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을 읽을 때는 잠시 정신이 들기도 하는데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또 알아차리게 된다.
조금 전 나의 희미한 깨달음은 '먼지 낀 눈에 보이는 허공꽃' 같은 것이라고.

지난 봄, 지리산의 한 암자 책꽂이에서 책을  훔쳐왔다.
남회근 선생의 알기 쉬운 <불교수행법 강의>.
'훔쳤다'고 표현했지만 밥을 먹고 나서 일행과 차를 마실 때
스님에게 말씀 드렸다.
눈독 들이고 있는 책이 몇 권 있는데 그 중 한 권 가져가도 되냐고.
스님은 알아서 하라고 반승낙(?)을 하셨고 나는 얼씨구나 하고 다음날 아침
그 두툼한 책을 가방 깊숙이 넣어 왔던 것.

몇 년 전 그 암자에 처음 갔을 때 사랑방 책꽂이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박종철 출판사에서 나온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 두툼한 선집 중에서 달랑 한 권(제1권)만 주문했다.
읽어본 적도 없고 보나마나 앞으로도 읽지 않을 책을 전집으로 주문해 꽂아두는 건
허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딱 한 권은 품에 지니고 싶었으니, 그건 무슨 심리일까?

얼마 전 <엄마가 뿔났다>를 보는데 1년 휴가를 얻어낸 김혜자가 혼자 사는 방
책꽂이가 눈에 띄었다.
몇 권 기우뚱 나이브한 제목의 책들 사이에 <막스 레닌주의와 언론>이 눈에 들어왔다.
김혜자의 방 책꽂이에 꽂힌 책도 작가 김수현이 직접 골랐을까?
아니면 김혜자가?
아니면 순전히 어쩌다가?

그런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지리산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어 훔쳐온 그 책을 어느 친구에게 선물받았다.
나는 뻔뻔하게도 '이럴 줄 알았으면 딴 책을 가져올걸!'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 주말 친하게 지내는 가족들과 어울려 2박 3일로 지리산에 다녀왔는데
남회근 선생의 그 책을 도로 가져가 스님 몰래 얌전히 책꽂이에 꽂아두고 왔다.

생각해 보니 나에게는 '도벽'이  좀 있는 것 같다.
어릴 때 지구본 저금통, 그리고 백수 시절 엄마 아버지의 주머니를 뒤진 것부터 시작해서......

어제 아침 모 방송 프로그램에는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 한복려 선생의
인터뷰 장면이 잠시 나왔는데, 그의 작업실 벽에는 누군가 붓으로 멋지게 쓴
자가
액자에 걸려 있었다.
형형한 눈빛이 나를 지켜보는 듯 살아 꿈틀거리는 필체였다.

누군가의 방 벽에 걸린 액자 속의 글이나 책꽂이에 꽂힌 책들에
시선을  빼앗기곤 한다.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라고만 편하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다.

얼마 전 신문기사인지 인터넷 포털 기사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런 글이 눈에 띄었다.

- 김장훈 득도.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봤더니 '득도'가 아니고 '독도'였다.
착시현상이 요즘 부쩍 심해져서 형이상학적으로  처리,
눈에 먼지가 낀 것이라 믿고 싶지만 그것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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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7 18: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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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7 2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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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15: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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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2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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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 2008-10-08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리산 칠불암(언젠지부터 칠불사로 승격?) 아래 茶 만드시는 내외분의 민박집...
장식이라고는 한구석 놓인 다듬잇돌과 천정에 그네마냥 내린 대(竹)옷걸이
1문, 2창, 1벽 구조의 나트막하여 다락같은 느낌의 단촐한 그 방...
친구야, 우리 뿔 나지 않아도 훌쩍 길 떠나 한 번 자묵자..
맘이, 생각만으로도 헛헛해지는 거이.....맘에도 먼지꽃이 피여....

로드무비 2008-10-08 21:08   좋아요 0 | URL
먹자판 여행에 떼를 지어 다니다 보니 근처 실상사니 보국사니 하는 절들도
한 번 들어가 보지 못했다. 말이 지리산 여행이지 산행은 잠깐이요,
참숯가마 찜질방이 필수인 코스라니!
그때가 언제지?
아우라지, 철길이 지나는 길이었던가?
그때처럼 저녁 무렵 낯선 길 위에서 만나도 좋겠다.^^


흰머리김 2008-10-12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친하게 지내는 가족이 누구인지 난 알고 있다. ㅎㅎ
쌀쌀한 날씨에 잘 지내고 계시지요.
지리산은 단풍이 들었나.......
마감을 끝내고 멋진 하루를 보내볼까 하는데 뭐~~
딱히 없네요. 이곳 상해는.
가고 싶다. 지리산..... 먹자판 여행은 뭐랄까
나이듬을 보이는 것 같은 슬픔이..
예전 힘차게 뛰고 놀던 시절을 생각하시어
다음에는 산행을 주로하는 여행을 다녀오시기를..
젊음이여 다시 내게오라~~~~

로드무비 2008-10-12 18:00   좋아요 0 | URL
마감이 월말인 줄 알았더니 무려 열흘 뒤라니...ㅎㅎ
먹자판여행도 좋아.
먹고 마시고 낄낄거리고.
그런 날도 소중해.(뭔들 안 소중하겄어.)

산행은 아무래도 세 시간 이상은 무리.
말벌대소동이라고 할까.
갑자기 나타나 따라다니는 말벌 때문에 예정된 코스를 다 가지 못했는데
난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
(이르지 마시오.)

그건 그렇고 아직 새파란 이가 젊음 타령이라니!떽!!

2008-10-16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리산에 다녀왔구나! 난 주말에 동은이 다솜학교에서 북한산에 갔었어. 엄청 용기를 내서 밧줄를 잡고 암벽도 타고... 300m 정도의 낮은 봉우리를 올랐지!
평소 운동을 안했는데도 빨빨거리고 다녀서인지 이번엔 휴우증도 없네.
등산 전문가인 다니엘쌤과 젬마쌤을 만나서 좋은 이야기도 듣고...



로드무비 2008-10-21 14:27   좋아요 0 | URL
엄마학교라는 게 생겼다는데 나도 거기 가볼까?
요즘 컨디션이 좋다니 다행이다.
참치회 먹으러 안 와?
전화할게.^^

2008-10-20 1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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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0 15: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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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0 15: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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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14: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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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1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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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12: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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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14: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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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01: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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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09: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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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09: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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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1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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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15: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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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3 1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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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5 1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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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한 아름다움
로버트 K. 존스톤 지음, 주종훈 옮김 / IVP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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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한 구절로 요약된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도다.'
(1장 8절)

인생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확실한 것은 단 하나,  언제 찾아들지 모르는 '병고'와  '죽음'이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며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11장 9~10절)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다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원하는 일을 행하라니,
이 무슨 소린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하는 전도서의 메시지와 밀접한  영화들을
엄선하여 소개하고 있는 로버트 존스톤의 <허무한 아름다움>을 읽은 건 달포 전.
그 당장 컴퓨터 앞으로 달려와 리뷰를 쓰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고장난 컴퓨터도 컴퓨터지만,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꿈틀댔기 때문이다.
욕심이 생기는 사람과의 관계는 청산하고, 욕심이 나는 일은 미리 포기하는,
'게으름과 용기 없음'이 문제인 나 같은 사람에겐 자기기만이라고 할까 합리화라고 할까,
전도서의 그 모든 전언이 꿀처럼 달콤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어제 오후 <우디 앨런, 뉴요커의 페이소스>라는 책을 읽는데
<허무한 아름다움>에 소개된 영화 '범죄와 비행'이 나왔다.
우디 앨런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멋진 기억, 가장 포근한 기억, 가장 정겨운 기억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초콜릿케이크와 우유를 든든히 먹고
부모님은 여전히 잠들어 계신 사이 학교에 가느라 집을 나서는 모습이에요.'
(뉴요커의 페이소스, 212쪽)

물론 그의 발걸음은 학교가 아니라 맨해튼의 한 극장을 향한다.

우디 앨런의 책을 읽다가  몇십 년 전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졸이던 울엄마의
들큰한 감자볶음 냄새를 맡으며 눈물이 핑 돌았다.

<허무한 아름다움>의 표지에는 '현대영화의 렌즈를 통해 본 전도서'라는 부제가 선명하다.
샘 멘데스 감독의 <아메리칸 뷰티>와,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
<펀치 드렁크 러브>는 마크 포스터 감독의 <몬스터 볼>과 함께 "모든 것이 헛되고 부질없다"는
전도서의 전언을 쪽지처럼 내 손에 쥐어주고 달아났다.


이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거머쥐려 애쓰는 부富와 성공을
감히 '잡동사니'라고 말하는 앨런 볼(<아메리칸 뷰티>의 시나리오 작가)은
어느 날  바람에 마구 휘날리는 비닐봉지를 보며 인생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평화와 경이감을 느끼고 영화에 이 장면을 삽입했다고 한다.
젊음과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듯한 빨간색 장미다발과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봉지의 적절한 대비라니!

1952년작 구로자와 아키라의 <이키루(生)>부터 시작해 2003년작 알렉산더 페인의
<어바웃 슈미트>까지, 전도서와 연관지어 그가 소개하는 열세 편의 영화들은
'인생의 헛됨에 대한 시적 고찰에서 시작해, 소중하지만 덧없는 인생의 아름다움'이
전도서의 지혜처럼 녹아 있는 영화들로 꼽기에 손색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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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8-10-02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탄력 받으셨네요, 하루에 두꼭지나 글을 올리셨습니다!
저도 아메리칸 뷰티의 비닐 봉다리에 평화와 경이감에 더해 허무감을 느꼈었는데-_-
더불어 우디 알렌의 포근함과 이키루의 스산함은 백배 공감하는 바입니다.
이책은 여러모로 마구 땡깁니다. 바로 지르고 땡스투 하겠습니다.^^
...그리고 <몬스터 볼>의 감독은 마크 포스터..오타로 'ㄴ'이 더 붙었네요.

로드무비 2008-10-03 01:26   좋아요 0 | URL
twoshot 님, 탄력은 받았는데 좀 낑낑거렸습니다.
책 읽자마자 <펀치 드렁크 러브>를 다시 챙겨봤거든요.
이상하게 땡겨서...
책이나 영화가 시기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다가오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마크 포스터, 바로 고칠게요.^^


2008-10-06 20: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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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7 14: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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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7 00: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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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7 14: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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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09: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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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2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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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 2008-10-08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ahms의 독일레퀴엠...
육신은 풀과 같아.......헛되고 헛되도다...전도서의 1장 8절을 독일어 가사로 쓴..

친구야...
느즈막허니 영화예매 함 해보려 들어가선
연거푸 대여섯번씩이나 매진이라는 문구에 밀리고 밀리다보니....
아~~나라는 인간은 영화 하나 제대로 꿰찰 수 없는, 녹녹찮음에....
에라이~ 낭패와 자학사이의 불같은 오기가 불끈 ~
....나는야 국도 간다....."라벤더의 연인들" 봤다.
거기엔 '변방의 삶' 저물어가는 황혼녘 관조의 힘과 정결함이 있더라
죠수아 벨의 바이올린 선율에 가슴을 슬어내리다...

2008-10-08 21: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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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 아침은 울타리콩이 쌀알보다 많은 밥을 푹 끓여
죽도 아니고 누룽지도 아닌 묘한 형태로 먹었다.
2년 전인가는 잘 말린 시래기에 갑자기 필이 꽂혔는데 올해는 콩이다.
봄부터 여름까지 주로 서리태를 사서 물도 끓여 마시고 밥에 듬뿍 넣어 먹기도 했는데
검정콩을 삶아 갈아 우유와 섞어 마시는 건 딱 한 번 해보고 말았다.
고소하고 맛은 괜찮았는데 믹서기를 꺼내는 그 한 번의 과정이 몹시 귀찮았기 때문이다.

엊그제 아파트 단지 내에 장이 서서 가봤더니 잡곡을 파는 코너에 
 '울타리콩'이라는 팻말을 꽂은 통이 눈에 띄었다.

"앗, 울타리콩이다!"

나는 오래 전 헤어진 친구를 우연히 만난 듯 반가워 달려들었다.
울타리콩은 한달 전인가 얼마 전 나의 수첩 귀퉁이에 꼭 읽고 싶은, 
한 권의 책제목과 함께 메모되었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자서전 <마법의 등>.
무슨 책인가를 읽다가 지금은 절판된 베리만 감독의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급히 적어 넣은 것 같은데, 울타리콩이 왜 그 옆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좋아하는 감독의 자서전 옆에 적혀 있다는 이유 때문에
울타리콩은 단순한 콩이 아닌, 뭔가 신비하고 다정하고 매력적인 존재로
내 안에서 격상되었다.

강낭콩과 비슷하게 생긴 울타리콩은 선명한 자주빛으로
눌러보니 손톱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야물었다.
콩이니까 다 비슷하겠지 생각하고 검정콩처럼 10분쯤 미리 삶아
불려놓은 쌀과 함께 솥에 안쳤다.
그런데 따글따글 익지 않은 콩이 입 안에서 따로 논다.
쌀 반 콩 반으로 밥을 지어 아이들 밥을 따로 펐더니 어른들이 먹는 밥은
쌀알보다 콩이 더 많다.
할 수 없이 콩만 따로 긁어 솥 한 귀퉁이에 모아놓았다.

어제 아침 물을 부어 누룽지를 끓인다고 끓였는데 뚜껑을 열자
어마어마하게 몸을 불린 울타리콩의 크기에 깜짝 놀랐다.
밥으로 치면 한 공기 반 남짓이었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단팥죽 맛이 살짝 나는 게 아닌가.
절반을 덜어 배불리 먹고, 절반은 밀폐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놨다가
오늘 아침 물을 조금 붓고 다시 끓였다.
조금도 남기지 않고 다 긁어먹고 났더니 아주 흡족했다.
(별것 아님, 라면의 유혹을 이겼다는 것.)

그나저나 왜 울타리콩이 <마법의 등>과 함께 적혔을까?
설겆이를 하는데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 조금 전 수첩을 뒤져보았다.
그 페이지의  몇 장 앞에는 가을에 한 번 가봐야지 하고 적어놓은 삼청동의 식당과
가게 이름들이 있었다.
튀김집 '바삭'과 함께, 유명한 죽집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
그 집은 특히 단팥죽으로 명성이 자자한데 '곱게 갈은 팥앙금에 울타리콩을 삶아 넣은
것이 특징이다'라는 메모가 덧붙여져 있었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부인 이름이 리브 '울'만이다.
베리만의 필모그래피에는 배우 리브 울만의 이름이 항상 따라다닌다.
그의 책 제목을 적어넣으며 나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고 
그 무렵 어떤 잡지에서 읽은 삼청동의 죽집과 '울타리콩'이 생각났던 것이다.
(이래서 요즘 우리 가족이 나를 사오정이라 부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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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2 15: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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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2 2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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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3 01: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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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3 1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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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6 13: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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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조조 4천 원에 영화를 보려고 아침부터 너무 서둘러서 그랬는지,
매표소 앞에서 잠시 영화 제목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떤 하루> 한 장이요." 했더니 담당 여직원은  "'멋진 하루' 말씀이시죠?" 하면서
표를  내민다.
<여자 정혜>의 이윤기 감독이 연출했으며 전도연 하정우가 헤어진 연인으로,
1년 전에 빌려간 돈을 당장 내놓으라며 여자가 남자를 하루종일 따라다닌다는
정도로만 이 영화를 알고 있었으니,  영화 제목을 바꿔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병운(하정우)이 죽치고 있는 스크린 경마장에 불쑥 찾아온 희수(전도연)가
처음으로 내뱉는 말이 "돈 갚아!"이다.
몰골을 보아하니 삼만오천 원도 없을 것 같은 병운에게 삼백오십만 원이 있을 리 없다.
영화 포스터의 '이렇게 만나고 싶지 않았다'라는 헤드카피가 절묘하다.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며 이별을 통보했는데 그 결혼도 깨지고 직장은 구하기 어렵고
쪽팔리는 일이지만 빌려주고 못 받은 돈 350만을 받으러 온 참이다.
채권자와 채무자가 되어 1년 만에 만나는 연인 관계처럼 어색한 게 또 있을까.

독 잔뜩 오른 얼굴로 나타나 오늘중으로 빌린 돈을 모두 받아내고 말겠다니
병운은 그녀를 대동하고 돈을 꾸러 나선다.
그날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강남에서 강북, 서울의 이 구석 저 구석,
돈을 구하러 떠도는 구차한 로드무비인 셈이다.

<여자, 정혜>에서 변두리 우편취급소에 근무하며 혼자 사는 미혼여성의 삶을
가타부타 아무 말 없이  흑백 다큐멘터리처럼 펼쳐 보였던 이윤기 감독은
정혜와는 또 다르게 제법 앙칼지고 야무진 희수를 새 영화에 등장시켰지만
두 여성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화장을 거의 안한 듯한 투명한 얼굴의 정혜(김지수 분)가 식물성이라면,
스모키 화장으로 제법 세상에 대해 적의를 나타내는 것 같지만
뾰족한 수가 없는 건 희수(전도연)도 마찬가지이다.
반죽이 좋달까 요령이 뛰어나달까 거의 처세술의 달인으로 보이는 병운이지만
그도 맹탕.





살아가는 일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다.
술판에도 못 끼고 늙다리 오토바이족 틈에 끼어앉아 기주봉이 권하는 담배를 피우는 희수.



그것은 몇 푼의 돈을 빌리기 위해 만나는 병운의 지인들도 다르지 않다.
사촌형을 만났더니 마침 옥상에서 오토바이 동호회원들의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허름한 옥상의 계단 밑에는 하릴없이 하늘바라기를 하고 있는
중년의 오토바이족이 있다.
가죽점퍼를 입고 선글래스를 멋지게 쓰고 폼을 잡고 앉아서도 막막한 그 표정들이라니......

그런데 신기한 건 연상의 여성 사업가, 어쩌다 알고 지내는 호스티스, 대학 시절 승마부 후배,
스키 강사로 잠시 일할 때 만난 제자,  이혼 뒤 싱글맘이 된 초등학교 여자 동창까지
갑자기 찾아와 손을 벌리는 병운을 귀찮아 하거나 따돌리는 기색이 없다는 것.
그들은 병운의 손에 백만 원부터 십만 원까지 다문 얼마라도 쥐어서 보내거나 하다못해
술이라도 한잔 먹여 보낸다.
어떻게 보면 돈을 빌려주는 입장의 그들보다 , 또 병운을 사정없이 족치는 희수보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병운이  유리한 위치를 점한 것처럼 보이는데.

옥신각신하던 그들이 밥 한끼 먹으러 찾아간 단골집 제주식당은 문을 닫았고
종로의 단성사는 며칠 전 부도를 맞았다.
그 낡은 식당에서 이모님이 해주는 생선찌개백반을 먹고 싶었는데
징거버거를 베물어야 하고, 나는 아직도 멀티플렉스 극장이 거북하기 짝이 없다.

지리멸렬한 남녀의 삶을 보여주는 이 영화, 희수와 병운 역에
<여자, 정혜>의 김지수와 황정민을 떠올려보았다.
사실성은 좀더 획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속은 더 메슥메슥했겠지만.

아무리 영화 속이라지만 돈을 좇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다니는 일은 피곤하고 피곤했다.
'이제 도합 이백십만 원 받았으니 남은 돈이 얼마...' 
어쩌자고 나는 병운의 남은 빚을 어두운 객석에서 함께 세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극장문을 나서는 사람들의 입가에는 대부분 왜 희미한 웃음이 맴돌았던 걸까?























계단 이 장면 괜찮지? 파일로는 사진을 분간할 수 없어 뒤늦게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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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8-09-30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 말 때문에 사진만 보고 죽 내려버렸어요. ^-^;;
모두들 이야기 하시니, 안 그래도 끌렸던 이 영화 , 보러가야겠어요.

로드무비 2008-09-30 16:51   좋아요 0 | URL
치니 님,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나면 왠지 보러 가기 싫어지지 않나요?ㅎㅎ
엄청나게 끌리진 않았는데 보러 갔고, 꽤 재밌었습니다.
'누들'이나 '캐러멜'보다 좋았습니다요.^^


2008-09-30 17: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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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1 0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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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9-3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이 영화 보고 왔어요. 모두 다 좋았는데 러닝타임이 좀 길었던 것 같아요. 10분만 잘랐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했어요^^;;;;

로드무비 2008-10-01 00:50   좋아요 0 | URL
마노아 님, 전 길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허리가 좀 아프더구만요.^^
 

'굶을 때 양식을 주니 비굴해진다.
자립해야 된다고 돈 빌려다 주니 자취 없이 사라진다.
개인으로 실패하였다고 조직을 만드니 그 조직체는 단체로 타락한다.
병 고쳐 힘 얻으니 마누라 때리는 데 그 힘을 쓴다.
인격을 존중하여 재정을 맡겼더니 돈도 사람도 잃었다.
민주적으로 선출하여 맡기니 더 단수 높게 횡령했다.'

 --김진홍 <새벽을 깨우리로다> (202쪽), 1982년, 홍성사 刊


1982년에 홍성사에서 나온 '빈민의 벗' 김진홍 목사의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당시 아직 어린(?) 나에게 꽤 큰 충격을 주었다.
창녀 주정뱅이 등 활빈교회에 모여든 빈민의 삶의 실상은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고
그들과 웃고울며 뒹구는 김진홍 목사는 돈키호테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의적 같았다. 목사라기보다......

몇 년 전, 남양주에 살 때는 구리에 소재한 그의 교회를 물어물어 찾아가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설교가 어찌나 수상하던지......
예배를 마치고 나오며 남편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외쳤다.
"저 사람 똥퍼목사 김진홍 맞아?"

그의 생각이 어떻게 변했든 현재 그의 행보(뉴라이트의 수장으로서)가 어떻든
이 책이 나에게 준 것들은 그대로 내 속에 간직될  것이다.

앞에 인용한 구절은 오래 전 내가 밑줄을 그어놓은 대목이다.
너무 신랄한 표현이다 싶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민을 사랑한다'는
통렬한 고백으로 알았는데,
지금 미루어 짐작해 보니 그의 변신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책 뒤에 '쓰고 나서'라고 하여 몇 줄 덧붙인 글이 있는데
지금 보니 횡설수설이다.

강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랑은 강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보다는 '강한 사람'에 인생의 방점을 찍었던가 보다.
삐딱한 시선으로 보니, 엄청난 감동을 주었던 구절이 어쩌면 이렇게도 다르게 읽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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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8-09-27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바로는, 예수님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셨죠.

로드무비 2008-09-27 13:1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치니 님.

2008-09-29 0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30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30 0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30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