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부쩍 자주 거명되는 레즈비언 철학자이자 페미니즘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의 '퀴어이론'과 '여성 없는 페미니즘'에 관한 소개글을 옮겨놓는다. 이미 입문서들은 소개돼 있는 만큼 그녀의 출세작 <젠더 트러블>이 번역되기를 이 참에 기대해본다. 필자인 조현준 연구원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정체성 이론>(한국학술정보, 2007)을 펴낸 버틀러 전공자이다(책은 아마도 필자의 박사학위논문일 것이다).

 

대학신문(07. 09. 10)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② 주디스 버틀러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에서 수사학과 및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레즈비언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페미니스트이자 소위 ‘퀴어 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버틀러의 철학사적 공헌은 페미니즘 담론의 고정관념으로 여겨졌던 ‘억압자 남성’, ‘피억압자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양식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데 있다.

버틀러의 퀴어 이론은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젠더 자체의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을 토대로, 동성애와 이성애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제도담론의 권력 효과임을 폭로하고자 한다. ‘퀴어’는 원래 동성애자들을 경멸적으로 부르던 호칭이었으나, 버틀러에 이르러 ‘퀴어 이론’은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고정하는 모든 담론적 권력에 저항하는 전복의 표어가 된다.



버틀러의 주저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은 시몬 드 보부아르, 지그문트 프로이트, 자크 라캉, 자크 데리다, 그리고 미셸 푸코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현대 철학자들을 ‘퀴어 이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조망한 책이다. 이 책은 많은 논쟁을 일으키며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세계적으로 십만 권 이상 팔렸고 인터넷 상에 ‘주디’라는 국제 팬진(fanzine)까지 탄생시키면서 버틀러를 영미 지성계의 떠오르는 아이콘, 학계의 주목받는 스타로 만들었다. 이후 버틀러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격분하기 쉬운 말』, 『권력의 심리 양태』, 『젠더 허물기』, 『자신을 말하기』 등의 저작을 통해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뿐 아니라 정치 철학과 윤리학까지 관심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많은 사람들을 『젠더 트러블』에 열광하게 만든 것일까? 이는 크게 두 가지 논의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여성 없는 페미니즘’의 가능성 제기다. 다시 말해 본질적인 정치 주체가 없는 정치학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다. 예컨대, 일상에서의 일탈을 꿈꾸며 이따금씩 화장과 여장을 즐기는 씨름신동 동구(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나 언제나 자신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며 성전환 수술비를 저금하는 여장남자 두눈박이(영화 「다세포소녀」)는 페미니즘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혹은 남자로 태어났지만 성전환 수술 후 소송을 통해 2002년 법적으로 성별 정정을 받은 하리수는 어떤가?



페미니즘이라는 성 정치학의 정치 주체가 여성이라면, 이 때 성을 지칭하는 것은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가 될 것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이 섹스, 후천적으로 사회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교육받은 성이 젠더라면, 섹슈얼리티는 인간의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이다. 그런데 섹스라는 생물학적이고 해부학적인 특성도, 섹슈얼리티라는 원초적인 욕망도 사실은 애초부터 그렇게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제도담론이 그렇게 명명하고 인식하도록 지식 체계를 동원한 결과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모두 사회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젠더로 수렴되며 규범이 만든 허구이기 때문에 분명한 정의가 불가능해진다.

두 번째는 욕망과 법 간에 발생하는 인과론의 전도다. 즉 근원적 욕망은 애초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억압해야 할 어떤 대상을 가정하고 있던 규율권력과 지배담론이 만든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욕망이 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 법이 욕망을 만들었다는 ‘인과론의 전도’는 당연하다고 생각돼 온 기존 담론이 어떤 권력의 역학 관계에 의해 구성되고 조작됐는지를 면밀히 살피는 ‘계보학’의 관점을 부각시켰다.

결국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규범이 만든 허구이자 규제가 만든 이상이라는 의미에서 어떤 본질적인 내적 특성을 갖는 것이 아닌, 다양하고 산포된 관점을 가진 제도, 실천, 담론의 효과가 된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광의의 젠더로 수렴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젠더는 모방을 통해 원본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패러디’, 행위를 통해서만 의미를 발현하는 ‘수행성’, 재의미화의 가능성을 안고 반복되는 규범에의 ‘복종’, 자신 안에 타자를 품고 있는 ‘우울증’의 양식으로 발현된다. 이제 진정한 남성이나 여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기존 규범 속에서 원본의 권위를 허물면서 수행적 행위를 통해 언제나 재의미화된다. 그것은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대상을 떠나보내지 못해서 자신의 일부로 합체한 우울증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요점은, 근본적으로 결정된 ‘본질적인’ 여성은 없다는 것이다. 젠더의 표현물이라는 가면 뒤에 본질적인 젠더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젠더 정체성은 외관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수행을 통해서만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집합이나 범주 없는 ‘여성 없는 페미니즘’의 가능성이고 자신 안에 타자의 가능성을 노정하는 ‘퀴어 이론’의 출발점이다. 타인과 나의 구분과 경계에서 모든 차이가 나오고, 그 차이가 차별을 낳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정치주체를 심문하는 버틀러의 젠더 정체성 이론이 현실의 문화정치학과 접목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남자와 여자가, 남성성과 여성성이, 이성애와 동성애가 분명한 자기 정의를 할 수 없다면, 그리고 언제나 규범 안의 패러디로서 수행적 행위를 통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에 사실상 나와 타인의 경계조차 불분명한 것이라면, 남자가 여자를, 남성성이 여성성을, 이성애가 동성애를 억압하거나 천시할 근거가 없다. 그것이 인류의 절반인 여성뿐 아니라 인구의 십 퍼센트에도 못 미친다고 평가절하되는 소수자의 섹슈얼리티를 인정하고 평등한 공존을 모색하려는 ‘퀴어 이론’의 현실적 정치성이다.(조현준 연구원/ 한국여성문화이론연구소)

07. 09. 10.

P.S. 지젝의 버틀러 읽기와 비판은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의 5장을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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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의 서평기사들을 훑어보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책은 제임스 모로(1947- )의 소설 <하느님 끌기>(웅진지식하우스, 2007)이다. 그나마 가장 자세하게 다룬 편이건만 기사 자체는 알라딘의 책소개보다 더 나을 것도 없었다. 세계적인 판타지 작가라는 저자의 약력을 읽다 보면 이 작품이 처음 소개됐다는 게 다소 신기할 정도이다(물만두님의 페이퍼에도 없다니! 내가 못 찾은 건가?).


1947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1981년 첫 소설 <폭력의 와인>을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 인공자궁에서 태어난 신의 딸, 즉 예수의 이복여동생이 현대 사회에서 구세주의 역할을 맡게 된다는 내용의 <성스러운 딸>로 세계환상문학상을 수상했고, <진실의 도시>, <성인을 위한 성경이야기>로 네뷸러상을 수상했다. '하느님의 죽음'을 다룬 3부작 중 첫 작품인 <하느님 끌기>로 세계환상문학상과 그랑프리 드 리마지네르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종교뿐 아니라 인본주의, 무신론까지도 풍사의 대상으로 삼은 다양한 판타지를 발표해왔다.

 

원제는 <여호와 끌기(Towing Jehovah)>(1994)인 이 작품의 대략적인 내용은 제목이 암시하는 바 그대로이다?! "하느님이 죽었다는 가정에서 시작해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소설. 육신을 가진 하느님과 그것을 식량거리로 삼는 인간들이라는 파격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 철학적이고 인류학적인 고찰이 돋보이며, 그 안에 세상의 아름다움과 슬픔까지 담아내는 깊이가 있다." 그런 탓인지 작가와의 한 인터뷰는 '기독교의 살만 루슈디?'란 제목을 달고 있었다. "살만 루슈디에게 이런 기막힌 풍자 실력이 있었다면 고생 없이 큰 인기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란 시카고 트리뷴의 평도 같은 맥락인 것이고.  

알라딘의 소개를 마저 읽어본다. "제임스 모로가 '하느님 죽음'에 관해 쓴 3부작 중 첫 책인 <하느님 끌기>는 하느님의 시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벌이는 천사들, 교황청, 무신론자들의 온갖 작전들과, 그들 틈에서 죽어라고 북극에 마련된 무덤으로 시신을 끌고 가는 한 유조선 선장의 이야기를 그린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신의 존재를 둘러싼 수많은 종교 갈등에 대한 풍자요, 신이 있든 없든 결국 이어지는 인간의 삶에 대한 고찰이다."

"하느님의 죽음(Godhead)' 3부작의 이어지는 두 소설은 각각 'Blameless in Abaddon'(1996)과 'The Eternal Footman'(1999)이다. 내친 걸음에 마저 다 소개되면 읽을 만하겠다...

book cover of
Blameless in Abaddon
(Godhead, book 2)
by
James Morrow

book cover of
The Eternal Footman
(Godhead, book 3)
by
James Morrow

07. 0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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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내가 따로 자리를 마련하고 있지는 않지만) 중국 관련서는 하나의 트렌드를 이룬다. 가령 지난주에 나온 쑨리핑의 <단절>(산지니, 2007)이나 이번주에 나온 <캠브리지 중국사 10, 11권>(새물결, 2007)은 모두 주목에 값하는 책들로 개인적으로는 여러 편의 서평을 이미 읽어두었다. 하지만 당장 읽을 만한 여력이 안된다는 생각에 '낚시질'조차 미뤄두고 있다.

대신에 밀린 글들의 진도나 나갈까 하다가 머리가 가뿐한 것도 아니어서 잠시 '단순작업'을 하기로 했다. 한편으론 새로 나온 책들을 둘러보다가 단박에 재출간도서임을 알아본, 비탈리 루빈의 <중국에서의 개인과 국가: 공자, 묵자, 상앙, 장자의 사상 연구>(도서출판 율하, 2007)에 대해서 약간의 호기심이 생긴 때문이기도 하다(알라딘에는 저자가 '비탈 루빈'으로 오기돼 있다).

표지 자체가 예전에 출간된 현상과인식사의 표지를 바로 떠올리게 해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같은 제목의 책이 1988년에 현상과인식사에서 출간된 바 있다. 인터넷에 떠 있는 출판사 소개에는 "이 책은 다른 여러 나라들뿐만 아니라, 대만의 여러 대학ㆍ대학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교과서로 계속해서 읽히고 있는 것도 이 책이 주는 가치를 입증해준다. 18년전에 이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었지만 오래 동안 절판 상태에 있는 가운데 본 출판사가 이 책의 가치를 거듭 확인하고 다시 출간하게 되었다. 이 책은 전문분야의 독자들뿐만 아니라 일반독자들에게도 좋은 책으로 평가받으리라 믿는다."라고 돼 있다.

물론 다시 출간되었다거나 '중국' 관련서란 이유 때문에 내가 호기심을 갖게 된 건 아니다. "소련이 붕괴되기 전 구 소련의 학자 루빈 교수가 1970년 모스크바에서 펴낸 <고대 중국의 이데올로기와 역사>를 번역한 책으로 중국 지성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온 공자, 묵자, 상앙, 장자의 네 사상가의 정치사상을 논의하고 있다."란 소개에서 '구 소련의 학자 루빈 교수'란 말에 눈길이 간 것뿐이다. 국역본은 'Individual and state in ancient China : essays of four Chinese philosophers'(1976)이란 영어본을 옮긴 것이지만 원저 자체는 러시아어로 씌어졌다는 것이니까, 한번 '찾아보자'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1970년 저작이라면 관련정보를 거의 기대할 수 없는 게 아닌가라는 게 일차적인 판단이었지만.

예상대로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의 이미지들은 찾아볼 수 없었는데, 러시아어본의 제목이 <고대 중국의 이데올로기와 역사>가 아니라 <고대 중국의 이데올로기와 문화>(1970)라는 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책은 <고대 중국에서의 개인과 권력>(1999)이란 제목으로 다시 나왔던 듯하다(이미지가 너무 작아서 옮겨놓지 않는다). 

저자인 바실리 아로노비치 루빈은 1923년생으로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철학을 전공으로 1969년 박사학위(칸지다트)를 받았다. 유대계로서 유대인 이민운동가로도 활동했으며 결국 1976년 당국의 허가를 받아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예루살렘대학의 교수를 지내다가 1981년 세상을 떠났다. '중국에서의 개인과 국가'에서 왠지 '러시아에서의 개인과 국가'란 뉘앙스가 읽히는 건 그런 맥락에서이다.

07. 0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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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7-09-09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물과 사상 9월호 이상수 전 한겨레 기자의 글도 재미있던데요.
현재 중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속마음. 니네는 우리의 속국이었다.
캠브릿지 중국사는 가격의 압박이 윽.

로쟈 2007-09-10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수 기자의 책을 재밌게 읽은 적이 있는데, 이젠 전업 '학자'로 나선 건가 보군요...
 

어젯밤에 미처 올라오지 않은 북리뷰 기사들이 있나 훑어보다가 한겨레의 이번주 '김윤식의 문학산책'을 읽고 옮겨놓는다(가장 최근에는 아마 콰이강의 다리에 관한 칼럼을 옮겨놓았던 듯하다). 인문학에 대한 노교수의 정의를 읽을 수 있어서 흥미롭다.

한겨레(07. 09. 08) 인문학의 자리 되새겨준 논문

밀도 높은 인문학의 저술은 어째서 우리를 감동시키는가. 한동안 묻어두었던 이 과제가 새삼 떠오름은 웬 까닭인가. 인문학의 위기라는 유행구호와는 무관한 것. 제 책상 앞에 놓인 한 권의 책, 요컨대 구체적 현실 앞에 제가 알몸으로 마주했음에서 온 것이오. ‘내셔널리즘과 반복하는 식민지주의’라는 부제를 달고 현해탄을 건너온 이 책은 <식민지 조선/ 제국 일본의 문화연환(文化連環)>. 도쿄대학 학술박사 논문으로 제출된 이 저술의 핵심 부분은 어디일까. 이런 물음에 금방 응해오는 것이 단재 신채호(1880~1936)를 논한 제1장 ‘반제국주의의 폭력과 동시대의 폭력 비판’. 원제목은 ‘반제국주의 폭력과 멸죄적(滅罪的)인 힘’(<사상>, 2000. 11).

근대화의 난제 중의 난제인 저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의 고리 끊기가 마침내 가능하다는 것. 저주의 방도가 그것. 그 목소리가 하도 커서 귀가 멍멍할 지경이오. 저주란, 또 그 연속성이란 무엇이뇨. 단재 왈, “갑이 을에게 심구(深仇)가 있어 이를 갚으려면 힘이 부족하고 그만두려 하면 마음이 불허하는지라 이에 을의 화상(畵像)을 향하여 그 눈도 빼어보고 그 목도 베어보고 혹 을의 이름을 불러 염병에 죽어라”라고 거듭 뇌기가 그것. 여기까지 오면 저자 J(제이) 교수가 어째서 일본 국수주의 사상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를 다룬 석사논문을 버리고 단재 자리에 서서 재출발했는가에 마주칠 수 있소.

J교수, 그녀는 무엇이며 또 누구인가. 스스로를 다만 386세대라 했소(1964년 서울생, 83학번). 경제성장 덕분에 세계문학전집 따위를 읽은 세대. 대학에 와서야 역사의식(광주의 5월)에 눈뜬 세대. 운동권 룸펜으로 남느냐, 거리에 혹은 구로공단에 나서냐의 갈림길 헤매기의 세대. 도서관 옥상에서 꽃잎처럼 떨어지는 학우를 목도한 날, 밤을 새워 토론한 세대. 다음날 새벽 책가방과 신발을 나란히 벗어 두고 한강에 투신자살한 급우를 둔 세대. 그 급우의 유서엔 이렇게 적혀 있었소. 전위에 서지도 못하고, 민중을 사랑할 수도, 사랑하는 척하는 흉내도 낼 수 없어 자살한다고.

세상은 그녀를 ‘회색인’이라 했소. ‘가짜 희망’이란 무엇인가. 세상엔 과연 살아 있는 시간을 가득 채워주는 무엇인가가 있는가. 이 물음을 J교수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음에 틀림없소. 이 책을 회색인으로 죽은 급우에게 봉헌했음이 그 증거. 당대의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서 이 회색인을 이렇게 읊었소. ‘민주 열사 박혜정(朴惠貞)’이라고. 이마가 유달리 나온 수줍은 학생. 젊은 날 제가 지도교수 노릇 한 그 박혜정. 제자의 죽음을 해명하라는 총장과 당국의 요구를 묵살했던 무능한 지도교수.

대체 인문학이란 무엇이뇨. 거짓 희망이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학문이 아니었겠는가. 살아 있는 시간을 가득 채워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 쉼 없이 묻는 공부가 아니었겠는가. 민중을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하는 척하는 연기도 할 수 없는 자리. 거기 깃드는 정신의 이름이 인문학이 아니었던가. 어느 쪽에 편들지 않으면서 쉼 없이 감행하는 자기 넘어서기, 거짓 희망에 눈멀지 않기, 요컨대 주인·노예 변증법의 고리 끊기. 이를 자양분으로 하여 자라는 이상한 나무. 인문학이 이 나무를 닮지 않았다면 대체 무엇을 닮아야 할까.(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07. 09. 08.

P.S. 아래는 80년 광주의 경험과 이후의 죽음들에 관한 오마이뉴스의 기사이다.

오마이뉴스(04. 12. 08) 광주의 경험, 죽음 우리 곁에 다가오다

광주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한국현대사에서 정치권력과 시민의 생명 문제에 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는 그 권력의 악랄함으로 친다면 이디 아민의 우간다나 보카사의 중앙아프리카 같은 나라, 또는 피노체트의 칠레 등과 견주어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시기에 일어난 의문사 사건의 숫자는 이런 나라에서 피살되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숫자와 견주어 볼 때 현격하게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박정희 시기에도 의문사 사건은 있지만,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처형이나 인혁당 사건에서와 같이 반대파의 생명을 빼앗을 때도 일정한 법적 절차-그렇기에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지만-를 밟으려 한 사례도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박정희 독재가 같은 시기 다른 나라의 악명높은 독재들에 비해 훨씬 부드러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 차이는 권력의 본질과 관련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권력이 출발한 역사적 조건의 차이라 할 것이다.



10·26, 자제력을 지키던 대중과 권력의 긴장관계가 깨지다

박정희 정권은 기본적으로 분단과 민간인학살로 인하여 한국사회가 멸균실 수준의 반공체제가 이루어진 토대 위에서 출발했다. 바꾸어 말하면 독재권력이 잡아죽여야 할 사람들을 이미 다 죽여 놓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이미 제거해 버린 상황에서 권력을 잡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비록 4·19혁명을 거친 후이기는 하나, 일반대중들이 상당한 수준으로 '길들여져 있는' 상황에서 출발했다고 할 것이다.

박정희는 집권기간에 시민들의 거센 저항 때문에 여러 차례 군을 동원해야 했고, 집권말기에 가서는 긴급조치와 같은 극도의 강압적 조치가 상시화되어 있었다. '긴급조치'는 긴급한 상황에서 발동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발동되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집권 동안 계엄령은 모두 3회 실시되어 총 31개월간 지속되었고, 위수령 역시 3회 실시되어 총 5개월간 지속되었다. 긴급조치는 모두 9차례에 걸쳐 발동되어 69개월 간 지속되었다. 박정희가 집권한 220개월 중 거의 절반에 달하는 105개월 동안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 등 비상수단이 상시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빈번히 군을 동원하고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 자체를 군법회의에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상상을 초월한 비상대권을 휘둘렀지만,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거나 집단학살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독재권력 입장에서 한편에서는 총칼을 실제로 사용할 필요성이 적었던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또다시 대규모로 가두에서 피를 흘리는 상황을 피하려는 나름대로의 자제력을 발휘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이북의 김일성 정권도 마찬가지이다. 김일성 정권도 철저한 주민통제로 유명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1956년 헝가리 반공봉기나 1968년 체코의 '프라하의 봄', 그리고 1989년 중국의 천안문 광장 사건 등과 같은 대규모 유혈사태를 경험하지는 않았다. 남북의 분단과 전쟁, 전쟁 기간 중의 인구이동, 그리고 각각의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학살로 인하여 이북 역시 이남과 마찬가지로 저항세력에 대한 교통정리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정전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학살의 기억을 간직한 대중들 역시 독재권력에 대한 저항에서 나름대로 넘어야 할 선은 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유신의 마지막 나날에 가서는 나름대로 지켜지던 자제 규율이 양쪽 모두에서 무너져 갔다. 1970년대 후반 학번들에게 민간인학살은 완벽하게 잊혀진 사건이 되었고, 1960년의 4월혁명 당시의 유혈사태조차도 머나먼 과거의 일이었다. 민간인학살의 기억을 갖지 못한 당시의 학생들은 이 정권이 총을 쏠 수 있는 정권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독재권력은 독재권력대로 '겁을 상실'한 학생들을 다시 길들여야 했다. 1975년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한 사법살인도 별로 약효가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살해당하기 직전, 유신정권 내부에서는 부산과 마산의 학생·시민들의 시위가 폭력시위로 발전하자 군대를 동원해서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강경론이 대두되었다. 10·26사건이 일어나던 날 저녁, 당시 실질적인 2인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수백만을 학살하고도 문제없었다며 "부마사태 같은 일이 또 일어날 경우, 탱크로 한 2~3백만 명만 깔아 죽이면 잠잠해진다"고 호언했다. 김재규는 재판과정에서 이런 분위기를 진술하며 자신의 박정희 살해가 대규모 유혈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의거였다고 정당화했다.



1980년 5월 광주, 죽음에 대한 태도가 바뀌다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는 유신정권의 종식을 가져왔지만, 대규모 유혈사태를 방지할 수는 없었고 다만 6개월 가량 연기시켰을 뿐이다. 그리고 장소가 영남의 부산 또는 마산에서 호남의 광주로 바뀌었을 뿐이다. 1980년 5월 전두환 일당은 자신들의 정권탈취기도에 저항하여 떨쳐 일어선 광주시민을 상대로 학살을 감행했다. 약 2백여 명의 시민들이 국군의 총칼에 의해 살해당했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www.518.org)에 의하면 사망자 및 행불자는 207명으로 되어 있다.

1960년 이후 한국정치를 특징지어 온 군과 학생의 대립이 이제 최루탄에서 실탄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민간인 학살의 기억이 거의 지워지거나 왜곡되어 한국전쟁 당시의 학살은 인민군이나 좌익이 저지른 것으로만 생각하던 광주시민들에게 국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은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광주의 많은 어린이들은 이 학살이 국군이 아니라 인민군이 국군 복장을 하고 저지른 것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민주화운동의 모든 영역에서 엄청난 충격을 가져 왔지만, 의문사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변화는 죽음에 대한 태도의 변화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죽인 쪽과 죽음을 당한 쪽 모두에서 감지된다. 양쪽 모두 박정희 정권 말기까지 나름대로 유지되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거센 저항과 탄압에 대한 자제력이 상실되었으며, 정치적인 죽음을 대량으로 목도하게 된 것이다.

사람을 죽인 쪽은 당장 방자해지기 시작했다. 부산지구 계엄합동수사단에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수사를 받던 임기윤 목사가 1980년 7월 27일 의문사를 당했고, 1980년 7월 11일 청주보안감호소에서는 단식농성 중이던 비전향장기수 변형만과 김용성이 감호소 당국의 강제급식과정에서 의문사를 당하는 등 광주학살 직후인 1980년 7월 한 달 동안만 모두 3건의 의문사가 발생했다.

반란과 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일당은 자신들의 살육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꾸미기 위해 '불량배 일제 소탕'이라는 미명 하에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폭력행사를 계속했다. 삼청교육대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숫자는 정확히 집계되지 않고 있으나 최소 수십 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들은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엄격히 요구하는 '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이하 의문사법) 상의 의문사는 아닐지라도 국가공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의하여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광주학살에 뒤이은 삼청교육대 사건은 비록 단기적이기는 하지만, 일반 시민들에 대한 공포감 확산과 더불어 권력이 지목한 '사회불안세력'에 대한 폭력행사를 정당화하는 효과를 창출했다. 광주에서의 죽음을 겪으면서 저항세력 역시 죽음과 새롭게 대면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 기간 동안 1975년의 제2차 인혁당 사건 등 여러 차례의 사법살인이 있었지만, 당시에 널리 알려진 의문사로는 최종길 교수 사건과 장준하 사건이 있었고, 이 이외에 저항과정에서 직접 목숨을 끊거나 죽임을 당한 민족민주열사는 전태일(1970년)·김상진(1975년)·김경숙(1979년) 등에 불과했다.



그들의 학살은 한국사회에서 죽어 있던 죽음을 불러내다

한국전쟁 기간의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거치면서 한국은 죽음조차 죽인 사회로 전락했다. 죽인 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찬양하기까지 하는 사회에서 억울한 정치적 죽음은 널리 알릴 수도, 슬퍼할 수도, 추모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그런 잊혀진 죽음이 되고 말았다. 전태일·최종길·김상진·장준하·김경숙 등의 죽음이 이어졌지만, 아직 죽음은 우발적인 비극처럼 여겨졌고, 우리 곁에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광주를 겪으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도청을 지키던 동료가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은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졌다. 너무나 멀리 있었던 죽음이 우리 곁으로 다가온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졌고,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만이 투쟁에 나서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싸우는 정권이 살인정권이고, 자신도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광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숨은 이미 자신의 것만이 아니었다.

학살자들은 광주에서 잔혹한 학살을 감행한 것이 자신들의 권력의지를 과시하며 한국전쟁 당시의 학살의 기억을 잊어버리거나 애초부터 갖지 못했던 저항세력에게 본때를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본때를 보여 대중들이 겁을 먹게 하면 한국전쟁 직후처럼 모든 반대파가 사라져 버린 무저항의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들의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들의 학살은 한국사회에서 죽어 있던 죽음을 오히려 불러냈다.

광주의 죽음도 광주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시민군의 저항이 진압된 직후인 5월 30일에는 서강대생 김의기가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투신했고, 6월 9일에는 노동자 김종태가 광주학살을 규탄하는 전단을 뿌리고 분신했다. 1981년에는 광주가 고향인 서울대생 김태훈이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투신했고, 1983년에는 광주항쟁 당시 전남대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이 장기간의 옥중 단식 끝에 숨을 거두었으며, 서울대생 황정하도 시위를 주도하다가 도서관에서 추락, 사망했다.

특히 박관현은 단식투쟁 중에 열린 공판의 최후진술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외치며 싸웠던 거리에 있지 못하고 광주에서 빠져나가 나 혼자만 살고자 했다는 사실"을 "죽어간 영령들에게"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는 최후진술을 했다. 군사독재에 대한 투쟁 속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자각, 살아남은 사람으로서의 부끄러움과 책임감이 깊어갈수록, 일반국민들이 독재정권과 어용언론의 정보통제와 여론조작 속에 광주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점점 더 견딜 수 없는 일이 되어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political suicide)는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 1986년 상반기만 하더라도 오한섭·박영진·김세진·이재호·변형진·이동수·박혜정·이경환·강상철 등 무려 9명이 뚜렷한 정치적 메시지를 갖고 투쟁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거센 투쟁의 분위기 속에서 1986년 6월 11일 노동자 신호수가 서부서 대공과에 연행되었다가 19일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6월 18일 기관원에 연행된 서울대생 김성수는 20일 부산 앞바다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발견되었다. 부천서에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한 것도 바로 이 때의 일이다.

사체까지 은폐하려는 시도 있었다는 점 기억해야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발생한 사건으로 1·2기 의문사위에 진정·접수되어 의문사로 인정되거나 최소한 진상규명불능 판정을 받은 사건은 모두 19건인, 이 중 녹화사업을 비롯한 군대 내 사건이 10건, 삼청교육대 관련 사건이 2건, 교도소나 감호소 내에서 벌어진 사건이 3건 등으로 군대·삼청교육대·교도소 등 특수시설 내에서 벌어진 사건이 78.9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실종사건도 2건이나 된다.

시신을 확인할 수 없었던 실종사건의 경우 1기 의문사위에서는 모두 진상규명불능 판정을 받았지만, 2기 의문사위는 정은복 사건을 의문사로 인정했다. 실종사건은 성급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많은 의문사 사건에 사인뿐만 아니라 사체까지 은폐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이런 시도가 성공했을 경우 시신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실종사건이 되고 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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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9-09 02:52   좋아요 0 | URL
김윤식 선생이 틈날 때마다 되짚는 저 어떤 '죄의식'의 자리가, 인문학에 대한 노교수의 '어떤' 정의 내리기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 항상 받아오고 있습니다. 좋은 기사 소개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어쩌면 근대문학의 연구에 있어 가장 '헤겔적인' 자리에 서 있다고도 할 선생의 자기-부정 혹은 거듭나기에의 지향 역시, 어쩌면 그 가장 '헤겔적인' 자리에서 재-전유되고 재-사유되어야 하지 않나, 아니 어쩌면 이미 그렇게 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로쟈 2007-09-09 14:13   좋아요 0 | URL
어떤 죄의식의 자리가 강조될 필요는 없겠지만 아무튼 어떤 자리를 확인해두는 건 의미있어 보입니다. 람혼님 덕분에 좀더 머뭇거리게 되는 자리네요.^^
 

주저리주저리 적다가 또 날려먹었다(빌어먹을, 알라딘! 잠시의 틈도 안 주는구나!). 그냥 줄여쓴다. 이번주 북리뷰들을 대충 훑어본 결과 별로 눈에 띄는 책이 없더라는 것. 그래서 고맙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하다는 것. 시인이자 철학도인 진은영씨의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그린비, 2007)에 대한 리뷰 정도를 챙겨둔다는 것. 너무 식상한 제목이긴 한데(이젠 '차이'란 말도 지겹다!), "니체 철학을 주제로, 용수와 들뢰즈를 넘나들며 보여주는 저자의 독법(讀法)은 한 문장, 다음 글귀에 눈이 저절로 갈만큼 매혹적이다"란 리뷰는 '유혹적'이라서... 

한겨레(07. 09. 08) 현대 차이철학의 허무주의를 극복하라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관문이다. 그를 통과해야 현대철학의 지평이 제대로 열린다. 진은영(37)씨는 니체 철학 전공자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그린비 펴냄·1만5900원)은 그가 모교인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을 갈무리해 펴낸 책이다. 니체 철학의 함의를 풍성하게 담은 그의 책을 사이에 놓고 한겨레신문사 자료실에서 그와 만났다.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차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는 것입니다. 이 성과는 특히 하이데거·바타유·푸코·데리다·들뢰즈 같은 일군의 탈근대 철학자들이 이루어낸 것입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들을 모두 니체의 후계자로 지목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니체 철학을 베이스캠프로 사용해 현대철학이라는 산을 등정했다는 것이죠.”

그는 현대철학의 출발점에 니체 철학이 있는 이상, 니체를 공부할 이유는 분명하다고 말했다. “탈근대 철학에 도입된 차이 개념을 사유하고 차이의 철학을 발전시키는 작업은 니체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통해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철학이 ‘차이’ 개념에 주목하는 것은 근대 철학의 폐해를 극복할 길이 거기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근대 철학이란 요약하자면, 동일성의 철학이다. 하나의 보편적 기준을 상정하고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거기에 폭력적으로 복속시키거나 복속되지 않으면 배제하고 추방해버리는 철학이 동일성의 철학이다. 이 철학의 폭력성을 극복하자는 것이 탈근대 철학이고, 그때 탈근대 철학이 구사하는 가장 중요한 전략이 ‘차이를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니체는 말하자면, 차이의 철학으로 가는 직행로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개념이 니힐리즘(허무주의), 힘에의 의지(권력의지), 영원회귀,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아우르는 ‘차이의 철학’이다. 이 가운데 니힐리즘은 니체가 평생을 두고 싸운 사유의 주제였다. “니체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목표는 ‘니힐리즘의 자기극복’이었습니다.” 왜 니힐리즘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니체는 자기 시대가 니힐리즘에 철저하게 감염돼 있다고 보았다.

니체가 니힐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탄식하는 단순한 허무의식이 아니라, 현실의 세계 자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현실 너머의 ‘진짜 세계’, ‘초월적 본질’을 찾는 모든 본질주의적 사고방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현상계 너머의 영원한 이데아(본체계)를 찾는 플라톤주의와 그것의 쌍둥이인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이 현세 부정의 관념으로서 전통적 니힐리즘이다. 신이 죽어버림으로써 이 전통의 니힐리즘은 끝났지만 그것을 대체해 새로운 신이 등장했다고 니체는 말한다. 현실 세계를 관통하는 어떤 법칙을 찾아내 거기에 매달리거나 자본·화폐·국가 같은 것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것이 니체가 인식한 현대의 니힐리즘이다. 니체는 이 니힐리즘을 극복해야 할 질병이라고 규정했다.

“그 질병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니체가 발견한 개념이 ‘힘에의 의지’입니다.” ‘힘에의 의지’를 니체의 말로 풀면 이렇다. “이 세계는 곧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힘이며, 힘들과 힘의 파동의 놀이로서 하나이자 동시에 다수이고, 자기 안에서 휘몰아치며 밀려드는 힘들의 바다이며, 영원히 변화하며 영원히 되돌아오고, 어떤 포만이나 권태나 피로도 모르는 생성이다. 영원한 자기창조와 영원한 자기파괴의 세계가 ‘힘에의 의지’다.”

이 힘들의 흐름은 영원히 되돌아와 영원히 되풀이되는데, 그것을 가리켜 니체는 ‘영원회귀’라고 말한다. 그때의 영원회귀는 똑같은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복된다는 뜻이 아니다. 영원회귀는 차이의 반복이다. 다시 말해,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이다. 그리하여 삶은 끝없는 변화와 생성 속에서 반복하되 항상 차이나는 반복이 된다. 삶과 세계는 차이의 바다, 차이의 축제가 된다. “그런 식으로 니체는 차이를 새롭게 사유했고 적극적으로 끌어안았습니다.”

근대의 동일성 철학을 돌파하는 차이의 철학은 바로 여기에서 성립했다. “그러나 이 차이의 철학은 차이라는 개념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유행하는 탈근대적 차이철학에도 동일성 철학의 폐해가 끼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차이를 불변의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차이를 ‘승인’하는 형태의 철학에서 그런 경향이 발견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걸로 끝내버리는 것인데, 그래서는 차이와 차이의 진정한 만남도 없고 그 만남을 통한 또다른 차이의 생성도 없다.

이런 ‘차이 승인’의 철학을 그는 ‘탈근대적 니힐리즘’이라고 부른다. 이 현대적 니힐리즘을 극복하려면 차이·다름을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사유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차이를 즐기는 것,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이 생산 활동’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것이 그가 말하는 진정한 차이의 철학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 생산 철학’도 오늘날 자본주의적 지배 전략으로 전용되고 있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끝없이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면서 ‘차이’와 ‘다름’의 판매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지금 자본주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차이의 철학은 거기에 합당한 정치학과 윤리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책은 차이의 철학이 자본의 논리에 빠져들지 않고 자본의 포획욕망에 저항해 그 욕망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소수 정치학’을 내세운다. 지배의지로 뭉친 다수성의 논리와 맞서 싸워 다름의 풍요로움을 지켜내고 또 그 풍요로움을 창조하는 소수성의 정치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차이의 철학’은 니힐리즘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글 고명섭 기자)

문화일보(07. 09. 07) 소멸은 곧 생성… 삶을 끝없이 긍정하라 !

이 책의 저자를 처음 접한 것은 시집을 통해서다. 지난 2003년 출간된 저자의 첫 시집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보고, 이렇게 기사 첫머리를 풀었다. “젊은 시인의 첫 시집은 항상 가슴을 설레게 한다.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같은 새로운 세계가 한, 두편의 ‘우연’에 머무르지 않고 시집 전반을 관통할 때 설렘은 기쁨과 탄성으로 연결된다.”

이 책 역시 설렘을 넘어 기쁨과 탄성을 자아낸다. 더욱이 난해하기 그지없는 니체 철학을 주제로, 용수와 들뢰즈를 넘나들며 보여주는 저자의 독법(讀法)은 한 문장, 다음 글귀에 눈이 저절로 갈만큼 매혹적이다. 빼어난 감수성과 예민한 지성의 결정체를 보는 듯하다.

저자는 니체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딴 소장 철학자다. 결코 호락호락한 책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철학에 별 조예가 없는 일반인의 시선까지 잡아끄는 흡인력을 갖고 있다. 조금만 정신차려 읽는다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우선 니힐리즘을 화두로 니체를 푼다. 니힐리즘을 통해 서구 철학사의 지배적 흐름을 형성했던 경향을 규명하려고 했던 니체의 생각을 보여준다. 니체는 ‘불변의 실체’를 상정하는 경향을 니힐리즘의 한 표현이라고 규정했다.

니힐리즘은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먼지 같은 존재로서 하루해를 넘기지 못하고 부스러져 영원히 사라져간다’는 정서다. 따라서 니힐리스트들은 자기 존재의 불안정성을 완화시켜 줄 안정감을 갈구하게 된다. 즉, ‘영원불변한 실체’를 상정함으로써 안정감을 가상적으로 확보하려고 한다. 예컨대 ‘가상계에 대립하는 이데아의 세계를, 차안을 넘어선 피안을, 제1원인으로서의 신을, 자연현상의 배후로서의 법칙 등을 상정’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 같은 시도들이 삶을 병들게 할 뿐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영원불변하는 것에 대한 욕망은 유전(流轉)과 파괴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그 두려움을 제거하고 변화 자체를 긍정하며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영원성에 대한 욕망, 안정화되고 고착되려는 욕망은 완전히 사라진다”며 “(영원성에 대한 욕망의 제거를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유전과 파괴가 허무한 소멸이 아니라는 점이 납득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즉, 유전과 파괴를 ‘생성(生成)’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성에 대한 긍정만이 유전하고 소멸하는 자연과 삶에서 슬픔과 고통 대신에 평안한 기쁨을 가져다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생성이란 무엇인가. “생성은 질적 ‘차이’를 가진 다수의 질료들이 끊임없이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는 과정 그 자체”이며 “다수자들의 차이는 생성을 보장하며 생성의 철학을 완성시키는 중요한 원리”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가 이 같은 차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근대성의 사유가 다양한 종류의 차이를 절대적인 보편성을 통해 억압함으로써 현실적 차이를 지닌 존재들에게 폭력을 행사해왔다고 탈근대 철학자들은 파악한다. 따라서 근대성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차이 개념을 철학에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차이 개념은 오늘날 시장이데올로기와 냉소주의의 상투어가 돼 버렸다. “새로이 등장한 탈근대적 지배전략은 근대성의 산물인 국가, 민족, 인종 등의 배타적 경계를 강화하거나 실체화하기보다는 그것을 해체”하며 오히려 “차이들이나 복수성을 강조, 상품생산과 시장형성의 논리에 이용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이의 상대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이미 차이를 고정화해 실체화함으로써 서로 다른 존재자들간의 어떠한 관여나 상호 작용도 불가능하게” 만들며 “이처럼 차이를 고정화해 실체화하는 오늘날의 흐름을 ‘탈근대적 니힐리즘’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같은 탈근대적 니힐리즘에 맞서기 위해 “인도의 불교 철학자 용수,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들뢰즈와 더불어 니체의 통찰이 아로새겨진 사유의 긴 회랑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굳이 용수와 들뢰즈를 통해 니체를 보려 하는 것일까. 니체의 사유를 한층 더 발전시켜 탈근대적 니힐리즘에 맞서는 새로운 존재론이자 정치학을 만들기 위해서다. 저자는 용수와 들뢰즈의 입을 빌려 ‘원인이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는 상호의존성’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풋사과를 먹고 배탈이 났다고 하자. 원인(풋사과) 때문에 결과(배탈)가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만일 풋사과를 먹은 뒤 장을 보완해주는 다른 음식을 먹어서 배탈이 나지 않았다면 더 이상 풋사과는 배탈의 원인이 아니라 소화라는 결과의 원인이 될 것이다. 한마디로, 과거 사건을 구성하는 원인들의 배치에 현재 발생하는 새로운 원인들이 참여함으로써 전혀 다른 새로운 사건이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현재의 순간은 언제나 생성의 순간이며, 과거 사건의 배치 속에 원인들을 새로운 사건의 원인으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숙명론을 극복하고, 현재를 무한히 긍정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용수와 들뢰즈를 경유해 해석한 니체는 저자 자신의 목소리이기도 하다.(김영번기자)

07. 09. 08.

P.S. 여기도 간단히 적는다. 참고문헌에 대해서 세 문단쯤 적었었는데(참고문헌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도 나의 '취미'다), 오기된 부분만 지적한다. 데리다의 <에쁘롱>(동문선, 1998)의 역자들이 '김다운, 황순회'로 잘못 기재됐다. '김다은, 황순희'가 맞다. 그리고 알랭 르노의 <개인>(동문선, 2002)의 원저가 잘못 기재됐다. 'L’ère de l’individu. Contribution à une histoire de la subjectivité'(1989)로 돼 있는데, 국역본의 부제가 '주체철학에 관한 고찰'이니까 원저는 'L’individu. Remarques sur la philosophie du sujet'(1995)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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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9-07 21:30   좋아요 0 | URL
허 이분 칸트 전공자 아니었나요? 언제 갈아타셨지? (물론 칸트에 대한 개설서에서 니체, 들뢰즈에 대한 애정을 듬뿍 드러내긴 하더군요.)

로쟈 2007-09-07 22:11   좋아요 0 | URL
제가 알기엔 원래 니체 전공자인데요...

자꾸때리다 2007-09-08 07:33   좋아요 0 | URL
리라이팅 시리즈로 처음에 칸트 개설서를 내서 칸트 전공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요?ㅋ

로쟈 2007-09-08 20:50   좋아요 0 | URL
석박사가 모두 니체입니다...

nada 2007-09-08 14:09   좋아요 0 | URL
이젠 차이란 말도 지겹다, 는 구절에서 키득거렸어요.^^
고병권 씨 책하고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동어반복일 거 같기도 하공.

로쟈 2007-09-08 20:52   좋아요 0 | URL
제가 그것까지 염두에 둔 건 아니었는데요.^^; 여하튼 '차이의 철학'이 거꾸로 유행어가 되다보니...

yoonta 2007-09-08 17:47   좋아요 0 | URL
기사에 있네요. 저 책이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이라고..

로쟈 2007-09-08 20:51   좋아요 0 | URL
혹시 석사는 칸트를 했는지 확인해보니까 모두 니체입니다.