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스 커피 중독


20대 후반쯤의 나는 우유와 커피를 먹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우유는 유당분해효소인가 그게 없어서 국민학교 시절 무조건 하루에 하나씩 먹어야 하는 것을 고문처럼 느꼈었고, 군대에서도 억지로 먹이는 문화 때문에 좀 힘들었다. 이후 입에도 댄 적이 없고 지금도 먹지 못한다. 가끔 우유를 사먹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외계인을 보는 것처럼 낯선 느낌이 든다. 그럼 당시에 커피는 왜 먹지 못했을까?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별로 마셔본 적이 없었는데, 가끔 마시면 소화가 잘 안되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커피는 위산 분비를 촉진시켜 오히려 소화를 돕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왜 나는 커피만 마시면 소화가 안 되는 상황을 반복해서 겪었을까? 그 이후로 커피를 안 마셨다. 그런데 30대 초반에 출판사 영업 일을 하면서, 여기저기 크고 작은 서점들을 다녀야 했는데, 서점 사장님 혹은 담당자들이 우리가 방문하면 무조건 종이컵에 믹스 커피를 한 잔씩 타서 갖다 주시더라. 처음에는 고맙습니다만, 제가 커피를 마시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말을 하며 사양했는데, 대부분 사장님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냥 종이컵을 내 손에 쥐여주며, 이거 한 잔이라도 대접해야 마음이 편하다며, 이거 안 마시면 섭섭하다고 하셨다. 한 두 곳 서점에서만 그런 곳이 아니라 가는 곳 대부분에서 그랬다. 결국 안 마실 수 없어서 억지로 한 잔, 두 잔, 세 잔, 네 잔 마시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커피를 마셔도 소화에 전혀 문제가 없게 적응이 되었다. 확실히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맞다.


출판 영업 일을 그만두고는 꽤 오랫동안 다시 커피를 안 마셨다. 원래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일부러 찾아 마시지 않는 편이었다. 약속이 있어 커피숍을 가게 되면 나는 늘 다른 종류의 차를 마시거나 쥬스를 마시곤 했었다. 내가 커피를 안 마신다는 사실을 잘 아는 지인들은 미리 알아서 다른 차를 주문해 주기도 했다. 이렇게 커피를 입에도 안 대고 지낸 시간은 제법 길었다. 내가 일부러 커피를 찾아 마실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한 10년 전에 지금 이 일터에서 일을 시작한 후로 달라졌다. 일이 정말 많고, 야근도 많고, 늘 피곤했다.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일인데,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으면 곤란했다. 그럴 때 믹스 커피를 마셔보니 확실히 각성 효과가 생기더라. 커피숍의 아메리카노도 가끔 마시게 되었다. 하지만 내 돈 주고 사 먹어야 하는 아메리카노 보다는 사무실에 비치되어 있는 믹스 커피에 더 손이 자주 갔다. 처음 한 동안은 일을 하다가 가끔 뭔가 머리가 멍 하거나 집중이 잘 안 될 때에만 믹스 커피를 먹었었다. 그러다가 점점 더 자주 먹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거의 매일 하루에 한 잔씩 마셨고, 그보다 시간이 더 지나서는 하루에 두 잔을 마시기도 했다. 예전에 커피 못 마신다고 떠들고 다녔던 사람이 과연 내가 맞았던가 싶다. 


한동안 일을 쉬었던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그때는 당연히 커피도 몇 달 동안 입에 대지 않았다. 하지만 일을 다시 시작하면 금방 다시 믹스 커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아침에 출근해서 한동안 일하다가 오후에 좀 졸리기도 하고 조금 집중력이 흐트러질 무렵 커피를 마시는 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데, 요즘은 아침에 출근하자 마자 한 잔 타서 마셔야 비로소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이거 점점 커피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믹스 커피의 그 달달함. 즉, 설탕에도 중독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남들보다는 훨씬 더 물을 많이 넣고 마시기 때문에 혈당 스파이크 걱정은 덜해도 될 것 같다는 부분이다. 다른 사람들이 믹스 커피를 타는 모습을 보니 보통 머그 컵에 물을 절반도 안 되도록 넣고 타던데, 나는 뜨거운 물을 절반 조금 넘게 넣고 잘 저은 후에 미지근한 물이나 찬 물을 컵에 가득 차도록 다시 채워서 마신다. 그럼 단 맛이 많이 희석되어서 마실 만한 상태가 된다. 암튼 요즘 갑자기 믹스 커피에 계속 손이 가는 내 모습을 깨닫고 이제 좀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염과 땀


정말 더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낮에 외부 일정이 있어서 좀 돌아다니다보면 금방 옷이 땀에 젖어 버린다. 그래서 속옷과 셔츠는 여벌 옷을 사무실에 두고 다닌다.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저녁까지 매장을 보다가 밤에 달리기 복장으로 갈아입고 달리기를 하기도 한다. 달리기를 마치고 돌아오면 땀에 젖은 머리띠와 두건 등을 바로 빨아서 널어놓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낮에 여성 조합원 한 분이 매장에 오셨었다. 우리 매장엔 중고 의류이지만, 예쁘고 스타일이 괜찮은 옷들을 잘 손질해서 저렴하게 판매하는 코너가 있다. 한동안 사람들이 그 코너가 있는지도 모르고 별로 판매도 되지 않았는데, 최근에 기다란 행거 채로 밖에 놔뒀더니 오가다가 옷을 살펴보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날 매장에 오셨던 여성 조합원님도 거기서 화사한 색의 원피스 하나를 골라 결제하시더니 화장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셨다. 낮에 어디 다녀오느라 옷이 땀에 다 젖어서 갈아입으려고 하셨던 것.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오셔서는 매니저님은 언제 오시는 지를 묻는다. 그때 매니저님은 세 군데 가량 외부 일정이 있어서 1시간 반이나 2시간 후에나 돌아올 상황이었다. 그렇게 말씀 드렸더니, 그 분이 갑자기 그럼 이거 좀 잠가주세요. 라고 하시며 뒤를 돌았는데, 등 한 가운데에서 목으로 올라오는 지퍼가 절반 정도 잠긴 상태에서 위쪽은 열려 있었다. 아, 이거 때문에 여성인 매니저님을 찾으셨구나. 그런데 매니저님은 안 계시고 지금은 남자인 나 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나한테 부탁을 하셨구나.


상황은 이해했는데, 나는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뭔가 손을 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 그 분은 등을 돌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기다리고 계셨는데, 나는 뇌에서 경고가 먼저 울리느라 멈칫하고 있었다. 암튼 그렇게 불편한 상태로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 누군가 지퍼를 올려드리기는 해야겠지. 지금은 나 밖에 사람이 없으니까. 나는 손을 뻗으며 한 번 더 확인을 받았다. 제가 올려드려도 되는 거 맞죠? 그 분은 그럼요. 제가 부탁드렸잖아요. 라고 답하셨다.


아까 얘기한 그 중고 의류들은 교환, 환불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안내를 하면 가끔 입어 볼 수 없냐고 묻는 분들도 계신다. 옷가게라면 당연한 요구일텐데, 여기는 탈의실이 없다. 그나마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사무 공간에 미닫이 문이 있어서 내가 밖으로 나오고 그 안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는 있다. 그래서 가끔 여성 분들이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면 나는 일하다 말고 쫓겨나서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 중고 의류는 거의 99%가 여성들을 위한 옷이다. 이렇게 옷이 잘 팔리면 좀 더 자주 자리를 비워줘야 할 것 같다.


케틀벨 운동 모임


우리 동네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는 조합원들의 자치를 통해 운영하는 운동공간이 있다. 여기서 여러 운동 프로그램들이 운영이 되기도 하고 다양한 운동 모임들도 자발적을 운영하고 있다. 한 달쯤 전에 나는 어쩌다가 50대 60대 여성 조합원들과 대화하는 중에 케틀벨 운동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내 기준에서 케틀벨은 바벨이나 덤벨보다 훨씬 더 다양한 운동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좋은 도구여서, 그런 이야기들을 전한 것이었는데, 그때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던 분 중 한 분이 나중에 나에게 케틀벨 운동 모임을 해달라고 요청하셨다. 나는 혼자 집에서 운동을 하기 때문에 굳이 그 운동공간을 이용할 필요는 없는데, 다른 분들에게 케틀벨 운동을 알려주고 좋은 자세와 적절한 강도와 횟수 등을 봐주기 위해서는 그 분들과 같이 운동모임을 꾸릴 수 밖에 없었다. 몇 해 전에 동네 50대, 60대 언니들과 달리기 모임을 운영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케틀벨 모임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내가 꽤 오랫동안 바벨과 케틀벨을 별로 들지 않았더라. 가끔 덤벨 정도만 들고, 대부분 맨몸 운동 중심으로 아주 짧게 운동하는 정도로 근력 운동은 별로 하지 않았다. 달리기에 집중한 탓도 있고, 게을러진 탓도 있고, 예전에 재밌어 했던 동작들에서 흥미를 잃어가고 있기도 했다. 


혼자 다양한 케틀벨 운동을 오래 했기 때문에, 이 분들에게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도록 알려드리고, 이후 바른 자세에 익숙해지도록 어떤 방식으로 연습을 시킬 것인지, 그리고 데드리프트, 클린 앤 저크,스내치, 스쿼트, 푸시 프레스 등 동작 들을 바벨과 덤벨 그리고 케틀벨로 들어 올리는 자세와 각각의 고유한 특징들 등을 잘 알려드릴지 머리 속에서 금방 그릴 수 있었다. 확실히 나는 뭐든 가르치는 일에는 재능이 있고, 자신이 있다. 이번에 이 언니들과 재미있게 잘 해보면서 나중에 언젠가 운동 강사의 길을 가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지만, 지금 나의 몸 상태와 나이를 생각하면 어렵겠다는 생각이 거의 곧바로 들었다. 게다가 나는 아무런 자격증도 없으니. 


어쨌거나 운동을 하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다치지 않는 것이다. 맨 처음 시작할 때 이 부분을 계속 반복해서 강조할 생각이다. 절대 무리하지 않도록. 자신에게 맞는 무게를 잘 고를 수 있도록 옆에서 신중하게 살펴보고 조언해줘야 할 것이다. 가벼운 무게로 각각의 동작이 몸에 익을 때까지 반복 또 반복하도록 권해야 한다.


바로 엊그제 케틀벨 운동 모임을 하자는 제안을 승낙했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 벌써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일단 나부터 케틀벨에 쌓인 먼지들을 털어내고, 움직여 봐야 할 것 같다. 예전에 보았던 영상들이나 시각 자료들도 다시 찾아보고, 가능하면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직접 말로 해보고, 써보기도 해야 할 것이다. 준비를 잘 해서 다들 케틀벨의 재미에 빠질 수 있도록 해야지. 이번 기회에 나도 다시 운동의 재미에 빠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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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천재가 쓰고 언어 천재가 번역한 책


페이스북을 보다가 신견식 선생이 번역한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봤다. 다카노 히데유키라는 저자는 25개 언어를 배워서 사용한 여행 작가라고 한다. 책 소개와 목차 등을 살펴보니 이 저자가 이렇게 많은 외국어를 배운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냥 부딪혀서 계속 대화를 시도한 것과 부지런히 따라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책을 사서 읽어보면 명확히 알 수 있으려나?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본다. 저자도 저자이지만,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신견식 선생이 번역을 했기 때문이다. 책 소개 페이지에 있는 역자 소개 첫 문단은 이렇게 적혀 있다. "25개 이상의 언어를 우리 말로 옮긴 한국의 '언어 괴물'. 저자는 직접 몸으로 부딪혀가며 25개의 언어를 배워 익힌 사람이고, 번역가도 책과 사전과 씨름하며 25개 이상의 언어를 우리말로 옮긴 사람이다. 


아, 이거 갑자기 외국어 25개 정도 못 배우면 인간도 아닌 것 같은 열등감이 든다. 제대로 할 줄 아는 외국어는 하나도 없고, 그나마 영어는 어떻게든 저떻게든 대화 비스무리하게 할 수 있고, 일본어와 중국어를 좀 진지하게 익히는 중이고, 그 외 잡다한 여러 외국어를 재미로 손을 대보는 사람 입장에서 뭐랄까, 의욕이 팍 식는 기분이랄까. 뭐 어차피 남하고 비교하려고 외국어 익히는 것이 아니고 해외 여행을 가보려고 외국어에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저 재미로 손을 댔으니, 그냥 느긋하게, 천천히 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야지.















사실 이 책의 가장 신기한 점은 링갈라어, 보미타바어, 샨어, 와어 처럼 어디쯤에 있는 어느 나라 언어인지도 모를 언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본 신견식 선생의 글에서도 이 부분이 흥미로웠다. 내가 평생 저런 언어들을 익혀볼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저자와 번역가 덕분에 저런 들어보지 못했던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접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는 일인가. 


사실 젊은 시절이었던 20대에 독일로 공부하러 가려고 독일 문화원(괴테 인스티튜트)을 다니기도 했었는데, 이 계획이 실현되었다면 독일어는 좀 더 잘했을 텐데, 현실은 유학은 커녕 짧은 해외여행조차 거의 가본 적 없이 늙어가고 있다. 이젠 실제로 어딘가 해외에 가보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저 해당 외국어를 들을 기회가 생기면 조금 알아들었으면 좋겠고, 읽을 일이 생기면 대충 읽을 줄은 알았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동기에, 종류를 막론하고 외국어를 새로 익히는 일의 재미를 느껴버려서 그 재미를 이어간다는 정도로 여러 외국어를 손을 대보고 있다.


이렇게 꾸준히 야금야금 외국어를 익히는 것은 재미는 있는데, 제일 큰 난관은 시간이다. 바쁜 일상에서 시간을 쪼개어 조금씩 해보는 것인데, 그마저도 시간을 내기 어려운 날들이 생기면 며칠씩 중단되고, 며칠 중단한 후에는 다시 시작하기가 어려워진다. 주말에 일정이 없는 경우엔 침대에 누워 몇 시간씩 여러 외국어를 해보다가 평일이 되면 이삼일 이상 하나도 손을 못 대기도 한다. 그나마 듀오링고의 경우는 이 앱이 워낙 집요하게 얼른 들어와서 연속 학습을 이어가라고 강요하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시간을 만들기도 하는데, 낮엔 업무로 바쁘고, 저녁엔 늦게까지 긴 회의가 이어지는 날엔 전화기를 들여다 볼 틈도 없기에 그냥 지나치고 만다. 


그래도 한동안 중단했다가도 꾸준히 잊지 않고 다시 시작하기를 몇 해째가 되니, 여러 번 다시 들여다보면 저번에 익혔던 거네 하고 알아 볼 수 있게 되고, 딴 일 하면서 틀어놓은 노래 가서에서 스치듯 지나간 어떤 단어를 알아들으면  어떤 날엔 영화나 드라마 대사를 자막 없이 알아들어서 자신감이 막 솟았다가, 어떤 날엔 뉴스에서 빠르게 쏟아지는 말들을 거의 알아듣지 못해 절망하기도 하며 이렇게 외국어로 일희일비 하는 일이 이젠 재미있다. 뭐, 이제와서 대단한 목표나 의미를 찾을 필요 있나? 재미있으면 된 거지.


아참, 그런데 이 책 원제가 궁금하다. 지금 이 제목은 아마도 한국 출판사가 지은 제목일 것 같은데, 지구 정복이란 단어를 저 저자가 썼을 것 같지가 않아서. 책을 사서 판권 페이지를 열어보면 알 수 있겠지.



요상한 통증의 나날들


이 서재에 자주 통증에 대한 이야기를 썼었다. 나는 남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통증들을 갖고 있다. 하나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인데, 원인은 교통사고로 명확하다. 얼굴을 크게 다쳤던 나는 눈 밑에 뼈가 깨져서 인공뼈로 대체했고, 코 밑에서부터 눈까지 심하게 다쳐서 감각이 사라졌다. 만져도 느껴지지 않는다. 내 살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신경이 죽어버린 부위에 가끔 아주 심하게 통증이 느껴진다. 통증은 종류도 다양하고, 강도도 다양하다. 조금 묵직한 통증인데, 그럭저럭 견딜만한 수준의 통증이 좀 자주 나타나고, 가끔은 날카롭고 쎈 통증이 오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심하게 아픈 날엔 눈을 뜨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두통이 함께 찾아오기도 하고, 여러 감각이 정상이 아니라 아무 일도 하기 어렵다. 출근해야 하는 날에 이런 통증이 찾아오면 어쩔수 없이 사정을 설명하고 쉴 수 밖에 없다. 


또 하나의 통증은 관절 통증이다. 이건 교통사고를 당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증상이다. 처음에는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통증의 원인을 몰라서 많이 답답했다. 그러다가 많이 찾아보고 병원과 한의원에도 몇 군데 다녀오고 하면서 류마티스 관절염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다 류마티스 인자 검사를 받았는데, 없다고 나왔다. 이때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분명 증상은 류마티스 관절염이 거의 분명한데, 병원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하고. 퇴행성 관절염이나 통풍과 같은 내 증상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반복한다. 다행히 내 증상은 며칠 지나면 씻은 듯이 낫거나, 오래 가더라도 이삼주면 완전히 나았기 때문에 그냥 증상이 나타날 때에만 불편해도 참고 지나가곤 했다. 그러다 가끔 아주 극심하게 관절이 붓고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는 날들이 생겼다. 긴 시간동안 그렇게 지냈다. 의사들도 정확한 병명을 찾아주지 못한 채로. 아주 가끔 통증이 심하면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저주파 마사지를 받고, 가끔 소염진통제를 먹으며 버텼다. 그러다가 작년 늦여름에 우연히 지인께서 내 증상을 듣더니, 본인이 똑같은 증상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고 하시더니, 나중에 정확한 병명을 알려주셨다. '재발성 류마티즘' 덕분에 병명을 알고 정확한 증상을 알고 나니 가끔 심하게 아파도 안심이 되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언제 아팠는지 모르게 나으니까.


위 두 통증이 가끔 번갈아 나타나거나, 가끔 동시에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렇게 통증으로 고통받는 나를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은 쉬이 이해하지를 못한다. 친한 사람들도 그렇다. 몇 년 동안 수십번 설명을 해줘도 다음에 또 엉뚱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께는 정말 고마운 마음이지만, 본인이 생각하기에 용하다는 한의원이나 정형외과 등으로 나를 데려가려는 혹은 꼭 가보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여러 곳의 정형외과 포함한 병원과 한의원을 몇 년 동안 다녔다는 이야기를 설명하고 또 설명해도 다음에 또 그러신다.


최근에 두 가지 일이 있었다. 5월 말에 태양광 발전소 청소를 앞두고 있었다. 미리 사다리를 구해놓고, 홍보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참가자들도 제법 모집해놓았다. 준비는 거의 완벽하게 되어 있었는데, 발전소 청소를 이틀 앞두고 갑자기 관절 통증이 찾아왔다. 왼쪽 무릎과 오른쪽 발목이었다. 양쪽 다리의 서로 다른 관절이 붓고 통증이 심해서 걸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일어서거나 앉는 것도 힘들었다. 아침엔 어떻게든 일터로 출근을 했는데, 갑자기 통증이 더 심해져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조차 엄청 힘들었다. 첫날은 그래서 일터에서 조퇴했는데, 거의 등산을 해야 할 정도로 가파른 언덕을 걸어서 올라갈 자신이 없어서 일터 차량을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그러니까 발전소 청소 하루 전 날, 아침에 나오는데, 통증이 좀 심했지만, 그래도 차가 있어서 출근을 했다. 주차하고 일터로 걸어오는 길에 왼쪽 무릎은 그래도 조금 나은데, 오른쪽 발목은 도저히 디디기가 어려워서 질질 끌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걸어서 출근하던 매니저님이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내일 발전소 청소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물었다. 나도 그걸 걱정하던 중이어서 둘이 한참 논의를 했다. 다음날인 토요일에 내가 어떻게든 출근해서 매장을 보고, 매니저님이 발전소 청소를 진행하시라고 했다. 청소를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매니저님을 위해 아주 자세하게 내용과 전체 행사 진행 대본을 써드렸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이사장님께 보고까지 마쳤다. 그날은 저녁에 태양광 발전에 대한 강의를 하기로 되어 있어서 아파도 조퇴도 하지 못하고 억지로 일을 하고 있었다. 오후 늦은 시간, 그러니까 저녁이 되기 전에 갑자기 발목이 덜 아픈 느낌이 들었다. 오른발에 무게를 실어 디뎌봤는데, 통증이 없지는 않았지만, 아침에 비하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침 내 강의를 들으러 온 이사장님께 갑자기 발목이 나아져서 내일 청소하러 갈 수는 있을 것 같다. 다만, 발목이 완전히 낫지는 않을 것 같으니,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작업과 청소를 직접 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전체 행사 진행과 안전 관리를 맡겠다고 말씀드렸다. 이사장님과 매니저님은 아침까지 발을 질질 끌면서 걷지도 못하던 사람이 저녁이 되자 괜찮은 것 같다고 하는 걸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직접 본인들 눈으로 보고도 어쩜 이럴 수가 있냐 했다. 그래도 나 없이 행사를 진행하는 상황에 대한 걱정이 컸는데, 내가 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다음날 아직은 조금 통증이 남아 있지만, 걷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는 걸 확인하고 청소 행사를 진행하러 갔다. 내가 직접 청소를 하지 않고 전체 진행과 관리 감독 역할만 한 것은 10년 넘게 이 행사를 반복 진행하면서 처음이었다. 나는 해마다 매번 가장 열심히 일하고, 가장 많은 시간 일한 사람이었다. 이거 한번 해보니까 너무 편하긴 하던데, 조금 마음이 불편한 것과 내가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있기는 하더라.


또 하나의 이야기는 바로 어제와 오늘 일이다. 갑자기 오른손 손목과 손등이 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건 그제였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점점 심해져서 한눈에 보기에도 퉁퉁 부었고 색깔도 달랐다. 게다가 밤에는 이 통증이 너무 심해서 잠을 자기가 어려웠다. 또 하필이면 얼굴 통증과 동시에 왔기에 더 힘들었다. 그런데 손목 통증이 너무 심하니까 얼굴 통증은 오히려 덜 느껴지는 효과가 있기는 하더라. 그리고 둘째 날이 어제였다. 무조건 출근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아침에 나갈 준비를 하려는데, 하필 오른손 손을 전혀 쓸수가 없어서 난감했다. 왼손으로만 씻었는데, 세수와 양치가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일이었나 싶었다. 아주 간단한 동작조차 왼손으로는 어색하기도 하고 정확한 동작이 잘 되지 않았다. 평소보다 훨씬 오래 걸려서 씻고 출근했다. 퉁퉁 부어오른 손목과 손등에 파스를 붙이고 손목 보호대를 단단하게 감아서 고정했다. 


출근하니 마침 매장에 몇몇 친한 조합원들이 와 계셨는데, 제일 친한 친구 한 명이 나를 보자마자 걱정스런 눈빛으로 손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좀 부었다고 말했는데, 갑자기 다가와 손을 들어올리더니 너무 심하게 부었다고 막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 친구는 작년과 지난번 발전소 청소 전에 발목 건을 아는 사람이라, 이게 지난 번 발목 건과 같은 증상이냐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제서야 내 팔을 놓아주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내 허리 근처까지 팔을 받치며 내렸다. 어제는 매장으로 찾아오는 친한 선배들이 꽤 있었는데, 다들 내게 농담으로 어디 가서 싸웠냐고 물었다. 사실 사무실에 나오기는 했지만, 오른손을 전혀 쓸 수 없어서 일을 하기가 어려웠다. 왼손으로 마우스를 쓰려니 너무 어렵고 오래 걸렸다. 자꾸만 엉뚱한 곳에 클릭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판도 왼손 검지로만 두드리니 답답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급한 일들을 보고 퇴근했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잠에서 깼는데, 붓기가 한결 가라앉아 있었고, 피부 색도 많이 돌아온 것을 확인했다. 통증은 조금 남아있었지만, 어제에 비하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손목과 손가락을 움직일 수도 있었다. 조심스럽게 오른손으로 세수도 하고 양치도 했다. 어제 왼손으로 답답했던 걸 생각하며, 왼손으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평소에 연습을 좀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출근해 마우스와 자판을 정상적으로 쓸 수 있어서 엄청 다행이었다. 어제 미뤄둔 일들을 재빨리 해치웠다. 그리고 오후가 되어 어제 내 손을 붙잡고 걱정했던 친구가 다시 방문했다. 내 손을 보더니 다시 또 깜짝 놀랐다. 하루 만에 붓기가 거의 가라앉고 피부 색도 거의 돌아온 것을 보더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물었다. 나는 이게 내가 말한 그 '재발성 류마티즘'의 증상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도 오래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작년 여름에 발목 통증은 거의 10일 정도 동안 심했었다. 


얼굴 통증도 관절 통증도 아무리 심하게 아파도 결국 조금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이게 계속 된다고 생각한다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빠르면 하루 이틀 안에, 길어도 이삼주 안에는 완전히 낫는다는 것을 알기에, 좀 심하게 아파도 견딜 수 있는 것 같다. 어쨌거나 주말까지 가지 않고 오늘 거의 나아서 정말 다행이다.


오늘은 어제에 비해 통증이 훨씬 덜해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는데, 업무 관련해서는 안타까운 소식이 있어서 다시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올해 안에 건설이 가능하리라 믿었던 발전소 부지 하나가 계통 용량의 한계로 추진이 무산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건이 다소 불확실 요소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일 유력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 다음 부지를 또 어떻게 알아봐야 할지 답을 찾기가 어려워 한동안 머리가 멍해졌다. 에휴! 이제 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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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6-27 2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외국어를 25개나 하다니...언어 괴물 이라는 표현이 딱 맞네요.
전 유창한 건 아니지만 중국어 의사 소통이 가능해진 이후로 영어 사용이 힘듭니다. 영어로 말해야 할 경우에도 중국어가 먼저 나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국어가 먼저 나오는 경우는 없어요. 모국어와 다른 언어의 명확한 어떤 경계가 존재하나 봅니다. 그런 경험으로 볼때 25개의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도 괴물이지만 그 25개의 언어가 상황에 맞춰 말로써 구사된다는 것이 더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감은빛 2025-07-03 14:50   좋아요 0 | URL
아, 지난 번에도 잉크냄새님이 중국어 때문에 영어가 잘 안된다는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요. 25개는 정말 상상도 못할 수준이죠. 가끔 유튜브에 서너개 정도의 언어를 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와서 틀어놓기도 하는데. 이렇게 잘 하려면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아니 하나만 잘 해도 엄청 부러운데 말이죠.

저는 잉크냄새님도 엄청 부럽습니다.

카스피 2025-06-28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외국어를 잘 하려면 그냥 맨몸으로 부디치면서 체득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이 사실인가 봅니다.하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동양인 그중에서도 힌국인과 일본인들은 완벽하게 외국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니 외국어가 잘 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그러면에서 저자와 번역자 모두 참 대단하신 분들인것 같아요.
그리고 통증이 계시다고 하는데 병원에서 원인을 알지 못한다고 하니 참 힘드시겠습니다.저 역시도 가끔씩 아주 심한 편두통을 앓는데 이 경우는 아픔을 참기위해 손으로 벽을 세게 두두릴 지경이에요(손의 아픔으로 편두통의 아픔을 잊고자..)
병원에서도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아픈 당사자는 참 커다란 고역이지요ㅜ.ㅜ

감은빛 2025-07-03 14:52   좋아요 0 | URL
네, 카스피님. 그래서 저는 외국어는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익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실제로 그런 취지로 외국어를 알려주는 분들도 제법 많이 계시더라구요.

통증은 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벌써 몇 해 동안 의사랑 상담하면서 이게 참 답이 없는 상황이라 결론을 내렸거든요. 카스피님의 편두통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랍니다.

cyrus 2025-06-29 1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은빛님의 아픔이 글로만 봐도 어느 정도인지 느껴져요. 저는 예전에 통풍으로 고생한 적이 있어요. 그 이후로 일시적으로 금주를 했지만, 술만 줄인다고 해도 통풍 발작이 안 생기는 건 아니더라고요. 통풍을 유발하는 음식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통풍 발작은 은빛님이 겪은 통증과 비슷해요. 통증이 생기는 부위가 벌겋게 부어올라요. 지금은 통풍 발작 횟수는 크게 줄어들긴 했는데, 어쩌다가 한 번은 손가락이나 무릎이 쑤실 때가 있어요. 저는 이 통증 또한 통풍의 일부로 여겨요. 조금이라도 통증이 느껴지면 진통제를 먹어요. 진통제를 먹지 않으면 통증이 점점 커지거든요. 일해야 하는 평일에 통증이 느껴지면 곤란해요. 그래서 출근할 때도 진통제를 가지고 다녀요. ^^;;

감은빛 2025-07-03 14:56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께서 통풍을 겪고 있다는 말씀을 남겨주셨던 것이 몇 해 전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래된 일인 것 같아요. 그때 맥주 이야기 하셨던 것도 기억합니다.

기본적으로 관절 통증은 염증 반응인 경우가 많아서 벌겋게 부어오르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그래서 일부 의사들이 제 증상을 통풍으로 진단한 적도 있었는데, 실제로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통풍이랑 제 증상은 좀 많이 다릅니다. 평소엔 이번처럼 막 그렇게 붓지도 않고, 이번처럼 벌겋게 색이 변하지도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도 가방에 진통제를 챙겨 다니는 편이구요. 일터에도 서랍에 늘 진통제가 있어요. 어디 갈 때 진통제가 없으면 불안합니다.
 

얇은 책이다. 벽을 주제로 쓴 6편의 단편 소설을 담고 있다. 4편은 SF임을 확실히 알 수 있지만, 두 편은 잘 모르겠다. 이런 류의 주제별 모음집은 수록 작품들의 편차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단순히 취향으로만 봐도 그렇고, 구조와 밀도를 생각해도 그렇다.

첫 소설인 듀나 작가의 [아레나]는 이 책의 첫번째 자리를 차지할만한 흥미로운 소설이다. 미국의 코믹스나 영화 같은 곳에서나 나올 법한 초능력자들이 엄청 많은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K팝 아이돌 문화를 엮었다. 초능력자 아이돌이 공연도 하고 악당들도 물리친다. 그 장면들은 드론으로 촬영되어 전 세계로 영상을 퍼뜨린다. 하지만 모든 장면을 다 드론이 찍을 수는 없는 일. 카메라의 사각지대에서 일어난 일이나 잘 보이지 않는 장면들은 각색되어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소설 속에서 반복되는 초능력자들의 전투 장면들은 초기에는 사실이 거의 대부분 발표되었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은 그저 하나의 선택할 수 있는 재료 중 하나가 되었다고 했다.

˝재미를 위해 양념을 치고, 이미지를 미화하고 몇몇 중요한 사실을 감추기도 했지만, 사실의 큰 덩어리는 남아있었다. 하지만 전투와 오락을 구분할 수 없게 되고 회사마다 쌓아놓은 비밀들이 많아지자 사실은 점점 존재감을 잃었다.˝(본문 33쪽)

수십명의 초능력자 무리가 주인공이 일하는 회사를 습격해 수많은 사람들이 전투에서 죽었지만, 전투가 끝나자 회사의 작가들이 살아남은 초능력자들에게 다가가 인터뷰 하면서 처음엔 사실을 묻고, 그 다음엔 생각을 묻고, 마지막으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말았으면 하는지를 묻는다고 했다. 이렇게 회사에 고용된 작가들이 만드는 공식 세계관이 있는가 하면 전세계 팬들이 각자 만드는 팬픽들도 있다.

이제 진실 혹은 사실은 그 힘을 잃고, 그저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이렇게 저렇게 바뀌어 버리는 설정과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들만 유통되고 있었다. 이 소설의 제목 아레나는 고대 로마 시대에 검투사들이 싸우던 원형 경기장을 말한다. 소설의 첫 문단에서 2033년 7월 14일 대구 도시철도 공사장에서 진홍색 젤리로 가득찬 지층이 발견되고 끔찍한 전염병인 적사병이 유행하고 남한은 이제 전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독특한 생태계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적사병의 원인인 프로스페로 생태계는 소수의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초능력자로 만들었다고 나온다. 아레나는 이렇게 초능력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장소이고, 대한민국이란 나라 전체가 관중석으로 고립된 경기장처럼 전세계로부터 고립되어 거대한 아레나가 되었던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남성은 청소년기에 강한 초능력으로 인기가 많은 아이돌이자 강한 히어로였지만, 성인이 되면서 회사 경영진이 되어 얼굴 마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실질적인 회사 경영은 다른 동료들이 하고, 그는 그저 앞에 나서서 웃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제 초능력자들의 전투에도 나서지 않는다. 성인이 된 그와 동료들은 경영자와 중간 간부가 되고, 다시 어린 청소년들이 나서서 전투를 한다. 이런 시스템도 한국의 케이팝 아이돌과 그 기획사의 문화를 가져다 썼다. 현실에서도 각 기획사마다 연차가 오래된 아이돌들은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않고 회사 중간 간부가 되거나, 얼굴 마담이 되는 것 같다.

듀나의 이 짧은 단편은 흥미로운 소재와 다양한 초능력을 지니고 또 사연을 품은 등장인물들이 나와서 책을 처음 펼쳐든 독자들의 마음을 뺏기에 충분한 매력을 가졌다. 이 정도의 설정으로 이렇게 짧은 이야기만 펼치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중편이나 장편으로 다음 이야기를 계속 써주거나 연작으로 만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두번째 소설인 아밀 작가의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은 제목에도 나온 것처럼 4차원을 다룬다. 3차원 밖에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이 4차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게 가장 궁금했다. 아무리 잘 설명한다고 해도 인간인 우리가 그걸 잘 느낄 수 있을까? 이 소설은 음악, 그 중에서도 클래식 음악을 다룬다. 읽다가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잠깐 생각났다.

세번째 소설은 이산화 작가의 [깡총]이다. 맞다. 깡총 깡총 뛰어다니는 그 동물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그 동물 덕분에 멸종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 이야기 왠지 익숙하지 않나? 그렇다. 이건 호주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가져와 더 흥미로운 설정을 덧붙였다. 긴 싸움을 이어가는 두 종족의 싸움이라는 설정도 좋고, 연구자와 사냥꾼이라는 두 인간 주인공의 조합도 좋았다. 무엇보다 마지막 반전이 기가막히게 좋았다. 이 책을 통해 이산화 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큰 발견이다. 이 소설엔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마틴 옹의 [얼음과 불의 노래]에 나오는 장벽과 같은 길고 높은 벽이 나온다. 사이비 종교에 미친 광신도 집단도 나온다.

이서영 작가의 [월담하려다 접천]도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처음 소개한 듀나의 [아레나]에서 남한 전체가 고립된 상황이었다면, 이 소설에서는 서울이 하나의 고립된 섬 같은 상황이다. 벽에 갇힌 도시 같은 느낌. 여기 서울은 전능하신 방패님이 다스리는 나라다. 뭐든 방패님의 말씀을 따라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 방패님에 대한 정보는 전혀 나오지 않는데 내 느낌에 한 사람의 독재자인 것 같지는 않고 소수의 엘리트 고위 공직자 집단이거나, 종교 집단의 지도자들이 아닐까 싶다. 이 독재국가에선 사람들이 특정한 지역의 출산센터에서 태어나 유아센터, 초등센터, 중등센터, 고등센터를 옮겨 다니며 자란다. 주인공은 역촌동 출산센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같은 출산센터에서 태어나 같은 유아센터 등을 함께한 친구는 나오지만 부모나 가족에 대한 언급은 없다. 공동 시설에서 다함께 자랐으리라. 어렸을 때 북한에 대해 들었던 것과 비슷하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고 공동 작업장에서 일을 해야하고 아이도 탁아소에서 공동으로 자란다. 방패님의 말씀을 통해 평생 서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듣고 그렇게 믿고 살아왔는데, 코딩을 통해 우연히 외부 네트워크의 존재를 알게되어 접촉했다는 이야기. 후반부에 갑자기 이야기의 규모가 너무 커지는데 비해 적절한 묘사가 이뤄지지 않아 아쉽고, 결말이 좀 많이 허무하다. 방패님이란 기묘한 느낌의 독재자 이미지가 재미있고 신선했는데 갑자기 너무 큰 이야기를 흘러가버려서 많이 아쉽다.

이유리 작가의 [무너뜨리기]는 마음의 벽 아니 서로를 허물없이 생각하는 어떤 경계를 다룬 소설이다. 작중 7년차 부부인 남녀 주인공이 더는 서로를 이성으로 느끼지 않게 되고, 방귀도 아무렇지도 않게 뀌게 되는 상황에서 남자가 새로운 시도를 제안하는데, 리빌딩이란 이름의 일종의 최면 치료 같은 것을 받는다. 여기까지는 이야기가 제법 괜찮았다. 그런데 후반부에 갑자기 전혀 다른 이야기로 흘러가면서 좀 황당하게 끝난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마지막 소설은 정보라 작가의 [무르무란]이다. 아마도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모티브로 글을 쓴 것이 아닌가 싶다. 고대 흔히 우리가 신석기 시대라 부르는 돌도끼와 돌칼을 쓰던 시절의 이야기. 선조로부터 지혜를 벽화를 통해 배워 익히고, 이 시대의 지혜를 또 벽에 새겨 후대에 남기는 삶을 다룬다. 사냥에 대한 장면을 기대했으나 묘사가 안 나오고, 주술의식에 대한 묘사는 길게 나오는데 그 장면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소설집 [저주 토끼]를 통해 읽었던 정보라 작가 다운 글이란 생각은 들었지만, 생각보다는 크게 와닿는 지점이 없는 소설이었다.

여섯 작품 모두 저마다 다른 위상과 층위의 벽을 상정하고 이야기를 펼친다. 듀나 작가와 이서영 작가가 고립된 국가와 도시를 둘러싼 벽을 그렸고, 이산화 작가는 인간이 만든 인공물로서 거대한 장벽을 그렸다. 아밀 작가는 차원의 벽을 상정했고, 이유리 작가는 심리적인 벽을 가정했다. 정보라 작가는 유일하게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암벽을 주제로 글을 썼다.

다양한 이야기 꺼리들이 여러가지 다른 주제로 생각을 넓혀주는 기분 좋은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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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6-24 0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듀나님은 오래전부터 sf소설을 쓰신분인데 아직까지도 작품활동을 하시는지 몰랐네요.저도 읽어봐야 겠네요^^

감은빛 2025-06-26 17:43   좋아요 0 | URL
단편을 여기저기 많이 발표하셨던데요.
확실히 필력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영화 [숨통을 조이는 사랑]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


■ 원제: 爱的噩梦

 한국어 제목: 숨통을 조이는 사랑

 영어 제목: Suffocating Love


 감독: 랴오밍이(廖明毅)

 등장인물

○ 남자: 배우는 린바이홍(林栢宏). 작중 이름이 무엇인지 나오지 않는다. 헌책 나눔을 통해 만난 여성과 교제를 시작하고 동거하게 되는데, 이때 여성이 내건 조건들이 숨통을 조일 듯한 것들이었다. 자신이 평소 즐겨 찾아보는 인플루언서가 있고, 새로운 고객 회사의 담당자로 만난 고등학생 시절 짝사랑했던(고백했다가 차였던) 여성이 있다.  

 린아이쉬안: 배우는 린잉젠(林盈臻). 남자 주인공이 고등학생 시절에 좋아했던, 그래서 두 차례나 연애편지를 보냈던 여성. 남자 주인공의 새로운 고객 회사 담당자로 우연히 다시 만난다.

 바이지아치: 배우는 샹지에루(項婕如) 헌책 나눔을 하면서 여러번 만난 남자 주인공과 교재하다가 그가 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라고 권해 동거를 시작한다.

 헤이즈 요우리(黑泽由里): 일본식 이름은 쿠로사와 유리(黒沢ゆり) 자막에서는 계속 쿠로사와 유리라고 나온다. 배우는 셰신잉(謝欣穎). 남자 주인공이 평소 동경하며 즐겨 찾는 SNS를 운영하는 인플루언서.


일단 감독 이야기부터 해보자. 정말 재미있게 보기도 했고, 한동안 제법 좋아하는 영화 중에 상위권에 있었던 대만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총괄 프로듀서이자 편집 감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감독 데뷔작은 그 유명한 [괴짜들의 로맨스]이다. 이 영화는 대만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었다. 마스크와 비닐 등으로 중무장한 강박증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아주 독특한 내용의 영화가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나와서 더 흥미로웠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신선하고 멋진 영화라고 생각했지만, 결말은 좀 아쉬웠다. 강박증이란 증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실제로 저럴까 싶은 부분도 있었고, 어쩌면 저런 사람들도 있을 수 있지 하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갑자기 강박증이 씻은 듯이 낫게 되는 부분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픽션이겠지만. 이 영화 [숨통을 조이는 사랑]이 두번째 영화인지 다른 영화가 더 있는지는 찾아보지 않았지만, 첫 영화와 이 영화까지 보고나니 감독이 어떤 특정한 강박과 통제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은 배우 이야기. 남자 주인공을 맡은 배우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찾아보지는 않았다. 연기는 꽤 괜찮았다. 배역에 적절하게 잘 어울리는 이미지라고 여겼다. 초반 여주인공인 바이지아치 역을 맡은 샹지에루는 이전에 [버려진 사람들]이란 영화에서 봤었다. 차이웨이라는 경찰 역이었다. 귀엽고 매력적인 외모에 연기력도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차이웨이 때 보다는 배역에 훨씬 어울리는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귀여운 외모의 여자친구가 이렇게 강압적인 요구를 지속하면 과연 이 관계를 계속 이어갈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할 만큼 매력적인 인물을 잘 연기했다. 린아이쉬안 역의 린잉젠이란 배우는 이 영화에서 처음 봤다. 전형적인 사무직 여성의 이미지를 잘 소화했다. 거기에 청소년 시절 남자 주인공의 첫 사랑으로서 아슬아슬 밀당을 하는 부분도 잘 연기했다. 나중에 바람을 피우며 둘이 데이트를 즐기는 장면들은 연기와 연출이 제법 좋았다. 남자 주인공과 엮이는 세 명의 여성 중에 제일 데이트 다운 데이트를 즐긴 인물이다. 영화 후반의 주인공인 헤이즈 요우리 역을 맡은 셰신잉은 제일 익숙한 얼굴이었다. 일단 이 감독의 전작인 [괴짜들의 로맨스]에서 여주인공인 첸칭 역을 맡았었다. 그리고 넷플릭스 드라마 [화등초상]에서 황바이허 역을 맡았었다. 술집에서 사용하는 일본식 이름은 유리였다. 그러고 보니 이 배우는 화등초상에서도 일본식 이름으로 유리를, 이 영화에서도 일본 이름 유리를 썼네. 화등초상을 볼 때에도 눈에 들어오는 매력적인 배우였다. 괴짜들의 로맨스 때에도 외모와 연기력 모두 좋은 점수를 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기묘한 느낌을 주는 배역을 맡아 나름 연기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워낙 배역 자체가 설득력이 너무 떨어지는 터라 배우가 오히려 손해를 본 느낌이다. 상식적으로 설득력이 생기지 않는 인물을 보며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개성있는 외모로 충분한 매력을 발산했다.


이제 제목 이야기를 좀 하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원제는 '악몽 같은 사랑'이라 옮길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후반의 이야기는 현실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악몽이라고 받아들일 만하다. 전체적으로 내용을 생각하면 당연히 원제가 이 이야기에 제일 적절한 제목이다. 우리나라 제목은 영화 전반부 내용만을 반영한 제목으로 보인다. 아, 물론 후반부 주인공인 헤이즈 요우리 역시 다른 의미로 숨통을 조이기는 하는데, 이건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숨통까지 조이는 느낌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이렇게 미신에 집착하는 것인지, 무엇을 바라고 원하는 것인지 대화를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영어 제목은 우리 제목과 같은 맥락이다. 역시 제일 포괄적인 제목은 원제라 볼 수 있겠다.


우선 바이지아치가 남자 주인공에게 요구한 10가지 규칙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1. 양치나 세수한 후에 세면대와 바닥 닦기

2. 내가 아침으로 뭘 만들던 다 먹기

3. 아침 먹고 꼭 설거지 하기

4. 직장에서 2시간마다 위치 보내기

5. 내가 문자를 보내면 바로 답장하기

6. 실시간임을 확인하기 위해 번호를 사진으로 보내기

7. 집에 오면 휴대폰과 지갑을 탁자에 올리고 곧바로 샤워하러 가기. 샤워하는 동안 나는 폰과 영수증을 확인 할거야

8. 아침처럼 내가 차린 저녁도 다 먹기

9. 내가 샤워하는 동안 너는 집안 머리카락을 제거해

10. 내가 자면 너도 내 옆에서 자야 해. 휴대폰이나 컴퓨터는 할 수 없어.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 나 건드리지 마(혼전순결)


규칙 1번은 사람마다 생활방식이 다르니까 이해할 수 있다. 화장실을 사용한 후에 굳이 물기를 닦아내는 건 뭐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요구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화면에선 화장지(티슈)를 쓴다. 걸레가 아니라. 비싼 티슈를 화장실 바닥 물기 제거에 쓴다. 게다가 주인공 커플은 첫 데이트부터 영화를 안 보고 환경보호 전단지를 나눠주는 캠페인을 했는데, 화장지를 저렇게 막 쓴다고? 환경 보호를 위해 헌 책 나눔을 하다가 만나 연인이 되었는데? 여기서부터 이 영화가 너무 허술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규칙 2번은 사랑하는 사람이 만든 음식이니 기본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음식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반복적으로 계속 하다보면 잘 하게 되는 법. 문제는 입맛이 없는 날이 있을 수도 있고, 배탈이 나거나 아파서 못 먹을 수도 있다는 점. 영화에 그런 내용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픈 사람에게 다 먹을 것을 강요한다면 이거야 말로 가장 비현실적인 포인트가 되었을 것이다. 이건 무조건 그냥 헤어지고 만다로 가야하지 않을까 싶다.


규칙 3번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이건 뭐 굳이 규칙으로 정하지 않아도 누구나 꼭 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아침 일찍 일어나 음식을 만들어줬다면, 설거지는 당연한 일.


규칙 4번부터 이건 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무조건 2시간마다 연락을 하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 거기에 더해 위치를 전송하라니! 현실에서 이러면 이건 배우자를 의심하는 정신병인 의처증이나 의부증이라고 여길 것이다. 


규칙 5번도 그냥 내 연락에는 가능하면 빨리 답해줘 라는 측면이 아닌 정말로 곧바로 답해야 한다는 뜻이라면 말이 안 된다. 일단 업무상의 미팅이나 회의 같은 것들에 참여하는 시간이 있을 것이고, 전화기를 휴대하기 어려운 환경들도 있을 것이다.


규칙 6번은 좀 이해가 안 되는 규칙이다. 실시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왜 숫자를 찍어서 보내지? 차라리 영상통화를 하라는 것이 훨씬 더 어울리지 않나 싶다. 영화에서도 실제로 이 규칙을 실천하는 장면은 더 나오지 않는다.


규칙 7번. 아! 나는 여기서부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 전화기와 지갑을 놓고 씻으러 들어가면 전화기와 영수증을 뒤져본다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다. 일단 영수증은 볼 수 있다. 영화에서 두 사람은 아직 결혼하기 전이고 동거 상태인데, 집은 여성의 소유이고, 남성은 공과금 등을 낸다. 생활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식사의 경우 외식은 남성이 내고, 집에서 먹는 경우 장을 보는 건 여성이 내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왜 남성의 일상적인 지출을 감시하는 거지? 내 경우 결혼생활 내내 애들 엄마와 나는 각자 자기 수입으로 알아서 살았지만, 집안 살림을 위한 돈은 둘이 계속 의논하며 같이 부담했다. 서로 단 한번도 서로의 지출을 살펴보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뭐, 내 경우에는 뭔가 다른 곳에 쓸 수 있을만큼 돈을 벌지도 못했지만. 암튼, 그래 영수증은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전화기를 본다는 건 지금 현재 시대에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단 영화 [완벽한 타인]이 떠오른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리메이크작 [완벽한 타인]을 먼저 보고 나중에 원작인 이탈리아 영화 [Perfetti sconosciuti]도 보았다. 친한 친구들 부부 동반 모임에서 장난으로 시작한 놀이, 전화로 연락 온 내용을 공유하는 놀이를 하고, 그로 인해 서로 큰 상처를 주고 받는다는 내용은 정말 그럴듯하고 흥미로웠다. 영화를 보고 실제로 어떤 모임에서 그렇게 해봤다는 증언도 들었었는데, 영화처럼 극적인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지만, 서로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하더라.


규칙 8번. 이건 2번과 마찬가지다. 다만 거의 매일 야근을 해야 한다거나, 저녁마다 일정이 생긴다거나, 회식이 생긴다거나 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하다.


규칙 9번. 뭐 청소는 매일 할 수 있다. 다만,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의 비중을 따져보면 길이가 짧은 남성에 비해 길이가 긴 여성의 비중이 클 수 밖에 없다. 머리카락을 길러보니 확실히 알겠더라. 방에 내 머리카락이 어마어마하게 떨어지고, 예전에 짧았던 시절에 비해 너무 눈에 잘 띄었다.


규칙 10번은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으로서 함께 잠을 잔다는 의미는 섹스를 하던 하지 않던 잠자는 시간 만은 서로 함께 한다는 것을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집에 와서도 밤에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도 분명히 있고, 불면증 처럼 쉽게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아무리 혼전순결을 이해하고 동의하고 실천한다고 해도, 성인 남녀가 한 침대에서 같이 자면서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말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섹스는 하지 않아도 안아줄 수는 있는 거 아닌가? 팔베게를 해준다거나, 영화에 나온 것처럼 옆구리에 손을 대는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지 않나?


자, 여기서 이 영화의 핵심 주제를 생각해보자.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고, 사랑하게 된 사람이고, 만약 여기서 헤어지면 앞으로 다시는 이런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멋진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는데, 혹은 동거를 시작했는데, 그 사람이 이런 조건을 요구한다면 과연 응할 것인가? 성별과 성향과 생활 방식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겠지. 그런데 대체로는 아무리 멋진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렇게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그만두지 않을까? 영화는 애초에 이 정도의 집착에 맞춰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 감독이 집착이라는 것에 대해 엄청나게 집착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전작의 강박증이라는 증상에 대해 과장은 있다고 해도 그럴 수 있겠다고 하는 개연성을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 바이지아치가 남자에게 그렇게 심하게 집착하는 이유는 드러나지 않는다. 바이지아치는 다만 남성과 본격 교제를 하기 전에 다음 내용들을 말한다. 혼전순결을 인정할 수 있는지 묻고, 본인은 채식을 한다고 알리고, 또 지병이 있다고 했다. 아마도 심장 질환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영화 내내 그는 집에만 있고 거의 외출을 하지 않으며, 초반에 남자와 헌책 교환을 위해 만날 때에도 늘 택시를 타고 와서 책만 교환하고 바로 다시 택시를 타고 가곤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 그리고 본인이 조금 별난 구석이 있다고 표현한다. 이 별난 구석이 번역 자막의 표현이고, 원문인 중국어로는 어떤 표현인지, 어떤 뉘앙스가 더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동거를 시작해 남자가 집에 들어온 첫날 남자가 외출복 차림으로 침대에 눕자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고 심각해진 바이지아치가 남성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 것이 자신이 별난 구석이 있다고 한 말 기억하느냐고 묻고는 위 규칙 10가지를 말한다. 이게 별난 구석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인가?


앞서 나는 바이지아치를 전반부 주인공으로, 헤이즈 요우리를 후반부 주인공이라고 표현했었다.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하니 전반부와 후반부 이렇게 둘로 나눠서 주인공을 구분할 것이 아니라 중반부 주인공으로 린아이쉬안을 넣어야 할 것 같다. 린아이쉬안은 중반부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이 동거를 시작하고 초반에 숨통을 조이는 규칙들을 받아들이려 애쓰는 과정이 조금 나오다가 말고 갑자기 바이지아치의 비중은 확 줄어든다. 갑자기 린아이쉬안이 등장하면서 남자는 바이지아치를 속이고 몰래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만남 초반에 아이쉬안이 남자에게 학창시절 받았던 편지들을 보여주며 기억하냐고 묻는 장면 등 장난 섞인 밀당을 이어가는 과정은 괜찮았다. 그러나 갑자기 결혼을 앞둔 아이쉬안이 단지 권태기라는 이유만으로 오랜만에 만난 남자에게 갑자기 마음을 열고 급격하게 바람을 피우는 과정은 좀 납득하기 어렵다. 본인은 아주 오래 사귄 연인이 따로 있는데, 과거에 자신이 거절했던 남자에게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끌린다고? 이거 너무 손쉬운 전개이고, 너무 심각한 주인공 몰아주기 아닌가.


그리고 남자가 바이지아치에게 아이쉬안과의 관계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려고 마음 먹고 아이쉬안과 둘만 소통하며 몰래 사용해온 전화기를 탁자에 두고 출근했다가 돌아온 다음에 갑자기 완변한 판타지로 장르가 바뀐다. 갑자기 남자와 함께 누운 여자의 등에 그러니까 오른쪽 어깨 뒤쪽에 토끼 문신이 보이고 남자는 자다가 깨서 토끼탈을 쓴 사람에게 불려가서 소원을 빌라고 강요당한다. 토끼탈은 탈을 벗어 보이더니, 소원을 빌었는지, 그게 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리볼버 권총에 총알을 장전하고 남자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다음 순간 남자는 아침에 눈을 뜨는데, 바이지아치인줄 알았던 등을 돌린 채 잠들었던 여성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여성은 바로 자신이 동경하며 자주 방문했던 SNS를 운영하는 인플루언서 헤이즈 요우리였다. 하, 여기쯤에서 이 영화가 과연 어떻게 이야기를 수습할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수습을 하겠지 설마 수습을 안하지는 않겠지라고 의심을 하지는 않았다.


여자친구와의 동거가 거의 감옥 수준이어서 그랬는지 이번에 남자는 혼자 살고 있었고, 여자친구인 요우리는 사소한 부분까지 자신을 잘 챙겨주는 엄청 자상한 사람이었다. 수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점심때 도시락을 일터로 갖다주고 물도 꼭 챙겨주며, 가끔 자신의 집에 들러 저녁을 냉장고에 챙겨 넣어주고 이불과 베개 등 침구를 정리해주는 등 모든 것들을 다 챙겨준다. 그러면서도 사진 작가로서 멋진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현실에서 여자친구였던 바이지아치는 자신의 몸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었는데, 이 헤이즈 요우리는 요염한 속옷을 입고 남자를 유혹하더니 육체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나중에 요우리는 임신을 해서 남자와 함께 병원에서 초음파 영상을 보고 태아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는다.


여기까지는 다 잘 된 거처럼 보이는데, 여기에 반전이 등장한다. 알고보니 헤이즈 요우리는 남자의 집 곳곳에 특히 베게 속이나 침대 밑 등 수십개의 부적을 두었던 것. 매번 요우리가 침구를 정리했던 이유는 부적을 갈아넣기 위했던 것. 그리고 남자에게 주었던 물과 도시락 등에도 부적을 태운 재가 섞인 물을 부어서 주었던 것도 발견한다. 여기서 남자는 요우리에게 오만정이 다 떨어지고, 다시 바이지아치를 그리워한다. 우연히 자동차 매장에서 바이지아치가 다른 남자 친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발견했지만,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갑자기 자동차 판매원이었던 토끼탈과 단 둘이 만나 왜 네가 소원을 빌 수 있었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영화 초반 바이지아치는 한가지 단순한 행동을 1백만번이던가? 그만큼 반복하면 소원을 빌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은 뽁뽁이를 터트리는 행위를 반복하는데, 늘 2~3천번 수준에서 숫자를 잊는다고 했었다. 바이지아치는 점점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그리고 갑자기 만난 학창시절 알고 지냈던 여성과의 관계 등을 짐작하며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 그래서인지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가 며칠 후에 돌아오는데, 돌아온 날 남자가 남겨두고 간 전화기를 확인하고 이 관계가 이미 끝났다고 깨닫는다. 그는 남자가 돌아오기 전에 뽁뽁이를 소원을 빌 수 있는 만큼 터뜨리고 토끼탈을 마주치자 소원을 빌게 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소원을 말한다. 즉, 남자가 소원을 빌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바이지아치가 그걸 소원으로 말했기 때문이었던 것.


그리고 토끼탈은 다시 남자에게 리볼버 권총을 쏜다. 그리고 남자는 다시 아침에 눈을 뜨고 이번에는 등을 돌린 채 누운, 오른쪽 어깨 뒤에 토끼 문신이 있는 여성이 과연 누구일까? 남자가 손을 뻗자 여성이 그 손을 잡아 자신의 옆구리에 놓아두는데, 다음 순간 그 손을 더 당겨 자신의 배로 옮기고 그 배는 임신한 상태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여보세요? 여기서 영화가 끝나면 어쩌라는 거죠? 예? 대체 뭘 말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드신 건가요? 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에서 토끼를 가져온 것은 뭐 알겠는데, 토끼 문신은 뭘까? 영화 후반 남자의 집에 걸려 있어서 자주 보이던 웜홀이란 글씨가 적힌 포스터는 아마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굴을 의미하는 것 같다. 영화 중반쯤에는 평행이론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아니, 마지막에 여성의 얼굴을 안 보여준 것은 괜찮은 선택일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영화에서 임신한 여성은 헤이즈 요우리 뿐이었으니, 그 사람일 확률이 제일 높겠지. 문제는 남자가 처음에도 그리고 두번째에도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왜 처음 소원을 빈 이후로 여성이 헤이즈 요우리로 바뀌었는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남자도 그를 보고 놀라는 장면을 보면 그가 바이지아치 대신 헤이즈 요우리랑 같이 살고 싶다거나 사귀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던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헤이즈 요우리가 왜 그렇게 무속에 빠져있는지, 왜 남자에게 그렇게 심하게 집착하는지 등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린아이쉬안은 헤이즈 요우리의 등장 이후로 아예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열린 결말이라고 포장하기에는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놓지 않았다. 이건 그냥 만들다가 말고 그냥 방치해놓고 열린 결말이야 하고 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앞부분과 중반까지는 꽤 괜찮았고, 후반부도 결말 전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기 때문에 이런 결말을 보고는 크게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그냥 남자가 세 명의 개성있는 그러나 집착이 강한 여성을 만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면 좀 다르게 풀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묻고 싶었던 것은 외모와 겉으로 보이는 측면에서 멋진 여성이라면 아니 성별을 떠나서 완벽한 이상형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사람인데, 강박과 집착이 심해도 만날 것인지 하는 질문일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선택은? 나는...... 어차피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는 일 일테니까 그냥 상상해본다면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어쩌면 저 아름다운 세 여배우 중 한 명과 교제하는 것이라면 어쩌면 받아들일 수 있지도 않을까. 어쩌면이니까 실제로 일어날 일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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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6-19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무리 외모가 훌륭해도 저런 규칙을 내세우는 사람과는 연애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누누이 말해왔지만 사랑은 머리가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무리 외모가 훌륭해도 저런 규칙 내세우는 순간 정이 떨어질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실제 연애에서 딱히 훌륭한 외모의 연인을 만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얼굴은 사실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지요. 저 규칙들은 너무 짜증나서 보는 순간 도망칠 것 같아요. 함께 지내기에 위험한 사람의 규칙이라고 생각됩니다. 1,3 번 빼고는 다른건 받아들일 수 없어요. 으.. 끔찍하네요..

감은빛 2025-06-26 17:47   좋아요 0 | URL
끔찍하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구요.
대만의 문화를 잘 모르지만, 국가를 초월한 상식이란 건도 있으니까.
게다가 영화에서도 감옥 생활처럼 표현이 나왔으니까요.

잉크냄새 2025-06-20 1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어 원제보다는 한국과 영어권 제목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페이퍼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에도 숨이 막히네요. ㅎㅎ
중국 영화 관심 있으시다면 隐入尘烟(인루천옌:먼지로 돌아가다) / 落叶归根(뤄예꾸이근:낙엽귀근) 我不是药神(워부스야오션:난 약신이 아니다) 추천드려요. 중국 현실을 잘 표현한 영화들입니다.

감은빛 2025-06-26 17:49   좋아요 0 | URL
오! 원제보다 한국과 영어 제목이 낫다고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음악에 이어 영화도 추천해주셨군요.
조금 여유가 생기면 하나씩 찾아볼게요.
고맙습니다!
 

바쁠수록 딴 짓


이 제목 분명히 언젠가 제목으로 쓴 적이 있었다. 게시물의 제목이었는지, 소제목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쓴 적이 있었다. 어쩌면 한 번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쓰는 이야기들은 특정한 시기에 따라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했던 이야기, 익숙한 이야기를 다시 해도 사실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이 서재를 방문해 이 재미없고 길기만 한 글을 읽는 이는 거의 없을 테니까.


암튼 어제와 오늘은 엄청 바쁜 날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바쁠수록 자꾸 딴 짓을 한다. 얼른 일을 마치고 딴 짓을 해도 될 텐데 말이다. 이 놈의 버릇이란 참 고약하기 짝이 없다. 어쨌거나 몇 건의 급한 일들 중에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더 높은 일 한 두 건을 마치고 잠시 머리를 식힌다는 핑계로 알라딘 서재에 들어왔다. 최근 한동안 북플도 거의 열어보지 않았었다. 아니 열어볼 여유가 없었다.


최근에 여러모로 상태가 좀 많이 안 좋았다. 한창 바쁜 때인데, 자꾸만 몸과 마음이 아프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평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는 편이었는데, 지난 며칠은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다 귀찮았고, 자주 만나던 친구들에게 연락이 와도 그냥 다음에 연락하자고 답했다.


여러가지 사회적인 상황과 그에 따른 한계를 깨닫게 만드는 일들이 1차로 마음을 무너뜨렸고, 그 다음에 개인적인 상황들이 뒤이어 2차로 몸과 마음에 무겁게 내려 앉았다. 아마도 스트레스 때문일텐데, 가끔 나타나던 관절 통증과 얼굴 통증이 동시에 찾아왔다. 이렇게 통증들이 찾아오면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진통제를 찾을 수 밖에.


지난 봄은 나 라는 사람의 한계에 대해 많이 깨닫고 생각하는 날들이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뭘 할 것인가? 모르겠다. 답을 찾지 못하고 그저 다람쥐 챗바퀴 도는 듯 정신 없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이 싫었다. 하루하루 소중한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것이 한심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아, 시간을 보니 정말 이러고 시간을 보낼 상황이 아니네. 일단 오늘은 얼른 일을 해야겠다. 딴짓을 한 만큼 집중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날지도 모른다. 집중하자!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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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6-14 0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고약하기 짝이 없는 버릇....저도 가지고 있습니다.ㅎㅎ

감은빛 2025-06-19 14:35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도 그러시다니, 저만 그런 건 아니다 싶어서 조금 위로가 됩니다.
고맙습니다!!!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