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창이란 이야기를 몇 번 했지?
조선의 왕조를 떠받치던 기반은 '사대부'였단다.
사대부는 문화예술을 중시하던 계층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시조를 지어 부르던 전통이었지. 

사대부와 더불어 연회자리에서 예술 창작과 감상에 참여했던 계층으로
기생들이 있었어.
기생들은 단독부임해야하는 공무원의 특성상,
관리들의 생활을 뒷받침해주던 사람들이었다고 보면 될 거야. 

그 중에 황진이라는 기생은 특별한 사람이지.
다양한 남성들과 남긴 이야기도 많지만,
서경덕이란 당대 최고의 학자의 인품에 감동하여 멋진 벗이 되었다고 하더구나. 

황진이의 시조가 6편 남아있는데, 한 수씩 읽어 보자.

청산(靑山)은 내 뜻이오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너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니져 우러예어 가는고

(해석) 늘 푸른 청산은 나의 마음이고 매양 이리저리 흐르는 물은 임의 정과도 같다.
      물이야 비록 흐르는 대로 흘러가더라도 청산이야 변할 수 있으랴.
      그러나 흐르는 물도 청산을 잊지 못해 울며울며 흘러가는 것 같구나.

내 마음은 청산처럼 변치 않고 그대로 있는데, 임의 사랑은 흐르는 물과 같이 변한대.
(나는 임을 그리워 잊지 못한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녹수(임)도 청산(나)를 못 잊어 울며 흘러 가는가, 하는
애절한 사랑노래지.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개성) 3절이라 일컬어지는 황진이.
아름다운 미모,
詩書音律(시서 음률)에 뛰어나고 묵화도 잘 치는,
그래서 문인, 碩儒(석유, 유학자들)와 詩酒(시주)로 교우하며 그들을 매혹시켰고,
지족선사를 파계시켰는가 하면,
도도하기 이를 데 없었던 왕족 벽계수를 '청산리 벽계수야' 라는 시조 한 수로 도취하게 했다는 일화는 유명해.
그러나 존경하는 서경덕에게만은 어쩔 수 없는 여인으로서의 연정을 버릴 수 없었던 것으로,
그의 시조에 나타난 임은 곧 서경덕을 칭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많단다.  

이 시조가 98년 수능에 등장했는데, 문제는 어렵지 않았단다.
한번 풀어봐.

 (나)의 시적 형상화 방법으로 볼 수 없는 것은?  

① 굳은 뜻과 변하는 정(情)을 대조시켰다.
② 울음을 물이 소리 내어 흐르는 것에 비유했다.
③ 청산(靑山)은 불변한다는 관습화된 상징을 이용했다.
④ 정(情)이 변하는 것을 물이 흘러가는 것으로 구상화했다.
⑤ 이별은 청산(靑山)의 탈속적(脫俗的)인 이미지로 나타냈다.

1)은 청산의 굳은 뜻, 유수의 변하는 정이 대조된 거 맞고,
2)는 '녹수도 청산을 못잊어 소리내어 우는가?'에서 드러나 있고,
3)은 청산의 불변 맞고,
4)는 임의 정이 유수처럼 변하는 거 맞고,
5)는 '청산'이 '속세를 벗어난 이미지'가 아니라, '불변'의 이미지니깐, 정답은, 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ㅣ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一到)창해(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수여간들 엇더리

(해석) 청산 속을 흐르는 푸른 시냇물아, 수월하게도 흘러간다고 자랑을 마라.
      한번 넓푸른 바다에 가기만 하면, 다시 청산으로 돌아오기 어려우니
      밝은 달이 산에 가득 비추고 있는 좋은 밤이니 잠시 쉬어 감이 어떠하냐?

이 시조의 특성은 <중의법>에 있어.
벽계수는 한자를 풀면, <푸른 시냇물>인데, <왕족 이은원의 비유>이기도 해.
명월의 한자 뜻은, <밝은 달>인데, <황진이의 기명(妓名)>이기도 하지. 

푸른 시냇물이 시원하게 콸콸 내려가는데, 빨리 흐른다고 잘난 체 말라고 그랬어.
한번 바다에 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인생사이니,
산에 달이 가득한 이 밤, 쉬어가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는 꼬임이지. 

이쁜 명월이가 왕족 벽계수를 놀리는 시조이기도 하지.
인생은 금세 지나가는데, 잘난 체 할 필요도 없지 않겠냐? 뭐, 이런 거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청산>
순간적으로 변하는 <벽계수>
인생은 헛되이 금세 지나가는 것이니 풍류를 즐기며 놀아 보세~
이런 멋진 시조지. 

애원이나 음탕함으로 꾀었다면 오래 남지 않았겠지만,
멋으로 남성을 유혹해 내고 있는 묘방을 보여 주고 있어서 오래도록 감동을 주는 시조지. 

이 작품의 배경으로 이런 이야기가 남아 있단다.

이조(李朝) 종실(宗室)에 벽계수(碧溪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황진이를 만나더라도 침혹(沈惑)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늘 큰 소리를 쳤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황진이가 사람을 시켜 달 밝은 가을 밤, 그를 개성 만월대(滿月臺)로 오게 하였다.
그리고 황진이는 곱게 단장한 후, 낭랑한 목소리로 함축성(含蓄性) 있는 표현을 빌어 이 시조를 읊어 그를 유혹하였다.
이 노래를 듣던 벽계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에 도취되어 그만 타고 온 나귀에서 떨어져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다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情)은 나도 몰라 하노라

(해석) 아! 내가 한 일이여! 이토록이나 그리울 줄을 몰랐더란 말이냐?
      가지말고 있으라 했더라면 떠났으랴만, 제 구태여
      괜시리 보내놓고 이에 와서 그리워하는 속내를 나 자신도 모르겠구나.

이 시조의 화자는 <회한>에 싸여 있단다.
후회하는 한스러움이 <회한>이지. 

'제 구태여'는 '임이 구태여', '내가 구태여'로 다 해석이 가능해서
어떻게 해석하든, 이별은 어쩔 수 없다는 일이며,
그 책임을 굳이 따져서 무엇하겠느냐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 

임이 그립지만 어쩔 수 없음을 확인하는 심리의 애틋함이 기막히게 포착되었다는 평을 얻는 시조야.
겉으론 강해보이지만, 속으론 외로움에 떠는 화자의 마음을 읽는 일은
슬픈 상황이지만 절절한 마음이 전해져서 읽는 이를 감동시킨단다.

자존심과 연정(戀情) 사이에서 한 여인이 겪는 오묘한 심리적 갈등이
고운 우리말의 절묘한 구사를 통해서 섬세하고 곡진하게 표현된 작품으로 시조 문학의 결정체를 잘 보여주지.

이 시는 한국 시의 전통인 <이별의 정한>에 닿아 있어서 다음과 같은 문제와 많이 어울린단다. 

♣ 이 시조의 정서에 접맥된 작품이 아닌 것은?  

 ① 가시리 가시리잇고 / 바리고 가시리잇고.
 ②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③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④ 구름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⑤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이별 노래가 아닌 것은 3번이지?

산은 녯 산이로대 믈은 녯 믈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거든 녯 믈이 이실쏘냐
인걸(人傑)도 믈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노매라

(해석)  산은 옛날의 산 그대로인데 물은 옛날의 물이 아니구나.
      종일토록 흐르니 옛날의 물이 그대로 있겠는가.
      사람도 물과 같아서 가고 아니 오는구나.

산과 물의 대조를 통해 인생의 허무함을 짚어 보고 있는 시조야.
산과 물의 대조적 의미가 잘 드러나 있지.  

여기서 '인걸'을 보편적 의미로 보면 이 작품의 성격은 철학적, 관조적이라 볼 수 있지만,
정을 둔 임(서경덕)이라고 보면 돌아오지 않는 임에 대한 슬픈 심사를 표현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단다.

황진이는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삼절(松都三絶)이라 부른 건 아까 이야기했고,
황진이는 한때 서경덕을 유혹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유일한 존경의 대상으로서 사제(師弟)의 의(誼)를 맺었지.
이 시조는 그의 스승이었던 서경덕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것이래. 
존경하는 사람도 물의 흐름과 같아서 죽게 마련이라
자연에 대한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있는, <인생무상>을 확인하는 시조라고 볼 수 있어. 

다음엔 가장 유명한 절창을 하나 들어 보자.

동지(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春風)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뷔구뷔 펴리라

(해석) 동짓달 긴나긴 밤의 한가운데를 베어 내어,
      봄바람처럼 따뜻한 이불 속에 서리서리 넣어 두었다가,
      정든 임이 오신 밤이면 굽이굽이 펼쳐 내리라.

이 시조의 독창성은 '불가능한 상황'을 상정한 것이지.
베어낼 수 없는 자연적 개념인
기나긴 동짓달 <밤>을 한허리를 베어 두었다가,
임이 오신 날 밤이면 구비구비 펼쳐 보겠대.
참신한 비유와 우리말을 잘 살려 쓴 묘미가 돋보이지.

홀로 지새우는 동짓달 기나긴 밤
정든 임과 함께 덮는 춘풍 이불 사이의 거리감,
이러한 거리에서 지은이의 그리움과 안타까움은 극대화되고 있는 거지. 

초장의 '한허리'의 '한'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 말인지 물을 때가 있어. 

'한'은 여러 가지 뜻이 있거든.
1. 한창이다
2. 가운데, 복판
3. 크다. 위대하다  
4. 같다

한허리는 '가운데, 복판, 중간'의 의미겠지?
'한겨울' 같은 건 한창이란 뜻이고,
'한글'은 위대하단 뜻이고,
'한동네', '한반'은 같다는 뜻이지.

팝송 중에 <Time In A Bottle - 병 속에 추억의 시간을 담아>란 노래가 있어. 

이 시조와 발상이 아주 비슷하단다.
시간을 세이브할 수 있다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아껴두고 싶대. 

엄마가 맨날 그러잖아.
민우 어릴 때로 시간을 돌려준다면, 정말 그 때로 가고 싶다고...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그런 거 아닐까 싶다. ^^

If I could save time in a bottle / The first thing that I'd like to do
만약 시간을 병에 담아 둘 수 있다면 /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Is to save every day / Till eternity passes away / Just to spend them with you
영원토록 당신과 함께 /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 하루하루를 아껴두는거에요

If I could make days last forever / If words could make wishes come true
만약 시간이 영원할 수 있다면 / 만약 말로서 소원을 이룰 수 있다면

I'd save every day / like a treasure and then / Again I would spend them with you
난 보물처럼 모든 날들을 아껴서 / 당신과 다시 함께 보내고 싶어요

But there never seems / to be enough time to do / the things you want to do / Once you find them
하지만 원하는 일을 하기에 / 충분한 시간이 있는건 / 결코 아니지요 / 일단 당신이 시간을 찾고나면

I've looked around enough to know / That you're the one / I want to go through time with
주위를 둘러보고 알게되었지요 / 당신이야 말로 나와 시간을 함께 / 시간을 보내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란걸

If I had a box just for wishes / And dreams that'd never come true
만약 나에게 결코 이루어질수 없는 / 소원과 꿈을 담을수 있는 상자가 있다면

The box would be empty / Except for the memory of / how They were answered by you
상자는 비워둘거에요.당신으로 의해 / 어떻게 소원과 꿈이 이루어 지게 / 되었는가에 대한 기억만 제외하고는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枕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닙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월침삼경 : 달도 잠든 깊은 밤

(해석) 내가 언제 신의가 없어서 임을 언제 한 번이라도 속였길래,
      달 기운 한밤중이 되도록 나를 찾아올 듯한 기척이 전혀 없네.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에 (임의 발자국소리 인줄 속게되는) 내 마음인들 어찌하리오.

이 노래에선 나는 임을 속인 일이 없는데,
한 밤중이래도 임이 올 기색이 전혀 없다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어.
가을 바람에 잎이 지는 소리를 듣고는 화자는 임이 오는 기척이라고 착각하기도 하지. 

스스로 한탄하면서 환각적인 감정까지 담긴 그리움의 결정판이라 볼 수 있단다.
이 짧은 시 안에서,
내가 언제 임을 속였기에... 하는 '원망'과,
온 뜻이 전혀 없네... 하는 '기다림'과,
추풍에 지는 닙 소리...의 '기대감'과,
어이하리오...의 '안타까움'이 함축되어 녹아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단다.

전설적인 인물 황진이를 추모하여 시조를 지은 이도 있었더.
임제라는 선비가 평안도사로 부임하던 길에
명기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읊은  시인데,
나중에 이 일이 양반의 체통을 떨어뜨렸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다고도 한단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쳤난이
잔(殘) 자바 권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임제>

(해석) 푸른 풀 우거진 골짜기에서 자고 있느냐, 누워 있느냐.
      그 곱고 아름답던 얼굴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혀 있단 말이냐.
      술잔을 잡아 권해 줄 사람이 이제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아름답고 시문에도 능하던 황진이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작자는
술병을 차고 무덤 앞에서 혼자 잔을 기울이며 인생의 허무를 되씹고 있지.
그 아름답고도 황홀한 얼굴의 모습도 간 데 없이
그 무상한 죽음 앞에 입을 다문 만인의 연인 황진이.
불러도 두드려도 대답이 없으니 그녀의 세계를 사랑했던 작자의 애상적 감정은 쏟아져 흘렀던 거겠지. 

양반 신분으로 이런 일을 하면 분명히 세상은 욕을 할 터인데도,
화자는 자신의 생각을 충실하게 표현한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쯤에서 황진이가 그토록 마음 졸이며 사모했던 도인 서경덕의 시조도 한 수 볼까?

마음이 어린 후(後)ㅣ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늬님 오리마난
지난 닙 부난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해석) 마음이 어리석으니 하는 일마다 모두 어리석다.
      겹겹이 구름 낀 산중이니 임이 올 리 없건마는
      떨어지는 잎과 부는 바람 소리에도 행여나 임인가 하고 생각한다.  

초장은 어쩌면 도학자로서의 서경덕이 자신을 돌아보는 느낌도 난다. 

스스로를 돌아보니 하는 일이 다 어리석다는 것처럼.
그러나, 황진이와 엮어 생각하면,
첩첩산중에 임이 오겠냐마는,
지나는 잎과 부는 바람 소리에 임이 오는 소리인가 한다는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어. 

오늘은 황진이의 시조 여섯 편과,
황진이의 팬클럽 회장 임제의 시조, 그리고 서경덕의 시조까지 묶어 봤단다. 

지난 번에 이야기한 것처럼,
시조는 읊는 맛이 졸깃졸깃 최고란다.
짧은 구절 속에 담긴 풍부한 의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몇 번이고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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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윤선도의 '만흥'을 공부했지?
만흥이 '게으른 사람의 느긋한 흥취가 일어남을 적은 시'였다면,
오늘 읽을 '견회요'는 조금 심각한 시란다. 

遣懷謠는 '견회'의 노래지.
보낼 견, 품을 회,
그래서 <시름을 쫓는 노래>, <회포를 푸는 노래>, <마음을 달래는 노래> 정도로 보면 되겠어.
암튼,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인 모양이지? 

[가] 슬프나 즐거오나 옳다 하나 외다 하나
     내 몸의 해올 일만 닦고 닦을 뿐이언정
     그 밧긔 여남은 일이야 분별(分別)할 줄 이시랴.

(해석) 슬프나, 즐거우나 (남들이) 옳다고 하거나, 그르다고 하거나
         내가 할 일만 닦고 닦을 뿐이지
         그밖에 다른 일이야 근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1연은 자기가 할 일을 다 하면 된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단다.
남들이 옳다고 하든 외다(그르다)고 하든,
소신껏 신념에 충실한 삶을 살겠다는 내용이지.
충실한 삶을 산 사람은 그 밖의 결과는 자신이 '분별'할 것이 아니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저절로 자연스럽게 되리라고 믿는 거겠지.
옛날 사람들은 '옳다' '바르다'의 반대로 '외다'는 말을 썼어.
그래서 '왼손잡이'는 '틀린, 나쁜' 뜻으로 보고 고치려고 노력한 거지. 

자, 처음 연에서 자기 할 일만 충실히 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나왔는데,
뭐, 삶이 그래서 평안하게 되었다면 굳이 시를 쓸 필요는 없었겠지?
수필을 쓰면 되는 거지. 바른 생활 교과서처럼 말이야. 

그런데, 시의 언어는 뭔가 '푸념', '넋두리'할 것이 있을 때 쓰는 <독백>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앞으로 어떤 스트레스 상황에 닥칠지, 그걸 예상하고 읽어야 한단다.
계속 읽어 보자.

[나] 내 일 망년된 줄 내라 하여 모랄 손가
     이 마음 어리기도 님 위한 탓이로세
     아뫼 아무리 일러도 임이 헤여 보소서

(해석) 내 일이 잘못된 줄을 나라고 해서 모르겠는가
         이 마음이 어리석은 것도 모두 임금을 위하기 때문일세
         아무개가 아무리 헐뜯어도 임금께서 헤아려 주십시오.

여기 드디어 <임>이 나오는구나. <임금님>.
왕조 시대의 한계지. 모든 권력은 임금에게 있고, 임금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힘. 

윤선도는 봉림대군(뒤에 효종이 된)의 사부로 인정받는 학자였어.
효종이 임금이 되고, 효종의 모친의 죽음과 관련하여 3년간 상복을 입자고 주장했는데,
당시 권력층이었던 노론의 우두머리 송시열과 치열하게 싸웠지. 
송시열은 1년만 입자고 주장했거든.
이런 걸 예송논쟁이라 부른대. 

윤선도는 남인 출신이었는데, 노론의 송시열이 효종을 가짜 임금 취급한다며 격렬한 상소를 올리지.
너무 과격한 상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역공격을 당하고 만대.
송시열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가,
송시열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한 반대파가 윤선도를 공격하였고,
사형 주장까지 나왔으나 효종의 사부였던 덕에 유배를 가게 된단다. 

그래서 함경도 추성(秋城)으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임금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심이 드러나는 견회요를 짓게 되지.  
3연에선 추성 진호루가 그래서 등장하는 거란다. 

종장에서 <아뫼 아무리 일러도 임이 헤여 보소서>처럼 자신의 과실을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사설시조가 하나 있어.  

개야미 불개야미 잔등 부러진 불개야미
앞발에 정종나고 뒷발에 죵귀 난 불개야미, 광릉 샘재 너머 들어 가람의 허리를 가르 물어 추혀 들고 북해를 건너닷 말이 이셔이다.
님이 님아, 온 놈이 온 말을 하여도 님이 짐작하쇼서 

초장은 AABA 구조로 된 시구지.
개미 개미 잔등부러진 불개미.
중장이 한정없이 길어져 사설시조라고 한단다.
앞발, 뒷발에 종기난 개미가 잘 걷지도 못하겠지?
그런데 광릉의 샘재란 고개를 넘어 들어가 호랑이의 허리를 가로물고 추켜들어 북해를 건너갔단 말이 있습니다. 

헐~ 과장법도 좀 심하지?
걷지도 못하는 개미더러 산을 넘고 호랑일 물어 바다를 건넜대. ㅋ
임이여, 백 사람이 백가지 말을 하더라도, 임이 짐작하여 판단하소서.
이런 하소연이란다.

[다] 추성 진호루 밧긔 울어 예는 저 시내야
    무음 호리라 주야에 흐르는다
    님 향한 내 뜻을 조차 그칠 뉘를 모르나다

(해석) 추성의 진호루 밖에 울며 흐르는 저 시냇물아!
         무엇을 하려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르느냐?
         (너도) 임을 향한 내 마음처럼 그칠 줄을 모르는구나. 

귀양간 진호루 밖에 시냇물이 흐르는데 마치 우는 것 같대.
시냇물한테 뭐하려고 밤낮으로 흐르느냐고 물어.
그러면서 자신과 시냇물의 공통점을 찾아서 <감정이입>이 일어나지. 

임향한 내 마음이 그치지 않는 것처럼, 너도 그칠 줄을 모르는구나.
이렇게 임금을 향한 변함 없는 마음이 잘 드러난 시지.
마찬가지 감정 이입이 드러난 시로 왕방연의 시조가 있단다. 

단종을 천만리 영월 땅에  유배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강물을 보니
내 마음처럼 울며 가는구나... 이런 시조야.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시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왕방연>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진 시조를 한 편 보자. 

   방안에 혓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간데
   겉으로 눈물지고 속타는 줄 모르는고
  
뎌 촉불 날과 같아여 속타는 줄 모르도다. <이 개>

방안의 촛불이 누구와 이별했길래,
겉으로 눈물흐르고 속타는 줄 모르는가.
저 촛불은 나와 같아서 속타는 줄도 모른다. 

숙부(수양대군)가 조카(단종)를 죽인 사건, 계유정난.
승자가 패자를 죽이는 것이야 역사 속에 늘 일어나는 일이지만,
혈육간의 싸움은 속타는 것이기도 하지.

[라] 뫼흔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 많고 하고 하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느니

(해석) 산은 길기도 하고 물은 멀기도 하고
      부모님을 그리는 내 마음은 많기도 한데,
      어디서 짝 잃은 기러기는 슬피 울며 가는가.

이 연은 '길고길고', '멀고멀고', '많고많고', '하고하고', '울고울고'처럼 반복법이 특징적인 부분이지.
특히 <많고>와 <하고>는 의미가 같지만 다른 단어로 표현하여 간절함을 강조하고 있단다.
그만큼 많음을 완~전 울트라 강조하는 거지.
긴 산, 먼 강물이 장애물이 되어 부모님 곁으로 가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 화자.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이 많고도 많다.
하늘의 외기러기는 울며 날아 가는데, 제 마음을 이입하여 슬피 울고 간다고 했으니 감정 이입이지? 

[마] 어버이 그릴 줄을 처엄부터 알아마는
    님군 향한 뜻도 하날이 삼겨시니
    진실로 님군을 잊으면 긔 불효인가 여기노라.

(해석) 어버이가 그리울 줄을 처음부터 알았지마는,
      임금을 향한 마음은 하늘이 내신 것이니
      정말로 임금을 잊는다면 그것이 곧 불효가 아닌가 생각하노라.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건 본능이지만,
임금 향한 충성심도 하늘이 만든 것, 하늘의 이치란 것이지.
왕조 시대의 사고 방식은 이런 것이란다.
진실로 임금을 잊는다면, 그것 역시 불효란다. 

삼강오륜이란 말 들어봤지?
삼강의 '강'은 '벼리 강 綱'이란 글자를 쓴단다.
'벼리'는 <그물의 맨 위쪽 코를 꿰어 놓은 줄>로 이걸 당기면 그물 윗부분이 오므려 지는 거야.
그래서 가장 중요한 <핵심 포인트>를 '벼리'라고 하지. 

3강은 인간이 지켜야할 유교의 질서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야.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
쉽게 말해, 임금은 신하의 벼리가 되고, 아비는 자식의 벼리가 되고,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된다. 

봉건 질서로 따지면,
임금은 백성을 돌봐줄테니 신하 이하 백성들은 임금에 절대 복종하고, 
아비는 가정을 돌볼테니 자식들은 아비에 절대 복종하고,
남편은 가족을 돌볼테니 아내는 지아비에 절대 복종하라! 이런 거지. 

여기 임금과 아버지는 있는데, 선생님은 없잖아.
그래서 '군사부일체'란 말이 생겼단다.
'임금 군 君'과 '아비 부 父'는 '스승 사 師'와 한몸이란 거지.

어제 만흥에서도 나왔지만,
어떤 시에서든 <충신 연군지사>가 빠져선 안되지. 

그런 것이 조선 초기의 성리학적 질서였어. 
그렇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왕권이 흔들린단다.
선조가 궁궐을 버리고 달아나자, 도성의 난민들이 궁궐에 불을 질러버리지. 

윤선도 역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주도로 가려 했어.
그러던 중 해남 땅끝마을 옆의 <보길도>의 경치에 반해 버리지.
그는 보길도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어.
거기 정자도 세우고 산과 바다를 즐기며 시와 벗이 되어 살았지. 

윤선도의 견회요는 총 5수의 연시조야.
소신껏 행동하는 강직한 삶의 자세가 드러나있어.
그래서 귀양을 가지만,
귀양가서도 충성심과 효성은 변치 않는다는 내용이야.
자신의 결백은 임이 알아줄 것이라 믿으면서... 

윤선도의 '해남 윤씨'는 대단한 가문이었단다.
그의 증손자 윤두서는 유명한 화가지.
그의 자화상은 섬세한 필치로 이름이 높다. 

그리고 그의 5대 외손자 정약용이야 말할 것도 없이 유명한 사람이고. 

 

윤선도가 유배당한 원인이 된 상소문의 일부만 보면 이렇대.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를 아뢰나이다.
신의 아버지는 저의 상소를 금하려 한즉 국가를 저버릴까 두렵고,
받아들이려 한즉 그 아들이 죽음으로 나가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 멍하니 앉았고 묵묵하게 말이 없었습니다.
신이 상소를 올린다는 말을 듣고는 신의 손을 잡고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슬피 목이 메었으니,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스럽고 자비로운 임금님께서는 비록 신을 무거운 법에 놓아 주시되
이 때문에 늙은 아버지에게 화(禍)가 미치게 하지 마시면
영원히 천하 후세에 충신 효자들의 귀감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염려에도 화자는 상소문을 올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가]에서 나는 옳은 일은 하고 그른 일은 안 한다는 성품이 꼿꼿하게 드러나지.

자신은 무거운 법을 감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나]에서 임금을 믿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어 

결국 화자는 귀양을 가지만 충성심은 변하지 않지.
[다]에서 임향한 내 뜻은 그칠 적이 없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어. 

자신을 걱정하던 아버지를 유배지에서도 그리워하는 아들의 간절한 마음이 [라]에 담겼다 보면 되겠지.

[마]에는 충과 효를 모두 중시하는 화자의 생각이 충과 효를 동일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고 말이야.

시험에서 이런 문제가 난 적이 있단다. 

이 시조의 독자와 화자의 대화로 어색한 것을 고르시오.

독자 : 삶의 좌우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화자 :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꼭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①

독자 :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무모한 일이 될 수도 있을 텐데요?

화자 : 저도 때로는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여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해야 할 도리는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②

독자 : 자신의 신념이 흔들린 적은 없었습니까?

화자 : 예, 항상 흐르는 물처럼 제 마음은 늘 같았지요. … ③

독자 : 그로 인해 어려움에도 많이 처했을 텐데,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화자 : 부모님 곁을 떠나 지낼 때였습니다. 부모님께서 저 때문에 많이 우셨습니다. … ④

독자 : 효심이 지극하신데, 부모님 생각을 해서 자신의 신념을 조금 굽힐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화자 : 아닙니다. 대의를 버리는 것이 오히려 불효라고 생각합니다. … ⑤

답은  ④번이었어.
부모님께서 많이 우셨습니다...는 좀 아니지.

살다보면 스트레스 상황은 올 수밖에 없어.
그 스트레스는 스스로 자초한 것일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닥친 것일 수도 있지.
스트레스는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장기간 받는 스트레스는 사람을 망가뜨리기도 한단다.
적절한 스트레스를 즐기는 여유가 필요하겠지.  

조선 시대의 시조는 '창'으로 부르던 것이었기도 하니까,
읽는 맛이 특별하단다.
스트레스 받을 때, 시조를 나즉히 읊조려 보는 맛도 쏠쏠할 거야.
한번 낮은 소리로 읽어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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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6-01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래하고 입으로 부르는 것이라 정말 낮은 소리로 읽으니 더욱 좋군요.

중간에 불개미 사설 시조 말이죠,
맘에 쏙 들어오네요. 독특하면서도 절절한데다 해학까지 느껴져서요.
그러게요, 불개미 허리가 얼마나 가느다란데.

글샘님, 즐거운 날 되셔요.

글샘 2011-06-01 10:38   좋아요 1 | URL
시조는 정말 노래예요.
소리내서 혼자 읊어 보면 정말 좋은데...
옛날엔 시조를 과하게 많이 가르쳤는데,
요즘엔 과하게 덜 가르치죠.
시험엔 많이 나는데 말입니다. ^^

마녀고양이님도 즐거운 하루를 만들어 가시길...

이쁜별 2011-06-29 0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해석이 물흐르듯이 시원시원하게 되네요! 덕분에 잘공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샘 2011-06-30 15:12   좋아요 1 | URL
공부 잘 하셨다니 제가 고맙네요. ㅎㅎ
 

벌써 올해도 5월이 다 가고 있다.
곧 유월이 오는데 날이 왜 이렇게 추운지 모르겠구나.
하복을 입어야 할 날이 다 됐는데, 감기 조심하렴.
아이들이 두통약 찾으러 교무실에 많이 오더라 

오늘부터는 조선 시대의 대표 장르인 시조를 좀 살펴 보자.
시조는 짧은 속에서 다양한 주제와 표현 방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시험에도 내기 좋은 분야이니만큼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전에 가사 작품으로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살펴 보았고,
시조로는 이황의 <도산 십이곡>을 읽은 적이 있지. 
오늘은 시조하면 생각나는 시조의 달인, 윤선도의 '만흥'이란 시를 읽어 보자.
'만흥(漫興)'이란 말은 '저절로 일어나는 흥취'란 뜻이란다.
'만'자가 '넘쳐흐를 만'이니 자연을 감상하는 넘쳐흐르는 흥겨운 기분이란 뜻으로 보면 되겠다. 
(게으를 만 慢자가 아닙니다. ^^)

소학 언해 같은 데서도 잘 드러나듯,
조선 양반들의 삶의 목적은 무엇보다 <입신 양명>이었단다. 
몸을 상하오지 아니함이 효도의 <비롯함>이요,
입신하고 양명함이 효도의 <마침>이라는 글이 소학에 들어 있지. 

출세하고 이름을 떨쳐 이로써 부모의 이름을 현저하게 함이 효도라고 가르치지만,
그제나 이제나 정치란 것은 권력을 밀고 당기는 일이라,
한번 성하면 한번 쇠하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임금의 사랑을 가득 받을 때도 있으면,
임금에게서 멀어져 모함을 당하는 때도 있는 법. 

임금에게서 가까이 있을 때는 충성을 다하면 되지만,
귀양이라도 갔을 때는 <충신 연주지사>를 부르며 임금에 대한 사랑을 읊어대야 하는 것이었지.
그렇다고 귀양지에서 맨날 서울로 목을 빼고 학수고대하며 임금의 총애를 기다릴 수만은 없는 법.
폼을 잡으려면,
<안빈낙도 : 비록 가난해도 즐기는 도>
<안분지족 : 분수에 만족할 줄 아는 자세>
<강호한정 : 자연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태도>
<자연친화 : 자연과 가까이 지내며 즐기는 모습>
<물아일체 : 자연과 하나가 되는 상태> 
이런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양반의 바람직한 태도라고 여겼단다. 

이런 측면에서 보길도로 귀양갔던 윤선도의 마음이 담긴 시들을 한번 살펴 보자꾸나. 
이 시는 작가가 보길도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서 해남의 금쇄동에 은거할 때 지은 총 6수의 연시조이다.
이 시 역시 자연에 묻혀 살면서 분수에 맞는 즐거움을 누리는 유유자적한 경지를 노래한 것이지.
우선 한 수 한 수 살펴보자꾸나.

[가]

산슈간 바회아래 띠집을 짓노라하니
그 몰론 남들은 웃는다 한다마는
어리고 햐암의 뜻에는 내 분인가 하노라 

[해석] 자연 속에서 바위 아래 띠집을 짓고자 하니 
          그 뜻을 모르는 남들은 비웃기도 한다마는 
          어리석고 시골뜨기인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바로 나의 분수인가 생각하노라

山水는 자연이지. 그 바위 아래 초가집도 아닌 띠집을 지었어.
초가지붕은 볏짚을 쓰는데, 띠지붕은 강가의 갈대같은 걸 쓰니 더 낮은 품질의 평민 주택이겠다.
양반이 시골 궁벽한 곳에 초가를 짓고 사니 남들은 비웃겠지마는
어리석은 촌놈인 내 뜻에는 내 분수에 맞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야.
한자로 나타내면 '안분지족'이 되겠지. 계속 보자. 

 

[나]

보리밥 풋나믈을 알마초 머근 後에
바횟긋 믈가의 슬카지 노니노라
그나믄 녀나믄일이야 부럴줄이 이시랴

[해석] 보리밥과 풋나물을 알맞게 먹은 후에 
          바위 끝 물가에 가서 실컷 노닌다. 
          그 밖의 다른 일은 부러울 줄이 있으랴.

이제 가난한 생활이 드러난단다. 안빈낙도지.
보리밥에 풋나물일망정 알맞게 먹고,
바위 끝 물가에 나앉아 실컷 노닌다.
그러면 '그 남은 여 남은 일'은 부러워할 것이 더이상 없다는 이야기지.
'그 남은 여 남은 일'은 '그 밖의 다른 일들'을 가리키는 말로 '출세' 같은 속세의 미련을 가리키는 말이란다.
그치만, 정말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조차 할 필요 없을 텐데...
쬐끔은 관심이 있어 보이지? 

바위 끝에 앉아서 무얼 할까?
옛날 선비들의 그림 중, '고사관수도'란 그림이 있단다.
'고사', 곧 뛰어난 선비가, '관수' 물을 바라보는 그림이지.
<노자>라는 책에 <상선약수 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지.
'가장 훌륭한 것은 물과 같다'는 말.

물은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굳이 애쓰지 않고,
낮은 곳에 편편하게 고여있기 좋아하지.
평등하게 있지만, 앞을 가로막는 넘이 있으면 과감하게 뛰어넘고,
그래도 심하게 가로막으면 둑을 확 무너뜨려 버린단다.
유유히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는 선비는 그 물의 성정을 배우려 했는지도 몰라. 

아래 그림은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란다.
          



[다]

잔들고 혼자안자 먼뫼흘 바라보니
그리던 님이오다 반가옴이 이리하랴
말삼도 우움도 아녀도 몯내 됴하하노라

[해석] 술잔을 채워들고 혼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니 
       그리워하던 임이 온다 한들 반가움이 이보다 더하랴.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지만, 산을 즐기는 것을 마냥 좋아하노라.  

혼자서 술잔 들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어.
자연 친화지.
근데, 그리워하던 님이 온다고 해도 이렇게 반가울까? 이랬지.
누가 더 좋은 거야?
그렇지. 자연이 더 좋은 거지.
근데, 여기서 <그리던 님>은 결코 <임금>이 아니란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 온대도 자연이 더 좋다... 이런 거지, 임금보다 낫다... 헐~
왕조 시대엔 결코 등장할 수 없는 표현이겠지?  

이 시조의 종장에 자연을 좋아하는 이유가 등장한단다.
<말씀도 웃음도 않>기 때문에 못내(어쩔 수 없이) 좋아한다는구나.
인간은 왜 <아부의 말>과 <아부의 표정>을 짓곤 하잖아.
그것은 곳 같은 편인 척 하던 사람들이 언젠가는 적이 되곤 하는 인간사를 비판하는 뜻도 담겼겠다.
자연은 친한 체 하지 않아도, 언제나 변치않고 그곳에 있으니 사랑할 만 하다는 것이지.
상대적으로 인간은 얼마나 얄팍하게 변하는 존재인가... 이런 반성도 들었고.  

 

[라]

누고셔 三公도곤 낫다하더니 萬乘(만승)이 이만하랴
이제로 헤어든 巢父許由(소부허유)ㅣ 냑돗더라
아마도 林泉閑興(임천한흥)을 비길곳이 업세라

[해석] 누가 말하길 전원 생활이 정승 노릇 하는 것보다 낫다 하더니 만승을 지닌 천자인들 이만하랴
         이제 헤아려 보니 소부와 허유가 약았더라. 
         아마도 자연 속에서 노니는 한가로움은 비할 곳이 없어라. 

누군가가 삼정승보다 낫다고 했어.
무엇을?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 하는 생활이지. 

간혹 <귀거래 歸去來>라는 말도 있는데,
벼슬을 사양하고 시골에 낙향하여 평안한 삶을 사는 태도를 뜻해.
그런 내용을 글로 쓴 것을 <귀거래사>라고 하지.
버드 나무를 다섯 그루 심었다는 오류(五柳) 선생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유명하단다. 

화자는 좀더 뻥쳐서 황제보다 안빈낙도가 좋대.
이제 생각해 보니 중국의 고사 속의 은사(隱士)들로 유명한 인물 '소부, 허유'가 약았던 인물들 같대.
아마도 자연을 즐기는 강호한정보다 나은 것은 세상에 없을 거라네. 

자연을 즐기는 마음이야 참으로 행복했겠지만,
왠지 씁쓸한 맛이 담긴 것 같기도 하구나.
버림받은 자가 스스로 위로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마]

내셩이 게으르더니 하날히 아라실샤
人間萬事(인간만사) 한 일도 아니맛뎌
다만당 다토리업슨 江山을 딕회라 하시도다

[해석] 내 본성이 본래 게으름을 하늘이 아셨던지 
        인간 세상 수많은 일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맡기지 않고 
        다만 서로 차지하려 다투지 않는 강산을 지켜라 하시었구나. 

여기 와서는 자신에게 어떻게 이런 복이 떨어졌나, 행복해하는 거지.
나는 게으른데, 하느님이 그걸 아시고, 세상의 아무 일도 맡기지 않으신 거야.
다만 다툴 사람이 없는 자연을 지키라 하셨으니, 화자는 그저 자연을 즐길 뿐이지.
캬, 안빈낙도, 안분지족, 자연친화의 감정이 확 밀려오지? 

그렇지만...
사대부는 100% 안분지족을 꿈꿀 수 없단다.
자연에 묻혀있을 때는 선비(士)지만,
입신 출세하여 임금을 보필하면 대부(大夫)가 되는 것이 '사대부'니 말이지.
언제든 <당신이 부르면 달려갈거야, 무조건 무조건이야>할 준비가 되어있단 말을 덧붙여야 안분지족이 완성된단다.

[바]

江山이 됴타한들 내分으로 누얻나냐
님군 恩惠 이제더옥 아노이다
아므리 갑고쟈 하야도 해올일이 업세라.

[해석] 자연을 즐기는 생활이 좋다 하나 보잘 것 없는 나의 분수로 그게 가능하겠느냐? 
          임금의 은혜를 이제야 더욱 알겠도다.  
          아무리 갚고자 하여도 갚을 길이 없구나.

이렇듯 자연이 아무리 좋다 한들, 자신의 분수로 어찌 얻겠느냐.
임금의 은혜는 이제 더욱 알겠구나.
아무리 갚으려 하여도 할 수 있는 일이 없구나. 

캬, 이 정도면,
안빈낙도, 자연친화에서 <충신연주지사>까지 쫙 잘도 달렸지?  

이 시의 배경인 금쇄동 일대는 해남 윤씨 고택(古宅)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 있어 아무도 그 위치를 몰랐대.
그러다가 최근에서야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윤선도가 여기 은거하기 시작한 때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돌아온 직후였어.
그는 가문의 일마저 아들에게 맡기고 산속에서 십여 년간 혼자 지냈다는구나.
살 집은 물론 정자와 정원까지 조성해 놓고 날마다 거닐며 놀았다고 해. 
자연 속에서 유배 체험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봐야겠지. 
‘다툴 이 없는 강산’ 같은 말은 정쟁이 벌어지는 현실과 대비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고. 

자연을 노래한 한시 중 '최치원'의 시가 있는데 한번 읽어 보렴.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늘 시비(是非)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렸다네. <최치원, 제가야산독서당>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고교유수진농산)

'가야산의 독서당을 노래함'이란 한시야.
이 시는 '만흥'과는 분위기가 다르지?
'만흥'이 자연과 인간의 교감이 중시된 노래,
곧 자연친화적인 노래라면,
최치원의 '제가야산독서당'은
인간 세상의 시비하는 소리가 싫어서,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려서 세상과 단절을 기하고 있는 노래지.
곧, 자연과 인간은 상반된 속성을 가지고 있어 보인단다. 

이렇게 사대부의 삶은,
비록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자연 속에 머물고 있지만,
좋은 시절만 만나면,
다시 임금님 곁으로 가서 훌륭한 정치를 펼치려는 야망을 담고 있는 것이라 봐야겠지. 

힘들 때라고 해서 한숨만 쉬기보다는,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즐기는 자세도 바람직한 태도의 하나일 것 같구나.
그런 말이 있잖아.
<과거에 후회하지도 말고, 미래를 불안해하지도 말고, 현재를 잡아라>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이런 말들은 '죽은 시인의 사회'란 영화에 나왔던 말들인데,
삶의 힘든 순간에 기억해둘 법한 이야기기도 한 것 같아 적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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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5-30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방금 퀴즈 하나, 수업 한타임 듣고
헉헉 대다가 이 글을 읽었답니다. 그런데....... 머리 속에서 쏴아하고 외치네요.
한글로 풀어진 글도 좋지만, 원문이 참 좋군요. 호젓하고 숨을 터주고.

그런데 옛분들의 글귀는 매우 훌륭한데도 여전히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신기해요.
(음, 사회 교육의 효과랄까... 이런,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 하는 제 모습이 또다시 보이네요.)

글샘 2011-05-31 08:26   좋아요 0 | URL
원문을 읽는 맛이 나죠.
평시조는 원래 창으로 부르던 노래였대요. 시조창이라 하죠.
조선 후기로 가면서 연시조가 등장하는데, 이런 것들은 문학적인 가치가 높아요.
노래로 부르던 거라 입으로 읽는 맛이 특별하거든요.

왕조시대의 글을 우리 기준으로 읽으면 안되겠죠? 철저해요. 그 사람들은. ㅋ
우리도 거기 입각해서 읽어야죠.

pjy 2011-05-3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들쑥날쑥한 날씨에 감기조짐이 보여서 찬물말고 따뜻한 녹차 먹고 있습니다^^;
게으를'만'이라니 "만흥" 땡깁니다ㅋ 맘에 쏙드는 제목입니다~
근데 시를 보니 한가롭고 좋고 세상에 이렇게 편할수가 없는데, 그걸 왜 임금님한테 감사해야하는지는 @ㅅ@; 내쳐줘서 덕분이라는 뜻인가요ㅋㅋ

글샘 2011-05-31 12:12   좋아요 0 | URL
그래요. 따뜻한 녹차로 드세요. ^^
게으를 만... 좋아하면 살쪄요. ㅋㅋ

왕조 시대의 패러다임이죠. 무조건 복종. ㅎㅎ
오늘 쓴 페이퍼 보시면,
임금도 임금이지만, 당파간의 대결에서 살아남으려면 연군, 연주...는 필수였던 것 같네요.
 

곧 6월이구나.
아직도 아침저녁으로 추운데,
금세 여름이 될 모양이다.
건강한 여름 맞기 바란다. 

오늘은 김지하의 시를 몇 편 읽어 볼까 해.
중학교때 김지하의 '새봄'으로 국어 교과서를 시작했던 너희라,
김지하 이름은 들어 봤을 거다. 

우선 아빠가 대학시절 참 좋아했던 노래, '새'를 한번 읽어 보자.

저 청청한 하늘
저 흰 구름 저 눈부신 산맥
왜 날 울리나
날으는 새여
묶인 이 가슴

밤새워 물어 뜯어도
닿지 않는 밑바닥 마지막 살의 그리움이여.
피만이 흐르네
더운 여름날의 썩은 피

땅을 기는 육신이 너를 우러러
낮이면 낮 그여 한번은
울 줄 아는 이 서러운 눈도 아예
시뻘건 몸뚱어리 몸부림 함께
함께 답새라.
아 끝없이 새하얀 사슬 소리여 새여
죽어 너 되는 날의 길고 아득함이여.

낮이 밝을수록 침침해가는
넋 속의 저 짧은
여위어가는 저 짧은 볕발을 스쳐 떠나가는 새
청청한 하늘 끝

푸르른 저 산맥 너머 떠나가는 새
왜 날 울리나
덧없는 가없는 저 구름
아아 묶인 이 가슴 <새>


다섯 연으로 된 시인데,
각 행이 아주 짧고,
전달하려는 내용도 복잡하지 않아. 

1연의 '새'는 자유롭지.
청청한(푸르고 푸른) 하늘, 흰 구름, 눈부신 산맥,
그 위를 날으는(시적 자유, '나는'이 맞지) 새.
그 새가 화자를 울려.
화자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야. 
<묶인 이 가슴>이기 때문에 새가 부럽단다.

밤새
자신을 물어 뜯는대도 닿지 않는 밑바닥 마지막 살의 그리움.
이건 좀 정신이 나간 사람의 행동 같지.
정신질환자들이 자해를 잘 한대.
스스로가 가치있게 여겨지지 않을 때,
스스로를 해칠 때,
살이 아프고, 피가 흐르는 걸 보면서, 자기가 살아 있음을,
스스로 존재함을 느끼게 된다는 슬픈 역설을 쓰는 것 같구나. 

피만 흐르는 감옥 안.
더운 여름날, 썩은 피만 흐르는 세상.
감옥에 갇힌 자신은 과연 '존재'감이 느껴지는 걸까? 

김지하는 사회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한 시 <오적>을 썼다고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 들어가서 온갖 고초를 겪었단다. 

3연에선 고문을 받고 처절하게 비참함을 겪는 신체의 슬픔을 적고 있다.
발랄하게 걷지 못하는 육신,
땅을 기는 육신이,
너, 곧 자유인 너 - 새를 우러러보면서
낮이면 낮마다 그예 한번은 눈이 뻘겋게 부르트도록 울어대는
그래서 몸부림치게 되는,
함께,
함께 답새라(뜻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새처럼 되고 싶다는 의미일 것 같아.). 

육신은 정신을 놓아 버렸지만,
끝없이 어디서 새하얀 사슬 소리가 귓전에 올리는데,
새여,
죽어서 너 되어,
자유를 얻는 날까지를 기다리는 이 나약한 육신의 멀고 먼 기다림이여...

그러나,
화자가 지금 있는 곳은,
낮이 밝아가면 밝아갈수록 침침하게 어두워가는
감옥.
밖의 세상이 밝을수록
이곳은 어둠이 짙어지는
감옥의 역설. 

낮이 밝아질수록
화자의 넋은 침침해지고,
저 짧은 볕발
저 짧은 햇살의 토막난 사각형,
철창 사이로 내려앉은 네모난 햇살 위로
여위어가는 창살의 네모를 스쳐 떠나가는 새. 

푸른 하늘 끝,
푸르른 산맥 너머
덧없이 흐르는
끝도 없이 흐르는 저 구름을 보면
화자는 묶인 이 가슴이 원통하고 한스러워
눈물이
원통한 분노의 눈물이 흐른다. 

이 시는 80년대 어두운 사회에서 불리웠던 슬픈 노래였단다.
이 시는 1연과 5연이 마주보는 수미상관의 형식을 띠고 있고,
파란 하늘과 침울한 감옥 안의 분위기가 대조적인 시구나. 

초기 김지하의 시는 이렇게 억압적 현실에 저항하는 자유에 대한 갈망의 노래가 많단다.
마찬가지 저항시 중 '녹두꽃'을 읽어 보자.

빈손 가득히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타네
불타네
깊은 밤 넋 속의 깊고
깊은 상처에 살아
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수록
흡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 소리 사라져버린 밤은 끝없고
끝없이 혀는 짤리어 굳고 굳고
굳은 벽 속의 마지막
통곡으로 살아
타네
불타네
녹두꽃 타네
별 푸른 시구문 아래 목 베어 횃불 아래
횃불이여 그슬러라
하늘을 온 세상을
번뜩이는 총검 아래 비웃음 아래
너희, 나를 육시토록
끝끝내 살아. <녹두꽃>

<녹두>는 콩보다 작다고 해서 키가 작았던 전봉준을 일컫던 말이지.
감옥에 갇히고,
사형 선고까지 받은 시인은,
감옥 안에서
왕조 국가, 양반과 상놈 국가의 질서에 반대하다 죽어간 녹두 장군 전봉준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면서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는 노래를 떠올렸을지도 몰라. 

앞서 이야기했든,
녹두 장군과 시인은 모두 감옥에서 <죽음>을 맞게 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그렇지만, 그들의 '의지'는 죽지 않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지.
그것을 이 시에서눈 <살아>라는 말로 계속 반복하게 돼. 

빈손 가득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이렇게 말이지.
화자는 감옥의 쇠창살 틈으로 비집고 내려 앉은 햇살을 보고 있어.
거기서 살아있는 자신을 느끼게 되지.
그 햇살은 따스했을까? 눈부시게 따가웠을까?
감옥 안에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빈 손>이었지만,
햇살을 가득 움켜쥔 화자.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이 붉게 비치는 저녁에도 화자는 죽지 않고 살아 있어. 

화자의 열정은 불타고 있지.
깊은 밤 고문당한 깊은 상처를 이기고,
강한 넋으로 살아 있어.  

모진 매질 아래
날이갈수록 두 눈을 흡뜨면서(치켜뜨면서)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사는 화자와 녹두 장군. 

감옥에 갇힌 화자에게
열쇠 소리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달콤한 유혹인데,
그 소리마저 사라져버린 밤.
혀는 잘리고 굳고 굳고 굳어.
굳은 벽속의 마지막 통곡으로 살아있는 화자의 애절한 목소리. 

목이 다 쉬도록 꺼이꺼이 울 것같은 이 목소리가
어쩜 이렇게도 절창이었는지.
그래서 1970~80년대 대학생들은 이런 슬픈 시를 읽고,
이런 시를 노래로 만든 것들을 부르면서 저항의 의지를 다지곤 했단다. 

시구문은 시신이 나가는 문이야.
별이 푸르게 빛나는 밤,
시구문 아래서
횃불 아래서
목 베어진 전봉준, 녹두 장군. 

그를 생각하며
횃불로 세상을 그슬러 버리고 싶은 마음 가득해.
하늘을 온 세상을 그슬러 버리고 싶은 분노.
번득이는 총검으로 민중을 비웃는 독재자들.
너희는 화자와 녹두 장군을 육시(살육하는 것)하더라도
나는,
우리는 끝끝내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런 비장감이 가득 묻어있는 시야.
김지하의 <민주주의여 만세>로 유명한 <타는 목마름으로>는 전에 읽어 본 적이 있으니 한번 더 소개만 할게.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


 

절박한 상황이 금세라도 느껴질 것 같은 시란다. 

황토의 민중을 노래하던 김지하 시인이 조금 색다른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1990년대란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세상이 나뉘어져있던 이전에는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착취의 대안으로,
사회주의 세상을 꿈꾸곤 했었지만,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는 걸 보면서,
시인은 마음에 큰 변화를 일으킨 것 같아.



그 이후의 시들을 아빠가 관심깊게 본 것은 아니지만,
1994년쯤 상을 받은 시 중에 이런 시가 있단다.
한번 읽어 보렴.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 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중심의 괴로움>

제목이 '중심의 괴로움'이야.
자신이 중심에 서 보니 괴롭더라... 뭐,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한다. 

봄에 꽃대를 바라보고 있는 화자.
가만히 꽃대를 바라보니
꽃대가 흔들리더래. 

흙 밑에서
꽃대를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이
꽃이 피고
꽃이 사방으로 퍼지고 흩어지려고 하니,
괴롭지만 흔들린대. 

이 시는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돌아본 시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자신은 무얼 위하여 이적지
단 하나의 <중심>을 위하여 싸워 왔던지...
허무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지. 

다들 흔들리는데,
다들 흩어지는데,
자신만 중심을 지키고 서있으려니 말이지. 

그래서 시골에 내려가서,
비우겠다는 생각을 해.
비움으로써 <꽃피움>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지. 

김지하가 이런 시를 쓰던 때가 한국 사회가 민주화 되던 시절이라면 이런 시를 쓰든 말든 상관이 없었겠지.
개인적인 문제일 수 있으니 말이지.
그렇지만,
이 시대는,
김영삼이 평생 민주화 운동하던 야당 생활을 접고,
광주 학살의 주역들이 창당한 바로 그 당으로 들어가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그런 시기란다.
대학생들은 거기 반대하는 집회를 하고 시위를 하다 경찰의 몽둥이에 맞아 죽던 그런 시기.
그 불안한 시기에 자기는 중심을 버리고,
흔들리겠다,
다 비우고,
꽃을 피우겠다. 
이런 이외수같이 도사같은 투의 시를 쓰고 있으니 이전의 시들과는 상당히 달라 보이지. 

내가 보기에 그가 쓴 시 중 가장 이상한 시가 바로 중딩 1년 국어책에 실렸던 그 시야.
기억나지? 

한번 읽어 보렴. 



벚꽃 지는 걸 보니
푸른 솔이 좋아,

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
벚꽃마저 좋아. <김지하, 새봄>

푸른 솔은 전통적으로 절개를 상징하는 자연물이었단다.
'매화, 난초, 국화, 대'처럼 추운 계절에도 변치 않는 사물들을 사군자니 어쩌니 하면서 칭송하고 했지. 

그렇지만 일본의 국화인 벚꽃은 화사해서 아름답긴 해도,
시에서 칭송하기엔 조금 주제가 애매한 자연물이지. 

너무 빨리 변하는 바람에,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지조 없는 정치가를 일컬어서 '철새'라거나 '사쿠라(벚꽃)'라고 풍자하거든. 

벚꽃(쉽게 변함) 지는 걸 보니 푸른 솔(불변함)이 좋았던 화자는,
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 벚꽃마저 좋아진대. 

물론, 그저 자연물로서야 벚꽃의 아름다움을 따라올 것도 찾기 드물지.
1994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로,
서로 경쟁하듯 도로변에 심는 나무가 벚꽃나무인 걸 보면,
벚꽃의 아름다움을 뭐라고 할 순 없을 거야.
그렇지만,
저항의 아이콘이었던 김지하,
그가 이런 시를 쓰는 일은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지.
차라리 그가 절필을 선언했다든가 했더라면 더 멋진 사람 대접을 받았을 것 같단다. 

세상은 늘 변하는 거지만,
우리는 어떻게 변해갈지,
자신의 모습을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단다. 

세상은 점점 경쟁 중심의 사회로 변해가고 있어.
경쟁에 적응하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의미있지만,
그렇게 변해가는 사회를 비판하고,
자기 것을 굳세게 지켜가는 사람도 멋진 사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단다. 

너의 앞에 놓인 인생길에,
어떤 중심이 놓일지,
어떤 변화가 놓일지,
너는 어떤 시간과 어떤 일에 흔들릴지, 모두 미지수지만,
넉넉한 마음으로 적응하길 바라고,
굳센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지켜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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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1-05-30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는 목마름으로...제 고등학교 시절에 저를 잡고 놔주지 않던 시였습니다. 나중에 학생회장을 하면서 학회에 김지하씨를 초청하려 갔었는데 무작정 찾아간지라 스케줄이 맞지 않아서 초청은 못하고 몇마디 대화만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그때가 아마 출소하신 후 생명에 대하여 이야기하시던 때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때 많이 실망했던 기억이. 내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인지 그것을 포기한 것 같아서...뭐 사상의 전환같은 거라고 오해를 했던 거죠...^^아직도 김지하하면 타는 목마름입니다. 그 시로 만들어진 민중가요도 정말 좋아합니다. 어두운 써클실에서 땡삼이 아저씨의 답답한 짓을 보면서 많이 불렀던 기억이.... 좋은 글 읽게 해주셔서 글샘님 항상 감사합니다.

글샘 2011-05-30 23:32   좋아요 0 | URL
김지하의 생명이라...
뭐, 생명이 소중한 거 누가 모릅니까?
그러면, 4대강 반대라도 제대로 하든가... 사쿠라도 나는 좋아... 이건 아니거든요. ㅎㅎ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 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인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 얼음 속에서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그 빛나던 눈도 비늘도 다 시들어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나희덕, 마른 물고기처럼)

나희덕이 '사랑', 그 영원히 풀지 못할 과제에 대해 곰곰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몰라요.
사랑이 뭔지... 
인간의 언어가 가진 속성을 학자들은 삼각형으로 표현하곤 하죠.
세상의 숱하게 많은 '현실'들을,
인간의 두뇌 속에선 '개념화', '범주화'하여,
특정한 '언어'로 활용하는 것. 

사람들이 '사랑해.'하고 쉽게 내뱉는 그 말 속에는,
사실 수많은 머릿속 카테고리에 담겨야 할 것들이 구별되지 않고 쓰인다는 것.
그래서 화자의 '사랑해'가 나온 카테고리가
청자가 받아들인 카테고리의 '사랑해'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칸이었을 때,
소통의 불발이 일어나기 십상이라는 것. 

인간의 언어란 원래 태생적으로 그런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는 것.  

 

1연. 

(어둠 속의 남녀.)
남 : 영이야. 잠시만... 나와 잠시만 함께 있어 줘.
여 : (방백) 철아, 너... 너, 날 사랑하는 거 맞아?
      정말 날 사랑해서 나와 잠시라도 같이 있고 싶은 거야? 
      아니면, ... 아니면, 젊은 네 몸의 본능이 절제되지 못하고 있는 거야? 
남 : 영이야, 잠시만... 잠시면 돼. 

(영이, 손을 뻗어 철이의 어깨를 짚는다.)
여 : 철아, 괜찮아?
남 : (고개를 끄덕이며, 푸~푸~ 거칠게 한숨을 내쉰다.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른다.)
여 : 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남 : (갑자기 영이를 꽉 껴안으며) 몰라. 모르겠어. 내가 너를 정말 사랑하는 건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남녀.
그들은 사실 그들 머릿속의 다양한 카테고리 속의 상황을 모두 하나의 도가니에 넣어,
<사랑>이라는 상황의 용광로에서 녹여버리죠. 

사랑하는 이들이 두려운 것은,
자신의 사랑이 진실한 사랑인지 모른다느
자신의 사랑이 오락가락하는 욕정과,
연애 감정과,
소유욕과,
결혼을 전제한 교제와,
영원히 당신의 편이 되려는 순수한 마음과,
나를 버려도 좋을 투명한 마음의,
그 다양한 칸들을 유영하는 자신의 마음이,
어느 칸에 있으면 올바른 사랑이고,
어느 칸에 있으면 부정한 사랑인지,
배운 적도 없고,
그래서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그래서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그렇게 힘겨운 것일 수밖에 없지요.
한 사람의 머릿속에 질러진 칸만 해도 숱하게 많은데,
그 중 어느 한 칸의 감정에서 길어올려진 '사랑'이란 단어가,
상대방의 머릿속에 질러진 칸에 든 개념과 충돌하는 순간,
에효 =3=3 그 부딪힘의 에너지란... 

어쩌면 '물질'과 '반물질'이 부딪히면 질량이 '0'이 되면서 에너지를 방출한다고 하듯,
나의 사랑과 너의 사랑이 부딪히면서 뜨거운 사랑의 열기만 느껴질 뿐,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느낄는지도 모를 일이랍니다. 

나는 어린 시절을 떠올립니다.
몹시 추운 날, 시린 손을 비비적대던 것처럼,
미봉책으로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의 물고기마냥
헐떡거리는 너에게
그저 너를 적셔주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어댈 뿐.
그것이 그저 나의 최선이므로,
자꾸만, 자꾸만 침을 뱉어댈 뿐. 

잠시, 네 비늘은 어둠 속에서 빛날 순 있었지요.
그러나 나는 정말 두려웠답니다.
당신이 그걸 알았을까요? 아마 몰랐겠지요.
내 행위가 당신에게 영원히 전달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지금은 어둔 밤.
그래서 헐떡대는 당신 위로 내가 뱉는 침 정도의 위로로도
당신의 비늘은 잠시 빛날 수 있지만,
잠시 후 해가 뜨고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한다면,
그 환한 세상에서는
아마,
아마 우리의 착각이 환하게 밝혀질 것입니다.
나는 그게 두려운 거예요. 

어둠이 사라지고,
밝은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나의 행위는 결코 사랑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면...
두려움에 잠긴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습니다.
당신의 시든 비늘 위로...

아, 이 소통하지 못함.
소통의 불가능함.
여기에 답답해하는 것은,
인간만이 스스로 가로지른 빗장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짐승들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사랑과,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랑의 고귀한 아름다움의 간격이 좁혀질 때,
그 칸지름에 익숙하다 생각했지만,
또 그것에 불과하다고 느껴질 때,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처럼
그 간극이 멀고 깊다고 느껴질 때,
인간은 사고의 불빛을 꺼버려야 할는지요. 

나희덕은 결국 사랑의 의미 나눔에 성공하고 있지 못해 보입니다. 

이전의 젖은 물고기들은 결국 헤어지고 맙니다.
장자의 학철지부(涸轍之鮒)는
가장 필요할 때 물 한 바가지가 필요한 것이지,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오히려 더 잔인한 것일는지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지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밥상 위의 마른 생선을 만납니다.
그 황어는 바로 너였지요. 

네가 물 한 바가지 필요하다고 했을 때,
내가 물 한 바가지 부어주지 못했던 네가,
바싹 마른 황어가 되어 내 앞에 놓였을 때,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었던 것이 없었음을,
나 역시 네 옆에서 침이나 뱉어줄 따름이었지,
너에게 한 바가지의 물을 길어다 부어줄 능력이 못되었음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너의 꺾인 지느러미,
너의 시들어버린 눈과 비늘이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 앞에서,
화자는 할 말이 없죠. 

그때, 너에게 어떻게 해주었어야 했던지를 아직도 모른고,
그리고, 너의 꺾인 지느러미와 시들어버린 눈과 비늘이 나를 원망할는지,
아니면 무연히 잊었는지도 나는 모르죠. 

장자의 가르침은 이 대목에서 유효합니다. 

서로 침을 뱉어주고 거품을 내어 서로 적셔주는 행위,
이것은 강이나 호수에 있을 때 서로를 잊어버리는 것만 못해요. 

진실한 사랑은 가슴 떨린 사랑도 아니고,
잊지 못해 가슴 태우는 사랑도 아닙니다.
정말 사랑이란 것은,
<서로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랑이에요.
가족 같은 사랑.
산소 같은 사랑. 

서로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랑을 <떨어져 살아 서로 잊>는 것이라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헤어질까 바들바들 떠는 사랑이 아니라,
물과 물고기처럼
헤어짐을 상상할 필요도 없이 안정적으로 사는 삶.
수어지교라고 했던가요.
물 만난 고기라 했던가요. 

살아갈수록 손바닥이 까슬해지고,
손가락에 습한 기운이 조금씩 줄어들어,
자주 핸드 로션을 바르게 됩니다. 

그렇지만, 마음의 물기마저 말라버린다면,
슬프겠지요. 

서로의 대뇌 속,
다른 카테고리 속에 담겨진 낱말밭에 연연하기보다는,
사랑이란 말을 잊고,
당신이 거기 존재함 자체를 감사하며 사는 하루가 되기를... 

마른 물고기처럼 변해버린 당신의 존재를 만났을 때,
미안해하거나 후회하는 일도 애시당초 만들지 않으며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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