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농구 플레이오프 5차전 두 경기를 보고

어려서부터 여러가지 운동하는 걸 좋아했지만, 잘 하지는 못했다. 어렸을 때는 거의 매일 축구만 했는데, 운동에 소질은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분단 대항 축구 대회가 열려 최종 수비수(스위퍼)로 뛰었는데, 그 대회의 엠브이피가 되었다. 당시 우리 팀에는 우리 반에서 가장 빠르면서 발 재간도 좋았던 공격수가 있었다. 우리팀은 매 경기 두세골 정도는 넣어주면서 계속 이겼고, 결국 우승했다. 그럼 그 친구가 엠브이피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해 다른 아이들도 모두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최우수 선수 상을 받은 것은 우리 팀이 꾸준히 점수를 넣으면서도 가장 적은 실점으로 항상 수비가 탄탄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축구를 했으면서도 공을 잘 다루지 못했고, 킥도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기 싫어하는 성격과 상대 선수가 나를 제쳐도 곧바로 따라가 앞을 막아서는 순발력과 체력으로 끝까지 상대방 스트라이커를 괴롭혔다. 아마도 결승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우리 팀이 전반에 두 점을 넣어 2대 0으로 앞서 있었다. 후반전 초반에 좀 쉽게 한 점을 주고, 점수는 2대 1이 되었다. 후반 내내 상대 팀은 동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우리 팀은 추가점을 넣어 달아나려고 했지만 두 팀 모두 결정적인 찬스를 살리지 못하고 약간 소강상태에 들어가 종반으로 가고 있었다. 양팀 선수들은 대부분 지쳐 있었다. 막바지에 상대팀 스트라이커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측면으로 공을 몰고 올라왔다. 우리 미드필더는 돌파를 당하거나, 움직임을 못 읽어 뒤쳐졌다. 그는 빠르게 치고 들어왔고 나는 뒤돌아 골키퍼를 한 번 보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거리를 좁히자마자 그는 속이는 동작으로 나를 제치고 나갔다. 나는 순간 중심을 잃고 살짝 미끄러졌다가 곧 몸을 일으켜 달렸다. 골키퍼가 앞으로 나가야할지 그 자리를 지켜야 할지 어쩔줄 모르고 당황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아직은 조금 거리가 있을 때 상대 스트라이커가 조금은 성급하게 슛을 쏘려고 잠시 속도를 줄였을 무렵 내가 뒤에서 뛰어와 공을 빼았았다. 우리 팀은 열광했고, 지겨보던 다른 분단 아이들도 모두 그 장면에 큰 감명을 받았던 것 같았다. 내가 그 공을 몰고 중앙으로 가는 동안 경기가 끝났고, 우리 팀이 우승했다. 그 마지막 장면과 지금까지 수비에서 활약 덕분에 나는 엠브이피를 받았다. 그리고 아마 이삼일 학교를 빠졌다. 그날 너무 심하게 무리를 해서 앓아누워 버렸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축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 이후 중학생 시절에는 역기를 들거나 철봉을 하는 등 힘을 기르는 운동을 주로 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일본 만화 슬램덩크가 엄청나게 유행했다. 당시엔 아직 이 나라에 프로농구는 없었고, 실업농구와 대학농구가 각각 인기가 있었는데 농구대잔치 라는 리그에서 실업팀과 대학팀들이 모두 맞붙었다. 이때 실업팀은 기아팀의 허재, 강동희, 김유택의 막강한 트리오가 독보적이었고, 내가 좋아했던 컴퓨터 슈터로 불린 삼성의 김현준이 있었다. 대학팀은 당시 오빠 부대라고 불리는 여성들을 몰고 다닌 연세대가 압도적인 전력을 갖고 있었다.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서장훈 등이 포진한 연세대는 나중에 실업팀을 모두 제치고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암튼 슬램덩크를 비롯해 드라마 마지막 승부 등 미디어의 영향으로 나도 농구를 좋아하게 되었고, 농구를 좀 열심히 했었다. 하지만 키도 작은 편이었고, 역시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뭐 썩 잘하는 편이 되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실제로 해본 스포츠와 보는 것을 즐긴 스포츠를 비교해보면, 야구는 가장 오랫동안 롯데 자이언츠의 팬이었지만, 실제로 제대로 야구를 해 본적은 거의 없었다. 예전에는 다들 가난했기 때문에 야구공은 커녕 배트나 글로버 하나 가진 친구들이 드물었다. 그저 테니스공을 주먹으로 쳐서 간이 야구를 하곤 했는데, 이런 걸 실제 야구랑 비교할 수는 없다. 축구는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이 해본 경기이겠지만, 관람하는 스포츠로서 축구는 그렇게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저 위에서 언급한 중학생 시절에 부산 대우 로얄즈의 김주성 선수를 좋아하긴 했지만, 축구 경기를 보러 경기장에 가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국가대표 경기는 어지간하면 중계를 보기는 했지만, 야구를 거의 매일 보았던 것과 비교하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농구는 뒤늦게 해봤지만, 키가 작다는 한계를 많이 느꼈고, 그리 열심히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보는 농구는 그래도 꽤 좋아했었다. 삼성의 김현준 선수를 좋아해서 중계방송을 좀 봤었고,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기아나 연세대, 고려대 경기도 가끔 봤었다. 배구는 실제로 경기를 해본 기억은 없고, 중고등학교 체육 시간에 배우기는 했었다. 배구 경기도 가끔 보기는 했었다. 농구와 배구는 주로 늦가을부터 봄까지 하는 편이라 야구나 축구에 비하면 적게 볼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는 듯하다.

여자농구를 한참 즐겼던 시기가 딱 몇년도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은 모두 은퇴한 정은순, 전주원 선수 두 사람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내가 제일 좋아하고 응원했던 선수는 정은순 선수였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농구 경기 자체를 보지 않고 살았다. 배구는 가끔 봤었는데, 이상하게 농구는 안 봤었다. 그러다가 이번 겨울에 유튜브로 여자농구를 보기 시작했다. 우연히 여자 농구 올스타전을 봤는데, 일본 올스타와 국가 대항전을 벌였다. 그런데 올스타전이라는 특성 때문에 한일전이라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진지한 분위기가 아니라 웃음과 장난이 판을 치는 유쾌한 분위기였다. 여자 농구 경기를 보지는 않았지만, 스포츠 뉴스 따위와 노는 언니 등의 예능 프로그램 덕분에 김단비, 박지수, 강이슬 등의 선수들은 알고 있었다. 박지수는 보이지 않았는데 나중에 보니 튀르키에 리그로 갔다고 한다. 배구로 치면 김연경 선수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암튼 그 올스타전을 본 것을 계기로 자주 유튜브로 여자농구 경기를 보았다.

내가 주목한 팀은 우리은행과 비앤케이 두 곳이었다. 우리은행은 이번 시즌에 들어오면서 주전 멤버들 대부분이 다른 팀으로 옮겨가고, 김단비 혼자 팀을 이끄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런데 경기를 보다보면 이 김단비 선수의 활약이 어마어마했다. 초인이라고 불러야 할까? 각 종목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배구의 세계적인 선수인 김연경 선수가 아무리 잘 해도 한 경기에서 미치는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는데, 농구의 김단비가 한 경기에 미치는 영향은 김연경보다 훨씬 더 컸다. 그리고 리그를 진행하면서 다른 선수들도 김단비의 영향을 받아 경기력이 향상되어갔다. 우리은행이 김단비 원맨팀이었다면, 부산 비앤케이는 김소니아 원맨팀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법한 팀이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비앤케이는 다른 선수들이 조금 더 존재감을 드러내는 편이다. 김소니아 선수가 각 경기마다 김단비 못지않은 활약을 펼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일본 용병 선수를 비롯해 박혜진 선수라던가 안혜지 선수 등도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곤 했다.

팀으로 가장 눈길이 가는 팀인 우리은행이 정규리그 우승을 했고, 비앤케이는 내 고향 부산이 연고지이기도 하고, 김소니아 선수와 안혜지 선수에게 자꾸 눈이 가서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체 선수들 중에 가장 눈이 가는 선수는 케이비의 허예은 선수였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링을 향해 달려들어 레이업이나 훅슛을 넣는 모습이나 플로터를 던지는 모습을 보면 반하지 않을 수 없으며, 가끔씩 터지는 노룩 패스들, 결정적인 어시스트들을 보면 왜 농구를 지배하는 자리가 포인트가드인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잊을만하면 터지는 삼점슛.

내가 키가 작아서 그런지 슬램덩크 만화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는 선수는 강백호, 서태웅, 정대만이 아니라 송태섭이었다. 저 위에서 언급한 연세대 이상민이 포인트가드 치고 키도 크고 득점력도 좋은 편이라 가장 이상적인 포인트 가드로 꼽히곤 하는데, 내 기준에서 여자농구에서 가장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는 포인트 가드는 허예은 선수라고 본다. 그 다음이 아까도 얘기한 안혜지 선수다.

정규리그 우승한 우리은행과 4위인 케이비가 플레이오프에서 맞붙고 2위인 비앤케이와 3위인 삼성생명이 맞붙었다. 네 팀이 각 5판 3선승제인 플레이오프에 돌입했는데, 우리은행이 먼저 2승을, 비앤케이가 2승을 먼저 올리며 쉽게 끝날줄 알았으나 막판에 케이비와 삼성생명이 투지를 끌어올려 2대 2를 만들었다. 재미있게도 나란히 2연승 후 2연패를 당한 우리은행과 비앤케이는 이러다 떨어지는 이변이 생기는 거 아닌가 하는 긴장감을 주었다. 그렇게 나란히 5차전에 들어간 두 경기 엄청 재미있었다. 확실히 여기까지 와서는 김단비 선수와 김소니아 선수 모두 어느정도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지 예전에 느꼈던 만큼의 압도적인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대신 좀 더 유기적인 팀플레이가 나와서 보다 이상적인 플레이라고 할 수 있었다.

3년 전에 아이들이 무슨 농구 웹툰을 보고 농구공을 샀다고 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레이업슛과 뱅크슛 그리고 자유투 던지는 법 등을 알려줬는데, 아이들은 어려워하면서도 재미있어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아이들이 좀 더 열심히 농구를 했다면, 나도 같이 뒤늦게 농구 열정을 불피워보려나 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나는 지금 이렇게 유튜브로 열심히 농구 경기를 찾아보는 것이겠지.

윤석열이 석방되는 이 어이없는 현실 속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이 무력감 속에서 그나마 농구 경기를 보면서 빠져들어서 현실을 잠시 잊는다. 얼른 윤석열을 다시 감방에 쳐놓고 좀 더 마음 편하게 남은 챔피언 결정전을 즐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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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티모와 완쯔요


지난 주 월요일이었다. 일정이 없는 날이라 늦잠을 자고 여유있게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음악을 들으며 책을 펼쳐 들고 있었다. 유튜브는 내가 처음 선택한 음악 이후로는 내가 종종 듣는 음악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정확히는 이해하기 어려운 알고리즘에 의해 다른 전혀 모르는 음악들 등을 섞어서 무작위로 들려준다. 뭐 어차피 책이 집중하다 보면 어떤 음악이 나오는지 잘 깨닫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어차피 별로 상관은 없었다. 그렇게 잠시 책에 집중하면서 빠져들고 있을 즈음에 업무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으며 음악을 멈췄다가 통화를 마치고 다시 재생을 시켜보니 나온 노래가 한동안 자주 들었던 펑티모의 노래였다. 펑티모는 한 5년 정도 전에 엄청 자주 들었던 인터넷 가수였다. 그러니까 주로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커버해 부르는 개인 방송을 올리는 가수였다. 귀여운 외모에 엄청난 가창력을 가졌으며,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자신의 목소리와 음역대에 맞춰 잘 응용하는 음악 감각도 뛰어난 분이다. 우리나라에는 고양이 송이라는 동영상으로 유명해졌다고 하고, 나는 데시파시토 등 팝송들을 커버한 동영상들을 보고 좋아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엄청 유명해지고 나서는 돈도 많이 벌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본인 노래도 내고, 방송도 출연하곤 했다. 우리 복면가왕을 수입해가서 만든 가면 쓰고 노래 부르는 프로그램에 토끼탈을 쓰고 나와서 노래 두어곡을 불렀는데, 그중 공심(空心)이란 노래를 듣자마자 좋아하게 되었다. 이 노래는 남성 가수인 광택이란 분의 노래인데, 펑티모가 평소 방송할 때도 여러 번 불렀던 곡이었다. 곡이 좋기도 하고, 본인도 자신이 있으니 방송에서 불렀겠지. 정말 잘 불렀기 때문에 내 기준에서는 광택의 원곡보다 이 펑티모 버전이 더 좋았다. 펑티모 버전이 평소 방송에서 불렀던 것도 여러 동영상이 있고, 아까 언급한 가면 쓰는 방송에서 부른 버전도 있고, 또 최근에 어느 연말 시상식 같은 무대에서 부른 버전도 있고 다양한데, 유튜브에서 이 여러 버전들을 하나의 리스트로 만들어서 계속 반복해서 듣게 되었다. 


그러다가 펑티모 외에 다른 가수들이 부른 버전들도 찾아보게 되었고, 여러 남녀 인터넷 가수들의 동영상들을 들었다. 제법 잘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남성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원곡 가수인 광택보다 못했고, 여성들은 펑티모와 비교하는 순간 대체로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러다 귀가 번쩍 띄인 것이 완쯔요 라는 인터넷 가수가 부른 버전이었다. 펑티모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고, 어떤 소절들은 펑티모보다 더 유려하게 넘어가기도 했다. 다만 펑티모는 아까 얘기한대로 여러 번 불렀기 때문에 버전이 많은데 비해 완쯔유 가 부른 곡은 하나 밖에 찾을 수 없었다. 암튼 그래서 펑티모와 완쯔유가 부른 공심을 리스트로 만들어 두고 계속 반복해서 들었다. 펑티모도 그렇고, 이 완쯔유 라는 가수도 이미 본인의 곡을 냈기 때문에 인터넷 가수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 비록 여전히 개인 방송을 주로 하지만, 티비 방송에도 나오는 가수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그리고 인터넷 개인 방송의 음향 장비와 반주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티비 방송 프로그램 못지않게 잘 부르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그만큼 이 사람들이 음악적으로 다른 가수들에 비해 뒤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사실 나는 유튜브 외에 다른 인터넷 방송을 보지 않고, 유튜브도 주로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들 그리고 몇명 영화 채널을 주로 보고, 대부분은 음악을 듣는 용도로 이용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플랫폼으로 개인 방송들을 보고 있고, 그중 유명한 디제이들은 어마어마한 수입을 올린다고 들었다. 이미 뉴스에도 본 적이 있는데, 어느 유명한 방송 플랫폼의 여성 디제이에게 어느 남성이 교제를 전제 조건으로 수천만원 혹은 수억원의 후원(별풍선?)을 했다가 나중에 사기로 고소했다는 소식도 접했었다. 참, 신기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웹툰으로도 유명했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마스크 걸]에서도 주인공이 인터넷 개인 방송을 열어 인기와 더불어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내가 구독하는 영화 채널 중에는 대기업에 다니다가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유튜버(본인 표현)가 되었다고 대기업 연봉보다 유튜브로 버는 수입이 더 크다는 사람도 있었다. 영상을 찍고, 편집해서 올리는 것을 공부해서 그 정도의 수입을 벌 수 있다면 누구라도 한번쯤 생각해 볼만하다 싶었다. 그리고 곧 뉴스에서 요즘 아이들의 장래희망에 1순위가 압도적으로 유튜버 라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다. 그보다 조금 더 전에는 프로게이머 였다는 이야기도 본 적이 있었다. 확실히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맞춰 각 세대가 가진 생각, 어떤 가치관들이 크게 달라진다고 느낀다. 


내 친구 중 한 명도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한참 열심히 영상을 찍곤 했었다. 그 친구 나름대로 뭔가 독창적인 아이템을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만들었다고 느껴지긴 하는데, 솔직히 재미는 별로 없었다. 결국 구독자가 많이 늘지 않고 정체되는 시기가 길어지면서 이 친구는 영상 찍고 편집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잘 몰랐던 사실이지만, 초기에 유명한 유튜브 채널 중에는 혼자 콘티 짜고, 찍고, 편집하는 일을 다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면, 최근에는 각각의 영역을 맡아하는 사람들을 고용해서 좀 더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분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렇게 전문적으로 잘 하는 채널이 점점 더 늘어나면 그냥 개인이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나 개성만 믿고 혼자 뛰어들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앞서 말한 한동안 영상을 찍던 친구가 그 당시에 내게도 사진이나 영상을 꾸준히 찍어두고 나중에 편집하는 방법을 배워서(그렇게 어렵지 않다면서) 너도 영상을 올려보라고 권했다. 당시에는 제법 열심히 운동을 하던 시기여서 운동하는 사진과 영상을 기록해두라고 그렇게 반복해서 말하길래, 나도 삼각대 겸 셀카봉을 사서 혼자 이런저런 운동하는 사진들과 짧은 영상들을 찍기도 했다. 언젠가 동영상 편집하는 법을 배울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컴맹에 가까운 내가 그런 고급 기술을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고, 그저 사진을 좀 남겨두자는 마음에서였고, 이 사진들을 인스타그램에 가끔 올리기는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지인이 자주 모이는 사람들을 모아서 사회적 이슈나 시사 상식 등에 대해 떠드는 영상을 찍자는 제안도 여러 차례 했었다. 이 친구는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었고, 영상도 제법 잘 만드는 사람이라 촬영과 편집은 확실히 문제가 없었고, 어떤 컨텐츠를 어떻게 담아낼 것이냐가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 친구는 여러 차례 나에게 진행을 맡아 달라고 하면서 각 회차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잘 섭외해서 중요한 사안들을 짚어주는 방식으로 하자고 했었다. 재미있는 기획이라고 생각했고, 솔직히 재미있게 진행할 자신은 없었지만, 매끄럽게 어색하지 않게 진행할 자신은 있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영상을 찍으려면 사전에 대본도 꼼꼼하게 작성해야 하고, 전문가 섭외도 하고, 그 전문가들과 조율도 잘 해내야 하는데, 그 당시에는 일이 바빠서 그 정도의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답을 좀 애매하게 했던 모양인데, 나중에 이 친구가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하며 늘 꺼내는 말이 진행을 맡기려고 했던 내가 거절했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가 엎어진 거라고 내 탓을 하곤 했다.


사실 돈을 버는 목적이 아닌 그저 내 여러가지 활동들을 정리해두는 용도로라도 사진이나 영상을 어딘가에 올리곤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달리기 결과는 매번은 아니라도 종종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고, 다른 운동은 이제 귀찮아서 따로 찍지는 않고 있는데, 조금만 더 신경스고 조금 더 부지런해진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생각으로는 그렇고 현실은 늘 생각이나 예상과는 다르기 마련이긴 하다.


환자를 돌보는 고마운 사람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새콤달콤]이란 영화를 봤다. 그저 그런 흔한 로맨스 영화라고 생각하고 봤는데, 마지막 반전이 생각보다 신선하고 괜찮았다. 이름 때문에 벌어지는 오해와 반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고 비슷하게 이름으로 인해 벌어지는 오해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약 20년 전에 단편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내가 쓴 몇 안되는 소설 중에서도 단연 제일 괜찮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소설을 보여줬던 지인들의 반응도 나쁘지는 않았던 기억이 있다. 암튼 그래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배우들의 연기는 대체로 나쁘지는 않았지만, 썩 좋지도 않았다고 느꼈다. 단 한 명 간호사 역을 맡은 여주인공의 연기는 정말 좋았다.


약 4년 반 전에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당시에 나는 갈비뼈가 여러대 부러져서 스스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누군가 일으켜줘야 일어나 앉을 수 있었고, 걸을 수 없었고, 몸을 뒤집을 수도 없었다. 그때 하루에 두어번 간호사나 인턴(혹은 레지던트인지 암튼 나는 이들을 정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들이 내 몸을 옆으로 굴려서 몸을 뒤집어 줬다. 나 혼자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는데, 하필 그때 코로나가 제일 심한 시기였고, 내가 입원한 병원은 또 코로나 환자가 많은 병원이라 보호자가 병원에 상주할 수 없었다. 이게 한 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했지만, 몸을 혼자 가누지 못하는 나로서는 많이 불편하기도 했다. 그런 시기에 자주 찾아와서 뭐 불편하거나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어봐주고 챙겨주는 인턴이 있었다. 어찌나 친절하게 잘해주는지 그 사람이 정말 너무 고마웠다.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내 몸의 상처나 통증 등 중요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챙겨주고 모습 덕분에 정말 천사처럼 느껴졌다. 저 [새콤달콤]이란 영화를 보면서 여주인공이 환자에게 잘해주는 모습 때문에 갑자기 그가 생각이 났다. 나중에 퇴원하면 꼭 어떻게든 은혜를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매번 그 병원에 갈 때마다 그 생각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결국은 한번도 찾아가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오히려 실례가 될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이름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기도 했다.


몇 달 전에 치과에서 신경치료를 받을 때 일이다. 당시 나를 맡았던 간호사가 내게 무척 친절하게 잘 대해줬다. 마취 주사를 맞을 때 꽤 아프다고 주의를 주면서 내 어깨에 손을 얹어 토닥토닥 나를 달래듯 두드려줬다. 그 손길이 나는 정말 고마웠다. 그때 여러모로 좀 힘든 시기이기도 했고, 많이 우울한 때였는데, 그의 그 손길이 나를 많이 위로해줬다고 느꼈다. 그는 그저 직업으로서 간호사의 일을 조금 더 신경써서 잘 대해준 것이겠지만, 내게는 그 작은 행동이 엄청 큰 위안이 되었다. 앞서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때의 그 인턴과 방금 말한 이 간호사 두 사람은 아마 평생 은인으로 기억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제 같은 치과에서 나를 담당한 다른 간호사가 내게 재미있는 행동을 했다. 처음 진료를 시작한 의사가 나에게 간단한 조치를 하고 간호사에게 뭔가를 지시한 후에 잠시 다른 환자를 보러 자리를 옮겼다. 그 후로 나는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그건 사실 익숙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간호사는 그 긴 기다림이 신경쓰였는지, 내게 말을 걸어주기도 하고, 칫솔질 하는 법을 알려주는 영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고도 다시 한참을 더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나에게 새하얗고 조그마한 인형 하나를 건네줬다. 앙증맞고 귀여운 그 인형을 주면서 그는 내게 심심하시니까 이거 조물락 만지고 계세요. 라고 말하며 손아귀 힘을 기르는 운동도 되구요. 이거 이렇게 쥐고 계시면 마음의 위로가 되기도 하구요. 나중에 치료 받으시다가 통증이 와도 이거 안고 계시면 괜찮으실거예요. 그리고 엄청 귀엽잖아요.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이런 느낌으로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이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로 흰머리와 흰수염이 가득한, 누가봐도 중년의 아저씨인 나에게 자그마한 귀여운 인형을 건네는 그의 행동이 좀 많이 웃겼다. 그가 내 손에 그 인형을 쥐어주고 가버렸기 때문에 나는 어쩔줄을 몰라하면서도 그냥 인형을 쥐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냥 그가 시킨대로 조물락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인형은 정말 귀여웠다. 우리 작은 아이에게 주면 딱 좋아할만한 인형이었다. 치료를 다 받고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그 간호사 생각이 났다. 나름 나를 신경써서 잘 해주려고 한 행동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정말 고마운 일이다. 이 일도 앞서 언급했던 사례들과 함께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다.


이 글은 어제 쓰기 시작했지만, 절반 정도 쓰고 회의를 들어가느라 완성을 못했고, 회의를 마친 후에는 또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결국 하루를 넘겨버렸다. 그리고 오늘은 3월 11일 후쿠시마 핵 폭발 사고 14주년이 되는 날이다. 다른 기억해야 할 날들이 많지만, 이 날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날이다. 이 사고가 일어난 지 벌써 14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도쿄전력과 일본 정부는 전혀 수습을 못하고 있다. 핵폭발로 날아간 건물 지붕을 덮지도 못하고 있고,(참고로 체르노빌 핵폭발 사고 때에는 약 6개월만에 뚜껑을 덮어서 더이상 방사능이 새어나오지 못하게 막았었다.) 매일 매순간 방사능이 새어나오고 있다. 아마도 일본 정부는 몇 백년이 지나도 이 사고를 수습하지 못할 것이다. 잠시만 근처에 머물러도 치사량에 가까운 방사능에 노출되기 때문에 직접 사람이 들어가 작업을 할 수 없고, 로봇이나 기계를 보내도 방사능 때문에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 녹아버린 핵연료봉이 어디어 어떤 상태도 있는지도 파악하지도 못했고, 앞으로도 긴 시간 알 수 없을 것이다. 인류는 이 사고 이후로 방사능이라는 치명적인 물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아, 할말이 너무 많지만, 오늘은 너무 바쁜 날이다. 일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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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3-12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중국 노래를 좋아해요. 중국 노래의 감성이 한국의 90년대풍 발라드와 비슷한 면이 많아 중국 생활 당시에는 꽤 즐겨 들었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지나 제목을 많이 잊어버렸네요. 가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成都(청뚜, 성도), 好久不见(하오지우부쩬,오랫만이네요)도 괜찮고 린이롄의 至少还有你(쯔쌰오하이요우니,당신만 있으면)、류더화의 练习(롄씨,연습),류뤄잉의 后来(호우라이,나중에야) 한 번 들어보세요. 공심은 한번 들어봐야겠네요.
 

바람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수라처럼] 이란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다. 아니, 드라마 내용과 줄거리는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는데, 유명한 배우들이 여럿 나와서 그들의 연기를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일본 감독 중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다음으로 좋아하는 감독이다. [아무도 모른다]를 통해 처음 알았고, [세번째 살인]과 [바닷마을 다이어리], [어느 가족] 등을 보고 좋아하게 되었다. 이 감독이 우리나라 배우들과 작업한 [브로커]를 정말 기대했는데, 대실망이어서 하마구치 류스케 보다 순위가 내려갔다. 아직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를 보고 실망한 적은 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1979년 드라마를 인상깊게 보았다고 했다. 그 대본이 이후 자신의 작업들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했다. 그리고 그 드라마를 거의 각색하지 않고 본인이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시대 배경도 1979년 그대로이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아버지가 다 바람이 났다는 사실을 된 네 딸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이후로 각자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다루고 있다. 네 딸들은 저마다 개성이 뚜렸하다. 유명한 배우들이 그 역할을 맡기도 했고, 워낙 연기들이 좋아서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늙고 바람난 아버지 역할 역시 유명한 배우가 맡았다. 나에게는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으로 기억에 남아있는 쿠니무라 준이다. 곡성에서의 인상이 워낙 강해서, 이 드라마에서 인자하게 웃는 표정인데도, 나는 어쩐지 무섭게 느껴지곤 했다.

주인공으로 네 자매를 설정한 것은 어쩌면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은 아씨들]의 영향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그리고 곧바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도 떠올렸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여기는 다섯 자매가 나온다. 한 명이 더 많았다. 나는 일단 감독을 보고 이 드라마는 봐야겠구나 생각하긴 했지만, 네 자매의 배역을 보고 엄청 놀랐다. 일단 첫째는 미야자와 리에가 맡았다. 이 분이 젊고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에는 우리나라에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이전이라 작품들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유명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둘째는 오노 마치코가 맡았다. 고레에다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도 나왔었고, [솔로몬의 위증]과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도 보았었다. 셋째는 아오이 유우가 연기했다. 내가 한창 일본 문화를 접하던 시기에 제일 유명한 배우를 꼽으라면 아오이 유우가 아니었을까 싶다. 넷째는 히로세 스즈가 맡았다. 고레에다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처음 봤었다. 이후에 역시 고레에다 감독의 [세번째 살인]도 보았고, 이상일 감독의 [분노]도 봤다. 그리고 이와이 슌지 감독의 [라스트 레터]도 봤다. 외모와 연기력 모두 독보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존재감이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한다.

네 자매의 독특한 성격과 삶의 모습들을 보는 것이 이 드라마의 주 내용이다. 그리고 아빠와의 관계. 넷은 아니지만 두 딸을 키우는 아빠의 입장에서 나중에 내가 더 늙으면 딸들과 어떻게 지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보게 되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이 드라마에 왜 이렇게 바람 피우는 남성이 많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실제로도 많았을 수도 있다. 과거 70년대 말의 일본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 시절 한국에도 아마 많았을 것이다. 바람이 난다는 건 해당 남성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상대 여성도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이 드라마의 분기점이 열린다.

물론 이 이야기는 드라마니까 현실보다 자극적인 소재가 필요하다. 그러니 이렇게 바람난 남성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겠지. 네 자매와 그 엄마 이렇게 다섯 명 중에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지 않은 사람은 두 명 뿐이다. 첫째는 작중 시점에서 이미 남편과 사별한 상태라 남편이 바람을 필 수 없다. 생전에 바람을 피웠는지는 알수 없지만, 아마도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본인이 기혼자인 남성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 그리고 셋째의 남편은 아직은 신혼이라 바람을 피우지 않고 있다. 넷째의 남편은 결혼 전에 이미 딴 여자와 있는 모습을 넷째와 둘째에게 들켰다. 둘째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아주 강하게 의심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정황 증거는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바람난 상대방이라고 의심했던 여성의 결혼식에 초대 받는다. 이 둘째의 남편은 이 딸만 넷 있는 집에서 마치 가장처럼 여러 궂은 일들을 떠맡아 처리하곤 한다. 장인어른과도 잘 지내고, 딸들이 바람난 아버지를 비난할 때에도 계속 장인 편을 든다. 그것은 그가 남자라서, 그것도 역시 바람난 남편이라서 그럴수도 있겠지만, 이 아들 없는 집의 아들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 편을 드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편드는 짓이 옳다고 볼 수는 없는데, 이 시대 상황과 일본 사회라는 곳에서 이 인물의 가치관으로는 바람 한 번 피울수도 있지가 되는 것이라고 봤다. 이것은 다른 여성들의 태도에서도 여러 번 보인다. 첫째는 아버지의 바람에 대해 다른 딸들보다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가 현재 다른 남성과 불륜관계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첫째로서 아버지와의 유대관계 때문일 수도 있다. 넷째도 아버지의 바람에 별로 신경쓰지 않고, 막내로서 아버지와 잘 지내는 듯 보인다. 그는 자신의 남친이 집에서 다른 여성과 성관계를 맺는 장면을 보고서도 그것 때문에 화나는 것이 아니라 운동선수인 남친이 계체량 때문에 단식해서 자신도 임신중인데도 단식에 동참하고 있었는데(심지어 그래서 쓰러져서 둘째가 데리고 돌아온 길인데) 남친이 다른 여성과 먹고 남은 흔적인 빈 라면 그릇 때문에 화가 난다고 말한다. 그는 이 일 이후에 바람 자체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 결혼한다. 남편의 바람에 가장 민감한 사람은 둘째다. 그는 아버지의 바람 때문에 엄마가 받은 상처와 고통을 가장 공감한다. 그는 계속 남편의 바람을 의심하고 상대방으로 추정되는 비서를 신경쓰지만, 화면으로 보여주는 장면 만으로는 끝까지 이 남편이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운다고 확정할 수 없다. 아버지의 바람을 처음 발견하고 사람을 써서 증거를 모은 셋째는 가장 심하게 화를 낸다. 하지만 그 사건 덕분에 만난 남성과 사랑에 빠지고, 나중에는 그 남성이 아버지 혼자 사는 집에(엄마는 충격으로 돌아가심) 들어와 살면서, 또 결혼해서 결국 이 셋째 부부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가장 아버지와 잘 지내는 딸이 된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이야기. 퇴직했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일터에 나가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실은 일터에서 크게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 얼마든지 외출이 가능하고, 그 일주일에 하루는 주로 다른 여성과 그의 아들과 보내고 있었다. 작중에서 그 아들은 이 아버지와는 관계없는, 그 여성이 과거에 만난 다른 남성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나온다. 그런데 이 어린 꼬맹이가 할아버지 뻘 보다 더 나이가 많은 이 아버지를 엄청나게 따르고, 이 아버지 역시 이 꼬맹이를 엄청 아낀다. 드라마는 아마도 일부러 이 아버지의 바람이 여성을 만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빠 없는 아이를 위해 애써 시간을 내주는 것처럼 보여준다. 그리고 딸들이 자신을 찾아온 것을 본 그 여성은 이 아버지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결혼하기로 했다고 말한 것. 그래서 이 아버지는 이제 더는 그들 모자를 만나지 않는데, 아들은 계속 아빠를 찾아 전화를 걸고 따로 둘이 만나기도 한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이 아들을 야멸차게 내칠수 없으니 계속 대화하는 것인데, 이 아들이 비밀을 말해버린다. 사실은 새아버지가 없다는 것. 즉, 이 여성이 거짓말로 결혼을 통보해 이 아버지가 가정으로 돌아가도록 만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헤어졌다고 해서 바람을 피웠던 과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아버지가 아무리 혼외자인지 이혼 후 편모자가 된 것인지 모를 이 어른 아들에게 잘 대해준다고 해도 그가 가정을 버리고 다른 여성을 만났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용서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아내를 잃고 혼자 집안 일을 잘 해내지 못해 엉망으로 살아간다. 심지어 집에 불이 나기도 하고.

고레에다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비슷한 내용들이 있다. 세 자매는 어릴 때 자신들을 떠났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찾아갔다고 배다른 자매를 만난다. 그래서 네 자매가 되어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 그중 첫째는 가정이 있는 남성과 불륜 관계에 있다. 아버지가 엄마를 버리고 떠나 힘들게 살았을 그가 다른 기혼자를 만난다는 것. 고레에다 감독이 79년의 이 원작 드라마가 자신의 작품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말한 것이 이 영화에 드러난다.

바람은 다의어다. 기압의 차이로 인한 공기의 흐름이 가장 많이 쓰는 뜻이고, 무언가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도 바람이다. 내가 10년 가까이 일했던 일터는 태양과 바람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는데, 다들 태양광발전과 함께 풍력발전도 하는 것으로 듣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 바람은 그 바람이 아니라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다는 그 바람이예요. 윈드가 아니라 호프예요. 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이렇게 상대를 두고 다른 상대를 만나는 것도 바람의 뜻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그건 아니었다. 이건 바람나다 라는 동사였다. 명사로는 이 뜻이 없었다.

솔직히 살면서 다른 이성 상대에게 끌리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속으로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을 좋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을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걸 서로 쿨하게 이해하는 관계들도 있다고 듣기는 했다. 그게 실제로 어떻게 가능한지는 잘 상상이 되지 않지만.

이 드라마를 주욱 보면서 내 인생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들이 들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그 길에서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언제나 생각은 많다. 그러나 나는 늘 현실의 어떤 틀 안에 묶여있거나 갇혀있다.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데, 선택은 종종 파란 알약이다. 그냥 익숙하고 편한 상태에 안주하는 것이 제일 쉬우니까. 깨어나라. 깨어나는 선택을 주저없이 하면 좋겠다.

아, 바람 이야기의 어딘가에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 이야기도 하려 했는데, 이건 깜빡했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으므로 이건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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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3-06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드라마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그런데 외도에 대한 가치관이 우리나라와 너무 달라 놀라긴 했어요. 히로세 스즈 연기력과 미모에 저도 정말 깜짝 놀랐어요. 최근 그녀가 주인공으로 나온 드라마 <누가 공작의 춤을 보았나> 보는 중입니다. 아주 대성할 배우라는 생각 들더라고요.

감은빛 2025-03-11 12:53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도 재미있게 보셨군요. 반가워요! ㅎㅎ
저도 그랬어요. 지금 이게 맞아?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리속에 맴돌더라구요.
음 그 드라마도 찾아봐야겠네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글 고치기

예전에 출판사에 있을 때, 잠시 편집자로 살았었다. 나는 잡지 구독자 관리 업무와 잡지 영업, 단행본 영업을 주 업무로 맡았었는데, 욕심이 많았던 터라 잡지에 글을 쓰기도 하고 취재를 다니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편집 업무를 배워 영업자와 취재기자와 편집자 이렇게 세 가지 일을 했었다. 물론 주업무가 영업이었으니, 편집 업무는 속도도 느렸고, 서투르기도 했다. 오탈자를 잡아내거나, 띄워쓰기를 고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아서 늘 실수가 많았다. 그런 내가 자신 있는 일은 문장을 다듬는 것이었다. 보다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읽히도록 배치를 바꾸고, 단어를 수정하는 일에 자신이 있었다. 언젠가 새로운 단행본 맡을 담당자를 정하기 위해 대표님이 나와 베테랑 편집자 한 명에게 책 한 권을 주고 3일 안에 교정교열을 시켰다. 나는 이제 막 편집자로 첫 걸음을 내디딘 초짜이고, 그는 10년 이상 경력인데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경쟁에서 떨어지겠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 해보자고 마음 먹고 열심히 했다. 마감 기한이 되어 그와 나는 교정 본 책을 제출했고, 대표님은 다음날 우리를 불렀다. 결과는? 대표님은 오탈자와 띄워쓰기 오류를 잡아내는 능력은 그 베테랑 편집자가 월등히 낫다고 했다. 그런데 문장을 다듬는 능력은 내가 훨씬 나았다고 했다. 그는 문장에는 크게 손을 대지 않았는데, 오탈자는 거의 다 잡아냈고, 나는 오탈자는 많이 놓쳤지만, 조금이라도 부자연스러운 문장이 있으면 고쳤는데, 그 고친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새 책, 당시 이 출판사 입장에서는 중요한 분기점의 시작이 되는 중요한 책을 나에게 맡겼다. 이유는 오탈자 찾아내는 기능은 연습하다보면 더 잘 할 수 있지만, 문장을 고치는 능력은 쉽게 키우기 어려운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후로 나는 책 여러 권을 맡았지만, 교정 부분에서 그러니까 오탈자 찾아내는 능력이 크게 향상되지는 못했다. 낮에는 영업을 다니고, 남들 다 퇴근할 저녁부터 책상에 앉아 편집 업무를 하느라 늘 시간에 쫓겼다. 교정 능력을 키우려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 공부도 하고, 연습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나는 유독 실수가 많아서 내가 책임 편집을 맡았던 책에서는 끝내 잡아내지 못한 오탈자가 늘 있었다. 심지어 발행일을 잘못 적어놓고 최종 교정때까지 몰라서 미래에서 온 책을 펴내기도 했다. 스티커 작업 할 돈도 아깝다며, 대표님이 그냥 두라고 하셨다. 거기서 좀 더 버티며 편집 일을 계속 했다면, 나도 조금은 더 실력이 늘었겠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오탈자를 잡아내는 영역의 일은 좀 서툴렀지만, 글을 만지는 일은 그래도 자신있었다. 작은 출판사이다보니 첫 책을 내는 작가들이나 번역자들이 많았다. 대학에 몸담은 박사님들이나 번역 경험이 많지 않은 번역자들의 글은 비문이 많았고, 그 특유의 번역 어투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전문가라는 사람은 그런 번역어투가 읽기 쉬운 글보다 더 잘 쓴 글이라고 믿었다. 그런 글을 만나면 나는 아예 내가 다시 글을 썼다. 어떤 저자는 단어 하나 바꾸는 것에도 난리를 치기도 했는데, 내가 아예 새로 글을 쓴 것은 모른척 하더라. 본인도 부끄러웠던 것인지, 아니면 설마 내가 아예 새로 쓴 부분을 본인이 쓴 원문 그대로라 생각하고 못 알아본 것은 아니겠지. 어떤 번역자는 내용에 오류가 많고 인명이나 지명 등을 엉뚱하게 잘 못 써놓기도 해서 아예 원서와 사전을 옆에 끼고 하나하나 내가 다시 번역해가며 글을 고치기도 했다. 그렇게 내 젊은 시간을 갈아넣어가며, 매일 밤을 새워가며 글을 고쳐도 내게 남는 것은 없었다. 책에는 그저 판권 페이지에 편집자로 이름 하나 들어갈 뿐이다. 그 책의 절반 이상을 내가 새로 고쳐 썼어도 저자는 그 사람이고 나는 아무도 아니다. 그 책의 절반 이상을 내가 다시 번역했어도 결국 번역자는 그 사람이고 나는 표지나 책 날개에 이름을 넣을 수 없는 편집자일 뿐이었다. 게다가 나는 낮에는 영업자로, 가끔은 취재기자로 살았고 밤에는 편집자로 살았지만, 급여는 그대로였다. 나와 친했던 영업자 동료들은 내게 돈도 못 받는데, 왜 잠도 못 자면서 편집 일을 하냐고 뭐라하곤 했다. 나는 늘 내가 욕심이 많아서 그렇다고 했다. 일 욕심은 많으나 내 실속은 잘 찾지 못하는 미숙한 인간이라 그랬다.

내가 이 출판사에 처음 들어왔을때 여기는 영업이란 걸 해본 적도 없는 곳이었다. 나는 적자였던 출판사를 흑자로 돌리고, 첫해와 둘째해에 영업이익을 크게 증대시켰다. 대표님은 나를 엄청 존중했고, 그렇게 계속 잘 될줄 알았지만, 다시 해가 갈수록 영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점점 줄었다. 이건 당연한 일인데, 아무런 시스템도 없는 곳에 내가 영업 망을 구축하기 시작해서 처음엔 크 폭의 매출 상승이 이뤄지지만, 점점 망이 완성될수록 매출은 안정권에 접어 들면서 상승 폭은 낮아진다. 내가 잘 구촉해놓은 영업망은 이제 관리를 잘 해야하는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당시 대표님은 그 관리라는 영역을 과소평가했다. 내가 이미 시스템을 잘 만들어두었으니, 이제 내가 없어도 이 시스템이 잘 돌아간다고 믿었을 것이다. 나는 개국공신과 같은 대접을 받다가 한순간에 잘렸다. 그 후로 몇 건 알바로 교정 일을 맡은 적은 있지만, 제대로 배울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시민신문의 편집위원 역할을 몇 년간 맡았었다. 당연히 무급이었다. 신문 마감 기간에는 낮에 일터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 퇴근하면 신문사로 가서 새벽까지 편집 일을 했다. 편집장과 기자가 기사를 완성하면 내가 교정교열을 보고, 그걸 편집장이 다시 확인 한 후에 디자이너에게 넘겼다. 작은 규모라 취재기자도 부족한데 편집기자를 둘 여력은 당연히 없었고, 나는 아무런 댓가없이 매달 며칠씩 새벽 늦은 시간까지 교정을 봤다. 문제는 신입으로 들어온 기자가 기사를 쓸 줄 몰랐다는 것. 글쓰기 기본도 모르는 사람을 덜컥 기자로 뽑아놓고 기사를 쓰라고 하니 정말 엉망인 쓰레기를 쓰고 있었다. 매번 편집장은 그 기자의 기사 같지도 않은 결과물 때문에 어쩔줄을 몰라했고, 늘 그 기자의 엉망인 원고들은 내게 맡겨졌다. 이건 고칠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냥 기사를 새로 써야했다. 게다가 표현이 엉망이라도 내용이라도 충실하면 그걸로 새로 글을 쓰면 되는데 내용도 부실했다. 중언부언. 딱 그 표현 그대로였다.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결국 같은 것인데 그 엉망인 표현만 다르게 붙여놓았다. 그래서 그 기사는 아예 내가 내용을 찾아서 다시 썼다. 즉, 취재도 내가 다시 하고 기사도 내가 다시 썼다. 그런데 결국 발행하는 신문에 내 이름은 없었다. 편집장과 기자 이름은 들어가도 편집위원 이름은 아주 작게, 독자들이 어디 있는지 알기도 어려운 구석에, 자세히 들여다보조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크기로 적혀있었다. 나는 편집장에게 이 기사만큼은 내 이름과 그 기자 이름을 공동으로 넣어달라고 요구했고 받아들여졌다.

그 기자는 시간이 지나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나도 언제까지 계속 새벽까지 잠 못자고 거기에 매달릴 수는 없었다. 서서히 시민신문에 투여하는 시간을 줄여나갔고, 나중에는 딱 마감을 치는 날 하루만 가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편집장에게 전화가 왔다. 이번에도 그 기자의 기사인데, 본인이 좀 고쳐보려고 했지만, 손을 대지 못하겠다고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나대로 일이 몰려 늦게까지 일하다 잠든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무척 피곤했다. 내일 보면 안 되냐고 했더니, 일정상 오늘 밤안에 꼭 끝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결국 그 새벽에 노트북을 켜고 원고를 열었다. 아! 이건 진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그냥 다시 누웠다. 엄청 피곤했는데도 잠이 오지는 않았다. 한참을 누워있다가 결국 몸을 일으켜 책상에 앉았다. 남의 글을 고치는 일은 참 고역이다. 예전에 편집자였던 시절에는 그게 재미있었는데, 이제 아니었다. 이 짓도 이제 못하겠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결국 그 기사를 다시 써서 보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시민신문에서 몇 가지 문제가 불거지며 나는 편집위원을 그만두었다. 편집장도 그만두었다. 기사를 잘 쓰지 못했던 그때의 그 기자는 지금도 기자로 남아있고, 여전히 기사를 잘 쓰지는 못한다. 물론 그때보다는 훨씬 나아져서 그래도 기사 비스무리한 것처럼 읽히기는 한다.

오늘 갑자기 이렇게 편집 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아까 어느 연대단위에서 급하게 성명서를 함께 만들어달라고 초안을 공유문서로 보내왔던 일 때문이다. 그 문서를 딱 열었는데, 제목부터 첫문장과 마지막 문장까지 총체적으로 엉망이었다. 나도 한때 성명서를 많이 썼었고, 최근에도 몸담고 있는 지역정당에서 쓴 적이 있는데, 이렇게 앞뒤가 안 맞고 내용도 부실한 성명서는 본 적이 없었다. 이걸 초안이라고 공유한다고? 처음엔 제목도 수정 제안하고 앞부분 문장들을 고쳤다. 한 서너문장이 중언부언 같은 내용을 반복하길래, 싹 지우고 그 내용들을 종합해서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아래 본론으로 내려왔는데. 하! 이건 진짜 도저히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예 새로 써야 했는데, 그러기에는 이 공유문서라는 틀에서 시작하기가 어렵다고 느꼈다. 다른 사람들이 나처럼 글에 손대기 시작하면 실시간으로 자꾸 글이 바뀌는데, 내용이 계속 달라지니 새로 쓸 수가 없었다. 결국 이래저래 좀 해보다가 포기하고 그냥 창을 닫았다. 내가 창을 닫는 순간에도 두세 사람이 실시간으로 글을 고치고 있었다. 이건 처음부터 초안이 너무 부실해서 공유문서로 수정할 수 없는 건이었다. 초안을 쓴 사람이 다시 제대로 쓰던가, 다른 사람이 초안을 다시 쓰던가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 연대단위의 다른 분과 상황을 공유해보니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도 나도 이 상황을 수습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들어가보니 제목은 내 제안대로 바뀌었고, 앞부분 내가 고친 것도 그대로였는데 뒷부분은 계속 실시간으로 고쳐지는 중이었다. 여전히 상황은 그닥 좋아보이지 않았다. 다시 포기하고 창을 닫았다. 이건 어쩔 수 없다.

글쓰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가끔 머리 속에서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아 한참동안 깜빡이는 빈 커서만 쳐다보고 있기도 한다. 언제나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참 부족하구나. 나는 여전히 이것 밖에 안 되는구나 하고 깨닫는다. 내 글도 이렇게 엉망인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남의 글을 고치나. 글 좀 봐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비문을 문장의 형태를 갖추도록 수정 제안하거나, 딱딱하고 어색한 문장을 좀 더 자연스럽게 바꿔 제안하는 것은 가능하긴 한데, 딱 거기까지라고 스스로 한계를 그어준다. 글쓴이도 다 의도가 있을텐데 라고 생각하며 한 발 물러나곤 한다. 내 글이라면 처음부터 내가 다시 써도 상관없지만, 남의 글은 내가 그럴 수 없는 거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그 옛날 출판사 있던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 박사나 전문가가 쓴 비문과 어색한 번역 어투 투성이의 엉망인 원고를 하나도 안 고치고 오탈자만 좀 찾아낸 후에 그대로 출판할 것이다. 물론 교차 교정 단계에서 다른 편집자나 대표님이 바로 잡으면 나를 욕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저자한테 어이없는 소리 들을 일은 없고, 독자들이 이 저자는 이 정도로 글을 쓰는 구나 하고 정확하게 알테니. 이 저자는 이런 나쁜 버릇이 있구나. 이 저자는 이 단어와 저 표현을 너무 자주 쓰는구나. 이런 것들을 편집자인 나만 알면 너무 불공평하고 억울한 것 아닌가! 저 번역자는 사람 이름이나 지명도 똑바로 안 찾아봤구나. 저 번역가는 번역을 왜 이렇게 엉터리로 했을까. 이런 사실들을 독자들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독자들이 비싼 책 값을 내고 책을 살 필요가 없겠지. 편집자라는 존재는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출판사로 들어오는 초고가 모두 매끈하게 훌륭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런 경우는 무척 드물다. 사람마다 출판사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책임 편집을 맡은 책을 적어도 10번 이상 보면서 고치고 또 고치고 또 고쳤다. 이 책을 사는 독자에게 내가 예전에 엉망인 책을 읽고 느꼈던 그런 불쾌감을 주고 싶지 않아서.

다시 말하지만, 남의 글을 고치는 일은 정말 어렵다. 나는 사실 내글을 쓰거나 고치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그러니 이제 남의 글은 그만 고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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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2-26 2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편집자의 지분이 이 정도 일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비문학권의 학자나 지식인들의 글이 워낙 수려한 경우가 많아서 똑똑한 사람은 글도 잘 쓰는 줄 알았더니...ㅎㅎ 글쓰기도 철저한 분업화가 이루어지는 분야였던 거군요.

감은빛 2025-03-05 20:07   좋아요 0 | URL
문학으로 가면 편집자의 역할이 좀 바뀝니다. 문학에서는 편집자가 막 글을 고치기가 쉽지 않아요.

저는 교양서 혹은 전문서 편집자였기 때문에 전문 지식은 가졌으나 글은 좀 부족한 저자를 도와 글을 고치는 역할을 많이 했어요. 가끔 잉크냄새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지식도 많고 글도 잘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대체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죠.

바람돌이 2025-02-26 2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알고 있었지만 진짜 능력자세요. 남의 글 고치는거 얼마나 어려운데요. 저는 애들 자소서나 대회 제출용 글이나 봐주는데도 진짜 진땀을 빼는데 말이죠.
저는 책을 읽다보면 잘 된 책에서는 편집자를 안 찾게 되더라구요. 근데 책이 사실에 안 맞는 내용이나 오탈자가 많거나 문장이 이상하면 편집자 탓을 하게 되더라는.... 아 진짜 편집자는 이거 안봐주고 뭐했어 이러식으로요. 그런데 그러면 안될거 같아요. 당연하게 편집자가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글이 엉망인 경우도 얼마나 많겠어요.
남의 글 그만 고치시고 감은빛님의 글을 쓰실 날을 기다립니다. 화이팅이에요. ^^

감은빛 2025-03-07 19:14   좋아요 1 | URL
아이고, 아닙니다.
그냥 좀 잘난 척하길 좋아하는 아저씨일 뿐이에요.
그저 주위 사람들이 좀 잘 봐줘서 그렇게 보이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하려구요.
진짜 능력자들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바람돌이님 말씀대로 정말 잘 만든 책을 읽으면 저도 편집자에 대해 생각하지 않더라구요.
그만큼 매끄럽게 잘 만들었다는 뜻인 것 같아요.
그런데 뭔가 잘 안 읽히고, 오류나 오탈자를 발견하면 곧바로 저자가 아니라 편집자를 원망하게 되더라구요.
편집자라는 위치가 참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이제 제 글을 써야 할텐데요.
생각은 늘 하지만, 쉽지 않네요. ㅎㅎㅎㅎ
언제나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과거 오늘

북플의 지난 오늘 게시판은 가끔 북플에 접속할 때마다 가장 먼저 보는 곳이고, 이때 글이 적으면 다 읽는 편이고, 글이 좀 많으면 최근 글들과 가장 오래 전에 쓴 글을 중심으로 읽는다.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알라딘에 글을 자주 쓰는 편은 아니라 대개 글이 적고, 아예 없는 날들도 제법 있다. 오히려 오늘처럼 글이 여러 개인 날이 드물다.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페이스북에도 잠시 들어갔었는데, 여기에도 과거 오늘 작성한 글들을 보여주는 메뉴가 있다. 아마 페이스북이 먼저였고, 그 뒤에 북플에도 이 기능이 나왔었다. 페이스북에 뭔가를 쓰지 않은 지는 벌써 5년도 넘었다. 가끔 접속해 지인들의 소식과 에너지 전문가들이 공유해주는 소식들을 알아보려고 남겨뒀을 뿐. 그런데 과거에도 아주 적극적으로는 아니었지만, 간간히 짧은 소식들을 공유하긴 했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되었는데, 13년 전 그러니까 2012년 오늘 나는 아이들과 애들 엄마를 처가에 데려다주고 인천 배다리 헌책방 골목으로 책읽기 모임을 하러 갔었다. 그 시기에 내가 참여했던 책 모임은 주로 생태운동을 했던 구성원들이 매달 모였던 모임으로 제법 역사가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제주로 내려가셨지만, 당시 성균관대학교 앞의 유명한 풀무질 책방 지기인 은종복 형님도 그 모임에 계셨고, 과거 초록정치연대 회원이었거나, 녹색연합 회원, 녹색평론 읽기 모임 분들이 중심이었다. 또 기억나는 중심 인물이 배다리에서 긴 시간 헌책방을 운영했던 분이셨다. 이날 모임 장소는 그 헌책방이었다. 그 장소는 내가 출판계에 들어오기 전부터 알던 곳이었고, 출판계에 들어와서는 거래처로서 더 의미가 컸던 곳이기도 했다. 이 당시는 녹색당 활동을 활발하게 하느라 인천 녹색당에도 아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고, 그 분들과도 함께 어울렸던 날로 기억한다. 워낙 거리가 먼 곳이라 그날 책 모임을 마치고 길게 뒤풀이를 가졌고, 그곳에서 잠도 잤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직 2월 말이라 제법 추웠는데, 헌책방 2층을 게스트하우스 처럼 운영할 예정이라며 우리가 일종의 시범 운영 고객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저런 독서모임을 많이 나갔었고, 꾸준히 나간 곳과 금방 그만둬버린 곳들이 있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한 여기 독서모임이 가장 재미있고 좋았으며 그래서 가장 오래 열심히 참여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 당시 구성원들 중 몇몇 사람들의 얼굴과 말투가 기억난다. 12년 전이면 30대 후반이었는데, 그럼에도 내가 거의 막내였다. 환경운동가의 경험과 책을 많이 읽었던 이력 덕분에 형님들, 언니들에게 과하게 애정을 받았던 것 같다.

이렇게 페이스북 과거 소식 하나로 긴 시간 추억에 잠기는 나를 보면 확실히 나는 늙었다. 앞을 보고 살아야 할텐데, 자꾸만 뒤를 보고 있으니. 물론 일을 중심으로 어떤 측면들에서는 분명히 앞을 보는 지점들이 있는데,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그저 아무생각없이 현재를 살 뿐, 그다지 앞 날에 대한 계획이 없다. 무계획도 계획이라는 말을 가끔 생각하곤 하는데, 그건 계획이 아니라 태도라고 봐야 하겠지.

튿어진 옷

지난 주말에 일정들이 있어서 여기저기 다니다가 저녁에 돌아와 옷을 벗는데, 두터운 겨울 솜잠바가 튿어져 있었다. 어깨와 팔을 연결하는 바늘질 일부가 튿어져 안에 하얀 솜이 보였다.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렇게 옷이 튿어질만한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한 칠팔년 전쯤에 사서 매년 겨울 잘 입었던 옷으로 안감이 부들부들해서 입었을때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옷이라 좋아하는 옷이기도 했다. 저렴하게 구매했는데, 훨씬 비싼 오리털 파카 같은 옷들보다 이 옷이 더 좋다고 느꼈던 옷이다. 작년 겨울에는 오른쪽 옆 주머니 안감이 터져서 속에 솜이 보이긴 했는데, 어차피 주머니 안감이라 밖에서는 안 보이기도 하고, 주머니에 손이나 물건을 넣고 빼는 동작만 좀 조심하면 문제가 없어서 꿰매지도 않고 그냥 입고 지냈었다. 이번에 팔 연결 부위가 튿어져, 뒤에서 사람들이 보면 흰 솜이 삐져나온 것이 보일 것 같아서 도저히 그냥은 입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마침 친한 지인이 재봉틀을 갖고 있다고 얘기했던 것이 기억나서 전화를 걸었다. 재봉틀은 작업실에 있는데, 본인은 지금 감기몸살에 심하게 걸려서 당분간 작업실을 못 나간다고 했다. 그리고 재봉틀 보다는 손바느질로 꿰매는 것이 더 낫다고 나중에 본인이 꿰매주겠다고 당분간만 다른 옷을 입고 다니라고 했다. 앞으로도 매년 겨울을 이 옷으로 버틸 생각이었는데, 적어도 10년은 더 입을 생각이었는데. 벌써 이렇게 문제가 생기면 안 되는데. 옷장에 누군가 옷이 너무 커서 못 입는다고 준 오리털 잠바가 있고, 작년 겨울 아버지가 본인이 받았는데 흰 옷이라 못 입겠다고 주신 롱패딩이 있다. 둘 다 따뜻하기는 하지만, 좀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워 훨씬 가볍고 간편한 저 옷을 늘 입었던 것이다. 어쩔수 없이 옷을 수선할 때까지 둘 중 하나를 입어아겠지.

옷을 오래 입는 편이어서 낡은 옷들이 많다. 10년 넘은 옷들도 제법 있고, 20년 넘게 입고 있는 옷들도 있다. 나는 낡은 옷을 입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은 듯하다. 하긴 장발에 수염에 낡은 옷까지. 어디 산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생각할 만하겠다. 그것도 흰머리와 흰 수염이라니. 아, 흰 머리에 흰 수염에 흰 롱패딩은 또 나름 괜찮은 조합이 될 수 있겠다. 롱패딩이 불편해서 안 입고 다녔는데, 또 흰 색이라 막 입기에 부담스럽기도 하고. 당분간은 어쩔 수 없겠네. 잘 부탁한다. 롱패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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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2-25 1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다리 헌책방 2층 게스트하우스는 아직도 잘 운영되고 있을까요. 그곳을 다녀온 지도 어느덧 10년이 넘어가네요. 인천에 가게 되면 일부러라도 한번씩 다녀오곤 했는데, 갈때마다 이곳은 얼마나 오래 이 자리를 지켜줄까 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좀 오래되고 낡고 남루한 것들도 나름의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감은빛 2025-02-25 18:31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 저도 거기에 못 가본지 오래되었네요. 아마 10년까지는 아니고 한 8년이나 9년쯤 되었을 것 같아요. 오늘 페이스북에서 짧은 글을 보고 그 당시 기억들이 떠올라 한참 멍하니 시간을 보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