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에 갔다. 그곳은 밀양 송전탑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을 때는 나 살기가 바빠서 마음 한 켠으로만 품고 있던 곳이고, 교단을 떠나 활동가로 활약하는 이계삼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그 전에 표충사와 얼음골이 볼 만하다하여 언젠가는 가보리라 마음 먹은 지 오래된 곳이기도 하다.

 

 

어느 한 구절 소홀히 할 수 없었던 이계삼의 책들. 내 안의 거품을 제거해준 고마운 책들이다.

 

 

 

 

 

 

 

 

 

 

 

 

 

 

 

 

 

 

서쪽 끝 인천에 사는지라 동쪽 끝 강름이 제일 멀겠거니 했는데 밀양은 동쪽 끝보다 더 멀었다. 마음 먹지 않으면 좀체로 가기 힘든 곳이다. 어디 밀양뿐이랴. 밀린 숙제마냥 시간 되는대로 한곳씩 답사하기로 했다. 썩 괜찮은 생각이지 싶다.

 

 

구도심에 있는 영남루를 둘러보고 가까이 있는 전통시장으로 갔다.

 

 

전국3대 전통시장이라는데 인적마저 드문 거리는 깨끗했다.

 

 

 

 

 

 

연이은 참기름집. 쇠락한 기운이 감돌지만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오천 원짜리 보리밥. 산초가 들어간 겉절이가 특히 맛있었는데 주인 할머니가 그러신다. "서울 사람이나 충청도 사람은 산초 들어간 음식 못 먹어요." 헤헤. 나는 서울 사람도 충청도 사람도 아니라서 잘 먹는구나. 그런데 내 말투는 서울말이다. 맛깔스러운 경상도 사투리에 섞이니 듣기에도 말하기에도 아주 밋밋해져버린다. 내 말투가 싱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초 같은 짜릿함을 섞어서 말할 수는 없을까.

 

 

 

승효상의 <묵상>에서 읽었던 명례성지로 향했다.

 

 

 

 

 

 

 

 

 

 

 

 

 

 

 

 

80년 된 옛 한옥 성당. 남녀의 영역을 가르는 기둥이 있는 작고 소박한 곳이다. 견진성사까지 받은 몸이지만 마음이 떠난 지 오래. 절에 가면 오체투지, 교회에 가면 아멘, 성당에선 성수 찍어 성호를 긋는다.

 

 

 

승효상이 설계한 순교자 기념 성당.

 

 

 

 

 

 

 

 

 

 

 

 

 

 

 

 

 

 

 

 

 

 

 

계단의 사각형 구조물을 통해 외부의 빛이 내부로 들어간다.

 

 

 

임옥상의 순교자 조상

 

 

뜻대로만 된다면, 이 명례성지는 우리가 지금 찾는 수도원 순례 여행지처럼 세계의 순례자들이 목적하며 찾는 리스트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좋은 장소가 되어, 결국 그들이 살면서 부활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429쪽

 

 

 

 

 

다정한 모녀

 

 

다음 날. 이른 아침의 표충비각.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눈물을 흘린다는데...관심이 없다. 表忠. . .  충의를 드러내기도 싫다.

 

 

 

 

 

 

경내에 있는 '밀양 무안리 향나무'. 약 300년 된 향나무. 이렇게 큰 향나무는 처음 본다.

 

 

 

 

둘러보면 예쁜 담장도 있다.

 

 

 

 

다음은 청도 운문사.

 

 

 

운문사는 승가대학이 있는 비구니절이다. 유홍준이 <산사순례>에서 이 절의 명물은 새벽예불과 저녁예불이라고 했는데 접할 기회는 없었다. 여기보다는 1008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사리암이 더 인상적이었다.

 

 

사리암은 기도발이 좋은 곳이라고...  젖은 마음을 햇볕에 말리는 것 같은 정경.

 

 

 

밀양 시내의 모텔 얘기. 영남루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다보니 (그나마 좋아보이는) 낡은 모텔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데 담배냄새가 어찌나 심하던지 밤새 냄새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구토까지 날 정도였다. 험한 숙소에 익숙한 편인데 이 모텔만큼은 지금까지의 내 여행경력에 최악의 곳으로 남을 것 같다. 위정자들이여 이런 곳에서 하룻밤 묵어보시라. 민초들의 고단함이 말 그대로 폐부에 깊숙하게 박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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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건 책과 길의 공통점. 지난번 강화도 전등사에 갔다가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 유리에 붙어있는 강화도 지도를 보게 되었다. 그 때 눈에 들어온 또 하나의 섬, 교동도.

익히 들어본 지명이지만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가봐야지.

 

 

 

교동도에 들어가려면 교동도 방향 초소에서 간단한 신고를 하고 출입증을 받는다.

 

 

 

 

교동도 선착장. 멀리 강화도와 연결된 다리가 보인다.

 

 

 

 

이른 시간인데도 할머니 한 분이 고구마, 호박 등을 노상에서 팔고 계시기에 '속노랑 고구마' 한 상자를 구입, 오늘 개시했다고 흐뭇해하신다. 그런데 저건 뭐꼬? 분명 판매용인데. 불쏘시개? (정답은 이 페이퍼 끝에. ㅎ)

 

 

 

옛 분위기 물씬 풍기는 대룡시장.

 

 

 

골목 풍경

 

 

 

 

 

 

 

 

 

 

 

 

 

 

 

커피도 한 잔. 초입에서 먹은 찹쌀 꽈배기에 놀랐는데 이 카페에서 마신 커피에는 더 진하게 놀란다. 뜨내기 맛이 아니었다. 사장님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맛이다.

 

 

 

 

이곳의 콘셉, 제비.

 

 

 

 

 

 

 

한끼 식사로도 손색이 없는 호떡, 가히 명물이라 할 만하다. 주인 할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망향대와 연산군 유배지를 찾아간다.

 

 

 

 

저분들 모습이 내 모습. 북한이 바로 코앞에 있다.

 

 

 

 

연산군 유배지.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싼 작디작은 오두막. 유배문화관에 전시된 설명에 의하면,

 

 

유배 가운데 가장 가혹한 것은 배가 아니면 육지와의 연결이 차단되는 절도 絶島 안치이며, 집 주위를  둘러싸고 담장을 설치하여 그 곳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위리안치圍籬安置이다.

 

유배지역은 함경도, 평안도와 같은 국경지역과 제주도, 남해도, 진도, 거제도, 흑산도와 같은 섬으로 배정되었다. 그 중 '강화'는 왕족의 유배지로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저 오두막 유배는 절도 안치이자 위리안치로 가장 가혹한 형벌인데, 글쎄 오래 살려두기라도 하면 다행이었을 거다.

 

흑산도-최익현, 정약전

강진-정약용

나주-정도전

화순-조광조

      .

      .

      .

 

추자도 - 윤선도

함경도 - 윤선도

 

윤선도는 무슨 미운 털이 박혀서 여러 번이나 유배를 갔는지 급궁금해졌다.

 

 

 

 

 

 

 

 

 

 

 

 

 

 

 

 

 

윤선도는 사람됨이 바르지 못하고 가정 생활이 볼 만한 것이 없었으며, 부귀와 사치가 도를 넘고 행실이 방종하기 이를 데 없었으므로 젊어서 청요직을 역임한 뒤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해 해남에 물러가 살았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에 끝내 어려움을 같이하기 위해 달려오지 않았으므로 난이 끝난 뒤 대간으로부터 무거운 탄핵을 받았다. 그 뒤 인조가 승하하셨을 때 시골로 물러나 어렵게 지내던 사대부들이 모두들 달려와 곡을 했으나 윤선도만은 시골집에 버젓이 누워 분곡하지 않아 대신이 붙잡아다 국문할 것을 청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었다.

- 《효종실록》                                   - 218쪽

 

 

 

30대 초반에 시작된 그의 정치 역정은 이렇듯 유배로 시작하여 유배로 마감한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공교롭게도 초년에 <병진소>로 인해 귀양을 갔을 때도 약 7년이었고, 말년에 예송논쟁으로 귀양 갔을 때도 7년여의 시간이었다. 마치 수미쌍관법을 취하듯 앞뒤가 맞물려 있다.   -256

 

 

 

언제나 그러하듯이 정치적 검열은 사실 한 걸음만 벗어나서 보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지만 그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상상력을 억압하는 무서운 힘으로 작용한다.   - 55

 

 

 

그의 <오우가>, <어부사시사> 는 더 이상 말해서 무엇하랴.

 

 

 

교동도로 바람 쐬러 갔다가 윤선도 평전까지 손에 잡아봤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

 

*정답: 효자손( 저 옥수수 알갱이는 입으로 먹었을까, 손으로 떼어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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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9-25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상도 못한 정답이네요.
교동. 예전에 교동마님이라는 연속극이 있었던 기억이 나요.

nama 2019-09-25 19:18   좋아요 0 | URL
강를 교동짬뽕도 있지요.^^

나와같다면 2019-09-25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멈춘 공간 같아요

nama 2019-09-26 10:21   좋아요 0 | URL
교동도라는 섬에 어울리는 공간을 살린 셈이지요. 그곳 역시 삶의 현장이라서 먹고 사는 고민은 오히려 도시보다 더한 것 같아요.

sabina 2019-09-29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옛 모습을 이정도로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있는게 놀랍네요.
그 효자손, 엄청 시원할 것 같아요.ㅎㅎ

nama 2019-09-30 09:23   좋아요 0 | URL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 오늘도 누군가는 그것을 지켜내려고 애쓰고 있지요.
저 효자손을 과연 사는 사람이 있을까, 가 몹시 궁금해져요.^^
 

 

바다 이름이 아닌 동네 이름, 남해엘 갔었다. 남해, 하면 우선 떠오르는 곳이 금산 보리암, 독일 마을, 미국 마을, 섬이 정원, 가천다랑이마을 등이 있다. 보리암은 기도 도량이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러 간 게 아니라면 그리 빼어난 풍광을 보여주는 곳이 아닌만큼 약간은 실망할 수도 있다. 독일 마을은 방송을 너무 자주 탄 게 원인일까. 관광객이 너무나 많았다. 구경꾼이 그렇게나 많이 몰려드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피곤할까 싶어, 애써 그곳에 갔지만 구경하는 걸 접었다. 내가 그곳에 살고 있다면 대문을 꽁꽁 걸어잠그고 창문에 새까만색 암막 커튼을 달고 하루종일 외출을 삼가거나 아예 그곳을 떠났을 것 같다. 구경거리가 된 동네에서 산다는 건 우울하고 몹시 피곤한 일일 것 같다. 내가 그 동네 이장이라면 마을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고 동네 출입을 허가할 것이다. 섬이 정원은 한번쯤 가볼 만한 곳이다. 무언가를 꿈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물을 입장료 몇 푼을 내고 슬쩍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천다랑이 마을의 다랑이 논을 보니 발리의 다랑이 마을이 떠올랐다. 우리나라에도 발리 못지 않은 다랑이 마을이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닫고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남해, 크지 않은 섬에 볼 것이 이렇게 많다니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과 나, 우리는 남해에서 하루 묵어보기로 했다. 가성비가 몹시 떨어지는 펜션은 가급적 삼가고 군청(시청)이나 터미널이 있는 동네의 평범한 모텔에서 묵는 게 우리의 여행 방식이라서 남해 군청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모텔을 숙소로 정했다. 모텔에 들어서니 주인장이 안 보인다. 일이 분 망설이다가 주차장으로 나오니 곧이어 주인 아주머니가 따라나와선, 주방에서 부침개 만드느라 손님 온 것을 몰랐다며 그냥 가시겠냐고 묻는다. 다른 곳으로 옮겨야 그렇지, 하면서 주인 아주머니를 따라 들어가 방값을 치렀는데, 아주머니 왈, 부침개 한 쪽 잡숴보겠냐고 묻는다. 살짝 비가 오는 날씨에 부침개라니. 이미 모텔은 부침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낯선 이에게 베푸는 환대까지 더해 부침개 맛은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 없었다.

 

더 먹겠다고 하면 더 얻어 먹을 수 있었지만 우리에게도 염치는 있는 법.  가까운 전통시장으로 향했다. 허를한 식당에서 쉽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해서 콩죽을 먹었다. 가격도 저렴한데다 생각보다 맛이 소박하고 정겨웠다. 다만 반찬으로 나온 김치가 부족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밖에 계신 바람에 더 달라고 요구할 수 없었던 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라고 할까. 흐뭇한 마음으로 식당을 나서서 숙소로 향했는데... 남편 등에 있던 백팩이 생각났다. 식당에 두고 온 걸 깨닫고 급히 식당으로 갔는데 이미 가게 문이 닫힌 상태였다.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었다. 어쩌나, 잠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식당 맞은 편 가게의 주인분이 그러신다. 문 안 잠겼으니 어서 들어가 가지고 나오라고. 이 집은 문 안 잠근다고.

 

문 안 잠그는 식당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들어오자마자 극성스러운 모기의 습격을 당하고 이내 동네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부침개까지 얻어 먹었는데 야박하게 모기향 달라고 요구하기가 그러니 아예 집으로 가져갈 의도로 모기향을 사기로 했다. 액체 모기향 세트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 여기 살러 온 분들이세요?"

" 네?.....아니요."

" 모기향을 사시기에요."

" 저기 모텔에 묵는데 모기가 많아서요."

이 분은 동네 사람들을 다 알고 계신 지 낯선 이방인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우리가 낯선 사람들이라는 걸 확인받는 순간 기분이 묘했다. 낯선 사람을 알아봐주는 인정 같은 게 느껴졌다. 알아봐주니 낯섫은 낯섦이 아니었다. 친절이었다. "포인트, 몇 번이지죠?" 우리 동네건 낯선 동네건 으례 물건을 사면 듣게 되는 적립 시스템용 멘트. 그런데 여긴 달랐다. 살갑고 정겨운 기분에 젖어 숙소로 돌아오면서 남편과 나는 막연하지만 이런 다짐을 했다.

" 퇴직하면 남해에서 한달살이합시다."

 

2019년 6월 남해.

 

 

 

 

꼭 시계를 닮았다. 이름하여 시계꽃. 가천다랑이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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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 2019-07-14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남해 참 좋아하는데. 보통 시골마을이 논과 아파트 정리 안된시골과 도시의 중간의 어수선함을 보여주는데 남해는 단아하다고 할까 참 이쁜 곳입니다

nama 2019-07-14 18:5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산이면 산, 바다면 바다, 마을이면 마을, 참 단아하고 정감이 가는 곳입니다. 제 생각엔 발리보다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요. 물론 사람들도 좋구요.^^
 

  

1.

미국은 싫어도 뉴욕만큼은 가보고 싶었다. 미국이 싫다기보다는 미국에 대한 환상이 없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미군부대가 있는 동네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나는 일찍부터 미국 문화에 접해왔다고 할 수 있다. 군인들의 비상식량 깡통 속에 들어있던 고기 통조림, 이따금 동네에 손수레를 끌고 오는 행상에게서 한 대접씩 사서 뜨겁게 데워먹던 꿀꿀이죽, 달리는 미군 차량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비루하게 헬로를 남발하며 얻어 온 초콜릿, 유년의 시간대였던 1960년대 풍경이다. 겨우 먹고 살던 시절이어서 유독 먹거리에 대한 기억이 많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여러 친구들과 다양하게 어울리게 되었는데 특히 미군부대를 이웃한 친구들이 많았다. 그 때는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사이여도 서로들 집에 초대해서 함께 놀곤 하던 시절이어서 이 친구네 집 저 친구네 집, 두루두루 가볼 기회가 많았다. 공무원이었던 우리 아버지만 보고 자랐던 나는 친구의 아버지가 미군부대에서 일한다는 걸 듣고 신기하게 여기기도 했다. 미군부대 주변을 맴돌며 친구들과 우정을 쌓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고등학교는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있는 학교로 진학했지만 함께 진학한 친구들이 많아서 우리들의 놀이터는 여전했다. 대학 역시 새벽 통근열차를 타고 서울로 우루루 몰려갔지만 우리들이 모여서 쏘다니는 길거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젠 마음 놓고 술집이나 미군 전용 클럽에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대학생이 되니 선후배가 생기고 사회의식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그때 그간 학교에서 공부했던 그 아름다운 많은 시들을 단번에 물리친 시가 나타났다. 시인 박석수의 시였다.

 

   연 꽃

  -쑥고개 1

 

헐벗은 우리의 가슴에

한 잎 낙엽으로

떨어져 썩기 위하여

 

임당수보다 더 깊고 깊은

양키들의 털북숭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누이야,

 

네 몸과 바꾼 15불의

화대로도 애비들의 눈은

뜨여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연꽃은.

그 신화같은 연꽃

끝끝내 피어나지 않는다.

 

내의 껴입을수록 더

추워지는 이 겨울을

맨 정신으로 살아내기 위하여,

 

눈 부릅뜰수록 더

어두워지는 이 세상을

좀 더 바로 보기 위하여,

 

임당수보다 더 깊고 깊은

수렁 속에 던져진

우리들의 마지막 누이여.

 

   

 

 

 

 

 

 

 

 

 

 

 

 

 

 

 

 

양키들의 털북숭이 가슴에이 강렬한 구절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자꾸 의식하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이른바 반미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미군부대에 기대어 살고 있는 입장에서 나오는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국제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자조 섞인 말과도 닿아 있는 씁쓸함 같은 것. 미국은 이미 우리 안에 깊숙이 들어와 꽈리를 틀고 있었다. 미국 문화는 외국 문화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우여곡절 끝에 영어교사가 되어 영어로 밥을 먹고 살게 되었지만 영어교사를 마감할 때까지 미국 땅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도무지 미국이 궁금하지 않았다. 미국식/영국식 영어를 따져가며 발음에 버터를 바르려고 노력이야 했지만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더 이상 남의 나라 말로 밥 벌어먹고 사는 게 죄짓는 것 같아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가보지 않은 나라, 미국이지만 나는 미국 문화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벗어날 수도 없었다.

 

영어를 접으니 미국에나 한번 가 볼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미국을 대표하는 곳, 세계의 수도라는 뉴욕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간은 보름 정도로 잡았다.

   

 

 

2.

미국을 대표하는 곳이 뉴욕이라면 이번 뉴욕 여행을 대표하는 것이 무엇일까.

여행 전 책으로 예습했던 뉴욕현대미술관(MoMA), 휘트니미술관,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구겐하임미술관을 두루 다녔다. 솔직히 그림을 본다고 해서 눈에 익은 명화를 살아있는 육안으로 확인하는 기쁨 이상은 아니다. 낯선 그림 앞에서 감동하고 그 감동을 다음 단계로 이끌어가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임을 깨달을 뿐이다. 미술 전시회에 가면 늘 느끼는 부족함과 미진함의 원인이다.

 

구겐하임미술관은 명성대로 건물이 아름답다. 나선형으로 설계된 전시공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꼭대기 층, 마지막 전시실에 이른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명화들을 확인하는 기쁨을 누리며 올라왔는데 이 마지막 전시실은 좀 많이 낯설고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흑백사진까지는 좋은데, 이게 뭐지? 육체미가 가감 없이 드러나는 흑인의 상반신 혹은 하반신과 거대한 성기 사진. 10초 이상 눈에 힘을 주기도 힘든 작품을 스마트폰으로 찍는 이 남자는 또 뭐지

 

 약간의 충격을 충격이 아닌 양 하며 밖으로 나오니 예쁜 화장실이 눈앞에 나타났다. 거대한 기둥 모양의 화장실도 인상적인데 손잡이가 달린 변기 커버도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센스 만점의 변기 커버에 감탄하며 급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으흠,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보내줘야지.

 

    

 

 

 

집에 돌아와서 한대수의 책을 읽고 나서야 나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으니.....

 

 

 

 

 

 

 

 

 

 

 

 

 

   메이플소프(Mapplethorpe)는 사진계의 폭군, 이단아, 동성 섹스 포르노 작가로 알려졌다. 또 호의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은, 그를 동성 에로티카의 위대한 아티스트, 혹은 섹스 혁명의 개척자로 인정한다. 여하간, 메이프소프는 화젯거리이고, 논란의 대상이다.

   이러한 사진계의 '체 게바라', 메이플소프의 사진 전시회가 구겐하임 박물관에서 열렸다.(중략) 모두 흑백. 절반은 유명인의 초상화이고 다른 절반은 꽃과 남자 누드이다. 페니스가 노출된 흑인 남자들이다. 너무나도 생소하고 파격적이다. 대부분의 남녀 관람객들은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놀라워서 못 본 척하며 그냥 지나간다.    (108쪽) 

 

 

소심하게 변기 커버 사진이 뭐냐. 대담한 사진이라면 대담하게 찍어와야지. (참고로, 인터넷 검색하면 메이플소프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메이플소프의 평생 연인이었던 패티 스미스의 책. 메이플소프와의 뉴욕 생활을 그린 자서전으로 내셔널 북 어워드를 탔다고 한다. 언젠가 읽게 되겠지, 아마.

 

 

3.

때는 1970년대 초. 초등학생 때. 누군가를 따라서 미군부대 근처에 갔다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 어떤 예쁜 여자가 배꼽이 훤히 드러나는 흰색 짧은 웃옷을 입고 내 옆을 지나갔다. 그당시 동네에서 유일한 티비가 우리집에 있었기에 웬만한 장면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는데 실제 눈 앞에 본 그 옷차림은 상상초월의 생소한 놀라움을 선사했다. 아, 양공주구나.

 

충격으로 크기로 따지자면, 어린 초등생 눈에 보인 그 옷차림이나 메이플소프의 대담한 사진이 주는 충격이나 거기서 거기다. 미국은 이렇게 또 한번의 충격을 가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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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게스트하우스 이야기를 하기 전에 5일간 묵었던 여러 숙소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숙박은 요일에 따라 요금이 달라지므로 요일도 명시하고자 한다.

 

첫 날. 향일암 근처 펜션() 카드결제 6만 원

이튿날. 여수밤바다 근처 모텔() 현금 지불 5만 원

사흘째. 순천 선암사 템플스테이() 일인당 4만 원(저녁, 아침, 점심 공양 포함)

나흘째. 목포 게스트하우스() 카드결제 5만 원(조식 3,000원 미포함)

닷새째. 광주 대인시장 근처 모텔() 카드결제 3만 원

 

선암사 템플스테이를 제외하곤 예약 없이 되는대로 숙소를 잡았다. 선암사 템플스테이는 한겨울이라서 썰렁하지만 그래도 주말에 사람들이 더러 신청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우리 부부와 아가씨 둘이 전부였다. 사찰 입장에서는 행사 진행에 맥이 좀 빠지지 않았을까 싶었으나 절간의 고적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70세쯤 되는 부부에게는 방 하나를 준다는데 우리 부부는 아직 젊어서(?) 각자 방 하나씩을 배정 받았다.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절집에서 홀로 지새우는 밤, 각별하다면 각별한 경험이었다. 결과적으로 며칠 일정 중에 주말을 절집에서 보내기로 한 계획은 탁월한 발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템플스테이는 주말 요금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향일암. 아무런 정보 없이, 손 안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도 들여다보지 않고 찾아간 곳이다. 가다보면 뭐가 나오겠지 싶었는데 예상대로 뭐가 많았다. 승용차에서 내려 두리번거리자마자 어떤 아저씨가 호객을 하기에 별 망설임 없이 숙소를 잡았다. 비싼 펜션을 모텔 가격으로 준다기에 웬 떡이냐 싶은 마음에. 발코니 바로 앞에 남해의 푸른 바다가 좌~악 펼쳐져 있는 아주 전망 좋은 방이었다. 단점이라면 생수 한 병 얻어 마실 수 없다는 점.

 

여수밤바다, 하면 방송에서 날마다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대는 낭만포차를 기대했다. 밤마다 급조되는 포장마차에서 삼겹살, 새우, 전복 등이 들어간 탕을 먹었다. 여수밤바다에 와서 이 음식 안 먹으면 안 되는 듯한 미디어의 호들갑에 의연하게 대처했어야 했다는 걸 이튿날 화장실에서야 아픈 배를 달래며 깨달았다. 내 위장은 이제 낭만을 소화시키지 못했다.

 

영암 구림마을에 들렀다가 목포에 도착하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숙소에 대한 정보는커녕 일반 관광지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국내 여행인데 사전 예습이 뭐 필요할까 싶어 그냥 떠나왔으니 뒤늦게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들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지도와 숙소 정보를 구하기 위해 목포역 안내센터를 찾아가자는 남편. 역시 목포는 아날로그 세대를 무시하지 않는 곳이었다. 안내센터에 가니 우리가 찾고자 하는 지도가 모두 구비되어 있었고 친절한 안내도 받을 수 있었다. 구림마을의 미술관과 박물관에서도 느꼈지만 사람들이 매우 예의 바르고 친절해서 나도 덩달아 사교적이고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국내의 게스트하우스가 궁금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한 곳을 골라 그냥 찾아갔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빈 방이 아주 많았다. 분위기가 밝고 침구 등이 깨끗하긴 한데, 화장실이 공용이어서 변기 물을 내리면 한 층 전체에 소리가 울려 퍼지는 점이 좀 거슬렸다. 예전의 민박을 좀 더 세련되게 개조한 게 게스트하우스였다. 여러 곳을 다니지 않았으니 이것도 단견이거나 편견일 수 있겠다. 하여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표정이 밝고 사근사근하고 씩씩한 주인아주머니는 단박에 사람의 나이와 직업, 심지어는 건강까지 알아보는 대단히 발달한 촉을 지닌 분이었다. 남편의 타고난 신체의 특성을 순식간에 파악하였으며, 내 나이를 정확하게 맞추었으며, 내가 그간 지녔던 고혈압의 위험성이 류마티스 덕분에 완화되었다는 의학적으로 듣도 보도 못한 말 등을 거침없이 했다. 15년 넘게 고혈압 약을 먹다가 지금은 약을 끊은 상태이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정말 그럴까?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류마티스가 차라리 고마운 존재라며 거듭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 주인아주머니에게 묘하게 빨려들기 시작했다. 이분의 남편분이 유명한 정치인의 마사지사이며 자신도 어깨너머로 마사지를 배워 때때로 남편 대신 일을 하기도 했는데 오히려 남편보다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여러 해 동안 많은 사람들을 대하다보니 촉이 많이 발달했다고 한다. 이야기 중에 압도적인 놀라움은 남편분이 바람은 피지 않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아니 어떻게 남의 민감한 사생활까지 파악하지? 내 몸을 보고 한눈에 짚어내는 이 신통력은 뭐지? 친한 친구들과도 나누지 않는 이런 원초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이렇게 쉽게 꺼내지? 황당함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는데 이 주인아주머니는 하나도 개의치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도해 나갔다. 이야기뿐이랴. 내 걸음걸이를 살펴보더니 이렇게 걸어라 저렇게 걸어라, 이런 운동을 해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참을 주인아주머니와 주방에서 떠들다 방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남편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밥을 먹으며 다시 주인아주머니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번엔 동네이야기이다. 아마도 지금의 집에서 오래 살았는지 동네에서 멀지 않은 목포역 일대가 예전에 바다였었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가수 남진의 태생 이야기도 이어졌다. 목포의 역사와 남진의 개인사에 그리 관심이 가는 게 아니어서 좀 지루하긴 했지만, 만일 그쪽에 관심이 있다면 이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길고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리라. 주인아주머니의 수다에 잠시 유체이탈했던 넋을 불러들이고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꼭 다시 오겠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돌아서는데 엊저녁에 들었던 한 마디가 계속 생각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남편분이 바람은 피지 않았겠다.” 어떻게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내내 의문이었다. 엊저녁의 대화를 천천히 복기하다가 드디어 힌트를 찾아냈다. 내게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요실금은 없어요?”, “. 아직은요....” 나도 참...

 

이쯤에서 이 게스트하우스의 상호를 밝혀야 될 것 같다. 수다방 게스트하우스. 40대 이전의 젊은 사람들은 수다~방으로 인식하고, 나이든 축들은 수~다방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단다. 나는 물론 수~다방이란 단어가 먼저 떠올랐다. ‘다방은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예스러운 단어였다. 어쨌거나, 수다를 떠는 방이거나 물 다방이거나, 대화가 오고가는 집임에는 틀림없는 곳이다. ‘목포하면 이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아주머니를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번엔 광주 얘기. 광주에서 보낸 시간이 만 하루도 되지 않았으나 두 가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화장실과 모텔.

 

2년 전 어느 출근길. 가게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시내 한복판에서 이른 아침에 화장실을 찾아 헤매본 적이 있다. 빌딩마다 화장실은 있는데 열려있는 곳이 없었다. 이 때, 기지를 발휘하여(?) 찾아간 곳은 파출소였다. 적어도 파출소만큼은 이 시간에 문을 열어놓았으리라. 배는 아파오는데 민망함 따위 개에게나 줘버리는 거지 하는 다급한 심정으로.

 

광주 시내를 걷다가 저절로 눈에 들어온 것은 개방화장실을 가리키는 이정표였다. 거리 곳곳에 가로등처럼 우뚝 솟아있는 화장실 이정표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여기에선 서로서로를 배려해주는구나 싶었다. 이 개방화장실이 이른 아침에도 개방이 되는지 궁금하긴 했으나 적어도 화장실 인심만큼은 남다르다고 생각되었고 서로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무척이나 돋보였다. 비밀번호로 무장된 자본주의화된 화장실을 일상으로 접하다보니 이 개방화장실 이정표에도 작지 않은 감동을 받는 것이다.

 

 

 

 

모텔얘기. 카카오맵을 이용해 전통시장 주변의 모텔을 잡았다. 가격은 3만 원. 거의 90년대 가격이다. 그 때는 국내를 여행할 때 대부분 장급여관이라 불리우는 모텔을 이용했었기에 지금도 모텔을 이용하는데 어색함 따위는 괘념치 않기로 마음먹었다. 모텔을 이용할 때마다 놀라는 건, 이만한 가격에 이만한 편의시설을 갖춘 곳은 아마도 우리나라의 모텔이 최고가 아닐까 하는 거다. 작은 방에 텔레비전, 컴퓨터, 생수, 드라이어, 화장품, 야식업체 전화번호까지 하룻밤 묵는데 필요한 걸 전부 갖추었다. 심지어 칫솔 등이 들어있는 비닐 키트는 내용물이 아주 다양했다. 향일암 주변의 생수 한 모금 서비스 없는 비싼 펜션, 주인과의 수다는 즐거우나 눈치 보지 않을 수 없는 구조의 불편했던 게스트하우스, 유명관광지에 입지한 탓에 저렴하지 않은 숙소. 광주 시내의 한 모텔을 이용함으로써 이 모든 불만 사항을 단번에 털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선암사 템플스테이였음을 강조하고 싶다. 소박한 잠자리, 소박한 밥상이었으나 마음은 맑고 풍요롭기 그지없었다. 꽃은 아직 피지 않았으나 피어오를 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가득 전해져오는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 곳, 선암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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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1-25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어요.
전 40대 이하도 아니면서, 수다~방 으로 읽었네요. 수다가 고팠나봐요.
저희집에선 광주까지 버스 타니 2시간 좀 못되게 걸리더라고요. 모텔에서 묵어보기엔 너무 가깝죠?
구미마을, 구림마을, 모두 가보고 싶어요.

nama 2019-01-26 10:28   좋아요 0 | URL
때때로 수다가 필요해요.^^
모텔이 의외로 쾌적해요. 집 떠나서 이따금 묵어보는 것으로도 여행 기분을 낼 수 있어요.
구림마을은 시간이 없어서 대충 보았는데 기회가 되면 꼼꼼하게 보고 싶어요. 꽃 피는 계절에 골목 골목 누벼보고도 싶고요.

붕붕툐툐 2019-01-25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너무 좋으셨을 거 같아요~~

nama 2019-01-26 10:29   좋아요 0 | URL
그간 국내여행을 좀 등한시 했었는데요. 숨어 있는 곳을 발견하는 묘미가 있어요.^^

카알벨루치 2019-02-01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연휴 잘 지내시고 행복한 웃음 넘치는 가족들간의 시간 되소서

nama 2019-02-02 10:01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즐거운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