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부를 못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
야마다 에이미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아이 교실에 청소를 하러 한 달에 두 번쯤 간다. 
보통은 두세 명의 자모들이 짝을 이뤄 청소를 하는데 지난번에 내가 갔을 땐
아무도 나오지 않아 혼자 낑낑거리며 스무 개의 책상과 마흔 개의 걸상을 옮기며 교실을 쓸고 닦았다.
땀이 비오듯이 흘렀다.
바닥을  대걸레로 깨끗이 닦고 책상 줄을 맞추고 있는데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갑자기 나타났다.
왜 혼자서 청소를 하시느냐고 깜짝 놀라서 묻는데 나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그럴 수도 있죠, 당번 엄마가 깜빡하셨나봐요." 라고 대답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무척 흡족스러웠다.
오늘 나의 노고를 알아준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서.
더구나 그것이 아이의 담임선생님이라니!

책상을  한 개 한 개  깨끗이 닦고 걸레를 깨끗이 씻어 널어놓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실소를 금치 못했다.
담임선생님이 앞문을 드르륵 열고 나타났을 때 내 속에는 혼자 청소하는 게 서러워
입을 삐쭉삐쭉거리는 계집아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 나이에도 문득문득 이런 심정으로 살지 어떻게 알았겠나!
한가지 확실한 건 나이 예순이 넘어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사실이다.
사실  책상을 반쯤 옮겼을 때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대강 해치우고 가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꼼꼼하게 청소한 나의 노고는 유치하게도 선생의 등장으로 보상을 받았던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연륜이 빛나면서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기는커녕
더욱 치졸해지고 변덕만 늘어가는 자신을 느낀다.
이럴 때 솔직히 나는 당황한다. 앞으로 어떡해야 하지?
이런 몰골로 엄마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또 어른의 도리를 다하며 살아야 한다니!
아아, 한 마디로 나는 지금도 살아가는 일이 자신 없고 순간순간 아득하기만 하다.

어제 읽기 시작한 야마다 에이미의 <나는 공부를 못해>를 조금 전 마저 읽었다.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이 책 한 권을 통해 뭔가 조금 위로를 받은 느낌이다.
열일곱 살의 공부 못하는 개성 만점 고교생 도키다 히데미와,  말썽꾸러기 아들 때문에
학교에 불려와서도 눈치 안 보고 담임선생 앞에서 할 말 못할 말 다하는 젊은 엄마 진코와,
아비 없는 자식을 기르며 사는 딸의 집에 함께 살며 잔소리도 간섭도 어설픈 훈수도 없이
유쾌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할아버지, 이 세 가족의 살아가는 모습에서
뭔가 조그만 힌트를 얻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잠시 잊고 있던 것 정도랄까.

다음은 히데미가 한 초등학교에 전학 왔을 때의 인상적인 장면.

--자기 소개를 할 때 히데미는 교단 위에서 그냥 멍하니 서 있는 듯이 보였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한 오쿠무라(선생)는 그의 뒷머리에 손을 대고
인사를 하게 했다.  그러자 히데미는 그 손을 뿌리치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억지로 머리를 숙이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열한 살 소년 히데미의 말대로 누구도 누구의 머리를 강제로 숙이게 할 수는 없다.
부모든 선생이든 대통령이든 대통령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라도......
이 간단하고 명료한 원칙만 알고 지키더라도 세상은 좀더 자유스럽고 살 만할 터인데......
<나는 공부를 못해>는  자신도 모르게 구축된 오만 가지의 편견과 불길한 암시로 가득한 
삶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나 같은 어른이 가볍게 일독하면 더 좋겠다. 작가의 바람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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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5-07-09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 많으셨네요.
매달 2번째 토요일, 전일제 CA가 끝나면 저는 혼자서 저희반 청소를 합니다. 평일에 학생들의 청소 시간이 있지만, 남자애들이다 보니 워낙 게으르고 대충대충. 게다가 청소하고 또 보충수업하고 저녁먹고 야간자율학습하니. 청소는 하나마나. 학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저 역시 혼자 교실을 쓸고 책상 줄을 맞추면서, 고교에서도 한달에 한번이라도 학부모님들이 자식들 학교 청소 좀 해봐야 자기 자식 잘 타이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로드무비 2005-07-09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니님. 그러시군요. 얼마나 힘들지 짐작이 갑니다.
선생님들이 온갖 궂은일을 하실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책은 특히 선생님들이 보시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실마다 히데미 같은 녀석이 한둘은 꼭 있을 것 같아서요.
소설로 보면 개성 넘치는 매력적인 소년.
현실에서는 문제아!^^

서연사랑 2005-07-09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문제아'라고 '낙인'찍는 어른들이 없다면 '문제아'도 없을텐데 말이예요. 중간고사 기간을 '가을방학'이라며 가방에 책 한 권 안 넣어가지고 오던 녀석들도 학교를 벗어나니 사회에서 다들 제 자리 찾아 한 몫하는 성인들로 자라더군요. 그럴때면 '도대체 왜 그러니? 어!', '한심하다, 이놈들아'하고 화내던 제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정말 미안해지더라구요.
꼭 읽어볼께요.^^

2005-07-09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7-10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쑥스럽긴요.
이런 리뷰 쓰는 제가 쑥스럽죠.
님의 댓글이 항상 반가워요.
더 자주 뵈었으면......^^

서연사랑님, 화내던 당시에는 그런 아이들이 또 걱정이 되어서
그랬던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이 책에 나오는 교사의 몇 유형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서연 사랑님이 한 번쯤 읽어보시면 좋겠어요.

인터라겐 2005-07-10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이 바뀌는게 좋은것만은 아닌것 같아요.. 아이들 손으로 청소하는것도 나쁘지 않은데 왜 엄마들이 학교에 가서 청소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개인적으론요...
아이들이 같이 분단을 나눠 청소하면서 더 끈끈해 지고 그런거 아닐까요?

로드무비님이 쓰시는 글을 보다 보면 꼭 읽어야 할것들이 너무 많아져요..

딸기엄마 2005-07-10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개인적으로 히데미 같은 아이 맘에 쏙 들어요~ 저도 꼭 읽어 볼게요~

로드무비 2005-07-10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우개님, 네.
지우개님, 히데미도 히데미지만 미혼모로도 당당한 엄마랑,
항상 누군가랑 연애중인 할아버지도 무지 마음에 들었답니다.^^

인터라겐님, 제 생각에 1학년은 아직 청소는 좀 무리가 있는 것 같고요.
그래도 매일 청소를 하려니 한달에 두세 번 순서가 다가오는데
하루 걸러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이 책은 극적인 스토리 위주의 책은 아니고요,
살아가는 자세랄까 룰을 조용히 말해주는 듯해요.
한번 당신 인생의 주머니를 몽땅 까뒤집어 보시지! 하는 듯한......

urblue 2005-07-10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추천만. ^^

로드무비 2005-07-10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만 해주시면 블루님께 미련 없어요.ㅎㅎㅎ
--이렇게 말하면 삐지실 거죠?^^

날개 2005-07-10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학교는 요즘 고학년 애들의 자원봉사(울 효주도 신청했대요..^^)를 받아서 저학년 반 급식해주고 청소해줘요.. 엄마들은 1주일에 한번만 가고요.. 잘됐죠?^^

로드무비 2005-07-10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거 괜찮네요.
효주 칭찬해 주고 싶어요.^^

2005-07-10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7-10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제가 왜 웃을까요?

로드무비 2005-07-11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야 물론 내 글이 재밌어서 웃겠지.^^
아니면, 허리 아프다는 대목에서 "살 좀 빼슈!"라는 말을 하고 싶었거나......

미완성 2005-07-11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제가 이 리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요!
아무튼 저도 추천만. 이뻐해주세요;;

로드무비 2005-07-11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 빨간 치마는?@,.@
멍든사과님, 그런데 왜 놀라셨을까?('')(..)

로드무비 2005-07-11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사과님, 추, 추, 추천한 거 마, 맞아요?
카운트가 어젯밤 그대론데?^^

비로그인 2005-07-11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핫. 로드무비님, 카운트..그거 진짜 세고 계셨어요? 진짜죠? 캬..어쩜 저랑 일케 같으실까..이러니 제가 로드무비님을 좋아할 수 밖에..^^a

로드무비 2005-07-11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아니 추천수에 신경 안 쓰면 이 허무한 세상
뭐에 신경 쓰고 살겠습니까요.
저도 복돌이님이 너무너무 좋아요.
그, 그, 그런데 추천은요?ㅎㅎㅎ

2005-07-11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르바나 2005-07-11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징검다리 같은 댓글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아무나 가능한 일은 아니지요.

미완성 2005-07-13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옛날 옛적에 미리 추천해뒀었다구요 흥흥흥;;
삐져서 빨간 치마는 저만 입을 거예요 -_-V

로드무비 2005-07-13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멍든사과님, 정말 훌륭하십니다.
전 꼭 제가 추천했다고 밝혀야 속이 시원하던데......
사실 모르는 이의 추천은 감미로워요.
저도 요즘 그런 추세로 나가고 있답니다.^^
니르바나님, 죄송합니다. 댓글을 늦게 봤어요.
제가 좀 부흥사 같은 면이 있어서요.
(추천과 댓글을 강요한달까! 헌금처럼.^^;;)

조선인 2005-07-17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와 별개로 입을 삐죽삐죽대고 있는 계집아이 몫으로 추천을 하지요. 히히

로드무비 2005-07-17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속에도 있는 계집아이인게죠?^^*
추천 감사.^^

조선인 2005-07-18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들켰네요. 우리 친구인 거 맞죠? 부비부비. 히히

로드무비 2005-07-18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비부비, 헤헤헤^^
 
벼랑에서 살다
조은 지음, 김홍희 사진 / 마음산책 / 2001년 2월
품절


--작은 언덕배기 동네, 사직동에 그녀가 산다. 주워온 개와 더불어 독신으로 살고 있는 시인 조은의 삶.(표지의 글)

1960년생 시인 조은.
2001년, 이 책이 나오자마자 사서 읽었는데 질투심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왜냐하면 나도 인생의 꽤 긴 시기를 북아현동이라는 허름한 골목 낡은 한옥에서 살아본 적이 있었고 이 책에 실린 글과 사진들은 바로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질투심을 느끼는 건 아주 드문일인데......

--어둠 속에 섬돌처럼 떠 있는 불빛들을 딛고 가면, 자신이 불을 밝혀야 할 작은 집이 있다.

그림동화 <나의 사직동>처럼 이 책의 배경도 한옥이 유난히 많은 광화문 근처 사직동. 나는 능청스럽게 시인의 책 포토 리뷰에 나의 북아현동 이야기를 섞어 보련다.
남동생과 둘이 자취를 하던 때 바로 저 사진 속 골목의 낡은 2층집에서 2년 정도 살았다. 그 전에 살던 한옥이 헐리게 되었던 것.
살림은 빌린 리어카로 세 번 정도 나르니 끝!
한옥의 욕심 많은 주인 할머니는 자신이 10년이나 쓴 조그만 하이콜드 냉장고를 아주 싼 값이라며 내게 팔아먹(!)었는데 알고보니 새것에서 몇만 원 정도 빠진 금액이었다.
아무튼 새로 옮긴 단칸방, 세탁기도 없이 주워온 책상과 비닐옷장이 살림의 전부였던 때 여동생 부부가 서울에 놀러왔다가 우리 사는 꼴을 보고 기겁을 하여 집에 내려가 아버지를 졸랐다. 그리하여 단독 2층으로 이루어진 이사.
그때 여동생은 나보고 미련하기가 곰같다고 했던가!

--솜이불과 덧신, 체온이 낮은 사람이 자고 일어난 티가 난다.
(사진 설명 74쪽)

--내가 사는 곳은 인왕산 밑이고, 내 방에서는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가 은사시나무 사이로 잘 보인다.
오늘 새벽 나는 너를 생각하며 인왕산에 올랐다. (...)나는 인왕산에 올라 세상과의 편안한 거리감을 얻는다.
그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일들이 큰 가닥으로 보이고, 내가 당면한 문제의 핵심을 볼 수 있어 좋다.
산은 언제나 물통을 지고 제속으로 드는 사람들을 출구처럼 드러내며 침묵하고 있다.(46쪽)

수녀의 방처럼 침구가 소박하고 정갈해 보인다. 이 책을 썼을 때 시인의 나이 마흔 살 부근.

--길보다 낮은 집들(사진 설명 87쪽)

결혼식을 코앞에 두고 방을 구하던 때 합정동 너훈아가 함께 살던 골목 다세대 지하의 방이 났길래 구경 갔다. 그런데 그렇게 독특하고 멋진 가구며 인테리어라니!
무슨 사연으로 그 좁은 곳에 임시로 살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 방의 안주인은 여배우를 능가하는 미모의 세련된 여성이었다.
6천만 원에 가구까지 몽땅 주겠다고, 자기는 곧 미국에 살러간다고 하는데 살림살이까지 몽땅 준다고 하고 그것이 보통 고급스러운 게 아니어서 나는 구미가 동했다. 그때 우리의 예산은 3천 5백만 원 정도. 돈을 좀 빌려 그 지하방을 사자고 남편을 졸랐으나 남편은 들은 척도 안했다.
그때 무리해서 그 방을 샀더라면 몇 년 뒤 전세금을 홀랑 날리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이상하게 한번 본 그 반지하 집이 가끔 생각난다. 지하든 반지하든 그 이후 돌아다녀본 다른 집들은 너무 어둡고 지저분했는데......



--은이 태릉집에서 사직동으로 홀로 나온 이후에 은이 살았던 몇 개의 방을 나는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적절치 못한데 햇살만은 찬란히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낮잠을 잘 때면 모자를 쓰고 자야 했던 방에서부터... 그리고 지금 추운 채송화처럼 옹송거리며 살고 있는 방까지.
(...) 은이 방이 사직동에 없었다면 내 서울 생활은 꽤 적막했으리라.
(소설가 신경숙의 발문)

신경숙, 황인숙 시인, 김형경 등이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는 시인의 사직동 집.
'마음산책'의 발행인 조은숙 시인이 이 집에 놀러왔다가 그 고졸한 골목과 집, 친구가 사는 모습에 반해 책을 기획하게 된 것이라니 재밌다.

(보라색 티셔츠 입은 이가 시인 조은, 맞은편은 신경숙. 클릭해서 큰 사진으로 보세요^^)

--인간의 뇌세포처럼 굴곡이 진 지붕 위의 세계를 응시하다 보면, 눈썰매를 타고 비탈길을 내려갈 때처럼 가속도가 붙으며 순식간에 발치에 와닿는 기억들이 있다.(112, 113쪽)

북아현동 한옥에 살던 어느 해 겨울, 눈이 몹시 내려 기와며 담벼락이며 눈으로 소복소복하고 그 풍경이 너무 좋아 방문을 열고 앉아 마당을 내다보았다.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어 지갑을 뒤져보니 달랑 200원뿐.
풀빛출판사 뒷골목의 구멍가게에 가서 200원을 내밀고 백자라는 담배를 샀던 기억. 그나마 너무 독해서 한 대도 제대로 피우지 못했다.

--혼자 살다 보면 십자드라이버의 다양한 용도를 알게 된다. 내가 직접 달아놓은 옷걸이.(144쪽)

시인 조은의 이 벼랑의 기록은 참 매혹적이다. 생각해 보면 인생에 '과도기' 아닌 때가 어디 있으며, '벼랑' 아닌 곳이 어디 있겠는가.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나는 한 아이의 엄마였고 비록 전세지만 꽤 넓은 집에 살고 있었는데 사직동, 그녀의 벼랑이 너무 부러워 눈물이 날 뻔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오늘, 이 책을 오랜만에 꺼내어 읽어본다.

(이 책은 본격적인 사진집은 아니며 사진작가 김홍희 씨가 찍은 동네 골목과 그녀의 집 풍경들이 조그만 사진으로 시인의 다감한 산문과 함께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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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ntomlady 2005-06-16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로리뷰를 읽고 질투심을 느끼는 건 아주 드문일인데......
저도 갖고 싶어져서 낼름 보관함에 넣었습니다
조은, 이라는 시인 궁금합니다

로드무비 2005-06-16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드롭님, 200원 들고 백자 담배 사러 나가던 때가 아마
지금 님의 나이였던 듯.
시도 읽어봤지만 이 산문집은 더욱 괜찮습니다.^^

urblue 2005-06-16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 로드무비님의 청춘엔 그리 많은 사연들이 있는지요.

숨은아이 2005-06-16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자... 농활 갔을 때 공기 맑은 중에는 그렇게 맛있었는데, 서울 하늘 아래에선 도저히 못 피울 맛이더군요. ^^

로드무비 2005-06-16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고 꽁초도 맛있었죠?ㅎㅎ
블루님, 어, 이 페이퍼엔 사연이라 할 만한 거 없는데......
대강 읽었죠?^^

urblue 2005-06-16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쓰신 페이퍼들이랑 이거랑 합해서 말씀드린겁니다. ^^

내가없는 이 안 2005-06-16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청자는 맛을 봤는데 백자는 맛을 못 봤어요. 그렇게 독한가요? 서울 하늘 아래선 못 피울 맛이라니... (아니 이건 숨은아이님 글이네 ^^) 그런데 로드무비님 책도 나왔으면 싶어요. 그리고 미련하기가 곰같다는 말은 틀린 거예요. 가난도 안주 삼아 청춘을 보낸 것일 터인데. 안 그려요? ^^

히피드림~ 2005-06-16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소한의 것들만 누리며 미니멀하게 사는 삶, 때론 꿈꾸기도 하지만 저는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욕심만 목구멍 바로아래까지 차올라요...

비로그인 2005-06-16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의 사진 설명과 로드무비님의 삶이 뒤섞여, 더욱 정겨워요. 구수한 숭늉을 마시는 듯한 느낌..

비로그인 2005-06-16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격적인 사진집보다 이런 뭔가 허름한 것이 더 좋아 보여요. 저는 좀 전에 담배 사려고 나갔는데 보니, 돈을 뽑아놓지 않아 외상했답니다. ^^ 백자 담배하니까 도라지가 생각나네요. 할머니들 전용 담배 같은 도라지, 저는 가끔 도라지를 피웁니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도라지 담배. ^^

로드무비 2005-06-17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파님, 젊은 사람이 허름한 것 좋아하면 안되는데...ㅎㅎㅎ
도라지만 피우던 어떤 사람이 생각나네요.
난 좀 이상하던데.
오늘 잊지 말고 외상값이나 갚아요.^^
(좋은 동네 사시넹!)
복돌이님, 저 숭늉 좋아해요.
200원 들고 담배 사러 나간 이야기 마음에 드셨나보다.
노파님과 하여간 잘해보시랑께요.^^
punk님, 최소한의 것, 심플...저도 항상 생각하는데
책이며 쓸데없는 물건들을 미친 듯 사들이는 두 얼굴의 여자가
제 속에 있습니다요.^^;;;
이 안님, 에잉? 청자, 그 누런색 담배갑이 생각나네요.ㅎㅎ
그리고 가난을 안주삼은 건 아니었지만 자기자신에게 도취가 돼 있어서요.
내 사는 게 그렇게 꾸지리한 모습인지 몰랐습니다.
왜 그땐 다들 그랬잖아요.
자기를 엄청 구박하면서도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블루님, 어쩌면 제가 글을 너무 잘 써서 별 이야기 한 것도 없는데
사연이 많은 걸로 착각하는 것인지도 몰라요.=3=3=3

Phantomlady 2005-06-17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로드무비님이'너무 잘 써서' 리뷰 빼고는 별 이야기도 없던데 책임지세요 ^^ 어제 서점 가서 '벼랑에서 살다' 있느냐고 찾아달라고 해서 읽고 왔어요. 생각보다 참 심플한 책이더군요 군더더기 없는 삶이 보였습니다. 언젠가는 사서 읽을 날이 오겠죠.

니르바나 2005-06-18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도시의 뒷골목에 들러붙은 눈이 가슴에 많이 남는 것은
로드무비님이 그려주신 부산 '나의 연산동'과 함께 제 어린 시절의 추운날의 초상이 삼중주로 울려대는 이유일겝니다.
짧은 글과 사진이 감동적이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군요.
안녕하세요. 로드무비님
저는 요즘 오뉴월에 개도 앓지 않는다는 목감기로 빌빌거리고 있습니다.
빌려주신 책 '출가'를 가만히 앉자 읽고 있습니다.
동시에 알라딘서재에 올라오는 지인들의 글을 함께 읽으면서요.
새삼 사는 일에 몇가지 역할을 멋지게 소화하시는 로드무비님의 모습에
감탄절탄하고 있습니다.
어릴적에 영화관에 가지 않던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기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 새 제가 그 모냥으로 살고 있음을 보며 슬며시 웃었답니다.
......
밝은 날 알려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로드무비님

로드무비 2005-06-18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저의 연산동을 기억해 주시니 너무 고맙습니다.
전 시시껄렁한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아유, 그나저나 목감기 좀 차도가 있는지요?
저도 얼마 전 슬쩍 지나갔는데......
목 아프면 인생이 얼마나 괴로운데요.
그리고 저는 최소한의 집안일만 하고 서재활동도 게으르고
요즘 뭘 하는 인간인지 모르겠어요.
몇 가지 역할 감탄절탄하신다니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아무튼 목감기 빨리 나으시고요.
이 눈부신 계절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니르바나님.^^

로드무비 2005-06-1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드롭님, 심플하고 군더더기없고, 그러면서도 시인의
어떤 고집이 느껴지는 책이었습니다.
전 그런 종류의 고집 좋아합니다.
<벼랑에서 살다>는 선물 주고받기 좋은 책이에요.
친한 친구에게 선물해 달라고 조르세요.^^

비로그인 2005-06-21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사진 속의 저 빨간 건 뭐래요? 보라는 건 안 보고 어만 것만 보는 복돌..

로드무비 2005-06-21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고래 모양 펀치 되겠습니다.
책장 넘어가지 말라고......^^
(최근 마이 도러 페이퍼에 이 펀치 등장하는데......)

2005-06-24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은 인연을 알면 괴로울 일이 없다
법륜 지음 / 정토출판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자기계발서 혹은 처세학 책들을 어쩌다 읽게 되면 나는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 책들에 의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절대 성공 못할 유형의 인간이고 실패할 확률 99프로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나에게 꼭 가야 할 길은 없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루어야 할 일은 없다. 목표를 세우고 자신의 인생을 시분초로 쪼개어 뭔가 생산적인 일에 매진하라는 그 책들의 충고는 나에겐 하나도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과잉의욕은 소망한 바를 불가능하게 한다!

웃기게도 나는 20대 초반에 수첩 맨 앞장에 과잉의욕에 대한 경구를 적어가지고 다녔다. 책이나 영화, 맛난 음식 외에는 세상에 아무것도 관심 없었으면서......

얼마 전 읽은 화가 노은님의 <내 짐은 내 날개다>에 보면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어릴 때부터 부끄러움이 많아 남 앞에 나서는 거라면 쥐약인 화가가 어쩌다 교수가 되고보니 세미나 같은 데도 나가 청중 앞에 앉아있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고......요리조리  피해 다니다가 어느 날 꼼짝없이 주최자에게 잡혀 세미나장에 끌려갔는데 청중석을 보니 어떤 할아버지 기자가 수첩을 펴놓은 채 코까지 골며 주무시고 있더라는 것이다. '아니, 나를 바라보고 있기는커녕 저렇게 엎어져 자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쫄 것 없잖아!' 그 깨달음 이후 화가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 앞에 서게 되어도 떨지 않게 되었다고.

깨달음은 천둥번개 소리를 동반하고 요란하게 오는 것이 아니다. 방금 예를 든 화가 노은님의 경우처럼 슬그머니 소리소문도 없이 올 때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누추한 일상 속에 매복해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짠~하고 나타난다.

--깨달음의 세계는 더러운 것을 버리고 깨끗한 것을 취하는 세계가 아니라, 본래 더럽고 깨끗함이 없는 줄 깨친 까닭에 버릴 것도 취할 것도 없는 세계입니다.(114, 115쪽)

진지한 인간들이 흔히 자부심으로 삼는  분별력이나 노력, 의지도 크게 대수로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지은 인연을 알면 괴로울 일이 없다>는 정토회 설립자인 법륜 스님의 법문집으로 법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갖가지  질문을 즉석에서 대답하신 것이다. 수행에 관련된 심오한 질문들도 있지만 즉석에서 이루어지는 질문답게 가령  "이 남자랑 헤어질까요, 말까요?"하는 식의 원초적인 인생상담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스님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답변이 얼마나 선선하고 심상한지 귀를 기울이다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문제가 스르르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인생이란 그냥 사는 것입니다. 서로 따뜻하게 해주다 보면 정이 들고 고맙고 눈물이 나고 이래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사는 것은 뭐 특별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면 거기서 정이 나고 그러는 것입니다.(25쪽)

마흔여덟 살에 장애가 있고 장가도 안 간 시동생이 자꾸 부아를 돋워서 괴롭다는 어느 여성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화를 내지 말아야겠다고 참아서는 안 됩니다.보살님은 뭐든 참고 억누르고 그러지요? 잘해야겠다고, 참아야겠다고 결심하는데 결심하거나 참는 것은 수행이 아니에요. (...)그에게는 문제가 없어요. 그는 잘못이 없어요. 그는 그렇게 생겼고,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할 뿐입니다. 그것을 보고 내가 내 이해 관계나 내 편리에 사로잡혀서 상대를 문제 삼는 거란 말이지요. 문제를 삼아 놓고는 참는다고, 빈다고, 운다고, 결심한다고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47쪽)

정말 명쾌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서 구르다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어두워지고 경계에 끄달리는 사람들은 이런 법문집을 머리맡에 두고 가끔 꺼내어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이 책을 선물해주신  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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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5-06-10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신있게 살기를, 늘 바라는데... 늘 어렵네요.
그 무한한 空의 세계에 들어가야지 하면서도 들어가는게 또 두렵다지요.
이래저래 어려운 수행의 길입니다 ^^

로드무비 2005-06-10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소신이 없으면 또 그대로 살라는 것이 스님의 말씀입니다.
못난 대로 부족한 대로 받아들이고......님도 이미 아시는 이야기잖아요.
아무튼 법문집은 처음 읽었는데 참 좋네요.^^

히피드림~ 2005-06-10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로드무비님은 다른 알라디너들에게 책 선물을 많이 받으시는 것 같아요. 하긴 이벤트를 통해 님도 그만큼 다른 분들에게 베푸니까요^^
님의 리뷰보니까 생각나는데요,예전에 성철스님 돌아가셨을때 몸에서 사리가 많이 나왔잖아요. 근데 소소한 차이를 두고 돌아가신 어떤 이름없는 할머니 보살님의 몸 속에서 성철 스님 것 보다 더 많은 사리가 나왔데요. 거의 한가마니가 나왔다는... 그 할머니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유명한 분도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성불을 한거죠.

서연사랑 2005-06-11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같은 사람을 위한 책이네요.
까닭없이 세상을 향해 부아가 치밀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 혼자서 '내 탓은 아닐까' 걱정하는 저같은 사람.

야클 2005-06-1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에는 가끔 가면서 불경이나 스님들이 쓴 책은 거의 안 읽어본 것 같아요. 기껏해야 법정스님책 정도... 기억해뒀다가 한번 읽어보렵니다. ^^

로드무비 2005-06-13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 법문집은 저도 처음인데 옆에 두고 자주 읽는 것도 좋겠다 싶었어요.^^
서연사랑님, 저같은 이를 위한 거죠.
세상 이치를 짐작할 것 같은데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혼란스러운.
가끔 부아가 치미는 건 저도 같네요.^^
펑크님, 사실 따져보면 책이든 마음이든 주는 만큼 받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엄정한 세상이라는 거죠.
그리고, 그래서, 사리에 대한 신화는 이미 깨지지 않았나요?^^
새벽별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 분인데 낯이 익습니다요?ㅋㅋ^^
 
내 짐은 내 날개다
노은님 지음 / 샨티 / 2004년 5월
절판


물고기, 나비, 사람, 하늘, 새 등의 자연물을 단순하게 그려낸 그림에는 밝은 생명의 기운이 담겨 있으며, 천진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유럽에서는 그를 일컬어 "동양의 명상과 독일의 표현주의가 만나는 다리", "그림의 시인"이라 부른다.

1970년 독일 간호보조원을 자원하여 함부르크로 떠난 뒤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노은님. 그녀의 그림이 있는 에세이집 <내 짐은 내 날개다>.

-2002년 9월 3일, 내 나이 만 쉰여섯, 남편 나이 쉰아홉에 우리는 결혼을 했다.(...) 나의 남편 게하르트는 나처럼 그림을 그렸고 오랫동안 예술 속에서 지내온 착한 노총각이다. 같은 대학(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에서 미학사를 가르치는 동료교수인데 한 학교에서 일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게 울림을 준 것은 알고 지낸 지 10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였다. (그림 123쪽)

내 머리속의 가장 달콤한 만남은 헌책방을 경영하던 신동엽 시인과 손님으로 온 인병선 여사(현 짚풀생활사 박물관 관장)의 만남과 결혼이다.
포천군 면사무소에서 결핵관리요원으로 일하다 간호보조원으로
독일에 가서 취미로 그림을 그려 화가가 되고 또 영혼의 짝을 만난
화가 노은님의 라이프 스토리도 그에 못지 않게 충분히 감동적이다.

이 책에 실린 그림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134쪽)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고독이 느껴진다.

--처음엔 남몰래 쓰레기통을 뒤져 그곳에서 나온 재료들을 가지고 그리고 또 그렸다. 쓰레기통에 들어온 것들은 이제 더이상 필요 없고 하찮아진 것 같지만 실은 모두 제 역할을 다하고 들어온 것들이 아닌가. 구멍난 노동자의 손장갑에서도 그 구멍에 무진장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3년 전 친구 김원숙(화가)과 베네수엘라에 여행을 갔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 큰바람이 파도를 육지 쪽으로 몰고와 우리를 던져주었고 때마침 지나가던 아이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살아날 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인생을 공짜로 사는 것 같다. 그날을 생각하면 뭐든 못할 게 없어진다. 그 후로 우리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 또는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기로 했다.

쉰여섯에 결혼한 화가는 모차르트가 태어난 해에 지은 작은 로코코 성을 빌려 산다. 숲속에 위치한 이 성은 3층의 작은 건물로 거실에는 열두 개의 창이 나 있어 여우며 새들이며 개울가의 숭어가 뛰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데 이 3층짜리 성을 무려 35년간 빌리기로 했다니 부럽기 짝이 없다.

"당신은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할 뿐입니다."
예술을 하다보면 마티스 같은 고집스런 면이 나오게 마련이다. (...) 상대방을 이해시키기 위해, 상대방을 감동시키기 위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버린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술로 가는 길이 아닐 것이다.

--평범한 존재들이 보여주는 일상적이고 세세한 사실들이 예술로 이어질 수 있다고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의 느낌을 표현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여러 가지 금지된 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제멋대로이고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화가 노은님의 예술론이다. 인정받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조급하면 안된다는 것. 그녀의 그림 몇 점을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단순한 선과 요란하지 않은 색채로 인간의 기쁨과 심연을 보여주는 듯한 그림들이 좋다.

--어떤 독일 교수가 내게 물었다. 너의 나라 사람들 얼굴이 얼마나 인상적인데 아직도 석고 데생, 그것도 너의 나라 것도 아닌 그리스의 죽은 사람들 머리를 베끼고 시험을 보느냐고.

참다운 예술은 진정한 순수함을 원한다. 1982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전시회를 마치고 배웅하기 위해 백남준을 역에서 만났는데 웬 거지 중의 상거지 하나가 서 있었다고 한다. 정말이지 혼자 보기 아까웠다고.
아마도 진정한 예술가들은 겉을 꾸미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을 쓰지 않을 것이다. 간략한 소개지만 노은님과 백남준, 노은님과 중광 스님의 만남도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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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7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春) 2005-06-0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석고상.. 재밌군요.
질문 있어요. 현재 보이는 사진은 작은데, 클릭하면 커지는 거 어떻게 하는 건가요? 가르쳐 주세요.

돌바람 2005-06-07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 좋네요. 돈 생기면 꼭 사야쥐. 제가 인사는 제대로 드렸던가요. 좀 있다 찬찬히 들러보고 인사드릴게요. 땡스투우!

stella.K 2005-06-07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쁘네요.^^

로드무비 2005-06-07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화가의 결혼 일화 너무 좋지 않아요?
같은 직장에서 데면데면하게 보고 지내던 사람이 10년 뒤
마음속에 들어오다니!^^
stonywind님, 반갑습니다.
최근에 몇 번 다른 분 방에 댓글 다신 거 눈에 띄었어요.
저도 나중에 님 방에 가봐야겠군요.^^
하루님, 그건 제가 만든 기능이 아니고 본래 그렇게 되어 있답니다.
클릭하면 화면이 커지는 거 너무 신기하죠?ㅎㅎ

날개 2005-06-07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너무너무 마음에 드는 책이네요..^^
예술가는 예술가끼리 통한다는 건가요? 예술가들이 사는 거 보면 범상치가 않아요..

로드무비 2005-06-07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표지 정말 마음에 들어요.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만나 사랑하고 함께 부부로 사는 것 보면
뭔지 안심이 됩니다.
제가 보기에 이 부부는 예술로 통했다기보다 지극한 선과 선으로
만난 것 같아요.
호호, 혹시 또 모르지요.^^

2005-06-07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6-07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안 그래도 책이 좀 쌓였는데 한꺼번에 보낼게요. 이 책이랑 함께......
말씀해주신 코스는 그대로 꼭 한번 가보겠습니다.^^

플레져 2005-06-07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원숙 화가를 좋아하는데, 그분의 친구군요. 아, 노은님의 친구 김원숙이라고 해야 하나요? ^^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고독의 그림이라니... 너무나 멋진 표현이에욧!!

낯선바람 2005-06-08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책인가 하고 들어와봤더니 이 책이네요. 그림 정말 좋아요^^ 이 책의 출간 배경에 관한 멋진 기사가 생각나서 링크할게요. 읽어보세요.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473923



로드무비 2005-06-08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수자리님, 읽어봤습니다.
개인의 자발적인 후원 참 좋네요. 흐뭇한 소식입니다.^^
플레져님, 그림도 그림이지만 살아온 이야기나 소박한 예술철학도 좋네요.^^

2005-06-08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마천 2005-07-09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석고상 데생 문제도 틀이 한번 만들어지고 안바뀐다는게 문제죠. 일제시대 교육 받은 세대가 대학을 장악하고는 제자들에게 숭배만 강요하기 때문에 이꼴로 이어져 옵니다.

루니앤 2007-12-22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쿠오레님_
:)
 
사요나라 짜이젠
황춘명 지음, 이호철 옮김 / 창비 / 1983년 7월
평점 :
절판


 

50대의 일본남자들이 떼를 지어 타이완에 엽색관광을 온다. 그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을 거쳐 군대에까지 함께 몰려갔던 친구 사이로 ‘천인참(千人斬) 구락부’의 회원이며 멤버는 그들 7인뿐.


옛 일본의 무사들이 지향한 것이 일생 동안 1천 명 적군의 머리를 베는 것. 그런데 이 구락부의 천인참이란 1천 명의 여성과 동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각자 붉은색 빌로드 소책자를 하나씩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는데 거기에는 이때까지 관계한 여성들의 기록이 음모 한 가닥씩과 함께 투명비닐에 들어 있다.


그들의 여행 첫 목적지가 온천이 있는 자신의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장의 전화를 받고 ‘바쇼 씨 일행을 환영합니다!’라고 쓴 종이를 들고 공항으로 나가는 ‘나’는 한마디로 죽을 맛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과거 일본의 침략과 대학살만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데 아무리 회사 차원의 접대라지만 가는 곳마다 통역과 동포 여성을 그들의 품에 안겨주고 화대 따위를 중간에서 계산해 주어야 하는 게 그의 역할이니.


‘나’라는 1인칭 시점으로 이 불쾌하고 곤란하기 짝이 없는 경험을 독자에게 전하는 사람은 ‘미스터 황’이다.( 참고로 저자 황춘명은 <사요나라 짜이젠>으로 이 책이 나온 1970년대 초중반 자유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독자들은 미스터 황과 저자를 동일시했음에 틀림없다.) 이따위 뚜쟁이 일도 일이랍시고 강제로 던져주는 회사라니, 더구나 평소 황은 회사에서도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반골기질 강한 사람으로 호가 났다. 당장 사표를 던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만이나 한국이나, 소시민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럴 수도 없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린것들을 생각하면......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 일본인 엽색관광단을 골탕 먹였을까?

온천에서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고 술을 따르려고 나온 여성들을 주무르는 그들의 행각이야 이미 예고된 것이고. 그로서는 이왕 피할 수 없는 일, 최대한의 돈을 뜯어내어 동포 여성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돌아가게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그뿐 아니라 그는 아가씨들과 일본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장난을 좀 친다. 그의 주 무기인 통역으로. 가령 아가씨가 짓궂게 구는 자기의 짝을 향해 “병신 같은 녀석!”하고 욕을 하면 “당신 색마라는데요?” 하는 식이다.  이 일본인 관광객들은 정력이 딸리는 연령대라 그런지 ‘색마’라는 말을 들으면 칭찬 받은 아이처럼 입이 헤벌레 벌어지는 것이다.


그 징그러운 인간들을 인솔하고 다음 엽색 장소로 이동하던 기차에서  일본 유학을 꿈꾸고 있는 중국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을 우연히 만나는데(중국문학을 공부하는 인간이 일본에 유학을 가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한술 더 뜬다. 중국인 대학생과 일본인 관광객들 간의 통역을 자처, 일본인 관광객들로부터는 과거 일본의 침략과 당시 군인으로 전쟁에 참가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고백하게 함과 동시에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다. 일본인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감을 가지고 접근한 얼빠진 대학생 녀석 또한  혼찌검이 나는 것은 물론이다.  통역으로 장난을 쳐서라도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들어내고 마는 그가 나는 참 유능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자기 자신은 능히 자기가 대표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는 그의 대사를 보라! 아아, 정치든 경제든 독도 문제든 일본과의 협상 테이블에는 모름지기 미스터 황 같은 사람이 하나 꼭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을 나는 1983년 창비판 이호철 선생의 번역으로 먼저 읽고 열광하였다가, 우연히 헌책방에서  ‘기획출판  김데스크’에서 1975년도에 나온 것을 발견하고 구입했다. 육전소설 같은 책 표지가 아주 재미있다. 일본말 안녕(‘사요나라’)과 중국말 안녕(‘짜이젠’)을 갖다붙인 제목도 절묘하고.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 뭐요?”하고 누가 물으면 아주 오랫동안 내 입에서는 “사요나라 짜이젠!”이라는 대답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왔다. 신세를 한탄하거나 구질구질하게 설명하지 않고 군더더기 없는 대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매듭짓는 소설로 이만한 작품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이 작품 외에도 어느 바닷가 유곽이 배경인 <항구의 꽃>과, 미국인 차에 치어 다리가 부러진 한 노동자와 그의 가난한 가족이 몇 푼의 보상금과 호텔 같은 병원 시설에 입을 다물지 못하며 종내에는 그 사고를 횡재로 생각하고 병실에서 쌀 네 근 값인 사과를 하나씩 입에 베어 물고 희희낙락하는 이야기 <사과의 맛>, <주머니칼>이라는 작가의 섬세한 초창기 작품이 함께 실려 있다.

<항구의 꽃>의 다음 구절이 뭐가 그리 좋았던지  당시 20대 청춘이던 나는 검은색 볼펜으로 밑줄을 쳐놓았다.  --운명은 거친 것이어서  우리 같은 여자가 어리광 피우기에는 어림도 없다구요.

 

 


1975년 企劃出版 김데스크 刊(권용철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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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6-05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소위 섹스관광이군요. 그런 시절을 겪은 우리가 지금은 동남아로 섹스관광을 나가며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으니, 과거의 경험에서 과연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네요. 일생동안 천명이라..으음.... 일년에 50명씩 해도 20년이 걸리는...아니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까.

로드무비 2005-06-05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일생에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 이상의 축복이 어딨겠습니까!
인간들이 자신의 유능함을 이상한 방식으로 입증할려고 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 리뷰가 좀 이상한가요?
답글을 다는 님이 없군요.;;;


히피드림~ 2005-06-06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5년 치고는 책디자인이 그럴듯 한데요. 촌스러운 느낌을 거의 주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알라딘에서는 절판이네요.
그래도 도서관에 가면 있겠죠?

로드무비 2005-06-06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unk님, ㅎㅎ 그렇죠?
촌스럽긴커녕 뭔가 파워풀한 표지입니다.
이 책은 창비에서 나온 것도 절판되었는데 아마 오래 된 도서관에 가면 있을 겁니다.^^

날개 2005-06-07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책이군요. 표지도 특이하고..
주인공이 참 맘에 드네요.. 로드무비님이 좋아하시는 책이라니까 웬지 색달라 보인다는..^^;;

로드무비 2005-06-0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오옷, 며칠 동안의 리뷰와 페이퍼를 모두 읽어주시는 세심함과
부지런함이라니!
이 책 리뷰를 제가 잘 못 썼어요. 전달이 잘 안되었습니다.
무척 좋은 책인데......^^

플레져 2005-06-07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렇게 멋진 책이 있었다니요!
그래서 제가 요즘...어리광을 피우지 않아요. 아주 근엄해졌다구요 ^^

로드무비 2005-06-08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안 그래도 그런 것 같아요. 요즘!
섭섭하게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