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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돌리노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4월
평점 :
장미의 이름은 좀 어려웠던 기억이 나는데, 이 책은 처음 샀을 때도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주제 사라마구의 '리스본 쟁탈전'과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을 읽다가 불현듯, 바우돌리노를 만나고 싶었다.
역시... 주제 사라마구의 포르투갈은 바우돌리노의 이탈리아에도 있었고, 역사를 위한 변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를 읽노라면... 기호와 사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역사란 것은 하나의 '기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바우돌리노를 읽으며 떨쳐버릴 수 없는 화두였던 것 같다.
[a]라는 소리를 아로 써도 되지만, a로 써도 되고, 일본어로 써도 마찬가지이듯이...
그리고 야얏, 하는 쉬운 소리는 아! 하든 오우치! 하든 별로 거리감이 없을 수도 있지만,
한국어의 '식사 하셨어요?'를 영어로 번역할 때 '너 밥 먹었니?'로 번역하면 안 되고,
일본어의 '어디 가세요?'를 '너 어디 가는 거니?'로 번역하면 안 되는 거와 같지 않을까?
굿 모닝이든, 굶었니든... 그냥 친근감의 '기호'에 불과할 따름인 것을...
바우돌리노가 '성인'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기호>를 정식화하기에 이르고, 그것이 두 권이나 되는 책으로 엮인 것이 이 픽션이다. 이 픽션은 어디까지나 소설이기에, 우리에게 '사실'이 무엇이었던지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들려준다.
이런 거 보면 리스본 쟁탈전이랑 비슷하다. 과거와 현재가 오락가락하는 것이...
그리고, 역사란 정말 랑케가 말한 것처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에는 관심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럽 문화의 원천이라고 일컬어지던 '그리스-로마' 문화를 무너뜨린 '이슬람'을 치는 것이 <십자군>의 성스러운 임무였다는 '기호'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기호를 외치는 자들이 '황제'이거나 '가장 힘있는 자'라는 것만이 중요할 뿐.
그러다 보니, 신 제국주의시대의 '엠퍼러'를 자처하는 한 나라의 이슬람 타격이 <십자군>하고 별 다를 것도 없단 생각이 든다.
법에서도 마찬가지다. 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를 정확하게 밝혀낼 수 없으므로, 재판에 임하는 증인의 '기억'을 판결의 준거로 삼는다. 그 기억이 오락가락하지만 않으면 그게 판결의 기준이 된다는 것도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포스'가 느껴지는 대목이고, 그러므로 그 판결이란 '기호'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평생 감방안에 가두어 두기도 하는 거다.
기호란 정말 무서운 것이다.
기호로 작용하는 모든 것들은 모든 '진실'에 우선한다.
기호로 인정받은 모든 것들은 모든 '사실'을 은폐하도록 억압한다.
박정희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서민적인 사람이고 육영수 여사는 인자한 영부인이라는 <기호>로 정식화 되자,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를 나온 친일파였고, 공산주의자였다가 동지를 팔고 목숨을 건진 배신자였으며, 씨바쓰 리갈인지 그 회사에서 나온 로열 샬룻인지를 처 마시며 그때 그 사람을 부른 가수와 지금 재혼 회사를 열심히 운영하는 아가씨를 옆에 끼고 '대연'을 열다가 총맞아 죽은, 그리고 육여사는 박통이 바람필 때 재떨이로 이마가 깨진, 그러다가 74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세광이 쏘았다고 '정식화된' 총알에 맞아서 불행하게 죽은 불쌍한 여인이란 사실들은 모두 폐기된다.
전두환도 인자한 할아버지일 수도 있다.
그 아들과 탤런트 며느리에게 수백 억을 주는 능력있는 가장일 수도 있고,
장똘뱅이 같은 수하들에게 인심 좋은 보스일 수도 있다.
그가 광주 시민들을 학살하라고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전두환이 공수부대원이었던 것도 아니다.
전두환은 80년대 혼란했던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십이일이라는 용감한 사건을 일으켰고,
이어 대통령이 되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성사시켰으며,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개최하는 쾌거를 일으켰다.
이런 '기호'들은 그가 권력의 노예가 되어 저지른 온갖 악행들을 폐기시켜버릴 수 있는 것이다.
어두운 기호들이 힘을 얻으면, 생각보다 그 힘은 오래 간다.
간첩이란 '기호'를 얻어 비명횡사한 유족들의 아픔을 수십 억의 보상으로 갚을 수 있겠냐마는,
기호를 믿는 이들은 그 보상 자체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광주를 민주화 운동, 국가 유공자 대우하는 것에 불신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가.
어제던가, 합천엔 극장이 없어서, 공원에서 '화려한 휴가'를 상영했단다.
그 공원이 하필이면 그 새끼의 호가 붙은 공원이었고, 전사모(전두환 사형을 꾀하는 모임일까?) 회원들은 마스크를 쓰고 좀 뻘쭘한 자세로 와서 시위를 하다 갔단다.
'기호'의 힘은 이렇게 '진실'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라는 말보다 '연구'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던 '역사를 위한 변명'이 이 책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역사'라고 하면, 마치 그 책에 적힌 일들은 모두 사실이고 진실이라고 착각하게 되고,
그 책에 적히지 않은 일들은 '야사'가 되어 믿거나 말거나가 되어 버리는 것이어서,
히스토리아가 그저 '연구' 수준이었으면 하는 그런 바람은, 움베르토 에코가 이 책에서 희대의 뻥쟁이 바우돌리노를 창조하여 떠벌이도록 만들게 한 힘이 아니었을까 한다.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는 말은,
인권을, 인간답게 살 권리를 준다는 말은,
힘있는 기관이 '기호'로 정해진 것들을 줄여나갈 때 비로소 내용을 갖게 될 것이다.
아무리 '민주화된 정부'라는 기호가 판을 쳐도 그 알맹이는 '전시 체제'와 다름없다면 인권과 어긋나듯이,
'자율'이란 '기호'로 이름붙은 '타율 학습'과 '두발 타율화'가 시빗거리가 되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모든 강제된 기호들은 '나'를 억압한다.
'정식화된 기호'를 거부하는 것은 '운동'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래서... 운동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바우돌리노의 거짓말을 읽으면서, 에코 선생의 짱구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짱구를 굴리다 보니, 최근에 읽던 책들이 날줄과 씨줄이 되어 얄궂은 생각들의 옷감만 짠다.
새벽 4시가 다 되어 가는데...
임의 침묵을 탈고 하던, 10,000해 선생님이 계시던 백담사의 새벽이 이렇게 후텁지근했을까?
시집의 탈고가 1925년이었으니, 백담 계곡 아무리 서늘해도 마음은 오죽 답답하셨으랴.
새벽 4시,
마찬가지 절집에서 칩거하던 1해 새끼도 두 해 여름 몹시 더웠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