는 개인의 자율성을 무력하게 만든다. 소유해야만 한다는 압력 아래 개인은 타인의 시선 앞에서 자신의 뜻을 펼쳐나가는 자기만의 전망을 추구하는 인격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소유의 이정표에 맞춰 인생의 방향을 잡도록 강요된다. 소유가 존재를 규정하는 세계인 것이다. 이 마수로부터 벗어나려 하거나 소유를 키울 경제적 수단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시장가치를 수집하지 않는 개인에게 사회의 빈자리나 지키라고 심판한다. 자신을 새롭게 기획해보려는 이탈자, 아웃사이더를 허락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 우리의 잠재력은 세상 전체이며 모든 공간이었다. 툭 터진 공간이 펼쳐져 있었기에 그 공간이 모두 자신의 공간이라 믿었다. 그러나 가진 게 별로 없이 근근이 존재할 따름인 인간에게 사회는 일찌감치 사회적 연령을 정해버린다. 사회적 연령은 곧 마주하는 현실그 자체다.

 

소유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자신을 구축하는 일에만 몰두하느라 황폐해진 늙어가는 사람은 돌연 사회가 그에게 요구한 것에 자신을 맞춘 정도에 국한 된 사회적 연령을 부과받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타인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 새로운 자리를 향한 떠남의 여정이 가능할까? 나는 기어이 세계가 강요하는 시선에서 탈주할 것이다. 나는 아직 체념할 수 없어 저항한다. 그렇다고 늙어감을 저지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자기기만을 그 어떤 순간에 이를 때까지 계속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는 이것이 나의 고유한 자아 균형이 될 것이라고 결심한다. 나는 사회가 은근히 체념하도록 몰아붙이는 사회적 실존의 죽음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밤이 이미 시작되었을지라도 말이다.

 

왕성한 정력을 자랑하는 어느 기업총수, 학문적 담론의 영향력을 뽐내는 어느 학자, 정치적 권력을 발휘하는 정상급의 연로한 인사들의 사회적 연령을 말하며 그들은 여전히 늙어가는 자들이 아니라는 무식한 소리도 들려온다. 세계는 그들에게 사회관리의 기술로써 맞춤의 자리로 이용하는 것일 뿐, 그 노인들에게 과연 젊었던 시절의 그 광활한 삶의 공간, 의미 충만한 인생이 남아 있기는 할까? 황혼의 노년, 청춘을 사는 노년이니 하며 드라마, 광고에서 떠들어대지만, 그 늙어가는 자들의 공간은 기껏해야 나무랄 데 없는 양로원에 불과할 것이다. 이들의 배후에는 한창 빛나는 지성을 자랑하는 우수한 젊은이들의 떠받듦이 있을 뿐이고, 노인들은 점잖게 시치미를 떼며 아직 젊은 체 할 뿐이다. 저명한 교수는 이미 지적인 능력에서 서른 살 조교에게 추월당했으며 단지 채집한 명예의 학위를 자랑할 뿐임을 눈가림할 따름인 것을,

 

늙어가는 것은 결단코 아름답지 않다. 젊은이가 바라보는 노인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반감, 존경으로 위장된 반감, 이 빛바랜 인습의 공경은 아무것도 아님에 대한 두려움의 반감이다. 그 의미 없는 늙음이 존재로 밀고 들어오는 저항으로서의 반감. 이러한 반감은 젊은이의 노인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늙어가는 자들 동년배에 대한 반감은 마주하는 늙음에서 읽히는 존재 부정의 표시에 대한 거리감에서 오는 반감이다. 박수갈채를 받았던, 무명씨로 살아왔던 모든 인간은 늙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세계로부터 해체당하는 것이다.

 

감히 늙음의 긍정을 설파하는 자들, 긍정적 태도, 품위 있고, 불평하지 않는 노인, 젊음과 더불어 젊게 살자!, 인생은 예순부터! 이 기만적 구호들은 세계로부터 배제하면서도 불변의 존재라는 정장을 강제로 노인들에게 입히며 소비경제 주체로서 착취의 대상임을 잊지 않는다. 늙음을 바라보는 긍정적 태도? 그래, 일말의 편안한 기분은 줄 것이다. 그렇다고 늙어감의 파괴라는 본질을 가릴 수는 없는 것이다. 타인이 늙어가는 자를 바라보는 시선 안에 녹아있는 부정이 바로 자신의 문제임을 알아차리고 몸을 일으킨다. 결코 실행 할 수 없는 일을 하려 과감하게 떨쳐 일어나는 것, 아마 진정 품위 있게 늙어갈 유일한 가능성이자 기회일 것이다.

 

4. 결어 - 문화적 소외, 그리고 늙어감의 체념과 저항의 양면성

 

늙어가는 자는 이 같은 몸의 노화인 자기소외, 사회적 연령이라는 세계배제의 소외와 더불어 문화적 소외도 겪는다. 젊은 시절의 유행, 기억으로 구성된 각자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철지난 유행은 새로운 신호로 가득한 현재의 표시체계들의 해석에 곤혹스러워 한다. 자신의 해석은 과거라는 관계의 지점에서 새로운 현실이라는 시대의 관계로부터 해석을 알지 못한다. 교양을 쌓지 않은, 혹은 공부하지 않은 늙어가는 자는 낯섦의 정체에 무기력한 거부와 불쾌감을 드러낸다. 사실 이러한 문화적 표시체계는 동시대 내부에서조차 커다란 편차를 드러내기에 그가 아는 만큼 현재로부터 소외된다.

 

그럼에도 새로운 표시와 그 관계는 오로지 그 고안과 배열에 참가한 사람들에게만 완전히 유효하며 그들만이 쉽게 알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옛날만을 기억하는 늙어가는 이들의 아집은 곤욕을 치러야만 한다. 새로운 표시의 도전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진 이러한 인구가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퇴행의 저항과 마주해야한다. 그런데 이 퇴행의 주체인 늙어가는 자들이 세계에 저항할 때 그 반동의 영향은 정말 끔찍한 것이다. 오늘의 많은 세계가 극단적 우경화로 폭력과 거짓, 기만의 세계로 이동하는 것은 늙은 것들의 양적 증가, 그 양적 지배력 때문일 것이다.

 

세계의 몰이해로 빚어진 거부(拒否)들은 단지 개인적 소외의 처연함이 아니라 사회적 퇴행의 역사 반동적 사건의 투사(投射)이기도 하다. 이 늙음의 사색은 바로 그 늙음이 직면해야만 하는 피해 갈 수 없는 현실의 실체들을 여과 없이 드러내 체념할 할 것인가? 아니면 저항 할 것인가 묻는다. 우리는 무수한 자기모순과 세계의 부조리에 당면하고, 그 모호성에서 언젠가 직면했는지도 모르게 다가 올 것에 이르기까지 살아내야 한다. 체념의 모습들은 각양각색일 것이다. 또한 저항의 태도들도 무수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저항의 태도는 체념의 이면이고 또한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늙어감은 이렇게 애매모호함 사이에서 방황하며 시간으로 사라짐을 자각케 하는 어느 순간에 시작되는 표시체계인지도 모르겠다. 노년의 지혜나 노년의 행복 따위의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들은 이 책에 접근하지 말라. 바로 그러한 통속적이고 싸구려인 위선과 기만을 걷어내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늙어감의 진실을 말하는 책이니까 말이다. 그럼으로써 늙어감, 그 시간성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 늙어가는 자로서 직면한 곤혹의 실체를 더욱 극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다. 자신의 늙어가는 자아가 느끼는 그 분열된 자아가 지금 무얼 할 수 있는지, 그 내실에 품위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잿빛의 육중한 묘비가 그 삶의 흔적을 증언하리라”-장 아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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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6-25 0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나이 드는 걸 그렇게 좋게 여기지 않는 것 같기도 하네요 옛날에는 오래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오래 살면 어른으로 존경하기도 한 듯한데... 그것도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을 때였겠네요

이제는 더 오래 살기도 하는군요 과학과 의학이 좋아져서... 아프면서도 약을 먹고 살잖아요 어딘가 아프기보다 덜 아프고 살고 싶은 마음도 있군요 나이를 먹는다 해도 자기 나름대로 살면 좋겠다 싶습니다 자기 고집만 부리지 말고 유연하게...


희선

필리아 2025-06-25 07:58   좋아요 0 | URL
이 문장이 남는군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떠나 시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서 자아를 찾고자 하기 때문에 평안히 쉬는 일이 절대 없다. 어느 날 시간의 비밀을 알아낸 우리는 당혹한 나머지 경악한다. 모든 상처의 치유가 기만적임을 깨달았기에˝
이게 늙어가는 자의 앎이라고 말이죠.
 
남자의 자리 - 개정판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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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에토스와 존재의 방식, 생각하는 방식조차 달랐던 세계를 지나왔죠. 그 충격은 여전히 제 안에, 육체적으로도 남아 있어요. 어떤 상황들은....아니, 쑥쓰러움이나 불편함이 아니라, 자리, 마치 저의 진짜 자리가 아닌 것 같아요.” - 진정한 장소; le vrai lieu, 80쪽에서

 

아니 에르노가 미셸 포르투 감독과 진행한 인터뷰 모음집인 진정한 장소; le vrai lieu는 그녀가 제자리, 혹은 진정한 장소를 찾았다는 느낌에 이르는 내적 여정을 되짚어보는, 즉 자신의 존재 양상을 술회하는 글이다. 이 대담 속 한 문장의 인용으로 시작하는 까닭은 이 책, 남자의 자리 ; La Place는 어쩌면 그 여정의 주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는, 바로 현재 감각하는 자신의 자리에 끊임없이 출몰하는 지나온 자리와의 괴리, 긴장과 모순으로 얽혀 분열된 아비투스로 주체가 대립되는 두 얼굴의 화해를 위한 관계 회복의 글쓰기라는 생각에서이다.

 


이 작품의 읽기를 추동한 것은 클레르 마랭의 제자리에 있다는 것; etre a sa place으로 촉발된 것이기도 하지만, 분명 지금의 내 자리가 잘못된 자리라는 굴레로 여겨짐에 따른 그 벗어남의 갈등을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당분간 이 자리에 대한 읽기는 계속될 것 같다. 온전히 자리의 감각에 대한 내밀한 체화를 통한 이해에 이르기까지, 물론 클레르 마랭은 계급 횡단, 다시 말해서 사회 하층의 삶에서 중산층의 삶으로 이동한 사람들을 말하며, 그들이 겪는 육신에 새겨진 아비투스와 새로 진입한 세계에서의 아비투스의 분열로 인한 은밀히 습격해오는 자기 위선의 감각에 대한 혼란스러움의 지적을 통해, 자리가 사회적 정체성의 한 측면을 의미함에 있어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를 예시하고 있지만, 아니 에르노의 이 책은 그녀 자신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자기 자리, 진정한 자리를 확신하기 위한 내적 관계회복의 여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농장 일꾼으로 밥벌이를 하여야 했으며, 공장 노동자와 밭 일꾼의 삶을 전전해야했던 아버지의 인생과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사이에 찾아온 거리, 계층 간의 거리이며, 이름 없는 그 특별한 거리에 대한 이별의 사랑별곡일 것이다.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라는 남자의 자리, 그것을 꾸밈없이 존중하고 배반없이 묘사하며 가족과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부인(否認)의 감정을 극복하기 위한 이 글쓰기를 통해 정화된 새로운 탄생을 시도한다.

 

본문 47쪽에서

 

자신의 열등감이 내면화된 한 인간의 자기 방어의 말일 것이다. 사회와 타자를 의식해 스스로 자기 목소리와 행동을 억제하며 자기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도 모른 채 자기 실존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다 아버지의 이러한 태도는 딸인 아니 에르노에게도 내면화 되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표현되고 있지만 또다른 작품 《La honte; 부끄러움, 수치심》에서도 거듭 반복되고 있음에서 한 존재의 내면을 차지하게 된 빈곤과 계층의 열등감은 그녀가 지식인 중산계급에 진입하고서도 제자리에 대한 불안의 중대 요소였음을 의미할 것이다.


본문 35쪽에서

 

이렇게 지극히 당연하게 흘러가던 순간들을 세세하게 상기함으로써 하류라 여겨지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 회복과 그에 따른 소외를 고발하는 일 사이에서 좁다란 길을 발견한다. 바로 그러한 삶의 방식은 오롯이 그녀와 그녀의 가족의 것이었고, 심지어 행복하기도 했으며, 수치스러운 장벽들의 인식임을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지난 그 자리가 행복이자 동시에 소외이기도 했음을, 그 모순 사이에 흔들리는 존재들임을 확인한다. 그럼으로써 저자는 내밀한 진리에 대한 기나긴 픽션을 통해 불투명했던 것들에 빛을 비추고,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적절한 거리, 감정 조절, 말의 콘트롤, 수사학적 기교를 깡그리 제거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이 글쓰기를 통해 그녀는 진정한 자신의 자리를 확인한다.

 

아니 에르노는 글쓰기는 나만의 장소다.”라고 말한다. 자신이 자리한 모든 장소 중 유일하게 비물질적이며, (...) 어쨌든 그곳에 그 모든 장소가 담겨있다고 확신한다.“ 아버지와 자신의 정체에 의심을 갖게 하는 지나온 자리의 끊임없는 불편함은 자신도 모르게 힘 또는 굴욕의 징표들을 가지고 있는 이들, 그녀의 아버지가 살던 환경이라는 잊고 있었던 현실을 되찾게 한다. 이렇게 그녀는 교양 있는 부르주아의 세상으로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두고 가야했던 유산을 밝히는 일을마친다.

 

우리는 생애 내내 자리를 이동하는 존재들이다. 발목 잡는 지난 자리의 정체성, 그리고 현재의 또다른 굴레들, 삶이 지닌 복잡성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시도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자신을 온전히 내맡겨 흡수되며, 그 지배력 속에서 오히려 순수한 활동성, 존재감의 강화, 가득 찬 현존을 느낄 수 있는 고유한 내적 필연성의 장소, 있어야만 하는 장소라는 느낌, 내 주체의 역량의 증진과 창조능력의 긍정이라는 형식임을 느끼게 하는 자리임을 확인하려는 노력은 아마 눈을 감을 때까지 지속될 모양이다. 인생의 불투명함을 밝히기 위해, 그 삶을 구하기 위한 이 글이 지금 이 순간의 나와의 화해를 위한 방편을 생각해보라 권유하는 듯하다.

 

(rame)가 우리를 뱅뱅 돌게하네 - 아버지가 부르곤 하던 노래,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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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에 있다는 것
클레르 마랭 지음, 황은주 옮김 / 에디투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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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읽었으면 하는 책, 오직 나만이 소유한 책이었으면 하는 이기심을 작동케 하는 책이다. ‘자리가 함유하는 삶의 수많은 양태들에 대한 사유 그 어느 문장도 읽는 이의 내면에 파동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없다. 자리를 박차고 떠나기를 갈망하는, 제자리라고 여겼던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자리가 나를 한없이 줄어들게 하고, 내 안의 목소리를 잠재우게 하는 속박임을, 나를 한계에 속박해 제약하는 자리임을 직시하게 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럼에도 떠나지 못하는 무의식으로 은폐된 것의 실체, 내 자리에 얽혀있는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한 배반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하는 두려움의 주춤거림이었음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자리에 대한 이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탐사의 여정은 하나의 어휘, 문장, 페이지마다 간결하고 압축적인 의미들이 빠짐없이 그대로 공감의 전율로 내게 전해졌다. 하나의 의미도 놓치지 않으려고 밑줄과 텍스트의 여백에 감탄과 동의와 놀라움의 메시지들을 써놓는 일을 처음으로 집요하게 하도록 한 책이다.

 

자리라는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람 또는 동식물과 사물이 위치하고 있는 공간에서부터 일정한 조직체에서의 직위나 지위,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일어나는 곳이라는 십여 가지 뜻이 나열되어 있다. 더욱이 이러한 사전적 의미 뿐 아니라 그 상징적이거나 각종 비유의 뜻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다의(多義)성을 지닌 어휘라 할 수 있다. 또한 제자리는 있어야 마땅한 또는 본래 있거나, 위치변화가 없는 위의 모든 의미를 품은 자리로 이해되어도 무방하리라.

 

따라서 책의 제목에 있는 '제자리에 있다(etre â sa place)'는 것은 본래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거나, 마땅히 있어야(머물러야) 하거나, 고정되어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아우른다. 이로부터 우리는 몇 가지 물음을 떠올릴 수 있다. 내가 있어야 할 제자리란 정말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진정한 장소이자 공간일까? 그 자리는 변화없이 내가 머물 수 있는 곳일까? 만일 누군가 내게 제자리를 지키라고 할 때 그것은 대체 어떤 함의를 품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제자리란 대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로 작동하는 것일까? 만일 제자리라는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라고 할당된 자리가 내게 어울리지 않는 불편과 불쾌감으로 여겨질 때 나는 다른 자리로 이동하여 새로운 자리를 제자리로 삼을 수 있을까?

 

책은 바로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사유이며 응답이고, 그것은 제자리를 중심으로 우리들이 자리라고 부르는 것들이 삶의 상황들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며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의 통찰이다. 나아가서 우리들 개인 각자의 바른 자리로서의 제자리를 어떻게 발견하고 그것은 또한 어떠한 자리여야 함을 이해케 하는 삶의 주체자로서의 각성에 대한 찬란한 철학적 웅변이다. 저자 클래르 마랭은 이들 자리에 대한 성찰의 여정에 그녀의 깊고 총명한 사유들을 조르주 페렉, 앙리 미쇼, 마르그리트 뒤라스, 아니 에르노 등의 문학작품들, 피에르 부르디외, 미셸 푸코, 샹탈 자케 등의 철학적 담론은 물론 영화작품까지 아우르며, 끊임없이 자리옮김을 지속하는 이동하는 존재로서의 삶인 우리 인간들의 불가피한 행위의 의미를 파헤친다.

 

우리는 결코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으며, 때로는 이동하지 않고서도

내면의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 문장은 마치 우리네 삶의 형식이 정주(定住)민과 유목(遊牧)민으로 양분되어 있어 양자택일의 선택 가능성이 있는 듯 하는 말들에 대한 조르주 페렉의 비판에서 연유한, 저자 클래르 마랭의 언어이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언제나 하나의 여정인 것을 어찌 정주와 유목이라 구분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문득 혹은 수시로 어떤 삶의 한 자리에 갇혀있음을 깨닫고, 그 자리로부터의 탈주를 꿈꾸곤 하지 않나? 또한 이미 속해 있는 정서와 관계적 공간에 안주하고 있었음에 대한 피로가 습격해오기도 하고, 때론 분류하고 낙오시킴으로써 질서와 위계를 지닌 자리들은 제자리라고 여겼을 자리가 강제와 압제의 성격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급기야 도저히 살 수 없는 자리도 있다. 숨 막히게 하는 자리가 야기하는, 내 태도와 행동을 규정하고 결정짓는 암묵적인 보이지 않는 강제들로 내 삶의 창의를 중단시키고 훼방하는 사회 또는 가족이 지닌 관성의 힘이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가? 이때 우리는 지금의 자리를 벗어나 다른 자리로의 이동을, 그 떠남을 고뇌하지 않는가?

 

이 제자리라는 말은 양면성을 지닌 단어다. 각자의 고유성이 사라진 촘촘하게 짜인 세계, 모든 것이 마치 계획되어 있어 갈림길조차 예측하는 게 가능해 보이는 삶이라고, 내 주변과 사회는 자신이 되어야만 하는 것, 기대되는 것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무언의 압력을 가한다.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가해지는, 결코 상상하지 못하게끔 옥죄는 세계의 자리 말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우리들은 내게 맞지 않는 자리를 떠나 새로운 삶의 양식을 향해, 마음껏 자유 넘치는 창의의 삶이 가능한 희망으로써의 제자리도 있다. 그래, 우리 인간은 고정된 질서로서의 제자리와 욕망을 실현할 새로운 삶의 지대로써 제자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고 표류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런데 떠난다는 것이 그저 지금이라는 현실에 얽힌 것들을 툭툭 털어내고 도주하면 되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이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옮기는 일은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주체의 자리 자체를 옮기는 훨씬 내면적인 자기성찰의 과정을 수반할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각종의 구조물과 논리와 신호의 벽들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이동을 방해받는다. 오랫동안 나를 정의해 왔던 자리를 버리고 다른 정체성을 주장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를 옥죄는 끈들이 발하는 무언의 관성적 요구들이 수시로 새로운 삶의 도전 길에 심리적 억압을 지속한다. 이도 저도 아닌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제자리로 불리는 이 자리에 염오(厭惡)와 근원적 불쾌감이 솟구친다. 물질적으로 저당잡히고, 족쇄가 채워진 이 제자리를 떠나 방향을 잃은 채 표류하며 나를 정의해 왔던 정체성을 버리고 다른 정체성을 주장하려는 것을 주저케 한다. 그들이, 사회가 나를 배반자라고, 인간의 도리와 세상 삶의 관습을 저버렸다고, 아니 내 스스로가 이러한 족쇄들을 저버렸음에 대한 죄책감을 떨어내지 못하는 까닭일 것이다.

 

이미 머물러 익숙해진 장소, 이것에 나를 맞추고 순응했기에 가능했던 자리, 이것을 안정이라 믿으며 정체된 삶에 나는 정말 오랫동안 길들여져 있었음을 알아 버렸다. 내 실존은 얼붙었고, 이동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평온함과 친숙함에 웅크린 채 안주해왔던 삶을 이제 떨쳐버리려 한다. 동물은 자신의 환경 속에 갇힌 채 세계 빈곤속에 존재한다.이처럼 단순한 삶 속에서 제자리에 존재한다는 것은 축소된 세계의 제한된 실존에 만족하는 것임을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들은 이 제자리에서의 탈주를 상상하는 존재이지 않은가? 우리들은 뿌리내리는 존재가 아니라 이동하는 존재에 가까울 것이다. 사전에 결정된 세계에 사는 것을 끔찍이도 고통스러워하는, 그래서 타자의 세계, 우리 자신의 환경 바깥으로 이동하려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내가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하여 주는 곳, 세계로부터 나를 잘 지켜 보호해 주는 구역과 관계 맺기를 갈망한다. 정말 내 삶의 원기를 생생하게 회복시켜주는 곳,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 갈 것을 제안하는 장소를 향한 자리옮김을 희구한다. 내 존재를 문제 삼지 않는 곳, 길을 잃을 염려가 없는 곳, 내 실존을 편안하게 해주는 곳을 향한 이동을. 물론 다른 자리로 떠나기 위해서는 그 다른 자리에 진입하기 위한 주문과 규칙과 비밀번호가 있을 것이다. 그곳을 지배하는 언어와 여러 식별표지를 해독하는 배움을 지녀야 할게다. 설혹 실패할지라도 아마 그 소란과 잡음의 모험이 불러일으키는 해방의 환희와 흥분이 삶의 즐거움을 줄 것이라 믿는다.

 

언제부터 내 목소리를 잃었을까? 웃음, 고함, 직설적인 말들은

나의 음성 레퍼토리에서 사라졌다.”

 

책은 이와 같은 인간 보편의 자리옮김에 대한 존재적이고 실존적 욕망의 본질만을 탐사하는 것은 아니다. 자리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고 억압하는 방법으로서 선택하는 힘을 포기케 하는 힘의 작동이기도 한다. 자리는 여성, 서민, 그 밖의 소외된 무수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리, 할당된 틀 안에 머물라고 욕망의 제한을 명령하기도 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연인이 인용되고 있는데, 마치 과거가 라는 자신이 그대로 유지되어야 할 의무를 짊어지기라도 한 듯 숙명적 수치심의 자리, 자기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는 실패와 결말에서 도주할 수 없음을 내면화시킨 자리도 있다. 자신의 저주받은 정체성, 혈육의 자리, 그 실추를 피하기 위해, 딸에게 도망치기를 엄명하는 어머니를 마르그리트는 쓴다.

 

아마 이와 유사한 자리의 형태로 장애의 자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면화시키는 사회의 여러 형상들이 사회 문턱을 암시하며 스스로 제자리에 있어야 함을, 제자리에 있지 않음을 책망하듯 장애를 확인시킨다. 모든 것이 너무 높거나 낮고, 넓거나 좁으며, 위험하거나 접근 불가능할 때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게 된다. 이 세계가 이러한 물질적 공간으로 장애를 생산하며, 공간과 자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은밀히 강요한다.

 

이렇게 삶을 축소하고 사라지기를 내면화시키며, 내 자리의 투명화를 요구하는 세계는 우리에게서 제목소리를 앗아간다. 이것은 비단 사회라는 거대조직의 일반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가족 사이에서, 가까운 지인들의 모임에서, 나를 비교적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내 말허리를 자르고, 나 대신 말하며, 나에게 감히 삶을 설명하려는 상황을 빈번하게 마주할 때, 우리는 제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게 되고, 이 체계적으로 평가절하당하는 현상 속에서 스스로 목소리 내는 것을 금하기에 이른다. 내가 있는 자리가 맞지 않다는 듯 자리를 부정하는 시선과 행태들이 우리들을 점점 줄어들게 한다.

 

결국 밖으로 기어나오는 목소리는 다른 이들이 듣고 싶어 할만한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축소를 위한 노력에 경주하는 왜소한 스스로에 지쳐버린다. 다시 말하자면 내 입을 막는 것은 누구 손인가?” 라고 물을 때 그 손이 바로 내 손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억압하는 내면화된 자기 축소, 자기 부재를 형상화하려는 움츠러든 자아 말이다. 실존의 심장부에서 올라오는, 자기 검열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실시간으로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해줄 테시투라(tessitura), 우리 고유의 목소리를 해방시켜줄 제자리를 향한 떠남, 주체가 자신과 맺는 관계의 변화를 만들어줄 자리로의 탈주가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리라.

 

아니 에르노는 인터뷰집인 진정한 장소에서 자신의 계급 횡단으로 인한 제자리의 벗어남에 대해 말한다. 자신의 뿌리였던 과거와 현재의 자리가 가져오는 이중의 거리로 인한 괴리, 지금 속해있는 자리가 마치 자신의 자리가 아닌 것 같은, 성취도 진짜 성취처럼 여겨지지 않는 신중함을 요구할 때 계급횡단자들, 망명자들, 이주민들은 그 낯섦의 감각에 당혹스러워 한다. 마치 저의 진짜 자리가 아닌 것 같아, 진짜 그곳에 있지 않으면서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라고 말하며, 두 계급 사이를 통과하는, 혹은 두 개의 영토가 교차하는 경험을 가진 자들의 견뎌야 할 지배적 도식으로부터 벗어나는 능력만이 삶을 버텨낼 수 있었음을 증언하기도 한다. 철학자 샹탈 자케가 말하는 동일자의 반복 또는 감금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능력이라고 특징지은 -재생산’, 아마 이것이 바로 삶의 영속적 재구축과 재배치를 만들어내는 역동력이 아닐까?

 

우리는 결코 실존 안에서 제자리에 머물 수 없는 존재인 것만 같다. 부유(浮游)하는 존재, 모든 인간 존재가 유목민임을 자각할 때 자리에 대한 그 고정적이고 억압적이며 폭력성마저 띠고 있는 자리를 둘러싼 투쟁, 공간의 시련은 조금이라도 이완되지 않을까? 책은 많은 지면에서 실제적이든 상징적이든 변두리로 몰린다는 것, 즉 부적절한 자리에 놓여 삶이 위축되고 발목 잡히는 양태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의 발목을 잡아 우리의 행동과 욕망이 일치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그래서 타이밍을 잃고 기차를 놓쳐버리게 되는 자리들을 생각게 한다. 어떤 자리도 소유하지 못한 상태임에도 점유해야만 하는 자리가 있는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해야만 하는 부재증명의 역설적 자리도 있다.

 

여기 있지만 절대 드러나서는 안 되는 자리, 제자리에 있으라고 요구받은 자리는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린다. 자리란 이렇게 다양한 실존의 혼란이 초래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제자리를 찾는 여정을 멈출 수 없다. 진정한 장소를 찾기 위해, 제자리라는 감각을 찾기 위해 자신의 생의 사실을 쓰는 순간만큼 살아있음을 느꼈던 아니 에르노처럼 우리들은 영원히 자리옮김의 표류를 하는 존재일 것이다. 다른 장소를 향한 꿈으로부터 우리들은 자기 정체성의 양분을 공급받는 것일 게다. 내가 열망하는 이 자리, 제자리에 있다고 느끼는 현실적이면서 내면적인 장소, 내 실존이 평온함을 느끼는 자리를 향한 그 지고한 공간배치에 대한 인간의 염원을 풍부하게 향유할 문학적 문법의 아름다운 철학담론서다. 진정한 내 자리를 고뇌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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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미하엘 페리에의 바다저편의 회고록의 한 문장에 나의 느낌을 이입하여 변용한 글이다. 아마 이것이 이 책에 대한 진정한 감응의 소산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이 통렬한 잔인함에서 고통과 희열이 교차하는 착잡한 해방감을 느낀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언급에서 순간 얼어붙지만, 죽음의 시계추같은 생동감 없이 작동하는 삶의 복종에서 탈주하는 것이 불가피함을 인정한다. 그렇기에 는 어렴풋한 내 육체의 지시에 따르기로 결심한다. 나는 떠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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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6-10 0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닌 느낌이 들 때도 있겠습니다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다 느끼거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기도 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곳은 마음 편하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불안이 아주 가시지는 않을 듯합니다 제가 말한 건 사람 속이기도 하네요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사람은 어딘가에 들어가기도 하는군요 그게 편하기도 하지만 조금 자유가 없을지도...


희선

필리아 2025-06-10 07:56   좋아요 1 | URL
‘자리‘는 ‘소속‘과는 다른 것입니다. 외적 물리적 공간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내적 활기의 장소거든요. 어디, 누구에게 소속된 것이 아니지요. 글에서 업급했듯 자리는 끊임없이 진동하며 부유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것은 결코 정주의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전 지금의 자리를 떠나고 있어요. 뿌리를 뽑아내고 새로운 뿌리내림을 향한 모험을 감행하고 있답니다.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 모두가 똑같고 모두가 고립된 세상에서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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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kapitalismus und Todestrieb; 자본주의와 죽음충동의 메시지들을 나는 자기파멸적 세계로 향하는 우울한 현상에 은폐된 실체들의 경고로 받아들인다. 분명 저자가 지적하는 자유의 착각, 투명사회와 긍정과잉 사회가 지니는 의미들, 만물의 상품화로 인한 인간의 자기 전시화(展示化), 자발적 통제사회로의 이행의 괴멸적 현상들은 많은 부분 현실의 통찰일 것이지만, 이로 인해 인간 운명의 미래를 어둠의 지옥, 종말의 귀결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필연적 결과라면 구태여 이러한 비평적 글들은 공허한, 의미 없는 말잔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문제에 도사린 근본적 문제들을 개선하거나 제거하는 실천의 행동이다. 그런데 그런 상태의 우리들은 행동하고 있을까?

 

신자유질서가 지배하는 오늘의 지구화된 세계가 노정한 문제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들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냉소적인 소리들이 들려온다. ‘다 알고 있어. 그런데 불가피한 것이잖아.’, ‘나는 그 문제를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건 인간 삶의 실천을 위해 필요한 거예요.’와 같은 이 모순적 인식에는 징그러운 흉측스러움이 있다. 비판적 지식을 마치 수용한 것처럼 말하면서 그 비판의 효율성을 무력화하는 비논리다. 바로 신자유주의의 대표적 이데올로기가 이렇게 작동하기에 저항의 목소리는 동력을 잃고 만다.

 

현실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 이 근본적 망상은 그래서 문제에 대한 아무런 행동을 실행하지 않는다. 기후온난화, 디지털 기업들의 개인정보 수집의 위험성, 다름과 타자에 대한 부정성의 낙인찍기, 성과(成果)주의 윤리의 괴멸성 등 인간의 자유와 존엄, 생명성에 위협을 가하는 요인들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 해결을 위해 실행되지 않는다. 이 책 15편의 비평 에세이는 바로 이러한 실천적 행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우리들이 보지 못하는 질서, 미처 읽어내지 못한 현상 내재적 속성을 규명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행동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지금의 문화가 개방성과 소통을 강조함에도 심리화에 치우친 주관주의 담론은 객관적인 사회구조에 대한 관심을 개인의 정신 건강으로 전환시켰다.” - 한병철, 심리정치, 문학과지성사 2015

 

이 문장은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들이 좀처럼 공동체라는 우리라는 감정주체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를 지적하는 말이다. 객관적인 구조의 문제들을 한낱 개인들의 심리적이고 위생적인 것으로 치부하면서 사적 문제로 개별화, 국소화(局所化)하는 현 세계의 체제를. 이 앞선 저술(심리정치)에서의 관점은 이 책에서 자유로 옮겨가는데, 이 자유는 자신에 예속된 것조차 알지 못하는 착각된 자유’, 이를테면 발가벗은 자유이다. 국역된 제목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는 바로 이 착각된 자유로 인해 인간 삶의 근본인 자유를 인식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저항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혁명이 불가능한 이유는 자유가 이미 존재하지 않음에도 그 부존재한 자유의 시스템 내에 있게 됨으로써 마치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착각에 빠져있는 오늘의 인간들은 저항의 의지 자체가 생성될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오늘의 신자유주의 지배기술은 마르크스의 고전적인 타자 억압과 착취라는 폭력의 형태를 전혀 띠지 않으며, 우호적 모습을 취하고 심지어 그 착취를 개개인 스스로에게 돌리게 함으로써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하며, 공격을 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체제는 어떤 저항에도 전혀 손상을 입지 않는데, 바로 자유가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개인의 자유를 다치게 하지 않은 듯 행세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1. 강제를 자유로 느끼는 사회

 

산업사회의 체제유지 권력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그 실체가 확연한 저항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자유를 억압하는 대상에 저항하면 실체적 폭력이 작동하고, 사람들은 빼앗기는 자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규율과 억압의 질서를 보다 효율적인 영리한 지배기술을 발휘한다. 그것은 순응(복종)이 아니라 사람들을 독립적인 체계로 인식토록 함으로써 개체 외부인 사회문제가 아니라 개체 내인 자신의 문제로 인식케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발적으로 지배 맥락에 예속하게 한 것이다. 이 기막힌 체제는 오늘날 노동자들을 스스로 자신을 부리는 경영자로 인식케 하고, 모든 각자가 모든 각자를 상대로 경쟁하는 절대적 경쟁의 상태로 만들었다. 자기 노동의 경영자가 된 노동자는 자신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노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며 희열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총체적 착취에서는 이러한 자발적인 자기 착취로 이행된 현실을 설명함으로써 어떤 강제도, 어떤 명령도 없음에도 자발적으로 발가벗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사람들은 사회의 구조적 왜곡과 부조리로 인한 형상을 모두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봉사하는 서점의 선반을 가득 메운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을 보라. 자기 노력과 능력의 탓이고, 자기 선택의 과실이 된다. 모든 인간을 자기 경영자로 명명함으로써 신자유주의는 자신을 결코 노출하지 않고 자발적 노예들에 의해 매우 효율적으로 생산성의 과실을 독차지한다. 각자도생을 부르짖은 저 내란우두머리를 비롯한 극우집단이 시종 일관한 것이 바로 이 신자유주의적 불온함이다.

 

사회적 소통망을 생각해보자. 여기에는 모두가 스스로 산출한 욕구를 배설하는 사진, 동영상과 짧은 글들로 가득하다. 또한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행적은 고스란히 데이터가 되어 수집된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자발적으로 콘텐츠를 채우고, 자기 정보를 기꺼이 제공한다. 심지어 건강 기록에서 시시콜콜한 내밀한 영역의 이야기까지 부끄럼없이 내보이려는 욕구들로 가득 차 있다. 사회적소통망의 영주는 이들 개인들을 감시, 통제하며, 그들이 스스로 생산한 산물들의 과실을 차지하고 자본 축적의 쾌락을 향유한다. 개인들은 이들을 통제하지 못한다. 또한 자신들의 노동력 착취를 결코 강제된 착취라고 느끼지 않으며, 통제 불능 또한 억압이라 생각지 않는다. 즉 성과 주체인 개인들은 자유의 느낌을 동반한 이 자기착취라는 스스로 산출한 자유로운 강제에 예속된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의 의미다. 신자유는 곧 강제를 자유로 느끼게 하는 기괴하게 의미를 역전시킨 억압의 다른 얼굴이며, 보이지 않는 통제의 욕망이다. 이 신자유세계라는 시스템 안에 살기에 사람들은 결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차린 미술가 제니 홀저(Jenny Holzer)는 그래서 이렇게 외친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 이 다급한 자기 통제의 외침은 자기착취로 소진되는 현 인류에 대한 연민의 목소리다. 모든 일이 자유라는 허울아래 이루어지는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자유를 착취하는 세계다. 타자 없는, 즉 지배없는 착취인 자기 착취는 외견상 자유의 영역에서 일어나기에 대단히 효과적일뿐더러 저항할 대상은 물론 맞설 우리라는 것도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바로 이 지배의 부재와 우리의 부재가 세계의 근본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게 만든다.

 

2. 긍정성 과잉, 투명성 사회

 

특정 수준에 도달하면 한계에 봉착하는 타자착취와 달리 자발적으로 예속되는 자기착취는 자신을 붕괴시킬 때까지 한계가 없다. 그러다 실패하면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고난이나 파산을 겪으면 오로지 자신의 잘못이라 스스로를 책망한다. 이것은 자기 안으로 침몰하여 익사하는 우울증과 몹시 흡사하다. 자기 자신에 의하여 완전히 소진되고 마모되는 오늘날 증가하는 정신질환들(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소진 증후군 등)은 바로 이러한 신자유주의 성과(成果)윤리의 교활한 속성의 병리적 증상이다.

 

모든 문제를 를 의문케 하는 신자유주의의 음흉한 윤리는 그래서 사람들을 나르시시스적 내면성에 침잠해 온통 나를 쓰다듬어라, 나를 돌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럼으로써 나에게 항의하는 대항하는 타자가 없는 존재가 되어, 타자의 다름을 보지 못하게 하고, 곧 예의를 상실한 인간들은 자기만을 사랑하라고, 존중하라고 악다구니를 쓴다. 요즘 이 세계에 부쩍 나르시시스트가 늘어난 것은 자기 동일성을 반복하며, 다름과 타자를 무조건 부정성으로 제거함으로써 귀결된 긍정성 과잉의 현상일 것이다. 이렇게 부정성이 말끔히 제거된 긍정성 과잉의 시대는 같음만이 출몰하는 매끈한 세계다. 그래서 탈()면역시대라는 별칭이 붙었다,

 

매체의 구별 없이 모든 미디어들의 프로그램이 건강의학 정보로 가득 채워진다. 부정성을 걷어내고 긍정성, 같음으로 매끄럽게 획일화된 것들을 숭배한다. 반죽음, 혹은 설죽은 인간들이 성형과 온갖 약물과 보정으로 매끄러운 신체를 과시한다. 불멸을 향한, 죽음을 거부하는 이 행위들에서 자본주의의 어두운 속성을 본다. 죽음이라는 부정성을 회피하기위해 죽음충동이라는 또 다른 반()명제를 세움으로써 자신을 은폐하는 속성 말이다. 이 긍정성 과잉의 균질 사회는 다른 말로 투명사회다. 투명성이라 말하니 마치 부패와 부정의 드러남이라는 긍정성을 떠올리는 것은 심한 오해다. 이 투명성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투명성이다. 비밀이 완전히 사라진 포르노적 속성, 세상 모든 것을 전시, 상품화하고, 시간을 두고 인내하지 못하는 즉시성이다.

 

여기서 나는 하나의 우려스러운 현상을 본다. 투명성은 언급했듯 부패와 부정이 깨끗이 척결된 청결, 청렴으로 비치고, 즉시성이라는 신속한 화답을 하는 실용성의 정치 행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세상의 일, 특히 국가 정책으로서의 정치에는 시간을 두고 숙성되어야 하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 어떤 하나의 비전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지체라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투명사회를, 실용정치를 외치는 것은 비전 없는 정치라는 속빈 실체의 다른 형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소위 포퓰리즘이라는 대중선호정치에는 미래 없는 사회, 다시 말해 예측 가능성을 꿈꾸는 미래로의 행위가 실종된 오직 계산의 합리만이 존재할 것 같아 근심이 앞서는 것이다. 한국 정치의 미래는 결코 투명성, 실용성, 긍정성이 모토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디지털 정보사회가 야기하는 병리적 증상들, 151쪽에서】


투명사회란 기다리는(인내) 능력의 상실이라고 말했다. 즉 미래로 이어지는 약속에 대한 불능을 의미한다. 그래서 미래가 사라진 즉시성에 몰두하는 사회는 책임 맡기, 약속, 사랑 등의 본래의 함의가 위축되거나 훼손된다. 신자유의 체제의 이 대표적 속성인 투명사회는 그래서 국가의 무관심과 무책임을 현저하게 목격하게 한다. 시민들의 무고한 죽음들, 각종 인적 재난들에 대해 고위관료들을 비롯한 권력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며 무능력을 여실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일 게다.

 

요즘 사람들의 사랑에서 이상한 징후들을 보게 된다. 사랑에서조차 상처를 받지 않으려하고, 다친 상태가 되는 것을 지극히 꺼려한다. 사랑이 그런 것인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이미 그 자체로 부상이고, 실제 많은 걸 쏟아 부어야 하는 상처의 위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부정성을, 거친 표면을 거부하는 이러한 태도에서 매끄러움에 대한 숭배를 본다. 저자는 뛰어 오르는 사람들 ; Menschen springen(People jumping)에서 왜 사람들은 카메라 앞에서 부쩍 펄쩍 뛰어오르는 사람들이 많은가하고 묻는다. 갑자기 신자유체제가 사람들의 생명력을 증가시켜서? 아니면 나르시시스적 병적 경련인 건가? 사진의 전통적 가치는 순간을 회상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식(禮式)가치였다. 그래서 인간의 얼굴인 초상이 사진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사진에서 인간의 얼굴은 물러나고 도발적으로 눈에 띄는 전시(展示)가치에 압도되고 있다.

 

즉 상표처럼 두드러지기 위해 자신을 상품으로 전시하는 것이다. 기억과 역사가 없는, 그저 뛰어오르며 현재 가치를 증명하는 사진, 한 순간에 소진되는 사진, 쇼윈도 같은 사진을 전시하려는 것이다. 주목 받기 위해 뛰어오르는 상품인 인간만이 존재를 증명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인 통찰과 지혜의 미덕은 자취를 감춘 호모 살리엔스(Homo saliens; 뛰어오르는 인간)’, 스스로 상품이 된 발가벗은 자기 착취의 욕망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 투명사회는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까? 스스로 산출한 이 욕구가 수치심을 넘어설 때 인류는 스스로 들어선 통제사회, 강제된 예속사회 깊숙한 곳에서 좌절하고 있을 것이다.

 

3. 맺는 말


지금 우리는 자유의 위기에 처해있다. 자유는 강제의 맞수다. 그런데 자신도 모른 체 강제에 굴복하면서 그 강제를 자유라고 인식하게 한다. 자유 종말의 뚜렷한 징후다. 이 지배 없는 강제, 강제하는 상대가 없으니 저항이 애초 불가능하다. 그래서 더더욱 이 보이지 않는 상위의 지배질서는 저항 없이 매끄럽게 인간을 노예화한다.

 

긍정성 과잉이나 투명성이란 다름 아닌 획일화다. 다름과 부정성을 회피하고, 죽음을 거부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질서는 이제 디지털 질서로 이행되면서 그 실체를 인지하는데 더욱 곤란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속성들은 이 세계에서 우리 인간들의 삶, 그 존재의 이유를 풍성하게 하는 사랑과 앎에 대한 욕구와, 분석 비판의 지성 능력 등은 물론 존재의 근본인 자유의 지각조차 상실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세계는 무책임, 무관심, 극한의 이기적 욕구, 타자의 부정과 배척을 그 본질적 요소로 한다. 발터 벤야민의 인류의 자기소외는 어쩌면 인류가 자기파괴를 미적 향유로 체험하게 되는 수준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는 예견적 문장이 실재하는 현실사회로 여실하게 도래한 것이다.

 

저자 한병철은 한 대담자가 그가 음모론자처럼 느껴진다며, 세상을 험담하고, 사람들을 절망시키느라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저나 저의 분석이 무자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가 무자비하고 기괴하고 터무니없는 것이에요.”, 그리고는 어떻게 이 잘못된 세상에 즐겁게 있을 수 있죠?”라고 반문한다. 다만 자신은 이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앞에 놓여있는 세계를 더 많이 보려고, 또한 보기를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소음과 지식 없는 정보만이 난무하고, 딜레탕티즘(dilettantism)이 만연하는 이 불온한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들은 늘 지배구조 안에 내장된 권능들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이 숙고의 능력마저 사라지는 날 우리는 정말 인간을 상실하고 기계화된 노예들의 모습만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계 이해에 조금은 접근할 수 있는 문제적 저술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 착취의 질서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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