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생 1
키오 시모쿠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언젠가 <스위트 딜리버리>를 읽으며 재밌다고 난리를 쳤더니 자명한 산책님이 댓글을 남기셨다. 만화 <5년생>을 읽어보라고. 5년생? 그러고 보니 언젠가 물장구치는 금붕어님이 내게 권해주신 책이다. 홍상수의 영화 같은 만화라고. 나는 욕을 해대면서도 홍상수의 영화를 빼놓지 않고 본다. 왜 사람도 그런 사람 있지 않나. 지긋지긋하게 싫은데도 이상하게 자꾸 신경이 쓰이는 사람. 반대로 너무너무 성실하고 좋은 사람인데 개인적으로 만나보라면 피하고 싶은 사람.

인생은 참 불공평한 것이다.  10여 년 전 어떤 소설가와 커피를 마시며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성실함의 안쓰러움과 우스꽝스러움에 대하여. 한마디로 아무 재주 없이  성실하기만 한 사람의 그 진정성이라는 것과 노력이 구차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그날 심사가 좀 사나웠던 것일까? 그는 유명작가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나의 태도는 더 비열했다. 마치 재능이라는 딴주머니를 차고 있는 사람처럼 수긍할 수 없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5년생>을 어렵사리 손에 넣었다. 성적이 모자라 한 해 대학을 더 다녀야 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아키노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 사무실에 임시취직한 요시노의 지지부진한 사랑 이야기였다. 다음 대목을 보면 아키노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어떻게 요시노를 꼬셨냐는 친구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멋대가리없이 대답한다.

"글쎄, 그 당시 그 애도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고...대충 얘기하자면 좋은 사람인 척하면서 조금씩 다가갔다고나 할까. 글쎄, 인간이란 뭐 이렇다할 만한 이유 따위 없어도 어느 정도 상황이 만들어지면 그럴 분위기가 돼버리는 게 아닐까?"

요컨대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고 운명적인 것도 아니고 어쩌다보니 그런 사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자신의 사랑을 엄청나게 미화하여 들려주고는 나중에 엄청난 배신감에 치를 떨며 헤어지는 친구들을 예전에 워낙 많이 보았는지라 도리어 주인공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진술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아키노는 애인과의 일주일 만의 전화 통화에 이런 낯간지러운 말도 할 줄 안다. (전 5권을 통털어 가장 달콤한 사랑 고백 장면이다.)

"네가 머리를 잘랐다는데 아직 못 보고 있으니......"

요시노는 어떠냐 하면 애인 아키노보다 더 무덤덤하고 메마른 인간이다.

"난 말야. 원래 인간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 상관없는 얘기인지는 몰라도 인권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인권을 소리 높여 주장하는 인간은 특히 싫어."

변호사가 되기 위한 사법공부는 자신에게 별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직장생활과 공부를 병행하는 그녀. 그렇다고 그것을 괴로워하거나 불평을 늘어놓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유일한 장점은 속물이 아니라는 것. 유급이나 하고 멋진 삶에 대한 의욕도 도무지 없는 애인 아키노의 삶을 그대로 용인한다. 한마디로 둘은 너무 잘 만났다. 요시노도 그런 점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어느 날 이렇게 말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난 네가 너무 보고싶고 너무너무 사랑해서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그렇게 중요하게 느끼지 않는 이 감정이 내겐 소중하다고나 할까. 아키오의 존재가 가볍게 느껴지는 게 남자에게 정열을 투자할 여유가 없는 내게는 딱 안성맞춤이라고 할 수 있어."

아, 이런 그녀의 말은 언젠가 내가 어느 남자 앞에서 읊조렸던 말이기도 한 것이다. 나 또한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일상과 연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나니 비로소 구체적인 연애에 돌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별 볼일없는 저라도 사랑해 주실래요?

'연애가 뭐 별건가?' 시모쿠 키오라는 이 낯선 작가는 나의 18번인 이 대사를 다섯 권의 만화 속에 방백으로 숨겨놓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같은 만화랄까. (아쉽게도 이 책은 품절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영화로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10여 년 전 나와 '구차한 성실성'에 대해 얘기를 나눈 바 있는 소설가는 이렇게 비웃었다.  "영화감독도 분명 작가인데 이건 정말 무시무시한 상상력 결핍의 제목이야. 듣기만 해도 정말 짜증난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숨은아이 2004-11-14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만화는 보고 싶군요. 그런데 요 며칠 바쁘셨어요? 소식이 없어 궁금했어요.

로드무비 2004-11-14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애 둘 코감기 걸려 병원 다니고 밀린 책 좀 읽고 그러고 지냈어요.

반가워요.^^

에레혼 2004-11-14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시노, 마음에 드는 캐릭터네요. 실제로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는 너무 건조하고 팍팍해서 정이 안 갈지 몰라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기에는 참 괜찮은 성격 아닐까요....... 특히 "인권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인권을 소리 높여 주장하는 인간은 특히 싫어." 이 대목 120% 공감합니다.

[저도 로드무비님의 근황이 궁금했어요^^, 워낙 북적거리는 방인지라 잠시만 비워 둬도 무슨 일인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지요]

날개 2004-11-14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기대하라시더니, 정말 기대할만 하군요.. 근사합니다..^^* 아직 이 책을 못보았는데, 기회가 되면 꼭 봐야겠습니다..

아이들 감기는 좀 괜찮은가요? 며칠간 재충전을 하셔서 이제 글을 더 열심히 올리실거죠? 후후~

깍두기 2004-11-14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품절책 리뷰는 무효라고 할까봐요. 이렇게 구미가 당기게 해놓고 품절이라 하시면....ㅠ.ㅠ

2004-11-14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11-1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락와인님, 적당한 거리란 얼마를 말하는지 좀 알려주실래요?

전 아직도 그걸 몰라 낭패를 당하고 있습니다.

날개님, 아이들은 누런코 매달고 한 사나흘 지냈어요.

지금은 많이 나았어요. 덕분에...

깍두기님, 이 책은 품절이 아니고 절판인 것 같던데...

그런데 깍두기님이 별로 좋아하실 것 같지 않은 책인데요?

맹한 주인공들, 사건이랄 것 없는 냉수같은 일상...

그래도 보고 싶으시다면 언제 빌려드리리다.

속삭이신 님, 잘 알겠습니다.

호옹이 2012-04-06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키오...인데 댓글들이 2004년 댓글들이네
 
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부턴가 여성 작가들의 소설책을 내 돈 주고 사지 않는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원칙이다. 하성란, 조경란, 한 강 등의 신작 소설을 이동하는 시민도서관에서 몇 권인가 빌려 읽긴 했다. 어떤 책은 무지 재미있었다. 그런데  좀처럼 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인 일일까? 고독과 허무와 절망에 빠져 있는 그 매력적인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더이상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녀들은 참 우아하게도 허우적댄다. 절망할 때조차 포즈를 취한다는 느낌이랄까. 어떤 소설은 분명 재밌게 읽히는데 지갑을 열게 되지는 않는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신경숙과 전경린의 소설은 아예 읽을 수조차 없다. (전경린의 소설을 가지고 변영주 감독이 영화를 만들었을 때 나는 참 의외였고 분했다.)

그런데 며칠 전 오랜만에 읽은 정미경의 소설은 달랐다. 엄살과 과장이 느껴지지 않았으며 자신의 남다른 면모를 주인공을 통해 독자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허영도 없었다.

"씨발, 하기 싫은 것도 해야 되는 게 인생이잖아. 안 그래요?"

나릿빛 사진의 추억에 나오는 조폭 똘마니 '컬러 문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주인공은 이제 개인병원 엑스레이 기사로 취직하여 자신이 찍은 애인 사진 필름을 사진관에 맡길 정도로 돈을 번다. 인화되어 나온 사진을 보고 그녀가 생각나 모처럼 전화를 걸었는데 그녀의 약혼자가 이를 오해하여 깜장양복 덩치들을 매일 병원으로 보낸다. 그녀의 누드 필름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이미 가위로 잘라 쓰레기통에 넣었는데......그를 협박하기 위해 파견된 컬러문신이 제안한다. 새로 누드 사진을 찍어 필름을 가져다주는 것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결혼이라는 확실하고 공고한(요즘은 그렇지도 않지만) 제도 속으로의 편입을 앞둔 커플의 오만과 불안, 그리고 사랑은커녕 제 목숨 부지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관심 없는 한 청년이 처한 답답한 현실이 가슴을 조여온다.

나는 아직 하기 싫은 일은 요리조리 피하면서 미꾸라지처럼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컬러 문신'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하기 싫은 것도 해야 되는 게 인생이라고? 나도 알지, 그 정도는. 그런데 용케 이때까지는 하기 싫은 일은 피하면서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앞으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그게 무섭고 답답하다.)

호텔 유로 1203  부엌에서 언제나 자신을 위해 정체불명의 약초들을 커다란 냄비에 끓이는 일이 유일한 취미인 엄마가 나온다. 나도 요즘 삼백초 물을 끓여먹기 시작했다. 갱년기 여성에게  좋다고 해서.(오죽하면 내가 이러겠는가!)  그건 그렇고 파산지경임에도 명품을 포기하지 못하는 여주인공의 말에 일면 공감이 간다. '생이 이토록 누추한데 거기다 근검절약까지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의 피투성이 연인  남편의 느닷없는 죽음과 그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담담하게 기술할 수 있다니!  울며불며 난리를 치지 않는데도 주인공의 아픔과 환멸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건 멋을 부리는 것과는 다르다. 한마디로 '격'이다. '개인적인 고통을 증언하는 건 스스로 모자라는 사람임을 광고하는 것이다.' 라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성스러운 봄 걸을 때마다 뒤꿈치에 불이 켜지는 야광운동화를 신어보지 못하고 먼길을 떠난 이 작품 속 아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 온다. 작년 봄,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털어 라이온 킹 오리지널 야광운동화를 딸아이에게 사주었는데 5만 원 돈을 주고 아이 운동화를 샀다는 죄의식을 일거에 날려 주었다.

비소 여인 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조차 띤 채 사람들을 하나하나 해치우는 여주인공이 섬뜩하면서도 너무나 매력적인 캐릭터로 느껴졌다. '마음의 심연(深淵)'이라는 단어가 절로 생각났다.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장석조네를 능가하는 허름한 골목 풍경이라고 한마디로 말하고 싶다. 등장인물이 많은 것도 아니고 단편소설에 불과하지만......그 중에서도 분식집 여자 미옥, 아아 미옥. "사는 것도 지랄맞은데 동화마저 아파야 해? 무조건 해피엔딩이라야 해. 난 우울한 동화 싫어!"라는 그녀의 말은 평소 나의 생각과 좀 다르지만 이 글 속에서라면 무조건 고개를 끄덕여주고 싶다. 미옥은 나를 전율케 했다. 누군가 그녀의 분식집에 들어올 때마다 어릴 때 헤어진 동생을 만난 듯 깜짝 반가워했다는 정 많은 여인이다.

문학평론가 김미현은 '모든 삶이 가짜일 때는 가짜를 견디는 것이 진짜라는 것이다'라는 멋진 말로 이 한 권의 소설집을  정리해 놓았다. 책의 앞날개에 실린 사진을 보니 소설가 서영은과 강석경을 합쳐놓은 듯한 인상의 소설가 정미경. 어둡고 깊은 그의 눈매가 부럽기 짝이 없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깍두기 2004-11-14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를 누르고 싶지만 이 책을 이미 사버렸으니 추천만 하지요.

로드무비님의 글발에 주인공들이 더 살아나는 것 같구려. 나도 미옥이가 제일 좋았어요. 하지만 정미경은 무조건 해피엔딩이어야 한다고 해놓고 자기 주인공들을 그렇게 어정쩡한 시점에서 정지시켜 버린답니까? 주인공들이 투명의자 자세(애들 벌줄 때 쓰는 자세의 하나로 마치 투명의자에 앉은 것처럼 엉거주춤 앉아서 앞으로 나란히 하는 것)를 하고 정지해 버린 것 같아서 저는 너무 불편했단 말입니다.

로드무비 2004-11-1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때로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냉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며 위로받고 싶은 생각은 없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펼쳐 보여주는 것이 좋아요.

미옥에 관해서라면 나도 너무 안타까웠지만......

깍두기님, 추천 고마워요.

반딧불,, 2004-11-14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줄에 동감하면서 읽었습니다.

최근에 산 책은 거의 없고, 전경린과 신경숙을 읽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봄에 보시니 참 좋았다를 급한 마음에 사서 읽은 것 빼고는

제 돈으로 소설책을 사서 읽지 않는군요.

소설을 그리 좋아했었는데 어쩐 일인지^^;;;

사 줘야 하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 보니, 제 책은 거의 없고, 아이들 책만 있습니다.

로드무비 2004-11-14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자신을 위해서도 뭘 해주지 않으면 안 돼요.

그것이 남들 눈에는 아무리 쓰잘데기없는 것이라도.

그런데 이 리뷰에 내가 읽지 않는 작가들 이름을 밝힌 것이 좀 찝찝하네요.

이니셜로 처리할까요?

반딧불,, 2004-11-14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가끔 객관적 글쓰기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부텀 리뷰도 페이퍼도 못올리게 되었지요ㅠㅠ

stella.K 2004-11-14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그렇찮아도, 어제 오프 모임에 갔다가 저 깍두기님으로부터 말씀하신 책 선물 받았어요. 제가 베르나르의 <나무>를 드렸거든요. 물론 결국 책 바꿔 보기가 됐지만 기분 좋더라구요. 로드무비님에 재미있다니 솔깃해집니다. 빨리 읽어봐야 할텐데, 책은 쌓여만가고 무엇부터 읽어야할지 난감합니다.^^

로드무비 2004-11-14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나의 피투성이 연인부터 읽으세요.^^

kleinsusun 2004-11-14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느 때 부턴가 로드무비님과 같은 증세를 갖게 되었어요.

신경숙, 전경린 같은 여자 소설가 책을 돈 주고 사기 싫더라구요.

더 솔직히 말하면 돈주고 읽으라 해도, 누가 저를 감금하고 읽으라고 해도 읽기 싫은 기분이예요. '취재' 없이 쓴, 주인공들의 직업은 맨날 출판사 직원, 잡지사 기자, 방송국 작가 등등(모두 자전적인 부분).울고 짜고 감상적이고 상한 감정을 주저리 주저리...

오랜만에 여자 작가의 소설을 돈주고 샀어요.

정이현의 소설.

로드무비님의 리뷰를 읽으니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읽고 싶군요.

저랑 같은 증상을 앓고 있다니....반갑습니다.ㅋㅋ

에레혼 2004-11-14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물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콕콕 찌르는 글맛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리뷰네요. 마치 바로 옆에 앉아서 방금 막 읽고 난 책을 조분조분 얘기해 주는 듯한 느낌...... 잘 읽었고, 추천 드립니다!

로드무비 2004-11-15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여성작가들을 모두 싸잡아 얘기한 것이 조금 걸리네요.

좋아하는 작가도 몇 있거든요.

정이현 씨가 맡고 있는 한겨레신문 영화 코너 재밌게 읽고 있어요.

신경숙도 씨네21에 한동안 글 참 재밌게 썼잖아요.

그런데 소설은 왜 읽히지가 않는지......

수선님은 젊은 분이어서 그런지 확실하고 명쾌하시군요.^^

새벽별님, 제 의견 참고하다 좋은 책 놓치면 어떡한답니까? 헤헤

라일락와인님, 저의 리뷰는 평이 아니고 순전히 저의 느낌입니다.

저는 누군가의 글을 평할 만한 주변머리가 없거든요.

추천 고맙습니다.^^

하이드 2004-11-29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보관함에 넣어놓고 잊고 있었던 책인데, 꼭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하이드 2004-11-29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경린 책은 두권밖에 안 읽어봤지만, 변영주 감독의 '밀애' 였던가요 ? 영화는 참 잘 봤었는데, 이 영화에 대해서는 참 호오가 극단적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조은 지음, 최민식 사진 / 샘터사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4년 전,  내가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잘하면 거리에 나앉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저축이라곤 1천만 원짜리 적금이 다였고 만약 그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실직이라도 하면 그 돈을 가지고 몇 달이나 버틸 수 있겠는가? 급한 마음에 수소문해 덥석 물었던 원고도 엉망이어서 돈은 돈대로 다 못 받고 그 일을 내게 주었던 후배와도 틀어지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세 살짜리 딸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게 된 것도 낮시간에 좀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우리는 서울의 순대국밥집이 즐비한 기사식당 골목에 살았는데 형편이 그렇게 되자 예전에 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손님을 유인하고 주차를 담당하는 순대국밥 집의 50대 아저씨를 보면 '청소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하는데 저렇게 하루종일 서서 일하고 얼마를 버실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 냄비를 들고 순대국을 사러 가서 보면 젊은 주인에게 지청구를 들으며 주방에서 허리 한번 펼 틈 없이 일하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그들은 임시 일자리와 거처라도 확보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기사식당 그 골목엔 머리가 조금 모자란 30대의 총각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식당 주인들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당을 쓸고 쓰레기를 치워주며 국에 아무렇게나 만 밥을 한 그릇씩 얻어먹었다. 순대국밥집 앞에서 아침마다 나는 어린이집 봉고버스를 기다리며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 마시는 것이 행사였는데 어느 날 그가 커피를 마시는 나를 보고 입맛을 다시길래 한잔 빼주었더니 그 뒤론 아주 당당하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몹시 추운 겨울 어느 날, 스웨터 차림의 그가 너무 추워보여 집에 가서 남편이 안 입는 모직 점퍼랑 골덴바지를 가져다 주었다. 다음날 뜨뜻하게 옷을 입은 그가 나를 보자 어색하게 웃으며 먼 데서 달려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내 손의 무거운 시장바구니를 빼앗더니 앞장서서 걷는 것이었다. 우리 집 앞에 도착하여 그냥 들어가기 뭐하여 밥이나 먹었냐고 물었다. 아직 안 먹었다고 해서 국밥 사먹으라고 돈을 좀 주었는데 주면서도 나는 그 총각이 앞으로 나를 너무 좋아할까봐(?) 그것이 좀 부담스러웠다.(써놓고 보니 어이가 없다!)

"엄마, 왜 저 아저씨가 아빠 옷을 입었어?" 딸아이가 내게 물었다.

"응, 집이랑 가족이 없는 아저씨인데 외투가 없어서 아빠 안 입는 옷을 줬어."

"그러면 저 아저씨는 추운데 어디서 자?"

"응, 식당 같은 데 일해주고 거기서 잘 거야."

딸아이에게 말한 것처럼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는 이 골목의 터줏대감이나 다름없으니 착한 식당주인들이 돌아가며 그를 재워줄 거라고......그러나 그 속사정을 어떻게 알겠는가!  아아, 그 해 내가 느꼈던 삶의 공포가 고스란히 생각난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엔 시대는 좀 다르지만 내가 살던 순대국밥집 골목에서 만났던 허름한 이들의 얼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벼랑 앞에 선 듯하던 나의 얼굴도......

이 책은 부산역 앞, 자갈치시장, 용두산공원, 영도다리 부근 등 내가 나고 자란 곳이 배경이었던 1987년도에 나온 열화당 사진문고만큼 충격적이진 않았는데 1957년 용산역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국수 먹는 소녀 등 몇 장의 사진이 재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몇 해 뒤 소설가 조세희의 발문을 제목으로 달고 나온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의 책에 빠지지 않고 실리는 국수 먹는 이 소녀의 사진은 언제 보아도 가슴이 찡하다. 그 바로 앞 페이지의 까치둥우리 머리를 하고 인중에 허연 코를 두 줄 달고 있는 팔 없는 소녀의 사진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하긴 마찬가지.

최민식 선생은 이 책의 서문에서 "가난과 불평등 그리고 소외의 현장을 담은 내 사진은 '배부른 자의 장식적 소유물'이 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다"고 밝히고 있다. 가슴 서늘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오직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진작업의 생애를 걸 뿐이라는 최민식 선생의 말은 얼마나 믿음직한가! 믿고 싶어도 믿을 것이 없어 몸부림치는 이 허무한 세상에 말이다.

사진작가 강운구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하고 싶다. 몇 개의 책꽂이와 책상 하나가 전부인 내 조그만 방에는 그의 '우연 또는 필연'이라는 대형 포스터 액자가 십몇 년째 걸려 있다. 우리 엄마는 볼 때마다 내다버리라고 하는데 왜냐, 손에 담배가 들려 있는 사진이기 때문이이다. 광부인지 농부인지 얼굴을 안 보여주니 모르겠고 늙고 메마르고 주름진 시커먼 손에 거의 다 탄 담배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서 마지막 연기를 불사르고 있는 손 클로즈업 사진이다. 태백이나 황지 등 광산촌 혹은 폐광 주변 사람들을 즐겨 찍은 그의 사진들을 보면 이상하게도 시적 서정이 물씬 풍겨난다. 그래서인지  몇 년 전 금호갤러리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렸을 때 멋장이로 유명한 정치인 홍사덕이 혼자 와서 그의 사진들을 감상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같은 농부나 광부의 얼굴을 동시에 찍더라도 강운구와 최민식의 사진은 분명 다를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적 서정'인가 뭔가 하는 필터를 안 쓴 최민식 선생의 종주먹을 들이댄 듯한 사진이 훨씬 좋다. 지난 50년 동안 그의 카메라에 포착된 거리와 움막 속의 춥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시적 서정'이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 책 출간 당시 화제가 되었던 시인 조은의 심정적인 해설은 때론 적절하고 감상을 도와주는 역할도 했지만  뒤쪽으로 넘어갈수록 눈에 거슬리고 좀더 솔직히 말하면 짜증스러웠다. 가령 144쪽의 이런 구절을 보라.

--속에 있는 옷의 문양이 정의를 상징하듯 곧고 균일하군요. 하지만 아이가 두르고 있는 거적 같은 현실을 보십시오.

아버지의 구멍 뚫린 홈스펀 양복 윗도리를 뒤집어쓰고 있는 찌그러진 눈의 소년 사진에 가당치도 않은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사람들은 헐벗은 모습으로 움막이나 거리에 나와 있든지 생활의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다. 삶은 고구마 몇 개나 생선 몇 마리를 들고 손님을 기다리는 행상이나, 구멍 뚫린 옷을 입은 바가지머리의 꾀죄죄한 소녀, 그 소녀의 등에 매달린 아기, 깊게 패인 굵은 주름과 합죽한 입의 노인, 부랑아, 그리고 막일꾼 들이 주인공인 것이다.

끼니를 구하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좋으면서도 충격적이었지만 이 책의 맨 앞에 실린 움막 사진이 나는 특히 좋았다. 밥을 끓이고 있는 건지 국을 한 냄비 끓이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벽에 뚫린 굴뚝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최민식 선생의 사진에는 양푼이나 냄비째 국수 같은 것을 먹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유독 많다. 그 점은 사람의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 모습 보기를  좋아하는 나의 기호에도 딱 부합되는 것이다.

 


이런 사진들 앞뒤에 '초라한 날들이 미래의 골조가 될까요?'니 '사랑만이 어둠을 역전시킵니다'하는 시인의 해설은 너무 생뚱맞았다. 물론 사진을 빛내주는 근사한 구절들도 몇 있었지만......


댓글(23)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ooninara 2004-10-28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해설이 정말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네요..그냥 독자가 느끼게 가만 두는것이 좋을듯..

파란여우 2004-10-28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또 최민식 사진이군요. 상처로 가득한 세상을 따듯하게 바라보는 분입니다. 가슴이 울렁거리는군요...배가 고파져요..늦은 점심을 감사하게 먹으러 갑니다....

쎈연필 2004-10-28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해설이 정말 짜증나는군요. 시는 그렇지 않은데.

숨은아이 2004-10-28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이 모락모락 나는 리뷰입니다. ^___^
(그런데, "서울의 순대국밥집이 즐비한 기사식당 골목"이라면, 혹시 연남동인가요?)

에레혼 2004-10-28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장의 사진은 그 자체로 많은 말들과 침묵을 안고 있는 것인데.....
시인의 해설이, 덧말이 '가당찮다'는 님의 지적이 서늘하게 와닿습니다.

최민식과 강운구는, 모든 장르의 대가들이 그렇듯이, 서로 다른 걸음걸이로 걸어와 자연스레 어떤 지점에서 만나 서로 담배 한 대 나눠 피울 것 같아요, 아무 말없이......

옆으로 새는 얘기지만.... 이 글을 보다 보니 오늘 점심엔 국수 한 그릇 먹고 싶어지네요^^

플레져 2004-10-28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침묵, 옥의 티군요.
로드무비님의 리뷰에는 책 리뷰만 있지 않고 님의 삶도 들어있어 애틋합니다.
추천합니다! (너무 좋아서...흐흐...)

urblue 2004-10-28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화당 사진 문고를 보면서 먹먹했지요.
님의 훌륭한 리뷰가 그 느낌을 다시 깨웁니다.

로드무비 2004-10-28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님, 어느 시인이 썼어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조은 시인이 지나가다 이 글을 혹시라도 읽고 기분나쁘면 어쩌죠?^^;
파란여우님, 저도 담담하게 따뜻하게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늦은 점심은 맛있게 드셨는지요?
몽상자님, 조은 시인의 <벼랑에 살다> 읽어보셨나요?
시보다 더 좋은 산문집인데......
숨은아이님, 맞아요. 바로 그 골목입니다.
가끔 남편이 그 골목의 순대국과 감자탕을 사오곤 하죠. 저의 부탁으로......
라일락와인님, 쓰다보니 제가 사진작가 강운구를 조금 비판하는 듯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좋아하지 않는데 십몇 년 그의 전시회 포스터를 방에
걸어놓을 리 없지요.
님의 말처럼 두 분 어느 지점에서 만나 담배를 나눠 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국수는 제일제당 우리밀 햇국수를 육수가 맛나서 애용합니다만......
플레져님, 다른 분들의 리뷰가 이미 몇 나와 있어 저는 차별화시킨답시고
제 얘길 좀 끼워넣었어요. 좋아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블루님, 열화당 사진문고가 사실 그의 책들 중 제일 괜찮은 것 같아요.
슬쩍 하는 이야기지만......

내가없는 이 안 2004-10-28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민식의 자기 사진에 대한 단호한 글처럼 로드무비님의 리뷰도 가슴 서늘하군요.
잘 읽었습니다.

panda78 2004-10-28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해설이 정말 사진과 따로 노는군요. 로드무비님, 이 리뷰 정말 멋져요.
이 책에 대한 수많은 찬사를 많이 읽었지만, 이 책 보고 싶다! 란 생각을 하게 만든 리뷰는 로드무비님의 것이로군요.

로드무비 2004-10-28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님,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너무 반갑네여.^^
판다님, 님의 말을 들으니 어깨가 으쓱으쓱 올라가려고......
추천수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고마워요, 여러분.^0^

엔리꼬 2004-10-29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님의 리뷰를 보면서 사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들지만, 내가 이 책을 산다면 '배부른 자의 장식적 소유물'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로드무비 2004-10-29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림님, 잘 됐습니다.
이 책을 제가 선물할게요. 너무 약소하지만 그냥 받아주세요.
주소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기뻐요.^0^

엔리꼬 2004-10-29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그런 반응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요^^ 아무튼 주신다니 저야 기쁘기 한이 없네요.. 알라딘을 안지도 얼마 안되었는데 벌써 선물까지 받고... 감사합니다.
이 책을 선물받아도 장식적 소유를 고민하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요...
(그리고, 어린시절에 저도 남포동 근처에 살았어요...)

로드무비 2004-10-29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저는 부민동에 살았어요.
반가워요.^^
(장식적 소유니 뭐니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골치 아파요.
저는 그냥 하하호호 마음 가는 대로 살기로 했답니다.
물론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최소한 하면서요.)

2004-10-29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4-10-29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최민식...서글픈 현실이 카메라 앵글을 통해 그의 망막에 서려 있더군요.

로드무비 2004-10-29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접수했습니당.^^
잉크냄새님, 밤늦게(새벽 일찍인가?) 반갑습니다. ^^

2004-10-29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04-10-29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로드무비 2004-10-29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명한 산책님, 고맙습니다.
추천수 열 명 채워주셨네요.^^

다연엉가 2004-11-10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번씩 마음이 뒤숭생숭 할때면 일부러 썩어 문드러진 골목을 누비며 걷습니다. 그 곳의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서 맴을 쓰다듬고 옵니다. 돌아오는 길 낙엽이 쌓여 있는 곳을 일부러 눌러 보고요....저 책 책 사봐야겠습니다.

로드무비 2004-11-10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한 자님, 오늘 님을 자주 만나네요.

썩어문드러진 골목이라는 표현에서 어떤 슬픔이 느껴집니다.

세상에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사람들이 많지요.

언제 어떤 곤경에 처할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사는 게 두렵고도 가슴설레나 봐요.

가끔 님과 얘기 나누고 싶네요.
 
아따맘마 1
케라 에이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친구하고 싶은 여인을 만났다.  아따맘마와 이 만화를 그린 에이코 케라. 책 맨 뒷장에 있는 작가의 프로필을 소개하면 이렇다.

1962년 도쿄에서 태어남. 철이 남들에 비해 늦게 들었고 아무 생각 없이 소녀기를 지내고 나니 현재의 내가 됨.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 보니 현재의 내가 되어 있었다'는 작가의 담담한 독백이 마음에 든다. 투니버스에서 절찬리에 방영되고 있다는  이 애니메이션을 나는 아직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지난주 알라딘의 신간만화 소개 코너에서 이런 만화가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표지를 보는 순간 필이 팍 꽂히는 것이 아닌가! 세상 살아가는 요령은 아직 전무하다시피 한 나이지만 책이나 영화는 한눈에 필이 온다. 그리고 그것은  기대를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 만화는 서른두 가지의 에피소드와 '아따맘마 낙서장'이라고 하여 엄청 웃기는 서른 두 컷의 장면이 올 컬러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심각한 척 어설프게 인생을 논하려고 하지 않고 이렇게 단순하고 소소하게 일상을 잡아주는 만화나 영화가 좋다. 미모나 재능이 뛰어나서 만나는 사람마다 무릎을 꿇게 만드는 그런 따분하고 비현실적인 주인공이 아니라, 경품에 목을 매고, 미장원 갔다 와서 머리가 제대로 안 나왔다고 화를 내고, 자기가 벗어놓은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팬티스타킹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아따맘마 같은 허름한 주인공이 좋다.

중학생인 아들(오동동)과 고등학생인 딸(오아리)과 만년계장쯤 되어보이는 후줄근한 샐러리맨 남편과 조그만 집에서 알콩달콩 때로는 티격태격 살아가는 사십줄의 아줌마 아따맘마.

우리 엄마는 진짜 말을 이상하게 한다.(...)엄마는 머스타드, 와사비, 양념장, 타바스코 전부를 매운 소스라고 부른다. "아리야, 매운 소스 가져와!" "어떤 거?" "그러니까 찌릿한 거!" '타바스코군...'(아리의 혼잣말)

아따맘마와 나의 공통점은 셀 수도 없다. 티백은 두 번 사용하는 것, 팬티나 양말을 버릴 때는 새까매질 때까지 주위를 닦은 다음 버리는 것, 남의 구두를 밟은 채로 자기 구두를 찾는 것, 화장실 휴지가 떨어지기 전에 한 통을 갖다놔야 안심이 되는 것, 벗어놓은 스타킹이나 티셔츠의 엄청난 크기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 빳빳한 새돈은 쓰지 않고 깊숙이 넣어두는 것, 강 같은 야외로 나가면 젊었을 적 피가 끓어올라 어쩔 줄 모르는 것......

알뜰한 살림꾼 흉내는 내는데 야무진 구석이 없고 실수투성이인 이 뚱보 아줌마가 나는 참 좋다. 그의 어리숙한 남편과 아이들도.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우리집 이야기이니까.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urblue 2004-10-10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가끔 투니버스에서 이 만화 봅니다만, 저는 재미를 못 느끼겠더라구요.

로드무비 2004-10-10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쓰기엔 굉장히 곤란한 만화로군요. 이렇다할 만한 스토리가 없다보니......
그래도 저는 아무 생각없는 이 만화가 마음에 쏙 듭니다.
바로 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깍두기 2004-10-10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투니버스에서 봤는데...한 2분 정도?^^ 우리집 애들은 좋아해요. 저는 애니메이션 보다는 만화책이 좋고 영화보다는 책이 좋더라고요. 그러니 이 만화가 재밌을 것도 같은데....로드무비님의 추천도 있으니....^^

깍두기 2004-10-10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저는 이것만 같군요. 남의 구두를 밟은 채로 내 구두 찾는 것.....

로드무비 2004-10-10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마음도 좋으셔.
이런 리뷰랄 것 없는 리뷰에 추천씩이나.^^;;;
빨리 치카님 방으로 갑세다. 이러다 이벤트 놓칠라.^^

깍두기 2004-10-10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 내가 추천했다고 누가 그래요?

내가없는 이 안 2004-10-10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따맘마와 님의 공통점 중에 저도 하나 건졌어요.
빳빳한 새돈은 쓰지 않고 깊숙이 넣어두는 것. ^^

깍두기 2004-10-10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새 제목이 바뀌어서 또 들어와 봤잖아요!^^

불량 2004-10-11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따맘마 정말 재밌게 보고 있어요..^^

날개 2004-10-11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니로만 봤습니다... 우리 아이들이랑 저는 아주 열심히 본답니다.. ^^*

마냐 2004-10-11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아따맘마 마음에 듭니다.

로드무비 2004-10-12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통명랑가족만화가 좋아요.
꺼벙이, 꺼실이 오누이 같은 주인공이 나오는 만화...^^

비로그인 2004-10-13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만화 꼭 봐야겠어요.^^ 그리고 친구로 만들어 버릴래요 ^^;;

로드무비 2004-10-14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니님, 꼭 그러세요.^^

김선민 2005-05-28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안에 올컬러인가요?
 
호박과 마요네즈
나나난 키리코 지음, 문미영 옮김 / 하이북스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호박과 마요네즈>는 몇 년 전 홍대 앞의 만화서점에서 살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던 책이다. 어쩌다 이 책이 눈에 띄었는데 제목이 먼저 눈길을 끌었고 꺼내어보니 푸른빛 심플한 표지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책을 책꽂이에 도로 꽂았을까? 작가의 이름이 낯설었고 의심을 품고 보니 책표지가 너무 심심했던 것이다. 지워질 듯 가느다란 선으로 무심한 표정의 아가씨를 하나 달랑 그려놓았는데 세상에나, 그게 다였다. 주인공이 입은 티셔츠에 무늬 하나 그려놓지 않은 만화가 다 있다니!

이런 만화 처음 본다. 대부분의 여성 만화가들은 주인공의 옷에 심혈을 기울인다. 독특한 디자인이며 무늬며 어떤 때 보면 유명 패션디자이너 저리 가라이다. 모르긴 몰라도 만화를 그리다가 패션 디자이너로 전업한 만화가도 찾아보면 몇 명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나난 키리코의 <호박과 마요네즈>에는 패션이 없다. 주인공들을 홀랑 벗겨 내보낼 수 없으니까 최소한의 선으로 의상을 지정한다고 할까. 단추라도 몇 개 달아주면 감지덕지일 정도이니 나는 작가의 그런 드라이한 점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호박과 마요네즈>라는 제목도 따지고 보면 홍상수의 영화 제목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식이다. 이 작가는 '일상' 속의 사랑을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담담하게 읊조리고 있는데 우리가 슈퍼에 가서 호박 한 덩이와 마요네즈를 집어들 듯 무심하고 태평한 얼굴이다. 주인공들은 20대의 젊은이들인데 젊음의 열정은커녕 세상에 태어나 악다구니라고는 써본 적이 없는 듯 체념한 얼굴로 살아간다.

여주인공 미호, 하루종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우리 식으로 쉽게 표현해서--봉지쌀과 연탄 두 개를 간신히 사들고 집에 돌아왔더니 집은 정신없이 어질러져 있고 동거하는 남자친구는 머리에 까치집을 짓고 빈둥거리고 있다. 시간제 아르바이트로는 생활비가 턱없이 모자라 남자친구 몰래 술집에까지 나가는 처지이다.  "난 오늘 하루종일 일하고 왔는데 넌 집에서 하루종일 뭐했어?" 참다못한 미호의 입에서 나오는 외마디 비명이다.  "네가 하고 싶은 그 음악 때문에 나까지 내돌려지고 있는 것 아냐!"그러나 그 목소리는 높지 않고 낮다. 음악을 하느라 돈도 벌지 못하고 여자친구에게 얹혀 사는 세이도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한다. "자신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남한테 편승하려 하지 마!" 이쯤 되면 이미 그들의 사랑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호는 결국 길에서 우연히 만난 야비하기 짝이 없는 전 애인 하기오와 새로 사랑을 시작한다. 그런데 글쎄 그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랑이 시들고 지루하고 구차한 일상만 남을 때 사람들은 무엇으로 자신의 사랑을 지켜낼까?  나나난 키리코의 <호박과 마요네즈>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등장인물들--몇 되지도 않는--의 입을 통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툭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냉큼 받아서 적고 싶을 만큼 군더더기가 없다.

'우리들의 이 흔해빠진 일상은 실은 아주 망가지기 쉬워서 끝내 잃어버리지 않는 건 기적이다.'

<호박과 마요네즈>의 마지막 내레이션이다. 그렇다. 어찌 보면 시시하기 짝이 없는 누추한 나의 일상이나 사랑도 안간힘을 통해 기적적으로 쟁취한 평화이며 로맨스인 것이다. 새삼스러운 그 깨달음이 얼마나 반가운지......이 만화를 읽어본 사람들은 다 안다.

 

(#바람구두님 이벤트 때 느림님이 강력 추천하셔서 이 만화를 구입해 읽게 됐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어쩐지 여주인공 미호의 얼굴과 자취방에 자꾸 느림님 이미지가 겹치더군요.)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urblue 2004-10-01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이것도 빌려주시면 어떨지?
그런데 홍대 앞에 만화서점은 어디 있나요?

superfrog 2004-10-0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박과 마요네즈 보셨으니 이제 <블루>와 <워터>를 추천합니다..^^

로드무비 2004-10-0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바꿔볼 책 하나씩 메모해 놓읍시다.^^
홍대앞 한양툰크는 동교동 농협에서 꺾어져 한참 들어가는 골목에 숨어 있는데
그집 사이트 들어가서 찾으시오. 길치한테 길을 묻다니! 그런데 그집 호박 이 책은
품절입디다.
금붕어님, 위의 것들도 나나난 키리코 것인가요?
그리고 저번에 말씀하신 <5년생>은 혹시 어디 파는지 알고 계시나요?

superfrog 2004-10-01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와 워터는 키리코 나나난 작품이 맞구요, 5년생은 예전에 산 것들인데 혹시 홍대앞 가시면 어느 구석에선가 찾으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에레혼 2004-10-01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읽고 싶어요
표지 그림만으로도 '내 과'라는 필이 오네요...^^
이것도 줄서기 할까요?

로드무비 2004-10-01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붕어님, 재주껏 구해 볼게요.
라일락와인님, 나중에 읽으셔요.^^
표지그림만으론 내 과가 아닌데...전 좀 구질구질해요, 사람이...아주 마음에 듭디다!

2004-10-01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저자 이름이 마음에 드는군요. 나나난 키리코..

날개 2004-10-01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는 요 책을 오래전에 읽었습니다.. 아주 건조한 느낌이었는데..^^;;
한때, 이 책이 대유행해서 막 품절나고, 결국엔 해적 출판사에서 재판이 나오는 사태도 발생했었죠..

내가없는 이 안 2004-10-02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시한 일상도 안간힘으로 쟁취한 평화란 말... 격려해주는 듯한 말이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