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쉰 살이 넘어가면서 50년 묵은 내 우울을 떨쳐버렸는데,
그건 대단한 경험이 아니에요. 애인한테서 전화가 안 와서 짜증 내다
전화가 오는 것, 인생은 그런 건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전화라는 게 원래 없는 거라는 걸
안 거예요. 언젠가는 전화가 오는 게 아니라...
그걸 알고 나서 우울을 벗어버렸죠.

(<행복이 가득한 집> 2008,12월, 가수 김창완 인터뷰)


비디오대여점에서 아이가 만화를 고르는 동안 잡지를 펼쳤는데
김창완의 인터뷰 기사가 딱 눈에 띄었다.
대강 읽어내려 가는데 김창완의 저 말이 시선을 붙잡고 안 놓아주었다.
애인에게서 오다말다하는 전화 정도로 인생을 비유하는 솜씨라니!

맛있는 음식이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찾아다니며 먹었는데
이제는 밥과 김치만 있어도 맛있고 만족한다는 그다.

얼마 전 집 근처 극장에서 영화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를 봤다.
맛있는 케이크라면 환장하는 유괴범 '흰수염' 역을 맡았는데
그 모습이 정말 섬뜩하고 기괴했다.
마성의 게이나, 야성의 소년 꽃미남이나, 심지어 가게 진열장 속의
화려한 케이크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아 하품을 참고 있었는데
극 중 김창완은 유괴범이라기보다 '늙은 은둔형 외톨이'의 모습으로
단번에 내 시선을 빼앗았다.
그는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또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무슨 역할을 맡건 기다렸다는 듯
필요한 마스크를 꺼내어 쓰는 그에게도 아쉬움이 남는 작품은 있다.
죽음의 형식을 다룬 영화 <굿'바이>와 비교해 볼 때
<행복한 장의사>(1999년)가 그렇다.

1990년대 중반에 나온 <집에 가는 길> 이후 그는 <이제야 보이네>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산문집을 냈다.
두 번째 산문집이 나온 무렵에 그는 북새통과의 인터뷰(2005년)에서
이런 말을 했다.(궁금해서 찾아봤다.)

북새통(박종호) : 책에서 ‘나는 실제로 자유로운 사람도 아니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치도 않는다’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입니까?

김창완 : 우리가 자유라고 하는 것은 현재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 있느냐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자유라는 것은
나에게 필요치 않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전 현재, 지금 이 순간에 있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자체가 자유롭지 않다면 거기서부터 벗어남으로써 얻어지는
도피적 자유로움도 알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야 보이네> 출간 후 북새통과의 인터뷰에서 자유에 대해
피력한 지 3년이 흘렀다.

그런데, 그는, 정말로, 뭐가, 보이긴 보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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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8-12-07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창완씨의 글을 여기저기서 읽어보고 항상 감탄해왔는데, 이렇게 버젓이 책이 두권이나 나왔는지는 몰랐네요. 으 게으름이 항상 문제.
덕분에 보관함에 넣고 기분이 헤벌쭉 좋아졌어요.
무슨 역할을 해도, 무슨 노래를 해도, 무슨 말을 해도,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니고 김창완이면서 그 자리에서 원하고 있는 딱 그만큼을 정확히 해내는 이 아저씨, 아무래도 천재 중 하나가 아닐까 늘 생각해요.

참, 행복이가득한집 아직도 발간 중이군요. 오래전 엄마가 몇년을 사모으던 유일한잡지였는데... 왠지 기특하네요.

로드무비 2008-12-08 11:52   좋아요 0 | URL
치니 님, 그냥 그런가보다 하다가도 잡지 등에 인터뷰하는 장면이나
텔레비전에 모습이 나오면 꼭 시선을 고정하게 되지요.
그만큼 사람을 끄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요즘 여성잡지들은 기사 내용도 내용이지만 광고 지면들이 더러워서
도저히 봐줄 수가 없던데 <행복이 가득한 집>은 조금 나은 것 같아요.
고품격을 과시하는 게 좀 거시기하지만......

참, 저는 <집에 가는 길>을 오오래 전 아주 재밌게 읽었는데
<이제야 보이네>는 수첩에 메모해 놓고 까먹고 있었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08-12-08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창완씨는 제 마음의 가수예요.
정말 저도 책을 두권이나 내셨는지는 몰랐네요.
그 솔직함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어눌한 말투도 ^^

로드무비 2008-12-19 18:21   좋아요 0 | URL
어눌함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교활함(!)도 마음에 듭니다.^^

2008-12-19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19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3주 전, 영화를 보고 나서 들른 가까운 마트에서 월계수잎을 보았다.
싼 가격과 비닐봉지에 든 두세 주먹 정도의 분량이 좋아 보여
어디에 소용될지도 모르고 무조건 집어들었다.

며칠 후 또 조조영화를 보러 갔던 날
그 마트에 들러 수육용 돼지고기 한 덩이를 사왔다.
정육 코너 진열장의 이런 팻말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월계수잎과 커피와 된장을 넣고 30분 끓이다가...(맛있는 수육 삶기)

그날 저녁, 메모해온 레시피대로 모든 재료를 넣고 심혈을 기울였건만
내가 삶은 돼지 수육은 어딘가 어색했다. 흉내만 낸 것 같다고 할까.
비계는 물컹거렸고 고기는 질깃질깃했다.
냄새도 수상하고 한마디로 날탕이었다.

'돼지고기 수육을 직접 삶는 것'내게는 진정한 주부라고 할까
성숙한 어른의 로망 같은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삶은 돼지고기를 싫어했다.
그게 이유다.)

지지난 주 일요일, 김장을 도우러 형님댁에 갔다.
새벽까지 70포기의 배추를 절여놓은 형님은
큰 들통 가득 고춧가루와 젓갈과 마늘 등 온갖 것을 퍼붓고
쓱쓱 휘젓더니 우리가 버무리는 동안 상을 차리겠다며
잠시 자리를 뜨셨다.

정확하게 45분 후 우럭매운탕 냄비를 한가운데 두고
김이 술술 오르는 돼지고기 수육과 막 절인 겉절이와
맛있게 버무린 굴과 무채로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 식구들을 불렀다.
그 수육은 야들야들하고 쫄깃쫄깃하고 구수하고 깊은 맛이 났다.
그 며칠 전 내가 만든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너 근의 돼지고기가 순식간에 바닥났다.

형님은 나보다 열두 살 정도 많다.
생각해 보니 내가 처음 형님을 만났을 때 형님은 지금 내 나이였다.
그때도 형님은 김장 몇십 포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월계수 따위는 넣지 않고 돼지고기를 몇 근씩 삶았다.

어쩌다 사둔 월계수잎이 생각나서 돼지고기 한 덩이를 사고,
커피와 생강, 된장과 술, 좋다는 건 모두 넣고 아무리 끓여봐라.
그런 맛이 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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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8-12-04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계수잎은 생선 구울 때도 좋아요.

로드무비 2008-12-04 13:55   좋아요 0 | URL
생선의 몸통에 앞뒤로 잎을 붙여서 구우면 됩니까?^^

2008-12-04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4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08-12-04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군침이 도네요. 저흰 요즘 집에서 보내준 고기와(저희집이 정육점이어서)아내네 집에서 보낸 김장으로 행복한 밥상을 차리고 있어요. 평소에는 콘프레이크가 주식^^저희집은 시간이 지나도 어른스러워질 일이 없을 듯해요

로드무비 2008-12-04 17:38   좋아요 0 | URL
산책 님 저도 그 무렵에 연사흘 삶은 돼지고기를 먹었답니다.
수육도 버스처럼 한꺼번에 몰려오더군요.
그나저나 콘프레이크가 주식이라니...
흐뭇합니다.(우리 집이 좀 나은 것 같아서.)^^


瑚璉 2008-12-04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월계수 잎은 별로라능... (그냥 청주랑 우유로 처리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로드무비 2008-12-04 17:34   좋아요 0 | URL
월계수잎 하니까 뭔가 좀 있어 보이더라고요.=3=3
그런데 청주 대신 소주는 안 되나요?^^

Arch 2008-12-05 09:25   좋아요 0 | URL
소주도 되긴 하지만 청주가 향이 좋죠^^ 저도 어른이 되려나봐요. 오야붕^^

로드무비 2008-12-06 00:44   좋아요 0 | URL
시니에 님, 듣고 보니 그렇구만요.
뜨거운 수육에 청주향이 잘 어울립니다.
요리용 맛술이니만큼 큰 '됫병'으로 사볼까요? (흐뭇)

치니 2008-12-04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ㅋㅋ 저도 저거 수퍼에서 보고 아무 계획도 없음서 사둬야 될 것 같았는데.
로드무비님 글을 보니 자신 없어서 안 사게 될 것 같...ㅋㅋ

로드무비 2008-12-06 00:12   좋아요 0 | URL
치니 님, 님도 망설이셨군요.
그런데 찬장의 월계수잎을 보면 이상하게 흐뭇해요.
푸드 코디네이터라도 된 것 같은 기분.=3
천 원어치 사보시는 것도.^^

BRINY 2008-12-04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마토소스에 넣어 끓이고 삷은 스파게티면에 부으셔도 될 거 같아요~~

로드무비 2008-12-06 00:08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스파게티도 아직 해본 적이 없습니다.
별로 즐기질 않다보니.
매콤한 해물스파게티는 먹을만하던데
언제 한 번 브리니 님 말씀대로 해볼까요?^^

2008-12-05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6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8-12-05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재밌게 읽었어요. :)

로드무비 2008-12-06 00:00   좋아요 0 | URL
딸기 님, 고맙심더.^^

2008-12-19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19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중국의 도시 중경과 한국의 이리(익산으로 지명이 바뀜)에서
장률 감독이 만든 영화 두 편(<중경>, <이리>)이 연달아 개봉되었다.
폭발 직전의, 무언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듯한 느낌의 도시 중경과
30여 년 전 이미 대폭발을 경험한 도시 이리는 영화 속에서 놀랍게 닮아 있다.
만약 장률 감독이 서울의 가리봉동이나 노고산동에서 영화를 찍었대도
적막하고 황폐한 분위기는 비슷하지 않을까. 
전작 <망종>의 여주인공 순이나, <중경>의 쑤이, <이리>의 진서가
닮아 있는 것처럼.
그녀들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치통을 견디듯 하루하루 간신히
버텨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을 잠시 잊게 해줄 싸구려 진통제조차도 그녀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

쓰레기통을 뒤져 얻은 몇 푼의 돈으로 거리의 여자를 집으로 끌어들였다가
공안에게 발각, 경을 치게 된 쑤이의 아버지는 부끄러운 기색도 없다.
아버지를 훈방해준 공안은 욕망도 없이 쑤이를 안는다.
사랑은커녕 최소한의 교감도 없는 남녀의 잠자리는 삭막하고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다.

동네의 중국어학원과 경로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택시운전사인 오빠와 사는 진서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30여 년 전 이리역 폭발사고 때 엄마의 뱃속에 있었던 것이 원인.
사과 몇 알을 살 때도 계산을 못해 주인에게 지갑을 통째 맡기는 그녀다.
경로당의 꺼칠한 노인들 속에서 그녀의 말간 얼굴과 통통한 종아리는
눈부시다.
중국어어학원 원장은 몇푼 되지 않는 그녀의 수고비를 자꾸 미루고
주변의 놈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니, 그녀는 자주 하혈을 하며 쓰러진다.






장률 감독은 오래 전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 그들을 바라볼 뿐 내게 다른 권리는 없다.

호들갑과 과장된 탄식 속엔 되려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듯한 기미가
농후한 법인데, 장률 감독의 시선은 그럴 수 없이 드라이하다.
관객인 나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그저 바라볼 뿐.

"엄마, 아버지는 또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고 저는 자꾸만 더러워져 가요."

엄마의 묘소를 찾은 쑤이의 독백이다.
그런데 꼴도 보기 싫은 아버지의 밥숟가락 위에 거친 손길로
반찬을 올려주는 장면과 함께 쑤이의 북경어 수업시간이 좋았다.
강사의 선창에 이어 수강생들 목소리로 초여름 창 밖으로 흘러나오는
이백의 시와 주자청의 수필 <背影> 한 구절.
(중국의 시인들 중에서 이백을 특히 좋아한다는 장률 감독은
몇 년 전 <당시唐詩>라는 영화를 만든 바 있다.)

--그해 겨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실직했으니
설상가상의 날들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먼저 주자청의 산문집을 펼쳐보았다.

--그해 겨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아버지의 뒷모습> 82쪽, 박하정 譯, 태학사 刊)

이리에 사는 진서와 중경의 쑤이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리역 열차사고 당시 근처 극장에서 리사이틀을 하고 있다가
무명 코미디언인 사회자 이주일의 등에 업혀 구출되었다는 가수 하춘화.
바로 그녀의 노래를 즐겨 부르고 가끔 듣는다는 것이다.
사랑이 어쩌고 이별이 저쩌고 하는 아주 구성진 가락의 유행간데
이리역 폭발사고로 다리를 잃은 한국인 수강생 김씨의 선물이다.

하춘화의 노래 외에 두 영화에 또 나오는 게 있으니
동네 모퉁이에 어색하게 자라잡은 성인용품 가게.
살아갈 의욕은커녕 식욕조차 없어 모래알을 씹는 것 같은
영화 속 인물들은 그래도 그 성인용품 가게에 들러 콘돔도 사고
대형 고무인형도 산다.
시무룩한 낯짝으로.

"당신의 영화에는 왜 희망이 없느냐?"고 한 평론가가 물었다.
장률 감독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희망을 삶에서 찾아야지 왜 영화에서 찾냐고.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


영화 <중경>을 찍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중경의 쓰촨 지역에서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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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말 2008-11-30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정성일이다. 우선 댓글 먼저 쓰고 읽기 시작~ 고맙습니다!

로드무비 2008-11-30 13:21   좋아요 0 | URL
이 얼룩말 님이 그 얼룩말 님이시군요.^^

twoshot 2008-11-30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들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도 버거워서 장률의 영화는 피하게 되네요-.-;;
그보다는 어째 주자청의 산문이 떠 끌립니다.^^

로드무비 2008-11-30 18:20   좋아요 0 | URL
영화 속에서 만나는 주자청의 산문이 더 매력적이더군요.^^

치니 2008-11-3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 <망종> 하나도 참으로 버거웠던 기억인데, 정말 2개를 주루루 볼 수 있을지...저도 걱정이 앞서기는 하지만, 찜 해둡니다.

로드무비 2008-11-30 18:25   좋아요 0 | URL
영화 두 편을 개봉일에 맞춰 사흘인가 나흘에 걸쳐 보고 나니
아닌 게 아니라 기진맥진한 기분이었습니다.

2008-12-01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1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8-12-01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아버지의 뒷모습'이 옛날 국어 교과서에 나오던 그건가요? 제겐 꽤 감동적인 작품이었는데... 저는 장률의 영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다 로드무비님 덕분이지요... 언제고 볼 기회가 오겠지요..

로드무비 2008-12-01 15:37   좋아요 0 | URL
옛날 교과서에 나왔습니까?
그것이 아무리 좋은 작품이어도 교과서를 읽고 감동하긴
쉽지 않은 일인데......
장률 감독 영화가 제 입에 잘 맞습니다.
에로이카 님껜 어떠실지.

nada 2008-12-02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밥상.
밥상은 한 가족의 역사와 개인의 역사를 말해주는 거 같아요.
황량하고 푸석푸석해 보이는데, 그래도 또 따듯한 느낌도 있네요.
참내 애비란 인물들은...


로드무비님이 소개해주시는 장률 영화들이 좋아요. 영화 읽어주는 언니 같아요.^^

로드무비 2008-12-02 12:16   좋아요 0 | URL
쑤이와 아버지가 마주한 밥상과
진서와 태웅이 마주한 밥상이 같습니다.
아무 말 없이 화난 사람들처럼 밥만 먹는데
정말 맛없이 먹습니다.
제가 웬만하면 밥상위의 반찬들을 아주 유심히 관찰하거등요.
뭘 먹나 해서......
그런데 그들이 먹은 게 뭔지 전혀 기억이 안 납니다.
<누들>을 보고 와선 한동안 국수를 그렇게 먹었고
<굿'바이>를 보고 와선 당장 치킨을 시켜먹었던 제가 말이죠.
복어정자를 구할 수 없으니 치킨이라도 먹어야지요.^^

무해한모리군 2008-12-02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양배추님의 영화 읽어주는 언니라는 표현이 참 잘 어울리시네요.
왠일인지 점점 잔인하거나 충격이 클 것 같은 영화들을 잘 못보게 되요.
참 좋을거 같은데, 너무 마음이 아플거 같아서 또 볼 엄두가 안나네요..
소심쟁이 ㅠ.ㅠ

로드무비 2008-12-02 16:58   좋아요 0 | URL
잘 모르는 사람이 언니라고 하면 그렇게 부르지 말라며
정색했는데 요즘은 언니 소리 들으면 반갑더라고요.ㅎㅎ

'생선 한 마리 못 잡으면서 뭐라고 토를 다는 인간' 여깄습니다.^^
님이 말씀하시는 소심과 연결이 되어서요.

2008-12-19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19 1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침 일찍 깨어 최일남의 소설집 <아주 느린 시간>을 읽고 있는데
마루의 텔레비전에서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 흔한 게 사랑이라지만 나는 그런 사랑 원하지 않아
바라만 봐도 그냥 괜히 좋은 그런 사랑이 나는 좋아

읽던 책을 손에 들고 나는 홀린 듯이 밖으로 나왔다.
가수 이적을 닮은 신인가수가 김동환의 <묻어버린 아픔>을 열창하고 있었다.

'왕중왕'을 가리는 도전가요 프로그램.
이적을 닮은 신인가수는 2 A.M.의 멤버란다.
'왕중왕' 특집답게 노래열전을 벌이는 가수들의 면면이 화려했다.
1980년대 노래를 어떻게 알고 있냐고 사회자가 물었더니
해사한 얼굴의 그 청년 이렇게 대답한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곡이라고.

그들이 준결승에서 맞붙고 있는 상대는 이모뻘,
혹은 어머니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수라였는데
그녀는 올백으로 앞머리를 넘기고 궁둥이까지 닿는 긴 말총머리와
짝 달라붙는 검정색 로커의 복장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묻어버린 아픔>뿐만이 아니다.
도전자들이 부르는 한 곡 한 곡이 어찌나 가슴속을 파고드는지,
김양이 부르는 방실이의 <첫차>와 뮤지컬 가수 최정원이 부르는
<찬바람이 불면>도 좋았다.
김양과 짝을 이뤄 나온 송대관의 <낭만에 대하여>도 구수했다.
최정원의 끼와 실력은 단연 돋보였는데 정수라도 막상막하.
이효리의 노래 <Hey Mr. Big>을 멋지게 부르고 나자
최정원이 다가가 그녀에게 악수를 청하는데 보기좋았다.

-- 찬바람이 불며언 내가 떠난 줄 아아세요~

<찬바람이 불면>을 최정원이 부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질금질금 나왔다.
요 며칠 잠자리에서 읽고 있는 책이 최일남의 본격노년소설
<아주 느린 시간>이다.
소설 속 노인들의 심경과 상황들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쯤해서 갱년기를 받아들여야지,
콧물을 들이마시며 나는 그런 결심을 얼핏 한 것 같다.

심드렁한 열창
젊어서도 그렇고 지금도 나는 열창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열창하는 사람들을 보면 좋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오금이 저린다.
노래방에서도 아주 심드렁하게 부르나마나한 노래를 부르는데
이광조의 나들이, 이상은의 언젠가는, 그리고 김동환의 묻어버린 아픔이
좋은 반응(?)을 얻었던 노래들이다.
다행히 수상한 나의 열창을 그렇게도 좋아하던 친구들이 몇 있었다.

그나저나 흘러간 유행가는 힘이 세다.
재밌게 읽던 책을 덮게 하더니 사람을 마루로 불러낸다.
그리하여 아침밥도 미루고 이 시간에 이러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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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말 2008-11-30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와와...정말 재밌었겠어요. 보았음 좋았을텐데..하는 생각이 드네요

로드무비 2008-11-30 13:23   좋아요 0 | URL
트로트 가수 김양의 <노바디>도 멋졌답니다.^^

Arch 2008-11-30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이 프로 보는데 오래된 노래 나오면 저도 좋던걸요. 내가 언제, 저 노래를 들었는가 싶어지다가도 금세 입에 착 달라붙어서 응얼거리게 되더라구요. 옛날 가요들을 7080으로 묶는건 낯뜨겁지만 옛날 가요라 일컬어지는 노래들에서 가을을 느낄때가 많아져요. 가사를 보면 무심하게 툭툭 간단하게 지어냈을 것 같은데 어느 한 순간 아, 싶어지는. 겨울도 아닌데 괜히 몸서리가 쳐지는. 그런 노래 중의 하나가 제겐 '세월이 가면'이랍니다. 이 무슨 일요일 낮부터의 긴 댓글인지^^

로드무비 2008-11-30 18:23   좋아요 0 | URL
한경애의 '세월이 가면'인가 최호섭의 노랜가,
갑자기 헷갈리네요.
심지어는 하춘화의 노래도 좋더라고요.
이 무슨 심리인가 싶어 의아하기도 합니다.^^

Arch 2008-11-30 21:19   좋아요 0 | URL
최호섭이요. 전 이분의 이 노래만 알고 있는데도 참 좋더라구요. 음... 로드무비님 살짝 귀 좀... 나이를 먹는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아니면 취향이 바뀌어서던가. 전 예전 노래 들으면볼이 발그레해지고, 민망해서가 아니라 좋아서.

로드무비 2008-12-01 10:56   좋아요 0 | URL
시니에 님, 살짝 귀 좀.
저 하춘화 송대관 무지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꽤 괜찮더라고요.
맞아요. 나이 탓인 것 같아요.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 듣고 싶네요.
인터넷 뒤져봐야겠어요.
어느 분이 올려 놓으셨을라나?!

waits 2008-12-01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출근해서 이 페이퍼를 읽고는 저도 모르게 '찬바람이 불면'을 죙일 흥얼거렸답니다.
일하다 중간에 담배 피러 나갈 때마다 어찌나 찬바람이 불던지 얼어죽는 줄...ㅎㅎ
12월이예요, 향수와 함께 시작되는.. 훈훈한 페이퍼, 고맙습니다!

로드무비 2008-12-01 10:52   좋아요 0 | URL
나어릴때 님, 이번주 춥다네요.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저도 어제 티셔츠 바람에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나갔다가
얼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요.^^

2008-12-01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1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1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1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8-12-01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광조의 나들이... 그거 쉬운 노래 아닌데.. '발길 따라서 걷다가 바닷가 마을 지날 때... 이 땅에 흙냄새 나면 아무데라도 좋아라' 이제 가사도 잘 생각 안 나네요...

로드무비 2008-12-01 15:44   좋아요 0 | URL
착한 마음씨의 사람들과 정답게 얘기하리라.
산에는 꽃이 피어나고 물가에 붕어 있으니~~~

에로이카 님의 기억을 돕기 위해 떠오르는 대로 적어봤습니다.
고음불가의 제 목소리랑은 잘 맞습니다.ㅎㅎ

2008-12-19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19 1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주 빼빼로데이 다음날 저녁, 우리 집에선 작은 행사가 열렸다.
'푸른버섯 공화국' 빼빼로데이 이벤트.
주최자는 우리 집(즉 푸른버섯 나라) 대통령, 딸아이였다.

대선 후,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의 면상을 보자
자신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는지
딸아이는 멋대로 선거일을 정했다.

그리하여 바로 옆동에 사는 외삼촌 가족까지 모두 참여,
압도적인 지지 속에 대통령으로 뽑히고 취임했으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노래를 그렇게 불러쌓더니
'푸른버섯 나라'에서 거창하게 '푸른버섯 공화국'이 되었다.)


얼마 후 다가온 만우절에 우리 가족은 대통령령으로
거국적인 첫 행사를 치렀다.
가장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었는데
아쉽게도 나는 탈락, 남편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이번 빼빼로데이 행사도 대통령 마음대로였다.
몸치인 동주는 누나가 작사작곡율동까지 담당한 괴상한 노래를
며칠 동안의 강훈으로 모두 소화해야 했다.

행사 전 날, 아빠와 외삼촌 외숙모가 바쁜 일이 있어
참가할 수 없다고 통보하자
딸아이는 친한 친구 세 명을 제멋대로 초대했다.
가장 절친한 친구답게 민지는 두 살 아래의 남동생까지 데려와
참가자는 모두 여섯 명으로 늘어났다.

나는 우엉조림을 잘게 다져 넣은 유부초밥을 한 접시 만들고
분식집에서 사온 김밥 네 줄과 어묵찌개로 기본 식탁을 차린 후
메인 요리로 프라이드 한 마리와 양념치킨 반 마리를 주문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순간적인 기지로
빨간색 모직 담요를 롱스커트라며 뚱뚱한 허리에 두른 후
아이들 앞에서 상기된 얼굴로 동시 두 편을 낭송했다.

주하와 4-3반 소속 세 친구는 얼마 전 학예발표회 때 했던 깃발춤을
멋지게 재연했다.
딸아이의 깃발춤은 특히 얼마나 절도있고 씩씩한지
<어떤 나라>(북한의 소녀 둘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 영화)의
군무 속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남의 집은 아이가 부모님 앞에서 춤과 노래 등
재롱을 열심히 부린다는데,
우리 집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결혼식날에도 안 입은 뻘건 드레스를 입고......




이런 기록은 꼭 필요하다.
나중을 위해서......
('양질의 모정'의 증거자료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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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9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19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08-11-19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헤헤, 사진도 올려주시짐.

로드무비 2008-11-19 16:47   좋아요 0 | URL
카메라와 컴퓨러가 바뀌어서
사진 올리는 게 불가능합니다요.ㅎㅎ


瑚璉 2008-11-19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질의 모정'.
페이퍼 전체에 부모님의 애환이 뚝뚝 흐르는 듯 합니다 (-.-)b

로드무비 2008-11-19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瑚璉 님,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3=3

라주미힌 2008-11-19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다음엔 관객으로 참여하고 싶네용 ㅋㅋㅋㅋ

로드무비 2008-11-19 21:27   좋아요 0 | URL
다음 행사는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무렵이지 싶은디.=3=3=3
라주미힌 님, 오신 김에 저랑 못다한 이야기 좀 나누십시다요.
두어 번 들락거렸는데 대답도 못 얻고.( '')

마법천자문 2008-11-19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새끼들' 카테고리에 무슨 글들이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집에서 키우는 개들에 관한 내용인가요?

로드무비 2008-11-19 21:30   좋아요 0 | URL
아뇨, 승냥이과에 가까운 깡패 개들에 관한 카테고린데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이 더러워지는 것 같아
없앨까 생각중입니다.

바람돌이 2008-11-19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질의 모정을 위한 기록!! 정말 중요하죠 그럼요. ㅎㅎ
주하는 여전히 멋지게 크고 있군요. ^^

로드무비 2008-11-20 09:14   좋아요 0 | URL
나중에 몇 배로 돌려받으려면 기록이 중요합죠.
그런데요, 가끔 주하가 순진한 건지 모자란 건지
아리송할 때가 있습니다.
바람돌이 님은 어떠세요?^^

조선인 2008-11-20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주하는 훌륭한 딸이에요. 어쩜 그리 깜찍 발랄 유쾌한 행사를 기획할까요? 게다가 혼자서 작사작곡율동이라뇨. 존경합니다.

로드무비 2008-11-20 09:33   좋아요 0 | URL
불협화음이 심오한 곡에
거의 행위예술에 가까운 율동이었습니다.
존경은 오로지 조선인님의 몫입니다요.=3=3=3

마노아 2008-11-20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질의 모정에 브라보~ 근사한 행사였군요. 이건 비디오 자료로도 남겼어야 했는데 아쉬워요!

로드무비 2008-11-20 09:09   좋아요 0 | URL
저도 아쉽습니다. 헤헤.^^

2008-11-29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30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19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19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