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분투기
정은숙 지음 / 바다출판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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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고은의 어느 시에 등장했던 '민음사 미스 문'이 그토록 부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분명 그런 시가 있었다.) 내가 흠모하는 시인과 직접 만나 고양이나 개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라니! 백수로 하릴없이 시민도서관이나 들락이던 시절 서울의 출판사 편집실은 내게 꿈의 요새였다.



그런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내가 좋아하는 그 출판사(민음사는 아님)의 편집부 직원이 되어 있었다. 꿈같은 일이었다. 어느 날 아침 영업부 직원이 소설가 이제하 선생의 인지에 도장을 찍고 있길래 사무실에 오시느냐고 물었더니 교보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사장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인지를 가로채어 교보로 갔다. 교보문고 내에 커피숍도 있고 스파게티집도 있던 먼먼 시절의 일이다. 이제하 선생과 커피숍에 마주앉아 벌벌 떠는 손으로 커피를 마시는데 '지금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사무실로 돌아가 사장에게 엄청 깨졌지만......



사람은 참 간사한 동물이다. 자신의 꿈을 이루어놓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딱 뗀다.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나는 말도 안되는 원고의 교정을 보면서 투덜대기 시작했으며 1년을 조금 넘기고 사표를 냈다.



그 해 코엑스에서 열린 도서전시회에서 고은 시인도 소설가 이청준도 직접 볼 수 있었다. <만인보>를 1에서 5권까지 사서 두 권에 사인을 받았는데 독자들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가 좀 짜증스럽고 건성건성이어서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이청준 선생은 한 시간 후에 있는 자신의 강연회에 사람이 아무도 안오면 어쩌나 진심으로 걱정을 하고 계셨다. 우리 사장과 그런 말씀을 나누고 계시길래 "그럴 리가 있나요?" 했더니 나보고 가지 말고 꼭 머리수를 채워 달라신다. 나는 살아가는 데 자신감도 좋지만 기고만장한 사람보다는 수줍은 사람을 선호하는지라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강연을 무사히 마친 이 사람좋은 소설가는 고맙다며 내게 신작소설집을 주겠다고 하시더니 멋지게 서명하여 며칠 후 우편으로 보내주셨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키작은 자유인>이 바로 그 책이다.



출판사 편집부 직원으로 밥을 먹고 살았던 그 1년 몇 개월은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월급은 쥐꼬리만했고 일은 해도해도 끝이 없었다. 어렵사리 새책이 한 권 나오면 아바이순대 같은 집에서 회식을 하고 다음날은 다시 새벽부터 기어나와야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이라면 환장을 하는 아이였지만 책을 만드는 기술적인 일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사장도 그런 나의 성향을 눈치챘는지 디자인 쪽이나 제작 쪽 일엔 관여하게 하지 않고 원고를 고르는 일, 다듬는 일, 보도자료를 쓰는 일 등에 나를 부려먹었다. 나는 그런 주제에도 잘난 척은 엄청 했다. 가령 이런 일. 황동규 시인과 말씀을 나누던  사장님이 나를 부른다. "소설가 손창섭 선생 근황을 혹시 알고 있소?" "저 일본에 계신 걸로 아는데요." 그리곤 우쭐우쭐하며 사장실을 나오는 것이다. 무슨 엄청난 정보를 줬다고......



시인이자 도서출판 마음산책의 대표인 정은숙 씨의 <편집자 분투기>를 재밌게 읽었다. 출판편집자로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20년. 그녀의 아이디어로 이 세상에 나와 사람들의 심금을 건드리는 책만 해도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박영택의 <예술가로 산다는 것>, 조은의 <벼랑에서 살다>, 구효서의 <인생은 지나간다> 등 우선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책만 해도 여러 권이다.



자신은 성공적인  기획자이면서 출판사들의 기획 만능 추세를 비판하며 기획, 편집, 디자인, 제작, 홍보 등 출판과 관련된 모든 과정을 자신의 노하우를 곁들여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뿐인가, 책이란 무엇이며 편집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철학과 자세까지......한마디로 나만의 안테나로 세상을 읽되 균형감각과 미세조종술까지 획득하라는 것이다. 이게 참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어느 날  시인 조은의 사직동 한옥집에 놀러갔다가 그 골목과 고졸한 방안 풍경을 보고 사진과 곁들인 멋진 책을 머리속에 떠올렸다니, 그리하여 그렇게 예쁜 책 <벼랑에서 살다>가 세상에 나왔다니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기획 실패 사례까지 적나라하게 공개하고 있다.



책을 탁 덮으며 나는 희미한 부끄러움과 질투를 동시에 느꼈다. 이것은 내게 좀해서 찾아오지 않는 감정이라 나도 조금 놀랐는데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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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巖 2004-12-08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만 읽다보니 로드무비 글같은데 위를 보니 이름이 틀리는군요. 옛날 출판사 시대 생각이 납니다.

stella.K 2004-12-08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책을 좋아하는 거랑, 책을 만드는 거랑 다르긴 한가 보죠? 리뷰가 재밌어요. 바람구두님이 퍼오시는 송인소식이 이 사람이 쓴 거였군요. 읽어보고 싶어요. 일단 보관함에 넣어요.^^

로드무비 2004-12-08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암님도 출판사를 직접 운영하셨다고 했죠?

예전 아날로그적인 출판사 편집실 분위기 참 좋았어요.

가끔 그때가 그리워요.^^

깍두기 2004-12-08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 근무.....시켜주면 힘들고 능력없어서 사흘도 못하겠지만 여전히 제 머릿속의 꿈의 직업이어요^^

갈대 2004-12-08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 지금 이 책 보고 있어요. 이쪽에 관심이 있는지라, 그런데 솔직히 재미는 별로 없네요^^;

로드무비 2004-12-08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출판사를 하나 차리시죠?^^

갈대님, 출판인들에게나 재밌겠죠.

몇몇 에피소드가 재미난 것 빼면 그리 꽉찬 책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플레져 2004-12-0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보다 로드무비님의 지난날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음음...책보다 더 좋은 리뷰...^^

추천이어요, 저 또한!

sandcat 2004-12-08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과지*성사에 들어가서 시 교정만 보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더랬죠.

시야 뭐 교정 볼 것도 없는 거겠지만.

로드무비 2004-12-08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제 글은 리뷴지 페이펀지 구분이 잘 안 가죠?

전 앞으로도 그렇게 쓸 거예요. 추천 감솨!^^

샌드캣님, 저도 그런 꿈을 꾼 적이 있죠.

그런데 시 교정 보기보다 까다로워요. 아심시롱.^^


호랑녀 2004-12-08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줄 알았다가 마지막 발령이 안나서... 결국 백수로 몇 달을 지내야 했던 시절... 결혼하고 회사를 그만 두었던 시절... 몇 번 출판사에 발을 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이 닿지 않더군요.

가끔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면, 가슴 한켠이 쓸쓸해지면서 부럽습니다. 낼모레가 마흔인데... 아직두요.

kleinsusun 2004-12-08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편집자 분투기> 재미있게 읽었어요.

<편집자 분투기>를 읽고 쓴 독서일기를 마음산책 게시판에 올렸는데, 정대표님이 리플에 '인상 깊은 독후감'이라는 평을....ㅋㅋ

이 책 읽고 < 벼랑에 살다> 도 읽었거든요.

조은의 산문집. 최근 읽은 그 많은 글들 중에 가장 솔직한 글이었어요. 강추!!!

니르바나 2004-12-08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 고 은 선생에게 섭섭했던 마음일랑 접어두세요. 로드무비님

독자들은 작가에게 환상을 가지고 대하지만 소위 인기가 있는 작가의 반열에 들어서면 그 분들도 인간인데 모든 독자에게 항상 여일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좋은 작가들을 만나셨던 흥분이 님에게는 지금도 남아 있으니까요.

'키작은 자유인', '벼랑에서 살다', '인생은 지나간다'

저도 감동으로 읽던 책들입니다.

갈수록 로드무비님과 함께 읽은 책들이 느는 기쁨을 누가 알겠습니까?

브리즈 2004-12-11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 님의 지난날이 선연히 떠오르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정은숙은 편집자로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시인으로서 좋게 읽은 적은 없어서 책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는데, 로드무비 님의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는데요. ㅊㅊ합니다. ^^..

로드무비 2004-12-11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게야 댓글을 답니다. 죄송!;;

호랑녀님, 저는 도서관에서 근무하셨다는 님이 부럽습니다.

낼모레가 마흔이라니 역시 부러워요.;;

수선님, 벼랑에 살다 정말 재밌죠? 이 책은 세 번이나 샀어요.

그나저나 마음산책 홈페이지 한번도 안 가봤는데

수선님 글 읽으러 한번 가볼까요?

니르바나님, 그냥 그랬다는 거지 섭섭하기까지야 하겠습니까.

님과 읽은 책이 겹쳐지니 기분이 좋습니다.^^

브리즈님, 재밌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정은숙 씨 시는 별로였어요.
ㅊㅊ 고마워요.^^

2004-12-22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12-22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그럼 복순이 언니도?^^
 
십시일反 -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박재동 외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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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숨은아이님의 어떤 페이퍼에 나는 이런 댓글을 달았다. "나는 십시일반의 정신으로 살고는 있습니다만......" 이 말은 사실이다.  살아가는 일이 아직 어색하게 여겨지고 너무나 게으른 나머지 의로운 일에 앞장선다거나 남을 돕는 일에 적극적인 편은 아니지만 서명이 필요한 경우 등 머리수를 채우는 정도의 일, 후원금을 얼마간 내는 정도의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는 하고 살아가려고 한다. 그것이 내게는 십시일반의 정신인 것이다. 어떤 이가 보기엔 이런 나의 태도가 몹시 비겁하고 가소로워 보이겠지.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십시일反>은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없는 세상에 대한 청사진이랄까, 보고서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했다고 하면 너무나 형식적이고 딱딱한 내용일 것이라 오해하기 쉬운데 의외로 구석구석 이 세상의 가려운 곳까지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다. 빈부격차, 노동, 교육,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 문제 등 그 시선이 뻗치치 않은 곳이 없다고 하면 너무 과장일까?


이 재미있는 기획에 참여한 작가들은 박재동, 손문상, 유승하, 이우일, 이희재, 장경섭, 조남준, 최호철, 홍승우, 홍윤표로 자신이 포착한 이 사회의 차별을 자신의 만화에 꼼꼼하게 담고 있다.


손문상 씨의 '최종합격'이란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이렇다.


xx주식회사 신입사원 최종면접 현장. 여섯 명의 최종후보가 억지미소를 짓고 앉아 있다. "4번... 부모님이 아직 월세 살아요?"(탈락) "1번, 출신대가 본굡니까 분굡니까?"(탈락) "2번...잉? 야간이넷!"(탈락) "6번...결혼란을 안 썼네요? 기혼? 미혼?"(이 여성도 탈락) "두 분은 입사 성적도 좋고 출신성분, 학력 다 좋은데...두 분 다 아버님이 공직에...(한 후보의 아버지는 교직에, 한 후보의 아버지는 의원...) 김의원님 잘 계시죠?"(최종합격 3번!)


딸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나의 경우 조남준의 에피소드 '누렁이 1'이 특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60평 이상 아파트인 1단지에 사는 아이와 40평 이상인 2단지, 20평 이상인 3단지에 사는 한 학교 아이들의 생일파티 이야기였다. 아파트 평수에 따라 친구를 맺고 생일파티에 초대하고 하는 것이 결정된다는 건 어느 먼 천박하고 악독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의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나는 끝까지 그렇게 믿고 싶다.


자신은 꽤나 상식적이고 공평하고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자위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십시일反>을 읽어나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 찔리고 눈물이 솟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울고 있는 아이나 노인, 장애인이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나의 무관심이 무관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사회적인 폭력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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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12-06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여름에 본 건데도 기억이 가물가물...느낌만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리뷰를 써야하는건데.

숨은아이 2004-12-06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관심이 무관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인 폭력으로 연결된다..., 그렇지요, 정말.

하얀마녀 2004-12-06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좋은 책이 있었군요. 이래서 서재질을 멈출 수 없습니다. ^^

플레져 2004-12-06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은 숨어있는 책 잘 골라내셔요. 정말 친하게 지내야 한다니깐...^^:; 잘 읽고, 추천해요!

chika 2004-12-06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늘에야 이 책을 보관함에 집어넣었는데, 로드무비님은 리뷰를 쓰셨군요.(리뷰는 잘 안읽었답니다. 책 읽고나서 리뷰볼래요~ ^^)

미완성 2004-12-07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래저래 서재질하면서 느는 건 보관함이요 요통이요 변비입니다 ㅜ_ㅜ

추천!

깍두기 2004-12-08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또 언제 쓰셨나요? 이제서야 들여다봅니다. 십시일반.....괜히 가슴 한켠이 뭉클해지네요.
 
아이의 체온 - 뷰티플 라이프 스토리 1
요시나가 후미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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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아이 둘을 데리고 동네 병원에 갔다가 차례를 기다려 진료를 하고 빵집과 슈퍼에 들러 집에 돌아오는데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세 살짜리 녀석이 유모차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딸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자기가 유모차에 달랑 올라탄다. 빵봉지랑 시장바구니, 싸고 맛있게 보여 오는 길에 산 귤과 사과 보따리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유모차를 밀며 어둑어둑한 언덕길을 낑낑거리며 올라왔다. 조카녀석은 30미터쯤 떨어져 유모차 뒤를 쭐레쭐레 따라오고 있다. "달이야, 달!"하고 하늘을 가리키며 감탄도 해가면서 아주 신이 났다.  어느새 보름달이 되어버렸지?


그런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 같은 언덕 꼭대기 6단지 앞에 어물전이 펼쳐졌다.


"아니 저 아저씨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런데다 좌판을 펼치면 어떡해! 누가 알고 오겠냐고......"


딸아이에게 녀석과 유모차를 부탁하고 나는 길을 건너가 고등어 세 마리와 굴을 한 근 샀다. 굴은 떨이여서 저울에 달아 보니 두 근 가까이 되었다. 아저씨가 고등어를 손질할 동안 아이들이 있는 길 맞은편을 보니 유모차가 바닥에 자빠져 있고 딸아이는 그걸 일으켜 세우려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시장바구니며 등 주렁주렁 매달린 짐의 무게 때문이었다. 나는 급히 계산을 치르고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


집에 돌아와 봉지를 끌렀더니 고등어는 울퉁불퉁 모양 없이 잘리고 잘게 토막쳐져 있었다. 이건 누가 봐도 초보자의 솜씨였다. 세 마리를 골랐는데 네 마리를 주고 아무리 떨이라지만 한 근 가까운 굴을 서비스로 넣어주고 그리고 어쩌자고 그 아저씨는 바람 씽씽 부는 언덕배기에 자리를 깔았는지......앞으로 생선은 그 아저씨에게 사서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히 고등어와 굴은 아주 싱싱해서 굴전으로 부쳐먹어도 맛있고 생으로 초고추장에 찍어 먹어도 맛있었다.


리뷰 첫머리 치고 사설이 너무 길었다. 자기 전 <서양골동양과자점>의 작가 요시나가 후미의 <아이의 체온>을 읽었다. 아이의 체온, 홈 파티, 내가 본 풍경, 춤추는 왕자님, 흔히 있는 그런 날, 가끔은 이런 날이라는 제목의 여섯 개의 단편집이다.


아내와 사별한 38세의 남자가 모범생인 줄만 알았던 중1 아들 코이치의 부탁으로 산부인과에 간다. 아들의 여자친구를 데리고 임신 여부를 알기 위해. 다행히 임신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고 아들의 여자친구와 함께 오무라이스를 사먹고 집으로 돌아온다. 산부인과 대기실에서의 그의 독백이 인상적이다. '요즘 아이들은 어른스럽긴 하지만 세상물정을 모르고 비밀이 많지만 무책임하다. ...뭐야, 우리 어렸을 때랑 똑같잖아?'(아이의 체온)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처음 맞는 봄, 어린 아들 코이치를 데리고 장인장모를 만나러 간 그. 장모의 허락을 받지 않고 홈파티에 사람들을 초대한 장인이 곤경에 처한 것을 모른척할 수 없다. 장인과 함께 냉장고를 뒤져  밤새 이런저런 요리를 만드는데......(홈 파티)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함께 사는 발레 신동 소년 와다치는 코이치의 친구. 엄마가 붙잡는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던 자신의  행동이 상처로 남아 있는데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거리를 활보하는 동급생 코이치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 어느 날 국제적인 규모의 콩쿠르 참여를 앞두고 어느 여성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데 그 기자 이렇게 묻는다. "와다치군에게 있어 발레란 무엇인가요?" 이 삐딱한 소년의 대답. "당신, 무능한 기자로군요. 그 질문을 했던 사람 중 쓸만한 인간은 한 명도 없었죠." (춤추는 왕자님)


<아이의 체온>에 실린 여섯 개의 단편들은 그럴 수 없이 담담하게 사람들의 심리와 일상을 스케치하고 있다. 바로 어제 저녁 내가 아이 둘을 데리고 동네를 한 바퀴를 돌며 보았던 사람들과, 언덕배기에서 짐을 내팽개치고 자빠졌던 유모차와, 이제 막 생선을 팔기 시작하여 생선 다루는 솜씨가 형편없었던  선량한 얼굴의 그 아저씨를 웬지 떠올리게 하는 그저그런 이야기말이다. (이 글을 쓰면서 많이 후회했다. 처음부터 그냥 페이퍼로 쓸걸. 그런데 리뷰에서 페이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어버렸고 나는 염치좋게 이 글을 리뷰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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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2004-11-2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좋군요.... 로드무비표 일상의 내음이 고등어 찌개처럼 깊숙이 배여 있는 리뷰! 뭐, 난 이런 리뷰가 너무 반듯하고 깔끔한 리뷰보다 좋은걸요.

로드무비 2004-11-25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야요. 좋다면서 추천도 안 눌러주시고...흥=3=3

페이퍼로 썼으면 더 진한 글이 나왔을 텐데 어설프게 리뷰와 접목시키느라고

끙긍대었어요.^^

2004-11-25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게 리뷰를 읽는 다고 읽었는디 페이펀지 리뷴지..내 탓 아니랑게요..내가 헷갈린 줄 알았자너욧..ㅡ,.ㅡ!

2004-11-25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얀마녀 2004-11-25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올리셨습니다. ^^

날개 2004-11-25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든 페이퍼든 어떻습니까! 어차피 '로드무비'표인것을...^^

로드무비 2004-11-25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님, 앞으로 제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겠습니다.

페이뷰...어때요? 히히^^

속삭이신 님, 익숙지 않은 손으로 붕어빵을 굽고 군고구마 장사에 새로 나선

분들이 여기저기 너무 많이 보여요.

먹고살기가 정말 어려운 시대예요.^^;;;

하얀마녀님 추천 고맙습니다.^^

날개님, 로드무비표 글이란 게 정말 있어요?

그런데 질리면 어떡하죠?^^

(그럴 리야 없겠지만...=3=3)

에레혼 2004-11-25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번엔 또 '추천 누르기'를 제가 깜빡했단 말입니까, 이런이런......

한번에 한 가지씩밖에 할 줄 모르는 저의 둔감함을 용서하시압!

[어쩐지 다시 와 보고 싶더라니... 이번에 학실히 누지르고 갑니다!]


2004-11-25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페이뷰! 새로운 단어다..아아..이미 새 장르를 개척하셨어요..님은.

로드무비 2004-11-25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락와인님, 제가 계속 님께 텔레파시를 보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조금 전 구경한 님의 오코노미야키 정말 맛나겠던데요?

참나님, 그렇죠? 근사한 조어죠?(자화자찬;;)

깍두기 2004-11-25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언제 이 리뷰를 쓰셨대요? 왜 난 이제사 봤지? 요즘 브리핑의 압박이 장난이 아닙니다.

그나저나 페이뷰 좋네요^^ 저도 제 일상을 리뷰와 접목시키고파요.....

플레져 2004-11-25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맛있을수가...........ㅊㅊ 합니다! 페이뷰~ 넘 좋아요!!!

로드무비 2004-11-26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어제 님이 리뷰 올린 시간과 비슷할걸요?^^

플레져님, 페이뷰란 말이 멋져서 좋다는 말씀이시죠?^^

다연엉가 2004-12-06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추천 눌렸습니다. 히히히

로드무비 2004-12-06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책울타리님, 고마워용.^^
 
요절 - 왜 죽음은 그들을 유혹했을까
조용훈 지음 / 효형출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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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절대 만족을 모른다. 충족은 불가능하다. 충만한 부재이고 부재한 충만이다.맹목을 향애 폭주하는 기관차. 질투와 관능, 망설임과 설레임, 거짓맹세와 파괴적 일탈, 그 어떤 수사로도 포착할 수 없는 모호함이 사랑이다. 때로 광태적인 도발을 이끄는 힘이기도 하다. 최욱경은 이를 '금지된 꿈'이라 불렀다. 사랑은, 그것이 거절될 때 오히려 가치를 발한다. 잊으려 애쓸 때 사랑은 찾아오고 사랑에 목숨걸 때 사랑은 떠난다. 심리적 착종과 혼효의 심리적 공황상태가 바로 사랑이다. 통속적이다. 그러나 비웃지 말라. 통속적이고 추잡한 이별 앞에 우리는 늘 주인공 아닌가. 폭주하는 열차보다 빠르게 사랑은 달아난다. 사랑은 그 어떤 관용도 베풀지 않는다. 실패한 사랑은 슬픔과 손잡고 육체적 정신적 학대마저 잔악하게 유도한다. 이별 앞에 몸부림치는 것은 사치에 불과하다. 실연의 슬픔은 자기분열하여 그 깊이를 심화, 증폭시킨다. 최욱경은 그 사랑을 '비참한 관계'로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그녀에게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나? --최욱경(1940~1985), 화가.-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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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17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맹목을 향애--맹목을 향해

밑줄긋기 처음 올려보는데 꼴랑 이것 가지고 한 30분 씨름했다.

그리고 도대체 수정이 되지 않는다. 눈앞의 오자를 그냥 내버려두어야 하다니.....

호랑녀 2004-11-17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저 이 책 좋아해요. 최욱경의 그림... 색감이 참 좋지 않던가요? 화려하되 천박하지 않은...

로드무비 2004-11-17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 아주 오래 전 최욱경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거든요.

그런데 그녀의 책을 찾을 수가 없네요.

저 그 책 읽고 최욱경 무지 좋아했거든요.

水巖 2004-12-12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자 난 글 전체를 복사해서 다음 페이지에 올려 놓고 오자를 고치고 나서 먼저 쓴 글은 삭제했답니다. 어찌‰榮?고치면 되지요.

미완성 2005-02-26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멋진 문장이 있을 수가..
통속적이고 추잡한 이별 앞에 우리는 늘 주인공이 아닌가, 라니요.
이토록 품위있으면서도 이토록 멋지게 냄새나는 문장이라니..바람구두님 리뷰 읽다가 '아, 어디서 밑줄긋기 해놓은 거 없을까..?'하던 차에 우연히 보게 된 로드무비님의 밑줄긋기..너무나 멋진 구절입니다. 이 책 전체가 이렇게나 멋드러지게 냄새가 난다면 정말 오랜만에 가지고 싶은 책 목록에 올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더불어 이제야 막 그 이름을 불러본 최.욱.경.님의 그림이 궁금해지는데요? 아, 정말..잘 읽었습니다. :)
 
캄펑의 개구쟁이 2
라트 글 그림, 김경화 옮김 / 오월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권 이미지가 없어서 사진을 찍어 올린다. 어디까지나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산 책이니까.

 

<캄펑의 개구쟁이>는 말레이시아의 화가 라트의 흑백 그림책이다. '캄펑'은 시골이란 뜻인데 그가 태어난 곳은 세계에서 가장 큰 주석 채광지가 있는 마을로 깊은 숲 가운데이다. 주인공 소년이 태어날 때부터 중학교 시험에 합격하여 마을을 떠나기 전까지의 기록인 셈인데 시대 배경은 우리나라로 치면 6,70년대쯤이 될 것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컴퓨터도 없던 자동차도 아주 귀한 깡촌 시절 이야기다. 내가 읽은 건 <캄펑의 개구쟁이> 1권이고, 시중에는 이미 2권과 함께 <도시의 개구쟁이>까지 나와 있다.

엄마 품에 안겨 있다가 기어다니다가 걸음마를 시작하는 납작코에 뻐드렁니의 아이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어릴 때 코찔찔이 나와 내 동생의 모습이다. 구체적인 생활로 말레이시아라는 나라와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해 조금 엿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이리라.

--여섯 살...  사이드 선생님의 첫인상 때문에 나는 앞일이 캄캄하게만 느껴졌다.

--여기가 우리 마을이다. 왼쪽 약국 옆이 우리가 주로 이용하는 요우 아저씨네 가게다. 그리고 그 옆은 포목점인데 이 집 아저씨는 금은방도 겸하고 있었다.

뭐 이런 식의 설명과 함께 요우 아저씨라든지 포목점, 금은방이 있는 골목을 아주 세세하게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준다.


(그림을 자세히 보여주고 싶어 한 컷 찍었는데 너무 흐릿하게 나왔다. 주인공이 세상에 갓 태어났을 때의 방 안 풍경이다. 산파 할머니에게 수고비를 전달하는 아빠, 양말을 신고 누워 산후조리중인 엄마, 모기장 속의 아기...그림이 아주 사실적이면서도 정감있다.)

다른 나라의 결혼식 피로연 풍경이나 반 벌거숭이로 어울려 뛰어노는 아이들의 놀이 모습도 흥미롭지만 이 책에는 제법 재미있는 사건도 나온다. 하객으로 참석한 결혼식 뒤풀이에서 흥을 이기지 못하여 무대에 뛰어올라가 댄서들과 춤을 추었던 아빠가 엄마에게 야단맞는 모습. 한마디로 생활과 풍습을 코믹한 그림으로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 짧은 글로나마 이 책의 리뷰를 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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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5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11-15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제가 오해를 했나요?

그렇담 천만다행이고요. 휴~^^


urblue 2004-11-15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정감가는 그림입니다. 요것도 찜! 아셨죠?

로드무비 2004-11-15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헹~~~(심술 주간)

진/우맘 2004-11-15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레이시아라...아이에게 유럽이나 미국 말고 다른 세계의 그림책도 많이 보여주고 싶은데, 찾기가 쉽지 않아요. 보관함에 퐁당!

그리고 저 그림책 표지, 색감이나 분위기가...로드님이 이미지로 쓰는 호텔 바그다드와 비슷하게 느껴져요.^^

진/우맘 2004-11-15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1권 2권이 이어지는 이야기인가요? 아님, 따로따로도 이해가 되는?

로드무비 2004-11-15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맞아요.

제가 좋아하는 좀 코믹한 그림풍이에요.

우리 주하는 보여주니까 별로 관심을 안 갖더군요. 아무래도 흑백이라......

150여 쪽이고요. 글은 아주 짧고 페이지가 전부 그림입니다.

2권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도시의 개구쟁이>는 도시로 이사간 이후의

생활이라네요. 이어지는 것이지만 독립적이기도 하죠.

참고가 되었나요?

숨은아이 2004-11-15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찜! 제가 여쭙고 싶었던 걸 진/우맘님이 물어주셨네요.

날개 2004-11-15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와서 읽고 갔지만.. 로드무비님이 저 미워하실까봐 다시 왔어요~~

저런 그림 참 좋아합니다.. 그림책이라 이제 사게 될 일은 없을 것 같지만요..ㅎㅎ

몇 컷 정도 더 보고 싶어요..^^*

2004-11-15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11-16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님도 이런 그림 좋아하시는군요.

한마디로 인간적인 그림이죠.

날개님, 저는 제 방 멀리서 보고 북적인다고 친한 사람들이

아는 척도 안해주면 슬퍼요.

그리고 전 이 책들 돈 좀 생기면 다 살 거예요.^^


2004-11-16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