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와 빵칼
청예 지음 / 허블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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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스럽게 허겁지겁 읽어나갔다며 이 소설이 압도적 몰입으로 이끄는 작품이었다는 감상평에 절반만큼 현혹되어 집어 들었다. 물론 나머지 절반은 의심을 지닌 채 말이다.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쪽으로 책장을 넘겼다.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이상 행위를 한 것인데, 그곳에 무언가 주인공의 심적 또는 행위의 도달지점이 있으리라는 기대였던 것 같다.

 

그는 내 손목을 세게 쥐고, 끔찍한 눈으로 목도하고 있었다. 칼을 박아 넣으려 하는 사랑의 민낯을. (...) 날에 얼굴이 비쳤다. 울고 있는데도 웃음이 나왔다.” -170

 

이 히스테릭한 양면성의 장면을 뇌리에 가둔 채 읽기 시작했다. 유치원 교사 오영아가 있다. 그녀는 한 원아의 폭력으로 다친 피해 원생들을 달래고, 발악적 비명을 질러대는 가해 원아로 인해 매일이 고통스럽다. 아이를 한 대 쥐어 패고 싶지만 참아야 하고, 피해 원생들의 항의하는 부모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일까지 도맡아야 한다. 또한 오랜 친구는 그녀에게 세상의 당위에 대한 정의를 주장하며, 작은 어긋남조차 일상의 수행에서 실천되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녀는 그 올바름에 그저 수긍하는 것이 선의이며 갈등을 초래하지 않는 것이 친구와의 우정을 유지하는 것이라 인내한다.

 

어질고 배려심 깊은 연인과 미래를 계획하는 것은 사랑의 열정이 없어도 그의 선한 의지를 거절하는 것은 도덕적 배신이라 여기고 순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자신을 채근한다. 그러나 이 모든 수용과 수긍에 내면의 목소리를 억압하여야 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낀다. 마음껏 분출되는 감정과 의지에 따라 자신을 표현하고 싶다. 억압에서 자유, 해방을 향한 마음을 옥죄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럽기만 한 것이다. 그녀는 이를 도덕적 선의 길이고, 이 억압을 일탈하는 것은 부도덕, 즉 악이라 여기는 것 같다. 결국 그녀는 심리상담소를 찾는다.

 

나는 이러한 도덕적 선악을 전제로 한 이후에 서술되는 일탈의 행위를 반면교사로 하여 비로소 선악의 조화, 혹은 중립지대를 오가는 것이 마치 삶의 기술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주인공의 서사가 오히려 너무 판명하여 도덕적 회색지대의 모호함을 희구했다는 주인공의 태도가 기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주인공 오영아가 세상을 판단하는 생각이 여러 곳에서 드러나는데, 마일로로 불리기를 악착스레 외치는 문제아 은우의 엄마가 운영하는 에코 비건 빵집 나루터와 일방통로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염가의 상품을 파는 25마트의 대비라던가, 심리상담소에서 대뇌피질 시술 이후 타자의 절망과 폭력성의 쾌락에 자기를 내어주는 행위처럼 오직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분별하는데 능숙한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공공을 위하는 만족, 그것이 희생시키는 사적인 행복이야말로

도덕이라는 쾌락이 가진 양면이었다.” -118

 

주인공이 자기감정 해석에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다고 여겨진 이유이다. 발설하고 행위하고 싶지만 상황과 타자와의 관계에 따라 자기 내면의 원초적 반응을 억제하여 초래 될지 모를 갈등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은 결코 도덕적 행위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조금만 상상 실험을 해봐도 우리는 짜증나지만 타인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무수한 경우를 그려낼 수 있다. 그것에는 인간애라던가 관대함, 도덕적 이성의 발휘 여지가 없는 그저 타인이 함께 있음으로 인해 야기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에게 강제된 의무인 것이다. 우리들은 현존하는 존재들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하며 이러한 관계의 의무에 강제되고 있다. 유치원 교사 오영아는 자신의 본능적 반응의 억제를 마치 도덕적 소비처럼 여기는데,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승객으로 가득찬 만원버스에 새로운 승객이 오르면 욕지거리를 속으로 삼키며 작은 공간을 어쩔 수 없이 내어주는 것처럼, 타인들과 맺는 관계는 이 불가피한 자기 공간의 일부 포기이다. 여기 어디 도덕적 미덕이 존재하는가.

 


직장에서 상사의 무례한 부탁이나 곤란할 일의 회피, 저의가 불순한 동료의 행위 등을 무난하게 참아 내거나 거절하지 않고 맡는 경우에 이것에 대체 어떤 도덕적 미덕이 있을까? 직장이 자신의 생계나 성취의 불가피한 과정, 혹은 타자들의 불편한 시선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애나 자기 이익을 위해서이지 도덕적 소비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친구와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일방적인 수용과 순응성은 상실이나 외로움의 회피와 자기감정의 보호를 위한 것이지 무슨 도덕적 소비가 개입하고 있다는 것인지. 더구나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이나 인간들의 관계는 도덕적 이성의 실현과는 연결지점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아마 인간 대부분의 행위는 밀집한 버스 내에서 벌어지는 짜증나는 의무의 연속이고, 그것은 바로 다른 존재가 내 옆에 있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우발적이고 우연한 문제일 뿐이다. 즉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의무를 의식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일 것이다.

 

소설에 이런 문장이 있다. 짐승 같은 웃음 아래 가라앉은 다른 지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112)”, 타인이 불행을 맞아 송두리째 삶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며 쾌감에 절어 웃음을 터뜨리는 자신에게 그 심연에 웅크리고 있는 또다른 본성을 묻는 목소리일 것이다. 그리곤 시술 이전의 자신이 억제했던 목소리와 행위를 도덕적 소비로 해석하면서 미래의 연속적 행복을 스스로 박탈하는 어리석음이었나.”라고 사적 행복과 공공을 위한 만족의 두 가지 양면적 쾌락을 문제 삼는다. 그리곤 도덕적으로 산다는 건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회피였다.(135)” 고 결론을 내린다. 나는 은우의 엄마가 오영아에게 하는 말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운 목소리로 여겨졌는데, 사회적으로 용인된 가치만 추구하는 것, 당신은 그걸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부단히 통제했고, 그 기능이 무척 발달한 여자였습니다.(146)” 라는 지적이다.

 

기성의 질서와 제도, 가치에 대한 순응과 이에 대한 부정이나 의문의 필요성이 절단된 교육에 길든, 아니 기막히게 훈련된 세대들은 소위 시민적 소양이라는 도덕성,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만을 내면화한 것 같다.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승인된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도덕이라 생각하는 오해를 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주인공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고 속상하다.

 

사회적 시선에 붙들려 억제된 자기의지를 해방코자 하는 그 고통스런 바램은 도덕적 일탈과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그건 존재의 당연한 욕구인데 기성의 세상이 그것을 극단적으로 왜곡시켜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부끄러운 여자, 추한 여자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주인공의 자각이 절실한 시절이다. 이 만들어짐의 외피를 인식하는 것, 그 지점으로부터 존재는 자유로워 질 것이다. 관계와 상황의 불편함과 짜증남은 도덕의 미덕이나 소비와 무관한 우리의 사회적 의무에서 발생하는 지극히 자연스런 감정이다. 그것에 어떤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게되면 삶이 궁색하게 되고, 정작 괴물로 둔갑하게 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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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 - 분배에 관한 인류학적 사유
제임스 퍼거슨 지음, 이동구 옮김 / 여문책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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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원제는 분배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를 한 현존과 사회적 의무(Presence and Social obligation)’이다. 번역본 제목이 된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은 바로 현존을 풀어 쓴 것이다. 아마 직관적 이해가 쉽도록 이 풀어쓴 의미가 도움이 될 터이다. 분배, 즉 나눔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고려할 때 한국사회는 임금노동을 인간됨의 자격으로 삼고 있으며, 이에 앞선 전제로 국민국가의 성원권을 토대로 하고 있다. 함께 있음과 동일 경계 내 영토에 함께 사는 사람들의 자원 분배는 사실 뗄 수 없는 하나의 연결된 개념이다.

 

이같은 상태에 있는 존재들을 우리라고 하며, 이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에게는 제외와 배타를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눔의 토대를 이러한 기준에 매달리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인데, 실업과 불완전 취업상태의 비공식 생계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함에 따라 노동에 기반을 둔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기존 형태의 분배방식은 소위 사회 안전망이라는 기능을 더 이상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의 자원 투입 증가와 대대적인 감세조치가 진행되더라도 노동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자동화와 AI화로 감소시키고 있으며, 안정적 일자리는 축소되고 불완전 취업상태를 급진적으로 늘리는 까닭이다. 다시말해 시민권, 노동에 기반을 둔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인구가 늘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 이제 법적으로 인정한 정치적 성원권에 따른 일련의 명백한 보편적 권리와 의무의 보장은 사회적 안전장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관점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하는 순간에 이미 진입해 있으며, 이를 도외시할 경우 국민국가라는 신화적 믿음에 토대를 둔 분배정치는 무수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뿐 아니라 국가의 안정성과 정체성을 혼란에 빠뜨릴 우려가 증가한다. 이 저술은 이처럼 세계의 자원 분배에 대한 개념의 변화를 사유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대안적 가치와 제도를 향해 기존의 관념을 확장 혹은 변경시킬 수 있는지를 함께 고려해 보자는 것이다. 기술발전이 임금노동을 만들어내지도 않으며, 구조적 실업과 비정규직화가 지속되는 세계에서 전체의 성원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소수의 안정적 도시 노동계급만을 배분의 정당한 자격이라 한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외, 배제되는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무엇을 왜 가져야 하는가라는 첨예한 정치적 질문이 가능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성원권과 임금 노동의 기여도가 공적 분배 정치의 기준이었다면 이 기준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한국 사회는 시민권의 담지자인 성원으로서 노동임금 기여자만을 우리라고 부른다. 우리라는 그럴듯한 포용적 언어가 배타적 경계를 강화할수록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더욱 황폐해져 가게 된다. 여기서 대두되는 것이 현존, 여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들의 사회적 현실임을 직시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주하게 되는 일상적 상황을 생각해보자, 아침 출근 시간에 붐비는 지하철에 발 디딜 틈 없이 밀집한 객차에 몸을 꾸겨 넣는다. 이때 이미 만원 열차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새로이 올라타는 사람을 위해 공간을 기꺼이 내어주어야 하고, 내리는 사람을 위해 출로의 공간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여기에는 인간애라던가 도덕주의적 이성의 발휘, 자비로운 관대함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다만 속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비좁은 객차 내에서 어떻게 해서든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귀찮음과 짜증에 가깝다. 그럼에도 어떤 의무가 주는 느낌을 실행하는 것이다. 여기 함께 있어야 하는 사람의 실효적 분배요구에 강제되는 의무인 것이다. 바로 이것을 사회적 의무라 한다. 사회적 의무란 이처럼 인류애나 연민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의 문제인 것이다.

 


이제까지 분배의 자격 토대인 임금노동과 성원권 소유자만을 우리라 불렀다면 여기에 함께 있는 존재를 포함하여 우리라 할 수 있는 내연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불안정한 취업 상태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대표적일 것이다. 이들은 수시로 일자리가 중단되고 다시 불안정한 취업을 반복해야 한다. 지금의 행정부는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불안정 노동자의 실업급여 수급자격을 제한하여 사회안전망에서 배제시켜버렸다. 또한 취업이 불가능한 상태에 처한 사람들은 6개월 남짓의 짧은 실업급여 수급기간이 종료되면 영구히 사회적 분배에서 제외되어 빈곤의 나락에 빠지게 된다.

 

소득 70%이하의 하위계층 노령자에게 지급하던 월 33만원 이하에서 1만원까지 차등 지급하던 기초연금도 금리 인상에 따른 가능소득을 소득 증가분으로 가산, 수급자격을 대폭 축소하여 노인인구의 생계를 사지에 몰아넣고 있다. 즉 현 정부는 사회안전망 조치인 자원분배를 오직 상호거래의 인센티브로 여겨 노동기여에 한해서만 반대급부를 인정하는 것인데, 즉 사회복지 차원의 분배 정책은 폐지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급격하게 자원분배의 왜곡이 발생하고 있고 양극화를 극단화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서 하나 중요한 의미의 확인이 필요하다. 우리가 사회적이라 표현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단지 우연하고 우발적으로 공존하게 된 승객들간의 의존적 관계에 대한 앞선 설명과 같이 사회적이라 함은 생물학적 인구집단의 네트워크나 시장으로 연결된 경제적 이해 당사자들간의 집합이 아니다. 구성원들이 구속력있는 의무로 묶인 특정한 종류의 집단적 자아로서 도덕적 단일체라 이해하여야 한다. 즉 회원제 조직이나 사회를 규정하고 범위를 정해 놓은 안전망은 무수한 대다수의 사람들을 배제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의 건강성이란 비시민권자를 포함한 영토 내 모든 국가 성원을 포함하는 의미로 확장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인류학자인 저자 제임스 퍼거슨은 수천 년에 이르는 인류 사회가 일군 거대한 부는 인류 모든 인간의 상상과 고통, 피와 땀에 의한 공통의 유산이기에 모든 사람이 이 공통의 소유권에 대한 요구로부터 보편적 분배요구가 출현한다고 주장한다. 다시말해 전체 생산물에 대해 모든 사람이 일정한 지분을 가진다는 말이다. 다시 지하철 승객간의 공간 만들기를 생각해보자. 이들은 그저 한 공간에 밀집해 있을 뿐이지만 실질적 의무와 일정기간 지속되는 실용적 조정장치로 실효적 공간을 내어주고 그것을 정당하게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성이 중대하게 강제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공유의 문제이며, 연민이나 관대한 배려 따위가 아니라 여기 함께 살고 있으므로 불편을 감수하고 적정의 공간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의무란 이런 것이다. 이 원초적 사회적 의무를 지속하여 무시하고 배제하려 하면 사회는 급속하게 붕괴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수많은 반란과 혁명이라 기록된 역사적 현실이다. 사회적 의무는 짜증나지만 어쩌겠어! 와 같은 느낌의 의무이다. 그렇다고 존재에 대한 요구를 승인하는 것이 완전 평등이나 공평을 전제로 한 분배일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 이러한 사회적 의무의 반대 면인 요구에 만족스러운 수준의 답을 제공하는 경우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최소한으로 수용되며 성원권과 기여라는 명확한 한계와 보이지 않는 불평등이 수반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공평하지 않더라도 실질적인 자원의 분배에 이들을 참여시키는 것은 실존적임을 인정해야 한다.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인구 소멸국가로 지칭되며, 부족한 저임금 노동력은 이주노동자들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비정규직과 실업인구는 점증하고 있으며, 이는 기술발전에 의해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성원권이라는 기준만으로 사회 전체 자원을 배분하는 제도는 더 이상 올바른 정책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지금 여기 함께 있는 존재인 현존하는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 기준 개념의 지평을 확장해야 하는 것이다. 성원권이라는 집단의 폐쇄성은 배타적 성격으로 즉각적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 함께 산다. 이주노동자가 일군 농산물과 공산물로 우리는 식탁에서 식사를 하게 되고,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의해 배달 서비스와 경비, 청소 서비스를 받는다. 이 세계는 이들과 여기 함께 있다는 명확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며, 이것이 곧 사회적 의무의 강력한 근거이다.

 

이 세계 가치의 원천은 사회 전체의 것이다. 사회전체에 대한 과실에 대한 정당한 권리는 자본가나 노동자가 아닌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 배분이 불평등한 것일지라도. 불과 수년 전에 보편적 기본 소득이라는 개념이 한창 떠들썩했다. 나눔의 대상을 생각할 때 자신의 정체성이나 정치적 입장의 공유로 판단할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저 스치고 지나치고 부딪히는 불특정 이웃에 대한 사회적 의무라는 감각을 사회성의 원천으로 두는 공동체를 생각해야 하는 시대에 당면한 것이다. 과연 우리에 누구를 포함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관점의 대전환을 사유케 하는 간결한 저술이다. 낯섦과 수용하기 싫지만 내어주어야 하는 몫의 필요성을 과연 간과할 수 있는 것인지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다. 분명 따뜻한 공동체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우리는 비좁은 열차 안 승객처럼 새로운 승객의 공간 요구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이다. 이같이 책은 새롭게 수립되어야하는 분배정치의 대안과 전략을 위한 실천적 사유와 내용의 귀중한 촉매제라 하겠다. 120쪽 남짓의 콤팩트한 저작이다. 편견이나 선입견,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잠시 지우고 순수한 관점에서 변화하는 시대의 공존과 공유, 공동체의 의미를 새롭게 사유해 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많은 독자들이 분배 정치란 무엇인가를, 그리고 기본소득이란 왜 요구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볼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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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의 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4
조예은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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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敵産家屋)이 오늘 이 땅에 몇 채나 남아있는지는 모르겠다. 식민지 조선에 지어진 일본인들의 집, 문자대로 원수인 적()의 재산인 집이라는 뜻을 담은 적대적 혐오의 표현이리라, 내 외조부가 맏딸인 어머니에게 사준 최초의 집이 바로 이 적산가옥이었는데, 소설 속 탐욕스런 일본 상인의 넓은 마당을 지닌 이층집과 달리 작은 단층집이었다. 내 어린 시절은 다다미방 세 개가 마루로 연결된 소박한 집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 백 년 넘어 흐른 내 기억 속 그 집이 지금도 남아있는지는 모르겠다. 이 소설 읽기는 이러한 낯익음에서 시작되었다.

 


작가 조예은은 천상 이야꾼이다. 첫 문장을 읽자마자 피처럼 검붉은 단풍잎들관처럼 차분히 썩어가는 적산가옥의 방치된 정경은 어느새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마지막문장을 아쉬워하며 책장을 덮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작품이다. 소설은 식민지 조선을 살던 외증조모 박준영과 그녀의 외증손녀인 현운주의 이야기를 오가며 적산가옥으로 상징되는 제국주의적 착취와 잔혹함, 그리고 타자의 상처와 생명에 대한 무심성의 실체를 드러낸다.

 

식민지 조선에 일본 전통양식의 주택을 건축하고, 약탈과 갈취로 채워진 재화를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어울리지 않는 콘크리트 건물이 부조화를 이룬 붉은 담장 안의 집에 일본 무역상 가네모토는 아내 하나코와 외아들 유타카와 살고 있다. 적산가옥으로 상징되는 이 집은 조선인 토지의 약탈과 생산물과 노동력의 착취로 쌓아올린 제국주의적 탐욕의 과실일 것이다. 소설은 식민지 시대를 살던 여인 박준영의 소설과 일기, 그리고 그 적산가옥에 얽힌 자신의 이야기들로 키워진 외증손녀인 운주의 현재를 오가며 부정하고 불의한 부의 축재를 위해 인간의 탐욕과 광증이 어디까지에 미치는가에 대한 망각된 기억을 환기케 한다.

 

병원장의 추천으로 입주하게 된 붉은 담장의 집, 준영은 입주 간호사가 되어 피비린내가 고여 있는 기괴한 집, 그녀가 간호를 담당하게 될 가네모토의 외아들 유타카의 방에는 해부되어 내부를 드러낸 채 방치된 물고기들과 자상(刺傷)으로 뒤덮인 적의 그득한 아이가 있다. 굳게 잠겨 음침한 기운이 서려있는 별채가 어둠을 잔뜩 뒤집어 쓴 채 부조리하게 서 있다. 입주 간호사인 준영이 온 몸이 자상으로 가득한 유타카에 대한 초기의 경계심과 부정적 시선에서 점차 그 아이에 대한 연민과 이해의 감정으로 변화하게 되는 사연이 흐른다.

 

아이에게 가해지는 반복되는 참혹한 자상을 치료하던 어느 날, 준영은 유타카로부터   아버지는 내가 죽일 거야.” 라는 확신에 찬 예언적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해방이 되어 성난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을 처단하기 위해 몰려들던 날, 유타카의 예언처럼 가네모토와 유타카는 화염에 싸여 배가 갈라진 채 별채에 죽어있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간호장교가 된 준영은 헐값에 매물로 나온 이 적산가옥을 매입하여 그녀가 생명을 마감할 때 까지 어린 외종손녀 운주에 이르는 4대를 살아간다.

 

외증조모는 유언으로 이 집에서 1년을 살면 이후 처분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조건의 유산을 외증손녀 운주에게 남긴다. 말년에 하반신을 운신하지 못하는 그녀는 본채에서 떨어진 별채 바닥에서 마치 무언가를 들으려 귀를 밀착시킨 기이한 자세로 생을 마감한 채 발견되었다. 일본 유학을 마친 운주는 할머니가 남긴 적산가옥을 개조해 결혼을 약속한 남자와 함께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기위해 입주한다. 운주는 꿈과 환상을 오가며 유령과 조우하고, 외증조모가 들려주던 유타카의 사연 속 준영이 되어 불길한 당시의 상황들과 흐릿하기만한 현재를 오간다, 운주는 매양 잠에 시달리고, 건강을 잃어간다.

 

아마 유령으로 출현하는 유타카의 영혼은 추악한 욕망에 착취되고 약탈된 타자의 몸인 식민지민의 몸이고, 약소국민의 취약한 처지를 이용한 또 다른 형태의 야만적 갈취의 대상이 된 사람들의 은유일 것이다. 의붓아들에게 깊은 자상을 정기적으로 가하여 그의 예지력을 사업의 밑천으로 삼는 인물, 그래서 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입주한 간호사였던 준영의 공범으로서의 죄의식에 대한 반성과 연민, 그 진심을 소통하던 유타카의 유령은 마치 책임을 완수하듯 운주에게 그 폭력의 광기를 마감토록 하는 듯하다.

 

붉게 솟구치며 활활 타오르는 적산가옥, 이 땅에 서려있는 그 광적 탐욕과 폭력의 흔적들이 이처럼 청산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불의와 부정과 약탈의 욕망들이 함께 사라져 버릴 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깔끔할까. 약소국 여인들의 혼인 상대자를 알선하고 꾀어내 살해하고 보험금을 차지하는, 그 추악함은 여러 변형된 형태로 일제의 제국주의적 폭력을 닮아 있다. 타자에 대한 무공감과 재화의 추구를 위한 갖은 불의한 수단들이 21세기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준영은 아니 준영의 영혼인 운주는 별채의 바닥에서 들려오는 유타카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집은 약속이 끝나는 날, 불타 사라질 거야. (...) 네 증손녀도 나와같은 고통을 느낄 거고,  같은 걸 볼 거야.   이후는 그 아이의 선택에 달려있어.” -198

 

소설의 마지막에 들려오는 이 목소리는 운주에게 그녀가 마주한 현실 세계의 민낯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폭력의 세기에 대한 청산과 오늘의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미래의 토대를 생각게 한다. 여전히 일제 부역자들이 이 땅의 삶을 부패하게 하고 불의를 가짜 정의로 왜곡하고 있다. 이제라도 그 무리들의 죄과를 청산해야 할 터이다. 그 선택은 바로 오늘의 우리들에게 있음을.  오랜 시간 피와 비명이 들려오는 적산 가옥의 음침한 이야기들이 과거와 현재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오가며 궁금증에 온통 빠져들게 하는 매혹적 서사 속에 헤엄치다보면 어느새 둔중하게 직면한 현실을 각성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야기로서의 재미는 이 작품의 묘미다. 그리고 그 재미 속에 역사와 현실의 실제성을 풍부하게 녹여내고 있다. 조예은표 호러는 더 이상 장르라는 범주에 묶여있는 그런 작품이 아니다. 직면한 현재를 이야기하는 가장 세련된 표현 작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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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나일지도 몰라 - 지친 나에게 권하는 애니메이션 속 명언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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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이라 부르는 장르는 내게 아주 먼 세계라 할 수 있다. 어쩌면 비친화적이라는 말이 조금은 더 진실한 말이 될 것 같다. 물론 이 책에 수록된 대다수의 작품들에 대해 예술비평의 글들을 통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영상 속 행위자들의 언어와 태도가 함축하는 의미들을 알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망설이며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어쩌면 분석하려는 내 마음을 걷어내고 싶은 순수에 대한 막연한 동기가 작용한 터일 것이다.

 


이 책과 마주한 첫 작품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이웃집 토토로속 한 문장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나도 보였는데, 너희에게도 보였구나.”라며, 아이의 순수한 동심에 공감을 표하는 아빠의 그 소중한 존중의 마음을 보았던 까닭이다. 내가 잃어버린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중심주의가 깃들지 않은 우주 만물의 공평함과 그 무수한 생물과 무생물의 존재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 말이다. 생태이론가 티모시 모턴의 하이퍼 객체가 떠올려졌다. ‘자연이라는 대상화된 언어가 아니라 그들과 하등 차이없는 인간이 어울려 상호작용하는 객체로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곳으로 이 세계를 생각하게 한다.

 

이 책에는 이웃집 토토로를 비롯하여 벼랑위의 포뇨, 하울의 성등 미야자키 하야오의 명작들이 몇 편 수록되어 있는데, 극단적이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입혀 새로운 세계를 향한 저항과 희망을 말하는 작품 세계를 저자 이서희는 간결하고 압축적으로 담아내 각 애니메이션의 목소리 속으로 유혹해내고 있다.

 

나는 이러한 매혹적 글을 통해 몇몇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일어났는데,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과 브레드 버드의 라따뚜이를 호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너의 이름은.의 주인공 미츠하(三葉)의 이름 때문이었던 듯싶은데, 그것은 시간이 만들어낸 인연과 시간이 이어주는 운명에 얽힌 사랑이라는 고귀한 감정을 새삼스레 불러일으킨 로버트 제임스 윌러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속 프란체스카의 22년이 흐른 날 사흘간의 사람을 추억하는 그 깊은 그리움에 더해졌던 영향 이었던 것 같다.

 

신카이 마코토, 너의 이름은.중에서, 80


소설 속 여인의 사랑의 기억 속 그 날에 라디오에서 은은히 들려오던 음악 고엽(枯葉), Autumn Leaves이 연상되었다. 3년만큼의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사는 두 존재의 사랑 이야기와 "어느샌가 사람과 실 사이에 감정이 흐르게 된단다."처럼 객체 지향의 사유가 어우러진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과 인연에 대해 더욱 되돌아보게 했던 이유가 클 것이다. 이 감상글을 마치는대로 이 작품을 찾아보게 될 것 같다.

 

또한 브레드 버드의 라따뚜이또한 너의 이름은.과 같이 객체지향의 생태적 공존의 사유 연장에 있다고 여겨졌기에 더욱 호감을 가지고 읽게 되었다. 미각과 요리 실력을 갖춘 생쥐 레미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요리 재능이 늘어나지 않는 인간과의 공영(共榮)의 스토리, 존재의 실존적 존귀함과 자기 한계의 정의에 대한 설득력 있는 목소리는 소위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이즈음의 생태이론을 선취한 탁월한 작품으로 다가왔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샤르트르의 인용은 저자의 안목을 가늠케 한다. 이러한 깊은 사유 속에 관계와 용기의 믿음을 보여주는 이 작품을 프랑스가 자신들의 대표 애니메이션으로 여기기에 충분한 듯 해 보인다. 어쩌면 이 책을 단순히 동심과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기 위한 기념적 텍스트로 이해하는 것은 큰 잘못이 될 수도 있겠다. 오히려 저자가 인용한 작품 속 문장들에 은은히 빛나는 사유들을 음미하고, 애니메이션을 한낱 유치한 아이들의 영상 오락물로 치부할 수 없게 한다.

 

물론 인어공주의 변형작인 벼랑위의 포뇨처럼 부분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작품들을 단지 당당하고 막힘없는 태도로만 읽을 수 없는 다소 국수적 색체가 짙은 작품도 있다. 이러한 판단은 독자들의 취향과 비판적 성향의 차이에 맡기기로 한다. 정체성과 모험과 용기, 사랑의 애니메이션 속 이야기들이 맑게 흐르며 글쓴이의 매혹적이고 알찬 해석들이 새로운 가치와 사유의 세계로 초대한다. 책의 표제와 같이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되어 그들과 함께 환상의 세계를 거닐며 꿈꾸다 보면 마주하는 현실 속 삶의 장애물들을 뛰어넘을 용기와 어떤 열정이 피어날지도 모르겠다. 이제 마음에 품게 된 몇 작품을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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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목소리 후마니타스의 문학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김현균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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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으로 빚어졌다. 우리는 시간의 발이며 시간의 입이다. 시간의 발은 우리의 발로 걷는다. (...) 조만간 시간의 바람이 흔적들을 지울 것이다.” 

- 13, 시간이 말하다에서

 

인간 시간의 흐름을 마치 지배권력의 절대 사회가 당연했다는 듯 써진 것들이 역사라고 뻔뻔함을 드러내는 세계에서 포착되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은 뭇 사람들의 지난 시간 속의 삶의 이야기들을 역사의 실재로 재배치하려는 시도는 부인되고 외면되기 일쑤다. 대개 이러한 소외된 이야기들은 인간의 그늘진 측면들로 지배질서와 불화와 충동의 실재를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비극적 역사를 서사시적으로 역술한 대작 불의 기억3부작으로 시민대중을 위한 정치와 역사기술의 전범을 보여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독특한 역사서다. (마침 '불의 기억' 3부작을 마무리하는 '거울들'도 재출간 된 모양이다.)

 

이 책은 어떤 연대기적 기술 방식이나 인물, 사건을 중심으로 결말을 향한 연속성을 지닌 서술 방식과 같은 기성의 역사서술 양식을 파괴한다. 저자는 지배 권력에 의해 그저 침묵이 강요되거나 관심 밖의 이야기로 치부되었던 목소리를 잃었던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들, 이 사회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일상적이고 하찮은 것들을 통해 인간 사회의 병폐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것은 형형색색 333개의 이야기로 짠 한 폭의 우아한 천이되어 휘날린다. 모두가 보고 알아차리도록.

 

다섯 번째 이야기인 발자국은 이 책의 성격을 정의하는 의미심장함을 품고 있다. 직립보행을 시작한 한 쌍의 남녀가 아프리카 대초원을 걸어간다. 그 때 화산이 재를 뿜고 두 사람의 발자국을 보존했다. 손상되지 않고 남겨진 발자국은 이브와 아담이 걷다가 어느 지점에서 이브가 걸음을 멈추고 혼자 몇 걸음 걸어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후 이브는 함께 걷던 길로 돌아왔다. 이 얘기는 오래된 인류의 흔적으로 의심의 본래적인 표지를 남겼음을 전달하려 한다. 이 의심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진실을 위해 결코 의심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큰 뇌조이야기에 이르면 마녀와 부엉이가 사는 아스투리아스 너도밤나무 숲의 어둠 속에서 수컷 큰 뇌조와 암컷이 카니발의 흥겨운 춤판을 벌이고 있다 . 이 축제와 짝짓기 춤이 계속되는 동안 그들이 눈멀고 귀먹는다는 것을 아는사냥꾼들은 큰 뇌조를 쉽사리 잡아들인다. 스펙터클을 이용한 우민화(愚民化) 술책은 지배권력의 오랜 전술이고 지금 한국의 극우권력이 즐겨 사용하는 교활하고 천박하지만 꽤 실효성 있는 방법이다. 언제나 많은 대중들이 각성되지 않기 때문임을 너무도 잘 아는 까닭이다. 이처럼 갈레아노는 천천히 우화적 이야기 한 꼭지 한 꼭지를 진전시키며 목소리 없는 자들의 실재적 시간 여행을 가속화한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은 20세기 이래 단 한순간도 식은 적이 없다. 이야기 보상에서 과테말라의 한 소년은 너무도 궁핍해서 물건을 훔치고 본드를 흡입하며 헐리우드 스타를 꿈꾼다. 소년은 자신의 삶을 의탁할 수 없는 고국을 떠나 경찰의 삼엄한 눈을 피해 목숨을 건 국경을 넘어선다. 마침내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소년은 미() 해병대에 입대하고 이라크에서 전사한다. 2003년 어느 날 누이 엔그라시아는 제복차림의 남자들을 맞는다. 동생이 죽었음을, 전쟁에서 침략군의 첫 전사자가 되었음을. 미국은 소년을 시민으로 만들고 그의 관에 성조기를 두름으로써 군장(軍葬)의 예를 베푼다. 미국이 그에게 약속했던 보상으로서. 국민의 삶을 보장하지 못하는 과테말라 정권과 탐욕스러운 미국의 책임인가? 누가 이 소년의 삶을 함부로 처리할 권한을 주었을까? 소년은 아군의 포격으로 사망했음이 밝혀졌다. 이는 실제 사건으로의 역사이다. 책은 이렇게 은폐된 실상을 고발하는 대변(代辯)의 목록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이어지는 물의 주인들이야기와 쌍을 이루며 민영화된 기간산업의 악질적 폐해와 문화적 후진성을 고발하는데, 수구 우익집단은 권력을 차지하기만하면 국민의 필수적 삶의 근간이 되는 국영기업의 민영화에 열을 올린다. 자신들의 주머니를 가장 효과적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태초에는 개미허리가 가늘지 않았다고 한다. 개미는 몸통이 둥글고 온통 물로 가득 차 있었는데, 하느님이 세상에 물을 적시는 것을 깜빡해서 개미에게 도움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화가 난 하느님은 손가락으로 개미의 배를 쥐어짰다. 이리하여 7대양과 강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20세기 말 볼리비아에 물 전쟁이 일어났다. 수도사업이 민영화되어 미국 기업 벡텔이 물 공급을 거머쥐자 수도요금을 세 배 인상했다. 공동체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볼리비아 우파정권은 민중에게 발포했다. 사망자와 수감자가 속출하고 폭동은 2개월간 계속되었다. 마지막 공세에서 민중은 민영화되었던 물의 권리를 되찾았다. 코차밤바와 라파스의 민영화로 인한 시민폭동은 한국 사회에 뉴스로 전해지지 않는다. 기득권집단인 언론권력은 이 민영화로 배를 불릴 수 있기 때문에 보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것은 뉴스로 선택되지 않는다. 때문에 시민은 진실의 역사로부터 차단된다. 이것이 역사다.

 

이야기 친척들아메리카를 구원한 것으로 묘사되는(물론 서구 제국주의 관점이다) 어떤 사건(1492년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의 오백주년 기념으로 행해진 1992년 멕시코 남동부를 방문한 가톨릭 사제와 원주민의 대화다.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하라고 한다. 원주민들은 말한다.   옥수수를 내버려둬 옥수수 밭이 슬퍼한다고.”, 그리고  불이 잘 타지 않는다고 불을 때려 함부로 다뤘음을.”,  “ 정글 칼을 휘두르며 오솔길을 더럽혔음을”,  “나무 한 그루를 쓰러뜨리곤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음을 고해한다. 사제는 모세의 목록에 나오지 않는 이런 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맨다. 1520년 사제 라스카사스는 서구의 신대륙 발견을 구원이라 말하지 않았다.   ‘끔찍한 착취와 살인의 역사로 규정했다. 그것은 불과 50년 만에 2,0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서인도제도의 인디언을 멸종시킨 인류 최대의 참담한 인종학살이라 정의했다. 역사의 진실을 호도하는 이 기이한 500주년 행사의 후안무치가 인간의 진면목이라면 글쎄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더 약술하며 책의 감상을 맺어야겠다. 인류의 위대한 발명인 수레와 기계를 움직이는 바퀴를 누가 발명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경제를 작동시키는 바퀴를 발명한 사람의 이름은 알려져 있다고 한다. 기원전 115년에 태어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라는 것이다. 바로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삼두정치를 이끈 그 크라수스 맞다. 그는 시장의 활력은 재화 및 용역의 수요와 공급의 밀고 당기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순환법칙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로마에 최초로 회사를 창설했다. 인류 최초의 사설 소방회사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는 불을 지르고 화재를 진압하는 대가로 수입을 올렸다, 사업은 대대적 성공을 거두었다. 지배권력의 역사는 이를 선구자라 부른다.

 

오늘날 롤 모델이라 부르는 것은 또 어떨까? 학용품 도난과 사고에 대비해 동급생들에게 보험에 들게 하고, 합리적 이율로 급우들에게 돈을 빌려준 열 살 소년을 모범적 기업가요 천재 소년이라 부른다. 정말 개 웃기는 수작들이지 않은가? 스페인 인터넷 포털 서비스 최대 업체인 스타미디어 창설자의 이야기다. 언론이 이 자의 성공담을 집중조명하며 그의 모범을 쫓을 것을 말하는 세상에 우리들이 살고 있다. 말을 독점한 자들의 이 경박함과 치졸함이 역사에 짙은 어둠을 드리운다.

 

여기 이 책의 영혼이라 할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 세계를 직조해낸 이 책, 진실의 역사를 갈음하기로 한다.  생명의 나무는 거꾸로 자란다고 한다. 몸통과 가지는 아래쪽을 향하고 뿌리는 위쪽으로 자란다. 우듬지는 땅으로 가라앉고 뿌리들은 하늘을 바라본다. 나무는 열매가 아니라 기원을 제공한다고.  가장 내밀한 것을 땅 속에 감추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며 그것들을 악천후에 드러냄으로써 맨살의 뿌리가 세상 풍파에 맞서기를.  그것이 바로 삶이라 생명의 나무가 말한다고. 드러나지 않은 작은 목소리들을 무기화(武器化) 함으로써 갈레아노는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목소리로 변환하고자 한다.

 

저자가 몸소 겪었거나 들었으며, 오랜 발품으로 수집한 이야기들이다.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던 이들 이야기를 엮어 인간을, 인간의 역사를 새롭게 정의한다. 재미와 예리한 통찰이 버무려진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치밀한 미학이 엿보이는 전통적 범주를 파괴한 새로운 역사서이자 정치서이며 문학서라 해도 될 것 같다. 작은 이야기들로 세상의 진실을 엿보게 하는 맛깔스러운 시간의 목소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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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불의 기억' 3부작 완결판 거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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