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각자의 일이 있어야 한다. 젊으나 늙으나 여자나 남자나. 홀로 있는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기대게 되는 순간 불화의 싹이 움트기 시작한다. 무료함은 애정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심심하다고 애정에 기대면 애정은 매정으로 변한다. 오랜만에 이곳에 들어와 이런 말을 하는 이유.... 은퇴하면 겪는 일이다. 그러니 늙어 죽을 때까지 홀로 있고, 홀로 할 수 있는 일을 개발해야 한다. 이런 말이 내 입에서 이렇게 빨리 나오게 될 줄이야. 잠깐입니다.^^

 

집 구석구석에 쌓이는 책이 번거롭고 흉칙해서 도서관에 열심히 드나들었다.(요즘엔 이런저런 물건을 하나하나 버리는 게 일이다.) 돈 주고 사기 아까운 책들을 마음대로 빌릴 수 있어서 좋은데, 마음에 드는 책을 빌리고 나면 갈등이 생긴다. 그래도 이건 사야되지 않을까? 흥! 언제 다시 읽겠다고! 책은 널려 있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다음을 기약'하는 일은 만들지 말자며 조용히 마음을 접는다. 늘 일기를 쓰지만 다시 읽지는 않는다던 올리버 색스의 말이 떠오른다. 읽기도 한번으로, 쓰기도 한번으로. 다만 여운을 남기는 몇 권에 대해서 작은 기록을 남길 뿐이다.

 

 

 

 

 

 

 

 

 

 

 

 

 

 

 

 

이 책을 쓴 두 저자의 공통점. 징집을 피하기 위해 한 사람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한 사람은 미국에서 영국으로 갔다는 점이다. 징집을 회피했다고 영원히 모국에서 배제당하지 않았다는 점도 같다. 올리버 색스는 뉴욕과 런던을 넘나들며 책을 출판했고 제이 파리니는 미국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다. '부동시'라는 해괴한 사유로 군면제된 사람은 한 국가의 지도자가 되고, 국적을 바꿔가며 징집을 회피한 어느 가수는 무릎 꿇고 읍소해도 끝내 모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을 어찌 이해해야 하는지.

 

각설하고.

 

<온 더 무브>에서 인상적인 부분.

 

* '삶의 마지막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이 고마운 생각이게 하라' - W.H.Auden.

  (Let your last thoughts all be thanks.)

   이 말을 인용한 올리버 색스는 이런 말도 했다.

 

" Wystan's mind and heart came closer and closer in the course of his life, until thinking and thanking became one and the same."(Wystan은 바로 Auden)

 

 thinking과 thanking 이 하나가 되었다고라...

 

* p. 79~80  '런던으로 돌아와 의대에 다니던 시절에 마이클 형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고 더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래야 했는데. 형하고 외출해 맛난 것도 사 먹고 영화도 보고 연극도 보고 음악회도 가고(형 혼자서는 절대로 하지 못한 그런 일들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하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는 부끄러움(나를 그렇게 필요로 했는데 곁에 있어주지 못한 나쁜 동생이었다는 죄스러움)이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에 복받쳐 오른다.'

 

정신질환을 앓았던 형에 대한 미안함을 평생 떨칠 수 없었던 색스의 슬픔을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 부분은 읽고 또 읽어도 눈물이 핑돈다.

 

<보르헤스와 나>

p.128. "나는 더 이상 체면을 차려야 할 이유가 없어. 노년이 되면 좋은 점 중 하나지. 어떤 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지."

 

p.202. "시간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는 물었다. "그렇지 않네." 그는 자문자답했다. 그러고는 쇼펜하우어를 인용했다. "그 어떤 사람도 과거에 산 적이 없으며, 미래헤도 절대 살지 않을 것이다. 현재만이 모든 생명의 형식이다." 그러고 나서 보르헤스는 어느 불교 학자의 말을 인용했다. "삶은 생각이 지속하는 동안만 지속한다."

 

p.233. "아, 트라팔가 전투, 맞아. 사격수가 옆 배의 돛대 뒤에 숨어서 비겁하게 그를 저격했지. 그렇게 총을 맞고 죽어가던 넬슨 제독을 생각해 보게. 넬슨은 중위에게 말했다지. '하지 중위, 내가 총에 맞았네. 척추뼈가 으스러졌어. 이제 나는 죽을 거야.' 그리고 한 시간도 안 되어 그는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지. '최소한 나는 내 할 일은 다했네.'"

 

p241. "나도 괴물일세. 자네도 괴물이야. 마음속에 네시나 그렌델을 품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없어. 우리는 한밤중이면 어두운 물속에서 수영을 하지. 나는 떨면서 잠에서 깨어난다네. 자네는 그렇지 않나?"

 

모두 보르헤스의 말이다.

 

 '삶의 마지막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이 고마운 생각'이기는 아무리해도 불가능할 것 같으니 '최소한 나는 내 할 일은 다했네' 하면서 죽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생각.

 

이 책에서 보르헤스가 언급했던 책을 찾아본다.

 

 

 

 

 

 

 

 

 

 

 

 

 

 

 

 

p.107  "소설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완벽한 소설이지."

         "태평양 어느 섬에 갇힌 도망자, 살인자. 시간은 해체되고 현실도 해체되죠." 알래스테어가 말했다.

         "독자도 보이지 않게 되지. 심지어 독자 스스로에게도. 이야기만이 살아있을 뿐이야. 그래, 사라지는 건 작가의 운명이기도 한거야." 

 

 

 

 

 

 

 

 

 

 

 

 

 

 

 

p.112  "공간이 부풀어 오르다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까지 확대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의 무한한 확장에 비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하룻밤 사이에 70년, 아니 100년을 산 것 같은 기분이었다."

 

 

 

 

 

 

 

 

 

 

 

 

 

 

p.132  "나는 <베오울프>를 사랑해. 그래서 북해를 좋아하는 거야. 베오울프는 갑옷을 입고 허리에 큰 칼을 차고 수영을 하지. 아홉 마리의 괴물이 그를 바다 밑으로 끌고가. 베오울프는 하나씩 다 죽여버리지. 쉭쉭! 주변으로 퍼지는 핏물을 상상해 보게. 베오울프는 탈진해서 핀란드로 쓸려가지."

 

나는 대학 때 이 책을 읽긴 읽었으나 이해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고, 그 후 영화로도 봤으나 역시 이해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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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5 "저는 아무 생각이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가급적 남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대부분 아무 생각이 없긴 하지만요."

  "젊은 남자의 운명이야. 집중력이 제한되는 것 말이야. 내가 눈이 멀어서 갖게 된 몇 안 되는 이점 중 하나는 발기의 대상에 시선을 더 이상 고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일세. 이제 나는 내면을 본다네. 물론 그 내면에는 산도 있고 위험한 절벽도 있지만."

  "'아, 정신이여, 정신에는 산도 있고 폭포 절벽도 있다네.'"나는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유명한 시를 인용하면서 말했다. 보르헤스가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본 제라도 맨리 홉킨스.

 

 

 

 

 

 

 

 

 

 

 

 

 

 

큰글씨 책으로 나와 있다.

 

 

 

 

검색해보니, 예전에 뮤지엄 산에서 찍었던 요것이 '제라드 맨리 홉킨스를 위하여'라고 한다. 이 시인의 '황조롱이 새'라는 시에서 영감을 얻었다나. 하여튼 퍼즐 맞추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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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0  "그래! 그리고 주세페 자네가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면 레오폴도 루고네스도 추천하겠네. 예수회의 역사에 대한 그의 책을 먼저 읽게. 얼마나 걸작인지! 하지만 요즘 누가 루고네스를 읽나? 그는 내 젊은 시절의 영웅이었지. 시인 겸 번역가, 신학자, 역사학자, 에세이스트, 극작가, 소설가였지. 요즘 그렇게 많은 장르를 다 쓸 줄 아는 작가가 누가 있겠나?"

 

그래서 찾아 본 레오폴도 루고네스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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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9  "미국에서는 아예 읽히는 게 거의 없지." 보르헤스가 말했다. "나는 자네 나라를 여행한 적이 있지. 강연하려고. 예를 들면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 있는 하버드 대학에 말이야. 나는 항상 학생들에게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라고 말하지. 스티븐슨, 체스터턴, 웰스, 그리고 치디옥 티지본. 이제 시인이 나왔구먼."

  알래스테어가 눈썹을 치켜떴다. "티치본을요?"

  보르헤스는 우리의 관심에 표정이 밝아졌다. " 그 시인은 사실 단 한 편의 시만 썼네. '애가'라는 시지. 자기 자신을 위한 애가야.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시해할지도 모른다는 혐의로 런던의 탑에 갇혔어. 그가 천주교 신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게나. 그가 갇힌 건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 여왕을 왕좌에 앉히려는 배빙턴 음모사건의 일부였어. 그 시는 가장 완벽한 시야.

 

내 청춘의 전성기는 근심거리로 뒤덮여 있을 뿐,

내 기쁨의 연회에는 그저 고통 한 접시밖에,

내 작물의 수확은 가라지밭에서일 뿐,

내 모든 선(善)은 수확의 헛된 희망일 뿐,

대낮이 지나가지만 나는 태양을 볼 수 없고,

나는 지금 살아있지만 이제 내 인생은 끝났구나.

 

그래서 찾아 본 원문.

 

Elegy

 

My prime of youth is but a frost of cares,

My feast of joy is but a dish of pain,

My crop of corn is but a field of tares,

And all my good is but vain hope of gain:

The day is past, and yet I saw no sun,

And now I live, and now my life is done.

 

My tale was heard and yet it was not told,

My fruit is fallen, and yet my leaves are green,

My youth is spent and yet I am not old,

I saw the world and yet I was not seen:

My thread is cut and yet it is not spun,

And now I live, and now my life is done.

 

I sought my death and found it in my womb,

I looked for life and saw it was a shade,

I trod the earth and knew it was my tomb,

And now I die, and now I was but made:

My glass is full, and now my glass is run,

And now I live, and now my life is done.

 

 

각운이 a,b,a,b,c,c 로 입에 척척 달라붙는 맛이 있다. '내 젊음은 지나갔지만 나는 아직 늙지 않았고'.......

 

 

 

 

 

 

 

 

 

 

 

 

 

 

 

 

 

왼쪽은 구매하고, 오른쪽은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도서관에서 구매하게 한 책. 담배보다는 커피 마시는 게 내 취향인 듯....

 

 

 

 

 

 

 

 

 

 

 

 

 

 

 

 

 

책 먼저 읽다가 넷플릭스로 영화 보고 다시 책 마저 읽었다. 책에 비해 영화는 생략이 많아서 좀 무뚝뚝하게 여겨졌다. 필히 책을 보시기를.

 

p.68

"....피터, 남들이 하는 말을 절대로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남들은 너의 깊은 속을 절대로 모르니까."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을게요."

"하지만 피터, 말을 꼭 그런 식으로 할 필요는 없단다. 남의 말을 아예 귀담아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그런 사람은, 보통 모질게 자라서 모진 사람이 되게 마련이거든. 넌 상냥한 사람이 되어야 해, 상냥한 사람이 넌 어쩌면 남들한테 큰 해를 입히는 사람이 될지도 몰라. 왜냐면 넌 강하니까. 너 상냥함이 뭔지 아니, 피터?"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

"그래, 그럼 가르쳐주마. 상냥함이란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앞길에 놓인 걸림돌을 치우려고 애쓰는 거란다."

"그런 뭔지 알겠어요."

조니는 다시 입술을 물었다. "피너, 난 이때껏 걸림돌 같은 거였단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이 편하구나. 잘 알아들어 줘서 고맙다. 자, 이제 그만 가 봐야겠다."

 

 

p.341

"음, 네 손으로 편하게 해줘라." 필이 명령했다. "제일 빠른 방법은 모가지를 비트는 거야. 우습지, 안 그래? 그렇게 배짱이 두둑하지만 않았어도 다치는 일은 없었을 거 아냐."

"세상의 이치를 보여 주는 것 같네요." 피터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 꼬맹이는 철학자 나부랭이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필은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내 생각엔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걸 보여 주는 것 같은데."

 

 

이런 대화를 나누는 부분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피터의 아버지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영화만 보면, "자, 이제 그만 가 봐야겠다." 이 대사가 얼마나 섬뜩한 말인지를 알 수 없다.

"내 생각엔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걸 보여 주는 것 같은데."라는 대사가 자기의 운명을 암시한다는 것도 알 수 없다. 독자에게 힌트를 주는 이런 말들을 읽는 맛이란....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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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3-16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마 님 은퇴라시니 그동안 열심히 일한 만큼 이제 많이 쉬면서 또 좋은 시간 엮으시길 바랍니다. 잠깐인 거 맞는 것 같아요 ^^
페이퍼 보다 몇몇 겹치는 것들이 있어 반갑습니다. 특히 원주 뮤지엄산의. 저 붉은 조형물이 그런 것이었군요. 몰랐어요. 홉킨스 시집 찜해 갑니다.

2022-03-16 14: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16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je 2022-03-16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ma님 덕분에 저는 퍼즐을 찾았습니다. 뮤지엄산의 저 작품에 그런 배경이 있었군요!
저도 오랜만에 사진을 찾아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퍼즐을 맞추는 일이 남았습니다 ㅎㅎ

nama 2022-03-16 17:55   좋아요 1 | URL
겨우 퍼즐을 맞추었더니 홉킨스의 <황조롱이>라는 시가 숙제로 남았습니다.ㅎ

라로 2022-03-16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너무 좋아요!! ˝삶은 생각이 지속하는 동안만 지속한다.˝라는 보르헤스의 말을 저도 요즘 환자들을 보며 생각해요. 제가 간호사이면서도 너무 매정한 것 같지만, 기구에 의존해 생명을 부지하는 환자들을 보면 이렇게까지 하고서 살아야 하나? 그런 생각을 너무 자주 해서 요즘 괴로워요. 하지만, 그들 덕분에 저는 제 삶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인생은 참 오묘합니다.

nama 2022-03-17 08:27   좋아요 0 | URL
참 어려운 문제예요.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상황이요.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문제인데...
라로님 글에서 늘 에너지를 얻고 있어요. 잘 이겨내실거예요~~
 

 

인천에서 제주도 가는 배 Beyond Trust를 탔다. 이 배는 월, 수, 금 오후 7시에 출항해서 제주항에는 다음날 오전 9시 30분에 닿는다. 화, 목, 토는 제주에서 오후 7시 30분 출항, 다음날 오전 10시에 인천에 도착한다.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닿을 거리를 열 시간 넘게 배에서 뒹굴다보면 제주가 아주 멀리 떨어져있는 것 같고 우리나라가 큰 땅덩어리로 다가온다. 여행 기간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는 것도 좋다. 여행이란 이동 시간이나 여행 기간이 좀 길어야 여행맛이 난다.

 

작년에 이어 이번엔 8코스부터 시작한다. 보통 하루에 최소 2만 보는 걷게 되는데 생각보다 지치지 않는다. 제주 올레길이 워낙 다양하고 아름다워 여간해서 여독이 쌓이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솔비투르 암불란도. 걸으면 해결된다. 이 문장 하나 마음에 담고 걷고 걷다보면 어느새 끝이 보이고 길은 다시 그 다음 코스로 이어진다. 14코스까지 걸었는데 벌써 14-1 코스가 궁금해진다. 사진 몇 장 올려본다.

 

 

 

 

 

 

 

 

 

 

 

 

 

 

 

 

 

 

 

 

 

 

 

 

 

 

 

다음은 모슬포 이야기.

 

 

 

 

하루에 다섯 번 운행되는 마을순환버스를 타려면 눈이 밝아야한다. 카카오맵으로 행선지를 확인하는 건 기본, 버스정류장을 찾을 것, 정류장 유리에 붙어있는 버스노선표를 자세히 확인할 것, 또한 버스라는 게 반드시 버스모양이 아닐 수 있음을 염두에 둘 것 등.

 

아담한 녹색 마을버스를 기다리다가 하마터면 저 버스를 놓칠 뻔 했다. 리무진 밴이라니. 저런 차는 동남아를 여행할 때 현지 당일 패키지에서나 타봤지 국내에선 타본 적이 없다. 손님이라곤 남편과 나, 단 둘. 요금은 일인당 1,150원. 40여 분을 달리는데 도무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무엇엔가 홀린 것 같다. 여행맛이 제대로다.

 

 

이 노선표를 찾아낸 우리가 기특하다. 전날 버스 때문에 우왕좌왕 고생을 한 덕에 눈이 밝아졌다.

디지털 세상에 살다보니 아날로그가 참신하게 다가온다. 마치 아날로그 세계에 처음 진입한 것처럼. 디지털 세상에선 아날로그가 디지털이다.

 

 

 

상점 중에서 다방이 가장 많은 동네, 모슬포.

 

 

 

요건 <골목다방>의 메뉴판. 이름에 걸맞게 골목처럼 쏙 들어가 있는 다방.

 

 

 

70~80년대 동네에서 흔히 보던 잡화점을 으례 연쇄점이라고 불렀다. 이 단어가 반가워 사진을 친구들에게 보냈더니 다들 '연쇄점'이 뭐냐고 묻는다. 옆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같은 지역에서 성장했는데....거 참...

 

 

 

모슬포에 숙소를 잡으려고 여러 호텔 예약앱을 들여다보았으나 별로 만족스럽지 못해 그냥 현지답사를 했다. 두어 군데 호텔을 둘러보았으나 내키지 않아 이리저리 발길을 돌렸다. 모슬포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터덜터덜 오르며 "깨끗하고 있을 것 다 있고, 전망 좋고, 가격은 한 삼만 원하는 그런 민박집 어디 없을까?"하는 순간 눈 앞에 예쁘장한 간판이 보였다. <다락민박>. 심지어 집 앞은 올레길 11코스다. 내가 원하는 게 그대로 이루어지다니....그런 일도 다 있다니....게다가 주인아주머니는 어찌나 친절하신지 어느날엔 떡 한 접시와 잡채 한 접시를 갖다 주셨다. 체크아웃할 때는 물이 필요하냐고 물어주셨다. 제주도 한달살기는 이런 곳에서 해야 되겠구나, 다짐했다.

 

 

 

 

100km 쯤 걸었더니 양말이 닳았다. 내 연골은 안녕하신지...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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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5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25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22-10-21 0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너무 좋은걸요.
요즘 알라딘에 자주 들어오질 못해 nama님 올리신 글들을 한꺼번에 몰아서 읽었습니다. 꿈꾸시던 생활을 하고 계신가요. 좋아보여요.

nama 2022-10-21 06:57   좋아요 0 | URL
일을 놓으니 얼굴이 밝아졌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혼자서 노는 게 체질이니 이만하면 꿈이 이뤄진건가요.. 여행 못 다니고 늙어가는 게 좀 아쉬워요. 인생 끝이 서서히 보이잖아요. ㅎ
 
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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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깜짝 놀라면서 책장을 넘긴 책. 이유는,

- 대학원 과정은 아니지만 학사 편입으로 문예창작학과에서 공부를 해봤다는 것.

- 주인공들이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를 좋아한다는 사실. 대학 때 원고지 80장을 작성해야 하는 졸업논문으로 이 소설을 선택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래서인지 이 소설은 내게 의미가 크다는 것.

- 취업 후, 잠시 적을 두었던 문창과에서 알게 된 동료를 내 아파트로 불러들여 몇 개월간 동거했다는 것.


그러니 마치 내 얘기인양 읽게 되었다. 와우.... 내가 쓸 뻔한 소설을 누가 먼저 써버렸군, 은 물론 아니고 그저 한구절한구절 눈에 불을 켜고 읽게 되었다고나 할까. 소설 속의 합평회에서 한 작품을 두고 이를 잡듯 집요하게 따지고 파고드는 것처럼. 실제로 문창과에서 이루어졌던 창작세미나 수업이 그랬었다. 특히 등단한 학생의 작품을 잘근잘근 씹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게 떠오른다. 등단은 선망의 대상이었으므로.


"그쪽 소설 보니까 어떤 책 생각나는지 알아요? <와인즈버그, 오하이오> 읽어봤어요?"

"네." 그가 말했다. "굉장히 좋아했는데."

"거기서 영향받은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내 생각이 맞나?"

"허." 그가 말했다. "그런 생각은 못 해봤는데요. 아마 무의식적으로 스며들었나 보네."

                                                                    -49쪽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 졸업논문이란 게 그저 리포트를 길게 쓴 정도에 불과했지만 당시는 오랜 시간을 두고 고민한 결과물이었다. 수업 시간에 배운 적이 없는 이 소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혼자만 알고 있다는 자만심을 충족시켜주는 소설이었다. 논문 제목에 '소외'라는 단어를 붙였었는데 나의 대학 생활이 꽤나 외롭고 쓸쓸해서였을 것이다.


벽장문이 삐걱거리며 조금 열렸고, 부드러운 털이 내 팔을 스치며 정전기가 이는 게 느껴졌다. "셔우드" 종이 뭉치를 내려놓으며 내가 말했다. 등뼈의 울퉁불퉁하게 솟은 부분을, 턱 밑을, 두 귀 사이를 쓰다듬어주자 녀석은 두 눈을 감고 턱을 만족스럽게 늘어뜨렸고......

                                                 - 300 `~ 301쪽(마지막 페이지)


고양이 이름 "셔우드".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를 쓴 작가 이름이 셔우드 앤더슨이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미소짓게 한다.


"그건 숨길 수가 없었지." 그가 말했다. "MFA가 뭐의 약자냐고 묻길래 순수예술 석사과정 Master of Kine Arts이라고 했더니, 그걸 '자위하는 호모 예술 Masturbating Fag Art'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더라."             -59쪽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를 학생들은 이렇게 바꿔 불렀으니. '중간대학교 요술대학 문제창작학과"라고.


성적으로든 플라토닉하게든, 처음으로 누군가의 집에서 자고 나면 두 사람 모두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을 더 편하게, 동시에 더 불편하게 느끼게 된다. 함께 친밀감의 울타리를 뛰어넘지만 뒤이어 적나라한 아침 빛 속에서 서로를 보게 되는 것이다.     -65쪽


취업 후 얻은 아파트가 썰렁해서 문창과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를 불러들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재밌지도 덜 외롭지도 않았지만 누군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이 친구는 잘 생기고 인기 절정의 문학청년을 애인으로 두었는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집으로 전화를 걸어댔다. 당시는 90년대 초반으로 휴대폰이 보급되기 전이었다. 매일 걸려오는 전화에 질려서 결국 이 친구를 집에서 내보내게 되었는데.....낭만적이고 전형적인 문학청년인 그와 나는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다. 같은 수업을 들었으니까. 차라리 서로 몰랐다면 어땠을까.


잠시 동거했던 이 친구는 몇 년 후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고 책도 몇 권 세상에 내놓았다. 그 문학청년은 다른 여성을 만나서 아들 하나를 두었지만 그녀와도 헤어졌고 몇 년 후 홀로 살고 있는 집에서 돌연사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가 쓴 책 한 권이 내 책장에 꽂혀있다. 이 무슨 소설같은 이야기인지...


빌리가 내 안에서 다른 누구도 움직이게 한 적 없는 무언가를, 깔끔하게 정의된 범주에는 들어맞지 않는 무언가, 내가 명료하게 표현할 엄두를 낼 수 없었던 무언가를 건드려 움직이게 했다는 것을. 비록 이런 각각의 경험은, 누구나의 외로움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특정 범주에 넣기 불가능한 독특한 것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라고 - 타인의 경계가 그려내는 특별한 윤곽선은 우리 자신의 그것과 충돌하고, 남은 평생 동안 사라지지 않을 커다란 구멍을 남긴다 - 지금의 나는 생각하지만 말이다.           -287쪽


서로의 외로움을 정확히 알아본 사람은 서로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다. '특정 범주에 넣기 불가능한 독특한' 경험은 '남은 평생 동안 사라지지 않을 커다란 구멍을 남긴다.' 우정이자 사랑, 그 이상일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감정을 말하고자 한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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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는 동심.

소박한 소품들이지만 바다 건너 비행기 타고 온 것도 있고
놀이공원, 뽑기 코너 출신도 있다. 물론 소품의 주인은 딸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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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집안 살림살이에 이력이 붙을라나. 하긴 그런 착한 마음을 먹어본 적이 없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던 내가 드디어 한 단계를 올라갔다. 시래기를 데치고, 말리고, 저장하고, 요리까지 해냈다는 것. 누구에겐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누군가에게는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일이 되기도 하는 법. 나에게 시래기는 고난이도의 숙제 같은 거였다.





몇 년 전에도 시래기를 말렸다가 말린 시래기들이 고스란히 가루로 부숴지는 황당한 경험을 하고는 다시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후로 시래기는 돈 주고 사 먹는 음식이 되었다. 예전에 엄마에게는 일도 아닌 것들이 왜 그렇게 어렵고 낯설던지...




책을 통해서 얻는 간접 경험보다 몸을 써서 얻는 기쁨이 훨씬 더 가치 있다는 걸...환갑이 넘어서야 겨우 깨닫는다. 나는 내 몸을 잘 사용하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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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12-06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가지런히 널린 씨레기들이 느~~~무 예뻐요. 마자막 단락에 공감 백배요. 몸을 써서 얻은 것들이 오래오래 가기도 하더라구요.

nama 2021-12-06 18:51   좋아요 0 | URL
20대 때는 등산을 통해서 자신감과 성취감을, 삶의 용기를 얻었지요. 몸에서 얻은 것만이 내 것 같아요.

scott 2021-12-06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에 좋은 시레기 나마님 댁 겨울나기 든든산 양식이네요^^

nama 2021-12-06 18:54   좋아요 0 | URL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데 인기는 없네요~

프레이야 2021-12-06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지 말리다 실패해서 시래기는 구매했어요.
냉동실에 많이 넣어두니 든든하네요.
먹기 좋게 잘 나오네요. 하지만 이렇게 정성들여 말린 거랑
비교 불가겠지요. 영양가가 그리 높다는데 그보다도 여러가지로
조리해 먹을 수 있고 좋으네요. 겨울건강 챙기자구요^^
몸을 잘 사용하기! 나이 들어갈수록 절실한 것 같아요.

nama 2021-12-06 19:58   좋아요 1 | URL
감자 캐는 것은 좋아하는데 해먹는 건 별 괸심 없고,
밤 줍는 건 미치도록 좋아하는데 그냥 두는 바람에 벌레 먹고,
온갖 효소 만들지만 먹는 것엔 등한시하고.. 이게 저랍니다. ㅎ
시레기는 한번 제대로 해먹도록 노력해봐야지요.
몸을 사용하는 방법 터득하기. 배움엔 끝이 없어요.

stella.K 2021-12-06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기 좋네요. 건강해질 것만 같고.
저희는 이제 시래기를 잘 안 먹게되요.
어무이가 껍질까기 귀찮다고 사지도 않더라구요.
된장 시래기국 끊여 먹고 싶네요.^^

nama 2021-12-06 21:07   좋아요 0 | URL
시래기가 손이 많이 가긴 해요. 시간도 많이 걸리고요. 먹긴 쉽지만...음식은 남이 해주는 게 제일 맛있지요^^

라로 2021-12-07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래기 넘 좋아해요!! 여기 사니까 그리운 것 중에 하나고요. 저도 나마님처럼 만들어 보고 싶은데 여기서 무를 팔 때 아예 무청을 안 팔아서 아무래도 불가능. ㅎㅎㅎ 가지런히 널어 놓은 모양이 무슨 장식품처럼 멋지네요. (하아~~제 언어 능력은 변함이 없으니;;;)

nama 2021-12-07 16:59   좋아요 0 | URL
여기도 대형마트에서는 무만 팔아요. 저건 충남 예산에 갔다가 우연히 전통시장에서 사왔어요. 제가 구입한 거에다 다른 사람이 버리고 간 무청을 주인이 다듬어주는 바람에 얼떨결에 들고 왔어요. 시골에선 흔해 빠진 거라 인기가 없고 도시에선 거추장스럽다고 외면하다보니 무청 만나기도 귀해요.

nama 2021-12-09 18:36   좋아요 0 | URL
등잔 밑이 어둡다고..오늘 보니 동네 마트에도 무청 달린 무를 팔고 있네요. 살림에 얼마나 무심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