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유명한 한국 한시를 몇 편 읽어 보자. 
한자가 들어온 것이 1~2세기 정도라면 이제 2천년 가까이 한자가 쓰였는데,
훈민정음을 만든 15세기부터 한글이 쓰이지 않은 걸로 보면,
이 땅의 문화는 한문으로 전승되던 것이 많았겠지.
그렇지만 한문으로 된 것을 모두 내팽개치려는 풍조는 아쉽단다.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는 역사는 고조선까지 우리거라고 우기고,
공부하기 귀찮은 한문글줄은 다 내버리려는 얄팍한 생각은 결국 문화를 멸종시킬지도 모르겠다.

많이 읽었겠지만, 한국 한시의 대표작은 역시 정지상의 '송인'(임을 보내며)이다.

송인(送人)
                            정지상(鄭知常)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별루연년첨록파)

(기) 비 개인 긴 언덕에는 풀빛이 푸른데,

(승)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전) 대동강 물은 그 언제 다할 것인가,

(결)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파한집(破閑集)>

7언 절구로 이뤄진 한시다.
비가 갠 언덕에 풀빛이 짙어오는데,
그대를 남포(대동강 하류의 큰 도시)에서 이별하니 슬픈노래를 부른대.
'기'구와 '승'구에서는 <선경>이라고 해서 앞부분에서 경치를 내세우는 구절이야.
화자의 심사를 돋우는 배경을 묘사하게 되지. 

봄언덕에 풀빛이 짙어오는데, 이별하는 상황이 된단다.
'전'구와 '결'구는 <도치>되어 있어.
그래서 '결'구를 먼저 읽으면 되지.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해지니,
대동강 물은 언제까지나 마르지 않을 거란다. 

좀 과장이 심하긴 하지만, 아름다운 이별노래지.
화자는 아마도 봄빛 짙어오는 강언덕을 보면 눈물이 핑~ 하고 돌지도 모르겠다. 

이 시를 지은 정지상은 고려 말기의 문인이야.
고려 말기 혼란기에 <서경 천도>파에 가담했다가,
묘청의 난에 휘말려 김부식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그래.
김부식이 정지상의 시쓰는 재주를 질투했다고도 하는구나.

지금은 분단되어 가볼 수 없는 대동강.
옛 이야기 속의 대동강 가는 정말 아름다운 유원지처럼 느껴진단다.
부벽루와 연광정, 을밀대 등의 아름다운 경치는 정말 멋지더구나.
언젠가 통일이 되거나, 좀더 긴장이 풀리면 대동강 유람도 멋질 거란 생각이 든다.
거기 가면 이런 노래 한 수 착~ 읊을 수 있어야 멋지겠지. 

 

<대동강 연광정> 

 

<을밀대>

이 시는 <푸른 언덕>와 <푸른 물결>의 색상과 함께,
비, 강물, 눈물의 이미지가 마음을 촉촉하게 만드는 시다.

예전 수능에서 이 시를 이렇게 물은 적 있어.

63. (가)의 결구(結句)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기구(起句)의 '풀빛'과 시각적으로 어울린다.
② 과장된 표현으로 이별의 슬픔을 강조하고 있다.
③ 전구(轉句)의 '언제나 다할런가'와 의미가 호응한다.
④ 이별의 정한(情恨)이 깊은 강물의 흐름과 어우러진다.
⑤ 해마다 더해 가는 현실에 대한 무상감이 푸른 물결과 대응한다.

일단 '결구'가 마지막 행이란 걸 알아야 하겠지?
풀빛의 '푸른색'과 강물의 '푸른색'이 시각적으로 어울린단 이야기고,
눈물로 대동강이 안 마른다는 과장으로 이별의 슬픔을 강조하고 있고,
전구의 '언제나 다하겠는가'와 호응하고,
이별의 한과 깊은 강은 잘 어울리지. 

마지막 답안의 <무상함>은 세상이 모두 변해서 허무함을 뜻하는 말이니 좀 어색하지? 답은 5번! 

다음은 허균, 허난설헌의 스승이라는 '이달'의 한시를 한편 보자.

불일암 인운스님에게(佛日庵贈因雲釋)
                                                   이 달(李達)

寺在白雲中(사재백운중)

白雲僧不掃(백운승불소)

客來門始開(객래문시개)

萬壑松花老(만학송화로)


절집이라 구름에 묻혀 살기로,

구름이라 스님은 쓸지를 않아

바깥 손 와서야 문 열어 보니,

온 산의 송화꽃 하마 쇠었네.   <손곡집(蓀谷集), 이병주 옮김> 


이 시 역시 4행으로 이뤄진 <정형시>로 5언 절구라고 하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가득한 시란다.
구름 속의 절집,
스님이 쓸 수 없을만치 구름에 늘 싸여있는데,
손님이 온 어느 날, 문을 열어 보니,
온 산의 송화(소나무 꽃)는 하마 늙어버렸대.

구름으로 인하여 속세와 단절된 느낌이 강한 절집에 사는 인운 스님,
구름을 쓸지 않는 것은 곧 길도 쓸지 않는단 소리야.
속세와 떨어진 절에서 사는 스님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러다보니, 스님은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에도 관심이 없어.
손이 찾아와서야 비로소 송화가 이미 시들어버린 걸 알게 된다는 거지. 

시간, 세월에 초탈한 마음이 와락, 다가오는 시란다. 

이달은 조선의 학자로, 허균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어.
허균은 천민이 아니지만, 스승 이달이 '서자의 슬픔'을 간직하고 살았던 사람이지.
강원도 원주의 <손곡리>에 살아서 호가 '손곡'이라 불렀대. 

이 시는 마치 세상과 담 쌓고 살 수밖에 없는 스님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던
이달의 마음이 구름 속에 가득 담겨있단다.
분위기가 나른하지만, 쓸쓸하면서 씁쓸한 느낌을 어쩔 수 없다.
허균이 스승 이달의 모습을 보고 '홍길동전'을 구상했다는 이야기도 있단다.

신분의 제약때문에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시대는 참 슬픈 시대였을 것 같구나.
다음엔 지난 번 황진이의 시조에서 <임제>의 시조를 다뤘는데, 그이의 한시를 한편 보자.

무어별(無語別)

                               임제(林悌)

十五越溪女(십오월계녀)

羞人無語別(수인무어별)

歸來掩重門(귀래엄중문)

泣向梨花月(읍향이화월)

현대어번역

십오세 꽃다운 아가씨
남부끄러워 말도 못 하고 이별하네.
돌아와 중문을 닫아 걸고
배꽃처럼 하얀 달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네.

* 월계녀(越溪女) : 아름다운 미인. 중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손꼽히는 서시(西施)는 중국 월(越)나라 약야계(若耶溪) 출신이다. 또한 미인을 지칭하는 성어로 월녀오희(越女吳姬)가 있다. 월나라와 오나라는 대대로 미녀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이 시는 아빠가 참 아끼는 한시란다.
내용은 뾰족한 것도 없지만,
화자는 열다섯 살 어여쁜 아가씨를 관찰하고 있어.
부끄러워 말못하고 헤어진 아가씨.
돌아와 안채로 들어서는 중문을 닫아걸고는,
배꽃같은 달을 보며 눈물을 흘린대. 

조선 시대의 남녀간 사랑이란 '부부유별'같은 수직적 질서에 눌려 가치없는 것이었단다.
결혼이란 가문간의 결합이고. 

그래서 조선 후기로 가면 '자유연애'같은 가치를 소설 속에서라도 실현시키곤 하지. 춘향이처럼...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나오는 '이생규장전'이란 소설에서는,
남녀가 사랑하다 헤어졌는데 여자애(최랑)가 상사병이 들거든.
그러면 아빠가 그걸 알고 '네 이년, 나가 죽어라!'하는 게 일상적 법도일 터인데,
그 아빠는 최랑을 이생과 결합시키려 여러 번 노력을 해.
그게 바로 신화(新話)겠지, new-story. 

작년에 시험에 났던 '운영전'처럼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애절함은 고전적인 주제일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유명한 시 한 수만 더 읽어 보자.
매천 황현 선생은 한일합방(1910. 8. 29)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 시를 쓰고
음독 자살하였다고 한다. 네 수를 지었는데, 그 중 세번 째 시가 유명하다.

절명시(絶命詩)

                                 황현(黃玹)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새와 짐승들도 슬피 울고 바다 또한 찡그리네 

무궁화 이 나라가 이젠 망해버렸구나.

가을의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을 되새기니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가 어렵구나. 


1910년을 경술년이라고 하는데,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긴 참담한 상황에서,
절의(節義)를 지켜 자결하는 심결을 그려 낸 작품으로,
망국에 대한 선비의 통분과 절망을 토로하고 있는 거야.

나머지 세 작품을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어지러운 세상 부대끼면서 흰머리가 되기까지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가물거리는 촛불만 푸른 하늘을 비추네.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임금 볕이 옮겨지니
구중궁궐은 침침하여 햇살이 더디 드네.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구슬 같은 눈물이 종이 가닥을 적시네.

일찍이 나라를 버티는 일에 서까래 하나 놓은 공도 없었더니
단지 인(仁)을 이룰 뿐이요, 중(忠)을 이루진 못했어라.
겨우 능히 윤곡(尹穀)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진동(陳東)을 넘지 못했음이 부끄럽기만 하더라.

자결하는 것이 뭐 지식인의 할 일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 당시 부끄러운 일을 하고도 일제의 벼슬을 한 놈들도 있고, 
부끄러움을 느껴 자결한 사람도 몇 안 되는 걸 보면,
이런 지조 높은 선비들의 죽음은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 

한문이라고 하면 이젠 완전히 잊혀진 선사시대 유물처럼 생각하기도 한단다.
그렇지만,
한문 속에 담긴 내용을 곰곰 따져보면,
저것들이 한자로 쓰였다 뿐이지,
한국 문학으로 손색이 없음을 알게 되지. 

이제 다시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된다.
하복을 입어도 될 여름이야.
요즘 공기가 나빠 그런지 폐렴도 심하다고 하니 늘 건강 잘 챙기기 바란다.
잘 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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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된다더니 날씨가 궂다.
종일 습도가 높고 안개가 가득 끼는구나.
이럴 때일수록 깨끗한 환경에서 건강에 주의해야 한단다. 
그래서 우리집도 오랜만에 오늘 청소를 싸~악 했지. ^^ 

오늘은 고려가요 <동동(動動)>을 읽어보자. 

고려가요는 고려시대 평민들의 노래라고 해서 주로 <고려 속요>라고 부른단다.
고려시대 평민들의 노래가 아직까지 전해지는 것은,
조선 초기 고려시대 <궁중음악>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야.
조선이란 나라가 갑자기 생기고 왕궁의 예의 범절도 체계를 갖춰야 하지만,
예술이란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날 수 없는 것이지. 

궁중음악으로 쓰이던 고려가요는 훈민정음으로 나중에 기록된단다.
<악학궤범>, <악장가사>, <시용향악보> 등의 책 이름을 보면 모두 <악>자가 들어가지?
음악 책이었기 때문에 <악>이란 글자가 필수였다고 볼 수 있지. 

이렇게 궁중음악으로 쓰이다 보니 가시리 같은 이별노래의 후렴구가
<위 증즐가 대평성대>처럼 태평성대를 비는 구절이 들어간 거라고 봐야 한단다. 

이 노래 동동은 모두 13연으로 이뤄진 노래야.
매월 한 수씩 지어진 월령체 노래라고 하지.
그런데 왜 12수가 아니라 13수인가 하면,
바로 궁중음악으로 쓰인 때문이야. 

사랑노래를 그냥 <연주>하면서 <노래>하고,
무용단이 <무용>하면 궁중음악으로서 좀 가벼워 보이잖아.
왠지 거기다가 <우리나라 만세>나 <길이 보전하게> 정도가 들어가 줘야 뽀대가 나는 거지. ㅋ 

그래서 1연이 덧붙은 거란다.
한번 볼까?

[서사]

德(덕)으란 곰배예 받잡고, 福(복)으란 림배예 받잡고,
德이여 福이라 호날 나자라 오소이다.
아으 動動(동동)다리.

현대어 풀이
덕일랑은 뒷 잔(신령님께)에 바치옵고 복일랑은 앞 잔(임금님께)에 바치옵고
덕이여 복이라 하는 것을 드리러 오십시오. 아으 동동다리

이 서사가 바로 궁중음악에 쓰였단 흔적이지.
덕은 뒤에 바치고, 복은 앞에 바치고...
왠지 조상님과 임금님께 덕과 복을 바치는 제사 지내는 행사 같지 않니?
덕이며 복이라 하는 것을 바치러 나오라는 가사야.  

마지막 부분의 <아으 동동다리>를 후렴구라고 부르는데,
동동은 북을 치는 소리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단다.
다행히도, ㅋ 정확한 내용은 몰라.
그치만, 후렴이 무슨 내용을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깐, 음악적 요소라 보면 되지. 

이제 1월부터 12월까지는 계절에 따른 <애절한 이별의 노래>란다.
슬픈 가사가 정말 아름다워.
그러니 수천 년을 뛰어넘어 살아남았겠지.
1월령부터 읽어 보렴. 

[1월령]

正月(정월)ㅅ 나릿므른 아으 어져 녹져 하논대.
누릿 가온대 나곤 몸하 하올로 녈셔.
아으 動動다리.

현대어 풀이
정월의 냇물은 아! 얼었다 녹았다 하는데
세상에 태어난 이 몸은 홀로 지내는구나.
아으 동동다리

시냇물은 얼면 녹는대.
근데, 세상 가운대 나고는,
내 몸아!
홀로 살아가는구나. 

여기서 <시냇물>과 <내 몸>은 비슷하니 대조적이니?
시냇물은 녹지만, 내 몸은 홀로 지내니 <꽁꽁 얼어붙은 마음>일 거 아냐?
이렇게 시냇물을 이용해서 자신의 외로움을 표현한 거란다.
자연물을 이용해서 자신의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 아름답지 않아? 

요즘 노랫말이 자극적이고 에둘러 표현할 줄 모르는 것이
참 멋대가리 없는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단다.
소시 노래 하나 보렴.

눈 깜빡 할 사이 넌 또 Check it Out~! 지나가는 여자들 그만 좀 봐
아닌 척 못들은 척 가시 박힌 코웃음. 이상해 다 다 다

조금만 내게 친절하면 어때 무뚝뚝한 말투 너무 아파 난
이런 게 익숙해져 가는 건 정말 싫어 속상해 다 다 다

어딜 쳐다봐 난 여기 있는데

*너 때문에 내 마음은 갑옷 입고 이젠 내가 맞서줄게
네 화살은 Trouble! Trouble! Trouble! 나를 노렸어
너는 Shoot! Shoot! Shoot! 나는 훗! 훗! 훗!

독이 배인 네 말에 나 상처 입고도 다시 준 두 번째 Chance
넌 역시 Trouble! Trouble! Trouble! 때를 노렸어
너는 Shoot! Shoot! Shoot! 나는 훗! 훗! 훗!

자신의 고독으로 시작한 1월과 달리 2,3월엔 임의 모습을 찬양하고 있단다. 계속 보자. 

 

[2월령]

二月(이월)ㅅ 보로매, 아으 노피 현 燈(등)人블 다호라.
萬人(만인) 비취실 즈지샷다.
아으 動動다리.

현대어 풀이
이월 보름에 아! 높이 켜서 매달은 등불 같구나.
만인을 훤히 비치실 모습이로다.
아으 동동다리

2월 보름은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 <연등회>를 열던 때란다.
지금도 부처님 오신 날인 사월초파일엔 연등을 달곤 하잖아. 

 

임의 모습은 2월 보름 연등회하는 날,
높이 켠 등불 같대.
만인을 비출 모습이라고 예찬한단다. 

원래 사랑하는 마음에 빠지면 무엇이든 그렇게 좋아보이는 법이지. ^^
임이 그렇게 좋았는데,
이제 만나지 못하는 마음이 얼마나 시리겠어.
1월의 시냇물이 녹는 걸 보고도 마음이 시려서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화자의 아린 가슴이
2월의 연등회하는 날 더욱 가엾게 느껴지는구나.

[3월령]

三月(삼월) 나며 開(개)한 아으 滿春(만춘) 달욋고지여.
나매 브롤 즈즐 디뎌 나샷다.
아으 動動다리.

현대어 풀이
삼월 나면서 핀 아! 늦봄의 진달래꽃이여
남이 부러워할 자태를 지니고 나셨도다.
아으 동동다리

3월이면 음력 3월이니 양력으로는 4월 중순쯤 되겠다.
진달래가 4.19 무렵 만개하는 시절이니 그쯤으로 보면 되지.
3월 지내며 만개한 봄을 가득 채운 달랫꽃이여.
남이 부러워할 즞(옛날엔 받침을 반치음 시옷, 삼각형 모양을 썼단다.)을 가지고 나셨대.
고어에서 <얼굴>이란 말은 <안면> 외에도 <모습, 형태>를 가리키는 말이었어.
2월과 마찬가지로
진달래꽃처럼 임도 남들이 부러워할 모습을 지니셨던 분이라는 거지. 

 

[4월령] 

四月(사월) 아니 니저 아으 오실셔 곳고리새여.
므슴다 錄事(녹사)니만 녯 나를 닛고신뎌.
아으 動動다리.

현대어 풀이
사월 잊지 아니하고 아! 오셨구나 꾀꼬리 새여,
무슨 일로 녹사님은 옛 나를 잊고 계시는가.
아으 동동다리

4월에선 다시 슬픔이 강조되고 있어.
사월을 아니 잊고 아아 꾀꼬리 새는 돌아왔대.
뭐한다고 나의 <녹사(벼슬 이름)>님은 옛날에 사랑하던 나를 잊고 계신지... 

봄이면 새들이 짝을 찾기 위해서 많이 우짖는 계절이란다.
요즘에도 5월쯤이면 새들이 짝짓기할 계절이라서
산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야호>소리 지르지 말라고
플래카드도 붙이곤 하지.

자기는 혼자서 외로운데 꾀꼬리 우는 소릴 들으니 참, 더 외로움이 떠올랐나봐.
옛날에 고구려 2대왕 유리왕도 사랑하던 이를 잃고 <황조(꾀꼬리)가>를 불렀다잖아. 

펄펄 나는 꾀꼬리는/ 암수 서로 놀건마는/ 외로운 이 내 몸은 / 뉘와 함께 돌아갈꼬 (유리왕, 황조가)


이 노래가 실린 삼국사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덧붙어 있어.

3년 7월에 골천에 머무는 별궁을 지었다. 10월에는 왕비 송씨가 죽었다.
왕은 다시 두 여자를 후실로 얻었는데 한 사람은 화희(禾姬)라는 골천 사람의 딸이고,
또 한 사람은 치희(雉姬)라는 한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두 여자가 사랑 다툼으로 서로 화목하지 못하므로 왕은 양곡(凉谷)에 동궁과 서궁을 짓고 따로이 머물게 했다.
그 후 왕이 기산에 사냥을 가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두 여자가 싸웠다.
화희가 치희에게 "너는 한나라 집안의 종으로 첩이 된 사람인데 왜 이리 무례한가?" 하면서 꾸짖어 말했다.
치희는 부끄럽고 분하여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며 쫓아갔으나 치희는 성을 내며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어느 날 나무 밑에서 쉬며 꾀꼬리들이 날아 모여듦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노래하였다.

  

옛날 글을 읽을 때는 그 상징을 잘 읽어야 한단다.
저 시절의 '화희'는 '벼 화'자를 쓰니 농경부족의 딸인 모양이고,
'치희'는 '꿩 치'자를 쓰니 수렵부족(유목민)의 딸인 모양이지.
치희가 쫒겨가는 걸로 보아, 농경부족이 더욱 파워가 있었던 거 같구나. ^^

[5월령]
五月(오월) 五日(오일)애, 아으 수릿날 아침 藥(약)은
즈믄 핼 長存(장존)하샬 藥이라 받잡노이다.
아으 動動다리.

현대어 풀이
오월 오일에 아! 수릿날 아침에 먹는 약은
천 년을 오래 사실 약이기에 받치옵니다.
아으 동동다리

수릿날은 <단오>야.
엊그제 '현충일'이 단옷날이었는데,
예전에 단오에는 '양'의 기운이 가득한 시절이라 풀이해서 여러 행사를 했다는구나.
그날 아침에 '약'을 달여서 <천 년을 오래 사실 약>이라 생각하여 임에게 바친대.
그 <약>은 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겠지? 

그치만, 암만 좋은 약을 달여서 바치면 뭘해.
임이 없으니 쓸쓸하잖아. ㅠㅜ
임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닌지도 모를 일이야.

[6월령]

六月(유월)ㅅ 보로매 아으 별해 바룐 빗 다호라.
도라보실 니믈 젹곰 좃니노이다.
아으 動動다리.

현대어 풀이
유월 보름에 아! 벼랑에 버린 빗 같구나.
돌아보실 임을 잠시나마 따르겠습니다.
아으 동동다리

유월 보름(15일)은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도' 될 정도로 더워지는 날이지.
음력 유월 보름이니 7월 중순쯤 되겠다.
그래서 이 날을 <흐를 류, 머리 두>를 써서 '流頭'라고 불렀대. 

그런데 자신은 이날, 유두(발음이 쫌 ㅋㅋ)에 아아~~(생각만 해도 슬픈 유둣날)
벼랑에 버려진 빗 같대.
머리를 감고 나면 빗으로 빗었을 거 아냐.
그런데, 옛날엔 빗이 요즘처럼 플라스틱으로 생겨먹지 않았을 테니,
부러지고 이가 빠진 건 많이 버렸겠지.  

자신의 가엾은 모습을 '유둣날 버려진 빗'에 비유했단다. 슬픈 현실이야.
돌아보실 임을 조금이라도 따르고 싶다고 그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임이라면,
임을 따르는 일은, 세상을 버리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만치 힘들다는 이야기겠지. 

 

[7월령]

七月(칠월)ㅅ 보로매 아으 百種(백종) 排(배)하야 두고,
니믈 한 대 녀가져 願(원)을 비잡노이다.
아으 動動다리.

현대어 풀이
칠월 보름에 아! 온갖 제물을 차려 놓고
임과 함께 지내고자 소원을 비옵니다.
아으 동동다리

7월 보름이면 '백중'날이야.
여러 가지 곡식이 나기 시작하는 계절인 모양이지.
농경 부족으로서의 <단오>, <백중>, <한가위> 등의 세시 풍속이 잘 드러나 있는 시란다.
그건, <월령체> 가사니 그렇기도 하지. 

여러 곡식을 차려 두고,
님과 함께 살아가고자 소원을 빈다는 데서 보면,
제삿상을 차리고 임의 안녕을 비는 것처럼 보여서 마음이 더욱 쓸쓸해 보이는구나.

[8월령]

八月(팔월)ㅅ 보로만 아으 嘉排(가배) 나라마란,
니믈 뫼셔 녀곤 오날날 嘉俳(가배)샷다.
아으 動動다리.

현대어 풀이
팔월 보름은 아! 한가윗날이건마는
임을 모시고 지내야만 오늘이 진정 한가윗날일 것입니다.
아으 동동다리 

8월 보름은 '한가위'지. '가운데'를 뜻하는 '가온', '가배'에서 온 말이라 그래.
이날 달은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달이라고 한대.
이미 수확의 시기가 되었으니 마음이 풍요로운 농경 부족의 노래이니 그럴 수도 있지. 

원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날
외로운 사람은 가장 쓸쓸한 법이란다. 
요즘이라면 임과 이별한 사람에게 크리스마스가 가장 힘든 날일 수도 있겠다. 

8월 보름은 아아~ 한가위날이지만,
임을 모시고 있어야, 오늘이 한가위다울 것인데,
임이 없으니, 쓸쓸한 마음 참을 길 없다는 마음이 잘 드러난다.

[9월령]

九月(구월) 九日(구일)애 아으 藥(약)이라 먹논 黃花(황화)
고지 안해 드니 새셔 가만하얘라.
아으 動動다리.

현대어 풀이
구월 구일에 아! 약이라 먹는 노란 국화꽃이
집 안에 피니 초가집이 고요하구나.
아으 동동다리

9월 9일은 '양'의 숫자 중 가장 높은 '9'가 겹쳐지는 날이라 '중양절', '중구절'이라 부른다.
이 날은 워낙 양의 기운이 좋아서,
비명횡사한 영혼들의 제삿날을 모를 때, 이날 제사를 지내기도 한단다. 

쓸쓸한 가을이 깊어가는데,
약으로 먹는 국화꽃.
임에게 약을 달여 먹일 일도 없어,
꽃을 집안에 들여 놓으니 초가가 고요하단다. 

작년까진 임에게 국화를 달여 차로도 마시면서 웃고 떠들고 하면
임이 그렇게도 좋아하셨는데...
이제 국화차 달여 드릴 일도 없으니 쓸쓸한 마음 어이할까나...

[10월령]

十月(시월)애 아으 져미연 바랏 다호라.
것거 바리신 後(후)에 디니실 한 부니 업스샷다.
아으 動動다리.

현대어 풀이
시월에 아! 잘게 썬 보리수 같구나.
꺾어 버린 뒤에 그걸 지니실 한 분이 없으시구나.
아으 동동다리

시월이면 양력으로 12월이 다 되었어.
자신이 마치 저며진(얇게 썰어진) 보리수 같대.
꺾어 버린 후에,
자신을 지닐 한 분이 없으시단다. 

농경 사회에선 생산력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과 함께 가정을 꾸리지 않는다면 살아가기가 힘들지.
그런데, 자신은 마치 보리수 열매처럼
꺾어진 처지지만 누구도 자신을 돌봐주지 않는 외로운 처지래. 

보리수 나무엔 요즘 열매가 한창이다. 


[11월령]

十一月(십일월)ㅅ 봉당 자리예 아으 汗衫(한삼) 두퍼 누워
슬할사라온뎌 고우닐 스싀옴 녈셔.
아으 動動다리.

현대어 풀이
십일월 봉당 자리(흙바닥)에 아! 홑적삼 덮고 누워
슬프구나, 고운임을 떨어져 지내는구나.
아으 동동다리

이제 한겨울이야.
그런데, 자신의 마음은 얼마나 춥고 시린지...
마치 한겨울 봉당(부엌 바닥)에 얇은 여름 옷을 덮고 누운 것 같대.
슬프구나.
임과 따로 떨어져 살아가는구나.

이별의 슬픔이 온몸이 굳어질 정도로 추운 통증으로 느껴지는 거 같아.

[12월령]

十二月(십이월)ㅅ 분디남가로 갓곤 아으 나잘 盤(반)앳 져 다호라.
니믜 알패 드러 얼이노니 소니 가재다 므라잡노이다.
아으 動動다리.

현대어 풀이

십이월 분지나무로 깎은 아! 차려 올릴 소반의 젓가락 같구나.
임 앞에 들어 가지런히 놓으니 엉뚱한 다른 손님이 가져다 입에 뭅니다.
아으 동동다리

드디어 마지막 연이지.
이제 자신을 '분지나무'로 깎은
차려 올리는 소반의 <젓가락> 같대.
소반의 젓가락?
그게 어때서? 계속 읽어 보렴. 

임의 앞에 들어서 가지런히 바치는데,
임이 자신을 물지 않고,
손님이 가져다 물었대.
임은 자기와 인연이 없는지 이어지지 않는 쓸쓸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구나.  

이 시의 주제는 임이 없어 <고독>한 마음을 잘 드러낸 노래지.
그런데 맨 처음 연 때문에 임에 대한 <찬양, 송축>이 담겨 있기도 하단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 노래는 <제사지내는 의식의 노래>였을 거란 상상도 해. 

소반에 젓가락을 올리는 것도 그렇고,
이런저런 날들에 임에게 뭘 바치고 싶어하는 것도 그렇지.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에게 뭔가를 주고 싶은 건,
인간의 보편적 마음(인지상정)이잖아. 

이제 무더위가 시작되면 늘어지기 쉬운 계절이야.
그럴 때일수록 마음을 뽀송뽀송하게 유지하는 비결을 길러야 되지.
기말고사가 다가온다.
수시모집도 인원이 워낙 많으니 차근차근 기말고사 준비 잘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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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6-12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107회 군요. 참 한결같으신 글샘님^*^
아으 동동다리~~~~ 꽤 친근합니다.

먹음직스러운 보리수..어떻게 먹는걸까요?

글샘 2011-06-13 00:08   좋아요 0 | URL
보리수는 약재로 쓰기도 하구요, 술도 담가 먹더라구요.
익어갈 때 색깔이 참 예쁘답니다.
파프리카처럼 노랑, 연두, 빨강 이런 게 막 섞어 있어요.

동백꽃 2014-01-09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안녕하세요 :>
동동 현대어풀이를 찾다 너무 멋진 블로그를 발견했네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요즘엔 시조를 연속 읽어보고 있다. 
오늘은 부정적 세상에 물듦을 경계하도록 주의를 주는 시들을 살펴볼까 싶다.
워낙 세상은 다양한 인생들이 교차하는 곳이니,
자기 이익을 위하여 상대방을 해코지하는 일도 많은 곳이니 말이다.

 

가마귀를 뉘라 물드려 검따하며 백노를 뉘라 마전하여 희다더냐
황새다리를 뉘라 이어 기다하며 오리다리를 뉘라 분질러 자르다하랴
아마도 검고 희고 길고 자르고 흑백장단이야 일너 무삼하리오 (무명씨)

(해석)
가마귀를 누가 물들여 검다하며, 백로를 누가 하얗게 바래도록 만들어서 희다더냐.
황새 다리를 누가 이어 길다하며, 오리다리를 누가 분질러 짧다고 하느냐.
아아! 검고 희고 길고 짧고의 흑백(黑白) 장단(長短)을 따져서 무엇하랴?

* 마전하여 : 햇빛에 쬐어 흰빛이 나도록 하여

이 시조는 역시 사설시조지.
재미있는 것은 보통은 까마귀를 싫어하고 백로를 좋아하니깐,
까마귀 나쁘다 생각하는데
발상을 바꾸면 백로가 나쁜 놈일 수도 있다, 이렇게 전개하기 쉽거든. 

이 시조에서는
까마귀는 검고 백로는 희다.
그런데 누군가는 까마귀는 물들여 검고 백로는 마전하여 흰 것이라 우기지.
황새는 다리가 길고 오리는 짧아.
그치만 억지부리기 좋아하는 누군가는
황새 다리도 원래 짧은데 이어서 길어 진 거고, 오리다리는 분질러 짧아진 거라 우긴대. 

세상에!
우길 게 따로 있지. ㅋ
그치만, 사노라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걸 우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단다.
특히 정치가가 그렇지. 

화자는 '흑백장단'을 가려서 뭐하겠느냐!
다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이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어.
정치에 혐오감을 느낀 모양이지.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면,
자기네 편이 아니라고 상대방을 모해하여 곤경에 빠트리는 경우가 많거든.
그러려면 이런저런 말로 옭아매야 하는데,
그런 세태를 비판한 시로 읽으면 되겠다.  
이 시조와 유사한 시조가 있어.

가마귀 거므나다나(검다고 하거나) 해오리 희나다나
황새다리 기나다나 올해다리 져르나다나
세상에 흑백장단은 나난 몰나 하노라(무명씨)

(해석)
가마귀가 검다고 하거나, 해오라비 희다고 하거나
황새다리가 길다고 하거나,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하거나
세상살이의 검고, 희고, 길고, 짧은 것을 나는 몰라 하노라.

흑백장단을 나는 모르겠다.
그걸 가려서 뭐하겠느냐~는 위의 시조와,
나는 모르겠다!는 아래 시조는 쌍둥이처럼 보이는구나.
그만큼 세상이 혼란스러운 곳이었단 이야기겠지. 

세태를 풍자한 시를 하나 더 읽어 보자.  

발가버슨 아해들이 거믜쥴 테를 들고 개쳔으로 왕래하며
발가숭아 발가숭아 져리 가면 죽나니라 이리 오면 사나니라 부르나니 발가숭이로다.
아마도 세상 일이 다 이러한가 하노라. (이정신)

(해석)
발가벗은 아이들이 거미줄 채를 들고 개천으로 오고 가며,
발가숭아 발가숭아, 저리 가면 죽고 이리 오면 산다하고 부르는 것이 발가숭이로다.
아마도 세상일이 다 이처럼 속고 속이는 것인가 하노라.

이 시의 재미는 '발가버슨 아이들'을 가리키는 '발가숭이'가
'고추잠자리'를 가리키는 '발가숭이'와 동음이의어가 되어
앞의 발가숭이가 뒤의 발가숭이를 잡으려 한다는 말이 된다는 점에 있어. 

세상사는 이렇게 비슷한 존재끼리 서로 속이고 속는 것이라는
왠지, 씁쓸하구만~ 이런 어조로 읊은 시가 되겠지.
세태를 풍자한 대표적인 시조로 문제에 잘 등장하는 편이란다.  

가마괴 눈비 마자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夜光)명월(明月)이 밤인들 어두오랴
님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변할 줄이 이시랴. (박팽년)

(해석)
까마귀가 눈비를 맞아 희어지는 듯하다 다시 검어진다.
밝은 달이 밤이라고 해서 어두울 리가 있는가?
임금(단종)을 향한 한 조각 붉은 마음이야 변할 수 있겠는가?

다시 까마귀 이야기.
시조를 보면 까마귀가 정말 많이 등장해.
박지원의 이야기를 봐도,
까마귀는 검지만은 않다, 는 주장을 하거든.
까마귀를 보면 붉고 푸르며 누런 빛들이 모두 반짝이는데 사람들은 '검다'고 표현한다는 거지. 

세상의 다양성을 살려 읽지 못하고,
제 눈에 비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여 '고정'시키는 사태의 문제점을 지적하려 한 것이겠지. 

이 시에서는
까마귀가 눈을 맞아 희어지는 듯 하지만 다시 검어진대.
까마귀의 본질은 검은데,
눈비를 맞아 잠시 희어지는 듯 하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는단 거지. 
아마도 까마귀는 수양대군을 가리키는 듯 해.
조카를 죽이고 임금이 된 세조 말이야.
원래 음흉한 까마귀인데, 잠시 희어지는 듯 하지만, 본질은 시꺼먼 놈이란 비아냥이 들었지.

야광주는 밤이라도 어두워지지 않는 구슬이지. 
까마귀의 빛이 변치 않고 드러나듯,
야광명월은 아무리 어두워도 변치 않고 빛나는 거야.
그러니 화자의 단종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한 조각 붉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충성의 표현이지. 

초장의 '가마귀'는 '세조를 지지하는 세력'을 가리킬 수도 있고,
중장의 '야광 명월'은 '단종을 잊지 못하는 세력'이고 말이지.

왕조 시대에는,
이렇게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 중요했을 거다.
그에 따라서 출세를 하기도 하고, 귀양을 가기도 하고 했으니 말이야. 

이렇게 꼿꼿했으니 세조가 권력을 잡았다고 굽히지 않았지.
그래서 역모를 꾸미고 고문당하다 죽게 되는데, 아버지, 동생, 아들까지 다 죽였대.
그치만 며느리가 손자를 잘 숨겨둬서 후손이 전한다는구나.
왕조 시대는 '왕'의 안존을 위하여 참 비극적인 일도 잘 꾸몄다 싶어. 

가마괴 디디는 곧애 백로야 가디 말아
희고 흰 긷헤 거믄 때 무칠셰라 
딘실로 거믄 때 무티면 씨을 낄히 업사리라 (이시)

해석
가마귀 발 디디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희고 흰 깃털에 검은 때 묻힐세라.
진실로 검은 때가 한번 묻으면 씻을 길이 없으리라.

이 시조는 어렵지 않지?
까마귀는 전형적인 '악'의 대표,
백로는 '선'의 대표자인 거야. 

청렴결백을 모토로 삼았던 학자에게
검의 때가 묻으면 그것을 씻는 길은 참으로 어렵고 먼 길이라
그런 세상을 경계하며 깨끗한 이는
더럽히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시조야. 

'근묵자흑, 근주자적'이란 한자 성어가 있단다.
먹을 가까이 하면 저절로 검게 되고,
인주를 가까이 하면 저절로 붉어 진다.
주변의 친구나 상황에 따라 사람들은 때가 묻기도 하고 더러워지기도 하는 법이지.

가마귀 검거라 말고 해오리 셸줄 어이
검거니 셰거니 일편도 한져이고
우리도 수리두로미라 검도셰도 아녜라

* 검거라 말고 : 검다고 비웃지 말고

(해석)
까마귀 검다고 하지 말고, 해오라기 희다하지 말 것을
검거나 희거나 너무 치우쳐 외곬수로구나.
우리는 수리두루미처럼 검지도 희지도 않기를.... 

까마귀가 검다고 비웃고 욕을 했나봐.
아, 저놈은 엄청 더럽고 치사한 놈이야~ 이러고.
해오라기는 희고희다고 했는데 어이하랴~ 

검고 흰 것이 <일편 :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침>하구나.
우리는 수리두루미처럼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자는 이야기를 권하고 있어. 

세상은 너무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 피해를 입는 경우도 많거든.
그렇지만, 또 양쪽으로 나뉘어 싸우는 일도 많아서
그것의 중도를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단다.
어렵지만, 치우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시조겠지. 

가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것치 거믄들 속좃차 거믈소냐
것 희고 속 거믄 즘생은 네야 긘가 하노라(이직)

cf) 이본(異本)에서는 종장이 '아마도 것 희고 속 검을슨 너 뿐인가 하노라'로 되어있는 곳도 있다.

(해석)
까마귀가 겉보기에 검다하고, 해오라기야 비웃지 말아라.
비록 겉이 검을지라도 속마음까지 검을쏘냐?
겉이 희면서 속이 검은 짐승은 바로 너인가 하노라.

이 시조가 가마귀 시조의 대표작이지.
겉이 검은 가마귀, 
겉이 흰 백로.
그러나 중장에서 <가마귀는 겉이 검지만 속조차 검겠는가>하며 반전을 기하지.
종장에선 대놓고 백로를 비판해.
<겉 희고 속 검은> 너야말로 비판의 대상이야!
알겠어?
겉만 흰 척 하지마!
우린 다 알고 있다고!!! 이런 말이야.

이 시의 작가 이직은 조선의 개국 공신이야.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될 때,
고려 유신들은 절의를 지킨다면서 <맥수지탄>의 노래를 부르곤 했지.
새 왕조의 개국 공신들에게는 강한 비판을 던지고 말이야. 

개국 공신으로서 <가마귀> 처지가 된 화자.
절의를 지킨다는 <백로>들이야말로,
이적지 고려 왕조에서 부유층으로, 귀족으로 배불리 잘 먹고 잘 살았으면서,
그야말로 썩어빠진 고려 왕조의 몰락에 기여한 공이 큰 넘들이면서, 
우리를 비웃는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러는 시조란다. 

늘 조국의 안위를 걱정하는 우국지사인 체하는 인사들은
시대가 불안할수록 더 많은 법이지.
자기가 살아 남으려고 남들을 욕하는 자들 말이야.

가마귀 싸호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셩낸 가마귀 흰 빗츨 새올세라
청강에 조히 씨슨 몸을 더러일까 하노라(정몽주 모친)

해석
까마귀들이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아라.
성이 난 까마귀들이 새하얀 너의 몸빛을 보고 시기하고 미워할세라.
맑은 강에서 깨끗이 씻은 너의 결백한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정몽주 모친이 자식을 백로에 비유했어.
까마귀 옆에 가면 흰 빛을 시샘할까 두렵구나.
맑은 강에 깨끗이 씻은 몸이 더러워질까 두렵다고 했는데,
역시 백로 정몽주는
까마귀 이방원의 무리에게 당하고 말지.

이런들 엇더하며 져런들 엇더하료
만수산 드렁츩이 얼거진들 긔 엇더하료
우리도 이갓치 얼거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

이렇게 '하여가'를 부르며 회유하는 이방원에게
거부의 뜻으로 남긴 '단심가'는 정말 유명하지.     

 

이 몸이 죽어죽어 일백 번 고쳐 주거
백골이 진토되야 넉시라도 잇고 업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정몽주)

결국 정몽주는 돌아가는 길에 선죽교에서 제거되고 만단다.
세상 만사가 그런 거야.
필요하면 쓰고,
반대하면 버리고...
비정한 시장통 같은 곳이지.
비장성시라고 하던가.

검으면 희다 하고 희면 검다 하네
검거나 희거나 올타하리 전혀없다
찰하로 귀먹고 눈감아 듣도보도 말니라 (김수장)

(해석)
검으면 희다하고 희면 검다하네.
검거나 희거나 간에 옳다할 사람 전혀 없다.
차라리 귀먹고 눈을 감아 듣지도 보지도 말리라.

세상사람들은 이렇게 남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야.
검은 걸 희다고 우기지.
흑백간에 옳다고 인정해주는 이가 전혀 없대.
그러니 차라리 귀멀고 눈감아 듣고 보지 않겠대. 

아, 얼마나 세상에 회의적인지...
얼마나 세상에 대하여 염세적인지...  

구룸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하다
중천에 떠이셔 임의로 다니면서
구태야 광명한 날빗츨 따라가며 덥나니 (이존오)

(해석)
구름이 사심(邪心)이 없다는 말이 아무래도 허무맹랑하다.
하늘에 높이 떠 있어(떠서) 제멋대로 다니면서
하필이면 구태여 밝고 밝은 햇빛을 따라가며 덮는단 말인가? 

고려는
왕조 국가였지만,
지방의 귀족들이 상당한 패권을 가지고 있던 국가였던 모양이야.
상대적으로 왕권은 약화되었겠지. 

조선에 비하면 왕권이 약하던 고려는,
몽고의 침략 이후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단다. 

고려 말, 새로운 사상으로 성리학이 들어오게 된다.
성리학은 '자신을 꼿꼿하게 가다듬는 철학'이기도 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경륜의 철학'이기도 했지.
출세하기 전에는 '위기지학'으로서 자신을 가다듬고,
세상에 나간 다음엔 '위인지학'으로서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베푸는 것이야. 

출세하기 전의 '사'와 출세한 뒤의 '대부'로서의 <사대부>가 새로운 세력이 되고,
이성계 역시 그런 신진 세력의 의지를 틈타 임금자리를 얻게 된 것이고. 

흔들리던 고려 말,
공민왕 때 개혁가 신돈이란 사람이 있었단다.
그는 승려였지만 고려는 불교국가였으니 승려가 주요직책에 오를 수 있었지.
공민왕은 신돈을 꽤 믿었던지 신돈의 개혁 정책에 힘을 실어주었지.
그는
토지개혁 관청을 두어 부호들이 권세로 빼앗은 토지를 각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시켰으며,
국가 재정을 잘 관리하여 민심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렇지만 귀족국가 고려의 부호 세력들은
그의 개혁 정책이 달갑지만은 않았겠지.
결국 신돈은 제거되고, 역사 속에는 <나라를 망친 요망한 승려>로 남게 된다. 

역사는 패자에게 먹칠을 하는 경우가 많단다.
백제 의자왕이 삼천궁녀랑 놀아 나다가 나라를 망쳐 먹었다는 둥,
(실제 의자왕은 성실한 왕이었대.)
신라 경순왕이 맨날 술이나 마시며 포석정에서 놀았다는 둥,
승자 위주의 역사 서술을 하곤 하지. 

이 시조는 고려 말의 '신돈'을 풍자한 시조래.
구름이 '무심'하다고 하지만,
정말 욕심없는지... 아닌 것 같다고 의문을 제기해.
하늘 가운데 멋대로 다니는 구름은, (신돈이 임금의 총애를 받고 활동이 많은 걸 비꼬는 거지.)
구태여 밝은 햇빛을 따라다니면서 덮는 존재라고 하고 있단다. 

역사 서술에 남은 어떤 것이 신돈의 본모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빠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개혁에 반대하다가 투옥까지 된 작가가
신돈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쓴 시가 아닌가 싶어. 

오늘 다룬 시조들은,
혼탁한 세태에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시조들로 엮었다.
흑백을 가리기 어려운 곳이 세상이고,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제거하려는 곳이 세상이야. 

암튼,
돌다리도 두드려보면서
조심조심 건너야 하는 곳이 세상이란다.
이 시조들이 들려주는 함축적 의미를 두고두고 곱씹어 볼 필요가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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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평가원 모의고사에 엊그제 설명한 '견회요'가 나왔더구나. 
시험은 바로 어제 공부한 것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니 늘 관심을 가져 주기 바란다.

조선은 왕조 국가란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굳이 조선이 왕조 국가임을 강조한 이유는,
그것이 사고의 중심임을 알아야 조선 시대의 시가들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랬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난을 지나면서,
조선은 왕조 중심의 파워가 무너져 간다.
왜란 때는 임금이 백성 보는 데서 도망을 갔고,
호란 때는 임금이 남한산성에 숨어 버티는 통에 백성들은 피해가 컸다.

백성들의 사고 방식과 함께,
조선 후기의 생산 양식도 바뀌면서,
새로운 형식의 시조가 등장한다.
그것이 사설시조다.

사설시조는 평시조의 4음보격이 많이 벗어나 거의 자유시에 가깝게 늘어난 시조를 뜻한다.

평시조는 느릿하게 부르는 양반들의 노래로 정해진 격식을 중시하는 노래였다면,
조선 후기의 사설시조는 흑인들의 ‘랩’에 가까운,
그러니깐, 평민들이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중얼거림, 흥얼거림에 가까운 노래였단다.

형식적으로 자유로워졌다는 특징과 함께,
내용적으로도 다양한 삶의 애환이 담긴다.
한번 감상해 보자. 


창(窓) 내고쟈 창을 내고쟈, 이 내 가슴에 창 내고자
고모장지 셰살장지 들장지 열장지 암돌져귀 수돌져귀 배목걸새 크나큰 장도리로 똥닥 바가 이 내 가슴에 창 내고쟈.
잇다감 하 답답할 제면 여닫져 볼가 하노라.

(해석) 창을 내고 싶구나, 창을 내고 싶구나. 이내 가슴에 창문을 만들고 싶구나.
      고무래 들창문, 가는 살의 장지문, 들창문, 여는 창문, 암돌쩌귀 수돌쩌귀, 배목걸쇠, 크나큰 장도리로 뚝딱 박아서 이 내 가슴에 창을 내고 싶구나.
      이따금 너무 답답할 때면 열고 닫아 답답함을 풀고자 하노라

이 시조의 초장은 같은 구절이 반복되지.
이런 반복을 AABA 반복이라고 배웠을 터이고.
민요에서 그런 반복이 많이 나온단다.

가시리 가시리 바리고 가시리
살어리 살어리 쳥산애 살어리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성님 성님 사촌 성님
이런 것들이지.

가슴에 창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상황은,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한 거지.

중장에선 정말 창문을 만들 것처럼,
고모장지 셰살장지 들장지 열장지 암돌져귀 수돌져귀 배목걸새 등을
큰 장도리로 뚝딱 박아서
가끔 정말 답답할 때면 여닫아 보고 싶다는 하소연이지.

가슴 속에 답답한 심정이 가득한 서민의 마음을 잘 표현한 시조로 읽을 수 있겠다.
세상살이의 고달픔, 근심, 답답함이 ‘꽉 막힌 방’같이 느껴질 정도로
엄청 답답해 보이면서도
고모장지, 셰살장지.... 이런 것들을 늘어 놓고 있는 걸 보면,
‘이사람이 정말 답답한 거 맞아?’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를 느끼게도 한단다.

아마도 이 시를 지은 사람은 창호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어.
일반인들은 알기 어려운 다양한 전문 용어가 등장하니 말이지.

암튼 생활의 비애, 고통 등을 어둡게만 그리지 않고,
이처럼 웃음을 주는 방식으로 해학적으로 극복하려는 것이
한국 서민 문학의 특징이기도 하단다.

<단아한 멋> <정제된 멋>을 풍기던 정격 평시조에 비하자면,
<질서 변형의 멋> <웃음과 해학의 멋>이 드러난 것이 사설시조가 되겠지.

다만, 사설시조라 하더라도
이 역시 시조창으로 불리던 평시조의 영향을 받아서,
종장의 첫 구절 <석 자>는 고정불변인 경향이 있단다.
이 시의 ‘잇다감’이 해당되겠지.

평시조를 부를 때는 느리고 느긋한 곡조가 이어지는데,
종장의 첫구 석 자를 부를 때는,
변화가 심하고 높낮이가 많이 바뀌어 노래부르기가 어렵다는 특징 때문에,
글자 수를 변화시키지 않고 ‘석 자’로 고정시켰던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지.

계속 한편 더 읽어 보자. 

 

  나무도 바히돌도 업슨 뫼헤 매게 쪼친 가토리 안과
  대천바다 한 가온대 일천석 시른 대중강이 노도 일코 닷도 일코 돗대도 것고 뇽총도 끈코 키도 빠지고 바람부러 물결치고 안개 뒤셧거 자자진 날의 갈 길은 천 리 만 리 남고 사면이 거머어둑 천지 적막 가치 노을 떠난대 수적 만난 도사공의 안과,
  엇그졔 님 여흰 안이야 엇다가 가을하리오.

(해석)  나무도 바윗돌도 없는 산에서 매에게 쫓기는 까투리의 마음과
      대천 바다 한가운데 일천 석 실은 배에 노도 잃고 닻도 잃고 용총줄도 끊어지고 돗대도 꺾이고 키도 빠지고 바람 불어 물결치고 안개 뒤섞여 잦아진 날에 갈 길은 천리 만리 남았는데 사면이 검어 어둑하고 천지 적막 사나운 파도 치는데 해적 만난 도사공의 마음과
      엊그제 임 여윈 내 마음이야 어디다 견주어 보리요.

'삼한(三恨)', 혹은 '삼안(三內)'이라고 널리 알려진 이 작품은,
'안'이라는 말로 마음을 나타내면서,
세 가지 절박하기 그지없는 마음은 어디다 비할 데도 없다고 하고 있어.

맨 마지막으로 엊그제 임을 여읜 자기 마음을 말하기 위해서
다른 두 가지를 가져와 놓고서,
비할 데가 없다는 것으로 해서 그 둘이 각기 독자적인 의미를 갖도록 개방해 버렸으니
비유를 사용하는 방법치고 이만큼 기발한 예를 다시 찾기 어렵다는 평을 듣고 있지. 

셋이 모두 황당하고 아픈 마음이기도 하고,
그 중에 가장 아픈 마음은 '엊그제 임 여윈 내 마음'이기도 하단다.  

숨을 나무나 바윗돌이 없는 산에 매에게 쫓긴 까투리의 타는 속과,
험한 바다에서 큰 재물을 실었는데 도둑까지 만난 사공의 우두머리의 타는 속과,
엊그제 임 여읜 내 속을 어디다 비교하겠는가.
역시, 종장의 내 속이 가장 까맣게 탔다는 강조가 되겠지. 

전체적으로 곤란한 상황이 심해지는 걸로 봐서 <설상가상(雪上加霜)>이란 속담이 떠오르는구나.
그러면서도 어휘는 마치 판소리에서 해학적인 대목을 묘사하듯,
구수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도 놓치지 않고 있어 사설시조는 멋진 문학 작품이 된단다. 

 


요즘엔 이렇게 손글씨처럼 보이는 멋스런 글씨체가 유행이다.
이런 걸 캘리그래피라고 해.
내용도 멋지고, 글씨도 멋지지. 

두터비 파리를 물고 두험 우희 치다라 안자,
건넌산 바라보니 백송골이 떠 있거늘, 가슴이 금즉하여 풀덕 뛰어 내닫다가 두험 아래 잣바지거고.
모쳐라 날랜 낼싀만졍 에헐질 번 하괘라.

(해석) 두꺼비가 파리한 마리를 물고 두엄 위에 뛰어올라 앉아서,
      건너편 산을 바라보니 날랜 흰 송골매 한 마리가 떠 있으므로 가슴이 섬뜩하여지고 철렁 내려앉아 펄적 뛰어 내닫다가 두엄 아래로 나자빠졌구나.
      다행스럽게도 몸이 날랜 나였기에 망정이지 동작이 둔한 놈이었다면 다쳐서 몸에 멍이 들 뻔하였다.

이 시조는 마치 '이솝 우화'에라도 나오는 이야기 같지?
두꺼비가 파리를 물고 거름(두엄 : 주로 풀을 쌓고 분뇨를 덮어 썩게 만든 퇴비)에 올라갔대.
근데 저 멀리 매가 있는 거야.
놀라서 뛰어 내리다가 똥바가지인 두엄 아래 자빠지고 말았단다.
그치만 두꺼비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마침 날쌘 나니 망정이지, 다른 넘들이었다면 피멍들 뻔 했잖아." 이랬다는 이야기.  

우화처럼 이야기를 담은 것을 <우의적(寓意的)>인 시라고 말한단다.
수탈하는 중간 관리들을 강하게 풍자한 시지. 

두꺼비는 송골매는 두려워하는 넘이야.
높은 관리라면 임금을 무서워할 거고,
하급 관리라면 고급 관리를 무서워할 거고,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세상에 대한 풍자.

약자에게는 강한 체 뽐내고, 강자 앞에서는 비굴한 양반 계층을 풍자하는 멋진 시조란다.
두꺼비를 의인화하여 약육강식(弱肉强食)을 풍자한 사설 시조고,
백성을 못살게 굴던 양반들이
한족(漢族)이나 왜인(倭人), 북방 후진 민족 등 강대국의 침략에 직면하면 여지없이 굴복하고 마는 비굴한 태도를 비판한 시조이기도 해.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임진왜란때 임금의 도망,
병자호란때 치욕스런 굴욕,
그렇지만 백성에게는 수탈에만 욕심내는 탐관오리들...
모두 두꺼비같은 풍자의 대상이 되겠지.   

그리고 꼭 두꺼비만 풍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돌아가는 '더러운 세상'을 풍자하는 것이기도 하단다. 

김광규의 '묘비명'은 전에 한번 읽어본 일이 있는 시다.
한번 더 읽어 보자.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碑石)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꿋꿋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김광규, ‘묘비명’>

반어와 풍자로 가득한 시지.
돈과 권력을 움켜쥔 사람의 '훌륭한 비석'도 반어지.
시인은 도대체 어떤 무덤을 남길 것인지... 생각하게 하는 시. 
세상을 풍자한 시로 잘 등장하는 편이란다. 

세상이 삐뚤다고 매번 이야기하는 일도 쉽지 않다.
그렇지만 또 냉철한 눈을 유지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세상은 비굴하게 살지 않는 일도 어렵지만,
또한 남을 괴롭히며 살게 되기도 쉬운 노릇이니,
이런 문학 작품을 읽으며 수시로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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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는 창이란 이야기를 몇 번 했지?
조선의 왕조를 떠받치던 기반은 '사대부'였단다.
사대부는 문화예술을 중시하던 계층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시조를 지어 부르던 전통이었지. 

사대부와 더불어 연회자리에서 예술 창작과 감상에 참여했던 계층으로
기생들이 있었어.
기생들은 단독부임해야하는 공무원의 특성상,
관리들의 생활을 뒷받침해주던 사람들이었다고 보면 될 거야. 

그 중에 황진이라는 기생은 특별한 사람이지.
다양한 남성들과 남긴 이야기도 많지만,
서경덕이란 당대 최고의 학자의 인품에 감동하여 멋진 벗이 되었다고 하더구나. 

황진이의 시조가 6편 남아있는데, 한 수씩 읽어 보자.

청산(靑山)은 내 뜻이오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너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니져 우러예어 가는고

(해석) 늘 푸른 청산은 나의 마음이고 매양 이리저리 흐르는 물은 임의 정과도 같다.
      물이야 비록 흐르는 대로 흘러가더라도 청산이야 변할 수 있으랴.
      그러나 흐르는 물도 청산을 잊지 못해 울며울며 흘러가는 것 같구나.

내 마음은 청산처럼 변치 않고 그대로 있는데, 임의 사랑은 흐르는 물과 같이 변한대.
(나는 임을 그리워 잊지 못한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녹수(임)도 청산(나)를 못 잊어 울며 흘러 가는가, 하는
애절한 사랑노래지.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개성) 3절이라 일컬어지는 황진이.
아름다운 미모,
詩書音律(시서 음률)에 뛰어나고 묵화도 잘 치는,
그래서 문인, 碩儒(석유, 유학자들)와 詩酒(시주)로 교우하며 그들을 매혹시켰고,
지족선사를 파계시켰는가 하면,
도도하기 이를 데 없었던 왕족 벽계수를 '청산리 벽계수야' 라는 시조 한 수로 도취하게 했다는 일화는 유명해.
그러나 존경하는 서경덕에게만은 어쩔 수 없는 여인으로서의 연정을 버릴 수 없었던 것으로,
그의 시조에 나타난 임은 곧 서경덕을 칭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많단다.  

이 시조가 98년 수능에 등장했는데, 문제는 어렵지 않았단다.
한번 풀어봐.

 (나)의 시적 형상화 방법으로 볼 수 없는 것은?  

① 굳은 뜻과 변하는 정(情)을 대조시켰다.
② 울음을 물이 소리 내어 흐르는 것에 비유했다.
③ 청산(靑山)은 불변한다는 관습화된 상징을 이용했다.
④ 정(情)이 변하는 것을 물이 흘러가는 것으로 구상화했다.
⑤ 이별은 청산(靑山)의 탈속적(脫俗的)인 이미지로 나타냈다.

1)은 청산의 굳은 뜻, 유수의 변하는 정이 대조된 거 맞고,
2)는 '녹수도 청산을 못잊어 소리내어 우는가?'에서 드러나 있고,
3)은 청산의 불변 맞고,
4)는 임의 정이 유수처럼 변하는 거 맞고,
5)는 '청산'이 '속세를 벗어난 이미지'가 아니라, '불변'의 이미지니깐, 정답은, 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ㅣ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一到)창해(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수여간들 엇더리

(해석) 청산 속을 흐르는 푸른 시냇물아, 수월하게도 흘러간다고 자랑을 마라.
      한번 넓푸른 바다에 가기만 하면, 다시 청산으로 돌아오기 어려우니
      밝은 달이 산에 가득 비추고 있는 좋은 밤이니 잠시 쉬어 감이 어떠하냐?

이 시조의 특성은 <중의법>에 있어.
벽계수는 한자를 풀면, <푸른 시냇물>인데, <왕족 이은원의 비유>이기도 해.
명월의 한자 뜻은, <밝은 달>인데, <황진이의 기명(妓名)>이기도 하지. 

푸른 시냇물이 시원하게 콸콸 내려가는데, 빨리 흐른다고 잘난 체 말라고 그랬어.
한번 바다에 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인생사이니,
산에 달이 가득한 이 밤, 쉬어가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는 꼬임이지. 

이쁜 명월이가 왕족 벽계수를 놀리는 시조이기도 하지.
인생은 금세 지나가는데, 잘난 체 할 필요도 없지 않겠냐? 뭐, 이런 거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청산>
순간적으로 변하는 <벽계수>
인생은 헛되이 금세 지나가는 것이니 풍류를 즐기며 놀아 보세~
이런 멋진 시조지. 

애원이나 음탕함으로 꾀었다면 오래 남지 않았겠지만,
멋으로 남성을 유혹해 내고 있는 묘방을 보여 주고 있어서 오래도록 감동을 주는 시조지. 

이 작품의 배경으로 이런 이야기가 남아 있단다.

이조(李朝) 종실(宗室)에 벽계수(碧溪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황진이를 만나더라도 침혹(沈惑)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늘 큰 소리를 쳤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황진이가 사람을 시켜 달 밝은 가을 밤, 그를 개성 만월대(滿月臺)로 오게 하였다.
그리고 황진이는 곱게 단장한 후, 낭랑한 목소리로 함축성(含蓄性) 있는 표현을 빌어 이 시조를 읊어 그를 유혹하였다.
이 노래를 듣던 벽계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에 도취되어 그만 타고 온 나귀에서 떨어져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다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情)은 나도 몰라 하노라

(해석) 아! 내가 한 일이여! 이토록이나 그리울 줄을 몰랐더란 말이냐?
      가지말고 있으라 했더라면 떠났으랴만, 제 구태여
      괜시리 보내놓고 이에 와서 그리워하는 속내를 나 자신도 모르겠구나.

이 시조의 화자는 <회한>에 싸여 있단다.
후회하는 한스러움이 <회한>이지. 

'제 구태여'는 '임이 구태여', '내가 구태여'로 다 해석이 가능해서
어떻게 해석하든, 이별은 어쩔 수 없다는 일이며,
그 책임을 굳이 따져서 무엇하겠느냐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 

임이 그립지만 어쩔 수 없음을 확인하는 심리의 애틋함이 기막히게 포착되었다는 평을 얻는 시조야.
겉으론 강해보이지만, 속으론 외로움에 떠는 화자의 마음을 읽는 일은
슬픈 상황이지만 절절한 마음이 전해져서 읽는 이를 감동시킨단다.

자존심과 연정(戀情) 사이에서 한 여인이 겪는 오묘한 심리적 갈등이
고운 우리말의 절묘한 구사를 통해서 섬세하고 곡진하게 표현된 작품으로 시조 문학의 결정체를 잘 보여주지.

이 시는 한국 시의 전통인 <이별의 정한>에 닿아 있어서 다음과 같은 문제와 많이 어울린단다. 

♣ 이 시조의 정서에 접맥된 작품이 아닌 것은?  

 ① 가시리 가시리잇고 / 바리고 가시리잇고.
 ②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③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④ 구름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⑤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이별 노래가 아닌 것은 3번이지?

산은 녯 산이로대 믈은 녯 믈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거든 녯 믈이 이실쏘냐
인걸(人傑)도 믈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노매라

(해석)  산은 옛날의 산 그대로인데 물은 옛날의 물이 아니구나.
      종일토록 흐르니 옛날의 물이 그대로 있겠는가.
      사람도 물과 같아서 가고 아니 오는구나.

산과 물의 대조를 통해 인생의 허무함을 짚어 보고 있는 시조야.
산과 물의 대조적 의미가 잘 드러나 있지.  

여기서 '인걸'을 보편적 의미로 보면 이 작품의 성격은 철학적, 관조적이라 볼 수 있지만,
정을 둔 임(서경덕)이라고 보면 돌아오지 않는 임에 대한 슬픈 심사를 표현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단다.

황진이는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삼절(松都三絶)이라 부른 건 아까 이야기했고,
황진이는 한때 서경덕을 유혹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유일한 존경의 대상으로서 사제(師弟)의 의(誼)를 맺었지.
이 시조는 그의 스승이었던 서경덕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것이래. 
존경하는 사람도 물의 흐름과 같아서 죽게 마련이라
자연에 대한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있는, <인생무상>을 확인하는 시조라고 볼 수 있어. 

다음엔 가장 유명한 절창을 하나 들어 보자.

동지(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春風)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뷔구뷔 펴리라

(해석) 동짓달 긴나긴 밤의 한가운데를 베어 내어,
      봄바람처럼 따뜻한 이불 속에 서리서리 넣어 두었다가,
      정든 임이 오신 밤이면 굽이굽이 펼쳐 내리라.

이 시조의 독창성은 '불가능한 상황'을 상정한 것이지.
베어낼 수 없는 자연적 개념인
기나긴 동짓달 <밤>을 한허리를 베어 두었다가,
임이 오신 날 밤이면 구비구비 펼쳐 보겠대.
참신한 비유와 우리말을 잘 살려 쓴 묘미가 돋보이지.

홀로 지새우는 동짓달 기나긴 밤
정든 임과 함께 덮는 춘풍 이불 사이의 거리감,
이러한 거리에서 지은이의 그리움과 안타까움은 극대화되고 있는 거지. 

초장의 '한허리'의 '한'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 말인지 물을 때가 있어. 

'한'은 여러 가지 뜻이 있거든.
1. 한창이다
2. 가운데, 복판
3. 크다. 위대하다  
4. 같다

한허리는 '가운데, 복판, 중간'의 의미겠지?
'한겨울' 같은 건 한창이란 뜻이고,
'한글'은 위대하단 뜻이고,
'한동네', '한반'은 같다는 뜻이지.

팝송 중에 <Time In A Bottle - 병 속에 추억의 시간을 담아>란 노래가 있어. 

이 시조와 발상이 아주 비슷하단다.
시간을 세이브할 수 있다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아껴두고 싶대. 

엄마가 맨날 그러잖아.
민우 어릴 때로 시간을 돌려준다면, 정말 그 때로 가고 싶다고...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그런 거 아닐까 싶다. ^^

If I could save time in a bottle / The first thing that I'd like to do
만약 시간을 병에 담아 둘 수 있다면 /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Is to save every day / Till eternity passes away / Just to spend them with you
영원토록 당신과 함께 /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 하루하루를 아껴두는거에요

If I could make days last forever / If words could make wishes come true
만약 시간이 영원할 수 있다면 / 만약 말로서 소원을 이룰 수 있다면

I'd save every day / like a treasure and then / Again I would spend them with you
난 보물처럼 모든 날들을 아껴서 / 당신과 다시 함께 보내고 싶어요

But there never seems / to be enough time to do / the things you want to do / Once you find them
하지만 원하는 일을 하기에 / 충분한 시간이 있는건 / 결코 아니지요 / 일단 당신이 시간을 찾고나면

I've looked around enough to know / That you're the one / I want to go through time with
주위를 둘러보고 알게되었지요 / 당신이야 말로 나와 시간을 함께 / 시간을 보내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란걸

If I had a box just for wishes / And dreams that'd never come true
만약 나에게 결코 이루어질수 없는 / 소원과 꿈을 담을수 있는 상자가 있다면

The box would be empty / Except for the memory of / how They were answered by you
상자는 비워둘거에요.당신으로 의해 / 어떻게 소원과 꿈이 이루어 지게 / 되었는가에 대한 기억만 제외하고는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枕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닙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월침삼경 : 달도 잠든 깊은 밤

(해석) 내가 언제 신의가 없어서 임을 언제 한 번이라도 속였길래,
      달 기운 한밤중이 되도록 나를 찾아올 듯한 기척이 전혀 없네.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에 (임의 발자국소리 인줄 속게되는) 내 마음인들 어찌하리오.

이 노래에선 나는 임을 속인 일이 없는데,
한 밤중이래도 임이 올 기색이 전혀 없다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어.
가을 바람에 잎이 지는 소리를 듣고는 화자는 임이 오는 기척이라고 착각하기도 하지. 

스스로 한탄하면서 환각적인 감정까지 담긴 그리움의 결정판이라 볼 수 있단다.
이 짧은 시 안에서,
내가 언제 임을 속였기에... 하는 '원망'과,
온 뜻이 전혀 없네... 하는 '기다림'과,
추풍에 지는 닙 소리...의 '기대감'과,
어이하리오...의 '안타까움'이 함축되어 녹아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단다.

전설적인 인물 황진이를 추모하여 시조를 지은 이도 있었더.
임제라는 선비가 평안도사로 부임하던 길에
명기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읊은  시인데,
나중에 이 일이 양반의 체통을 떨어뜨렸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다고도 한단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쳤난이
잔(殘) 자바 권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임제>

(해석) 푸른 풀 우거진 골짜기에서 자고 있느냐, 누워 있느냐.
      그 곱고 아름답던 얼굴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혀 있단 말이냐.
      술잔을 잡아 권해 줄 사람이 이제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아름답고 시문에도 능하던 황진이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작자는
술병을 차고 무덤 앞에서 혼자 잔을 기울이며 인생의 허무를 되씹고 있지.
그 아름답고도 황홀한 얼굴의 모습도 간 데 없이
그 무상한 죽음 앞에 입을 다문 만인의 연인 황진이.
불러도 두드려도 대답이 없으니 그녀의 세계를 사랑했던 작자의 애상적 감정은 쏟아져 흘렀던 거겠지. 

양반 신분으로 이런 일을 하면 분명히 세상은 욕을 할 터인데도,
화자는 자신의 생각을 충실하게 표현한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쯤에서 황진이가 그토록 마음 졸이며 사모했던 도인 서경덕의 시조도 한 수 볼까?

마음이 어린 후(後)ㅣ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늬님 오리마난
지난 닙 부난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해석) 마음이 어리석으니 하는 일마다 모두 어리석다.
      겹겹이 구름 낀 산중이니 임이 올 리 없건마는
      떨어지는 잎과 부는 바람 소리에도 행여나 임인가 하고 생각한다.  

초장은 어쩌면 도학자로서의 서경덕이 자신을 돌아보는 느낌도 난다. 

스스로를 돌아보니 하는 일이 다 어리석다는 것처럼.
그러나, 황진이와 엮어 생각하면,
첩첩산중에 임이 오겠냐마는,
지나는 잎과 부는 바람 소리에 임이 오는 소리인가 한다는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어. 

오늘은 황진이의 시조 여섯 편과,
황진이의 팬클럽 회장 임제의 시조, 그리고 서경덕의 시조까지 묶어 봤단다. 

지난 번에 이야기한 것처럼,
시조는 읊는 맛이 졸깃졸깃 최고란다.
짧은 구절 속에 담긴 풍부한 의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몇 번이고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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