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터 [dts] - 마블+와이드미디어 할인행사
패티 젠킨스 감독, 리 터제슨 외 출연 / 마블엔터테인먼트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극장에 가서 보고 싶었으나 끝내 보지 못했던 영화 <몬스터>를 보았다. 패티 젠킨스 감독. 여주인공 린을 열연한 샤를리즈 테론에게 2004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안겨준 영화다.

'몬스터'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이며 영화들이 꽤 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흥미진진한 만화 <몬스터>, 영화 <몬스터볼> <쓰리 몬스터> <몬스터 주식회사>.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만 해도 이 정도이다.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몬스터'라는 단어에 매료되어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주인공 린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레이션과 함께 필름이 돌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어린 시절의 사진은 그것이 누구이든 사람들에게 큰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세상을 모르던 시절의 그 미소는 어떤 때는 가슴을 쥐어뜯게 만든다. '아아, 내가 이렇게 멀리 와버렸구나. 너무 많이 망가졌구나! 이제는 저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없구나!'

린은 어린 시절 배우를 꿈꾸는 예쁜 소녀였다. 그런데 아빠가 자살하고 어린 동생들과 살 길이 묘연해 열세 살부터 몸을 판다. 여덟 살 때 아버지의 친구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고했으나 믿어주지 않고 도리어 야단만 맞았다. 얼마나 억울하고 분했을까. 그 뒤로도 아버지 친구의 유린은 계속되었다. 그토록 어린 나이에 창녀가 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 먹여살렸는데 동생들은 자라서 그런 그녀를 쫓아낸다. 남부끄럽다고...

어느 날 자신이 너무 많이 망가져버렸음을 깨달은 린, 더이상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죽기 전에 목이나 축이려고 바에 들어왔다가 운명의 친구 셀비를 만난다. 동성연애자인 셀비. 그때부터 셀비의 존재는 린에게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그녀는 누구를 그토록 좋아해본 일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셀비 역의 크리스티나 리치는 묘한 차가움과 중성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얼굴. <아담스 패밀리>를 시작으로 <Now and Then> <슬리피 할로우> 등의 영화에 나왔다.

"일주일만 함께 있자. 나 같은 사람 다신 못 만날거야."(린)

"나 책임질 수 있지?"(셀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므로 창녀 짓을 때려치우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겠다는 린의 각오. 그러나 셀비의 친척 아줌마가 그랬듯이 사람들은 린을 딱 한 번만 보고도 그녀가 창녀임을 대번에 알아본다. 험상궂게 살아온 삶의 이력이 화인(火印)처럼 얼굴에 새겨진 것이다. 셀비는 돈을 벌어올 것을 참으로 당당하게 요구하고...궁지에 몰린 린은 어쩔 수 없이 다시 거리로 나가게 된다. 사무실에서 펜대를 굴리고 외모는 곱상하고 세련되기까지 한지는 몰라도 린을 몬스터처럼 흉물스럽게 쳐다보는 영화 속의 그 신사숙녀들이 내 눈에는 몬스터처럼 보였다. 어색해 죽겠는 걸 참고 취직하려고 애쓰는 린의 씰룩씰룩한 그 표정은 내 눈에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린의 독백. '나한테 상처를 준 건 오히려 선량한 사람들이었다....내가 뭘 믿을 때 얼마나 큰 인내심을 발휘하는지 사람들은 모른다.'

다시 돈을 벌러 나선 린이 으슥한 숲에서 험악한(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그 장면) 꼴을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그놈을 쏴죽였을 때 나는 벌떡 일어나 "잘했다! 그런 놈은 죽어도 싸다."하고 소리를 쳤다.(실제로!)그런 일들을 겪고도 고상하게 인생의 의미나 읊조리며 사는 인간이 있다면 그야말로 몬스터가 아닐까!

살인을 계속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기진맥진 초주검이 되어 돌아오는 린.

"몸파는 일을 왜 그만둔 거야? 맨날 파티하자더니! ...별장은 어떻게 된 거야?"(셀비)

"넌 나와 달리 곱게 살아온 사람이야. 그런데 세상일 나몰라라하고 사는 건 좋은데 제발 내 말도 좀 들어줘!"(린)

린이 어떻게 벌어온 돈인지도 모르고(사실 짐작은 하고 있다)  흥청망청하는 셀비는 린이 보는 앞에서 태연하게 다른 여자에게 정신이 팔려 있다. 아아, 저런 것이 인생이라면 정말 그만 살고 싶다. 놀이공원의 대회전관람차는 린의 독백처럼 꽤나 상징적이다. '생각한 것과 다른 것에 삶의 묘미가 있지. 어릴 때 반짝반짝 불을 밝히고 있는 놀이동산의 대회전관람차처럼 말이야. 얼마나 그것을 타보고 싶었는지. 그런데 어느 날 막상 내 차례가 되어 탔을 때 토할 것 같고 너무 무서워서 내려버렸지.'

사람들은 어릴 때 현실 속의 나와는 다른 사람을 꿈꾼다. 나의 가능성을, 그리고 자신이 원석(原石)임을 한눈에 알아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으로 가공시켜줄 누군가의 출현을 기대한다. 어린 시절의 린처럼. 그러나 린은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를 달고 12년 동안 복역하다가 2002년 사형됐다. 이 영화는 실화이다.  법정에서 린에게 손가락을 가리킴으로서 우정을 배신한 셀리는 그 뒤 단 한번도 린을 찾지 않았다고.

사랑에 있어서의 승리자는 오히려 그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린이었다. 그 사실이 내게 조그만 위로가 되어주었다. 샤를리즈 테론은 보기만 해도 신산스러운 그 표정으로 린을 200프로 소화해 냈다. 셀비 역의 크리스티나 리치도 적역이었다. 영화 <몬스터>는 어제 오후 나를 넉아웃시켜버렸다. 린의 인상적인 대사처럼......

"사람들은 매일매일 나가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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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6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4-09-1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극장에서 보려고 했는데, 개봉한 곳도 별로 없었고 너무 빨리 끝나버렸지요. 아우, 보고싶어라. 이번 주말용으로 찜했습니다.

깍두기 2004-09-16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지 보고 싶네요. 전 집에서 비디오를 보면 중간에 잠들어버리는 경향이.....^^ 누군가가 늙었다는 증거라고 그러데요.

내가없는 이 안 2004-09-16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슬프고 가혹해서 전 못 보겠어요. 이 느낌이 맞나요, 아닌 로드무비님이 리뷰를 너무 잘 쓰신 건가요? 농담 아님.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진짜로 못 보겠음. ㅠ.ㅠ

미누리 2004-09-16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몬스터 주식회사 이야기 쓰고 여기와서 몬스터를 또 보게 되어 놀랐습니다. -__-;;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혼자 머쓱해서 답글 달고 간다고 덧붙이러 왔습니다.

로드무비 2004-09-16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여주신 님은 이 영화 보지 마세요.
좀만 기다렸다가 보세요. 아셨죠?^^
블루님, 이 영화처럼 이상하게 땡기는 영화들이 있잖아요.
님도 저랑 성향이 비슷하신 건지...
깍두기님, 저는 빌려다놓고 못 보고 갖다준 영화가 한 박스는 될 겁니다.
그래도 꼭 보세요. 졸 틈이 없을걸요?^^
이 안님, 그렇게 여리셔서 어떻게...
저는 정신이 번쩍 나는 것 같은 이런 영화를 좋아해요.^^
미누리님, 저도 님 방에 놀러갈게요.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반가워요.^^

숨은아이 2004-09-16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몬스터"라는 말, 저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래서 이 영화 볼 생각도 안 했는데... 이 영화 봐야만 할 것 같네요. 울면서 이 여자의 명복을 빌어줘야만 할 것 같아요. 웅~ 일케 가슴이 미어지게 글을 쓰시다닛.

하얀마녀 2004-09-16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로 볼 마음 없었는데 리뷰를 읽고 나니 보고 싶어지네요.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어찌 그리 잘 쓰셨나요. ^^

로드무비 2004-09-16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울고 싶은날 이 영화 보세요.
정신이 번쩍 날 거예요. 전영경 씨 시는 내일 올릴게요.
하얀마녀님, 헤헤 제가 좀 잘 썼죠?
마음 가는 대로 썼더니...^^

마냐 2004-09-17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고...보고 싶은 영화, 아직도 못보고 있었네요.
알라딘은 요즘 책 뽐뿌에 음반 뽐뿌에 영화 뽐뿌까지 정신이 없네요. ^^

로드무비 2004-09-17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영화 리뷰도 보고 싶네요.^^

2004-09-17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너무 빨리 끝나버렸어요. 몇군데 개봉도 않고...전 이상하게 극장에서 보려고 맘 먹고 있던 것을 못 보면 비디오로 보기가 싫어서...클///
 
오리 선생 한호림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Sign 1 오리 선생 한호림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Sign 1
한호림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그래픽 디자이너로, 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 등 일련의 베스트셀러를 내어 주목을 끈 바 있는 오리 선생 한호림의 세계 뒷골목 간판 기행문이다. 영어로는 사인(Sign). 간판보다는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사인'이란 우리나라의 간판처럼 그 건물이나 집의 이마빡에 내건 옥호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그 집을 이미지나 어떤 문자로 상징하는 것이다. 그곳이 학교인지 관공서인지, 또 식당인지 여관인지, 또 식당 중에서도 치킨집인지 국수집인지......아주 세부적으로, 혹은 뭉뚱거려서.

내가 이 리뷰의 제목을  '선술집, 실비집, 여인숙' 등의 철지난 단어들을 끄집어내어  꽤나 서정적으로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일단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는 것이다.  그처럼 '사인'은 그야말로 어떤 집(숍)이 사람들에게 보내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이러한 맞춤한 곳이 있으니 얼른 오시오!" 하는......

저자 한호림은 지난 20여 년 동안 전세계 뒷골목을 돌며 그의 눈길을 끄는 사인들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셔터를 눌러 왔다. 시각 디자인 오브제를 찾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마침내 2년 전 그가 집대성하여 두 권으로 낸 이 책에는 미술적으로 가치를 인정받는다거나 이름만 대면 사람들이 아아, 하고 넘어가는 유명한 곳 중심이 아니라 세계의 뒷골목에서 오늘도 손님을 기다리며 불을 밝히고 있는 희미한 사인들이 저마다의 독창성을 뽐내며 모여 있다.

들머리를 장식한 각종 모뉴먼트, 멋드러진 글씨의 채널 레터, 엠블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장(紋章), 올빼미나 고양이 등의 조그만 청동 주조물, 벽에 새겨진 부조, 벽화, 공룡 등 거대한 동물 모형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아이 캐처(eye-catcher), 로고, 옥외의 메뉴 보드 등 사인의 종류는 무척이나 다양하다.

하버드 대학교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뒤쪽의 샛문에 '진리는 하버드 유니버스티의 상징'이라는 조그만 부조 하나밖에 학교를 알리고 자랑하는 그 무엇도 없다고 한다. 이런 점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몇 개 안되는 미덕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해적 캐릭터가 유머러스하게 그려진 해적학교가 있다는 점도 마찬가지.

벽화가 정말 예쁜 세계의 유치원과 탁아소들, 도서관과 출판사와 서점들도 빠트릴 수 없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올드타운의 고색창연함. 이곳 광장 가게들의 특징은 가게 이름이나 업종을 쓰지 않고 건물의 장식을 겸한 조그만 아이 캐처만 설치했다는 것. 가령 정육점에는 쇠머리에 쌍도끼 심벌만 걸려 있을 뿐이다. 폴란드는 특히 놋쇠 빛깔의 '모루(anvil)' 하나만 문 위쪽에 달랑 걸어놓고 '영업중'이라는 의미로 약한 촉광의 등불을 켜놓는다니 그 골목과 거리의 서정이 눈에 선연히 잡히는 듯하다.(우리 나라 도심의 건물 외벽을 도배질하다시피 한 어지러운 간판들과 현수막과 정말 비교된다.)

미국의 벼락부자들과 세계적인 스타들이 모여 사는 동네 비벌리 힐스, 북유럽의 집집마다 하나씩 있는 예쁜 우편함, 동물병원, 숙박업소....저자는 참으로 온 세계 구석구석을 발로 누빈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 매사추세츠에 있다는 '옛 항구여관(The Old Harbor Inn)'은  짐 자무쉬의 영화 <천국보다 낯선>에 나온 그런 허름한 여인숙이 아닐까. 언제 기회가 되면 그 집에서 며칠 묵었으면 좋겠다. '강이 보이는 여인숙(Riverview Inn)'도 "여섯 시에는 잠잘 곳을 정하세요' 라는 뜻이라는 'Motel 6'도 심플해서 너무 좋다.

페루 안데스 깊은 산속 조그만 호스텔의 외벽에 써놓은 호스텔의 이름(Y'LLARY HOSTAL)은 예술이고, 프랑스  마르세유의 한 튀니지 음식 전문점 벽 색깔과 레터링은 정말 환상적이다. 주머니가 가벼운 노동자들을 겨냥해 생긴 실비집들. 토론토의 한 실비집 이름은 '간단하게 때울 분 오십시오(Hello Toast Restaurant)'라니 구미가 당긴다.

거리의 간이매점인 키오스크, 세계 곳곳의 작은 옷집들, 거기다 움직이는 빌보드라 할 수 있는 트럭, 트레일러, 미니밴의 화려하고 개성적인 외양들......

이 책을 읽고 나자 나는 갑자기 카메라를 하나 들고 우리 나라 소읍이나 산간, 혹은 바닷가 마을 가게들을 한번 샅샅이 훑어보고 싶어졌다. 감자볶음 사진 하나 못 올리는 형편에 정말 야무지고 얼토당토않은 꿈이 아닐 수 없다.


사진은 이 책의 본문 중 한 페이지. 집집마다 있는 북유럽의 예쁜 우체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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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4-09-14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번화가에 서로 자기만 눈에 잘 띄려고 호화찬란 대문짝만한 간판을 보면 심란하죠. 이쁜 그림이 많이 있을 것 같네요, 이책에.

밥헬퍼 2004-09-14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으로는 시선을 잡는다는 것은 일단 성공한 셈입니다. 제가 그런 곳에 대한 실제로 접해 본적은 없지만 늘 그런 표현들이 가슴에서 풋풋하게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삶의 장소여서 그런 모양입니다. '선험적 경험'이 가능할까? 라지만. 카메라들고 멀리 가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집 안에도 있을 것이고, 문밖 조그만 가게도 있지 않겠어요. 재미있는 책이네요. 근데 별이 3개인 이유는 뭔가요?

로드무비 2004-09-14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정말 그렇죠?
특히 일산!
밥헬퍼님, 이 책에 별을 세 개만 준 이유는 너무 사진 중심이고 좀 잡다했다는 겁니다.
전문가들이야 구구한 설명 빼고 하나라도 사진자료 올린 걸 반가워하겠으나
저는 좀더 서정적인 글이 함께 했으면 더 좋지 않았나 싶어 아쉬웠거든요. 그래도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sandcat 2004-09-14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보고싶어요.
사진집이라고 생각하면, 가격도 그리 비싸진 않군요.

로드무비 2004-09-14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ndcat님, 호화 장정의 사진집치고는 싼 편이에요.
님도 관심분야가 다양하시군요. 세상의 뒷골목이라는...^^

urblue 2004-09-14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야말로 관심 분야가 다양하세요. 이런 책도 보시는구나.
지난 주 아일랜드에서 시연이랑 재복이랑 오토바이 가게에서 나와 울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통닭집인가 뭐 간판들 사이의 골목길에 둘이 쭈그려 앉은 모습. 그런 느낌일까요?

2004-09-14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09-14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아블루님, 바로 그거죠. 허름한 뒷골목 풍경......좋잖아요.^^
속삭여주신 님, 고맙습니다. 칭찬해 주셔서......힘이 불끈불끈 납니다.^^
그런데 이왕이면 칭찬만 하지 말고 추천도 좀 눌러주시지...^^;;;

urblue 2004-09-14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죄송해요. 제가 좀 전에 정신없어서 추천 눌르는거 잊었다구요. ㅠ.ㅠ

로드무비 2004-09-14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유아블루님한테 드린 말씀이 아닌데...
누가 칭찬만 잔뜩 하고 그냥 가서 괜히 한 번 해본 소리예요.
호호호, 블루님...아무튼 고마워요.^0^

2004-09-14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동네 뒷골목 풍경이야말로 사진에 남겨둘 만하거든요..제가 이사 온 4년 전만 하더라도 정말 국보급이었는데, 순식간에 재개발로 초토화 되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기록작업^^ 해야 겠단 생각을 실천해 옮겨야 겠습니다.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꾸욱~

로드무비 2004-09-14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님 사시는 동네가 어딘지 궁금합니다.
더 늦기 전에 꼭 기록해 주시길......^^

플레져 2004-09-14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계획이 잘못되있어요. 일본도, 홍콩도... 무조건 간판만 걸어놓고 이목을 끌기 위한 장삿속. 가끔은 간판이 이쁜 집, 이쁜 글씨체로 쓴 가게에는 무턱대고 들어가고 싶어져요...
가게 이름이 정말 구미를 당기는군요! 님의 리뷰도...^^ 추천 꾹~!

로드무비 2004-09-15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그죠? 저는 가게 이름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세상의 예쁜 가게 모두 가보고 싶어요.^^
추천 고맙습니다.^0^

내가없는 이 안 2004-09-15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감자볶음에 사진 넣어달라고 요청한 것이 괜스레 찔리네요. ^^
그건 그렇고 로드무비님 리뷰 읽다보니 그냥 확 나서고 싶네요. 좀전에 읽은 책에선 등산 얘기가 나와 산에 오르고 싶다가 지금은 어디고 걷고 싶으니... ^^ 별 세개지만 추천해요!

로드무비 2004-09-15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안님, 날씨가 너무 좋으니 자꾸 나가고 싶죠?
가까운 숲이나 공원이라도 자주 나가야겠어요.
가까이 살면 벤치에서 만나 커피라도 한잔하고 할 텐데.....
그리고 이 안님이 찔리실 것 하나 없어요.^^
 
거짓의 사람들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계모의 말만 듣고 아직 어린 아이를 돌아가며 구타한 한 마을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도벽이 있다는 계모의 말만 듣고 마을 사람들은 아이를 볼 때마다 한 명씩 돌아가며 머리통을 쥐어박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나는 그 기사가 사실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집단악'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무시무시한 영화를 한편 보고 난 기분이랄까. 현실은 종종 나쁜 영화보다 훨씬 악독하다.

악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여는 책이라고 <월 스트리트 저널>이 극찬했다는 M.스코트 팩의 <거짓의 사람들>을 읽었다. 저자의 머리말 첫 대목이 "이 책은 위험한 책이다"이다.

'인간의 악을 직접 들여다볼 수 있기 전까지는 치유의 희망을 꿈꿀 수 없다. 그런데 악이란 기분좋은 볼거리는 아니다.' 인간의 어두운 면을 다룬 책이 유쾌하게 읽힐 리는 없다. 그런데 나는 그 어두운 면에 평소 호기심이 많다.

10년 전쯤, 남대문시장 골목 노상에서 칼국수를 사먹는데 나는 칼국수를 말아주는 여성의 안 보아도 좋을  얼굴을 보고 말았다. 어쩌다보니 나는 손님이 하나도 없는 그녀의 좌판 앞 긴 나무의자에 궁둥이를 걸쳤다. 다른 나무의자 위는 바글바글했다. 그녀는 그것이 몹시 유감이었던 듯 혼자서 앙앙불락이었다. 그나마 하나 얻어걸린 손님에게 친절하게 대하긴 해야겠는데 기분이 몹시 나쁘니 혼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도 덩달아 어쩔 줄을 몰랐다. 억지로 웃는 얼굴의 무시무시함이라니! 그녀는 여차하면 자신의 손님을 모두 가로채가는 옆 가게 여자에게 칼이라도 던질 기세였다. 나는 침통한 얼굴로 칼국수를 먹었다. '하고많은 가게 중에 왜 하필 이런 가게로 기어든 거야. 아아, 내가 사는 건 왜 이 모양일까!' 속으로 탄식하며 말이다. 나는 왜 그때 그녀의 안 봐도 좋을 얼굴까지 고스란히 보고 앉아 있었던 것일까! 내게도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그날 저녁 퇴근 후 내가 좋아하는 시인을 만났다. "신이 내릴려나, 제 눈엔 요즘 이상한 게 자꾸 보여요. 모르고 지나가도 좋을 사람들의 얼굴까지!" 그날 낮에 본 칼국수집 여자 이야기를 하자 그 시인은 씨익 웃으며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걱정 마! 로드무비는 절대 신이 내릴 얼굴이 아냐!"

"가려진 영혼 속에서 벌어지는 섬뜩한 숨바꼭질 놀이, 단 하나뿐인 인간의 영혼은 그 속에서 혼자서 치고받다 스스로 피하여 숨는다."(저자가 Good and Evil이란 책에서 인용한 글)

위의 구절은 남대문시장 칼국수집 여자가 국수를 끓이고 또 내가 국수를 다 먹길 기다리는 20여 분 동안 보여준 바로 그 무시무시한 원맨쇼에 대한 기록에 다름아니다.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저 구절을 보는 순간 그녀가 의식의 수면 위로 둥실 떠올랐다.

악은 아주 멀쩡하고 태연한 얼굴로 우리의 일상 속에 출몰한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알코올로 도망가는 것만이 악이 아니다. 악은 아주 교묘한 모습으로 나타나 어느 날 문득 우리의 삶을 뒤흔든다. 자기 기만, 무정한 것, 이 모두도  악에 포함된다.

교회 헌금통 속에 55센트를 넣다가 어느 순간 '너는 55세에 죽을 것이다'라는 밑도끝도 없는 문장이 머리속에 떠오른 조지. 차를 달리다가 45마일 속도제한 표지판을 보는 순간 '너는 45세에 죽을 것이다' 하는 말이 떠오른다. 그는 결국 그런 식의 강박에 시달리다 못해 상담을 받기 위해 저자를 찾아온다. 그는 얼마나 그런 생각에 시달렸던지 마침내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악마와 계약을 맺는다. 그는 그 전까지만 해도 아주 평범하고 멀쩡한 시민이었다.

또 이런 부모도 있다. 형이 자살한 후 급격히 우울증에 빠진 소년 바비. 그의 무정한 부모는 그런 아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총을 선물한다. 바로 바비의 형이 자신을 쏘았던 그 총을......

부모자식 간의 기묘한 관계(바비, 로저의 두 경우), 뒤틀린 부부관계(사라와 하틀리), 애증의 모녀(빌리), 자신의 상담의사조차 가지고 놀고 장악하려다 실패하고 사라지는 찰린이라는 독신 여성......이 책에는 정말 이 인간 세계에서 타인과 자신을 속이며 어두운 얼굴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그 생생한 사례들을 읽다보면 깨닫지 않을 수 없다.거짓을 바탕으로 한 관계는 반드시 무너지고 만다는 걸......

'악한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겁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 모습이 빛 가운데 드러나는 걸 끊임없이 피하면서 자신의 목소리 듣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완전한 공포 속의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더이상 지옥에 갈 필요가 없다.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악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 무시무시한 실체 그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이 책을 쓰는 나의 의도다.'

나는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속에서 내 속에도 고스란히 있는 악의 씨들이 꿈틀꿈틀하는 걸 느꼈다. 그런데 저자의 다음과 같은 명쾌한 정의가 조금 위로가 된다.

'인간은 우연히 악의 파트너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성인이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어쩔 수 없이 악의 세력에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덫을 놓는 것이다.'

나는 적어도 스스로 덫을 놓고 그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우를 범하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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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2004-09-11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으니, 저에게도 떠오르는 책이 하나 있네요, 다시 들춰보고 저도 얘기를 하나 풀어놓고 싶어집니다.
이런 게 바로 웹의 효과가 아닐까요, 거미줄이 확산되듯, 하나의 줄에서 또 다른 줄이 이어져 나오고, 그렇게 한 줄 한 줄 이어져 또 하나의 새로운 망과 공간이 생겨나는 것......

누구든 우연히 악의 파트너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 선이든 악이든, 그 씨앗은, 그 선택의 실마리는, 그 결정적 계기는 모두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자라고 있는 걸까요?

하얀마녀 2004-09-11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잘 쓰시네요. ^^

로드무비 2004-09-11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락와인님, 빨리 하나 풀어놓으세요.
이 리뷰를 읽고 뭔가 떠올랐다니 몹시 궁금합니다.^^

하얀마녀님, 역시 잘 쓰죠? 호호호(방자한 웃음)
인간에게 최고의 악은 교만과 태만이래요.
이 책을 쓴 분이 그렇게 말했어요.^^;;;

superfrog 2004-09-11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에게 최고의 악은 교만과 태만.. 흠.. 같은 글자로 끝나는 낱말인데도 전혀 다른 의미로군요. 타인의 교만에 심하게 질리고 자신의 태만에 괴로워하고 있어요..;;;

로드무비 2004-09-1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 질렸다는 말씀이세요? 금붕어님? 엉엉.
저는 교만과 태만을 다 가지고 있어요.엉엉.

水巖 2004-09-11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역시 잘 쓰시네요. 군더덕이 없이.

플레져 2004-09-11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에서의 악을 가면이라고 했을 때, 예전에 아주 강했던 친구가 요즘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요. 그애 답지 않은 연약한 행동들 때문에 기막힐 뿐이지만, 친구 역시 강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약함을 들키고 싶지 않은 겁많은 소녀가 아니었나 싶네요. 별 다섯개에 어울리는 리뷰여요! 보관함에 넣겠습니다 ^^ 추천~!

2004-09-11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깍두기 2004-09-11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만 읽고도 무서워지니 이 책을 읽어야 할라나요?
님의 칼국수집 아줌마 이야기 정말 리얼하군요. 나도 생에서 그런 얼굴을 남에게 보인 적이 없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로드무비 2004-09-12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암님, 고맙습니다. 군더더기가 없다는 칭찬......(__)
플레져님, 저는 저 책 속의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꼈어요.
단, 자식을 교묘하게 학대하는 부모들 빼고...
깍두기님, 마음이 가면 읽으시고 두려움이 느껴지면 읽지 마세요.
읽고 싶은 책만 읽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2004-09-12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싶었는데, 읽으셨군요. 저도 읽으려도 벼르고 있어서 리뷰는 안 읽었어요..책 읽고 읽으려고요,ㅎㅎ.어쨌든 기인~ 리뷰...짝짝짝! 아, 리뷰는 안 읽었는데 댓글만 읽고도 추천!

2004-09-12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4-09-15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군요.^^
자기기만과 무정,뒤에서 살짝 웃고 있는 메시스토펠레스에 대해 동의합니다.근데 또 한편으론 자기위무를 위한 악도 가능하리라 생각해요.허무적인 위악이 될 수도 있으나...제가 최근에 본 오에 겐자부로의 책에서도 이러한 느낌이 많았습니다.현상적인 악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존재하며 수시로 꿈틀거리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절망과 공포가 악의 한 모습일 듯 해요. 때론 본인의 의지를 부드럽게 설득하며 좌절시키는 두려움도 그 깊은 모습중하나가 아닐까....

드팀전 2004-09-1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아주머니의 얼굴에서 악을 연상하신 건 너무 낭만적 관찰자의 시선인거 같아요.꼭 그런식은 아니어도 좋았겠으나.그녀의 생활을 위한 치열함이 그런 얼굴을 낳았다면...삶의 치열함이 악이 되어야만 하지요.가끔 장사하시는 분들의 과격한 열정이 눈에 거슬리고 한심해 보일때도 있긴하지만 먹고 살기 위한 애씀으로 이해하시는게...

로드무비 2004-09-15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드팀전님. 반갑습니다.
저는 평소 시장통의 악마구리같은 소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제게 없는 생의 열기 같은 걸 부러워도 하고요.
그런데 그 아주머니에게서 악을 본 건 스스로 절제할 수 없는 분노.
어딘가에 사로잡힌 것 같은 모습...그것 때문이죠.
정말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거든요.
제 속에 있을지도 모를 분노 그런 것 때문에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 낭만적 관찰자의 시선이라는 말씀은 조금 억울해요.
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할 수 없지만...^^

드팀전 2004-09-15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억울하셨다니 죄송해서 어쩌나 .....쯥
전 시장통의 소음을 별로 안좋아합니다.제가 관찰자죠.
단 마음에 뭉게 뭉게 피어오르는 낭만성을 자제하려고 하지요. 뭐 그런 경계심 아닐까해요.
시골에서 농부들 보면 도시인들이 멋도 모르고 "아...시골에서 농사나 지었으면.."이런 헛소리 하진 말자는.....그런 낭만성에 대한 자기경계정도...
자주 들를게요.

로드무비 2004-09-15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안 삐졌어요, 드팀전님.^^

라이더 2005-01-13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보,예스24를 능가하는 알라딘의 리뷰. 이래서 다시 돌아오곤 합니다.

잘 읽었어요. 알라딘은 전공서적(원서) 서포트좀 잘 하라!!!
 
오소리 아저씨의 소중한 선물
수잔 발레이 글 그림 / 지경사 / 1998년 7월
평점 :
절판



 

일본 치가사키현의 하마노고 초등학교는 복도와 교실을 구분하는 벽이 없다. 외양만 독특한 것이 아니다. 열린 학교다. 일본 전역에서 교사들이 이 학교를 찾아와 수업을 참관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간다.

이 학교의 초대교장 토시아키 오세이 교장(57세). 1960년대에 교사 생활을 시작하여 정년퇴직을 몇 년 앞두고 있다. 교사 생활뿐만이 아니다. 위암 말기로 3개월에서 기껏해야 6개월 살 수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는 이 사실을 숨기기는커녕 죽어가는 인간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인생의 가치를 가르치는 데 활용하기로 한다. 세상에, 자신의 죽음을 교육 소재로 써먹는 교사라니!

그는 매일 아침 교문 앞에서 약 700여 명의 아이들을 웃으며 맞이한다. 그뿐인가, 틈만 나면 아이들 사진을 찍어 복도에 주르르 전시하는데...

그의 교육철학은 이것이다. 어디까지나 아이들의 편에서...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교육이다. 교사들은 수업의 주제가 정해지면 먼저 아이들을 데리고 현장에 나간다. 가령 '치가사키의 훌륭한 해양환경'이 주제라면 선생님과 아이들은 바다에 가서 고깃배도 타보고 수산물 가공공장도 견학하는 것이다. 이 수업을 맡은 교사는 공개수업에서 그 고장의 바다를 자랑하는 문안을 아이들에게 생각해 보라고 한다. 한눈에 봐도 개구장이인 한 소년이 이렇게 말하며 낄낄댄다.

"더러운 바다지만 최선을 다해 볼게요."(이 말이 나는 너무 마음에 들었다.)

교사는 당황하며 사람들이 가보고 싶은 바다가 될 수 있도록 문안을 써야 하지 않겠냐고 하는데 교사들의 평가회에서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오세이 교장도 점잖게 한마디 거든다.

"듣고 냄새 맡고 만진 모든 것들을 아이들이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교사의 틀에 맞춘 교육은 지양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 한 명의 교사가 있다. 교사 생활 4년차인 모리타. 그가 지향하는 건 흥미로운 수업이다. 어디서 그렇게 멋들어진 티셔츠만 사서 입는지.(나는 그의 교육철학보다 그 티셔츠들을 산 가게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의 공개수업 은 '도덕'으로 가족의 재조명이었다. 그는 고심끝에 몇십 년 전 화산폭발사고로 가족을 잃고 입양 등의 방법으로 새로운 가족을 구성했던 역사적인 사례를 예로 들기로 한다. 하지만 마음이 너무 약한 그는 아버지가 없는 한 아이에게 "너라면 새 아버지가 생긴다면 어떨 것 같니?"라고 차마 묻지 못한다. 상처가 될까봐. 보다못한 오세이 교장이 구원투수로 나서는데 아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싫지만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라고 간신히 한마디 한다.

어떤 아이의 대답은 나를 눈물짓게 했다. "죽도록 싫지만 전 어리니까 어른들의 말을 들어야 해요." 공개수업 후 교사 평가회에서 모리타 선생은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한마디로 자신감이 없다는 것이다. 문제를 회피하기만 하고 문제를 직면하면 화가 났다는 선배 교사의 체험 고백이 그에게 조금 위로가 되어주었을까?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텅빈 교실에서 이 사람 좋은 교사는 흐느낀다.

"전 여러 면에서 능력이 부족한 것 같아요. 아이들이 불쌍하게만 여겨져요."(이 대목을 쓰는데 콧날이 시큰하다.)

어느 날 오세이 교장이 공개수업을 직접 하기로 했다. 그의 수업 과제는 '인생'.

"너희들이 알다시피 난 암에 걸렸다. 그러니까 가을에 난 아마 죽고 없을 거야."

아이들은 눈이 말똥말똥하다. 그러니까 아이들이지만...그는 그림동화 한 권을 준비해 와서 아이들에게 읽어준다. 수잔 발리의 <오소리의 작별선물>.

어느 날 늙은 오소리가 죽었다. 친구들이 모여 그를 회상한다. 여우는 넥타이 매는 법을 오소리에게서 배웠다고 고백한다.토끼는 빵 굽는 법을...오소리는 친구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를 아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무엇이 이들을 연결시켜 주는 걸까?" 교장의 물음에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대답한다. "추억이요." "끝이 없는 삶이에요." "영원!"이라는 대답까지 모두 나왔다. 아이들은 오세이 교장의 수업에서 사람들은 언젠가 누구나 죽으며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님을 배웠다.

교장은 평가회에서 교사들에게 말한다. 자신의 몸이 날로 쇠약해지는 걸 아이들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고. 자신의 고통과 두려움을 , 그리고 자신의 이 모든 노력은 두려움의 이면일지도 모른다고...잠자리에 들 때마다 내일 아침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한다는 그의 고백은 정말 얼마나 통렬하며 인간적인가.

그 며칠 후 2학기 수업이 모두 끝나고 오세이 교장은 방학을 맞은 아이들에게 1월에 만나자는 인사를 한다. 교무실의 교사들에게도. 하지만 그것이 그의 마지막 인사였다. 그의 병은 급격히 악화되어 이틀 뒤에 사망한다.

다큐멘터리답게 어디까지나 다큐멘터리적으로 감상을 써보았다. 줄거리의 나열로만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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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01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nicare 2004-09-01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그의 교육철학보다 그 티셔츠들을 산 가게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ㅡ너무 귀여우세요.
전 여러 면에서 능력이 부족한 것 같아요. 아이들이 불쌍하게만 여겨져요.-저는 능력도 인간성도 모두 부족해요. -_-;

로드무비 2004-09-0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여주신 님, 이 서재도 참 재밌네요. 친했던 사람과 멀어지기도 하고
몰랐던 사람과 친구가 되고...서재 소사이어티예요.ㅋㅋ
죽음을 저는 아직 입에 올릴 수 없습니다. 잘 죽고 싶어요.
님의 코멘트가 많은 힘이 됩니다.^^

밥헬퍼 2004-09-0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남는 글입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를 아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죽음을 기억할 때마다 그 두려움을 넘어서는 저의 확신과 고백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이것을 읽다니....지난 봄에 다녀온 키노쿠니학교도 문득 생각이 나네요. 교육문제는 여건은 달라도 근본적으로는 같은가봐요..끊임없이 대안을 찾아야 하는... 그리고 볼 시간이 없어 안타까운 EBS 다큐도...잘 읽었는데 집에서 한번 더 읽어보려고 가져갑니다.

nrim 2004-09-01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품 보았어요..
마지막 부분에.. 오세이 교장이 학교를 떠날때 그 뒷모습이 어찌나 슬퍼보이던지....
뒤이어 상영되었던.... 팔려가는 소녀들과.. 울란바토르의 가출 소년들은.. 정말 가슴이 아프더군요... 보고나서 잠을 이룰수가 없었어요.

로드무비 2004-09-01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헬퍼님, 어젯밤에 당장 쓰고 싶었는데 하룻밤 묵혔다가 썼어요.
좀 냉정하게 쓰려고요. 님이 다녀오신 키노쿠니학교도 궁금하네요.
한번 더 읽어보시겠다니 감사할 뿐입니다.
느림님, 안 그래도 느림님도 이거 보고 계실까? 하고 잠깐 생각했어요.
열렬한 다큐 팬이신 것 같아서...헤헤.

urblue 2004-09-01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추천만 꾹 누릅니다.

로드무비 2004-09-01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니케어님, 저는 그런 제가 못마땅한데 귀엽게 봐주시다니!
저는 모든 것이 부족해서 하나하나 열거할 수도 없을 지경이랍니다.^^

로드무비 2004-09-01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추천도 좋지만 코멘트 좀 남기시지.^^;;;

밥헬퍼 2004-09-01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도착했네요. 제목만으로도 대 만족입니다. 제가 즐겨먹는 점심이 바로 3,500원하는 도시락인걸 어찌 아셨는지...잘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숨은아이 2004-09-01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다큐는 어떤 목적의식 없으면 잘 보게 되지 않던데, 로드무비님 글 보니 이런 걸 못 보는 게 안타깝네요. 추천 누르고 가져가서 보려구요. 그런데... 쭈삣쭈삣... 이 다큐영화랑 "오소리 아저씨의 소중한 선물"이랑 저 귀여운 계란 한 판이랑 어떤 관계가 있나요?

로드무비 2004-09-01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 아이님, 별 뜻은 없습니다.
제 딴에는 획일화된 교육을 상징하는 의미로 계란 한 판 사진을
집어넣었고요. 좀 어이가 없죠?
<오소리 아저씨의 작별선물>을 번역하여 나온 것이
<오소리 아저씨의 소중한 선물>입니다.^^
추천 고맙습니다.

깍두기 2004-09-01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다시 볼 수 있나요? 전 꼭 봐야만 하겠는데.

로드무비 2004-09-0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뭐래요? 흥.
주하 예쁘다고 칭찬 남기지 않아서 삐친 로드무비.
헤헤헤 깍두기님, EBS 들어가서 한 번 보세요.
저는 자료 찾는데 영 젬병이라!

반딧불,, 2004-09-03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이것 어디서 찾으셨어요??
절판된 귀중한 것인데요...책 넘 좋지요??

2004-09-06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 아빠 - 레제르 만화 컬렉션
장 마르크 레제르 그림 / 열린책들 / 2000년 1월
평점 :
절판


세상의 아빠들은 왜 그렇게 술을 마실까?  '딱 한번만 만나고 싶다'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 가족이 해체되고 부모와 헤어져 혼자 지내다 엄마를 찾는 이들의 경우 열 명 중 여덟은 그 원인이 아빠의 술버릇 때문인 걸 알 수 있다. 허구헌날 마셔대는 술, 그로 인한 찢어지는 가난과 불화, 병...

열린책들에서 나온 장 마르크 레제르의 이 만화 속의 아빠는 아직 어린 아들을 가게에 보내 포도주를 매일 다섯 병씩 사오게 한다. 술꾼이라면 적어도 하루에 다섯 병은 마셔줘야 한다나? 주인공 소년은 그래도 아빠가 침대 옆 탁자 위에 가족 사진을 늘어놓은 걸 보고 엄마와 자신과 어린 동생들이 사랑받고 있다고 확신한다. 구차하지만 애틋한 확신이다.

그의 주인공들은 별다른 신념이나 희망 없는 사람들답게 흐린 선으로 꾸불텅하게 그려져  묘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아이는 가끔 술취한 아빠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두들겨 맞는다. '두고보자, 내가 크면...(퍽!)...그래, 내가 크기만 하면...(퍽!)...정말이지... 내가 크면...(퍽!)...복수하고 말겠다!'가 아이의 결심이다.

<우리 아빠>에 나오는 엄마는 시큰둥하며(대사가 없다. 할 말이 없다는 뜻이겠지) 설겆이 등 최소한의 집안일이나 하는 무뚝뚝한 뒷모습이 그려질 뿐이다. 하루의 노동에서 풀려나 겨우 앞치마를 벗는 엄마를 술취한 아빠는 질질 끌고 가 침대 속에 자빠뜨린다. 자신의 욕정을 풀기 위해...

이 작가가 바라보는 가족의 모습은 절망적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족 구성원은 제각각이다. 그러니 같은 피를 가졌다는 그 사실이 살아가는 데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다.

이 콜렉션에는 '그 외의 이야기들'이라고 하여 '마음의 편지', '오르가즘' 등 몇 편의 섬뜩한 작품이 함께 실려 있다. '마음의 편지'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이렇게 읊조린다. "나는 백작님네 거름 구덩이를 청소한다. 나는 늙었고, 못생겼고 슬프다." 시편의 절창을 떠올리게 하는 독백이 아닐 수 없다. 그에 대한 마음의 편지는 이렇다. "절망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일입니다. 최대한 집중하세요. 일하세요. 다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마세요."

'오르가즘' 편을 보고 철저하게 여성의 편에 서서 수컷들을 조롱하고 있는 작가에게 고개를 갸웃했다면  책의 맨 마지막에 있는 작가 소개를 꼼꼼히 읽어볼 일이다.

'그는 증오도 경멸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레제르는 심판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작품에 등장하는 그 악의 없는 괴물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는 어떤 환상도 없이, 현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여성을 사랑하고 숭배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아아, 우리 아부지가 술꾼이었다면, 그래서 어린 시절 내가 술심부름을 한번이라도 해봤더라면 더욱 절절한 리뷰를 써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을 텐데...아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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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8-23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억, 레제르닷! 흐흐....
제가 너무 좋아하는 작가랍니다. 추천추천....합니다.

로드무비 2004-08-23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 감사합니다.^^

하얀마녀 2004-08-23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 아빠가 되진 못했지만 역시 알콜이 가정파괴에 대해서 공감을 많이 하게 되네요.
저도 추천하고 갑니다. ^^

플레져 2004-08-23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빠가 술을 많이 드시고 오는 날에는 아이스크림과 바나나도 함께 왔더랬습니다.
은근히 그런날을 기다리기도 했었는데...
추천합니다~ 읽고 싶은 충동, 그것이야말로 알라딘이 바라고 독자가 바라는 리뷰겠지요?
님의 리뷰가 그래요, 늘...^^

로드무비 2004-08-23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얀마녀님, 참 남자분이셨죠?
이 글은 남자들에게 조금 먹히는군요.
하루빨리 아이 아빠가 되고 싶으신 건가요?^^
플레져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 리뷰나 짧은 글을 항상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시는 분.
저 또한 님의 글에 관심 많아요.^^

밥헬퍼 2004-08-24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처럼 다시 들르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어린시절 아버지의 술심부름을 무진장많이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술한모금 먹지않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되었지요. 반발은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경이로운 탈선인 셈이요. 리뷰의 끝을 읽다보니 괜히 지난 시절 생각이나서 그냥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