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인이라는 광기 - 정신질환과 낙인의 습격을 받은 어느 가족,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은 희망에 관한 이야기
스티븐 힌쇼 지음, 신소희 옮김 / 아몬드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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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잡하지만 후련한 심정으로 읽은 책. 정신질환에 대한 시각을 바로 잡아주고 그 고통을 보듬어 주는 책. 정신질환을 겪는 분이나 그 가족이 읽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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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터스위트 - 불안한 세상을 관통하는 가장 위대한 힘
수전 케인 지음, 정미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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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 아야코의 책「중년이후」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 경험상 체험이 아니라 지식으로만 터득한 것은 나의 피와 살이 될 정도의 정열로 발전된 것은 거의 없었다. 축적된 지식이 나의 체험에 힘입어 하나의 사상이 된 적은 있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 교육받은 것 중에는 순수하게 그 자체가 나의 신조가 된 것은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사람이란 자신이 체험한 것밖에는 알 수 없다는 사고에서 나는 지금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p. 111


거의 매일 북플이 알려주는 나의 흔적들을 읽다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내가 이런 책을 읽었어? 이런 글도 썼었어?'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 걸 읽어서 뭐하나... 콩나물에 물주듯 생의 어느 한 시기에 접한 책들도 나에게 피와 살이 되었을까....과연....



수전 케인의 이 책에서 마주친 한 문장에 한동안 생각이 꽂혔다.





나오미 시합 나이(Naomi Shihab Nye). 1952년생. 미국 시인.


위의 구절은 그의 시 <친절>에 나오는 문장이라서 일삼아 찾아보았다. 원문과 번역한 문장도 옮겨본다. 오늘은 시간이 널널하고 모처럼 마음도 밝다.



Kindness


Before you know what kindness really is

you must lose things,

feel the future dissolve in a moment

like salt in a weakened broth.

What you held in your hand,

what you counted and carefully saved,

all this must go so you know

how desolate the landscape can be

between the regions of kindness.

How you ride and ride

thinking the bus will never stop,

the passengers eating maize and chicken

will stare out the window forever.


Before you learn the tender gravity of kindness

you must travel where the Indian in a white poncho

lies dead by the side of the road.

You must see how this could be you,

how he too was someone

who journeyed through the night with plans

and the simple breath that kept him alive.


Before you know kindness as the deepest thing inside,

you must know sorrow as the other deepest thing.

You must wake up with sorrow.

You must speak to it till your voice

catches the thread of all sorrows

and you see the size of the cloth,

Then it is only kindness that makes sense anymore,

only kindness that ties your shoes

and sends you out into the day to gaze at bread,

only kindness that raises its head

from the crowd of the world to say

It is I you have been looking for,

and then goes with you everywhere

like a shadow or a friend.


친절(류시화 번역)


친절함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려면

네가 가진 것을 잃어 봐야 한다

싱거운 국에 소금이 녹아 사라지듯이

미래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껴 봐야 한다.

손 안에 갖고 있던 것

숫자를 세며 소중히 간직해 온 것

그 모든 것이 떠나가야만 한다

그래야 알게 된다

친절함이 없는 곳의 풍경이 얼마나 삭막한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버스에 타고 있는데

승객들은 옥수수와 닭고기를 먹으며 

영원토록 창밖을 응시한다


친절함의 부드러운 중력을 배우려면

흰 판초를 입은 인디언이

길가에 죽어 있는 곳을 지나가 봐야 한다

그가 너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도 나름의 계획을 갖고 밤을 여행한 사람이었다

그를 살아 있게 했던 것도 단순하 호흡이었다


친절함이 내면의 가장 깊은 것임을 알려면

또 다른 가장 깊은 것인 슬픔을 알아야 한다

슬픔에 감겨 잠에서 깨어나 봐야 한다

너의 목소리가 모든 슬픔의 실들을 알아차려

그 천의 크기를 알 때까지

슬픔과 이야기해 봐야 한다

그때 친절함 외에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없어지고

친절함만이 너의 신발끈을 묶어 주고

밖으로 나가 편지를 부치고 빵을 사게 할 수 있다

오직 친절함만이 세상의 많은 것들 속에서

머리를 들어 말한다

네가 찾고 있던 것은 바로 나라고

그리고 너의 그림자처럼 또는 친구처럼

너와 함께 어디든 갈 것이다



(*'밖으로 나가 편지를 부치고'......요부분은 원문에서 안 보이는데...)




지난번 포스팅했던 <내가 만난 장애아 엄마1>를 쓰면서 떠올린 감정이 슬픔이었는데 그 슬픔이 이렇게 친절로 연결되는 거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야 보이는구나, 라는 생각도. 나도 슬픈 거였구나, 라는 자각. 슬퍼야 보이는구나. 다시 소노 아야코로 돌아가서, '사람이란 자신이 체험한 것밖에는 알 수 없다'에 수긍 또 수긍. '친절'이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은 느낌.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는 내가 아는 것이 참 없다의 다른 표현. 나이 먹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이제는 솔직할 수 있다.'라는 생각.


시 한 편 건진 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만하다. 솔직히 이런 류의 책은 잔상이 오래가지 않는다. 읽는동안 마음의 위로를 받는 건 분명하지만 책을 덮고나면 곧 잊어버리고만다. 비터스위트라는 달콤씁쓸한 감정을 찾아 나선 작가의 열망과 부지런함이 되려 불편해지는 순간이 결국엔 들이닥치고. 차고 넘치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구먼, 하는 교만한 태도에 흠칫 놀라기도 하고. 독자로서의 예의를 끝까지 잘 지킬 것.


허준이 교수의 졸업식 축사를 동영상으로 보고 축사 원문도 찾아 읽었다. 그중 한 부분.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 '먼 미래의 우리'. 중학생 아이들을 가르칠 때 종종 이런 말을 했다. "너희들이 보기에 선생님(나)이 늙어보이지?" 아이들 대답, 이구동성으로 "네." 그러면 이렇게 말한다. "얘들아, 잠깐이다." 아이들이 고개를 젓는다. "쌤,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무서워요."


썩 살갑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지막 축사의 말에 '친절'이 들어가서 좋다. '절 중에서 최고의 절은 친절'이라던 어느 스님의 말씀도 떠오른다. 부디 친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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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미국에 가지 말 걸 그랬어
해길 지음 / 텍스트칼로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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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와서 일 년만 김밥 말아보쇼. 선생 때려치우고 온 걸 두고두고 후회할거요."

" 여기는 물과 공기만 좋아요. 말하자면 심심한 천국이지요."

" 우리 내일 라면 함께 끓여 먹어요. 여기선 라면 함께 먹는 날이 소풍날이예요."

" 외국은 여행이나 다녀야지 직접 외국에서 사는 건 아니랍니다."


2003년 뉴질랜드에 갔을 때 얘기이다. 당시 외국어과 교사 대상으로 해외 배낭연수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운 좋게 당첨되어 170만 원을 보조 받았다. 연수 해당 국가는 미국, 영국, 호주, 유럽, 뉴질랜드로 주로 영어권 국가에 한정되었다.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하는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권 국가는 왜 해당이 안되는지 그때나 지금이나 당혹스럽다. 유럽에서 영어를 사용할 기회보다 인도에서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훨씬 많은데도 말이다. 흑인 원어민 교사를 채용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겠지. 지금은 좀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뉴질랜드를 선택한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일주일은 패키지로 뉴질랜드 남북을 훑어보았다. 나머지 열흘은 동료교사 언니가 운영하는 오클랜드 외곽에 위치한 한 모텔에 묵으며 현지인처럼 지내보았다. 매일 버스를 타고 오클랜드 시내로 출퇴근했다. 대학에도 가보고 영화도 보고 맥주공장 견학도 하고 수족관도 가고.... 그러다가 어느날은 동료교사의 언니를 비롯한 한국인들과 어울려 월남쌈을 해먹기도 하고 현지인이 애용하는 온천에도 다녀왔다. 그들 중에는 퇴직하고 이민온 노부부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지금의 내 나이쯤 되는 분들이었던 것 같았다. 그분들이 내게 물었다. 오클랜드 시내 가는 버스요금이 얼마냐고. 자기들은 한번도 타본 적이 없노라고. "그거요. 손바닥에 동전 몇개 올려놓고 기사분한테 알아서 가져가시라고 했죠. 그래서 요금을 알게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딱 맞게 내고 타게 되었어요." 맥주공장 견학도 다녀왔다고 했더니 어떻게 알고 갔냐고 물었다. 여행안내소에 있는 브로슈어 보고 다녔왔다고 하니 "그런 방법도 있네요."하면서 신기해했다. 그렇게 두어 번 어울리다보니 한국이민자들 얘기와 이민생활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것들을 듣게 되었다. 대책없이 온 어떤 가족 얘기, 선생 때려치우고 이민와서 하루종일 김밥 마는 어떤 분 얘기, 이민 초기 운전이 익숙하지 않아 3시간 동안 직진했던 얘기 등. 그리고 위의 저 대화들. 듣다보니 이민생활이 그리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낙이라면 한인상가에 가서 비디오테이프 빌려다가 보는 것 정도. 이민자들끼리 함께 라면이나 맛있는 음식 해먹는 정도. 그리고 무엇보다 무료해보였다. 영어를 잘 못하니 키위(현지인)들과 어울리지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래도 이분들은 돈을 벌어야하는 압박감은 없어보였다. 부인은 전직 초등학교 교사여서 연금을 받고 있으며 한국을 오가며 생활한다고 했다.


여차하면 이민이나 가야지, 하고 막연하게 마음 먹고 동경도 품고 있었는데 단박에 정신이 들었다. 아, 니, 구, 나......하고.



이 책을 읽다보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어떻게 하는 일마다 망해버릴 수 있을까. 예전에 우리 아버지가 그랬다. 잉어 양어장, 양계장, 약초 재배, 향나무 재배, 시멘트 매매....하는 것마다 처절하게 실패했다. 답답한 엄마가 점쟁이를 찾아갔더니, 가만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고 했단다. 그냥 한국에 있었으면 절대 하지도 않을 고생을 온식구가 7년에 걸쳐 재산 탕진해가면서 고생은 고생대로 했다는 게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쩌릿쩌릿했다. 귀촌이나 귀농도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달살기, 일년살기를 해보는 게 실패를 줄이는 방법인데 하물며 외국 이민이야....



이 책은 아주 고마운 책이다. 미국에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도 내가알던 친구들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친구들은 학생 티를 벗지 못한 사회 초년생들이었는데 어느새 한 분야에서 자리를 잡고 조직에서도 중요한 위치까지 올라가 있었다. 대학가 근처에서 저렴한 술집이나 찾아다니던 예전의 친구들이 아니었다. 연예인 못지않은 머리 스타일에 유행하는 옷을 입고, 브랜드 가방을 멘 모습이 눈부셨다. 반면에 나는 미국에 갈 때 가져갔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낡은 가방을 메고 있었다.

                                                                                  -248쪽



7년간의 고생이 빛을 발할 때가 있을 거예요. 기죽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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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31 11: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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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31 11: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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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31 14: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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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1 09: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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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치병, 불치병이라고 해두자. 불가항력적인 이 병에 걸리면 나 같은 인간은 세상을 원망하고 신을 지독히도 미워하느라고 제명대로 못살 것이다. 그것도 태어나면서부터 얻게 된 병이라면.


입학식에는 이 학생의 어머니만 참석했다. 5층에 자리한 강당에 올라오는 게 힘겨웠는지 호흡이 거칠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그리 건강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물어보진 못했지만 기저질환을 앓고 있을 것 같았다. 입학식이 끝난 후 이 학생 몫의 교과서를 챙겨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후 일년 내내 이 학생은 한번도 등교하지 않았다. 등교하지 않아도 되었다. 집에서 온라인으로 교육청이 제시한 사이트에 들어가서 출석체크와 정해진 수업분량만 채우면 되었다. 연 네 차례의 시험을 볼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까 학교에 적을 두는 형태로 소속을 정해주었을 뿐 학교 생활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교복도 입어보고 싶고 친구들과도 어울리고 싶고 한창 유행중인 빨간색 립밤도 바르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의 휴대폰에 담긴 교복 입은 모습은 여느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다만 교복을 입었으되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이 형벌처럼 잔인할 뿐이었다.


엄마는 메신저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각종 서류도 그때그때 제출했고 자녀의 학업 생활에 필요한 정보교환도 놓치지 않았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학교에 와서 일처리를 했기에 엄마를 자주 만나게 되었다. 이제는 나도 나이가 들어 학부모의 나이가 내 나이를 넘는 사람이 없어서 학부모를 대하는 일도 그리 부담되지는 않았다. 나이듦의 편안함을 조금은 누릴 수 있게 되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한번도 출석하지 못하는 학생의 담임이라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시간은 잘도 흘러 여름방학에 들어갔다. 타지역에서 3일간의 연수를 받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이 학생의 엄마였다. 말을 머뭇거리고 있어서 용건을 여쭸다. 다음날 갚을테니 70만 원을 빌려줄 수 없냐고 묻는다. 간절하고 답답한 심정이 전해져왔으나 순간의 판단은, 빌려준다면 돌려받지 못할 돈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순간 당황한 나는 회피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더듬거리며 거절의 말을 했으리라. 나 자신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어 괴롭기도 했다. 그간의 이해와 공감은 돈 앞에서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들고 있었다. 나도 내가 마음에 안들었다.


개학이 되어 학교에 돌아와 이런 사건을 얘기하니 교감샘이 웃으며 그런다. "한번 빌려줘보시지 그랬어요." 그게 또 그렇다. 타인은 무심하다.



학교생활이 너무나 피곤했다. 얼마 후 학교를 영영 떠났다. 물론 이 일 때문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무겁고 지친 삶의 무게 때문에 쓰러질 찰나 지푸라기 하나 얻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도중하차, 자랑스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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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쯤 될까? 가물가물한 기억을 헤집어본다. 학급당 학생수가 50여 명쯤 하는 시절이었고 지금은 잊혀진 아이들 얼굴을 애써 떠올릴 수도 없지만 한 학생만큼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말이 없고 조용히 앉아있던 그 학생 때문이 아니라 그 학생의 어머니 때문이다. 아마도 학년 초에 열리는 학부모 총회에서 만났을 것이다. 아닌가? 잘 모르겠다. 하여튼 그 학생의 어머니와 얘기를 나누었고 자녀 중에 자폐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폐아가 주는 어감 때문에, 나 역시 장애가 있는 언니를 두었기에, 그 학생을 유심히 보게 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따로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자폐아를 동생으로 둔 아이의 마음은 어떨까 상상하며 일상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을 뿐이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학년 말이 되었을 무렵, 정확히는 김장철 무렵, 이 어머니가 갓담근 김장김치 세 통(아마도)을 손수 들고 내가 사는 아파트를 찾아오셨다. 고소공포증(밀실공포증?)으로 엘리베이터를 타면 심장이 두근거린다며 식은땀을 흘리고 계셨다. 예전에 어떤 선생님에게 드렸는데 제 때에 냉장고에 넣지 않아서 결국 못먹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시며 이마에 흘린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숨을 돌리셨다. 고마움과 죄송한 마음으로 염치없이 김치통을 받았다. 묵직했다. 배추김치, 알타리김치, 파김치였던가. 종류를 달리한 김치 세 통을 이삼일 실온에서 익힌 후 냉장고에 넣으니 냉장고가 꽉 찼다. 그해 겨울 그 김치를 먹을 때마다 이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후로도 그 김치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해보았다. 자녀의 담임선생님이 뭐가 그리 이쁘다고, 뭐가 고맙다고 이런 수고를 하셨을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아픈 자녀가 있으면 엄마의 마음도 늘 아프다. 아픈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서 내 아픔을 보아달라고, 알아달라고 할 수는 없다. 차라리 내가 남을 보듬어주는 게 내 아픈 마음을 들키지 않고 나를 위로하는 방법이 된다는 것을. 그러니 누군가 조건없이 내게 무엇인가를 베풀 때는 잠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사람의 마음의 밑자락을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위의 책. 김치통과 함께 주신 건지, 나중에 주신 건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저 책을 직접 쓰셨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직접 쓰신 걸로 기억하는데 내용을 읽다보니 아닌 것도 같고.....그게 또 그렇다. 타인은 무심하다.

 

1월 12일

  '버스 금강 추락 38명 사망'

  신문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 떼죽음을 당하는 세상이다.

  외로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 고장난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내는 아이. 현실적으로 보아도 가엾기 그지없고 절망감난 안겨 주지만 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맑고 깨끗한 영혼의 소유아이리라. 이럴 때는 겨울 열차를 타고 조용한 간이역에서 혼자 내리고 싶다.      -55쪽

 

1월 13일

  내가 당면하고 있는 이 시련은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다. 죽음을 생각해 보자. 죽음은 모든 것을 앗아가버린다. 이 시련조차도.

  그래서 이 시련은 생명이 숨쉬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 생명을 열렬히 사랑하라는 신의 가르침이 있다.     -55쪽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지, 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내는 장애아 엄마. 지금은 어떻게 살고 계신가요? 잘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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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8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9 18: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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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8-28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조건없이 베풀 때는 잠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말씀 너무 와 닿습니다!!! 잘 지내시죠??

2022-08-29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30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31 0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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