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의 첫 뉴스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이란의 독재자가 죽었다는 내용이었고, 이어서 이란의 반격으로 무차별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화면에서는 트럼프가 자신이 고귀한 일을 했다고 떠벌리고 있었다. 저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이 있을까? 있겠지. 애초에 대통령에 당선될 정도로 지지자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저런 짓을 벌일 수 있는 것이겠지. 누군가는 독재자를 죽이고 이란 국민들을 구한 것이니 잘한 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억압받는 이란 국민들이 직접 혁명을 일으킨 결과라면 무조건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은 결코 이란 국민들을 위해 이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 게다가 이 공습으로 독재자와 그 부하들만 죽은 것이 아니라 학교에도 폭탄이 떨어져 무고한 학생들도 죽었다. 트럼프의 이 공격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을 저지른 것이다.

최근 일본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인기가 엄청나다는 뉴스를 보았다. 다카이치 총리는 중의원을 해산시키고 다시 선거를 했는데, 자민당이 압도적으로 많은 의석을 확보했다고도 했다. 그 전까지 여당인 자민당이 소수이고, 야당 연합이 다수였던 상황이 다카이치와 자민당에게 유리하게 바뀐 것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손쉽게 야당 연합의 무능함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이례적으로 높은 인기를 이유로 꼽는 의견이 더 많다. 일본의 평화 헌법을 고쳐 전쟁이 가능한 일본을 만들겠다는 것이 다카이치 총리의 대표적인 정책이다. 일본 국민들은 과연 전쟁을 원하는 걸까? 다시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대일본제국을 만들려고 하는 걸까?

비록 지금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윤석열이 처음 등장해 이례적으로 높은 인기를 얻으며, 결국 대통령으로 당선까지 되는 모습을 보면 트럼프나 다카이치의 사례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중국의 시진핑이 이렇게 장기 집권을 하고 있는 모습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왜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 국민들은 전쟁을 옹호하고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지도자를 좋아하는 걸까? 왜 우리나라 국민들은 국정에는 관심 없는 멍청한 지도자를 선택했던 걸까?

물론 이렇게 단순하게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다. 현재 트럼프 정권에서도 이민세관단속국(ICE)의 무자비한 집행에 반발하는 시위가 많은 지역으로 번졌고, 러시아와 중국에서도 푸틴과 시진핑에 반발하는 세력들의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초기라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겠지만, 일본에도 다카이치와 자민당에 맞서는 세력이 있을 것이다. 현재의 이 상황은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행위와 선택의 결과이다.

오래전에 누군가와 일제시대 독립운동에 대해 대화한 적이 있었다. 그는 우리가 손쉽게 친일파를 비판하면 안 된다며, 만약 자신이 그 시대를 살았다고 해도 친일 행위를 할 거라고 했다. 누구나 잘 살고 싶은 욕심이 있고, 잘 살기 위해 친일 행위를 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말했다. 친일 행위에도 수위와 종류가 다양하겠지만, 대체로 일본제국의 이익에 도움을 주면서, 우리 국민들을 탄압하고 생계에 영향을 주는 일이다. 즉, 우리 국민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 수많은 선조들이 만주와 간도로 넘어갔던 이유는 이 땅에서는 도저히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그리고 평생을 살아온 고향을 버리고 척박한 땅을 찾아가는 선택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으리라. 자신의 안위를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범죄다. 만약 법으로 범죄로 규정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 태어나서 저지르면 안 되는 것이다. 인륜이나 도덕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그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더라도 결코 하지 않을 짓이다. 그걸 비난할 수 없다고 누구나 그 시절에 그런 상황에 처하면 똑같이 친일 행위를 했을 거라고 말하는 건 그 인간이 딱 그 정도로 자신만 아는, 남을 생각하지 않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실제 역사에서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활동했다는 사실만 봐도 어불성설임이 당연하다. 비록 살아남기 위해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일본이 부당하게 이 나라를 삼킨 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날이 바로 오늘 삼일절이다. 우리가 이미 다 배웠듯이 삼일만세운동은 겨우 하루 있었던 것이 아니다. 기미년 삼월 일일 탑골공원 인근에 있던 사람들만 참여한 국지적인 저항이 아니었다. 전국으로 그리고 해외로 확산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전 국민의 저항이었다.

오늘 삼일절을 맞아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좋겠다. 비록 내란을 저지른 세력들이 구속당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빨간당은 그들을 옹호하고 있고, 윤어게인을 외치는 독재 지지세력들이 활동하고 있다. 아마 많이 겹쳐지겠지만, 박정희의 독재를 미화하는 인간들이 여전히 건재하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승만을 숭배하는 인간들도 많다. 심지어 학살자 전두환을 옹호하고 노태우를 비롯한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는 인간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박정희에 대한 지지는 박근혜 지지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 있었던 걸로 착시를 불러 일으켰던 사람들은 과연 괜찮았을까? 노무현은 김선일 씨 납치 사망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전쟁에 참여하는 파병을 강행했다.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가 저지른 노동자 탄압과 환경 파괴를 생각하면 절대 존경한다 말할 수 없는 인물이다. 문재인은 어떤가? 우유부단이라는 단어를 인간으로 만들면 그라고 불릴 정도로 국정운영을 엉망으로 했고, 박근혜를 몰아냈던 촛불의 의지를 모조리 배신했던 인간, 수많은 시민들이 외쳤던 민주주의의 가치를 팽개쳐버린 인간이었다. 지금 민주당 지지자들 대부분이 윤석열을 욕하지만, 결국 윤석열을 만든 것은 문재인이었다. 과연 지금 이재명은 어떨까?

누구든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극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보이는 것들 외에 다른 것들을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 일부러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지금 이렇게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누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내 주위에는 빨간당 지지자도 없지만, 파란당 지지자도 많지 않다. 특히 이재명 집권 이후로 일부러 민주당 지지자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민주당에 빌붙어서 의석을 얻은 기본소득당과 진보당도 민주당만큼 싫어한다. 내 주위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라 많은 사람들이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늘 신기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아니 내가 평소 만나는 사람들은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데, 결국 나중에 이렇게 많은 표를 얻는 것을 보면 이상할 수 밖에.

내가 빨간당보다 파란당을 더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의 이중성과 거짓말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당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 여러 파벌이 있고, 다른 의견들이 있겠지만, 큰 틀에서 이 정당은 국민을 기만하는 정당이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자본 친화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필연적으로 노동자인 국민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결코 진보라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보수정당의 정체성을 아주 강하게 갖고 있다. 그럼에도 늘 국민들에게 빨간당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마치 국민들을 위하는 척 위선적인 태도를 취한다.

우리가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이유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접하기 위해서이고,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매우 복잡하다. 한 사람이 아무리 뛰어나도 모든 현황을 다 파악하기 어렵다. 우리는 우리가 잘 모르는 많은 것들을 누군가 제시해주는 대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결국은 어떤 틀에, 그가 속해있는 상황의 한계 안에 갇혀있을 확률이 높다. 그 틀을 깨기 위해 노력하고, 늘 다른 시각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일단 먼저 의심하고 깨어있으려고 애쓰는 삶은 피곤하고 힘들다. 나는 내 자신이 갇혀있는 한계를 인정하고 언제나 그 틀을 벗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과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집단이나 세력이 언제나 같다고 느껴진다면 한번쯤 의심해보고 다른 틀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나는 항상 종교에 빠진 사람들이 안타까웠다. 물론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다. 그 사람의 인생을 건 선택이니 타인이 참견할 수 없는 영역일 수 있다. 지금 보면 정치도 종교에 가깝다. 사람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 없이 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고찰 없이 그저 당의 색깔만 보고 무조건 지지하는 사람들을 보면 종교보다 더 굳건해 보인다.

작년 가을부터 여러 갈등 상황에 긴 시간 시달리고 있다. 사람은 참 안 바뀐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 하지만 바뀌기 위한 노력은 언제나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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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3-01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럼프의 이번 폭격은 올 중간선거시 지지층의 결집을 위해서 한 행동이지만 이란 독재자의 죽음을 보고 이란국민들이 춤추고 노래했다는 뉴스를 보고 트럼프의 입장예서 그나마 폭격의 정당성을 건졌다는 생각이 드네요.

잉크냄새 2026-03-01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것처럼 친일에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현재의 자신을 변호하고 미래의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행위라 생각해요.

cyrus 2026-03-02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한꺼번에 나올수록 마음 단단히 잡아야겠어요. 자신과 다른 생각을 배척하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맞다면서 기고만장할 것이고, 이를 악용해서 거짓 뉴스와 음모론을 퍼 나르는 선동꾼들이 판을 칠 거예요. 일단 나 자신이라도 한계와 문제점을 스스로 인지하면서 올바르게 생각하고 살아가도록 공부해야겠어요. 최근 밀의 <자유론>을 다시 읽으면서 정신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와 다른 생각은 솔직히 거부감은 느끼지만, 그래도 제대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마주 봐야겠어요.
 

영화 [이니시에이션 러브]와 [새콤달콤]


처음 영화 [새콤달콤]을 봤을 때, 빠른 전개와 참신한 반전 덕분에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생각에는 주연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가 큰 몫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참신하다고 느꼈던 반전의 여운은 오래가지 않았고, 그냥 괜찮은 오락 영화 정도의 느낌만 남았다. 최근에 우연히 다른 영화 정보를 찾아보다가 알게 되었는데, 이 [새콤달콤] 영화의 원작 소설이 있고, 일본 영화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작 소설까지 읽을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일본 영화는 궁금해서 찾아봤다.















일본 영화와 우리나라 영화 모두 마지막 반전이 중요하다. 그래서 일본 영화의 우리나라 포스터와 디비디 표지에 저렇게 새빨간 글씨로 마지막 반전에 대한 글을 적어놓았으리라. 저 붉은 글씨 때문에 이 영화가 공포영화인 것처럼 느껴진다. 누가 저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겠지만, 참 센스 후지다. 저 글씨 때문에 영화를 보려던 마음이 싹 사라질 것 같다. 


글을 쓸 때에는 그것이 책에 대한 이야기던, 영화 이야기던 그 작품에 대한 모든 것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 굳이 스포일러 경고 따위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아마도 유튜브의 영향인 것 같은데, 글에도 스포일러 경고를 미리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써 놓은 글들을 가끔 본다. 붉고 굵은 글씨로 아주 잘 보이게 맨 앞에 경고문을 적어 놓은 글들. 실은 나는 누군가 어떤 작품에 대한 핵심 내용을 미리 얘기해도 그 것을 (책이라면)읽거나, (영화라면)보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유명한 영화 [식스 센스]의 경우에도 부르스 윌리스에게 뭔가 비밀이 있다는 이야기를 먼저 듣고 영화를 봤었다. 물론 그가 실은 죽은 상태, 즉 유령이라는 것까지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주인공인 그에게 비밀이 있다는 이야기는 결국 나중에 뭔가 상황이 확 바뀌겠구나 라고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영화를 보는 재미 혹은 묘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 반전을 접하는 것도 좋겠지만, 사실은 나중에 이야기가 확 뒤집어질거야 라는 것을 대충 예상하고 본다고 그 재미가 그다지 줄어들지는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오히려 아예 아무런 정보 없이 책이나 영화를 시작하기 보다는 적어도 이게 어떤 종류의 이야기라는 기본 정보 정도는 파악하고 시작하는 편이다. 책을 읽을 때에는 거의 무조건 양쪽 날개와 판권 정보, 머리말 그리고 맨 뒤의 해설이나 옮긴이의 글까지 다 읽은 후에 본문으로 들어간다. 영화의 경우에도 미리 정보를 찾아본 후에 시작하는 경우가 많고 스포일러를 굳이 일부러 피하지도 않는다.


지금 굳이 일부러 스포일러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늘어놓는 이유는 이제 곧 이 두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반전에 대한 이야기를 쓸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니시에이션 러브]와 [새콤달콤] 모두 반전 때문에 기억에 남는 영화이지만, 꼭 그 반전이 아니더라도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밀도가 높고 짜임새가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맨 처음 아무 생각없이 [새콤달콤]만 봤을 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 했지만, 나중에 [이니시에이션 러브]를 일부러 찾아 보고, 그 다음에 [새콤달콤]을 다시 보니 각본과 연출이 치밀하게 계산을 많이 하고 만들었다는 점이 보였다. 그리고 이미 반전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본 것이라 (당연하겠지만) 반전의 의미는 거의 상관이 없고 이야기 자체가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관객을 속이고 막판 반전으로 연결시킨 감각은 대단하다 싶었다. 아마 원작이 그런 구성이라 일본과 한국에서 차례로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었겠지.


맨 처음에 아무런 정보 없이 [새콤달콤]을 봤을 때에도, 딱 반전을 눈치 챈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위화감은 계속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 주인공인 남성과 이야기가 끊어졌다가 다시 시작하는 시점의 남성은 그 외모가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도저히 같은 인물로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두 영화 모두 계속 관객을 속이며 "이렇게 외모가 달라도 얘네는 같은 사람이야." 라고 마치 가스라이팅을 하듯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이런 점이 마지막 반전을 더 극적으로 살리는 요소라고 하겠다. 관객을 속이는 결정적인 아이템은 바로 신발이다. 일본 영화에서는 나이키의 에어 조던이라는 것이 대사라도 등장하고, 딱 신발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아, 이건 내가 그 시절에 마이클 조던을 좋아했고, 에어 조던 이라는 상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이긴 하겠다. 그런 면에서 일본 영화는 참 잘 만들었다고 칭찬하고 싶다. 80년대 중후반을 살았던 세대에게는 추억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우리에게 응답하라 시리즈가 있듯이, 일본에는 이 영화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영화 시작 시점의 주인공인 약간 통통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농구화를 선물 받고, 잠시 후에 갑자기 남자 주인공이 바뀐다. 잘 생기고 날씬한 남성, 흔히 훈남이라고 표현하는 그런 멋진 남성으로. 아까 말한 것처럼 관객 입장에서는 당연히 위화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데, 감독은 신발을 비롯해 여러가지 요소로 계속 관객들에게 믿으라고 강요한다. 결국 관객들이 감독의, 아니 원작 작가의 강압에 못 이겨 반쯤 포기하고 받아들일 때쯤에 마지막 반전이 등장한다. 그럼 이 두 영화에서 공통으로 관객들을 속이는 요소들을 알아보자.


제일 중요한 요소는 언급한 거처럼 신발이다. 일본에도 그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연인에게 신발을 선물하면 안 된다는 일종의 미신(혹은 징크스?)이 있다. 그래서 마유와 스즈키가 헤어지고, 다은과 장혁이 헤어진다고 암시하는 증거라는 기능도 있다. 그리고 운동화는 살찐 주인공이 날씬한 주인공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매끄럽게 연결하는 기능도 한다. 주인공이 운동화를 선물 받고 열심히 운동해서 살을 뺀 것이라고 관객을 속이는 요소인 것이다. 그 속임수를 완성하기 위해 두 영화 모두 두 사람이 만날 때 주변에서 뭐라고 말을 하거나 눈짓으로 남성의 기를 죽이는 상황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에서 이름이 같거나 비슷한 두 남성이 부딪히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도 운동화는 꼭 필요한 소품이다. 두 사람이 부딪히기 위해서는 주위를 살피지 않고 달리도록 만들어야 하고 달리기 위해서는 운동화가 필요하니까. 두번째 요소는 이름이다. 일본 영화에서는 두 사람이 모두 '스즈키' 라는 성을 가졌다. '스즈키'가 얼마나 흔한 성씨인지는 모르지만, 우연히 한 여성이 연달아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는 설정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질 정도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는 한다. 우리나라 '김'씨, '이'씨, '박'씨 정도라면 아주 자연스러울 것 같기는 하다. 일본 영화에서 두 남성이 같은 성을 가졌다면, 우리 영화에서는 같은 이름을 가졌다. '혁'이라는 이름. 그리고 일본 영화는 여기서 애칭이라는 한 가지 요소를 더했다. 여성이 남성을 부르는 '탓쿤' 이라는 애칭.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처음에는 서로 성으로 부르고, 나중에 친해지고 나서야 이름에 '상' 이나 '짱'을 그리고 남성에 한해 '쿤' 을 붙이는데, 그냥 이름 만으로 부르는 건 정말 아주 친한 사이에 한해서 가능한 것 같다. 그에 반해 애칭은 상대적으로 좀 더 쉽게 부르기도 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름이 같은 것 만으로도 너무 자연스럽기 때문에 굳이 애칭까지 넣지는 않았으리라. 그런데 일본 영화에서 이 애칭이 좀 억지스럽다. 이런 것들이 마지막 반전에 대한 힌트가 될 수 있는데, 이 이야기가 밀도가 높고 잘 짜여졌다는 증거 중 하나다. 그러니까 관객들을 속이는 요소들도 계속 등장하지만, 관객들이 억지로 이 정도면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겠네 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 의외로 실은 그게 아냐 라고 알려주는 요소들도 존재한다. 처음 등장한 남성은 스즈키 유우키 이고, 뒤에 등장하는 남성은 스즈키 타쿠야 이다. 여성은 두 남성을 모두 '탓쿤' 이란 애칭으로 부르는데, 타쿠야는 이름 때문에 이 애칭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유우키는 대체 왜 탓쿤이 되는 걸까? 여성은 유우 라는 글씨의 한자(夕)가 가타가나 타(タ) 처럼 생겼다고 말하면서 이 남성의 애칭을 '탓쿤'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 이전에 습관적으로 '탓쿤' 이라 불렀거나 부르려던 실수는 그냥 무시하거나, 옷에 붙은 '태그'라고 둘러댔었다. 그 다음으로 관객을 속이는 요소 중 하나는 여성이 이 두 남성을 만난 계기가 같다는 것이다. 일본 영화에서 마유는 두 남성을 모두 미팅에서 만났다. 약 1년 가량의 시간 차를 두고. 한국 영화에서는 두 남성이 모두 다은이 일하는 병원에 환자로 실려온다. 환자와 간호사로 만나 연인으로 발전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이야기에는 관객을 속이는 요소들도 있지만, 그러면서도 이래도 속을 거야? 라며 놀리듯 이 두 사람이 다른 사람임을 보여주는 암시들도 존재한다. 일단 누가 뭐라해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두 사람의 외모가 가장 큰 증거이고, 그 다음이 두 사람의 성격이다. 한없이 순하고 착한 초반 주인공에 비해 그 다음 주인공은 한일 양국 모두 어느 정도 까칠하고 자기 중심적인 면이 있다. 여기서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이 하나 나오는데, 바로 남자 주인공의 폭력성이다. [새콤달콤]의 장혁은 피곤하다고 짜증을 내기도 하고 여러 상황 때문에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직접 폭력을 사용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니시에이션 러브]의 타쿠야는 무려 세 차례나 폭력을 사용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아마 80년대 일본이라는 시대 상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시대에는 한국 남성도 폭력을 자주 사용했고, 그럼에도 여성들은 그 폭력에 대항하거나, 신고하거나, 헤어지거나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아, 물론 지금도 아주 높은 확률로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제법 많겠지만, 적어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일본 영화의 시점이 87년이고, 우리 영화의 시점이 영화가 개봉한 21년 즈음일테니 당연한 선택이라 볼 수 있겠다. 그 외에도 여성이 남성을 대하는 태도 표정, 그리고 반대로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이 두 남성이 절대 같은 사람일 수 없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나는 특히 남성의 기질과 버릇에 주목했었다. 타쿠야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차갑다. 스스로 자신이 잘난 사람이란 것을 너무 잘 알고 그걸 보란 듯이 드러낸다. 그리고 버릇처럼 반복하는 행동이 있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게 유우키는 그렇지 않다. 장혁도 기본적으로 잘생기고 잘난 사람 특유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있다. 특징적인 그의 표정과 말투, 반복되는 몸짓들. 당연히 이장혁에게는 그런 모습들이 전혀 없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알라딘에 검색해보니 우리나라에 출간된 번역본이 있었다. 그런데 평들을 읽어보니 굳이 원서를 일부러 읽지는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위에서 마지막 반전에 대해 충분히 살펴 보았으니, 이제 각 인물들과 배역에 대해 알아보자.


[이니시에이션 러브]의 마유코는 마에다 아츠코가 맡았다. 처음 보는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보았던 드라마 [스캔들 이브]에도 나왔더라. 비록 앞 부분에 짧게 등장했다가 거의 마지막 쯤에 또 아주 짧게 나오고 말기는 하는데, 그 앞 부분의 역할이 제법 인상적이어서 표정 연기를 칭찬하며 봤었는데, 이 사람이 저 배우라는 걸 알아보지 못했다. 영화 정보를 찾아보고 나서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아서 다시 [스캔들 이브]의 해당 장면을 찾아 보았는데, 그래도 여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보이지는 않았다. 영화가 2015년 작품이고, 드라마는 2025년에 나온 거라 10년이라는 시간 차이 때문일까? 아니면 맡은 배역이 너무나도 달라서일까? 모르겠다. 아, 그리고 이 사람 아주 유명한 아이돌 출신이더라. 마침 드라마에서 맡은 배역이 아이돌 출신으로 유명 배우랑 결혼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캐스팅 담당자가 일부러 선택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서 마유코는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성이다. 그리고 아주 영리한 아니 영악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그의 선택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타쿠야가 폭력까지 휘둘렀기 때문에 마유코가 아주 자연스럽게 착한 남자를 선택한 것은 당연하다. [새콤달콤]의 다은에게는 이런 면이 보이지 않아 좀 아쉽다. 장혁의 이야기에서 정당성을 많이 부여하는 것에 반해 다은의 선택에는 막 공감하기가 조금 어렵다. 같은 이야기이지만, 상대적으로 일본 영화가 좀 더 마유코에게 집중한 느낌이고, 한국 영화는 장혁에게 집중한 느낌이다. 며칠 전에 [내 몸을 빌려드릴까요] 를 읽고 쓴 글에서도 썼는데, 80년대 중후반에서 90년대의 일본을 잘 알지 못해 놓치고 지나가는 디테일이 많은 느낌이다. 당시의 일본 문화를 잘 아는 분들이라면 훨씬 더 풍성한 느낌으로 이 이야기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마유코는 치위생사로 나오는데, 병원에서 일하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두 남성을 만난 것도 미팅 자리였고, 보여주는 모습도 모두 퇴근한 후의 일상이다. 치위생사 라는 직업이 다른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덜 힘들게 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반면 다은은 종합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인데, 두 남성을 만난 것도 모두 병원이었고, 병원에서 정말 피곤하고 힘들게 일하는 모습들이 많이 나온다.


[새콤달콤]의 다은은 채수빈이 맡았다. 이 배우를 이 영화에서 처음 봤는데, 정말 이 배역에 찰떡같이 잘 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기를 잘 했다. 물론 영화 자체가 전체적으로 말도 안되는 상황들을 계속 밀어붙이며 억지로 웃기려 드는 측면이 있어서 상식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면이 많기는 하지만, 현실에서 종합병원의 간호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기에 결국은 공감하게 되었다. 초반에 이어지는 병원 장면들을 보면서 장기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몸을 움직이지 못해서 목이 말라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있을 때, 친절하게 뭐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물어 봐주고, 다른 간호사들 보다 조금 더 잘 챙겨줬던 간호사가 있었다. 다은이 이장혁에게 잘해주는 장면들을 보면서 그 사람이 생각났다. 요 위에서 마유코가 아주 영리하고 자연스럽게 남자를 바꿨다고 말했는데, 상대적으로 다은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서야 결국 다른 선택을 하는 거처럼 보인다. 조금 더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줬다면 좋았을 것 같다.


스즈키 타쿠야는 마츠다 쇼타라는 배우가 맡았다. 처음 보는 배우인데, 키도 크고 정말 잘 생겼다. 찾아보니 재일교포 배우인 마츠다 유사쿠 라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고, 형인 마츠다 류헤이도 배우라고 나왔다. 어, 이 이름은 익숙하다 싶어서 보니 확실히 본 적이 있는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재미있게 봤었던 드라마 [아수라처럼] 에 나왔더라. 타쿠야에 대해서는 저 위에서 반전 이야기를 할 때 제법 자세히 다뤘다. 이것도 아마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타쿠야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미야코와 바람을 피우는 모습이 낯설고 이상하게 여겨졌다. 불륜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저 드라마 [아수라처럼] 에서도 불륜을 저지르는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적어도 다들 죄책감을 느끼기는 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물론 타쿠야도 죄책감이 아예 없지는 않았겠지만, 자신이 도쿄에서 시즈오카까지 그 먼 길을 운전해서 가주는 것으로 죄책감을 상쇄시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거리감이 없어서 이 두 도시가 얼마나 먼 지 잘 모르겠는데, 대사로 너댓시간 운전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차로 다섯시간 운전한다면 거의 서울 부산 간 거리에 가까운데. 그렇게 먼 거리를 오간다는 것은 확실히 너무 피곤하고 힘든 일이기는 하다. 나도 부산까지 운전을 하고 나면 너무 피곤해서 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 이 정도 장거리 연애라면 애초에 접근 자체가 달랐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장혁은 장기용이란 배우가 맡았다. 이름은 낯선데 얼굴은 익숙했다. 어디서 봤나 해서 찾아보니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나왔더라. 내 주위 중년 남성들 대부분이 이 드라마를 정말 좋아했고, 아주 친한 친구 한 명은 심지어 인생 드라마라며 여러 차례 반복해서 보던데, 나는 이 배우가 맡은 깡패 캐릭터가 아이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을 보고 난 후로 이 드라마를 보기 싫어졌었다. 결국 나중에 억지로 다 보기는 했는데,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은 절대로 들지 않는다. 뭐 그만큼 실감나게 연기를 잘 했다고 볼 수 있겠지. 이 배우가 나온 다른 작품은 기억나지 않는데, 검색했을 때 나온 사진들을 보면 같은 배우가 맞나 싶을 정도로 분위기나 표정들이 다양하더라. 영화에서 장혁은 인천에서 다은과 연애를 하다가 서울에 있는 대기업으로 파견을 나간다. 타쿠야가 며칠에 한번씩 시즈오카에 다녀왔던 것에 반해 장혁은 초반에 거의 매일 밤에 인천으로 퇴근했다가 아침에 서울로 출근한다. 비록 이동 거리는 도쿄 시즈오카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이 길이 얼마나 심각하게 막히는 길인지는 잘 알고 있다. 이제는 제법 오래 전 일이기는 하지만, 나도 부천에 살 당시에 서울로 출퇴근을 했었고, 자주 운전을 해야 했었다. 지금은 성인이 된 큰 아이가 아기였을 때였고, 아침에 아기를 신도림 장모님께 맡기고 종로로 출근했었다. 아기 짐이 엄청 많았기 때문에 차로 이동해야 했다. 인천에서 서울로 오는 두 길(고속도로와 국도) 모두 지독하게 막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서울에서도 신도림과 종로 모두 얼마나 막히는 길인가! 퇴근할 때는 또 반대로 신도림에 가서 아기를 데리고 다시 부천으로 가야 했다. 이 글을 쓰면서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끔찍한 기분이 든다.


앞서도 언급했는데, 이 영화는 일본 영화에 비해 장혁의 비중이 아주 높다. 일본 영화에서는 앞쪽 유우키의 이야기와 뒤쪽 타쿠야의 이야기를 카세트 테이프 A면과 B면이라고 제목을 붙여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다룬다. 원작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화에서는 중심 이야기가 타쿠야와의 사랑이기 때문에 결국은 타쿠야 이야기에 무게가 더 실려 있기도 하고, 실제로 등장 장면도 타쿠야가 더 많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그래도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영화에서는 이장혁의 이야기가 정말 짧다. 이 영화만 봤을 때에는 이게 당연하게 느껴졌는데, (결국 장혁과 다은의 이야기가 중심이니까) 일본 영화와 비교하니까 좀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이장혁의 비중이 줄었다. 타쿠야는 본인이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간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미야코를 거부하지 못하고 바람을 피우게 되는데, 장혁은 바람을 피운 것은 아닌 것으로 나온다. 무리해서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출퇴근의 피로,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를 파견 나온 비정규직 두 사람에게만 맡겨놓은 모양새가 말이 안 되기는 하지만, 암튼 거의 매일 야근을 해야 하는 회사 상황 등으로 한계에 몰려 있었다. 그리고 3교대 근무로 늘 지쳐있는 다은이 임신 후 낙태하는 상황에서 곁에 있어주지 않고 굳이 회사로 가버린 선택 등의 상황으로 홧김에 다은을 두고 떠나 버린다. 다은이 장혁의 회사로 반지를 보내(일본 영화에도 같은 장면 있음)면서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이별을 인정한 셈이 된다. 그리고 이후에 장혁이 보영과 관계를 시작한다. 어, 그런데 일본 영화도 그렇고 이 영화에서도 이 두 사람 이별의 결정적인 요인은 남자가 이름을 잘 못 부른 것인데, 타쿠야는 이미 바람을 피우고 있었기에 결정적인 실수가 당연하겠지만, 장혁은 왜 실수를 했을까? 이 부분이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네.


또 한 명의 스즈키인 유우키는 모리타 간로 라는 배우가 연기했다. 타쿠야의 빈 자리를 운 좋게 차지한 럭키 가이. 귀엽고 착한 남자. 영화에 나온 만큼 착한 남자라면 누구라도 그를 선택하는 것이 너무 당연할 것이다. [새콤달콤]을 먼저 봤기 때문에 포동포동 귀여운 남자 배우가 나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다부지게 근육질일 것으로 예상되는 배우가 나왔다. 그럼에도 의외로 귀여운 매력을 잘 보여줬다. 다른 역할을 맡으면 또 완전 다른 이미지가 될 것 같다. 다부진 체격 때문에 깡패 같은 역할이 잘 어울릴 것 같은 배우다. 일본 영화에서는 유우키와 마유코의 풋풋한 사랑, 설레는 사랑 이야기도 제법 좋았다.


이장혁 역은 이우제 라는 배우가 맡았다. 일본 영화 유우키에 비해서는 훨씬 부드럽고 귀여운 느낌이다. 상대적으로 좀 더 포동포동한 느낌이기도 하다. 아마 배역 때문에 일부러 살을 찌운 것으로 보인다. 일본 영화에 비해 이장혁은 다은과 제대로 연애한다는 느낌은 안 든다. 마지막 장면 이후에 이 두 사람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알콩달콩 사랑을 잘 키워갈 것인가? 어쩌면 마유코 유우키 커플과 달리 다은 이장혁 커플은 잘 될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마유코와 유우키는 아마 아주 높은 확률로 타쿠야와 비슷한 상황으로 갈 것 같다.


이시마루 미야코는 키무라 후미노가 연기했다. 전형적인 동양 미인, 특히 일본 미인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공부도 잘 했고, 좋은 직장도 얻었는데 예쁘기도 한 사람. 이런 사람에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타쿠야와 함께 도쿄에 올라온 그 친구가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것이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다. 물론 현실에서는 이런 사람을 만날 확률이 극히 드물고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여러가지 다른 요인들 때문에 바로 사랑에 빠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런데 이렇게 완벽한 여성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은근슬쩍 고백까지 한다면 마음이 흔들릴만도 하겠다. 아, 아냐. 이렇게 타쿠야의 바람을 이해해주면 안 되지! 영화가 끝나고 나서 나중에 과연 타쿠야와 미야코가 이어질까? 아마 영화에서 타쿠야가 미야코에게 청혼을 했다가 거절 당하는 장면이 있었던 것 같다. 키무라 후미노는 재작년에 영화 [시티 헌터]에 나왔더라.  


보영 역은 정수정이 맡았다. 정수정이라고 해서 누군지 몰랐는데, 아이돌이었더라. 키무라 후미노를 보고 나서 정수정을 다시 보니 이 두 사람 분위기가 상당히 비슷했다. 물론 제작진이 일부러 그런 느낌의 배우를 섭외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극 중 두 사람의 성격과 행동은 상당히 다른데,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은 정말 많이 비슷했다. 그런데 이놈의 제작진. 어떻게든 억지로 웃기려고 옷에 케첩을 흘리고, 고추장을 흘리고, 아, 진짜! 온갖 음식을 흘리고 씻지도 않고. 왜 예쁜 배우를 데려다가 이렇게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정말 전혀 웃기지 않고 그냥 영화를 꺼버리고 싶은 마음을 참고 달랬다. 


원작 소설의 제목이자 일본 영화의 제목인 [이니시에이션 러브]는 통과의례처럼 거쳐가는 사랑이라고 한다. 첫사랑을 말하는 것 같지만, 일반적인 기준으로 결혼 전까지 거쳐가는 인연들이 모두 해당되겠지. 결혼을 했어도 또 이혼을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불륜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인생은 모르는 것이기에 결국 모든 사랑이 해당될 수도 있겠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사랑이라는 것, 사람을 좋아한다는 감정이 결국은 그렇게 계속 변할 수 밖에 없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국 영화 제목은 [새콤달콤] 이다. 처음에 그 상품이 생각났다. 그걸 캐러멜이라고 부르던가? 확실히 사탕은 아니었는데. 암튼 제목을 보자마자 그것의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혀에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그 상품은 이름을 참 잘 지은 것 같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왜 제목이 새콤달콤인지는 잘 모르겠다. 두 번이나 봐도 모르겠다. 사랑이 새콤하면서도 달콤하다는 뜻인 것 같은데. 달콤은 알겠는데, 새콤은 뭘까?  


맨 처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봤을 때는 [새콤달콤]도 그리 나쁘지 않은 영화였는데, [이니시에이션 러브]와 비교하니 너무 못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억지로 웃기려고 그렇게 만든 것이겠지만,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이 안 된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일본 영화처럼 좀 진지하게 만들 순 없었을까? 그리고 감독이 장혁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제일 견디기 어려웠던 건 이경영이었고, 그 다음은 박철민이었다. 아, 진짜!!!! 얘네들은 쓸데없이 억지 웃음만을 위해 존재하는 캐릭터들인데, 이건 캐릭터 낭비라는 생각 밖에 안 든다. 백번 양보해서 박철민은 그래도 직장상사로서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이경영은 정말 불필요한 인물이다. 일본 영화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역할이다. 이경영 때문에라도 다시는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경영이 나올 때마다 확 그냥 영화를 꺼버리고 싶은 걸 얼마나 열심히 참았는지 모른다. 사실 영화 자체는 일본 영화가 훨씬 만듦새가 좋았는데, 주연 배우들의 연기는 채수빈과 장기용이 더 좋다고 느꼈다. 그런데 아무리 채수빈과 장기용이 연기를 잘 하고 합이 좋아도 이경영 때문에 이 영화에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다. 


일본 영화에서는 80년대가 배경이라 비정규직이 나오지 않는다. 타쿠야는 도쿄로 발령을 받아 간 것이지 장혁처럼 파견을 나간 것이 아니다. 그 시대 일본을 버블경제 직전의 황금기라고 말한다. 우리 세대가 응답하라 시리즈로 88년과 94년을 기억하는 것처럼 일본의 중년들은 이 영화로 그 시대를 추억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자막이 올라갈 때 작은 화면으로 80년대 백과사전이 나온다. 이후 세대는 본 적이 없을 그 시대의 물건들과 문화를 보여준다. 요런 거 참 재밌게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들을 설명하는 자막에 자주 감독 이름이 나온다. 감독이 자주 썼던 물건, 감독이 자주 했던 것. 뭐 이런 식이다. 여러 물건들이 소개되었는데, 카세트 테이프나 전화카드처럼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들도 있고, 당시 유행했던 드라마나 만화처럼 익숙하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아, 아마도 원작에서도 그럴 것 같은데, 이 영화에서 카세트 테이프가 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근데 이미 글을 너무 길게 써서 이건 그냥 패스.


[새콤달콤]에서는 파견직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에 대해서 다룬다. 비록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정규직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무시 당하는 모습 만은 사실적이다. 그리고 매일 야근에 영혼을 갈아 넣어야 할 정도의 업무 강도로 일을 시켜 놓고, 일이 마무리되면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현실도 똑같다. 이 부분이 이 영화 전체에서 딱 하나 칭찬할 부분이라 하겠다. 공교롭게도 80년대 일본과 2020년대 한국을 배경으로 같은 이야기의 영화가 나왔다는 것이 재미있다. 이런 식으로 일본과 한국이 같은 내용을 영화로 만든 것들을 비교하면 쓸 이야기 거리가 많겠다. 시간 날 때 하나씩 써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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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을 빌려 드릴까요
사토 아유코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나 자신을 누군가에게 빌려 준다는 의미


이 책을 다 읽고 꼭 글을 남기고 싶었다. 글을 쓰려고 마음 먹은 지 한참이 지났는데, 지금까지 계속 글을 쓰지 못한 이유가 있다. 마야는 왜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주려고 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질문에 답을 찾기에는 몇 가지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우선 성별의 한계가 있겠다. 나는 현재 중년 남성으로서 젊은 여성의 생각을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두번째는 시공간의 한계다. 이 소설은 1996년 "가와데 문학상"을 받았다. 90년대 중반 일본의 이야기다. 나도 물론 90년대 중반에 청춘을 살았지만, 일본과 한국은 여러 상황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요즘은 SNS와 각종 영상 등을 통해 각 나라의 사회상황과 문화를 훨씬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그때는 일본 문화를 직접 수입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세번째로는 계급 혹은 계층의 한계라 할 수 있다. 약간 억지로 일반화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일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대학인 도쿄대학을 다니고 있다. 비록 마야가 보디 렌탈을 통해 돈을 벌고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이 일을 한다는 내용은 없다. 아마 굳이 보디 렌탈이란 방법으로 돈을 벌지 않아도 대학을 다니며 생활하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것 같고, 필요하면 얼마든지 알바를 통해 용돈을 벌 수 있다. 실제 작중에서 마야는 그 용돈 벌이의 목적과 보디 렌탈의 고객 모집을 위한 목적으로 바 같은 곳에서 알바를 한다. 암튼 공부도 잘하고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움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반면 나는 지독하게 가난하게 살았고, 공부를 그리 잘 하지도 못했다. 그저 이름 없는 지방 대학을 겨우 졸업하고 시민운동 판에 뛰어든 가난한 활동가일 뿐. 사실 지금까지 언급한 태생적인 한계라는 것들은 다 핑계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모두 다르다. 이 지구에 약 80억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면, 그들 모두 각자 다른 생각을 한다. 완전히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다만 결이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각자 모두 이렇게 다름에도 불완전하게라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쨌든 마야의 삶을 들여다보며 상상해보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토 아유코 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일터에서 가까워도 한동안 가지 않았던 알라딘 중고서점을 그날 따라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별 생각없이 책들을 살펴보다가 정보라 작가의 책 하나를 고르고 우연히 집어든 책이 [도쿄대학 살인사건]이었다. 책 날개에 있는 작가 소개 문구에 비운의 천재 작가라고 적혀 있어서 구매했었다. 이 책은 약 1/3 정도 읽었는데, 진행이 좀 느리고 생각만큼 재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사토 아유코 작가의 가장 유명한 책이 바로 이 [보디 렌탈] 이라고 하길래 [도쿄대학 살인사건]을 덮어두고 이 책을 먼저 읽고 싶어졌다. 이 소설의 원제가 바로 [보디 렌탈]이고 우리나라에 처음 출간된 판본도 이 제목으로 나왔다고 한다. 이후 다시 출간된 책이 지금 제목으로 나왔다. 암튼 이 책을 구하기 위해 알라딘 앱에서 중고 책을 검색했다. 세 곳의 매장에 이 책이 있었고, 그 중 하나를 골라서 2만원 어치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배송료 2,500원을 아끼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돈을 쓰는 것인데, 평소 다른 온라인 쇼핑이라면 이런 짓을 하지 않겠지만, 책에 대해서는 늘 이렇게 한다. 그래도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책이니까. 


이 소설이 "가와데 문학상"의 수상작으로 결정된 그 회의는 무려 4시간이나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고 한다. 통상 문학상의 수상작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사전에 심사위원들이 대략 그 범위를 좁혀 놓고 시작하기 때문에 그렇게 긴 시간 토론을 이어가는 일은 드물다고 한다. 그만큼 문제작이었다는 뜻이겠지. 이 책의 맨 뒤에 수록된 두 편의 해설과 옮긴이 후기에서도 반복적으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본의 평론가 진노 토시후미는 이 소설을 포함한 사토 아유코의 작품들을 "초현실주의 실험"으로 보며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표현했다. 김미현 평론가는 "하루키의 경쾌함, 뒤라스의 관능성, 쿤데라의 위악성이 혼합된 묘하고 대담한 소설"이라고 말했다. 옮긴이 김진욱은 사토 아유코가 "성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그렸다고 언급했다.


이 책을 한 번 완독하고 두번째로 필요한 부분만 발췌독을 한 내 솔직한 마음은 생각만큼 재미있지도 않고, 생각만큼의 문제작도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이 30년 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하겠지. 그럼에도 김미현 평론가가 말한 것처럼 하루키와 뒤라스와 쿤데라를 불러올 정도는 아니다. 아, 확실히 경쾌함이 있고, 관능적이고, 위악성이 있다. 그것이 이 소설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잘 어우러져 있는가?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의문이 든다. 요컨대 핵심은 이거다. 이 글의 맨 앞에서 내가 던진 질문이자 독자들이 이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떠올릴 질문, 그래서 대체 왜 그는 타인에게 자신의 육체를 빌려주는 걸까? 그것도 젊은 여성이 돈 많은 중년의 남성들에게 고액의 돈을 받으며 남들이 매춘이라 부를 행위를 하는 것일까? 확실히 돈 때문이라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육체적인 쾌락 때문도 아니다. 뭔가 이 사회에 대한 환멸과 저항을 표현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럼 왜일까? 책을 덮은 후로 꽤 긴 시간을 생각해봐도, 나로서는 명확한 답을 찾기 어렵다.


진노 토시후미는 매춘을 "상실을 위한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내 몸이지만, 이 몸이 내 신체라는 감각을 상실하는 것. 이것을 위해 보디 렌탈 이란 행위를 하는 것이라는 말로 읽을 수 있다. 이 일본인 평론가는 작가인 사토 아유코가 우연한 계기로 신체감각을 상실할 계기로 매춘을 선택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이 해설은 아마 일본에서 출간된 96년 판본에 실린 글일 것이다. 사토 아유코는 2008년 [꽃들의 묘비]라는 작품을 출간하며 자신과 언니가 친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신체감각의 상실을 위해 매춘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김미현 평론가는 글에서 보디 렌탈의 이유를 딱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텅 빈 그릇이 되어 그 속에 허구나 망상, 유희 만을 담기 위해 의식이나 반성, 이성 따위 자의식을 몸에서 파낸다."는 문장을 썼다. 그리고 이 평론가는 소설 후반부에 마야가 유일하게 가학 충동을 느껴 먼저 유혹하는 우치다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며, 결국 마야가 "완전한 물건이 되기에는 그녀의 자의식이 철저하게 제거되지 못했기에 분열을 일으켰다."고 표현했다. 이어서 "물건이 스스로 물건임을 모르면 진짜 물건일 수 밖에 없다." 라며 "자신이 물건이라는 자의식이 있다면 그때부터는 이미 물건이 아니다." 라고 했다. 우리 마야는 자의식조차 없는 물건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자신의 몸을 타인에게 빌려주는 삶을 살았지만, 결국에는 자의식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옮긴이의 말에는 아사히 신문의 서평에 실린 마야의 목적도 소개하고 있다. "그녀가 노리는 것은 어떤 종류의 정신적 치유" 라고 했다. 이어서 "자신의 몸을 남자들의 욕정의 기호로 삼아 철저히 세련되게 만들면서 거꾸로 그 같은 욕정의 세계에서 정신을 이탈시킨다는 식의 '야릇한 치유법'" 이라고 적어놓았다.


이 소설에는 마야의 과거에 대한 내용이 거의 없다. 현재 대학생이면서 남몰래 부유한 중년 남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고 살고 있고, 그 고객인 여러 남자들과의 이야기들이 옴니버스식 구성처럼 등장한다. 마야가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는 그 과거를 알 수 없어 이해하기 어렵지만, 작가인 사토 아유코가 왜 이런 작중 주인공인 마야의 삶을 빌려 이런 이야기를 쓴 것인지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어려서부터 친아버지에게 당한 성적 학대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지옥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지워버려야 했을 것이고, 자신을 지우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로 선택한 것이 사물처럼 만드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사실 작가는 비운의 천재 작가가 아니었다. 가족이란 이름의 괴물에게 학대 당한, 너무나도 불행한 삶을 살았던,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했던 부단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자의식을 철저하게 지워서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던 경험이 나에게도 있다. 여기 알라딘 서재에 글로 여러 번 썼었고, 언제나 군대 이야기를 하게 되면 꼭 하는 이야기이다. 나는 군에 입대할 당시에 나 스스로 인간이라는 생각을 지우려 애썼다. 만약 내가 스스로 인간임을 인정한다면 도저히 그 생활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낱 미물이며, 감히 인간 따위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온갖 육체적, 정신적 폭력을 견뎌내야 했다. 만약 그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탈영을 했을 것이다.


이제 작가를 고려하지 않고 그냥 순수하게 작품 자체만 놓고 몇 가지만 더 얘기해보자. 일단 확실히 독특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다. 그리고 정말 너무나도 자극적인 주제다. 다만 글에는 섹스 묘사도 없고 야릇한 분위기조차 없기 때문에 포르노라고 부를 수는 없다. 마야가 말하는 보디 렌탈이란 개념 자체가 그렇듯이 이 글에서 중년 남성들이 마야를 빌려서 하는 여러 행위들은 철저히 차가운 시선으로, 감정을 배재하고 그저 이런 일이 있었음을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구체적인 묘사를 배제한다. 그리고 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해괴한 짓을 너무 당연하게 또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처럼 이 소설 전반에 상당한 블랙 유머와 해학이 깔려있다. 소설 초반에 와타나베 조교수가 강의에서 한 말인 "인간은 똥과 오줌 사이에서 태어난다."는 말은 이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잘 나타내는 말이다.               


정말 독특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상식적으로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주제를 너무 거리낌 없이 던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글이 경쾌하고 거침이 없기도 하며, 그러면서 또 위트와 해학을 갖춘 글이다. 앞서 김미현 평론가의 평가는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계속 말하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거야?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뭐라고 할 말이 없다. 확실히 이 소설의 결말은 좀 많이 아쉽다. 그리고 전체적인 구성도 아쉽다. 병렬적으로 여러 구매자들의 이야기를 배치한 것은 장점도 있지만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 전체적으로 큰 줄기의 이야기가 너무 약하다. 앞서 언급한 그 우치다 이야기가 이 소설 전체에서 절정에 해당하는 장면일텐데, 이 부분이 좀 아쉽다. 


이 이야기에서 이어서 생각할 거리들도 제법 많다. 일단 요즘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파파카츠"가 이 책에서 묘사된 보디 렌탈과 매우 유사하다. 부유한 중년 남성이 젊은 혹은 어린 여성이랑 놀고 돈을 지불하는 방식. 결국은 이것도 매춘이고, 원조교제와 다를 바 없는 행위일텐데, 거창하게 방과후 동아리 활동을 뜻하는 '부카츠' 라는 단어를 파파랑 붙여서 신조어를 만들었다. 우리나라 식으로 이해하려면 조건 만남이라고 해야할까? 예전에 보았던 드라마 [청춘시대] 에서 강이나 라는 캐릭터가 중년의 남성들을 만나면서 원하는대로 돈을 펑펑 쓰는 생활을 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생각해보니 최근에 본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 젊은 여성들이 이 파파카츠로 돈을 벌어서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자신의 '최애'에게 갖다 바치는 이야기가 여러 차례 나왔던 것 같다. 


그리고 일본에는 젊은 여성이 남성에게 자신을 빌려주는 또 다른 형태가 있더라. 바로 렌탈 여친이라고 부르는 것, 우리 말로 여친 대행 서비스 라고 하면 되려나? 일본 드라마 [내일, 나는 누군가의 여자친구] 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드라마로 시즌 1을 보았고, 시즌2는 앞 부분만 조금 보다가 말았다. 원작 만화가 있다고 알고 있다. 나무위키 설명에 의하면 이 만화에 렌탈 여친, 파파카츠, 소프랜드, 딜리버리 헬스 등 불법과 합법 사이를 오가며 통용되는 매춘 행위들이 총 망라된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며 곧바로 이 드라마를 떠올렸다. 이 책이 나왔던 96년에는 책 내용이 충격적인 문제작이었겠지만, 30년이 지난 지금은 이런 류의 매춘이 너무 흔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과 이 드라마를 연결해서 글을 하나 쓰고 싶었는데, 드라마를 가볍게 보고 넘겨 버려서 내용이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그때 디즈니 플러스를 딱 한 달만 구독해서 볼만한 영화나 드라마를 짧은 시간에 몰아서 보았기 때문에 더 기억이 안 나는 듯하다. 다시 보려면 다시 구독을 해야 하는데, 돈이 좀 아깝다. 혹시 [무빙]의 후속 시리즈로 강풀 작가의 세계관을 구현한 드라마가 디즈니 플러스에 나오면 그때 다시 구독할 예정이라, 그때 다시 보고 글을 쓸까 싶은데, 어쩌면 그때쯤 되면 이 드라마가 디즈니 플러스에 없을 지도 모르겠다. 


사토 아유코는 2013년에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알코올을 병용한 급성약물중독이라고 나온다.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힘겨웠을 작가의 삶을 감히 생각하면 참 뭐라 할 말을 찾기 어렵다. 그래도 열심히 작품 써준 덕분에 이렇게 인연을 맺을 수 있어서 고맙다고 표현하고 싶다. 자, 이제 꽤 오래 방치해뒀던 [도쿄대학 살인사건]을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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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책이다. 벽을 주제로 쓴 6편의 단편 소설을 담고 있다. 4편은 SF임을 확실히 알 수 있지만, 두 편은 잘 모르겠다. 이런 류의 주제별 모음집은 수록 작품들의 편차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단순히 취향으로만 봐도 그렇고, 구조와 밀도를 생각해도 그렇다.

첫 소설인 듀나 작가의 [아레나]는 이 책의 첫번째 자리를 차지할만한 흥미로운 소설이다. 미국의 코믹스나 영화 같은 곳에서나 나올 법한 초능력자들이 엄청 많은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K팝 아이돌 문화를 엮었다. 초능력자 아이돌이 공연도 하고 악당들도 물리친다. 그 장면들은 드론으로 촬영되어 전 세계로 영상을 퍼뜨린다. 하지만 모든 장면을 다 드론이 찍을 수는 없는 일. 카메라의 사각지대에서 일어난 일이나 잘 보이지 않는 장면들은 각색되어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소설 속에서 반복되는 초능력자들의 전투 장면들은 초기에는 사실이 거의 대부분 발표되었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은 그저 하나의 선택할 수 있는 재료 중 하나가 되었다고 했다.

˝재미를 위해 양념을 치고, 이미지를 미화하고 몇몇 중요한 사실을 감추기도 했지만, 사실의 큰 덩어리는 남아있었다. 하지만 전투와 오락을 구분할 수 없게 되고 회사마다 쌓아놓은 비밀들이 많아지자 사실은 점점 존재감을 잃었다.˝(본문 33쪽)

수십명의 초능력자 무리가 주인공이 일하는 회사를 습격해 수많은 사람들이 전투에서 죽었지만, 전투가 끝나자 회사의 작가들이 살아남은 초능력자들에게 다가가 인터뷰 하면서 처음엔 사실을 묻고, 그 다음엔 생각을 묻고, 마지막으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말았으면 하는지를 묻는다고 했다. 이렇게 회사에 고용된 작가들이 만드는 공식 세계관이 있는가 하면 전세계 팬들이 각자 만드는 팬픽들도 있다.

이제 진실 혹은 사실은 그 힘을 잃고, 그저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이렇게 저렇게 바뀌어 버리는 설정과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들만 유통되고 있었다. 이 소설의 제목 아레나는 고대 로마 시대에 검투사들이 싸우던 원형 경기장을 말한다. 소설의 첫 문단에서 2033년 7월 14일 대구 도시철도 공사장에서 진홍색 젤리로 가득찬 지층이 발견되고 끔찍한 전염병인 적사병이 유행하고 남한은 이제 전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독특한 생태계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적사병의 원인인 프로스페로 생태계는 소수의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초능력자로 만들었다고 나온다. 아레나는 이렇게 초능력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장소이고, 대한민국이란 나라 전체가 관중석으로 고립된 경기장처럼 전세계로부터 고립되어 거대한 아레나가 되었던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남성은 청소년기에 강한 초능력으로 인기가 많은 아이돌이자 강한 히어로였지만, 성인이 되면서 회사 경영진이 되어 얼굴 마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실질적인 회사 경영은 다른 동료들이 하고, 그는 그저 앞에 나서서 웃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제 초능력자들의 전투에도 나서지 않는다. 성인이 된 그와 동료들은 경영자와 중간 간부가 되고, 다시 어린 청소년들이 나서서 전투를 한다. 이런 시스템도 한국의 케이팝 아이돌과 그 기획사의 문화를 가져다 썼다. 현실에서도 각 기획사마다 연차가 오래된 아이돌들은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않고 회사 중간 간부가 되거나, 얼굴 마담이 되는 것 같다.

듀나의 이 짧은 단편은 흥미로운 소재와 다양한 초능력을 지니고 또 사연을 품은 등장인물들이 나와서 책을 처음 펼쳐든 독자들의 마음을 뺏기에 충분한 매력을 가졌다. 이 정도의 설정으로 이렇게 짧은 이야기만 펼치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중편이나 장편으로 다음 이야기를 계속 써주거나 연작으로 만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두번째 소설인 아밀 작가의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은 제목에도 나온 것처럼 4차원을 다룬다. 3차원 밖에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이 4차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게 가장 궁금했다. 아무리 잘 설명한다고 해도 인간인 우리가 그걸 잘 느낄 수 있을까? 이 소설은 음악, 그 중에서도 클래식 음악을 다룬다. 읽다가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잠깐 생각났다.

세번째 소설은 이산화 작가의 [깡총]이다. 맞다. 깡총 깡총 뛰어다니는 그 동물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그 동물 덕분에 멸종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 이야기 왠지 익숙하지 않나? 그렇다. 이건 호주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가져와 더 흥미로운 설정을 덧붙였다. 긴 싸움을 이어가는 두 종족의 싸움이라는 설정도 좋고, 연구자와 사냥꾼이라는 두 인간 주인공의 조합도 좋았다. 무엇보다 마지막 반전이 기가막히게 좋았다. 이 책을 통해 이산화 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큰 발견이다. 이 소설엔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마틴 옹의 [얼음과 불의 노래]에 나오는 장벽과 같은 길고 높은 벽이 나온다. 사이비 종교에 미친 광신도 집단도 나온다.

이서영 작가의 [월담하려다 접천]도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처음 소개한 듀나의 [아레나]에서 남한 전체가 고립된 상황이었다면, 이 소설에서는 서울이 하나의 고립된 섬 같은 상황이다. 벽에 갇힌 도시 같은 느낌. 여기 서울은 전능하신 방패님이 다스리는 나라다. 뭐든 방패님의 말씀을 따라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 방패님에 대한 정보는 전혀 나오지 않는데 내 느낌에 한 사람의 독재자인 것 같지는 않고 소수의 엘리트 고위 공직자 집단이거나, 종교 집단의 지도자들이 아닐까 싶다. 이 독재국가에선 사람들이 특정한 지역의 출산센터에서 태어나 유아센터, 초등센터, 중등센터, 고등센터를 옮겨 다니며 자란다. 주인공은 역촌동 출산센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같은 출산센터에서 태어나 같은 유아센터 등을 함께한 친구는 나오지만 부모나 가족에 대한 언급은 없다. 공동 시설에서 다함께 자랐으리라. 어렸을 때 북한에 대해 들었던 것과 비슷하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고 공동 작업장에서 일을 해야하고 아이도 탁아소에서 공동으로 자란다. 방패님의 말씀을 통해 평생 서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듣고 그렇게 믿고 살아왔는데, 코딩을 통해 우연히 외부 네트워크의 존재를 알게되어 접촉했다는 이야기. 후반부에 갑자기 이야기의 규모가 너무 커지는데 비해 적절한 묘사가 이뤄지지 않아 아쉽고, 결말이 좀 많이 허무하다. 방패님이란 기묘한 느낌의 독재자 이미지가 재미있고 신선했는데 갑자기 너무 큰 이야기를 흘러가버려서 많이 아쉽다.

이유리 작가의 [무너뜨리기]는 마음의 벽 아니 서로를 허물없이 생각하는 어떤 경계를 다룬 소설이다. 작중 7년차 부부인 남녀 주인공이 더는 서로를 이성으로 느끼지 않게 되고, 방귀도 아무렇지도 않게 뀌게 되는 상황에서 남자가 새로운 시도를 제안하는데, 리빌딩이란 이름의 일종의 최면 치료 같은 것을 받는다. 여기까지는 이야기가 제법 괜찮았다. 그런데 후반부에 갑자기 전혀 다른 이야기로 흘러가면서 좀 황당하게 끝난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마지막 소설은 정보라 작가의 [무르무란]이다. 아마도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모티브로 글을 쓴 것이 아닌가 싶다. 고대 흔히 우리가 신석기 시대라 부르는 돌도끼와 돌칼을 쓰던 시절의 이야기. 선조로부터 지혜를 벽화를 통해 배워 익히고, 이 시대의 지혜를 또 벽에 새겨 후대에 남기는 삶을 다룬다. 사냥에 대한 장면을 기대했으나 묘사가 안 나오고, 주술의식에 대한 묘사는 길게 나오는데 그 장면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소설집 [저주 토끼]를 통해 읽었던 정보라 작가 다운 글이란 생각은 들었지만, 생각보다는 크게 와닿는 지점이 없는 소설이었다.

여섯 작품 모두 저마다 다른 위상과 층위의 벽을 상정하고 이야기를 펼친다. 듀나 작가와 이서영 작가가 고립된 국가와 도시를 둘러싼 벽을 그렸고, 이산화 작가는 인간이 만든 인공물로서 거대한 장벽을 그렸다. 아밀 작가는 차원의 벽을 상정했고, 이유리 작가는 심리적인 벽을 가정했다. 정보라 작가는 유일하게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암벽을 주제로 글을 썼다.

다양한 이야기 꺼리들이 여러가지 다른 주제로 생각을 넓혀주는 기분 좋은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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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6-24 0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듀나님은 오래전부터 sf소설을 쓰신분인데 아직까지도 작품활동을 하시는지 몰랐네요.저도 읽어봐야 겠네요^^

감은빛 2025-06-26 17:43   좋아요 1 | URL
단편을 여기저기 많이 발표하셨던데요.
확실히 필력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외국 작품을 읽을 때 항상 가장 궁금하고 신경 쓰이는 것은 원작의 제목과 그 뉘앙스이다. 내가 출판사에 일했을 때에도 그랬고, 늘 그랬겠지만, 외국 작품들을 우리나라로 가져올 때 제목을 바꾸는 경우는 너무나도 많다. 그렇게 제목이 바뀌면서 원제의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도 제법 많다. 아, 이 글의 시작을 좀 잘 못 한것 같다. 실제로 제목이 바뀐 경우에 이렇게 글을 시작해야 적절한 설명이 되었을텐데, 이 경우엔 실제로 제목이 바뀌지 않고 똑같으니까, 이렇게 시작하면 쓸데없이 분량만 잡아먹는 꼴이 된다.

그런데, 아니 그럼에도 이렇게 이 글을 시작한 이유가 있다. 나는 사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영화를 먼저 봤었다. 그리고 그 영화 내용이 거의 하나도 기억도 안 날 때쯤 이 소설을 읽었고,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영화를 봤고, 그리고 소설을 빠르게 한 번 더 읽고 이 글을 쓴다. 맨처음 이 영화를 봤던 때가 언제였는지, 그때 혼자 봤었는지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과 함께 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히 봤던 것은 맞고, 조금은 불확실하지만, 혼자 봤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누군가 다른 사람과 같이 보고 그와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남아있다. 분명 같이 봤던 사람은 여성이었고, 그는 내게 만약 남자 주인공이었다면 어떨 것 같냐고 극중 상황에 대해 질문을 했었다. 구체적인 내용과 내 대답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리고 나도 그에게 여주인공의 입장이면 이라는 가정으로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역시 그의 답변도 그닥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 영화만 봤을 당시에는 이 작품의 원제가 비밀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뭔가 다른 제목이었을텐데 그냥 배급사에서 편하게 정한 제목이 아니었을까? 그도 그럴것이 예전에는 정말 이상하게 지은 외국 영화 제목이 많았다. 이건 나중에 따로 글을 하나 쓸 생각인데, 정말 뜬금없는 제목들이 많다. 아,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왜 이 소설과 영화의 제목이 비밀이 아니라고 느꼈냐면, 영화에서는 마지막 결론의 그 비밀이 별로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품의 막판에 드라나는 가장 큰 반전이자, 제목을 의미하는 그 비밀이 원작에 비해서는 비중이 너무 적어서 그닥 와닿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책을 읽고 다시 영화를 보면서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 게다가 책에는 분명 히미츠 라고 알파벳으로 일본어 원제가 적혀있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그 시절에 이 영화를 봤던 기억에 다른 건 다 몰라도 히로스에 료코의 표정들만은 잊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자세한 내용은 몰랐지만, 대략의 흐름에 대해서는 남아있었다. 그 상태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음, 왜 지금에서야 이 소설을 읽었느냐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을수도 있겠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최근 몇 달 동안 나는 새책 보다는 중고책을 많이 샀다. 예전에 비해 알라딘 온라인 중고 상품은 거의 없고, 내가 어떤 책을 검색하면 우주점이라고 표현한 전국 어딘가 매장에 원하는 책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경우 해당 매장에서 2만원 이상을 구매해야 배송료가 없어지더라. 그 배송료가 아까워서 나는 일단 처음 검색했던 책을 담아놓고 다른 책들을 추가로 담아서 2만원을 넘기려고 하는데, 꼭 세 권 이상 담아야 하더라. 이런 경우 제일 무난한 방법이 검증된 작가의 책을 추가로 담는 것이다. 최근에 가장 많이 담은 검증된 작가가 히가시노 게이고 였고, 이 책 [비밀]도 그런 와중에 내게 오게 되었다. 책을 받고 보니 처음 구매하려고 검색했던 책보다 이 책에 손이 먼저 갔고, 그래서 읽었다. 다행히 영화에 대한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흔히 스포일러라고 말하는 요소는 없었다. 물론 대략 어떤 흐름이라는 건 남아있었는데, 내게 그 정도는 몰입을 방해하는 스포일러가 되지 않았다.

그럼 책과 영화에 대해 생각나는대로 두드려보자. 일단 책 먼저. 일단 나는 시작하는 방식이 좋았다. 이야기의 화자인 남편 스기타 헤이스케가 야근을 마치고 돌아와 혼자 아침을 먹으려 하는 장면이었는데, 이 방식이 아주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습관과 성격을 보여주었다. 나도 야간에 물류창고에서 일을 하고 아침에 집으로 돌아와 혼자 간단히 아침을 먹고 잠이 드는 경우가 많은데, 내 공감이 더해져 이 도입부가 더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도입부에서 사고 장면에 대한 묘사 없이 뉴스에서 사고 소식을 접하는 것도 좋았다. 이걸 나중에 깨달았는데, 이 소설에서 작가는 철저하게 헤이스케의 시선으로만 이야기를 풀어간다. 즉, 헤이스케가 직접 겪지 않은 그 사고와 같은 내용은 아무리 중요한 이야기라도 직접 다루지 않는다. 물론 그래서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수도 있다. 가령 병원 장면은 조금 그랬다. 아내인 나오코와 딸인 모나미가 얼마나 다쳤는지, 지금 얼마나 위독한 상황인지 곧바로 보여주지 않고 의사의 언급으로만 간접적으로, 그러니까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이렇게 쓰면서 생각해보니 이 소설에 상대적으로 시각적 묘사가 적은 듯 느껴진다.

나오코가 죽고 모나미만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딸인 모나미의 몸에 아내인 나오코의 의식(영혼이라고 쓰려다가 왠지 이 단어가 더 적절한 것처럼 느껴졌다.)이 깃들었다는 것을 깨닫는 헤이스케의 모습은 처음에는 위화감이 적었는데, 두번째 읽을 때는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긴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저항해야 현실적인 것인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영화도 소설도 이 부분이 너무 무난하게 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나미가 알 수 없는 나오코와의 첫 데이트와 (아마도) 첫 관계가 있었을 나오코 집에서의 첫 날의 기억 등으로 과연 모나미의 몸 안에 나오코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가 어떻게 처음 만나고 서로 호감을 가졌는지 얘기해 준 적이 있다. 아이들이 그 이야기를 얼마나 자세하게 기억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거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나오코가 모나미에게 그 이야기를 해줬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사고로 희생된 많은 승객들의 유가족들이 호텔에 모여 대책 회의를 하는 장면은 전형적인 일본인들 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고정관념일지도 모르지만 여러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그런 장면들을 보았으니. 사고에 대한 묘사가 없었기에 독자는 사고 원인에 대한 정보도 주기적으로 열리는 이 회의를 통해 접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거의 정보를 주지 않는 것이 좀 답답했다. 물론 나중에 헤이스케가 이 부분을 파고 들긴 하는데, 정말 명쾌하게 원이 밝혀지기까지 몇 년이나 걸리니 답답할 수 밖에 없다. 삿포로까지 가서 졸음운전을 했던 운전사의 전처의 아들을 만났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었을 때, 나중에 전처를 만나야 결론이 나겠구나 하고 생각이 들기는 했는데, 그 일이 정말 그렇게 나중에 일어날 줄은 몰랐다.

사고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그리고 최근 제주항공 참사가 떠올랐다. 철저하게 헤이스케 중심의 이야기 전개라서 다른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는 않는데, 그래도 호텔의 회의 장면들과 1주기 때의 현장 방문 장면 등에서 아주 조금의 정보들이 나온다. 특히 이기적인 사람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쌍둥이 딸을 잃은 아빠(이 아저씨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데, 다시 책을 찾아보기는 귀찮네)를 다루는 방식도 나쁘지 않았다. 특히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차에 매달린 인형을 보는 헤이스케의 시선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나오코의 죽음과 방금 얘기한 것처럼 간접적으로 언급되는 희생자들 이야기와 1주기 때의 현장 방문 장면 등에서는 울음이 나는 걸 참기가 어려웠다. 아까 말했듯이 세월호 등 억울하고 안타까운 생명들이 떠올라서 더 그랬다. 이 사고도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으로 나온다. 애초에 스키여행을 위해 운행한 셔틀버스 성격이었으니 당연하겠지. 당시 일본에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던 건지, 작가가 다른 비슷한 사고를 보고 넣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작가가 생각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충분히 현실에서 있을 법한 사고였다. 다만 운전사가 돈 때문에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하고 무리해서 사고가 났다는 설정은 너무 손쉬운 설정이라는 생각이었다. 눈길이었고, 차량의 결함이 있을 수도 있고, 길 자체가 위험한 구간이었을텐데 그냥 정말 다른 이유 없이 졸음 운전으로 결론이 나는 것은 좀 이상했다. 물론 이 소설의 핵심이 사고 원인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기에 여기에 분량을 할애하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왜 운전사가 졸음 운전을 할 수 밖에 없었나 라는 의문만을 밝히려 하는 태도가 좀 납득하기 어려웠다.

일본 지리를 잘 몰라서 도쿄에서 나가노까지 얼마나 먼지 모르겠는데, 그 거리가 버스 기사 두 명이 교대 운전을 할 정도인가는 의문이다. 내 경험에 명절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버스로 17시간 이상 걸린 적도 있고, 10시간 이상 걸린 적은 수도 없이 많다. 당연히 버스 기사님은 한 분이었고, 그 분이 그 긴 시간 휴식 없이 운전대에 앉아 계셨다. 교대 기사 따위 없었으니까. 교대 기사까지 있는데도 버스 기사가 졸았다는 것. 아무리 돈을 위해 쉬지 않고 일했다는 설정이라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게다가 해당 기사가 졸려할 때 다른 기사 한 명은 뭘 한 걸까?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영화의 모나미, 그러니까 히로스에 료코는 그렇게 어리지 않았기에 처음 모나미가 초등학생이라고 했을 때 좀 놀라웠다. 고등학생이라면 어른이나 마찬가지니 위화감이 좀 적었겠지만, 5학년이라도 초등학생은 초등학생인데, 그 몸에 30대 어른이 들어가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뭔가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겠지. 작가가 영리하게 적절한 나이를 잘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모나미는 딸이지만, 나오코는 아내였으니 지금 나오코는 모나미의 몸에 있어도 아내라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인데, 이 어린 아이가 학교도 다니면서 집안 일을 모두 다 한다. 저녁거리를 사와서 매일 저녁을 준비하고, 설겆이와 뒷처리도 모두 혼자한다. 청소와 빨래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는데 헤이스케가 한다는 묘사도 없으니 역시 혼자 다 한다고 봐야겠지. 헤이스케는 집에서 하는 일이 없다. 야구 보고 다른 티비 프로그램 보고 가끔 맥주나 마시고 목욕하고 잔다. 아니 그 어린애가 학교 마치고 장보고 돌아와 서둘러 밥을 준비하고 설겆이까지 다 하는데 왜 아빠이자 남편이란 인간은 아무것도 안 하지? 왜 엄마가 죽고 딸이 성인이 될 때까지 그 긴 시간 헤이스케가 밥을 하는 장면은 단 하루도 없지? 한 두번 혼자 라면을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도 혼자 먹는 것이었다. 아무리 아내라고는 해도(아니 아내여도 마찬가지지만) 외형은 어린아이인 딸인데 왜 단 하루도 집안 일에서 휴식을 주지 않는 걸까?

게다가 부부관계 즉 밤 일에 대한 부분은 참 어이가 없었다. 이 부분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끌고 간 것이겠지만, 딸이지만 아내니까 부부관계도 할 수 있다. 뭐 이런 논리인 것이겠지만, 그리고 결국은 당연히 안 된다고 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참 정신이 아득해지는 장면들이었다. 만약 여기서 선을 넘었다면, 그냥 이 책 집어던지고 더이상 안 읽었을 것이다. 물론 실제 부부라면 싸우고 나서 그 방법으로 해소하는 상황이 아예 없지는 않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작가도 딱 그런 생각으로 이 장면을 만들었겠지만, 그리고 독자들이 딱 지금 내가 생각하듯 생각하길 바라고 넣은 것이겠지만, 그래도 읽으면서 너무 어이가 없었다. 나중에 영화로 이 장면을 봤는데, 다행히 영화에서는 옷은 안 벗었더라만(아마 심의 등급 등을 고려해 벗을 수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시도 자체로 화가 나는 것 마찬가지였다. 이것과 함께 목욕 장면도 정도는 좀 덜하지만, 마찬가지로 어이가 없었다. 이것 역시 영화에서는 가볍게 넘어가는데, 소설에서는 헤이스케가 나오코와의 목욕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나오코가 혼욕을 거부하고 나가자 화를 내는 장면에서 이게 일본이라서 당연한 것인가? 아니면 시대가 그랬던 건가? 궁금해졌다.

2000년 즈음에 사막화 방지 운동 차원에서 일본 대학의 시민단체와 함께 몽골에 갔을 때 처음으로 깨달았었다. 정말 일본은 남녀 관계가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봉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구나 하고. 그때 함께 어울려 놀던 대학생들 중 어느 남학생이 내게 작은 실수를 했었는데, 나중에 이 학생의 여자친구가 일부러 나를 찾아와 사과했었다. 그것도 그냥 말로 사과한 것이 아니라 무릎까지 꿇는 모습을 보고 정말 놀랐었다. 아니, 잘못은 남자애가 했는데,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여학생이 사과를 하나! 며칠동안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대충 보니, 늘 남학생들은 뭐든 마음대로 하는 편이고, 여학생들은 늘 뭔가 제약에 묶여있다는 느낌이었다. 반면 나와 우리 학생들은 반대에 가까웠다. 여학생들은 대체로 남학생들을 짐꾼이나 일꾼처럼 부려먹었고, 남학생들은 큰 불만없이 대체로 요구하는 대로 따랐다. 그렇다고 우리 여학생들에게 불만이나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 보이는 모습은 그랬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내가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일본에서 성인 남성으로 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남존여비라는 생각이 박혀있었던 건 세계적으로 마찬가지였고, 우리나라도 과거에 심각했지만,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고질적인 문제들이 존재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들은 그래도 달라지고 있고 제법 달라졌다고 생각하기에 이 책을 통해 느낀 일본의 모습은 새삼스럽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그 시절 일본에도 여성을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집안 일을 함께하는 남성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중의 문제였겠지.

나오코는 그러니까 딸의 몸에 들어가 다시 청소년기를 겪으며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나오코는 거의 초인처럼 느껴졌다. 대체 어떤 아이가 저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실제 일본의 여성 청소년들은 다 그런가? 식사와 청소와 빨래 등 모든 집안 일을 다 하면서 학교도 다니고 공부도 잘 하고, 그러면서 동아리 활동이나 학생회 활동도 다 하고. 이게 나오코가 이미 이 시기를 한번 겪었던 어른이라서 이미 모든 집안 일을 달인 수준으로 잘 한다는 설정이긴 하지만, 모든 집안 일은 아무리 달인이라도 시간이 걸린다.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해서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라면 잠을 잘 수 없어야 하고 그러면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할 수 없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니 아기였을 때 나와 애들 엄마는 아무리 열심히 집안 일을 해도 늘 시간에 쫓겼다. 퇴근하고 둘이 쉼없이 집안 일을 해도 마치면 새벽이었고, 지쳐 잠이 들어도 아기들은 새벽에 꼭 깨기 때문에 금방 다시 깨야했다. 가능하면 애들 엄마가 조금이라도 더 자도록 내가 일어나 아기에게 분유도 먹이고, 트림도 시키고, 기저귀도 봐주고, 안아서 재우고 다시 잠을 자기도 했지만, 어떤 날엔 아기가 아무리 시끄럽게 울어도, 애들 엄마가 내게 좀 어떻게 해보라고 아무리 깨워도 모르고 잠들어있었던 날들도 있었다. 이 소설에선 아기를 키우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다른 집안 일들 모두가 고스란히 딸의 몫이 된다.

나오코가 제2의 인생을 살아가다는 측면에서 오래 전에 읽었던 [리플레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라 고민할 가치조차 없지만, 그래도 만약에 내가 다시 젊은 혹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어떤 삶을 살까하고 생각해본다. 나는 아마 다시 살아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보면 실패한 인생처럼 보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그냥 그럭저럭 잘 살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 목표는 남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경제적 성공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의 내가 이 성격과 성향과 기억을 그대로 갖고 어려진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얘기다. 여전히 나는 공부를 그닥 열심히 하지 않을 것이고, 여전히 수학을 못 할 것이고, 아마도 돈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을 것 같다. 아, 여기서 소설 속에 재미있는 설정 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 나오코는 학창시절 수학과 과학을 잘 하지 못했었다. 전형적인 문과 뭐 이런 느낌. 이건 나도 마찬가지라서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헤이스케는 이과라 수학도 과학도 잘 했었다. 그 딸인 모나미는 아빠를 닮아서 수학을 꽤 잘했다고 나온다. 그래서 나오코는 갑자기 잘했던 수학을 못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까봐 걱정하는데, 의외로 헤이스케가 알려주니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고. 의식은 나오코지만, 뇌는 모나미의 뇌니까 수학을 잘 하는 모나미의 뇌로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이니 잘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이런 논리였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까 [리플레이] 소설을 언급했는데, 여기서는 정확히 특정 시점의 본인에게 의식이 들어가는 혹은 돌아가는 개념이라 몸이나 뇌가 바뀌지 않는데, 이 경우는 딸의 몸으로 들어간 것이니, 그렇다면 전혀 다른 상황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음, 좀 더 세부적으로 할 말이 많았는데, 시간 관계상 이쯤하고 이제 결론인 반전으로 가보자. 영화에서는 이 부분이 좀 어이없고 딱히 인상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소설은 아! 하고 한번 환기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다만 금방 다시 의심이 들기는 했다. 어쩌면 나오코가 모나미에게 얘기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다른 시시콜콜한 것들을 다 기록해두면서 그렇게 중요한 걸 전해주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나오코와 모나미의 기이한 공존이 이상하다고 여긴 시점에서 게임은 끝난 것일수도 있다. 이건 각자가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몫이라고 여긴다. 암튼 여기서 작가가 얼마나 영리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초반에 짚었듯이 이 소설은 철저히 헤이스케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헤이스케의 생각과 시선 안으로 갇힌 느낌이다. 그 바깥의 시공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래서 헤이스케가 나오코와 모나미의 공존 기간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으면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믿을 수 밖에 아니 대부분 믿게 만들어진 구조다. 반면 반지 때문에 헤이스케가 이 모든 것이 나오코가 의도한 긴 시간동안 연출한 상황이라고 깨닫는 순간, 독자들도 일정부분 그 생각에 따르도록 만들어진 구조인 것이다. 사실 아무런 징후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그것도 이성교제를 비롯해 여러모로 남편과 아내의 갈등이 극에 치달은 시점에, 갑작스레 모나미의 의식이 깨어난다고 하는 상황이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엄마의 의식이 딸에게 들어가는 것도 말이 되지 않지만, 이건 이 소설의 세계관이자 핵심 설정이고, 여기서 모나미가 의식을 찾으려면 이 부분에 대한 트리거가 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사건이 있어야 한다.

자, 시간에 쫓기니 영화 이야기는 원래 의도와 달리 짧게만 다루자. 일단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소설과 달리 시각적으로 인물과 상황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다. 하지만, 영화는 2시간 이내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큰 제약이 있다. 그래서 모나미가 초등 5학년이 아니라 고등학생으로 시작한다. 초반에 사고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데, 이 연출이 좀 별로였다. 확실히 옛날 영화구나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전체적으로 그 비극적인 느낌을 거의 살리지 못해서 차라리 소설처럼 남편이 뉴스로 소식을 접하는 장면부터 시작하거나, 그냥 버스가 눈 덮힌 산길을 달리는 장면에서 사고 장면을 건너뛰고 남편 장면으로 넘어가기만 했어도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시간이 짧으니 등장인물을 다 잘라내고 운전사의 아들을 직접 등장시킨 것은 정말 큰 패착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이해하지만, 그랬다면 이 인물을 좀 더 입체적으로 잘 살렸어야 하고 나오코가 이 인물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줘서 관객들을 설득시켜야 했다.

무었보다 중간 과정의 인물들이 다 빠지면서 나오코가 얼마나 현명하고 상황에 따라 대처를 잘 하는 사람인지 보여주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쉽다. 모나미의 담임과 헤이스케와의 관계도 많이 생략된 것이 아쉽고. 아, 이게 드라마도 있다고 하던데, 드라마라면 분량이 충분할테니 확실히 보여줄 수 있었을 것 같다.

딱 하나 영화 시나리오에서 영리하게 잘 한 것이 있다면, 평소 나오코가 헤이스케의 턱을 들게하고 까끌까끌한 수염을 만지는 습관이 있다고 설정한 것이다. 이건 말그대로 습관이라 무심코 튀어나올 수 있는 행동이고, 이건 일부러 모나미가 따라하고 싶어도 따라하기 쉽지 않은 행동이다.

그래서 책을 두번째 읽고 생각해보니 소설보다 영화의 반전이 훨씬 더 간결하면서도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졌다. 와! 처음에 별로 반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나중에 보니 오히려 훨씬 괜찮은 반전이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음, 더 할 말이 많지만, 자꾸 연락이 오고 있어서 딱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이 소설에서는 정확한 시기가 나오지 않지만, 가전제품과 그 부품들 이야기로 대략 추정해 볼 수 있다. 물론 일본이라서 조금 다를 수는 있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소설을 발표한 시점이 1998년이고, 내용으로 유추해보면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일 것 같다. 영화는 99년에 제작되었는데, 딱 그 시대로 설정한 것 같다. 중간에 소마 선배가 모나미에게 휴대폰 번호를 알려달라고 말하는 대사가 있다. 소설에서는 휴대폰이란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대였다. 소마 선배가 4시부터 모나미가 나올 때까지 무조건 기다린다고 했었다.

아, 전화 이야기로 또 한참 옛 추억을 더듬어 떠들 내용이 있었는데, 그건 다음 기회에 써야겠다. 그리고 진짜 마지막으로 주인공의 딸이자 아내인 모나미의 이름 때문에 처음에는 자꾸 특정한 볼펜이 생각나서 몰입을 방해했다. 나중에 찾아봐야지 생각했는데, 지금 검색해보니 그 모나미는 프랑스에 Mon ami 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정말 마지막으로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히로스에 료코다. 다른 거 다 필요없이 그냥 그가 연기하는 모나미, 아니 나오코의 의식이 깃든 모나미를 보는 것이 정말 좋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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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1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2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