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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 시절 - Art 020
마쓰오 바쇼 외 지음, 가츠시카 호쿠사이 외 그림, 김향 옮기고 엮음 / 다빈치 / 2006년 3월
평점 :
어제 비같지도 않은 비가 흩뿌리더니, 갑자기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음력으론 아직도 윤칠월인데...
이 책에선 하이쿠를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음을 붙여 둔 것이 돋보인다.
실제로 하이쿠는 정제된 <정형시>이기 때문에, 그 뜻보다는 형식미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글들이다.
그래서 의미를 음미하는 것도 좋지만, 원음으로 읊어 보는 맛이 일품인 문학이다.
일본 방송을 간혹 보면 아직도 하이쿠 짓기 놀이를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일본어를 고등학교 수준에서만이라도 배운 사람이라면, 짧은 실력이나마, 일본어로 읊조려 보는 하이쿠의 맛이 색다를 것이다.
그 옆에 보면, 하이쿠에 어울릴 만한 우키요에가 실려 있다.
미인도를 그려 두기도 하고, 도쿄의 풍경을 그려 두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화단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우키요에는 가장 일본적이어서 가장 세계적인 예술로 평가받기도 하는 그림이다.
일본놈들의 행태를 보면 참 부러울 때가 많다.
아들 녀석이 사회 시간에 일본에 대해 배우는데, 그들은 성실하고 부지런해서 경제적으로 성공했단다. 피~ 순 거짓말. 그들은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는 미국 뒤를 닦아 주면서 성공한 것이다. 만주 731 부대의 마루타 실적을 그대로 미국에 상납하고 얻은 평화와 부흥이다.
속으론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들에게 남은 전통, 가부끼나 노, 하이쿠와 우키요에 같은 것들을 보면 별것 아닌 것으로 생색을 잘도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럽다.
십년 이래, 우리도 지방자치제를 표방하면서 각 지자체에서 무슨무슨 '축제'를 시시껄렁하게 펼치고 있지만, 거기 모인 사람들은 떠돌이 유랑극단 내지는 불나방처럼 모여드는 음식 장사들 뿐이다. 토속 음식도 없고, 인정도 없고, 축제 속에 축제스러운 흥청댐은 어디에도 없다. 오로지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한마당만 펼쳐질 뿐. 연꽃 축제엔 연꽃이 피지 않지만 휴가철에 맞춰 열린다는 해괴한 논리 앞에서, 한국의 지방자치제의 현주소를 읽게 된다.
일본의 갖가지 마츠리를 보면 부럽다. 별것 아닌 것들이지만, 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한국인들은 세계 유일의 시속 100킬로 이상 달리는 버스 안에서, 그 좁은 공간을 활용하는 관광버스 춤을 개발한 민족이고,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식사를 빨리 마치는 민족이다.
느긋한 우리의 시간을 빼앗아간 식민지 시대와 가난했던 현대사의 굴곡을 비웃기나 하는 듯,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 보니 눈물나게 서러운 과거만 가득한 민족에게, 일본인들은 자랑이나 하는 듯, 전통을 앞세우며 뿌리를 내세운다.
하이쿠의 밝고 발랄하고 신선하고 찡한 언어들을 느끼면서 아름다운 마음으로 우키요에를 바라보면 될 일이지 청승맞게 남 탓이나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짠해지지만, 과연 우리에겐 우리 것이 있기나 한 건지... 생각하면 속이 쓰리고 맘이 아파서 해 보는 소리다.
죽이지 마라, 파리가 손으로 빌고 발로도 빈다.(잇사)
일어 음으론, 야레 우쓰나 하에가 테오 스리 아시오 스루.라고 읽는다.
직역하면, 야, 치지마. 파리가 손을 비비고 다리를 비비잖아... 뭐, 이런 느낌이다. 좀 다르다.
떠나는 내게 머무는 그대에게, 가을이 두 개.(시키)
일어론, 유쿠 와레니 도도마루 나레니 아키 후타스.
직역하면 가는 내게 머무는 그대에게, 가을 둘. 세상은 보는 이 숫자만큼 존재한다.
떨어진 꽃잎 가지로 돌아가네, 아, 나비였구나.(모리다케)
락카 에다니 가에루토 미레바 고쵸우카나.
직역하면, 낙화 가지로 돌아가서 보니, 나빈가...
봄비로구나. 소근대며 걸어가는 도롱이와 우산.(부손)
하루사메야 모노가타리 유쿠 미노토 카사.
봄비구나. 이야기하며 가는 도롱이와 우산. 아 그들의 도란도란 이야깃소리가 정겹기만 하다.
하이쿠를 접해보지 못한 이들이 처음 하이쿠를 대하기 좋은 책이다. 그림이 있어 더 좋다.
그리고, 우키요에만 보기에도 좋은 책이다.
일본어를 조금 안다면, 더없이 좋은 책이다. 중얼중얼 읽으며 사는 맛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